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한자병기 아국역사(我國歷史(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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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서 배우던

아국역사(我國歷史)

한장경 편

고대 삼일운동

  편집(編輯)서

이 原稿는 現在發刊된 많은 歷史서와는 歷史觀點에서 差異가 있다고 생각되고 또 專門歷史硏究의 考證面보다는 보이지 않게 흘러오는 精神體系의 한 가닥을 느끼게 해주는 著述이라 생각되나 한글전용의 현시점에서는 여러 가지 벽이많아 발간치 못한다 시쳇말로 구닥다리 공부를 좀하신 분들이 옛날 얘기하듯 일러주는 도리밖에? 없지 않을까 尹相基

  回顧談

二十二 歲에 咸興農村에서 私立學校 敎員으로 있을때에 漢學을 하는 노인집에 우리나라 歷史 大東紀年이라는 책이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빌려보았다. 이때는 日本한테 침략당한지 八年이라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기만하면 압수하는 까닭에 역사책을 얻어 보기는 극히 어려웠다. 그 책을 보고 이 나라에 나서 제나라역사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 책을 비밀히 읽었다. 또 그 이웃洞里에 燃藜室記述이라는 역사책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도 비밀히 빌려 읽었다. 그때 每日申報에 朝鮮儒敎淵源이라는 논문이 계속 발표되었는데 우리나라 역사가 전연 발표되지 못하고 있던 當時에 이 論文은 내 歷史硏究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퇴근하여 숙소에 돌아오면 신문에서 꼭 이 논문을 베껴가지고 그날 밤으로 이것을 精讀하였다. 그 학교를 그만둔 후에 己未年의 三一運動을 겪고 이를 契機로 사람들 중에서 우리역사를 알아야겠다는 民族意識이 높아지고 나 역시 우리역사를 더 깊이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서 그해 가을에 歷史遺蹟을 探訪하기 爲하여 期限없는 南道旅行을 떠났다. 서울에 와서 몇일간 여러 史蹟을 돌아보고 더 南으로 내려가서 公州 扶餘 恩津 鷄龍山을 거쳐서 淸州 報恩 錦山을 보고 全州에 들어갔다가 萬頃江을 따라 내려가다 旅費가 떨어졌다. 할 수 없이 金堤郡 農村의 어느 私立學校 敎員으로 就任하여 一時지내기로 했는데 그만 육년을 보냈다. 이 학교에 있는 동안에 全北과 全南에 있는 史蹟을 두루 돌아보고 여름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慶州 金海等地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이 學校를 그만둔 후에는 北間島와 西間島를 돌아다니면서 고대 祖上들이 經營하던 滿洲方面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역사연구 十年間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는 우리나라의 古代에는 農民이 全人口의 九割이 넘었는데 역사책은 主로 王室과 貴族들의 역사로 되어있고 農民의 역사는 全然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었다. 나는 農民의 歷史를 알아 보려고 하던次에 朝鮮農民이라는 月刊雜誌가 발간되어 거기에 入社하여 農村問題를 연구하면서 農民歷史를 아울러 연구했다. 이렇게 五,六 年 역사를 연구하는 동안 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역사는 되는대로 發展變化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떠한 原理와 法則을 따라서 發展하고 變化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다시 이 原理와 法則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읽은 것이 西洋哲學이오 여기에 四,五年의 歲月을 쏟았는데 여기에서는 아무 所得이 없었다. 다음에는 宋代의 程朱哲學인 理氣說을 연구하고 우리나라 先賢들의 學說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무런 原理와 法則을 發見치 못하고 다시 易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하고 八一五解放 三年前에 처음으로 易學에 들어가니 이것이 내가 易學을 硏究하기 始作한 動機다. 易學은 宇宙萬物에 모두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도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 生長成법칙이 있는 까닭에 人類歷史에도 또한 이러한 법칙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宇宙의 法則이 바로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되는 것이오 여기에서 비로소 이제까지 追求하던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을 大略 짐작한 것이오 그 實은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곧 易學原理의 主要部分임을 알게 되었다. 1967년회고담

 

 

 

 

<제목 차례>

아국(我國)의 자연환경(自然環境)5

원시생활(原始生活)8

고조선(古朝鮮)9

삼국(三國)의 흥기(興起)15

고구려(高句麗)의 융성(隆盛)21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22

三.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24

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25

삼국혼전(三國混戰)26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30

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32

발해(渤海)의 건국(建國)34

해상발전(海上發展)36

신라(新羅)의 쇠망(衰亡)37

고려건국(高麗建國)39

고려(高麗)정치(政治)41

사회계급(社會階級)43

건설사업(建設事業)45

一. 토지제도(土地制度)45

二. 성종(成宗)의 치적(治積)46

계단(契丹)관계(關係)48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문화(文化)51

중기(中期)의 융성(隆盛)53

여진(女眞)관계(關係)57

계생(繼生)하는 반란(叛亂)59

몽고란(蒙古亂)62

정치(政治)의 문란(紊亂)69

외국(外國)관계(關係)72

고려(高麗)의 멸망(滅亡)74

비고(備考)79

이조(李朝)건국(建國)80

이조(李朝)정치(政治)81

왕위쟁탈(王位爭奪)84

건설(建設)시기(時機)86

단종(端宗)과 세조(世祖)94

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99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107

중종반정(中宗反正)후(後)의 국정(國政)108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115

사회(社會)의 부패(腐敗)117

임진왜란(壬辰倭亂)123

난후(亂後)의 형세(形勢)134

병자호란(丙子胡亂)137

서양문화(西洋文化)와의 교섭(交涉)과 외국무역(外國貿易)146

사색당쟁(四色黨爭)150

영(英) 정(正)의 문화(文化)159

세도(勢道)정치(政治)161

홍경래(洪景來) 난(亂)과 민란(民亂)162

북간도(北間島) 이주(移住)165

개국(開國)시대(時代)167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171

일본(日本)의 침략(侵略)177

민중(民衆)운동(運動)184

기미독립(己未獨立) 선언서(宣言書)187

   

아국(我國)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아국(我國)은 아세아대륙(亞細亞大陸) 의 동북부(東北部)에 뻗어 나온 반도(半島)로서 삼면(三面)이 환해(環海)하고 앞으로 태평양(太平洋)과의 사이에 일본열도(日本列島)가 병풍(屛風)처럼 가리웠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地理的條件)으로 말미암아 고래(古來)로 대륙(大陸)에서 흥망(興亡)한 여러 나라 세력(勢力)이 우리를 덮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며 또 일본(日本)의 눈길이 언제나 우리에게 쏠려 있음으로 우리는 금후(今後)로도 항상(恒常) 대륙(大陸)을 돌아보고 일본(日本)을 내다보면서 생존(生存)하여야만 할 것이다.

아국(我國)은 북위(北緯) 삼십삼도(三十三度)에서 사십삼도(四十三度)까지의 사이에 있어서 가장 살기 좋은 온대(溫帶)의 한 지방(地方)이며 한서(寒暑)가 모두 생물(生物)이 서식(棲息)하기에 알맞고 또 절후(節候)를 따라서 우설(雨雪)이 고르므로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 자란다. 더욱이 공기(空氣)가 맑고 아름다운 산천(山川)이 어리어서 경치(景致)좋기로 세계(世界)에서 유명(有名)하고 지하(地下)에는 금(金) 은(銀) 동(銅) 철(鐵)을 비롯한 모든 광물(鑛物)이 풍부(豊富)하며 바다에는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부딪쳐서 각종(各種)의 어물(魚物)이 많이 잡힌다.

아국(我國)과 대륙(大陸)과의 지경(地境)은 근세(近世)에 와서 백두산(白頭山)과 및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두만강(豆滿江) 압록강(鴨綠江)으로 하였으나 옛날은 송화강(松花江)기슭의 만주(滿洲)벌판이 아국(我國)의 강토(疆土)이었고 또 그와 반대(反對)로 국경선(國境線)이 지금(只今)보다 축소(縮小)된 일도 있었으나 그러나 오늘날 삼팔선(三八線)이란 부자연(不自然)한 선(線)을 긋고 남북(南北)이 두 동강이로 나뉘게 된 것은 역사적(歷史的)으로 그러한 기록(記錄)이 있는 것도 아니오 또 우리민족(民族)이 이를 승인(承認)한 것도 아니다. 아국(我國)은 세계(世界)어느 나라보다도 순수(純粹)한 단일(單一)한 민족(民族)으로서 이 부자연(不自然)한 선(線)은 불원(不遠)하여 반드시 소멸(消滅)시켜야 할 것이다.

아국(我國)의 척량산맥(脊梁山脈)은 해발(海拔) 이천칠백여(二千七百餘) 미(米 미터)의 백두산(白頭山)에서 비롯하여 함경도(咸鏡道)땅에 개마(蓋馬)의 높고 넓은 고원지대(高原地帶)를 이루고 남(南)으로 내려와서 강원도(江原道)와의 사이에 철령(鐵嶺)을 이루니 옛날 여기에 관문(關門)을 두어서 출입(出入)하는 행인(行人)을 수비(守備)하였기 때문에 이를 중심(中心)으로 강원도(江原道)를 관동(關東), 함경도(咸鏡道)를 관북(關北),평안도(平安道)를 관서(關西)라 부르는 이름이 생겼다. 이 척량산맥(脊梁山脈)은 강원도(江原道)의 한복판을 타고 내려오면서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같은 명산(名山)을 내고 경상도(慶尙道)와의 지경(地境)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이 되고 다시 소백산맥(小白山脈)으로 뻗어 나와서 지리산(智異山)을 이루고 그 여맥(餘脈)이 멀리 제주도(濟州道)의 한라산(漢拏山)에까지 미쳤다. 충청도(忠淸道)와 경상도(慶尙道)와의 사이에 죽령(竹嶺), 조령(鳥嶺)의 관문(關門)이 있어 예로부터 남북(南北)이 통(通)하는 길목이 되었고 경상도(慶尙道)를 영남(嶺南)이라 함은 이 두 영(嶺)의 남(南)쪽에 있기 때문이다. 충청도(忠淸道)를 호서(湖西)라하고 전라도(全羅道)를 호남(湖南)이라 함은 신라(新羅)때에 지금(只今)의 김제(金堤)땅에 벽골제(碧骨堤)라는 큰 못을 파고 이 못이 호수(湖水)처럼 크고 넓다하여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이 아국(我國)의 지세(地勢)는 척량산맥(脊梁山脈)이 북(北)에서 남(南)으로 뻗어 있고 이 산맥(山脈)을 분수령(分水嶺)으로 하여 동(東)은 경사(傾斜)가 급(急)하나 서(西)와 남(南)은 넓은 평야(平野)가 열리고 대하(大河)가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문화(文化)는 언제나 동북부(東北部)지방(地方)보다 서남부(西南部)지방(地方)에서 먼저 열리었다. 강(江)은 북(北)으로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이 있어서 다 함께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였으나 하나는 서(西)로 흘러서 황해(黃海)에 들어가고 하나는 동(東)으로 흘러서 동해(東海)에 들어갔다. 이 두 강(江)은 근세(近世)에 와서 아국(我國)의 북경(北境)이 되고 하나는 서(西)로 중국대륙(中國大陸)과의 교섭(交涉)의 관문(關門)이 되고 하나는 북(北)으로 여진족(女眞族)의 내왕(來往)하는 길목이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압록강(鴨綠江)은 길이가 이천리(二千里)에 가까워서 아국(我國)에서 제일(第一) 큰 강(江)이며 고구려(高句麗)는 이 강(江)안에서 흥(興)하였고 남(南)으로 대한해협(大韓海峽)에 들어가는 낙동(洛東)은 신라(新羅)의 발상지(發祥地)이오 그밖에 청천강(淸川江), 대동강(大洞江), 예성강(禮成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금강(錦江)등(等) 황해(黃海)로 흘러 들어가는 강(江)이 대부분(大部分)이오 예로부터 이러한 강안(江岸)이 역사(歷史)의 무대(舞臺)로 등장(登場)하였다. 특(特)히 대동강(大洞江)은 고조선(古朝鮮)의 중심지(中心地)로서 나중에 고구려(高句麗)의 도읍(都邑)이 되었고 예성강(禮成江)과 임진강(臨津江) 어귀는 고려(高麗)의 근거지(根據地)이오 한강(漢江)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유명(有名)한 쟁탈지(爭奪地)가 되고 근세이래(近世以來)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안(江岸)의 서울이 아국(我國)의 수도(首都)이고 금강(錦江)은 백제말엽(百濟末葉)의 도읍(都邑)이었다.

고대(古代)의 도읍(都邑)은 방비(防備)의 편리(便利)와 풍산지대(豊産地帶)를 가진 것이 주요(主要)한 조건(條件)이 되어 있었으므로 역대(歷代)의 국도(國都)는 모두 대강(大江)의 험(險)과 평야(平野)를 가진 강안(江岸)을 취(取)하였던 것이다.

아국(我國)의 기후(氣候)는 대륙(大陸)과 대양(大洋)과의 사이에 갈마드는, 일사량(日射量)의 차(差)로 말미암아 생긴 계절풍(季節風)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좌우(左右)된다. 시월(十月)에서부터 삼월(三月)까지는 대륙계절풍(大陸季節風)이 불어서 춥고 가물며 사월(四月)에서부터 구월(九月)까지는 비교적(比較的) 약(弱)한 해안계절풍(海岸季節風)이 불어서 비가 많이 온다. 동일(同一)한 위도(緯度)의 타국(他國)에 비기어 아국(我國)의 겨울이 더욱 춥고 또 일년강우량(一年降雨量)의 사분지삼(四分之三)이 여름에 있음은 이 때문이고 아국(我國)의 농업생산(農業生産)이 이러한 기후(氣候)의 지배(支配)를 받음은 물론(勿論)이다.

 

원시생활(原始生活)

아국(我國)의 원시시대(原始時代)에는 주(主)로 어패(魚貝)와 조수(鳥獸)를 잡아먹고 초근목실(草根木實)을 캐어 먹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입고 석굴(石窟)과 움집에서 살았다. 농사(農事)라고는 오직 서(黍 기장)가 있을 뿐이오 서(黍 기장)는 어떤 토지(土地)에서든지 잘 생육(生育)되고 파종시기(播種時期)의 조만(早晩)에 영향(影響)됨이 적으므로 농업기술(農業技術)이 부족(不足)한 고대(古代)에 서농(黍農)만 있는 것은 필연(必然)한 일이다.

기구(器具)나 기명(器皿)은 주로 토석(土石)들로 만든 것이었으니 이 때를 석기시대(石器時代)라 한다. 지금(只今) 아국(我國)과 만주(滿洲)에서 발견(發見)되는 석부(石斧), 석촉(石鏃), 석도(石刀)의 여러 가지 석기(石器)는 모두 같은 계통(系統)인 것이며 이 시대(時代)의 토기(土器)는 물론(勿論) 날 그릇이었으니 그래도 쓸모 있게 여러 가지 모양(模樣)을 만들고 또 간단(簡單)한 그림 모양(模樣)도 새겨내었다. 그러므로 석기(石器)보다 토기(土器)에 있어서 그 시대(時代)의 모습(模習)과 그 민족(民族)의 성격(性格)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석기시대(石器時代)의 흔적(痕跡)은 지금(只今) 아국(我國)의 각처(各處)에 있는 굴(屈)속과 고성지(古城地)와 고분(古墳) 가운데서 많이 발견(發見)되거니와 그 중(中)에서도 해변(海邊) 여러 곳에 산재(散在)하는 패총(貝塚)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패총 중(貝塚中)에는 황해도(黃海道) 몽금포(夢金浦)와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金海)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有名)하며 그밖에 경상남도(慶尙南道) 고성(固城)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迎日)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北靑) 함경북도(咸鏡北道) 성진(城津), 웅기(雄基) 등지(等地)에도 큰 패총(貝塚)이 있으니 이는 옛날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버린 것이 파묻혀 생긴 것이다.

「선돌」이라는 입석(立石)은 높은 산(山)을 본뜬 것이어서 그때 사람들의 신앙(信仰)의 대상(對象)이었으며 이는 세계(世界)에서도 태양(太陽)을 숭배(崇拜)하는 풍습(風習)이 있는데, 어떤 곳에나 있지만 아국(我國)에 더욱 많고 그 중(中)에서도 단군전설(檀君傳說)이 남아 있는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지방(地方)과 마한(馬韓)의 옛 땅에 특(特)히 많다.

또「고인돌」이라고 한 지석(支石)은 혹(或)은 하늘에 제사(祭祀)지내던 제단(祭壇)이었다 하고 혹(或)은 옛사람들의 무덤이라 하나 이 역시(亦是) 태양(太陽)을 숭배(崇拜)하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한 흔적(痕跡)이며 특(特)히 지석(支石)은 인국(鄰國)인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에서는 전연(全然) 발견(發見)되지 아니 하는데 아국(我國)을 비롯하여 만주(滿洲)와 시베리아와 유럽에 걸쳐서 이것이 있고 아국(我國)에서는 여러 곳에서 발견(發見)되었다.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과 황해도(黃海道) 은률(殷栗)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有名)하다.

 

고조선(古朝鮮)

지금(只今)으로부터 사천여년(四千餘年) 전(前)의 옛날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중국(中國)의 요(堯)임금 때요 이 해를 아국(我國)의 기원원년(紀元元年)이라 한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천여년(千餘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하나 확실(確實)한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그 후(後)에 중국(中國)의 은(殷)나라가 망(亡)하고 주(周)나라가 대신(代身)하게 되었는데, 은(殷)나라의 왕자(王子)인 기자(箕子)가 그 무리를 데리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지금(只今)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부여(扶餘), 남부(南部)에는 구려맥(句麗貊)이 있고 반도방면(半島方面)에는 한(韓)이 있었는데 그 연대(年代)와 국도(國都)는 알 수 없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은 여러모로 발달(發達)된 산업(産業)의 기초(基礎) 위에서 대륙(大陸)의 진보(進步)한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여 크게 발전(發展)하고 조선기술(造船技術)이 발달(發達)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中國)의 제(齊)와 노(魯)로 더불어 무역(貿易)하며 농사(農事)짓는 법(法)과 우마(牛馬)를 기르는 목축업(牧畜業)이 발달(發達)하고 사람의 성질(性質)이 정직(正直)과 예절(禮節)과 신의(信義)를 숭상(崇尙)하고 평화(平和)와 정결(淨潔)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중국(中國)사람들은 아국인(我國人)을 군자지국(君子之國) 대인지시(大人之市)라하고 인인선(仁人善)이라 불렀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이 구백여년(九百餘年)동안 계속(繼續)하는 중(中)에 중국(中國)에서는 주(周)나라 세력(勢力)이 차츰 약(弱)해지고 소위(所謂)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時代)라 해서 여러 백년(百年)동안 전쟁(戰爭)이 계속(繼續)되고 흉년(凶年)이 겹들어서 연(燕), 조(趙), 제(齊), 노(魯)의 중국(中國) 북방(北方) 사람들이 혹(或)은 해로(海路)로, 혹(或)은 육로(陸路)로 조선(朝鮮)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특(特)히 연(燕)나라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의 서부(西部)를 쳐서 빼앗고 요하(遼河)를 사이에 두고 조선(朝鮮)과 지경(地境)을 접(接)하여 있어서 일직부터 교섭(交涉)이 잦았고 주(周)나라가 망(亡)하고 진(秦)나라가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할 무렵에 조선(朝鮮)으로 피난(避難)하여 들어오는 사람이 수(數) 없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기부왕(箕埠王)때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을 서부국경(西部國境)에 머물게 하더니 만(滿)이 야심(野心)을 품고 많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난리(亂離)를 일으켜 왕도(王都)를 치거늘 준왕(準王)이 미처 항거(抗拒)치 못하여 해로(海路)로 마한(馬韓)에 주입(走入)하니 이는 단기(檀紀)이천일백사십년(二千一百四十年) 정미(丁未)이다.

위만(衛滿)이 나라를 세운 후(後)에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위씨조선(衛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진(秦)나라를 이어서 중원(中原)을 통일(統一)한 한(漢)나라의 세력(勢力)이 커져서 동(東)으로 침입(侵入)하니 위만(衛滿)의 손자(孫子) 우거(右渠)는 견디지 못하여 항복(降服)하니 이는 단기(檀紀) 이천이백이십육년(二千二百二十六年) 계유(癸酉)의 일이오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삼대(三代) 팔십칠년(八十七年)으로써 끝마쳤다.

한(漢)나라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의 고지(故地)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菟)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사군(四郡)의 위치(位置)와 넓이에 대(對)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않으나 대개(大槪) 낙랑군(樂浪郡)은 평양(平壤)을 중심(中心)으로 한 대동강(大洞江) 기슭임이 확실(確實)하고 진번군(眞番郡)은 황해도(黃海道)와 경기도(京畿道)의 한강(漢江) 이북(以北)이오 임둔군(臨屯郡)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와 강원도(江原道)의 철령(鐵嶺) 이북(以北)이오 현토군(玄菟郡)은 압록강(鴨綠江) 기슭을 중심(中心)으로 한 평안북도(平安北道)와 동가강(佟佳江) 하류지방(下流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사군(四郡)은 우리 민족(民族)의 맹렬(猛烈)한 반항(反抗)때문에 미처 뿌리를 내릴 사이도 없이 진번(眞番) 임둔(臨屯) 이군(二郡)은 이십육년(二十六年)만에 없어지고 현토군(玄菟郡)은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스스로 해소(解消)되고 낙랑군(樂浪郡)만이 중국(中國) 사람들의 근거지(根據地)로서 반도(半島) 중부(中部)에 사백여년(四百餘年)동안 남아 있었다.

낙랑군(樂浪郡)은 아국(我國)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중국(中國)과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함으로 아국(我國)의 중국(中國) 무역(貿易)을 맡아 하였다. 평양(平壤)에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 토성리(土城里)라는 마을에 분명(分明)한 토성(土城) 자리가 있고 그 마을 전토(田土)사이에서 낙랑군(樂浪郡)의 유물(遺物)이 나옴으로 보아 이곳이 낙랑(樂浪)의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 동(東)쪽 평평(平平)한 언덕 위에 수다(數多)한 고분(古墳)이 있고 그 고분(古墳) 속에서 금(金) 옥(玉) 동(銅)으로 만든 거울과 각종(各種)의 질그릇과 그림을 새긴 솥이라든가 와편(瓦片) 칠기(漆器) 등(等) 낙랑유물(樂浪遺物)이 많이 나와서 고고학상(考古學上) 보배가 되었다.

조선(朝鮮) 중부(中部)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이 건국(建國)될 무렵에 지금(只今)의 북만주(北滿洲) 지방(地方)에는 부여족(扶餘族)이 살아서 농업(農業)과 목축(牧畜)에 힘쓰고 중국(中國)의 진보(進步)된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하였으며 지 방(地 方)이 이천리(二千里)이오 호수(戶數)가 팔만(八萬)이나되며 서(西)로 오환(烏桓) 선고(鮮皐) 등(等)의 인(鄰)과 겨뤄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나라에 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들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지 아니하면 그 과실(過失)이 임금에게 있다하여 혹(或)은 갈아세워야 한다하고 혹(或)은 죽여야한다 하였다. 부여(扶餘)의 임금은 세습적(世襲的) 추장(酋長)에 지나지 아니하여 그 밑에 짐승이름을 붙인 오(烏), 가(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等) 벼슬이 있어 사출도(四出道)를 나가 지키고 이들은 각기(各其) 수백호(數百戶)로부터 수천호(數千戶)의 백성(百姓)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여(扶餘)와 때를 같이하여 동해(東海) 방면(方面)에는 옥저(沃沮), 예(濊)가 있고 반도(半島) 남부(南部)에는 삼한(三韓)이 있었다. 옥저(沃沮)는 지금(只今)의 함경도(咸鏡道) 지방(地方)에 살았는데 그 땅은 동북(東北)이 좁고 서남(西南)이 넓으며 장(長)이 천리(千里)이고 북(北)으로는 읍루(挹婁)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이고 남(南)으로는 예(濊)와 잇닿아 있었다. 호수(戶數)는 오천(五千)이며 임금은 없고 부락(部落)마다 수령(首領)이 있어 부락(部落)일을 추려나가고 언어(言語)는 고구려(高句麗)와 같고 성질(性質)이 강직(强直)하고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생산(生産)되고 음식(飮食)과 거처(居處)와 모든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비슷하였다. 옥저(沃沮)는 남북(南北)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북옥저(北沃沮)는 읍루(挹婁)와 접경(接境)한 관계(關係)로 여름이면 읍루(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약탈(掠奪)함으로 산중(山中)에 깊이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게되면 비로소 부락(部落)에 내려와서 살았다.

예(濊)는 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동(東)에서 함경도(咸鏡道)의 남(南)에 걸쳐서 살았다. 스스로 고구려(高句麗)와 동족(同族)이라 하고 호수(戶數)가 이만(二萬)이며 사람들이 성질(性質)이 순후(淳厚)하고 염치(廉恥)가 밝으며 도적(盜賊)이 없어서 밤에 문(門)을 닫는 일이 없었다.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거의 비슷하나 의복(衣服)은 다르며 여러 부락(部落)은 산천(山川)의 경계(境界)를 중(重)히 여겨 서로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고 이를 범(犯)하면 책화(責禍)라 하여 노예(奴隸)와 우마(牛馬)로써 배상(賠償)하며 기(忌)하는 것이 많아서 가족중(家族中)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곧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살았다. 예(濊)사람들은 마포(麻布)를 짜고 양잠(養蠶)할 줄 알고, 별을 보고 그 해의 농사(農事)의 풍흉(豊凶)을 미리 알 수 있었다.

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이 시대(時代)는 일산(一山)의 장(障)과 일수(一水)의 조(阻)가 스스로 한 부락(部落)을 이루어 국가(國家)노릇을 하였는데 삼한(三韓)의 지방(地方)에 이러한 부락국가(部落國家)가 칠십팔국(七十八國)이나 있었다. 각(各) 부락(部落)에는 수령(首領)이 있고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은 각기(各其) 소속(所屬)한 부락국가(部落國家)를 통어(統御)하는 총왕(總王)이 있었다.

마한(馬韓)은 그 중(中) 서(西)쪽에 있어서 백성(百姓)이 농사(農事)를 짓고 양잠(養蠶)을하고 오십사국(五十四國)으로 나뉘어 그 크기가 대국(大國)은 만여호(萬餘戶), 소국(小國)은 수백호(數百戶)이며 사람의 성질(性質)이 용감(勇敢)하고 해마다 오월(五月)에 파종(播種)이 끝난 뒤와 시월(十月)에 추수(秋收)를 마친 뒤에 한번씩 전국인(全國人)이 모여 천제사(天祭祀)를 지내고 여러 날 동안 일야(日夜)로 마음껏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놀았다.

변(弁),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도(慶尙道)땅에서 모두 이십사국(二十四國)이 있고 대국(大國)은 사오천호(四五千戶)이오 소국(小國)은 육칠(六七)백호(百戶)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지(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되고 벼를 심고 양잠(養蠶)과 우마(牛馬)의 축산(畜産)이 성(盛)하고 혼인(婚姻)에 예절(禮節)이 밝고 사람이 죽으면 큰 조우(鳥羽)를 달아 보내니 이는 그 영혼(靈魂)이 날아가도록 함이었다.

이때까지의 역사가(歷史家)들은 삼한(三韓)을 나눠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 하고 그 중(中) 마한(馬韓)이 지금(只今)의 한강(漢江) 이남(以南)에서부터 충남북도(忠南北道)와 전라도(全羅道)땅이고 진한(辰韓)은 지금(只今)의 경상도(慶尙道)의 대부분(大部分)이고 변한(弁韓)은 나중의 가야(伽倻)의 여러 나라가 일어난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지방(地方)이라 하였으나 새로운 연구(硏究)에 의(依)하면 진한(辰韓)이 한사군(漢四郡)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漢江) 유역(流域)이고 마한(馬韓)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이고 변한(弁韓)이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지방(地方)이라 한다.

부여(扶餘)의 일족(一族)에 졸본부여(卒本扶餘)가 있으니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연안(沿岸)의 땅이오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이다.

이 시대(時代)의 정치(政治)는 신앙(信仰)과 완전(完全)히 분립(分立)되지 아니하여 부락(部落)의 수령(首領)이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천제(天祭)를 지내며 또 마을의 정치(政治)를 행(行)하였다. 신앙(信仰)의 가장 높은 대상(對象)은 하늘의 상징(象徵)인 태양(太陽)이었으며 해마다 농사(農事)가 끝나면 일정(一定)한 때에 신곡(新穀)으로 술과 떡을 빚어 천제(天祭)를 지내고 그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놀았다.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부여(扶餘)의 영고(迎鼓) 등(等)은 모두 이를 이름이다. 이 제사(祭祀)는 처음에 높은 산(山)마루에서 지냈으니 그 곳은 어느 곳보다도 태양(太陽)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러한 풍습(風習)은 나중에 농업(農業)이 발달(發達)되고 강안(江岸)과 평야(平野)에 내려와 살게된 뒤에도 계속(繼續)되어 국가(國家)에서는 해마다 유명(有名)한 높은 산(山)에 산제(山祭)를 드리고 고을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으며 마을에는 당산(堂山)이 있어서 온 고을사람과 온 마을사람이 정성(精誠)을 바치는 곳이다.

사회(社會)는 대가(大家)라는 지배계급(支配階級)과 하호(下戶)라는 백성(百姓)과 노예(奴隸)의 세 계급(階級)으로 나뉘었고 대가(大家)들은 광대(廣大)한 토지(土地)를 가지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농사(農事)를 지었으며 이 시대(時代)는 토지(土地)는 넓고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함으로 전쟁(戰爭)할 때마다 노예(奴隸)로 부릴 포로(捕虜)를 얻는 것이 유일(唯一)한 전리품(戰利品)이었다. 산업(産業)은 농잠(農蠶)과 직포(織布)가 자못 발달(發達)하였으며 변 진한(弁辰韓)에서는 철(鐵)을 채굴(採掘)하여 돈으로 쓰고 이웃나라와 서로 무역(貿易)하였다.

종전(從前)에는 석기(石器)와 동기(銅器)만 있었는데 동기(銅器)는 연(軟)하여 칼 도끼 등(等)으로 사용(使用)치 못하더니 철(鐵)이 발견(發見)된 후(後)로 철제(鐵製)연장과 무기(武器)가 생겨서 산업(産業)과 전쟁(戰爭)양식(樣式)에 대혁명(大革命)을 일으켰다. 지금 이 문명(文明)에서 철(鐵) 한가지를 없앤다고 하면 이 호화(豪華)스러운 문명(文明)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니 고대(古代)의 철(鐵)의 발견(發見)은 참으로 경이적(驚異的) 사실(事實)이었다.

 

삼국(三國)의 흥기(興起)

처음에 북부여(北扶餘)의 임금 해모수(解慕潄)가 아들 주몽(朱夢)을 낳았는데 주몽(朱夢)은 동부여(東扶餘)의 임금 금와(金蛙)에게 양육(養育)되다가 그의 형제(兄弟)들의 시기(猜忌)에 못 배겨 부하(部下)를 거느리고 도망(逃亡)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러 국가(國家)를 세우고 성(姓)을 고(高)라 하니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

일설(一說)에는 주몽(朱夢)이 졸본(卒本)에 와서 졸왕(卒王)의 여서(女婿)가 되었다가 왕(王)이 죽은 뒤에 그 위(位)를 계승(繼承)하였다 하는데 여러 가지 사실(史實)로 보면 이 말이 가장 근리(近理)하고 주몽(朱夢)이 졸본(卒本) 국호(國號)를 고쳐서 고구려(高句麗)라 하였음으로 후인(後人)이 고구려(高句麗)의 역연수(歷年數)에 대(對)하여 주몽(朱夢)으로부터 망(亡)할 때까지를 칠백오년(七百五年)이라 하고 졸본(卒本)까지를 합(合)하여 구백년(九百年)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의 다섯 대족단(代族團)이 중심(中心)으로 이루어진 사회(社會)이며 산(山)이 많고 토지(土地)가 여위어서 생활(生活)이 곤란(困難)한 까닭에 사람들이 권검(勸儉)하였다.(고구려(高句麗) 건국(建國) 단기(檀紀) 이천이백구십칠년(二千二百九十七年))

고구려(高句麗)시조(始祖) 주몽왕(朱夢王)이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는데 동부여(東扶餘)에 있을 때에 낳은 아들 유리(類利)가 찾아와서 태자(太子)가 되었음으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부하(部下) 십인(十人)을 거느리고 남(南)으로 향(向)하여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을 지나서 마한(馬韓)에 들어가니 마한왕(馬韓王)이 두 형제(兄弟)의 웅걸(雄傑)함을 보고 동북(東北) 백리(百里)의 땅을 할여(割與)하여 써 거처(居處)하게 하였다. 비류(沸流)는 어염(魚鹽)의 이(利)를 취(取)하여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仁川)지방(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온조(溫祚)는 산천(山川)의 험(險)과 평야(平野)의 이(利)를 취(取)하여 한강안(漢江岸)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都邑)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백제(百濟)라하고 성(姓)을 부여(扶餘)라 하니 이가 곧 백제시조(百濟始祖)이다.(檀紀 二千三百十六年)

비류(沸流)는 그 땅이 비습(卑濕)하여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죽으매 그 백성(百姓)이 모두 위례성(慰禮城)으로 돌아오니, 온조(溫祚)는 세력(勢力)이 점점(漸漸)자랐으니, 창업(創業) 초기(初期)에 북변(北邊)의 낙랑(樂浪)과 말갈(靺鞨)이 자주 침입(侵入)함으로 한산(漢山)에(지금의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 도읍(都邑)을 옮겼다.

변 진한(弁辰韓)의 사로국(斯盧國)에는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육촌장(六村長)이 회의(會議)를 열고 북방인(北方人)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밀려오는 이때에 우리가 현군(賢君) 일인(一人)을 구(求)하여 세우고 국가(國家)를 통일(統一)하지 아니하면 안되리라 하고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맞이하여 임금을 삼고 지금의 경주(慶州)에 도읍(都邑)하니 이가 곧 신라(新羅) 시조(始祖)이다. (檀紀 二千二百七十七年) 신라(新羅)의 국호(國號)는, 처음에는 사로(斯盧) 그밖에 여러 가지로 불러 왔으나 후(後)에 신라(新羅)라 고쳤으므로 신라(新羅)로 통칭(通稱)하는 것이다.

삼국(三國)의 시조(始祖)는 모두 일대(一代)의 영걸(英傑)이라 당시(當時)의 각국(各國)이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로 성립(成立)되어 완전(完全)한 통일국가(統一國家)를 이루지 못하고 부락(部落)과 부락(部落)사이에 호상(互相) 침벌(侵伐)함이 있으되 국가(國家) 총왕(總王)이 능(能)히 제어(制御)치 못함을 보고 정치(政治)를 중앙(中央)에 통일(統一)한다는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쓰기로 하였다. 그 까닭에 건국(建國)초(初)부터 부근(附近)의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여 군현(郡縣)을 만들고 관리(官吏)를 보내어 다스렸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역사상(歷史上) 정치제도(政治制度)의 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고구려(高句麗)는 태백산(太白山) 좌우(左右)에 산재(散在)한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를 정복(征服)하고 한(漢)이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취(取)하니 이때가 졸본(卒本)이라는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로 개칭(改稱)한 때이오 동(東)으로 옥저(沃沮) 지방(地方)까지를 그 판도(版圖)에 넣었다.

백제(百濟)는 점차(漸次)로 마한국(馬韓國)의 여러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니 마한왕(馬韓王)이 책(責)하여 왈(曰) 왕(王)이 처음에 아경(我境)에 들어 왔을 때에 객신(客身)할 곳이 없기로 토지(土地)를 주어 안거(安居)케 했거늘 이제 우리 국토(國土)를 침범(侵犯)하니 무슨 도리(道理)인고 하였으나 온조왕(溫祚王)은 듣지 아니하고 남(南)으로 점차(漸次)로 강토(疆土)를 넓혔다.

신라(新羅)는 변 진한(弁辰韓)의 북부(北部)를 점점(漸漸) 병합(倂合)하고 서(西)로 마한국경(馬韓國境)에 다다르니 여기서 비로소 백제(百濟) 병(兵)과 상견(相見)하게 되어 삼국시대(三國時代) 육칠백년(六七百年) 간(間)의 전란(戰亂)의 막(幕)을 열었다. 그러나 이 전쟁(戰爭)은 호전기풍(好戰氣風)이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와 통일국가(統一國家)를 만들려는 운동(運動) 과정(過程)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생긴 현상(現象)이었다.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이 각기(各其)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로 엉켜 갔을 때에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 지방(地方)은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이루지 못하고 육가야국(六伽倻國)이 분립(分立)하여 부족사회(部族社會)를 그대로 지내었다. 그 중(中)에는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의 김해(金海) 지방(地方)을 중심(中心)으로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가락국(駕洛國)을 세우니 이가 곧 가락시조(駕洛始祖)이오 가락(駕洛)을 또한 금관(金官)이라 하며 (檀紀 二千三百七十五年) 그밖에 대가야(大伽倻) 소가야(小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등(等)이 있었는데 좁은 구역(區域)에 육국(六國)이 분립(分立)되어 있었음으로 국력(國力)이 모두 떨치지 못하고 또 그 위치(位置)가 아국(我國)의 최남단(最南端)에 있어 북(北)에서 밀려온 아국(我國) 문화권(文化圈)의 가장 구석진 곳이다. 다만 낙동강(洛東江)이 흘러내려 가서 삼각주(三角洲)를 이룬 곳으로 국민(國民)의 생활(生活)은 가장 유족(裕足)한 곳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제도(制度)와 풍습(風習)에는 여러 가지 특색(特色)이 있고 창조성(創造性)이 있었다. 신라(新羅)는 당시(當時) 일반적(一般的)으로 행(行)하고 있는 군주(君主)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타파(打破)하고 이세(二世) 남해왕(南解王)은 자(子) 유리(儒理)와 서(婿) 석탈해(昔脫解)에 일러 왈(曰) 아(我) 사후(死後)에 박(朴) 석(昔) 이성(二姓)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로써 왕위(王位)를 사(嗣)하라 하더니, 석탈해(昔脫解)가 제사대(第四代) 왕(王)이 되니 이로부터 박석(朴昔) 이성(二姓)이 상전(相傳)하고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수양(收養)하더니 그후(後)에 알지(閼智)의 자손(子孫)이 또한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여 이로부터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이 상전(相傳)하였다. 이 시대(時代)는 전란(戰亂)이 자주 일어나고 또 창업기(創業期)에 있었는데 만일 군주(君主)가 연유(年幼)하거나 또한 암우(暗愚)하면 혹(或)은 행정권(行政權)이 신하(臣下)에게 옮기고 혹(或)은 국가대사(國家大事)를 처리(處理)할 능력(能力)이 없어서 반드시 위망(危亡)에 빠지게 되는 것임으로 신라(新羅)에서는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깨트리고 골품제(骨品制)를 써서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을 성골(聖骨)이라 하고 성골(聖骨) 출신(出身)이 왕위(王位) 계승권(繼承權)을 가지되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가 왕(王)이 되기로 하니 이 까닭에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와 정립(鼎立)한 동안 일,이(一,二)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유군(幼君)과 암왕(暗王)이 거의 없었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도 이,삼(二,三)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연유(年幼)한 군주(君主)가 거의 없으니 이로써 보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의 군(君)됨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왕위(王位)계승(繼承)의 한 원칙(原則)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며 후세(後世)에 자기(自己) 자손(子孫)에게 행복(幸福)을 주기 위(爲)하여 황구(黃口) 유아(幼兒)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함은 국사(國事)를 위(爲)함이 아니오 그 국가(國家)를 자가(自家) 혈통(血統)의 사유물(私有物)로 생각한 까닭이며, 이로 인(因)하여 국사(國事)를 그르치고 아들에게 행복(幸福)을 준다는 것이 도리어 큰 재화(災禍)를 준 예(例)도 적지 아니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인성(人性)은 혼후(渾厚)하여 개인(個人)의 사욕(私慾)보다 국가(國家)를 위(爲)하는 마음이 더 두터웠다. 신라(新羅)에는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한 예(例)가 여러 번 있었고 고구려(高句麗)에서는 높은 벼슬을 다른 사람에게 사양(辭讓)하는 예(例)가 있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왕(故國王)때에 오부(五部)에 명령(命令)하여 현인(賢人)을 천거(薦擧)하라한즉 오부(五部)가 연류(宴留)를 추천(推薦)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더니 연류(宴留)가 말하되 신(臣)이 용우(庸愚)하여 족(足)히 써 국가(國家) 대정(大政)을 맡지 못할지라 압록곡(鴨綠谷)에 을파소(乙巴素)가 있어 역전(力田) 자급(自給)하는데 성질(性質)이 강의(剛毅)하고 정치(政治)의 대재(大才)가 있으니 차인(此人)이 아니면 국사(國事)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신(臣)의 벼슬을 차(此)에게 맡기라 하였다. 왕(王)은 곧 을파소(乙巴素)를 거용(擧用)하니 을파소(乙巴素)의 정치(政治)가 현명(賢明)하여 백성(百姓)이 편안(便安)하고 또 백성(百姓)의 빈궁(貧窮)함을 걱정하여 봄에 국창(國倉)의 곡식(穀食)을 내어 백성(百姓)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환수(還收)하여 해마다 상례(常例)를 삼으니 백성(百姓)이 모두 기뻐하고 이것이 아국(我國)의 진대제도(賑貸制度)의 시초(始初)였다.

삼국(三國)은 국가(國家)에 큰 난리(亂離)가 있으면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집고 궁시(弓矢)를 메고 군대(軍隊)의 선두(先頭)에 나서고 군졸(軍卒)이 그 뒤를 따름으로 장 병(將 兵)이 모두 일체(一體)가되어 당시(當時) 천하(天下) 강국(强國)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물론(勿論) 이때는 전공(戰功)이 있는 자(者)에게 토지(土地)를 주는 전장제도(田庄制度)가 있고 또 포로(捕虜)를 획득(獲得)하여 농업(農業) 노예(奴隸)로 사용(使用)하는 제도(制度)가 있음으로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들이 선두(先頭)에 나서는 것은 전공(戰功)을 세우기 위(爲)한 일면(一面)이 없지 아니하나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는 숭고(崇高)한 정신(精神)은 족(足)히 후세(後世)의 미약(微弱)한 하민층(下民層)만을 군사(軍士)로 내 세우고 자기(自己)는 안일(安逸)한 지위(地位)에 도피(逃避)하는 귀족층(貴族層)을 괴사(愧死)케 할 것이오 유명(有名)한 신라(新羅)의 화랑(花郞)도 이러한 정신(精神)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람은 혼후(渾厚)한 기풍(氣風)으로써 지위(地位)의 고하(高下)와 세력(勢力)의 강약(强弱)을 가리지 아니하고 오직 일심(一心)으로 함께 국사(國事)에 당(當)하였으므로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아국(我國)역사상(歷史上) 가장 광휘(光輝)있는 시대(時代)를 현출(現出)한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융성(隆盛)

고구려(高句麗)의 국도(國都) 졸본(卒本)은 평야(平野)가 적고 외적(外敵)을 막기에 불편(不便)함으로 얼마 후(後)에 국내성(國內城)에 옮기고 다시 환도성(丸都城)에 옮겨서 서(西)로 요하(遼河)방면(方面)으로 내려가고 남(南)으로 한반도(韓半島)로 내려가기 시작(始作)하였다. 고구려(高句麗)가 서(西)와 남(南)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면 안될 이(理)는 두 가지가 있다.

一. 고구려(高句麗)의 땅은 평야(平野)가 적고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며 기후(氣候)가 한냉(寒冷)하여 농산(農産)이 풍부(豊富)치 못함으로 국가(國家) 존립상(存立上) 오곡(五穀)과 잠마(蠶麻)가 풍성(豊盛)한 남방(南方)으로 진출(進出)치 아니할 수 없는 것

二. 요하(遼河)로부터 대동강(大洞江)에 이르는 일대지(一帶地)는 고래(古來)로 우리 민족(民族)이 거주(居住)하던 조선(朝鮮) 고지(故地)이던 것이 지금(只今)에 현토(玄菟) 낙랑(樂浪)등(等)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으로 되었음으로 이것을 회복(恢復)치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건국(建國)초기(初期)부터 서출(西出) 남하(南下) 정책(政策)을 써서 마침내 서(西)로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지경(地境)이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南)으로 낙랑(樂浪)을 취(取)하여 사백년(四百年)동안 내려오던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을 뿌리 채 뽑아버리고 드디어 백제(百濟)와 접경(接境)하니 이때가 삼국(三國)이 비로소 정립(鼎立)한 때이오 삼국(三國) 후(後) 약 삼백년(約 三百年) 경(頃)의 일이었다.

고구려(高句麗)는 서(西)쪽으로 발달(發達)하는 도중(途中)에 중국(中國)과의 충돌(衝突)이 가장 심(甚)하더니 중국(中國)의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위(魏)와 항쟁(抗爭)하다가 위장(魏將) 관구검(毌丘儉)에게 패(敗)하여 환도성(丸都城)이 회신(灰燼)되었으므로 일시(一時) 국세(國勢)가 매우 위태(危殆)하였으나 얼마 후(後)에 다시 회복(恢復)하여 대륙(大陸)으로 진출(進出)하는 정책(政策)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요하(遼河) 서(西)쪽의 금주성(錦州城)에 웅거(雄據)하고 있는 연(燕)나라와 쟁웅(爭雄)하다가 연군(燕軍)에게 패(敗)하여 환도성(丸都城)은 다시 수리(修理)할 수 없이 파괴(破壞)되고 도성(都城)이 적국(敵國)에 너무 가까워서 항상(恒常) 위험성(危險性)이 있음을 염려(念慮)하여 그 후(後)에 평양(平壤)으로 옮기더니 고구려(高句麗) 중흥(中興)의 영왕(英王)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다시 환도성(丸都城)에 도읍(都邑)하고 강토(疆土)를 사방(四方)으로 넓히니 이때가 고구려(高句麗)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이오 지금 만주(滿洲) 집안현(輯安縣) 비석가(碑石街)에 흘연(屹然)히 서있는 높이 이십이척(二十二尺)의 거비(巨碑)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공적(功績)을 영원(永遠)히 전(傳)하기 위(爲)하여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세운 것이다.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

백제(百濟)는 건국(建國) 후(後) 점차(漸次)로 마한(馬韓)의 땅을 탈취(奪取)하더니 불과(不過) 이십(二十) 여년(餘年)에 전역(全域)을 통합(統合)하고 반도(半島) 서남부(西南部)의 일대국(一大國)을 형성(形成)하였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농산(農産)이 많고 일면(一面)이 대해(大海)인 관계(關係)로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이 발달(發達)하여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무역(貿易)하고 수군(水軍)이 또한 정예(精銳)하여 한때는 중국(中國)의 동해안(東海岸) 일부(一部)를 점령(占領)한 일도 있었다.

고구려(高句麗)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내려 온 후(後) 예성강(禮成江)(황해도)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충돌(衝突)이 일어나기 시작(始作)하였다.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는 본시(本是) 형제(兄弟)의 나라이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백제(百濟)를 치다가 전사(戰死)하니 이로부터 양국(兩國)이 세수(世讎)가 맺어져서 전쟁(戰爭)이 연년(連年) 부절(不絶)하더니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이 남하정책(南下政策)을 추진(推進)하여 평양(平壤)에 이도(移都)한 후로 백제(百濟)는 그 압력(壓力)에 눌려서 더 북진(北進)치 못하고 개로왕(盖鹵王)때에는 고구려(高句麗)와 싸우다가 왕(王)은 전사(戰死)하고 전군(全軍)이 복멸(覆滅)하고 한강(漢江) 좌우(左右)의 지(地)를 상실(喪失)하고 왕자(王子)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기니 이때가 백제(百濟)의 최대(最大) 수난기(受難期)이었다.

신라(新羅)는 반도(半島)의 동남(東南) 일우(一隅)에 처(處)하여 현군(賢君)이 상속(相續)하고 그 정치(政治)에는 화백(和白)이라는 제도(制度)가 있어 임금을 선거(選擧)하고 다른 중요(重要)한 국사(國事)를 의론(議論)하는데 유족(遺族)들이 모여서 회의(會議)하고 전원(全員)이 찬성(贊成)한 연후(然後)에 결정(決定)함으로 항상(恒常) 국론(國論)이 잘 통일(統一)되고 또 이 나라는 육부족(六部族)의 합의(合意)에 의(依)하여 성립(成立)되었으므로 그 국민(國民)의 부족적(部族的) 단결(團結)이 가장 공고(鞏固)하였으니 이것이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었고 이 부족(部族)의 단결력(團結力)은 전전이사(轉轉移徙)하여 다니는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는 아국(我國)의 서해안(西海岸)을 끼고 있어서 일직부터 대륙(大陸)과의 교섭(交涉)이 빈번(頻繁)하여 손쉽게 그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할 수 있었고 한문(漢文)도 국초(國初)부터 들어와서 일부(一部) 지식계급(知識階級)사이에 행(行)하였음으로 문화(文化) 정도(程度)의 향상(向上)이 볼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新羅)는 지리적(地理的)으로 중국(中國)과 직접(直接)으로 교통(交通)하지 못하고 주(主)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통(通)하여 간접(間接)으로 대륙(大陸)문화(文化)를 받은 관계(關係)로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얼마쯤 뒤졌으나 그 대신(代身) 삼한시대(三韓時代)로부터 계속(繼續)하여오는 국유문화(國有文化)를 충분(充分)히 발달(發達)케 하고 그 기초(基礎)위에 대륙문화(大陸文化)를 받아서 세계(世界)에 자랑할만한 신라문화(新羅文化)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불교(佛敎)를 받아들일 때에 있어서도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가장 쉽게 받아왔으나 오직 신라(新羅)는 그 받아들이는 가부(可否)에 대(對)하여 논란(論難)과 비판(批判)이 가장 심각(深刻)하여 어려운 곡절(曲折)을 겪었고 그 뒤에 가장 아름다운 불교문화(佛敎文化)의 꽃이 핀 것으로 보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후세(後世)에 외국문화(外國文化)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깊은 검토(檢討)와 비판(批判)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유문화(國有文化)의 기초(基礎)가 약(弱)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三.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귀족(貴族) 공신(功臣)들에게 전장(田庄) 식읍(食邑) 등(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농경(農耕)에 종사(從事)할 노예(奴隸)를 아울러 주니 고구려(高句麗)에는 좌식(坐食)하는 대가(大家)가 만여호(萬餘戶)이오 하호(下戶)는 그들에게 양식(糧食)과 어염(魚鹽)을 져다 바쳤으며, 신라(新羅)에는 재상가(宰相家)의 노복(奴僕)이 삼천인(三千人)에 달하고 우마(牛馬)의 수(數)도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 때는 돈이 없고 미곡(米穀)과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사용(使用)하니 이것은 고대(古代) 물물교환(物物交換)의 유풍(遺風)이오 지금에 호남(湖南)지방(地方)에서 미곡(米穀)에 한(限)하여 매(買)하는 것을 판다하고 매(賣)하는 것을 산다 하는 것은 삼국(三國) 이래(以來) 미곡(米穀) 마포(麻布)가 돈으로 쓰이던 유속(遺俗)이다.

삼국(三國)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의 도성(都城) 인구(人口)는 고구려(高句麗)는 이십일만여호(二十一萬餘戶)이오 신라(新羅)는 십칠만여호(十七萬餘戶)이오 백제(百濟)는 십오만여호(十五萬餘戶)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한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인구(人口)가 일호(一戶)에 오인(五人)으로 잡더라도 칠십만(七十萬) 혹(或)은 백만(百萬)이 될 것이니 이것은 사실(事實)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도성(都城)이 팽창(膨脹)치 아니할 수 없는 이유(理由)가 있으니 이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도성(都城)이 수삼개월(數三個月) 적군(敵軍)의 포위(包圍)를 당(當)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 포위(包圍)에는 식량(食糧) 무기(武器) 기타 여러 가지 생필품(生活品)을 도성내(都城內)에서 자급자족(自作自給)치 아니하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각국(各國)의 도성내(都城內)에는 첫째로 무기(武器)를 제조(製造)하는 공장(工場)이 있고 거기에 종사(從事)하는 기술자(技術者)및 노무자(勞務者)등(等) 백공(百工)이 있고 큰 시장(市場)도 이 도성내(都城內)에 집중(集中)되어 있었다. 국가(國家)가 도성(都城)을 옮길 때에 먼저 공장(工場)과 백공(百工)을 옮긴 것은 이 까닭이오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이 팽창(膨脹)한 것은 자연(自然)의 이(理)이다.

 

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을 중심(中心)으로 남북(南北) 수천리(數千里)에 걸쳐서 큰 세력(勢力)을 길렀으므로 비단(非但)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에 대(對)한 압력(壓力)이 될 뿐 아니라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대하여도 끊임없는 위협(威脅)이었다.

그러나 전일(前日)의 중국(中國)은 오호(五胡) 십육국(十六國)의 어지러운 시대(時代)였으나 그 뒤에 남북(南北)으로 나뉘었다가 수(隋)나라가 일어나서 통일(統一)을 이룬 뒤에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사이에는 두 큰 세력(勢力)이 마주쳐서 부딪치지 아니할 수 없이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수(隋)나라의 요서(遼西)를 친 것이 동기(動機)가 되어서 수(隋) 문제(文帝)가 삼십만(三十萬) 군사(軍士)로서 쳐들어 왔으나 중도(中途)에서 패(敗)하여 돌아갔다. 다음 임금 양제(煬帝)는 본시(本是) 허심(虛心)이 많은 사람으로서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해 보겠다는 야심(野心)과 부황(父皇)이 이루지 못한 한(恨)을 풀겠다는 생각으로 천하(天下)의 힘을 기우려 영양왕(嬰陽王) 이십이년(二十二年) (檀紀 二千九百四十五年)에 百十三萬의 陸軍과 多數한 水軍을 거느리고 高句麗로 쳐들어오니 陣의 길이가 九百六十里에 뻗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짐작(斟酌)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으로써 대장(大將)을 삼고 준비(準備)하던 터이라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수군(隋軍) 이십만((二十萬)을 유인(誘引)하여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러 대파(大破)하니 적(敵)의 생환(生還) 자(者)가 겨우 二千八百名에 지나지 못하니 이것을 살수대전(薩水大戰)이라 하며 요동(遼東)에 남아있는 군사(軍士)는 혹(或)은 패(敗)하고 혹(或)은 겁(怯)을 먹고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양제(煬帝)는 이듬해 다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와서 요동성(遼東城)을 쳤으나 거듭 실패(失敗)하고 세 번째 고구려(高句麗)를 치려다가 국내(國內) 반란(叛亂)으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게 망(亡)하였다.

 

삼국혼전(三國混戰)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麗)에게 밀려서 웅진(熊津)으로 옮긴 후(後) 외(外)로는 고구려(高句麗)의 침략(侵略)이 그치지 아니하고 내(內)로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국력(國力)이 떨치지 못함으로 한 편(便)으로는 멀리 일본(日本)과 친선(親善)하여 그 후원(後援)을 얻으려 하였으며 백제(百濟)의 학자(學者) 왕인(王人)이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가지고 일본(日本)에 들어가서 그 왕자(王子)에게 처음으로 한문(漢文)을 가르쳐주고 불교(佛敎)와 및 건축(建築), 도기(陶器), 양조(釀造), 야금(冶金), 조각(彫刻), 회화(繪畵)등(等)의 기술(技術)을 전(傳)한 것도 모두 이 시대(時代)의 일이었다. 백제(百濟) 성왕(聖王)은 신라(新羅)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를 치려 하더니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의 강성(强盛)함을 두려워하고 또 부질없이 외국(外國)과 싸우기보다 내정(內政)을 닦아서 국력(國力)을 충실(充實)히 하는 것이 옳다하고 백제(百濟)의 청(請)을 거절(拒絶)하고 도리어 고구려(高句麗)와 통(通)함으로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화호(和好)가 깨지고 신라(新羅)를 치다가 왕(王)이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백제(百濟)는 더욱 약(弱)하여 웅진(熊津)에서 지탱(支撑)치 못하고 도읍(都邑)을 사비(泗沘)(지금의 부여(扶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 고쳤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때에 불교(佛敎)가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이 나라 정치(政治)는 군주(君主)와 민중(民衆)의 계급(階級) 차별(差別)이 엄격(嚴格)한 계급제도(階級制度)이며 불교(佛敎)는 상하(上下)의 차별(差別)이 없는 평등사상(平等思想)위에 서는 것이므로 법흥왕(法興王)이 불교(佛敎)를 펴서 정치적(政治的)으로는 군민(君民)의 계급(階級)을 엄립(嚴立)하고 종교적(宗敎的)으로는 군민평등(君民平等)을 주창(主唱)하여 국민(國民)의 일치단결(一致團結)을 도(圖)하니 이 정책(政策)이 민심(民心)단합(團合)에 적지 않은 효과(效果)를 거두었던 것이다.

