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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3.09.03 원시생활 (삼화선생 서당국사)
  9. 2013.09.03 고조선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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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13.09.03 고구려의 융성 (삼화선생 서당국사)
  12. 2013.09.03 백제와 신라의 발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13. 2013.09.03 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선생 서당국사)
  14. 2013.09.03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15. 2013.09.03 삼국혼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韓長庚 編 朝鮮歷史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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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長庚 編 朝鮮歷史 書生 全永壽 韓聲遠 筆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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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국역사(我國歷史)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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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혼용 조선역사 아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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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歷史

          韓長庚 著

                  古代  三一運動

이 原稿는 現在發刊된 많은 歷史서와는 歷史觀點에서 差異가 있다고 생각되고 또 專門歷史硏究의 考證面보다는 보이지 않게 흘러오는 精神體系의 한 가닥을 느끼게 해주는 著述이라 생각되나 한글전용의 현시점에서는 여러 가지 벽이많아 발간치 못한다 시쳇말로 구닥다리 공부를 좀하신 분들이 옛날 얘기하듯 일러주는 도리밖에? 없지 않을까 尹相基

 回顧談

二十二歲에 咸興農村에서 私立學校 敎員으로 있을때에 漢學을 하는 老人집에 우리나라 歷史 大東紀年이라는 冊이있는 것을 發見하고 그것을 빌려보았다. 이때는 日本한테 侵略當한지 八年이라 우리나라 歷史冊을 보기만하면 押收하는 까닭에 歷史冊을 얻어 보기가 極히 어려웠다. 그 冊을 보고 이 나라에 나서 제나라歷史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 冊을 秘密히 읽었다. 또 그 이웃洞里에 燃藜室記述이라는 歷史책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도 秘密히 빌려 읽었다. 그때 每日申報에 朝鮮儒敎淵源이라는 論文이 繼續 發表되었는데 우리나라 歷史가 全然 發表되지 못하고 있던 當時에 이 論文은 내 歷史硏究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學校에서 退勤하여 宿所에 돌아오면 新聞에서 꼭 이 論文을 베껴가지고 그날 밤으로 이것을 精讀하였다. 그 學校를 그만둔 後에 己未年의 三一運動을 겪고 이를 契機로 사람들 中에서 우리 歷史를 알아야겠다는 民族意識이 높아지고 나 亦是 우리歷史를 더 깊이 硏究해야겠다는 생각이 切實해서 그해 가을에 歷史遺蹟을 探訪하기 爲하여 期限없는 南道旅行을 떠났다. 서울에 와서 몇日間 여러 史蹟을 돌아보고 더 南으로 내려가서 公州 扶餘 恩津 鷄龍山을 거쳐서 淸州 報恩 錦山을 보고 全州에 들어갔다가 萬頃江을 따라 내려가다 旅費가 떨어졌다. 할 수 없이 金堤郡 農村의 어느 私立學校 敎員으로 就任하여 一時지내기로 했는데 그만 六年을 보냈다. 이 學校에 있는 동안에 全北과 全南에 있는 史蹟을 두루 돌아보고 여름 겨울 放學을 利用하여 慶州 金海等地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이 學校를 그만둔 後에는 北間島와 西間島를 돌아다니면서 古代 祖上들이 經營하던 滿洲方面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歷史硏究 十年間 한 가지 풀리지 않는 問題는 우리나라의 古代에는 農民이 全人口의 九割이 넘었는데 歷史冊은 主로 王室과 貴族들의 歷史로 되어있고 農民의 歷史는 全然 記錄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었다. 나는 農民의 歷史를 알아보려고 하던次에 朝鮮農民이라는 月刊雜誌가 發刊되어 거기에 入社하여 農村問題를 硏究하면서 農民歷史를 아울러 硏究했다. 이렇게 五,六 年 歷史를 硏究하는 동안 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歷史는 되는대로 發展變化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떠한 原理와 法則을 따라서 發展하고 變化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다시 이 原理와 法則을 硏究하기 始作했다.

먼저 읽은 것이 西洋哲學이오 여기에 四,五年의 歲月을 쏟았는데 여기에서는 아무 所得이 없었다. 다음에는 宋代의 程朱哲學인 理氣說을 硏究하고 우리나라 先賢들의 學說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무런 原理와 法則을 發見치 못하고 다시 易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하고 八一五解放 三年前에 처음으로 易學에 들어가니 이것이 내가 易學을 硏究하기 始作한 動機다. 易學은 宇宙萬物에 모두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도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 生長成法則이 있는 까닭에 人類歷史에도 또한 이러한 法則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宇宙의 法則이 바로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되는 것이오 여기에서 비로소 이제까지 追求하던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을 大略 斟酌한 것이오 그 實은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곧 易學原理의 主要部分임을 알게 되었다. 1967年回顧談

 

 

<題目 次例>

我國의 自然環境

原始生活

古朝鮮

三國의 興起

高句麗의 隆盛

百濟와 新羅의 發展

三. 三國時代의 社會

高句麗와 中國과의 關係

三國混戰

新羅의 三韓統一

三國의 文化와 經濟

渤海의 建國

海上發展

新羅의 衰亡

高麗建國

高麗政治

社會階級

建設事業

一. 土地制度

二. 成宗의 治積

契丹關係

儒敎와 佛敎의 文化

中期의 隆盛

女眞關係

繼生하는 叛亂

蒙古亂

政治의 紊亂

外國關係

高麗의 滅亡

備考

李朝建國

李朝政治

王位爭奪

建設時機

端宗과 世祖

李朝基礎의 完成

燕山君의 失政

中宗反正後의 國政

日本과의 關係

社會의 腐敗

壬辰倭亂

亂後의 形勢

丙子胡亂

西洋文化와의 交涉과 外國貿易

四色黨爭

英 正의 文化

勢道政治

洪景來 亂과 民亂

北間島 移住

開國時代

壬午軍亂 甲申政變

日本의 侵略

民衆運動

己未獨立 宣言書

 

我國의 自然環境

我國은 亞細亞大陸 의 東北部에 뻗어 나온 半島로서 三面이 環海하고 앞으로 太平洋과의 사이에 日本列島가 屛風처럼 가리웠다. 이러한 地理的條件으로 말미암아 古來로 大陸에서 興亡한 여러 나라 勢力이 우리를 덮친 일이 한 두 番이 아니며 또 日本의 눈길이 언제나 우리에게 쏠려 있음으로 우리는 今後로도 恒常 大陸을 돌아보고 日本을 내다보면서 生存하여야만 할 것이다.

我國은 北緯 三十三度에서 四十三度까지의 사이에 있어서 가장 살기 좋은 溫帶의 한 地方이며 寒暑가 모두 生物이 棲息하기에 알맞고 또 節候를 따라서 雨雪이 고르므로 여러 가지 穀食이 잘 자란다. 더욱이 空氣가 맑고 아름다운 山川이 어리어서 景致좋기로 世界에서 有名하고 地下에는 金 銀 銅 鐵을 비롯한 모든 鑛物이 豊富하며 바다에는 寒流와 暖流가 부딪쳐서 各種의 魚物이 많이 잡힌다.

我國과 大陸과의 地境은 近世에 와서 白頭山과 및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豆滿江 鴨綠江으로 하였으나 옛날은 松花江기슭의 滿洲벌판이 我國의 疆土이었고 또 그와 反對로 國境線이 只今보다 縮小된 일도 있었으나 그러나 오늘날 三八線이란 不自然한 線을 긋고 南北이 두 동강이로 나뉘게 된 것은 歷史的으로 그러한 記錄이 있는 것도 아니오 또 우리民族이 이를 承認한 것도 아니다. 我國은 世界어느 나라보다도 純粹한 單一한 民族으로서 이 不自然한 線은 不遠하여 반드시 消滅시켜야 할 것이다.

我國의 脊梁山脈은 海拔 二千七百餘 米 (미터)의 白頭山에서 비롯하여 咸鏡道땅에 蓋馬의 높고 넓은 高原地帶를 이루고 南으로 내려와서 江原道와의 사이에 鐵嶺을 이루니 옛날 여기에 關門을 두어서 出入하는 行人을 守備하였기 때문에 이를 中心으로 江原道를 關東, 咸鏡道를 關北,平安道를 關西라 부르는 이름이 생겼다. 이 脊梁山脈은 江原道의 한복판을 타고 내려오면서 金剛山 五臺山같은 名山을 내고 慶尙道와의 地境에 이르러 太白山이 되고 다시 小白山脈으로 뻗어 나와서 智異山을 이루고 그 餘脈이 멀리 濟州道의 漢拏山에까지 미쳤다. 忠淸道와 慶尙道와의 사이에 竹嶺, 鳥嶺의 關門이 있어 예로부터 南北이 通하는 길목이 되었고 慶尙道를 嶺南이라 함은 이 두 嶺의 南쪽에 있기 때문이다. 忠淸道를 湖西라하고 全羅道를 湖南이라 함은 新羅때에 只今의 金堤땅에 碧骨堤라는 큰 못을 파고 이 못이 湖水처럼 크고 넓다하여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이 我國의 地勢는 脊梁山脈이 北에서 南으로 뻗어 있고 이 山脈을 分水嶺으로 하여 東은 傾斜가 急하나 西와 南은 넓은 平野가 열리고 大河가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文化는 언제나 東北部地方보다 西南部地方에서 먼저 열리었다. 江은 北으로 鴨綠江과 豆滿江이 있어서 다 함께 白頭山에서 發源하였으나 하나는 西로 흘러서 黃海에 들어가고 하나는 東으로 흘러서 東海에 들어갔다. 이 두 江은 近世에 와서 我國의 北境이 되고 하나는 西로 中國大陸과의 交涉의 關門이 되고 하나는 北으로 女眞族의 來往하는 길목이 되었다. 그 中에서도 鴨綠江은 길이가 二千里에 가까워서 我國에서 第一 큰 江이며 高句麗는 이 江岸에서 興하였고 南으로 大韓海峽에 들어가는 洛東은 新羅의 發祥地이오 그밖에 淸川江, 大洞江, 禮成江, 臨津江, 漢江,錦江等 黃海로 흘러 들어가는 江이 大部分이오 예로부터 이러한 江岸이 歷史의 舞臺로 登場하였다. 特히 大洞江은 古朝鮮의 中心地로서 나중에 高句麗의 都邑이 되었고 禮成江과 臨津江 어귀는 高麗의 根據地이오 漢江은 三國時代에도 有名한 爭奪地가 되고 近世以來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江岸의 서울이 我國의 首都이고 錦江은 百濟末葉의 都邑이었다.

古代의 都邑은 防備의 便利와 豊産地帶를 가진 것이 主要한 條件이 되어 있었으므로 歷代의 國都는 모두 大江의 險과 平野를 가진 江岸을 取하였던 것이다.

我國의 氣候는 大陸과 大洋과의 사이에 갈마드는, 日射量의 差로 말미암아 생긴 季節風의 影響을 받아서 左右된다. 十月에서부터 三月까지는 大陸季節風이 불어서 춥고 가물며 四月에서부터 九月까지는 比較的 弱한 海岸季節風이 불어서 비가 많이 온다. 同一한 緯度의 他國에 비기어 我國의 겨울이 더욱 춥고 또 一年降雨量의 四分之三이 여름에 있음은 이 때문이고 我國의 農業生産이 이러한 氣候의 支配를 받음은 勿論이다.

 

原始生活

我國의 原始時代에는 主로 魚貝와 鳥獸를 잡아먹고 草根木實을 캐어 먹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입고 石窟과 움집에서 살았다. 農事라고는 오직 黍(기장)가 있을 뿐이오 黍 (기장)는 어떤 土地에서든지 잘 生育되고 播種時期의 早晩에 影響됨이 적으므로 農業技術이 不足한 古代에 黍農만 있는 것은 必然한 일이다.

器具나 器皿은 주로 土石들로 만든 것이었으니 이때를 石器時代라 한다. 只今 我國과 滿洲에서 發見되는 石斧, 石鏃, 石刀의 여러 가지 石器는 모두 같은 系統인 것이며 이 時代의 土器는 勿論 날 그릇이었으니 그래도 쓸모 있게 여러 가지 模樣을 만들고 또 簡單한 그림 模樣도 새겨내었다. 그러므로 石器보다 土器에 있어서 그 時代의 模習과 그 民族의 性格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石器時代의 痕跡은 只今 我國의 各處에 있는 屈속과 古城地와 古墳 가운데서 많이 發見되거니와 그 中에서도 海邊 여러 곳에 散在하는 貝塚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貝塚中에는 黃海道 夢金浦와 慶尙南道 金海에 있는 것이 가장 有名하며 그밖에 慶尙南道 固城 慶尙北道 迎日 咸鏡南道 北靑 咸鏡北道 城津, 雄基 等地에도 큰 貝塚이 있으니 이는 옛날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버린 것이 파묻혀 생긴 것이다.

「선돌」이라는 立石은 높은 山을 본뜬 것이어서 그때 사람들의 信仰의 對象이었으며 이는 世界에서도 太陽을 崇拜하는 風習이 있는데, 어떤 곳에나 있지만 我國에 더욱 많고 그 中에서도 檀君傳說이 남아 있는 黃海道 九月山을 中心으로 한 地方과 馬韓의 옛 땅에 特히 많다.

또「고인돌」이라고 한 支石은 或은 하늘에 祭祀지내던 祭壇이었다 하고 或은 옛사람들의 무덤이라 하나 이 亦是 太陽을 崇拜하는 巨石文化의 한 痕跡이며 特히 支石은 鄰國인 中國과 日本에서는 全然 發見되지 아니 하는데 我國을 비롯하여 滿洲와 시베리아와 유럽에 걸쳐서 이것이 있고 我國에서는 여러 곳에서 發見되었다. 江原道 春川과 黃海道 殷栗에 있는 것이 가장 有名하다.

 

古朝鮮

只今으로부터 四千餘年 前의 옛날에 檀君王儉이 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平壤에 都邑하고 國號를 朝鮮이라 하니 中國의 堯임금 때요 이 해를 我國의 紀元元年이라 한다.

檀君朝鮮은 千餘年동안 繼續하였다 하나 確實한 年代는 알 수 없다. 그 後에 中國의 殷나라가 亡하고 周나라가 代身하게 되었는데, 殷나라의 王子인 箕子가 그 무리를 데리고 朝鮮에 들어와서 只今의 遼西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또한 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箕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滿洲 北部에는 扶餘, 南部에는 句麗貊이 있고 半島方面에는 韓이 있었는데 그 年代와 國都는 알 수 없다.

箕氏朝鮮은 여러모로 發達된 産業의 基礎 위에서 大陸의 進步한 文明을 輸入하여 크게 發展하고 造船技術이 發達하여 바다를 건너 中國의 齊와 魯로 더불어 貿易하며 農事짓는 法과 牛馬를 기르는 牧畜業이 發達하고 사람의 性質이 正直과 禮節과 信義를 崇尙하고 平和와 淨潔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中國사람들은 我國人을 君子之國 大人之市라하고 仁人善이라 불렀다.

(http://blog.daum.net/s4k2y76/699 殷民의 東來)

箕氏朝鮮이 九百餘年동안 繼續하는 中에 中國에서는 周나라 勢力이 차츰 弱해지고 所謂 春秋戰國 時代라 해서 여러 百年동안 戰爭이 繼續되고 凶年이 겹들어서 燕, 趙, 齊, 魯의 中國 北方 사람들이 或은 海路로, 或은 陸路로 朝鮮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中에서도 特히 燕나라는 箕氏朝鮮의 西部를 쳐서 빼앗고 遼河를 사이에 두고 朝鮮과 地境을 接하여 있어서 일직부터 交涉이 잦았고 周나라가 亡하고 秦나라가 中國을 統一할 무렵에 朝鮮으로 避難하여 들어오는 사람이 數 없이 많았다. 그러던 次에 箕埠王때에 燕나라 사람 衛滿을 西部國境에 머물게 하더니 滿이 野心을 품고 많은 軍士를 거느리고 亂離를 일으켜 王都를 치거늘 準王이 미처 抗拒치 못하여 海路로 馬韓에 走入하니 이는 檀紀二千一百四十年 丁未이다.

衛滿이 나라를 세운 後에 國號를 또한 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衛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中國大陸에는 秦나라를 이어서 中原을 統一한 漢나라의 勢力이 커져서 東으로 侵入하니 衛滿의 孫子 右渠는 견디지 못하여 降服하니 이는 檀紀 二千二百二十六年 癸酉의 일이오 衛氏朝鮮은 三代 八十七年으로써 끝마쳤다.

漢나라는 衛氏朝鮮의 故地에 樂浪, 眞番, 臨屯 玄菟의 四郡을 두었다. 四郡의 位置와 넓이에 對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않으나 大槪 樂浪郡은 平壤을 中心으로 한 大洞江 기슭임이 確實하고 眞番郡은 黃海道와 京畿道의 漢江 以北이오 臨屯郡은 咸鏡南道의 南部와 江原道의 鐵嶺 以北이오 玄菟郡은 鴨綠江 기슭을 中心으로 한 平安北道와 佟佳江 下流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四郡은 우리 民族의 猛烈한 反抗때문에 미처 뿌리를 내릴 사이도 없이 眞番 臨屯 二郡은 二十六年만에 없어지고 玄菟郡은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스스로 解消되고 樂浪郡만이 中國 사람들의 根據地로서 半島 中部에 四百餘年동안 남아 있었다.

樂浪郡은 我國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中國과 交通이 便利함으로 我國의 中國 貿易을 맡아 하였다. 平壤에서 大洞江을 건너 土城里라는 마을에 分明한 土城 자리가 있고 그 마을 田土사이에서 樂浪郡의 遺物이 나옴으로 보아 이곳이 樂浪의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 東쪽 平平한 언덕 위에 數多한 古墳이 있고 그 古墳 속에서 金 玉 銅으로 만든 거울과 各種의 질그릇과 그림을 새긴 솥이라든가 瓦片 漆器 等 樂浪遺物이 많이 나와서 考古學上 보배가 되었다.

朝鮮 中部에 衛滿朝鮮이 建國될 무렵에 只今의 北滿洲 地方에는 扶餘族이 살아서 農業과 牧畜에 힘쓰고 中國의 進步된 文化를 輸入하였으며 地 方이 二千里이오 戶數가 八萬이나되며 西로 烏桓 鮮皐 等의 鄰과 겨뤄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나라에 큰 水災나 旱災가 들어서 農事가 잘 되지 아니하면 그 過失이 임금에게 있다하여 或은 갈아세워야 한다하고 或은 죽여야 한다 하였다. 扶餘의 임금은 世襲的 酋長에 지나지 아니하여 그 밑에 짐승이름을 붙인 烏, 加, 猪加, 狗加 等 벼슬이 있어 所道를 나가 지키고 이들은 各其 數百戶로부터 數千戶의 百姓을 거느리고 있었다.

扶餘와 때를 같이하여 東海 方面에는 沃沮, 濊가 있고 半島 南部에는 三韓이 있었다. 沃沮는 지금只今의 咸鏡道 地方에 살았는데 그 땅은 東北이 좁고 西南이 넓으며 長이 千里이고 北으로는 挹婁와 이웃하고 東은 大海이고 南으로는 濊와 잇닿아 있었다. 戶數는 五千이며 임금은 없고 部落마다 首領이 있어 部落일을 추려나가고 言語는 高句麗와 같고 性質이 强直하고 土地가 肥沃하여 여러 가지 穀食이 生産되고 飮食과 居處와 모든 風俗이 高句麗와 비슷하였다. 沃沮는 南北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北沃沮는 挹婁와 接境한 關係로 여름이면 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掠奪함으로 山中에 깊이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게되면 비로소 部落에 내려와서 살았다.

濊는 지금의 江原道의 東에서 咸鏡道의 南에 걸쳐서 살았다. 스스로 高句麗와 同族이라 하고 戶數가 二萬이며 사람들이 性質이 淳厚하고 廉恥가 밝으며 盜賊이 없어서 밤에 門을 닫는 일이 없었다. 言語와 風俗이 高句麗와 거의 비슷하나 衣服은 다르며 여러 部落은 山川의 境界를 重히 여겨 서로 侵犯하는 일이 없고 이를 犯하면 責禍라 하여 奴隸와 牛馬로써 賠償하며 忌하는 것이 많아서 家族中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곧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살았다. 濊사람들은 麻布를 짜고 養蠶할 줄 알고, 별을 보고 그 해의 農事의 豊凶을 미리 알 수 있었다.

韓에는 馬韓, 辰韓, 弁韓의 三韓이 있었다. 이 時代는 一山의 障과 一水의 阻가 스스로 한 部落을 이루어 國家노릇을 하였는데 三韓의 地方에 이러한 部落國家가 七十八國이나 있었다. 各 部落에는 首領이 있고 馬韓 辰韓 弁韓은 各其 所屬한 部落國家를 統御하는 總王이 있었다.

馬韓은 그 中 西쪽에 있어서 百姓이 農事를 짓고 養蠶을하고 五十四國으로 나뉘어 그 크기가 大國은 萬餘戶, 小國은 數百戶이며 사람의 性質이 勇敢하고 해마다 五月에 播種이 끝난 뒤와 十月에 秋收를 마친 뒤에 한번씩 全國人이 모여 天祭祀를 지내고 여러 날 동안 日夜로 마음껏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놀았다.

弁, 辰韓은 지금의 慶尙道땅에서 모두 二十四國이 있고 大國은 四五千戶이오 小國은 六七百戶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地가 肥沃하여 여러 가지 穀食이 잘되고 벼를 심고 養蠶과 牛馬의 畜産이 盛하고 婚姻에 禮節이 밝고 사람이 죽으면 큰 鳥羽를 달아 보내니 이는 그 靈魂이 날아가도록 함이었다.

이때까지의 歷史家들은 三韓을 나눠서 馬韓 辰韓 弁韓이라 하고 그 中 馬韓이 只今의 漢江 以南에서부터 忠南北道와 全羅道땅이고 辰韓은 只今의 慶尙道의 大部分이고 弁韓은 나중의 伽倻의 여러 나라가 일어난 洛東江 下流地方이라 하였으나 새로운 硏究에 依하면 辰韓이 漢四郡에서 가장 가까운 漢江 流域이고 馬韓은 忠淸道와 全羅道이고 弁韓이 지금의 慶尙道 地方이라 한다.

扶餘의 一族에 卒本扶餘가 있으니 지금의 鴨綠江 沿岸의 땅이오 高句麗의 前身이다.

이 時代의 政治는 信仰과 完全히 分立되지 아니하여 部落의 首領이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天祭를 지내며 또 마을의 政治를 行하였다. 信仰의 가장 높은 對象은 하늘의 象徵인 太陽이었으며 해마다 農事가 끝나면 一定한 때에 新穀으로 술과 떡을 빚어 天祭를 지내고 그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놀았다. 高句麗의 東盟, 東濊의 舞天, 扶餘의 迎鼓 等은 모두 이를 이름이다. 이 祭祀는 처음에 높은 山마루에서 지냈으니 그 곳은 어느 곳보다도 太陽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러한 風習은 나중에 農業이 發達되고 江岸과 平野에 내려와 살게된 뒤에도 繼續되어 國家에서는 해마다 有名한 높은 山에 山祭를 드리고 고을에는 城隍堂이 있으며 마을에는 堂山이 있어서 온 고을사람과 온 마을사람이 精誠을 바치는 곳이다.

社會는 大家라는 支配階級과 下戶라는 百姓과 奴隸의 세 階級으로 나뉘었고 大家들은 廣大한 土地를 가지고 奴隸를 부려서 農事를 지었으며 이 時代는 土地는 넓고 人口가 稀少함으로 戰爭할 때마다 奴隸로 부릴 捕虜를 얻는 것이 唯一한 戰利品이었다. 産業은 農蠶과 織布가 자못 發達하였으며 弁 辰韓에서는 鐵을 採掘하여 돈으로 쓰고 이웃나라와 서로 貿易하였다.

從前에는 石器와 銅器만 있었는데 銅器는 軟하여 칼 도끼 等으로 使用치 못하더니 鐵이 發見된 後로 鐵製연장과 武器가 생겨서 産業과 戰爭樣式에 大革命을 일으켰다. 지금 이 文明에서 鐵 한 가지를 없앤다고 하면 이 豪華스러운 文明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니 古代의 鐵의 發見은 참으로 驚異的 事實이었다.

 

三國의 興起

처음에 北扶餘의 임금 解慕潄가 아들 朱夢을 낳았는데 朱夢은 東扶餘의 임금 金蛙에게 養育되다가 그의 兄弟들의 猜忌에 못 배겨 部下를 거느리고 逃亡하여 卒本에 이르러 國家를 세우고 姓을 高라 하니 이가 高句麗의 始祖이다.

一說에는 朱夢이 卒本에 와서 卒王의 女婿가 되었다가 王이 죽은 뒤에 그 位를 繼承하였다 하는데 여러 가지 史實로 보면 이 말이 가장 近理하고 朱夢이 卒本 國號를 고쳐서 高句麗라 하였음으로 後人이 高句麗의 歷年數에 對하여 朱夢으로부터 亡할 때까지를 七百五年이라 하고 卒本까지를 合하여 九百年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桂婁部 消奴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의 다섯 代族團이 中心으로 이루어진 社會이며 山이 많고 土地가 여위어서 生活이 困難한 까닭에 사람들이 勸儉하였다.(高句麗 建國) (檀紀 二千二百九十七年)

高句麗始祖 朱夢王이 아들 沸流와 溫祚를 낳았는데 東扶餘에 있을 때에 낳은 아들 類利가 찾아와서 太子가 되었음으로 沸流와 溫祚는 部下 十人을 거느리고 南으로 向하여 漢의 樂浪郡을 지나서 馬韓에 들어가니 馬韓王이 두 兄弟의 雄傑함을 보고 東北 百里의 땅을 割與하여 써 居處하게 하였다. 沸流는 魚鹽의 利를 取하여 彌鄒忽(지금의 仁川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溫祚는 山川의 險과 平野의 利를 取하여 漢江岸의 慰禮城에 都邑하여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百濟라하고 姓을 扶餘라 하니 이가 곧 百濟始祖이다.(檀紀 二千三百十六年)

沸流는 그 땅이 卑濕하여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죽으매 그 百姓이 모두 慰禮城으로 돌아오니, 溫祚는 勢力이 漸漸자랐으니, 創業 初期에 北邊의 樂浪과 靺鞨이 자주 侵入함으로 漢山에(지금의 廣州 南漢山城)) 都邑을 옮겼다.

弁 辰韓의 斯盧國에는 六村이 있었는데 六村長이 會議를 열고 北方人의 勢力이 南으로 밀려오는 이때에 우리가 賢君 一人을 求하여 세우고 國家를 統一하지 아니하면 안되리라 하고 朴赫居世를 맞이하여 임금을 삼고 지금의 慶州에 都邑하니 이가 곧 新羅 始祖이다. (檀紀 二千二百七十七年) 新羅의 國號는, 처음에는 斯盧 그밖에 여러 가지로 불러 왔으나 後에 新羅라 고쳤으므로 新羅로 通稱하는 것이다.

三國의 始祖는 모두 一代의 英傑이라 當時의 各國이 여러 部落國家로 成立되어 完全한 통일統一國家를 이루지 못하고 部落과 部落사이에 互相 侵伐함이 있으되 國家 總王이 能히 制御치 못함을 보고 政治를 中央에 統一한다는 中央集權制를 쓰기로 하였다. 그 까닭에 建國初부터 附近의 部落을 倂合하여 郡縣을 만들고 官吏를 보내어 다스렸으니 이것이 我國 歷史上 政治制度의 大 轉換期이다.

高句麗는 太白山 左右에 散在한 여러 部落國家를 征服하고 漢이 玄菟郡을 쳐서 高句麗縣을 取하니 이때가 卒本이라는 國號를 高句麗로 改稱한 때이오 東으로 沃沮 地方까지를 그 版圖에 넣었다.

百濟는 漸次로 馬韓國의 여러 部落을 倂合하니 馬韓王이 責하여 曰 王이 처음에 我境에 들어 왔을 때에 客身할 곳이 없기로 土地를 주어 安居케 했거늘 이제 우리 國土를 侵犯하니 무슨 道理인고 하였으나 溫祚王은 듣지 아니하고 南으로 漸次로 疆土를 넓혔다.

新羅는 弁 辰韓의 北部를 漸漸 倂合하고 西로 馬韓國境에 다다르니 여기서 비로소 百濟 兵과 相見하게 되어 三國時代 六七百年 間의 戰亂의 幕을 열었다. 그러나 이 戰爭은 好戰氣風이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中央集權制와 統一國家를 만들려는 運動 過程에 必然的으로 생긴 現象이었다.

馬韓과 弁韓이 各其 百濟와 新羅로 엉켜 갔을 때에 洛東江 下流 地方은 中央集權制를 이루지 못하고 六伽倻國이 分立하여 部族社會를 그대로 지내었다. 그 中에는 洛東江 下流의 金海 地方을 中心으로 金首露王이 駕洛國을 세우니 이가 곧 駕洛始祖이오 駕洛을 또한 金官이라 하며 (檀紀 二千三百七十五年) 그밖에 大伽倻 小伽倻 阿羅伽倻 古寧伽倻 星山伽倻 等이 있었는데 좁은 區域에 六國이 分立되어 있었음으로 國力이 모두 떨치지 못하고 또 그 位置가 我國의 最南端에 있어 北에서 밀려온 我國 文化圈의 가장 구석진 곳이다. 다만 洛東江이 흘러내려 가서 三角洲를 이룬 곳으로 國民의 生活은 가장 裕足한 곳이다.

三國時代의 制度와 風習에는 여러 가지 特色이 있고 創造性이 있었다. 新羅는 當時 一般的으로 行하고 있는 君主 一姓 世襲制를 打破하고 二世 南解王은 子 儒理와 婿 昔脫解에 일러 曰 我 死後에 朴 昔 二姓이 年長 且 賢者로써 王位를 嗣하라 하더니, 昔脫解가 第四代 王이 되니 이로부터 朴昔 二姓이 相傳하고 脫解王이 金閼智를 收養하더니 後에 閼智의 子孫이 또한 王位를 繼承하여 이로부터 朴昔金 三姓이 相傳하였다. 이 時代는 戰亂이 자주 일어나고 또 創業期에 있었는데 萬一 君主가 年幼하거나 또한 暗愚하면 或은 行政權이 臣下에게 옮기고 或은 國家大事를 處理할 能力이 없어서 반드시 危亡에 빠지게 되는 것임으로 新羅에서는 一姓 世襲制를 깨트리고 骨品制를 써서 朴昔金 三姓을 聖骨이라 하고 聖骨 出身이 王位 繼承權을 가지되 年長 且 賢者가 王이 되기로 하니 이 까닭에 新羅가 高句麗 百濟와 鼎立한 동안 一,二의 例外를 除하고는 幼君과 暗王이 거의 없었다. 高句麗와 百濟도 二,三의 例外를 除하고는 年幼한 君主가 거의 없으니 이로써 보면 年長 且 賢者의 君됨은 三國時代의 王位繼承의 한 原則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며 後世에 自己 子孫에게 幸福을 주기 爲하여 黃口 幼兒에게 王位를 傳함은 國事를 爲함이 아니오 그 國家를 自家 血統의 私有物로 생각한 까닭이며, 이로 因하여 國事를 그르치고 아들에게 幸福을 준다는 것이 도리어 큰 災禍를 준 例도 적지 아니한 것이다.

三國時代에 人性은 渾厚하여 個人의 私慾보다 國家를 爲하는 마음이 더 두터웠다. 新羅에는 王位를 辭讓한 例가 여러 번 있었고 高句麗에서는 높은 벼슬을 다른 사람에게 辭讓하는 例가 있었으니 高句麗 故國王때에 五部에 命令하여 賢人을 薦擧하라한즉 五部가 宴留를 推薦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더니 宴留가 말하되 臣이 庸愚하여 足히 써 國家 大政을 맡지 못할지라 鴨綠谷에 乙巴素가 있어 力田 自給하는데 性質이 剛毅하고 政治의 大才가 있으니 此人이 아니면 國事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臣의 벼슬을 此에게 맡기라 하였다. 王은 곧 乙巴素를 擧用하니 을乙巴素의 政治가 賢明하여 百姓이 便安하고 또 百姓의 貧窮함을 걱정하여 봄에 國倉의 穀食을 내어 百姓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還收하여 해마다 常例를 삼으니 百姓이 모두 기뻐하고 이것이 我國의 賑貸制度의 始初였다.

三國은 國家에 큰 亂離가 있으면 貴族의 子弟가 먼저 槍劍을 집고 弓矢를 메고 軍隊의 先頭에 나서고 軍卒이 그 뒤를 따름으로 將 兵이 모두 一體가되어 當時 天下 强國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勿論 이때는 戰功이 있는 者에게 土地를 주는 田庄制度가 있고 또 捕虜를 獲得하여 農業 奴隸로 使用하는 制度가 있음으로 貴族의 子弟들이 先頭에 나서는 것은 戰功을 세우기 爲한 一面이 없지 아니하나 國家를 爲하여 生命을 아끼지 아니하는 崇高한 精神은 足히 後世의 微弱한 下民層만을 軍士로 내 세우고 自己는 安逸한 地位에 逃避하는 貴族層을 愧死케 할 것이오 有名한 新羅의 花郞도 이러한 精神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三國時代의 사람은 渾厚한 氣風으로써 地位의 高下와 勢力의 强弱을 가리지 아니하고 오직 一心으로 함께 國事에 當하였으므로 三國時代는 我國歷史上 가장 光輝있는 時代를 現出한 것이다.

高句麗의 隆盛

高句麗의 國都 卒本은 平野가 적고 外敵을 막기에 不便함으로 얼마 後에 國內城에 옮기고 다시 丸都城에 옮겨서 西로 遼河方面으로 내려가고 南으로 韓半島로 내려가기 始作하였다. 高句麗가 西와 南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면 안될 理는 두 가지가 있다.

一. 高句麗의 땅은 平野가 적고 土地가 瘠薄하며 氣候가 寒冷하여 農産이 豊富치 못함으로 國家 存立上 五穀과 蠶麻가 豊盛한 南方으로 進出치 아니할 수 없는 것

二. 遼河로부터 大洞江에 이르는 一帶地는 古來로 우리 民族이 居住하던 朝鮮 故地이던 것이 只今에 玄菟 樂浪等 中國의 郡縣으로 되었음으로 이것을 恢復치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建國初期부터 西出 南下 政策을 써서 마침내 西로 玄菟郡을 쳐서 地境이 遼河에 이르고 南으로 樂浪을 取하여 四百年동안 내려오던 中國의 郡縣을 뿌리 채 뽑아버리고 드디어 百濟와 接境하니 이때가 三國이 비로소 鼎立한 때이오 三國 後 約 三百年 頃의 일이었다.

高句麗는 西쪽으로 發達하는 途中에 中國과의 衝突이 가장 甚하더니 中國의 三國時代의 魏와 抗爭하다가 魏將 毌丘儉에게 敗하여 丸都城이 灰燼되었으므로 一時 國勢가 매우 危殆하였으나 얼마 後에 다시 恢復하여 大陸으로 進出하는 政策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遼河 西쪽의 錦州城에 雄據하고 있는 燕나라와 爭雄하다가 燕軍에게 敗하여 丸都城은 다시 修理할 수 없이 破壞되고 都城이 敵國에 너무 가까워서 恒常 危險性이 있음을 念慮하여 그 後에 平壤으로 옮기더니 高句麗 中興의 英王 廣開土王이 다시 丸都城에 都邑하고 疆土를 四方으로 넓히니 이때가 高句麗의 極盛時代이오 지금 滿洲 輯安縣 碑石街에 屹然히 서있는 높이 二十二尺의 巨碑는 廣開土王의 功績을 永遠히 傳하기 爲하여 그 아들 長壽王이 세운 것이다.

百濟와 新羅의 發展

百濟는 建國 後 漸次로 馬韓의 땅을 奪取하더니 不過 二十 餘年에 全域을 統合하고 半島 西南部의 一大國을 形成하였다 土地가 肥沃하여 農産이 많고 一面이 大海인 關係로 造船術과 航海術이 發達하여 中國大陸과 貿易하고 水軍이 또한 精銳하여 한때는 中國의 東海岸 一部를 占領한 일도 있었다.

高句麗의 勢力이 南으로 내려 온 後 禮成江(黃海道)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衝突이 일어나기 始作하였다. 百濟와 高句麗는 本是 兄弟의 나라이었으니 高句麗 故國原王이 百濟를 치다가 戰死하니 이로부터 兩國이 世讎가 맺어져서 戰爭이 連年 不絶하더니 高句麗 長壽王이 南下政策을 推進하여 平壤에 移都한 後로 百濟는 그 壓力에 눌려서 더 北進치 못하고 盖鹵王때에는 高句麗와 싸우다가 王은 戰死하고 全軍이 覆滅하고 漢江 左右의 地를 喪失하고 王子 文周王이 熊津(지금의 公州)으로 옮기니 이때가 百濟의 最大 受難期이었다.

新羅는 半島의 東南 一隅에 處하여 賢君이 相續하고 그 政治에는 和白이라는 制度가 있어 임금을 選擧하고 다른 重要한 國事를 議論하는데 遺族들이 모여서 會議하고 全員이 贊成한 然後에 決定함으로 恒常 國論이 잘 統一되고 또 이 나라는 六部族의 合意에 依하여 成立되었으므로 그 國民의 部族的 團結이 가장 鞏固하였으니 이것이 後日 三韓統一의 原動力이 되었고 이 部族의 團結力은 轉轉移徙하여 다니는 高句麗나 百濟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高句麗나 百濟는 我國의 西海岸을 끼고 있어서 일직부터 大陸과의 交涉이 頻繁하여 손쉽게 그 文化를 輸入할 수 있었고 漢文도 國初부터 들어와서 一部 知識階級사이에 行하였음으로 文化 程度의 向上이 볼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新羅는 地理的으로 中國과 直接으로 交通하지 못하고 主로 高句麗와 百濟를 通하여 間接으로 大陸文化를 받은 關係로 文化의 發達이 얼마쯤 뒤졌으나 그 代身 三韓時代로부터 繼續하여오는 國有文化를 充分히 發達케 하고 그 基礎위에 大陸文化를 받아서 世界에 자랑할만한 新羅文化를 이루었다. 이러한 事實은 佛敎를 받아들일 때에 있어서도 高句麗와 百濟는 가장 쉽게 받아왔으나 오직 新羅는 그 받아들이는 可否에 對하여 論難과 批判이 가장 深刻하여 어려운 曲折을 겪었고 그 뒤에 가장 아름다운 佛敎文化의 꽃이 핀 것으로 보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後世에 外國文化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깊은 檢討와 批判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國有文化의 基礎가 弱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三國時代의 社會

三國時代의 土地制度는 모두 國有로 하고 貴族 功臣들에게 田庄 食邑 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農耕에 從事할 奴隸를 아울러 주니 高句麗에는 坐食하는 大家가 萬餘戶이오 下戶는 그들에게 糧食과 魚鹽을 져다 바쳤으며, 新羅에는 宰相家의 奴僕이 三千人에 달하고 牛馬의 數도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때는 돈이 없고 米穀과 麻布를 交換의 媒介로 使用하니 이것은 古代 物物交換의 遺風이오 지금에 湖南地方에서 米穀에 限하여 買하는 것을 판다하고 賣하는 것을 산다 하는 것은 三國 以來 米穀 麻布가 돈으로 쓰이던 遺俗이다.

三國의 極盛時代의 都城 人口는 高句麗는 二十一萬餘戶이오 新羅는 十七萬餘戶이오 百濟는 十五萬餘戶이다. 어떤 사람들은 人口가 稀少한 當時에 都城人口가 一戶에 五人으로 잡더라도 七十萬 或은 百萬이 될 것이니 이것은 事實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三國時代에는 都城이 膨脹치 아니할 수 없는 理由가 있으니 이 時代는 戰爭이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都城이 數三個月 敵軍의 包圍를 當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 包圍에는 食糧 武器 기타 여러 가지 生活品을 都城內에서 自作自給치 아니하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各國의 都城內에는 첫째로 武器를 製造하는 工場이 있고 거기에 從事하는 技術者및 勞務者等 百工이 있고 큰 市場도 이 都城內에 集中되어 있었다. 國家가 都城을 옮길 때에 먼저 工場과 百工을 옮긴 것은 이 까닭이오 當時에 都城이 膨脹한 것은 自然의 理이다.

 

高句麗와 中國과의 關係

高句麗는 鴨綠江을 中心으로 南北 數千里에 걸쳐서 큰 勢力을 길렀으므로 非但 新羅와 百濟에 對한 壓力이 될 뿐 아니라 中國大陸에 對하여도 끊임없는 威脅이었다.

그러나 前日의 中國은 五胡 十六國의 어지러운 時代였으나 그 뒤에 南北으로 나뉘었다가 隋나라가 일어나서 統一을 이룬 뒤에는 高句麗와의 사이에는 두 큰 勢力이 마주쳐서 부딪치지 아니할 수 없이 되었다. 高句麗 嬰陽王때에 靺鞨을 거느리고 隋나라의 遼西를 친 것이 動機가 되어서 隋 文帝가 三十萬 軍士로서 쳐들어 왔으나 中途에서 敗하여 돌아갔다. 다음 임금 煬帝는 本是 虛心이 많은 사람으로서 天下를 統一해 보겠다는 野心과 父皇이 이루지 못한 恨을 풀겠다는 생각으로 天下의 힘을 기우려 嬰陽王 二十二年 (檀紀 二千九百四十五年)에 百十三萬의 陸軍과 多數한 水軍을 거느리고 高句麗로 쳐들어오니 陣의 길이가 九百六十里에 뻗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斟酌하고 乙支文德으로써 大將을 삼고 準備하던 터이라 乙支文德이 鴨綠江을 건너가서 隋軍 二十萬을 誘引하여 薩水(지금의 淸川江)에 이르러 大破하니 敵의 生還者가 겨우 二千八百名에 지나지 못하니 이것을 薩水大戰이라 하며 遼東에 남아있는 軍士는 或은 敗하고 或은 怯을 먹고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煬帝는 이듬해 다시 軍士를 거느리고 와서 遼東城을 쳤으나 거듭 失敗하고 세 번째 高句麗를 치려다가 國內 叛亂으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唐나라에게 亡하였다.

 

三國混戰

百濟는 高句麗에게 밀려서 熊津으로 옮긴 後 外로는 高句麗의 侵略이 그치지 아니하고 內로는 政治가 어지러워서 國力이 떨치지 못함으로 한 便으로는 멀리 日本과 親善하여 그 後援을 얻으려 하였으며 百濟의 學者 王人이 千字文과 論語를 가지고 日本에 들어가서 그 王子에게 처음으로 漢文을 가르쳐주고 佛敎와 및 建築, 陶器, 釀造, 冶金, 彫刻, 繪畵等의 技術을 傳한 것도 모두 이 時代의 일이었다. 百濟 聖王은 新羅와 함께 高句麗를 치려하더니 新羅가 高句麗의 强盛함을 두려워하고 또 부질없이 外國과 싸우기보다 內政을 닦아서 國力을 充實히 하는 것이 옳다하고 百濟의 請을 拒絶하고 도리어 高句麗와 通함으로 百濟와 新羅의 和好가 깨지고 新羅를 치다가 王이 戰死하였다. 이에 百濟는 더욱 弱하여 熊津에서 支撑치 못하고 都邑을 泗沘(지금의 扶餘))로 옮기고 國號를 南夫餘라 고쳤다.

