천명과 운명과의 관계 (한장경저 역학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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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天命)과 운명(運命)과의 관계(關係)

 

역(易)에 「天道變化 各正性命 = 천도(天道)가 변화(變化)하여 각각(各各) 성명(性命)을 정(正)한다」【註二】하고, 또 「昔者 聖人之作易也 將以順性命之理 = 옛적에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음에 장차(將且) 써 성명(性命)의 이(理)를 순(順)한다」【註三】하니, 성(性)은 물(物)의 품수(稟受)한 천성(天性)이오, 명(命)은 천(天)의 부여(賦與)한 천명(天命)이니, 이 천명(天命)이라 함은 무엇이며, 운명(運命)과의 관계(關係)는 어떠한가. 천명(天命)이라 함은 물(物)의 형성(形成)됨과 함께 그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부여(賦與)되는 것으로서 부여(賦與)하는 면(面)으로 볼 때에는 천명(天命)이 되고, 품수(稟受)하는 면(面)으로 볼 때에는 천성(天性)이 되는 것이니, 중용서(中庸書)에 「天命之謂性 = 천(天)이 명(命)함을 성(性)이라 이른다」함은, 명(命)과 성(性)이 일물(一物)의 양면작용(兩面作用)임을 말한 것이다. 천명(天命)과 천성(天性)은 형질(形質)이 구성(構成)됨과 동시(同時)에 자체(自體)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부여(賦與)되고 품수(稟受)된 것으로서, 그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는 것은 천명(天命)에 속(屬)하고, 자체(自體)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사물(事物)을 적의(適宜)히 재제(裁制)하는 정신작용(精神作用)의 본원(本源)은 천성(天性)에 속(屬)하는 것이니, 즉(卽) 천명(天命)은 생존작용(生存作用)의 체(體)이오 천성(天性)은 생존작용(生存作用)의 용(用)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부여(賦與)된 천명(天命)은, 각개체(各個體)의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천성(天性)으로 하여금, 그 개체(個體)의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도록 운행(運行)하여, 사람의 생활(生活)로 하여금 그 형질(形質)에 적응(適應)한 범위외(範圍外)를 나가지 못하게 하니, 이가 곧 운명(運命)이오, 운명(運命)을 선천조직(先天組織)이라 함은 형질(形質)의 생존작용(生存作用)이 천시(天時)를 수종(隨從)하는 동시(同時)에 또한 기정(旣定)된 천명(天命)에 지배(支配)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의 천성(天性)은 정(情)으로 발로(發露)하여 본능(本能)이 되고, 본능(本能)에는 계한(界限)이 없는지라, 이 계한(界限)없는 본능(本能)에 의(依)하여 무한(無限)히 창조(創造)하고 무한(無限)히 성장(成長)하고 또 무한(無限)히 구원(久遠)하려하는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스스로 운명(運命)과 대대(對待)하게 되나니,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후천운행(後天運行)이라 함은 사상(思想)의 힘이 시의(時義)를 행(行)하는 동시(同時)에 또한 미래(未來)를 향(向)하여 발전(發展)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명(天命)을 순(順)하는 때는 천명(天命)이 조우(助祐)하고 천명(天命)을 순(順)치 아니할 때는 천명(天命)이 조우(助祐)치 아니하고 또한 재앙(災殃)이 있나니, 역(易)에 「順天休命 = 천(天)의 휴명(休命)을 순(順)한다」【註四】하고 또 「天之所助者順也 = 천(天)의 조(助)하는 자(者)는 순(順)함이다」【註五】함은, 천명(天命)을 순(順)하는 자(者)를 조우(助祐)함을 말함이오, 「天命不祐行矣哉 = 천명(天命)이 우(祐)치 아니함을 행(行)하랴」【註六】함은, 천명(天命)을 순(順)치 아니하는 자(者)를 조우(助祐)치 아니함을 말함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천명(天命)과 천성(天性)을 아울러 가지고 있어, 그것이 운명(運命)과 자유의지(自由意志)로 되는지라, 그러므로 운명(運命)은 체(體)가 되고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용(用)이 되어, 통일체내(統一體內)에서 대대작용(對待作用)을 행(行)하고 대대균등(對待均等)의 이(理)에 의(依)하여 양자(兩者)는 서로 반반(半半)한 교호작용(交互作用)을 행(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함에는 반드시 운명(運命)의 경역(境域)과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범위(範圍)가 대대(對待)하고, 운명(運命)은 수렴작용(收斂作用)으로써 천명(天命)의 경역외(境域外)로 발전(發展)하는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제약(制約)하려하고 자유의지(自由意志)는 발현작용(發顯作用)으로써 기정(旣定)된 운명(運命)을 개척(開拓)하려 하나니, 고어(古語)에「인(人)의 화복(禍福)은 운수(運輸)에 있다」함은, 운명(運命)의 경역(境域)을 말함이오, 「사(事)의 성패(成敗)는 노력(勞力)에 있다」함은,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범위(範圍)를 말함이니 운수론(運數論)은 조직체(組織體)의 체대용소(體大用小)의 이(理)를 취(取)함이오, 노력론(努力論)은 운행력(運行力)의 용대체소(用大體小)의 이(理)를 취(取)함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활(生活)은 반(半)은 운명(運命)의 지배(支配)를 받고 반(半)은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依)하여 동작(動作)하고 있어, 운명(運命)으로부터 오는 화복(禍福)과 자유의지(自由意志)로부터 오는 성패(成敗)가 각기(各其) 반반(半半)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運命)과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일물중(一物中)에 혼륜(渾淪)되어 있는지라, 그 한계(限界)에 대(對)하여는 어느 것이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범위(範圍)에 속(屬)하고, 어느 것이 운명(運命)의 경역(境域)에 속(屬)하는지는, 예지(豫知)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세간(世間)의 만사만물(萬事萬物)은 그것을 운명(運命)으로 해석(解釋)하면 운명(運命)이 아닌 것이 없고 또 자유의지(自由意志)로 해석(解釋)하면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아닌 것이 없다. 더욱이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역량여하(力量如何)에 따라서 운명(運命)에 속(屬)하는 경역(境域)에 스스로 광협(廣狹)․대소(大小)의 차(差)가 생(生)하는 것이니, 의지력(意志力)이 박약(薄弱)하여 오직 환경(環境)의 지배(支配)속에서만 생활(生活)하는 것은 운명(運命)의 경역(境域)이 광대(廣大)한 것이오, 그에 반(反)하여 모든 고난(苦難)을 무릅쓰고 환경(環境)을 개척(開拓)하고 나가는 것은 자유의지(自由意志)의 범위(範圍)가 광대(廣大)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능동적(能動的)으로 인사(人事)를 다하여 천명(天命)을 대(待)할 것이오, 다만 수동적(受動的) 태도(態度)로써 성패(成敗)와 화복(禍福)을 운명(運命)의 소관(所關)으로만 추탁(推托)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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