다음임금 진흥왕(眞興王)은 신라(新羅) 중흥(中興)의 영걸(英傑)이라 처음으로 화랑(花郞)이라는 제도(制度)를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무리를 모아서 오유(娛遊)하면서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을 토론(討論)하기도하고 가무(歌舞)로써 즐기기도 하고 멀리 국내(國內)의 유명(有名)한 산천(山川)을 돌아다니면서 몸도 단련(鍛鍊)하고 인정(人情)도 살피며 그리하는 중에 옳고 바른 사람을 골라서 나라에 천거(薦擧)하여 적당(適當)한 소임(所任)을 맡아보게 하니 당시(當時)에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화랑(花郞) 출신(出身)이었고 이것이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여 서로 화호(和好)를 맺는 것이 외교정책(外交政策)의 주요(主要)한 하나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한편(便)으로는 대륙문화(大陸文化)를 수입(輸入)하고 한편(便)으로는 대국(大國)의 성원(聲援)을 빌어서 적대국(敵對國)을 위압(威壓)하려 함이니 지금(只今)에 외국(外國) 승인(承認)을 받음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자유(自由)로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할 수 있으되 오직 신라(新羅)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 할 길이 없으므로 삼국(三國)의 혼전(混戰) 지대(地帶)인 한강(漢江) 일대지(一帶地)를 점령(占領)하고 서해(西海)로부터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는 것이 국가대계(國家大計)의 주요(主要)한 일부(一部)이었다. 이에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한강(漢江) 지대(地帶)에서 격전(激戰)하고 있는 기회(機會)를 틈타서 먼저 백제군(百濟軍)과 연합(聯合)하여 고구려(高句麗) 군(軍)을 쫓아버리고 다시 백제군(百濟軍)을 반격(反擊)하여 드디어 한주(漢州)(지금의 서울)로부터 인천(仁川) 남양(南陽)에 이르는 지역(地域)을 점유(占有)하니 이로부터 중국(中國)에 통(通)하는 길이 열리고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기초(基礎)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로부터 해마다 대륙(大陸)과의 교통(交通)이 끊이지 아니하고 유학생(遊學生)과 구법승(求法僧)이 수(數)없이 다녔다. 이때 육가야국(六伽耶國) 중(中)에 가락국(駕洛國)은 법흥왕(法興王)때에 이미 신라(新羅)에 합병(合倂)되고 진흥왕(眞興王)때에 대가야국(大伽倻國)을 쳐서 군현(郡縣)을 삼으니 남은 사(四) 가야국(伽倻國)이 차례로 무너져서 낙동강(洛東江) 유역(流域) 지방(地方)이 전부(全部) 신라(新羅)의 땅이 되었고 지금의 가야금(伽倻琴)은 이 가야국(伽倻國)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며 진흥왕(眞興王)은 또한 북(北)으로 땅을 넓혀서 남옥저(南沃沮)의 중부(中部)에까지 이르고 국경(國境) 지방(地方)에 순수(巡狩)하여 비(碑)를 세우니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창녕읍(昌寧邑)과 서울의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과 함경남도(咸鏡南道)의 함주군(咸州郡) 황초령(黃草嶺)과 함경남도(咸鏡南道) 이원군(利原郡)의 마운령(摩雲嶺)에 있는 순수비(巡狩碑)가 곧 그것이다.

신라(新羅)의 국세(局勢)가 갑자기 강성(强盛)하여짐을 보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종래(從來)의 세수(世讎)를 버리고 서로 화호(和好)를 맺어서 신라(新羅)에 당(當)하게 되니 신라(新羅)도 형세(形勢)의 위태(危殆)함을 깨닫고 중국대륙(中國大陸)의 힘을 이끌어 올 정책(政策)을 쓰게 되었다.

이때 중국(中國)은 수(隋)나라가 망(亡)하고 당(唐)나라가 대신(代身)하고 그 임금 태종(太宗)은 유명(有名)한 영왕(英王)이다. 당태종(唐太宗)은 북(北)으로 돌궐(突闕)(터키)을 무찌르고 서(西)로 토번(吐藩)(티베트)과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평정(平定)하고 남방(南方)의 여러 나라도 조공(朝貢)하게되어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였다고 생각되었으나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高句麗)만이 그에게 굴복(屈伏)하지 아니함으로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때 (檀紀 二千九百七十七年)에 스스로 군사(軍士) 삼십만(三十萬)을 거느리고 風雨같이 몰려와서 이듬해 四月에 이미 요하(遼河)를 건넜고 이때 고구려(高句麗)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국정(國政)을 잡고 굳게 지키었다. 당태종(唐太宗)은 요동성(遼東城)과 백암성(白岩城)을 빼았은 후(後) 안시성(安市城)을 포위(包圍)하고 수개월(數個月)을 싸웠으나 마침내 떨어뜨리지 못하던 중(中) 고구려(高句麗) 장수(將帥)의 화살이 당태종(唐太宗)의 눈을 마쳤으므로 당병(唐兵)은 전의(戰意)를 잃고 또 가을철이 되어 찬바람이 불어오고 양식(糧食)까지 다하게 되었다. 이에 당태종(唐太宗)은 싸움을 단염(斷念)하고 도로 돌아가는데 험로(險路)와 풍설(風雪)에 인마(人馬)의 희생(犧牲)이 길에 가득하였고 그 후(後) 수차(數次)로 군사(軍士)를 보내어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역시(亦是) 고구려(高句麗)의 맹렬(猛烈)한 반격(反擊)으로 실패(失敗)하고 돌아갔다.

고구려(高句麗)와 대륙(大陸)의 세력(勢力)이 반세기(半世紀)를 두고 겨룬 그 사이에 신라(新羅)의 힘이 더욱 커지고 그 때에 또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의 두 영걸(英傑)이 나서 하나는 군사(軍事)로 하나는 외교(外交)로 대(大) 신라(新羅)를 세우기에 힘을 다하였다. 백제(百濟)는 성왕(聖王)이 전사(戰死)한 원수(怨讐)를 기어(期於)히 갚으려하여 자주 군사(軍士)를 내어 신라(新羅)를 치고 고구려(高句麗)가 또한 신라(新羅)의 대륙(大陸)의 힘을 이끄는 것을 미워하여 압력(壓力)을 가(加)하니 신라(新羅)는 김춘추(金春秋)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구원(救援)을 청(請)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 죽은 후(後) 그 아들 고종(高宗)은 어버이의 뜻을 이어 항상(恒常) 동방(東方)을 판도내(版圖內)에 넣으려 하던 차(次)에 신라(新羅)의 청병(請兵)이 있으므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회(好機會)라 하여 드디어 백제(百濟)를 칠 군사(軍士)를 일으켰다.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할 무렵에 신라(新羅) 왕(王)이 승하(昇遐)하고 김춘추(金春秋) 알천(閼川) 두 사람이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할 후보(候補)자(者)가 되었는데 이인(二人)이 서로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하다가 춘추(春秋)가 왕(王)이 되니 이가 곧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이때 백제(百濟)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민생(民生)은 도탄(塗炭)에 빠지고 여러 번 신라(新羅)를 치다가 번번이 패(敗)하니 국세(國勢)가 위급(危急)하던 차 당(唐)나라 군사(軍士)가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이 장군(將軍)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백제(百濟) 장군(將軍) 계백(階伯)은 결사군(決死軍) 오천명(五千名)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아가 김유신(金庾信) 군(軍)을 맞아 용감(勇敢)히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하여 마침내 패(敗)하여 전사(戰死)하고 사비성(泗泌城)이 나당(羅唐) 연합군(聯合軍)에게 떨어지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이 항복(降服)하니 이로써 백제(百濟)는 三十一王 六百七十八年에 亡하고 (단기 二千九百九十三年) 지금 부여(扶餘) 금강안(錦江岸)의 낙화암(落花岩)은 당시(當時) 궁녀(宮女)들이 도망(逃亡)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애화(哀話)를 남긴 곳이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은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당(唐)나라의 근본(根本) 정책(政策)에 의(依)하여 그 군사(軍士)를 옮겨서 신라(新羅)를 치려하였다. 원래(原來) 외국(外國)의 군대(軍隊)를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하는 데는 마침내 그 군대(軍隊)의 침박(侵撲)을 받는 것이 고금(古今) 역사(歷史)의 통례(通例)라 무열왕(武烈王)과 김유신(金庾信)은 일직부터 외군(外軍) 이용(利用)의 위험성(危險性)이 있음을 잘알고 또 당(唐)나라의 야심(野心)을 이미 간파(看破)한 터이라 한편(便)으로 백제(百濟)에 출병(出兵)하면서 한편(便)으로 국내(國內)를 굳게 지키니 소정방(蘇定方)이 그 기미(機微)를 알고 감(敢)히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김유신(金庾信)으로써 명장(名將)이라고 칭(稱)하는 소이(所以)이오 후세(後世)에 자국내(自國內)를 텅텅 비워 놓고 외군(外軍)을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한다는 것은 가장 우매(愚昧)한 것이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등(等) 오(五) 도독부(都督附)를 두었는데 백제(百濟) 유민(遺民)들의 광복운동(光復運動)으로 말미암아 당(唐)나라의 군정(軍政)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왕족(王族) 복신(福信)이 승(僧) 도침(道琛)과 더불어 지금 한산(韓山)부근(附近)인 주류성(周留城)에서 군사(軍士)를 일으켜 일본(日本)에 가 있는 왕자(王子) 풍(豊)을 세워 임금을 삼고 고구려(高句麗)와 일본(日本)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여 한동안 그 기세(氣勢)가 떨치더니 나중에 내부(內部)의 세력(勢力) 다툼으로 말미암아 복신(福信)이 도침(道琛)을 죽이고 풍왕(豊王)이 또 복신(福信)을 죽여서 마침내 모두가 무너지고 말았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다시 고구려(高句麗)를 칠 준비(準備)를 시작(始作)하였다. 이때 고구려(高句麗)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고 그 아들 남생(男生)이 정권(政權)을 잡았는데 가족(家族)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겨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우 정사(淨士)는 十二城으로써 신라(新羅)에 가서 붙고 남생(男生) 그 아우 남달(男達)이 서로 시기(猜忌)하여 싸움이 일어나더니 남생(男生)은 당(唐)나라에 항복(降服)하여 본국(本國)의 군사기밀(軍事機密)을 일일이 고(告)하였다. 당(唐)나라 임금 고종(高宗)은 어버이 태종(太宗)의 뜻을 이어 육차(六次)나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으로 평생(平生)의 한(恨)으로 여기던 터이라 장군 이적(李勣)을 시켜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로 쳐들어 가게하고 이에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도 군사(軍士)와 식량(食糧)을 내어 당군(唐軍)을 도왔다. 고구려(高句麗)는 나라 일이 어지러운 데에 흉년(凶年)이 겹 들여서 매우 곤경(困境)에 빠졌으나 그래도 二年동안이나 지탱(支撑)하다가 마침내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되니 (단기 三千一年) 백제(百濟)가 망(亡)한 후(後) 팔년(八年)만이오 그 역연수(歷年數)는 졸본(卒本) 부여(扶餘) 건국(建國)으로부터는 팔백(八百) 여년(餘年)이오 주몽(朱夢)으로부터는 二十八王 七百五年으로 망(亡)하였다.

당(唐)나라는 평양(平壤)에 동도호부(東都護府)를 두고 고구려(高句麗) 고지(故地)를 구(九) 도독부(都督府)로 나누고 고구려(高句麗) 백성(百姓)을 많이 중국(中國)으로 옮겨갔다.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 일변령(釰弁令)은 왕족안승(王族安勝)을 받들어 광복운동(光復運動)을 일으키고 신라(新羅)가 또 이를 도와서 당(唐)나라에 대항(對抗)하였음으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마침내 요동(遼東)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승(安勝)이 일변령(釰弁令)을 죽여서 광복운동(光復運動)은 중심(中心)을 잃어버리고 안승(安勝)은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하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칠 때에는 그 토지(土地)를 신라(新羅)가 통일(統一)할 생각이었으나 두 나라가 망(亡)한 후(後)에 당(唐)나라가 그 땅을 모두 점령(占領)하고 신라(新羅)는 도리어 당(唐)나라의 위협(威脅)을 받게 되었다.문무왕(文武王)은 두 나라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을 도와서 당(唐)나라와 싸우게 하더니 마침내 당(唐)나라와 직접(直接) 싸우기로 결정(決定)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 이년후(二年後)부터 칠년(七年)동안 싸움을 계속(繼續)하던 끝에 실력(實力)으로 당군(唐軍)을 몰아내고 대동강(大洞江) 이남(以南)의 땅을 찾아서 비로소 삼한(三韓) 통일(統一)의 업(業)이 이루어졌다.

 

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

삼국(三國)에는 국문(國文)이 없고 중국(中國)의 한문(漢文)을 수입(輸入)하여 썼으므로 일부(一部) 귀족계급(貴族階級)은 그것을 이용(利用)할 수 있었으나 일반(一般)백성(百姓)은 아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고 한문자(漢文字)가 국어(國語)에 맞지 않음으로 일을 기록(記錄)할 때에는 한자(漢字)의 음(音)과 훈(訓)을 빌어서 「밝은달」을 「明期月」이라는 等으로 썼으니 新羅의 향가(鄕歌)가 그 예(例)이다. 신라(新羅)가 삼한통일(三韓統一)뒤에 오륙백년(五六百年)의 전화(戰禍)로부터 비로소 해방(解放)되어 당(唐)나라로 들어가는 유학생(遊學生)이 해마다 늘어가고 성당(盛唐)의 찬란(燦爛)한 문물(文物)을 부지런히 받아들이는 동시(同時)에 한문(漢文) 열(熱)도 상당(相當)히 높아졌다. 그리하여 한문학자(漢文學者) 설총(薛聰)은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어 경서(經書)를 해석(解釋)하여 생도(生徒)를 가르치고 종전(從前)에는 지명(地名) 같은 것이 모두 우리 나라 말로 되어 있더니,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에 모든 지명(地名)을 중국식(中國式)으로 고치니 「沙熱伊 고을」을 「淸風縣」으로 고침과 같음이오 이 무렵을 前後하여 人名도 차츰 中國式 姓名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의 옛 모습이 漸次 사라지고 中國을 崇拜하는 風習이 생겨서 사대사상(事大思想)이 국민(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국민사상(國民思想)의 일대(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불교(佛敎)는 아국(我國)에 들어온 후(後) 건축(建築), 조각(彫刻), 야금(冶金), 회화(繪畵) 등(等) 기술(技術)을 전래(傳來) 하여 불교(佛敎) 광포(廣布)와 함께 널리 보급(普及)되었으나 끊임없는 전란(戰亂)으로 인(因)하여 그 발생(發生)하려던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더니 신라(新羅)의 통일기(統一期)를 전후(前後)하여 힘있게 발전(發展)하였으니 지금 남아있는 황룡사(皇龍寺)의 구층탑(九層塔), 첨성대(瞻星臺), 불국사(佛國寺), 석굴암(石窟庵) 같은 것이 모두 그 시대(時代)의 만든 유물(遺物)이다.

토지제도(土地制度)는 삼국(三國) 정립(鼎立) 당시(當時)에는 유족(遺族)들이 대 면적(大 面積)을 차지하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경작(耕作)하고 일반(一般)농민(農民)은 각기(各其) 일정(一定)한 면적(面積)을 가지고 농사(農事)지으며 이때는 지(地)가 많고 인구(人口)가 비교적(比較的) 적고 유식민(遊食民)을 구(驅)하여 강제(强制)로 황지(荒地)를 개척(開拓)하고 농업(農業)에 종사(從事)케 하였다.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사회(社會)가 안정(安定)되었으므로 비로소 당(唐)나라의 균전제(均田制)를 배워서 정전제(丁田制)를 만들고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십오세(十五歲)부터 장정(壯丁)이라 하여 국가(國家)로부터 분배(分配)받고 육십세(六十歲)에 국가(國家)에 반환(返還)하며 공신(功臣)유족(遺族)들에게 사전(賜田)을 주어 토지(土地)의 수세권(收稅權)을 가지게 하였다.

 

발해(渤海)의 건국(建國)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하고 일변령(釰弁令)등(等)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이 실패(失敗)에 돌아감에 그 백성(百姓)들이 혹(或)은 당(唐)나라에 강제(强制)로 옮겨지고 혹(或)은 신라(新羅)로 망입(亡入)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북방(北方)으로 유입(流入)하였다. 이때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말갈족(靺鞨族)이 살고 칠부(七部)로 나뉘어 있었으나 그 중(中)에 가장 드러난 것은 송화강(松花江) 기슭에 속말말갈(粟末靺鞨)과 흑룡강(黑龍江)가에 사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두 부족(部族)이 있고 고구려(高句麗) 당시(當時)에는 이들 말갈(靺鞨)은 고구려(高句麗)의 속국(屬國)이 되어 있었으나 고구려(高句麗)의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된 뒤에 북방(北方)의 모든 성(城)이 당(唐)나라에 점령(占領)된 것이 아니어서 말갈(靺鞨)사람들이 그러한 성(城)에 웅거(雄據)하고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들이 이에 합세(合勢)하였다. 그러한지 삼십년(三十年) 동안에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여러 번 당병(唐兵)과 싸워서 크게 이기니 당병(唐兵)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지 삼십일년(三十一年)만에 새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진국(震國)이라 하니, 그 후(後)에 발해(渤海)로 고치니 이가 곧 발해(渤海) 태조(太祖)이다. (檀紀 三千三十二年)

발해(渤海)는 서(西)로 당(唐)나라와 서역(西域)의 문화(文化)를 받아들이고 동(東)으로 일본(日本)과 무역(貿易)하여 해적(海賊)을 충동(衝動)시켜서 당(唐)나라의 산동반도(山東半島)를 친일도 있었다. 처음에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에 도읍(都邑)하더니 후세(後世)에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로 옮기니 이는 길림성(吉林城) 영안현(寧安縣)에 있는 동경성(東京城)이라 하며 지금도 그때의 그 성(城)자리가 남아 있어서 그 주위(周圍)가 거의 사십리(四十里)나 된다.

이때의 강토(疆土)는 북(北)은 흑룡강(黑龍江)에 이르고 서(西)로 요해(遼海)에 미치고 남(南)은 대동강(大洞江)과 원산(元山) 등지(等地)로써 신라(新羅)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에 닿으니 중국(中國)사람들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稱)하였으며 발해(渤海)의 건국(建國)과 신라(新羅)의 통일기(統一期)가 거의 연대(年代)를 같이 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신라(新羅)를 남국(南國) 또는 남조(南朝)라 하고 발해(渤海)를 북국(北國) 또는 북조(北朝)라 하여 이 시대(時代)를 우리 나라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라고 한다.

발해(渤海)는 만주(滿洲)의 넓은 벌판을 차지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전통(傳統)을 물려받으며 성당(盛唐)의 문화(文化)를 받아들여서 산업(産業)과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발해(渤海)에는 부여족(扶餘族)과 말갈족(靺鞨族)이 합쳐서 나라를 세웠으되 어찌한 때문인지 신라(新羅)와는 교섭(交涉)이 거의 없었고 또 말갈족(靺鞨族)은 그 뒤에 오래 남아서 여진족(女眞族)이 되었으되 부여족(扶餘族)은 전연(全然) 만주(滿洲)에 남지 아니하였다.

 

해상발전(海上發展)

신라(新羅)는 북(北)쪽의 일면(一面)이 대륙(大陸)에 접(接)할뿐이오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려있는 반도국(半島國)이다. 국민(國民)들은 해상(海上)에서의 활동(活動)이 자못 활발(活潑)하여 수(數)많은 유학생(遊學生)과 상인(商人)들이 당(唐)나라에 내왕(來往)하였고 따라서 당(唐)나라의 해안(海岸)지방(地方)에는 신라(新羅)사람들이 교거(僑居)하는 신라방(新羅坊)이 처처(處處)에 생겼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통일(統一)이후(以後) 더욱 현저(顯著)하여 그 중(中)에서 한 예(例)를 들면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남(東南)에 있는 석성만(石城灣) 부근(附近)인 등주(登州) 문등현(文登縣) 청령향(淸寧鄕) 적산(赤山)은 신라(新羅)에서 당(唐)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그 곳에서 신라(新羅)사람들이 세운 법화원(法花院)이라는 사찰(寺刹)은 쌀 백석(百石)지기의 장전(庄田)이 있었으며 설법(說法)이 열릴 때에는 신라(新羅)사람들의 남녀 수백명(數百名)이 모였다. 당시(當時)는 일본(日本)사람들이 당(唐)나라에 내왕(來往)하는 것도 신라(新羅)사람들의 힘을 많이 빌렸으니 신문왕(神文王)때에는 당(唐)나라에 가는 일본(日本)사람들의 학생(學生)과 구법승(求法僧)이 많이 신라(新羅)의 배를 타고 다녔으며 경덕왕(景德王)때에는 일본(日本)에가는 당(唐)나라 사신(使臣)이 신라(新羅)의 배를 이용(利用)하였고 혜태왕(惠泰王)때에는 당(唐)나라에 가있는 일본(日本)사람들이 그 본국(本國)과의 통신(通信)을 신라(新羅)의 선편(船便)으로 하였다. 그러나 신라(新羅)의 말엽(末葉)에 이르러 국세(國勢)가 떨치지 못하고 때마침 당(唐)나라도 쇠약(衰弱)해지니 황해(黃海)위에 해적(海賊)이 들끓었고 이는 수백년(數百年)동안 평화(平和)롭게 계속(繼續)되던 양국(兩國)사이의 교통(交通)에 큰 위협(威脅)이 될뿐더러 심지어(甚至於)는 해적(海賊)의 떼가 신라(新羅)사람들을 잡아다가 노비(奴婢)로 팔아먹는 일까지도 있었다. 이때 당(唐)나라에 벼슬살이하던 장보고(張保皐)가 이러한 사실(事實)을 알고 신라(新羅)로 돌아와서 왕(王)에게 아뢰고 스스로 청해진(淸海鎭)(지금의 全羅南道 莞島)) 대사(大使)가되어 군사(軍士) 일만명(一萬名)으로 양해(兩海)의 길목을 지키는 동시(同時) 맹렬(猛烈)한 해상(海上)활동(活動)을 시작(始作)하여 황해(黃海)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掌握)하고 당(唐)나라와 일본(日本)에 무역(貿易)하여 다시금 신라(新羅)의 명성(名聲)이 천하(天下)에 떨쳤다. 그러나 신라(新羅) 조정(朝廷)의 왕위(王位) 다툼의 여파(餘波)가 여기까지 미쳐와서 장보고(張保皐)는 임금이 보낸 자객(刺客)에게 암살(暗殺)을 당(當)하고 빛나던 청해진(淸海鎭)의 막(幕)이 닫혔다.

 

신라(新羅)의 쇠망(衰亡)

신라(新羅)의 통일(統一)한 후(後)에는 통일(統一)하기 이전(以前)의 웅대(雄大)한 기백(氣魄)과 선미(善美)한 풍습(風習)이 점점(漸漸) 사라지기 시작(始作)하니 이것이 사라짐이 곳 쇠망(衰亡)할 전조(前兆)이다. 그 이유(理由)는

一.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왕위(王位)를 서로 현자(賢者)에게 사양(辭讓)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왕위(王位) 다툼이 그치지 아니하여 궁중(宮中)에 살벌(殺伐)과 유혈(流血)의 참극(慘劇)이 연달아 일어났다,

二.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정치(政治) 지도층(指導層)이 청백(淸白)하고 국사(國史)에 충성(忠誠)하여 민중(民衆)의 모범(模範)이 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귀족층(貴族層)이 부패(腐敗)하여 일야(밤낮) 왕유연(日夜 王遊宴)을 일삼고 경중(京中)에는 가무(歌舞)의 음악(音樂)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三. 統一以前에는 年幼한 임금이 거의 없더니 統一後에는 自己의 血統에게 富貴와 榮華를 주기 爲하여 幼兒에게 王位를 傳하여 王位爭奪의 端緖를 열었다.

四.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화랑(花郞)의 무리와 같은 소년(少年) 애국자(愛國者)가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爲)하여 일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국민(國民)이 모두 위정(爲政) 계급(階級)을 미워하여 다시 화랑정신(花郞精神)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卽位)한 후(後)로는 간신(奸臣)들이 권력(權力)을 잡고 정치(政治)를 어지럽혀서 백성(百姓)의 원성(怨聲)이 더욱 높아가고 또 흉년(凶年)이 겹 들어서 각지(各地)에 도적(盜賊)이 봉기(蜂起)하였다.

이때 양길(梁吉)이 북원(北原)에서 무리를 모아 가지고 궁예(弓裔)로 하여금 북방(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서 무리를 모으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을 위(爲)하여 원수(怨讐)를 갚는다하고 후백제(後百濟)라는 나라를 세우고 서남방(西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얼마 지난 후(後)에 궁예(弓裔)는 스스로 임금이 되어 송악(松嶽)군(郡)에 도읍(都邑)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옛 나라를 회복(恢復)한다하고 국호(國號)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니 이것은 모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의 유민(遺民)들이 그 조국(祖國)이 망(亡)한지 이미 수백년(數百年)에 아직도 조국(祖國) 광복(光復)의 뜻이 머리 속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을 이용(利用)하여 신라(新羅)에 반항(反抗)케 하고 그 세력(勢力)을 확장(擴張)하려 함이다. 궁예(弓裔)는 다시 철원(鐵原)으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마진(摩震)이라 하다가 또 태봉(泰封)이라고 했다. 견훤(甄萱)은 도읍(都邑)을 무주(武州)로 옮기고 중국(中國)의 여러 나라와 무역(貿易)하여 힘을 기르는 한편 차츰 동(東)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한동안 반도(半島) 안에는 삼국(三國)이 다시 벌어지니 이를 후삼국(後三國)이라 한다.

태봉(泰封) 왕(王) 궁예(弓裔)는 송악(松嶽)사람 왕건(王建)을 시켜서 해로(海路)로 나주(羅州)를 쳐서 빼앗고 후백제(後百濟)와 중국(中國)과의 교섭(交涉)하는 교통(交通)을 끊고 고유(固有)한 항해(航海) 세력(勢力)을 발휘(發揮)하여 서해(西海)의 해적(海賊)을 막으니 이때로부터 왕건(王建)의 명성(名聲)이 일국(一國)에 떨쳤으니 태봉(泰封)왕(王)의 성질(性質)이 포악(暴惡)함으로 부하(部下) 제장(諸將)이 왕(王)을 쫓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推戴)하여 임금을 삼으니 이가 곧 고려시조(高麗始祖)이다. (檀紀 三千二百五十一年)

 

 

태조(太祖)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

성종(成宗)

무인(戊寅)

갑진(甲辰)

병오(丙午)

경술(庚戌)

을해(乙亥)

임오(壬午)

26

2

4

26

6

16

목종(穆宗)

현종(顯宗)

덕종(德宗)

정종(靖宗)

문종(文宗)

순종(順宗)

무술(戊戌)

경술(庚戌)

임신(壬申)

을해(乙亥)

정해(丁亥)

 

12

22

3

12

37

반(半)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갑자(甲子)

을해(乙亥)

병자(丙子)

병술(丙戌)

계묘(癸卯)

정묘(丁卯)

11

1

10

17

24

24

명종(明宗)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

광종(光宗)

신묘(辛卯)

무오(戊午)

을축(乙丑)

임신(壬申)

갑술(甲戌)

경신(庚申)

27

7

7

2

46

15

충렬(忠烈)

충선왕(忠宣王

충숙왕(忠肅王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王

을해(乙亥)

을유(乙酉)

신미(辛未)

신미(辛未)

을유(乙酉)

을축(乙丑)

34

5

25

52

4

3

공민왕(恭愍王

우왕(禑王)

창왕(昌王)

공양왕(恭讓王

 

 

임진(壬辰)

을묘(乙卯)

 

기사(己巳)

 

 

23

4

반(半)

4

 

 

고려(高麗) 역대표(歷代表)

 

고려건국(高麗建國)

고려(高麗)태조(太祖)는 이듬해 송악(松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고 신라(新羅)와 친선(親善)을 도모(圖謀)하고 후백제(後百濟)를 제압(制壓)하려는 정책(政策)을 쓰니 신라(新羅)도 후백제(後百濟)에게 부대끼던 터임으로 고려(高麗)와 친(親)하려 하였다. 후백제(後百濟) 왕(王) 견훤(甄萱)은 이를 보고 비밀(秘密)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신라(新羅)에 쳐들어갔다.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은 마침 포석정(鮑石亭)에 나가서 유상곡수(流觴曲水)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후백제(後百濟)의 군사(軍士)를 만나 왕(王)과 왕비(王妃)와 대신(大臣)들이 모두 참혹(慘酷)한 변(變)을 당하였다. 견훤(甄萱)은 왕(王)을 해치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백성(百姓)을 포로(捕虜)하여 돌아가니 신라(新羅)왕(王)은 나아가 싸울 힘이 없고 들어와 지킬 힘이 없으므로 신하(臣下)들과 의논(議論)하고 고려(高麗)에 항복(降服)하려하니 태자(太子)가 통곡(慟哭)하면서 어찌 천년(千年) 조국(祖國)을 한번 싸우지도 아니하고 남에게 주리오 하나 왕(王)은 공연(空然)히 싸우기만 하면 불쌍한 백성(百姓)의 생명(生命)만을 없앤다 하고 항복(降服)하기로 결정(決定)하니 태자(太子)는 왕(王)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개골산(皆骨山)(금강산)에 들어가서 마의(麻衣)를 입고 일생(一生)을 마치니 이가 곧 마의태자(麻衣太子)이다. (檀紀 三千二百六十八年)

高麗가 新羅를 合倂하던 해에 後百濟에서도 變亂이 일어났다. 甄萱은 네째 아들 金剛을 사랑하여 이를 太子로 세우려 하였음으로 그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父王을 金山寺에 가두고 金剛을 죽인 後에 맏아들 神劍이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이에 甄萱은 憤함을 이기지 못하고 高麗로 亡命하여 신검(神劍)을 치기를 請하니 高麗太祖는 甄萱을 厚待하여 後百濟의 人心을 分散시키고 大軍을 거느리고 後百濟를 쳐서 滅하고 이에 半島를 統一하니 그 歷年數는 新羅는 五十六王 九百九十二年이오 後百濟는 二王 四十餘年이었다.

처음에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불교(佛敎)와 유교(儒敎)가 아울러 행(行)하여 불교(佛敎)에는 원효(元曉) 의상(義湘) 같은 명승(名僧)이 나고 원효(元曉)가 지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과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불교(佛敎)의 교리(敎理)에 새로운 진보(進步)를 가져오게 하였고 승(僧) 혜초(慧超)는 당(唐)나라에 건너갔다가 다시 길을 떠나 인도(印度)와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편답(遍踏)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팔(八) 세기(世紀) 무렵의 인도(印度) 사정(事情)을 전(傳)하는 유일(唯一)한 책(冊)으로 세계(世界)의 보배가 되어있고 또 혜초(慧超) 이외(以外)에도 신라(新羅)의 중으로써 인도(印度)를 찾아간 사람이 칠명(七名)이나 있다고 한다. 유교(儒敎)에는 설총(薛聰)이외(以外)에 김대문(金大問) 최치원(崔致遠) 같은 명유(名儒)가 났는데 김대문(金大問)은 국가학(國家學)을 연구(硏究)하여 극진(極盡)히 환대(歡待)하였고, 발해(渤海)의 옛 남경(南京)을 수복(收復)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러나 발해(渤海)가 망(亡)한 뒤로 만주(滿洲)의 대천지(大天地)는 다시 우리 민족(民族)의 땅이 되지 못하고 계단족(契丹族)과 여진족(女眞族)의 손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려(高麗)정치(政治)

고려(高麗)태조(太祖)의 정치(政治)는 신라(新羅)말엽(末葉)의 폐해(弊害)에 감(鑑)하여 여러 가지의 개혁(改革)과 독창(獨創)이 있었다.

一. 신라말(新羅末)에 토지제도(土地制度)가 문란(紊亂)하여 처음에 조세(租稅)는 토지수확량(土地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던 것을 十分之二三을 받은 까닭에 백성(百姓)의 생활(生活)이 곤란(困難)하고 도적(盜賊)이 많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었음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신라(新羅)의 정전제(丁田制)를 습용(襲用)하되 조세(租稅)는 十分之一로 정(定)하고 건국후(建國後) 三年동안은 전부(全部) 면세(免稅)하였다.

二.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당(唐)나라 문화(文化)가 들어옴으로부터 국민(國民)이 자주정신(自主精神)을 잃고 사대사상(事大思想)에 취(醉)하는 경향(傾向)이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음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중국(中國)과 아국(我國)은 인성(人性)이 각이(各異)하고 풍토(風土)가 부동(不同)하니 모든 제도(制度)와 문물(文物)은 반드시 중국(中國)과 동일(同一)히 할 필요(必要)가 없다하여 사대(事大)의 풍(風)을 경계(警戒)하였다.

三. 태조(太祖)는 동족(同族)인 발해(渤海)가 계단(契丹)에게 망(亡)한 뒤로 계단(契丹)을 무도(無道)한 나라라 하여 몹시 미워하고 계단(契丹)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화친(和親)할 것을 청(請)하되 듣지 아니하고 북방(北方) 경영(經營)에 전념(專念)하였다.

四. 종래(從來) 중국(中國)에는 연호제도(年號制度)가 있어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인 천자(天子)는 연호(年號)를 쓸 수 있으되 속국(屬國)은 쓸 수 없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가장 강성(强盛)하던 시대(時代)에는 우리 나라도 중국(中國)과 대등(對等)한 천자국(天子國)이라 하여 연호(年號)를 썼으니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영락(永樂),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의 건원(建元)같은 것이 그 것이다.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당(唐)나라에 부려(附麗)하여 당(唐)나라 연호(年號)를 쓰더니 태조(太祖) 건국후(建國後)에 우리 나라도 완전(完全)한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가라 하여 연호(年號)를 세워 천수(天授)라 하였다.

五. 삼국시대(三國時代)이전(以前)에는 유족(遺族)만 성(姓)이 있고 일반(一般) 서민(庶民)은 명(名)만 있고 성(姓)이 없더니 태조(太祖) 건국후(建國後)에 전국민(全國民)에게 일제(一齊)히 성(姓)을 영사(領賜)하고 오직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고려(高麗)에 반항(反抗)하는 자(者)에게 마(麻), 우(牛), 돈(豚), 상(象)등(等)의 수축명(獸畜名)을 사(賜)하여 일반(一般) 국민(國民)과 요연(暸然)하게 구별(區別)하였으니 후일(後日)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재상(宰相) 상진(尙震)은 상(象)성(姓)의 승격(昇格)이라 한다.

六. 태조(太祖)는 승(僧) 도선(道詵)을 선생(先生)으로 모시고 그의 말에 의(依)하여 각지(各地)에 사찰(寺刹)을 창건(創建)하고 관궐(官闕)을 지으니 도선(道詵)은 당승(唐僧) 일행(一行)의 풍수학설(風水學說)을 배워서 아국(我國) 풍수지리(風水地理)학(學)의 원조(元祖)가 된 자(者)로써 세인(世人)이 용자(龍子)라 칭(稱)하고 이때로부터 명당(明堂) 화복(禍福)의 사상(思想)이 국민(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 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高麗) 태조(太祖) 정치(政治)는 아국사상(我國史上) 중요(重要)한 일시기(一時期)를 획(劃)하였고 삼국(三國)통일후(統一後) 오랜 동안의 정치부패기(政治腐敗期)를 지낸 까닭에 종전(從前)의 농후(濃厚)한 풍속(風俗)은 많이 없어졌으나 고려태조(高麗太祖)의 모든 시책(施策)이 적의(適宜)함을 얻었으므로 국민(國民)의 기풍(氣風)이 진실(眞實)하여 국가(國家)에 전란(戰亂)이 있는 때에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집고 선진(先陣)에 나섰으며 관리(官吏)들이 그 지위(地位)를 자기보다 연장(年長)하고 또 현능(賢能)한 자(者)에게 사양(辭讓)하는 일이 있으니 태조(太祖)가 최응(崔凝)으로써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삼으니 응(凝)이 말하기를 신(臣)의 동료(同僚) 윤봉(尹逢)이 신(臣)보다 십년(十年)을 연장(年長)하니 청(請)컨대 먼저 제수(除授)하소서 하고 사양(辭讓)하니 태조(太祖)가 대희(大喜)하여 그 예양(禮讓)함을 칭찬(稱讚)한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사회계급(社會階級)

고려(高麗)는 신라(新羅)의 사직(社稷)을 물려받음과 함께 신라(新羅)의 귀족(貴族)들도 이를 받아드려서 왕대(王代)계통(系統)의 사람들과 함께 고려(高麗)의 특권계급(特權階級)을 이루었다. 그 후(後) 발해(渤海)가 망(亡)하여 그 왕족(王族) 귀족(貴族)이 많이 고려(高麗)에 들어와서 이에 합(合)치고 또 불교(佛敎)로써 국교(國敎)를 삼은 관계(關係)로 승려(僧侶)들도 이 계급(階級)에 참여(參與)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권계급(特權階級)밑에 서민계급(庶民階級)이 있어서 산업(産業)을 맡아보았으며 다시 밑으로 여러 가지의 천인(賤人) 계급(階級)이 있어서 그 중(中)에서도 공사(公私)노비(奴婢)의 노예계급(奴隸階級)은 온갖 학대(虐待)를 받고 한 낟 재물(財物)로서 매매(買賣)되는 풍습(風習)이 있었으며 또 그들의 자손(子孫)은 대대(代代)로 노예(奴隸)가 되는 것이다. 서민계급(庶民階級)이라 함은 농민(農民), 상인(商人), 공장(工匠), 병졸(兵卒) 등(等)으로서 그 중(中)에서도 농민(農民)은 가장 많이 생산(生産)노동(勞動)에 종사(從事)하고 또 부역(賦役)과 병역(兵役)을 맡아 하였다. 이들 중(中)에는 계단(契丹) 여진(女眞) 일본(日本) 등(等)의 귀화민(歸化民)이 많았다.

고려(高麗)의 계급제도(階級制度)는 대단히 엄격(嚴格)하여 인세(人世)의 호적(戶籍)을 고람(考覽)하여 천류(賤類)에 견연(牽連)이 있으면 그 사람을 관리(官吏)로 쓰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건국(建國) 초(初)에 공신(功臣)들은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노예(奴隸)를 삼으니 그들의 불평(不平)과 원망(怨望)이 적지 아니함으로 광종(光宗)은 노비안험법(奴婢按驗法)을 만들어서 노비(奴婢)의 문서(文書)를 새로이 심사(審査)하고 노비(奴婢)와 노주간(奴主間)의 시비(是非)를 재판(裁判)하여 억울(抑鬱)한 노비(奴婢)들은 해방(解放)시키더니 이번에는 노주(奴主)들이 불평(不平)이 일어나서 이미 속량(贖良)한 사람들은 노주(奴主)의 소청(所請)에 따라서 다시 노비(奴婢)를 만든 일도 있었다.

고려(高麗)는 불교(佛敎)와 함께 유교(儒敎)도 발달(發達)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유학(儒學)은 경서(經書)를 줄기로 하여 유학(儒學)의 근본사상(根本思想)을 공부(工夫)하는 일이 적고 과거(科擧)에 필요(必要)한 과목(科目)에 치중(置中)하는 경향(傾向)이 있었다. 과거법(科擧法)은 광종(光宗)때에 중국(中國)사람 쌍기(雙冀)가 귀화(歸化)하고 그의 건의(建議)를 따라서 비롯하였는데 이때의 과거(科擧) 삼(三)은, 일(一)은 진사과(進士科)이니 문예(文藝)를 주(主)로 하여 시험(試驗)함으로 제술과(製述科)라고도 하며, 이(二)는 명경과(明經科)이니 경의(經義)를 주(主)로 하여 시험(試驗)하며 삼(三)은 의복과(醫卜科)이니 의학(醫學) 천문(天文) 음양(陰陽) 지리(地理)를 시험(試驗)하더니 그 후(後)에 명법과(明法科) 진사(進士) 명경(明經)등(等)과(科)에 합격(合格)한 사람들은 귀족계급(貴族階級)에 참여(參與)하게되고 의복(醫卜) 법(法) 등과(等科)는 국가기관(國家機關)의 사무(事務)와 기술(技術)을 맡아보는 것이었다.

 

 

건설사업(建設事業)

一. 토지제도(土地制度)

토지제도(土地制度)는 태조(太祖)가 신라(新羅)의 구제(舊制)를 습용(襲用)할 것을 원칙(原則)으로 정(定)하고 만사 초창중(萬事 草創中)에 있어 그 세칙(細則)을 정(定)치 못하더니 오세(五世) 경종(景宗)때에 이르러 비로소 전국(全國)의 토지(土地)를 모두 공전(公田)으로 하고 균전제(均田制)에 의(依)하여 수전수전(授田收田)의 법(法)을 확립(確立)하였다. 그 법(法)은 조정(朝廷)의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부병한인(府兵閑人)(관리(官吏)에서 물러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신분(身分)과 직위(職位)에 따라서 농사(農事)지을 땅과 시초(柴草땔감)로 쓸 토지(土地)를 아울러 주니 이를 전시과(田柴科)라고 한다. 전시지(田柴地)는 자손(子孫)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오 그 받은 사람이 사망(死亡)하거나 퇴직(退職)하면 국가(國家)에 반환(返還)하는 것이 원칙(原則)이며 부병(府兵)은 이십(二十)세(歲)에 전(田)을 받고 육십세(六十歲)에 이르러 도로 바치는 법(法)이었다. 일반(一般) 전시과(田柴科)외(外)에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란 것이 있어서 국가(國家)에 공훈(功勳)을 세운 사람이나 또는 그 자손(子孫)에게 주어서 세습(世襲)으로 인정(認定)하였으며 또 그밖에 공해전(公廨田) (관청(官廳)의 경비(經費)를 쓰기 위(爲)한 것) 사원전(寺院田)(사원(寺院)의 경비(經費)를 위(爲)하여 주는 것) 내계전(內桂田)(왕실(王室)의 재원(財源)으로 쓰는 토지) 녹과전(祿科田)(관리(官吏)들의 생활(生活)을 돕기 위(爲)하여 주는 것)등(等)이 있었다.) 이리하여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하고 조권(租權)을 가지고 있어 토지(土地)의 매매(買賣)를 금(禁)하고 그 겸병(兼倂)의 폐(弊)를 방지(防止)하였다. 농민(農民)은 십육세(十六歲)가 되면 반드시 토지(土地)를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자손(子孫)이 출생(出生)하는 때 그 출생(出生)을 등록(登錄)하여야 그 지(地)를 받는 관계(關係)로 호적(戶籍)에 빠지는 사람이 없고 관리(官吏)가 죄(罪)를 지으면 면직(免職)이 되는 동시(同時)에 그 받은 바의 토지(土地)를 빼앗겨서 생활(生活)의 길이 끊어지게 됨으로 관리(官吏)들이 모두 일에 충실(充實)하고 청렴(淸廉)하였으니 이것이 고려(高麗)초기(初期) 국세(國勢)가 융성(隆盛)한 소이(所以)이다.

 

二. 성종(成宗)의 치적(治積)

육세(六世) 성종(成宗)에 이르러 고려(高麗)일대(一代)의 모든 제도(制度)가 비로소 완비(完備)되니 태조(太祖)가 삼국(三國) 통일후(統一後) 사십여년(四十餘年)의 오랜 세월(歲月)을 지나서 겨우 법전(法典)이 완성(完成)되고, 또 고구려(高句麗)의 고지(故地)를 수복(收復)할 북방(北方) 경영(經營)도 진보(進捗)되지 못함은 지지(遲遲)함이 없지 아니하나 이렇게 지지(遲遲)함은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부단(不斷)히 반항운동(反抗運動)을 일으켜서 국내(國內)가 안정(安定)치 못함으로 인(因)함이라고 볼 것이다.

성종(成宗)은 불교(佛敎)의 외(外)에 특(特)히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여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根本)을 삼고 외방(外方)의 우수(優秀)한 자제(子弟)를 뽑아 국자감(國子監)(지금의 대학(大學))에서 공부하게 하고 그 중(中)에서 뛰어난 자(者)를 골라서 다시 송(宋)나라에 유학(遊學)시켰다.

그리고 외방(外方)의 십이목(十二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 의학박사(醫學搏士)를 보내어 교육(敎育)과 의료(醫療)를 맡아보게 하였다.

또 경제정책(經濟政策)에 힘써서 농사(農事)철의 부역(賦役)을 금(禁)하고 병기(兵器)를 걷어서 농구(農具)를 만들어 농업(農業)을 장려(獎勵)하니 지금 우리 나라에서 쓰이는 풍장 같은 농악(農樂)이 이 시대(時代)에 처음으로 생긴 것이라 하며 면재법(免災法)을 마련(磨練)하여 재난(災難)을 입은 자(者)에게 세납(稅納)과 부역(賦役)을 감(減)하는 준례(準例)를 세우고 비황책(備荒策)으로 주(州)와 부(府)에 의창(義倉)을 두어 곡식(穀食)을 쌓고 양경(兩京)과 십이목(十二牧)에 상평창(常平倉)을 두어 곡식(穀食)과 포목(布木)을 저축(貯蓄)하였다가 농사(農事)의 형편(形便)을 따라서 물가(物價)가 높으면 상평창(常平倉)의 물품(物品)을 헐(歇)하게 방매(放賣)하여 물가(物價)를 내리게 하고 물가(物價)가 너무 떨어지면 상평창(常平倉)에서 비싸게 매입(買入)하여 물가(物價)의 조절(調節)을 도모(圖謀)하여 국민(國民)의 생활(生活)을 안정(安定)시켰다.

또 특이(特異)한 제도(制度)로 보(寶)라는 것이 있으니 보(寶)는 지금의 계(契)의 기원(起源)으로써 일정(一定)한 재단(財團)을 가지고 거기서 생기는 이식(利息)으로 목적(目的)하는 사업(事業)을 경영(經營)하는 것이니 폐난(弊難)에 빠진 사람들을 구휼(救恤)하기 위한 제위보(濟危寶), 교육(敎育)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학보(學寶) 같은 것이 그 것이오 이 기관(機關)은 한편으로는 사업(事業) 경영체(經營體)가 되고 한편으로는 서민금융(庶民金融) 기관(機關)이 되어 국민(國民)의 경제(經濟) 생활(生活)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 때의 물품(物品) 매매(買賣)에는 화폐(貨幣)를 쓰지 아니하고 마포(麻布)와 미곡(米穀)으로 화폐(貨幣)의 대신(代身)으로 썼다. 그러나 사회(社會)가 발달(發達)하고 인구(人口)가 늘어서 매매(買賣)는 점차(漸次) 많아지는데 마포(麻布)는 중량(重量)이 무겁고 습기(濕氣)와 연기(煙氣)에 품질(品質)이 상(傷)하기 쉽고 또 서모(鼠耗)도 적지 아니하여 큰 불편(不便)을 느끼게 되었다. 외국(外國)과의 통상무역(通商貿易)에는 포화(布貨) 이외(以外)에 지은(地銀)을 쓰고 일부(一部)에는 송전(宋錢)이 들어와서 유통(流通)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극(極)히 소수(小數)에 불과(不過)하였다.

이에 성종(成宗)은 비로소 동(銅)을 원료(原料)로 하여 전화(錢貨)를 만드니 이것이 아국(我國) 주전(鑄錢)의 시(始)이다. (檀紀 三千三百二十九年 成宗 十五年) 그러나 貨幣는 반드시 시장(市場)을 통(通)하여 유통(流通)되는 것이오 만일 시장(市場)이 없으면 그것으로써 생활(生活) 필수품(必需品)을 매득(買得)하기에 여간(如干) 불편(不便)이 아니라 이 시대(時代)는 시장(市場) 수(數)가 적고 또 민간(民間)에서 전화(錢貨)를 신용(信用)치 않는 관계(關係)로 널리 쓰이지 못하고 여전(如前)히 포화(布貨)로 쓰게 되었다.

 

계단(契丹)관계(關係)

이때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송(宋)나라가 있었고 만주(滿洲)에는 계단(契丹)이 있어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원래(原來) 아국(我國)은 만주(滿洲)의 배후(背後)에 있는 강국(强國)임으로 만주(滿洲)에 터를 잡고있는 나라가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다투고자하면 먼저 배후(背後)의 위험(危險)을 조정(調整)하지 아니하고는 중국(中國) 방면(方面)으로 전력(全力)할 수 없는 것임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로 중국(中國)방면(方面)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아국(我國)의 병(兵)을 받음이 통례(通例)이었다. 계단(契丹)이 발해(渤海)를 멸(滅)한 후(後)에 압록강(鴨綠江) 좌우(左右)의 지(地)에는 여진족(女眞族)이 살았음으로 계단(契丹)과 아국(我國)은 직접(直接) 부딪히는 일이 없고 또 송(宋)나라가 계단(契丹)을 칠 때에 아국(我國)에 원병(援兵)을 청(請)하였으되 아국(我國)에서는 섣불리 이에 응(應)하지 아니하였음으로 계단(契丹)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섭(關涉)이 없었다. 그러나 계단(契丹)은 어느 때든지 아국(我國)을 제압(制壓)치 아니할 수 없는 처지(處地)였음으로 성종(成宗) 십이년(十二年)에 (三千三百二十六年) 공연(空然)한 트집을 잡아 대군(大軍)을 보내어 북변(北邊)에 쳐들어 왔다.

이때 고려(高麗)는 삼한통일(三韓統一)후(後) 근(近) 육십년간(六十年間) 병혁(兵革)을 알지 못하여 인심(人心)이 해이한 터이라 계단(契丹) 병(兵)이 들어옴을 보고 정부(政府) 고관중(高官中)에는 북변(北邊)의 땅을 할양(割讓)하고 화친(和親)하자는 의론(議論)까지 있었다. 이때 서희(徐熙)는 할지론(割地論)을 크게 반대(反對)하여 말하되 우리 나라는 동방(東方)의 대국(大國)이오 또 계단(契丹)을 막을만한 힘도 있는데 땅을 버려서 화친(和親)함은 국가(國家)의 치욕(恥辱)이오 더욱이 고구려(高句麗)의 고지(故地)를 수복(收復)하려는 우리 나라로서 어찌 경솔(輕率)히 할지론(割地論)을 말하랴 일전(一戰)한 후(後)에 모든 일을 처리(處理)하여도 늦지 아니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나가 싸워서 적(敵)의 기세(氣勢)를 꺾어놓고 계단(契丹)장수(將帥) 소손령(蕭遜寧)을 찾아가서 저들이 까닭 없이 사단(事端)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침범(侵犯)함을 힐난(詰難)하였다. 소손령(蕭遜寧)은 고려(高麗)는 신라(新羅)를 물려받은 나라이니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은 전부(全部) 계단(契丹)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하였다. 서희(徐熙)는 우리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의 부흥(復興)임으로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한 것이니 땅의 경계(境界)를 말하면 계단(契丹)은 본시(本是) 고구려(高句麗) 땅이니 우리가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항변(抗辯)하였다. 소손령(蕭遜寧)은 그러면 고려(高麗)는 무슨 까닭으로 가까운 계단(契丹)과 사귀지 아니하고 멀리 송(宋)나라와 친(親)하냐 하니 이것은 우리 나라와 송(宋)나라의 관계(關係)를 끊고 자기(自己) 나라와는 친선(親善)하여 후고(後顧)의 걱정을 없애려는 심산(心算)이다. 서희(徐熙)는 우리도 계단(契丹)과 사귀고자하나 중간(中間)에 여진(女眞)의 땅이 가로 놓여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니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의 땅을 우리에게 달라하여 동의(同意)를 얻고 서로 화친(和親)을 맺고 계단군(契丹軍)이 물러간 뒤에 익년(翌年)부터 군사를 내어 곽주(郭州) 구주(龜州)등 여러 성(城)을 쌓으니 이것이 이른바 강동문성(江東文城)의 기초(基礎)가 된 것이다. 그러나 계단(契丹)은 이번 화친(和親)으로써 만족(滿足)치 아니하고 기회(機會)만 있으면 다시 고려(高麗)를 침범(侵犯)하려 하던 차(次)에 마침 고려(高麗)에 내란(內亂)이 있어서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해(害)하고 현종(顯宗)을 세우니 계단(契丹)이 강조(康兆)의 죄(罪)를 묻는다 빙자(憑藉)하고 삼십만(三十萬)의 군사(軍士)로 쳐들어 왔다. 이때 신하(臣下)들 중에 화친(和親)하자고 주장(主張)하는 자(者)가 있었으나 강감찬(姜邯贊)이 이를 반대(反對)하고 현종(顯宗) 왕(王)을 나주(羅州)로 피난(避難)하게 하고 양규(楊規)로 하여금 계단군(契丹軍)을 맞아 싸우니 계단군(契丹軍)은 약탈(掠奪)과 포학(暴虐)을 마음껏 하다가 마침내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우리 나라의 귀중(貴重)한 문헌(文獻)이 많이 불타버렸으니 우리 나라에도 옛날부터 고기삼한(古記三韓), 고기고구려(古記高句麗), 유기신라(留記新羅) 백제(百濟)의 사기(史記) 등(等) 사적(史籍)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모두 이와 같은 병화(兵火)에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삼국시(三國時) 이전(以前)의 일을 기록(記錄)한 사서(史書)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기타 중국(中國) 서적(書籍)에 산견(散見)하는 것뿐이다. 계단(契丹)은 고려(高麗)에 대(對)한 야심(野心)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 후 팔년(八年)만에 (顯宗 九年 檀紀 三千三百五十一年) 다시 앞서 쌓은 육성(六城)을 달라는 핑계로 십만(十萬)군(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이에 상원수(上元帥)가 산(山)골에 복병(伏兵)을 두어 계단군(契丹軍)을 무찌르고, 적병(敵兵)이 길을 피(避)하여 송도(松都)로 내려오는 것을 대동강(大洞江)에서 습격(襲擊)하여 적병(敵兵)을 만여명(萬餘名)을 죽이니 계단군(契丹軍)의 기세(氣勢)가 한목 꺾이었다. 이듬해 이월(二月)에 적군(敵軍)의 대부대(大部隊)가 구주(龜州)를 지나는 것을 강감찬(姜邯贊)이 동문(東門) 밖에서 맞아 싸워서 크게 깨트리고 도주(逃走)하는 적(敵)을 추격(追擊)하여 이를 섬멸(殲滅)하니 이후(以後)로 계단(契丹)은 다시 고려(高麗)를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었고 지금까지 우리 국민(國民)은 강감찬(姜邯贊)을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명장(名將)으로 병칭(竝稱)하고 있는 것이다.

만주(滿洲)에서 계단(契丹)의 세력(勢力)이 쇠약(衰弱)해지고 압록강(鴨綠江) 좌우(左右)에 있는 여진(女眞)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한 틈을 타서 고려(高麗)는 이남(以南)의 지(地)를 점차(漸次) 수복(收復)하고 덕종(德宗)은 유소(柳韶)를 시켜서 여진(女眞)을 방비(防備)하기 위(爲)한 성(城)을 쌓으니 압록강(鴨綠江) 어구(於口)인 의주(義州)군 광성면(光城面) 외동(外洞)으로부터 시작(始作)하여 함경남도(咸鏡南道) 정평군(定平郡)의 비백산(鼻白山)을 거쳐서 함주군(咸州郡) 都連逋에 이르기까지 무릇 千餘里이니 이것을 천리장성(千里長城)이라 하며 십이년(十二年)동안의 공력(功力)을 기우려 정종(靖宗) 십년(十年)에 완성(完成)하였다. (檀紀 三千三百二十四年)

成宗때에 地方으로 나누어 경기(京畿)의 외(外)에 관내도(關內道)-양주(楊州)- 광주(廣州)- 해주(海州)), 중원도(中原道)-충주(忠州)- 청주(淸州)), 하남도(河南道)-공주 등(等), 강남도(江南道)-전주(全州)등(等), 영남도(嶺南道)-상주(尙州)등(等), 산남도(山南道)-진주(晉州)등(等) 영동도(嶺東道)-경주(慶州)등(等), 해양도(海陽道)-나주(羅州) 승천(昇川)(順川) 삭방도(朔方道)-춘주(春州) 명주(溟州)등(等), 패서도(浿西道)-서경(西京)등(等)의 십도(十道)로 만들었으니 현종(顯宗)때에 이르러서 북변(北邊)이 아직 정(定)치 못하였음으로 다시 지방(地方)의 구획(區劃)을 고쳐서 경기(京畿)의 외(外)에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도(京畿道)의 일부(一部)와 충청남북도(忠淸南北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일부(一部)) 서해도(西海道)-(지금의 황해도(黃海道)의 오도(五道)를 두고 북변(北邊)에는 동계(東界)와 북계(北界)를 두니 동계(東界)는 또한 동북면(東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江原道) 북부(北部)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이오 북계(北界)는 또한 서북면(西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평안남북도(平安南北道)의 대부분(大部分)이다. 이와 같이 북변(北邊)을 서계(西界)로 정(定)한 것은 이 지방(地方)이 계단(契丹)및 여진(女眞)과 상접(相接)하는 땅이오 또 앞으로 북진(北進)하려는 계획(計劃)이 있기 때문에 잠정적(暫定的)으로 정(定)해 놓은 행정구역(行政區域)이다.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문화(文化)

고려(高麗) 건국(建國) 이후(以後)에 유교(儒敎)가 들어와서 관가(官家)에서 세운 교육기관(敎育機關)에 의(依)하여 상당(相當)한 발달(發達)을 이루고 이러한 관학(官學)외(外)에 사학(私學)이 있어서 한때 크게 떨치었고 학생(學生)들은 관학(官學)보다도 사학(私學)에 가기를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관학(官學)에서보다 사학(私學)에서 더 많이 인재(人才)가 났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황금시대(黃金時代)라고 칭(稱)하는 문종(文宗)때에는 유명(有名)한 사학(私學)이 십이개(十二個)나 있어서 거기서 공부(工夫)하는 학도(學徒)들은 십이문도(十二門徒)라하고 그 중(中)에서도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칭(稱)하는 최충(崔沖)의 문(門)이 가장 이름이 높고 당시(當時) 국가(國家)의 드러난 인물(人物)은 대개(大槪)가 이 최문(崔門) 출신(出身)이었고 최충(崔沖)의 시호(諡號)가 문헌공(文憲公)임으로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칭(稱) 하였다.

고려(高麗)는 불교(佛敎)로써 국교(國敎)를 삼고 정치제도(政治制度) 같은 것이 불법(佛法)에 인연(因緣)되지 아니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一般) 풍습(風習)에도 모두 불교(佛敎)의 정신(精神)이 들어 있었다.