新羅 法興王때에 佛敎가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이 나라 政治는 君主와 民衆의 階級 差別이 嚴格한 階級制度이며 佛敎는 上下의 差別이 없는 平等思想위에 서는 것이므로 法興王이 佛敎를 펴서 政治的으로는 君民의 階級을 嚴立하고 宗敎的으로는 君民平等을 主唱하여 國民의 一致團結을 圖하니 이 政策이 民心團合에 적지 않은 效果를 거두었던 것이다.

다음임금 眞興王은 新羅 中興의 英傑이라 처음으로 花郞이라는 制度를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무리를 모아서 娛遊하면서 學文과 道德을 討論하기도하고 歌舞로써 즐기기도 하고 멀리 國內의 有名한 山川을 돌아다니면서 몸도 鍛鍊하고 人情도 살피며 그리하는 中에 옳고 바른 사람을 골라서 나라에 薦擧하여 適當한 所任을 맡아보게 하니 當時에 國家를 爲하여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花郞 出身이었고 이것이 新羅의 三韓統一의 原動力이 된 것이다.

三國時代는 中國과 交通하여 서로 和好를 맺는 것이 外交政策의 主要한 하나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便으로는 大陸文化를 輸入하고 便으로는 大國의 聲援을 빌어서 敵對國을 威壓하려 함이니 只今에 外國 承認을 받음과 같은 것이다. 高句麗와 百濟는 自由로 中國과 交通할 수 있으되 오직 新羅는 中國과 交通 할 길이 없으므로 三國의 混戰 地帶인 漢江 一帶地를 占領하고 西海로부터 中國과 交通하는 것이 國家大計의 主要한 一部이었다. 이에 高句麗와 百濟가 漢江 地帶에서 激戰하고 있는 機會를 틈타서 먼저 百濟軍과 聯合하여 高句麗 軍을 쫓아버리고 다시 百濟軍을 反擊하여 드디어 漢州(지금의 서울)로부터 仁川 南陽에 이르는 地域을 占有하니 이로부터 中國에 通하는 길이 열리고 後日 三韓統一의 基礎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로부터 해마다 大陸과의 交通이 끊이지 아니하고 遊學生과 求法僧이 數없이 다녔다. 이때 六伽耶國 中에 駕洛國은 法興王때에 이미 新羅에 合倂되고 眞興王때에 大伽倻國을 쳐서 郡縣을 삼으니 남은 四 伽倻國이 次例로 무너져서 洛東江 流域 地方이 全部 新羅의 땅이 되었고 지금의 伽倻琴은 이 伽倻國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며 眞興王은 또한 北으로 땅을 넓혀서 南沃沮의 中部에까지 이르고 國境 地方에 巡狩하여 碑를 세우니 지금의 慶尙道 昌寧邑과 서울의 北漢山 碑峰과 咸鏡南道의 咸州郡 黃草嶺과 咸鏡南道 利原郡의 摩雲嶺에 있는 巡狩碑가 곧 그것이다.

新羅의 局勢가 갑자기 强盛하여짐을 보는 高句麗와 百濟는 從來의 世讎를 버리고 서로 和好를 맺어서 新羅에 當하게 되니 新羅도 形勢의 危殆함을 깨닫고 中國大陸의 힘을 이끌어 올 政策을 쓰게 되었다.

이때 中國은 隋나라가 亡하고 唐나라가 代身하고 그 임금 太宗은 有名한 英王이다. 唐太宗은 北으로 突闕(터키)무찌르고 西로 吐藩(티베트)과 西域의 여러 나라를 平定하고 南方의 여러 나라도 朝貢하게되어 天下를 統一하였다고 생각되었으나 오직 東方의 高句麗만이 그에게 屈伏하지 아니함으로 高句麗 寶藏王때 (檀紀 二千九百七十七年)에 스스로 軍士 三十萬을 거느리고 風雨같이 몰려와서 이듬해 四月에 이미 遼河를 건넜고 이때 高句麗에는 淵蓋蘇文이 國政을 잡고 굳게 지키었다. 唐太宗은 遼東城과 白岩城을 빼았은 後 安市城을 包圍하고 數個月을 싸웠으나 마침내 떨어뜨리지 못하던 中 高句麗 將帥의 화살이 唐太宗의 눈을 마쳤으므로 唐兵은 戰意를 잃고 또 가을철이 되어 찬바람이 불어오고 糧食까지 다하게 되었다. 이에 唐太宗은 싸움을 斷念하고 도로 돌아가는데 險路와 風雪에 人馬의 犧牲이 길에 가득하였고 그 後 數次로 軍士를 보내어 高句麗를 쳤으나 亦是 高句麗의 猛烈한 反擊으로 失敗하고 돌아갔다.

高句麗와 大陸의 勢力이 半世紀를 두고 겨룬 그 사이에 新羅의 힘이 더욱 커지고 그 때에 또 金庾信과 金春秋의 두 英傑이 나서 하나는 軍事로 하나는 外交로 大 新羅를 세우기에 힘을 다하였다. 百濟는 聖王이 戰死한 怨讐를 期於히 갚으려하여 자주 軍士를 내어 新羅를 치고 高句麗가 또한 新羅의 大陸의 힘을 이끄는 것을 미워하여 壓力을 加하니 新羅는 金春秋를 唐나라에 보내어 救援을 請하였다. 唐太宗이 죽은 後 그 아들 高宗은 어버이의 뜻을 이어 恒常 東方을 版圖內에 넣으려 하던 次에 新羅의 請兵이 있으므로 千載一遇의 好機會라 하여 드디어 百濟를 칠 軍士를 일으켰다.

 

新羅의 三韓統一

처음에 新羅가 唐나라에 請兵할 무렵에 新羅 王이 昇遐하고 金春秋 閼川 두 사람이 王位를 繼承할 候補者가 되었는데 二人이 서로 王位를 辭讓하다가 春秋가 王이 되니 이가 곧 太宗武烈王이다. 이때 百濟는 政治가 어지러워서 民生은 塗炭에 빠지고 여러 番 新羅를 치다가 番番이 敗하니 國勢가 危急하던 次 唐나라 軍士가 바다를 건너오고 新羅 武烈王이 將軍 金庾信을 보내어 大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百濟 將軍 階伯은 決死軍 五千名을 거느리고 黃山으로 나아가 金庾信 軍을 맞아 勇敢히 싸웠으나 衆寡不敵하여 마침내 敗하여 戰死하고 泗泌城이 羅唐 聯合軍에게 떨어지고 百濟 義慈王이 降服하니 이로써 百濟는 三十一王 六百七十八年에 亡하고 (檀紀 二千九百九十三年) 지금 扶餘 錦江岸의 落花岩은 當時 宮女들이 逃亡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哀話를 남긴 곳이다.

唐將 蘇定方은 百濟를 滅한 뒤에 唐나라의 根本 政策에 依하여 그 軍士를 옮겨서 新羅를 치려하였다. 原來 外國의 軍隊를 이끌어다가 利用하는 데는 마침내 그 軍隊의 侵撲을 받는 것이 古今 歷史의 通例라 武烈王과 金庾信은 일직부터 外軍 利用의 危險性이 있음을 잘알고 또 唐나라의 野心을 이미 看破한 터이라 便으로 百濟에 出兵하면서 한편便으로 國內를 굳게 지키니 蘇定方이 그 機微를 알고 敢히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金庾信으로써 名將이라고 稱하는 所以이오 後世에 自國內를 텅텅 비워 놓고 外軍을 이끌어다가 利用한다는 것은 가장 愚昧한 것이다.

唐나라는 百濟의 故地에 熊津 馬韓 等 五 都督附를 두었는데 百濟 遺民들의 光復運動으로 말미암아 唐나라의 軍政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王族 福信이 僧 道琛과 더불어 지금 韓山附近인 周留城에서 軍士를 일으켜 日本에 가 있는 王子 豊을 세워 임금을 삼고 高句麗와 日本에 救援을 請하여 한동안 그 氣勢가 떨치더니 나중에 內部의 勢力 다툼으로 말미암아 福信이 道琛을 죽이고 豊王이 또 福信을 죽여서 마침내 모두가 무너지고 말았다.

唐나라는 百濟를 滅한 뒤에 다시 高句麗를 칠 準備를 始作하였다. 이때 高句麗는 淵蓋蘇文이 죽고 그 아들 男生이 政權을 잡았는데 家族사이에 不和가 생겨서 淵蓋蘇文의 아우 淨士는 十二城으로써 新羅에 가서 붙고 男生 그 아우 男達이 서로 猜忌하여 싸움이 일어나더니 男生은 唐나라에 降服하여 本國의 軍事機密을 일일이 告하였다. 唐나라 임금 高宗은 어버이 太宗의 뜻을 이어 六次나 高句麗를 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으로 平生의 恨으로 여기던 터이라 將軍 李勣을 시켜서 大軍을 거느리고 高句麗로 쳐들어 가게하고 이에 新羅 文武王도 軍士와 食糧을 내어 唐軍을 도왔다. 高句麗는 나라 일이 어지러운 데에 凶年이 겹 들여서 매우 困境에 빠졌으나 그래도 二年동안이나 支撑하다가 마침내 平壤城이 陷落되니 (檀紀 三千一年) 百濟가 亡한 後 八年만이오 그 歷年數는 卒本扶餘 建國으로부터는 八百 餘年이오 朱夢으로부터는 二十八王 七百五年으로 亡하였다.

唐나라는 平壤에 東都護府를 두고 高句麗 故地를 九 都督府로 나누고 高句麗 百姓을 많이 中國으로 옮겨갔다. 高句麗 遺將 釰弁令은 王族 安勝을 받들어 光復運動을 일으키고 新羅가 또 이를 도와서 唐나라에 對抗하였음으로 安東都護府는 마침내 遼東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安勝이 釰弁令을 죽여서 光復運動은 中心을 잃어버리고 安勝은 新羅로 들어갔다.

처음에 新羅가 唐나라에 請兵하여 百濟와 高句麗를 칠 때에는 그 土地를 新羅가 統一할 생각이었으나 두 나라가 亡한 後에 唐나라가 그 땅을 모두 占領하고 新羅는 도리어 唐나라의 威脅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光復運動을 도와서 唐나라와 싸우게 하더니 마침내 文武王은 唐나라와 直接 싸우기로 決定하고 高句麗가 亡한 二年後부터 七年동안 싸움을 繼續하던 끝에 實力으로 唐軍을 몰아내고 大洞江 以南의 땅을 찾아서 비로소 三韓 統一의 業이 이루어졌다.

 

三國의 文化와 經濟

三國에는 國文이 없고 中國의 漢文을 輸入하여 썼으므로 一部 貴族階級은 그것을 利用할 수 있었으나 一般百姓은 아는 者가 極히 적었고 漢文字가 국國語에 맞지 않음으로 일을 記錄할 때에는 漢字의 音과 訓을 빌어서 「밝은달」을 「明期月」이라는 等으로 썼으니 新羅의 鄕歌가 그 例이다. 新羅가 三韓統一뒤에 五六百年의 戰禍로부터 비로소 解放되어 唐나라로 들어가는 遊學生이 해마다 늘어가고 盛唐의 燦爛한 文物을 부지런히 받아들이는 同時에 漢文 熱도 相當히 높아졌다. 그리하여 漢文學者 薛聰은 吏讀文을 만들어 經書를 解釋하여 生徒를 가르치고 從前에는 地名 같은 것이 모두 우리나라 말로 되어 있더니, 新羅 景德王때에 모든 地名을 中國式으로 고치니 「沙熱伊 고을」을 「淸風縣」으로 고침과 같음이오 이 무렵을 前後하여 人名도 차츰 中國式 姓名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의 옛 모습이 漸次 사라지고 中國을 崇拜하는 風習이 생겨서 事大思想이 國民의 머리속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니 이것이 我國 國民思想의 一大 轉換期이다.

佛敎는 我國에 들어온 後 建築, 彫刻, 冶金, 繪畵 等 技術을 傳來 하여 佛敎 廣布와 함께 널리 普及되었으나 끊임없는 戰亂으로 因하여 그 發生하려던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더니 新羅의 統一期를 前後하여 힘있게 發展하였으니 지금 남아있는 皇龍寺의 九層塔, 瞻星臺, 佛國寺, 石窟庵 같은 것이 모두 그 時代의 만든 遺物이다.

土地制度는 三國 鼎立 當時에는 遺族들이 大 面積을 차지하고 奴隸를 부려서 耕作하고 一般農民은 各其 一定한 面積을 가지고 農事지으며 이때는 地가 많고 人口가 比較的 적고 遊食民을 驅하여 强制로 荒地를 開拓하고 農業에 從事케 하였다.

新羅 統一後에 社會가 安定되었으므로 비로소 唐나라의 均田制를 배워서 丁田制를 만들고 土地는 모두 國有로 하고 十五歲부터 壯丁이라 하여 國家로부터 分配받고 六十歲에 國家에 返還하며 功臣遺族들에게 賜田을 주어 土地의 收稅權을 가지게 하였다.

 

渤海의 建國

高句麗가 亡하고 釰弁令等의 光復運動이 失敗에 돌아감에 그 百姓들이 或은 唐나라에 强制로 옮겨지고 或은 新羅로 亡入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北方으로 流入하였다. 이때 滿洲 北部에는 靺鞨族이 살고 七部로 나뉘어 있었으나 그 中에 가장 드러난 것은 松花江 기슭에 粟末靺鞨과 黑龍江가에 사는 黑水靺鞨의 두 部族이 있고 高句麗 當時에는 이들 靺鞨은 高句麗의 屬國이 되어 있었으나 高句麗의 平壤城이 陷落된 뒤에 北方의 모든 城이 唐나라에 占領된 것이 아니어서 靺鞨사람들이 그러한 城에 雄據하고 高句麗 遺民들이 이에 合勢하였다. 그러한지 三十年 동안에 高句麗 遺將 大祚榮은 軍士를 거느리고 여러 番 唐兵과 싸워서 크게 이기니 唐兵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高句麗가 亡한지 三十一年만에 새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震國이라 하니, 그 後에 渤海로 고치니 이가 곧 渤海 太祖이다. (檀紀 三千三十二年)

渤海는 西로 唐나라와 西域의 文化를 받아들이고 東으로 日本과 貿易하여 海賊을 衝動시켜서 唐나라의 山東半島를 친일도 있었다. 처음에 中京 顯德府에 都邑하더니 後世에 上京 龍泉府로 옮기니 이는 吉林城 寧安縣에 있는 東京城이라 하며 지금도 그때의 그 城자리가 남아 있어서 그 周圍가 거의 四十里나 된다.

이때의 疆土는 北은 黑龍江에 이르고 西로 遼海에 미치고 南은 大洞江과 元山 等地로써 新羅와 이웃하고 東은 大海에 닿으니 中國사람들이 海東盛國이라고 稱하였으며 渤海의 建國과 新羅의 統一期가 거의 年代를 같이 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新羅를 南國 또는 南朝라 하고 渤海를 北國 또는 北朝라 하여 이 時代를 우리나라의 南北朝時代라고 한다.

渤海는 滿洲의 넓은 벌판을 차지하고 高句麗의 傳統을 물려받으며 盛唐의 文化를 받아들여서 産業과 文化의 發達이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渤海에는 扶餘族과 靺鞨族이 합쳐서 나라를 세웠으되 어찌한 때문인지 新羅와는 交涉이 거의 없었고 또 靺鞨族은 그 뒤에 오래 남아서 女眞族이 되었으되 扶餘族은 全然 滿洲에 남지 아니하였다.

 

海上發展

 新羅는 北쪽의 一面이 大陸에 接할뿐이오 三面이 바다로 둘려있는 半島國이다. 國民들은 海上에서의 活動이 자못 活潑하여 數많은 遊學生과 商人들이 唐나라에 來往하였고 따라서 唐나라의 海岸地方에는 新羅사람들이 僑居하는 新羅坊이 處處에 생겼다. 이러한 事實은 統一以後 더욱 顯著하여 그 中에서 한 例를 들면 지금의 山東半島의 東南에 있는 石城灣 附近인 登州 文登縣 淸寧鄕 赤山은 新羅에서 唐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그 곳에서 新羅사람들이 세운 法花院이라는 寺刹은 쌀 百石지기의 庄田이 있었으며 說法이 열릴 때에는 新羅사람들의 男女 數百名이 모였다. 當時는 日本사람들이 唐나라에 來往하는 것도 新羅사람들의 힘을 많이 빌렸으니 神文王때에는 唐나라에 가는 日本사람들의 學生과 求法僧이 많이 新羅의 배를 타고 다녔으며 景德王때에는 日本에 가는 唐나라 使臣이 新羅의 배를 利用하였고 惠泰王때에는 唐나라에 가있는 日本사람들이 그 本國과의 通信을 新羅의 船便으로 하였다. 그러나 新羅의 末葉에 이르러 國勢가 떨치지 못하고 때마침 唐나라도 衰弱해지니 黃海위에 海賊이 들끓었고 이는 數百年동안 平和롭게 繼續되던 兩國사이의 交通에 큰 威脅이 될뿐더러 甚至於는 海賊의 떼가 新羅사람들을 잡아다가 奴婢로 팔아먹는 일까지도 있었다. 이때 唐나라에 벼슬살이하던 張保皐가 이러한 事實을 알고 新羅로 돌아와서 王에게 아뢰고 스스로 淸海鎭(지금의 全羅南道 莞島) 大使가되어 軍士 一萬名으로 兩海의 길목을 지키는 同時 猛烈한 海上活動을 始作하여 黃海의 制海權을 掌握하고 唐나라와 日本에 貿易하여 다시금 新羅의 名聲이 天下에 떨쳤다. 그러나 新羅 朝廷의 王位 다툼의 餘波가 여기까지 미쳐와서 張保皐는 임금이 보낸 刺客에게 暗殺을 當하고 빛나던 淸海鎭의 幕이 닫혔다.

 

新羅의 衰亡

新羅의 統一한 後에는 統一하기 以前의 雄大한 氣魄과 善美한 風習이 漸漸 사라지기 始作하니 이것이 사라짐이 곳 衰亡할 前兆이다. 그 理由는

一. 統一以前에는 王位를 서로 賢者에게 辭讓하더니 統一後에는 王位 다툼이 그치지 아니하여 宮中에 殺伐과 流血의 慘劇이 연달아 일어났다,

二. 統一以前에는 政治 指導層이 淸白하고 國史에 忠誠하여 民衆의 模範이 되더니 統一後에는 貴族層이 腐敗하여 日夜 王遊宴을 일삼고 京中에는 歌舞의 音樂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三. 統一以前에는 年幼한 임금이 거의 없더니 統一後에는 自己의 血統에게 富貴와 榮華를 주기 爲하여 幼兒에게 王位를 傳하여 王位爭奪의 端緖를 열었다.

四. 統一以前에는 花郞의 무리와 같은 少年 愛國者가 生命을 아끼지 아니하고 나라를 爲하여 일하더니 統一後에는 國民이 모두 爲政 階級을 미워하여 다시 花郞精神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眞聖女王이 卽位한 後로는 奸臣들이 權力을 잡고 政治를 어지럽혀서 百姓의 怨聲이 더욱 높아가고 또 凶年이 겹 들어서 各地에 盜賊이 蜂起하였다.

이때 梁吉이 北原에서 무리를 모아 가지고 弓裔로 하여금 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甄萱이 完山에서 무리를 모으고 百濟 義慈王을 爲하여 怨讐를 갚는다하고 後百濟라는 나라를 세우고 서西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얼마 지난 後에 弓裔는 스스로 임금이 되어 松嶽郡에 都邑하고 高句麗의 옛 나라를 恢復한다하고 國號를 後高句麗라 하니 이것은 모두 百濟와 高句麗의 遺民들이 그 祖國이 亡한지 이미 數百年에 아직도 祖國光復의 뜻이 머리속에 깊이 뿌리박힌 것을 利用하여 新羅에 反抗케 하고 그 勢力을 擴張하려 함이다. 弓裔는 다시 鐵原으로 옮기고 國號를 摩震이라 하다가 또 泰封이라고 했다. 甄萱은 都邑을 武州로 옮기고 中國의 여러 나라와 貿易하여 힘을 기르는 한편 차츰 東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한동안 半島 안에는 三國이 다시 벌어지니 이를 後三國이라 한다.

泰封 王 弓裔는 松嶽사람 王建을 시켜서 海路로 羅州를 쳐서 빼앗고 後百濟와 中國과의 交涉하는 交通을 끊고 固有한 航海 勢力을 發揮하여 西海의 海賊을 막으니 이때로부터 王建의 名聲이 一國에 떨쳤으니 泰封王의 性質이 暴惡함으로 部下 諸將이 王을 쫓아내고 王建을 推戴하여 임금을 삼으니 이가 곧 高麗始祖이다. (檀紀 三千二百五十一年)

  高麗 歷代表

太祖

惠宗

定宗

光宗

景宗

成宗

戊寅

甲辰

丙午

庚戌

乙亥

壬午

26

2

4

26

6

16

穆宗

顯宗

德宗

靖宗

文宗

順宗

戊戌

庚戌

壬申

乙亥

丁亥

12

22

3

12

37

宣宗

獻宗

肅宗

睿宗

仁宗

毅宗

甲子

乙亥

丙子

丙戌

癸卯

丁卯

11

1

10

17

24

24

明宗

神宗

熙宗

康宗

高宗

光宗

辛卯

戊午

乙丑

壬申

甲戌

庚申

27

7

7

2

46

15

忠烈王

忠宣王

忠肅王

忠惠王

忠穆王

忠定王

乙亥

乙酉

辛未

辛未

乙酉

乙丑

34

5

25

52

4

3

恭愍王

禑王

昌王

恭讓王

壬辰

乙卯

己巳

23

4

4

高麗建國

高麗太祖는 이듬해 松嶽으로 都邑을 옮기고 新羅와 親善을 圖謀하고 後百濟를 制壓하려는 政策을 쓰니 新羅도 後百濟에게 부대끼던 터임으로 高麗와 親하려 하였다. 後百濟 王 甄萱은 이를 보고 秘密히 軍士를 거느리고 新羅에 쳐들어갔다. 新羅 景哀王은 마침 鮑石亭에 나가서 流觴曲水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後百濟의 軍士를 만나 王과 王妃와 大臣들이 모두 慘酷한 變을 당하였다. 甄萱은 王을 해치고 敬順王을 세우고 百姓을 捕虜하여 돌아가니 新羅王은 나아가 싸울 힘이 없고 들어와 지킬 힘이 없으므로 臣下들과 議論하고 高麗에 降服하려하니 太子가 慟哭하면서 어찌 千年 祖國을 한번 싸우지도 아니하고 남에게 주리오 하나 王은 空然히 싸우기만 하면 불쌍한 百姓의 生命만을 없앤다 하고 降服하기로 決定하니 太子는 王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皆骨山(金剛山)에 들어가서 麻衣를 입고 一生을 마치니 이가 곧 麻衣太子이다. (檀紀 三千二百六十八年)

高麗가 新羅를 合倂하던 해에 後百濟에서도 變亂이 일어났다. 甄萱은 네째 아들 金剛을 사랑하여 이를 太子로 세우려 하였음으로 그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父王을 金山寺에 가두고 金剛을 죽인 後에 맏아들 神劍이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이에 甄萱은 憤함을 이기지 못하고 高麗로 亡命하여 神劍을 치기를 請하니 高麗太祖는 甄萱을 厚待하여 後百濟의 人心을 分散시키고 大軍을 거느리고 後百濟를 쳐서 滅하고 이에 半島를 統一하니 그 歷年數는 新羅는 五十六王 九百九十二年이오 後百濟는 二王 四十餘年이었다.

처음에 新羅 統一後에 佛敎와 儒敎가 아울러 行하여 佛敎에는 元曉 義湘 같은 名僧이 나고 元曉가 지은 十門和諍論과 大乘起信論疏는 佛敎의 敎理에 새로운 進步를 가져오게 하였고 僧 慧超는 唐나라에 건너갔다가 다시 길을 떠나 印度와 西域의 여러 나라를 遍踏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지은 往五天竺國傳은 八世紀 무렵의 印度 事情을 傳하는 唯一한 冊으로 世界의 보배가 되어있고 또 慧超 以外에도 新羅의 중으로써 印度를 찾아간 사람이 七名이나 있다고 한다. 儒敎에는 薛聰以外에 金大問 崔致遠 같은 名儒가 났는데 金大問은 國家學을 硏究하여 極盡히 歡待하였고, 渤海의 옛 南京을 收復하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渤海가 亡한 뒤로 滿洲의 大天地는 다시 우리 民族의 땅이 되지 못하고 契丹族과 女眞族의 손으로 들어가 버렸다.

高麗政治

高麗太祖의 政治는 新羅末葉의 弊害에 鑑하여 여러 가지의 改革과 獨創이 있었다.

一. 新羅末에 土地制度가 紊亂하여 처음에 租稅는 土地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던 것을 十分之二三을 받은 까닭에 百姓의 生活이 困難하고 盜賊이 많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었음으로 高麗 太祖는 新羅의 丁田制를 襲用하되 租稅는 十分之一로 定하고 建國後 三年동안은 全部 免稅하였다.

二. 新羅 統一後에 唐나라 文化가 들어옴으로부터 國民이 自主精神을 잃고 事大思想에 醉하는 傾向이 一世를 風靡하였음으로 高麗 太祖는 中國과 我國은 人性이 各異하고 風土가 不同하니 모든 制度와 文物은 반드시 中國과 同一히 할 必要가 없다하여 事大의 風을 警戒하였다.

三. 太祖는 同族인 渤海가 契丹에게 亡한 뒤로 契丹을 無道한 나라라 하여 몹시 미워하고 契丹이 使臣을 보내어 和親할 것을 請하되 듣지 아니하고 北方 經營에 專念하였다.

四. 從來 中國에는 年號制度가 있어 自主獨立國인 天子는 年號를 쓸 수 있으되 屬國은 쓸 수 없었는데 三國時代에 가장 强盛하던 時代에는 우리나라도 中國과 對等한 天子國이라 하여 年號를 썼으니 高句麗 廣開土王의 永樂, 新羅 法興王의 建元같은 것이 그 것이다. 新羅 統一後에 唐나라에 附麗하여 唐나라 年號를 쓰더니 太祖 建國後에 우리나라도 完全한 自主獨立國가라 하여 年號를 세워 天授라 하였다.

五. 三國時代以前에는 遺族만 姓이 있고 一般 庶民은 名만 있고 姓이 없더니 太祖 建國後에 全國民에게 一齊히 姓을 領賜하고 오직 新羅와 後百濟의 遺民이 高麗에 反抗하는 者에게 麻, 牛, 豚, 象等의 獸畜名을 賜하여 一般 國民과 暸然하게 區別하였으니 後日 李朝時代의 宰相 尙震은 象姓의 昇格이라 한다.

六. 太祖는 僧 道詵을 先生으로 모시고 그의 말에 依하여 各地에 寺刹을 創建하고 官闕을 지으니 道詵은 唐僧 一行의 風水學說을 배워서 我國 風水地理學의 元祖가 된 者로써 世人이 龍子라 稱하고 이때로부터 明堂 禍福의 思想이 國民의 머리속에 뿌리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高麗 太祖 政治는 我國史上 重要한 一時期를 劃하였고 三國統一後 오랜 동안의 政治腐敗期를 지낸 까닭에 從前의 濃厚한 風俗은 많이 없어졌으나 高麗太祖의 모든 施策이 適宜함을 얻었으므로 國民의 氣風이 眞實하여 國家에 戰亂이 있는 때에 貴族의 子弟가 먼저 槍劍을 집고 先陣에 나섰으며 官吏들이 그 地位를 자기보다 年長하고 또 賢能한 者에게 辭讓하는 일이 있으니 太祖가 崔凝으로써 廣評侍郞을 삼으니 凝이 말하기를 臣의 同僚 尹逢이 臣보다 十年을 年長하니 請컨대 먼저 除授하소서 하고 辭讓하니 太祖가 大喜하여 그 禮讓함을 稱讚한 것이 그 一例이다.

社會階級

高麗는 新羅의 社稷을 물려받음과 함께 新羅의 貴族들도 이를 받아드려서 王代系統의 사람들과 함께 高麗의 特權階級을 이루었다. 그 後 渤海가 亡하여 그 王族 貴族이 많이 高麗에 들어와서 이에 合치고 또 佛敎로써 國敎를 삼은 關係로 僧侶들도 이 階級에 參與하게 되었다. 이러한 特權階級밑에 庶民階級이 있어서 産業을 맡아보았으며 다시 밑으로 여러 가지의 賤人 階級이 있어서 그 中에서도 公私奴婢의 奴隸階級은 온갖 虐待를 받고 한 낟 財物로서 買賣되는 風習이 있었으며 또 그들의 子孫은 代代로 奴隸가 되는 것이다. 庶民階級이라 함은 農民, 商人, 工匠, 兵卒 等으로서 그 中에서도 農民은 가장 많이 生産勞動에 從事하고 또 賦役과 兵役을 맡아 하였다. 이들 中에는 契丹 女眞 日本 等의 歸化民이 많았다.

高麗의 階級制度는 대단히 嚴格하여 人世의 戶籍을 考覽하여 賤類에 牽連이 있으면 그 사람을 官吏로 쓰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建國 初에 功臣들은 新羅와 後百濟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奴隸를 삼으니 그들의 不平과 怨望이 적지 아니함으로 光宗은 奴婢按驗法을 만들어서 奴婢의 文書를 새로이 審査하고 奴婢와 奴主間의 是非를 裁判하여 抑鬱한 奴婢들은 解放시키더니 이번에는 奴主들이 不平이 일어나서 이미 贖良한 사람들은 奴主의 所請에 따라서 다시 奴婢를 만든 일도 있었다.

高麗는 佛敎와 함께 儒敎도 發達하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儒學은 經書를 줄기로 하여 儒學의 根本思想을 工夫하는 일이 적고 科擧에 必要한 科目에 置中하는 傾向이 있었다. 科擧法은 光宗때에 中國사람 雙冀가 歸化하고 그의 建議를 따라서 비롯하였는데 이때의 科擧 三은, 一은 進士科이니 文藝를 主로 하여 試驗함으로 製述科라고도 하며, 二는 明經科이니 經義를 主로 하여 試驗하며 三은 醫卜科이니 醫學 天文 陰陽 地理를 試驗하더니 그 後에 明法科 進士 明經等科에 合格한 사람들은 貴族階級에 參與하게 되고 醫卜 法 等科는 國家機關의 事務와 技術을 맡아보는 것이었다.

建設事業

土地制度

土地制度는 太祖가 新羅의 舊制를 襲用할 것을 原則으로 定하고 萬事 草創中에 있어 그 細則을 定치 못하더니 五世 景宗때에 이르러 비로소 全國의 土地를 모두 公田으로 하고 均田制에 依하여 授田收田의 法을 確立하였다. 그 法은 朝廷의 文武百官으로부터 府兵閑人(官吏에서 물러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身分과 職位에 따라서 農事지을 땅과 柴草(땔감)로 쓸 土地를 아울러 주니 이를 田柴科라고 한다. 田柴地는 子孫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오 그 받은 사람이 死亡하거나 退職하면 國家에 返還하는 것이 原則이며 府兵은 二十歲에 田을 받고 六十歲에 이르러 도로 바치는 法이었다. 一般 田柴科外에 功蔭田柴科란 것이 있어서 國家에 功勳을 세운 사람이나 또는 그 子孫에게 주어서 世襲으로 認定하였으며 또 그밖에 公廨田(官廳의 經費를 쓰기 爲한 것) 寺院田(寺院의 經費를 爲하여 주는 것) 內桂田(王室의 財源으로 쓰는 土地) 祿科田(官吏들의 生活을 돕기 爲하여 주는 것)等이 있었다. 이리하여 土地는 모두 國有로하고 租權을 가지고 있어 土地의 買賣를 禁하고 그 兼倂의 弊를 防止하였다. 農民은 十六歲가 되면 반드시 土地를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子孫이 出生하는 때 그 出生을 登錄하여야 그 地를 받는 關係로 戶籍에 빠지는 사람이 없고 官吏가 罪를 지으면 免職이 되는 同時에 그 받은 바의 土地를 빼앗겨서 生活의 길이 끊어지게 됨으로 官吏들이 모두 일에 充實하고 淸廉하였으니 이것이 高麗初期 國勢가 隆盛한 所以이다.

 二. 成宗의 治積

六世 成宗에 이르러 高麗一代의 모든 制度가 비로소 完備되니 太祖가 三國 統一後 四十餘年의 오랜 歲月을 지나서 겨우 法典이 完成되고, 또 高句麗의 故地를 收復할 北方 經營도 進捗되지 못함은 遲遲함이 없지 아니하나 이렇게 遲遲함은 新羅와 後百濟의 遺民이 不斷히 反抗運動을 일으켜서 國內가 安定치 못함으로 因함이라고 볼 것이다.

成宗은 佛敎의 外에 特히 儒敎를 崇尙하여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根本을 삼고 外方의 優秀한 子弟를 뽑아 國子監(지금의 大學)에서 공부하게 하고 그 中에서 뛰어난 者를 골라서 다시 宋나라에 遊學시켰다.

그리고 外方의 十二牧에 經學博士 醫學搏士를 보내어 敎育과 醫療를 맡아보게 하였다.

또 經濟政策에 힘써서 農事철의 賦役을 禁하고 兵器를 걷어서 農具를 만들어 農業을 獎勵하니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풍장 같은 農樂이 이時代에 처음으로 생긴 것이라 하며 免災法을 磨練하여 災難을 입은 者에게 稅納과 賦役을 減하는 準例를 세우고 備荒策으로 州와 府에 義倉을 두어 穀食을 쌓고 兩京과 十二牧에 常平倉을 두어 穀食과 布木을 貯蓄하였다가 農事의 形便을 따라서 物價가 높으면 常平倉의 物品을 歇하게 放賣하여 物價를 내리게 하고 物價가 너무 떨어지면 常平倉에서 비싸게 買入하여 物價의 調節을 圖謀하여 國民의 生活을 安定시켰다.

또 特異한 制度로 寶라는 것이 있으니 寶는 지금의 契의 起源으로써 一定한 財團을 가지고 거기서 생기는 利息으로 目的하는 事業을 經營하는 것이니 弊難에 빠진 사람들을 救恤하기 爲한 濟危寶, 敎育을 目的으로 하는 學寶 같은 것이 그 것이오 이 機關은 한便으로는 事業 經營體가 되고 한便으로는 庶民金融 機關이 되어 國民의 經濟 生活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때의 物品 買賣에는 貨幣를 쓰지 아니하고 麻布와 米穀으로 貨幣의 代身으로 썼다. 그러나 社會가 發達하고 人口가 늘어서 買賣는 漸次 많아지는데 麻布는 重量이 무겁고 濕氣와 煙氣에 品質이 傷하기 쉽고 또 鼠耗도 적지 아니하여 큰 不便을 느끼게 되었다. 外國과의 通商貿易에는 布貨 以外에 地銀을 쓰고 一部에는 宋錢이 들어와서 流通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極히 小數에 不過하였다.

이에 成宗은 비로소 銅을 原料로 하여 錢貨를 만드니 이것이 我國 鑄錢의 始이다. (檀紀 三千三百二十九年 成宗 十五年) 그러나 貨幣는 반드시 市場을 通하여 流通되는 것이오 萬一 市場이 없으면 그것으로써 生活 必需品을 買得하기에 如干 不便이 아니라 이 時代는 市場 數가 적고 또 民間에서 錢貨를 信用치 않는 關係로 널리 쓰이지 못하고 如前히 布貨로 쓰게 되었다.

契丹關係

이때 中國大陸에는 宋나라가 있었고 滿洲에는 契丹이 있어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原來 我國은 滿洲의 背後에 있는 强國임으로 滿洲에 터를 잡고 있는 나라가 中國大陸과 다투고자하면 먼저 背後의 危險을 調整하지 아니하고는 中國 方面으로 全力할 수 없는 것임으로 三國時代 以來로 中國方面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我國의 兵을 받음이 通例이었다. 契丹이 渤海를 滅한 後에 鴨綠江 左右의 地에는 女眞族이 살았음으로 契丹과 我國은 直接 부딪히는 일이 없고 또 宋나라가 契丹을 칠 때에 我國에 援兵을 請하였으되 我國에서는 섣불리 이에 應하지 아니하였음으로 契丹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關涉이 없었다. 그러나 契丹은 어느 때든지 我國을 制壓치 아니할 수 없는 處地였음으로 成宗 十二年에 (三千三百二十六年) 空然한 트집을 잡아 大軍을 보내어 北邊에 쳐들어 왔다.

이때 高麗는 三韓統一後 近 六十年間 兵革을 알지 못하여 人心이 해이한 터이라 契丹 兵이 들어옴을 보고 政府 高官中에는 北邊의 땅을 割讓하고 和親하자는 議論까지 있었다. 이때 徐熙는 割地論을 크게 反對하여 말하되 우리나라는 東方의 大國이오 또 契丹을 막을만한 힘도 있는데 땅을 버려서 和親함은 國家의 恥辱이오 더욱이 高句麗의 故地를 收復하려는 우리나라로서 어찌 輕率히 割地論을 말하랴 一戰한 後에 모든 일을 處理하여도 늦지 아니하다고 하여 스스로 軍士를 거느리고 나가 싸워서 敵의 氣勢를 꺾어놓고 契丹將帥 蕭遜寧을 찾아가서 저들이 까닭 없이 事端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侵犯함을 詰難하였다. 蕭遜寧은 高麗는 新羅를 물려받은 나라이니 高句麗의 옛 땅은 全部 契丹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徐熙는 우리나라는 高句麗의 復興임으로 國號를 高麗라 한 것이니 땅의 境界를 말하면 契丹은 本是 高句麗 땅이니 우리가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抗辯하였다. 蕭遜寧은 그러면 高麗는 무슨 까닭으로 가까운 契丹과 사귀지 아니하고 멀리 宋나라와 親하냐 하니 이것은 우리나라와 宋나라의 關係를 끊고 自己 나라와는 親善하여 後顧의 걱정을 없애려는 心算이다. 徐熙는 우리도 契丹과 사귀고자하나 中間에 女眞의 땅이 가로 놓여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니 鴨綠江 以南의 땅을 우리에게 달라하여 同意를 얻고 서로 和親을 맺고 契丹軍이 물러간 뒤에 翌年부터 軍士를 내어 郭州 龜州등 여러 城을 쌓으니 이것이 이른바 江東文城의 基礎가 된 것이다. 그러나 契丹은 이번 和親으로써 滿足치 아니하고 機會만 있으면 다시 高麗를 侵犯하려 하던 次에 마침 高麗에 內亂이 있어서 康兆가 穆宗을 害하고 顯宗을 세우니 契丹이 康兆의 罪를 묻는다 憑藉하고 三十萬의 軍士로 쳐들어 왔다. 이때 臣下들 中에 和親하자고 主張하는 者가 있었으나 姜邯贊이 이를 反對하고 顯宗 王을 羅州로 避難하게 하고 楊規로 하여금 契丹軍을 맞아 싸우니 契丹軍은 掠奪과 暴虐을 마음껏 하다가 마침내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우리나라의 貴重한 文獻이 많이 불타버렸으니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古記三韓, 古記高句麗, 留記新羅 百濟의 史記 等 史籍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모두 이와 같은 兵火에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三國時 以前의 일을 記錄한 史書는 三國史記 三國遺事 기타 中國 書籍에 散見하는 것뿐이다. 契丹은 高麗에 對한 野心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 後 八年만에 (顯宗 九年 檀紀 三千三百五十一年) 다시 앞서 쌓은 六城을 달라는 핑계로 十萬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이에 上元帥가 山골에 伏兵을 두어 契丹軍을 무찌르고, 敵兵이 길을 避하여 松都로 내려오는 것을 大洞江에서 襲擊하여 敵兵을 萬餘名을 죽이니 契丹軍의 氣勢가 한목 꺾이었다. 이듬해 二月에 敵軍의 大部隊가 龜州를 지나는 것을 姜邯贊이 東門 밖에서 맞아 싸워서 크게 깨트리고 逃走하는 敵을 追擊하여 이를 殲滅하니 以後로 契丹은 다시 高麗를 侵犯하는 일이 없었고 지금까지 우리 國民은 姜邯贊을 乙支文德과 함께 名將으로 竝稱하고 있는 것이다.

滿洲에서 契丹의 勢力이 衰弱해지고 鴨綠江 左右에 있는 女眞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한 틈을 타서 高麗는 以南의 地를 漸次 收復하고 德宗은 柳韶를 시켜서 女眞을 防備하기 爲한 城을 쌓으니 鴨綠江 於口인 義州郡 光城面 外洞으로부터 始作하여 咸鏡南道 定平郡의 鼻白山을 거쳐서 咸州郡 都連逋에 이르기까지 무릇 千餘里이니 이것을 千里長城이라 하며 十二年동안의 功力을 기우려 靖宗 十年에 完成하였다. (檀紀 三千三百二十四年)

成宗때에 地方으로 나누어 京畿의 外에 關內道-(楊州)- (廣州)- (海州), 中原道-(忠州)- (淸州), 河南道-(公州) 等, 江南道-(全州)等, 嶺南道-(尙州)等, 山南道-(晉州)等 嶺東道-(慶州)等, 海陽道-羅州 昇川 順川) 朔方道-(春州 溟州)等, 浿西道-(西京)等의 十道로 만들었으니 顯宗때에 이르러서 北邊이 아직 定치 못하였음으로 다시 地方의 區劃을 고쳐서 京畿의 外에 楊廣道-(지금의 京畿道의 一部와 忠淸南北道) 慶尙道 全羅道, 交州道-(지금의 江原道의 一部) 西海道-(지금의 黃海道)의 五道를 두고 北邊에는 東界와 北界를 두니 東界는 또한 東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江原道 北部와 咸鏡南道의 南部이오 北界는 또한 西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平安南北道의 大部分이다. 이와 같이 北邊을 西界로 定한 것은 이 地方이 契丹및 女眞과 相接하는 땅이오 또 앞으로 北進하려는 計劃이 있기 때문에 暫定的으로 定해 놓은 行政區域이다.

 

儒敎와 佛敎의 文化

高麗 建國 以後에 儒敎가 들어와서 官家에서 세운 敎育機關에 依하여 相當한 發達을 이루고 이러한 官學外에 私學이 있어서 한때 크게 떨치었고 學生들은 官學보다도 私學에 가기를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官學에서보다 私學에서 더 많이 人才가 났다.

高麗時代의 黃金時代라고 稱하는 文宗때에는 有名한 私學이 十二個나 있어서 거기서 工夫하는 學徒들은 十二門徒라하고 그 中에서도 海東孔子라고 稱하는 崔沖의 門이 가장 이름이 높고 當時 國家의 드러난 人物은 大槪가 이 崔門 出身이었고 崔沖의 諡號가 文憲公임으로 文憲公徒라고 稱 하였다.

高麗는 佛敎로써 國敎를 삼고 政治制度 같은 것이 佛法에 因緣되지 아니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一般 風習에도 모두 佛敎의 精神이 들어 있었다.

高麗社會의 特殊한 風習으로는 燃燈會와 八關會가 있었으니 이는 國家祭典으로써 우리나라 古代社會에서 널리 行하여진 迎鼓 東盟 舞天 等의 風俗이 佛敎의 影響을 받아서 얼마쯤 變化하여진 것이다. 燃燈은 佛을 섬기는 것이오 八關은 天神을 비롯하여 自然神을 섬기는 것이니 둘 다 燈불을 燦爛히 켜고 온갖 飮食을 베풀며 그 사이에 춤추고 노래하여 全國民이 함께 즐기고 同時에 天地神明을 즐겁게 하여 豊年이 들고 天下가 和平하기를 빌고 感謝하는 것이었다.