고려사회(高麗社會)의 특수(特殊)한 풍습(風習)으로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있었으니 이는 국가제전(國家祭典)으로써 우리 나라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 널리 행(行)하여진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 등(等)의 풍속(風俗)이 불교(佛敎)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얼마쯤 변화(變化)하여진 것이다. 연등(燃燈)은 불(佛)을 섬기는 것이오 팔관(八關)은 천신(天神)을 비롯하여 자연신(自然神)을 섬기는 것이니 둘 다 등(燈)불을 찬란(燦爛)히 켜고 온갖 음식(飮食)을 베풀며 그 사이에 춤추고 노래하여 전국민(全國民)이 함께 즐기고 동시(同時)에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즐겁게 하여 풍년(豊年)이 들고 천하(天下)가 화평(和平)하기를 빌고 감사(感謝)하는 것이었다.

성종(成宗)때에는 승(僧) 삼십여명(三十餘名)을 송(宋)나라 항주(抗州)에 보내어 그 곳 영명사(永明寺) 지현선사(智賢禪師)에게 선종(禪宗)의 교리(敎理)를 배워 오고 그 외(外)에도 불법(佛法)을 닦으러 대륙(大陸)에 건너가는 승(僧)이 수(數)없이 많았다. 그 중(中)에서도 고려(高麗) 불교계(佛敎界)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대현국사(大賢國師) 의천(義天)이다.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써 십일세(十一歲)에 출가(出家)하여 승(僧)이 되고 후(後)에 송(宋)나라에 건너가서 불경(佛經) 천권(千卷)을 구(求)해 오고 또다시 송(宋)나라와 요(遼)나라(계단(契丹)와 일본(日本)에 사람을 보내어 사천권(四千卷)을 구(求)해와서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불경(佛經)을 박아내니 一千十部 四千七百四十卷이며 이를 흥왕사판(興王寺版) 대장경(大藏經) 또는 의천(義天)의 속장경(續藏經)이라 한다.

이보다 앞서 성종(成宗)때에 불법(佛法)의 힘으로 계단(契丹)의 군사(軍士)를 물리치려 하여 불경(佛經) 판각(版刻)을 시작(始作)하여 대장경(大藏經) 一千七十六部 五千四百八十卷을 박아내고 그 후(後) 文宗때에 빠진 佛經 일천권(一千卷)을 박아내고 여기에 興王寺版을 合치면 그 當時의 世界에서 가장 完備한 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國寶가 後日 蒙古亂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高宗이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노력(努力)으로 이를 새로 만드니 이것이 지금 경상도(慶尙道)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유명(有名)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불교(佛敎)가 퍼짐과 함께 거기에 따르는 미술공예(美術工藝)도 크게 발달(發達)하여 아국사상(我國史上) 미술공예(美術工藝)의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이루었고, 다만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인성(人性)이 혼후(渾厚)함으로 모든 제품(製品)이 웅대(雄大)한 기상(氣象)이 나타나고 있음에 비(比)하여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인성(人性)은 혼후(渾厚)한 풍(風)이 적고 오직 진실(眞實)하였음으로 모든 제품(製品)에 우아(優雅)한 맛은 유여(有餘)하나 웅대(雄大)한 기상(氣象)은 적다고 한다.

 

중기(中期)의 융성(隆盛)

문종(文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일백삼십여(一百三十餘)이오 외(外)로는 북변(北邊)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쌓인 후(後)에 국경(國境)에 큰 일이 없고 내(內)로는 문화(文化)가 발달(發達)하고 도로(道路)를 열어서 교통(交通)을 편리(便利)하게 하니 물론(勿論) 당시(當時)의 교통(交通)은 지금과 같이 어떠한 산곡태산(山谷泰山)이든지 우마차(牛馬車)가 통행(通行)할 수 있는 도로(道路)가 아니오 소위(所謂) 평지(平地)의 도로(道路)도 겨우 우마차(牛馬車)가 통행(通行)할 수 있음에 불과(不過)하고 산로(山路)에는 보행인(步行人)이나 태우마(駄牛馬)가 행(行)할 정도(程度)이니 지금 각지(各地)에 남아있는 구로(舊路) 폐로(廢路)가 곧 그 시대(時代)의 유물(遺物)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當時)에는 군사(軍士)가 행진(行陣)할 때에는 군사(軍士)들이 무거운 식량(食糧) 전구(戰具)같은 것을 지는 외(外)에 태우마(駄牛馬)의 열(列)이 천리(千里) 이천리(二千里)를 잇닿았다 한다. 성종(成宗) 이후(以後) 각(各) 주요(主要) 도로(道路)에 비로소 원(院)을 두어 행인(行人)의 숙소(宿所)로 쓰는 정책(政策)을 그대로 이어오고 산곡험산(山谷驗山)에도 대개(大槪) 도로(道路)를 만들어 종전(從前)에 비(比)하여 교통(交通)이 훨씬 편리(便利)하여졌다.

건국(建國) 초기(初期)로부터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항상(恒常) 반항(反抗)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음으로 문종(文宗)은 외방(外方)에서 반항(反抗)하는 사상(思想)이 있는 유력(有力)한 향리(鄕吏)의 자제(子弟)를 서울에 와서 머물게 하니 이것을 기인(其人)이라 하고 기인제(其人制)가 생긴 이후(以後)로 외방(外方)의 인심(人心)이 점차(漸次) 안정(安定)되고 이 기인제(其人制)는 후일(後日)의 경주인(京主人)의 근원(根源)이 된 것이다.

문종(文宗)의 세(世)는 고려(高麗) 일대(一代)를 통(通)하여 가장 좋은 태평(太平)시절(時節)을 이루었고 고려(高麗)도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왕위(王位) 계승(繼承)의 좋은 법(法)을 받아 유군(幼君)을 세우지 아니하고 왕위(王位)를 아들에게만 전(傳)함이 아니라 형제(兄弟) 상전(相傳)하는 뜻이 적지 아니하더니 선종(宣宗)이 그 아들 헌종(獻宗)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하니 헌종(獻宗)은 황구(黃口) 유아(幼兒)라 국정(國政)을 감임(堪任)할 능력(能力)이 없고 모든 행정권(行政權)이 그 신하(臣下)의 손에 의(依)하여 좌우(左右)되니 왕(王)의 숙부(叔父) 숙종(肅宗)이 정부(政府)를 전복(顚覆)하고 왕(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王)이 되니 이것은 이조(李朝)때의 단종(端宗) 사변(事變)과 같은 것이다.

화폐제도(貨幣制度)는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창설(創設)한 뒤로 잘 행(行)치 못하였고 대현국사(大賢國師) 의천(義天) 같은 이도 주전(鑄錢)의 실행(實行)을 주장(主張)하니 숙종(肅宗)이 왕(王)이 된 후(後)로 이 정책(政策)을 강력(强力)히 추진(推進)하여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전(鑄錢)을 만들어 주요(主要)도시(都市)에서 쓰게 하니 이때의 전면(錢面)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비롯하여 해동중보(海東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등(等)으로 쓰이었으며 또 一斤重의 銀으로 我國地形을 본뜬 甁을 만들어서 돈으로 쓰니 이 銀甁은 그 模樣을 좇아서 활구(濶口)라 하였으며 이 외(外)에도 쇄은(碎銀) 소은병(小銀甁) 같은 것도 쓰였다.

숙종(肅宗)이 화폐제도(貨幣制度)를 확립(確立)하려고 한 것은 당시(當時) 산업(産業)이 발달(發達)하여 국내(國內)에 물화(物化)의 유통(流通)이 많을 뿐만 아니라 외국무역(外國貿易)이 또한 늘어가는 까닭이었다. 이때 고려(高麗)는 대륙(大陸)세력(勢力)과 항상(恒常) 무력(武力) 교섭(交涉)을 가지고 있으되 한 편(便)으로 벽란(碧瀾예성강)나루를 통(通)하여 송(宋)나라와 흑수(黑水)(지금의 北滿州) 일본(日本) 유구(琉球)(오끼나와 부근) 섬라(暹羅)(타이랜드)등(等) 여러 나라와 또 멀리는 대식국(大食國)(중동지방)의 상인(商人)들과 평화(平和)로운 무역(貿易)을 계속(繼續)하였고 저쪽에서 들어오는 물건(物件)은 주(主)로 비단, 책(冊), 문방구(文房具), 약재(藥材), 향료(香料), 다(茶), 대모(玳瑁), 서각(犀角) 등(等)이며 이 쪽에서 나가는 것은 동(銅), 은(銀), 포목(布木), 인삼(人蔘), 우황(牛黃), 호피(虎皮), 지(紙), 화문석(花紋席), 나전(螺鈿), 자기(磁器) 등(等)이었다. 고려자기(高麗磁器)는 천하(天下)의 절품(絶品)으로서, 또 고려(高麗)의 견지(繭紙)는 고려(高麗) 특산품(特産品)으로써 당시(當時) 송(宋)나라에서 대환영(大歡迎)을 받았던 것이다.

서남해중(西南海中)에 있는 탐라(耽羅)는 지금의 제주도(濟州道)인데 고초(古初)에 형제(兄弟) 삼인(三人)이 석혈(石穴)중(中)에서 살더니 그 후(後)에 여자(女子)와 우조(牛鳥)와 각곡(各穀) 종자(種子)를 실은 배가 해변(海邊)에 와서 닿음으로 삼인(三人)이 여자(女子)를 분취(分娶)하고 성(姓)은 각각(各各) 고(高) 부(夫) 양(良)으로 정(定)하고 농사(農事)지으니 인구(人口)가 차차(次次) 늘어가서 한 독립국가(獨立國家)가 되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비로소 백제(百濟)와 통(通)하였다. 신라(新羅)통일(統一) 후(後)로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한 속국(屬國)으로 조공(朝貢)하고 있더니 숙종(肅宗)은 이를 내지(內地)와 동일(同一)하게 만들고 고려(高麗)의 정치(政治)를 펴기 위(爲)하여 국호(國號)를 폐(廢)하고 군(郡)을 만드니 이때로부터 탐라(耽羅)는 국가(國家)에서 보내는 관리(官吏)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성(人性)이 강한(强悍)하고 종전(從前)의 왕자(王子) 계통(系統)이 지방(地方)의 세력(勢力)을 가지고 있어 국가(國家)에 대(對)하여 반란(反亂)이 자주 일어났다.

고려(高麗)초기(初期)로부터 국가(國家)의 운명(運命)을 예언(豫言)한 소위(所謂) 비결(秘訣)이 유행(流行)하였는데 그 비결(秘訣)에 목(木)자(子)가 득국(得國)하여 한양(漢陽)에 도(都)한다는 말이 있었음으로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자(者)가 음모(陰謀)를 꾸미는 일이 종종(種種)있었다. 숙종(肅宗)은 한양(漢陽)(지금의 서울)에 이본(李本)을 많이 심고 장성(長成)함을 기다려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작벌(斫伐)케 하여 이씨(李氏)의 왕기(王氣)를 제압(制壓)한다고 한 일까지 있었으니 고려(高麗)의 정치(政治)는 비결(秘訣)의 힘의 작용(作用)이 적지 아니하였고 이 비결(秘訣)은 이조(李朝)의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것으로서 당시(當時) 고려(高麗)의 민간(民間)에도 비결(秘訣)의 힘의 영향(影響)이 가장 컸던 것이다.

 

여진(女眞)관계(關係)

여진(女眞)은 처음에 발해국(渤海國)을 구성(構成)한 말갈(靺鞨)의 일족(一族)이라 발해(渤海)가 계단(契丹)에게 망(亡)한 뒤에 여진족(女眞族)이 남만주(南滿州) 방면(方面)에 거주(居住)하는 자(者)는 계단(契丹)에게 귀화(歸化)하여 숙여진(熟女眞)이 되고 백두산(白頭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북만주(北滿州)와 옥저(沃沮)고지(故地)에 거주(居住)하는 자(者)는 항상(恒常) 계단(契丹)에 반항(反抗)하였음으로 이를 생여진(生女眞)이라 한다. 우리 나라와 인접(隣接)하고 있는 여진족(女眞族)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으로서 무역(貿易)과 침략(侵略)을 되풀이하였으나 고려(高麗)를 두려워하는 기색(氣色)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합이빈(哈爾濱)(하얼빈) 부근(附近)의 완안(完顔) 부(部)에 오아속(烏雅束)이 나서 그 세력(勢力)이 무척 늘어서 이웃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合)치고 그 힘이 우리 나라 국경(國境)에까지 미치니 오아속(烏雅束)의 선세(先世)는 고려(高麗) 동북면(東北面)의 화주(和州)(지금의 영흥(永興)사람 김모(金某)임으로 그들은 고려(高麗)를 부모지국(父母之國)이라 肅宗 九年 正月에 咸州(지금의 咸興)의 女眞 부락部落을 통합(統合)한 오아속烏雅束의 부하(部下)는 국경(國境)을 넘어서 정평(定平)에 들어왔다. 이에 고려(高麗)에서는 임간(林幹)을 보내어 치다가 실패(失敗)하고 다시 윤관(尹瓘)을 대신(代身) 보내었으나 또한 공(功)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적(敵)을 유화(宥和)하여 돌려보내었다. 그러나 윤관(尹瓘)은 이 싸움에서 여진(女眞)이 어찌하여 강(强)한가를 알았다. 그것은 고려(高麗)의 보병(步兵)에 대(對)하여 적(敵)은 모두 기병(騎兵)이어서 처음부터 대적(對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윤관(尹瓘)은 이에 신기대(神騎隊)라는 기병대(騎兵隊)를 만들어서 맹렬(猛烈)한 훈련(訓練)을 시켰다. 그러던 중(中) 숙종(肅宗)이 승하(昇遐)하면서 유언(遺言)으로 지금의 여진(女眞)의 세력(勢力)을 꺾지 아니하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으리라 하여 여진(女眞)을 치기를 부탁(付託)하였다.

숙종(肅宗) 이년(二年)에 (기원 삼천사백사십년) 여진(女眞)이 다시 국경(國境)을 침범(侵犯)함으로 윤관(尹瓘)이 십칠만(十七萬)의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장성(長城)을 넘어 가서 적(敵)의 소굴(巢窟) 일백(一百) 삼십여소(三十餘所)를 무찌르고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함주(咸州), 공험진(公嶮鎭), 의주(宜州), 통태(通泰), 평융(平戎)의 구성(九城)을 쌓으니 이것이 유명(有名)한 동북면(東北面) 구성(九城)이다.

구성(九城)의 땅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 확실(確實)히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혹(或)은 공험진(公嶮鎭)을 지금의 북간도(北間島)의 땅이라 하고, 혹(或)은 길주(吉州)를 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 길주(吉州)라 하여 마치 구성(九城)의 땅이 두만강(豆滿江)의 좌우(左右)에 까지 미침과 같이 말하는 일도 있으나 당시(當時) 전쟁(戰爭)한 일수(日數)와 거리(距離) 등(等)으로 생각하여 보면 지금의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북부(北部) 해안(海岸)지방(地方)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 해로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여진(女眞)은 고려(高麗)에 원수(怨讐)를 갚고 구성(九城)을 회복(恢復)하려하여 쉴 사이 없이 반격(反擊)을 되풀이하고 또 완안(完顔)부(部)가 수만명(數萬名)으로서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등(等)을 차례로 포위(包圍)하였으나 성공(成功)치 못하였다. 이때 여진(女眞)은 구성(九城) 등지(等地)에서 쫓겨나간 부락(部落)이 안주(安住)할 곳을 잃어서 몹시 피로(疲勞)하고 고려(高麗)도 또한 구성(九城)의 땅이 험(驗)하여 지키기 어렵고 또 거리(距離)가 멀어서 모든 군수물(軍需物)을 수송(輸送)하기 어려워서 국력(國力)이 피폐(疲弊)하였다. 이에 여진(女眞)은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구성(九城)을 반환(返還)하여 달라고 애원(哀願)하여 왈(曰) 만일 구성(九城)을 돌려주면 이후(以後)로는 영원(永遠)히 고려(高麗)를 부모(父母)의 나라로 섬기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조공(朝貢)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맹서(盟誓)하고 돌 자갈 하나라도 지경(地境)을 넘어서 던지지 아니 하겠다고 굳게 다짐함으로 고려(高麗)는 그들의 소원(所願)을 들어주기로 하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여진(女眞) 면장(面長)들로 하여금 함주성(咸州城) 밖에 단(壇)을 모으고 하늘에 맹서(盟誓)케 한 다음 구성(九城)으로부터 차례로 물러나니 이로써 여러 해 동안 애써 이루어진 동북면(東北面)의 계획(計劃)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반환(返還)은 효과(效果)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니 후일(後日) 고려(高麗)와 여진(女眞)과의 교섭(交涉)에 큰 영향(影響)을 끼쳐서 오랫동안 불안(不安)하던 동북면(東北面)의 국경(國境)이 이로부터는 평정(平靜)하여졌고 오아속(烏雅束)의 아들 아골타(阿骨打)가 여진국(女眞國)을 크게 만들어 국호(國號)를 금(金)이라 하고 계단(契丹) 즉(卽) 요(遼)나라를 멸(滅)하고 다시 중국(中國)에 쳐들어가서 송(宋)나라를 양자강(楊子江) 남(南)쪽으로 몰아내서 동양(東洋) 천지(天地)를 뒤흔들었건만 고려(高麗)에 대(對)하여는 항상(恒常) 우호(友好)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택리지(擇里志)라는 글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만주(滿洲)에서 일어난 국가(國家)는 대강(大江)과 대야(大野)를 가지고 있어 그 기풍(氣風)이 웅대(雄大)함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는 능(能)히 중국대륙(中國大陸)과 자웅(雌雄)을 다투었고 발해(渤海) 유족(遺族)인 금(金)나라는 능(能)히 중국(中國)에 들어가서 제왕(帝王)노릇을 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에 국척(局蹐, 跼蹐)하고 있는 국가(國家)는 천리(千里)의 강(江)과 백리(百里)의 야(野)가 없기 때문에 겨우 그 봉역(封域)을 근수(僅守)할 뿐이라는 뜻을 썼는데 지리(地理)와 국민(國民)기풍(氣風)의 관계(關係)가 있고 없는 것은 별문제(別問題)로 하고 어쨌든 우리 민족(民族)이 만주(滿洲)를 잃은 후(後)에 그 세력(勢力)이 갑자기 미약(微弱)하여진 것은 사실(事實)이다.

 

계생(繼生)하는 반란(叛亂)

숙종(肅宗)의 아들 인종(仁宗)은 나이 어리고 그 외조부(外祖父) 이자겸(李資謙)이 권력(權力)을 잡고 스스로 높은 벼슬에 나아가서 국사(國事)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구성(九城) 싸움에 나가서 공(功)을 세우고 돌아온 척준경(拓俊京)을 심복(心腹)으로 부려서 온갖 포학(暴虐)한 일을 다 하였다. 그는 자기(自己)에게 반대(反對)하는 사람을 모조리 방축(放逐)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고자 하여 왕(王)을 죽이려 하니 이것은 목(木) 자(子) 득국(得國) 비결(秘訣)에 인(因)함이라 그러나 자겸(資謙)은 마침내 패(敗)하고 말았다. 이 난리(亂離)에 궁궐(宮闕)이 불타 버리고 서울이 쓸쓸하게 됨에 승(僧) 묘청(妙淸)과 시인(詩人) 정지상(鄭知常) 등(等)을 중심(中心)으로 서경(西京)에 도(都)를 옮기고 임금을 황제(皇帝)라 일컫고 연호(年號)를 세우자는 의견(意見)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정(朝廷)에서는 그 의견(意見)을 반대(反對)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묘청(妙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경(西京)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부개(夫開)라 하니, 인종(仁宗)은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그 이듬해에 평정(平定)하였다.

묘청(妙淸)의 난(亂)에 대(對)하여 옛날 사서(史書)에는 묘청(妙淸)으로써 망탄(妄誕)한 사람이라 하고 그 난(亂)을 일으킨 것은 정권(政權) 다툼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러 학자(學者)들은 묘청(妙淸)으로써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항(對抗)하는 혁명가(革命家)라 하여 시비(是非)가 정(定)치 못하고 있다. 당시(當時)의 시세(時勢)를 보건대 조정(朝廷) 안에는 중국(中國)을 조국(祖國)처럼 여기는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思想)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니 정치가(政治家)중(中)에는 거기에 불만(不滿)을 품은 자(者) 적지 아니하였고 묘청(妙淸)도 그 중(中)의 일인(一人)이었다. 이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혁파(革破)를 주장(主張)함에는 그것을 주장(主張)할만한 인물(人物)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나 묘청(妙淸)은 사실(事實)로 망탄(妄誕)한 사람이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써 왕(王)의 마음을 이끌고 정지상(鄭知常)이 또한 음양설(陰陽說)로써 거기에 부동(附同)하였으며 서경(西京)에 도읍(都邑)을 옮기려 함은 서경(西京)에 묘청(妙淸)의 세력(勢力)이 이미 부식(扶植)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묘청(妙淸)이 진심(眞心)으로 국가(國家)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爲)하는 정인(正人) 지사(志士)가 아니오 다만 세력(勢力) 다툼을 위(爲)한 술책(術策)에 불과(不過)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高麗)는 태조(太祖) 이래(以來)로 우문정책(右文政策)을 쓰고 무인(武人)을 낮추어보게 되어서 무인(武人)들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더니 의종(毅宗)때에 이르러 왕(王)은 본시(本是) 기질(氣質)이 나약(懦弱)하여 근시(近侍)와 문신(文臣)들만을 가까이하고 그들이 또한 왕(王)의 사랑을 믿고 방자(放恣)한 일이 많아서 무신(武臣)들의 감정(感情)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이러한 무신(武臣)들의 불평(不平)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정중부(鄭仲夫) 등(等)이 난(亂)을 일으켜 근시(近侍)와 문신(文臣)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집을 헐어버리고 왕(王)을 몰아내고 왕(王)의 아우를 세우니 이가 명종(明宗)이다. 이 난리(亂離)가 경인년(庚寅年)에 제일차(第一次)로 일어나고 계사년(癸巳年)에 재차(再次) 일어났음으로 이를 경계지란(庚癸之亂)이라 한다. 정중부(鄭仲夫)는 나라의 권세(權勢)를 한 손에 잡고 조정(朝廷)의 중요(重要)한 벼슬에서 외방(外方)의 소임(所任)에 이르기까지 전부(全部) 무신(武臣)이 맡아보게 되었다.

문신(文臣)의 세상(世上)은 비록 무력(無力)하나마 전통(傳統)과 권위(權威)를 세우고 그를 중심(中心)으로 하여금 움직여 나갔지만 무인(武人)의 세상(世上)은 그러한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힘으로 움직였다. 정중부(鄭仲夫)는 권세(權勢)를 잡은지 십년(十年)만에 경대승(慶大升)에게 죽고 대승(大升)은 다행(多幸)이 천명(天命)을 마쳤으나 그때 서울 안 도적(盜賊)은 모두 무신(武臣)의 부하(部下)라고 할 만치 백성(百姓)들의 원성(怨聲)이 적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後)에 장군(將軍) 이의민(李義旼)이 권세(權勢)를 잡고 갖은 포학(暴虐)을 다하여 목(木)자(子) 득국(得國)의 비결(秘訣)을 이용(利用)하여 반역(叛逆)을 도모(圖謀)하더니 최충헌(崔忠獻)이 의민(義旼)을 죽이고 그의 삼족(三族)과 종들까지도 모조리 잡아죽이니 국가(國家)의 모든 권세(權勢)가 충헌(忠獻)에게 돌아갔다. 충헌(忠獻)은 명종(明宗)을 가두고 그 아우를 세우니 이가 신종(神宗)이다. 충헌(忠獻)은 사병(私兵)을 길러서 자기(自己)를 수호(守護)케 하니 그 세력(勢力)이 관군(官軍)보다 억세고 나라의 정치(政治)를 자기 집 도방(都房)에 앉아서 처결(處決)하니 이것을 도방정치(都房政治)라하고 도방정치(都房政治)가 생긴 후(後)로 조정(朝廷)은 빈집이 되고 관군(官軍)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아니하고 그가 권세(權勢)를 잡은 이십사년(二十四年)간(間)에 두 임금을 내치고 내 임금을 세우니 유약(柔弱)한 왕(王)들이 또한 충헌(忠獻)의 비위(脾胃)를 맞추는 수밖에 다른 도리(道理)가 없었다.

무신(武臣)의 난리(亂離)를 거쳐서 그들의 발호(跋扈)로 유족사회(遺族社會)의 묵은 전통(傳統)이 무너지고 사회(社會)가 힘으로 움직이게 되자 이때까지 하층(下層)에서 눌려 살던 농민(農民)과 노예(奴隸)계급(階級)이 자주 반란(叛亂)을 일으켰다. 그 중(中)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건(事件)으로는 명종(明宗)때에 공주(公州)에서 일어난 망이(亡伊)의 난(亂)과 청도(淸道)에서 일어난 김사미(金沙彌)의 난(亂)과 신종(神宗)때에 동경(東京경주)에서 일어난 김순(金順)의 난(亂)과 울진(蔚珍)에서 일어난 김위(金偉)의 난(亂) 같은 것이며 노예(奴隸)의 반란(叛亂)으로는 신종(神宗)때에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사건(事件)과 같은 것은 주목(注目)할 현상(現象)이니 만적(萬積)은 관사(官私) 노비(奴婢) 수천(數千)명을 송도(松都)의 뒷산에 모아 놓고 최충헌(崔忠獻) 이하(以下) 자기네들의 상전(上典)을 각각 죽이고 노비(奴婢) 문서(文書)를 불사라서 노비를 모두 해방(解放)하여 삼한(三韓)에 천인(賤人) 계급(階級)을 없이하고 또 장상(將相)이 본시(本是) 종(種)이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도 장상(將相)이 될 수 있다하고 일을 꾸미다가 중도(中途)에 발각(發覺)되어 거사(擧事)치 못하고 모두 잡혀 죽었다.

 

몽고란(蒙古亂)

최충헌(崔忠獻)이 권세(權勢)를 잡은 후(後)에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판국(版局)이 벌어졌다. 몽고(蒙古)는 본시(本是) 외몽고(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유목(遊牧)하는 부족(部族)이러니 성길사한(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사방(四方)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쳐서 큰 세력(勢力)을 이루니 이는 최충헌(崔忠獻)이 한창 세도(勢道)를 부리던 희종(熙宗)때 일이다. 금(金)나라가 몽고(蒙古)의 힘에 눌림에 계단(契丹)의 귀족(貴族)들이 요동(遼東)에서 일어나고 금(金)의 반장(叛將) 포선만노(蒲鮮萬奴)는 지금의 간도(間道)지방(地方)을 근거지(根據地)로 하여 동진국(東眞國)을 세웠다. 그 후(後) 고종(高宗)때에 이르러 요동(遼東)의 계단족(契丹族)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우리 나라 지경(地境) 안으로 밀려들어와서 약탈(掠奪)을 함부로 행(行)하였다. 고려(高麗)는 군사(軍士)를 보내어 각지(各地)에서 계단병(契丹兵)과 싸우는 중(中)에 또 몽고(蒙古)가 동진(東眞)과 연합(聯合)하여 계단병(契丹兵)을 치기 위(爲)하여 그 뒤를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니 국내(國內)에 사국군대(四國軍隊)가 어울려서 형세(形勢)가 극(極)히 험악(險惡)하고 또 급박(急迫)하였다. 더욱이 고려(高麗)와 몽고(蒙古)는 종래(從來)로 외교관계(外交關係)가 전연(全然)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인성(人性)이 강한(强悍)함으로 국내인심(國內人心)이 흉흉(恟恟)하였다.

이때 계단병(契丹兵)은 앞으로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막히고 뒤로 몽진연합군(蒙眞聯合軍)에게 쫓기어 서북면(西北面)의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서 지키니 몽고(蒙古)장(將) 합진(哈眞)과 동진장(東眞將) 완안자연(完顔子淵)이 그 뒤를 따라 강동성(江東城)을 포위(包圍)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형세(形勢)가 심(甚)히 위구(危懼)함을 보고 전략(戰略)과 외교(外交)에 능숙(能熟)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여 조충(趙冲)을 원수(元帥)로 하고 김취려(金就礪)를 부원수(副元帥)로 하여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몽진군(蒙眞軍)의 영(營)에 가서 크게 주연(酒宴)을 베풀고 두 장수(將帥)를 접대(接待)하였다. 두 장수(將帥)는 우리 나라 두 원수(元帥)의 인격(人格)이 매우 높음을 보고 모앙(慕仰)함을 마지아니하였다. 완안자연(完顔子淵)은 아인(我人)에게 말하되 고려(高麗)의 조원수(趙元帥)는 기위(奇偉)한 사람이라 국가(國家)가 이러한 장수(將帥)를 둔 것은 천(天)의 사(賜)함이라 하고 합진(哈眞)은 김취려(金就礪)를 보고 말하되 내가 일직 육국(六國)을 정벌(征伐)하여 귀인(貴人)을 만남이 많으되 형(兄)의 얼굴을 보니 어찌 그렇게 기위(奇偉)한고 하여 칭찬(稱讚)하였다. 이에 세나라 군사(軍士)는 강동성(江東城)을 쳐서 계단병(契丹兵)을 전멸(全滅)시킨 뒤 몽진(蒙塵)과 화호(和好)를 맺고 무사(無事)히 돌려보냈었다. 이 난(亂)에 귀항(歸降)한 자(者)가 말했는데 이들은 산림지대(山林地帶)와 황무지(荒蕪地)에 이주(移住)시켜 농사(農事)짓게 하니 이를 계단장(契丹場)이라 하고 계단장(契丹場)에 들어간 자(者)들 중(中)에는 농사(農事)짓기 싫어하고 사냥과 피혁(皮革) 유기(柳器) 등(等) 수공업(手工業)으로 전업(轉業)하는 자(者)가 많았으니 이것이 대개(大槪) 후일(後日)의 소위(所謂) 소백정(白丁) 고리백정(白丁)등(等)이 된 것이다.

만주(滿洲) 지방(地方)에서는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밀려나와서 동진국(東眞國)은 얼마후(後)에 망(亡)하고 몽고(蒙古)는 고려(高麗)를 구원(救援)하였다. 고종(高宗) 십이년(十二年)에 몽고(蒙古)의 사신(使臣)이 고려(高麗)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도적(盜賊)을 만나 죽은 일이 있음으로 몽고(蒙古)에서는 이것을 트집잡아 가지고 국교(國交)가 점점(漸漸) 험악(險惡)하더니 마침내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에 제일차(第一次)로 고려(高麗)에 쳐들어 왔다. 원래(原來) 만몽(滿蒙) 지방(地方)에 뿌리를 잡은 국가(國家)들은,

一. 해양(海洋)을 가지지 못해서 해외(海外)로 발전(發展)할 길이 없고 二. 기후(氣候)가 추워서 잠포(蠶布) 등(等) 의복(衣服) 자료(資料)가 생산(生産)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몽고(蒙古)가 처음으로부터 고려(高麗)를 빼앗을 욕심(慾心)을 가지는 것도 이 해양(海洋)과 의복(衣服) 자료(資料)를 얻기 위(爲)함이오 계단병(契丹兵)이 뒤를 쫓아 나온 것도 고려(高麗)에 발을 부칠 구실(口實)을 얻으려 함이오 다시 고려(高麗)에 쳐들어 온 것도 자기들이 처음부터 욕심(慾心)내던 일을 달성(達成)하기 위(爲)함이다.

금후(今後)에 있어서도 몽고(蒙古)방면(方面)에 입(立)하는 나라는 해안(海岸)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가장 거리(距離)가 가까운 동해(東海)로 진출(進出)하려 할 것이오 더욱이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아국(我國) 해안(海岸)에 착목(着目)할 것은 물론(勿論)이다. 몽고군(蒙古軍)이 쳐들어오면서 구주성(龜州城)을 포위(包圍)하니 이때 구주(龜州)를 지키던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 등(等)이 여러 날 동안 몽고군(蒙古軍)과 싸워서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몽고장(蒙古將) 한 사람이 탄복(歎服)하여 왈(曰) 내가 종군(從軍)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성(城)이 이와 같이 공격(攻擊)을 받고 굴(屈)치 않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 성중(城中) 제장(諸將)들은 후일(後日) 반드시 장상(將相)이 되리로다 하였다.

그러나 고려(高麗)는 마침내 몽고군(蒙古軍)을 대적(對敵)치 못하여 그 이듬해 삼군(三軍)이 몽고군(蒙古軍)에게 굴복(屈服)하기에 이르렀다. 몽고(蒙古)에서는 달로화적(達魯花赤)(다루가치)라는 관리(官吏) 칠십이인(七十二人)을 보내와서 고려(高麗)의 내정(內政)을 간섭(干涉)하였다. 이에 고려(高麗) 조정(朝廷)은 몽고(蒙古)와 항쟁(抗爭)하려하여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가 당시(當時) 정권(政權)을 잡고 있는지라 왕(王)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니 (단기 삼천오백육십오년) 이는 몽고군(蒙古軍)이 육지(陸地)에서는 강(强)하나 수군(水軍)이 없어서 바다에서는 힘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삼십년(三十年)동안 몽고(蒙古)의 군사(軍士)가 강화도(江華島)의 맞은편(便)에 와서 아무리 위협(威脅)을 하고 출륙(出陸)하기를 계속(繼續)하여도 최우(崔瑀)는 응(應)하지 아니하니 그 분(忿)풀이를 육지(陸地)에서 마음껏 하여 전후(前後)육차(六次)나 그들의 사나운 발굽이 압록강(鴨綠江) 이쪽을 짓밟아서 서북면(西北面)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이 견디지 못하여 아주 마을이 비게 되었으며 적군(敵軍)은 멀리 경주(慶州)까지 쳐들어와서 학살(虐殺)과 노략(擄掠)을 마음대로 하였다.

대구(大邱) 부인사(符仁寺)에 있는 대장경(大藏經)판(版)과 경주(慶州) 황룡사(皇龍寺)의 구층석탑(九層石塔)이 불타 버린 것도 이 때이며 그들이 제육차(第六次)로 들어 왔을 때는 고려(高麗)사람을 잡아 간 것이 이십만명(二十萬名)을 넘고 죽은 사람의 수(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고려(高麗)에서는 대장경(大藏經)이 불타버린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고종왕(高宗王)은 다시 발원(發願)하여 십육년(十六年)동안의 노력(努力)으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판(版)을 새기고 이 대장경(大藏經)을 새겨 내기에 하도 힘들어서 더 간편(簡便)한 방법(方法)을 생각해 낸 것이 활자(活字)이다.

고종(高宗) 이십일년(二十一年) (삼천육백육십칠년)에 이미 주자(鑄字)로써 책(冊)을 박아내니 이는 독일(獨逸)사람들이 서양(西洋)에서 처음으로 활자(活字)를 만들어서 책(冊)을 박아낸 것보다 이백년(二百年)이나 앞섰다. 활자(活字)는 문명(文明)의 모(母)라는 말이 있거니와 세계(世界)에서 가장 먼저 활자(活字)를 발명(發明)한 고려(高麗)는 역시(亦是) 문화(文化)의 선진국(先進國)이었다.

송(宋)나라 임금이 일부러 사신(使臣)을 보내와서 귀중(貴重)한 책(冊)을 빌려달라 하고 일본(日本)이 항상(恒常) 남양(南洋)의 진기(珍奇)한 물건(物件)을 가지고 와서 그 값으로 특(特)히 대장경(大藏經)을 나눠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高麗)가 당시(當時)의 동양(東洋)에서 문화적(文化的)으로 얼마나 높은 수준(水準)을 지니었던가를 알 수 있고 이러한 문화(文化) 속에서 맺어진 열매가 활자(活字)이었다.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간 뒤 최씨(崔氏)는 정권(政權)을 오로지 하여 사병(私兵)인 삼별초군(三別抄軍)으로써 스스로 수비(守備)하여 육지(陸地)에 나가 싸운 일이 없고 오직 육지군대(陸地軍隊)에 대(對)하여 항전(抗戰)을 명령(命令)할 뿐이며 서남안지방(西南岸地方)으로부터 수로(水路)로 식량(食糧)과 기타(其他) 물자(物資)를 운수(運輸)해다 안락(安樂)한 생활(生活)을 계속(繼續)하였다.

고종(高宗) 사십오년(四十五年)에 최씨(崔氏)와 삼별초군(三別抄軍)사이에 틈이 생김을 이용(利用)하여 삼별초(三別抄)를 시켜서 최씨(崔氏)를 멸(滅)하니 최씨(崔氏)는 四世 六十餘年만에 亡하고 王이 直接 政治를 맡아보게 됨에 마침내 몽고(蒙古)에 굴복(屈服)하고 왕자(王子)를 보내어 화친(和親)하기를 청(請)하니 원(元)나라(몽고(蒙古)) 세조(世祖) 홀필열(忽必烈)이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 왈(曰) 고려(高麗)는 만리(萬里)의 나라이라 당태종(唐太宗)이 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왕자(王子)가 오니 이는 하늘이 시킴이라 하고 후(厚)히 접대(接待)하고 군사(軍士)로 호위(扈衛)시켜서 본국(本國)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동안에 고종(高宗)이 승하(昇遐)하고 왕자(王子)가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가 원종(元宗)이다. 원종(元宗)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겨우 끝나고 그 뒤를 정리(整理)하는 가장 복잡(複雜)한 때라 첫째로 삼십년(三十年)동안 도읍(都邑)하던 임시수도(臨時首都) 강화도(江華島)로부터 송경(松京)에 환도(還都)한 것이오 둘째로 환도(還都)한 뒤 삼별초(三別抄)가 반란(叛亂)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내려가서 관군(官軍)과 싸우다가 패(敗)하여 다시 제주도(濟州道)에 들어가더니 마침내 관군(官軍)에게 망(亡)하였다.

이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에 대(對)하여 지금의 어떤 학자(學者)는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으로써 몽고(蒙古)에 항전(抗戰)하는 의거(義擧)라 하여 찬양(讚揚)하고 있으나 삼별초(三別抄)는 원래(元來) 최씨(崔氏)의 수족(手足)으로써 몽고란(蒙古亂)중 가장 안락(安樂)한 도중(島中)생활(生活)을 하고 항적(抗敵)의 진(陣)에 참가(參加)한 일이 없고 최씨(崔氏)가 망한 뒤에 여전(如前)히 강화도(江華島)에 있어 육지(陸地)에 나와 싸운 일이 없었으니 이것을 항전파(抗戰派)라고 부를 수 없음은 물론(勿論)이오 환도후(還都後)에 그 조직(組織)을 고쳐서 관군(官軍)으로 개편(改編)하려하매 그들은 과거(過去)의 특수(特殊)존재(存在)로서의 특권(特權)이 상실(喪失)됨에 불만(不滿)을 품고 반란(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로 동북면(東北面)의 쌍역(雙域)에 있는 관리(官吏)들이 본국(本國)을 배반(背叛)하고 화주(和州 永興) 이북(以北)의 땅으로써 원(元)나라에 부속(附屬)한 것이다. 이로부터 원(元)나라가 고려(高麗)의 종주국(宗主國)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가 일본(日本)을 칠 터이니 고려(高麗)도 힘을 합(合)하라 하여 충렬왕(忠烈王)이 임금이 되던 해에 (단기 삼천육백칠년) 고려(高麗)에서 만든 전함(戰艦) 구백척(九百隻)으로 합포(合浦)(지금의 마산부근)를 떠나서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를 무찌르고 구주(九州)의 박다(博多)를 점령(占領)하였으나 폭풍우(暴風雨)가 일어나서 전함(戰艦)이 많이 파손(破損)되었음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그 후(後) 칠년(七年)만에 다시 몽고군(蒙古軍)과 중국(中國)의 강남군(江南軍)과 고려군(高麗軍)이 연합(聯合)하여 일본(日本)을 치러 갔으나 이번에도 대풍(大風)이 일어나서 강남군(江南軍)이 거의 전멸(全滅)하고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에 중국(中國)의 전함(戰艦)은 대개(大槪) 파손(破損)되었으나 고려(高麗) 전함(戰艦)의 파손(破損) 된 것이 극(極)히 적은 것은 백제시대(百濟時代) 이래(以來) 아국(我國)의 조선기술(造船技術)이 우수(優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려(高麗)는 백여년(百餘年)동안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는 사이에 나라 정치(政治)는 전(專)혀 원(元)나라의 의사(意思)에 의하여 행(行)하여졌다. 충렬왕(忠烈王)이후(以後)로는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의 공주(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원(元)나라 임금의 사위가 되고 그 공주(公主)가 낳은 아들이 왕위(王位)에 오르게되니 고려(高麗)왕실(王室)은 혈통적(血統的)으로도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게 되었고 임금의 시호(諡號)는 종전(從前)의 종자(宗字)를 폐(廢)하고 그 머리에 충자(忠字)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 대도(大都)에 별저(別邸)를 두고 거기 내왕(來往)이 잦으니 그 비용(費用)도 적지 아니하여 국가(國家)재정(財政)이 극(極)히 곤란(困難)하였지만 정치(政治)의 명령계통(命令系統)이 헝클어져서 본국(本國)에서 발(發)한 명령(命令)이 원(元)나라 대도(大都)로부터 저지(沮止) 당(當)하는 일도 있고 원(元)나라에 아부(阿附)하여 권세(權勢)를 얻으려 하여 본국(本國)을 무함(誣陷)하는 폐주견(吠主犬)들이 양국(兩國)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면서 정부(政府)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정령(政令)을 발(發)하는 일도 있어 나라 기강(紀綱)이 여지(餘地)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폐주견(吠主犬)들은 심지어(甚至於) 본국(本國)의 국호(國號)를 폐(廢)하고 원(元)나라의 일지방(一地方)으로 만들자는 운동(運動)까지 일어나니 충선왕(忠宣王)은 체읍(涕泣)하면서 사백년(四百年)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이 나의 몸에 이르러 떨어지게 되니 어찌 통심(痛心)한 일이 아니랴하고 이제현(李濟賢) 등(等)으로 더불어 원(元)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겨우 무사(無事)함을 얻은 일도 있었다.

이때 왕실(王室)로부터 민간(民間)에 이르기까지 원(元)나라 풍습(風習)이 흘러 들어오고 한편(便)으로는 문화(文化)의 수입(輸入)도 활발(活潑)하여 안향(安珦)이 孔子의 도상(圖像)과 유교의식(儒敎儀式)을 중국(中國)으로부터 직접(直接) 가져 온 것도 이때의 일이오 충선왕(忠宣王)은 원(元)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이루고 조맹부(趙孟頫)등(等) 대학자(大學者)들과 사귀어 한때 대륙(大陸)문화(文化)의 중심(中心)이 되었다.

 

정치(政治)의 문란(紊亂)

고려(高麗)는 농업(農業)으로써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삼았음으로 토지생산(土地生産)은 국민생활(國民生活)의 기초(基礎)가 되고 국가재정(國家財政)의 지주(支柱)가 되고 호구(戶口)의 정비(整備) 군사(軍士)의 징발(徵發) 등(等)이 모두 토지(土地)의 수수제도(授受制度)로부터 출발(出發)하였으니 국가(國家)의 흥폐(興廢), 정치(政治)의 선부(善否)가 모두 토지제도(土地制度)의 여하(如何)에 달려 있었다. 몽고란(蒙古亂) 이후(以後)로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헝클어짐을 따라 가장 먼저 폐해(弊害)를 생(生)한 것이 토지제도(土地制度)였다.

처음에 관리(官吏)의 봉급(俸給)으로써 농민(農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의 수조권(收租權)을 준 것은 다만 현물(現物) 운반(運搬)의 불편(不便)을 덜기 위(爲)한 방편(方便)에 불과(不過)한 것이오 그 관리(官吏)에게 토지(土地)를 준 것은 아니오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관리(官吏)와 농민(農民)과의 사이에 신분적(身分的)으로 노주관계(奴主關係)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토지(土地) 생산물(生産物)의 십분일(十分一)을 관리(官吏)에게 주면서도 부역(賦役)이나 호세(戶稅)는 국가(國家)에 바친 것이니 이것은 다른 나라의 봉건사회(封建社會)의 농노제(農奴制)와는 그 성질(性質)이 전연(全然) 다르다.

그런데 국가(國家)의 질서(秩序)가 한번 헝클어지자 권신(權臣) 귀족(貴族) 토호(土豪)들은 그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농민(農民)에 대(對)하여 국가(國家)의 호구장(戶口帳)에서 삭거(削去)하고 국가(國家)에 바쳐야 할 부역(賦役)과 호세(戶稅)를 자기(自己)가 사취(私取)하니 국가(國家)의 공민(公民)의 수(數)는 날로 줄어들고 이 까닭에 호적(戶籍)이 헝클어지고 또 토지수수법(土地授受法)이 제대로 실행(實行)되지 못함으로 인(因)하여 병역(兵役)을 부담(負擔)할 장정(壯丁)의 수(數)도 알 수 없이 되었다.

한편(便)으로 간인(奸人)의 무리가 함부로 농간(弄奸)을 하여 일찍 관리(官吏)가 병정(兵丁)을 들어간 일이 없이 전시과(田柴科)의 토지를 도적(盜賊)해 먹으며 아비는 공전(公田)을 사사(私私)로이 아들에게 세습(世襲)시키고 아들은 이를 은익(隱匿)하여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니 고려(高麗) 토지(土地) 一百七十餘萬結 中에서 國家의 土地帳에 남아있는 土地가 七八十萬結 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 農民 한 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에 대하여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있다고 자칭(自稱)하는 자가 六七人에 달(達)하는 일도 있어 어느 사람이 국가(國家)에서 인정(認定)한 수조권(收租權)자인지 알 수 없고 이 까닭에 농민(農民)이 지은 일년(一年) 농사(農事)는 모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전수(公田數)가 줄어들고 국가(國家)에 들어가는 전조(田租)가 또한 중간(中間)에서 횡령(橫領)되어 국가재정(國家財政)은 말할 수 없이 군색(窘塞)하였고 혹(或) 현상(賢相)이 들어 있어 이 폐해(弊害)를 그치려하되 반근착절(盤根錯節)한 권신(權臣)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농민(農民)들은 하루바삐 정국(政局)에 대변동(大變動)이 생겨서 새로운 정치(政治)가 나오기를 갈망(渴望)하였다.

세상(世上)일이 이와 같이되니 관리(官吏)의 부패(腐敗)는 극도(極度)에 달(達)하여 민재(民財)를 빼앗아 먹기를 항다반사(恒茶飯事)로 하니 이때의 사관(史官)들은 이를 평(評)하여 말하되 응견(鷹犬)을 치토(雉兎)의 장(場)에 방(放)함과 같다고 하였다.

고려(高麗)문화(文化)에 중심(中心)이 되고 있는 불교(佛敎)에도 폐해(弊害)가 생(生)하여 승려(僧侶)들은 특권(特權)을 믿고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마음대로 하고 사찰(寺刹)에서 음범(淫犯)을 행(行)하는 일도 적지 아니하여 정계(政界)와 함께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불만(不滿)을 가진 유신중(儒臣中)에는 불교(佛敎)를 배척(排斥)하는 소리가 점점(漸漸) 높아지고 유교(儒敎) 장려(獎勵)의 선진(先陣)에 나선자(者)가 안향(安珦)이다. 안향(安珦)은 中國으로 부터 孔子圖像과 유교(儒敎)의 모든 의식(儀式)을 전(傳)해오고 또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 즉(卽) 성리학(性理學)을 가져와서 후진(後進)을 가르치니 이것이 우리 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이 뿌리를 뻗은 시초(始初)이오 이어서 이색(李穡)(호(號) 목은(牧隱)) 정몽주(鄭夢周)(호(號) 포은(圃隱)) 같은 대유(大儒)를 생(生)하니 당시(當時) 정몽주(鄭夢周)는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조(祖)라 칭(稱)하였고 이 연원(淵源)이 이조(李朝)에 흘러 내려가서 성리학(性理學)의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룬 것이다.

 

 

외국(外國)관계(關係)

원(元)나라가 아세아(亞細亞) 대륙(大陸)에 대제국(大帝國)을 건설(建設)한지 八九十年에 차츰 그 힘이 기우러져서 사방(四方)에 도적(盜賊)이 일어나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는 형편(形便)이라 공민왕(恭愍王)은 세자(世子)때에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이러한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이 기회(機會)에 원(元)나라 세력(勢力)을 물리치기로 하고 왕(王)의 오년(五年)(단기 삼육팔구년)에 원(元)나라에서 고려(高麗)에 설치(設置)하여둔 정동행자(征東行者)를 파(罷)하고 전일(前日)에 원(元)나라에게 빼앗긴 동북면(東北面)의 땅과 나아가서는 요동(遼東) 등지(等地)를 도로 찾으려하여 인당(印璫)으로 하여금 압록강(鴨綠江)저편(便)의 팔참(八站)을 치고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동북면(東北面)의 쌍성(雙城) 이북(以北)을 수복(收復)하게 하니 이것은 오랜 동안 북방(北方) 민족(民族)에게 눌려서 피어나지 못하던 대고구려주의(大高句麗主義)가 다시 한번 광채(光彩)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때에 원(元)나라의 홍두적(紅頭賊)이란 도적(盜賊)의 무리 십여만명(十餘萬名)이 우리 나라에 근거(根據)를 잡으려 하여 쳐들어 왔다. 고려(高麗)로서는 뜻밖의 일이오 도적(盜賊)의 기세(氣勢)는 매우 사나웠음으로 왕(王)은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등지(等地)로 피난(避難)하니 적(賊)이 송경(松京)을 함락(陷落)시켜서 궁궐(宮闕)과 모든 재보(財寶) 문헌(文獻)이 탕진(蕩盡)하였다. 수일(數日)후(後)에 정세운(鄭世雲)이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등(等) 삼원수(三元帥)로 더불어 겨우 쳐서 파(破)하니 적(敵)의 태평(太平)은 죽고 나머지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달아났다.

왕(王)은 기어(期於)코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려하여 이성계(李成桂)등(等)으로 하여금 요양성(遼陽城)을 쳐서 떨어뜨리고 遼東의 官民에게 榜을 내 걸어 우리의 目的은 한때 잃어버린 고지(故地)를 찾으려 함에 있다하고 타일렀다. 이는 물론(勿論) 요하(遼河)까지가 본시(本是) 우리의 지경(地境)임을 말함이겠지만 이때 형편(形便)으로도 원(元) 나라가 고려(高麗)를 누르고 국경(國境)을 南으로 뻗은 반면(反面)에 백성(百姓)들은 이 분명(分明)치 않은 지경(地境)을 믿어서 전(前)날 보다도 더 북(北)쪽으로 나갔음으로 요동(遼東) 평야(平野)에 고려(高麗)사람이 많이 살아서 요양(遼陽)에 고려군민총독부(高麗軍民總督府)가 생기더니 이때 마침 고려(高麗)의 국정(國情)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그 때문에 대륙정책(大陸政策)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나라는 북(北)으로 만주대륙(滿洲大陸)과 접(接)하고 동(東)으로 일(一) 해협(海峽)을 격(隔)하여 일본(日本)과 이웃하고 있음으로 외교관계(外交關係)와 국방(國防)관계(關係)는 항상(恒常)이 두 방면(方面)에서 생겼다.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왜구(倭寇)는 고려(高麗)를 멸망(滅亡)케 한 일인(一因)이 된 대사건(大事件)이라 원래(元來) 왜구(倭寇)는 일본(日本)사람의 해적(海賊)떼로서 고려(高麗) 중엽(中葉)부터 고려(高麗)와 송(宋)나라의 해안지방(海岸地方)을 노략(擄掠)질 하여 대대(代代)로 내려오면서 약탈(掠奪) 강도(强盜)로 업(業)을 삼는 무리들이었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이르러 왜구(倭寇)가 더욱 심(甚)하여 해안지방(海岸地方)은 물론(勿論)이오 차츰 육지(陸地)로 들어오고 또 남방(南方)을 휩쓴 뒤에 북(北)으로 뻗어서 경기도(京畿道)의 강화(江華) 풍덕(豊德)같은 서울의 지척(咫尺)에까지 미쳤다.

해안지방(海岸地方) 사람들은 안도(安堵)하고 살 수 없음으로 깊이 육지(陸地)로 들어가고 양전옥답(良田沃畓)에 갈대가 무성(茂盛)하니 우리 나라에서 가장 곡식(穀食)이 많이 나는 토지(土地)는 주(主)로 연해안(沿海岸)에 있는데 해안지방(海岸地方)에 농민(農民)이 살지 못하고 모든 토지(土地)가 황무(荒蕪)로 화(化)한 까닭에 국내(國內)의 식량(食糧)이 부족(不足)하고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이 또한 군색(窘塞)하였다.

이와 같이 왜구(倭寇)가 삼십여년(三十餘年)을 계속(繼續)하는 동안에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여러 차례로 왜구(倭寇)를 대파(大破)한 일이 있고 최무선(崔茂宣)이 원(元)나라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製造)하는 방법(方法)을 배워 아국(我國) 최초(最初)의 화기(火器)를 만들어서 전라도(全羅道) 진포(鎭浦)에서 왜구(倭寇)의 배 삼백척(三百隻)을 단번(單番)에 무찌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왜구(倭寇)의 기세(氣勢)는 좀처럼 줄어들지 아니하고 우왕(禑王)때에는 왕도(王都)를 깊은 육지(陸地)로 옮기자는 議論도 일어나고 정몽주(鄭夢周)를 일본(日本)에 보내어 왜구(倭寇)를 금(禁)해 달라고 청(請)한 일도 있었으며 임진강(臨津江) 어구(於口)로부터 남안(南岸)을 거쳐 멀리 동해안(東海岸)의 함주(咸州) 해안(海岸)에 이르기까지 연장(延長) 四千里의 땅이 모두 왜구(倭寇)의 난무(亂舞)장(場)이 되었고 어떤 곳에는 연작(鷰雀)이 임목(林木)에 귀소(歸巢)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왜구중(倭寇中)에는 일본(日本) 해적(海賊)만 있는 것이 아니오 고려(高麗)사람으로서 지방관리(地方官吏)에게 불만(不滿)을 품은 자(者)와 생활(生活)이 곤난(困難)한 자(者)가 왜구(倭寇)노릇을 하는 가(假) 왜구(倭寇)도 적지 아니하여 방비(防備)가 허소(虛疎)한 곳에는 반드시 왜구(倭寇)가 출몰(出沒)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왜구(倭寇)의 대부대(大部隊)가 전라도(全羅道) 운봉(雲峰)으로 모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부하장(部下將) 동두란(佟豆蘭)과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황산(荒山) 서북(西北)에서 크게 싸워서 왜구(倭寇)의 아지발도(阿只拔都) 대장(大將)을 죽이고 그 무리를 쳐 없애니 이로부터 왜구(倭寇)의 기세(氣勢)가 꺾이어서 다시 전일(前日)과 같이 횡행(橫行)하지 못하였고 이성계(李成桂)가 개선(凱旋)하는 대로(大路)변(變)에는 백성(百姓)들이 모여 나와서 환영(歡迎)하고 최영(崔瑩)은 이성계(李成桂)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공(功)을 칭사(稱謝)하니 이에 이성계(李成桂)의 위망(威望)이 일세(一世)를 덮어서 후일(後日) 혁명(革命)의 기지(基地)를 이룬 것이다.

 

고려(高麗)의 멸망(滅亡)

공민왕(恭愍王) 말년(末年)에 원(元)나라가 북(北)으로 쫓겨가고 명(明)나라가 중원(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단기 삼천칠백일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대륙(大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두 가지 의견(意見)이 대립(對立)되었다. 최영(崔瑩)은 오래 동안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원(元)나라와 명(明)나라의 현(現) 세력(勢力)이 아직 정(定)해진 것이 아니니 우리는 원(元)나라와 사귀고 명(明)나라를 누르면서 이 기회(機會)에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여 국세(國勢)를 다시 한번 떨쳐보자 하고 이성계(李成桂)는 명(明)나라가 이미 중원(中原)을 차지하였으니 우리는 천하(天下)의 대세(大勢)에 어김없이 원(元)나라에 대(對)하던 태도(態度)로써 명(明)나라를 대(對)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主張)하니 이것이 소위(所謂)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와의 대립(對立)이다. 그러던 차(次)에 명(明)나라는 차츰 요동(遼東)을 평정(平定)하고 우왕(禑王) 십사년(十四年)에 이르러서는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 장차(將次) 압록강(鴨綠江)이쪽의 땅을 빼앗으려 하니 최영(崔瑩)이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하여 명(明)나라를 치기로 결정(決定)하니 이성계(李成桂)는 여러 번 왕(王)에게 글을 올려 반대(反對)하였다.

최영(崔瑩)은 조금도 북벌(北伐)계획(計劃)을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王)과 함께 서경(西京)으로 나가서 조민수(曹敏修)와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군사(軍士) 오만(五萬)을 거느리고 가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이성계(李成桂)에게 대군(大軍)을 주어서 그 계획(計劃)을 실현(實現)하려 한 것이 최영(崔瑩)의 일대실책(一大失策)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서 위화도(威化島) (을혜섬)에 머무는 차에 조민수(曹敏修)를 달래어 장마철에 많은 군사(軍士)가 강(江)을 건너가기 어렵고 또 명(明)나라는 새로 일어나서 그 강대(强大)한 기세(氣勢)를 대적(對敵)하기가 쉽지 아니하니 여기서 회군(回軍)하는 것이 옳다하고 풍우(風雨)같이 서경(西京)을 향(向)하여 행진(行進)하니 이것은 분명(分明)히 왕명(王命)을 거역(拒逆)하는 일이라 군사중(軍士中)에서는 벌써 목(木)자(子) 득국(得國)이라는 요언(謠言)이 성행(盛行)하고 최영(崔瑩)은 왕(王)과 함께 형세(形勢)가 이미 틀리고 이성계(李成桂)의 손에 잡혀 죽으니 국인(國人)이 최영(崔瑩)의 죽음을 듣고 도하(都下)가 모두 철시(撤市)하여 조(弔)하고 원근(遠近)의 남녀노소(男女老少) 없이 모두 서로 붙들고 울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의 아들을 세우니 이가 창왕(昌王)이다. 이로부터 이성계(李成桂)가 권세(權勢)를 한 손에 잡고 안으로는 그의 반대파(反對派)를 몰아내고 밖으로는 명(明)나라와 친(親)하여 고려(高麗)의 운명(運命)은 이미 조석(朝夕)으로 보전(保全)하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 공민왕(恭愍王)때에 승(僧) 신돈(辛旽)을 써서 국정(國政)을 맡겼다가 실정(失政)을 보고 신돈(辛旽)을 죽였는데 우왕(禑王)은 혹(或)은 공민왕(恭愍王)의 아들이라 하고 혹(或)은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왕실(王室)을 중심(中心)으로 기괴(奇怪)한 풍설(風說)이 크게 유행(流行)하니 우왕(禑王)을 왕대(王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왕대(王代) 조정(朝廷)을 지지(支持)하려는 사람이오 신대(辛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이성계(李成桂)를 중심(中心)으로 한 혁명파(革命派)이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을 신대(辛代)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그 아들 창왕(昌王) 또한 신대(辛代)의 혈통(血統)이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왕대(王代)중에서 가장 암약(暗弱)한 공양왕(恭讓王)을 세우니 이때로부터는 이미 이성계(李成桂)의 천하(天下)가 되고 만 것이다.