成宗때에는 僧 三十餘名을 宋나라 抗州에 보내어 그 곳 永明寺 智賢禪師에게 禪宗의 敎理를 배워 오고 그 外에도 佛法을 닦으러 大陸에 건너가는 僧이 數없이 많았다. 그 中에서도 高麗 佛敎界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大賢國師 義天이다. 義天은 文宗의 넷째 아들로써 十一歲에 出家하여 僧이 되고 後에 宋나라에 건너가서 佛經 千卷을 求해 오고 또다시 宋나라와 遼나라(契丹)와 日本에 사람을 보내어 四千卷을 求해와서 興王寺에 敎藏都監을 두고 佛經을 박아내니 一千十部 四千七百四十卷이며 이를 興王寺版 大藏經 또는 義天의 續藏經이라 한다.

이보다 앞서 成宗때에 佛法의 힘으로 契丹의 軍士를 물리치려 하여 佛經 版刻을 始作하여 大藏經 一千七十六部 五千四百八十卷을 박아내고 그 後 文宗때에 빠진 佛經 一千卷을 박아내고 여기에 興王寺版을 合치면 그 當時의 世界에서 가장 完備한 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國寶가 後日 蒙古亂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高宗이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努力으로 이를 새로 만드니 이것이 지금 慶尙道 海印寺에 있는 有名한 八萬大藏經이다.

佛敎가 퍼짐과 함께 거기에 따르는 美術工藝도 크게 發達하여 我國史上 美術工藝의 黃金時代를 이루었고, 다만 三國時代는 人性이 渾厚함으로 모든 製品이 雄大한 氣象이 나타나고 있음에 比하여 高麗時代의 人性은 渾厚한 風이 적고 오직 眞實하였음으로 모든 製品에 優雅한 맛은 有餘하나 雄大한 氣象은 적다고 한다.

 

中期의 隆盛

文宗의 世는 建國한지 이미 一百三十餘이오 外로는 北邊에 千里長城이 쌓인 後에 國境에 큰 일이 없고 內로는 文化가 發達하고 道路를 열어서 交通을 便利하게 하니 勿論 當時의 交通은 지금과 같이 어떠한 山谷泰山이든지 牛馬車가 通行할 수 있는 道路가 아니오 所謂 平地의 道路도 겨우 牛馬車가 通行할 수 있음에 不過하고 山路에는 步行人이나 駄牛馬가 行할 程度이니 지금 各地에 남아있는 舊路 廢路가 곧 그 時代의 遺物이다.

그러므로 그 當時에는 軍士가 行陣할 때에는 軍士들이 무거운 食糧 戰具같은 것을 지는 外에 駄牛馬의 列이 千里 二千里를 잇닿았다 한다. (그러나 文宗때는(?) 成宗 以後 各 主要 道路에 비로소 院을 두어 行人의 宿所로 쓰는 政策을 그대로 이어오고 山谷驗山에도 大槪 道路를 만들어 從前에 比하여 交通이 훨씬 便利하여졌다.

建國 初期로부터 新羅와 後百濟의 遺民이 恒常 反抗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음으로 文宗은 外方에서 反抗하는 思想이 있는 有力한 鄕吏의 子弟를 서울에 와서 머물게 하니 이것을 其人이라 하고 其人制가 생긴 以後로 外方의 人心이 漸次 安定되고 이 其人制는 後日의 京主人의 根源이 된 것이다.

文宗의 世는 高麗 一代를 通하여 가장 좋은 太平時節을 이루었고 高麗도 三國時代의 王位 繼承의 좋은 法을 받아 幼君을 세우지 아니하고 王位를 아들에게만 傳함이 아니라 兄弟 相傳하는 뜻이 적지 아니하더니 宣宗이 그 아들 獻宗에게 王位를 傳하니 獻宗은 黃口 幼兒라 國政을 堪任할 能力이 없고 모든 行政權이 그 臣下의 손에 依하여 左右되니 王의 叔父 肅宗이 政府를 顚覆하고 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王이 되니 이것은 李朝때의 端宗 事變과 같은 것이다.

貨幣制度는 成宗이 처음으로 創設한 뒤로 잘 行치 못하였고 大賢國師 義天 같은 이도 鑄錢의 實行을 主張하니 肅宗이 王이 된 後로 이 政策을 强力히 推進하여 鑄錢官을 두고 鑄錢을 만들어 主要都市에서 쓰게 하니 이때의 錢面에는 海東通寶를 비롯하여 海東重寶 東國通寶 東國重寶 三韓通寶 三韓重寶等으로 쓰이었으며 또 一斤重의 銀으로 我國地形을 본뜬 甁을 만들어서 돈으로 쓰니 이 銀甁은 그 模樣을 좇아서 濶口라 하였으며 이 外에도 碎銀 小銀甁 같은 것도 쓰였다.

肅宗이 貨幣制度를 確立하려고 한 것은 當時 産業이 發達하여 國內에 物化의 流通이 많을 뿐만 아니라 外國貿易이 또한 늘어가는 까닭이었다. 이때 高麗는 大陸勢力과 恒常 武力 交涉을 가지고 있으되 한 便으로 碧瀾(禮成江)나루를 通하여 宋나라와 黑水(지금의 北滿州) 日本 琉球(오끼나와 부근) 暹羅(타이랜드)等 여러 나라와 또 멀리는 大食國(中東地方)의 商人들과 平和로운 貿易을 繼續하였고 저쪽에서 들어오는 物件은 主로 비단, 冊, 文房具, 藥材, 香料, 茶, 玳瑁, 犀角 等이며 이쪽에서 나가는 것은 銅, 銀, 布木, 人蔘, 牛黃, 虎皮, 紙, 花紋席, 螺鈿, 磁器 等이었다. 高麗磁器는 天下의 絶品으로서, 또 高麗의 繭紙는 高麗 特産品으로써 當時 宋나라에서 大歡迎을 받았던 것이다.

西南海中에 있는 耽羅는 지금의 濟州道인데 古初에 兄弟 三人이 石穴中에서 살더니 그 後에 女子와 牛鳥와 各穀 種子를 실은 배가 海邊에 와서 닿음으로 三人이 女子를 分娶하고 姓은 各各 高 夫 良으로 定하고 農事지으니 人口가 次次 늘어가서 한 獨立國家가 되었고 三國時代에 비로소 百濟와 通하였다. 新羅統一 後로부터 高麗에 이르기까지 한 屬國으로 朝貢하고 있더니 肅宗은 이를 內地와 同一하게 만들고 高麗의 政治를 펴기 爲하여 國號를 廢하고 郡을 만드니 이때로부터 耽羅는 國家에서 보내는 官吏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人性이 强悍하고 從前의 王子 系統이 地方의 勢力을 가지고 있어 國家에 對하여 反亂이 자주 일어났다.

高麗初期로부터 國家의 運命을 豫言한 所謂 秘訣이 流行하였는데 그 秘訣에 木子가 得國하여 漢陽에 都한다는 말이 있었음으로 李氏 姓을 가진 者가 陰謀를 꾸미는 일이 種種있었다. 肅宗은 漢陽(지금의 서울)에 李本을 많이 심고 長成함을 기다려 尹瓘으로 하여금 斫伐케 하여 李氏의 王氣를 制壓한다고 한 일까지 있었으니 高麗의 政治는 秘訣의 힘의 作用이 적지 아니하였고 이 秘訣은 李朝의 鄭鑑錄과 같은 것으로서 當時 高麗의 民間에도 秘訣의 힘의 影響이 가장 컸던 것이다.

 

女眞關係

女眞은 처음에 渤海國을 構成한 靺鞨의 一族이라 渤海가 契丹에게 亡한 뒤에 女眞族이 南滿州 方面에 居住하는 者는 契丹에게 歸化하여 熟女眞이 되고 白頭山을 中心으로 한 北滿州와 沃沮故地에 居住하는 者는 恒常 契丹에 反抗하였음으로 이를 生女眞이라 한다. 우리나라와 隣接하고 있는 女眞族은 모두 生女眞으로서 貿易과 侵略을 되풀이하였으나 高麗를 두려워하는 氣色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哈爾濱(하얼빈) 附近의 完顔 部에 烏雅束이 나서 그 勢力이 무척 늘어서 이웃의 여러 部族을 合치고 그 힘이 우리나라 國境에까지 미치니 烏雅束의 先世는 高麗 東北面의 和州(지금의 永興)사람 金某임으로 그들은 高麗를 父母之國이라 肅宗 九年 正月에 咸州(지금의 咸興)의 女眞 部落을 統合한 烏雅束의 部下는 國境을 넘어서 定平에 들어왔다. 이에 高麗에서는 林幹을 보내어 치다가 失敗하고 다시 尹瓘을 代身 보내었으나 또한 功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敵을 宥和하여 돌려보내었다. 그러나 尹瓘은 이 싸움에서 女眞이 어찌하여 强한가를 알았다. 그것은 高麗의 步兵에 對하여 敵은 모두 騎兵이어서 처음부터 對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尹瓘은 이에 神騎隊라는 騎兵隊를 만들어서 猛烈한 訓練을 시켰다. 그러던 中 肅宗이 昇遐하면서 遺言으로 지금의 女眞의 勢力을 꺾지 아니하면 반드시 後患이 있으리라 하여 女眞을 치기를 付託하였다.

肅宗 二年에 (紀元 三千四百四十年) 女眞이 다시 國境을 侵犯함으로 尹瓘이 十七萬의 軍士를 거느리고 長城을 넘어 가서 敵의 巢窟 一百 三十餘所를 무찌르고 英州, 雄州, 福州, 吉州, 咸州, 公嶮鎭, 宜州, 通泰, 平戎의 九城을 쌓으니 이것이 有名한 東北面 九城이다.

九城의 땅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 確實히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或은 公嶮鎭을 지금의 北間島의 땅이라 하고, 或은 吉州를 지금의 咸鏡北道 吉州라 하여 마치 九城의 땅이 豆滿江의 左右에 까지 미침과 같이 말하는 일도 있으나 當時 戰爭한 日數와 距離 等으로 생각하여 보면 지금의 咸鏡南道의 北部 海岸地方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 해로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女眞은 高麗에 怨讐를 갚고 九城을 恢復하려하여 쉴 사이 없이 反擊을 되풀이하고 또 完顔部가 數萬名으로서 英州 雄州 吉州等을 차례로 包圍하였으나 成功치 못하였다. 이때 女眞은 九城 等地에서 쫓겨나간 部落이 安住할 곳을 잃어서 몹시 疲勞하고 高麗도 또한 九城의 땅이 驗하여 지키기 어렵고 또 距離가 멀어서 모든 軍需物을 輸送하기 어려워서 國力이 疲弊하였다. 이에 女眞은 使臣을 보내어 와서 九城을 返還하여 달라고 哀願하여 曰 만일 九城을 돌려주면 以後로는 永遠히 高麗를 父母의 나라로 섬기고 子子孫孫이 朝貢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盟誓하고 돌 자갈 하나라도 地境을 넘어서 던지지 아니 하겠다고 굳게 다짐함으로 高麗는 그들의 所願을 들어주기로 하고 官員을 보내어 女眞 面長들로 하여금 咸州城 밖에 壇을 모으고 하늘에 盟誓케 한 다음 九城으로부터 次例로 물러나니 이로써 여러 해 동안 애써 이루어진 (東北面의 計劃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返還은 效果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니 後日 高麗와 女眞과의 交涉에 큰 影響을 끼쳐서 오랫동안 不安하던 東北面의 國境이 이로부터는 平靜하여졌고 烏雅束의 아들 阿骨打가 女眞國을 크게 만들어 國號를 金이라 하고 契丹 卽 遼나라를 滅하고 다시 中國에 쳐들어가서 宋나라를 楊子江 南쪽으로 몰아내서 東洋 天地를 뒤흔들었건만 高麗에 對하여는 恒常 友好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擇里志라는 글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滿洲에서 일어난 國家는 大江과 大野를 가지고 있어 그 氣風이 雄大함으로 高句麗와 渤海는 能히 中國大陸과 雌雄을 다투었고 渤海 遺族인 金나라는 能히 中國에 들어가서 帝王노릇을 하였는데 鴨綠江 以南에 국局蹐, 跼蹐하고 있는 國家는 千里의 江과 百里의 野가 없기 때문에 겨우 그 封域을 僅守할 뿐이라는 뜻을 썼는데 地理와 國民氣風의 關係가 있고 없는 것은 別問題로 하고 어쨌든 우리 民族이 滿洲를 잃은 後에 그 勢力이 갑자기 微弱하여진 것은 事實이다.

 

繼生하는 叛亂

肅宗의 아들 仁宗은 나이 어리고 그 外祖父 李資謙이 權力을 잡고 스스로 높은 벼슬에 나아가서 國事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九城 싸움에 나가서 功을 세우고 돌아온 拓俊京을 心腹으로 부려서 온갖 暴虐한 일을 다 하였다. 그는 自己에게 反對하는 사람을 모조리 放逐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고자 하여 王을 죽이려 하니 이것은 木 子 得國 秘訣에 因함이라 그러나 資謙은 마침내 敗하고 말았다. 이 亂離에 宮闕이 불타 버리고 서울이 쓸쓸하게 됨에 僧 妙淸과 詩人 鄭知常 等을 中心으로 西京에 都를 옮기고 임금을 皇帝라 일컫고 年號를 세우자는 意見이 일어났다. 그러나 朝廷에서는 그 意見을 反對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妙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西京에서 亂離를 일으켜 새로 나라를 세워 國號를 大爲라 하고 年號를 夫開라 하니, 仁宗은 金富軾으로 하여금 軍士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그 이듬해에 平定하였다.

妙淸의 亂에 對하여 옛날 史書에는 妙淸으로써 妄誕한 사람이라 하고 그 亂을 일으킨 것은 政權 다툼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러 學者들은 妙淸으로써 金富軾을 中心으로 한 事大主義에 對抗하는 革命家라 하여 是非가 定치 못하고 있다. 當時의 時勢를 보건대 朝廷안에는 中國을 祖國처럼 여기는 事大主義 思想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니 政治家中에는 거기에 不滿을 품은 者 적지 아니하였고 妙淸도 그 中의 一人이었다. 이 事大主義의 革破를 主張함에는 그것을 主張할만한 人物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나 妙淸은 事實로 妄誕한 사람이오 風水地理說로써 王의 마음을 이끌고 鄭知常이 또한 陰陽說로써 거기에 附同하였으며 西京에 都邑을 옮기려 함은 西京에 妙淸의 勢力이 이미 扶植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妙淸이 眞心으로 國家의 百年大計를 爲하는 正人 志士가 아니오 다만 勢力 다툼을 爲한 術策에 不過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高麗는 太祖 以來로 右文政策을 쓰고 武人을 낮추어보게 되어서 武人들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더니 毅宗때에 이르러 王은 本是 氣質이 懦弱하여 近侍와 文臣들만을 가까이하고 그들이 또한 王의 사랑을 믿고 放恣한 일이 많아서 武臣들의 感情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이러한 武臣들의 不平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鄭仲夫 等이 亂을 일으켜 近侍와 文臣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집을 헐어버리고 王을 몰아내고 王의 아우를 세우니 이가 明宗이다. 이 亂離가 庚寅年에 第一次로 일어나고 癸巳年에 再次 일어났음으로 이를 庚癸之亂이라 한다. 鄭仲夫는 나라의 權勢를 한 손에 잡고 朝廷의 重要한 벼슬에서 外方의 所任에 이르기까지 全部 武臣이 맡아보게 되었다.

文臣의 世上은 비록 無力하나마 傳統과 權威를 세우고 그를 中心으로 하여금 움직여 나갔지만 武人의 世上은 그러한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힘으로 움직였다. 鄭仲夫는 權勢를 잡은지 十年만에 慶大升에게 죽고 大升은 多幸이 天命을 마쳤으나 그때 서울 안 盜賊은 모두 武臣의 部下라고 할 만치 百姓들의 怨聲이 적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죽은 後에 將軍 李義旼이 權勢를 잡고 갖은 暴虐을 다하여 木子 得國의 秘訣을 利用하여 叛逆을 圖謀하더니 崔忠獻이 義旼을 죽이고 그의 三族과 종들까지도 모조리 잡아 죽이니 國家의 모든 權勢가 忠獻에게 돌아갔다. 忠獻은 明宗을 가두고 그 아우를 세우니 이가 神宗이다. 忠獻은 私兵을 길러서 自己를 守護케 하니 그 勢力이 官軍보다 억세고 나라의 政治를 자기 집 都房에 앉아서 處決하니 이것을 都房政治라하고 都房政治가 생긴 後로 朝廷은 빈집이 되고 官軍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아니하고 그가 權勢를 잡은 二十四年間에 두 임금을 내치고 내 임금을 세우니 柔弱한 王들이 또한 忠獻의 脾胃를 맞추는 수밖에 다른 道理가 없었다.

武臣의 亂離를 거쳐서 그들의 跋扈로 遺族社會의 묵은 傳統이 무너지고 社會가 힘으로 움직이게 되자 이때까지 下層에서 눌려 살던 農民과 奴隸階級이 자주 叛亂을 일으켰다. 그 中에서 가장 두드러진 事件으로는 明宗때에 公州에서 일어난 亡伊의 亂과 淸道에서 일어난 金沙彌의 亂과 神宗때에 東京(慶州)에서 일어난 金順의 亂과 蔚珍에서 일어난 金偉의 亂 같은 것이며 奴隸의 叛亂으로는 神宗때에 私奴 萬積의 事件과 같은 것은 注目할 現象이니 萬積은 官私 奴婢 數千名을 松都의 뒷산에 모아 놓고 崔忠獻 以下 자기네들의 上典을 各各 죽이고 奴婢 文書를 불사라서 奴婢를 모두 解放하여 三韓에 賤人 階級을 없이하고 또 將相이 本是 種이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도 將相이 될 수 있다하고 일을 꾸미다가 中途에 發覺되어 擧事치 못하고 모두 잡혀 죽었다.

 

蒙古亂

崔忠獻이 權勢를 잡은 後에 政治가 어지러워서 蒙古의 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版局이 벌어졌다. 蒙古는 本是 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遊牧하는 部族이러니 (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四方의 여러 部族을 合쳐서 큰 勢力을 이루니 이는 崔忠獻이 한창 勢道를 부리던 熙宗때 일이다. 金나라가 蒙古의 힘에 눌림에 契丹의 貴族들이 遼東에서 일어나고 金의 叛將 蒲鮮萬奴는 지금의 間道地方을 根據地로 하여 東眞國을 세웠다. 그 後 高宗때에 이르러 遼東의 契丹族이 鴨綠江을 건너서 우리나라 地境 안으로 밀려들어와서 掠奪을 함부로 行하였다. 高麗는 軍士를 보내어 各地에서 契丹兵과 싸우는 中에 또 蒙古가 東眞과 聯合하여 契丹兵을 치기 爲하여 그 뒤를 따라 鴨綠江을 건너오니 國內에 四國軍隊가 어울려서 形勢가 極히 險惡하고 또 急迫하였다. 더욱이 高麗와 蒙古는 從來로 外交關係가 全然 없을 뿐만 아니라 그 人性이 强悍함으로 國內人心이 恟恟하였다.

이때 契丹兵은 앞으로 高句麗軍에게 막히고 뒤로 蒙眞聯合軍에게 쫓기어 西北面의 江東城에 들어가서 지키니 蒙古將 哈眞과 東眞將 完顔子淵이 그 뒤를 따라 江東城을 包圍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形勢가 甚히 危懼함을 보고 戰略과 外交에 能熟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여 趙冲을 元帥로 하고 金就礪를 副元帥로 하여 軍士를 거느리고 蒙眞軍의 營에 가서 크게 酒宴을 베풀고 두 將帥를 接待하였다. 두 將帥는 우리나라 두 元帥의 人格이 매우 높음을 보고 慕仰함을 마지아니하였다. 完顔子淵은 我人에게 말하되 高麗의 趙元帥는 奇偉한 사람이라 國家가 이러한 將帥를 둔 것은 天의 賜함이라 하고 哈眞은 金就礪를 보고 말하되 내가 일직 六國을 征伐하여 貴人을 만남이 많으되 兄의 얼굴을 보니 어찌 그렇게 奇偉한고 하여 稱讚하였다. 이에 세 나라 軍士는 江東城을 쳐서 契丹兵을 전全滅시킨 뒤 蒙塵과 和好를 맺고 無事히 돌려보냈었다. 이 亂에 歸降한 者가 말했는데 이들은 山林地帶와 荒蕪地에 移住시켜 農事짓게 하니 이를 契丹場이라 하고 契丹場에 들어간 者들 中에는 農事짓기 싫어하고 사냥과 皮革 柳器 等 手工業으로 轉業하는 者가 많았으니 이것이 大槪 後日의 所謂 소白丁 고리白丁等이 된 것이다.

滿洲 地方에서는 蒙古의 勢力이 밀려나와서 東眞國은 얼마後에 亡하고 蒙古는 高麗를 救援하였다. 高宗 十二年에 蒙古의 使臣이 高麗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鴨綠江을 건너가서 盜賊을 만나 죽은 일이 있음으로 蒙古에서는 이것을 트집 잡아 가지고 國交가 漸漸 險惡하더니 마침내 高宗 十八年에 第一次로 高麗에 쳐들어 왔다. 原來 滿蒙 地方에 뿌리를 잡은 國家들은,

一. 海洋을 가지지 못해서 海外로 發展할 길이 없고

二. 氣候가 추워서 蠶布 等 衣服 資料가 生産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蒙古가 처음으로부터 高麗를 빼앗을 慾心을 가지는 것도 이 海洋과 衣服 資料를 얻기 爲함이오 契丹兵이 뒤를 쫓아 나온 것도 高麗에 발을 부칠 口實을 얻으려 함이오 다시 高麗에 쳐들어 온 것도 自己들이 처음부터 慾心내던 일을 達成하기 爲함이다.

今後에 있어서도 蒙古方面에 立하는 나라는 海岸을 얻기 爲하여 반드시 가장 距離가 가까운 東海로 進出하려 할 것이오 더욱이 不凍港을 얻기 爲하여 반드시 我國 海岸에 着目할 것은 勿論이다. 蒙古軍이 쳐들어오면서 龜州城을 包圍하니 이때 龜州를 지키던 朴犀와 金慶孫 等이 여러 날 동안 蒙古軍과 싸워서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蒙古將 한 사람이 歎服하여 曰 내가 從軍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城이 이와 같이 攻擊을 받고 屈치 않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 城中 諸將들은 後日 반드시 將相이 되리로다 하였다.

그러나 高麗는 마침내 蒙古軍을 對敵치 못하여 그 이듬해 三軍이 蒙古軍에게 屈服하기에 이르렀다. 蒙古에서는 達魯花赤(다루가치)라는 官吏 七十二人을 보내와서 高麗의 內政을 干涉하였다. 이에 高麗 朝廷은 蒙古와 抗爭하려하여 崔忠獻의 아들 崔瑀가 當時 政權을 잡고 있는지라 王을 모시고 江華島로 들어가니 (檀紀 三千五百六十五年) 이는 蒙古軍이 陸地에서는 强하나 水軍이 없어서 바다에서는 힘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三十年동안 蒙古의 軍士가 江華島의 便에 와서 아무리 威脅을 하고 出陸하기를 繼續하여도 崔瑀는 應하지 아니하니 그 忿풀이를 陸地에서 마음껏 하여 前後六次나 그들의 사나운 발굽이 鴨綠江 이쪽을 짓밟아서 西北面 一帶에는 百姓이 견디지 못하여 아주 마을이 비게 되었으며 敵軍은 멀리 慶州까지 쳐들어와서 虐殺과 擄掠을 마음대로 하였다.

大邱 符仁寺에 있는 大藏經版과 慶州 皇龍寺의 九層石塔이 불타 버린 것도 이 때이며 그들이 第六次로 들어 왔을 때는 高麗사람을 잡아 간 것이 二十萬名을 넘고 죽은 사람의 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高麗에서는 大藏經이 불타버린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高宗王은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努力으로 八萬大藏經版을 새기고 이 大藏經을 새겨 내기에 하도 힘들어서 더 簡便한 方法을 생각해 낸 것이 活字이다.

高宗 二十一年 (三千六百六十七年)에 이미 鑄字로써 冊을 박아내니 이는 獨逸사람들이 西洋에서 처음으로 活字를 만들어서 冊을 박아낸 것보다 二百年이나 앞섰다. 活字는 文明의 母라는 말이 있거니와 世界에서 가장 먼저 活字를 發明한 高麗는 亦是 文化의 先進國이었다.

宋나라 임금이 일부러 使臣을 보내와서 貴重한 冊을 빌려달라 하고 日本이 恒常 南洋의 珍奇한 物件을 가지고 와서 그 값으로 特히 大藏經을 나눠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高麗가 當時의 東洋에서 文化的으로 얼마나 높은 水準을 지니었던가를 알 수 있고 이러한 文化 속에서 맺어진 열매가 活字이었다.

江華島에 들어간 뒤 崔氏는 政權을 오로지 하여 私兵인 三別抄軍으로써 스스로 守備하여 陸地에 나가 싸운 일이 없고 오직 陸地軍隊에 對하여 抗戰을 命令할 뿐이며 西南岸地方으로부터 水路로 食糧과 其他 物資를 運輸해다 安樂한 生活을 繼續하였다.

高宗 四十五年에 崔氏와 三別抄軍사이에 틈이 생김을 利用하여 三別抄를 시켜서 崔氏를 滅하니 崔氏는 四世 六十餘年만에 亡하고 王이 直接 政治를 맡아보게 됨에 마침내 蒙古에 屈服하고 王子를 보내어 和親하기를 請하니 元나라(蒙古) 世祖 忽必烈이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 曰 高麗는 萬里의 나라이라 唐太宗이 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王子가 오니 이는 하늘이 시킴이라 하고 厚히 接待하고 軍士로 扈衛시켜서 本國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동안에 高宗이 昇遐하고 王子가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가 元宗이다. 元宗 時代는 戰爭이 겨우 끝나고 그 뒤를 整理하는 가장 複雜한 때라 첫째로 三十年동안 都邑하던 臨時首都 江華島로부터 松京에 還都한 것이오 둘째로 還都한 뒤 三別抄가 叛亂을 일으켜 珍島로 내려가서 官軍과 싸우다가 敗하여 다시 濟州道에 들어가더니 마침내 官軍에게 亡하였다.

이 三別抄의 亂에 對하여 지금의 어떤 學者는 三別抄의 亂으로써 蒙古에 抗戰하는 義擧라 하여 讚揚하고 있으나 三別抄는 元來 崔氏의 手足으로써 蒙古亂中 가장 安樂한 島中生活을 하고 抗敵의 陣에 參加한 일이 없고 崔氏가 亡한 뒤에 如前히 江華島에 있어 陸地에 나와 싸운 일이 없었으니 이것을 抗戰派라고 부를 수 없음은 勿論이오 還都後에 그 組織을 고쳐서 官軍으로 改編하려하매 그들은 過去의 特殊存在로서의 特權이 喪失됨에 不滿을 품고 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로 東北面의 雙域에 있는 官吏들이 本國을 背叛하고 和州 (永興) 以北의 땅으로써 元나라에 附屬한 것이다. 이로부터 元나라가 高麗의 宗主國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元나라가 日本을 칠 터이니 高麗도 힘을 合하라 하여 忠烈王이 임금이 되던 해에 (檀紀 三千六百七年) 高麗에서 만든 戰艦 九百隻으로 合浦(지금의 마산부근)를 떠나서 對馬島와 壹岐島를 무찌르고 九州의 博多를 占領하였으나 暴風雨가 일어나서 戰艦이 많이 破損되었음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그 後 七年만에 다시 蒙古軍과 中國의 江南軍과 高麗軍이 聯合하여 日本을 치러 갔으나 이번에도 大風이 일어나서 江南軍이 거의 전全滅하고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에 中國의 戰艦은 大槪 破損되었으나 高麗 戰艦의 破損 된 것이 極히 적은 것은 百濟時代 以來 我國의 造船技術이 優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高麗는 百餘年동안 元나라의 支配를 받는 사이에 나라 政治는 專혀 元나라의 意思에 依하여 行하여졌다. 忠烈王以後로는 代代로 王이 元나라의 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元나라 임금의 사위가 되고 그 公主가 낳은 아들이 王位에 오르게 되니 高麗王室은 血統的으로도 元나라의 支配를 받게 되었고 임금의 諡號는 從前의 宗字를 廢하고 그 머리에 忠字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代代로 王이 元나라 大都에 別邸를 두고 거기 來往이 잦으니 그 費用도 적지 아니하여 國家財政이 極히 困難하였지만 政治의 命令系統이 헝클어져서 本國에서 發한 命令이 元나라 大都로부터 沮止 當하는 일도 있고 元나라에 阿附하여 權勢를 얻으려 하여 本國을 誣陷하는 吠主犬들이 兩國의 사이를 往來하면서 政府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政令을 發하는 일도 있어 나라 紀綱이 餘地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吠主犬들은 甚至於 本國의 國號를 廢하고 元나라의 一地方으로 만들자는 運動까지 일어나니 忠宣王은 涕泣하면서 四百年 祖宗의 基業이 나의 몸에 이르러 떨어지게 되니 어찌 痛心한 일이 아니랴하고 李濟賢 等으로 더불어 元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겨우 無事함을 얻은 일도 있었다.

이때 王室로부터 民間에 이르기까지 元나라 風習이 흘러 들어오고 便으로는 文化의 輸入도 活潑하여 安珦이 孔子의 도圖像과 儒敎儀式을 中國으로부터 直接 가져 온 것도 이때의 일이오 忠宣王은 元나라에 가서 萬卷堂을 이루고 趙孟頫等 大學者들과 사귀어 한때 大陸文化의 中心이 되었다.

 

政治의 紊亂

高麗는 農業으로써 國家經濟의 中心을 삼았음으로 土地生産은 國民生活의 基礎가 되고 國家財政의 支柱가 되고 戶口의 整備 軍士의 徵發 等이 모두 土地의 授受制度로부터 出發하였으니 國家의 興廢, 政治의 善否가 모두 土地制度의 如何에 달려 있었다. 蒙古亂 以後로 社會의 秩序가 헝클어짐을 따라 가장 먼저 弊害를 生한 것이 土地制度였다.

처음에 官吏의 俸給으로써 農民의 耕作하는 土地의 收租權을 준 것은 다만 現物 運搬의 不便을 덜기 爲한 方便에 不過한 것이오 그 官吏에게 土地를 준 것은 아니오 收租權을 가진 官吏와 農民과의 사이에 身分的으로 奴主關係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土地 生産物의 十分一을 官吏에게 주면서도 賦役이나 戶稅는 國家에 바친 것이니 이것은 다른 나라의 封建社會의 農奴制와는 그 性質이 全然 다르다.

그런데 國家의 秩序가 한번 헝클어지자 權臣 貴族 土豪들은 그 收租權을 가지고 農民에 對하여 國家의 戶口帳에서 削去하고 國家에 바쳐야 할 賦役과 戶稅를 自己가 私取하니 國家의 公民의 數는 날로 줄어들고 이 까닭에 戶籍이 헝클어지고 또 土地授受法이 제대로 實行되지 못함으로 因하여 兵役을 負擔할 壯丁의 數도 알 수 없이 되었다.

便으로 奸人의 무리가 함부로 弄奸을 하여 일찍 官吏가 兵丁을 들어간 일이 없이 田柴科의 토지를 盜賊해 먹으며 아비는 公田을 私私로이 아들에게 世襲시키고 아들은 이를 隱匿하여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니 高麗 土地 一百七十餘萬結 中에서 國家의 土地帳에 남아있는 土地가 七八十萬結 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 農民 한 집의 耕作하는 土地에 對하여 收租權을 가지고 있다고 自稱하는 者가 六七人에 達하는 일도 있어 어느 사람이 國家에서 認定한 收租權자인지 알 수 없고 이 까닭에 農民이 지은 一年 農事는 모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公田數가 줄어들고 國家에 들어가는 田租가 또한 中間에서 橫領되어 國家財政은 말할 수 없이 窘塞하였고 或 賢相이 들어 있어 이 弊害를 그치려하되 盤根錯節한 權臣 貴族들의 勢力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農民들은 하루바삐 政局에 大變動이 생겨서 새로운 政治가 나오기를 渴望하였다.

世上일이 이와 같이되니 官吏의 腐敗는 極度에 達하여 民財를 빼앗아 먹기를 恒茶飯事로 하니 이때의 史官들은 이를 評하여 말하되 鷹犬을 雉兎의 場에 放함과 같다고 하였다.

高麗文化에 中心이 되고 있는 佛敎에도 弊害가 生하여 僧侶들은 特權을 믿고 放恣한 行動을 마음대로 하고 寺刹에서 淫犯을 行하는 일도 적지 아니하여 政界와 함께 腐敗 一路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不滿을 가진 儒臣中에는 佛敎를 排斥하는 소리가 漸漸 높아지고 儒敎 獎勵의 先陣에 나선者가 安珦이다. 安珦은 中國으로 부터 孔子圖像과 儒敎의 모든 儀式을 傳해오고 또 宋나라의 程朱學 卽 性理學을 가져와서 後進을 가르치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性理學이 뿌리를 뻗은 始初이오 이어서 李穡(號 牧隱) 鄭夢周(號 圃隱) 같은 大儒를 生하니 當時 鄭夢周는 東方 理學의 祖라 稱하였고 이 淵源이 李朝에 흘러 내려가서 性理學의 全盛時代를 이룬 것이다.

外國關係

元나라가 亞細亞 大陸에 大帝國을 建設한지 八九十年에 차츰 그 힘이 기우러져서 四方에 盜賊이 일어나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는 形便이라 恭愍王은 世子때에 元나라에 가 있어서 이러한 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이 機會에 元나라 勢力을 물리치기로 하고 王의 五年(檀紀 三六八九年)에 元나라에서 高麗에 設置하여둔 征東行者를 罷하고 前日에 元나라에게 빼앗긴 東北面의 땅과 나아가서는 遼東 等地를 도로 찾으려하여 印璫으로 하여금 鴨綠江便의 八站을 치고 柳仁雨로 하여금 東北面의 雙城 以北을 收復하게 하니 이것은 오랜 동안 北方 民族에게 눌려서 피어나지 못하던 大高句麗主義가 다시한번 光彩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때에 元나라의 紅頭賊이란 盜賊의 무리 十餘萬名이 우리나라에 根據를 잡으려 하여 쳐들어 왔다. 高麗로서는 뜻밖의 일이오 盜賊의 氣勢는 매우 사나웠음으로 王은 慶尙道 尙州 等地로 避難하니 賊이 松京을 陷落시켜서 宮闕과 모든 財寶 文獻이 蕩盡하였다. 數日後에 鄭世雲이 安祐 金得培 李芳實等 三元帥로 더불어 겨우 쳐서 破하니 敵의 太平은 죽고 나머지는 鴨綠江을 건너가서 달아났다.

王은 期於코 遼東을 恢復하려하여 李成桂等으로 하여금 遼陽城을 쳐서 떨어뜨리고 遼東의 官民에게 榜을 내 걸어 우리의 目的은 한때 잃어버린 故地를 찾으려 함에 있다하고 타일렀다. 이는 勿論 遼河까지가 本是 우리의 地境임을 말함이겠지만 이때 形便으로도 元 나라가 高麗를 누르고 國境을 南으로 뻗은 反面에 百姓들은 이 分明치 않은 地境을 믿어서 前날 보다도 더 北쪽으로 나갔음으로 遼東平野에 高麗사람이 많이 살아서 遼陽에 高麗軍民總督府가 생기더니 이때 마침 高麗의 國情이 安定되지 못하고 그 때문에 大陸政策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北으로 滿洲大陸과 接하고 東으로 一 海峽을 隔하여 日本과 이웃하고 있음으로 外交關係와 國防關係는 恒常이 두 方面에서 생겼다. 高麗 末葉의 倭寇는 高麗를 滅亡케 한 一因이 된 大事件이라 元來 倭寇는 日本사람의 海賊떼로서 高麗 中葉부터 高麗와 宋나라의 海岸地方을 擄掠질 하여 代代로 내려오면서 掠奪 强盜로 業을 삼는 무리들이었다. 恭愍王때에 이르러 倭寇가 더욱 甚하여 海岸地方은 勿論이오 차츰 陸地로 들어오고 또 南方을 휩쓴 뒤에 北으로 뻗어서 京畿道의 江華 豊德같은 서울의 咫尺에까지 미쳤다.

海岸地方 사람들은 安堵하고 살 수 없음으로 깊이 陸地로 들어가고 良田沃畓에 갈대가 茂盛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穀食이 많이 나는 土地는 主로 沿海岸에 있는데 海岸地方에 農民이 살지 못하고 모든 土地가 荒蕪로 化한 까닭에 國內의 食糧이 不足하고 國家의 財政이 또한 窘塞하였다.

이와 같이 倭寇가 三十餘年을 繼續하는 동안에 崔瑩과 李成桂가 여러 次例로 倭寇를 大破한 일이 있고 崔茂宣이 元나라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火藥을 製造하는 方法을 배워 我國 最初의 火器를 만들어서 全羅道 鎭浦에서 倭寇의 배 三百隻을 單番에 무찌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倭寇의 氣勢는 좀처럼 줄어들지 아니하고 禑王때에는 王都를 깊은 陸地로 옮기자는 議論도 일어나고 鄭夢周를 日本에 보내어 倭寇를 禁해 달라고 請한 일도 있었으며 臨津江 於口로부터 南岸을 거쳐 멀리 東海岸의 咸州 海岸에 이르기까지 延長 四千里의 땅이 모두 倭寇의 亂舞場이 되었고 어떤 곳에는 鷰雀이 林木에 歸巢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倭寇中에는 日本 海賊만 있는 것이 아니오 高麗사람으로서 地方官吏에게 不滿을 품은 者와 生活이 困難한 자者가 倭寇노릇을 하는 假 倭寇도 적지 아니하여 防備가 虛疎한 곳에는 반드시 倭寇가 出沒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倭寇의 大部隊가 全羅道 雲峰으로 모이었다. 李成桂는 部下將 佟豆蘭과 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荒山 西北에서 크게 싸워서 倭寇의 阿只拔都 大將을 죽이고 그 무리를 쳐 없애니 이로부터 倭寇의 氣勢가 꺾이어서 다시 前日과 같이 橫行하지 못하였고 李成桂가 凱旋하는 大路變에는 百姓들이 모여 나와서 歡迎하고 崔瑩은 李成桂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功을 稱謝하니 이에 李成桂의 威望이 一世를 덮어서 後日 革命의 基地를 이룬 것이다.

 

高麗의 滅亡

恭愍王 末年에 元나라가 北으로 쫓겨 가고 明나라가 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檀紀 三千七百一年) 高麗 朝廷에서는 大陸 外交에 對하여 두 가지 意見이 對立되었다. 崔瑩은 오래 동안 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元나라와 明나라의 現 勢力이 아직 定해진 것이 아니니 우리는 元나라와 사귀고 明나라를 누르면서 이 機會에 遼東을 恢復하여 國勢를 다시 한 番 떨쳐보자 하고 李成桂는 明나라가 이미 中原을 차지하였으니 우리는 天下의 大勢에 어김없이 元나라에 對하던 態度로써 明나라를 對하는 것이 옳다고 主張하니 이것이 所謂 親元派와 親明派와의 對立이다. 그러던 次에 明나라는 차츰 遼東을 平定하고 禑王 十四年에 이르러서는 鐵嶺衛를 세우고 將次 鴨綠江이쪽의 땅을 빼앗으려 하니 崔瑩이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하여 明나라를 치기로 決定하니 李成桂는 여러 番 王에게 글을 올려 反對하였다.

崔瑩은 조금도 北伐計劃을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八道都統使가 되어 王과 함께 西京으로 나가서 曹敏修와 李成桂로 하여금 軍士 五萬을 거느리고 가서 遼東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北伐을 反對하는 李成桂에게 大軍을 주어서 그 計劃을 實現하려 한 것이 崔瑩의 一大失策이었다. 李成桂는 鴨綠江에 이르러서 威化島 (을혜섬)에 머무는 차에 曹敏修를 달래어 장마철에 많은 軍士가 江을 건너가기 어렵고 또 明나라는 새로 일어나서 그 强大한 氣勢를 對敵하기가 쉽지 아니하니 여기서 回軍하는 것이 옳다하고 風雨같이 西京을 向하여 行進하니 이것은 分明히 王命을 拒逆하는 일이라 軍士中에서는 벌써 木子 得國이라는 謠言이 盛行하고 崔瑩은 王과 함께 形勢가 이미 틀리고 李成桂의 손에 잡혀 죽으니 國人이 崔瑩의 죽음을 듣고 都下가 모두 撤市하여 弔하고 遠近의 男女老少 없이 모두 서로 붙들고 울었다. 李成桂는 禑王의 아들을 세우니 이가 昌王이다. 이로부터 李成桂가 權勢를 한 손에 잡고 안으로는 그의 反對派를 몰아내고 밖으로는 明나라와 親하여 高麗의 運命은 이미 朝夕으로 保全하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 恭愍王때에 僧 辛旽을 써서 國政을 맡겼다가 失政을 보고 辛旽을 죽였는데 禑王은 或은 恭愍王의 아들이라 하고 或은 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王室을 中心으로 奇怪한 風說이 크게 流行하니 禑王을 王代라 하는 것은 主로 王代 朝廷을 支持하려는 사람이오 辛代라 하는 것은 主로 李成桂를 中心으로 한 革命派이다. 李成桂는 禑王을 辛代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그 아들 昌王 또한 辛代의 血統이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王代중에서 가장 暗弱한 恭讓王을 세우니 이때로부터는 이미 李成桂의 天下가 되고 만 것이다.

高麗의 田制는 紊亂할대로 紊亂하여 이를 事務的으로 바로잡을 수 는 없었다. 이에 趙浚 等이 私田 改革을 主張하여 勳臣 貴族들의 猛烈한 反對가 있었으나 李成桂의 勢力이 이를 支持하여 高麗가 亡하기 前해인 恭讓王 三年에 옛날의 科田制를 復活하는 田制改革을 斷行하고 私田 文券을 서울의 한 복판에 쌓아 놓고 萬民 環視中에 불살라 버리니 이로써 李成桂의 勢力은 農民들의 歡迎을 받고, 便 묵은 貴族들의 勢力을 무너뜨리어 勢力은 더욱 커지고 또 國家의 財源을 넉넉하게 하여 李氏朝鮮 建國의 經濟的 基礎를 삼았다.

우리나라 衣服 資料는 麻布가 가장 主되고 그밖에 中國으로부터 輸入되는 綿布 等이 있고 農村의 細民層은 狗皮를 입는 者도 적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中 恭愍王때에 文益漸이 中國에 갔다가 交趾(베트남)로부터 棉花 種子를 가져오는데 이때 元나라에서는 棉花 種子를 外國에 보내는 것을 嚴禁하고 있었음으로 文益漸은 筆管속에 秘密히 넣어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우리나라 棉花 栽培의 始初이며 高麗가 亡할 무렵에 全國에 퍼져서 우리나라 衣服界에 一 新紀元을 그었던 것이다.

高麗의 王室을 지켜가고 李成桂의 勢力을 눌러 보려고 하는 사람들 中에 그 中心 人物은 鄭夢周였다. 그러나 鄭夢周는 一個 文臣이라 아무 武力的 實力이 없더니 恭讓王 四年에 李成桂가 海州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傷하였다는 所聞을 듣고 이를 機會로 李成桂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李成桂가 松京에 돌아오고 그 아들 李芳遠이 刺客 趙英珪를 보내어 善竹橋에서 鄭夢周를 처 죽였다.