고려(高麗)의 전제(田制)는 문란(紊亂)할대로 문란(紊亂)하여 이를 사무적(事務的)으로 바로잡을 수 는 없었다. 이에 조준(趙浚) 등(等)이 사전(私田) 개혁(改革)을 주장(主張)하여 훈신(勳臣) 귀족(貴族)들의 맹렬(猛烈)한 반대(反對)가 있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이 이를 지지(支持)하여 고려(高麗)가 망(亡)하기 전(前)해인 공양왕(恭讓王) 삼년(三年)에 옛날의 과전제(科田制)를 부활(復活)하는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斷行)하고 사전(私田) 문권(文券)을 서울의 한 복판에 쌓아 놓고 만민(萬民) 환시중(環視中)에 불살라 버리니 이로써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은 농민(農民)들의 환영(歡迎)을 받고, 한편(便) 묵은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을 무너뜨리어 세력(勢力)은 더욱 커지고 또 국가(國家)의 재원(財源)을 넉넉하게 하여 이씨조선(李氏朝鮮) 건국(建國)의 경제적(經濟的) 기초(基礎)를 삼았다.

우리 나라 의복(衣服) 자료(資料)는 마포(麻布)가 가장 주(主)되고 그밖에 중국(中國)으로부터 수입(輸入)되는 면포(綿布) 등(等)이 있고 농촌(農村)의 세민층(細民層)은 구피(狗皮)를 입는 자(者)도 적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중(中) 공민왕(恭愍王)때에 문익점(文益漸)이 중국(中國)에 갔다가 교지(交趾베트남)로부터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가져오는데 이때 원(元)나라에서는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외국(外國)에 보내는 것을 엄금(嚴禁)하고 있었음으로 문익점(文益漸)은 필관(筆管)속에 비밀(秘密)히 넣어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우리 나라 면화(棉花) 재배(栽培)의 시초(始初)이며 고려(高麗)가 망(亡)할 무렵에 전국(全國)에 퍼져서 우리 나라 의복계(衣服界)에 일(一) 신기원(新紀元)을 그었던 것이다.

고려(高麗)의 왕실(王室)을 지켜가고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을 눌러 보려고 하는 사람들 중(中)에 그 중심(中心) 인물(人物)은 정몽주(鄭夢周)였다. 그러나 정몽주(鄭夢周)는 일개(一個) 문신(文臣)이라 아무 무력적(武力的) 실력(實力)이 없더니 공양왕(恭讓王) 사년(四年)에 이성계(李成桂)가 해주(海州)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상(傷)하였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이를 기회(機會)로 이성계(李成桂)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송경(松京)에 돌아오고 그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자객(刺客) 조영규(趙英珪)를 보내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鄭夢周)를 처 죽였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고려(高麗)의 운명(運命)도 이와 함께 다 하였다. 그해 칠월(七月)에 이성계(李成桂)는 공양왕(恭讓王)을 폐(廢)하여 원주(原州)로 내치고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이태조(李太祖)이오 (단기 삼천칠백이십오년) 임신(壬申) 고려는 삼십사왕(三十四王) 四百七十五年으로 끝마쳤다.

高麗時代는 三國時代의 무용(武勇)의 유풍(遺風)이 있어 능(能)히 계단(契丹) 몽고(蒙古) 홍건적(紅巾賊) 왜구(倭寇)와 같은 대적(大敵)을 막아 싸우니 당시(當時)의 유물(遺物)로서 건축(建築)에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조각(彫刻)에 은진(恩津)의 미륵불(彌勒佛) 등(等)은 미술(美術)로도 유명(有名)하거니와 그 굳세고 힘찬 모습은 그때 사람의 기질(氣質)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엽(末葉)에 이르러 종래(從來)에 국난(國難)이 있을 때는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진(陣)의 선두(先頭)에 나서던 진실(眞實)한 풍(風)이 없어지고 세력(勢力)이 있는 자(者)들이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하는 풍(風)이 생(生)하니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에 유학(儒學)을 배우는 학생(學生)들이 우리는 공자묘(孔子廟)를 지키는 유생(儒生)들이니 전쟁(戰爭)에 나갈 수 없다고 정부(政府)에 청원(請願)한바 그때 정승(政丞) 염제신(廉悌臣)이 엄책(嚴責)하여 왈(曰) 국난(國難)이 있을 때에 귀족(貴族)자제(子弟)들이 먼저 칼을 잡고 나가는 것은 조종(祖宗) 이래(以來)의 상규(常規)라 너희들이 공자묘(孔子廟)를 빙자(憑藉)하는 것은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함이라 너희들이 지키지 아니하면 공자묘(孔子廟)가 어디로 도망(逃亡)가느냐 하고 일제(一齊)히 전쟁(戰爭)에 내어 보낸 일이 있으니 이것이 고려(高麗)사람의 기질(氣質)의 변함이오 이 변화(變化)한 기질(氣質)이 이조(李朝)에 상속(相續) 되었다.

고려사회(高麗社會)의 부패(腐敗)는 혁명(革命)을 불렀고 혁명(革命)은 사회발전(社會發展) 과정(科程)에 있어서 일대(一大) 청신제(淸新劑)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는 공민왕(恭愍王) 삼년(三年)에 이미 전제(田制)를 개혁(改革)한 뒤에 자기(自己)가 국왕(國王)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정치개혁(政治改革)에 대(對)한 주장(主張)을 내 세운 것이 없고 다만 왕대(王代) 사직(社稷)을 빼앗으려는 권력(權力) 다툼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조신중(朝臣中)에는 이성계(李成桂)의 혁명(革命)에 대(對)하여 강렬(强烈)한 반대(反對)를 한 자(者)가 적지 아니하고 그 중(中)에는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에 숨어서 일생(一生)을 이씨(李氏)의 앞에 무릎을 굴(屈)치 안한 자(者) 있으니 이를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한다.

칠십이현(七十二賢)과 그 자손(子孫)들은 이씨(李氏)에 복(服)하지 아니하고 혹(或)은 유기(柳器) 피혁장(皮革匠)등 천업(賤業)을 하는 자(者)도 있고 혹(或)은 상업(商業)에 몸을 던져 송경(松京)과 연안(延安) 배천(白川)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는 자(者)도 있었으니 지금의 개성(開城) 사람의 상업술(商業術)이 일국(一國)에 유명(有名)하고 개성상업부기(開城商業簿記)가 서양식(西洋式) 부기(簿記)와 병칭(倂稱)되고 있는 것은 당시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의 창안(創案)으로 된 까닭이라 한다.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임신(壬申)

기묘(己卯)

신사(辛巳)

기해(己亥)

신미(辛未)

계유(癸酉)

7

2

18

32

2

3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인종(仁宗)

병자(丙子)

기축(己丑)

경유(庚酉)

을묘(乙卯)

병인(丙寅)

을사(乙巳)

13

1

25

11

39

1

명종(明宗)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병오(丙午)

무진(戊辰)

을유(乙酉)

계해(癸亥)

경인(庚寅)

경자(庚子)

22

41

14

27

10

15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

을묘(乙卯)

신축(辛丑)

을사(乙巳)

정유(丁酉)

신유(辛酉)

을미(乙未)

46

4

52

24

34

15

철종(哲宗)

광무황제(光武皇帝)

융희황제(隆熙皇帝)

 

 

 

경술(庚戌)

갑자(甲子)

정미(丁未)

 

 

 

14

44

4

 

 

 

이조(李朝)역대표(歷代表)

 

비고(備考)

一. 고려(高麗)왕실(王室)이 없어진 것은 태조(太祖)가 한양(漢陽)에 이도(移都)하니 전(全) 백성(百姓)이 송경(松京)에 회귀(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태종(太宗)이 부하(部下)로 하여금 망월대(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개국(開國)초(初)에 무국호(無國號)하여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라 칭(稱)하고 명국(明國)에서 태조(太祖)가 왕위(王位)에 오름을 승낙(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조선(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조선(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이조(李朝)는 명(明)의 아유국(阿諛國))

三. 태조(太祖)는 백성(百姓)을 위하여 혁명(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일생(一生)에 왕위(王位)를 차지하려고 명국(明國)에 아유(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이태조(李太祖)는 명(明)에서 명령(命令)하면 모두 응(應)하였다.

 

이조(李朝)건국(建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선조(先祖)는 본시(本是) 함경도(咸鏡道)에 살았는데 그 고조부(高祖父)가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하고 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 경흥(慶興)에 살더니 태조(太祖)의 어버이 이자춘(李子春)은 영흥(永興)에 살고 거기서 태조(太祖)를 낳으니 이때 영흥(永興)은 쌍성총독부(雙城總督府)로 되어 원(元)나라에 속(屬)하였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유인우(柳仁雨)가 쌍성(雙城)을 칠 때에 이자춘(李子春)이 이를 도와서 공(功)이 있었음으로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 겸(兼)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함주(咸州)를 중심(中心)으로 하여 큰 세력(勢力)을 가졌고 이때 태조(太祖)는 나이 젊었으나 특출(特出)한 무예(武藝)가 있었음으로 함주(咸州) 이북(以北)에 살고 있는 여진족(女眞族)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으며 후일(後日)에 태조(太祖)가 자주 큰 공(功)을 세운 것도 그 수하(手下)에 동두란(佟豆蘭) 이하(以下) 여진(女眞) 출신(出身)의 맹장(猛將)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 한다.

태조(太祖)가 건국(建國)한 이듬해에 국호(國號)를 고쳐서 조선(朝鮮)이라 하고 삼년(三年) 후(後)에 도읍(都邑)을 지금의 서울에 옮기고 경복궁(景福宮)을 짓고 성(城)을 쌓아서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다.

 

 

이조(李朝)정치(政治)

一. 토지제도(土地制度)이니 고려시대(高麗時代)는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장정(壯丁)에 따라서 수수(授受)하더니 태조(太祖)가 공민왕(恭愍王) 삼년(三年)에 개혁(改革)한 전제(田制)는 다만 사전(私田)을 폐(廢)하고 과전제(科田制)를 부활(復活)한 것이 고려(高麗)의 전제(田制)와 같을 뿐이오 토지(土地)를 농민(農民)에게 분배(分配)한 것은 장정(壯丁) 수수(授受)제(制)가 아니라 대개(大槪) 농민(農民)이 현재(現在) 경작(耕作)하고 있는 토지(土地)를 그 농가(農家)에 주는 것을 원칙(原則)으로 한 까닭에 각(各) 농가(農家)의 경작면적(耕作面積)에 많고 적은 차이(差異)가 생겼다.

그러므로 토지(土地)는 비록 고려(高麗)의 국유제(國有制)를 그대로 계승(繼承)하고 있으나 각(各) 농가(農家)의 경지(耕地)는 영구(永久) 경작권(耕作權)의 형태(形態)로 되어 있어 그 속에 후일(後日) 사유지(私有地)로 될 싹을 포장(包藏)하고 있으며 그 경작지(耕作地)는 국법(國法)에 의하여 자유(自由)로 매매(買賣) 전당(典當)하는 것을 금(禁)하고 있으나 이것은 완전(完全)히 국유제(國有制)가 사유제(私有制)로 변(變)해 넘어가는 과도기적(過渡期的) 형태(形態)이었다.

二. 高麗는 佛敎로서 국교(國敎)를 삼고 각지(各地)에 수다(數多)한 사찰(寺刹)을 세우고 왕실(王室)로부터 민간(民間)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식(儀式)은 불교식(佛敎式)을 썼다. 그러나 말엽(末葉)에 이르러 불교(佛敎)의 폐(廢)가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이조(李朝)는 불교(佛敎)를 극도(極度)로 배척(排斥)하여 사찰(寺刹)의 대부분(大部分)을 헐어버리고 사찰토지(寺刹土地)를 몰수(沒收)하고 유교(儒敎)로서 국교(國敎)를 삼고 특(特)히 중국(中國)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을 존숭(尊崇)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依)하여 집마다 가묘(家廟)를 만들게 하고 정주학(程朱學) 이외(以外)의 학문(學文)은 모두 이단(異端)이라 하여 일체(一切)로 용납(容納)치 못하게 하였다. 인위적(人爲的) 국민사상(國民思想) 통일(統一)의 결과(結果)는 학풍(學風)이 편협(偏狹)하여 배타성(排他性)이 강(强)하고 사상(思想)의 침체(沈滯)를 초래(招來)하여 생발(生發)의 기(氣)가 없었다.

三. 고려(高麗)에 무신횡포(武臣橫暴)의 폐(弊)가 크고 이성계(李成桂) 자신(自身)도 무신(武臣)으로써 왕대(王代)의 사직(社稷)을 빼앗았음으로 이조(李朝)는 무신(武臣)을 누르고 문신(文臣)을 높여서 국가대사(國家大事)는 전(專)혀 문신(文臣)의 손에 의(依)하여 행(行)하니 이 까닭에 사회(社會)는 문약(文弱)에 빠져서 외적(外敵)이 쳐들어오면 나아가 막을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恒常) 퇴굴(退屈)하였으며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는 물론(勿論)이오 그 일문(一門)까지도 병역(兵役)을 면제(免除)하고 오직 무세무력(無勢無力)한 한문미족(寒門微族)의 사람들만 군병(軍兵)으로 만들었다.

四. 혁명(革命)을 일으킨 이론(理論)이 광명정대(光明正大)치 못하여 고려유민(高麗遺民)들의 반대(反對)가 강열(强烈)하였음으로 이조(李朝)는 왕대부흥운동(王代復興運動)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건국(建國)한지 삼년(三年)에 전국(全國)의 왕대(王代)를 노소(老少)없이 모두 잡아서 학살(虐殺)하니 이때 왕대(王代)를 강화도(江華島)와 남해(南海) 여러 섬에 보내어 안주(安住)시킨다 하고 배에 싣고 들어가다가 물 속에 넣어 죽인 자(者)도 팔백여명(八百餘名)이오 개성(開城)으로부터 이북(以北)의 평안도지방(平安道地方)에 사는 왕대(王代)들은 모두 도망(逃亡)하여 요동(遼東)으로 들어가니 지금 만주(滿洲)지방(地方)에 다른 성(姓)보다 특(特)히 왕대(王代)가 많은 것은 이 까닭이라 하며 외국(外國)으로 도망(逃亡)할 수 없는 왕대(王代)들은 성자(姓字)를 고쳐서 옥(玉) 전(全) 전(田) 차(車) 등(等)으로 변(變)하니 혁명후(革命後)에 전조(前朝) 왕족(王族)을 일인(一人)도 남기지 아니하고 학살(虐殺)한 것은 아국(我國)유사(有史) 이래(以來) 오직 이조(李朝)뿐이었다. 한편(便)으로 황해도(黃海道) 평안도(平安道) 지방(地方)에서 왕대(王代)를 받들고 반란(叛亂)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개성(開城) 이북(以北)의 사람을 조정(朝廷)의 대관(大官)에 쓰지 아니하고, 함경도(咸鏡道)는 자기(自己)의 출신(出身)지방(地方)이다.

인성(人性)이 강(强)하고 만일 대용(大用)하면 이씨(李氏) 조정(朝廷)에 불리(不利)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역시(亦是) 대관(大官)에 쓰지 아니하니 이 까닭에 이조(李朝) 오백년(五百年)동안에 서북인(西北人)은 사로(仕路)가 막힌 것이다.

五. 고려(高麗) 말엽(末葉)에 정치(政治)가 문란(紊亂)하여지자 권신(權臣)귀족(貴族)들은 국가(國家)의 관리(官吏)에 정원(定員)이 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마음대로 자기(自己) 친척(親戚)이나 특수관계(特殊關係)가 있는 者를 관리(官吏)로 쓰게되어 정원수(定員數)의 배(倍) 이상(以上)을 초과(超過)하였는데 이조(李朝) 개국후(開國後)에 관리(官吏)의 수(數)를 줄이고 관리(官吏)를 개체(改替)하려하였으나 만일 그 때문에 인심(人心)이 불안(不安)하여 동요(動搖)가 생기면 이씨(李氏) 정권(政權)의 유지(維持)에 불리(不利)할까 염려(念慮)하여 관리(官吏)의 수(數)도 줄이지 못하고 주요(主要)한 자리 외(外)에는 개체(改替)하지도 못하니 이 까닭에 재정(財政)이 곤란(困難)하고 따라서 관리(官吏)의 봉급(俸給)은 생활비(生活費)를 충족(充足)치 못하였고 이것이 이조(李朝) 오백년(五百年)동안을 통(通)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많이 생긴 주인(主因)이 되었다. (관리(官吏)수(數)가 많으면 이조시대(李朝時代)의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생긴다.)

六. 고려(高麗)의 문은 귀족(貴族)이 이미 없어지고 이씨(李氏)에 친부(親附)한 자(者)가 신귀족(新貴族)이 되었는데 이씨(李氏) 조정(朝廷)은 아직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어느 한 구석에서 어떠한 사건(事件)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음으로 이들 신귀족(新貴族)을 특별(特別) 대우(待遇)하고 민재(民財)를 빼앗아 먹는 것을 묵인(黙認)하기까지 하고 李氏에게 모반(謀反)하는 일을 고발(告發)하라고 장려(獎勵)하여 후(厚)한 상(賞)을 주었으니 이것이 이조(李朝) 일대(一代)에 귀족(貴族)의 횡포(橫暴)와 고발(告發)의 폐습(弊習)을 조장(助長)한 일인(一因)이 되었다.

七. 이조(李朝)가 고려(高麗)를 빼앗은 것은 사회(社會)의 발전(發展)을 위한 혁명(革命)이 아니오 다만 이씨가(李氏家)가 왕(王)노릇을 한다는 것이 주요(主要)한 목적(目的)이 되어 있으니 이것은 이대(李代) 개국후(開國後) 흔히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개국(開國)한 처음부터 추악(醜惡)한 왕위쟁탈전(王位爭奪戰)이 일어나서 오백년(五百年)동안을 끊임없이 부자(父子) 형제(兄弟) 숙질(叔姪) 등(等)의 사이에 유혈(流血)의 극(劇)을 연출(演出)한 것이다.

 

왕위쟁탈(王位爭奪)

처음에 태조(太祖)는 송경(松京)으로부터 도읍(都邑)을 옮기려하여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과 한양(漢陽)을 친(親)히 돌아본 결과(結果) 한양(漢陽)으로 옮겨왔는데 얼마 안가서 왕자(王子)의 변(變)이 일어나서 골육(骨肉)의 참혹(慘酷)한 화란(禍亂)을 자아냈다. 태조(太祖)에게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韓)씨의 소생(所生)에 육자(六子)가 있고 신덕왕후(神德王后) 강(康)씨의 소생(所生)에 방번(芳蕃) 방석(芳碩)의 이자(二子)가 있는데 태조(太祖)의 혁명(革命) 운동(運動)에 한씨(韓氏) 소생(所生)의 방원(芳遠)(태종(太宗))의 힘이 가장 크더니 한씨(韓氏)는 개국(開國)하기 전(前)에 죽고 강씨(康氏)가 왕후(王后)로 되어 자기(自己)의 소생(所生) 방석(芳碩)으로 세자(世子)를 삼으려하니 정부(政府)대신(大臣) 중(中)에는 「평시(平時)에는 장(長)을 세우고 난시(亂時)에는 공(功)을 먼저 한다.」하여 반대(反對)한 일도 있었다.

태조(太祖)는 왕위(王位)로써 국가(國家) 전체(全體)와 관련(關聯)시키지 아니하고 이씨가(李氏家)의 사사(私事)로 생각하여 그 사랑하는 강씨(康氏)의 소생(所生) 방석(芳碩)으로써 세자(世子)를 삼으니 한씨(韓氏) 소생(所生)의 여러 형(兄)들이 불평(不平)을 품고 그 중(中)에서도 개국(開國)의 공(功)이 있는 방원(芳遠)의 불만(不滿)이 가장 컸다.

이때 세자(世子) 방석(芳碩)을 돕는 책임(責任)을 맡은 자(者)는 정도전(鄭道傳) 등(等)이라 정도전(鄭道傳) 등(等)은 여러 왕자(王子)가 불평(不平)을 품고있는 형세(形勢)를 살피고 태조(太祖)에게 말하여 왕자(王子)들의 병기(兵器)를 지니는 것을 금(禁)하고 다시 왕자(王子) 칠인(七人)을 칠도(七道)에 분견(分遣)하고자 하니 이는 왕자(王子)들을 방축(放逐)하려는 술책(術策)이다. 이에 방원(芳遠)은 크게 노(怒)하여 방번(芳蕃) 방석(芳碩)과 정도전(鄭道傳) 등(等)을 죽이고 방원(芳遠)의 형(兄) 방과(芳果)가 세자(世子)가 되니 태조(太祖)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분(忿)함을 참지 못하여 가장 친근(親近)한 부하(部下)를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울 근처(近處)의 산사(山寺)를 소유(逍遊)하다가 멀리 北으로 行하여 舊居인 함흥(咸興) 본궁(本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방과(芳果)가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정종(定宗)이오 정종(定宗) 원년(元年)에 한양(漢陽)은 골육(骨肉)의 변(變)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신도(新都)를 버리고 개경(開京)으로 돌아갔다. 정종(定宗)은 방원(芳遠)으로써 세제자(世弟子)를 삼으니 방원(芳遠)의 형(兄) 방간(芳幹)이 거기에 불만(不滿)을 품고 박포(朴苞)로 더불어 방원(芳遠)을 해(害)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박포(朴苞)는 잡혀서 죽고 방간(芳幹)은 토산(兎山)으로 쫓겨나갔다. 정종(定宗)이 임금이 된지 이년(二年)만에 하루는 세제(世弟)방원(芳遠)의 기색(氣色)이 수상(殊常)함을 보고 왕위(王位)를 방원(芳遠)에게 전(傳)하니 이가 태종(太宗)이다. 태종(太宗)은 즉위(卽位)한 후(後) 곧 한양(漢陽)으로 돌아왔는데 조신중(朝臣中)에는 개경(開京)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신도(新都)를 싫어하는 자(者)가 많아서 왕도(王都)가 안정(安定)치 못하더니 하루 밤에 개경(開京)궁궐(宮闕)이 전부(全部) 불에 타버리니 다시 개경(開京)으로 옮기자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太祖)가 함흥(咸興)에 들어간 후(後)에 조정(朝廷)에서는 자주 문안사(問安使)를 보내었으나 태조(太祖)는 분(忿)함이 풀리지 아니하여 오는 사람마다 죽여서 일인(一人)도 생환(生還)한 자(者)가 없으니 지금까지도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태종(太宗)이 박순(朴淳)을 보내어 태조(太祖)의 환국(還國)하기를 청(請)하고 부자간(父子間)의 천륜(天倫)의 정(情)을 극진(極盡)하니 태조(太祖)가 감동(感動)하여 돌아왔다.

박순(朴淳)의 극진(極盡)한 말의 내용(內容)을 함흥(咸興)고노(古老)들이 구비(口碑)로 상전(相傳)하는 말에 의(依)하면 「부자(父子)가 상쟁(相爭)하여 남북(南北) 이조(二朝)가 있음과 같이 국민(國民)의 눈에 보이는데 창업(創業)한지 오래되지 못하고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여 장차(將次) 무슨 변란(變亂)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 부자(父子)가 상쟁(相爭)하여 나아가 국가(國家) 만년(萬年)의 기업(基業)을 떨어뜨리랴」함이라 태조(太祖)는 이 말을 듣고 대오(大悟)하여 드디어 남환(南還)을 결의(決意)하였다 한다.

 

건설(建設)시기(時機)

태종(太宗)이 임금이 된 것은 개국(開國)한지 구년(九年)만이라 이제로부터 점차(漸次)로 건설적(建設的) 정책(政策)을 행(行)하게 되었다.

경제면(經濟面)에서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이래(以來)로 화폐제도(貨幣制度)를 여러 번 확립(確立)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태종(太宗)이 다시 착수(着手)하여 전화(錢貨)를 만들려 하였으나 그 원료(原料)되는 동(銅)이 부족(不足)함으로 주(主)로 저폐(楮幣)를 만들어 쓰게 하니 이는 지금의 지폐(紙幣)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전화(錢貨)를 신용(信用)치 않는 당시(當時) 사람들이 저화(楮貨)를 신용(信用)할 이유(理由)가 없었다. 그리하여 저폐(楮幣)의 가치(價値)가 폭락(暴落)하더니 마침내 유통(流通)이 끊어지고 전일(前日)과 같이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쓰고 오승포(五升布)를 표준(標準)으로 하니 오승포(五升布)라 함은 일정(一定)하여있는 포폭(布幅)에 경사(經絲) 사백본(四百本)을 말함이다. (한 목은 십(十) 오리 일(一)승(升)은 팔(八)목)

문화(文化) 면(面)에 있어서 특기(特記)할만한 것은 주자소(鑄字所) 설치(設置)이다. 고려(高麗)때에 활자(活字)를 만들어 쓴 일이 있었으나 그 규모(規模)가 크지 못하더니 태종(太宗) 삼년(三年)에 주자소(鑄字所)를 두고 이직(李稷) 박석명(朴錫命) 등(等)으로 하여금 동(銅)으로 많은 주자(鑄字)를 만들어 주요(主要)한 서적(書籍)을 인쇄(印刷)하여 내니 이는 우리 나라 출판문화사(出版文化史) 상(上) 획기적(劃期的) 혁명(革命)이다.

외교(外交)에 있어서는 태조(太祖)개국(開國)할 때에 명(明)나라의 승인(承認)을 얻고 해마다 많은 세폐(歲幣)를 바치기로 하였음으로 명(明)나라의 세폐(歲幣) 요구(要求)가 수량(數量)이 많고 또 가혹(苛酷)하여 특(特)히 마필(馬匹)의 요구(要求)가 더욱 심(甚)하여 매년(每年) 수천필(數千匹) 내지 만여필(萬餘匹)을 강요(强要)하고 또 축우(畜牛)까지 요구(要求)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여기에 응(應)하면 국내(國內)의 마필(馬匹)이 전부(全部) 없어질 것이오 응(應)하지 아니하면 명(明)나라로부터 어떠한 압박(壓迫)이 올지 알 수 없어서 진퇴(進退) 양난(兩難)에 빠졌다. 조신(朝臣) 중(中)에는 이를 거절(拒絶)하자고 주장(主張)한 강경(强硬) 논(論)도 있었으나 태종(太宗)은 온화(穩話)하게 이를 해결(解決)하자고 무마(撫摩)하고 명(明)나라에 대(對)하여 세폐(歲幣)를 감(減)할 것을 여러 차례로 요청(要請)하더니 얼마후(後)에 그 요청(要請)대로 실현(實現)되었다.

고려(高麗)말(末)에 극성(極盛)하던 왜구(倭寇)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태종(太宗)때에 남해안(南海岸)을 침범(侵犯)한 일이 있음으로 태종(太宗)이 위(位)를 세종(世宗)에게 전(傳)하고 대상왕(大上王)이 되었으니 자기(自己) 생전(生前)에 왜구(倭寇)의 소굴(巢窟)을 없애야 한다하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상당(相當)한 전과(戰果)를 내었으나 오래 수비(守備)하기가 어려움으로 얼마 후에 회군(回軍)하였다. (이종무(李從茂)가 변변치 못하여 一敗하여 돌아왔다.)

처음에 태종(太宗)의 장자(長子)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써 세자(世子)를 삼았으나 삼자(三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 항상(恒常) 장차(將次)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할 생각이 있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또한 천자(天資)가 개당(個儻)하여 자기(自己)보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의 재덕(才德)이 뛰어남을 알고 왕위(王位)를 그에게 넘기려하여 거짓 방탕(放蕩)하여 세자(世子)의 위(位)에서 물러나니 이씨(李氏) 개국(開國)이후 추악(醜惡)한 왕위(王位) 쟁탈전(爭奪戰)을 하는 속에서 홀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이와 같은 특이(特異)한 행동(行動)을 한 것은 일신(一身)의 영예(榮譽)보다 국가(國家) 전체(全體)를 위하는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왕위(王位)를 상양(相讓)하던 혼후(渾厚)한 풍(風)을 다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후(後)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王)이되니 이가 세종(世宗)이라 세종(世宗)은 이조(李朝) 일대(一代)를 통(通)하여 제일(第一)가는 성군(聖君)일 뿐만 아니라 아국(我國)의 역사(歷史) 전체(全體)를 통(通)하여 보아도 가장 훌륭한 인군(人君)이다.

세종(世宗)은 황희(黃憙) 허조(許稠) 등(等) 명상(名相)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함에 그 중점(重點)을 인재(人才) 문제(問題)에 두었다. 즉 어떻게 하면 인재(人才)를 많이 배양(培養)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人才)를 거용(擧用)할 수 있을까 하고 또 군왕(君王)이나 재상(宰相)의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훌륭한 인재(人才)를 얻어서 국가(國家)의 각 기관(機關)에 적재적소(適材適所)로 배치(配置)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과거(科擧)로써 인재(人才)를 취(取)하는데 그 출제(出題)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국방(國防) 문화(文化) 등(等)에 관(關)한 실제(實際) 방책(方策)으로 하고 여기에 급제(及第)한 사람은 다시 호당(湖堂)에 보내어 몇 해 동안을 자유롭게 연구(硏究)케 하니 이 까닭에 인재(人才)가 배출(輩出)하여 여러 가지 큰 사업(事業)을 행(行)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서변(西邊)과 북변(北邊)에는 여진족(女眞族)이 거주(居住)하고 있는데 국인(國人)들은 이를 야인(野人)이라 불렀다.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한 뒤에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이남(以南)의 여진족(女眞族)이 한때 모두 귀부(歸附)하였으나 이는 일시적(一時的)의 일이오 그 지대(地帶)가 우리 나라의 영토(領土)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 야인(野人)은 항상(恒常) 서북(西北) 변(邊)의 근심이 되더니 세종(世宗)은 이를 정벌(征伐)하기로 결의(決意)하고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북변(北邊)을 치게 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유한(有限)한 인력(人力)으로써 성공(成功)할 수 없는 군역(軍役)을 시작(始作)한다하여 극력(極力)으로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세종(世宗)은 굽히지 아니하고 야인(野人)을 쳐서 혹(或)은 항복(降服)받고 혹(或)은 두만강(豆滿江) 외(外)로 쫓아내고 두만강(豆滿江) 남(南)에 종성(鍾城) 경원(慶源) 회령(會寧) 경흥(慶興) 은성(穩城) 부령(富寧)의 육진(六鎭)을 새로이 세우고 경상도(慶尙道) 백성(百姓)을 옮겨서 그 지방(地方)을 채우니 발해(渤海)가 망(亡)한지 오백여년(五百餘年)에 이 지대(地帶)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 영토(領土)로 돌아왔으며 귀순(歸順)한 야인(野人)들은 혹(或)은 우리 나라 사람에 동화(同化)하고 혹(或)은 재가승(在家僧)이라는 특수인(特殊人)으로서 그 지방(地方)에 남았었다.

(함경(咸鏡)지명(地名)에 흥(興) 자(字)가 셋이 있는 것은 태조(太祖)의 고조부(高祖父)가 살았던 데를 경흥(慶興)이라 하고 정종(定宗) 태종(太宗)의 출생지(出生地)를 함흥(咸興)이라 하고 영흥(永興)은 태조(太祖)가 낫기 때문에 영흥(永興)이라고 지명(地名)을 각각 지었다. 신흥(新興)은 왜정(倭政)때 새로 지은 지명(地名))

세종(世宗)이 조세제도(租稅制度)에 대(對)하여는 칠팔년(七八年)을 고민(苦悶)하고 드디어 투표제도(投票制度)를 실시(實施)하였다.

서변(西邊)에서는 파저강(婆豬江) 기슭에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 등(等)이 웅거(雄據)하여 자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약탈(掠奪)함으로 태종(太宗)때에 갑산(甲山)의 땅을 나누어 지금의 평안도(平安道)에 여연군(閭延郡)을 두었다. 세종(世宗)때에 이르러 야인(野人)의 침입(侵入)이 잦아서 강안(江岸)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들이 안주(安住)할 수 없으니 세종(世宗)은 이를 다만 방비(防備)하느니보다 한 걸음 나아가 강(江)을 건너서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부실 계획(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강(江)건너는 명(明)나라의 영토(領土)이오 또 임목(林木)이 폐문(蔽文)하여 함부로 쳐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명(明)나라에 대(對)하던 외교(外交)로써 야인(野人)정벌(征伐)의 부득이(不得已)함을 역설(力說)하고 한편(便)으로는 비밀(秘密)히 북벌군(北伐軍)을 훈련(訓練)하고 강변(江邊)에 군량(軍糧)을 비축(備蓄)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많아서 매일(每日) 이 문제(問題)를 가지고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만일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깨지 않으면 서변(西邊) 일대(一帶)는 야인(野人)의 독무대(獨舞臺)가 될 것이니 이를 실행(實行)치 아니할 수 없고 또 이를 치자면 명(明)나라 영토(領土)에 공공연(公公然)하게 들어갈 수가 없음으로 비밀리(秘密裏)에 거사(擧事)하려는 것이다. 이 문제(問題)를 크게 떠들어서 만일 명(明)나라에 들리면 대사(大事)가 틀어질 것이니 조용히 처리(處理)하고자 타일렀다.

그러나 반대(反對)하는 자(者)들은 듣지 아니하고 연일(連日)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대노(大怒)하여 왈(曰) 야인(野人)의 침략(侵略)을 그대로 방임(放任)하자는 것은 국토(國土)를 적(賊)에게 주자는 생각이니 외교관계(外交關係)에 관(關)한 일을 공공연(公公然)하게 떠들면 국가(國家) 장래(將來)에 무슨 이익(利益)이 있느냐 하여 책(責)하고 아국(我國) 인성(人性)이 경조(輕躁)하여 반드시 국가(國家) 대사(大事)를 그르칠지로다. 하고 탄식(嘆息)하였다. 이에 모든 반대(反對)를 물리치고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야인(野人)을 치고 강(江) 이쪽에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세곳을 두니 이로써 압록강(鴨綠江) 기슭에 사군(四郡)이 이루어져서 그 후(後) 다소(多少)의 곡절(曲折)이 없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압록강(鴨綠江)이 완전(完全)히 우리 나라의 국경(國境)이 되었다.

토지(土地)의 조세제도(租稅制度)는 고제(古制)에 의(依)하여 수확량(收穫量)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을 받기로 하였으나 토지(土地)마다 매년(每年) 일정(一定)한 액수(額數)를 받는 공법(貢法)을 쓰느냐 또는 해마다 년년(年年)의 풍흉(豊凶)과 작황(作況)의 양부(良否)를 실지(實地)로 답사(踏査)하여 세액(稅額)을 정(定)하는 답험법(踏驗法)을 쓰느냐 하는 것이 전국적(全國的)으로 일대(一大) 송안(訟案)이 되었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노력(努力)을 들이면 수확(收穫)을 올릴 수 있고 또 수한재(水旱災)가 적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공법(貢法)을 환영(歡迎)하고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고 기후(氣候)의 영향(影響)을 많이 받아서 흉년(凶年)이 잦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답험법(踏驗法)을 환영(歡迎)하였다. 그리하여 공법(貢法)도 써보고 답험법(踏驗法)도 써 보았는데 공법(貢法)에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을 정(定)하는 일이나 답험법(踏驗法)에서 매년(每年)의 수확량(收穫量)을 정(定)하는 일이나 모두 실제(實際)로 간사(幹事)하는 관리(官吏)의 공정(公正)여부(與否)가 법(法)의 정신(精神)을 살리고 죽이고 하였다.

그러나 세제(稅制)를 어느 쪽으로든지 확정(確定)치 아니할 수 없음으로 세종(世宗)은 각도(各道)를 단위(單位)로 하여 각 수령(守令)과 농가(農家)로 하여금 어느 제도(制度)를 찬성(贊成)하는가를 낙점(落點)케 하니 낙점(落點)이라 함은 지금의 투표(投票)와 같은 것이다. 그 결과(結果)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의 삼도(三道)는 공법(貢法) 찬성(贊成) 자(者)가 십(十)의 팔(八)이오 경기(京畿) 강원(江原)의 양도(兩道)는 양법(兩法)의 찬성(贊成)이 대략(大略) 반반(半半)이었다. 이에 민의(民意)를 존중(尊重)히 여겨 삼남(三南)과 경기(京畿) 강원(江原)은 공법(貢法)을 쓰고 서북(西北) 삼도(三道)는 답험법(踏驗法)으로 쓰이게 하되 공법(貢法)을 쓰는 지대(地帶)에서도 토지(土地) 등급(等級)이 낮은 박토(薄土)에 대(對)하여는 재(災)를 주기로 하였다. 동일(同一)한 국내(國內)에서 지방(地方)에 따라서 상이(相異)한 법(法)을 쓴 것은 오직 민정(民情)에 맞추려 함이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오백여년(五百餘年) 전(前)옛날에 민의(民意)를 묻기 위(爲)하여 대중(大衆)의 낙점제(落點制)를 썼다는 것은 일대(一大) 기관(奇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토지제도(土地制度)에 결부제(結負制)를 편용(偏用)한 것은 제도(制度)의 문란(紊亂)을 발생(發生)시킨 일인(一因)이 되었다. 신라시대(新羅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에는 면적(面積)을 표시(表示)하는 경무제(頃畝制)와 수확량(收穫量)을 표시(表示)하는 결부제(結負制)를 병용(竝用)하니 일결(一結)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부(負)가되고 일부(一負)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이 일속(一束)이 되었다. (결(結)은 맥, 부(負)는 짐, 속(束)은 뭇)

경(頃)이라 함은 토지(土地)의 일등지(一等地)의 일결(一結)과 동일(同一)한 면적(面積)이오 경(頃)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무(畝)가된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처음에는 양제(兩制)를 병용(竝用)하다가 그 후(後)에 세액계산(稅額計算)의 편의(便宜)를 위(爲)하여 결부법(結負法)을 전용(專用)하고 이조(李朝)에 이르러 이를 답습(踏襲)하였다. 세종(世宗)때에 토지(土地)를 구등(九等)에 나누었는데 이를 결부(結負)와 경(頃)으로써 비교(比較)하여보면 일등지(一等地) 일결(一結)은 일경(一頃)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하나 구등지(九等地) 일결(一結)은 사경(四頃) 여(餘)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함으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에 따라서 경수(頃數)가 모두 다르고 따라서 그 토지(土地)를 보고 그 결수(結數)를 알 수 없으며 혹(或)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이 농민(農民)의 토지(土地)를 침범(侵犯)하되 국가(國家)의 토지장부(土地帳簿)에는 결 부 수(結負數)만 있고 그 토지(土地)의 지도(地圖)라든가 면적(面積)이든가가 기재(記載)되어 있지 아니함으로 침점(侵占)여부(與否)와 침범(侵犯)한 면적(面積)을 가고(可考)할 길이 전연(全然)없고 이 까닭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각(各) 토지(土地)의 세액(稅額)이 헝클어지기 시작(始作)하였다. (세종(世宗)이 면적(面積)을 재기 위(爲)하여 인재(人才)를 구(求)하니 인재(人才)가 없어서 면적(面積)을 재지 못하여 토지제도(土地制度)가 문란(紊亂)하였다.)

세종(世宗)은 천성(天性)이 총명(聰明)하고 또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궁중(宮中)에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학자(學者)들을 모아서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는 한편 유익(有益)한 서적(書籍)을 많이 만드니 고려사(高麗史)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농사설(農事說)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등(等)은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음악(音樂)에도 많은 관심(關心)을 가져서 해주(海州)에서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南陽)에서 경석(磬石)이 나며,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악기(樂器)를 고쳐 만들고 이어서 구악(舊樂)을 고쳐 다듬으니 지금껏 세계(世界)에 자랑이 되고 우리 나라의 아악(雅樂)은 이때에 완성(完成)한 것이다. 또 역상(曆象) 방면(方面)에도 연구(硏究)를 쌓아서 장영실(蔣英實)과 더불어 대소(大小)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앙부일귀(仰釜日晷) 등(等)을 만들고 동(銅)으로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서울과 각도(各道)에 나눠주어서 우량(雨量)을 재었다. 이는 서기(西紀)1639년(年)보다. 이백년(二百年)이 앞서서 활자(活字)와 함께 우리 문화(文化)의 자랑거리다.

또 우리 문화사(文化史)상(上) 가장 특기(特記)할만한 사업(事業)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국문(國文)의 창제(創製)이다.

세종(世宗)은 「제국(諸國)이 각기(各其) 문자(文字)가 있어서 방언(方言)을 기(記)하거늘 독(獨)히 무(無)하노라 아국(我國)의 어음(語音)이 중국(中國)과 달라서 한자(漢字)와 서로 유통(流通)치 못함으로 우민(愚民)이 언(言)코자 함이 있으되 마침내 그 정(情)을 신(伸)치 못하노라 내가 이를 민망(憫惘)히 여겨 문자(文字)를 신제(新製)하야 인인(人人)으로 하여금 학습(學習)하기 쉽고 일용(日用)에 편(便)케 하고자 하노라」함과 같이 국가의식(國家意識)의 자각(自覺)과 대중교육(大衆敎育)의 필요(必要)에 의(依)하여 국문(國文)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등(等)과 더불어 친(親)히 연구(硏究)를 거듭한 결과 그의 이십팔년(二十八年) (삼천칠백칠십구년 병인(丙寅))에 이십팔자(二十八字)를 지어내어 중외(中外)에 영포(領布)하니 이것이 오늘날 세계(世界)의 여러 문자(文字)중에서 제일(第一) 우수(優秀)한 우리 국문(國文)이다.

이때 한학사상(漢學思想)에 젖은 최만리(崔萬里)같은 무리들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성현(聖賢)의 글이 아니라 하여 쓰기를 반대(反對)한 일이 있었으나 세종(世宗)은 이를 물리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써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내는 한편 관청(官廳)의 공문서(公文書)에 이 글을 쓰게 하며 또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경전(經典)을 번역(飜譯)하여 백성(百姓)들에게 읽혔다. 민간(民間)에서는 이 글을 언문(諺文) 또는 언서(諺書)라하고 한문(漢文)을 번역(飜譯)한 것을 언해(諺解)라 하였다.

 

단종(端宗)과 세조(世祖)

세종(世宗)의 다음에 문종(文宗)은 재위(在位)한지 겨우 이년(二年)이오 그 아들 단종(端宗)이 왕(王)이 되니 나이 겨우 십이세(十二歲)이다. 그런데 당시(當時) 단종(端宗)에게는 모후(母后)가 없고 근친(近親)이라고는 숙부(叔父) 칠인(七人) 즉(卽) 수양대군(首陽大君) 以下 七人君이 있어 모두 强盛하니 國民들은 王의 장래에 대하여 모두 위구(危懼)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전일(前日)에 세종(世宗)이 승하(昇遐)하였을 때에 국민(國民)이 성군(聖君)을 잃은 것을 크게 슬퍼하였는데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하였을 때에는 그때보다도 더욱 슬퍼하니 그것은 문종(文宗)을 위(爲)한 슬픔이 아니라 어린 단종(端宗)이 보호자(保護者)가 없고 칠대군(七大君)의 힘이 강대(强大)함으로 국사(國事)가 장차(將次) 어떻게될까 근심하는 슬픔이었다.

단종(端宗) 이년(二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등(等)과 더불어 난(亂)을 일으켜, 그때 정승(政丞)으로 있는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等)을 죽이고 스스로 군국(軍國) 대권(大權)을 잡고 있더니 또 이년(二年)후(後)에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니 이가 세조(世祖)이다. 이에 단종(端宗)의 舊臣中에는 兩派로 갈려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等은 世祖에게 붙고 世祖의 行爲를 통분(痛憤)히 생각하는 성삼문(成三問) 박팽연(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等)은 세조(世祖)를 몰아내고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려 하다가 미연(未然)에 발각(發覺)되어 그 가족(家族)및 연루(連累)자(者)들과 함께 사형(死刑)을 당(當)하고 단종(端宗)은 노산군(魯山君)으로 내려서 영월(寧越)로 귀양가더니 이듬해에 세조(世祖)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에서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일으키다가 패(敗)하여 죽고 단종(端宗)도 또한 세조(世祖)에게 해(害)된 바 되었다.

세조(世祖)는 왕위(王位)를 억지로 얻었으나, 정치(政治)를 잘하여 성장기(成長期)에 있는 이조(李朝)를 힘써 배양(培養)하였다. 왕(王)은 억불정책(抑佛政策)을 늦추어서 서울 안에 원각사(圓覺寺)를 짓고 십삼층탑(十三層塔)을 쌓으며 刊都監을 두어서 佛經을 많이 박아내었다.

특히 民間의 弊害를 없애기에 努力하여 백성(百姓)들이 억울(抑鬱)한 일이 있는 때는 직접(直接)으로 왕(王)에게 상서(上書)하게 하고 비록 세력(勢力)이 있는 자(者)라도 민폐(民弊)를 짓는 자(者)는 용서(容恕)함이 없이 처벌(處罰)하였다.

(권람(權擥)은 권근(權近)의 손자(孫子)라 권근(權近)은 고려(高麗) 신하(臣下)로써 이씨(李氏) 득국(得國)함에 귀화(歸化)하였다. 처음에는 태조(太祖)가 써먹기 위하여 잘 대우(待遇)하더니 이씨(李氏)가 완전(完全)히 득국(得國)하니 권근(權近)을 절개(節槪)없는 신하(臣下)라고 물리치니 노말년(老末年)에 분(忿)함을 참지 못하였다. 이를 손자(孫子)가 알고 단종(端宗)이 임금이 되어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빼앗는다는 것을 듣고 이에 참여(參與)하여 이씨(李氏)끼리 싸우라는 내용(內容)계획(計劃)을 세웠다. 그러니 고려(高麗) 신하(臣下)가 이조(李朝) 집안끼리 싸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육신(死六臣)은 다만 단종(端宗)이 왕위(王位)에 오르면 세조(世祖)보다 정치(政治)를 잘한다하여, 또 나라를 위(爲)하여 단종(端宗)을 받든 것이 아니라 단종(端宗)에만 충성(忠誠)한 것이다. 세조(世祖)가 한 일은 무리(無理)가 아니고 당연(當然)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설(說)도 있다.)

당시(當時) 민폐(民弊)의 가장 큰 자(者)는 방납(防納)이니 방납(防納)이라 함은 백성(百姓)이 국가(國家)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상인(商人)이나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이 대납(代納)하는 것이다. 당시(當時)의 백성(百姓)이 국가(國家)에 대한 부담(負擔)의 의무(義務)에는 토지생산(土地生産)의 일부(一部)를 바치는 조세(租稅), 각(各) 지방(地方)에서 산출(産出)되는 특산품(特産品)을 바치는 공물(貢物), 병역(兵役), 축성(築城), 운수(運輸) 등(等)에 종사(從事)하는 부역(賦役)의 세 가지가 있었다.

공물(貢物)은 전국(全國) 각(各) 군(郡)을 단위(單位)로 하여 바치는 것인데 예(例)컨대 해변(海邊) 군(郡)은 어물(魚物) 해초(海草) 등등(等等) 산간(山間) 군(郡)은 모피(毛皮) 약재(藥材)등(等) 평야(平野) 군(郡)은 연초(煙草) 과실(果實) 명유(明油)등(等) 전주(全州)의 지(紙), 해주(海州)의 묵(墨), 갑산(甲山)의 산삼(山蔘), 강원도(江原道)의 청밀(淸蜜), 전라도(全羅道) 죽물(竹物) 등(等)이오 정부(政府)에서 수백종(數百種)의 산물(産物)을 각군(各郡) 산출액(産出額)과 호구수(戶口數)를 참작(參酌)하여 각도(各道)에 배정(配定)하고 도(道)는 군(郡)에 배정(配定)하고 군(郡)은 백성(百姓)의 각(各)에 배정(配定)하며 백성(百姓)이 자기(自己)에게 배정(配定)된 공물(貢物)을 군수(郡守)에게 바치면 군(郡)의 이서(吏胥)들이 그것을 검사(檢査)하여 수납(收納)하니 당시(當時) 공물(貢物)의 부담(負擔)은 조세(租稅)보다 몇 배나 중(重)하고 검사(檢査)에 불합격(不合格)되면 다시 호품(好品)을 구득(求得)하지 아니하면 안되므로 백성(百姓)의 손해(損害)가 적지 아니하였고 이서(吏胥)들은 백성(百姓)의 약점(弱點)을 승(乘)하여 비록 호품(好品)이라도 불합격(不合格)으로 퇴각(退却)하고 상인(商人)과 결탁(結託)하여 백성(百姓)으로부터 시가(時價)의 이삼배(二三倍)를 걷어서 그 물품(物品)을 대납(代納)하고 차액(差額)되는 이익(利益)을 분식(分食)하는 것이다.

대저(大抵) 이조(李朝)의 이서(吏胥)는 행정상(行政上) 한 특수계급(特殊階級)으로 존재(存在)하였다. 이서(吏胥)는 원래(原來) 국가(國家)의 관리(官吏)가 아니오 각군(各郡)의 행정사무(行政事務)를 돕는 사무원(事務員)으로서 아무런 봉급(俸給)이나 보수(報酬)를 받지 아니하는지라 이조개국(李朝開國) 초(初)에는 사무(事務)는 다단(多端)하되 생활비(生活費)를 얻을 길이 없음으로 고역(苦役)과 궁곤(窮困)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逃亡)하는 자(者)도 적지 아니하더니 그 후(後)에 백성(百姓)들로부터 횡렴(橫斂)하는 곡경(曲逕)을 발견(發見)하고 또 소위(所謂) 군수(郡守) 현령(縣令)은 그 지방(地方)의 실정(實情)을 잘 알고 있는 이서(吏胥)의 힘을 받지 아니하면 군정(郡政)을 행(行)할 수가 없음으로 군행정(郡行政)의 실권(實權)은 전(全)혀 이서(吏胥)의 손에 쥐여있었고 더욱이 전국(全國) 삼백여군(三百餘郡)에는 모두 그 지방(地方) 출신(出身)의 이서(吏胥)가 있어 국가(國家)에서 임명(任命)한 수령(守令)과 백성(百姓)의 중간(中間)에 개재(介在)하여 사무계급(事務階級)으로써 일대세력(一大勢力)을 형성(形成)하고 있어 수령(守令)은 물론(勿論)이오 중앙정부(中央政府)에서도 그 세력(勢力)을 무시(無始)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서(吏胥)들이 공물(貢物) 검사(檢査)를 하게되니 그 합검(合檢) 불합검(不合檢)은 전(專)혀 그들의 일구일필(一口一筆)에 달려 있고 거기에 따라서 방납제(防納制)가 생기게 되니 백성(百姓)에게 끼치는 폐해(弊害)는 실(實)로 막대(莫大)하고 세조재야(世祖在也)하는 동안은 엄격(嚴格)하고 과단(果斷)있는 행정(行政)으로 능(能)히 이 폐해(弊害)를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임금 때로부터 점점 부활(復活)되고 말았다.

세종(世宗)이 육진(六鎭)을 건설(建設)한 뒤에 야인(野人)들의 침략(侵略)이 그치지 아니 하고 단종(端宗) 때에는 그 세력(勢力)이 더욱 성(盛)하였음으로 조신(朝臣) 중(中)에는 육진(六鎭)을 포기(抛棄)하자는 비굴(卑屈)한 논자(論者)도 있어 한동안 서로 의론(議論)을 다투었다. 세조(世祖)가 왕(王)이 된 뒤에 처음에 압록강(鴨綠江)기슭의 사군(四郡)을 폐(廢)하고 야인(野人)들을 무마(撫摩)하기로 하였으나 갈수록 그들의 버릇이 사나워 짐으로 세조(世祖)는 회령(會寧)을 엿보는 야인(野人)을 쳐서 이를 두만강(豆滿江) 북쪽으로 쫓고 또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강(江) 내외(內外)의 야인(野人)의 소굴(巢窟)을 엎었으며 어유소(魚有沼) 남소(南沼) 장군(將軍) 등(等)을 시켜서 파저강(婆豬江)의 야인(野人) 괴수(魁首) 이만주(李滿住)의 부자(父子)를 잡아 죽였다.

세조(世祖)의 왕위(王位) 쟁탈(爭奪) 난(亂)은 이씨왕가(李氏王家)의 개국(開國) 초(初)부터 있은 예(例)의 골육전(骨肉戰)이오 육신(六臣)의 사(死)는 주(主)를 위(爲)한 사절(死節)이라 군주정치(君主政治) 시대(時代)에는 흔히 있는 일이오 아무런 특이(特異)한 것이 없으나 다만 이 난(亂)이 우리 나라의 정치(政治)와 인심(人心)에 미친 영향(影響)은 실(實)로 크고 또 심각(深刻)한 것이었다. 고려(高麗) 말(末)에 정몽주(鄭夢周)가 국사(國事)에 순절(殉節)하고 그 제자(弟子) 길재(吉再)(호(號)는 야은(冶隱))가 정몽주(鄭夢周)의 이학(理學) 계통(系統)을 계승(繼承)하고 그것이 김숙자(金叔慈)(호(號)는 강호(江湖))를 거쳐 김종직(金宗直)(호(號)는 점필제(佔畢齊)에게로 전(傳)하였는데 이 계통(系統)의 학(學)을 받은 유사(儒士)들은 절의(節義)에 대(對)한 관념(觀念)이 가장 강(强)하고 따라서 세조(世祖)의 행사(行事)에 대(對)하여 큰 분노(憤怒)를 품고 세조(世祖)에게 붙어서 공신(功臣)이 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等)을 극도(極度)로 미워함은 물론(勿論)이오 한명회(韓明澮) 같은 사람은 이 공로(功勞)로 국구(國舅)가 되었기 때문에 유사(儒士)들은 왕실(王室)의 외척(外戚)까지를 몹시 미워하여 이때로부터 유사(儒士) 대(對) 공신(功臣) 척리(戚里)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이 벌어져서 이래(爾來) 백여년(百餘年)동안을 정계(政界)의 대소사건(大小事件)이 주(主)로 유사(儒士)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으로부터 일어났고 필경(畢竟) 우리 사회(社會)를 망(亡)쳐버린 붕당(朋黨) 싸움의 시초(始初)인 동서분당(東西分黨)도 유사(儒士) 대(對) 척리(戚里)의 싸움에서 발단(發端)한 것이다.

또 한가지 영향(影響)은 벼슬하는 사람들이 군주(君主)에 충성(忠誠)을 다하다가 세조(世祖)의 독수(毒手)에 걸려서 무참(無慘)히 죽고 그 가족(家族)까지 학살(虐殺) 당(當)하는 것을 보고 세사(世事)의 무상(無常)함을 보고 장태식(長太息)하고 자후(自後)로는 보신지책(保身之策)에 치중(置中)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항직(伉直)한 행동(行動)을 피(避)하려 하였음으로 정계(政界)의 공기(空氣)가 인순고식(因循姑息)과 유유범범(悠悠泛泛)에 흘러서 창조(創造)와 혁신(革新)을 행(行)하려는 활기(活氣)를 전(全)혀 잃으니 이것이 이조일대(李朝一代)를 통(通)하여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이 생기지 못한 주인(主因)이 되었다.

이조개국(李朝開國) 이래(以來)로 서북인(西北人)을 쓰지 아니함으로 서북인(西北人)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혁명(革命)을 성공(成功)한 서북(西北) 맹장(猛將)들도 모두 분기(憤氣)를 품고 향리(鄕里)에 돌아갔으며 특(特)히 태조(太祖)의 아장(牙將)으로 있던 동두란(佟豆蘭)도 태조(太祖)가 성(姓)을 이씨(李氏)를 주고 청해백(淸海伯)을 봉(封)하여 특수(特殊)한 대우(待遇)를 하였으나 역시(亦是) 불만(不滿)을 품고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그 털과 상소문(上疏文)과 함께 봉(封)하여 태조(太祖)에게 올리고 도망(逃亡)하여 그 고향(故鄕)인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으로 돌아가니 태조(太祖)는 후일(後日)에 혹(或) 변(變)을 생(生)할까 두려워하여 그 가족(家族)을 한양(漢陽)으로 옮겨온 일도 있다.

그러던 中 세조(世祖)의 난(亂)이 일어나서 인심(人心)이 불안하게 되자 함경(咸鏡)사람 이시애(李施愛)가 난리(亂離)를 꾸며서 함경감사(咸鏡監司)(신숙주(申叔舟)의 아들)를 죽이고 각지(各地)에서 난민(亂民)이 일어나서 수령(守令)들을 죽였다. 세조(世祖)는 군사(軍士)를 보내어 여러 달만에 평정(平定)하고 이래백년(爾來百年)동안 함경도(咸鏡道)에 停擧를 行하였다.

 

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

세조(世祖)의 다음에 예종(睿宗)은 위(位)에 있은지 일년(一年)이오 성종(成宗)이 왕(王)이되니 이때는 이조(李朝)의 기초(基礎)가 굳어지고 또 여러 가지 제도(制度)가 갖추어졌다. 왕(王)은 유신(儒臣) 김종직(金宗直) 등(等)을 쓰고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문선(東文選)같은 책(冊)을 만들고 또 세조(世祖)때에 시작(始作)하여 끝마치지 못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完成)하니 이는 이후(以後) 수백년(數百年)동안 정치(政治)를 행(行)하는 기틀이 되었다. 집현전(集賢殿)은 세조(世祖)때에 폐(廢)하였으나 성종(成宗)은 홍문관(弘文館)을 새로이 두고 젊은 학자(學者)들을 공부(工夫)시키던 호당(湖堂)도 다시 시작(始作)하였다.