鄭夢周가 죽자 高麗의 運命도 이와 함께 다 하였다. 그해 七月에 李成桂는 恭讓王을 廢하여 原州로 내치고 王位에 오르니 이가 李太祖이오 (檀紀 三千七百二十五年 壬申) 高麗는 三十四王 四百七十五年으로 끝마쳤다.

高麗時代는 三國時代의 武勇의 遺風이 있어 能히 契丹 蒙古 紅巾賊 倭寇와 같은 大敵을 막아 싸우니 當時의 遺物로서 建築에 浮石寺의 無量壽殿, 彫刻에 恩津의 彌勒佛 等은 美術로도 有名하거니와 그 굳세고 힘찬 모습은 그때 사람의 氣質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末葉에 이르러 從來에 國難이 있을 때는 貴族의 子弟가 陣의 先頭에 나서던 眞實한 風이 없어지고 勢力이 있는 者들이 兵役을 忌避하는 風이 生하니 紅巾賊의 亂에 儒學을 배우는 學生들이 우리는 孔子廟를 지키는 儒生들이니 戰爭에 나갈 수 없다고 政府에 請願한바 그때 政丞 廉悌臣이 嚴責하여 曰 國難이 있을 때에 貴族子弟들이 먼저 칼을 잡고 나가는 것은 祖宗 以來의 常規라 너희들이 孔子廟를 憑藉하는 것은 兵役을 忌避함이라 너희들이 지키지 아니하면 孔子廟가 어디로 逃亡가느냐 하고 一齊히 戰爭에 내어 보낸 일이 있으니 이것이 高麗사람의 氣質의 變함이오 이 變化한 氣質이 李朝에 相續 되었다.

高麗社會의 腐敗는 革命을 불렀고 革命은 社會發展 科程에 있어서 一大 淸新劑가 된 것이다. 그러나 李成桂는 恭愍王 三年에 이미 田制를 改革한 뒤에 自己가 國王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政治改革에 對한 主張을 내 세운 것이 없고 다만 王代 社稷을 빼앗으려는 權力 다툼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朝臣中에는 李成桂의 革命에 對하여 强烈한 反對를 한 者가 적지 아니하고 그 中에는 松京의 杜門洞에 숨어서 一生을 李氏의 앞에 무릎을 屈치 안한 者 있으니 이를 杜門洞 七十二賢이라 한다.

七十二賢과 그 子孫들은 李氏에 服하지 아니하고 或은 柳器 皮革匠등 賤業을 하는 者도 있고 或은 商業에 몸을 던져 松京과 延安 배천(白川)의 사이를 往來하는 者도 있었으니 지금의 開城 사람의 商業術이 一國에 有名하고 開城商業簿記가 西洋式 簿記와 倂稱되고 있는 것은 당시 杜門洞 諸賢의 創案으로 된 까닭이라 한다.

 

 

李朝역대표(歷代表

太祖

定宗

太宗

世宗

文宗

端宗

壬申

己卯

辛巳

己亥

辛未

癸酉

7

2

18

32

2

3

世祖

睿宗

成宗

燕山君

中宗

仁宗

丙子

己丑

庚酉

乙卯

丙寅

乙巳

13

1

25

11

39

1

明宗

宣祖

光海君

仁祖

孝宗

顯宗

丙午

戊辰

乙酉

(癸亥

庚寅

庚子

22

41

14

27

10

15

肅宗

景宗

英祖

正祖

純祖

憲宗

乙卯

辛丑

乙巳

丁酉

辛酉

乙未

46

4

52

24

34

15

哲宗

光武皇帝

隆熙皇帝

庚戌

甲子

丁未

14

44

4

備考

一. 高麗王室이 없어진 것은 太祖가 漢陽에 移都하니 全 百姓이 松京에 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太宗이 部下로 하여금 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開國初에 無國號하여 高麗權知國事라 稱하고 明國에서 太祖가 王位에 오름을 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李朝는 明의 阿諛國)

三. 太祖는 百姓을 爲하여 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一生에 王位를 차지하려고 明國에 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李太祖는 明에서 命令하면 모두 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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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建國

太祖 李成桂의 先祖는 本是 咸鏡道에 살았는데 그 高祖父가 元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하고 지금의 咸鏡北道 慶興에 살더니 太祖의 어버이 李子春은 永興에 살고 거기서 太祖를 낳으니 이때 永興은 雙城總督府로 되어 元나라에 屬하였다. 恭愍王때에 柳仁雨가 雙城을 칠 때에 李子春이 이를 도와서 功이 있었음으로 朔方道萬戶 兼 兵馬使가 되어 咸州를 中心으로 하여 큰 勢力을 가졌고 이때 太祖는 나이 젊었으나 特出한 武藝가 있었음으로 咸州 以北에 살고 있는 女眞族들의 推仰을 받고 있으며 後日에 太祖가 자주 큰 功을 세운 것도 그 手下에 佟豆蘭 以下 女眞 出身의 猛將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 한다.

太祖가 建國한 이듬해에 國號를 고쳐서 朝鮮이라 하고 三年 後에 都邑을 지금의 서울에 옮기고 景福宮을 짓고 城을 쌓아서 五百年 王業의 基礎를 닦았다.

李朝政治

一. 土地制度이니 高麗時代는 土地는 모두 國有로 하고 壯丁에 따라서 授受하더니 太祖가 恭愍王 三年에 改革한 田制는 다만 私田을 廢하고 科田制를 復活한 것이 高麗의 田制와 같을 뿐이오 土地를 農民에게 分配한 것은 壯丁 授受制가 아니라 大槪 農民이 現在 耕作하고 있는 土地를 그 農家에 주는 것을 原則으로 한 까닭에 各 農家의 耕作面積에 많고 적은 差異가 생겼다.

그러므로 土地는 비록 高麗의 國有制를 그대로 繼承하고 있으나 各 農家의 耕地는 永久 耕作權의 形態로 되어 있어 그 속에 後日 私有地로 될 싹을 包藏하고 있으며 그 耕作地는 國法에 의하여 自由로 買賣 典當하는 것을 禁하고 있으나 이것은 完全히 國有制가 私有制로 變해 넘어가는 過渡期的 形態이었다.

二. 高麗는 佛敎로서 國敎를 삼고 各地에 數多한 寺刹을 세우고 王室로부터 民間에 이르기까지 모든 儀式은 佛敎式을 썼다. 그러나 末葉에 이르러 佛敎의 廢가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李朝는 佛敎를 極度로 排斥하여 寺刹의 大部分을 헐어버리고 寺刹土地를 沒收하고 儒敎로서 國敎를 삼고 特히 中國 宋나라의 程朱學을 尊崇하고 朱子家禮에 依하여 집마다 家廟를 만들게 하고 程朱學 以外의 學文은 모두 異端이라 하여 一切로 容納치 못하게 하였다. 人爲的 國民思想 統一의 結果는 學風이 偏狹하여 排他性이 强하고 思想의 沈滯를 招來하여 生發의 氣가 없었다.

三. 高麗에 武臣橫暴의 弊가 크고 李成桂 自身도 武臣으로써 王代의 社稷을 빼앗았음으로 李朝는 武臣을 누르고 文臣을 높여서 國家大事는 專혀 文臣의 손에 依하여 行하니 이 까닭에 社會는 文弱에 빠져서 外敵이 쳐들어오면 나아가 막을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恒常 退屈하였으며 貴族의 子弟는 勿論이오 그 一門까지도 兵役을 免除하고 오직 無勢無力한 寒門微族의 사람들만 軍兵으로 만들었다.

四. 革命을 일으킨 理論이 光明正大치 못하여 高麗遺民들의 反對가 强烈하였음으로 李朝는 王代復興運動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建國한지 三年에 全國의 王代를 老少없이 모두 잡아서 虐殺하니 이때 王代를 江華島와 南海 여러 섬에 보내어 安住시킨다 하고 배에 싣고 들어가다가 물속에 넣어 죽인 者도 八百餘名이오 開城으로부터 以北의 平安道地方에 사는 王代들은 모두 逃亡하여 遼東으로 들어가니 지금 滿洲地方에 다른 姓보다 特히 王代가 많은 것은 이 까닭이라 하며 外國으로 逃亡할 수 없는 王代들은 姓字를 고쳐서 玉 全 田 車 等으로 變하니 革命後에 前朝 王族을 一人도 남기지 아니하고 虐殺한 것은 我國有史 以來 오직 李朝뿐이었다. 便으로 黃海道 平安道 地方에서 王代를 받들고 叛亂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開城 以北의 사람을 朝廷의 大官에 쓰지 아니하고, 咸鏡道는 自己의 出身地方이다.

人性이 强하고 萬一 大用하면 李氏 朝廷에 不利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亦是 大官에 쓰지 아니하니 이 까닭에 李朝 五百年동안에 西北人은 仕路가 막힌 것이다.

五. 高麗 末葉에 政治가 紊亂하여지자 權臣貴族들은 國家의 官吏에 定員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마음대로 自己 親戚이나 特殊關係가 있는 者를 官吏로 쓰게 되어 定員數의 倍 以上을 超過하였는데 李朝 開國後에 官吏의 數를 줄이고 官吏를 改替하려하였으나 만일 그 때문에 人心이 不安하여 動搖가 생기면 李氏 政權의 維持에 不利할까 念慮하여 官吏의 數도 줄이지 못하고 主要한 자리 外에는 改替하지도 못하니 이 까닭에 財政이 困難하고 따라서 官吏의 俸給은 生活費를 充足치 못하였고 이것이 李朝 五百年동안을 通하여 貪官汚吏가 많이 생긴 主因이 되었다. (官吏數가 많으면 李朝時代의 貪官汚吏가 생긴다.)

六. 高麗의 문은 貴族이 이미 없어지고 李氏에 親附한 者가 新貴族이 되었는데 李氏 朝廷은 아직 人心이 安定되지 못하고 어느 한 구석에서 어떠한 事件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음으로 이들 新貴族을 特別 待遇하고 民財를 빼앗아 먹는 것을 黙認하기까지 하고 李氏에게 謀反하는 일을 告發하라고 獎勵하여 厚한 賞을 주었으니 이것이 李朝 一代에 貴族의 橫暴와 告發의 弊習을 助長한 一因이 되었다.

七. 李朝가 高麗를 빼앗은 것은 社會의 發展을 爲한 革命이 아니오 다만 李氏家가 王노릇을 한다는 것이 主要한 目的이 되어 있으니 이것은 李代 開國後 흔히 「化家爲國」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開國한 처음부터 醜惡한 王位爭奪戰이 일어나서 五百年동안을 끊임없이 父子 兄弟 叔姪 等의 사이에 流血의 劇을 演出한 것이다.

 

王位爭奪

처음에 太祖는 松京으로부터 都邑을 옮기려하여 公州 鷄龍山과 漢陽을 親히 돌아본 結果 漢陽으로 옮겨왔는데 얼마 안가서 王子의 變이 일어나서 骨肉의 慘酷한 禍亂을 자아냈다. 太祖에게는 神懿王后 韓씨의 所生에 六子가 있고 神德王后 康씨의 所生에 芳蕃 芳碩의 二子가 있는데 太祖의 革命 運動에 韓氏 所生의 芳遠(太宗)의 힘이 가장 크더니 韓氏는 開國하기 前에 죽고 康氏가 王后로 되어 自己의 所生 芳碩으로 世子를 삼으려하니 政府大臣 中에는 「平時에는 長을 세우고 亂時에는 功을 먼저 한다.」하여 反對한 일도 있었다.

太祖는 王位로써 國家 全體와 關聯시키지 아니하고 李氏家의 私事로 생각하여 그 사랑하는 康氏의 所生 芳碩으로써 世子를 삼으니 韓氏 所生의 여러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中에서도 開國의 功이 있는 芳遠의 不滿이 가장 컸다.

이때 世子 芳碩을 돕는 責任을 맡은 者는 鄭道傳 等이라 鄭道傳 等은 여러 王子가 不平을 품고 있는 形勢를 살피고 太祖에게 말하여 王子들의 兵器를 지니는 것을 禁하고 다시 王子 七人을 七道에 分遣하고자 하니 이는 王子들을 放逐하려는 術策이다. 이에 芳遠은 크게 怒하여 芳蕃 芳碩과 鄭道傳 等을 죽이고 芳遠의 兄 芳果가 世子가 되니 太祖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忿함을 참지 못하여 가장 親近한 部下를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울 近處의 山寺를 逍遊하다가 멀리 北으로 行하여 舊居인 咸興 本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芳果가 王位에 오르니 이가 定宗이오 定宗 元年에 漢陽은 骨肉의 變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新都를 버리고 開京으로 돌아갔다. 定宗은 芳遠으로써 世弟子를 삼으니 芳遠의 兄 芳幹이 거기에 不滿을 품고 朴苞로 더불어 芳遠을 害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朴苞는 잡혀서 죽고 芳幹은 兎山으로 쫓겨나갔다. 定宗이 임금이 된지 二年만에 하루는 世弟芳遠의 氣色이 殊常함을 보고 王位를 芳遠에게 傳하니 이가 太宗이다. 太宗은 卽位한 後 곧 漢陽으로 돌아왔는데 朝臣中에는 開京 舊都를 생각하고 新都를 싫어하는 者가 많아서 王都가 安定치 못하더니 하루 밤에 開京宮闕이 全部 불에 타버리니 다시 開京으로 옮기자는 사람이 없었다.

太祖가 咸興에 들어간 後에 朝廷에서는 자주 問安使를 보내었으나 太祖는 忿함이 풀리지 아니하여 오는 사람마다 죽여서 一人도 生還한 者가 없으니 지금까지도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咸興差使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太宗이 朴淳을 보내어 太祖의 還國하기를 請하고 父子間의 天倫의 情을 極盡하니 太祖가 感動하여 돌아왔다.

朴淳의 極盡한 말의 內容을 咸興古老들이 口碑로 相傳하는 말에 依하면 「父子가 相爭하여 南北 二朝가 있음과 같이 國民의 눈에 보이는데 創業한지 오래되지 못하고 人心이 安定되지 못하여 將次 무슨 變亂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 父子가 相爭하여 나아가 國家 萬年의 基業을 떨어뜨리랴」함이라 太祖는 이 말을 듣고 大悟하여 드디어 南還을 決意하였다 한다.

建設時機

太宗이 임금이 된 것은 開國한지 九年만이라 이제로부터 漸次로 建設的 政策을 行하게 되었다.

經濟面에서는 高麗時代以來로 貨幣制度를 여러 番 確立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太宗이 다시 着手하여 錢貨를 만들려 하였으나 그 原料되는 銅이 不足함으로 주主로 楮幣를 만들어 쓰게 하니 이는 지금의 紙幣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錢貨를 信用치 않는 當時 사람들이 楮貨를 信用할 理由가 없었다. 그리하여 楮幣의 價値가 暴落하더니 마침내 流通이 끊어지고 前日과 같이 麻布를 交換의 媒介로 쓰고 五升布를 標準으로 하니 五升布라 함은 一定하여있는 布幅에 經絲 四百本을 말함이다. (한 목은 十 오리 一升은 八목)

文化 面에 있어서 特記할만한 것은 鑄字所 設置이다. 高麗때에 活字를 만들어 쓴 일이 있었으나 그 規模가 크지 못하더니 太宗 三年에 鑄字所를 두고 李稷 朴錫命 等으로 하여금 銅으로 많은 鑄字를 만들어 主要한 書籍을 印刷하여 내니 이는 우리나라 出版文化史上 劃期的 革命이다.

外交에 있어서는 太祖開國할 때에 明나라의 承認을 얻고 해마다 많은 歲幣를 바치기로 하였음으로 明나라의 歲幣 要求가 數量이 많고 또 苛酷하여 特히 馬匹의 要求가 더욱 甚하여 每年 數千匹 乃至 萬餘匹을 强要하고 또 畜牛까지 要求하니 朝廷에서는 여기에 應하면 國內의 馬匹이 全部 없어질 것이오 應하지 아니하면 明나라로부터 어떠한 壓迫이 올지 알 수 없어서 進退 兩難에 빠졌다. 朝臣 中에는 이를 拒絶하자고 主張한 强硬 論도 있었으나 太宗은 穩話하게 이를 解決하자고 撫摩하고 明나라에 對하여 歲幣를 減할 것을 여러 次例로 要請하더니 얼마後에 그 要請대로 實現되었다.

高麗末에 極盛하던 倭寇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太宗때에 南海岸을 侵犯한 일이 있음으로 太宗이 位를 世宗에게 傳하고 大上王이 되었으니 自己 生前에 倭寇의 巢窟을 없애야 한다하고 世宗 元年에 李從茂로 하여금 對馬島를 쳐서 相當한 戰果를 내었으나 오래 守備하기가 어려움으로 얼마 후에 回軍하였다. (李從茂가 변변치 못하여 一敗하여 돌아왔다.)

처음에 太宗의 長子 讓寧大君으로써 世子를 삼았으나 三子 忠寧大君이 聖德이 있음을 보고 恒常 將次 忠寧大君에게 王位를 傳할 생각이 있고 讓寧大君이 또한 天資가 倜儻하여 自己보다 忠寧大君의 才德이 뛰어남을 알고 王位를 그에게 넘기려하여 거짓 放蕩하여 世子의 位에서 물러나니 李氏 開國이후 醜惡한 王位 爭奪戰을 하는 속에서 홀로 讓寧大君이 이와 같은 特異한 行動을 한 것은 一身의 榮譽보다 國家 全體를 위하는 至誠에서 나온 것이며 三國時代에 王位를 相讓하던 渾厚한 風을 다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後에 忠寧大君이 王이되니 이가 世宗이라 世宗은 李朝 一代를 通하여 第一가는 聖君일 뿐만 아니라 我國의 歷史 全體를 通하여 보아도 가장 훌륭한 人君이다.

世宗은 黃憙 許稠 等 名相으로 더불어 國事를 議論함에 그 重點을 人才 問題에 두었다. 즉 어떻게 하면 人才를 많이 培養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좋은 人才를 擧用할 수 있을까 하고 또 君王이나 宰相의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훌륭한 人才를 얻어서 國家의 各 機關에 適材適所로 配置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科擧로써 人才를 取하는데 그 出題는 主로 政治 經濟 國防 文化 等에 關한 實際 方策으로 하고 여기에 及第한 사람은 다시 湖堂에 보내어 몇 해 동안을 자유롭게 硏究케 하니 이 까닭에 人才가 輩出하여 여러 가지 큰 事業을 行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西邊과 北邊에는 女眞族이 居住하고 있는데 國人들은 이를 野人이라 불렀다. 太祖가 開國한 뒤에 鴨綠江과 豆滿江의 以南의 女眞族이 한때 모두 歸附하였으나 이는 一時的의 일이오 그 地帶가 우리나라의 領土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 野人은 恒常 西北 邊의 근심이 되더니 世宗은 이를 征伐하기로 決意하고 金宗瑞를 보내어 北邊을 치게 하니 朝臣 中에는 有限한 人力으로써 成功할 수 없는 軍役을 始作한다하여 極力으로 反對하는 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世宗은 굽히지 아니하고 野人을 쳐서 或은 降服받고 或은 豆滿江 外로 쫓아내고 豆滿江 南에 鍾城 慶源 會寧 慶興 穩城 富寧의 六鎭을 새로이 세우고 慶尙道 百姓을 옮겨서 그 地方을 채우니 渤海가 亡한지 五百餘年에 이地帶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領土로 돌아왔으며 歸順한 野人들은 或은 우리나라 사람에 同化하고 或은 在家僧이라는 特殊人으로서 그 地方에 남았었다.

(咸鏡地名에 興 字가 셋이 있는 것은 太祖의 高祖父가 살았던 데를 慶興이라 하고 定宗 太宗의 出生地를 咸興이라 하고 永興은 太祖가 낫기 때문에 永興이라고 地名을 各各 지었다. 新興은 倭政때 새로 지은 地名)

世宗이 租稅制度에 對하여는 七八年을 苦悶하고 드디어 投票制度를 實施하였다.

西邊에서는 婆豬江 기슭에 野人 李滿住 等이 雄據하여 자주 鴨綠江을 건너와 掠奪함으로 太宗때에 甲山의 땅을 나누어 지금의 平安道에 閭延郡을 두었다. 世宗때에 이르러 野人의 侵入이 잦아서 江岸 一帶에는 百姓들이 安住할 수 없으니 世宗은 이를 다만 防備하느니보다 한 걸음 나아가 江을 건너서 野人의 本據를 부실 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江건너는 明나라의 領土이오 또 林木이 蔽文하여 함부로 쳐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明나라에 對하던 外交로써 野人征伐의 不得已함을 力說하고 便으로는 秘密히 北伐軍을 訓練하고 江邊에 軍糧을 備蓄하니 朝臣 中에는 北伐을 反對하는 者가 많아서 每日 이 問題를 가지고 떠들었다. 世宗은 萬一 野人의 本據를 깨지 않으면 西邊 一帶는 野人의 獨舞臺가 될 것이니 이를 實行치 아니할 수 없고 또 이를 치자면 明나라 領土에 公公然하게 들어갈 수가 없음으로 秘密裏에 擧事하려는 것이다. 이 問題를 크게 떠들어서 萬一 明나라에 들리면 大事가 틀어질 것이니 조용히 處理하고자 타일렀다.

그러나 反對하는 者들은 듣지 아니하고 連日 떠들었다. 世宗은 大怒하여 曰 野人의 侵略을 그대로 放任하자는 것은 國土를 賊에게 주자는 생각이니 外交關係에 關한 일을 公公然하게 떠들면 國家 將來에 무슨 利益이 있느냐 하여 責하고 我國 人性이 輕躁하여 반드시 國家 大事를 그르칠지로다. 하고 嘆息하였다. 이에 모든 反對를 물리치고 崔潤德을 보내어 野人을 치고 江 이쪽에 慈城 茂昌 虞芮의 세 곳을 두니 이로써 鴨綠江 기슭에 四郡이 이루어져서 그 後 多少의 曲折이 없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鴨綠江이 完全히 우리나라의 國境이 되었다.

土地의 租稅制度는 古制에 依하여 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기로 하였으나 土地마다 每年 一定한 額數를 받는 貢法을 쓰느냐 또는 해마다 年年의 豊凶과 作況의 良否를 實地로 踏査하여 稅額을 定하는 踏驗法을 쓰느냐 하는 것이 全國的으로 一大 訟案이 되었다. 土地가 肥沃하여 努力을 들이면 收穫을 올릴 수 있고 또 水旱災가 적은 土地를 가진 사람은 貢法을 歡迎하고 土地가 瘠薄하고 氣候의 影響을 많이 받아서 凶年이 잦은 土地를 가진 사람은 踏驗法을 歡迎하였다. 그리하여 貢法도 써보고 踏驗法도 써 보았는데 貢法에서 土地의 等級을 定하는 일이나 踏驗法에서 每年의 收穫量을 定하는 일이나 모두 實際로 幹事하는 官吏의 公正與否가 法의 精神을 살리고 죽이고 하였다.

그러나 稅制를 어느 쪽으로든지 確定치 아니할 수 없음으로 世宗은 各道를 單位로 하여 各 守令과 農家로 하여금 어느 制度를 贊成하는가를 落點케 하니 落點이라 함은 지금의 投票와 같은 것이다. 그 結果 忠淸 全羅 慶尙의 三道는 貢法 贊成 者가 十의 八이오 京畿 江原의 兩道는 兩法의 贊成이 大略 半半이었다. 이에 民意를 尊重히 여겨 三南과 京畿 江原은 貢法을 쓰고 西北 三道는 踏驗法으로 쓰이게 하되 貢法을 쓰는 地帶에서도 土地 等級이 낮은 薄土에 對하여는 災를 주기로 하였다. 同一한 國內에서 地方에 따라서 相異한 法을 쓴 것은 오직 民情에 맞추려 함이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五百餘年 前옛날에 民意를 묻기 爲하여 大衆의 落點制를 썼다는 것은 一大 奇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土地制度에 結負制를 偏用한 것은 制度의 紊亂을 發生시킨 一因이 되었다. 新羅時代의 土地制度에는 面積을 表示하는 頃畝制와 收穫量을 表示하는 結負制를 竝用하니 一結의 百分之一이 負가되고 一負의 十分之一이 一束이 되었다. (結은 맥, 負는 짐, 束은 뭇)

頃이라 함은 土地의 一等地의 一結과 同一한 面積이오 頃의 百分之一이 畝가된다. 高麗에 이르러 처음에는 兩制를 竝用하다가 그 後에 稅額計算의 便宜를 爲하여 結付法을 專用하고 李朝에 이르러 이를 踏襲하였다. 世宗때에 土地를 九等에 나누었는데 이를 結負와 頃으로써 比較하여보면 一等地 一結은 一頃의 面積과 同一하나 九等地 一結은 四頃 餘의 面積과 同一함으로 土地의 等級에 따라서 頃數가 모두 다르고 따라서 그 土地를 보고 그 結數를 알 수 없으며 或 勢力있는 者들이 農民의 土地를 侵犯하되 國家의 土地帳簿에는 結負數만 있고 그 土地의 地圖라든가 面積이든가가 記載되어 있지 아니함으로 侵占與否와 侵犯한 面積을 可考할 길이 全然없고 이 까닭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各 土地의 稅額이 헝클어지기 始作하였다. (世宗이 面積을 재기 爲하여 人才를 求하니 人才가 없어서 面積을 재지 못하여 土地制度가 紊亂하였다.)

世宗은 天性이 聰明하고 또 學問을 좋아하여 宮中에 集賢殿을 두고 學者들을 모아서 學問을 硏究하는 한편 有益한 書籍을 많이 만드니 高麗史 八道地理志 農事說 醫方類聚 鄕藥集成方等은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音樂에도 많은 關心을 가져서 海州에서 秬黍가 나고 南陽에서 磬石이 나며, 朴堧으로 하여금 樂器를 고쳐 만들고 이어서 舊樂을 고쳐 다듬으니 지금껏 世界에 자랑이 되고 우리나라의 雅樂은 이때에 完成한 것이다. 또 曆象 方面에도 硏究를 쌓아서 蔣英實과 더불어 大小 簡儀臺 自擊漏(물시계) 仰釜日晷(해시계) 等을 만들고 銅으로 測雨器를 만들어 서울과 各道에 나눠주어서 雨量을 재었다. 이는 西紀1639年보다. 二百年이 앞서서 活字와 함께 우리 文化의 자랑거리다.

또 우리 文化史上 가장 特記할만한 事業은 訓民正音 즉 國文의 創製이다.

世宗은 「諸國이 各其 文字가 있어서 方言을 記하거늘 獨히 無하노라 我國語音이 中國과 달라서 漢字와 서로 流通치 못함으로 愚民이 言코자 함이 있으되 마침내 그 情을 伸치 못하노라 내가 이를 憫惘히 여겨 文字를 新製하야 人人으로 하여금 學習하기 쉽고 日用에 便케 하고자 하노라」함과 같이 國家意識의 自覺과 大衆敎育의 必要에 依하여 國文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鄭麟趾 申叔舟 成三問 崔恒 等과 더불어 親히 硏究를 거듭한 結果 그의 二十八年 三千七百七十九年 丙寅)에 二十八字를 지어내어 中外에 領布하니 이것이 오늘날 世界의 여러 文字中에서 第一 優秀한 우리 國文이다.

이때 漢學思想에 젖은 崔萬里같은 무리들은 訓民正音을 聖賢의 글이 아니라 하여 쓰기를 反對한 일이 있었으나 世宗은 이를 물리치고 訓民正音으로써 龍飛御天歌를 지어내는 한편 官廳의 公文書에 이 글을 쓰게 하며 또 儒敎와 佛敎의 經典을 飜譯하여 百姓들에게 읽혔다. 民間에서는 이 글을 諺文 또는 諺書라하고 漢文을 飜譯한 것을 諺解라 하였다.

端宗과 世祖

世宗의 다음에 文宗은 在位한지 겨우 二年이오 그 아들 端宗이 王이 되니 나이 겨우 十二歲이다. 그런데 當時 端宗에게는 母后가 없고 近親이라고는 叔父 七人 卽 首陽大君 以下 七人君이 있어 모두 强盛하니 國民들은 王의 將來에 대하여 모두 危懼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前日에 世宗이 昇遐하였을 때에 國民이 聖君을 잃은 것을 크게 슬퍼하였는데 文宗이 昇遐하였을 때에는 그때보다도 더욱 슬퍼하니 그것은 文宗을 爲한 슬픔이 아니라 어린 端宗이 保護者가 없고 七大君의 힘이 强大함으로 國事가 將次 어떻게 될까 근심하는 슬픔이었다.

端宗 二年에 首陽大君이 權擥 韓明澮等과 더불어 亂을 일으켜, 그때 政丞으로 있는 皇甫仁 金宗瑞等을 죽이고 스스로 軍國 大權을 잡고 있더니 또 二年後에 端宗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니 이가 世祖이다. 이에 端宗의 舊臣中에는 兩派로 갈려서 鄭麟趾 申叔舟等은 世祖에게 붙고 世祖의 行爲를 痛憤히 생각하는 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李塏 柳誠源 兪應孚 等은 世祖를 몰아내고 端宗을 復位하려 하다가 未然에 發覺되어 그 家族및 連累者들과 함께 死刑을 當하고 端宗은 魯山君으로 내려서 寧越로 귀양 가더니 이듬해에 世祖의 아우 錦城大君이 慶尙道 順興에서 李甫欽과 더불어 端宗 復位를 일으키다가 敗하여 죽고 端宗도 또한 世祖에게 害된 바 되었다.

世祖는 王位를 억지로 얻었으나, 政治를 잘하여 成長期에 있는 李朝를 힘써 培養하였다. 王은 抑佛政策을 늦추어서 서울 안에 圓覺寺를 짓고 十三層塔을 쌓으며 刊都監을 두어서 佛經을 많이 박아내었다.

특히 民間의 弊害를 없애기에 努力하여 百姓들이 抑鬱한 일이 있는 때는 直接으로 王에게 上書하게 하고 비록 勢力이 있는 者라도 民弊를 짓는 者는 容恕함이 없이 處罰하였다.

(權擥은 權近의 孫子라 權近은 高麗 臣下로써 李氏 得國함에 歸化하였다. 처음에는 太祖가 써먹기 爲하여 잘 待遇하더니 李氏가 完全히 得國하니 權近을 節槪없는 臣下라고 물리치니 老末年에 忿함을 참지 못하였다. 이를 孫子가 알고 端宗이 임금이 되어 世祖가 王位를 빼앗는다는 것을 듣고 이에 參與하여 李氏끼리 싸우라는 內容計劃을 세웠다. 그러니 高麗 臣下가 李朝 집안끼리 싸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死六臣은 다만 端宗이 王位에 오르면 世祖보다 政治를 잘한다하여, 또 나라를 爲하여 端宗을 받든 것이 아니라 端宗에만 忠誠한 것이다. 世祖가 한 일은 無理가 아니고 當然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說도 있다.)

當時 民弊의 가장 큰 者는 防納이니 防納이라 함은 百姓이 國家에 바치는 貢物을 商人이나 勢力있는 者들이 代納하는 것이다. 當時의 百姓이 國家에 對한 負擔의 義務에는 土地生産의 一部를 바치는 租稅, 各 地方에서 産出되는 特産品을 바치는 貢物, 兵役, 築城, 運輸 等에 從事하는 賦役의 세 가지가 있었다.

貢物은 全國 各 郡을 單位로 하여 바치는 것인데 例컨대 海邊 郡은 魚物 海草 等等 山間 郡은 毛皮 藥材等 平野 郡은 煙草 果實 明油等 全州의 紙, 海州의 墨, 甲山의 山蔘, 江原道의 淸蜜, 全羅道 竹物 等이오 政府에서 數百種의 産物을 各郡 産出額과 戶口數를 參酌하여 各道에 配定하고 道는 郡에 配定하고 郡은 百姓의 各에 配定하며 百姓이 自己에게 配定된 貢物을 郡守에게 바치면 郡의 吏胥들이 그것을 檢査하여 收納하니 當時 貢物의 負擔은 租稅보다 몇 배나 重하고 檢査에 不合格되면 다시 好品을 求得하지 아니하면 안되므로 百姓의 損害가 적지 아니하였고 吏胥들은 百姓의 弱點을 乘하여 비록 好品이라도 不合格으로 退却하고 商人과 結託하여 百姓으로부터 時價의 二三倍를 걷어서 그 物品을 代納하고 差額되는 利益을 分食하는 것이다.

大抵 李朝의 吏胥는 行政上 한 特殊階級으로 存在하였다. 吏胥는 原來 國家의 官吏가 아니오 各郡의 行政事務를 돕는 事務員으로서 아무런 俸給이나 報酬를 받지 아니하는지라 李朝開國 初에는 事務는 多端하되 生活費를 얻을 길이 없음으로 苦役과 窮困을 견디지 못하여 逃亡하는 者도 적지 아니하더니 그 後에 百姓들로부터 橫斂하는 曲逕을 發見하고 또 所謂 郡守 縣令은 그 地方의 實情을 잘 알고 있는 吏胥의 힘을 받지 아니하면 郡政을 行할 수가 없음으로 郡行政의 實權은 全혀 吏胥의 손에 쥐여있었고 더욱이 全國 三百餘郡에는 모두 그 地方 出身의 吏胥가 있어 國家에서 任命한 守令과 百姓의 中間에 介在하여 事務階級으로써 一大勢力을 形成하고 있어 守令은 勿論이오 中央政府에서도 그 勢力을 無始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吏胥들이 貢物 檢査를 하게되니 그 合檢 不合檢은 專혀 그들의 一口一筆에 달려 있고 거기에 따라서 防納制가 생기게 되니 百姓에게 끼치는 弊害는 실實로 莫大하고 世祖在也하는 동안은 嚴格하고 果斷있는 行政으로 能히 이 弊害를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임금 때로부터 漸漸 復活되고 말았다.

世宗이 六鎭을 建設한 뒤에 野人들의 侵略이 그치지 아니 하고 端宗 때에는 그 勢力이 더욱 盛하였음으로 朝臣 中에는 六鎭을 抛棄하자는 卑屈한 論者도 있어 한동안 서로 議論을 다투었다. 世祖가 王이 된 뒤에 처음에 鴨綠江기슭의 四郡을 廢하고 野人들을 撫摩하기로 하였으나 갈수록 그들의 버릇이 사나워 짐으로 世祖는 會寧을 엿보는 野人을 쳐서 이를 豆滿江 북쪽으로 쫓고 또 申叔舟를 보내어 江 內外의 野人의 巢窟을 엎었으며 魚有沼 南沼 將軍 等을 시켜서 婆豬江의 野人 魁首 李滿住의 父子를 잡아 죽였다.

世祖의 王位 爭奪 亂은 李氏王家의 開國 初부터 있은 例의 骨肉戰이오 六臣의 死는 主를 爲한 死節이라 君主政治 時代에는 흔히 있는 일이오 아무런 特異한 것이 없으나 다만 이 亂이 우리나라의 政治와 人心에 미친 影響은 實로 크고 또 深刻한 것이었다. 高麗 末에 鄭夢周가 國事에 殉節하고 그 弟子 길재吉再(號) (冶隱)가 鄭夢周의 理學 系統을 繼承하고 그것이 金叔慈(號) (江湖))를 거쳐 金宗直(號) (佔畢齊)에게로 傳하였는데 이 系統의 學을 받은 儒士들은 節義에 對한 觀念이 가장 强하고 따라서 世祖의 行事에 對하여 큰 憤怒를 품고 世祖에게 붙어서 功臣이 된 鄭麟趾 申叔舟 韓明澮 權擥 等을 極度로 미워함은 勿論이오 韓明澮 같은 사람은 이 功勞로 國舅가 되었기 때문에 儒士들은 王室의 外戚까지를 몹시 미워하여 이때로부터 儒士 對 功臣 戚里의 激烈한 鬪爭이 벌어져서 爾來 百餘年동안을 政界의 大小事件이 主로 儒士 對 功臣戚里의 싸움으로부터 일어났고 畢竟 우리 社會를 亡쳐버린 朋黨 싸움의 始初인 東西分黨도 儒士 對 戚里의 싸움에서 發端한 것이다.

또 한가지 影響은 벼슬하는 사람들이 君主에 忠誠을 다하다가 世祖의 毒手에 걸려서 無慘히 죽고 그 家族까지 虐殺 當하는 것을 보고 世事의 無常함을 보고 長太息하고 自後로는 保身之策에 置中하고 될 수 있는 대로 伉直한 行動을 避하려 하였음으로 政界의 空氣가 因循姑息과 悠悠泛泛에 흘러서 創造와 革新을 行하려는 活氣를 全혀 잃으니 이것이 李朝一代를 通하여 新銳와 獨創이 생기지 못한 主因이 되었다.

李朝開國 以來로 西北人을 쓰지 아니함으로 西北人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太祖를 도와서 革命을 成功한 西北 猛將들도 모두 憤氣를 품고 鄕里에 돌아갔으며 特히 太祖의 牙將으로 있던 佟豆蘭도 太祖가 姓을 李氏를 주고 淸海伯을 封하여 特殊한 待遇를 하였으나 亦是 不滿을 품고 削髮爲僧하여 그 털과 上疏文과 함께 封하여 太祖에게 올리고 逃亡하여 그 故鄕인 咸鏡道 北靑으로 돌아가니 太祖는 後日에 或 變을 生할까 두려워하여 그 家族을 漢陽으로 옮겨온 일도 있다.

그러던 中 世祖의 亂이 일어나서 人心이 불안하게 되자 咸鏡사람 李施愛가 亂離를 꾸며서 咸鏡監司(申叔舟)의 아들)를 죽이고 各地에서 亂民이 일어나서 守令들을 죽였다. 世祖는 軍士를 보내어 여러 달 만에 平定하고 爾來百年동안 咸鏡道에 停擧를 行하였다.

李朝基礎의 完成

世祖의 다음에 睿宗은 位에 있은지 一年이오 成宗이 王이되니 이때는 李朝의 基礎가 굳어지고 또 여러 가지 制度가 갖추어졌다. 王은 儒臣 金宗直 等을 쓰고 東國通鑑 東國與地勝覽 東文選같은 冊을 만들고 또 世祖때에 始作하여 끝마치지 못한 經國大典을 完成하니 이는 以後 數百年동안 政治를 行하는 기틀이 되었다. 集賢殿은 世祖때에 廢하였으나 成宗은 弘文館을 새로이 두고 젊은 學者들을 工夫시키던 湖堂도 다시 始作하였다.

社會의 階級에는 네 層이 있어 그 地位가 職業과 社會的 待遇를 달리 하였으며 大槪는 居住地域도 달리하고 또 다른 階級과 婚姻하는 일도 적었다. 여러 階級 中에 가장 上層에 있는 것이 兩班이니 兩班이라 함은 東班인 文官과 西班인 武官을 合한 말이다. 公卿과 士大夫 階級을 통틀어 말함이며 이들은 政治를 指導하는 地位를 차지하여 모든 特權과 享樂을 누리었다.

그 다음에 中人 階級이 있으니 그들은 醫官 譯官 計士 觀相 律學 寫字 圖畵 等 國家에 要緊한 技術 方面의 일을 맡아보았다. 社會的 地位는 양반과 常民의 中間이었으며 이 밖에 吏胥와 軍校 같은 層은 보다 얼마쯤 낮은 것이었으나 亦是 中人 階級에 屬하였다. 그 다음에 常民階級은 農業 工業 商業에 從事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數가 가장 많고 또 國家經濟의 中心을 이루고 있으나 그 社會的 地位가 낮아서 自己의 生存權을 保全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兩班과 中人에게 눌리어 지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賤民階級은 奴婢를 비롯하여 俳優 巫堂 妓生 驛卒 白丁 等을 말하는 것이니 奴婢에는 國事에 屬하는 것을 公奴婢라하고 個人家에 屬하는 것은 私奴婢라 하며 白丁에도 지금에 흔히 말하는 소 잡는 사람만이 白丁이 아니라 柳器 匠皮 革工 같은 것도 모두 白丁이라 불렀고 이들은 人權을 主張하지 못함은 勿論이오 어떤 境遇에는 牛馬와 同樣의 待遇를 받았다.

外交關係에 있어서는 明나라에 對한 朝貢과 日本 南陽 等에 對한 交隣이 있었는데 이러한 外交의 裏面에는 隣國들과 平和로운 貿易을 行하려는 것이 있었다. 明나라와의 關係는 해마다 使臣을 보내어 朝貢貿易을 行하고 저쪽에서 使臣이 오면 이를 勅使라 하여 特別히 待遇하였는데 朝貢貿易이라 함은 物貢의 形式을 通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의 公的貿易을 行하는 것으로 이는 中國 사람들의 大國然하는 自尊心에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貢物의 形式으로 내어가는 物件은 金銀, 人蔘, 豹皮, 苧布, 花紋席, 螺鈿, 白紙 等이었고 그 代身 저쪽에서 들어오는 것은 主로 絹緞, 磁器, 藥材, 書籍 等이었으며 이밖에도 國境 地帶의 私貿易과 密貿易을 通하여 두 나라 사이의 物資가 많이 交流되었으니 이 時代는 三國時代에 比較的 自由로 中國으로 往來하면서 學問도 배우고 貿易도 하던 때와 달라서 公的으로 中國을 다니는 以外에는 往來를 嚴禁하는 鎖國時代라 物資의 有無相通이 如意치 못함으로 鴨綠江 岸의 中江鎭과 豆滿江岸에서 年 一二次 公的貿易을 行하는 外에 密易이 年中 盛行하였다. 明나라에 바치던 金銀 貢은 世宗때에 外交 交涉에 依하여 免除되고 그 後로는 우리나라에서 金銀이 나지 아니함을 보이기 爲하여 金銀鑛을 廢한 일도 있었다.

日本과의 사이는 世宗 元年에 對馬島를 친 以後로 한때 交通이 그쳤었으나 對馬島는 山이 많고 食糧 其他 物産이 적어서 우리나라의 힘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음으로 저쪽에서 謝罪의 뜻을 表하고 다시 서로 和好하기를 懇請하였다. 이에 世宗은 三浦를 열어서 對馬島人이 와서 貿易함을 許諾하니 三浦라 함은 薺浦 (지금의 (昌原郡)(馬山傍) 薺德里의 乃而浦 釜山浦 蔚山의 塩浦이다. 그 後에 癸亥條約을 맺어서 해마다 對馬島 王이 보내는 배를 五十隻으로 限定하며 또 米豆 二百石 씩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貿易品을 倭人들은 銅 銀 硫黃 等의 鑛産物을 비롯하여 南洋의 特産인 蘇木 胡椒 香料 等을 들여오고 우리나라에서는 綿布 麻布 米豆 白紙 書籍(特히 大藏經)을 보내었다.