사회(社會)의 계급(階級)에는 네 층(層)이 있어 그 지위(地位)가 직업(職業)과 사회적(社會的) 대우(待遇)를 달리 하였으며 대개(大槪)는 거주지역(居住地域)도 달리하고 또 다른 계급(階級)과 혼인(婚姻)하는 일도 적었다. 여러 계급(階級) 중(中)에 가장 상층(上層)에 있는 것이 양반(兩班)이니 양반(兩班)이라 함은 동반(東班)인 문관(文官)과 서반(西班)인 무관(武官)을 합(合)한 말이다. 공경(公卿)과 사대부(士大夫) 계급(階級)을 통틀어 말함이며 이들은 정치(政治)를 지도(指導)하는 지위(地位)를 차지하여 모든 특권(特權)과 향락(享樂)을 누리었다.

그 다음에 중인(中人) 계급(階級)이 있으니 그들은 의관(醫官) 역관(譯官) 계사(計士) 관상(觀相) 율학(律學) 사자(寫字) 도화(圖畵) 등(等) 국가(國家)에 요긴(要緊)한 기술(技術) 방면(方面)의 일을 맡아보았다.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는 양반과 상민(常民)의 중간(中間)이었으며 이 밖에 이서(吏胥)와 군교(軍校) 같은 층(層)은 보다 얼마쯤 낮은 것이었으나 역시(亦是) 중인(中人) 계급(階級)에 속(屬)하였다. 그 다음에 상민계급(常民階級)은 농업(農業) 공업(工業)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수(數)가 가장 많고 또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이루고 있으나 그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가 낮아서 자기(自己)의 생존권(生存權)을 보전(保全)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양반(兩班)과 중인(中人)에게 눌리어 지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천민계급(賤民階級)은 노비(奴婢)를 비롯하여 배우(俳優) 무당(巫堂) 기생(妓生) 역졸(驛卒) 백정(白丁) 등(等)을 말하는 것이니 노비(奴婢)에는 국사(國事)에 속(屬)하는 것을 공노비(公奴婢)라하고 개인가(個人家)에 속(屬)하는 것은 사노비(私奴婢)라 하며 백정(白丁)에도 지금에 흔히 말하는 소 잡는 사람만이 백정(白丁)이 아니라 유기(柳器) 장피(匠皮) 혁공(革工) 같은 것도 모두 백정(白丁)이라 불렀고 이들은 인권(人權)을 주장(主張)하지 못함은 물론(勿論)이오 어떤 경우(境遇)에는 우마(牛馬)와 동양(同樣)의 대우(待遇)를 받았다.

외교관계(外交關係)에 있어서는 명(明)나라에 대(對)한 조공(朝貢)과 일본(日本) 남양(南陽) 등(等)에 대(對)한 교린(交隣)이 있었는데 이러한 외교(外交)의 이면(裏面)에는 인국(隣國)들과 평화(平和)로운 무역(貿易)을 행(行)하려는 것이 있었다. 명(明)나라와의 관계(關係)는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무역(朝貢貿易)을 행(行)하고 저쪽에서 사신(使臣)이 오면 이를 칙사(勅使)라 하여 특별(特別)히 대우(待遇)하였는데 조공무역(朝貢貿易)이라 함은 물공(物貢)의 형식(形式)을 통(通)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의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것으로 이는 중국(中國) 사람들의 대국연(大國然)하는 자존심(自尊心)에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 공물(貢物)의 형식(形式)으로 내어가는 물건(物件)은 금은(金銀), 인삼(人蔘), 표피(豹皮), 저포(苧布), 화문석(花紋席), 나전(螺鈿), 백지(白紙) 등(等)이었고 그 대신(代身) 저쪽에서 들어오는 것은 주(主)로 견단(絹緞), 자기(磁器), 약재(藥材), 서적(書籍) 등(等)이었으며 이밖에도 국경(國境) 지대(地帶)의 사무역(私貿易)과 밀무역(密貿易)을 통(通)하여 두 나라 사이의 물자(物資)가 많이 교류(交流)되었으니 이 시대(時代)는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비교적(比較的) 자유(自由)로 중국(中國)으로 왕래(往來)하면서 학문(學問)도 배우고 무역(貿易)도 하던 때와 달라서 공적(公的)으로 중국(中國)을 다니는 이외(以外)에는 왕래(往來)를 엄금(嚴禁)하는 쇄국시대(鎖國時代)라 물자(物資)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이 여의(如意)치 못함으로 압록강(鴨綠江) 안(岸)의 중강진(中江鎭)과 두만강(豆滿江)안(岸)에서 년(年) 일이차(一二次)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외(外)에 밀역(密易)이 연중(年中) 성행(盛行)하였다. 명(明)나라에 바치던 금은(金銀) 공(貢)은 세종(世宗)때에 외교(外交) 교섭(交涉)에 의(依)하여 면제(免除)되고 그 후(後)로는 우리 나라에서 금은(金銀)이 나지 아니함을 보이기 위(爲)하여 금은광(金銀鑛)을 폐(廢)한 일도 있었다.

일본(日本)과의 사이는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대마도(對馬島)를 친 이후(以後)로 한때 교통(交通)이 그쳤었으나 대마도(對馬島)는 산(山)이 많고 식량(食糧) 기타(其他) 물산(物産)이 적어서 우리 나라의 힘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음으로 저쪽에서 사죄(謝罪)의 뜻을 표(表)하고 다시 서로 화호(和好)하기를 간청(懇請)하였다. 이에 세종(世宗)은 삼포(三浦)를 열어서 대마도인(對馬島人)이 와서 무역(貿易)함을 허락(許諾)하니 삼포(三浦)라 함은 제포(薺浦) (지금의 창원군(昌原郡)마산방(馬山傍) 제덕리(薺德里)의 내이포(乃而浦) 부산포(釜山浦) 울산(蔚山)의 염포(塩浦)이다. 그 후(後)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어서 해마다 대마도(對馬島) 왕(王)이 보내는 배를 오십(五十)척(隻)으로 한정(限定)하며 또 미두(米豆) 이백석(二百石) 씩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무역품(貿易品)을 왜인(倭人)들은 동(銅) 은(銀) 유황(硫黃) 등(等)의 광산물(鑛産物)을 비롯하여 남양(南洋)의 특산(特産)인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등(等)을 들여오고 우리 나라에서는 면포(綿布) 마포(麻布) 미두(米豆) 백지(白紙) 서적(書籍)(특히 대장경(大藏經))을 보내었다.

여진(女眞)과의 사이에는 두만강(豆滿江) 기슭에 경성(鏡城) 경원(鏡源)의 무역소(貿易所)를 열어서 그들의 마필(馬匹)과 여러 가지 수피(獸皮) 즉(卽) 토표피(土豹皮), 초서피(貂鼠皮), 웅피(熊皮), 녹피(鹿皮)를 들여오는 대신(代身) 이쪽에서 금은(金銀), 마포(麻布), 저포(苧布), 면포(綿布), 농구(農具), 부정(釜鼎), 유기(鍮器), 백지(白紙), 염장(鹽醬), 주(酒) 등(等)을 내어 보냈으며 또 여진(女眞)의 추장(酋長)들에게 직첩(職帖)을 주어서 그 계급(階級)에 따라 서울에 와서 진상(進上) 숙배(肅拜)한 이름으로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하게 하니 이는 조공무역(朝貢貿易)의 형식(形式)을 본뜬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지금의 태평로(太平路)에 태평관(太平館)이 있어 명(明)나라 사신(使臣)들을 접대(接待)하고 동대문(東大門)안에는 북평관(北平館)이 있어 왜인(倭人)들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와서 묵을 때면 후시(後市)라는 명목(名目)으로 館所 에서 무역(貿易)이 행(行)하여 졌다. 이 밖에 유구국(琉球國)에서도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설당(雪糖), 석(錫), 서각(犀角) 등(等)의 여러 가지 진기(珍奇)한 남양산물(南洋産物)을 가져오고 우리 나라의 면포(綿布), 마포(麻布), 대장경(大藏經) 등(等)을 얻어 갔으며 섬라(暹羅)(지금의 태국(泰國))에서도 방물(方物)을 가지고 사신(使臣)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外國) 사신(使臣)이 우리 국경(國境)에 들어오면 정부(政府)에서 그들을 후대(厚待)하는 뜻으로서 서울까지 오는 비용(費用)과 서울에서 머물고 다시 돌아 갈때 국경(國境)까지 나가는 비용(費用)을 부담(負擔)하였고 그 보내는 물건(物件)도 가져온 물건(物件)의 몇배(倍)를 주었음으로 남양(南洋)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게 되었고 우리 나라의 부담(負擔)이 적지 아니하니 이는 외국(外國)이 우리 나라에 조공(朝貢)한다는 형식(形式)을 꾸미고 무역상(貿易上) 실권(實權)을 취(取)하려 함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외국(外國)의 조공(朝貢)을 받는 것을 만족(滿足)하게 생각할 뿐이오 우리 나라 사람이 해외(海外)에 나가서 무역(貿易)하는 길을 전연(全然) 폐쇄(閉鎖)하여 버리니 이 까닭에 무역관계(貿易關係)에는 항상(恒常) 손(損)을 보고 국민(國民)의 해외(海外) 웅비(雄飛)의 기상(氣象)은 날로 사라졌다.

성종(成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팔구(八九)십년(十年)이라 국가(國家)의 기초(基礎)가 굳어진 때라 점차(漸次) 보수(保守)의 경향(傾向)이 생(生)하고 모든 부면(部面)에 경화(硬化) 침체(沈滯)의 빛이 농후(濃厚)하여지니 사가(史家)들은 이를 성극시대장쇠(盛極時代將衰)의 기(期)라 한다.

특(特)히 귀족(貴族)의 세력(勢力)이 강(强)하고 반상(班常)의 구별(區別)이 엄(嚴)하며 전국적(全國的)으로 불과(不過) 삼십(三十) 내외(內外)의 족벌(族閥)이 정치(政治)를 전행(專行)하고 지방별(地方別)로는 경기(京畿) 충청(忠淸) 경남(慶南)의 삼도(三道)가 귀족(貴族) 주거(住居)의 중심(中心)이 되었다. 또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제도(制度)가 더욱 엄격(嚴格)하여 여자(女子)의 개가(改嫁)를 불허(不許)하고 재가(再嫁)녀(女)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국가(國家)가 서용(敍用)치 아니하고 귀족(貴族)들은 과부(寡婦)를 금고(禁錮)하는 것을 가내(家內)의 영예(榮譽)로 여겼으며 첩(妾)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서얼(庶孼)이라 하여 천대(賤待)하고 서자(庶子)들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니 이 서자(庶子)는 소위(所謂) 그 아비된 자(者)가 향락(享樂)과 음욕(淫慾)의 만족(滿足)을 얻기 위(爲)하여 생(生)긴 산물(産物)이오 모복(母腹)으로부터 낙지(落地)하는 순간(瞬間)이 이미 천대(賤待)를 받을 운명(運命)을 가졌으니 서자(庶子)의 서자(庶子)된 죄(罪)는 아비에게 있는 것이오 서자(庶子)자신(自身)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된 자(者)는 첩(妾)을 축(蓄)하는 날에 벌써 서자(庶子)의 출생(出生)할 것이 약속(約束)되었고 그 서자(庶子)가 사회(社會)로부터 천대(賤待)를 받는 것을 알면서 축첩생활(蓄妾生活)을 하는 것은 그 심신(心身)의 부패(腐敗)한 所致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오 더욱이 서자얼(庶子孼) 천대(賤待)의 제도(制度)는 축첩(蓄妾)을 가장 많이 하는 귀족계급(貴族階級)들이 만든 것이다.

세조(世祖)때에는 강력(强力)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행(行)하여 비록 간관(諫官)이라 하더라도 언론(言論)의 자유(自由)를 행(行)치 아니하더니 성종(成宗)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고 언어(言語)를 개(開)하여 간관(諫官)들의 언론자유(言論自由)를 인(認)하니 이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이 벌어졌다. 유신(儒臣)들은 세조(世祖)때에 가슴속에 쌓여 있으되 발표(發表)할 수 없었던 울분(鬱憤)이 일시(一時)에 터져 나와서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조금이라도 과오(過誤)를 범(犯)함이 있는 때는 일호(一毫)의 관용(寬容)이 없이 논박(論駁) 공격(攻擊)하고 어느 한 사람이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하면 유신(儒臣) 전체(全體)가 그를 응원(應援)하여 조정(朝廷)은 유신(儒臣)이 지도권(指導權)을 잡고 성종(成宗)도 대체(大體)로 유신(儒臣)들의 말을 청종(聽從)하였다.

이때의 유교(儒敎)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한학(漢學)과 달라서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인 성리학(性理學)을 말하는 것이니 성리학(性理學)을 또한 이기설(理氣說)이라 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제자(弟子) 가운데서 성리학(性理學)에 가장 밝은 사람은 정여창(鄭汝昌) (호(號) 일두(一蠹)) 김굉필(金宏弼)(호(號) 한훤당(寒暄堂))이니 정여창(鄭汝昌)의 이기론(理氣論)에는 「理의 在하는 바에 氣가 또한 聚하고 氣가 動하는 바에 理가 또한 着하여 彼此의 別이 없다. 그러나 理는 혼연지선(渾然至善)하여 爲함이 없고 氣는 순리청탁(醇醨(漓)淸濁)하여 運用이 있어 피차(彼此)의 別이 있으니 이를 一하되 二하고 二하되 一한다 함이다. 理가 없으면 氣가 응주(凝做)할 바가 없고 氣가 없으면 理가 流行치 못한다」하니 이것이 理氣說의 大要이다. 이 이기설(理氣說)의 새로운 이론(理論)은 청년학자(靑年學者)들 사이에 환영(歡迎)되고 李朝一代 學問의 中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였음으로 교육(敎育)과 과거(科擧)도 또한 유학(儒學)을 中心으로 하였으니 교육기관(敎育機關)으로는 서울에 성균관(成均館)(지금의 국립대학교)을 비롯하여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고 외방(外方)에는 고을마다 향교(鄕校)가 있고 마을에는 서당(書堂)이 있어 주(主)로 유교(儒敎)의 경전(經典)을 가르쳤고 이밖에 특수(特殊) 과목(科目)으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서학(書學) 화학(畵學)을 연구(硏究)하는 기관(機關)이 있고 또 한어(漢語) 여진어(女眞語) 몽고어(蒙古語) 왜어(倭語) 등(等)을 가르치는 기관(機關)도 있다.

과거(科擧)는 국가(國家)에서 인재(人才)를 취(取)하는 최고(最高) 시험(試驗)이라 태종(太宗) 세종(世宗)의 시대(時代)에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등(等) 주요(主要)한 현실문제(現實問題)에 대(對)한 논문(論文)을 시험(試驗)하더니 성종(成宗) 이후(以後)에는 그러한 논문(論文) 시험(試驗)이 점점 적어지고 주(主)로 문장(文章)을 취(取)하는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이 행(行)하니 이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은 그 속에 치국(治國) 경륜(經綸)이 있는 것도 아니오 국민생활(國民生活) 상(上)에 어떠한 관련(關聯)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다만 공교(工巧)로운 심장적구(尋章摘句)와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일삼는 것이니 이 까닭에 소위(所謂) 학문(學問)은 형식(形式)에 흐르고 실용(實用)이 없는 귀족계급(貴族階級)의 유희물(遊戱物)이 되고 말았다. 그럼으로 정여창(鄭汝昌)같은 이는 교시(巧詩) 하는 士를 取하지 아니하여 말하되 「詩는 성정(性情)의 發함이라 어찌 설설(屑屑)하게 工夫를 강하(强下)하리오」하였다.

이조개국(李朝開國) 後에 외방관리(外方官吏)의 민폐(民弊)를 作하는 者가 있고 없음을 조사(調査)하기 爲하여 자주 경차관(敬差官)이라는 특사(特使)를 보내더니 그 後에 그 관명(官名)을 어사(御使)라 고쳐서 비밀(秘密)히 각도(各道)에 보내 이가 암행어사(暗行御史)의 기원(起源)이다. 성종(成宗)때에 이르러 王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여 官吏가 罪를 받는 者가 極히 적고 태평성대(泰平盛代)라고 일컬었으나 그 반면(反面)에 민폐(民弊)를 작(作)하는 관리(官吏)가 많이 생겨서 사회내부(社會內部)에 퇴폐(頹廢)의 기운(氣運)이 싹트기 시작(始作)하였다. 이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각도(各道)에 파견(派遣)하니 당시(當時) 조지서(趙之瑞) 정광필(鄭光弼) 김일손(金馹孫) 같은 이가 모두 명어사(名御使)였다.

어사(御使)의 임무(任務)는 대체(大體)로 국법(國法)을 지키지 않는 者, 부모(父母)에 불효(不孝)하는 양풍미속(良風美俗)을 해(害)하는 者, 수령(守令)이나 이서(吏胥)들이 국곡(國穀)을 도적(盜賊)하고 인민(人民)을 괴롭게 하는 者等 법률(法律)과 도덕(道德)에 어그러지는 행위일체(行爲 一切)를 조사(調査)하고 그것을 범(犯)한 者를 발견(發見)할 時는 王의 대리(代理)의 자격(資格)으로 그 고을에 출도(出道)하여 혹(或)은 수령(守令)을 파면(罷免)시킬 수도 있고 혹(或)은 죄인(罪人)을 선참후계(先斬後啓)할 수도 있음으로 외방(外方)에서는 어사(御使)를 호(虎)라고도 불렀다.

어사(御使)가 수월(數月)의 동안에 일도(一道)를 순행(巡行)하는 것임으로 간리(奸吏)들의 소행(所行)을 一 一히 탐지(探知)할 수는 없으나 한번 출동(出動)하면 일도(一道)가 숙연(肅然)하여 간악(奸惡)을 자행(恣行)치 못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에 축묘(畜猫)가 있으매 서(鼠)가 사행(肆行)치 못한다.」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

성종(成宗) 왕비(王妃) 윤씨(尹氏)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生母)라 윤비(尹妃)가 왕(王)에게 불손(不遜)한 일이 있음으로 왕(王)이 폐위(廢位)하였다가 죽였다. 연산군(燕山君)은 성질(性質)이 원래(元來) 난폭(亂暴)한데 그 모(母)가 원사(寃死)함을 알고 심중(心中)에 깊은 악감(惡感)을 품고 있었다. 이때 신하(臣下)들 중(中)에는 후일(後日)에 연산군(燕山君)이 왕위(王位)에 오르면 반드시 국사(國事)를 크게 그르치리라고 풍간(諷諫)한 사람도 있었으나 성종(成宗)도 그 성미(性味)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참아 세자(世子)를 폐(廢)할 수가 없다하여 실행(實行)치 못하고 마침내 연산군(燕山君)을 세워서 이조(李朝) 쇠퇴(衰頹)의 단(端)을 열었으니 이는 전(專)혀 성종(成宗) 유약(柔弱)의 소치(所致)이다.

연산군(燕山君)이 왕(王)이 된 후(後)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은 여전(如前)히 격화(激化)하였다. 성종(成宗)은 항상(恒常) 유신(儒臣)을 옹호(擁護)한 까닭에 유신(儒臣)의 언론(言論)이 실행(實行)되었지만 연산군(燕山君)은 혼암(昏暗)한 임금이라 유신(儒臣)들이 공신척리(功臣戚里)를 공격(攻擊)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또 그때 조정(朝廷)에는 공신(功臣)의 자손(子孫)들과 외척(外戚)의 무리가 권세(權勢)를 잡고있어 유신(儒臣)들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런데 김종직(金宗直)이 일즉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을 지은 일이 있으니 이 글은 옛날 중국(中國)에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라는 어린 임금을 세우고 섬기다가 죽인 일이 있는데 은연(隱然)히 의제(義帝)를 단종(端宗)에 비(比)하고 항우(項羽)를 세조(世祖)에게 비(比)하고 의제(義帝)를 조(弔)함은 곳 단종(端宗)을 조(弔)함이라 종직(宗直)의 제자(弟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이 되어 이 글을 사초(史草)에 기재(記載)하고 그 끝에 「忠憤之文」이라고 附記하였다.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 중(中)의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等)이 이 사초(史草)를 보고 이는 세조(世祖)의 일을 비방(誹謗)하는 것이라 하여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리니 연산군(燕山君)은 이를 대역죄(大逆罪)라 하여 김종직(金宗直)의 시체(屍體)를 파내어 버리고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等)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弟子)들을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 또는 사화(史禍)라 하고 이조(李朝) 유학계(儒學界)에 제일차(第一次)의 겁운(劫運)이었다.

연산군(燕山君)은 음탕(淫蕩)하고 유연(遊宴)을 좋아하여 막대(莫大)한 재정(財政)을 소비(消費)하고 유연비(遊宴費)가 부족(不足)하게 되자 인민(人民)으로부터 공물(貢物)을 가징(加徵)하여 조종(祖宗) 이래(以來)의 규준(規準)을 깨뜨리고 간인배(奸人輩)를 등용(登用)하여 국정(國政)을 혼란(混亂)케 하더니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있은지 육년(六年)만에 그 생모(生母) 윤씨(尹氏)를 폐(廢)하여 죽일 것을 주장(主張)한 사람들을 조사(調査)하여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 보내니 이를 갑자사화(甲子士禍)라 하고 유학계(儒學界)의 제이차(第二次) 겁운(劫運)이었다. 두번의 사화(士禍)가 있은 후(後)로 연산군(燕山君)은 학정(虐政)이 더욱 심(甚)하여 정치(政治)가 어지럽고 백성(百姓)이 살 수 없으니 이에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等)이 반정운동(反正運動)을 일으키어 연산군(燕山君)을 폐(廢)하여 강화도(江華島)의 교동(喬桐)에 내치고 연산군(燕山君)의 아우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推戴)하여 세우니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후(後)의 국정(國政)

중종(中宗)의 반정(反正)은 연산군(燕山君)의 학정(虐政)에 괴로움을 받던 백성(百姓)과 두 번의 사화(士禍)에 기(氣)가 꺾어진 유학계(儒學界)에 한 광명(光明)을 주고 활기(活氣)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사회(社會)의 행방면(行方面)에 개혁(改革)의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이때 김굉필(金宏弼)의 제자(弟子)에 조광조(趙光祖)(호(號) 정암(靜菴))가 있으니 그는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고 정치(政治)를 정화(淨化)함으로써 기임(己任)을 삼고 중종(中宗)의 신임(信任)을 얻어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等) 청년학도(靑年學徒)와 더불어 그 이상(理想)한 바를 실현(實現)하기에 노력(努力)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향약법(鄕約法)을 시행(施行)하여 지방자치(地方自治)의 제도(制度)를 세우니 향약(鄕約)이라 함은 중국(中國) 송(宋)나라 사람들이 시작(始作)한 것으로 한 지방(地方)사람끼리 자치적(自治的)인 규약(規約)을 만들어 선(善)한 일을 서로 권면(勸勉)하고 악(惡)한일을 서로 규간(規諫)하고 예의(禮義)로써 서로 교제(交際)하고 환난(患難)을 서로 구제(救濟)한다는 네 가지 취지(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때에 공신(功臣)에 濫參한 자(者)가 많았으니 원래(元來) 반정공신(反正功臣)이라 함은 반정사업(反正事業)을 획책(劃策)하고 신명(身命)을 그 사업(事業)에 바친 자(者)를 말함이다. 그런데 중종(中宗)의 공신중(功臣中)에 거사(擧事)하는 날에 그 소문(所聞)을 듣고 비로소 와서 열(列)에 참거(參擧)한 자(者) 실제(實際)로 이 사업(事業)에 공헌(貢獻)한 일이 없이 공신(功臣)들과 인연(因緣)이 있는 자(者)들이 공신명부(功臣名簿)에 기록(記錄)됨으로 인(因)하여 공신(功臣)인 자(者)가 칠십(七十)여인(餘人)에 달(達)하고 공신(功臣)들은 국가(國家)로부터 공신전(功臣田)을 받아서 세습(世襲)하고 군(君)을 봉(封)하여 사회적(社會的) 특권(特權)을 향유(享有)하니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이러한 공신(功臣)들을 삭제(削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당시(當時) 반정(反正)의 공(功)이 있는 공신(功臣)들 중(中)에는 특권(特權)을 남용(濫用)하여 세력(勢力)을 얻기와 재화(財貨)를 모으기에만 힘쓰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이는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반정사업(反正事業)을 행(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귀(富貴)를 얻으려 하는 반정(反正) 모리배(牟利輩)의 행동(行動)이었다. 유신(儒臣)대(對) 공신(功臣)의 싸움은 해를 지낼수록 더욱 심각(深刻)하여지는 터이라 조광조(趙光祖) 유신일파(儒臣一派)가 이를 그대로 간과(看過)할 이(理)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신파(功臣派)에 어떠한 과실(過失)이 있는 때는 총궐기(總蹶起)하여 공격(攻擊)하고 왕(王)이 자기(自己)들의 의견(意見)을 듣지 아니하는 때에는 동맹(同盟)퇴직(退職)한 일도 이삼차(二三次) 있었으나 중종왕(中宗王)은 암왕(暗王)이라 조광조(趙光祖)를 신임(信任)한 것도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신임(信任)이 아니라 다만 일반세론(一般世論)을 듣고 그를 현인(賢人)이라 하여 대용(大用)한 것이다. 그런데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중종(中宗)을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聖君)을 만들고 사회(社會)로 하여금 성의정심(誠意正心)할 것을 강요(强要)하다 깊이 탄(歎)하였다.

이 까닭에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폐정(弊政)을 개혁(改革)한 것이 많아서 백성(百姓)으로부터 환영(歡迎)을 받는 반면(反面)에 공신(功臣) 귀족(貴族)들로부터 극도(極度)의 미움을 받고 왕(王)도 또한 점점(漸漸)으로 염증(厭症)을 내게 되었다.

조광조(趙光祖) 一派는 專혀 도학(道學)을 主張하여 小學과 같은 수신서(修身書)와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성리학(性理學)을 爲主하고 시(詩) 부(賦) 표(表) 책(策)과 같은 문장학(文章學)을 배척(排斥)하며 인재(人才)를 취(取)함에 있어도 문장(文章)으로써 과거(科擧)를 보는 현행(現行)시험법(試驗法)을 폐지(廢止)하고 인물고사(人物考査)로써 사람을 취(取)하는 현량과(賢良科)를 행(行)하기를 건의(建議)하니 이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는 정광필(鄭光弼)이 홀로 반대(反對)하여 말하되 현량과(賢良科)의 이름은 비록 좋으나 인심(人心)이 순후(淳厚)치 못한 금일(今日)에는 반드시 폐해(弊害)가 생(生)할 것이니 행(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왕(王)은 조광조(趙光祖)의 말을 좇아 마침내 시행(施行)하였다. 그러나 현량과(賢良科)의 시험관(試驗官)은 주(主)로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가 당(當)하고 있었음으로 그 취(取)하는바 사람은 거의 성리학(性理學) 파(派)들이어서 문장(文章)을 주(主)하는 선비들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인재(人才)를 씀이 편벽(偏僻)하다는 비난(非難)이 각방면(各方面)에서 일어났다.

이조(李朝)의 전제(田制)는 국유제(國有制)이오 매매(買賣)와 전당(典當)을 금(禁)하더니 징병제도(徵兵制度)에 입영(入營)하는 비용(費用) 또 병역복무중(兵役服務中) 의식제비(依食諸費)를 군인(軍人)이 자담(自擔)하는 관계(關係)로 농민(農民)이 군대(軍隊)에 징소(徵召)되는 때에는 그 입영(入營)하는 모든 비용(費用)을 마련하기 爲하여 경작(耕作)하던 土地를 전당(典當)치 아니할 수 없고 전당기간(典當期間)은 五年으로하되 그 期間이 지나도 부채(負債)를 갚지 못하는 때는 土地가 대금업자(貸金業者)의 소유(所有)로 넘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국법(國法)에 위반(違反)되는 일이나 국가(國家)에서는 군대징소상(軍隊徵召上) 금지(禁止)할 수 없는 일임으로 묵인(黙認)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 전제파탄(田制破綻)의 시초(始初)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전당행위(典當行爲)가 비밀리(秘密裏)에 행(行)하더니 내종(乃終)에는 공공연(公公然)하게 관습화(慣習化)하고 소유(所有)의 이전(移轉)도 자유(自由)로 행(行)하여 완전(完全)한 사유제(私有制)로 화(化)하고 따라서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들은 남의 토지(土地)를 경작(耕作)하고 수확물(收穫物)의 일부(一部)를 지주(地主)에게 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이 발생(發生)한 시(始)이오 세종(世宗) 말년(末年)으로부터 세조(世祖)때에 걸쳐서 생긴 일이다. 그 後에는 전당기간(典當期間) 五年이라는 것이 五十日로 단축(短縮)되니 군대(軍隊)로 징소(徵召)되는 군인(軍人)이 오십일(五十日) 기간내(期間內)에 환토(還土)할 수는 없음으로 전당(典當)하는 날이 곧 토지(土地)가 영영(永永) 방매(放賣)되는 날이다.

이 까닭에 빈민(貧民)들의 경지(耕地)는 급속도(急速度)로 부인(富人)의 손에 겸병(兼倂)되고 중종(中宗)때에 이르러서는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이라는 두 계급(階級)이 똑똑히 사회면(社會面)에 나타났다. 강릉(江陵)사람 박수량(朴遂良)은 어전(御前)에서 현량과(賢良科) 시험(試驗)을 마치고 말하되 「평소(平素)에 생각(生覺)하고 있는 바를 한번 전하(殿下)께 아뢰고자 하였는데 이 기회(機會)에 아뢰어도 좋은가」라고 물어서 왕(王)의 허락(許諾)을 받고 아뢰기를 「지금 강릉(江陵) 지방(地方)은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이 허다(許多)하여 농민(農民) 생활(生活)이 대단히 궁핍(窮乏)하니 이것은 하루바삐 고치지 아니하면 국가(國家)의 장래(將來)에 큰 근심이 될 것이니 다시 균전제(均田制)를 행(行)하는 것이 가(可)하다」고 하였다.

중신(重臣)들 중(中)에는 지주(地主)의 토지(土地)를 국가(國家)에서 수상(收上)하여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에게 분급(分給)할 수 는 있으나 그렇게 하면 공연(空然)한 혼란(混亂)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반대(反對)하고 전일(前日)에 분급(分給)한 것을 지주(地主)에게 팔고 농토를 잃었으니 지금 분배(分配)하여 주더라도 또 얼마후(後)에 다시 지주(地主)에게 팔 것이 아니냐하여 응(應)치 아니하였다. 이 문제(問題)가 한번 제의(提議)되자 조정(朝廷)안에는 양론(兩論)이 대립(對立)하고 조광조(趙光祖) 파(派)에서는 토지(土地)를 다시 분배(分配)하자는 혁신론(革新論)을 주장(主張)하여 비록 후일(後日)에 다시 팔아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금일(今日)의 일은 금일(今日)의 정(情)에 맞게 하는 것이 정치(政治)의 본지(本旨)라 하여 기어(期於)히 토지제도(土地制度)를 개혁(改革)하려 하였다. 왕(王)은 중신(重臣)들로 하여금 여러 날 동안 토론(討論)시킨 결과(結果) 한 사람의 토지(土地) 소유(所有)는 오십(五十)결(結) 이내(以內)로 제한(制限)하기로 하니 당시(當時)에 있어서 토지(土地) 소유(所有)를 제한(制限)한 것은 일대(一大) 개혁(改革)이 아닌 것은 아니나 대체(大體)로 지주(地主)계급(階級)에 유리(有利)한 해결(解決)이오 금후(今後)의 토지(土地) 겸병(兼倂)의 방지(防止)에 아무런 실효(實效)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주(地主) 계급(階級)이 이 제도령(制度令)에 대(對)하여 불만(不滿)을 가진 것은 물론(勿論)이다.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의 정치(政治) 이념(理念)은, 그 이상(理想)은 좋으나 그 수단(手段)이 과격(過激)한 점(點)이 많고 공신(功臣) 귀족(貴族)들과의 사이에 극단(極端)의 비타협(非妥協) 태도(態度)를 취(取)하고 성리학파(性理學派) 이외(以外)의 사람에게는 편협(偏狹)한 배타심(排他心)으로 대(對)하여 당시(當時) 현(賢) 재상(宰相)으로 이름난 정광필(鄭光弼)같은 이도 그들은 비부(鄙夫)라고 통매(痛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自己) 일파(一派)의 사람들을 조정(朝廷)에 포열(布列)하고 점점(漸漸) 정치(政治)의 실권(實權)을 잡으며 백성(百姓)들은 그들을 크게 환영(歡迎)하게 되니 이에 왕(王)은 은연(隱然)히 위구(危懼) 불평(不平)한 마음을 품게되었다. 그러던 중(中) 그들은 칠십여인(七十餘人)의 위훈(僞勳)을 삭제(削除)하자고 제의(提議)하니 공신(功臣)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들기 시작(始作)하고 평소(平素)에 유신파(儒臣派)로부터 소인(小人)이라는 이름 밑에 극도(極度)의 배척(排斥)을 받은 남곤(南袞)과 공신(功臣)의 한사람인 심정(沈貞) 등(等)이 주동(主動)이 되어 한편(便)으로 왕(王)의 마음을 동요(動搖)시키고 한편(便)으로 조광조(趙光祖) 파(派)의 모역(謀逆)함을 무고(誣告)하여 중종(中宗) 십사년(十四年) 기묘(己卯)에 조광조(趙光祖)와 그의 동지(同志)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여 즉회(卽回)로 죽이려하는 것을 정광필(鄭光弼)이 왕(王)의 소매를 붙잡고 「신진(新進) 연소(年少)들이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그 행동(行動)이 과격(過激)하였을 뿐이오 이지(異志)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만류(挽留)하여 모두 귀양살이 보내더니 미구(未久)에 적소(謫所)에서 대부분(大部分)을 죽이니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화(禍)가 있은 후(後)에 현량과(賢良科)를 폐(廢)하고 토지제도(土地制度) 한령(限令)이 스스로 소멸(消滅)됨은 물론(勿論)이오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읽는 자(者)는 모두 조광조(趙光祖) 파(派)라 하여 강압(强壓)함으로 이러한 글은 당세(當世)의 큰 금물(禁物)이 되고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等)이 용사(用事)하여 정치(政治)를 어지럽게 하고 정광필(鄭光弼)도 그들에게 물려 나갔다.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等)이 정권(政權)을 잡고 그 당류(黨類)를 이끌어들여 정치(政治)를 어지럽힌 지 십여년(十餘年)에 왕(王)은 그 무리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김안노(金安老)를 써서 그 무리를 없애니 이를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 하여 안노(安老)의 흉악(凶惡)함은 곤정(袞貞)의 무리보다 더 심(甚)하였다. 안노(安老)가 용사(用事)한지 칠년(七年)에 왕(王)은 그 일파(一派)를 모두 제거(除去)하니 간신(奸臣)이 정권(政權)을 잡음이 전후(前後) 십구년(十九年)동안이라 왕(王)은 크게 회오(悔悟)하여 탄식(歎息)하되 「처음에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를 몰아내면 국사(國事)가 잘될 줄 알았더니 곤정(袞貞) 일파(一派)의 간악(奸惡)은 말할 수 없이 심(甚)하였고 이 일파(一派)를 몰아내면 금후(今後)는 아무 일 없을 줄로 생각했더니 安老의 흉악(凶惡)은 전(前)보다 더 심(甚)하여 국가(國家)를 위태(危殆)롭게 하고 백성(百姓)을 괴롭게 하였다. 후세(後世)에 나를 어떤 임금이라 칭(稱)할고」하고 정광필(鄭光弼)을 적소(謫所)로부터 불러들여 정승(政丞)을 삼으니 백성(百姓)들이 천일(天日)을 본듯이 환호(歡呼)하였다. 이에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의 금(禁)이 스스로 풀리고 유신(儒臣)들을 거용(擧用)하였으며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은 비로소 서원(書院)을 짓고 거기에 선현(先賢)을 모시고 유생(儒生)들이 모여서 도학(道學)을 연구(硏究)하게 하니 이것이 이조(李朝) 서원(書院)의 시초(始初)이다.

그러나 중종(中宗)은 암주(暗主)라 조정(朝廷)안에 왕권(王權) 쟁탈(爭奪)의 단서(端緖)가 열리었다. 중종(中宗)도 비(妃)에 선비(先妃) 윤씨(尹氏)는 인종(仁宗)을 낳고 계비(繼妃) 윤씨(尹氏)는 명종(明宗)을 낳았는데 인종(仁宗)의 외숙(外叔)은 윤임(尹任)이오 명종(明宗)의 외숙(外叔)은 윤원형(尹元衡)이니 세인(世人)이 윤임(尹任)을 대윤(大尹)이라 하고 윤원형(尹元衡)을 소윤(小尹)이라 하고 이 두 사람의 세력(勢力) 다툼을 대윤(大尹) 소윤(小尹)의 싸움이라 하였다. 인종(仁宗)은 중종(中宗)을 이어 왕(王)이 된지 겨우 일년(一年)에 승하(昇遐)하고 아들이 없음으로 그 아우 명종(明宗)이 십이세(十二歲)에 왕(王)이 되고 그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정치(政治) 실권(實權)을 잡고 윤원형(尹元衡)이 용사(用事)하니 최초(最初)부터 척리(戚里)파(派)를 미워하는 유생(儒生)들이 명종(明宗) 외가(外家)의 천정(擅政)함을 좋아할 이(理)가 없었다. 이에 윤원형(尹元衡)은 전(前)부터의 정적(政敵)인 대윤(大尹) 일파(一派)와 자기(自己)에게 좋지 못한 감정(感情)을 가지고 있는 유신(儒臣)들을 일체(一切) 배제(排除)하기로 정(定)하고 명종(明宗)이 왕(王)이 되던 을사(乙巳)년에 근거(根據)없는 사실(事實)을 꾸며서 역적(逆賊)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 한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여러 차례 사화(士禍) 중(中) 가장 참혹(慘酷)하고 인심(人心)이 가장 분개(憤慨)하였다. 무오(戊午) 기묘(己卯)의 사화(士禍)는 그 상대자(相對者)가 간신(奸臣)들이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燕山君)이 그 어머니를 위(爲)한 복수(復讐)이니 혹(或)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왕(王)의 모후(母后)와 왕(王)의 외숙(外叔)이 아무런 죄(罪)가 없는 유신(儒臣)들을 무함(誣陷)하여, 절대충성(絶對忠誠)을 다할 것을 학문(學問)의 대본(大本)을 삼고 있는 유학도(儒學徒)들도 왕실(王室)에 대한 충성(忠誠)이 엷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자(前者)에 세 번의 사화(士禍)에는 비록 참혹(慘酷)한 변(變)을 당(當)하였으되 오히려 다시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여 그 이상(理想)하는 바를 정치(政治)의 면(面)에 실현(實現)하려고 노력(努力)하는 사람이 연(連)달아 나왔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以後)에는 그들은 정치(政治)에서 물러나 현실(現實) 세상(世上)과 인연(因緣)을 끊고 산림(山林)에 숨어서 오로지 학문(學問)에만 힘쓰게 되었음으로 정치(政治)와 학문(學問)이 나뉘어져서 소위(所謂) 산림학자(山林學者)라는 것이 생기고 실사(實事)를 떠나서 이론(理論)에 행동(行動)을 떠나서 사색(思索)에 치우치는 경향(傾向)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서경덕(徐敬德)(호(號)는 화담(花潭)) 조식(曺植)(호(號)는 남명(南溟)) 이황(李滉)(호(號)는 퇴계(退溪)) 기대승(奇大升)(호(號)는 고봉(高峯) 이지함(李之菡)(호(號)는 토정(土亭)같은 일대(一代) 명유(名儒)가 나서 명종(明宗)시대(時代)의 유학계(儒學界)에 꽃을 피웠으나 그들은 정치(政治) 방면(方面)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고 비록 이황(李滉)같은 이는 왕(王)의 부름을 받아서 벼슬에 나온 일이 있으나 기회만 있으면 다시 산림(山林)으로 돌아갔음으로 그때에 이를 평(評)하여 산금(山禽)이라고 별명(別名)을 지은 일도 있었다.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

세종(世宗)때에 옥포(玉浦)를 열어서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한 것이 그 후(後) 차츰 왜인(倭人)의 수효(數爻)가 늘어서 수천명(數千名)에 이르며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을 어기는 일이 적지 아니하더니 중종(中宗) 오년(五年)(단기 삼천팔백사십삼년 경오(庚午))에 대마도(對馬島)와 연결(連結)하여 난(亂)을 일으키니 이를 삼포왜란(三浦倭亂) 또는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 한다.

이 난(亂)은 곧 평정(平定)되었으나 그 후(後)에도 중종(中宗) 삼십구년(三十九年)에 통영군(統營郡) 사량(蛇梁)에서 변란(變亂)을 일으킨 일이 있고 명종(明宗) 십년(十年) 을묘(乙卯)에 또 다시 해남군(海南郡) 달량포(達梁浦)에 침입(侵入)하니 이를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한다. 원래(元來) 왜인(倭人)들은 아국(我國)과 무역(貿易)하지 아니하고는 살수가 없는 데이나 그 무역액(貿易額)에는 제한(制限)이 있으므로 왜인(倭人)들은 비밀(秘密)히 제한외(制限外)의 무역(貿易)을 행(行)하고 또 변장(變裝)하고 거주구역(居住區域)밖에 나와서 민가(民家)로 좇아 다니면서 장사하는 한편(便) 국가(國家)의 정치(政治)와 사업(事業)의 기밀(機密)을 정탐(偵探)하여 왜(倭) 본국(本國)에 보고(報告)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에 정부(政府)에서는 지방관리(地方官吏)에게 명(命)하여 그를 엄금(嚴禁)한 관계(關係)로 양국민(兩國民)의 감정(感情)이 서로 좋지 못하여 마침내 삼포(三浦)의 변(變)이 일어나고 그 변(變)이 평정(平定)된 뒤로 종래(從來)의 무역액(貿易額)을 반(半)으로 줄이니 이때로부터 왜인(倭人)의 아국(我國)에 대(對)한 감정(感情)이 더욱 악화(惡化)되었다.

이에 조정(朝廷)에서는 왜인(倭人)들이 왜구(倭寇)를 잡아 바치었다든가 표류(漂流)한 우리 나라 사람을 돌려 보내주었다든가 하여 우리 나라에 공로(功勞)가 있는 자(者)에게는 관직(官職)을 주어 이를 수직왜(守職倭)라 하여 특별(特別)한 대우(待遇)로써 그들을 무마(撫摩)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感情)은 마침내 풀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간교(奸狡)한 꾀로써 우리 나라를 속이고 우리 나라 국정(國政)을 밀정(密偵)하니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들을 대(對)할 때 경어(敬語)를 쓰는 일이 적고 흔히 왜놈이라 불러서 모욕(侮辱)하였다. 김안국(金安國)같은 이는 이를 근심하여 양국민(兩國民) 사이의 감정(感情)이 좋지 못하고 장래(將來) 국가(國家)에 이(利)롭지 못하리라고 경고(警告)한 일도 있었다.

을묘란(乙卯亂)이 일어나자 조정(朝廷)에서는 이준경(李浚慶)으로 도순찰사(都巡察使)를 명(命)하여 치게 하니 이준경(李浚慶)이 호남(湖南)에 내려갔으나 군사(軍士)도 몇 사람되지 아니하고 무기(武器)도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한편으로는 군사(軍士)들을 소집(召集)하고 한편으로는 무기(武器)를 만들어서 영격(迎擊)하더니 적(賊)은 약탈(掠奪)하여 가지고 해상(海上)으로 도망하였다. 이 난(亂)이 있은 후(後)에 한동안 양국(兩國) 교통(交通)이 끊어지더니 일본(日本)이 다시 통상(通商)하기를 간망(懇望)하고 우리 나라에서도 그들을 무마(撫摩)하는 것이 득책(得策)이라 하여 통상(通商)을 허(許)하는데 종래(從來)에 개항(開港)한 청포(菁浦)방면(方面)은 첩첩(疊疊)한 도서(島嶼)에 싸여서 왜선(倭船)이 숨기 쉽고 우리 나라의 척후(斥候)가 보기 어려움으로 부산(釜山) 일항(一港)을 열어서 왜선(倭船)의 내왕(來往)을 허(許)하니 이는 부산(釜山)에 섬이 없어서 왜선(倭船)의 내왕(來往)을 보기 쉬운 까닭이다.

 

사회(社會)의 부패(腐敗)

연산군(燕山君) 이후(以後) 육십여년(六十餘年) 간(間) 간신(奸臣)이 정권(政權)을 잡을 때가 많았고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이르러서는 정치(政治)가 극도(極度)로 어지럽고 화뇌(貨賂)가 성행(盛行)하여 사회(社會)는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외방(外方)의 공물(貢物)은 개국초(開國初)에 지방산물(地方産物)과 호구수(戶口數)를 감안(勘案)하여 정(定)한 것인데 연산군(燕山君)이 이를 가징(加徵)하고 또 산물(産物)이 수량(數量)과 호구(戶口)가 오륙십(五六十) 년간(年間)에 변동(變動)된 것이 적지 아니 하되 조정(朝廷)에서는 그것을 민간(民間) 실정(實情)에 맞도록 개정(改正)치 아니하여 민폐(民弊)가 심(甚)하였다.

군역(軍役)은 군포(軍布)을 바치고 징소(徵召)됨을 면(免)하는 제도(制度)가 행(行)하였는데 이는 각(各) 진보(鎭堡)가 군포(軍布)를 받아 가지고 군인(軍人)을 용인(傭人)하기 위(爲)함이다. 그러나 진보(鎭堡)의 주장(主將)이란 자(者)들은 군포(軍布)로써 사복(私腹)을 채우고 군사(軍士)를 용인(傭人)치 아니 하는 까닭에 각(各) 진보(鎭堡)의 실제(實際) 인원(人員)은 정원수(定員數)의 천(千)의 이삼(二三)에도 달(達)치 못하고 군적(軍籍)에는 허명(虛名) 가명(假名) 심지어(甚至於) 구명(狗名) 묘명(猫名)까지 씌어있었다. 그리고 한번 군포(軍布)를 바치기 시작(始作)한 사람은 매년(每年) 계속(繼續)하여 바치기로 되어있는데 혹(或)은 그 사람이 사망(死亡)한 뒤에도 여전(如前)히 징포(徵布)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 백골징포(白骨徵布)라하고 혹(或)은 유아(乳兒)에게도 徵布하였으니 이를 황구(黃口)징병(徵兵)이라 하고 혹(或)은 사람이 고역(苦役)을 견디지 못하여 전가(全家)를 거느리고 도망(逃亡)하여 버리면 그 군포(軍布)를 그의 일족(一族)으로부터 받고 일족(一族)이 없으면 절린(切隣)으로부터 징수(徵收)하니 이는 군포(軍布)가 주장(主將)의 사수입(私收入)이 되는 까닭에 사망(死亡) 유아(乳兒) 도망(逃亡) 같은 사실(事實)을 국가(國家)에 보고(報告)하지 아니하고 계속(繼續) 징수(徵收)하는 것이며 이로 인(因)하여 진보(鎭堡)에는 매년(每年) 고정(固定)불변(不變)하는 군포(軍布) 수입(收入)이 있었다. 그럼으로 이때에는 각(各) 진보(鎭堡)의 가격(價格)이 군포(軍布) 필수(疋數)에 정(定)해져서 그 가격(價格)의 다소(多少)로써 지위(地位)의 고하(高下)를 정(定)하는 것이었다.

이서(吏胥)의 폐망(弊亡) 전(前)부터 있는 일이지만 중종(中宗) 명종(明宗)의 전후(前後) 삼십여년(三十餘年) 간(間) 중앙(中央)의 정치(政治)가 어지러움으로 인(因)하여 더욱 심(甚)하여져서 모든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백성(百姓)들은 그 생활(生活)을 유지(維持)할 수 없었고 당시(當時) 군현(郡縣)의 수(數)는 삼백이십(三百二十) 여(餘)인데 군현(郡縣)이 너무 많아서 백성(百姓)의 부담(負擔)이 과중(過重)함으로 이를 폐합(廢合)하여 백성(百姓)의 부담(負擔)을 경감(輕減)하려고 기도(企圖)한 일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이서(吏胥)의 실직(失職)하는 자(者)가 많게 됨으로 군현(郡縣)의 실권(實權)을 잡고 있는 이서(吏胥)들은 중앙정부(中央政府) 내(內)의 간신배(奸臣輩)들과 결탁(結託)하여 극력(極力)으로 저해(沮害)한 일도 있었고 수령(守令)들은 중앙(中央)으로부터 임명(任命)되어 삼년(三年)이라는 임기(任期)(임기(任期)에는 신축(伸縮)이 있었다.)를 지내는데 지방(地方)의 실정(實情)을 잘 알지 못함으로 그 대부분(大部分)은 이서(吏胥)의 손에 사무(事務)를 맡겨 버리는 형편(形便)이어서 백성(百姓)들은 수령(守令)보다도 이서(吏胥)를 두려워하였으니 이 까닭에 국가(國家)의 말단행정(末端行政)은 이서정치(吏胥政治)로 화(化)하였다.

조식(曺植) 같은 이는 명종(明宗)에게 상서(上書)하여 왕(王)의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과부(寡婦)로서 정치(政治)를 어지럽게 한다는 과부간정론(寡婦干政論)과 군현(郡縣)의 이서배(吏胥輩)들이 국사(國事)를 그르치고 있다는 이서망국론(吏胥亡國論)을 올려 세인(世人)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케 한 일도 있었다.

이때 유신(儒臣)들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어서 비록 기(氣)가 꺾이었으나 그 잠재(潛在)한 힘은 더욱 굳세어 공신척리(功臣戚里)들을 미워하는 생각이 날로 강(强)해지더니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음에 종래(從來) 왕후(王后)의 힘을 배경(背景)으로 하여 온갖 횡포(橫暴)를 자행(恣行)하던 윤원형(尹元衡)은 의지(依支)할 곳이 없는 일독부(一獨夫)라 유신(儒臣)들은 일제(一齊)히 궐기(蹶起)하여 마침내 윤원형(尹元衡)을 몰아내고 무리를 일소(一掃)하였다.

명종(明宗)의 뒤를 이어 선조(宣祖)가 왕(王)이 되니 이때는 명상(名相) 이준경(李浚慶)이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조정(朝廷)이 유신(儒臣) 일색(一色)으로 조직(組織)되었다. 세조(世祖)때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파의 싸움이 일어난 이래(以來) 일백십여(一百十餘) 년(年)만에 비로소 유신(儒臣)이 완전(完全)히 정권(政權)을 잡으니 이로부터 그 이상(理想)하는 바의 정치(政治)를 실현(實現)할 시기(時機)가 도래(到來)한 것이다.

그러나 이준경(李浚慶)은 그 임종(臨終) 유차(遺箚)에 「지금(只今) 사습(士習)이 부허(浮虛)하여 허위(虛僞)가 풍(風)을 작(作)하니 붕당(朋黨)의 점(漸)이 있다」고 경고(警告)하니 당시(當時) 유사(儒士)들이 경조(輕躁)하여 독실(篤實)한 풍(風)이 없고 고언(高言) 대담(大談)을 일삼고 사람의 조그마한 과실(過失)이라도 관용(寬容)함이 없이 공격(攻擊)하기를 좋아함으로 반드시 붕당(朋黨)이 생긴다고 예언(豫言)한 것이다.

이 유차(遺箚)가 한번 들어오자 조정(朝廷) 제신(諸臣)들은 붕당(朋黨)이 없음을 극력(極力) 변명(辨明)하고 이이(李珥)같은 이는 이준경(李浚慶)이 무근(無根)한 말로써 사림(士林)을 화독(禍毒)하는 것이라 하여 공박(攻駁)하고 심지어(甚至於) 이준경(李浚慶)을 추죄(追罪)하자는 격론(激論)까지 일어난 일이 있으니 이는 자기(自己)들이 결(決)코 붕당(朋黨)을 만들지 않을 것을 맹서(盟誓)함과 같음이다.

그러나 이준경(李浚慶)이 죽은지 사년(四年)만인 선조(宣祖) 팔년(八年) 을해(乙亥)(단기 삼천구백팔년)에 마침내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기고 말았다. 처음에 심의겸(沈義謙)은 왕실(王室)의 외척(外戚)으로서 명종(明宗)때에 간신(奸臣)들의 행악(行惡)이 심(甚)한 중(中)에서 유사(儒士)들을 구활(救活)한 일이 많았음으로 비록 심(沈)이 척리파(戚里派)에 속(屬)하되 유신(儒臣)들의 호감(好感)을 얻고 있으며 김효원(金孝元)은 신진(新進) 유사(儒士)로써 연소유신(年少儒臣)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었는데 김효원(金孝元)은 심의겸(沈義謙)을 척리파(戚里派)라 하여 배격(排擊)하고 심의겸(沈義謙)은 김효원(金孝元)이 일직 권신(權臣)의 문(門)에 출입(出入)하였다 하여 멸시(蔑視)한 관계(關係)로 두 사람사이에 갈등(葛藤)이 생겼다. 이에 심의겸(沈義謙)을 우(右)하는 자(者)와 김효원(金孝元)을 우(右)하는 자(者)가 생기고 경조부박(輕佻浮薄)한 무리들이 마치 정월(正月) 초생(初生) 줄다리기에 양편(兩便)에 서로 와서 덧붙듯이 혹(或)은 심의겸(沈義謙)파(派)에 붙고 혹(或)은 김효원(金孝元)파(派)에 붙어서 조정(朝廷)안이 양당(兩黨)으로 갈라지니 심(沈)의 집은 서울의 서편(西便)에 있음으로 그를 서인(西人)이라 하고 김(金)의 집은 동편(東便)에 있음으로 동인(東人)이라 하고 또 노성파(老成派)는 대개(大槪) 서인(西人)이 되고 소장파(少壯派)는 대개(大槪) 동인(東人)이 되니 유신(儒臣) 대 공신척리(功臣戚里)파(派)의 백십여년간(百十餘年間)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은 역시(亦是) 유사(儒士) 대(對) 척리(戚里)의 사소(些少)한 감정(感情) 소격(疏隔)을 계기(契機)로 하여 그 형태(形態)가 일변(一變)하여 동류(同流) 상잔(相殘) 동지(同志) 상식(相食)하는 유신(儒臣) 대(對) 유신(儒臣)의 추악(醜惡)한 당쟁(黨爭)으로 화(化)하였다.

당쟁(黨爭)이 한번 일어난 후(後) 조정(朝廷)안에는 중정(中正) 불편(不偏)한 자(者)가 거의 없고 오직 자당(自黨)의 이해를 위(爲)하여 움직여서 정치(政治)의 이상(理想)이 있는 것도 아니오 사(事)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가리는 것도 아니오 동인(東人)은 동인(東人)을 옹호(擁護)하고 서인(西人)은 서인(西人)을 옹호(擁護)하여 일대(一大) 난투(亂鬪) 장(場)을 이루었다. 선조(宣祖)는 군신(群臣)에게 누가 붕당(朋黨)을 만들고 있느냐고 문책(問責)한즉 군신(群臣)들은 붕당(朋黨)이라는 말은 다만 항간(巷間)에서 유포(流布)되는 풍설(風說)이오 조신중(朝臣中)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변명(辨明)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쓰고 죄(罪) 줌이 모두 당쟁(黨爭)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공론(公論)이 행(行)치 못하고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짐으로 이이(李珥)는 이를 조정(調停)하는 것을 기임(己任)으로 삼고 분당(分黨)의 장본인(張本人)인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을 외관(外官)으로 내어보내면 당쟁(黨爭)이 멈추리라고 하여 왕(王)께 이 의견(意見)을 아뢰었던 바 왕(王)은 심의겸(沈義謙)으로 개성(開城) 유수(留守)를 삼고 김효원(金孝元)으로 회령(會寧) 부사(府使)를 삼으니 비록 동(同)한 외관(外官)이로되 심(沈)은 승진(昇進)되고 김(金)은 폄점(貶點)되는 결과(結果)를 생(生)하였다. 이에 동인(東人)들은 크게 불평(不平)을 품고 또 김(金)의 폄점(貶點)은 이이(李珥)의 제안(提案)에 의(依)한 것이라 하여 일제(一齊)히 일어나서 이이(李珥)도 공정(公正)한 조정자(調停者)가 아니고 서인(西人)에 당(黨)하여 동인(東人)을 압박(壓迫)하는 것이라 하여 공격(攻擊)을 행(行)하니 이이(李珥)는 조정(調停)하기를 단념(斷念)할 뿐만 아니라 조정(朝廷)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으로 향리(鄕里)로 물러갔다. 이때 이지함(李之菡)은 국사(國事)를 근심하여 말하기를 율곡(栗谷)이 조정(朝廷)에 있으면 큰 효과(效果)는 없어도 파국(破局)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한번 물러가는 날이면 이 정국(政局)을 다시 수습(收拾)할 수 없으리라 하여 크게 탄식(歎息)하였다.

음식(飮食)이 있는 곳에 반드시 다툼이 있는지라 처음에는 서인(西人)이 득세(得勢)하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동인(東人)이 힘이 커지자 동인(東人) 속에서 다시 내부(內部)에 싸움이 일어나니 이는 이산해(李山海)를 중심(中心)으로 한 일파(一派)와 유성룡(柳成龍)(호(號)는 서애(西崖))을 중심(中心)으로 한 일파(一派)이니 이(李)는 서울에 살고 있음으로 북(北)이라 하고 유(柳)는 영남(嶺南)에 살고 있음으로 남인(南人)이라 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은 남(南) 북(北) 서(西)의 삼당(三黨)으로 나뉘어 삼색(三色)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는 날로 험악(險惡)하여 가고 국내(國內) 정세(情勢)는 당쟁(黨爭)으로 인(因)하여 더욱 부패(腐敗)하여지고 특(特)히 병비(兵備)가 극(極)히 허소(虛疎)하여 북(北)의 야인(野人)이나 남(南)의 왜구(倭寇)가 침입(侵入)하는 일이 있으면 도저(到底)히 막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이이(李珥)는 미리 십만(十萬) 병(兵)을 양(養)하여 경성(京城)에 이만(二萬)을 두고 각도(各道)에 일만(一萬)씩을 두어 여외(廬外)의 악(惡)을 방비(防備)할지오 만일(萬一) 그렇지 아니하면 일년(一年)을 불거(不去)하여 토붕(土崩)의 화(禍)가 있으리라고 경정(逕庭)에서 아뢰나 유성룡(柳成龍)이 무사태평(無事泰平)한 때에 병(兵)을 양(養)하는 것은 화(禍)를 양(養)함이라 하여 반대(反對)하고 다른 조신(朝臣)들도 당쟁(黨爭)에만 열중(熱中)하고 국사(國事)를 근심하는 자(者)가 없음으로 이 나라를 살리는 유일책(唯一策)인 십만(十萬) 양병론(養兵論)은 실현(實現)되지 못하고 말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선조(宣祖) 초(初)에 일본(日本)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국내(國內)를 통일(統一)하고 장차(將次) 대륙(大陸)으로 진출(進出)할 야심(野心)이 있어 우리 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양국(兩國)이 서로 친화(親和)하게 지내자 하고 또 우리 나라에 침입(侵入)할 뜻이 있다는 풍설(風說)이 퍼지고 있음으로 선조(宣祖) 이십삼년(二十三年)에 조정(朝廷)에서는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보내니 그 형식(形式)은 양국(兩國) 수호(修好)를 위(爲)함이나 기실(其實)은 수길(秀吉)의 태도(態度)를 타진(打診)함이다. 황(黃)과 김(金)이 돌아온 후(後) 두 사람의 복명(復命)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 황(黃)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안광(眼光)이 빛나고 태도(態度)가 거만(倨慢)하니 반드시 입구(入寇)하리라 하고 김(金)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눈이 쥐눈 같고 인물(人物)이 보잘 것 없으니 반드시 입구(入寇)치 아니한다. 하였다. 황(黃)은 서인(西人)임으로 서인(西人)들은 덮어놓고 황(黃)의 말을 옳다하고 김(金)은 동인(東人)임으로 동인(東人)들은 김(金)의 말을 지지(支持)하여 국가명일(國家明日)의 흥망(興亡)이 달려있는 중대(重大) 사(事)에 적(敵)의 실정(實情)을 깊이 검토(檢討)치 아니하고 오직 당인(黨人) 옹호(擁護)만을 위주(爲主)하였으며 이때 동인(東人)의 세력(勢力)이 컸음으로 조정(朝廷)의 의론(議論)은 김(金)의 말을 좇게되고 선조(宣祖)도 또한 김(金)이 선사(善使)하였다 하여 포상(褒賞)하고 착수(着手)중(中)에 있는 남방(南方)의 군비(軍備)도 수면상태(睡眠狀態)에 빠지고 군신(君臣)이하(以下)가 모두 태평몽(泰平夢)에 취도(醉倒)하였다.

일본(日本) 수길(秀吉)은 우리 나라의 군비(軍備)의 허실(虛實)을 전일(前日)의 사신(使臣) 왕래(往來) 시(時)에 미리 탐지(探知)하고 선조(宣祖) 이십오년(二十五年) 임진(壬辰)(단기 삼천구백이십오년)에 명(明)나라를 치러가니 조선(朝鮮)은 길을 빌려달라고 빙자(憑藉)하고 그해 사월(四月)에 군사(軍士) 이십만(二十萬)과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藤淸正) 등(等) 장수(將帥)를 보내어 풍우(風雨)같이 몰려와서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하니 이는 우리 나라의 청천벽력(靑天霹靂)이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던 아국(我國) 군대(軍隊)가 백전(百戰) 노련(老鍊)한 왜병(倭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동래성(東來城)이 일전(一戰)도 못하고 함락(陷落)되고 적군(敵軍)은 거침없이 동서(東西) 두 길로 나뉘어 경성(京城)을 향(向)하여 북상(北上)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이 급보(急報)를 듣고 모두 창황망조(蒼皇罔措)하고 선조(宣祖)는 김식일(金識一)이 국사(國事)를 그르쳤다 하여 곧 잡아오라고 엄명(嚴命)을 내리더니 성일(誠一)이 황공(惶恐) 입경(入京)하는 차(次)에 선조(宣祖)는 다시 명령(命令)을 내리어 이번 왜구(倭寇)는 너로 인(因)하여 오는 것이니 네가 나가서 막으라 하여 남방(南方)으로 보내었다.

조정(朝廷)에서는 적(敵)을 막을 힘이 없고 서로(西路)를 좇아 피난(避難)의 길을 떠나니 경성(京城) 안에 있던 난민(亂民)들이 경복궁(景福宮)에 불질러 사뤘으며 각지(各地)의 수령(守令)들은 대부분(大部分)이 직무(職務)를 버리고 도망(逃亡)하였음으로 호구(戶口)와 토지(土地)의 문적(文籍)이 이때에 대개(大槪) 멸실(滅失)되었다. 왜병(倭兵)이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한지 겨우 이십일(二十日)만에 경성(京城)이 함락(陷落)되고 팔도(八道) 인심(人心)이 토붕(土崩)하듯이 무너져서 다시 수습(收拾)할 수가 없었다. 선조(宣祖)는 서로(西路)를 피난(避難)하면서도 서도(西道)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를 크게 의구(疑懼)하여 이원익(李元翼)을 불러서 말하되 경(卿)이 일직 안주(安州) 목사(牧使)가 되었을 때 행정(行政)을 잘하여 평안도(平安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생각한다하니 경(卿)이 먼저 평안도(平安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안무(按撫)하라하고 또 최흥원(崔興源)을 불러 말하되 경(卿)이 일직 황해(黃海)감사(監司)사가 되었을 때 백성(百姓)을 사랑하였음으로 황해도(黃海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잊지 아니한다 하니 경(卿)이 먼저 황해도(黃海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개성(開城)에 가서 얼마동안 머물다가 왜병(倭兵)이 따라옴을 보고 평양(平壤)을 거쳐서 의주(義州)에 가서 머물고 있었다.

국세(國勢)가 이렇게 위태(危殆)로운 지경(地境)에 이르렀을 때에 국내(國內)에는 오직 두 줄기의 생기(生氣)가 움직였으니 그 하나는 이순신(李舜臣)의 해전(海戰)이오 또 하나는 의병(義兵)의 궐기(蹶起)이다. 이순신(李舜臣)은 전라도(全羅道) 좌수사(左水使)가 된 때로부터 미리 왜적(倭賊)의 침입(侵入)이 있을 것을 짐작(斟酌)하고 우수(優秀)한 전선(戰船)을 제조(製造)하려 하여 백제(百濟) 시대(時代) 이래(以來) 고려(高麗) 시대(時代)로 거쳐서 전(傳)해오는 아국(我國) 특유(特有)의 조선(造船)기술(技術)을 써서 새로이 한 배를 창조(創造)하니 그 배는 철판(鐵板)으로 위를 덮어서 거북의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 송곳을 꽂고 적병(敵兵)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사이에 십자로(十字路)를 통(通)하여 우리 군사(軍士)가 자유(自由)로 통행(通行)하게 하고 전후(前後)좌우(左右)에 총혈(銃穴)을 내어서 군사(軍士)가 그 밑에 숨어 총(銃)을 놓게 된 것이니 이를 구선(龜船)이라 한다.

이순신(李舜臣)은 왜병(倭兵)이 들어옴을 보고 구선(龜船) 팔십척(八十隻)을 거느리고 오월(五月) 칠일(七日) 옥포(玉浦)에서, 유월(六月) 사일(四日)에 당포(唐浦)에서, 칠월(七月) 팔일(八日)에 한산도(閑山島)의 앞바다 등(等) 적(敵)의 수군(水軍)을 연(連)거푸 쳐 부시고 한산도(閑山島)의 길목을 수비(守備)하니 적(敵)이 다시 남해(南海) 변(邊)을 엿보지 못하였다. 처음에 왜병(倭兵)은 육로(陸路)와 해로(海路)의 두 길로 병진(倂進)하여 일거(一擧)에 우리 나라를 삼키려 한 것인데 해로(海路)가 이순신(李舜臣)에게 막힌 까닭에 육로(陸路) 군(軍)의 동(東)은 함경도(咸鏡道) 두만강(豆滿江)까지 들어가고 서(西)는 평양(平壤)까지 들어갔으되 더 북상(北上)하기를 두려하여 왕(王)을 쫓아가지 못하였으니 이 대란(大亂)에 우리 나라가 다시 소생(蘇生)함에는 이순신(李舜臣)의 힘이 절대(絶對)한 것이었다.

왜병(倭兵)이 처음 들어 올 때에는 인심(人心)이 모두 황겁(慌怯)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또 적(敵)은 조총(鳥銃)을 가지고 있는데 총(銃)의 위력(威力)이 얼마나 큰가를 알지 못함으로 감(敢)히 접전(接戰)할 용기(勇氣)를 내지 못하더니 시일(時日)이 경과(經過)함을 따라 점차(漸次)로 적(敵)의 정세(情勢)를 알게 됨으로부터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거의(擧義)하려는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경상도(慶尙道)에서 처음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者)는 곽재우(郭在祐)(호(號)는 망우당(忘憂堂))이니 홍의(紅衣)를 입고 마(馬)를 타고 적진(敵陣)에 들어가서 횡행(橫行)하되 적(敵)이 감(敢)히 막지 못하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있는 곳에는 적(敵)이 반드시 피거(避去)하였다. 전라도(全羅道)에서는 광주(光州)의 고경명(高敬命)(호(號)는 제봉(霽峰))이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와 김천일(金千鎰) 등(等)으로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이 소식(消息)을 듣고 각지(各地)에서 의병(義兵)이 연거푸 일어났음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중(中)에 의병(義兵)의 세력(勢力)이 가장 큰 곳이 호남(湖南)이었고 이 의병(義兵)의 힘에 의하여 호남(湖南)이 보전(保全)된 까닭에 국가(國家)의 생맥(生脈)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호남(湖南) 의병(義兵)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군(軍)과 아울러 유명(有名)한 것은 금산(錦山)의 조헌(趙憲)(호(號)는 중봉(重峯))군(軍)이다. 조헌(趙憲)은 임진(壬辰) 전년(前年)에 미리 명년(明年)에 큰 병란(兵亂)이 일어 날줄을 알고 선조(宣祖)에게 상소(上疏)하여 정치(政治)의 잘못됨을 통론(痛論)하고 급(急)히 방비(防備)의 책(策)을 세울 것을 극언(極言)하니 그 말이 너무 과격(過激)함으로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광인(狂人)이라 하여 귀양보내었다.

임진(壬辰)란(亂)이 일어남에 동지(同志)를 모아서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원근(遠近)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조헌(趙憲)이 일어났다. 하여 용관(聳觀)하고 우국(憂國)하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여러 번 왜병(倭兵)과 싸워서 이기더니 금산(錦山)싸움에서 중과(衆寡)과가 부적(不適)하여 패사(敗死)하고 동지(同志)인 칠백의사(七百義士)도 함께 죽으니 지금도 전쟁(戰爭)하던 자리에 칠백의사(七百義士) 총(塚)이 있으며 이 싸움에 왜병(倭兵)도 죽은 자(者)가 많고 또 전쟁(戰爭)의 후방(後方) 세력(勢力)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여 물러가고 다시 전라도(全羅道)를 엿보지 못하니 호남(湖南)북부(北部)의 보전(保全)함은 주(主)로 조헌(趙憲)의 힘이었다.

이밖에도 각도(各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서 큰 전공(戰功)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적병(敵兵)을 괴롭게 하여 마음대로 횡행(橫行)치 못하게 하고 우리 나라 백성(百姓)에게 한줄기의 기(氣)를 넣어준 공(功)은 적지 아니하였으며 특(特)히 승병(僧兵)의 힘이 또한 적지 아니하니 승(僧) 유정(惟政)(호(號)는 사명산인(泗溟山人))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고제(高弟)로서 승병(僧兵)을 모아 비록 실전(實戰)에는 참가(參加)치 아니하였으나 물자(物資)의 운반(運搬)과 여러 가지 역사(役事)에 큰 조력(助力)을 하였다.

이때 국군(國軍)들도 점차(漸次)로 세력(勢力)을 얻어서 왜병(倭兵)을 쳐 부시려는 용기(勇氣)를 내게되고 권율(權慄)은 이기(梨崎)(배티,대둔산부근)에서, 이정암(李廷馣)은 연안(延安)에서, 김시민(金時敏)은 진주(晉州)에서 모두 크게 이겼다.

이 정도(程度)의 병력(兵力)만으로는 전국(全國)에 가득히 찬 적(敵)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왕(王선조(宣祖))은 의주(義州)에 있어서 유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호(號)는 백사(白沙) 이덕형(李德馨)(호(號)는 한음(漢陰)등(等)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하는데 난(亂)이 일어난 후(後)에 당쟁(黨爭)은 일시(一時) 멈추어 졌으나 그 저류(底流)에는 여전(如前)이 동서(東西)의 알력(軋轢)이 있음으로 왕(宣祖王)은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有西東」가 하여 東西의 싸움이 國家로 하여금 이 地境을 만들어 놓고 또 여기까지 몰려와서 東西 싸움을 하느냐 恨歎하였다.

國事가 이에 이르매 獨力으로는 恢復할만한 길이 없음으로 明나라에 請兵하기로 決定하였다. 이때 明나라에서는 이상(異常)한 와언(訛言)이 전파(傳播)되어 조선(朝鮮)이 왜(倭)와 공모(共謀)하여 명국(明國)을 치러온다고 하였다 그 증거(證據)로는 왜병(倭兵)이 들어온後 한번의 결전(決戰)도 없이 왕(王宣祖)은 압록강(鴨綠江) 변(邊)까지 들어오고 왜병(倭兵)은 평양(平壤)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청병(請兵)하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이를 변명(辨明)하고 또 원병(援兵)을 보내어 달라고 간청(懇請)하였으며 明나라에서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일본수길(日本秀吉)이 장차(將次) 명(明)나라를 치기 위(爲)하여 조선(朝鮮)에 길을 빌려달라 하고 조선(朝鮮)이 그를 거절(拒絶)하자 곧 침입(侵入)한 사정(事情)과 명국(明國)의 울타리가 되고있는 조선(朝鮮)이 명국(明國)을 대신(代身)하여 왜구(倭寇)의 화(禍)를 받고있다는 사실(事實)을 확실(確實)히 알게되고 이에 조선(朝鮮)에 원병(援兵)을 보내기로 결정(決定)하였다. 그리하여 癸巳年 正月에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사만(四萬)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평양(平壤)의 적(敵)을 대파(大破)하니 적(敵)이 개성(開城) 방면(方面)으로 물러났다. 이여송(李如松)은 적(敵)을 경(輕)히 여기고 추격(追擊)하여 벽제관(碧蹄舘)에서 싸우다가 패(敗)하고 다시 추격(追擊)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에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크게 적(敵)을 파(破)하니 적(敵)은 제해권(制海權)을 잃어서 보급(補給)이 끊어지고 또 평양(平壤)과 행주(幸州)에서 대패(大敗)하여 기세(氣勢)가 점점(漸漸) 줄어들더니 이여송(李如松)이 명(明)나라사람 심유경(沈惟敬)을 시켜서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의 사이에 화의(和議)를 진행(進行) 시켰음으로 왜병(倭兵)은 이해 사월(四月)에 경성(京城)을 물러나서 남해안(南海岸)으로 내려갔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래 머물 계획(計劃)을 세우고 또 전일(前日)에 진주(晉州)에서 패(敗)한 것을 분(憤)하게 여겨서 십여만(十餘萬)의 군사(軍士)로 진주성(晉州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전번(前番)에 김시민(金時敏)이 진주(晉州) 싸움에 대승(大勝)할 때는 수천병(數千兵)으로써 적(敵)의 십만병(十萬兵)을 물리쳤는데 이번에는 성중병(城中兵)이 육만(六萬)에 이르니 사람마다 모두 성(城)을 지키기에 아무 염려(念慮)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직 진주(晉州) 기생(妓生) 논개(論介)가 근심하였다.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이 그 연고(緣故)를 물으니 논개(論介)가 대답(對答)하되 전번(前番)에는 군사(軍士)가 비록 적으나 장수(將帥)가 서로 사랑하고 호령(號令)이 한군데서 나온 까닭에 이겼지만 이번은 군사(軍士)가 비록 많으나 통솔(統率)이 없고 장수(將帥)가 병(兵)을 알지 못하니 이 까닭에 근심한다고 하였다.

성중(城中)은 구일(九日) 구야(九夜)의 동안에 백여(百餘)차례를 싸워서 번번히 적을 막으나 마침내 성(城)이 함락(陷落)하고 성중(城中)의 백성(百姓)들까지 모두 칠만명(七萬名)이 죽으니 그 참혹(慘酷)하기가 임진란(壬辰亂) 중(中)에서도 가장 심(甚)하였고 논개(論介)는 적장(敵將)에 끌려서 촉석루(矗石樓) 아래의 암상(岩上)에서 적(敵)의 주연(酒宴)에 나갔다가 적장(敵將)의 허리를 안고 함께 강중(江中)에 떨어져 죽으니 후인(後人)이 이 암석(岩石)을 의기암(義妓岩)이라고 이름지었다.

왕(王宣祖)은 경성(京城)이 수복(收復)한 후(後) 경성(京城)을 떠난지 일년반(一年半)만에 구도(舊都)에 돌아왔다. 그러나 왜병(倭兵)이 아직 남방(南方)에 가득히 차있어 어느 때에 다시 쳐올지 알 수 없고 심유경(沈惟敬)의 화의(和議)의 대(對)하여는 반대(反對)의 태도(態度)를 취하고 명(明)나라에 적극(積極) 남공(南攻)하기를 청(請)하였다 명(明)나라에서는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원수(遠輸)하기가 곤란(困難)하다하여 구차(苟且)히 화의(和議)를 성립(成立)시키려하니 왕(王宣祖)은 국력(國力)이 약(弱)하여 독력(獨力)으로 왜(倭)를 섬멸(殲滅)치 못함을 슬퍼하여 군제(軍制)의 대(大) 개혁(改革)을 제안(提案)하니 이 안(案)은 예(隸)를 해방(解放)하여 군사(軍士)로 쓰자는 것인데 이는 군제(軍制) 개혁(改革)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계급제도(社會階級制度)의 일대(一大) 혁명(革命)이 되는 것이다.

아국(我國)의 군제(軍制)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군역(軍役)이 면제(免除)되고 노예계급(奴隸階級)은 천인(賤人)이라 하여 군역(軍役)에 참여(參與)치 못하게 하니 그 까닭은 만일 천인(賤人)이 먼저 입대(入隊)하여 군교(軍校)가 되고 양민(良民)이 후(後)에 입대(入隊)하여 병졸(兵卒)이 되면 양민(良民)이 천인(賤人)의 지휘(指揮)를 받게되어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양민(良民)이나 천인(賤人)이나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오 또 국가(國家)의 앞날을 생각하여 볼때 군사(軍士)가 부족(不足)한 현실(現實)을 타개(打開)하려면 수십만(數十萬)의 천인(賤人) 장정(壯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 종래(從來)의 계급제도(階級制度)를 깨뜨리고 천인(賤人)을 양민(良民)과 함께 군사(軍士)로 쓰게 하려하니 제신(諸臣)들은 이를 잘 토의(討議)하라고 영(令)을 내렸다.

조정(朝廷) 제신(諸臣)중(中)에는 여기에 찬성(贊成)한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사노(私奴)를 많이 부리고 있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강경(强硬)한 반대운동(反對運動)을 일으켰으니 그 이유(理由)는 노주(奴主)의 분(分)은 군신(君臣)의 분(分)과 같으매 만일 노예(奴隸)를 해방(解放)하여 양민(良民)을 만들면 이는 강상(綱常)이 무너지는 것이라 하니 기실(其實)은 국가(國家)의 강상(綱常)을 존중(尊重)히 여기는 데서 나온 주장(主將)이 아니라 전(專)혀 노예(奴隸)를 부려서 호화(豪華)한 생활(生活)을 누리려는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왕(王宣祖)의 제안(提案)이 마침내 통과(通過)되지 못하니 왕(王宣祖)은 「국가(國家)를 살리는 최선(最善)의 안(案)이 개인(個人)들의 사심(私心)때문에 실행(實行)되지 못하니 가탄(可歎)한 일이로다.」하고 이 제도(制度)를 공노(公奴)에게만 시행(施行)하였다. 공노(公奴)중(中)에는 주야(晝夜)로 무예(武藝)를 연습(練習)하여 군대(軍隊)에 들어가서 양민(良民)이 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한편(便)으로 양반계급(兩班階級)의 여러 가지 방해(妨害)로 인(因)하여 완전(完全)한 실시(實施)를 보지 못하였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으로 물러간 후(後)에 명(明)나라와의 사이에 화의(和議)가 진행(進行)되어 차츰 본국(本國)으로 물러가더니 양국(兩國)의 대표(代表) 사이에 결정(決定)한 화의(和議) 조건(條件)과 명(明)나라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보낸 칙서(勅書)의 내용(內容)이 서로 틀린다 하여 선조(宣祖) 삼십년(三十年) 정유(丁酉)에 다시 대군(大軍)을 보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유란(丁酉亂)이라 한다.

왜병(倭兵)은 전번(前番)의 실패(失敗)에 삼가서 수군(水軍)을 더 증가(增加)하고 또 미리 간첩(間諜) 요시라(要詩羅)를 놓아서 우리 조정(朝廷)과 이순신(李舜臣)과의 사이를 이간(離間)하니 우리 조정(朝廷)에서는 그 모략(謀略)에 넘어가서 이순신(李舜臣)을 잡아다가 옥(獄)에 가두고 장차(將次)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事件)의 이면(裏面)에는 역시(亦是) 당파(黨派) 싸움이 숨어 있으니 조정(朝廷)이 의주(義州)에 있을 동안은 당쟁(黨爭)이 한동안 멈추고 있더니 경성(京城)에 환도(還都)한 후(後)에 다시 재연(再燃)하여 북인(北人)의 세력(勢力)이 우세(優勢)한 판인데 이순신(李舜臣)은 유성룡(柳成龍)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유성룡(柳成龍)은 남인(南人)이기 때문에 북인(北人)들은 이순신(李舜臣)을 당쟁(黨爭)의 희생(犧牲)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이순신(李舜臣) 처치(處置)에 대(對)하여 의견(意見)을 유성룡(柳成龍)에게 물으니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李舜臣)은 명장(名將)이라 왜인(倭人)의 말을 듣고 함부로 죄(罪)줄 수도 없고 또 전란(戰亂)이 끝나지 아니한 때 이런 명장(名將)을 죽이는 것은 불가(不可)하다」하였다.

왕(王宣祖)은 이 말을 중(重)히 여겨 다만 면직(免職)시키고 석방(釋放)하니 이때 사신(史臣)은 이를 평(評)하기를 「남해(南海)를 홀로 지켜서 국맥(國脈)을 붙잡고 오던 명장(名將)이 적(敵)의 모개(謀介) 이간(離間)과 당쟁(黨爭)의 여파(餘波)로 이런 일을 당(當)하니 멀리 남방(南方)의 적세(賊勢)를 바라보고 가까이 조정(朝廷)의 형편(形便)을 살펴봄에 가슴속에서 통곡(痛哭)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구나」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면직(免職)된 뒤에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니 원균(元均)은 본시(本是)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사(水使)로 있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통제사(統制使)가 된 뒤에 그 부하(部下)되기를 부끄러워하여 항상(恒常) 이순신(李舜臣)을 조정(朝廷)에 모해(謀害)하던 자(者)이오 먼저에 이순신(李舜臣)이 죄(罪)를 받은 것도 원균(元均)의 모해(謀害)가 유력(有力)한 일인(一因)이 된 것이다. 왜병(倭兵)들은 원균(元均)이 이순신(李舜臣)을 대신(代身)함을 듣고 수군(水軍)을 크게 발(發)하여 우리 수군(水軍)을 치니 원균(元均)이 대패(大敗)하여 육지(陸地)에 올라와 도망(逃亡)하였는데 그 생사(生死)는 세상(世上)이 알지 못하며 적(敵)은 전라도(全羅道) 해안(海岸)을 점령(占領)하고 멀리 충청도(忠淸道)의 직산(稷山) 당진(唐津)에 까지 침입(侵入)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크게 당황(唐慌)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라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순신(李舜臣)으로 통제사(統制使)를 삼았다. 이때 왜병(倭兵)이 전라도(全羅道) 육지(陸地)에 깊이 들어와 싸우므로 이순신(李舜臣)은 산곡(山谷)길을 좇아 우수영(右水營)에 이르니 전선(戰船)의 남은 것이 겨우 십이척(十二隻)이라 피난선(避難船)을 모아 가지고 진도(珍島)의 울돌목(명량(鳴梁)에서 적선(敵船) 오백척(五百隻)을 무찌르고 고금도(古今島)를 무찌르니 적(敵)의 세력(勢力)이 꺾이어서 다시 서해(西海)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 육지(陸地)에서는 명(明)나라 원군(援軍)이 남원(南原)에서 패(敗)하고 또 울산(蔚山) 사천(泗川) 순천(順天)등지(等地)에 진지(陣地)를 쌓고 적(敵)과 싸우다가 모두 패(敗)하였다.

적세(敵勢)가 다시 성(盛)함을 보고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사람 김덕령(金德齡)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김덕령(金德齡)은 용력(勇力)이 있고 안광(眼光)이 횃불과 같아서 대적(對敵)하는 바가 없고 왜병(倭兵)이 두려하여 감(敢)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충청도(忠淸道)에서 반란군(叛亂軍)이 일어나서 김덕령(金德齡)도 자기(自己)들과 합모(合謀)한다고 선전(宣傳)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곧 김덕령(金德齡)을 잡아다가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그 무죄(無罪)함을 알았으나 김덕령(金德齡)은 이귀(李貴)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이귀(李貴)는 서인(西人)이라 동인(東人)이 조정(朝廷)안의 세력(勢力)을 잡고 있는데 김덕령(金德齡)의 목숨을 구원(救援)하여 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김덕령(金德齡)같은 용장(勇將)을 방면(放免)하였다가 후일(後日)에 만일 반란(叛亂)을 일으키면 억제(抑制)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죽였다.

우리 나라 군사(軍士)와 명(明)나라 군사(軍士)는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랫동안 적병(敵兵)과 대치(對峙)하고 있더니 선조(宣祖) 삼십일년(三十一年) 무술(戊戌) 십일월(十一月)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으면서 왜병(倭兵)을 철수(撤收)시키는데 이순신(李舜臣)은 그 퇴로(退路)를 막고 경상도(慶尙道) 노량(露梁)에서 적(敵)을 맞아 싸워 크게 파(破)하더니 적(敵)의 탄(彈)알에 맞아 전사(戰死)하고 적(敵)이 도환(逃還)한 자(者)가 겨우 오십여척(五十餘隻)에 불과(不過)하고 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이 이로써 끝났다. 이때 조정(朝廷)의 일부(一部)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만일 전승(戰勝)하고 돌아오더라도 반드시 간신(奸臣)들의 모해(謀害)로 죽을 것이니 차라리 전사(戰死)하리라」하고 일부러 투구를 벗고 탄(彈)알에 죽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일본(日本)이 무단(無端)히 군사(軍士)를 일으켜서 인국(隣國)을 침략(侵略)하여 무고(無辜)한 인민(人民)을 함부로 살륙(殺戮)하고 우리 나라는 기근(饑饉)과 질병(疾病)이 이에 겹 들여서 참혹(慘酷)한 화(禍)가 몽고(蒙古)의 침입(侵入)보다 더 심(甚)하였고 명(明)나라가 오랫동안 군사(軍士)를 움직여서 이 때문에 나라가 몹시 병폐(病弊)하였다.

명(明)나라 군사(軍士)가 우리 나라에 와서 있는 동안에 횡폭(橫暴)한 일도 적지 아니하고 소위 관왕묘(關王廟)라 하여 중국(中國) 옛날의 관우장군(關羽將軍)을 모시고 선조(宣祖) 왕(王)으로 하여금 절하게 하는 일도 있어 우리 나라를 괴롭게 함이 많았으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란(大亂)을 구(求)해 주는 은혜(恩惠)를 깊이 감사(感謝)하여 아무런 불평(不平)도 말치 아니 하였고 명(明)나라는 이 난리(亂離)에서 많은 군사(軍士)와 재물(財物)을 잃은 까닭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만주족(滿洲族)에게 망(亡)하게 되니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깊이 명(明)나라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오래 잊지 아니 하였다.

이 난리(亂離)에 무기(武器)의 발달(發達)한 것은 구선(龜船) 이외(以外)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있으니 이는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대포(大砲)로써 이 포(砲)가 터지면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震動)하고 철편(鐵片)이 튀어 나가서 적(敵)을 해치는 것인데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석(朴昔)이 이 포(砲)를 써서 경주(慶州)를 회복(恢復)하였다. 왜병(倭兵)으로부터 얻은 조총(鳥銃)은 본시(本是) 일본(日本)이 서양(西洋)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인데 우리 나라도 이 법(法)을 얻은 후(後)에 공장(工匠)에게 명령(命令)하여 제조(製造)하니 이가 우리 나라가 총(銃)을 사용(使用)한 처음이다. 왜병(倭兵)은 물러갈 때에 여러 가지 기술자(技術者)를 사로잡아 가고 특(特)히 그 중(中)에는 도공(陶工)이 가장 많았음으로 일본(日本)의 도자기(陶磁器) 공업(工業)이 이로부터 시작(始作)하였다. 왜병(倭兵)은 저희들도 많은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희생(犧牲)하고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이 돌아갔으나 우리 나라의 우수(優秀)한 기술(技術)을 배워 갔음으로 저희들끼리 말하기를 「무장(武裝)한 유학생(遊學生)을 조선(朝鮮)에 보냈다」고 하였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은 후(後)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새로이 막부(幕府)를 열어서 이전(以前)의 잘못을 말하고 국교(國交)를 회복(恢復)하기를 거듭 청(請)하며 또 그들에게 사로잡혀간 수천(數千)명(名)의 포로(捕虜)를 돌려보내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日本)에 대(對)한 복수심(復讐心)이 복 받혀서 허락(許諾)치 아니하더니 양국간(兩國間)에 오랫동안 국교(國交)가 끊어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전쟁(戰爭)이 끝난지 칠년(七年)만에(을사(乙巳))일본(日本)의 소원(所願)을 들어서 부산(釜山)에 다시 왜관(倭館)을 열고 대마도(對馬島)와의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하여 그 후(後) 삼백년(三百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난후(亂後)의 형세(形勢)

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은 비록 끝났으나 기경(起耕)치 못한 토지(土地)가 적지 아니하고 집과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고 생계(生計)를 잃은 백성(百姓)이 수(數)없이 많고 산곡(山谷)에 피난(避難) 갔던 사람들은 기아(飢餓)를 견디지 못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하면서 겨우 고향(故鄕)에 돌아 왔으나 의지(依支)할 곳이 없어서 도로(道路)에서 방황(彷徨)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이러한 난민(難民)에 대(對)하여 아무런 구제책(救濟策)이 없었고 더욱이 난중(亂中)에 국적(國籍)의 대부분(大部分)이 없어졌는데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은 남의 토지(土地)를 모경(冒耕)하여 자기(自己)의 토지(土地)를 만들려하니 도처(到處)에서 전송(田訟)이 일어나되 관가(官家)에서 이를 적당(適當)하게 처리(處理)치 못하였고 조정(朝廷)에서는 토지측량(土地測量)에 착수(着手)하였으나 사무(事務)가 자리를 잡지 못하여 잘 진척(進陟)되지 아니 하였다. 한 편(便)으로는 당쟁(黨爭)이 더욱 심(甚)하여 북인(北人)들 끼리에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눠져서 그 세력(勢力) 다툼은 일보(一步)를 나아가 왕위(王位) 쟁탈전(爭奪戰)과 엉켜지게 되었으니 이는 관인(官人)들 끼리에만 세력(勢力)을 다투기 보다 세력(勢力)의 발원(發願)인 군왕(君王)을 자기들 편(便)에 넣는 것이 가장 유력(有力)하기 때문이다. 당쟁(黨爭)이 이와 같이 심각(深刻)하게 되니 난후(亂後)의 모든 정리(整理) 같은 것은 아무런 효과(效果)를 나타내지 못하고 말았다.

선조(宣祖)의 다음 임금 광해군(光海君)은 본시(本是) 난중(亂中)에 인심(人心)을 수습(收拾)하려고 갑자기 세자(世子)로 세운 것이라 선조(宣祖)가 이를 바꾸려는 뜻이 있었다. 이 기미(機微)를 알고 소북파(小北派)는 선조(宣祖)의 뜻을 받들려 하고 대북파(大北派)는 세자(世子)를 옹호(擁護)하여 서로 다투더니 선조(宣祖)가 병중(病中)에 대북파(大北派)를 척축(斥逐)하던 중(中) 급졸(急猝)히 승하(昇遐)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왕위(王位)에 오르고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等)이 세력을 잡으니 항간(巷間)에서는 선조(宣祖)가 과독(過毒)하였다고 전(傳)했다.

당시(當時) 세납(稅納)은 토지(土地)의 소출(所出)로써 바치는 조세(租稅)와 지방(地方)의 특산물(特産物)을 바치는 공물(貢物)과 병역(兵役)과 부역(賦役) 대신(代身)으로 바치는 군포(軍布)가 있었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폐해(弊害)가 따르고 더욱이 대란(大亂)을 치른 후(後)로 토지제도(土地制度)와 세제(稅制)가 극도(極度)로 문란(紊亂)하여졌음으로 광해군(光海君) 즉위(卽位) 초(初) 이원익(李元翼)(호(號) 오리(梧里))이 대동법(大同法)을 설(設)하기를 청(請)하였다. 이 법(法)은 선혜청(宣惠廳)이라는 기관(機關)을 두고 매년(每年) 춘추(春秋)에 전(田) 일결(一結)에 미(米) 팔(八)되를 거두어 경고(京庫)에 수납(收納)하여 수시(隨時)로 국비(國費)를 지출(支出)하는데 각(各) 사사주인(司私主人)으로 하여금 上供하는 제(諸) 물품(物品)을 수납(收納)케 하고 이 외(外)에는 척포(尺布) 승미(升米)도 민호주(民戶主)로부터 가징(加徵)치 못하게 하여서 사주인私主人 방납계배(防納計倍)의 폐(弊)를 끄치려 함이라 광해군(光海君)은 이 제도(制度)를 경기도(京畿道)에 먼저 시험적(試驗的)으로 행(行)하니 거실(巨室)호민(豪民)과 사주인(私主人)들이 모두 방납(防納)의 대리(大利)를 잃고 백방(百方)으로 저해(沮害)함으로 광해군(光海君)은 여러 번 이 제도(制度)를 파(罷)하려 하였으나 경기(京畿)백성(百姓)들이 일제(一齊)히 그 편리(便利)함을 말하고 파(罷)하지 못하도록 다툰 까닭에 계속(繼續)하여 행(行)하고 그 후(後)에 점차(漸次)로 타도(他道)에 시행(施行)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성질(性質)이 사납고 어두워서 정치(政治)가 몹시 어지럽고 대북파(大北派)를 중용(重用)하여 그 형(兄) 임해군(臨海君) 이하(以下) 동기(同氣)를 많이 죽이고 선조(宣祖) 왕비(王妃)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廢)하여 서궁(西宮)에 유폐(幽閉)하고 폐모(廢母)에 반대(反對)하는 이원익(李元翼)(오리(梧里)) 이항복(李恒福)(필운(弼雲),백사(白沙)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정온(鄭蘊)(호(號) 동계(桐溪))등(等)을 죄(罪)주었다. 이항복(李恒福)이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으로 귀양가는 길에 철령(鐵嶺)에 올라서서 「철령(鐵嶺)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본들 어떠하리」라는 노래를 지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세력(勢力)을 잃고 기회(機會)를 엿보고 있던 서인(西人)들이 비밀(秘密)히 반정(反正)할 꾀를 꾸미더니 광해군(光海君) 십년(十年)에 이귀(李貴)(黙齋), 김류(金瑬)(北渚)等이 中心이 되어 반정군(反政軍)을 일으켜서 왕(王)을 강화도(江華島)에 내치고 왕(王)의 조카 능양군(綾陽君)을 맞아드려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인조(仁祖)이다.

임진(壬辰)란(亂)이 끝난 지 이미 이십여년(二十餘年)이라 난후(亂後) 정리(整理)도 채 되지 못한 위에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이 또 십오년(十五年) 동안을 계속(繼續)하니 국가(國家)의 정치(政治)는 말할 수 없이 헝클어지고 백성(百姓)의 생활(生活)은 극도(極度)의 곤궁(困窮)에 빠졌다. 이에 인조(仁祖)는 이원익(李元翼)을 불러들여 정승(政丞)을 삼고 난마(亂麻) 같은 정치(政治)를 정리(整理)하는데 이원익(李元翼)은 대동법(大同法)을 팔도(八道)에 모두 시행(施行)하기를 극력(極力)으로 주장(主將)하였다. 그 때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많아서 경기도(京畿道) 이외(以外)에 겨우 충청도(忠淸道)에 시행(施行)하니 백성(百姓)들은 모두 이 법(法)을 대환영(大歡迎)함으로 얼마후(後)에 반대론(反對論)을 물리치고 팔도(八道)에 시행(施行)하였다.

처음에 반정(反正)을 꾀하던 여러 사람들은 오직 국가(國家)와 백성(百姓)을 위(爲)하여 거의(擧義)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반정후(反正後) 공신(功臣)들의 대부분(大部分)은 순전(純全)히 사리(私利)를 위(爲)하여 행동(行動)하고 공신(功臣)이라는 특권(特權)을 이용(利用)하여 모리(牟利) 행위(行爲)를 자행(恣行)함으로 국인(國人)의 비난(非難)이 적지 아니 하였고 김장생(金長生)(사계(沙溪) 같은 이는 공신(功臣)들에게 글을 보내어 반정(反正) 거의(擧義)한 것은 일국(一國)이 칭송(稱誦)하는 일이나 공(功)을 빙자(憑藉)하고 사리(私利)를 도모(圖謀)하면 후세(後世)의 공론(公論)이 이를 무엇이라고 평(評)하랴 경고(警告)한 일도 있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밖에 있는 여진족(女眞族) 즉(卽) 야인(野人)은 명(明)나라에서도 억제(抑制)하기 어려워서 항상(恒常) 회유(懷柔)하여 오던 터이라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우리 나라 북변(北邊)을 침입(侵入)하려는 계획(計劃)이 있었는데, 만일 이때에 야인(野人)이 침범(侵犯)하였다면 우리 나라는 복배(腹背)로 적(敵)을 받아서 지탱(支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육진(六鎭)의 수비를 튼튼히 한 까닭에 아무 일 없었다. 그 후(後)에 야인(野人)들은 명(明)나라 세력(勢力)이 약(弱)해짐을 보고 점차(漸次)로 기세(氣勢)를 펴는 중(中)에 여진족(女眞族)중(中)에서 노아합적(奴兒哈赤)(누르하치)이 일어나서 만주(滿洲)에 있는 여러 부족(部族)을 통일(統一)하고 광해군(光海君) 팔년(八年)에 임금이 되고 왕호(王號)를 「대한(大汗)」이라 하고 심양(瀋陽)(봉천(奉天))에 도(都)하고 국호(國號)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맹렬(猛烈)한 기세(氣勢)로 명(明)나라에 쳐들어갔다. 명(明)나라에서는 우리 나라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였음으로 광해군(光海君)은 강홍립(姜弘立) 등(等)으로 하여금 군사(軍士) 일만명(一萬名)을 거느리고 가서 명(明)나라를 돕게 하니 이는 임진(壬辰)란(亂)의 은혜(恩惠)를 갑기 위(爲)함이라 그러나 명(明)나라 군사(軍士)가 패(敗)하고 강홍립(姜弘立)은 만주(滿洲)에 항복(降服)하고 그 후(後)로부터 광해군(光海君)은 될수록 중립(中立)을 지켜서 만주(滿洲)가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와서 동맹(同盟)하기를 청(請)하였으나 응(應)하지 아니하고 또 명(明)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보내기를 교섭(交涉)하였으되 역시(亦是) 주저(躊躇)하고 있었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후(後)에 조정(朝廷)에서는 광해군(光海君)의 중립정책(中立政策)이 명(明)나라에 대(對)한 의리(義理)에 어긋났다하여 가도(假島)(평안도 피섬)에 와 있는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을 도와서 그와 긴밀(緊密)한 관계(關係)를 맺었다.

처음에 인조반정(仁祖反正)할 때에 이괄(李适)의 공(功)이 적지 아니하였는데 조정(朝廷)의 처사(處事)가 이괄(李适)의 마음에 만족(滿足)치 아니하였음으로 이괄(李适)은 평안도(平安道)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풍우(風雨)같이 달려와서 경성(京城)을 점령(占領)하였다. 인조(仁祖)는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에 피난(避難)하고 장만(張晩), 정충신(鄭忠信), 이서(李曙) 등(等)으로 하여금 이를 쳐서 깨뜨리고 이괄(李适)이하 여러 수령(首領)들을 죽이니 그 여당(餘黨)이 만주(滿洲)로 도망(逃亡)하여 들어가서 만주(滿洲) 임금 태종(太宗)을 충동(衝動)시켜 조선(朝鮮)을 치기를 청(請)하였다.

이때 만주(滿洲)는 우리 나라가 명(明)나라를 돕고 있는 형세(形勢)를 살피고 힘으로 누르려고 하던 차(次)이라 아민(阿敏)이라는 장수(將帥)로 하여금 군사(軍士) 삼만(三萬)을 거느리고 인조(仁祖) 오년(五年) 정묘(丁卯)에 쳐들어왔다. 조정(朝廷)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적군(敵軍)을 막고 왕(王仁祖)은 강화도(江華島)에 피난(避難)하더니 마침내 그들과 형제(兄弟)의 의(誼)를 맺고 적군(敵軍)이 물러가니 이를 정묘호란(丁卯虎亂)이라 한다.

그 후(後) 만주(滿洲)의 세력(勢力)은 더욱 강(强)해지고 그 임금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太宗)은 용병(用兵)을 잘하여 중국(中國)과 몽고(蒙古)를 점차(漸次)로 약취(略取)하고 우리 나라에 대(對)하여 형제국(兄弟國)의 약조(約條)를 고쳐서 군신(君臣)국(國)으로 만들자고 함에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분(憤)하게 여겨서 그들과 절교(絶交)하자고 주장(主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만주(滿洲)는 국호(國號)를 청(淸)이라 고치고 천자(天子)의 호(號)를 칭(稱)하고 우리 나라에 대(對)하여 저희에게 존호(尊號)를 바치라고 요구(要求)하니 이에 양국(兩國)의 국교(國交)는 몹시 험악(險惡)하였다.

이때 조정(朝廷)에서는 청병(淸兵)이 반드시 침입(侵入)할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오직 입으로 청국(淸國)을 배척(排斥)하는 소리만 높을 뿐이오 침입(侵入)하는 것을 막을만한 준비(準備)는 전연(全然) 없었다.

조신(朝臣) 중(中)에는 이미 양국(兩國)의 화(和)가 끊어지고 또 방비책(防備策)도 세우지 않으면 국가(國家)의 장래(將來)가 어떻게 될 것이냐고 근심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고 윤황(尹煌)(八松)같은 이는 「이미 和하지 못하고 또 싸우지도 못하면 이는 앉아서 나라를 亡케 함이라 다시 和할 수가 없다면 싸울 準備를 急히 갖춰야 될 것인데 只今에 軍士도 없고 軍糧도 없으니 이제로부터 이를 準備하여 淸兵을 막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 오직 한가지 방법(方法)은 왕(王)이 여러 신하(臣下)를 거느리고 모두 창(槍)을 집고 활을 메고 선진(先陣)에 나가서 개성(開城)이나 평양(平壤)에 진주(進駐)하여 전국(全國)에 호령(號令)을 내리면 이 소식(消息)을 들은 의병사(義兵士)들이 반드시 무기(武器)를 준비(準備)하고 양식(糧食)을 등에 지고 스스로 달려와서 국난(國難)에 부(赴)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순월(旬月)사이에 정병(精兵) 수만(數萬)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 방법(方法)만이 나라를 구(救)하는 길이라」하여 친정론(親征論)을 역설(力說)하였다.

그러나 조정(朝廷) 내(內)에는 김류(金瑬)와 김자점(金自點)의 세력(勢力)싸움이 벌어지고 붓대와 혀끝으로 적(敵)을 꾸짖을 뿐이오 아무런 계획(計劃)도 없는 자(者)들이 대부분(大部分)이니 이 친정론(親征論)이 실행(實行)되지 못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中)에 인조(仁祖) 십사년(十四年) 병자(丙子) 십이월(十二月)에 청태종(淸太宗)이 스스로 군사(軍士) 십만(十萬)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는데 이때 우리 나라의 명장(名將) 임경업(林慶業)(고송(孤松))이 의주(義州)부윤(府尹)으로 있으면서 백마(白馬)산성(山城)을 굳게 지키고 있음으로 청병(淸兵)은 이를 피(避)하여 창성(昌城)의 간도(間道)로 나와서 도중(道中)에서 만나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경성(京城)에 통보(通報)하는 길을 끊고 신도겸행(信道兼行)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넌지 사월(四月)만에 선진(先陣)이 경성(京城) 교외(郊外) 십여리허(十餘里許)에 이르니 조정(朝廷)에서는 몽상(夢想)도 못하던 일이라 상하(上下)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먼저 왕자(王子)를 비롯하여 대신(大臣)들의 가족(家族)을 강화도(江華島)로 피난(避難)시키니 이는 청병(淸兵)이 침입(侵入)하는 때에 가장 안전(安全)한 피난지(避難地)로 설비(設備)하여 둔 곳이오 또 청병(淸兵)을 막을 준비(準備)를 하지 아니한 것도 전(專)혀 이 강화도(江華島)를 믿었기 때문이다.

왕(王仁祖)은 제신(諸臣)을 거느리고 강화(江華) 반월(半月)로 나가려 하더니 청병(淸兵)이 이미 길을 막았음으로 급(急)히 동대문(東大門)을 나가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니 청병(淸兵)이 뒤를 따라 성(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성(城)에 농거(籠居)한지 사십일(四十日)에 근왕병(勤王兵)은 이르지 아니하고 양식(糧食)이 핍절(乏絶)하여 마(馬)를 잡아먹게 되고 성중(城中) 인심(人心)이 크게 위구(危懼)하여 고성(孤城)을 지키기 어려운 형편(形便)이었다. 하루는 왕(王仁祖)이 성(城)을 순시(巡視)하더니 한 군졸(軍卒)이 왕(王)전(前)에 나와 업드려 말하되 「지금 대장(大將)된 사람은 목숨을 아껴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비단 옷을 입고 성(城)아래에 앉아서 우리 군졸(軍卒)을 독전(督戰)하니 이런 대장(大將)은 아무 소용(所用)이 없는 것인즉 우리 군졸(軍卒) 중(中)에서 대장(大將)을 정(定)하여 주시면 사력(死力)을 내어 싸우리라」하니 왕(王)은 군심(軍心)이 이미 변(變)함을 보고 크게 놀라서 제신(諸臣)과 이를 의론(議論)하는데 혹시(或是) 군변(軍變)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이때 강화도(江華島)를 지키는 대장(大將)은 청병(淸兵)이 바다를 건너서 들어올 수 없는 것을 굳게 믿고 매일(每日) 주연(酒宴)을 베풀고 놀더니 뜻밖에 청병(淸兵)이 성하(城下)에 이르러 쳐들어 왔다. 성중(城中)에서는 비록 군사(軍士)는 있었으나 수족(手足)을 놀릴 사이 없이 함락(陷落)되고 피난(避難) 나갔던 왕자(王子)이하(以下)가 모두 포로(捕虜)되고 대신(大臣)들 가족(家族)의 부녀(婦女)들은 능욕(凌辱)을 당(當)할 것을 두려하여 혹은 목매어 죽고 혹(或)은 바다에 빠져 죽으니 그 참상(慘狀)을 참아 볼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는 강화도(江華島) 함락(陷落)의 소식(消息)을 듣고 모두 낙담(落膽)하여 더 항전(抗戰)할 기(氣)를 전연(全然)잃고 왕(王仁祖)과 최명길(崔鳴吉)(지천(遲川))등(等)은 화의(和議)를 주장(主張)하게 되니 이 화의(和議)라 함은 동등(同等)한 국가(國家)로써 화친(和親)하는 것이 아니오 청(淸)에 굴복(屈服)하고 천자(天子)로 모시는 굴욕적(屈辱的)인 항복(降服)이다. 이에 조신(朝臣) 중(中) 척화파(斥和派)는 군신(君臣)이 모두 전사(戰死)할지언정 결(決)코 오랑캐의 앞에 굴슬(屈膝)하고 살지는 못하리라 하고 최명길(崔鳴吉) 등(等) 주화파(主和派)를 매국적(賣國賊)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왕(王仁祖)은 한갓 죽는 것은 국가(國家)를 위(爲)함이 아니라 하고 다음해 정축(丁丑) 정월(正月)에 삼전도(三田渡)(송파)에서 청병(淸兵)에 항복(降服)하였다.

이에 청태종(淸太宗)은 세자(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인질(人質)로 하고 김상헌(金尙憲) 등(等) 척화신(斥和臣)과 수천명(數千名)의 포로(捕虜)를 끌고 군사(軍士)를 돌렸다.

이때 최명길(崔鳴吉)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尙憲) 등(等) 척화파(斥和派)의 사이에 서로 의심(疑心)이 생긴 까닭은 척화파(斥和派)는 주화파(主和派)로써 부귀(富貴)를 탐(貪)내어 청국(淸國)에 항복(降服)하여 그 지위(地位)를 굳게 하려는 것이라 하고 주화파(主和派)는 척화파(斥和派)로써 참으로 대의(大義)를 세우는 것이 아니오 조명(釣名)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 한 것이다.

그 뒤에 청국(淸國)은 명국(明國)을 치기 위(爲)하여 우리 나라 군사(軍士)를 보내기를 강요(强要)하니 최명길(崔鳴吉)이 극력(極力) 반대(反對)함으로 청(淸)은 최명길(崔鳴吉)을 불러다가 옥(獄)에 가두었다.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鳴吉)은 모두 사생(死生)이 눈앞에 박두(迫頭)하되 조금도 굴(屈)하지 아니하고 끝끝내 대의(大義)를 지켰음으로 종래(從來) 양파(兩派)사이의 모든 의심(疑心)과 오해(誤解)가 풀려버렸다.

우리 나라 사람이 청병(淸兵)에게 잡혀간 것이 적지 아니하고 또 청국(淸國)은 명(明)나라를 칠 군사(軍士)를 보내라고 계속(繼續) 요구(要求)하니 조정(朝廷)에서는 포로(捕虜)된 사람을 돌려오는 것과 군사(軍士)보내기를 거절(拒絶)하는 것이 대청외교(對淸外交)의 가장 중요(重要)한 일이었다. 그러나 청(淸)의 힘이 늘어서 군사(軍士)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었는데 임경업(林慶業)이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명병(明兵)과 싸우게 되자 군사(軍士) 중(中)에 도망(逃亡)하여 명(明)나라에 들어가서 청병(淸兵)의 내용(內容)을 알려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또 포로(捕虜)된 사람을 담배를 주고 돌려온 일이 있으니 담배는 광해군(光海君) 때에 일본(日本)을 거쳐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고 몇 해 아니 되어 국내(國內)에 퍼져서 한 생산업(生産業)이 되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는, 삼국시대(三國時代)는 혹(或)은 대등(對等)한 지위(地位)로써 교제(交際)하고 혹(或)은 외교정책(外交政策)으로 사대(事大)의 예(禮)를 잡더니 몽고(蒙古) 침입(侵入) 후(後)에 그 힘에 굴복(屈服)하여 완전(完全)한 군신(君臣) 관계(關係)가 되고 고려말(高麗末)에 명(明)나라가 중국(中國)을 차지하자 자진(自進)하여 군신(君臣) 관계(關係)를 맺으니 이는 북방(北方) 호족(胡族)에 대(對)하여는 항상(恒常) 적대감정(敵對感情)을 가지면서 한족(漢族)에 대(對)하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대(事大)의 예(禮)를 잡는 고래(古來)의 한 전통(傳統)이었다. 그런데 청국(淸國)은 호족(胡族)이라 국인(國人) 전체(全體)가 그에게 굴복(屈服)하기를 싫어하고 힘만 있으면 그를 쳐보려는 생각을 가졌다.

병자(丙子)의 란(亂)에 힘이 원체(元體) 부족(不足)하여 굴복(屈服)하기는 하였으나 청(淸)에 대한 반항심(反抗心)은 더욱 굳어졌다. 인질(人質)로 갔던 왕자(王子)는 십년(十年)만에 돌아오더니 세자(世子)는 십년(十年) 노고(勞苦)에 귀국(歸國)한지 얼마 아니 되어 병사(病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조(仁祖)의 뒤를 이어 왕(王)이 되니 이가 효종(孝宗)이다.

효종(孝宗)은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백반고초(百般苦楚)를 비상(備嘗)하고 또 청병(淸兵)에 종사(從事)한 일이 있어 그들의 실력(實力)을 잘 알고 있는지라 왕(王)이 된 후(後)에 청(淸)의 원수(怨讐)를 갚을 생각이 간절(懇切)하여 북벌(北伐)할 뜻을 품었다.

이에 송시열(宋時烈)(우암(尤庵)등(等)과 더불어 북벌(北伐) 계획(計劃)을 꾸미고 이완(李浣)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조련(調練)시키고 각지(各地)에 전마(戰馬)를 기르고 주요(主要)한 병참지(兵站地)에 군량(軍糧)을 저치(儲置)하였다. 그리고 이조(李朝)건국(建國)한지 이백오십여년(二百五十餘年)동안에 서북인(西北人)의 사로(仕路)를 막고 가혹(苛酷)한 차별(差別) 대우(待遇)를 하더니 강대(强大)한 청국(淸國)을 치려니 자연(自然)히 서북인(西北人)의 힘을 합(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에 비로소 서북인(西北人) 조용(調用)의 논(論)이 일어났다. 그러나 종래(從來)에 문(文)은 지평장령(持平掌令)에 지나지 못하고 무(武)는 만호첨사(萬戶僉使)에 지나지 못하던 것을 겨우 일이(一二)계급(階級)을 올려 주자는 데 불과(不過)하고 이것조차 조정(朝廷)안의 양반계급(兩班階級)의 방해(妨害)로 인(因)하여 순편(順便)하게 진행(進行)치 못하였다.

한편(便)으로 청국(淸國)과 교통(交通)한 뒤로 중국(中國)의 학문(學問)과 산업(産業)방면(方面)을 보고 돌아온 학자(學者)들 중(中)에는 우리 자체(自體)의 비판(批判)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청국(淸國)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발달(發達)하고 서양학술(西洋學術)이 수입(收入)되어 널리 퍼지고 있는 때이라 우리 나라 사신(使臣)들이 당시(當時) 청(淸)의 서울인 북경(北京)을 내왕(來往)하면서 이러한 중국(中國) 학술(學術)방면(方面)에 눈뜨기 시작(始作)하고 우리의 종래(從來)의 성리학(性理學)만으로는 국력(國力)을 크게 할 수 없으니 위선(爲先) 우리의 고유한 문화(文化)와 역사(歷史) 지리(地理) 등(等)을 연구(硏究)하는 동시(同時)에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學問)을 넓혀서 국내(國內)의 산업(産業)과 외국무역(外國貿易)을 진흥(振興)시켜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를 북학론(北學論)이라 이르고 북학(北學)이라 함은 북(北)으로 선진국(先進國)을 배운다는 뜻이다.

북학론(北學論)을 생(生)하는 학파(學派)를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또는 실학파(實學派)라 하는데 그중(中) 먼저 주창(主唱)한 사람은 유명(有名)한 경제학자(經濟學者)로 칭(稱)하는 유형원(柳馨遠)(반계(磻溪))이었고 실학(實學)의 주창(主唱)은 종래(從來) 정주학(程朱學)만을 숭고(崇高)하던 학풍(學風)의 일대(一大) 변화(變化)이오 또한 침체(沈滯)한 사회(社會) 분위기(雰圍氣)에 일대(一大) 청신기분(淸新氣分)을 주입(注入)한 것이었다.

정치가(政治家)중(中)에는 김육(金堉)(잠곡(潛谷)이 중국(中國)으로부터 철전(鐵錢)을 수입(收入)하여 철화(鐵貨) 제도(制度)의 확립(確立)을 꾀하니 이는 면포(綿布)를 화폐(貨幣)로 사용(使用)하여서는 국내(國內)의 산업(産業)이 발달(發達)될 수 없음으로 기어(期於)히 철화(鐵貨)로써 통화(通貨)를 삼으려 한 것이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주전(鑄錢)을 시작(始作)함으로부터 육백여년(六百餘年)을 지난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철화(鐵貨)가 통화(通貨)로 쓰게 되었으며 또 대동법(大同法)도 김육(金堉)의 강력(强力)한 주장(主張)에 의(依)하여 전국(全國)에 고루 시행(施行)하게 되었다.

또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로 흉년(凶年)이 자주 드는데 흉년(凶年)의 원인(原因)은 주(主)로 한재(旱災)이었고 특(特)히 수도경작(水稻耕作)에 한재(旱災)가 더욱 심(甚)하였다. 이에 효종(孝宗)은 만주(滿洲)에서 보고 온 수차(水車)를 국중(國中)에 보급(普及)시켜서 관개(灌漑)에 적지 않은 편의(便宜)를 주었다.