女眞과의 사이에는 豆滿江 기슭에 鏡城 鏡源의 貿易所를 열어서 그들의 馬匹과 여러 가지 獸皮 卽 土豹皮, 貂鼠皮, 熊皮, 鹿皮를 들여오는 代身 이쪽에서 金銀, 麻布, 苧布, 綿布, 農具, 釜鼎, 鍮器, 白紙, 鹽醬, 酒 等을 내어 보냈으며 또 女眞의 酋長들에게 職帖을 주어서 그 階級에 따라 서울에 와서 進上肅拜란 이름으로 公的貿易을 하게 하니 이는 朝貢貿易의 形式을 본뜬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지금의 太平路에 太平館이 있어 明나라 使臣들을 接待하고 東大門안에는 北平館이 있어 倭人들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와서 묵을 때면 後市라는 名目으로 館所 에서 貿易이 行하여 졌다. 이 밖에 琉球國에서도 자주 使臣을 보내어와서 蘇木, 胡椒, 香料, 雪糖, 錫, 서각(犀角) 等의 여러 가지 珍奇한 南洋産物을 가져오고 우리나라의 綿布, 麻布, 大藏經 等을 얻어 갔으며 暹羅(지금의 (泰國))에서도 方物을 가지고 使臣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外國 使臣이 우리 國境에 들어오면 政府에서 그들을 厚待하는 뜻으로서 서울까지 오는 費用과 서울에서 머물고 다시 돌아갈때 國境까지 나가는 費用을 負擔하였고 그 보내는 物件도 가져온 物件의 倍를 주었음으로 南洋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주 使臣을 보내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負擔이 적지 아니하니 이는 外國이 우리나라에 朝貢한다는 形式을 꾸미고 貿易上 實權을 取하려 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外國의 朝貢을 받는 것을 滿足하게 생각할 뿐이오 우리나라 사람이 海外에 나가서 貿易하는 길을 全然 閉鎖하여 버리니 이 까닭에 貿易關係에는 恒常 損을 보고 國民의 海外 雄飛의 氣象은 날로 사라졌다.

成宗의 世는 建國한지 이미 八九十年이라 國家의 基礎가 굳어진 때라 漸次 保守의 傾向이 生하고 모든 部面에 硬化 沈滯의 빛이 濃厚하여지니 史家들은 이를 盛極時代將衰의 期라 한다.

特히 貴族의 勢力이 强하고 班常의 區別이 嚴하며 全國的으로 不過 三十 內外의 族閥이 政治를 專行하고 地方別로는 京畿 忠淸 慶南의 三道가 貴族 住居의 中心이 되었다. 또 男尊女卑의 制度가 더욱 嚴格하여 女子의 改嫁를 不許하고 再嫁女의 所生한 子孫은 國家가 敍用치 아니하고 貴族들은 寡婦를 禁錮하는 것을 家內의 榮譽로 여겼으며 妾의 所生한 子孫은 庶孼이라 하여 賤待하고 庶子들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니 이 庶子는 所謂 그 아비된 者가 享樂과 淫慾의 滿足을 얻기 爲하여 生긴 産物이오 母腹으로부터 落地하는 瞬間이 이미 賤待를 받을 運命을 가졌으니 庶子의 庶子된 罪는 아비에게 있는 것이오 庶子自身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된 者는 妾을 蓄하는 날에 벌써 庶子의 出生할 것이 約束되었고 그 庶子가 社會로부터 賤待를 받는 것을 알면서 蓄妾生活을 하는 것은 그 心身의 腐敗한 所致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오 더욱이 庶子孼 賤待의 制度는 蓄妾을 가장 많이 하는 貴族階級들이 만든 것이다.

世祖때에는 强力한 專制政治를 行하여 비록 諫官이라 하더라도 言論의 自由를 行치 아니하더니 成宗이 性質이 仁柔하고 言語를 開하여 諫官들의 言論自由를 認하니 이에 儒臣 對 功臣戚里의 싸움이 벌어졌다. 儒臣들은 世祖때에 가슴속에 쌓여 있으되 發表할 수 없었던 鬱憤이 一時에 터져 나와서 功臣戚里의 조금이라도 過誤를 犯함이 있는 때는 一毫의 寬容이 없이 論駁 攻擊하고 어느 한 사람이 攻擊을 始作하면 儒臣 全體가 그를 應援하여 朝廷은 儒臣이 指導權을 잡고 成宗도 大體로 儒臣들의 말을 聽從하였다.

이때의 儒敎는 高麗時代의 漢學과 달라서 宋나라의 程朱學인 性理學을 말하는 것이니 性理學을 또한 理氣說이라 하고 金宗直의 弟子 가운데서 性理學에 가장 밝은 사람은 鄭汝昌 (號) (一蠹)) 金宏弼(호(號) (寒暄堂))이니 鄭汝昌의 理氣論에는 「理의 在하는 바에 氣가 또한 聚하고 氣가 動하는 바에 理가 또한 着하여 彼此의 別이 없다. 그러나 理는 渾然至善하여 爲함이 없고 氣는 醇醨(漓)淸濁하여 運用이 있어 彼此의 別이 있으니 이를 一하되 二하고 二하되 一한다 함이다. 理가 없으면 氣가 凝做할 바가 없고 氣가 없으면 理가 流行치 못한다」하니 이것이 理氣說의 大要이다. 이 理氣說의 새로운 理論은 靑年學者들 사이에 歡迎되고 李朝一代 學問의 中心이 되었다.

이와 같이 儒敎를 崇尙하였음으로 敎育과 科擧도 또한 儒學을 中心으로 하였으니 敎育機關으로는 서울에 成均館(지금의 國立大學校)을 비롯하여 四部學堂이 있고 外方에는 고을마다 鄕校가 있고 마을에는 書堂이 있어 主로 敎의 經典을 가르쳤고 이밖에 特殊 科目으로 天文 地理 醫學 律學 算學 書學 畵學을 硏究하는 機關이 있고 또 漢語 女眞語 蒙古語 倭語 等을 가르치는 機關도 있다.

科擧는 國家에서 人才를 取하는 最高 試驗이라 太宗 世宗의 時代에는 主로 政治 經濟 社會 等 主要한 現實問題에 對한 論文을 試驗하더니 成宗 以後에는 그러한 論文 試驗이 점점 적어지고 主로 文章을 取하는 詩賦表策 等의 試驗이 行하니 이 詩賦表策 等의 試驗은 그 속에 治國 經綸이 있는 것도 아니오 國民生活 上에 어떠한 關聯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다만 工巧로운 尋章摘句와 吟風弄月을 일삼는 것이니 이 까닭에 所謂 學問은 形式에 흐르고 實用이 없는 貴族階級의 遊戱物이 되고 말았다. 그럼으로 鄭汝昌같은 이는 巧詩 하는 士를 取하지 아니하여 말하되 「詩는 性情의 發함이라 어찌 屑屑하게 工夫를 强下하리오」하였다.

李朝開國 後에 外方官吏의 民弊를 作하는 者가 있고 없음을 調査하기 爲하여 자주 敬差官이라는 特使를 보내더니 그 後에 그 官名을 御使라 고쳐서 秘密히 各道에 보내 이가 暗行御史의 起源이다. 成宗때에 이르러 王이 性質이 仁柔하여 官吏가 罪를 받는 者가 極히 적고 泰平盛代라고 일컬었으나 그 反面에 民弊를 作하는 官吏가 많이 생겨서 社會內部에 頹廢의 氣運이 싹트기 始作하였다. 이에 暗行御史를 各道에 派遣하니 當時 趙之瑞 鄭光弼 金馹孫 같은 이가 모두 名御使였다.

御使의 任務는 大體로 國法을 지키지 않는 者, 父母에 不孝하는 良風美俗을 害하는 者, 守令이나 吏胥들이 國穀을 盜賊하고 人民을 괴롭게 하는 者等 法律과 道德에 어그러지는 行爲 一切를 調査하고 그것을 犯한 者를 發見할 時는 王의 代理의 資格으로 그 고을에 出道하여 或은 守令을 罷免시킬 수도 있고 或은 罪人을 先斬後啓할 수도 있음으로 外方에서는 御使를 虎라고도 불렀다.

御使가 數月의 동안에 一道를 巡行하는 것임으로 奸吏들의 所行을 一 一히 探知할 수는 없으나 한번 出動하면 一道가 肅然하여 奸惡을 恣行치 못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에 畜猫가 있으매 鼠가 肆行치 못한다.」하였다.

燕山君의 失政

成宗 王妃 尹氏는 燕山君의 生母라 尹妃가 王에게 不遜한 일이 있음으로 王이 廢位하였다가 죽였다. 燕山君은 性質이 元來 亂暴한데 그 母가 寃死함을 알고 心中에 깊은 惡感을 품고 있었다. 이때 臣下들 中에는 後日에 燕山君이 王位에 오르면 반드시 國事를 크게 그르치리라고 諷諫한 사람도 있었으나 成宗도 그 性味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참아 世子를 廢할 수가 없다하여 實行치 못하고 마침내 燕山君을 세워서 李朝 衰頹의 端을 열었으니 이는 專혀 成宗 柔弱의 所致이다.

燕山君이 王이 된 後에 儒臣 對 功臣戚里의 싸움은 如前히 激化하였다. 成宗은 恒常 儒臣을 擁護한 까닭에 儒臣의 言論이 實行되었지만 燕山君은 昏暗한 임금이라 儒臣들이 功臣戚里를 攻擊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또 그때 朝廷에는 功臣의 子孫들과 外戚의 무리가 權勢를 잡고있어 儒臣들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런데 金宗直이 일즉 「弔義帝文이라는 글을 지은 일이 있으니 이 글은 옛날 中國에 項羽가 義帝라는 어린 임금을 세우고 섬기다가 죽인 일이 있는데 隱然히 義帝를 端宗에 比하고 項羽를 世祖에게 比하고 義帝를 弔함은 곳 端宗을 弔함이라 宗直의 弟子 金馹孫이 史官이 되어 이 글을 史草에 記載하고 그 끝에 「忠憤之文」이라고 附記하였다.

功臣戚里派 中의 李克墩 柳子光 等이 이 史草를 보고 이는 世祖의 일을 誹謗하는 것이라 하여 燕山君에게 알리니 燕山君은 이를 大逆罪라 하여 金宗直의 屍體를 파내어 버리고 金馹孫 鄭汝昌 金宏弼 等을 비롯하여 그의 弟子들을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戊午士禍 또는 史禍라 하고 李朝 儒學界에 第一次의 劫運이었다.

燕山君은 淫蕩하고 遊宴을 좋아하여 莫大한 財政을 消費하고 遊宴費가 不足하게 되자 人民으로부터 貢物을 加徵하여 祖宗 以來의 規準을 깨뜨리고 奸人輩를 登用하여 國政을 混亂케 하더니 戊午士禍가 있은지 六年만에 그 生母 尹氏를 廢하여 죽일 것을 主張한 사람들을 調査하여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 보내니 이를 甲子士禍라 하고 儒學界의 第二次 劫運이었다. 두 番의 士禍가 있은 後로 燕山君은 虐政이 더욱 甚하여 政治가 어지럽고 百姓이 살 수 없으니 이에 成希顔 朴元宗 等이 反正運動을 일으키어 燕山君을 廢하여 江華島의 喬桐에 내치고 燕山君의 아우 晉城大君을 推戴하여 세우니 이를 中宗反正이라 한다.

 

中宗反正後의 國政

中宗의 反正은 燕山君의 虐政에 괴로움을 받던 百姓과 두 番의 士禍에 氣가 꺾어진 儒學界에 한 光明을 주고 活氣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社會의 行方面에 改革의 氣運이 움직였다. 이때 金宏弼의 弟子에 趙光祖(號) (靜菴))가 있으니 그는 儒學을 振興하고 政治를 淨化함으로써 己任을 삼고 中宗의 信任을 얻어 金淨 金湜 等 靑年學徒와 더불어 그 理想한 바를 實現하기에 努力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鄕約法을 施行하여 地方自治의 制度를 세우니 鄕約이라 함은 中國 宋나라 사람들이 始作한 것으로 한 地方사람끼리 自治的인 規約을 만들어 善한 일을 서로 勸勉하고 惡한일을 서로 規諫하고 禮義로써 서로 交際하고 患難을 서로 救濟한다는 네 가지 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中宗反正의 때에 功臣에 濫參한 者가 많았으니 元來 反正功臣이라 함은 反正事業을 劃策하고 身命을 그 事業에 바친 者를 말함이다. 그런데 中宗의 功臣中에 擧事하는 날에 그 所聞을 듣고 비로소 와서 列에 參擧한 者 實際로 이 事業에 貢獻한 일이 없이 功臣들과 因緣이 있는 者들이 功臣名簿에 記錄됨으로 因하여 功臣인 者가 七十餘人에 達하고 功臣들은 國家로부터 功臣田을 받아서 世襲하고 君을 封하여 社會的 特權을 享有하니 趙光祖 一派는 이러한 功臣들을 削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當時 反正의 功이 있는 功臣들 中에는 特權을 濫用하여 勢力을 얻기와 財貨를 모으기에만 힘쓰는 者가 적지 아니하니 이는 國家를 爲하여 反正事業을 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富貴를 얻으려 하는 反正 牟利輩의 行動이었다. 儒臣對 功臣의 싸움은 해를 지낼수록 더욱 深刻하여지는 터이라 趙光祖 儒臣一派가 이를 그대로 看過할 理가 없었다. 그리하여 功臣派에 어떠한 過失이 있는 때는 總蹶起하여 攻擊하고 王이 自己들의 意見을 듣지 아니하는 때에는 同盟退職한 일도 二三次 있었으나 中宗王은 暗王이라 趙光祖를 信任한 것도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信任이 아니라 다만 一般世論을 듣고 그를 賢人이라 하여 大用한 것이다. 그런데 趙光祖 一派는 中宗을 堯舜과 같은 聖君을 만들고 社會로 하여금 誠意正心할 것을 强要하다 깊이 歎하였다.

이 까닭에 趙光祖 一派는 弊政을 改革한 것이 많아서 百姓으로부터 歡迎을 받는 反面에 功臣 貴族들로부터 極度의 미움을 받고 王도 또한 漸漸으로 厭症을 내게 되었다.

趙光祖 一派는 專혀 道學을 主張하여 小學과 같은 修身書와 近思錄과 같은 性理學을 爲主하고 詩 賦 表 策과 같은 文章學을 排斥하며 人才를 取함에 있어도 文章으로써 科擧를 보는 現行試驗法을 廢止하고 人物考査로써 사람을 取하는 賢良科를 行하기를 建議하니 이때 領議政으로 있는 鄭光弼이 홀로 反對하여 말하되 賢良科의 이름은 비록 좋으나 人心이 淳厚치 못한 今日에는 반드시 弊害가 生할 것이니 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王은 趙光祖의 말을 좇아 마침내 施行하였다. 그러나 賢良科의 試驗官은 主로 趙光祖 一派가 當하고 있었음으로 그 取하는바 사람은 거의 性理學 派들이어서 文章을 主하는 선비들의 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人才를 씀이 偏僻하다는 非難이 各方面에서 일어났다.

李朝의 田制는 國有制이오 買賣와 典當을 禁하더니 徵兵制度에 入營하는 費用 또 兵役服務中 依食諸費를 軍人이 自擔하는 關係로 農民이 軍隊에 徵召되는 때에는 그 入營하는 모든 費用을 마련하기 爲하여 耕作하던 土地를 典當치 아니할 수 없고 典當期間은 五年으로하되 그 期間이 지나도 負債를 갚지 못하는 때는 土地가 貸金業者의 所有로 넘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國法에 違反되는 일이나 國家에서는 軍隊徵召上 禁止할 수 없는 일임으로 黙認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 田制破綻의 始初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典當行爲가 秘密裏에 行하더니 乃終에는 公公然하게 慣習化하고 所有의 移轉도 自由로 行하여 完全한 私有制로 化하고 따라서 土地없는 農民들은 남의 土地를 耕作하고 收穫物의 一部를 地主에게 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地主와 小作人이 發生한 始이오 世宗 末年으로부터 世祖때에 걸쳐서 생긴 일이다. 그 後에는 典當期間 五年이라는 것이 五十日로 短縮되니 軍隊로 徵召되는 軍人이 五十日 期間內에 還土할 수는 없음으로 典當하는 날이 곧 土地가 永永 放賣되는 날이다.

이 까닭에 貧民들의 耕地는 急速度로 富人의 손에 兼倂되고 中宗때에 이르러서는 地主와 小作人이라는 두 階級이 똑똑히 社會面에 나타났다. 江陵사람 朴遂良은 御前에서 賢良科 試驗을 마치고 말하되 「平素에 生覺하고 있는 바를 한번 殿下께 아뢰고자 하였는데 이 機會에 아뢰어도 좋은가」라고 물어서 王의 許諾을 받고 아뢰기를 「지금 江陵 地方은 土地없는 農民이 許多하여 農民 生活이 대단히 窮乏하니 이것은 하루바삐 고치지 아니하면 國家의 將來에 큰 근심이 될 것이니 다시 均田制를 行하는 것이 可하다」고 하였다.

重臣들 中에는 地主의 土地를 國家에서 收上하여 土地없는 農民에게 분급(分給)할 수 는 있으나 그렇게 하면 空然한 混亂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反對하고 前日에 分給한 것을 地主에게 팔고 農土를 잃었으니 지금 分配하여 주더라도 또 後에 다시 地主에게 팔 것이 아니냐하여 應치 아니하였다. 이 問題가 한번 提議되자 朝廷안에는 兩論이 對立하고 趙光祖 派에서는 土地를 다시 分配하자는 革新論을 主張하여 비록 後日에 다시 팔아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今日의 일은 今日의 情에 맞게 하는 것이 政治의 本旨라 하여 期於히 土地制度를 改革하려 하였다. 王은 重臣들로 하여금 여러 날 동안 討論시킨 結果 한 사람의 土地 所有는 五十結 以內로 制限하기로 하니 當時에 있어서 土地 所有를 制限한 것은 一大 改革이 아닌 것은 아니나 大體로 地主階級에 有利한 解決이오 今後의 土地 兼倂의 防止에 아무런 實效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地主 階級이 이 制度令에 對하여 不滿을 가진 것은 勿論이다.

趙光祖 一派의 政治 理念은, 그 理想은 좋으나 그 手段이 過激한 點이 많고 功臣 貴族들과의 사이에 極端의 非妥協 態度를 取하고 性理學派 以外의 사람에게는 偏狹한 排他心으로 對하여 當時 賢 宰相으로 이름난 鄭光弼같은 이도 그들은 鄙夫라고 痛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自己 일파一派의 사람들을 朝廷에 布列하고 漸漸 政治의 實權을 잡으며 百姓들은 그들을 크게 歡迎하게 되니 이에 王은 隱然히 危懼 不平한 마음을 품게되었다. 그러던 中 그들은 七十餘人의 僞勳을 削除하자고 提議하니 功臣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들기 始作하고 平素에 儒臣派로부터 小人이라는 이름 밑에 極度의 排斥을 받은 南袞과 功臣의 한사람인 沈貞 等이 主動이 되어 便으로 王의 마음을 動搖시키고 便으로 趙光祖 派의 謀逆함을 誣告하여 中宗 十四年 己卯에 趙光祖와 그의 同志들을 一網打盡하여 卽回로 죽이려하는 것을 鄭光弼이 王의 소매를 붙잡고 「新進 年少들이 時務를 알지 못하고 그 行動이 過激하였을 뿐이오 異志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挽留하여 모두 귀양살이 보내더니 未久에 謫所에서 大部分을 죽이니 이것이 己卯士禍이다. 이 禍가 있은 後에 賢良科를 廢하고 土地制度 限令이 스스로 消滅됨은 勿論이오 小學과 近思錄을 읽는 者는 모두 趙光祖 派라 하여 强壓함으로 이러한 글은 當世의 큰 禁物이 되고 南袞 沈貞 等이 用事하여 政治를 어지럽게 하고 鄭光弼도 그들에게 물려 나갔다.

南袞 沈貞 等이 政權을 잡고 그 黨類를 이끌어 들여 政治를 어지럽힌 지 十餘年에 王은 그 무리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金安老를 써서 그 무리를 없애니 이를 以毒制毒이라 하여 安老의 凶惡함은 袞貞의 무리보다 더 甚하였다. 安老가 用事한지 七年에 王은 그 一派를 모두 除去하니 奸臣이 政權을 잡음이 前後 十九年동안이라 王은 크게 悔悟하여 歎息하되 「처음에 趙光祖 一派를 몰아내면 國事가 잘될 줄 알았더니 袞貞 一派의 奸惡은 말할 수 없이 甚하였고 이 一派를 몰아내면 今後는 아무 일 없을 줄로 생각했더니 安老의 凶惡은 前보다 더 甚하여 國家를 危殆롭게 하고 百姓을 괴롭게 하였다. 後世에 나를 어떤 임금이라 稱할고」하고 鄭光弼을 謫所로부터 불러들여 政丞을 삼으니 百姓들이 天日을 본듯이 歡呼하였다. 이에 小學 近思錄의 禁이 스스로 풀리고 儒臣들을 擧用하였으며 豊基郡守 周世鵬은 비로소 書院을 짓고 거기에 先賢을 모시고 儒生들이 모여서 道學을 硏究하게 하니 이것이 李朝書院의 始初이다.

그러나 中宗은 暗主라 朝廷안에 王權 爭奪의 端緖가 열리었다. 中宗도 妃에 先妃 尹氏는 仁宗을 낳고 繼妃 尹氏는 明宗을 낳았는데 仁宗의 外叔은 尹任이오 明宗의 外叔은 尹元衡이니 世人이 尹任을 大尹이라 하고 尹元衡을 小尹이라 하고 이 두 사람의 勢力 다툼을 大尹 小尹의 싸움이라 하였다. 仁宗은 中宗을 이어 王이 된지 겨우 一年에 昇遐하고 아들이 없음으로 그 아우 明宗이 十二歲에 王이 되고 그 母后 文定王后가 政治 實權을 잡고 尹元衡이 用事하니 最初부터 戚里派를 미워하는 儒生들이 明宗 外家의 擅政함을 좋아할 理가 없었다. 이에 尹元衡은 前부터의 政敵인 大尹 一派와 自己에게 좋지 못한 感情을 가지고 있는 儒臣들을 一切 排除하기로 定하고 明宗이 王이 되던 乙巳年에 根據없는 事實을 꾸며서 逆賊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或은 죽이고 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乙巳士禍라 한다.

乙巳士禍는 여러 次例 士禍 中 가장 慘酷하고 人心이 가장 憤慨하였다. 戊午 己卯의 士禍는 그 相對者가 奸臣들이었고 甲子士禍는 燕山君이 그 어머니를 爲한 復讐이니 或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乙巳士禍는 王의 母后와 王의 外叔이 아무런 罪가 없는 儒臣들을 誣陷하여, 絶對忠誠을 다할 것을 學問의 大本을 삼고 있는 儒學徒들도 王室에 對한 忠誠이 엷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前者에 세 번의 士禍에는 비록 慘酷한 變을 當하였으되 오히려 다시 儒學을 振興하여 그 理想하는 바를 政治의 面에 實現하려고 努力하는 사람이 連달아 나왔지만 乙巳士禍 以後에는 그들은 政治에서 물러나 現實 世上과 因緣을 끊고 山林에 숨어서 오로지 學問에만 힘쓰게 되었음으로 政治와 學問이 나뉘어져서 所謂 山林學者라는 것이 생기고 實事를 떠나서 理論에 行動을 떠나서 思索에 치우치는 傾向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徐敬德(號) (花潭) 曺植(號) (南溟) 이李滉(號)(退溪) 奇大升(號)(高峯) 李之菡(號)(土亭)같은 一代 名儒가 나서 明宗時代의 儒學界에 꽃을 피웠으나 그들은 政治 方面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고 비록 李滉같은 이는 王의 부름을 받아서 벼슬에 나온 일이 있으나 기회만 있으면 다시 山林으로 돌아갔음으로 그때에 이를 評하여 山禽이라고 別名을 지은 일도 있었다.

日本과의 關係

世宗때에 玉浦를 열어서 貿易을 許諾한 것이 그 後 차츰 倭人의 數爻가 늘어서 數千名에 이르며 朝廷의 命令을 어기는 일이 적지 아니하더니 中宗 五年(단기 삼천팔백사십삼년 (庚午)에 對馬島와 連結하여 亂을 일으키니 이를 三浦倭亂 또는 庚午倭變이라 한다.

이 亂은 곧 平定되었으나 그 後에도 中宗 三十九年에 統營郡 蛇梁에서 變亂을 일으킨 일이 있고 明宗 十年 乙卯에 또 다시 海南郡 達梁浦에 侵入하니 이를 乙卯倭變이라 한다. 元來 倭人들은 我國과 貿易하지 아니하고는 살수가 없는 데이나 그 貿易額에는 制限이 있으므로 倭人들은 秘密히 制限外의 貿易을 行하고 또 變裝하고 居住區域밖에 나와서 民家로 좇아 다니면서 장사하는 한便 國家의 政治와 事業의 機密을 偵探하여 倭 本國에 報告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에 政府에서는 地方官吏에게 命하여 그를 嚴禁한 關係로 兩國民의 感情이 서로 좋지 못하여 마침내 三浦의 變이 일어나고 그 變이 平定된 뒤로 從來의 貿易額을 半으로 줄이니 이때로부터 倭人의 我國에 對한 感情이 더욱 惡化되었다.

이에 朝廷에서는 倭人들이 倭寇를 잡아 바치었다든가 漂流한 우리나라 사람을 돌려 보내주었다든가 하여 우리나라에 功勞가 있는 者에게는 官職을 주어 이를 守職倭라 하여 特別한 待遇로써 그들을 撫摩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그들의 感情은 마침내 풀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奸狡한 꾀로써 우리나라를 속이고 우리나라 國政을 密偵하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들을 對할 때 敬語를 쓰는 일이 적고 흔히 왜놈이라 불러서 侮辱하였다. 金安國같은 이는 이를 근심하여 兩國民 사이의 感情이 좋지 못하고 將來 國家에 利롭지 못하리라고 警告한 일도 있었다.

乙卯亂이 일어나자 朝廷에서는 李浚慶으로 都巡察使를 命하여 치게 하니 李浚慶이 湖南에 내려갔으나 軍士도 몇 사람 되지 아니하고 武器도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한편으로는 軍士들을 召集하고 한편으로는 武器를 만들어서 迎擊하더니 賊은 掠奪하여 가지고 海上으로 도망하였다. 이 亂이 있은 後에 한동안 兩國 交通이 끊어지더니 日本이 다시 通商하기를 懇望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들을 撫摩하는 것이 得策이라 하여 通商을 許하는데 從來에 開港한 菁浦方面은 疊疊한 島嶼에 싸여서 倭船이 숨기 쉽고 우리나라의 斥候가 보기 어려움으로 釜山 一港을 열어서 倭船의 來往을 許하니 이는 釜山에 섬이 없어서 倭船의 來往을 보기 쉬운 까닭이다.

社會의 腐敗

燕山君 以後 六十餘年 間 奸臣이 政權을 잡을 때가 많았고 明宗 末年에 이르러서는 政治가 極度로 어지럽고 貨賂가 盛行하여 社會는 腐敗 一路를 걷고 있었다. 外方의 貢物은 開國初에 地方産物과 戶口數를 勘案하여 定한 것인데 燕山君이 이를 加徵하고 또 産物이 數量과 戶口가 五六十 年間에 變動된 것이 적지 아니 하되 朝廷에서는 그것을 民間 實情에 맞도록 改正치 아니하여 民弊가 甚하였다.

軍役은 軍布을 바치고 徵召됨을 免하는 制度가 行하였는데 이는 各 鎭堡가 軍布를 받아 가지고 軍人을 傭人하기 爲함이다. 그러나 鎭堡의 主將이란 者들은 軍布로써 私腹을 채우고 軍士를 傭人치 아니 하는 까닭에 各 鎭堡의 實際 人員은 定員數의 千의 二三에도 達치 못하고 軍籍에는 虛名 假名 甚至於 狗名 猫名까지 씌어있었다. 그리고 한번 軍布를 바치기 始作한 사람은 每年 繼續하여 바치기로 되어있는데 或은 그 사람이 死亡한 뒤에도 如前히 徵布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 白骨徵布라하고 或은 乳兒에게도 徵布하였으니 이를 黃口徵兵이라 하고 或은 사람이 苦役을 견디지 못하여 全家를 거느리고 逃亡하여 버리면 그 軍布를 그의 一族으로부터 받고 一族이 없으면 切隣으로부터 徵收하니 이는 軍布가 主將의 私收入이 되는 까닭에 死亡 乳兒 逃亡 같은 事實을 國家에 報告하지 아니하고 繼續 徵收하는 것이며 이로 因하여 鎭堡에는 每年 固定不變하는 軍布 收入이 있었다. 그럼으로 이때에는 各 鎭堡의 價格이 軍布 疋數에 定해져서 그 價格의 多少로써 地位의 高下를 定하는 것이었다.

吏胥의 弊亡 前부터 있는 일이지만 中宗 明宗의 前後 三十餘年 間 中央의 政治가 어지러움으로 因하여 더욱 甚하여져서 모든 苛斂誅求에 百姓들은 그 生活을 維持할 수 없었고 當時 郡縣의 數는 三百二十 餘인데 郡縣이 너무 많아서 百姓의 負擔이 過重함으로 이를 廢合하여 百姓의 負擔을 輕減하려고 企圖한 일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吏胥의 失職하는 者가 많게 됨으로 郡縣의 實權을 잡고 있는 吏胥들은 中央政府 內의 奸臣輩들과 結託하여 極力으로 沮害한 일도 있었고 守令들은 中央으로부터 任命되어 三年이라는 任期(任期에는 伸縮이 있었다.)를 지내는데 地方의 實情을 잘 알지 못함으로 그 대大部分은 吏胥의 손에 事務를 맡겨 버리는 形便이어서 百姓들은 守令보다도 吏胥를 두려워하였으니 이 까닭에 國家의 末端行政은 吏胥政治로 化하였다.

曺植 같은 이는 明宗에게 上書하여 王의 母后 文定王后가 寡婦로서 政治를 어지럽게 한다는 寡婦干政論과 郡縣의 吏胥輩들이 國事를 그르치고 있다는 吏胥亡國論을 올려 世人의 耳目을 聳動케 한 일도 있었다.

이때 儒臣들은 여러 次例의 士禍를 겪어서 비록 氣가 꺾이었으나 그 潛在한 힘은 더욱 굳세어 功臣戚里들을 미워하는 생각이 날로 强해지더니 明宗 末年에 文定王后가 죽음에 從來 王后의 힘을 背景으로 하여 온갖 橫暴를 恣行하던 尹元衡은 依支할 곳이 없는 一獨夫라 儒臣들은 一齊히 蹶起하여 마침내 尹元衡을 몰아내고 무리를 一掃하였다.

明宗의 뒤를 이어 宣祖가 王이 되니 이때는 名相 李浚慶이 領議政이 되고 朝廷이 儒臣 一色으로 組織되었다. 世祖때에 儒臣 對 功臣戚里파의 싸움이 일어난 以來 一百十餘 年만에 비로소 儒臣이 完全히 政權을 잡으니 이로부터 그 理想하는 바의 政治를 實現할 時機가 到來한 것이다.

그러나 李浚慶은 그 臨終 遺箚에 「只今 士習이 浮虛하여 虛僞가 風을 作하니 朋黨의 漸이 있다」고 警告하니 當時 儒士들이 輕躁하여 篤實한 風이 없고 高言大談을 일삼고 사람의 조그마한 過失이라도 寬容함이 없이 攻擊하기를 좋아함으로 반드시 朋黨이 생긴다고 豫言한 것이다.

이 遺箚가 한번 들어오자 朝廷 諸臣들은 朋黨이 없음을 極力 辨明하고 李珥같은 이는 李浚慶이 無根한 말로써 士林을 禍毒하는 것이라 하여 攻駁하고 甚至於 李浚慶을 追罪하자는 激論까지 일어난 일이 있으니 이는 自己들이 決코 朋黨을 만들지 않을 것을 盟誓함과 같음이다.

그러나 李浚慶이 죽은지 四年만인 宣祖 八年 乙亥(檀紀 三千九百八年)에 마침내 東西分黨이 생기고 말았다. 처음에 沈義謙은 王室의 外戚으로서 明宗때에 奸臣들의 行惡이 甚한 中에서 儒士들을 救活한 일이 많았음으로 비록 沈이 戚里派에 屬하되 儒臣들의 好感을 얻고 있으며 金孝元은 新進 儒士로써 年少儒臣들의 推仰을 받고 있었는데 金孝元은 沈義謙을 戚里派라 하여 排擊하고 沈義謙은 金孝元이 일직 權臣의 門에 出入하였다 하여 蔑視한 關係로 두 사람사이에 葛藤이 생겼다. 이에 沈義謙을 右하는 者와 金孝元을 右하는 者가 생기고 輕佻浮薄한 무리들이 마치 正月 初生 줄다리기에 兩便에 서로 와서 덧붙듯이 或은 沈義謙派에 붙고 或은 金孝元派에 붙어서 朝廷안이 兩黨으로 갈라지니 沈의 집은 서울의 西便에 있음으로 그를 西人이라 하고 金의 집은 東便에 있음으로 東人이라 하고 또 老成派는 大槪 西人이 되고 少壯派는 大槪 東人이 되니 儒臣 對 功臣戚里派의 百十餘年間의 激烈한 鬪爭은 亦是 儒士 對 戚里의 些少한 感情 疏隔을 契機로 하여 그 形態가 一變하여 同流 相殘 同志 相食하는 儒臣 對 儒臣의 醜惡한 黨爭으로 化하였다.

黨爭이 한번 일어난 後 朝廷안에는 中正 不偏한 者가 거의 없고 오직 自黨의 이해를 爲하여 움직여서 政治의 理想이 있는 것도 아니오 事의 是非와 善惡을 가리는 것도 아니오 東人은 東人을 擁護하고 西人은 西人을 擁護하여 一大 亂鬪 場을 이루었다. 宣祖는 群臣에게 누가 朋黨을 만들고 있느냐고 問責한즉 群臣들은 朋黨이라는 말은 다만 巷間에서 流布되는 風說이오 朝臣中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辨明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쓰고 罪 줌이 모두 黨爭의 影響을 받아서 公論이 行치 못하고 政治가 어지러워짐으로 李珥는 이를 調停하는 것을 己任으로 삼고 分黨의 張本人인 沈義謙과 金孝元을 外官으로 내어보내면 黨爭이 멈추리라고 하여 王께 이 意見을 아뢰었던바 王은 沈義謙으로 開城 留守를 삼고 金孝元으로 會寧 府使를 삼으니 비록 同한 外官이로되 沈은 昇進되고 金은 貶點되는 結果를 生하였다. 이에 東人들은 크게 不平을 품고 또 金의 貶點은 李珥의 提案에 依한 것이라 하여 一齊히 일어나서 李珥도 公正한 調停者가 아니고 西人에 黨하여 東人을 壓迫하는 것이라 하여 攻擊을 行하니 李珥는 調停하기를 斷念할 뿐만 아니라 朝廷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으로 鄕里로 물러갔다. 이때 李之菡은 國事를 근심하여 말하기를 栗谷이 朝廷에 있으면 큰 效果는 없어도 破局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한번 물러가는 날이면 이 政局을 다시 收拾할 수 없으리라 하여 크게 歎息하였다.

飮食이 있는 곳에 반드시 다툼이 있는지라 처음에는 西人이 得勢하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東人이 힘이 커지자 東人 속에서 다시 內部에 싸움이 일어나니 이는 李山海를 中心으로 한 一派와 柳成龍(號 (西崖)을 中心으로 한 一派이니 李는 서울에 살고 있음으로 北이라 하고 柳는 嶺南에 살고 있음으로 南人이라 하였다. 이에 朝廷은 南 北 西의 三黨으로 나뉘어 三色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때 日本과의 關係는 날로 險惡하여 가고 國內 情勢는 黨爭으로 因하여 더욱 腐敗하여지고 特히 兵備가 極히 虛疎하여 北의 野人이나 南의 倭寇가 侵入하는 일이 있으면 到底히 막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李珥는 미리 十萬 兵을 養하여 京城에 二萬을 두고 各道에 一萬씩을 두어 廬外의 惡을 防備할지오 萬一 그렇지 아니하면 一年을 不去하여 土崩의 禍가 있으리라고 逕庭에서 아뢰나 柳成龍이 無事泰平한 때에 兵을 養하는 것은 禍를 養함이라 하여 反對하고 다른 朝臣들도 黨爭에만 熱中하고 國事를 근심하는 者가 없음으로 이 나라를 살리는 唯一策인 十萬 養兵論은 實現되지 못하고 말았다.

壬辰倭亂

宣祖 初에 日本에서는 豊臣秀吉이 國內를 統一하고 將次 大陸으로 進出할 野心이 있어 우리나라에 使臣을 보내어 兩國이 서로 親和하게 지내자 하고 또 우리나라에 侵入할 뜻이 있다는 風說이 퍼지고 있음으로 宣祖 二十三年에 朝廷에서는 黃允吉과 金誠一을 通信使로 日本에 보내니 그 形式은 兩國 修好를 爲함이나 其實은 秀吉의 態度를 打診함이다. 黃과 金이 돌아온 後 두 사람의 復命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 黃은 말하되 秀吉의 眼光이 빛나고 態度가 倨慢하니 반드시 入寇하리라 하고 金은 말하되 秀吉의 눈이 쥐눈 같고 人物이 보잘 것 없으니 반드시 入寇치 아니한다. 하였다. 黃은 西人임으로 西人들은 덮어놓고 黃의 말을 옳다하고 金은 東人임으로 東人들은 金의 말을 支持하여 國家明日의 興亡이 달려있는 重大 事에 敵의 實情을 깊이 檢討치 아니하고 오직 黨人 擁護만을 爲主하였으며 이때 東人의 勢力이 컸음으로 朝廷의 議論은 金의 말을 좇게 되고 宣祖도 또한 金이 善使하였다 하여 褒賞하고 着手中에 있는 南方의 軍備도 睡眠狀態에 빠지고 君臣以下가 모두 泰平夢에 醉倒하였다.

日本 秀吉은 우리나라의 軍備의 虛實을 前日의 使臣 往來 時에 미리 探知하고 宣祖 二十五年 壬辰(檀紀 三千九百二十五年)에 明나라를 치러가니 朝鮮은 길을 빌려달라고 憑藉하고 그해 四月에 軍士 二十萬과 小西行長 加藤淸正 等 將帥를 보내어 風雨같이 몰려와서 釜山에 上陸하니 이는 우리나라의 靑天霹靂이오 醉生夢死하던 我國 軍隊가 百戰 老鍊한 倭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東來城이 一戰도 못하고 陷落되고 敵軍은 거침없이 東西 두 길로 나뉘어 京城을 向하여 北上하니 朝廷에서는 이 急報를 듣고 모두 蒼皇罔措하고 宣祖는 金誠一이 國事를 그르쳤다 하여 곧 잡아오라고 嚴命을 내리더니 誠一이 惶恐 入京하는 次에 宣祖는 다시 命令을 내리어 이번 倭寇는 너로 因하여 오는 것이니 네가 나가서 막으라 하여 南方으로 보내었다.

朝廷에서는 敵을 막을 힘이 없고 西路를 좇아 避難의 길을 떠나니 京城 안에 있던 亂民들이 景福宮에 불질러 사뤘으며 各地의 守令들은 大部分이 職務를 버리고 逃亡하였음으로 戶口와 土地의 文籍이 이때에 大槪 滅失되었다. 倭兵이 釜山에 上陸한지 겨우 二十日만에 京城이 陷落되고 八道 人心이 土崩하듯이 무너져서 다시 收拾할 수가 없었다. 宣祖는 西路를 避難하면서도 西道 人心의 向背를 크게 疑懼하여 李元翼을 불러서 말하되 卿이 일직 安州 牧使가 되었을 때 行政을 잘하여 平安道 百姓이 지금까지 卿을 생각한다하니 卿이 먼저 平安道에 가서 民心을 按撫하라하고 또 崔興源을 불러 말하되 卿이 일직 黃海監司사가 되었을 때 百姓을 사랑하였음으로 黃海道 百姓이 지금까지 卿을 잊지 아니한다 하니 卿이 먼저 黃海道에 가서 民心을 收拾하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開城에 가서 얼마동안 머물다가 倭兵이 따라옴을 보고 平壤을 거쳐서 義州에 가서 머물고 있었다.

國勢가 이렇게 危殆로운 地境에 이르렀을 때에 國內에는 오직 두 줄기의 生氣가 움직였으니 그 하나는 李舜臣의 海戰이오 또 하나는 義兵의 蹶起이다. 李舜臣은 全羅道 좌수사左水使가 된 때로부터 미리 倭賊의 侵入이 있을 것을 斟酌하고 優秀한 戰船을 製造하려 하여 百濟 時代 以來 高麗 時代로 거쳐서 傳해오는 我國 特有의 造船技術을 써서 새로이 한 배를 創造하니 그 배는 鐵板으로 위를 덮어서 거북의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 송곳을 꽂고 敵兵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사이에 十字路를 通하여 우리 軍士가 自由로 通行하게 하고 前後左右에 銃穴을 내어서 軍士가 그 밑에 숨어 銃을 놓게 된 것이니 이를 龜船이라 한다.

李舜臣은 倭兵이 들어옴을 보고 龜船 八十隻을 거느리고 五月 七日 玉浦에서, 六月 四日에 唐浦에서, 七月 八日에 閑山島의 앞바다 等 敵의 水軍을 連거푸 쳐 부시고 閑山島의 길목을 守備하니 敵이 다시 南海 邊을 엿보지 못하였다. 처음에 倭兵은 陸路와 海路의 두 길로 倂進하여 一擧에 우리나라를 삼키려 한 것인데 海路가 李舜臣에게 막힌 까닭에 陸路 軍의 東은 咸鏡道 豆滿江까지 들어가고 서西는 平壤까지 들어갔으되 더 北上하기를 두려하여 王을 쫓아가지 못하였으니 이 大亂에 우리나라가 다시 蘇生함에는 李舜臣의 힘이 絶對한 것이었다.

倭兵이 처음 들어 올 때에는 人心이 모두 慌怯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또 敵은 鳥銃을 가지고 있는데 銃의 威力이 얼마나 큰가를 알지 못함으로 敢히 接戰할 勇氣를 내지 못하더니 時日이 經過함을 따라 漸次로 敵의 情勢를 알게 됨으로부터 憂國之士들의 擧義하려는 氣運이 움직였다. 慶尙道에서 처음으로 義兵을 일으킨 者는 郭在祐(號)(忘憂堂)이니 紅衣를 입고 馬를 타고 敵陣에 들어가서 橫行하되 敵이 敢히 막지 못하고 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고 紅衣將軍이 있는 곳에는 敵이 반드시 避去하였다. 全羅道에서는 光州의 高敬命(號) (霽峰)이 아들 從厚, 因厚와 金千鎰 等으로 더불어 義兵을 일으키니 이 消息을 듣고 各地에서 義兵이 연거푸 일어났음으로 壬辰倭亂中에 義兵의 勢力이 가장 큰 곳이 湖南이었고 이 義兵의 힘에 依하여 湖南이 保全된 까닭에 國家의 生脈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湖南 義兵가운데 高敬命 軍과 아울러 有名한 것은 錦山의 趙憲(號)(重峯)軍이다. 趙憲은 壬辰 前年에 미리 明年에 큰 兵亂이 일어 날줄을 알고 宣祖에게 上疏하여 政治의 잘못됨을 痛論하고 急히 防備의 策을 세울 것을 極言하니 그 말이 너무 過激함으로 朝廷에서는 이를 狂人이라 하여 귀양 보내었다.

壬辰亂이 일어남에 同志를 모아서 義兵을 일으키니 遠近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趙憲이 일어났다. 하여 聳觀하고 憂國하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여러 番 倭兵과 싸워서 이기더니 錦山싸움에서 衆寡가 不適하여 敗死하고 同志인 七百義士도 함께 죽으니 지금도 戰爭하던 자리에 七百義士 塚이 있으며 이 싸움에 倭兵도 죽은 者가 많고 또 戰爭의 後方 勢力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여 물러가고 다시 全羅道를 엿보지 못하니 湖南北部의 保全함은 主로 趙憲의 힘이었다.