효종(孝宗)이 북벌(北伐) 계획(計劃)을 세움으로부터 비로소 자기비판(自己批判)이 생겨서 자체(自體)가 얼마나 미약(微弱)하고 침체(沈滯)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학술(學術) 산업(産業) 등(等) 모든 방면(方面)에 개혁(改革)과 쇄신(刷新)의 기운(氣運)이 가득 하였다. 소위(所謂) 북벌(北伐)이라 함은 효종(孝宗)이 복수심(復讐心)에서 나온 일종(一種)의 희망(希望)이오 당시(當時)의 양국(兩國) 국력(國力)을 비교(比較)하여 보아서 결(決)코 실현성(實現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국민(國民) 전체(全體)가 북벌(北伐)의 불가능(不可能)함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 등(等)이 이를 주장(主張)한 것은 왕(王孝宗)의 뜻을 영합(迎合)하여 자기(自己)의 지위(地位)를 고식(固植)하려 한 것이오 아무 진실성(眞實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후(後)에 윤휴(尹鑴)가 북벌(北伐) 론(論)을 주장(主張)한 것도 또한 조명(釣名)을 위(爲)한 것이었다. 효종(孝宗)은 북벌(北伐)하기 위(爲)하여 총수대(銃手隊)를 양성(養成)하였는데 이때 북만주(北滿州)의 흑룡강(黑龍江) 방면(方面)에서는 아라사(俄羅斯)(러시아)인(人) 침략(侵略)이 심(甚)하여 청(淸)과의 사이에 충돌(衝突)이 있으되 청인(淸人)은 항상(恒常) 아(俄) 인(人)에게 패(敗)함으로 청(淸)은 조선(朝鮮) 총수(銃手)의 잘 싸움을 알고 구원(救援)을 청(請)하여 두 번을 우리 총수대(銃手隊)가 들어가서 아(俄) 인(人) 격퇴(擊退)에 성공(成功)하니 이가 우리 나라와 아(俄) 인(人)이 서로 관섭(關涉)한 시초(始初)이었으며 효종(孝宗)은 왕위(王位)에 있은지 십년(十年) (기해(己亥)오월(五月)) 승하(昇遐)하고 북벌(北伐)론(論)은 스스로 사라지고 말았다.

 

서양문화(西洋文化)와의 교섭(交涉)과 외국무역(外國貿易)

이조(李朝)는 정주학(程朱學)을 숭상(崇尙)하고 그 외(外)의 학문(學問)은 일체(一切)로 이단(異端)이라 하여 배척(排斥)함으로 학술(學術)의 발달(發達)할 여지(餘地)가 없었다. 산업(産業) 방면(方面)에 있어서는 오직 농업(農業)을 중(重)히 여기고 공업(工業)을 천(賤)히 여기며 혹시(或是) 공업(工業) 기술(技術)이 능숙(能熟)한 자(者)가 있으면 소위(所謂) 양반(兩班)들은 그를 불러다가 임금(賃金)도 변변히 주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사역(使役) 함으로 기술자(技術者)들은 그 생활(生活)을 유지(維持)할 수 없어서 그 후(後)부터는 그 기술(技術)을 발휘(發揮)치 아니하고 고의(故意)로 조악(粗惡)한 물건(物件)을 만들게되니 그 까닭에 기술(技術)은 점차(漸次)로 퇴보(退步)되고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 국제적(國際的)으로 유명(有名)한 모든 공작물(工作物)이 다시 생산(生産)되지 못하니 유명(有名)한 백제(百濟) 이래(以來)의 조선(造船) 기술(技術) 신라시대(新羅時代)의 건축(建築) 조각(彫刻) 회화(繪畵) 등(等) 기술(技術) 고려(高麗)의 자기(磁器) 제지(製紙) 기술(技術) 등(等)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그러던 중(中) 중국(中國)에서는 명(明)나라 말엽(末葉)에 이태리(伊太利)사람 이마두(伊瑪竇)(마테오 리치)가 북경(北京)에 와서 천주교(天主敎) 당(堂)을 세우고 교리(敎理)와 학술(學術)에 관(關)한 도서(圖書)를 많이 번역(飜譯)하여 낸 뒤로부터 서양(西洋)의 학술(學術)과 기물(器物)이 차차(次次) 퍼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국(中國)을 거쳐 다시 우리 나라에 지래(持來)하게 되었다.

인조(仁祖) 구년(九年) (단기 삼천구백육십사년 신미(辛未))에 정두원(鄭斗源)(호정(壺亭))이 明나라에 갔다가 西洋의 총(銃) 천리경(千里鏡)(망원경) 자명종(自鳴鐘)(시계)등(等)을 가져와서 처음으로 서양(西洋) 문물(文物)을 전(傳)하였으며 효종(孝宗) 때에는 김육(金堉)이 북경(北京)의 흠천감(欽天監)에 사람을 보내어 서양(西洋) 역법(曆法)을 배워다가 효종(孝宗) 사년(四年) (계사(癸巳))부터 시헌역(時憲曆)을 시행(施行)하니 이것이 서양(西洋) 문물(文物)을 직접(直接)으로 채용(採用)한 시초(始初)이었다.

서양(西洋)의 천주교(天主敎)는 선조(宣祖)때에 중국(中國)을 거쳐서 들어온 형적(形迹)이 있고 인조(仁祖)때로부터 서학(西學)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秘密裏)에 민간(民間)에 유포(流布)되고 있었다. 원래(原來) 종교(宗敎)의 포교(布敎)에는 교리(敎理) 이외(以外)에 다른 학술(學術) 공예(工藝) 등(等)을 수반(隨伴)하여 와서 교리(敎理) 선전(宣傳)의 힘을 돕는 것이다. 그 까닭에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불교(佛敎)가 들어올 때에 여러 가지 기술(技術)이 반래(伴來)하고 천주교(天主敎)의 포교(布敎)에도 서양(西洋)문물(文物)의 전래(傳來)가 간접적(間接的)으로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의 학술(學術)과 공업(工業) 기술(技術)에 이색(異色)이 섞이게 되었다.

서양(西洋)사람으로서 직접(直接)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는 선조(宣祖)때에 제주도(濟州道)에 표착(漂着)한 마리이(馬里伊)(포르투칼 사람..)를 비롯하여 인조(仁祖)때에는 화란(和蘭)(네델란드)사람 삼인(三人)이 표착(漂着)하여 왔고 그 중(中)에서도 박연(朴淵)은(벨테브레)은 대포(大砲)를 만드는 기술(技術)이 있고 우리 나라 사람에게 장가를 들어서 살았으며 효종(孝宗)때에는 역시(亦是) 화란(和蘭)사람 하멜등(等)(여수시 바닷가에 하멜공원이 있음) 삼십육(三十六)인(人)이 표류(漂流)하여 와서 십사년(十四年)동안 우리 나라에 구류(拘留)되어 있다가 그 중(中)에서 「하멜」등(等) 육인(六人)이 일본(日本)의 장기(長崎)로 도망(逃亡)하여 그곳에서 본국(本國)에 돌아갔다. 「하멜」이 우리 나라에 관(關)한 책(冊)을 지어내니 서양(西洋) 사람의 손으로 우리 나라가 세계(世界)에 소개(紹介)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외국(外國) 무역(貿易)은 전(前)에는 외국(外國)과의 통상(通商)을 국가(國家) 재정(財政)을 보족(補足)하기 위(爲)하여 통상(通商)에 힘쓰고 거기에 필요(必要)한 시설(施設)을 하였다. 일본(日本)에 대(對)하여는 부산(釜山) 왜관(倭館)을 물이 깊은 초량(草梁)으로 옮기고 선박(船舶)의 왕래(往來)를 편리(便利)하게 하고 청(淸)에 대(對)하여는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의 무역(貿易)을 정기적(定期的)으로 개설(開設)하게 하고 동부(東部) 만주(滿洲)에 대(對)한 회령(會寧) 개시(開市)에도 그때 그때의 적당(適當)한 변통(變通)을 더 하였다. 의주(義州)에서 청인(淸人)의 생사(生絲)를 들여오고 부산(釜山)에서 일본(日本)의 은(銀)을 받아다가 다시 두 나라에 전매(轉賣)하여 그 이익(利益)을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에 보태었고 또 인삼(人蔘)의 수출(輸出)도 적지 아니 하였다.

이조개국(李朝開國) 초(初)에는 남양(南洋) 방면(方面)의 조왜(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섬라(暹羅)(동남아시아 샴, 타이) 유구(琉球)(오끼나와)등(等) 여러 나라가 자주 토산물(土産物)을 가지고 오더니 그 후(後)에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의 해상(海上)에는 왜구(倭寇)의 작폐(作弊)가 심(甚)하여 남양(南洋) 사람들의 직접(直接) 통항(通航)은 끊어지고 그 대신(代身)에 해상(海上) 무역(貿易)으로써 유일(唯一)한 생계(生計)를 삼는 유구(琉球)사람들이 남해(南海) 일본(日本) 조선(朝鮮)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면서 중계무역(中繼貿易)의 이(利)를 취(取)하였다.

이러한 관계(關係)로써 유구(琉球)는 우리 나라에 내왕(來往)이 많고 성종(成宗)때에 가장 빈번(頻繁)하였고 연산군(燕山君) 이후(以後)로 차차(次次) 드물어졌다. 그네들은 대개(大槪) 섬라(暹羅) 안남(安南)(베트남) 남양군도(南洋群島)(괌,싸이판지역) 조왜(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등(等) 남국(南國)의 물자(物資)를 직접(直接) 또는 중국(中國) 경유(經由)로 받아다가 일본(日本) 박다(博多)(규슈)에서는 일본(日本)상인(商人)에 넘기고 우리 나라 삼포(三浦)로 와서는 주(主)로 면포(綿布)와 교역(交易)하여 한번에 수천(數千) 내지(乃至) 수만여필(數萬餘疋)을 가져가는 일도 있었으니 이때의 일본(日本)이나 유구(琉球)는 아직 목면(木棉) 재배(栽培)를 몰라서 일국(一國)의 수요(需要)를 우리 나라에서 가져다가 공급(供給) 하였음으로 우리 나라 면포(綿布)는 국제(國際) 통화(通貨)로써 중요성(重要性)을 가지고 있었다. 인조(仁祖)때에 유구(琉球) 왕(王)이 일본(日本)에 잡혀간 일이 있는데 왕자(王子)가 부왕(父王)을 속(贖)하고자 하여 여러 가지 보화(寶貨)를 배에 싣고 일본에 가다가 바람에 표류(漂流)되어 제주도(濟州道)에 내박(來泊)하였다. 그때 제주도(濟州道) 목사(牧使)는 그 보화(寶貨)를 탐내어 취(取)하려 하였으나 응(應)하지 아니 함으로 불법입국(不法入國)하였다는 죄명(罪名) 하(下)에 사형(死刑)에 처(處)하니 왕자(王子)는 부왕(父王)도 속(贖)하지 못하고 아무 죄(罪)없이 이역(異域)에서 죽는 것이 하도 원통(寃痛)하여 보화(寶貨)를 해중(海中)에 집어넣고 글 한 수(首)를 짓고 형(刑)을 받으니 이것이 유구(琉球) 사람이 우리나라에 온 최후(最後)이었다.

堯語難明桀服身 三良入地人誰贖

臨刑何暇訴蒼旻 二子乘舟賊不仁

骨曝沙場纏有草 竹西樓下滔滔水

魂歸故國弔無親 遺恨分明咽萬春

 

堯임금말도 桀에겐 밝히기 어렵고

세사람 묻히니 누가 贖하리오

刑에 臨하여 하늘에 호소할 겨를도 없네

二子乘舟에 적은 어질지 못하네

뼈는 모래밭에 딩굴고 풀마저엉킬터

魂은 고국에 돌아간들 조문할 친척 없네

죽서루아래 도도히 흐르는 물처럼

유한 오열은 분명 만년 봄 하리라

 

 

 

 

사색당쟁(四色黨爭)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은 서인(西人)의 손으로써 된 것임으로 서인(西人)이 정권(政權)을 홀로 차지하고 광해군(光海君)을 도와서 악정(惡政)을 행(行)하던 대북파(大北派)는 전멸(全滅)되고 소북파(小北派)와 남인(南人)은 정치(政治)에 참여(參與)하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다. 그러나 서인(西人)의 횡포(橫暴)가 차차(次次) 심(甚)하였음으로 효종(孝宗) 말년(末年)으로부터 왕(王)은 서인(西人)을 싫어하고 남인(南人)을 등용(登用)하는 일이 많더니 효종(孝宗)의 다음 임금 현종(顯宗)에 이르러서는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함께 조정(朝廷)에 입(立)하였다.

이때 양파(兩派)의 당쟁(黨爭)으로서 소위(所謂) 예송(禮訟)이라는 것이 있으니 효종(孝宗)의 상(喪)에 그 계모(繼母) 조대비(趙大妃)가 어떠한 복(服)을 입어야 옳으냐 함에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 등(等)은 일년(一年)이라 하고 남인(南人) 윤휴(尹鑴) 등(等)은 삼년(三年)이라 하여 서로 싸우다 서인(西人)이 이겼는데 현종(顯宗)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 (효종(孝宗)인(人))의 상(喪)에 다시 그 시어머니 조대비(趙大妃)의 복(服)을 서인(西人) 김수흥(金壽興) 등(等)은 구월(九月)이라 하고 남인(南人) 허적(許積) 등(等)은 일년(一年)이라 하여 이번은 남인(南人)이 이기고 오십년(五十年)동안을 정권(政權)을 잡고 있던 서인(西人)은 정계(政界)에서 쫓겨났다. 이때로부터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당쟁(黨爭)이 더욱 심(甚)하였는데 현종(顯宗)의 다음 임금 숙종(肅宗)의 초년(初年)에는 남인(南人)이 세력(勢力)을 얻고 있더니 숙종(肅宗) 육년(六年)에 서인(西人) 김석주(金錫冑) 등(等)이 당시(當時)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는 허적(許積)의 서자(庶子) 허견(許堅)이 역모(逆謀)를 꾸몄다하여 역옥(逆獄)을 일으켜서 허적(許積) 윤휴(尹鑴) 등(等) 남인(南人)의 영수(領首)들이 원통(寃痛)한 죽음을 당(黨)하고 남인(南人)이 무고(無辜)히 죄(罪)를 입은 자(者)가 천(千)을 넘고 서인(西人)이 다시 정권(政權)을 잡으니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이때 서인(西人)의 수령(首領)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弟子) 윤증(尹拯)과의 사이에 감정(感情)이 어긋나서 두 파(派)로 나뉘었는데 송(宋)의 편(便)을 드는 사람을 노론(老論)이라 하고 윤(尹)의 편(便)을 드는 사람을 소론(少論)이라 하니 이에 서인(西人)은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나뉘고 거기에 남인(南人)과 소북(小北)을 합쳐서 사색(四色)이라 일컬었다. 숙종(肅宗)은 본시(本是) 변덕(變德)이 많은 임금이라 어느 한가지 일이 몇 해 동안 계속(繼續)되면 곧 염증(厭症)이 나서 새 것을 좋아하는 성질(性質)이 있었다. 숙종(肅宗) 십오년(十五年)에 왕(王)이 왕비(王妃) 민씨(閔氏)를 싫어하고 희빈(嬉嬪) 장씨(張氏)를 사랑하고 그가 낳은 아들을 세자(世子)로 봉(封)하려 함에 송시열(宋時烈) 등(等) 서인(西人)이 이를 반대(反對)하였음으로 왕(王)은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민비(閔妃)를 폐(廢)하고 다시 남인(南人)을 쓰니 고대(古代) 소설(小說)로 전(傳)해오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왕(王)이 장빈(張嬪)에 혹(惑)하여 민비(閔妃)를 몰아냄을 풍자(諷刺)한 글이었다.

그러나 숙종(肅宗) 이십년(二十年)에 이르러 왕(王)은 전(前)에 한 일을 후회(後悔)하고 민비(閔妃)를 복위(復位)하고 장빈(張嬪)을 쫓아내고 다시 서인(西人)을 불러 쓰니 이로부터 남인(南人)들은 아주 정계(政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정계(政界)에서 물러난 남인(南人) 학자(學者)들은 벼슬을 체념(諦念)하고 주(主)로 실학(實學) 방면(方面)으로 향(向)하여 고서(古書)의 고증(考證)과 새로운 연구(硏究)가 많이 생기니 그 중(中)에 가장 유명(有名)한 사람은 이익(李瀷)(성호(星湖)이니 그는 유형원(柳馨遠)(반계(磻溪)의 새 학풍(學風)을 계승(繼承)하여 후진(後進)의 길을 개척(開拓)한 대(大) 학자(學者)이었다. 남인(南人)의 패퇴(敗退)는 비록 남인(南人)을 위(爲)하여는 소조(蕭條)한 감(感)이 없지 아니하나 우리 나라 학문(學問)의 발달(發達)을 위 하여는 크게 경하(慶賀)할 일이었다.

정계(政界)의 번복(飜覆)이 이와 같이 잦고 정쟁(政爭)이 이와 같이 험(險)함으로 국가(國家)의 대사(大事)는 모두 방기(放棄)하는 형편(形便)이었다.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두 대란(大亂)을 겪은 뒤에 토지(土地) 겸병(兼倂)의 폐(弊)는 더욱 증장(增長)하여 사회(社會)는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의 양대(兩大) 계급(階級)으로 분열(分列)하고 소작인(小作人)들은 생계(生計)가 점점(漸漸) 어려워서 산림(山林) 중(中)에 들어가서 임목(林木)을 불사르고 경지(耕地)만드는 경향(傾向)이 많았으니 이가 화전(火田)의 시(始)이다. 그러나 조정(朝廷)에서는 이에 대(對)한 아무런 대책(對策)이 없고 이로부터 각지(各地)에 울창(鬱蒼)하던 임목(林木)은 날로 황폐(荒廢)하여졌다.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와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에 천제(天際)에 높이 솟아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우리 나라의 주산(主山)으로 되어있으나 청국(淸國)과의 사이에 과재(跨在)하여 양국(兩國) 국경선(國境線)이 명확(明確)치 아니하였다. 세종왕(世宗王)이 육진(六鎭)을 설치(設置)한 후(後)에 두만강(豆滿江) 북편(北便)의 주민(住民)들이 번호(藩胡)라는 이름으로 대대(代代)로 조정(朝廷)에 공물(貢物)을 바치더니 인조(仁祖)때에 청국(淸國)이 이 지방(地方)에 살던 동족(同族)을 데려감에 이 지방(地方)이 공한(空閑)한 채로 버려져서 피아(彼我)의 유민(流民)들이 비밀(秘密)히 입거(入居)하였다. 그래서 여기가 어느 나라 땅이냐 하는 문제(問題)가 가끔 일어나더니 숙종(肅宗) 삼십팔년(三十八年) 임진(壬辰)에 청국(淸國) 강희(康熙) 제(帝)가 이 지방(地方)의 국경(國境)을 밝히기 위(爲)하여 목극등(穆克登)을 우리 나라에 보내었다. 이때 조선(朝鮮)에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사이에 격렬(激烈)한 당쟁(黨爭)이 벌어지고 있는 때라 국경문제(國境問題)의 중요성(重要性)은 염두(念頭) 에 두지 아니하고 북경(北境) 지리(地理)에 아무런 견식(見識)이 없는 사람들을 백두산(白頭山)에 보내어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경계(境界)를 정(定)하는데 목극등(穆克登)의 주장(主張)에 일언(一言)의 항변(抗辯)도 없이 유유순종(唯唯順從)하여 백두산(白頭山)하(下) 십리(十里)허(許)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서(西)는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東)은 토문강(土門江)이 된다는 글을 새기니 이가 소위(所謂)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이다.

비(碑)를 세운 후(後)에 조정(朝廷) 안에서 여러 가지 물론(物論)이 일어나고 북변(北邊)에 있는 관리(官吏)가 실지(實地)로 이 일대를 답사(踏査)하여 조정(朝廷)에 보고(報告)하였는데 그 요지(要旨)는 정계비(定界碑)의 서편(西便)으로 흐르는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는 틀림이 없으나 동편(東便)으로 흐르는 물은 사파(四派)가 있으니 가장 북편(北便)에서 흐르는 제일파(第一派)의 물은 비(碑)에서 거리가 멀고 또 북(北)쪽으로 들어가니 이는 문제(問題) 삼을 것이 없고 그 물의 남(南)에서 흐르는 제이파(第二派)도 비(碑)와의 거리(距離)가 조금 멀고 제삼파(第三派)의 물은 비(碑)에서 가장 가까운데 이 물을 따라 내려가면 점점(漸漸) 북(北)으로 굽어져서 깊이 호지(胡地)로 들어가고 제사파(第四派)인 가장 남(南)쪽에 있는 물은 비(碑)에서 가장 멀고 이것이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가 된 것이니 결국(結局) 정계비(定界碑)에 기록(記錄)된 所謂 토문강(土門江)이라 함은 제삼파(第三派)의 물을 말함이 확실(確實)하다고 하였다. 이 제삼파(第三派)의 물은 간도(間島)의 북(北)쪽을 흘러서 두만강(豆滿江) 하류(下流)에 이르러 합수(合水)된 것임으로 지금의 간도(間島) 지방(地方)은 정계비문(定界碑文)대로 해석(解釋)하면 당연(當然)히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되는 것이오 이것이 후일(後日) 양국간(兩國間)의 분쟁(紛爭)거리가 되는 것이다.

울릉도(鬱陵島)는 동해(東海) 중(中)에 있는 일(一) 고도(孤島)라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독립국가(獨立國家)로 있다가 신라(新羅)의 군현(郡縣)으로 된 것이다. 이조(李朝) 초기(初期)에는 주민(住民)이 있어 농업(農業)과 어업(漁業)으로 생활(生活)하더니 그 후(後)에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이 자주 있어서 주민(住民)들이 안주(安住)할 수가 없고 또 국가(國家)에서 군사(軍士)를 보내어 수비(守備)할 수도 없음으로 조정(朝廷)에서는 주민(住民)을 전부(全部) 내륙(內陸)으로 옮기고 무인도(無人島)를 만들었다. 울릉도(鬱陵島)와 그 동(東)쪽에 있는 독도(獨島)는 어획(漁獲)이 많은 곳임으로 일본어민(日本漁民)들이 비밀(秘密)히 들어와서 자유(自由)로 고기잡이를 하고 혹(或) 조선어민(朝鮮漁民)이 고기 잡으러 들어가면 그들은 鬱陵島를 일본(日本) 영토(領土)라 하여 축출(逐出)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숙종(肅宗)때에 안용복(安龍福)이 여러 어민(漁民)들과 함께 울릉도(鬱陵島)에 고기 잡으러 들어갔더니 일본어선(日本漁船)이 이미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기로 안용복(安龍福)은 우리 어민들과 합력(合力)하여 몰아버린 일이 있는데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알고 도리어 법금(法禁)을 범(犯)하고 밀어(密漁)하였다는 죄명(罪名)으로 벌을 받았다.

그러나 안용복(安龍福)은 우리 나라 영토(領土)를 우리 나라 사람이 지키지 못하고 일본어민(日本漁民))의 임의(任意) 사용(使用)에 맡기는 것이 원통(寃痛)하여 다시 어선(漁船)을 타고 들어갔더니 역시(亦是) 일본어선(日本漁船)이 와서 있기로 이를 난타(亂打)하여 쫓아 보냈는데 마침 풍파(風波)가 일어나서 표류(漂流)하여 일본(日本)에 들어갔다. 안용복(安龍福)은 이 기회(機會)에 일본인(日本人)의 울릉도(鬱陵島) 밀어(密漁) 금지(禁止) 문제(問題)를 근본적(根本的)으로 해결(解決)하리라 하고 일본(日本)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이를 힐문(詰問)하더니 막부(幕府)에서는 이는 대마도(對馬島)의 어민(漁民)들의 소위(所爲)요 중앙(中央) 정부(政府)에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며 타국(他國) 영토(領土)에 들어가서 고기 잡는 것은 부당(不當)한 일이오 또 이로 인(因)하여 양국간(兩國間)의 화(和)를 상(傷)함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대마도(對馬島) 주(主)에게 보내는 글을 안용복(安龍福)에게 주었다. 안용복(安龍福)은 그 글을 가지고 대마도(對馬島) 주(主)에게 전(傳)하니 대마도(對馬島) 주(主)는 막부(幕府)의 엄명(嚴命)에 겁(怯)을 먹고 안용복(安龍福)에게 사과(謝過)까지 하였다. 안용복(安龍福)은 다시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다시는 밀어(密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約束)의 글을 받아 가지고 나라에 돌아오니 이는 외교(外交)의 일대(一大) 성공(成功)이오 또 울릉도(鬱陵島)를 일본(日本) 영토(領土)라고 주장(主張)하여 일후(日後) 양국(兩國)간(間)에 분쟁(紛爭)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危險性)을 이미 막은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이 말을 듣고 안용복(安龍福)의 공(功)을 상(賞)주려는 말은 없고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이 없이 외국(外國)과 교섭(交涉)한 죄(罪)로 사형(死刑)에 처(處)하려 하였다. 이때 조정(朝廷)안에는 사형(死刑) 논(論)에 반대(反對)하여 상공죄론(賞功罪論)이 강력(强力)히 주장(主張)되니 이 논(論)은 안용복(安龍福)이 일본인(日本人)의 밀어(密漁)를 금지(禁止)한 공(功)은 크게 상(賞)주어야할 것이오 사사(私私)로이 외국(外國)과 교섭(交涉)한 죄는 벌(罰)하여야할 것인데 만일 안용복(安龍福)을 죽이면 이는 한것 대마도(對馬島) 주(主)로 하여금 통쾌(痛快)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우리 나라의 수치(羞恥)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논(論)이 마침내 이겨서 안용복(安龍福)은 한동안 옥(獄)에 갇혔다가 방면(放免)되고 상(賞)은 받지 못하였다.

숙종(肅宗) 일대(一代)는 당쟁(黨爭)이 가장 심(甚)하여 국토(國土)의 영토(領土)문제(問題)까지 등한시(等閑視)하기에 이르렀고 숙종(肅宗)의 뒤를 이은 경종(景宗)은 희빈(嬉嬪) 장씨(張氏)의 소생(所生)이라 처음에 숙종(肅宗)때에 경종(景宗)을 세자(世子)로 봉(封)하려는 것을 노론(老論) 송시열(宋時烈) 등(等)이 반대(反對)하였고 또 경종(景宗)이 즉위(卽位)한 후(後)에 노론(老論)들은 경종(景宗)이 병약(病弱)하다하여 왕(王)의 이복(異腹)아우 영조(英祖)를 왕(王)의 대리(代理)로 세워서 정사(政事)를 대청(代聽)케 하려하니 이에 소론(少論)들은 노론(老論)을 역적(逆賊)으로 몰아서 소위(所爲) 노론곡신(老論哭臣)이라는 李頣命 金昌集 李健命 趙泰采 等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罪주니 이는 경종(景宗) 원년(元年) 신축(辛丑)으로부터 다음해 임인(壬寅)에 걸친 일임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라 하는데 사화(士禍)라 함은 비사류파(非士類派)가 사류(士類)를 모해(謀害)하는 것이오 사류(士類)와 사류(士類)와의 모해(謀害)는 사화(士禍)가 아니라 당쟁(黨爭)의 살육(殺戮) 극(劇)이니 소위(所謂) 辛壬士禍는 하나의 사류(士類) 간(間)의 살육(殺戮)극(劇)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경종(景宗)은 신병(身病)이 있어 재위(在位)한지 겨우 사년(四年)이오 영조(英祖)가 즉위(卽位)하니 영조(英祖)는 총명(聰明)함이 이조(李朝) 제왕(諸王) 중(中)에서 넉넉히 중주(中主)는 되는지라 일직부터 당파(黨派)싸움이 국가(國家)의 모든 불행(不幸)의 원인(原因)임을 깊이 느끼고 친(親)히 노론(老論)의 閔鎭遠과 少論의 李光佐의 화해(和解)를 권(勸)하고 조정(朝廷)에서는 여러 색목(色目)의 사람을 함께 쓰기로 하니 이를 탕평책(蕩平策)이라 한다. 당인(黨人) 중(中)에는 저희들의 지나친 행동(行動)을 반성(反省)하고 국가(國家)의 앞날을 위(爲)하여 탕평책(蕩平策)에 호응(呼應)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당화(黨禍)때문에 참혹(慘酷)한 화(禍)를 당(當)한 집의 자손(子孫)들은 양파(兩派)가 함께 조정(朝廷)에 입(立)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더욱이 노론(老論)들은 기어(期於)이 신임당화(辛壬黨禍)의 원수(怨讐)를 갚으려 하였다. 왕(王英祖)은 아무리 탕평(蕩平)하기를 권(勸)하되 노론(老論)들이 끝까지 응(應)하려하지 아니함으로 「당쟁(黨爭)도 국가(國家)가 있은 연후(然後)의 일이오 만일 당쟁(黨爭)때문에 국가(國家)가 망(亡)하면 당인(黨人)들은 어느 곳에 가서 당쟁(黨爭)을 할 것인가」하여 정(情)으로 읍언(泣言)한 일도 있고 몇 차례는 일이(一二)일간(日間) 단식(斷食)하고 당인(黨人)들의 반성(反省)을 촉구(促求)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당쟁(黨爭)은 이미 원결수심(怨決讐深)하고 난치(難治)의 고질(痼疾)로되어 왕(王英祖)의 읍소(泣訴)나 단식(斷食)으로써 화해(和解)될 것이 아니었다. 이에 왕(王英祖)은 탕평책(蕩平策)에 응(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점차(漸次)로 멀리하고 당쟁(黨爭)에 깊이 관계(關係)되지 아니한 사람들을 쓰게되니 조정(朝廷)안에서 당쟁(黨爭)에 깊이 관계(關係)되지 아니한 사람은 주(主)로 척리파(戚里派)이었고 이로부터 척리파(戚里派)의 대두(擡頭)하는 경향(傾向)이 나타나서 순조(純祖)이후 팔십여년(八十餘年) 간(間)을 외척(外戚) 전횡(專橫) 시대(時代)를 만들었다. 처음에 세조(世祖)때에 유신파(儒臣派) 대(對) 척리파(戚里派)의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이 구십년(九十年)동안을 계속(繼續)하다가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유신파(儒臣派)가 승리(勝利)를 얻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유신(儒臣) 동지(同志) 간(間)에 당쟁(黨爭)이 일어나서 이래(爾來) 백(百)육칠십년(六七十年)간(間)을 혈투(血鬪)를 연출(演出)하고 마침내 자체(自體)의 부패(腐敗)로 인(因)하여 다시 전일(前日)의 정적(政敵)이던 척리파(戚里派)를 등장(登場)케 하니 이는 세사(世事)의 한 과보(果報)로써 역사(歷史)는 복(覆)치 아니하면서 또한 반복(反覆)하는 것이다.

영조(英祖)가 비록 탕평책(蕩平策)을 쓰고 있으나 정계(政界)의 이면(裏面)에는 여전(如前)히 격심(激甚)한 당쟁(黨爭)의 조류(潮流)가 흐르고 있고 각지방(各地方)에는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고 유사(儒士)들의 독서처(讀書處)로 되어 있는 서원(書院)은 당쟁(黨爭)의 근거지(根據地)로 되어 있으며 타당(他黨)과의 사이에는 서로 통혼(通婚)치 아니함은 물론(勿論)이오 지방(地方)에서 일어나는 사소(些少)한 일까지도 모두 당쟁(黨爭) 꺼리로 이용(利用)하였고 영조(英祖) 초년(初年)에는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이 합세(合勢)하여 이인좌(李麟佐)를 대장(大將)으로 하여 영남(嶺南)에서 병(兵)을 일으켜 정국(政局)을 전복(顚覆)시키려는 반란(叛亂)까지 일어났다. 영조(英祖) 중년(中年)에 세자(世子)로 하여금 대리(代理) 청정(聽政)케 하였는데 세자(世子)의 처사(處事)가 당인(黨人)들의 이해(利害)에 맞지 아니함으로 당인(黨人)들은 백방(百方)으로 모략(謀略)을 꾸며서 왕(王)과 세자(世子)와의 사이를 이간(離間)시키고 일보(一步)를 진(進)하여 왕(王英祖)의 부자간(父子間)의 감정(感情)의 갈등(葛藤)을 일으키더니 필경(畢竟) 세자(世子)를 왕(王)에게 참소(讒訴)하여 이를 폐(廢)하고 뒤주 속에 넣어서 죽이기에 이르니 이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이오 정조(正祖)의 부(父)이다.

그럼으로 정조(正祖)의 신하(臣下)들 중(中)에서 김구주(金龜柱)는 세자(世子)를 죽임이 옳다 하고 홍봉한(洪鳳漢)은 옳지 않다 하여 두 파(派)의 의견(意見)이 나뉘어지니 김(金)의 편(便)에 가담(加擔)한 사람을 벽파(僻派)라 하고 홍(洪)의 편(便)에 가담(加擔)하는 파(派)를 시파(時派)라 하여 이로부터 사색(四色)의 싸움보다도 시벽(時僻)의 두 파(派)가 서로 맞서서 정조(正祖) 일대(一代)는 이 싸움으로 날을 보내었으니 정조(正祖)가 그 부(父)의 원사(寃死) 참사(慘死)한 것을 몹시 슬퍼함으로 왕(王)의 뜻을 받드는 사람은 시파(時派)가 되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은 영조(英祖)의 처리(處理)할 일이니 이를 비난(非難)할 수 없다 하는자(者)는 벽파(僻派)가 되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은 당쟁(黨爭)의 여파(餘波)가 왕실(王室)에 미친것이오 국가정치(國家政治)에는 아무 관계(關係)가 없는 일인데 이것으로써 또 서로 가부(可否)를 다투고 있는 것은 세력(勢力) 쟁탈(爭奪)을 위한 일(一) 방편(方便)으로 이용(利用)한 것이다.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세(世)는 사색(四色)이 없어진 것은 아니오 또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와의 싸움이 일어났으나 정조(正祖)도 현명(賢命)한 임금이라 영조(英祖)의 정책(政策)을 답습(踏襲)하여 탕평책(蕩平策)을 썼음으로 숙종(肅宗)의 때와 같은 유혈(流血)의 참극(慘劇)은 별(別)로 없어서 인심(人心)이 안정(安定)하였다.

그리하여 왕(王)은 민생문제(民生問題)에 크게 유의(留意)하였으니 영조(英祖)는 당시(當時) 평민(平民)의 장정(壯丁)들이 군포(軍布)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무명 이필(二疋)씩 바치었는데 이것이 백성(百姓)에게 과중(過重)한 부담(負擔)이 되고 있음으로 왕(王英祖)의 이십육년(二十六年)부터 균역법(均役法)을 시행(施行)하여 군포(軍布)를 한 필(疋)씩 감(減)하고 그 대신(代身) 어염(魚鹽) 선박(船舶)에도 과세(課稅)하였다.

조엄(趙儼)은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감저(甘藷)(고구마)를 가져와서 심으니 이가 우리 나라에서 감저(甘藷)를 심은 처음이다. 조정(朝廷)에서는 감저(甘藷)가 구황곡식(救荒穀食)으로 중요(重要)한 것이라 하여 삼남(三南) 각지(各地)에 심게 하니 수십년(數十年) 동안에 각지방(各地方)에 널리 보급(普及)되니 정조(正祖)때에 이르러 전국(全國)에서 산출(産出)되는 감저(甘藷)의 수량(數量)을 조사(調査)케 한바 의외(意外)에 남해안(南海岸)의 몇 부락(部落)에 겨우 얼마간 남아 있을 뿐이오 그 외(外)에는 종자(種子)조차 없어져 버렸다. 왕(王)은 크게 놀래어 그 원인(原因)을 조사(調査)하니 농가(農家)에서 감저(甘藷)를 심으면 군현(郡縣)의 이속(吏屬)들과 토호(土豪)들이 값도 내지 않고 무료(無料)로 토색(討索)하고 그 토색(討索)에 응(應)하지 아니하면 무슨 구실(口實)을 만들어서 잡아다가 엄형(嚴刑)을 가(加)하니 농민(農民)들은 감저(甘藷)를 심은 까닭에 파산(破産)할 지경(地境)에 이른 자(者)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필경(畢竟) 종자(種子)까지 없애버린 것이었다. 이에 왕은 엄명(嚴命)을 내리어 토색(討索)하는 자(者)를 엄금(嚴禁)하고 그 재배(栽培)함을 극력(極力) 장려(獎勵)한 결과 드디어 우리 나라의 주요(主要)한 생산물(生産物)이 되었다.

정조(正祖)는 또한 전국(全國)에 영(令)을 내리어 농업기술(農業技術)의 우수(優秀)한 것이 있으면 그 요령(要領)과 방법(方法)을 적어서 조정(朝廷)에 올리라 하니 이에 전국(全國)으로부터 수리시설(水利施設) 농용거(農用車)등(等) 농업상(農業上) 유익(有益)한 계획(計劃)과 경험담(經驗談)이 많이 제출(提出)되었다. 왕(王)은 농업(農業)을 장려(獎勵)하는 의미(意味)로 좋은 안(案)을 제출(提出)한 사람을 뽑아서 서울에 불러다가 한자리에 모으고 각자(各自) 안(案)을 설명(說明)케 한 후(後) 후(厚)히 상(賞)을 주고 그 안(案)을 모아서 농서(農書)를 만들어 전국(全國)에 폈다.

 

영(英) 정(正)의 문화(文化)

실학(實學)이 한번 일어난 후(後)로 이 방면(方面)에 뜻을 두는 학자(學者)가 많고 또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글을 편찬(編纂)하고 민간(民間)에서는 역사(歷史) 지리(地理) 정치(政治) 경제(經濟) 실업(實業) 산학(算學) 의학(醫學) 실학(實學)에 대(對)한 연구(硏究)와 저술(著述)이 성(盛)해서 그 문운(文運)의 발달(發達)은 세종(世宗)때에 필적(匹敵)할만 하였다. 또 전(前)부터 천주교(天主敎)가 들어오고 있던 중(中) 정조(正祖)때에는 이승훈(李承薰)이 북경(北京)으로부터 천주교(天主敎)에 관(關)한 책(冊)을 가져와서 청년학자(靑年學者)들끼리 나누어 읽음에 그 교세(敎勢)가 크게 떨쳐서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도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제사(祭祀)를 폐(廢)하고 이 교(敎)를 신앙(信仰)하는 자(者)가 많으며 특(特)히 황해(黃海) 강원(江原) 경기(京畿) 충청(忠淸)의 각도(各道)에 성행(盛行)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천주교(天主敎)가 제사(祭祀)를 폐(廢)하는 까닭으로 이를 사교(邪敎)라 하여 금령(禁令)을 내리고 또 근원(根源)을 막는다하여 북경(北京)으로부터 모든 서적(書籍)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교세(敎勢)는 비밀리(秘密裏)에 더욱 넓어지고 소주(蘇州)(강소성)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비밀리(秘密裏) 입국(入國)하여 더욱 전도(傳道)에 힘썼다.

남인(南人)들은 숙종(肅宗) 말(末)로부터 정권(政權)에서 멀어짐에 그 힘을 학문(學問)에 기울여서 청(淸)나라의 고증학(考證學)을 받아드린 것도 남인(南人)이었고 또 천주학(天主學)이라는 새 지식(知識)에 대(對)하여 서로 그들은 특별(特別)한 관심(關心)을 가지고 남인(南人)으로서 천주교(天主敎)를 믿는 사람이 많았으니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이학규(李學逵) 정약종(鄭若鍾) 정약용(鄭若鏞) 같은 일대(一代)의 명사(名士)가 모두 진실(眞實)한 신도(信徒)였고 특(特)히 정약용(鄭若鏞)(다산(茶山))은 실학파(實學派) 가운데서 가장 특출(特出)한 학자(學者)이었다.

원래(元來) 천주교(天主敎)에서 제사(祭祀)를 제사(祭祀)를 지내지 말라함이 국속(國俗)에 어그러지기 때문에 나라에서 이를 사교(邪敎) 또는 좌도(左道)라 하여 금지(禁止)함이러니 정권(政權)다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비(非) 천주교인파(天主敎人派)가 천주교인(天主敎人)인 반대파(反對派)를 넘어뜨리려는 죄목(罪目)으로 이를 이용(利用)함에 미쳐 천주교(天主敎)에 대(對)한 박해(迫害)가 정조(正祖) 십오년(十五年) 이후(以後)로 여러 번 일어났다. 그러나 정조(正祖)때는 남인(南人) 채제공(蔡濟恭)(번암(樊巖))이 오랫동안 정승(政丞)으로 있으면서 이들을 옹호(擁護)하여 될 수 있도록 일이 없이 하였으나 정조(正祖)의 다음 임금 순조(純祖)가 즉위(卽位)함에 원년(元年)에 서교(西敎)의 옥(獄)을 일으켜서 다수(多數)한 교도(敎徒)가 잡혀 죽었다. 그러나 금령(禁令)이 엄(嚴)할수록 비밀리(秘密裏)에 더욱 퍼졌다. 천주교(天主敎)는 가깝게는 북경(北京)과 멀리는 서양(西洋)에 연결(連結)을 가졌음으로 세계(世界)의 새 소식(消息)과 학술(學術)이 이 길로 말미암아 들어오는 것이 많았으니 영국(英國)에서 발명(發明)된 수두법(手痘法)이 정약용(鄭若鏞)으로 말미암아 전래(傳來)한 것이 그 일례(一例)이오 후일(後日)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지구도(地球圖)같은 것도 천주교(天主敎)를 통(通)하여 서양학술(西洋學術)의 영향(影響)을 받은 것이다.

 

세도(勢道)정치(政治)

세도(勢道)라 함은 본시(本是) 왕(王)과 신하(臣下)들 사이를 주선(周旋)하는 소임(所任)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다. 모든 정치(政治)가 그의 손을 거치게 됨으로 스스로 세력(勢力)을 잡게된 것이다. 정조(正祖)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에 세손(世孫)을 해(害)하려 함으로 홍국영(洪國榮)이 세손(世孫)을 극진(極盡)히 보호(保護)하여 겨우 무사(無事)함을 얻고 및 즉위(卽位)한 뒤에 홍국영(洪國榮)으로써 숙위대장(宿衛大將)을 삼으니 궁중(宮中)을 지키면서 부터 소위(所謂) 세도(勢道)가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은 횡포(橫暴)한 일이 많음으로 미구(未久)에 물러나더니 정조(正祖)의 뒤를 이은 순조(純祖)가 왕(王)이 되니 때에 나이 십일세(十一歲)이었다. 그래서 영조(英祖)의 후인(后人) 안동(安東) 김씨(金氏)가 대신(代身) 국사(國事)를 처리(處理)하고 그 본가편(本家便)의 김조순(金祖淳)이 실권(實權)을 잡으니 세상(世上)에서 이 정치(政治) 형태(形態)를 안동(安東) 김씨(金氏) 세도(勢道)라고 칭(稱)하고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삼대(三代)가 모두 안동(安東) 김씨(金氏)에게 장가를 들어서 이 뒤 육십년(六十年)동안에 김씨(金氏)가 외척(外戚)으로써 세도(勢道)를 잡고 나가니 이것이 척리파(戚里派)의 완전(完全)한 재(再)등장(登場)이다.

세도(勢道)정치(政治)가 벌어진 후(後)로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풍습(風習)이 날로 심(甚)하고 관직(官職)을 매득(買得)한 무리들은 백성(百姓)들을 토색(討索)하여 재산(財産)을 잡으려하고 한 편(便) 서원(書院)을 중심(中心)으로 한 양반들이 무고(無辜)한 백성(百姓)들을 잡아다가 억울(抑鬱)한 죄(罪)를 얽어서 재물(財物)을 함부로 빼앗고 군현(郡縣)의 이속(吏屬)들이 여러 가지 농간(弄奸)으로 민재(民財)를 착취(搾取)하니 백성(百姓)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도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음으로 힘써 일할 생각이 나지 아니하여 모든 산업(産業)이 위축(萎縮)하니 평안지방(平安地方) 같은 곳은 고래(古來)로 율목(栗木) 재배(栽培)가 성행(盛行)하여 율산(栗産)이 전국(全國)에 유명(有名)하더니 율목(栗木)이 있는 까닭으로 전일(前日) 남(南)쪽 지방(地方)에서 고구마 재배(栽培)로 인(因)하여 파산(破産)하는 일이 있음과 같은 억울(抑鬱)한 사정(事情)이 도처(到處)에 생겼음으로 일제(一齊)히 율목(栗木)을 베어버린 일도 있었다.

이조(李朝)의 정치(政治)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삼정(三政)이라 하니 이는 국가(國家) 정치(政治)에 가장 근본(根本)이 되는 재정(財政)문제(問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전정(田政)이라 함은 토지(土地)의 소출(所出)을 근거(根據)로 하여 받는 세납(稅納)이오 군정(軍政)이라 함은 군포(軍布)이오 환곡(還穀)이라 함은 춘궁기(春窮期)에 가난한 백성(百姓)들에게 곡식(穀食)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얼마쯤의 이식(利息)을 붙여서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고구려(高句麗) 시대(時代)의 진대(賑貸)의 진대법(賑貸法)과 같은 것이다.

 

홍경래(洪景來) 난(亂)과 민란(民亂)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생긴 뒤로 삼정(三政)이 어지러워서 백성(百姓)이 살수가 없고 흉년(凶年)이 자주 들고 천재지변(天災地變)이 그치지 아니하여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 정조(正祖)때에 평안도(平安道) 유생(儒生)들이 서북(西北)사람을 몹시 차별(差別)한다는 이유(理由)로 과거(科擧)의 시험장(試驗場)에 들어감을 거부(拒否)한 일이 있는데 정조(正祖)는 조그마한 천민(賤民)들이 감(敢)히 왕명(王命)을 거역(拒逆)한다 하여 크게 노(怒)하여 그 수모자(首謀者)를 귀양보내고 그 외(外)는 모두 다시 과거(科擧)를 보지 못하게 하니 평안도(平安道) 인심(人心)이 극도(極度)로 분개(憤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中) 용강(龍岡)사람 홍경래(洪景來)가 벼슬을 구(求)하러 서울에 왔다가 조정(朝廷)의 처사(處事)가 탁란(濁亂)함을 보고 혁명(革命)의 뜻을 품고 순조(純祖) 십일년(十一年) 신미(辛未)에 우군칙(禹君則) 등(等)으로 더불어 가산(嘉山) 다복동(多福洞)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스스로 평서(平西) 대원수(大元帥)가 되고 격서(檄書)를 관서(關西) 일대(一帶)에 전(傳)하되 「관서(關西)는 단기(檀箕)의 구역(舊域)으로 문물(文物)이 환랑(煥朗)하며 왜호(倭胡)의 양난(兩難)에 효충(效忠)이 크거늘 조정(朝廷)이 서토(西土)를 경시(輕視)함은 하고(何故)오 더욱 방금(方今)에 유왕(幼王)이 상(上)에 있고 권간(權奸)이 날로 늘어서 김조순(金祖淳) 박종경(朴宗慶)의 무리가 국병(國柄)을 절롱(竊弄)하여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비는 틈이 없고 생민(生民)이 도탄(塗炭)하여 전두(前頭)가 불측(不測)하니 마땅히 이때로서 서인(西人)이 분기(奮起)하여 국내(國內)를 징청(澄淸)할 것이다.」하고 각(各) 고을을 치니 청천강(淸川江) 이북(以北)의 여러 고을이 이에 호응(呼應)하여 그 기세(氣勢)가 크게 떨치고 수령(守令) 중(中)에도 홍군(洪軍)에 항복(降服)한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저 유명(有名)한 김삿갓(입(笠) 이름 환연(煥淵))은 이때 조부(祖父) 김익순(金益淳)이 수령(守令)으로서 홍군(洪軍)에 항복(降服)하여 역적(逆賊)이 되었음으로 역적(逆賊)의 손자(孫子)로써 법망(法網)을 피(避)하여 삿갓을 쓰고 숨어 다닌 사람이다.

이 해 십이월(十二月)에 홍경래(洪景來)는 청천강(淸川江)을 도수(渡水)하여 남진(南進)하려 하더니 일야간(一夜間)에 비가 와서 얼음이 풀렸음으로 강(江)을 건너지 못하고 정주성(定州城)을 웅거(雄據)하고 관군(官軍)과 항전(抗戰)하였다. 이때는 오랫동안 승평(昇平)이 계속(繼續)하여 백성(百姓)들이 병사(兵事)를 알지 못하는지라 관군(官軍)이 비록 홍군(洪軍)을 치고 있으나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사기(士氣)가 떨치지 못하더니 상지(相持)한지 넉 달만에 임신년(壬申年) 사월(四月)에 관군(官軍)이 성외(城外)에 굴(窟)을 파고 화약(火藥)을 터뜨려서 겨우 성(城)이 함락(陷落)하였다. 홍경래(洪景來)는 「事已至此無可奈何」라하고 城을 넘어 도주(逃走)하여 그 종적(蹤迹)을 알지 못하였다.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 일어나기 전(前)에 이미 각지방(各地方)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났으니 민란(民亂)이라 함은 대개 수령(守令)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못 견디어 민중(民衆) 속에서 지휘자(指揮者)를 정(定)하고 난(亂)을 일으켜 수령(守令)을 몰아내는 것인데 수령(守令)을 죽이는 일은 극(極)히 적고 대부분(大部分)은 버들 광주리에 담아서 군경(群境)밖에 내어쫓는 것이다. 그럼으로 민란(民亂)은 혁명(革命)이 아니니 당시(當時)의 민란(民亂)은 귀족사회(貴族社會)의 영원성(永遠性)을 시인(是認) 하면서 다만 그때 그때의 불평(不平) 때문에 일어나는 소요(騷擾)이오 또 학정(虐政)을 하는 수령(守令)을 쫓아내면 그 목적(目的)이 달성(達成)되는 것이다. 지금 세상(世上)에 행(行)하는 춘향전(春香傳)은 정조(正祖) 시대(時代)의 전후(前後)에 지은 소설(小說)이라 하는데 그 글 속에 전라도(全羅道) 오십삼주(五十三州)의 머슴들이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짚둥우리에 담아서 경외(境外)에 몰아내겠다고 계획(計劃)함과 같음이 민란(民亂)의 실마리였다.

순조(純祖)의 뒤를 이은 헌종(憲宗)이 또한 나이 어리고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세도(勢道)를 잡고있어 정치(政治)가 어지럽고 각지(各地)에서 백성(百姓)의 소동(騷動)이 일어나서 조정(朝廷)에서는 이년(二年)이나 삼년(三年)에 한번씩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팔도(八道)에 보내어 민폐(民弊)를 끼치는 자(者)를 죄(罪)주는데 어사(御使)가 한번 나갔다가 돌아오면 수령(守令) 이속(吏屬) 토호(土豪)들이 죄(罪)를 받는 자(者)가 이백(二百) 혹(或)은 삼백(三百)에 가까우니 당시(當時) 지방(地方)에서 백성(百姓)을 괴롭게 하는 자(者)가 얼마나 많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사(御使)의 출도(出道)도 크게 효과(效果)를 내지 못하고 백성(百姓)의 고통(苦痛)은 여전(如前)히 심(甚)하더니 헌종(憲宗)의 다음 임금 철종(哲宗) 십삼년(十三年) 임술(壬戌)에 경상도(慶尙道) 진주(晉州)에서 백성(百姓)들이 병사(兵使)의 포학(暴虐)을 견디지 못하여 민란(民亂)을 일으켜 탐욕(貪慾)한 관리(官吏)를 몰아내고 그와 부동(附同)한 사람들을 잡아 다스리니 그 형세(形勢)가 가장 맹렬(猛烈)하였다. 이 바람이 한번 일어남에 각지(各地) 백성(百姓)들의 가슴속에 쌓이고 쌓였던 불평(不平)이 일시(一時)에 폭발(暴發)하여 경상도(慶尙道) 각지(各地)에서 불이 터지고 다음에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에 퍼졌는데 그 중(中)에 전라도(全羅道)가 우심(尤甚)하여 감사(監司)가 쫓겨나기에 이르렀고 다시 퍼져서 멀리 함경도(咸鏡道)의 함흥(咸興)과 제주도(濟州島)에까지 미치니 나라의 위신(威信)은 땅에 떨어지고 이씨(李氏) 왕조(王朝)의 몰락(沒落)이 가까워 오는 조종(弔鍾)을 울린다는 감(感)을 깊게 하였다.

 

북간도(北間島) 이주(移住)

청국(淸國)이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한 후(後)에 만주(滿洲)를 통(統)히 금봉지(禁封地)로 하여 만주(滿洲)인(人) 이외(以外)의 거주(居住)를 금지(禁止)하고 더욱이 백두산(白頭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압록강(鴨綠江) 유역(流域)의 서간도(西間島)와 두만강(豆滿江) 유역(流域)의 북간도(北間島)를 청국(淸國) 시조(始祖)의 발상지(發祥地)라 하여 공광(空曠)하게 하여 아무도 인거(人居)치 못하게 하니 공지(空地)로 된지 이백년(二百年)에 산야(山野)에 수림(樹林)이 가득하여 하늘을 가리고 그 사이로 각종(各種) 짐승들이 놀고 있으며 각(各) 강변(江邊)에는 겸가(蒹葭갈대)가 무성(茂盛)하고 지중(池中)에는 사람의 식료(食料)로 되는 마름이 가득하였다. 헌종(憲宗)이후(以後)에 정치(政治)는 더욱 어지럽고 흉년(凶年)이 자주 들어서 생로(生路)를 잃은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의 백성(百姓)들은 스스로 금지(禁地)로 되어 있는 강(江) 월편(越便)의 간도(間島)에 착안(着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밀(秘密)히 강(江)을 건너서 짐승도 사냥하고 인삼(人蔘) 마름을 캐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관리(官吏)들은 타국(他國)의 금지(禁地)에 들어가면 국제문제(國際問題)가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도강(渡江)하는 자(者)를 엄벌(嚴罰)하고 한편(便)으로 서간도(西間島)의 모아산(帽兒山) 지방(地方)에 있는 만주인(滿洲人) 부락(部落)과 북간도(北間島)의 혼춘(琿春) 지방(地方)에 있는 만주인(滿洲人) 부락(部落)에서는 생활필수품(生活必需品)인 식염(食鹽) 부정(釜鼎) 기(器) 농구(農具) 축우(畜牛) 등(等)을 우리 나라로부터 가져가지 아니하면 구(求)할 길이 없는데 양국(兩國)의 정식(正式) 개시장(開市場)을 통(通)하여 매득(買得)하는 일도 있으나 그것 만으로서는 항상(恒常) 그 수요(需要)를 만족(滿足)시키지 못함으로 자연(自然)히 우리 나라 사람의 입주(入住)를 환영(歡迎)하고 우리 나라 관리(官吏)가 그곳에 가서 수색(搜索)할 때도 잘 보호(保護)하여 주었다.

철종(哲宗) 때에 이르러서는 비밀(秘密)히 입주(入住)하는 자(者)가 더욱 늘어서 겨울에 강(江)이 합빙(合氷)한 때에 이르러서는 수십호(數十戶)가 집단(集團)으로 입주(入住)하는 일도 있으며 이때 연해주(沿海州)는 본시(本是) 중국영토(中國領土)이었는데 몇 해전(前)에 아라사(俄羅斯)(러시아)에 할양(割讓)된 것이다.

아(俄)국(國)에서는 연해주(沿海州)의 광막(廣漠)한 황지(荒地)를 개척(開拓)하기 위(爲)하여 우리 나라 사람의 입주(入住)를 환영(歡迎)하고 식량(食糧)과 종자(種子)등(等)을 대어주고 있음으로 북간도(北間島)에 들어갔던 우리 백성(百姓)들은 다시 연해주(沿海州)로 전주(轉住)하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가 우리 나라 사람의 손으로서 개척(開拓)되었다는 것이다. 후일(後日) 우리 나라 사람의 이주(移住)한 수(數)가 북간도(北間島)에 사십여만(四十餘萬), 연해주(沿海州)에 이십만(二十萬)이 된 것은 모두 이때로부터 비롯한 것이며 마령서(馬鈴薯)(감자)가 북방(北方)으로부터 전(傳)하여 온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비밀(秘密)히 도강(渡江)하다가 관인(官人)에게 잡혀 죽은 사람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적지 아니하여 이러한 원사자(寃死者)의 피와 눈물이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의 개척사(開拓史)의 첫머리를 꾸민 것이오 그만치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는 우리 민족(民族)의 영원(永遠)히 잊어버리지 못할 곳이다.