이밖에도 各道에서 義兵이 일어나서 큰 戰功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敵兵을 괴롭게 하여 마음대로 橫行치 못하게 하고 우리나라 百姓에게 한줄기의 氣를 넣어준 功은 적지 아니하였으며 特히 僧兵의 힘이 또한 적지 아니하니 僧 惟政(號(泗溟山人)은 西山大師 休靜의 高弟로서 僧兵을 모아 비록 實戰에는 參加치 아니하였으나 物資의 運搬과 여러 가지 役事에 큰 助力을 하였다.

이때 國軍들도 漸次로 勢力을 얻어서 倭兵을 쳐 부시려는 勇氣를 내게 되고 權慄은 梨崎(배티,大芚山附近)에서, 李廷馣은 延安에서, 金時敏은 晉州에서 모두 크게 이겼다.

이 程度의 兵力만으로는 全國에 가득히 찬 敵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王(宣祖)은 義州에 있어서 柳成龍 李恒福(號)(白沙) 李德馨(號) (漢陰)等으로 더불어 國事를 議論하는데 亂이 일어난 後에 黨爭은 一時 멈추어 졌으나 그 底流에는 如前이 東西의 軋轢이 있음으로 王(宣祖)은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有西東」가 하여 東西의 싸움이 國家로 하여금 이 地境을 만들어 놓고 또 여기까지 몰려와서 東西 싸움을 하느냐 恨歎하였다.

國事가 이에 이르매 獨力으로는 恢復할만한 길이 없음으로 明나라에 請兵하기로 決定하였다. 이때 明나라에서는 이상(異常)한 와언(訛言)이 전파(傳播)되어 조선(朝鮮)이 왜(倭)와 공모(共謀)하여 명국(明國)을 치러온다고 하였다 그 증거(證據)로는 왜병(倭兵)이 들어온後 한번의 결전(決戰)도 없이 왕(王宣祖)은 압록강(鴨綠江) 변(邊)까지 들어오고 왜병(倭兵)은 평양(平壤)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청병(請兵)하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이를 변명(辨明)하고 또 원병(援兵)을 보내어 달라고 간청(懇請)하였으며 明나라에서는 使臣을 보내어 調査한 結果 日本秀吉이 將次 明나라를 치기 爲하여 朝鮮에 길을 빌려 달라 하고 朝鮮이 그를 拒絶하자 곧 侵入한 事情과 明國의 울타리가 되고 있는 朝鮮이 明國을 代身하여 倭寇의 禍를 받고 있다는 事實을 確實히 알게 되고 이에 朝鮮에 援兵을 보내기로 決定하였다. 그리하여 癸巳年 正月에 明將 李如松이 군사 四萬을 거느리고 鴨綠江을 건너와서 平壤의 敵을 大破하니 敵이 開城 方面으로 물러났다. 李如松은 敵을 輕히 여기고 追擊하여 碧蹄舘에서 싸우다가 敗하고 다시 追擊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에 權慄이 幸州에서 크게 敵을 破하니 敵은 制海權을 잃어서 補給이 끊어지고 또 平壤과 幸州에서 大敗하여 氣勢가 漸漸 줄어들더니 李如松이 明나라사람 沈惟敬을 시켜서 倭將 小西行長과의 사이에 和議를 進行 시켰음으로 倭兵은 이해 四月에 京城을 물러나서 南海岸으로 내려갔다.

倭兵은 南海岸에서 오래 머물 計劃을 세우고 또 前日에 晉州에서 敗한 것을 憤하게 여겨서 十餘萬의 軍士로 晉州城을 包圍하였다. 前番에 金時敏이 晉州 싸움에 大勝할 때는 數千兵으로써 敵의 十萬兵을 물리쳤는데 이번에는 城中兵이 六萬에 이르니 사람마다 모두 城을 지키기에 아무 念慮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직 晉州 妓生 論介가 근심하였다. 義兵將 金千鎰이 그 緣故를 물으니 論介가 對答하되 前番에는 軍士가 비록 적으나 將帥가 서로 사랑하고 號令이 한군데서 나온 까닭에 이겼지만 이번은 軍士가 비록 많으나 統率이 없고 將帥가 兵을 알지 못하니 이 까닭에 근심한다고 하였다.

城中은 九日 九夜의 동안에 百餘次例를 싸워서 番番히 적을 막으나 마침내 城이 陷落하고 城中의 百姓들까지 모두 七萬名이 죽으니 그 慘酷하기가 壬辰亂 中에서도 가장 甚하였고 論介는 敵將에 끌려서 矗石樓 아래의 岩上에서 敵의 酒宴에 나갔다가 敵將의 허리를 안고 함께 江中에 떨어져 죽으니 後人이 이 岩石을 義妓岩이라고 이름 지었다.

王(宣祖)은 京城이 收復한 後 京城을 떠난지 一年半만에 舊都에 돌아왔다. 그러나 倭兵이 아직 南方에 가득히 차있어 어느 때에 다시 쳐올지 알 수 없고 沈惟敬의 和議의 對하여는 反對의 態度를 취하고 明나라에 積極 南攻하기를 請하였다 明나라에서는 軍士와 物資를 遠輸하기가 困難하다하여 苟且히 和議를 成立시키려하니 王(宣祖)은 國力이 弱하여 獨力으로 倭를 殲滅치 못함을 슬퍼하여 軍制의 大 改革을 提案하니 이 案은 隸를 解放하여 軍士로 쓰자는 것인데 이는 軍制 改革이 될 뿐만 아니라 社會階級制度의 一大 革命이 되는 것이다.

我國의 軍制는 兩班階級은 軍役이 免除되고 奴隸階級은 賤人이라 하여 軍役에 參與치 못하게 하니 그 까닭은 萬一 賤人이 먼저 入隊하여 軍校가 되고 良民이 後에 入隊하여 兵卒이 되면 良民이 賤人의 指揮를 받게 되어 社會의 秩序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王(宣祖)은 良民이나 賤人이나 모두 나의 赤子이오 또 國家의 앞날을 생각하여 볼 때 軍士가 不足한 現實을 打開하려면 數十萬의 賤人 壯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 從來의 階級制度를 깨뜨리고 賤人을 良民과 함께 軍士로 쓰게 하려하니 諸臣들은 이를 잘 討議하라고 令을 내렸다.

朝廷 諸臣中에는 여기에 贊成한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私奴를 많이 부리고 있는 兩班階級은 强硬한 反對運動을 일으켰으니 그 理由는 奴主의 分은 君臣의 分과 같으매 만일 奴隸를 解放하여 良民을 만들면 이는 綱常이 무너지는 것이라 하니 其實은 國家의 綱常을 尊重히 여기는 데서 나온 主將이 아니라 專혀 奴隸를 부려서 豪華한 生活을 누리려는 私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王(宣祖)의 提案이 마침내 通過되지 못하니 王(宣祖)은 「國家를 살리는 最善의 案이 個人들의 私心때문에 實行되지 못하니 可歎한 일이로다.」하고 이 制度를 公奴에게만 施行하였다. 公奴中에는 晝夜로 武藝를 練習하여 軍隊에 들어가서 良民이 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便으로 兩班階級의 여러 가지 妨害로 因하여 完全한 實施를 보지 못하였다.

倭兵은 南海岸으로 물러간 後에 明나라와의 사이에 和議가 進行되어 차츰 本國으로 물러가더니 兩國의 代表 사이에 決定한 和議 條件과 明나라가 豊臣秀吉에게 보낸 勅書의 內容이 서로 틀린다 하여 宣祖 三十年 丁酉에 다시 大軍을 보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丁酉亂이라 한다.

倭兵은 前番의 失敗에 삼가서 水軍을 더 增加하고 또 미리 間諜 要詩羅를 놓아서 우리 朝廷과 李舜臣과의 사이를 離間하니 우리 朝廷에서는 그 謀略에 넘어가서 李舜臣을 잡아다가 獄에 가두고 將次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 事件의 裏面에는 亦是 黨派 싸움이 숨어 있으니 朝廷이 義州에 있을 동안은 黨爭이 한동안 멈추고 있더니 京城에 還都한 後에 다시 再燃하여 北人의 勢力이 優勢한 판인데 李舜臣은 柳成龍의 薦擧한 사람이오 柳成龍은 南人이기 때문에 北人들은 李舜臣을 黨爭의 犧牲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王(宣祖)은 李舜臣 處置에 對하여 意見을 柳成龍에게 물으니 柳成龍은 「李舜臣은 名將이라 倭人의 말을 듣고 함부로 罪줄 수도 없고 또 戰亂이 끝나지 아니한 때 이런 名將을 죽이는 것은 不可하다」하였다.

王(宣祖)은 이 말을 重히 여겨 다만 免職시키고 釋放하니 이때 史臣은 이를 評하기를 「南海를 홀로 지켜서 國脈을 붙잡고 오던 名將이 敵의 謀介 離間과 黨爭의 餘波로 이런 일을 當하니 멀리 南方의 賊勢를 바라보고 가까이 朝廷의 形便을 살펴봄에 가슴속에서 痛哭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구나」하였다.

李舜臣이 免職된 뒤에 元均이 三道水軍統制使가 되니 元均은 本是 李舜臣과 함께 水使로 있었는데 李舜臣이 統制使가 된 뒤에 그 部下되기를 부끄러워하여 恒常 李舜臣을 朝廷에 謀害하던 者이오 먼저에 李舜臣이 罪를 받은 것도 元均의 謀害가 有力한 一因이 된 것이다. 倭兵들은 元均이 李舜臣을 代身함을 듣고 水軍을 크게 發하여 우리 水軍을 치니 元均이 大敗하여 陸地에 올라와 逃亡하였는데 그 生死는 世上이 알지 못하며 敵은 全羅道 海岸을 占領하고 멀리 忠淸道의 稷山 唐津에 까지 侵入하였다. 朝廷에서는 크게 唐慌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라 하는 수 없이 다시 李舜臣으로 統制使를 삼았다. 이때 倭兵이 全羅道 陸地에 깊이 들어와 싸우므로 李舜臣은 山谷길을 좇아 右水營에 이르니 戰船의 남은 것이 겨우 十二隻이라 避難船을 모아 가지고 珍島의 울돌목(鳴梁)에서 敵船 五百隻을 무찌르고 古今島를 무찌르니 敵의 勢力이 꺾이어서 다시 西海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 陸地에서는 明나라 援軍이 南原에서 敗하고 또 蔚山 泗川 順天等地에 陣地를 쌓고 敵과 싸우다가 모두 敗하였다.

敵勢가 다시 盛함을 보고 全羅道 光州사람 金德齡이 義兵을 일으키니 金德齡은 勇力이 있고 眼光이 횃불과 같아서 對敵하는 바가 없고 倭兵이 두려워하여 敢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忠淸道에서 叛亂軍이 일어나서 金德齡도 自己들과 合謀한다고 宣傳하니 朝廷에서는 곧 金德齡을 잡아다가 調査한 結果 그 無罪함을 알았으나 金德齡은 李貴의 薦擧한 사람이오 李貴는 西人이라 東人이 朝廷안의 勢力을 잡고 있는데 金德齡의 목숨을 救援하여 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金德齡같은 勇將을 放免하였다가 後日에 萬一 叛亂을 일으키면 抑制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죽였다.

우리나라 軍士와 明나라 軍士는 南海岸에서 오랫동안 敵兵과 對峙하고 있더니 宣祖 三十一年 戊戌 十一月에 豊臣秀吉이 죽으면서 倭兵을 撤收시키는데 李舜臣은 그 退路를 막고 慶尙道 露梁에서 敵을 맞아 싸워 크게 破하더니 敵의 彈알에 맞아 戰死하고 敵이 逃還한 者가 겨우 五十餘隻에 不過하고 七年동안의 大亂이 이로써 끝났다. 이때 朝廷의 一部에서는 李舜臣이 「萬一 戰勝하고 돌아오더라도 반드시 奸臣들의 謀害로 죽을 것이니 차라리 戰死하리라」하고 일부러 투구를 벗고 彈알에 죽었다고 하였다.

壬辰倭亂은 日本이 無端히 軍士를 일으켜서 隣國을 侵略하여 無辜한 人民을 함부로 殺戮하고 우리나라는 饑饉과 疾病이 이에 겹 들여서 慘酷한 禍가 蒙古의 侵入보다 더 甚하였고 明나라가 오랫동안 軍士를 움직여서 이 때문에 나라가 몹시 病弊하였다.

明나라 軍士가 우리나라에 와서 있는 동안에 橫暴한 일도 적지 아니하고 소위 關王廟라 하여 中國 옛날의 關羽將軍을 모시고 宣祖 王으로 하여금 절하게 하는 일도 있어 우리나라를 괴롭게 함이 많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大亂을 求해 주는 恩惠를 깊이 感謝하여 아무런 不平도 말치 아니 하였고 明나라는 이 亂離에서 많은 軍士와 財物을 잃은 까닭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滿洲族에게 亡하게 되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깊이 明나라 恩惠를 생각하여 오래 잊지 아니 하였다.

이 亂離에 武器의 發達한 것은 龜船 以外에 飛擊震天雷가 있으니 이는 李長孫이 만든 大砲로써 이 砲가 터지면 소리가 天地를 震動하고 鐵片이 튀어 나가서 敵을 해치는 것인데 慶尙左水使 朴昔이 이 砲를 써서 慶州를 恢復하였다. 倭兵으로부터 얻은 鳥銃은 本是 日本이 西洋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인데 우리나라도 이 法을 얻은 後에 工匠에게 命令하여 製造하니 이가 우리나라가 銃을 使用한 처음이다. 倭兵은 물러갈 때에 여러 가지 技術者를 사로잡아 가고 特히 그 中에는 陶工이 가장 많았음으로 日本의 陶磁器 工業이 이로부터 始作하였다. 倭兵은 저희들도 많은 軍士와 物資를 犧牲하고 아무런 所得이 없이 돌아갔으나 우리나라의 優秀한 技術을 배워 갔음으로 저희들끼리 말하기를 「武裝한 遊學生을 朝鮮에 보냈다」고 하였다. 豊臣秀吉이 죽은 後 德川家康이 새로이 幕府를 열어서 以前의 잘못을 말하고 國交를 恢復하기를 거듭 請하며 또 그들에게 사로잡혀간 數千名의 捕虜를 돌려보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日本에 對한 復讐心이 복 받혀서 許諾치 아니하더니 兩國間에 오랫동안 國交가 끊어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戰爭이 끝난지 七年(乙巳)만에日本의 所願을 들어서 釜山에 다시 倭館을 열고 對馬島와의 貿易을 許諾하여 그 後 三百年동안 繼續하였다.

 

亂後의 形勢

七年동안의 大亂은 비록 끝났으나 起耕치 못한 土地가 적지 아니하고 집과 家産을 蕩盡하고 生計를 잃은 百姓이 數없이 많고 山谷에 避難 갔던 사람들은 飢餓를 견디지 못하여 草根木皮로 延命하면서 겨우 故鄕에 돌아 왔으나 依支할 곳이 없어서 道路에서 彷徨하였다. 朝廷에서는 이러한 難民에 對하여 아무런 救濟策이 없었고 더욱이 亂中에 國籍의 大部分이 없어졌는데 勢力있는 者들은 남의 土地를 冒耕하여 自己의 土地를 만들려하니 到處에서 田訟이 일어나되 官家에서 이를 適當하게 處理치 못하였고 朝廷에서는 土地測量에 着手하였으나 事務가 자리를 잡지 못하여 잘 進陟되지 아니 하였다. 한 便으로는 黨爭이 더욱 甚하여 北人들 끼리에 다시 大北과 小北으로 나눠져서 그 勢力 다툼은 一步를 나아가 王位 爭奪戰과 엉켜지게 되었으니 이는 官人들 끼리에만 勢力을 다투기보다 勢力의 發願인 君王을 자기들 便에 넣는 것이 가장 有力하기 때문이다. 黨爭이 이와 같이 深刻하게 되니 亂後의 모든 整理 같은 것은 아무런 效果를 나타내지 못하고 말았다.

宣祖의 다음 임금 光海君은 本是 亂中에 人心을 收拾하려고 갑자기 世子로 세운 것이라 宣祖가 이를 바꾸려는 뜻이 있었다. 이 機微를 알고 小北派는 宣祖의 뜻을 받들려 하고 大北派는 世子를 擁護하여 서로 다투더니 宣祖가 病中에 大北派를 斥逐하던 中 急猝히 昇遐하고 光海君이 王位에 오르고 大北派 李爾瞻 鄭仁弘 等이 勢力을 잡으니 巷間에서는 宣祖가 過毒하였다고 傳했다.

當時 稅納은 土地의 所出로써 바치는 租稅와 地方의 特産物을 바치는 貢物과 兵役과 賦役 代身으로 바치는 軍布가 있었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弊害가 따르고 더욱이 大亂을 치른 後로 土地制度와 稅制가 極度로 紊亂하여졌음으로 光海君 卽位 初 李元翼(號) (梧里)이 大同法을 設하기를 請하였다. 이 法은 宣惠廳이라는 機關을 두고 每年 春秋에 田 一結에 米 八되를 거두어 京庫에 收納하여 隨時로 國費를 支出하는데 各 司私主人으로 하여금 上供하는 諸 物品을 收納케 하고 이 外에는 尺布 升米도 民戶主로부터 加徵치 못하게 하여서 私主人 防納計倍의 弊를 끄치려 함이라 光海君은 이 制度를 京畿道에 먼저 試驗的으로 行하니 巨室豪民과 私主人들이 모두 防納의 大利를 잃고 百方으로 沮害함으로 光海君은 여러 번 이 制度를 罷하려 하였으나 京畿百姓들이 一齊히 그 便利함을 말하고 罷하지 못하도록 다툰 까닭에 繼續하여 行하고 그 後에 漸次로 他道에 施行하였다.

光海君은 性質이 사납고 어두워서 政治가 몹시 어지럽고 大北派를 重用하여 그 兄 臨海君 以下 同氣를 많이 죽이고 宣祖 王妃 仁穆大妃를 廢하여 西宮에 幽閉하고 廢母에 反對하는 李元翼(梧里) 李恒福(弼雲),(白沙) (鰲城府院君) 鄭蘊(號 桐溪))等을 罪주었다. 李恒福이 咸鏡道 北靑으로 귀양 가는 길에 鐵嶺에 올라서서 「鐵嶺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九重宮闕에 뿌려본들 어떠하리」라는 노래를 지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勢力을 잃고 機會를 엿보고 있던 西人들이 秘密히 反正할 꾀를 꾸미더니 光海君 十年에 李貴(黙齋), 金瑬(北渚)等이 中心이 되어 反政軍을 일으켜서 王을 江華島에 내치고 王의 조카 綾陽君을 맞아드려 王位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仁祖이다.

壬辰亂이 끝난 지 이미 二十餘年이라 亂後 整理도 채 되지 못한 위에 光海君의 亂政이 또 十五年 동안을 繼續하니 國家의 政治는 말할 수 없이 헝클어지고 百姓의 生活은 極度의 困窮에 빠졌다. 이에 仁祖는 李元翼을 불러들여 政丞을 삼고 亂麻 같은 政治를 整理하는데 李元翼은 大同法을 八道에 모두 施行하기를 極力으로 主將하였다. 그 때 反對하는 者가 많아서 京畿道 以外에 겨우 忠淸道에 施行하니 百姓들은 모두 이 法을 大歡迎함으로 얼마 後에 反對論을 물리치고 八道에 施行하였다.

처음에 反正을 꾀하던 여러 사람들은 오직 國家와 百姓을 爲하여 擧義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反正後 功臣들의 大部分은 純全히 私利를 爲하여 行動하고 功臣이라는 特權을 利用하여 牟利 行爲를 恣行함으로 國人의 非難이 적지 아니 하였고 金長生(沙溪) 같은 이는 功臣들에게 글을 보내어 反正 擧義한 것은 一國이 稱誦하는 일이나 功을 憑藉하고 私利를 圖謀하면 後世의 公論이 이를 무엇이라고 評하랴 警告한 일도 있었다.

 

丙子胡亂

鴨綠江과 豆滿江의 밖에 있는 女眞族 卽 野人은 明나라에서도 抑制하기 어려워서 恒常 懷柔하여 오던 터이라 壬辰倭亂때에 우리나라 北邊을 侵入하려는 計劃이 있었는데, 萬一 이때에 野人이 侵犯하였다면 우리나라는 腹背로 敵을 받아서 支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朝廷에서는 六鎭의 守備를 튼튼히 한 까닭에 아무 일 없었다. 그 後에 野人들은 明나라 勢力이 弱해짐을 보고 漸次로 氣勢를 펴는 中에 女眞族中에서 奴兒哈赤(누르하치)이 일어나서 滿洲에 있는 여러 部族을 統一하고 光海君 八年에 임금이 되고 王號를 「大汗」이라 하고 瀋陽(奉天)에 都하고 국호國號를 後金이라 하고 猛烈한 氣勢로 明나라에 쳐들어갔다. 明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 救援을 請하였음으로 光海君은 姜弘立 等으로 하여금 軍士 一萬名을 거느리고 가서 明나라를 돕게 하니 이는 壬辰亂의 恩惠를 갑기 爲함이라 그러나 明나라 軍士가 敗하고 姜弘立은 滿洲에 降服하고 그 後로부터 光海君은 될수록 中立을 지켜서 滿洲가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와서 同盟하기를 請하였으나 應하지 아니하고 또 明나라에서 援兵을 보내기를 交涉하였으되 亦是 躊躇하고 있었다. 仁祖가 反正한 後에 朝廷에서는 光海君의 中立政策이 明나라에 對한 義理에 어긋났다하여 假島(平安道 피섬)에 와 있는 明將 毛文龍을 도와서 그와 緊密한 關係를 맺었다.

처음에 仁祖反正할 때에 李适의 功이 적지 아니하였는데 朝廷의 處事가 李适의 마음에 滿足치 아니하였음으로 李适은 平安道에서 亂離를 일으켜 風雨같이 달려와서 京城을 占領하였다. 仁祖는 忠淸道 公州에 避難하고 張晩, 鄭忠信, 李曙 等으로 하여금 이를 쳐서 깨뜨리고 李适이하 여러 首領들을 죽이니 그 餘黨이 滿洲로 逃亡하여 들어가서 滿洲 임금 太宗을 衝動시켜 朝鮮을 치기를 請하였다.

이때 滿洲는 우리나라가 明나라를 돕고 있는 形勢를 살피고 힘으로 누르려고 하던 次이라 阿敏이라는 將帥로 하여금 軍士 三萬을 거느리고 仁祖 五年 丁卯에 쳐들어왔다. 朝廷에서는 張晩을 都元帥로 하여 敵軍을 막고 王(仁祖)은 江華島에 避難하더니 마침내 그들과 兄弟의 誼를 맺고 敵軍이 물러가니 이를 丁卯虎亂이라 한다.

그 後 滿洲의 勢力은 더욱 强해지고 그 임금 누르하치의 아들 太宗은 用兵을 잘하여 中國과 蒙古를 漸次로 略取하고 우리나라에 對하여 兄弟國의 約條를 고쳐서 君臣國으로 만들자고 함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憤하게 여겨서 그들과 絶交하자고 主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次에 滿洲는 國號를 淸이라 고치고 天子의 號를 稱하고 우리나라에 對하여 저희에게 尊號를 바치라고 要求하니 이에 兩國의 國交는 몹시 險惡하였다.

이때 朝廷에서는 淸兵이 반드시 侵入할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오직 입으로 淸國을 排斥하는 소리만 높을 뿐이오 侵入하는 것을 막을만한 準備는 全然 없었다.

朝臣 中에는 이미 兩國의 和가 끊어지고 또 防備策도 세우지 않으면 國家의 將來가 어떻게 될 것이냐고 근심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고 尹煌(八松)같은 이는 「이미 和하지 못하고 또 싸우지도 못하면 이는 앉아서 나라를 亡케 함이라 다시 和할 수가 없다면 싸울 準備를 急히 갖춰야 될 것인데 只今에 軍士도 없고 軍糧도 없으니 이제로부터 이를 準備하여 淸兵을 막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 오직 한 가지 方法은 王이 여러 臣下를 거느리고 모두 槍을 집고 활을 메고 先陣에 나가서 開城이나 平壤에 進駐하여 全國에 號令을 내리면 이 消息을 들은 義兵士들이 반드시 武器를 準備하고 糧食을 등에 지고 스스로 달려와서 國難에 赴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旬月사이에 精兵 數萬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 方法만이 나라를 救하는 길이라」하여 親征論을 力說하였다.

그러나 朝廷 內에는 金瑬와 金自點의 勢力싸움이 벌어지고 붓대와 혀끝으로 敵을 꾸짖을 뿐이오 아무런 計劃도 없는 者들이 大部分이니 이 親征論이 實行되지 못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中에 仁祖 十四年 丙子 十二月에 淸太宗이 스스로 軍士 十萬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는데 이때 우리나라의 名將 林慶業(孤松)이 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白馬山城을 굳게 지키고 있음으로 淸兵은 이를 피避하여 昌城의 間道로 나와서 道中에서 만나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京城에 通報하는 길을 끊고 信道兼行하여 鴨綠江을 건넌지 四月만에 先陣이 京城 郊外 十餘里許에 이르니 朝廷에서는 夢想도 못하던 일이라 上下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먼저 王子를 비롯하여 大臣들의 家族을 江華島로 避難시키니 이는 淸兵이 侵入하는 때에 가장 安全한 避難地로 設備하여 둔 곳이오 또 淸兵을 막을 準備를 하지 아니한 것도 專혀 이 江華島를 믿었기 때문이다.

王(仁祖)은 諸臣을 거느리고 江華 半月로 나가려 하더니 淸兵이 이미 길을 막았음으로 急히 東大門을 나가 廣州의 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니 淸兵이 뒤를 따라 城을 包圍하였다 城에 籠居한지 四十日에 勤王兵은 이르지 아니하고 糧食이 乏絶하여 馬를 잡아먹게 되고 城中 人心이 크게 危懼하여 孤城을 지키기 어려운 形便이었다. 하루는 王(仁祖)이 城을 巡視하더니 한 軍卒이 王前에 나와 업드려 말하되 「지금 大將된 사람은 목숨을 아껴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비단 옷을 입고 城아래에 앉아서 우리 軍卒을 督戰하니 이런 大將은 아무 所用이 없는 것인즉 우리 軍卒 中에서 大將을 定하여 주시면 死力을 내어 싸우리라」하니 王은 軍心이 이미 變함을 보고 크게 놀라서 諸臣과 이를 議論하는데 或是 軍變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이때 江華島를 지키는 大將은 淸兵이 바다를 건너서 들어올 수 없는 것을 굳게 믿고 每日 酒宴을 베풀고 놀더니 뜻밖에 淸兵이 城下에 이르러 쳐들어 왔다. 城中에서는 비록 軍士는 있었으나 手足을 놀릴 사이 없이 陷落되고 避難 나갔던 王子以下가 모두 捕虜되고 大臣들 家族의 婦女들은 凌辱을 當할 것을 두려하여 혹은 목매어 죽고 或은 바다에 빠져 죽으니 그 慘狀을 참아 볼 수가 없었다.

南漢山城에서는 江華島 陷落의 消息을 듣고 모두 落膽하여 더 抗戰할 氣를 全然잃고 王(仁祖)과 崔鳴吉(遲川)等은 和議를 主張하게 되니 이 和議라 함은 同等한 國家로써 和親하는 것이 아니오 淸에 屈服하고 天子로 모시는 屈辱的인 降服이다. 이에 朝臣 中 斥和派는 君臣이 모두 戰死할지언정 決코 오랑캐의 앞에 屈膝하고 살지는 못하리라 하고 崔鳴吉 等 主和派를 賣國賊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王(仁祖)은 한갓 죽는 것은 國家를 爲함이 아니라 하고 다음해 丁丑 正月에 三田渡(松坡)에서 淸兵에 降服하였다.

이에 淸太宗은 世子와 鳳林大君을 人質로 하고 金尙憲 等 斥和臣과 數千名의 捕虜를 끌고 軍士를 돌렸다.

이때 崔鳴吉等 主和派와 金尙憲 等 斥和派의 사이에 서로 疑心이 생긴 까닭은 斥和派는 主和派로써 富貴를 貪내어 淸國에 降服하여 그 地位를 굳게 하려는 것이라 하고 主和派는 斥和派로써 참으로 大義를 세우는 것이 아니오 釣名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 한 것이다.

그 뒤에 淸國은 明國을 치기 爲하여 우리나라 軍士를 보내기를 强要하니 崔鳴吉이 極力 反對함으로 淸은 崔鳴吉을 불러다가 獄에 가두었다. 金尙憲과 崔鳴吉은 모두 死生이 눈앞에 迫頭하되 조금도 屈하지 아니하고 끝끝내 大義를 지켰음으로 從來 兩派사이의 모든 疑心과 誤解가 풀려버렸다.

우리나라 사람이 淸兵에게 잡혀간 것이 적지 아니하고 또 淸國은 明나라를 칠 軍士를 보내라고 繼續 要求하니 朝廷에서는 捕虜된 사람을 돌려오는 것과 軍士보내기를 拒絶하는 것이 對淸外交의 가장 重要한 일이었다. 그러나 淸의 힘이 늘어서 軍士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었는데 林慶業이 軍士를 거느리고 明兵과 싸우게 되자 軍士 中에 逃亡하여 明나라에 들어가서 淸兵의 內容을 알려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또 捕虜된 사람을 담배를 주고 돌려온 일이 있으니 담배는 光海君때에 日本을 거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몇 해 아니 되어 國內에 퍼져서 한 生産業이 되었다.

우리나라와 中國과의 關係는, 三國時代는 或은 對等한 地位로써 交際하고 或은 外交政策으로 事大의 禮를 잡더니 蒙古 侵入 後에 그 힘에 屈服하여 完全한 君臣 關係가 되고 高麗末에 明나라가 中國을 차지하자 自進하여 君臣 關係를 맺으니 이는 北方 胡族에 對하여는 恒常 敵對感情을 가지면서 漢族에 對하여는 아무 거리낌 없이 事大의 禮를 잡는 古來의 한 傳統이었다. 그런데 淸國은 胡族이라 國人 全體가 그에게 屈服하기를 싫어하고 힘만 있으면 그를 쳐보려는 생각을 가졌다.

丙子의 亂에 힘이 元體 不足하여 屈服하기는 하였으나 淸에 對한 反抗心은 더욱 굳어졌다. 人質로 갔던 王子는 十年만에 돌아오더니 世子는 十年 勞苦에 歸國한지 얼마 아니 되어 病死하고 鳳林大君이 仁祖의 뒤를 이어 王이 되니 이가 孝宗이다.

孝宗은 瀋陽에 있을 때에 百般苦楚를 備嘗하고 또 淸兵에 從事한 일이 있어 그들의 實力을 잘 알고 있는지라 王이 된 後에 淸의 怨讐를 갚을 생각이 懇切하여 北伐할 뜻을 품었다.

이에 宋時烈(尤庵)等과 더불어 北伐 計劃을 꾸미고 李浣으로 하여금 軍士를 調練시키고 各地에 戰馬를 기르고 主要한 兵站地에 軍糧을 儲置하였다. 그리고 李朝建國한지 二百五十餘年동안에 西北人의 仕路를 막고 苛酷한 差別 待遇를 하더니 强大한 淸國을 치려니 自然히 西北人의 힘을 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에 비로소 西北人 調用의 論이 일어났다. 그러나 從來에 文은 持平掌令에 지나지 못하고 武는 萬戶僉使에 지나지 못하던 것을 겨우 一二階級을 올려주자는 데 不過하고 이것조차 朝廷안의 兩班階級의 妨害로 因하여 順便하게 進行치 못하였다.

便으로 淸國과 交通한 뒤로 中國의 學問과 産業方面을 보고 돌아온 學者들 中에는 우리 自體의 批判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淸國에는 考證學이 發達하고 西洋學術이 收入되어 널리 퍼지고 있는 때이라 우리나라 使臣들이 當時 淸의 서울인 北京을 來往하면서 이러한 中國 學術方面에 눈뜨기 始作하고 우리의 從來의 性理學만으로는 國力을 크게 할 수 없으니 爲先 우리의 固有한 文化와 歷史 地理 等을 硏究하는 同時에 利用厚生의 學問을 넓혀서 國內의 産業과 外國貿易을 振興시켜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를 北學論이라 이르고 北學이라 함은 北으로 先進國을 배운다는 뜻이다.

北學論을 生하는 學派를 實事求是學 또는 實學派라 하는데 그中 먼저 主唱한 사람은 有名한 經濟學者로 稱하는 柳馨遠(磻溪)이었고 實學의 主唱은 從來 程朱學만을 崇高하던 學風의 一大 變化이오 또한 沈滯한 社會 雰圍氣에 一大 淸新氣分을 注入한 것이었다.

政治家中에는 金堉(潛谷)이 中國으로부터 鐵錢을 收入하여 鐵貨 制度의 確立을 꾀하니 이는 綿布를 貨幣로 使用하여서는 國內의 産業이 發達될 수 없음으로 期於히 鐵貨로써 通貨를 삼으려 한 것이오 高麗 成宗이 鑄錢을 始作함으로부터 六百餘年을 지난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鐵貨가 通貨로 쓰게 되었으며 또 大同法도 金堉의 强力한 主張에 依하여 全國에 고루 施行하게 되었다.

또 우리나라는 三國時代 以來로 凶年이 자주 드는데 凶年의 原因은 主로 旱災이었고 特히 水稻耕作에 旱災가 더욱 甚하였다. 이에 孝宗은 滿洲에서 보고 온 水車를 國中에 普及시켜서 灌漑에 적지 않은 便宜를 주었다.

孝宗이 北伐 計劃을 세움으로부터 비로소 自己批判이 생겨서 自體가 얼마나 微弱하고 沈滯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學術 産業 等 모든 方面에 改革과 刷新의 氣運이 가득 하였다. 所謂 北伐이라 함은 孝宗이 復讐心에서 나온 一種의 希望이오 當時의 兩國 國力을 比較하여 보아서 決코 實現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國民全體가 北伐의 不可能함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宋時烈 等이 이를 主張한 것은 王(孝宗)의 뜻을 迎合하여 自己의 地位를 固植하려 한 것이오 아무 眞實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後에 尹鑴가 北伐論을 主張한 것도 또한 釣名을 爲한 것이었다. 孝宗은 北伐하기 爲하여 銃手隊를 養成하였는데 이때 北滿州의 黑龍江 方面에서는 俄羅斯(러시아)人 侵略이 甚하여 淸과의 사이에 衝突이 있으되 淸人은 恒常 俄人에게 敗함으로 淸은 朝鮮 銃手의 잘 싸움을 알고 救援을 請하여 두 번을 우리 銃手隊가 들어가서 俄人 擊退에 成功하니 이가 우리나라와 俄 人이 서로 關涉한 始初이었으며 孝宗은 王位에 있은지 十年 (己亥五月) 昇遐하고 北伐論은 스스로 사라지고 말았다.

西洋文化와의 交涉과 外國貿易

李朝는 程朱學을 崇尙하고 그 外의 學問은 一切로 異端이라 하여 排斥함으로 學術의 發達할 餘地가 없었다. 産業 方面에 있어서는 오직 農業을 重히 여기고 工業을 賤히 여기며 或是 工業 技術이 能熟한 者가 있으면 所謂 兩班들은 그를 불러다가 賃金도 변변히 주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使役 함으로 技術者들은 그 生活을 維持할 수 없어서 그 後부터는 그 技術을 發揮치 아니하고 故意로 粗惡한 物件을 만들게 되니 그 까닭에 技術은 漸次로 退步되고 三國時代 以來 國際的으로 有名한 모든 工作物이 다시 生産되지 못하니 有名한 百濟 以來의 造船 技術 新羅時代의 建築 彫刻 繪畵 等 技術 高麗의 磁器 製紙 技術 等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 그 一例이다.

그러던 中 中國에서는 明나라 末葉에 伊太利사람 伊瑪竇(마테오 리치)가 北京에 와서 天主敎堂을 세우고 敎理와 學術에 關한 圖書를 많이 飜譯하여 낸 뒤로부터 西洋의 學術과 器物이 次次 퍼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中國을 거쳐 다시 우리나라에 持來하게 되었다.

仁祖 九年 (檀紀 三千九百六十四年 (辛未)에 鄭斗源(壺亭))이 明나라에 갔다가 西洋의 銃 千里鏡(망원경) 自鳴鐘(시계)等을 가져와서 처음으로 西洋 文物을 傳하였으며 孝宗 때에는 金堉이 北京의 欽天監에 사람을 보내어 西洋 曆法을 배워다가 孝宗 四年 癸巳부터 時憲曆을 施行하니 이것이 西洋 文物을 直接으로 採用한 始初이었다.

西洋의 天主敎는 宣祖때에 中國을 거쳐서 들어온 形迹이 있고 仁祖때로부터 西學 또는 天主學이라는 이름으로 秘密裏에 民間에 流布되고 있었다. 原來 宗敎의 布敎에는 敎理 以外에 다른 學術 工藝 等을 隨伴하여 와서 敎理 宣傳의 힘을 돕는 것이다. 그 까닭에 三國時代에 佛敎가 들어올 때에 여러 가지 技術이 伴來하고 天主敎의 布敎에도 西洋文物의 傳來가 間接的으로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學術과 工業 技術에 異色이 섞이게 되었다.

西洋사람으로서 直接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는 宣祖때에 濟州道에 漂着한 馬里伊(포르투칼 사람..)를 비롯하여 仁祖때에는 和蘭(네델란드)사람 三人이 漂着하여 왔고 그 中에서도 朴淵은(벨테브레)은 大砲를 만드는 技術이 있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장가를 들어서 살았으며 孝宗때에는 亦是 和蘭사람 하멜等(여수시 바닷가에 하멜공원이 있음) 三十六人이 漂流하여 와서 十四年동안 우리나라에 拘留되어 있다가 그 中에서 「하멜」等 六人이 日本의 長崎로 逃亡하여 그곳에서 本國에 돌아갔다. 「하멜」이 우리나라에 關한 冊을 지어내니 西洋 사람의 손으로 우리나라가 世界에 紹介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外國 貿易은 前에는 外國과의 通商을 國家 財政을 補足하기 爲하여 通商에 힘쓰고 거기에 必要한 施設을 하였다. 日本에 對하여는 釜山 倭館을 물이 깊은 草梁으로 옮기고 船舶의 往來를 便利하게 하고 淸에 對하여는 鴨綠江 上流의 貿易을 定期的으로 開設하게 하고 東部 滿洲에 對한 會寧 開市에도 그때그때의 適當한 變通을 더 하였다. 義州에서 淸人의 生絲를 들여오고 釜山에서 日本의 銀을 받아다가 다시 두 나라에 轉賣하여 그 利益을 國家의 財政에 보태었고 또 人蔘의 輸出도 적지 아니 하였다.

李朝開國 初에는 南洋 方面의 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暹羅(동남아시아 샴, 타이) 琉球(오끼나와)等 여러 나라가 자주 土産物을 가지고 오더니 그 後에 朝鮮과 日本의 海上에는 倭寇의 作弊가 甚하여 南洋 사람들의 直接 通航은 끊어지고 그 代身에 海上 貿易으로써 唯一한 生計를 삼는 琉球사람들이 南海 日本 朝鮮의 사이를 往來하면서 中繼貿易의 利를 取하였다.

이러한 關係로써 琉球는 우리나라에 來往이 많고 成宗때에 가장 頻繁하였고 燕山君 以後로 次次 드물어졌다. 그네들은 大槪 暹羅 安南(베트남) 南洋群島(괌,싸이판지역) 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等 南國의 物資를 直接 또는 中國 經由로 받아다가 日本 博多(규슈)에서는 日本商人에 넘기고 우리나라 三浦로 와서는 主로 綿布와 交易하여 한번에 數千 乃至 數萬餘疋을 가져가는 일도 있었으니 이때의 日本이나 琉球는 아직 木棉 栽培를 몰라서 一國의 需要를 우리나라에서 가져다가 供給 하였음으로 우리나라 綿布는 國際 通貨로써 重要性을 가지고 있었다. 仁祖때에 琉球 王이 日本에 잡혀간 일이 있는데 王子가 父王을 贖하고자 하여 여러 가지 寶貨(酒泉石,漫山帳)를 배에 싣고 日本에 가다가 바람에 漂流되어 濟州道에 來泊하였다. 그때 濟州道 牧使 李箕賓는 그 寶貨를 탐내어 取하려 하였으나 應하지 아니 함으로 不法入國하였다는 罪名 下에 死刑에 處하니 王子는 父王도 贖하지 못하고 아무 罪없이 異域에서 죽는 것이 하도 寃痛하여 寶貨를 海中에 집어넣고 글 한 首를 짓고 刑을 받으니 이것이 琉球 사람이 우리나라에 온 最後이었다.

堯語難明桀服身 三良入地人誰贖

臨刑何暇訴蒼旻 二子乘舟賊不仁

骨曝沙場纏有草 竹西樓下滔滔水

魂歸故國弔無親 遺恨分明咽萬春

 

堯임금말도 桀에겐 밝히기 어렵고

세사람 묻히니 누가 贖하리오

刑에 臨하여 하늘에 呼訴할 겨를도 없네

二子乘舟에 賊은 어질지 못하네

뼈는 모래밭에 딩굴고 풀마저엉킬터

魂은 故國에 돌아간들 弔問할 親戚 없네

竹西樓아래 滔滔히 흐르는 물처럼

遺恨 嗚咽은 分明 萬年 봄 하리라

사색당쟁四色黨爭

仁祖의 反正은 西人의 손으로써 된 것임으로 西人이 政權을 홀로 차지하고 光海君을 도와서 惡政을 行하던 大北派는 全滅되고 小北派와 南人은 政治에 參與하는 者가 極히 적었다. 그러나 西人의 橫暴가 次次 甚하였음으로 孝宗 末年으로부터 王은 西人을 싫어하고 南人을 登用하는 일이 많더니 孝宗의 다음 임금 顯宗에 이르러서는 西人과 南人이 함께 朝廷에 立하였다.

이때 兩派의 黨爭으로서 所謂 禮訟이라는 것이 있으니 孝宗의 喪에 그 繼母 趙大妃가 어떠한 服을 입어야 옳으냐 함에 西人 宋時烈 等은 一年이라 하고 南人 尹鑴 等은 三年이라 하여 서로 싸우다 西人이 이겼는데 顯宗때에 仁宣大妃 (孝宗人)의 喪에 다시 그 시어머니 趙大妃의 服을 西人 金壽興 等은 九月이라 하고 南人 許積 等은 一年이라 하여 이번은 南人이 이기고 五十年동안을 政權을 잡고 있던 西人은 政界에서 쫓겨났다. 이때로부터 南人과 西人의 黨爭이 더욱 甚하였는데 顯宗의 다음 임금 肅宗의 初年에는 南人이 勢力을 얻고 있더니 肅宗 六年에 西人 金錫冑 等이 當時 領議政으로 있는 許積의 庶子 許堅이 逆謀를 꾸몄다하여 逆獄을 일으켜서 許積 尹鑴 等 南人의 領首들이 寃痛한 죽음을 黨하고 南人이 無辜히 罪를 입은 者가 千을 넘고 西人이 다시 政權을 잡으니 이를 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이때 西人의 首領 宋時烈과 그 弟子 尹拯과의 사이에 感情이 어긋나서 두 派로 나뉘었는데 宋의 便을 드는 사람을 老論이라 하고 尹의 便을 드는 사람을 少論이라 하니 이에 西人은 老論 少論으로 나뉘고 거기에 南人과 小北을 합쳐서 四色이라 일컬었다. 肅宗은 本是 變德이 많은 임금이라 어느 한 가지 일이 몇 해 동안 繼續되면 곧 厭症이 나서 새 것을 좋아하는 性質이 있었다. 肅宗 十五年에 王이 王妃 閔氏를 싫어하고 嬉嬪 張氏를 사랑하고 그가 낳은 아들을 世子로 封하려 함에 宋時烈 等 西人이 이를 反對하였음으로 王은 西人을 몰아내고 閔妃를 廢하고 다시 南人을 쓰니 古代 小說로 傳해오는 謝氏南征記는 王이 張嬪에 惑하여 閔妃를 몰아냄을 諷刺한 글이었다.

그러나 肅宗 二十年에 이르러 王은 前에 한 일을 後悔하고 閔妃를 復位하고 張嬪을 쫓아내고 다시 西人을 불러 쓰니 이로부터 南人들은 아주 政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政界에서 물러난 南人 學者들은 벼슬을 諦念하고 主로 實學 方面으로 向하여 古書의 考證과 새로운 硏究가 많이 생기니 그 中에 가장 有名한 사람은 李瀷(星湖)이니 그는 柳馨遠(磻溪)의 새 學風을 繼承하여 後進의 길을 開拓한 大 學者이었다. 南人의 敗退는 비록 南人을 爲하여는 蕭條한 感이 없지 아니하나 우리나라 學問의 發達을 위 하여는 크게 慶賀할 일이었다.

政界의 飜覆이 이와 같이 잦고 政爭이 이와 같이 險함으로 國家의 大事는 모두 放棄하는 形便이었다. 壬辰 丙子의 두 大亂을 겪은 뒤에 土地 兼倂의 弊는 더욱 增長하여 社會는 地主와 小作人의 兩大 階級으로 分列하고 小作人들은 生計가 漸漸 어려워서 山林 中에 들어가서 林木을 불사르고 耕地만드는 傾向이 많았으니 이가 火田의 始이다. 그러나 朝廷에서는 이에 對한 아무런 對策이 없고 이로부터 各地에 鬱蒼하던 林木은 날로 荒廢하여졌다.

鴨綠江 上流와 豆滿江 上流에 天際에 높이 솟아있는 白頭山은 우리 나라의 主山으로 되어있으나 淸國과의 사이에 跨在하여 兩國 國境線이 明確치 아니하였다. 世宗王이 六鎭을 設置한 後에 豆滿江 北便의 住民들이 藩胡라는 이름으로 代代로 朝廷에 貢物을 바치더니 仁祖때에 淸國이 이 地方에 살던 同族을 데려감에 이 地方이 空閑한 채로 버려져서 彼我의 流民들이 秘密히 入居하였다. 그래서 여기가 어느 나라 땅이냐 하는 問題가 가끔 일어나더니 肅宗) 三十八年 壬辰에 淸國 康熙帝가 이 地方의 國境을 밝히기 爲하여 穆克登을 우리 나라에 보내었다. 이때 朝鮮에서는 老論과 少論사이에 激烈한 黨爭이 벌어지고 있는 때라 國境問題의 重要性은 念頭 에 두지 아니하고 北境 地理에 아무런 見識이 없는 사람들을 白頭山에 보내어 穆克登과 함께 境界를 定하는데 穆克登의 主張에 一言의 抗辯도 없이 唯唯順從하여 白頭山下 十里許에 定界碑를 세우고 西는 鴨綠江이 되고 東은 土門江이 된다는 글을 새기니 이가 所謂 白頭山 定界碑이다.

碑를 세운 後에 朝廷 안에서 여러 가지 物論이 일어나고 北邊에 있는 官吏가 實地로 이 一帶를 踏査하여 朝廷에 報告하였는데 그 要旨는 定界碑의 西便으로 흐르는 鴨綠江 上流는 틀림이 없으나 東便으로 흐르는 물은 四派가 있으니 가장 北便에서 흐르는 第一派의 물은 碑에서 거리가 멀고 또 北쪽으로 들어가니 이는 問題 삼을 것이 없고 그 물의 南에서 흐르는 第二派도 碑와의 距離가 조금 멀고 第三派의 물은 碑에서 가장 가까운데 이 물을 따라 내려가면 漸漸 北으로 굽어져서 깊이 胡地로 들어가고 第四派인 가장 南쪽에 있는 물은 碑에서 가장 멀고 이것이 豆滿江 上流가 된 것이니 結局 定界碑에 記錄된 所謂 土門江이라 함은 第三派의 물을 말함이 確實하다고 하였다. 이 第三派의 물은 間島의 北쪽을 흘러서 豆滿江 下流에 이르러 合水된 것임으로 지금의 間島 地方은 定界碑文대로 解釋하면 當然히 朝鮮의 領土가 되는 것이오 이것이 後日 兩國間의 紛爭거리가 되는 것이다.

鬱陵島는 東海 中에 있는 일一 孤島라 三韓時代에는 于山國이라는 獨立國家로 있다가 新羅의 郡縣으로 된 것이다. 李朝 初期에는 住民이 있어 農業과 漁業으로 生活하더니 그 후後에 倭寇의 侵入이 자주 있어서 住民들이 安住할 수가 없고 또 國家에서 軍士를 보내어 守備할 수도 없음으로 朝廷에서는 住民을 全部 內陸으로 옮기고 無人島를 만들었다. 鬱陵島와 그 東쪽에 있는 獨島는 漁獲이 많은 곳임으로 日本漁民들이 秘密히 들어와서 自由로 고기잡이를 하고 或 朝鮮漁民이 고기 잡으러 들어가면 그들은 鬱陵島를 日本 領土라 하여 逐出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肅宗때에 安龍福이 여러 漁民들과 함께 鬱陵島에 고기 잡으러 들어갔더니 日本漁船이 이미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기로 安龍福은 우리 漁民들과 合力하여 몰아버린 일이 있는데 朝廷에서는 이를 알고 도리어 法禁을 犯하고 密漁하였다는 罪名으로 벌을 받았다.

그러나 安龍福은 우리나라 領土를 우리나라 사람이 지키지 못하고 日本漁民의 任意 使用에 맡기는 것이 寃痛하여 다시 漁船을 타고 들어갔더니 亦是 日本漁船이 와서 있기로 이를 亂打하여 쫓아 보냈는데 마침 風波가 일어나서 漂流하여 日本에 들어갔다. 安龍福은 이 機會에 日本人의 鬱陵島 密漁 禁止 問題를 根本的으로 解決하리라 하고 日本 幕府에 들어가서 이를 詰問하더니 幕府에서는 이는 對馬島의 漁民들의 所爲요 中央 政府에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며 他國 領土에 들어가서 고기 잡는 것은 不當한 일이오 또 이로 因하여 兩國間의 和를 傷함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對馬島 主에게 보내는 글을 安龍福에게 주었다. 安龍福은 그 글을 가지고 對馬島 主에게 傳하니 對馬島 主는 幕府의 嚴命에 怯을 먹고 安龍福에게 謝過까지 하였다. 安龍福은 다시 幕府에 들어가서 다시는 密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約束의 글을 받아 가지고 나라에 돌아오니 이는 外交의 一大 成功이오 또 鬱陵島를 日本 領土라고 主張하여 日後 兩國間에 紛爭이 일어날 수 있는 危險性을 이미 막은 것이다. 朝廷에서는 이 말을 듣고 安龍福의 功을 賞주려는 말은 없고 朝廷의 命令이 없이 外國과 交涉한 罪로 死刑에 處하려 하였다. 이때 朝廷안에는 死刑 論에 反對하여 賞功罪論이 强力히 主張되니 이 論은 安龍福이 日本人의 密漁를 禁止한 功은 크게 賞주어야할 것이오 私私로이 外國과 交涉한 罪는 罰하여야할 것인데 萬一 安龍福을 죽이면 이는 한것 대마도(對馬島) 主로 하여금 痛快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우리나라의 羞恥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 論이 마침내 이겨서 安龍福은 한동안 獄에 갇혔다가 放免되고 賞은 받지 못하였다.

肅宗 一代는 黨爭이 가장 甚하여 國土의 領土問題까지 等閑視하기에 이르렀고 肅宗의 뒤를 이은 景宗은 嬉嬪 張氏의 所生이라 처음에 肅宗때에 景宗을 世子로 封하려는 것을 老論 宋時烈 等이 反對하였고 또 景宗이 卽位한 後에 老論들은 景宗이 病弱하다하여 王의 異腹아우 英祖를 王의 代理로 세워서 政事를 代聽케 하려하니 이에 少論들은 老論을 逆賊으로 몰아서 所爲 老論哭臣이라는 李頣命 金昌集 李健命 趙泰采 等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罪주니 이는 景宗 元年 辛丑으로부터 다음해 壬寅에 걸친 일임으로 辛壬士禍라 하는데 士禍라 함은 非士類派가 士類를 謀害하는 것이오 士類와 士類와의 謀害는 士禍가 아니라 黨爭의 殺戮劇이니 所謂 辛壬士禍는 하나의 士類 間의 殺戮劇에 不過한 것이다. 景宗은 身病이 있어 在位한지 겨우 四年이오 英祖가 卽位하니 英祖는 聰明함이 李朝 諸王 中에서 넉넉히 中主는 되는지라 일직부터 黨派싸움이 國家의 모든 不幸의 原因임을 깊이 느끼고 親히 老論의 閔鎭遠과 少論의 李光佐의 和解를 勸하고 朝廷에서는 여러 色目의 사람을 함께 쓰기로 하니 이를 蕩平策이라 한다. 黨人 中에는 저희들의 지나친 行動을 反省하고 國家의 앞날을 爲하여 蕩平策에 呼應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黨禍때문에 慘酷한 禍를 當한 집의 子孫들은 兩派가 함께 朝廷에 立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더욱이 老論들은 期於이 辛壬黨禍의 怨讐를 갚으려 하였다. 王(英祖)은 아무리 蕩平하기를 勸하되 老論들이 끝까지 應하려하지 아니함으로 「黨爭도 國家가 있은 然後의 일이오 만일 黨爭때문에 國家가 亡하면 黨人들은 어느 곳에 가서 黨爭을 할 것인가」하여 情으로 泣言한 일도 있고 몇 차례는 一二日間 斷食하고 黨人들의 反省을 促求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黨爭은 이미 怨決讐深하고 難治의 痼疾로 되어 王(英祖)의 泣訴나 斷食으로써 和解될 것이 아니었다. 이에 王(英祖)은 蕩平策에 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漸次로 멀리하고 黨爭에 깊이 關係되지 아니한 사람들을 쓰게 되니 朝廷안에서 黨爭에 깊이 關係되지 아니한 사람은 主로 戚里派이었고 이로부터 戚里派의 擡頭하는 傾向이 나타나서 純祖以後 八十餘年 間을 外戚 專橫 時代를 만들었다. 처음에 世祖때에 儒臣派 對 戚里派의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이 九十年동안을 繼續하다가 明宗 末年에 儒臣派가 勝利를 얻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儒臣 同志 間에 黨爭이 일어나서 爾來 百六七十年間을 血鬪를 演出하고 마침내 自體의 腐敗로 因하여 다시 前日의 政敵이던 戚里派를 登場케 하니 이는 世事의 한 果報로써 歷史는 覆치 아니하면서 또한 反覆하는 것이다.

英祖가 비록 蕩平策을 쓰고 있으나 政界의 裏面에는 如前히 激甚한 黨爭의 潮流가 흐르고 있고 各地方에는 先賢을 享祀하고 儒士들의 讀書處로 되어 있는 書院은 黨爭의 根據地로 되어 있으며 他黨과의 사이에는 서로 通婚치 아니함은 勿論이오 地方에서 일어나는 些少한 일까지도 모두 黨爭 꺼리로 利用하였고 英祖 初年에는 少論과 南人이 合勢하여 李麟佐를 大將으로 하여 嶺南에서 兵을 일으켜 政局을 顚覆시키려는 叛亂까지 일어났다. 英祖 中年에 世子로 하여금 代理 聽政케 하였는데 世子의 處事가 黨人들의 利害에 맞지 아니함으로 黨人들은 百方으로 謀略을 꾸며서 王과 世子와의 사이를 離間시키고 一步를 進하여 王(英祖)의 父子間의 感情의 葛藤을 일으키더니 畢竟 世子를 王에게 讒訴하여 이를 廢하고 뒤주 속에 넣어서 죽이기에 이르니 이가 思悼世子이오 正祖의 父이다.

그럼으로 正祖의 臣下들 中에서 金龜柱는 世子를 죽임이 옳다 하고 洪鳳漢은 옳지 않다 하여 두 派의 意見이 나뉘어지니 金의 便에 加擔한 사람을 僻派라 하고 洪의 便에 加擔하는 派를 時派라 하여 이로부터 四色의 싸움보다도 時僻의 두 派가 서로 맞서서 正祖 一代는 이 싸움으로 날을 보내었으니 正祖가 그 父의 寃死 慘死한 것을 몹시 슬퍼함으로 王의 뜻을 받드는 사람은 時派가 되고 思悼世子의 죽음은 英祖의 處理할 일이니 이를 非難할 수 없다 하는者는 僻派가 되니 思悼世子의 죽음은 黨爭의 餘波가 王室에 미친 것이오 國家政治에는 아무 關係가 없는 일인데 이것으로써 또 서로 可否를 다투고 있는 것은 勢力 爭奪을 爲한 一 方便으로 利用한 것이다.

英祖와 正祖의 世는 四色이 없어진 것은 아니오 또 時派와 僻派와의 싸움이 일어났으나 正祖도 賢命한 임금이라 英祖의 政策을 踏襲하여 蕩平策을 썼음으로 肅宗의 때와 같은 流血의 慘劇은 別로 없어서 人心이 安定하였다.

그리하여 王은 民生問題에 크게 留意하였으니 英祖는 當時 平民의 壯丁들이 軍布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무명 二疋씩 바치었는데 이것이 百姓에게 過重한 負擔이 되고 있음으로 王(英祖)의 二十六年부터 均役法을 施行하여 軍布를 한 疋씩 減하고 그 代身 魚鹽 船舶에도 課稅하였다.

趙儼은 日本에 使臣으로 갔다가 甘藷(고구마)를 가져와서 심으니 이가 우리나라에서 甘藷를 심은 처음이다. 朝廷에서는 甘藷가 救荒穀食으로 重要한 것이라 하여 三南 各地에 심게 하니 數十年 동안에 各地方에 널리 普及되니 正祖때에 이르러 全國에서 産出되는 甘藷의 數量을 調査케 한바 意外에 南海岸의 몇 部落에 겨우 얼마간 남아 있을 뿐이오 그 外에는 種子조차 없어져 버렸다. 王은 크게 놀래어 그 原因을 調査하니 農家에서 甘藷를 심으면 郡縣의 吏屬들과 土豪들이 값도 내지 않고 無料로 討索하고 그 討索에 應하지 아니하면 무슨 口實을 만들어서 잡아다가 嚴刑을 加하니 農民들은 甘藷를 심은 까닭에 破産할 地境에 이른 者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畢竟 種子까지 없애버린 것이었다. 이에 王은 嚴命을 내리어 討索하는 者를 嚴禁하고 그 栽培함을 極力 獎勵한 결과 드디어 우리나라의 主要한 生産物이 되었다.

正祖는 또한 全國에 令을 내리어 農業技術의 優秀한 것이 있으면 그 要領과 方法을 적어서 朝廷에 올리라 하니 이에 全國으로부터 水利施設 農用車等 農業上 有益한 計劃과 經驗談이 많이 提出되었다. 王은 農業을 獎勵하는 意味로 좋은 案을 提出한 사람을 뽑아서 서울에 불러다가 한자리에 모으고 各自 案을 說明케 한 後 厚히 賞을 주고 그 案을 모아서 農書를 만들어 全國에 폈다.

英 正의 文化

實學이 한번 일어난 後로 이 方面에 뜻을 두는 學者가 많고 또 英祖와 正祖는 學問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글을 編纂하고 民間에서는 歷史 地理 政治 經濟 實業 算學 醫學 實學에 對한 硏究와 著述이 盛해서 그 文運의 發達은 世宗때에 匹敵할만 하였다. 또 前부터 天主敎가 들어오고 있던 中 正祖때에는 李承薰이 北京으로부터 天主敎에 關한 冊을 가져와서 靑年學者들끼리 나누어 읽음에 그 敎勢가 크게 떨쳐서 士大夫의 집에서도 神主를 불사르고 祭祀를 廢하고 이 敎를 信仰하는 者가 많으며 特히 黃海 江原 京畿 忠淸의 各道에 盛行하였다. 朝廷에서는 天主敎가 祭祀를 廢하는 까닭으로 이를 邪敎라 하여 禁令을 내리고 또 根源을 막는다하여 北京으로부터 모든 書籍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敎勢는 秘密裏에 더욱 넓어지고 蘇州(江蘇省)사람 周文謨가 秘密裏 入國하여 더욱 傳道에 힘썼다.

南人들은 肅宗 末로부터 政權에서 멀어짐에 그 힘을 學問에 기울여서 淸나라의 考證學을 받아드린 것도 南人이었고 또 天主學이라는 새 知識에 對하여 서로 그들은 特別한 關心을 가지고 南人으로서 天主敎를 믿는 사람이 많았으니 李承薰 李家煥 李學逵 鄭若鍾 鄭若鏞 같은 一代의 名士가 모두 眞實한 信徒였고 特히 鄭若鏞(茶山)은 實學派 가운데서 가장 特出한 學者이었다.

元來 天主敎에서 祭祀를, 祭祀를 지내지 말라함이 國俗에 어그러지기 때문에 나라에서 이를 邪敎 또는 左道라 하여 禁止함이러니 政權다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非 天主敎人派가 天主敎人인 反對派를 넘어뜨리려는 罪目으로 이를 利用함에 미쳐 天主敎에 對한 迫害가 正祖 十五年 以後로 여러 번 일어났다. 그러나 正祖때는 南人 蔡濟恭(樊巖)이 오랫동안 政丞으로 있으면서 이들을 擁護하여 될 수 있도록 일이 없이 하였으나 正祖의 다음 임금 純祖가 卽位함에 元年에 西敎의 獄을 일으켜서 多數한 敎徒가 잡혀 죽었다. 그러나 禁令이 嚴할수록 秘密裏에 더욱 퍼졌다. 天主敎는 가깝게는 北京과 멀리는 西洋에 連結을 가졌음으로 世界의 새 消息과 學術이 이 길로 말미암아 들어오는 것이 많았으니 英國에서 發明된 手痘法이 鄭若鏞으로 말미암아 傳來한 것이 그 一例이오 後日 金正浩의 大東輿地圖 地球圖같은 것도 天主敎를 通하여 西洋學術의 影響을 받은 것이다.

 

勢道政治

勢道라 함은 本是 王과 臣下들 사이를 周旋하는 所任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다. 모든 政治가 그의 손을 거치게 됨으로 스스로 勢力을 잡게 된 것이다. 正祖가 世孫으로 있을 때에 世孫을 害하려 함으로 洪國榮이 世孫을 極盡히 保護하여 겨우 無事함을 얻고 및 卽位한 뒤에 洪國榮으로써 宿衛大將을 삼으니 宮中을 지키면서 부터 所謂 勢道가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洪國榮은 橫暴한 일이 많음으로 未久에 물러나더니 正祖의 뒤를 이은 純祖가 王이 되니 때에 나이 十一歲이었다. 그래서 英祖의 后人 安東 金氏가 代身 國事를 處理하고 그 本家便의 金祖淳이 實權을 잡으니 世上에서 이 政治 形態를 安東 金氏 勢道라고 稱하고 純祖 憲宗 哲宗 三代가 모두 安東 金氏에게 장가를 들어서 이 뒤 六十年동안에 金氏가 外戚으로써 勢道를 잡고 나가니 이것이 戚里派의 完全한 再登場이다.

勢道政治가 벌어진 後로 賣官賣職하는 風習이 날로 甚하고 官職을 買得한 무리들은 百姓들을 討索하여 財産을 잡으려하고 한 便 書院을 中心으로 한 兩班들이 無辜한 百姓들을 잡아다가 抑鬱한 罪를 얽어서 財物을 함부로 빼앗고 郡縣의 吏屬들이 여러 가지 弄奸으로 民財를 搾取하니 百姓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도 아무런 所得이 없음으로 힘써 일할 생각이 나지 아니하여 모든 産業이 萎縮하니 平安地方 같은 곳은 古來로 栗木 栽培가 盛行하여 栗産이 全國에 有名하더니 栗木이 있는 까닭으로 前日 南쪽 地方에서 고구마 栽培로 因하여 破産하는 일이 있음과 같은 抑鬱한 事情이 到處에 생겼음으로 一齊히 栗木을 베어버린 일도 있었다.

李朝의 政治는 田政, 軍政, 還穀의 三政이라 하니 이는 國家 政治에 가장 根本이 되는 財政問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田政이라 함은 土地의 所出을 根據로 하여 받는 稅納이오 軍政이라 함은 軍布이오 還穀이라 함은 春窮期에 가난한 百姓들에게 穀食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얼마쯤의 利息을 붙여서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高句麗 時代의 賑貸의 賑貸法과 같은 것이다.

洪景來 亂과 民亂

勢道政治가 생긴 뒤로 三政이 어지러워서 百姓이 살수가 없고 凶年이 자주 들고 天災地變이 그치지 아니하여 人心이 安定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 正祖때에 平安道 儒生들이 西北사람을 몹시 差別한다는 理由로 科擧의 試驗場에 들어감을 拒否한 일이 있는데 正祖는 조그마한 賤民들이 敢히 王命을 拒逆한다 하여 크게 怒하여 그 首謀者를 귀양 보내고 그 外는 모두 다시 科擧를 보지 못하게 하니 平安道 人心이 極度로 憤慨하고 있었다. 그러던 中 龍岡사람 洪景來가 벼슬을 求하러 서울에 왔다가 朝廷의 處事가 濁亂함을 보고 革命의 뜻을 품고 純祖 十一年 辛未에 禹君則 等으로 더불어 嘉山 多福洞에서 亂離를 일으켜 스스로 平西 大元帥가 되고 檄書를 關西 一帶에 傳하되 「關西는 檀箕의 舊域으로 文物이 煥朗하며 倭胡의 兩難에 效忠이 크거늘 朝廷이 西土를 輕視함은 何故오 더욱 方今에 幼王이 上에 있고 權奸이 날로 늘어서 金祖淳 朴宗慶의 무리가 國柄을 竊弄하여 天災地變이 비는 틈이 없고 生民이 塗炭하여 前頭가 不測하니 마땅히 이때로서 西人이 奮起하여 國內를 징청(澄淸)할 것이다.」하고 各 고을을 치니 淸川江 以北의 여러 고을이 이에 呼應하여 그 氣勢가 크게 떨치고 守令 中에도 洪軍에 降服한 者가 적지 아니하니 저 有名한 김삿갓(笠) 이름 煥淵은 이때 祖父 金益淳이 守令으로서 洪軍에 降服하여 逆賊이 되었음으로 逆賊의 孫子로써 法網을 避하여 삿갓을 쓰고 숨어 다닌 사람이다.

이 해 十二月에 洪景來는 淸川江을 渡水하여 남진南進하려 하더니 一夜間에 비가 와서 얼음이 풀렸음으로 江을 건너지 못하고 定州城을 雄據하고 官軍과 抗戰하였다. 이때는 오랫동안 昇平이 繼續하여 百姓들이 兵事를 알지 못하는지라 官軍이 비록 洪軍을 치고 있으나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士氣가 떨치지 못하더니 相持한지 넉달만에 壬申年 四月에 官軍이 城外에 窟을 파고 火藥을 터뜨려서 겨우 城이 陷落하였다. 洪景來는 「事已至此無可奈何」라하고 城을 넘어 逃走하여 그 蹤迹을 알지 못하였다.

洪景來의 亂이 일어나기 前에 이미 各地方에서 民亂이 일어났으니 民亂이라 함은 대개 守令들의 苛斂誅求에 못 견디어 民衆 속에서 指揮者를 定하고 亂을 일으켜 守令을 몰아내는 것인데 守令을 죽이는 일은 極히 적고 大部分은 버들 광주리에 담아서 群境밖에 내어쫓는 것이다. 그럼으로 民亂은 革命이 아니니 當時의 民亂은 貴族社會의 永遠性을 是認 하면서 다만 그때 그때의 不平 때문에 일어나는 騷擾이오 또 虐政을 하는 守令을 쫓아내면 그 目的이 達成되는 것이다. 지금 世上에 行하는 春香傳은 正祖 時代의 前後에 지은 小說이라 하는데 그 글 속에 全羅道 五十三州의 머슴들이 南原府使를 짚둥우리에 담아서 境外에 몰아내겠다고 計劃함과 같음이 民亂의 실마리였다.

純祖의 뒤를 이은 憲宗이 또한 나이 어리고 安東金氏가 勢道를 잡고있어 政治가 어지럽고 各地에서 百姓의 騷動이 일어나서 朝廷에서는 二年이나 三年에 한번씩 暗行御史를 八道에 보내어 民弊를 끼치는 者를 罪주는데 御使가 한번 나갔다가 돌아오면 守令 吏屬 土豪들이 罪를 받는 者가 二百 或은 三百에 가까우니 當時 地方에서 百姓을 괴롭게 하는 者가 얼마나 많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御使의 出道도 크게 效果를 내지 못하고 百姓의 苦痛은 如前히 甚하더니 憲宗의 다음 임금 哲宗 十三年 壬戌에 慶尙道 晉州에서 百姓들이 兵使의 暴虐을 견디지 못하여 民亂을 일으켜 貪慾한 官吏를 몰아내고 그와 附同한 사람들을 잡아 다스리니 그 形勢가 가장 猛烈하였다. 이 바람이 한번 일어남에 各地 百姓들의 가슴속에 쌓이고 쌓였던 不平이 一時에 暴發하여 慶尙道 各地에서 불이 터지고 다음에 全羅道 忠淸道에 퍼졌는데 그 中에 全羅道가 尤甚하여 監司가 쫓겨나기에 이르렀고 다시 퍼져서 멀리 咸鏡道의 咸興과 濟州島에까지 미치니 나라의 威信은 땅에 떨어지고 李氏 王朝의 沒落이 가까워 오는 弔鍾을 울린다는 感을 깊게 하였다.

 

北間島 移住

淸國이 中國을 統一한 後에 滿洲를 統히 禁封地로 하여 滿洲人 以外의 居住를 禁止하고 더욱이 白頭山을 中心으로 한 鴨綠江 流域의 西間島와 豆滿江 流域의 北間島를 淸國 시조始祖의 發祥地라 하여 空曠하게 하여 아무도 人居치 못하게 하니 空地로 된지 二百年에 山野에 樹林이 가득하여 하늘을 가리고 그 사이로 各種 짐승들이 놀고 있으며 各 江邊에는 蒹葭(갈대)가 茂盛하고 池中에는 사람의 食料로 되는 마름이 가득하였다. 憲宗以後에 政治는 더욱 어지럽고 凶年이 자주 들어서 生路를 잃은 關西와 關北의 百姓들은 스스로 禁地로 되어 있는 江 越便의 間島에 着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秘密히 江을 건너서 짐승도 사냥하고 人蔘 마름을 캐는 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官吏들은 他國의 禁地에 들어가면 國際問題가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渡江하는 者를 嚴罰하고 便으로 西間島의 帽兒山 地方에 있는 滿洲人 部落과 北間島의 琿春 地方에 있는 滿洲人 部落에서는 生活必需品인 食鹽 釜鼎 器 農具 畜牛 等을 우리나라로부터 가져가지 아니하면 求할 길이 없는데 兩國의 正式 開市場을 通하여 買得하는 일도 있으나 그것 만으로서는 恒常 그 需要를 滿足시키지 못함으로 自然히 우리나라 사람의 入住를 歡迎하고 우리나라 官吏가 그곳에 가서 搜索할 때도 잘 保護하여 주었다.

哲宗 때에 이르러서는 秘密히 入住하는 者가 더욱 늘어서 겨울에 江이 合氷한 때에 이르러서는 數十戶가 集團으로 入住하는 일도 있으며 이때 沿海州는 本是 中國領土이었는데 몇해 前에 俄羅斯(러시아)에 割讓된 것이다.

俄國에서는 沿海州(러시아 프리모르스키 地方)(블라디보스토크= 한 地名)의 廣漠한 荒地를 開拓하기 爲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入住를 歡迎하고 食糧과 種子等을 대어주고 있음으로 北間島에 들어갔던 우리 百姓들은 다시 沿海州로 轉住하는 者가 적지 아니하니 間島와 沿海州가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서 開拓되었다는 것이다. 後日 우리나라 사람의 移住한 數가 北間島에 四十餘萬, 沿海州에 二十萬이 된 것은 모두 이때로부터 비롯한 것이며 馬鈴薯(감자)가 北方으로부터 傳하여 온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秘密히 渡江하다가 官人에게 잡혀 죽은 사람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적지 아니하여 이러한 寃死者의 피와 눈물이 間島와 沿海州의 開拓史의 첫머리를 꾸민 것이오 그만치 間島와 沿海州는 우리 民族의 永遠히 잊어버리지 못할 곳이다.

開國時代

哲宗의 뒤를 이어 興宣君(李昰應)의 第二子(命福)가 王位에 오르니 이가 高宗이오 때에 나이 十二歲이었다. 興宣君이 大院君으로 되어 實際의 政權을 잡으며 外戚의 勢道를 막기 爲하여 安東金氏의 勢力을 누르고 또 黨派싸움의 뿌리를 뽑기 爲하여 四色을 똑같이 登用하여 階級과 地方의 差別을 없애기 爲하여 平氏와 西北사람을 불러 쓰고 黨爭의 根源地가 되어 百姓을 못살게 구는 많은 書院을 없애며 軍布란 이름으로 常民이 많이 負擔하는 兵役稅를 戶布로 고쳐서 兩班階級도 이를 내게 하고 不正한 官吏와 吏屬들을 處罰하니 오랫동안 흐리고 어지럽던 政治에 새 光明의 빛이 오는듯 하였다. 그러나 大院君은 果斷性과 決行力이 强한 反面에 疎忽한 處斷도 없지 아니하고 더욱이 壬辰倭亂에 불타버린 景福宮을 다시 지으려고 百姓들의 財物과 勞力을 强制로 바치게 하고 經費가 不足함에 當百錢을 만들어 내어서 經濟界를 어지럽게 하니 百姓들의 怨聲이 날로 높아지고 한 便으로 王代의 特權을 잃은 階級들이 大院君을 誹謗하려는 소리도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이보다 앞서 哲宗 末年에 俄羅斯 國이 淸國으로부터 烏蘇里江 以東의 沿海州를 얻어 朝鮮이 俄國으로부터 國境이 相接하게되고 高宗 卽位의 해에 俄人이 이미 慶興에 와서 通交를 請하니 朝廷에서는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中에 天主敎人 가운데 俄國 問題를 좋게 解決하는 代身에 天主敎 傳導의 公認을 얻으려하여 大院君에게 運動하는 者가 있었는데 그의 行動이 大院君의 마음을 거슬리는 點이 있었고 또 天主敎徒들이 外國과 連絡하여 우리나라를 危殆롭게 할 念慮가 있다하여 高宗 三年(檀紀 四千百九十九年)에 秘密히 入國한 佛蘭西사람 敎士들과 天主敎徒 數萬名을 大虐殺하였다. 敎士 中 한사람이 빠져나가서 淸國에 있는 佛蘭西 艦隊에 이일을 알리니 佛國艦 七隻이 江華島를 侵犯하다가 우리 軍士에게 敗하여 물러가니 이를 丙寅洋擾라 한다.

高宗 五年에 美國商船이 平壤의 大洞江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빠지고 糧食이 다하여 沒殺한 일이 있었다. 淸國에 있는 美國 官吏가 오랜 뒤에 이 所聞을 듣고 高宗 八年에 軍艦 五隻을 거느리고 江華 海峽으로 侵入하다가 우리 軍士에게 막혀서 더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가니 이를 辛未洋擾라 한다.

大院君은 거듭 洋擾를 치뤘으나 번번히 쳐서 물리쳤음으로 外國의 무서운 것이 없음을 速斷하고 禁敎와 排外의 決心을 더욱 굳게 하고 서울 鐘路 네거리와 國內의 重要한 곳에 斥和碑를 세우니 그 글에「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이라 하였다.

日本은 德川幕府의 末期에 歐美로 더불어 通商關係를 맺고 西洋文化를 輸入한 뒤로 우리나라는 日本의 心事를 疑心하여 前부터의 交際를 끊어버렸더니 高宗 五年 戊辰에 이른바 明治維新이 된 後에 그 事由를 우리 나라에 通知하여 왔는데 그 文句가 前과 같이 恭遜하지 아니함으로써 大院君이 이를 받지 아니하여 兩國의 사이에 不和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中에 大院君은 朝廷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는데 처음에 大院君은 外戚이 權勢를 잡고 國事를 그르치는 일이 있을까 두려하여 高宗 王妃를 揀擇함에 있어서 일부러 아비 없는 閔妃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閔妃는 非常히 재주가 있고 政治에 慾心이 있는지라 여러 가지 策略을 써서 大院君이 政權을 잡은지 十年만에 마침내 이를 내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高宗에게 돌아온 政權을 自己가 代身 掌握하고 閔氏 一派의 勢力을 늘이니 이로부터 大院君과 그 며느리 閔妃와의 사이에 葛藤이 생겨서 여러 가지 變을 지어내었다. 大院君이 물러나고 閔妃의 本家便에서 勢道를 잡으면서 對外 方針이 次次 變하여 가더니 高宗 十二年 乙亥에 日本 軍艦 한 隻이 江華島앞에 들어와 서있는 것을 우리 砲臺가 이를 砲擊하니 日本이 이를 當하여 事態가 險惡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日本의 眞意가 이 機會에 外交關係를 맺음에 있고 우리 國策도 그렇게 기우러진 때이라 다음해 丙子에 兩國代表가 江華에 모여서 修好條規를 맺으니 그 內容은 朝鮮이 自生國으로써 日本과 平等權을 가지고 使命을 交換 하기로 하고 釜山 밖에 또 二港을 開港하기로 한 것이다. 이 結果로 十六年 己卯에 日本公使 花房義質이 와서 倭館을 열고 釜山 元山 仁川이 차례로 開港 되었다.

原來 朝鮮은 仁祖 丁丑 以後에 淸國을 宗主國으로 하여 多貢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은 形式에 그치고 實際에 있어서는 內外의 政策을 自主하는 獨立國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朝鮮에 外國關係의 事端이 일어날 때마다 淸國은 恒常 外交에 對하여 朝鮮이 自主國임을 言明하니 그럼으로 江華條約의 첫머리에 이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條約이 締結된 뒤에 日本의 勢力이 朝鮮에 퍼질 兆朕이 보이므로 淸國은 前日 態度를 버리고 그 外交를 맡아보는 北洋大臣 李鴻章이 우리나라를 勸해서 西洋各國으로 더불어 通商을 열게 하여 十九年 壬午에 美國과 修好通商 條約이 成立하고 癸未年에 英國 德國(독일) 甲申年에 伊太利 俄羅斯와의 條約이 次例로 成立하여 我國이 完全히 國際舞臺위에 나서고 世界 各國의 사이에 門戶가 開放되었다.

大抵 産業 革命으로 이미 成就한 西洋社會는 物資 文明이 相當히 發達하고 所謂 資本主義 社會를 만들고 그 만들어 낸 商品을 팔기 爲하여 새로운 市場을 찾아내기에 눈이 붉은 때이라 우리나라가 홀로 東北 一隅의 隱土國으로서 門戶를 잠그고 있을 수 없었고 또 西洋社會와의 接觸을 通하여서만 그들의 새로운 物質文明을 받아들일 수가 있음으로 日本을 비롯한 여러 外國과 通商을 始作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여러 强國이 우리나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 勢力 다툼을 하게 되었으니 實로 高宗 丙子 以後의 우리나라는 世界列强의 角逐場으로 化한 것이다.

壬午軍亂 甲申政變

오랜 동안의 鎖國政策을 깨트리고 外國과의 通商을 許한 우리나라는 비로소 世界의 情勢에 눈뜨게 되어 高宗 十八年 辛巳에 魚允中 洪英植等 十數人을 紳士遊覽團이라 하여 日本으로 보내어 開化의 政務를 視察케 하니 이는 우리나라가 西洋의 新文明에 對하여 積極的으로 關心을 表示한 始初이었다.

紳士團이 돌아와서 壬午年에 統理機務衛門이라는 機關을 만들어서 政治를 施行하며 또 兵制를 고치고 日本 陸軍 將校를 데려다가 新式의 軍隊를 編成하였다.

이와 同時에 모든 方面에 新舊의 對立이 생겨서 서로 非難과 攻擊을 일삼게 되니 新文化를 받아들이자는 者는 開化派라 하고 日本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守舊派라 指目하였는데 이들은 世界列强의 틈에 끼어있는 우리나라의 새 地位를 自覺하여 國民一致로 自主獨立의 基礎를 닦는다는 것보다 開化派는 日本을 힘입으려 하고 守舊派는 淸國을 기대려하여 兩者가 모두 제 精神을 차리지 못하는 點으로는 매 한가지오 다른 것이 없었고 이로 因하여 우리나라는 淸國과 日本이 東洋에서의 地位를 다투는 씨름판이 되었다.

軍制改革과 日本 勢力의 導入은 守舊派의 싫어하는 바이오 또 舊式 軍人은 失職될 것을 걱정하고 있더니 壬午年에 舊式 軍人이 오랫동안 料米를 받지 못하고 또 밀렸던 料米를 타는데 쌀에 모래가 많이 섞여서 이에 不平이 暴發하여 便으로 退處하여 있는 大院君에게 陳情을 하고 한便으로 當時 政權을 잡고 貪虐 不法으로 民斂을 한 閔氏를 죽이고 危害가 閔妃에게 미칠듯 함에 閔妃는 忠州로 逃亡하고 한便으로 日本 公使館을 襲擊하고 또 敎師로 와 있던 日本將校를 죽이니 日本公使는 스스로 使舘에 불지르고 仁川으로 가서 英國 軍艦을 얻어 타고 本國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壬午軍亂이라 한다.

大院君이 이 變報를 듣고 나와서 亂을 鎭定하고 다시 政權을 잡으니 閔氏들은 救援을 淸國에 請하매 淸國에서는 이 機會를 타서 우리나라에 勢力을 뻗치려 하여 吳長慶으로 하여금 兵 三千을 거느리고 서울로 와있게 하고 大院君이 이번 變亂이 張本人이라 하여 억지로 淸國으로 데려가더니 後에 돌려보냈다. 花房은 軍士를 거느리고 仁川으로 와서 變亂의 責任을 물으니 朝廷에서는 賠償金 五十萬圓을 내고 日本 公使館에 護衛兵을 두고 使臣을 日本에 보내어 陳謝의 뜻을 表하는 等 條件으로 條約을 맺으니 이가 濟物浦條約이오 이해 八月에 朴英孝를 大使로 하고 金玉均을 副使로 日本에 보내니 이때의 乘船에 처음으로 太極旗를 使用하였다.

朴英孝 金玉均 等이 日本에 가서 보고는 우리나라 政治 開化의 時急함을 깨닫고 돌아와서 爲先 典圜局(주전소(鑄錢所)) 機器局(제조소(製造所)) 博文局(인쇄소(印刷所))等을 設置하고 漢城旬報를 發刊하여 民志의 啓開發에 힘쓰고 國政 改革에 對하여 여러 가지 抱負를 發表하니 이가 우리나라 最初의 新聞이었다.

高宗 二十一年 甲申에 淸國은 佛國과의 사이에 紛爭이 있었다. 그럼으로 다른 일을 돌아볼 餘力이 없는지라 開化派에서는 이를 알고 日本의 後援을 얻어 守舊派를 掃蕩하여버릴 計劃을 세우고 그해 十月에 新設한 郵政局의 開廳式이 있음을 機會로 하여 閔氏 一黨의 여러 要人을 죽이고 日兵을 宮中으로 끌어들여 王을 족쳐서 開化派의 新政府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守舊派가 淸國 軍士를 淸兵함에 淸將 袁世凱가 軍士를 이끌고 들어가서 日軍과 接戰하였다. 日兵이 힘이 弱하여 宮中에서 敗退하고 洪英植 等은 죽고 日本公使 等은 憤激한 民衆의 襲擊을 받으면서 서울에서 退去하고 朴英孝 金玉均等은 이틈에 끼어 日本으로 亡命하고 그 卽時로 閔氏 守舊派의 政局이 다시 나타나니 이것이 甲申 十月의 變이라는것이오 開化派의 실패失敗는 내 집안일을 남의 힘으로만 하려 한 當然한 結果이오 그 까닭에 우리나라의 開化가 時運에 뒤진 것은 千載의 恨事이었다.

이해 十一月에 日本에서 全權大使 井上聲이 군대(軍隊)를 거느리고 와서 談辨하여 우리가 日本公使館의 新築할 基地와 費用을 負擔하는 條件으로 그 前 일을 結末 짓고 한便 日本은 다음해 乙酉에 伊藤博文을 淸國에 보내어 李鴻章으로 더불어 天津에서 談辨하여 兩國의 朝鮮 駐屯 兵을 四個月 以內로 撤收할 것과 앞으로 朝鮮 事變에 있어 兩國이 軍隊를 出動 시킬 때에는 서로 通知할 것을 約定하니 이것이 所謂 天津條約이오 이 甲申의 變은 여러 해 동안 속으로 葛藤되는 淸 日 兩國의 勢力이 表面에서 衝突한 것이다.

天津條約에 依하여 兩國이 모두 撤兵하였으나 淸兵의 一將 袁世凱가 通商事務 全權委員의 名目으로써 그대로 서울에 머물면서 內政에 干涉하고 諸閔이 그와 어우러져서 放恣한 行動을 行하여 國事가 더욱 글러졌다. 다만 時勢의 推移하는 바에 開化에 關한 新施設이 哲宗때에 安東金氏들이 勢道하여 함부로 官職을 팔아먹고 이 官職을 산 무리들이 地方官으로 내려와서 討索을 마음껏 하고 兩班階級이 書院을 巢窟로 하여 百姓들을 괴롭게 함으로 各地에서 民亂이 일어나고 民心이 不安한 中 慶州의 崔濟愚(水雲)가 東學이란 새 宗敎를 일으켜서 「輔國安民 廣濟蒼生」을 敎의 主旨로하니 塗炭에 빠진 百姓들이 많이 加入하였다. 政府에서는 特權階級에 不平을 품은 下層階級의 사람들이 한 黨으로 團結됨을 두려워하여 東學이 世上을 어지럽히고 民衆을 속인다는 罪名으로 崔濟愚를 잡아다 大邱에서 死刑하니 敎徒들은 地下로 들어가서 東學運動을 繼續하였다. 秕政에 시달리는 百姓들은 마음이 많이 이에 기우러져서 隱然히 天勢力을 形成하더니 壬辰에 이르러 崔時亨(해월(海月))을 中心으로 敎祖 崔濟愚의 伸寃運動이 表面化하여 政府에 글을 올리고 癸巳年에는 忠淸道 報恩을 中心으로 굳게 團結한 敎徒들이 京城에 올라와서 大闕 앞에서 歎願한다는 名目으로 示威運動을 敢行하였다. 이때에는 政府의 解散命令으로 一旦 물러났으나 한便 不安한 民心을 刺戟하고 한便 敎勢가 크게 떨쳐서 慶尙 全羅 忠淸의 三南을 비롯하여 江原 黃海 平安道에 이르기까지 東學의 運動이 急速度로 發展하였다

이때 全羅道 古阜 郡守가 萬石洑(정읍)를 修理함에 있어 不正한 일이 있었음으로 民亂이 일어나더니 東學黨員 全琫準이 이를 契機로 하여 그 무리들과 함께 亂離를 일으켜서 四方이 이에 呼應하여 일어났다. 官軍이 이를 치러 갔으나 到處에서 敗하고 마침내 全州가 東學黨에게 占領되었음으로 朝廷에서 袁世凱에게 相議한 結果 淸國 軍士 일천오백명이 와서 軍士를 도와서 겨우 亂을 平定하였다. 日本은 벌써부터 한번 淸國과 싸워 大陸에 있는 地位를 決定해 보려고 벼르는 차이라 甲午 二月에 日本의 保護下에 있던 金玉均이 上海에 갔다가 朝鮮사람 刺客에게 暗殺을 當하고 國論이 일어나고 因하여 淸國이 東學亂에 日本에 通告함이 없이 朝鮮에 出兵함은 天津條約을 違反함이라 하여 또한 留民을 保護한다는 名目으로 出兵하더니 이해 六月에 마침내 牙山 海上에서 兩國의 海軍이 衝突하고 成歡에서 陸戰이 始作하였다. 戰爭이 난 뒤에 水陸 양쪽에서 淸國이 大敗하여 日本의 地位는 나날이 强하여 졌다.