 

 

 

개국(開國)시대(時代)

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의 제이자(第二子명복(命福))가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고종(高宗)이오 때에 나이 십이세(十二歲)이었다. 흥선군(興宣君)이 대원군(大院君)으로 되어 실제(實際)의 정권(政權)을 잡으며 외척(外戚)의 세도(勢道)를 막기 위(爲)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력(勢力)을 누르고 또 당파(黨派)싸움의 뿌리를 뽑기 위(爲)하여 사색(四色)을 똑같이 등용(登用)하여 계급(階級)과 지방(地方)의 차별(差別)을 없애기 위(爲)하여 평씨(平氏)와 서북(西北)사람을 불러 쓰고 당쟁(黨爭)의 근원지(根源地)가 되어 백성(百姓)을 못살게 구는 많은 서원(書院)을 없애며 군포(軍布)란 이름으로 상민(常民)이 많이 부담(負擔)하는 병역세(兵役稅)를 호포(戶布)로 고쳐서 양반계급(兩班階級)도 이를 내게 하고 부정(不正)한 관리(官吏)와 이속(吏屬)들을 처벌(處罰)하니 오랫동안 흐리고 어지럽던 정치(政治)에 새 광명(光明)의 빛이 오는 듯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은 과단성(果斷性)과 결행력(決行力)이 강(强)한 반면(反面)에 소홀(疎忽)한 처단(處斷)도 없지 아니하고 더욱이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불타버린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지으려고 백성(百姓)들의 재물(財物)과 노력을 강제(强制)로 바치게 하고 경비(經費)가 부족(不足)함에 당백전(當百錢)을 만들어 내어서 경제계(經濟界)를 어지럽게 하니 백성(百姓)들의 원성(怨聲)이 날로 높아지고 한 편(便)으로 왕대(王代)의 특권(特權)을 잃은 계급(階級)들이 대원군(大院君)을 비방(誹謗)하려는 소리도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이보다 앞서 철종(哲宗) 말년(末年)에 아라사(俄羅斯) 국(國)이 청국(淸國)으로부터 오소리강(烏蘇里江) 이동(以東)의 연해주(沿海州)를 얻어 조선(朝鮮)이 아국(俄國)으로부터 국경(國境)이 상접(相接)하게되고 고종(高宗) 즉위(卽位)의 해에 아인(俄人)이 이미 경흥(慶興)에 와서 통교(通交)를 청(請)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中)에 천주교인(天主敎人) 가운데 아국(俄國) 문제(問題)를 좋게 해결(解決)하는 대신(代身)에 천주교(天主敎) 전도(傳導)의 공인(公認)을 얻으려하여 대원군(大院君)에게 운동(運動)하는 자(者)가 있었는데 그의 행동(行動)이 대원군(大院君)의 마음을 거슬리는 점이 있었고 또 천주교도(天主敎徒)들이 외국(外國)과 연락(連絡)하여 우리 나라를 위태(危殆)롭게 할 염려(念慮)가 있다하여 고종(高宗) 삼년(三年)(단기 사천백구십구년)에 비밀(秘密)히 입국(入國)한 불란서(佛蘭西)사람 교사(敎士)들과 천주교도(天主敎徒) 수만명(數萬名)을 대학살(大虐殺)하였다. 교사(敎士) 중(中) 한사람이 빠져나가서 청국(淸國)에 있는 불란서(佛蘭西) 함대(艦隊)에 이일을 알리니 불국(佛國) 함(艦) 칠척(七隻)이 강화도(江華島)를 침범(侵犯)하다가 우리 군사(軍士)에게 패(敗)하여 물러가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고종(高宗) 오년(五年)에 미국상선(美國商船)이 평양(平壤)의 대동강(大洞江)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빠지고 양식(糧食)이 다하여 몰살(沒殺)한 일이 있었다. 청국(淸國)에 있는 미국(美國) 관리(官吏)가 오랜 뒤에 이 소문(所聞)을 듣고 고종(高宗) 팔년(八年)에 군함(軍艦) 오척(五隻)을 거느리고 강화(江華) 해협(海峽)으로 침입(侵入)하다가 우리 군사(軍士)에게 막혀서 더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가니 이를 신미양요(辛未洋擾)라 한다.

대원군(大院君)은 거듭 양요(洋擾)를 치뤘으나 번번히 쳐서 물리쳤음으로 외국(外國)의 무서운 것이 없음을 속단(速斷)하고 금교(禁敎)와 배외(排外)의 결심(決心)을 더욱 굳게 하고 서울 종로(鐘路) 네거리와 국내(國內)의 중요(重要)한 곳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니 그 글에「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이라 하였다.

일본(日本)은 덕천막부(德川幕府)의 말기(末期)에 구미(歐美)로 더불어 통상(通商)관계(關係)를 맺고 서양문화(西洋文化)를 수입(輸入)한 뒤로 우리 나라는 일본(日本)의 심사(心事)를 의심(疑心)하여 전(前)부터의 교제(交際)를 끊어버렸더니 고종(高宗) 오년(五年) 무진(戊辰)에 이른바 명치유신(明治維新)이 된 후(後)에 그 사유(事由)를 우리 나라에 통지(通知)하여 왔는데 그 문구(文句)가 전(前)과 같이 공손(恭遜)하지 아니함으로써 대원군(大院君)이 이를 받지 아니하여 양국(兩國)의 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中)에 대원군(大院君)은 조정(朝廷)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는데 처음에 대원군(大院君)은 외척(外戚)이 권세(權勢)를 잡고 국사(國事)를 그르치는 일이 있을까 두려하여 고종(高宗) 왕비(王妃)를 간택(揀擇)함에 있어서 일부러 아비 없는 민비(閔妃)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민비(閔妃)는 비상(非常)히 재주가 있고 정치(政治)에 욕심(慾心)이 있는지라 여러 가지 책략(策略)을 써서 대원군(大院君)이 정권(政權)을 잡은지 십년(十年)만에 마침내 이를 내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고종(高宗)에게 돌아온 정권(政權)을 자기(自己)가 대신(代身) 장악(掌握)하고 민씨(閔氏) 일파(一派)의 세력(勢力)을 늘이니 이로부터 대원군(大院君)과 그 며느리 민비(閔妃)와의 사이에 갈등(葛藤)이 생겨서 여러 가지 변(變)을 지어내었다. 대원군(大院君)이 물러나고 민비(閔妃)의 본가편(本家便)에서 세도(勢道)를 잡으면서 대외(對外) 방침(方針)이 차차(次次) 변(變)하여 가더니 고종(高宗) 십이년(十二年) 을해(乙亥)에 일본(日本) 군함(軍艦) 한 척(隻)이 강화도(江華島)앞에 들어와 서있는 것을 우리 포대(砲臺)가 이를 포격(砲擊)하니 일본(日本)이 이를 당(當)하여 사태(事態)가 험악(險惡)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진의(眞意)가 이 기회(機會)에 외교관계(外交關係)를 맺음에 있고 우리 국책(國策)도 그렇게 기우러진 때이라 다음해 병자(丙子)에 양국대표(兩國代表)가 강화(江華)에 모여서 수호조규(修好條規)를 맺으니 그 내용(內容)은 조선(朝鮮)이 자생국(自生國)으로써 일본(日本)과 평등권(平等權)을 가지고 사명(使命)을 교환(交換) 하기로 하고 부산(釜山) 밖에 또 이항(二港)을 개항(開港)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결과(結果)로 십육년(十六年) 기묘(己卯)에 일본공사(日本公使) 화방의질(花房義質)이 와서 왜관(倭館)을 열고 부산(釜山) 원산(元山) 인천(仁川)이 차례로 개항(開港) 되었다.

원래(原來) 조선(朝鮮)은 인조(仁祖) 정축(丁丑) 이후(以後)에 청국(淸國)을 종주국(宗主國)으로 하여 다공(多貢)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은 형식(形式)에 그치고 실제(實際)에 있어서는 내외(內外)의 정책(政策)을 자주(自主)하는 독립국(獨立國)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朝鮮)에 외국관계(外國關係)의 사단(事端)이 일어날 때마다 청국(淸國)은 항상(恒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조선(朝鮮)이 자주국(自主國)임을 언명(言明)하니 그럼으로 강화조약(江華條約)의 첫머리에 이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조약(條約)이 체결(締結)된 뒤에 일본(日本)의 세력(勢力)이 조선(朝鮮)에 퍼질 조짐(兆朕)이 보이므로 청국(淸國)은 전일(前日) 태도(態度)를 버리고 그 외교(外交)를 맡아보는 북양(北洋) 대신(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우리 나라를 권(勸)해서 서양(西洋)각국(各國)으로 더불어 통상(通商)을 열게 하여 십구년(十九年) 임오(壬午)에 미국(美國)과 수호통상(修好通商) 조약(條約)이 성립(成立)하고 계미년(癸未年)에 영국(英國) 덕국(德國)(독일) 갑신(甲申)년에 이태리(伊太利) 아라사(俄羅斯)와의 조약(條約)이 차례(次例)로 성립(成立)하여 아국(我國)이 완전(完全)히 국제무대(國際舞臺)위에 나서고 세계(世界) 각국(各國)의 사이에 문호(門戶)가 개방(開放)되었다.

대저(大抵) 산업(産業) 혁명(革命)으로 이미 성취(成就)한 서양사회(西洋社會)는 물자(物資) 문명(文明)이 상당(相當)히 발달(發達)하고 소위(所謂)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社會)를 만들고 그 만들어 낸 상품(商品)을 팔기 위(爲)하여 새로운 시장(市場)을 찾아내기에 눈이 붉은 때이라 우리 나라가 홀로 동북(東北) 일우(一隅)의 은토(隱土)국(國)으로서 문호(門戶)를 잠그고 있을 수 없었고 또 서양사회(西洋社會)와의 접촉(接觸)을 통(通)하여서만 그들의 새로운 물질문명(物質文明)을 받아들일 수가 있음으로 일본(日本)을 비롯한 여러 외국(外國)과 통상(通商)을 시작(始作)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여러 강국(强國)이 우리 나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 세력(勢力) 다툼을 하게 되었으니 실(實)로 고종(高宗) 병자(丙子) 이후(以後)의 우리 나라는 세계열강(世界列强)의 각축장(角逐場)으로 화(化)한 것이다.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오랜 동안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깨트리고 외국(外國)과의 통상(通商)을 허(許)한 우리 나라는 비로소 세계(世界)의 정세(情勢)에 눈뜨게 되어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 신사(辛巳)에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등(等) 십수인(十數人)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 하여 일본(日本)으로 보내어 개화(開化)의 정무(政務)를 시찰(視察)케 하니 이는 우리 나라가 서양(西洋)의 신문명(新文明)에 대(對)하여 적극적(積極的)으로 관심(關心)을 표시(表示)한 시초(始初)이었다.

신사단(紳士團)이 돌아와서 임오년(壬午年)에 통리기무위문(統理機務衛門)이라는 기관(機關)을 만들어서 정치(政治)를 시행(施行)하며 또 병제(兵制)를 고치고 일본(日本) 육군(陸軍) 장교(將校)를 데려다가 신식(新式)의 군대(軍隊)를 편성(編成)하였다.

이와 동시(同時)에 모든 방면(方面)에 신구(新舊)의 대립(對立)이 생겨서 서로 비난(非難)과 공격(攻擊)을 일삼게 되니 신문화(新文化)를 받아들이자는 자(者)는 개화파(開化派)라 하고 일본(日本)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수구파(守舊派)라 지목(指目)하였는데 이들은 세계열강(世界列强)의 틈에 끼어있는 우리 나라의 새 지위(地位)를 자각(自覺)하여 국민일치(國民一致)로 자주독립(自主獨立)의 기초(基礎)를 닦는다는 것보다 개화파(開化派)는 일본(日本)을 힘입으려 하고 수구파(守舊派)는 청국(淸國)을 기대려하여 양자(兩者)가 모두 제 정신(精神)을 차리지 못하는 점(點)으로는 매 한가지오 다른 것이 없었고 이로 인(因)하여 우리 나라는 청국(淸國)과 일본(日本)이 동양(東洋)에서의 지위(地位)를 다투는 씨름판이 되었다.

군제개혁(軍制改革)과 일본(日本) 세력(勢力)의 도입(導入)은 수구파(守舊派)의 싫어 하는 바이오 또 구식(舊式) 군인(軍人)은 실직(失職)될 것을 걱정하고 있더니 임오년(壬午年)에 구식(舊式) 군인(軍人)이 오랫동안 요미(料米)를 받지 못하고 또 밀렸던 요미(料米)를 타는데 쌀에 모래가 많이 섞여서 이에 불평(不平)이 폭발(暴發)하여 한편(便)으로 퇴처(退處)하여 있는 대원군(大院君)에게 진정(陳情)을 하고 한편(便)으로 당시(當時) 정권(政權)을 잡고 탐학(貪虐) 불법(不法)으로 민렴(民斂)을 한 민씨(閔氏)를 죽이고 위해(危害)가 민비(閔妃)에게 미칠듯 함에 민비(閔妃)는 충주(忠州)로 도망(逃亡)하고 한편(便)으로 일본(日本) 공사관(公使館)을 습격(襲擊)하고 또 교사(敎師)로 와 있던 일본(日本)장교(將校)를 죽이니 일본공사(日本公使)는 스스로 사관(使舘)에 불지르고 인천(仁川)으로 가서 영국(英國) 군함(軍艦)을 얻어 타고 본국(本國)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 한다.

대원군(大院君)이 이 변보(變報)를 듣고 나와서 난(亂)을 진정(鎭定)하고 다시 정권(政權)을 잡으니 민씨(閔氏)들은 구원(救援)을 청국(淸國)에 청(請)하매 청국(淸國)에서는 이 기회(機會)를 타서 우리 나라에 세력(勢力)을 뻗치려 하여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병(兵) 삼천(三千)을 거느리고 서울로 와있게 하고 대원군(大院君)이 이번 변란(變亂)이 장본인(張本人)이라 하여 억지로 청국(淸國)으로 데려가더니 얼마후(後)에 돌려보냈다. 화방(花房)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인천(仁川)으로 와서 변란(變亂)의 책임(責任)을 물으니 조정(朝廷)에서는 배상금(賠償金) 오십만원(五十萬圓)을 내고 일본(日本) 공사관(公使館)에 호위병(護衛兵)을 두고 사신(使臣)을 일본(日本)에 보내어 진사(陳謝)의 뜻을 표(表)하는 등(等) 조건(條件)으로 조약(條約)을 맺으니 이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오 이해 팔월(八月)에 박영효(朴英孝)를 대사(大使)로 하고 김옥균(金玉均)을 부사(副使)로 일본(日本)에 보내니 이때의 승선(乘船)에 처음으로 태극기(太極旗)를 사용(使用)하였다.

박영효(朴英孝) 김옥균(金玉均) 등(等)이 일본(日本)에 가서 보고는 우리 나라 정치(政治) 개화(開化)의 시급(時急)함을 깨닫고 돌아와서 위선(爲先) 전환국(典圜局)(주전소(鑄錢所)) 기기국(機器局)(제조소(製造所)) 박문국(博文局)(인쇄소(印刷所))등(等)을 설치(設置)하고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發刊)하여 민지(民志)의 계개발(啓開發)에 힘쓰고 국정(國政) 개혁(改革)에 대(對)하여 여러 가지 포부(抱負)를 발표(發表)하니 이가 우리 나라 최초(最初)의 신문(新聞)이었다.

고종(高宗) 이십일년(二十一年) 갑신(甲申)에 청국(淸國)은 불국(佛國)과의 사이에 분쟁(紛爭)이 있었다. 그럼으로 다른 일을 돌아볼 여력(餘力)이 없는지라 개화파(開化派)에서는 이를 알고 일본(日本)의 후원(後援)을 얻어 수구파(守舊派)를 소탕(掃蕩)하여버릴 계획(計劃)을 세우고 그해 시월(十月)에 신설(新設)한 우정국(郵政局)의 개청식(開廳式)이 있음을 기회(機會)로 하여 민씨(閔氏) 일당(一黨)의 여러 요인(要人)을 죽이고 일병(日兵)을 궁중(宮中)으로 끌어들여 왕(王)을 족쳐서 개화파(開化派)의 신정부(新政府)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가 청국(淸國) 군사(軍士)를 청병(淸兵)함에 청장(淸將) 원세개(袁世凱)가 군사(軍士)를 이끌고 들어가서 일군(日軍)과 접전(接戰)하였다. 일병(日兵)이 힘이 약(弱)하여 궁중(宮中)에서 패퇴(敗退)하고 홍영식(洪英植) 등(等)은 죽고 일본공사(日本公使) 등(等)은 분격(憤激)한 민중(民衆)의 습격(襲擊)을 받으면서 서울에서 퇴거(退去)하고 박영효(朴英孝) 김옥균(金玉均)등(等)은 이틈에 끼어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하고 그 즉시(卽時)로 민씨(閔氏) 수구파(守舊派)의 정국(政局)이 다시 나타나니 이것이 갑신(甲申) 시월(十月)의 변(變)이라는 것이오 개화파(開化派)의 실패(失敗)는 내 집안 일을 남의 힘으로만 하려 한 당연(當然)한 결과(結果)이오 그 까닭에 우리 나라의 개화(開化)가 시운(時運)에 뒤진 것은 천재(千載)의 한사(恨事)이었다.

이해 십일월(十一月)에 일본(日本)에서 전권대사(全權大使) 정상성(井上聲)이 군대(軍隊)를 거느리고 와서 담변(談辨)하여 우리가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의 신축(新築)할 기지(基地)와 비용(費用)을 부담(負擔)하는 조건(條件)으로 그 전(前) 일을 결말(結末) 짓고 한편(便) 일본(日本)은 다음해 을유(乙酉)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청국(淸國)에 보내어 이홍장(李鴻章)으로 더불어 천진(天津)에서 담변(談辨)하여 양국(兩國)의 조선(朝鮮) 주둔(駐屯) 병(兵)을 사개월(四個月) 이내(以內)로 철수(撤收)할 것과 앞으로 조선(朝鮮) 사변(事變)에 있어 양국(兩國)이 군대(軍隊)를 출동(出動) 시킬 때에는 서로 통지(通知)할 것을 약정(約定)하니 이것이 소위(所謂) 천진조약(天津條約)이오 이 갑신(甲申)의 변(變)은 여러 해 동안 속으로 갈등(葛藤)되는 청(淸) 일(日) 양국(兩國)의 세력(勢力)이 표면(表面)에서 충돌(衝突)한 것이다.

천진조약(天津條約)에 의(依)하여 양국(兩國)이 모두 철병(撤兵)하였으나 청병(淸兵)의 一將 원세개(袁世凱)가 통상사무(通商事務) 전권위원(全權委員)의 명목(名目)으로써 그대로 서울에 머물면서 내정(內政)에 간섭(干涉)하고 제민(諸閔)이 그와 어우러져서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행(行)하여 국사(國事)가 더욱 글러졌다. 다만 시세(時勢)의 추이(推移)하는 바에 개화(開化)에 관(關)한 신시설(新施設)이 철종(哲宗)때에 안동김씨(安東金氏)들이 세도(勢道)하여 함부로 관직(官職)을 팔아먹고 이 관직(官職)을 산 무리들이 지방관(地方官)으로 내려와서 토색(討索)을 마음껏 하고 양반계급(兩班階級)이 서원(書院)을 소굴(巢窟)로 하여 백성(百姓)들을 괴롭게 함으로 각지(各地)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민심(民心)이 불안(不安)한 중(中) 경주(慶州)의 최제우(崔濟愚)(水雲)가 東學이란 새 宗敎를 일으켜서 「輔國安民 廣濟蒼生」을 敎의 主旨로하니 塗炭에 빠진 百姓들이 많이 加入하였다. 政府에서는 특권계급(特權階級)에 불평(不平)을 품은 하층계급(下層階級)의 사람들이 한 당(黨)으로 단결(團結)됨을 두려워하여 동학(東學)이 세상(世上)을 어지럽히고 민중(民衆)을 속인다는 죄명(罪名)으로 최제우(崔濟愚)를 잡아다 大邱에서 死刑하니 敎徒들은 地下로 들어가서 東學運動을 繼續하였다. 비정(秕政)에 시달리는 백성(百姓)들은 마음이 많이 이에 기우러져서 은연(隱然)히 천세력(天勢力)을 형성(形成)하더니 임진(壬辰)에 이르러 최시형(崔時亨)(해월(海月))을 중심으로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이 표면화(表面化)하여 정부(政府)에 글을 올리고 계사년(癸巳年)에는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을 중심(中心)으로 굳게 단결(團結)한 교도(敎徒)들이 경성(京城)에 올라와서 대궐(大闕) 앞에서 탄원(歎願)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시위운동(示威運動)을 감행(敢行)하였다. 이때에는 정부(政府)의 해산명령(解散命令)으로 일단(一旦) 물러났으나 한편(便) 불안(不安)한 민심(民心)을 자극(刺戟)하고 한편(便) 교세(敎勢)가 크게 떨쳐서 경상(慶尙) 전라(全羅) 충청(忠淸)의 삼남(三南)을 비롯하여 강원(江原) 황해(黃海) 평안도(平安道)에 이르기까지 동학(東學)의 운동(運動)이 급속도(急速度)로 발전(發展)하였다

이때 전라도(全羅道) 고부(古阜) 군수(郡守)가 만석보(萬石洑)(정읍)를 수리(修理)함에 있어 부정(不正)한 일이 있었음으로 민란(民亂)이 일어나더니 동학당원(東學黨員) 전봉준(全琫準)이 이를 계기(契機)로 하여 그 무리들과 함께 난리(亂離)를 일으켜서 사방(四方)이 이에 호응(呼應)하여 일어났다. 관군(官軍)이 이를 치러 갔으나 도처(到處)에서 패(敗)하고 마침내 전주(全州)가 동학당(東學黨)에게 점령(占領)되었음으로 조정(朝廷)에서 원세개(袁世凱)에게 상의(相議)한 결과(結果) 청국(淸國) 군사(軍士) 일천오백명이 와서 군사(軍士)를 도와서 겨우 난(亂)을 평정(平定)하였다. 일본(日本)은 벌써부터 한번 청국(淸國)과 싸워 대륙(大陸)에 있는 지위(地位)를 결정(決定)해 보려고 벼르는 차이라 갑오(甲午) 이월(二月)에 일본(日本)의 보호하(保護下)에 있던 김옥균(金玉均)이 상해(上海)에 갔다가 조선(朝鮮)사람 자객(刺客)에게 암살(暗殺)을 당(當)하고 국론(國論)이 일어나고 인(因)하여 청국(淸國)이 동학란(東學亂)에 일본(日本)에 통고(通告)함이 없이 조선(朝鮮)에 출병(出兵)함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위반(違反)함이라 하여 또한 유민(留民)을 보호(保護)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출병(出兵)하더니 이해 유월(六月)에 마침내 아산(牙山) 해상(海上)에서 양국(兩國)의 해군(海軍)이 충돌(衝突)하고 성환(成歡)에서 육전(陸戰)이 시작(始作)하였다. 전쟁(戰爭)이 난 뒤에 수륙(水陸) 양쪽에서 청국(淸國)이 대패(大敗)하여 일본(日本)의 지위(地位)는 나날이 강(强)하여 졌다.

일본(日本)이 세력(勢力)의 커짐을 따라 우리 나라 내정(內政)에 간섭(干涉)하기 시작(始作)하고 개화당(開化黨)이 세(勢)를 얻어 민씨(閔氏) 일족(一族)을 물리치고 김홍집(金弘集)을 수반(首班)으로 하는 신정부(新政府)가 조직(組織)되고 청국(淸國)과의 관계(關係)를 끊고 개국기원(開國紀元) 준용과거(遵用科擧) 폐지(廢止) 계급타파(階級打破) 사회혁신(社會革新) 등(等)에 관(關)한 이백여건(二百餘件)을 결정(決定)하니 이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한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은 우리 나라의 천수백년(千數百年)동안을 내려오던 봉건적제도(封建的制度)를 종결(終決)시키고 서양(西洋)의 자본주의(資本主義)를 수입(輸入)하는 시초(始初)이며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이를 강요(强要)한 것은 우리 나라의 발전(發展)을 위(爲)함이 아니오 일본(日本) 자본주의(資本主義)의 한 시장(市場)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을미년(乙未年)에 일본(日本)과 청국(淸國)이 마관조약(馬關條約)을 맺고 우리 나라의 독립(獨立)을 밝히고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일본(日本)에 주기로 하더니 아라사(俄羅斯)와 독일(獨逸)과 불란서(佛蘭西)의 삼국(三國)이 일본(日本)을 눌러서 요동(遼東)반도(半島)를 청국(淸國)에 돌려주기로 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日本)의 힘이 약(弱)함을 보고 또 주권(主權)의 침해(侵害)와 이권(利權)의 강요(强要)가 심(甚)해 짐으로 조정(朝廷)과 국민(國民)들에 배일(排日)의 기운(氣運)이 움직이고 따라서 일본(日本)의 압제(壓制)로 된 경장(更張)도 좋을 수가 없다하여 잘 시행(施行)되지 아니 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는 문벌타파(門閥打破)의 칙유(勅諭)가 내려서 양반(兩班)도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할 수 있고 또 상업(商業)이나 공업(工業)을 하던 사람도 학교(學敎)에 입학(入學)할 수 있다 하니 이는 사민평등(四民平等)(士農工商)의 첫 걸음을 내 디딘 것이며 이러한 정신(精神) 아래 을유년(乙酉年)에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서 신학문(新學問)과 신사상(新思想)을 가르치고 이해에 또 濟象院을 設立하여 처음으로 西洋의 의술(醫術)을 받아 들였다. 이 보다 앞서 갑신년(甲申年)에 우정국(郵政局)을 설립(設立)하고 우체제도(郵遞制度)를 실시(實施)하려던 것이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因)하여 일시(一時) 중단(中斷)되더니 을유년(乙酉年)에 전보국(電報局)이 생기고 이와 전후(前後)하여 주요(主要) 도시(都市)에 전신선(電信線)이 가설(架設)되었다.

 

일본(日本)의 침략(侵略)

우리 나라에 배일(排日)의 소리가 높아짐에 종전(從前)부터 동양(東洋) 방면(方面)에 세력(勢力)을 뻗쳐보려고 항상(恒常) 기회(機會)를 엿보고 있던 아라사(俄羅斯)가 공사(公使) 위패(韋貝)(카를 베베르)를 우리 나라에 보내어 왕실(王室)에 친근(親近)하기를 힘쓰고 일본(日本)을 누름에는 아국(俄國)이 가장 적당(適當)함을 선전(宣傳)하여 새로이 궁정(宮廷)의 신뢰(信賴)를 받게되고 개화당(開化黨)은 점차(漸次)로 몰락(沒落)하였다. 이때 일본(日本)의 공사(公使) 삼포오루(三浦梧樓)(미우라 고로)는 무인(武人)이라 이를 개(慨)하여 국면(局面)의 비상타개(非常打開)를 결정(決定)하고 을미(乙未) 팔월(八月)에 일변(一邊) 대원군(大院君)을 데려내어 먼저 궁중(宮中)으로 들어가고 병사(兵士)와 검객(劍客)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친아(親俄) 정책(政策)을 주장(主張)하고 있는 민비(閔妃)를 해(害)한 후(後) 그 시신(屍身)을 소화(燒火)하고 일변(一邊) 삼포(三浦) 자신(自身)은 왕(王)에게 뵈고 친아(親俄) 파(派)를 쫓아낼 것과 개화파(開化派) 내각(內閣)을 재(再) 조직(組織)할 것을 강청(强請)하여 왕(王)의 승인(承認)을 얻으니 이를 팔월을미지변(八月乙未之變)이라 한다. 이 사변(事變)이 외교상(外交上)으로 거북한 문제(問題)가 됨에 일본(日本)은 삼포(三浦) 이하(以下) 관계자(關係者)를 소환(召還)하여 투옥(投獄)하였다.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은 다시 개혁안(改革案)을 진행(進行)하여 구력(舊曆)을 폐지(廢止)하고 태양력(太陽曆)을 채용(採用)하며 단발령(斷髮令)을 영포(領布)하면서 일왕일원(一王一元)의 연호(年號)를 세우기로 하여 병신(丙申)으로부터 건양(建陽)이라 채(採)할 것을 결정(決定)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강압수단(强壓手段)은 일반(一般)의 악감(惡感)을 사고 더욱이 민비(閔妃)의 시해(弑害)는 왕(王)의 부자(父子)의 지한(至恨)이 되어 개화당(開化黨)의 시정(施政)은 잘 진행(進行)되지 아니하였고 한편(便)으로 박정양(朴定陽) 등(等) 친아(親俄) 파(派)의 암중운동(暗中運動)이 있어 건양(建陽) 원년(元年) 이월(二月)에 왕(王)과 태자(太子)가 궁중(宮中)에서 벗어나서 아국(俄國) 사관(使舘)으로 옮겨가고 정국(政局)이 일변(一變)하여 개화(開化)의 신법령(新法令)은 많이 철폐(撤廢)되고 아국(俄國)의 세력(勢力)이 우리 나라 궁정(宮廷)에 깊이 뿌리를 박고 김홍집(金弘集)은 난(亂) 중(中)에 맞아죽고 그 밖의 친일파(親日派)는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하고 각(各) 지방(地方)에는 국모(國母)의 원수(怨讐)를 갚고 단발(斷髮)을 반대(反對)한다하여 의병(義兵)이 일러 나서 국내(國內)가 소연(騷然)하였다.

고종(高宗)은 아관(俄館)에 머무르기 일년(一年)만에 정유(丁酉) 이월(二月)에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德壽宮))에 돌아갔다. 그리고 기미독립(己未獨立) 후(後) 하지 못한 바를 결정(決定)하여 황제위(皇帝位)에 오르고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고치고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바꾸고 특파대사(特派大使) 또는 전권공사(全權公使)를 각국(各國)에 파견(派遣)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허울은 훌륭하게 만들어 졌으나 군상신하(君上臣下)의 아무 데서도 새로운 정신(精神)을 가다듬은 실상(實相)을 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관정(官廷)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친아파(親俄派)의 굴혈(窟穴)이 되어서 아국(俄國)의 심부름하기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광무(光武)원년(元年) 구월(九月)에는 아국(俄國)이 반(半)넘어 위협(威脅)으로써 우리 군대(軍隊)의 교련(敎鍊)과 재정(財政)의 처리(處理)를 수중(手中)에 거두어가며 일변(一邊) 광산(鑛山) 삼림(森林) 기타(其他)의 이권(利權)을 훔쳐가기에 열중(熱中)하며 또 해군(海軍) 근거지(根據地)로 마산(馬山)을 조차(租借)하려는 음모(陰謀)도 진행(進行)하고 있었다.

갑신(甲申)의 당인(黨人)으로서 미국(美國)에 망명(亡命)하여 있던 서재필(徐載弼)이 건양(建陽) 원년(元年) 미국(美國)에서 돌아와서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의 고문(顧問)으로 있으면서 독립문(獨立門)을 짓고 신문(新聞)을 내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만들어 국민정신(國民精神) 계발(啓發)에 힘쓰더니, 아국(俄國)의 이러한 야심(野心)을 보고 맹렬(猛烈)히 일어나서 반대운동(反對運動)을 일으키니 아국(俄國)의 행동(行動)이 크게 퇴축(退縮)되고 마산(馬山) 조차(租借) 문제(問題)도 미연(未然) 방지(防止)되었다.

독립협회(獨立協會)는 내정(內政)의 개혁상(改革上)에 많은 의견(意見)을 제출(提出)하였으나 정부(政府)나 민간(民間)이 모두 입으로만 떠들 뿐이오 실천(實踐)에 대한 계획(計劃)과 열의(熱意)가 없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오직 광무년간(光武年間)에 새로운 시설(施設)이 전(前)보다 많았으니 원년(元年)에는 경성(京城) 인천(仁川)간(間)에 전선(電線)을 가설(架設)하고 이년(二年)에는 경성(京城)에 전차(電車)가 놓이고 삼년(三年)에는 경인철도(京仁鐵道)가 개통(開通)되었다.

아국(俄國)이 우리 나라에 가까워 짐음 일본(日本)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써 일본(日本)은 아국(俄國)에 대(對)해서 한국문제(韓國問題)에 관(關)한 협의(協議)를 구(求)하여 두어 차례 내약(內約)도 성립(成立)되었다. 그러나 아국(俄國)은 불같은 남하욕(南下慾)을 그러한 내약(內約)에 거리낌없이 하고싶은 일을 하며 또 만주(滿洲)의 경영(經營)에 착수(着手)하여 광무(光武) 이년(二年)에 청국(淸國)으로부터 요동(遼東)반도(半島)를 조차(租借)하여 여순구(旅順口)에 군항(軍港)을 설비(設備)하고 만주(滿洲)철도(鐵道)의 부설권(敷設權)을 얻으며 일변(一邊) 조선(朝鮮)의 진해만(鎭海灣)의 밤구미(마산포의 한 지역)를 조차(租借)하여 그 야심(野心)이 점점 들어 났다. 다시 광무(光武) 사년(四年) 청국(淸國)에 의화단(義和團)의 난(亂)이 있음을 기회(機會)로 하여 만주(滿洲)를 군사점령하(軍事占領下)에 두고 각국(各國)의 말에 이기지 못하여 철병(撤兵)한다는 기한(期限)을 정(定)하되 그는 형식(形式)뿐이오 실행(實行)하지는 아니 하였다. 일본(日本)은 아국(俄國)의 남하(南下)를 제어(制御)하려하여 광무(光武) 육년(六年) 일월(一月)에 일영동맹(日英同盟)을 맺으니 그 대개(大槪)는 한청양국(韓淸兩國)의 독립(獨立)과 및 그 영토(領土)를 보전(保全)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은 한국(韓國)에서 영국(英國)은 청국(淸國)에서 정치상(政治上) 경제상(經濟上)으로 특수(特殊)한 권익(權益)을 가지고 이것이 침해(侵害)되는 때에는 양국(兩國)이 공동(公同)으로 필요(必要)한 조치(措置)를 하며 또 양국(兩國) 중(中) 일국(一國)이 타국(他國)과 개전(開戰)하는 때에는 일국(一國)은 엄정(嚴正) 중립(中立)을 지킨다 함이었다. 아국(俄國)에서는 일영동맹(日英同盟)에 대항(對抗)하기 위(爲)하여 아불동맹(俄佛同盟)을 맺어 극동(極東)에 있는 양국(兩國)의 이익(利益)을 공동(共同)으로 보호(保護)한다 하였다.

일본(日本)과 영국(英國)이 동맹(同盟)을 맺어 소위(所謂) 한국(韓國)의 독립(獨立)과 영토보전(領土保全)한다 함은 한국(韓國)의 이익을 위(爲)함이 아니라 한국(韓國)이 아국(俄國)에게 탈취(奪取)됨을 방지(防止)하고 일본(日本)이 탈취(奪取)하겠다는 뜻이니 이때로부터 한국(韓國)은 완전(完全)히 열강(列强)의 조상육(俎上肉)이 된 것이오 자주독립(自主獨立)하는 역사(歷史)는 이미 끊어진 것이다.

아국(俄國)은 만주(滿洲)에서 철병(撤兵)할 성의(誠意)를 보이지 아니할 뿐 아니라 광무(光武) 칠년(七年)에는 한국(韓國)으로 손을 뻗어서 일변(一邊) 용암포(龍巖浦)(압록강 하구 평북)의 조차(租借)를 구(求)하고 일변(一邊) 군대(軍隊)를 그리로 보내서 벌목(伐木)과 건축(建築)의 사업을 시작(始作)하였다.

일본(日本)은 아국(俄國)과 최후(最後)의 교섭(交涉)을 시(始)하여 아국(俄國)이 만주(滿洲)와 한국(韓國)에서 손을 떼기를 요구(要求)하여 아국(俄國)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북위(北緯) 삼십구도(三十九度) 이상(以上)의 우리 나라의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의 땅을 중립지대(中立地帶)로 하기를 요구(要求)하고 조금도 양보(讓步)하려 하지 아니하더니 광무(光武) 팔년(八年) 이월(二月)에 마침내 일아전쟁(日俄戰爭)이 일어났다. 일아(日俄)의 풍운(風雲)이 급(急)하여짐에 우리 정부(政府)는 미리 국외중립(國外中立)을 선언(宣言)하였으나 전쟁(戰爭)의 시작(始作)됨과 함께 일본군(日本軍)이 연속(連續) 입국(入國)하여 국토(國土)의 일부(一部)가 전쟁(戰爭)으로 화(化)하고 아국(俄國)의 패퇴(敗退)를 따라서 일본(日本)의 압력(壓力)이 그대로 커졌다. 그리하여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대(對)한 시정개선(施政改善)의 충고권(忠告權)과 외교기능(外交機能)의 제한권(制限權)을 가지고 다시 재정(財政)과 외교(外交)의 감독권(監督權)을 가지고 정부(政府) 각(各) 기관(機關)에 일본인(日本人) 고문(顧問)이 들어앉고 이 동안에 경의(京義) 경원(京元)의 양(兩) 철도(鐵道) 부설권(敷設權) 이하(以下)로 허다(許多)한 권익(權益)을 가지고 이어 통신사업(通信事業)도 일본(日本)의 것이 되었다.

광무(光武) 구년(九年)에 일본(日本)이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대승(大勝)하고 또 아국(俄國) 해군(海軍)이 대마해협(對馬海峽)에서 치명상(致命傷)을 받아 전국(戰局)의 대세(大勢)가 이미 정(定)하매 미국(美國) 대통령(大統領) 루즈벨트가 이 중간(中間)에 들어 양국(兩國)의 강화조약(講和條約)이 포츠머스(뉴햄프셔주)에서 조인(調印)되어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에서 정치상(政治上) 군사상(軍事上) 경제상(經濟上)으로 특수(特殊)한 이익(利益)이 승인(承認)되었다.

일본(日本)은 이해 십일월(十一月)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와서 위협(威脅)으로써 협약(協約)을 맺으니 외교권(外交權)을 빼앗고 통감(統監)을 경성(京城)에 두어 보호정치(保護政治)를 시행(施行)하니 이것이 보통(普通) 이른바 오조약(五條約) 또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條約)은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반대(反對)하고 황제(皇帝)가 서명(署名)을 거절(拒絶)한 때문에 형식(形式)을 갖추지 못하고 일방적(一方的)으로 실행(實行)된 것이다.

이 조약(條約)이 한번 발포(發布)됨에 국민(國民) 상하(上下)의 분격(憤激)이 극도(極度)에 달(達)하고 오랫동안 한국(韓國)의 보전(保全)과 동양평화(東洋平和)를 공약(公約)해 오던 일본(日本)의 무신의(無信義)함을 통매(痛罵)하여 한신(韓臣)들 중에는 조약(條約) 폐기(廢棄)를 소청(疏請)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매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이하(以下) 순국(殉國)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조병세(趙秉世)는 그 유서(遺書)에 「강린(强隣)이 조약(條約)을 져버리고 도적(盜賊)의 무리가 나라를 팔아서 우리의 자손(子孫)이 이 장차(將次) 남의 노예(奴隸)가 될 것이니 바라건대 동포(同胞)들은 각자(各自)가 분발(奮發)하여 독립(獨立)의 기초(基礎)를 닦으라」하고 민영환(閔泳煥)의 유서(遺書)에서는「내가 죽어도 지하(地下)에서 우리 나라의 독립(獨立)을 위(爲)하여 싸우리니 동포(同胞)들은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말고 천만번(千萬番) 분발(奮發)하여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學問)을 더욱 힘쓰며 한마음 한뜻으로 나가서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회복(恢復)하면 나는 저승에서 기뻐하리라」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한국병합(韓國倂合)에 대(對)한 방안(方案)은 이미 결정(決定)되고 시기(時機)만 기다릴 뿐이더니 광무(光武) 십일년(十一年)에 화란(和蘭)(네델란드) 해아(海牙)(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매 한국(韓國) 황제(皇帝)의 밀사(密使) 이상설(李相卨) 이준(李雋)이 해아(海牙)에 가서 협약(協約)의 무효(無效)함을 역설(力說)하니 이에 일본(日本)이 그 책임(責任)을 묻는다 하여 황제(皇帝)를 퇴위(退位)시켜 태황제(太皇帝)라 하고 태자(太子)를 세워 황제(皇帝)를 삼고 연호(年號)를 융희(隆熙)라 고치고 일체(一切) 행정(行政)을 통감(統監)의 지휘(指揮)를 받고 일본인(日本人)을 한국(韓國)의 관리(官吏)로 임용(任用)하기로 하는 동시(同時)에 군대(軍隊)를 해산(解産)하고 각부(各部)의 차관(次官)에 일본인(日本人)을 임용(任用)하여 소위(所謂) 차관정치(次官政治)가 실현(實現)되었다.

간도지방(間島地方)은 청국(淸國)의 봉금지(封禁地)로 되어 만주족(滿洲族) 이외(以外)의 인민(人民)의 입거(入居)함을 허락(許諾)하지 아니하더니 어느 틈에 청국(淸國)의 산동지방(山東地方)의 유민(流民)들이 입주(入住)하여 우리 고종(高宗) 초년(初年)에는 이미 억제(抑制)할 수 없이 되었음으로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에 청국(淸國)의 토문강(土門江) 일대(一帶) 지방(地方)을 정식(正式)으로 개방(開放)하기로 하고 관리(官吏)를 보내어 조사(調査)할 때 그곳이 이미 조선인(朝鮮人)의 집단(集團) 거주(居住)로 된 것을 발견(發見)하였다. 이에 청국(淸國)에서는 조선인(朝鮮人)에게 청국(淸國) 민속(民俗)을 좇거나 조선(朝鮮)으로 철환(撤還)하거나 양자(兩者) 중(中)에 그 하나를 택(擇)하라고 하였다. 조선인(朝鮮人)은 그대로 살되 청국(淸國) 풍속(風俗)을 좇지 아니하겠다 하여 말썽이 되더니 이십년(二十年)에 어윤중(魚允中)이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되어 두만강(豆滿江) 연변(沿邊)을 시찰(視察)할 때에 이 사정(事情)을 알고 이는 국세민생(國勢民生)의 큰 문제(問題)라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와 그 부근(附近)의 지형(地形)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그 결과(結果)로 정계비(定界碑)에서 가까이 나오는 물은 동북(東北)의 방향(方向)으로 흐르다가 토문(土門)의 형상(形狀)을 짓고 지금 간도지방(間島地方)을 휩싸 흐르는 것을 발견(發見)하고 토문강(土門江)이라는 것은 곧 이 물이오 간도지방(間島地方)은 당연(當然)히 조선(朝鮮)의 소속(所屬)임을 판정(判定)하였고 청국(淸國)에서는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豆滿江)의 별명(別名)이라 하여 양국(兩國)의 주장(主張)이 서로 대립(對立)되었다. 이십이년(二十二年)에 양국(兩國)은 실지(實地)로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청국(淸國)에서 그 주장(主張)하는 근거(根據)가 부족(不足)함을 깨닫고도 오히려 굴(屈)하지 아니하고 조선(朝鮮)에서도 기어(期於)히 주장(主張)을 관철(貫徹)하려하여 이래(爾來) 수십년(數十年)에 문제(問題)의 해결(解決)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한국(韓國)의 외교(外交)가 일본(日本)으로 넘어감에 간도문제(間島問題)가 청일(淸日)사이의 분쟁(紛爭)이 되고 처음에는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의 방침(方針)대로 간도(間島)를 우리 나라 영토(領土)로 정(定)하고 행정기관(行政機關)을 간도(間島)의 용정촌(龍井村)에 두고 조선인민(朝鮮人民)을 거느리더니 융희(隆熙) 삼년(三年)에 일본(日本)이 남만주(南滿州) 철도(鐵道)의 안봉선(安奉線)을 고쳐 놓을 때에 청국(淸國)이 일본(日本)의 말을 잘 듣지 아니함에 일본(日本)은 철도(鐵道)용지(用地) 문제(問題)를 일본(日本)의 요구(要求)대로 해결(解決)하는 대신(代身)에 간도(間島)를 청국영토(淸國領土)로 인정(認定)하였다. 그리하여 간도(間島)의 주권(主權)은 청국(淸國)에 주고 한국인민(韓國人民)은 전(前)과 같이 자유(自由)로 거주(居住)하면서 청국(淸國)의 법권(法權)에 복종(服從)하며 용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백초구(百草溝) 는 개방지(開放地)로 하여 이쪽의 영사관(領事館)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간도문제(間島問題)는 일본(日本)이 저희 본국(本國)의 이익(利益)을 위(爲)하여 청국(淸國)에 준 것이오 한국(韓國)의 승인(承認)한 것이 아님으로 금후(今後) 우리 나라와 중국(中國)과의 사이에 다시 분쟁(紛爭)이 일어날 문제(問題)이다.

 

민중(民衆)운동(運動)

처음에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맺어지며 중앙(中央) 정국(政局)이 소란(騷亂)함은 물론(勿論)이오 지방(地方)에서도 조약(條約)에 대(對)한 반항운동(反抗運動)이 도처(到處)에서 일어났다. 그 중(中)에서도 크게 기세(氣勢)를 떨친 것은 광무(光武) 십년(十年)에 민종식(閔宗植)이 홍천(洪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최익현(崔益鉉)은 순창(淳昌)에서 신돌석(申乭石)은 평해(平海)에서 이에 호응(呼應)하여 일어나 한동안 일인(日人)을 괴롭게 하였다.

일본(日本) 세력(勢力)이 커지기 시작(始作)힘으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 중(中)에서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서 일본(日本)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祖國)과 동포(同胞)를 배반(背叛)하는 무리가 생겼으니 그 중(中)에서도 안병준(安秉畯) 윤시병(尹始炳)같은 자(者)들은 동학(東學)교도(敎徒)의 한 사람인 이용구(李容九)와 더불어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서 일본(日本)의 전쟁(戰爭)에 협력(協力)하고 또 보호조약(保護條約)을 맺기 전(前)부터 이미 우리 나라는 일본(日本)의 보호(保護)를 받아야 한다고 발표(發表)하였다. 이에 일본(日本)에 가있던 동학(東學)의 수령(首領) 손병희(孫秉熙)는 곧 경성(京城)으로 돌아와서 이용구(李容九)와 손을 끊고 새로이 천도교(天道敎)를 일으켜서 동학(東學)의 전통(傳統)을 이으니 따로이 시천교(侍天敎)를 세워서 이와 대립(對立) 하였다.

이에 일진회(一進會)의 반역행동(反逆行動)에 대항(對抗)하기 위(爲)하여 장지연(張志淵)등(等)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組織)하였으나 내무대신(內務大臣)으로 들어간 송병준(宋秉畯)에게 해산(解散)을 당(當)하고 광무(光武) 십일년(十一年)에는 나인영(羅寅永)등(等)이 일본(日本)과 협약(協約)맺은 오대신(五大臣)을 매국노(賣國奴) 또는 오적(五賊)이라 하여 암살(暗殺)을 도모(圖謀)하고 오대신(五大臣)의 한 사람 권중현(權重顯)을 길거리에서 저격(狙擊)한 일이 있었다.

융희(隆熙) 연대(年代)에 이르러서는 의분(義憤)에 북받치는 민중(民衆)의 격렬(激烈)한 행동(行動)이 더욱 잦았다. 처음에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를 빼앗으려는 행동(行動)을 미국(美國)이 시인(是認)하고 일본(日本)의 추천(推薦)으로 미국(美國)사람 수지분(須知芬)(D.W.스티븐스)이 우리 나라의 외교(外交) 고문(顧問)이 되더니 수지분(須知芬)이 미국(美國)에 건너가서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대(對)한 행동(行動)을 찬(讚)한 까닭에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두 사람이 이를 쏘아 죽이고 삼년(三年) 시월(十月)에는 전(前)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합이빈(哈爾濱)(하얼빈)에 간 것을 안중근(安重根)이 쏘아 죽이고 이해 십이월(十二月)에는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경성(京城)의 길거리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에 찔린 일은 가장 세상(世上)에 들어 난 일이다.

앞서 국가(國家)의 내외(內外) 정세(情勢)의 긴박(緊迫)과 새 사조(思潮)의 움직임은 뜻이 있는 인사(人士)들로 하여금 일아(日俄)를 반성(反省)하게 하여 국학(國學)에 대(對)한 연구(硏究)가 늘어갔으니 주시경(周時經)은 국문(國文)의 연구(硏究)와 보급(普及)에 힘썼고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같은 젊은 학자(學者)들은 국사(國史) 연구(硏究)에 공적(功績)이 있었고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은 국문(國文)과 한문(漢文)을 섞어 쓴 새로운 글월로서 신(新) 소설(小說)은 우리 나라의 문학(文學)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언론기관(言論機關)에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비롯하여 황성신문(皇城新聞) 제국신문(帝國新聞) 대한매일신문(大韓每日新聞) 등(等)이 차례로 나타나서 모두 독립사상(獨立思想)을 고취(鼓吹)하고 일본(日本)의 야망(野望)을 비난(非難)하였다.

그러나 한번 기우러지기 시작(始作)한 국세(國勢)는 다시 회복(恢復)할 길이 없었다.

융희(隆熙) 사년(四年)에 일본(日本)군벌(軍閥)의 거두(巨頭) 사내정의(寺內正毅)(데라우찌 마사다께)가 총독(總督)으로 되어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의 사이에 합방조약(合邦條約)이 맺어져서 이해 팔월(八月) 이십구일(二十九日)에 이를 발표(發表)하였다.

우리 나라가 건국(建國) 이래(以來) 사천여년(四千餘年)에 일직 단절(斷絶) 된 일이 없는 역사(歷史)의 전통(傳統)이 처음으로 끊어지고 이천만(二千萬) 민족(民族)은 비통(悲痛)한 시련(試鍊)을 직면(直面)하였다.

이씨(李氏) 건국(建國)으로부터 융희(隆熙) 사년(四年) 경술(庚戌)에 이르기까지 이십칠대(二十七代) 오백십구년(五百十九年)이었고 뜻 있는 사람들은 의분(義憤)을 이기지 못하여 일본(日本)에 반항(反抗)하다 혹(或)은 죽고 혹(或)은 옥(獄)에 갇치고 혹(或)은 외국(外國)으로 망명(亡命) 하였다.

 

  기미독립(己未獨立) 선언서(宣言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이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의 권위(權威)를 장(仗)하야 차(此)를 선언(宣言)함이며 이천만(二千萬) 민중(民衆)의 성충(誠忠)을 합(合)하야 차(此)를 포명(佈明)함이며 민족(民族)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발전(自由發展)을 위(爲)하야 차(此)를 주장(主張)함이며 인류적(人類的) 양심(良心) 발로(發露)에 기인(基因)한 세계개조(世界改造)의 대기운(大機運)에 순응병진(順應倂進)하기 위(爲)하야 차(此)를 제기(提起)함이니 시(是) ― 천(天)의 명명(明命)이며 시대(時代)의 대세(大勢)이며 전인류공동주권(全人類共同主權)의 정당(正當)한 발동(發動)이라 천하하물(天下何物)이든지 차(此)를 저지억제(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구시대(舊時代)의 유물(遺物)인 침략주의(侵略主義) 강권주의(强權主義)의 희생(犧牲)을 작(作)하야 유사이래(有史以來) 누천년(累千年)에 처음으로 이민족겸제(異民族箝制)의 통고(痛苦)를 상(嘗)한지 금(今)에 십년(十年)을 과(過)한지라 아생존권(我生存權)의 박탈(剝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심령상발전(心靈上發展)의 장애(障碍)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민족적존영(民族的尊榮)의 훼손(毁損)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으로써 세계문화(世界文化)의 대조류(大潮流)에 기여보비(寄與補裨)할 기연(機緣)을 유실(遺失)함이 무릇 기하(幾何)이뇨

희(噫)라 구래(舊來)의 억울(抑鬱)을 선양(宣揚)하려하면

시하(時下)의 고통(苦痛)을 파탈(擺脫)하려하면

장래(將來)의 위협(威脅)을 삼제(芟除)하려하면

민족적양심(民族的良心)과 국가적염의(國家的廉義)의 압축소잔(壓縮銷殘)을 흥분신장(興奮伸張)하려하면

각개인격(各個人格)의 정당(正當)한 발달(發達)을 수(遂)하려하면

가련(可憐)한 자제(子弟)에게 수치적재산(羞恥的財産)을 유여(遺與)치 아니하려하면

자자손손(子子孫孫)의 영구완전(永久完全)한 경복(慶福)을 도영(導迎)하려하면

최대급무(最大急務)가 민족적독립(民族的獨立)을 확실(確實)하게 함이니 이천만각개(二千萬各個)가 인(人)마다 방촌(方寸)의 인(刃)을 회(懷)하고 인류통성(人類通性)과 시대양심(時代良心)이 정의(正義)의 군(軍)과 인도(人道)의 간과(干戈)로써 호원(護援)하는 금일(今日) 오인(吾人)은 진(進)하야 취(取)함에 하강(何强)을 좌(挫)치 못하랴 퇴(退)하야 작(作)하매 하지(何志)를 전(展)치 못하랴

병자수호조규(丙子修護條規) 이래(以來) 시시종종(時時種種)의 금석맹약(金石盟約)을 식(食)하얏다 하야 일본(日本)의 무신(無信)을 죄(罪)하랴 아니하노라 학자(學者)는 강단(講壇)에서 정치가(政治家)는 실제(實際)에서 아(我) 조종(朝宗)의 세업(世業)을 식민지시(植民地視)하고 아(我) 문화민족(文化民族)을 토매인우(土昧人遇)하야 한갓 정복자(征服者)의 쾌(快)를 탐(貪)할 뿐이오 아(我)의 구원(久遠)한 사회기초(社會基礎)와 탁락(卓犖)한 민족심리(民族心理)를 무시(無視)한다 하야 일본(日本)의 소의(少義)함을 책(責)하랴 아니하노라

자기(自己)를 책려(策勵)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타(他)의 원우(怨尤)를 가(暇)치 못하노라

현재(現在)를 주무(綢繆)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숙석(宿昔)의 징변(懲辨)을 가(暇)치 못하노라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소임(所任)은 다만 자기(自己)의 건설(建設)이 유(有)할 뿐이오 결(決)코 타(他)의 파괴(破壞)에 재(在)치 아니 하도다

엄숙(嚴肅)한 양심(良心)의 명령(命令)으로써 자가(自家)의 신운명(新運命)을 개척(開拓)할 뿐이오 결(決)코 구원(舊怨)과 일시적감정(一時的感情)으로써 타(他)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 구사상(舊思想) 구세력(舊勢力)에 기미(羈縻)된 일본(日本) 위정가(爲政家)의 공명적희생(功名的犧牲)이된 부자연우불합리(不自然又不合理)한 착오상태(錯誤狀態)를 개선광정(改善匡正)하야 자연우합리(自然又合理)한 정경대원(政經大原)으로 귀환(歸還)케 함이로다

당초(當初)에 민족적요구(民族的要求)로써 출(出)치 아니한 양국합병(兩國合倂)의 결과(結果)가 필경(畢竟) 고식적(姑息的) 위압(威壓)과 차별적(差別的) 불평(不平)과 통계수자상허식(統計數字上虛飾)의 하(下)에서 이해상반(利害相反)한 양민족간(兩民族間)에 영원(永遠)히 화동(和同)할 수 없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去益深造)하는 금래실적(今來實積)을 관(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舊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眞正)한 이해(理解)와 동정(同情)에 기본(基本)한 우호적(友好的) 신국면(新局面)을 타개(打開)함이 피차간(彼此間)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捷徑)임을 명지(明知)할 것이 아닌가 또 이천만(二千萬) 함분축원(含憤蓄怨)의 민(民)을 위력(威力)으로써 구속(拘束)함은 다만 동양(東洋)의 영구(永久)한 평화(平和)를 보장(保障)하는 소이(所以)가 아닐 뿐 아니라 차(此)로 인(因)하야 동양안위(東洋安危)의 주추(主樞)인 사억만지나인(四億萬支那人)의 일본(日本)에 대(對)한 위구(危懼)와 시의(猜疑)를 갈수록 농후(濃厚)케 하야 그 결과(結果)로 동양전국(東洋全局)이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비운(悲運)을 초치(招致)할 것이 명(明)하니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조선독립(朝鮮獨立)은 조선인(朝鮮人)으로 하야곰 정당(正當)한 생영(生榮)을 수(遂)케 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으로 하야곰 사로(邪路)로써 출(出)하야 동양지지자(東洋支持者)인 중책(重責)을 전(全)케 하는 것이며 지나(支那)로 하야곰 몽매(夢寐)에도 면(免)치 못하는 불안공포(不安恐怖)로서 탈출(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東洋平和)로 중요(重要)한 일부(一部)를 삼는 세계평화(世界平和)와 인류행복(人類幸福)에 필요(必要)한 계단(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區區)한 감정상(感情上) 문제(問題)리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展開)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時代)가 거(去)하고 도의(道義)의 시대(時代)가 래(來)하도다 과거전세기(過去全世紀)에 연마장양(鍊磨長養)된 인도적(人道的) 정신(精神)이 바야흐로 신문명(新文明)의 서광(曙光)을 인류역사(人類歷史)에 투사(投射)하기 시(始)하도다.

신춘(新春)이 세계(世界)에 래(來)하야 만물(萬物)의 회소(回蘇)를 최촉(催促)하는도다 동빙한설(凍氷寒雪)에 호흡(呼吸)을 폐칩(閉蟄)한 것이 피일시(彼一時)의 세(勢)라 하면 화풍난양(和風暖陽)에 기맥(氣脈)을 진서(振舒)함은 차일시(此一時)의 세(勢)니 천지(天地)의 부운(復運)에 제(際)하고 세계변조(世界變潮)를 승(乘)한 오인(吾人)은 아무 주저(躊躇)할 것 없으며 아무 기탄(忌憚)할 것도 없도다 아(我)의 고유(固有)한 자유권(自由權)을 호전(護全)하야 생왕(生旺)의 낙(樂)을 포향(飽享)할 것이며 아(我)의 자족(自足)한 독창력(獨創力)을 발휘(發揮)하야 춘만(春滿)한 대계(大界)에 민족적정화(民族的精華)를 결뉴(結紐)할지로다

아(我) 등(等)이 자(玆)에 분기(奮起)하도다 양심(良心)이 아(我)와 동존(同存)하며 진리(眞理)가 아(我)와 병진(倂進)하는도다 남녀노소(男女老少)없이 음울(陰鬱)한 고소(古巢)로서 활발(活潑)히 기래(起來)하야 만휘군상(萬彙群象)으로 더불어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을 성수(成遂)케 하도다 천백세조령(千百世祖靈)이 오등(吾等)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全世界) 기운(氣運)이 오등(吾等)을 외호(外護)하나니 착수(着手)가 곧 성공(成功)이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光明)으로 맥진(驀進)할 따름인저

 

공약삼장(公約三章)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인도(正義人道) 생존존영(生存尊榮)을 위(爲)하는 민족적요구(民族的要求)이니 자유적정신(自由的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決)코 배타적(排他的)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치 말라

최후(最後)의 일인(一人)까지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正當)한 의사(意思)를 쾌(快)히 발표(發表)하라

일체(一切)의 행동(行動)은 가장 질서(秩序)를 존중(尊重)하야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야곰 어디 까지던지 광명정대(光明正大)케 하라

조선(朝鮮)건국(建國) 사천이백오십이년(四千二百五十二年) 삼월(三月) 일일(一日)

조선민족대표(朝鮮民族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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