日本이 勢力의 커짐을 따라 우리나라 內政에 干涉하기 始作하고 開化黨이 勢를 얻어 閔氏 一族을 물리치고 金弘集을 首班으로 하는 新政府가 組織되고 淸國과의 關係를 끊고 開國紀元 遵用科擧 廢止 階級打破 社會革新 等에 關한 二百餘件을 決定하니 이를 甲午更張이라 한다. 甲午更張은 우리 나라의 千數百年동안을 내려오던 封建的制度를 終決시키고 西洋의 資本主義를 輸入하는 始初이며 日本이 우리나라에 이를 强要한 것은 우리나라의 發展을 爲함이 아니오 日本 資本主義의 한 市場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乙未年에 日本과 淸國이 馬關條約을 맺고 우리나라의 獨立을 밝히고 遼東半島를 日本에 주기로 하더니 俄羅斯와 獨逸과 佛蘭西의 三國이 日本을 눌러서 遼東半島를 淸國에 돌려주기로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日本의 힘이 弱함을 보고 또 主權의 侵害와 利權의 强要가 甚해 짐으로 朝廷과 國民들에 排日의 氣運이 움직이고 따라서 日本의 壓制로 된 更張도 좋을 수가 없다하여 잘 施行되지 아니 하였다.

壬午年에는 門閥打破의 勅諭가 내려서 兩班도 商業에 從事할 수 있고 또 商業이나 工業을 하던 사람도 學敎에 入學할 수 있다 하니 이는 四民平等(士農工商)의 첫 걸음을 내 디딘 것이며 이러한 精神 아래 乙酉年에는 培材學堂을 세워서 新學問과 新思想을 가르치고 이해에 또 濟象院을 設立하여 처음으로 西洋의 醫術을 받아 들였다. 이 보다 앞서 甲申年에 郵政局을 設立하고 郵遞制度를 實施하려던 것이 甲申政變으로 因하여 一時 中斷되더니 乙酉年에 電報局이 생기고 이와 前後하여 主要 都市에 電信線이 架設되었다.

 

日本의 侵略

우리 나라에 排日의 소리가 높아짐에 從前부터 東洋 方面에 勢力을 뻗쳐보려고 恒常 機會를 엿보고 있던 俄羅斯가 公使 韋貝(카를 베베르)를 우리 나라에 보내어 王室에 親近하기를 힘쓰고 日本을 누름에는 俄國이 가장 適當함을 宣傳하여 새로이 宮廷의 信賴를 받게되고 開化黨은 漸次로 沒落하였다. 이때 日本의 公使 三浦梧樓(미우라 고로)는 武人이라 이를 慨하여 局面의 非常打開를 決定하고 乙未 八月에 一邊 大院君을 데려내어 먼저 宮中으로 들어가고 兵士와 劍客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親俄政策을 主張하고 있는 閔妃를 害한 後 그 屍身을 燒火하고 一邊 三浦 自身은 王에게 뵈고 親俄派를 쫓아낼 것과 開化派 內閣을 再 組織할 것을 强請하여 王의 承認을 얻으니 이를 八月乙未之變이라 한다. 이 事變이 外交上으로 거북한 問題가 됨에 日本은 三浦 以下 關係者를 召還하여 投獄하였다.

開化黨 內閣은 다시 改革案을 進行하여 舊曆을 廢止하고 太陽曆을 採用하며 斷髮令을 領布하면서 一王一元의 年號를 세우기로 하여 丙申으로부터 建陽이라 採할 것을 決定하였다. 그러나 日本의 强壓手段은 一般의 惡感을 사고 더욱이 閔妃의 弑害는 王의 父子의 至恨이 되어 開化黨의 施政은 잘 進行되지 아니하였고 便으로 朴定陽 等 親俄派의 暗中運動이 있어 建陽 元年 二月에 王과 太子가 宮中에서 벗어나서 俄國使舘으로 옮겨가고 政局이 一變하여 開化의 新法令은 많이 撤廢되고 俄國의 勢力이 우리나라 宮廷에 깊이 뿌리를 박고 金弘集은 亂 中에 맞아죽고 그 밖의 親日派는 日本으로 亡命하고 各 地方에서는 國母의 怨讐를 갚고 斷髮을 反對한다하여 義兵이 일어나서 國內가 騷然하였다.

高宗은 俄館에 머무르기 一年만에 丁酉 二月에 慶運宮(지금의 덕수궁(德壽宮))에 돌아갔다. 그리고 己未獨立 後 하지 못한 바를 決定하여 皇帝位에 오르고 國號를 大韓이라 고치고 年號를 光武로 바꾸고 特派大使 또는 全權公使를 各國에 派遣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허울은 훌륭하게 만들어 졌으나 君上臣下의 아무 데서도 새로운 精神을 가다듬은 實相을 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官廷은 不學無識한 親俄派의 窟穴이 되어서 俄國의 심부름하기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光武元年 九月에는 俄國이 半넘어 威脅으로써 우리 軍隊의 敎鍊과 財政의 處理를 手中에 거두어가며 一邊 鑛山 森林 其他의 利權을 훔쳐가기에 熱中하며 또 海軍 根據地로 馬山을 租借하려는 陰謀도 進行하고 있었다.

甲申의 黨人으로서 美國에 亡命하여 있던 徐載弼이 建陽 元年 美國에서 돌아와서 開化黨 內閣의 顧問으로 있으면서 獨立門을 짓고 新聞을 내고 獨立協會를 만들어 國民精神 啓發에 힘쓰더니, 俄國의 이러한 野心을 보고 猛烈히 일어나서 反對運動을 일으키니 俄國의 行動이 크게 退縮되고 馬山 租借 問題도 未然 防止되었다.

獨立協會는 內政의 改革上에 많은 意見을 提出하였으나 政府나 民間이 모두 입으로만 떠들 뿐이오 實踐에 對한 計劃과 熱意가 없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오직 光武年間에 새로운 施設이 前보다 많았으니 元年에는 京城 仁川間에 電線을 架設하고 二年에는 京城에 電車가 놓이고 三年에는 京仁鐵道가 開通되었다.

俄國이 우리 나라에 가까워 짐음 日本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써 日本은 俄國에 對해서 韓國問題에 關한 協議를 求하여 두어 次例 內約도 成立되었다. 그러나 俄國은 불같은 南下慾을 그러한 內約에 거리낌없이 하고싶은 일을 하며 또 滿洲의 經營에 着手하여 光武 二年에 淸國으로부터 遼東半島를 租借하여 旅順口에 軍港을 設備하고 滿洲鐵道의 敷設權을 얻으며 一邊 朝鮮의 鎭海灣의 밤구미(마산포의 한 지역)를 租借하여 그 野心이 점점 들어 났다. 다시 光武 四年 淸國에 義和團의 亂이 있음을 機會로 하여 滿洲를 軍事占領下에 두고 各國의 말에 이기지 못하여 撤兵한다는 期限을 定하되 그는 形式뿐이오 實行하지는 아니 하였다. 日本은 俄國의 南下를 制御하려하여 光武 六年 一月에 日英同盟을 맺으니 그 大槪는 韓淸兩國의 獨立과 및 그 領土를 保全하는 同時에 日本은 韓國에서 英國은 淸國에서 政治上 經濟上으로 特殊한 權益을 가지고 이것이 侵害되는 때에는 兩國이 公同으로 必要한 措置를 하며 또 兩國中 一國이 他國과 開戰하는 때에는 一國은 嚴正 中立을 지킨다 함이었다. 俄國에서는 日英同盟에 對抗하기 爲하여 俄佛同盟을 맺어 極東에 있는 兩國의 利益을 共同으로 保護한다 하였다.

日本과 英國이 同盟을 맺어 所謂 韓國의 獨立과 領土保全한다 함은 韓國의 利益을 爲함이 아니라 韓國이 俄國에게 奪取됨을 防止하고 日本이 奪取하겠다는 뜻이니 이때로부터 韓國은 完全히 列强의 俎上肉이 된 것이오 自主獨立하는 歷史는 이미 끊어진 것이다.

俄國은 滿洲에서 撤兵할 誠意를 보이지 아니할 뿐 아니라 光武 七年에는 韓國으로 손을 뻗어서 一邊 龍巖浦(鴨綠江 河口 平北)의 租借를 求하고 一邊 軍隊를 그리로 보내서 伐木과 建築의 사업을 始作하였다.

日本은 俄國과 最後의 交涉을 始하여 俄國이 滿洲와 韓國에서 손을 떼기를 要求하여 俄國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北緯 三十九度 以上의 우리나라의 平安道와 咸鏡道의 땅을 中立地帶로 하기를 要求하고 조금도 讓步하려 하지 아니하더니 光武 八年 二月에 마침내 日俄戰爭이 일어났다. 日俄의 風雲이 急하여짐에 우리 政府는 미리 國外中立을 宣言하였으나 戰爭의 始作됨과 함께 日本軍이 連續 入國하여 國土의 一部가 戰爭으로 化하고 俄國의 패퇴敗退를 따라서 日本의 壓力이 그대로 커졌다. 그리하여 日本이 우리 나라에 對한 施政改善의 忠告權과 外交機能의 制限權을 가지고 다시 財政과 外交의 監督權을 가지고 政府 各 機關에 日本人 顧問이 들어앉고 이 동안에 京義 京元의 兩 鐵道 敷設權 以下로 許多한 權益을 가지고 이어 通信事業도 日本의 것이 되었다.

光武 九年에 日本이 滿洲 奉天에서 大勝하고 또 俄國 海軍이 對馬海峽에서 致命傷을 받아 戰局의 大勢가 이미 定하매 美國 大統領 루즈벨트가 이 中間에 들어 兩國의 講和條約이 포츠머스(뉴햄프셔주)에서 調印되어 日本이 韓國에서 政治上 軍事上 經濟上으로 特殊한 利益이 承認되었다.

日本은 이해 十一月에 伊藤博文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와서 威脅으로써 協約을 맺으니 外交權을 빼앗고 統監을 京城에 두어 保護政治를 施行하니 이것이 普通 이른바 五條約 또는 乙巳保護條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條約은 參政大臣이 反對하고 皇帝가 署名을 拒絶한 때문에 形式을 갖추지 못하고 一方的으로 實行된 것이다.

이 條約이 한번 發布됨에 國民 上下의 憤激이 極度에 達하고 오랫동안 韓國의 保全과 東洋平和를 公約해 오던 日本의 無信義함을 痛罵하여 韓臣들 중에는 條約 廢棄를 疏請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매 閔泳煥 趙秉世 以下 殉國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趙秉世는 그 遺書에 「强隣이 條約을 져버리고 盜賊의 무리가 나라를 팔아서 우리의 子孫이 이 將次 남의 奴隸가 될 것이니 바라건대 同胞들은 各自가 奮發하여 獨立의 基礎를 닦으라」하고 閔泳煥의 遺書에서는「내가 죽어도 地下에서 우리 나라의 獨立을 爲하여 싸우리니 同胞들은 조금도 失望하지 말고 千萬番 奮發하여 뜻을 굳게 가지고 學問을 더욱 힘쓰며 한마음 한뜻으로 나가서 自主獨立을 恢復하면 나는 저승에서 기뻐하리라」하였다.

그러나 日本의 韓國倂合에 對한 方案은 이미 決定되고 時機만 기다릴 뿐이더니 光武 十一年에 和蘭(네델란드) 海牙(헤이그)에서 萬國平和會議가 열리매 韓國皇帝의 密使 李相卨 李雋이 海牙에 가서 協約의 無效함을 力說하니 이에 日本이 그 責任을 묻는다 하여 皇帝를 退位시켜 太皇帝라 하고 太子를 세워 皇帝를 삼고 年號를 隆熙라 고치고 一切 行政을 統監의 指揮를 받고 日本人을 韓國의 官吏로 任用하기로 하는 同時에 軍隊를 解産하고 各部의 次官에 日本人을 任用하여 所謂 次官政治가 實現되었다.

間島地方은 淸國의 封禁地로 되어 滿洲族 以外의 人民의 入居함을 許諾하지 아니하더니 어느 틈에 淸國의 山東地方의 流民들이 入住하여 우리 高宗 初年에는 이미 抑制할 수 없이 되었음으로 高宗 十八年에 淸國의 土門江 一帶 地方을 正式으로 開放하기로 하고 官吏를 보내어 調査할 때 그곳이 이미 朝鮮人의 集團 居住로 된 것을 發見하였다. 이에 淸國에서는 朝鮮人에게 淸國 民俗을 좇거나 朝鮮으로 撤還하거나 兩者 中에 그 하나를 擇하라고 하였다. 朝鮮人은 그대로 살되 淸國 風俗을 좇지 아니하겠다 하여 말썽이 되더니 二十年에 魚允中이 西北經略使가 되어 豆滿江 沿邊을 視察할 때에 이 事情을 알고 이는 國勢民生의 큰 問題라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白頭山 定界碑와 그 附近의 地形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그 結果로 定界碑에서 가까이 나오는 물은 東北의 方向으로 흐르다가 土門의 形狀을 짓고 지금 間島地方을 휩싸 흐르는 것을 發見하고 土門江이라는 것은 곧 이 물이오 間島地方은 當然히 朝鮮의 所屬임을 判定하였고 淸國에서는 土門江은 豆滿江의 別名이라 하여 兩國의 主張이 서로 對立되었다. 二十二年에 兩國은 實地로 調査한 結果 淸國에서 그 主張하는 根據가 不足함을 깨닫고도 오히려 屈하지 아니하고 朝鮮에서도 期於히 主張을 貫徹하려하여 爾來 數十年에 問題의 解決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韓國의 外交가 日本으로 넘어감에 間島問題가 淸日사이의 紛爭이 되고 처음에는 日本이 韓國의 方針대로 間島를 우리 나라 領土로 定하고 行政機關을 間島의 龍井村에 두고 朝鮮人民을 거느리더니 隆熙 三年에 日本이 南滿州 鐵道의 安奉線을 고쳐 놓을 때에 淸國이 日本의 말을 잘 듣지 아니함에 日本은 鐵道用地 問題를 日本의 要求대로 解決하는 代身에 間島를 淸國領土로 認定하였다. 그리하여 間島의 主權은 淸國에 주고 韓國人民은 前과 같이 自由로 居住하면서 淸國의 法權에 服從하며 龍井村 局子街 頭道溝 百草溝 는 開放地로 하여 이쪽의 領事館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間島問題는 日本이 저희 本國의 利益을 爲하여 淸國에 준 것이오 韓國의 承認한 것이 아님으로 今後 우리 나라와 中國과의 사이에 다시 紛爭이 일어날 問題이다.

 

民衆運動

처음에 乙巳保護條約이 맺어지며 中央 政局이 騷亂함은 勿論이오 地方에서도 條約에 對한 反抗運動이 到處에서 일어났다. 그 中에서도 크게 氣勢를 떨친 것은 光武 十年에 閔宗植이 洪川에서 義兵을 일으키고 崔益鉉은 淳昌에서 申乭石은 平海에서 이에 呼應하여 일어나 한동안 日人을 괴롭게 하였다.

日本 勢力이 커지기 始作힘으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 中에서 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서 日本의 앞잡이가 되어 祖國과 同胞를 背叛하는 무리가 생겼으니 그 中에서도 安秉畯 尹始炳같은 者들은 東學敎徒의 한 사람인 李容九와 더불어 一進會를 만들어서 日本의 戰爭에 協力하고 또 保護條約을 맺기 前부터 이미 우리 나라는 日本의 保護를 받아야 한다고 發表하였다. 이에 日本에 가있던 東學의 首領 孫秉熙는 곧 京城으로 돌아와서 李容九와 손을 끊고 새로이 天道敎를 일으켜서 東學의 傳統을 이으니 따로이 侍天敎를 세워서 이와 對立 하였다.

이에 一進會의 反逆行動에 對抗하기 爲하여 張志淵等이 大韓自强會를 組織하였으나 內務大臣으로 들어간 宋秉畯에게 解散을 當하고 광무光武 十一年에는 羅寅永等이 日本과 協約맺은 五大臣을 賣國奴 또는 五賊이라 하여 暗殺을 圖謀하고 五大臣의 한 사람 權重顯을 길거리에서 狙擊한 일이 있었다.

隆熙 年代에 이르러서는 義憤에 북받치는 民衆의 激烈한 行動이 더욱 잦았다. 처음에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를 빼앗으려는 행동(行動)을 美國이 是認하고 日本의 推薦으로 美國사람 須知芬(D.W.스티븐스)이 우리 나라의 外交 顧問이 되더니 須知芬이 美國에 건너가서 日本이 우리 나라에 對한 行動을 讚한 까닭에 田明雲과 張仁煥의 두 사람이 이를 쏘아 죽이고 三年 十月에는 前 統監 伊藤博文이 哈爾濱(하얼빈)에 간 것을 安重根이 쏘아 죽이고 이해 十二月에는 總理大臣 李完用이 京城의 길거리에서 李在明의 칼에 찔린 일은 가장 世上에 들어 난 일이다.

앞서 國家의 內外 情勢의 緊迫과 새 思潮의 움직임은 뜻이 있는 人士들로 하여금 日俄를 反省하게 하여 國學에 對한 硏究가 늘어갔으니 周時經은 國文의 硏究와 普及에 힘썼고 申采浩 朴殷植같은 젊은 學者들은 國史 硏究에 功績이 있었고 兪吉濬의 西遊見聞은 國文과 漢文을 섞어 쓴 새로운 글월로서 新 小說은 우리 나라의 文學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言論機關에는 獨立新聞을 비롯하여 皇城新聞 帝國新聞 大韓每日新聞 等이 차례로 나타나서 모두 獨立思想을 鼓吹하고 日本의 野望을 非難하였다.

그러나 한번 기우러지기 始作한 國勢는 다시 恢復할 길이 없었다.

隆熙 四年에 日本軍閥의 巨頭 寺內正毅(데라우찌 마사다께)가 總督으로 되어 總理大臣 李完用과의 사이에 合邦條約이 맺어져서 이해 八月 二十九日에 이를 發表하였다.

우리 나라가 建國 以來 四千餘年에 일직 斷絶 된 일이 없는 歷史의 傳統이 처음으로 끊어지고 二千萬 民族은 悲痛한 試鍊을 直面하였다.

李氏 建國으로부터 隆熙 四年 庚戌에 이르기까지 二十七代 五百十九年이었고 뜻 있는 사람들은 義憤을 이기지 못하여 日本에 反抗하다 或은 죽고 或은 獄에 갇치고 或은 外國으로 亡命 하였다.

己未獨立 宣言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이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 良心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倂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 ―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이며 全人類共同主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든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舊時代의 遺物인 侵略主義 强權主義의 犧牲을 作하야 有史以來 累千年에 처음으로 異民族箝制의 痛苦를 嘗한지 今에 十年을 過한지라 我生存權의 剝奪됨이 무릇 幾何이며 心靈上發展의 障碍됨이 무릇 幾何이며 民族的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이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寄與補裨할 機緣을 遺失함이 무릇 幾何이뇨

噫라 舊來의 抑鬱을 宣揚하려하면

時下의 苦痛을 擺脫하려하면

將來의 威脅을 芟除하려하면

民族的良心과 國家的廉義의 壓縮銷殘을 興奮伸張하려하면

各個人格의 正當한 發達을 遂하려하면

可憐한 子弟에게 羞恥的財産을 遺與치 아니하려하면

子子孫孫의 永久完全한 慶福을 導迎하려하면

最大急務가 民族的獨立을 確實하게 함이니 二千萬各個가 人마다 方寸의 刃을 懷하고 人類通性과 時代良心이 正義의 軍과 人道의 干戈로써 護援하는 今日 吾人은 進하야 取함에 何强을 挫치 못하랴 退하야 作하매 何志를 展치 못하랴

丙子修護條規 以來 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食하얏다 하야 日本의 無信을 罪하랴 아니하노라 學者는 講壇에서 政治家는 實際에서 我 朝宗의 世業을 植民地視하고 我 文化民族을 土昧人遇하야 한갓 征服者의 快를 貪할 뿐이오 我의 久遠한 社會基礎와 卓犖한 民族心理를 無視한다 하야 日本의 少義함을 責하랴 아니하노라

自己를 策勵하기에 急한 吾人은 他의 怨尤를 暇치 못하노라

現在를 綢繆하기에 急한 吾人은 宿昔의 懲辨을 暇치 못하노라

今日 吾人의 所任은 다만 自己의 建設이 有할 뿐이오 決코 他의 破壞에 在치 아니 하도다

嚴肅한 良心의 命令으로써 自家의 新運命을 開拓할 뿐이오 決코 舊怨과 一時的感情으로써 他를 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 舊思想 舊勢力에 羈縻된 日本 爲政家의 功名的犧牲이된 不自然又不合理한 錯誤狀態를 改善匡正하야 自然又合理한 政經大原으로 歸還케 함이로다

當初에 民族的要求로써 出치 아니한 兩國合倂의 結果가 畢竟 姑息的 威壓과 差別的 不平과 統計數字上虛飾의 下에서 利害相反한 兩民族間에 永遠히 和同할 수 없는 怨溝를 去益深造하는 今來實積을 觀하라 勇明果敢으로써 舊誤를 廓正하고 眞正한 理解와 同情에 基本한 友好的 新局面을 打開함이 彼此間 遠禍召福하는 捷徑임을 明知할 것이 아닌가 또 二千萬 含憤蓄怨의 民을 威力으로써 拘束함은 다만 東洋의 永久한 平和를 保障하는 所以가 아닐 뿐 아니라 此로 因하야 東洋安危의 主樞인 四億萬支那人의 日本에 對한 危懼와 猜疑를 갈수록 濃厚케 하야 그 結果로 東洋全局이 共倒同亡의 悲運을 招致할 것이 明하니 今日 吾人의 朝鮮獨立은 朝鮮人으로 하야곰 正當한 生榮을 遂케 하는 同時에 日本으로 하야곰 邪路로써 出하야 東洋支持者인 重責을 全케 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야곰 夢寐에도 免치 못하는 不安恐怖로서 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로 重要한 일부一部를 삼는 世界平和와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區區한 感情上 問題리오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過去全世紀에 鍊磨長養된 人道的 精神이 바야흐로 新文明의 曙光을 人類歷史에 投射하기 始하도다.

新春이 世界에 來하야 萬物의 回蘇를 催促하는도다 凍氷寒雪에 呼吸을 閉蟄한 것이 彼一時의 勢라 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니 天地의 復運에 際하고 世界變潮를 승乘한 吾人은 아무 躊躇할 것 없으며 아무 忌憚할 것도 없도다 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이며 我의 自足한 獨創力을 發揮하야 春滿한 大界에 民族的精華를 結紐할지로다

我等이 玆에 奮起하도다 良心이 我와 同存하며 眞理가 我와 倂進하는도다 男女老少없이 陰鬱한 古巢로서 活潑히 起來하야 萬彙群象으로 더불어 欣快한 復活을 成遂케 하도다 千百世祖靈이 吾等을 陰佑하며 全世界 氣運이 吾等을 外護하나니 着手가 곧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 따름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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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約三章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人道 生存尊榮을 爲하는 民族的要求이니 自由的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感情으로 逸走치 말라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곰 어디 까지던지 光明正大케 하라

朝鮮建國 四千二百五十二年 三月 一日

朝鮮民族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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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한자병기 아국역사(我國歷史(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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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서 배우던

아국역사(我國歷史)

한장경 편

고대 삼일운동

  편집(編輯)서

이 原稿는 現在發刊된 많은 歷史서와는 歷史觀點에서 差異가 있다고 생각되고 또 專門歷史硏究의 考證面보다는 보이지 않게 흘러오는 精神體系의 한 가닥을 느끼게 해주는 著述이라 생각되나 한글전용의 현시점에서는 여러 가지 벽이많아 발간치 못한다 시쳇말로 구닥다리 공부를 좀하신 분들이 옛날 얘기하듯 일러주는 도리밖에? 없지 않을까 尹相基

  回顧談

二十二 歲에 咸興農村에서 私立學校 敎員으로 있을때에 漢學을 하는 노인집에 우리나라 歷史 大東紀年이라는 책이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빌려보았다. 이때는 日本한테 침략당한지 八年이라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기만하면 압수하는 까닭에 역사책을 얻어 보기는 극히 어려웠다. 그 책을 보고 이 나라에 나서 제나라역사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 책을 비밀히 읽었다. 또 그 이웃洞里에 燃藜室記述이라는 역사책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도 비밀히 빌려 읽었다. 그때 每日申報에 朝鮮儒敎淵源이라는 논문이 계속 발표되었는데 우리나라 역사가 전연 발표되지 못하고 있던 當時에 이 論文은 내 歷史硏究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퇴근하여 숙소에 돌아오면 신문에서 꼭 이 논문을 베껴가지고 그날 밤으로 이것을 精讀하였다. 그 학교를 그만둔 후에 己未年의 三一運動을 겪고 이를 契機로 사람들 중에서 우리역사를 알아야겠다는 民族意識이 높아지고 나 역시 우리역사를 더 깊이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서 그해 가을에 歷史遺蹟을 探訪하기 爲하여 期限없는 南道旅行을 떠났다. 서울에 와서 몇일간 여러 史蹟을 돌아보고 더 南으로 내려가서 公州 扶餘 恩津 鷄龍山을 거쳐서 淸州 報恩 錦山을 보고 全州에 들어갔다가 萬頃江을 따라 내려가다 旅費가 떨어졌다. 할 수 없이 金堤郡 農村의 어느 私立學校 敎員으로 就任하여 一時지내기로 했는데 그만 육년을 보냈다. 이 학교에 있는 동안에 全北과 全南에 있는 史蹟을 두루 돌아보고 여름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慶州 金海等地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이 學校를 그만둔 후에는 北間島와 西間島를 돌아다니면서 고대 祖上들이 經營하던 滿洲方面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역사연구 十年間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는 우리나라의 古代에는 農民이 全人口의 九割이 넘었는데 역사책은 主로 王室과 貴族들의 역사로 되어있고 農民의 역사는 全然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었다. 나는 農民의 歷史를 알아 보려고 하던次에 朝鮮農民이라는 月刊雜誌가 발간되어 거기에 入社하여 農村問題를 연구하면서 農民歷史를 아울러 연구했다. 이렇게 五,六 年 역사를 연구하는 동안 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역사는 되는대로 發展變化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떠한 原理와 法則을 따라서 發展하고 變化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다시 이 原理와 法則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읽은 것이 西洋哲學이오 여기에 四,五年의 歲月을 쏟았는데 여기에서는 아무 所得이 없었다. 다음에는 宋代의 程朱哲學인 理氣說을 연구하고 우리나라 先賢들의 學說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무런 原理와 法則을 發見치 못하고 다시 易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하고 八一五解放 三年前에 처음으로 易學에 들어가니 이것이 내가 易學을 硏究하기 始作한 動機다. 易學은 宇宙萬物에 모두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도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 生長成법칙이 있는 까닭에 人類歷史에도 또한 이러한 법칙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宇宙의 法則이 바로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되는 것이오 여기에서 비로소 이제까지 追求하던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을 大略 짐작한 것이오 그 實은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곧 易學原理의 主要部分임을 알게 되었다. 1967년회고담

 

 

 

 

<제목 차례>

아국(我國)의 자연환경(自然環境)5

원시생활(原始生活)8

고조선(古朝鮮)9

삼국(三國)의 흥기(興起)15

고구려(高句麗)의 융성(隆盛)21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22

三.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24

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25

삼국혼전(三國混戰)26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30

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32

발해(渤海)의 건국(建國)34

해상발전(海上發展)36

신라(新羅)의 쇠망(衰亡)37

고려건국(高麗建國)39

고려(高麗)정치(政治)41

사회계급(社會階級)43

건설사업(建設事業)45

一. 토지제도(土地制度)45

二. 성종(成宗)의 치적(治積)46

계단(契丹)관계(關係)48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문화(文化)51

중기(中期)의 융성(隆盛)53

여진(女眞)관계(關係)57

계생(繼生)하는 반란(叛亂)59

몽고란(蒙古亂)62

정치(政治)의 문란(紊亂)69

외국(外國)관계(關係)72

고려(高麗)의 멸망(滅亡)74

비고(備考)79

이조(李朝)건국(建國)80

이조(李朝)정치(政治)81

왕위쟁탈(王位爭奪)84

건설(建設)시기(時機)86

단종(端宗)과 세조(世祖)94

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99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107

중종반정(中宗反正)후(後)의 국정(國政)108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115

사회(社會)의 부패(腐敗)117

임진왜란(壬辰倭亂)123

난후(亂後)의 형세(形勢)134

병자호란(丙子胡亂)137

서양문화(西洋文化)와의 교섭(交涉)과 외국무역(外國貿易)146

사색당쟁(四色黨爭)150

영(英) 정(正)의 문화(文化)159

세도(勢道)정치(政治)161

홍경래(洪景來) 난(亂)과 민란(民亂)162

북간도(北間島) 이주(移住)165

개국(開國)시대(時代)167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171

일본(日本)의 침략(侵略)177

민중(民衆)운동(運動)184

기미독립(己未獨立) 선언서(宣言書)187

   

아국(我國)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아국(我國)은 아세아대륙(亞細亞大陸) 의 동북부(東北部)에 뻗어 나온 반도(半島)로서 삼면(三面)이 환해(環海)하고 앞으로 태평양(太平洋)과의 사이에 일본열도(日本列島)가 병풍(屛風)처럼 가리웠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地理的條件)으로 말미암아 고래(古來)로 대륙(大陸)에서 흥망(興亡)한 여러 나라 세력(勢力)이 우리를 덮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며 또 일본(日本)의 눈길이 언제나 우리에게 쏠려 있음으로 우리는 금후(今後)로도 항상(恒常) 대륙(大陸)을 돌아보고 일본(日本)을 내다보면서 생존(生存)하여야만 할 것이다.

아국(我國)은 북위(北緯) 삼십삼도(三十三度)에서 사십삼도(四十三度)까지의 사이에 있어서 가장 살기 좋은 온대(溫帶)의 한 지방(地方)이며 한서(寒暑)가 모두 생물(生物)이 서식(棲息)하기에 알맞고 또 절후(節候)를 따라서 우설(雨雪)이 고르므로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 자란다. 더욱이 공기(空氣)가 맑고 아름다운 산천(山川)이 어리어서 경치(景致)좋기로 세계(世界)에서 유명(有名)하고 지하(地下)에는 금(金) 은(銀) 동(銅) 철(鐵)을 비롯한 모든 광물(鑛物)이 풍부(豊富)하며 바다에는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부딪쳐서 각종(各種)의 어물(魚物)이 많이 잡힌다.

아국(我國)과 대륙(大陸)과의 지경(地境)은 근세(近世)에 와서 백두산(白頭山)과 및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두만강(豆滿江) 압록강(鴨綠江)으로 하였으나 옛날은 송화강(松花江)기슭의 만주(滿洲)벌판이 아국(我國)의 강토(疆土)이었고 또 그와 반대(反對)로 국경선(國境線)이 지금(只今)보다 축소(縮小)된 일도 있었으나 그러나 오늘날 삼팔선(三八線)이란 부자연(不自然)한 선(線)을 긋고 남북(南北)이 두 동강이로 나뉘게 된 것은 역사적(歷史的)으로 그러한 기록(記錄)이 있는 것도 아니오 또 우리민족(民族)이 이를 승인(承認)한 것도 아니다. 아국(我國)은 세계(世界)어느 나라보다도 순수(純粹)한 단일(單一)한 민족(民族)으로서 이 부자연(不自然)한 선(線)은 불원(不遠)하여 반드시 소멸(消滅)시켜야 할 것이다.

아국(我國)의 척량산맥(脊梁山脈)은 해발(海拔) 이천칠백여(二千七百餘) 미(米 미터)의 백두산(白頭山)에서 비롯하여 함경도(咸鏡道)땅에 개마(蓋馬)의 높고 넓은 고원지대(高原地帶)를 이루고 남(南)으로 내려와서 강원도(江原道)와의 사이에 철령(鐵嶺)을 이루니 옛날 여기에 관문(關門)을 두어서 출입(出入)하는 행인(行人)을 수비(守備)하였기 때문에 이를 중심(中心)으로 강원도(江原道)를 관동(關東), 함경도(咸鏡道)를 관북(關北),평안도(平安道)를 관서(關西)라 부르는 이름이 생겼다. 이 척량산맥(脊梁山脈)은 강원도(江原道)의 한복판을 타고 내려오면서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같은 명산(名山)을 내고 경상도(慶尙道)와의 지경(地境)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이 되고 다시 소백산맥(小白山脈)으로 뻗어 나와서 지리산(智異山)을 이루고 그 여맥(餘脈)이 멀리 제주도(濟州道)의 한라산(漢拏山)에까지 미쳤다. 충청도(忠淸道)와 경상도(慶尙道)와의 사이에 죽령(竹嶺), 조령(鳥嶺)의 관문(關門)이 있어 예로부터 남북(南北)이 통(通)하는 길목이 되었고 경상도(慶尙道)를 영남(嶺南)이라 함은 이 두 영(嶺)의 남(南)쪽에 있기 때문이다. 충청도(忠淸道)를 호서(湖西)라하고 전라도(全羅道)를 호남(湖南)이라 함은 신라(新羅)때에 지금(只今)의 김제(金堤)땅에 벽골제(碧骨堤)라는 큰 못을 파고 이 못이 호수(湖水)처럼 크고 넓다하여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이 아국(我國)의 지세(地勢)는 척량산맥(脊梁山脈)이 북(北)에서 남(南)으로 뻗어 있고 이 산맥(山脈)을 분수령(分水嶺)으로 하여 동(東)은 경사(傾斜)가 급(急)하나 서(西)와 남(南)은 넓은 평야(平野)가 열리고 대하(大河)가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문화(文化)는 언제나 동북부(東北部)지방(地方)보다 서남부(西南部)지방(地方)에서 먼저 열리었다. 강(江)은 북(北)으로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이 있어서 다 함께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였으나 하나는 서(西)로 흘러서 황해(黃海)에 들어가고 하나는 동(東)으로 흘러서 동해(東海)에 들어갔다. 이 두 강(江)은 근세(近世)에 와서 아국(我國)의 북경(北境)이 되고 하나는 서(西)로 중국대륙(中國大陸)과의 교섭(交涉)의 관문(關門)이 되고 하나는 북(北)으로 여진족(女眞族)의 내왕(來往)하는 길목이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압록강(鴨綠江)은 길이가 이천리(二千里)에 가까워서 아국(我國)에서 제일(第一) 큰 강(江)이며 고구려(高句麗)는 이 강(江)안에서 흥(興)하였고 남(南)으로 대한해협(大韓海峽)에 들어가는 낙동(洛東)은 신라(新羅)의 발상지(發祥地)이오 그밖에 청천강(淸川江), 대동강(大洞江), 예성강(禮成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금강(錦江)등(等) 황해(黃海)로 흘러 들어가는 강(江)이 대부분(大部分)이오 예로부터 이러한 강안(江岸)이 역사(歷史)의 무대(舞臺)로 등장(登場)하였다. 특(特)히 대동강(大洞江)은 고조선(古朝鮮)의 중심지(中心地)로서 나중에 고구려(高句麗)의 도읍(都邑)이 되었고 예성강(禮成江)과 임진강(臨津江) 어귀는 고려(高麗)의 근거지(根據地)이오 한강(漢江)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유명(有名)한 쟁탈지(爭奪地)가 되고 근세이래(近世以來)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안(江岸)의 서울이 아국(我國)의 수도(首都)이고 금강(錦江)은 백제말엽(百濟末葉)의 도읍(都邑)이었다.

고대(古代)의 도읍(都邑)은 방비(防備)의 편리(便利)와 풍산지대(豊産地帶)를 가진 것이 주요(主要)한 조건(條件)이 되어 있었으므로 역대(歷代)의 국도(國都)는 모두 대강(大江)의 험(險)과 평야(平野)를 가진 강안(江岸)을 취(取)하였던 것이다.

아국(我國)의 기후(氣候)는 대륙(大陸)과 대양(大洋)과의 사이에 갈마드는, 일사량(日射量)의 차(差)로 말미암아 생긴 계절풍(季節風)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좌우(左右)된다. 시월(十月)에서부터 삼월(三月)까지는 대륙계절풍(大陸季節風)이 불어서 춥고 가물며 사월(四月)에서부터 구월(九月)까지는 비교적(比較的) 약(弱)한 해안계절풍(海岸季節風)이 불어서 비가 많이 온다. 동일(同一)한 위도(緯度)의 타국(他國)에 비기어 아국(我國)의 겨울이 더욱 춥고 또 일년강우량(一年降雨量)의 사분지삼(四分之三)이 여름에 있음은 이 때문이고 아국(我國)의 농업생산(農業生産)이 이러한 기후(氣候)의 지배(支配)를 받음은 물론(勿論)이다.

 

원시생활(原始生活)

아국(我國)의 원시시대(原始時代)에는 주(主)로 어패(魚貝)와 조수(鳥獸)를 잡아먹고 초근목실(草根木實)을 캐어 먹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입고 석굴(石窟)과 움집에서 살았다. 농사(農事)라고는 오직 서(黍 기장)가 있을 뿐이오 서(黍 기장)는 어떤 토지(土地)에서든지 잘 생육(生育)되고 파종시기(播種時期)의 조만(早晩)에 영향(影響)됨이 적으므로 농업기술(農業技術)이 부족(不足)한 고대(古代)에 서농(黍農)만 있는 것은 필연(必然)한 일이다.

기구(器具)나 기명(器皿)은 주로 토석(土石)들로 만든 것이었으니 이 때를 석기시대(石器時代)라 한다. 지금(只今) 아국(我國)과 만주(滿洲)에서 발견(發見)되는 석부(石斧), 석촉(石鏃), 석도(石刀)의 여러 가지 석기(石器)는 모두 같은 계통(系統)인 것이며 이 시대(時代)의 토기(土器)는 물론(勿論) 날 그릇이었으니 그래도 쓸모 있게 여러 가지 모양(模樣)을 만들고 또 간단(簡單)한 그림 모양(模樣)도 새겨내었다. 그러므로 석기(石器)보다 토기(土器)에 있어서 그 시대(時代)의 모습(模習)과 그 민족(民族)의 성격(性格)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석기시대(石器時代)의 흔적(痕跡)은 지금(只今) 아국(我國)의 각처(各處)에 있는 굴(屈)속과 고성지(古城地)와 고분(古墳) 가운데서 많이 발견(發見)되거니와 그 중(中)에서도 해변(海邊) 여러 곳에 산재(散在)하는 패총(貝塚)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패총 중(貝塚中)에는 황해도(黃海道) 몽금포(夢金浦)와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金海)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有名)하며 그밖에 경상남도(慶尙南道) 고성(固城)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迎日)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北靑) 함경북도(咸鏡北道) 성진(城津), 웅기(雄基) 등지(等地)에도 큰 패총(貝塚)이 있으니 이는 옛날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버린 것이 파묻혀 생긴 것이다.

「선돌」이라는 입석(立石)은 높은 산(山)을 본뜬 것이어서 그때 사람들의 신앙(信仰)의 대상(對象)이었으며 이는 세계(世界)에서도 태양(太陽)을 숭배(崇拜)하는 풍습(風習)이 있는데, 어떤 곳에나 있지만 아국(我國)에 더욱 많고 그 중(中)에서도 단군전설(檀君傳說)이 남아 있는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지방(地方)과 마한(馬韓)의 옛 땅에 특(特)히 많다.

또「고인돌」이라고 한 지석(支石)은 혹(或)은 하늘에 제사(祭祀)지내던 제단(祭壇)이었다 하고 혹(或)은 옛사람들의 무덤이라 하나 이 역시(亦是) 태양(太陽)을 숭배(崇拜)하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한 흔적(痕跡)이며 특(特)히 지석(支石)은 인국(鄰國)인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에서는 전연(全然) 발견(發見)되지 아니 하는데 아국(我國)을 비롯하여 만주(滿洲)와 시베리아와 유럽에 걸쳐서 이것이 있고 아국(我國)에서는 여러 곳에서 발견(發見)되었다.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과 황해도(黃海道) 은률(殷栗)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有名)하다.

 

고조선(古朝鮮)

지금(只今)으로부터 사천여년(四千餘年) 전(前)의 옛날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중국(中國)의 요(堯)임금 때요 이 해를 아국(我國)의 기원원년(紀元元年)이라 한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천여년(千餘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하나 확실(確實)한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그 후(後)에 중국(中國)의 은(殷)나라가 망(亡)하고 주(周)나라가 대신(代身)하게 되었는데, 은(殷)나라의 왕자(王子)인 기자(箕子)가 그 무리를 데리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지금(只今)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부여(扶餘), 남부(南部)에는 구려맥(句麗貊)이 있고 반도방면(半島方面)에는 한(韓)이 있었는데 그 연대(年代)와 국도(國都)는 알 수 없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은 여러모로 발달(發達)된 산업(産業)의 기초(基礎) 위에서 대륙(大陸)의 진보(進步)한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여 크게 발전(發展)하고 조선기술(造船技術)이 발달(發達)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中國)의 제(齊)와 노(魯)로 더불어 무역(貿易)하며 농사(農事)짓는 법(法)과 우마(牛馬)를 기르는 목축업(牧畜業)이 발달(發達)하고 사람의 성질(性質)이 정직(正直)과 예절(禮節)과 신의(信義)를 숭상(崇尙)하고 평화(平和)와 정결(淨潔)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중국(中國)사람들은 아국인(我國人)을 군자지국(君子之國) 대인지시(大人之市)라하고 인인선(仁人善)이라 불렀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이 구백여년(九百餘年)동안 계속(繼續)하는 중(中)에 중국(中國)에서는 주(周)나라 세력(勢力)이 차츰 약(弱)해지고 소위(所謂)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時代)라 해서 여러 백년(百年)동안 전쟁(戰爭)이 계속(繼續)되고 흉년(凶年)이 겹들어서 연(燕), 조(趙), 제(齊), 노(魯)의 중국(中國) 북방(北方) 사람들이 혹(或)은 해로(海路)로, 혹(或)은 육로(陸路)로 조선(朝鮮)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특(特)히 연(燕)나라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의 서부(西部)를 쳐서 빼앗고 요하(遼河)를 사이에 두고 조선(朝鮮)과 지경(地境)을 접(接)하여 있어서 일직부터 교섭(交涉)이 잦았고 주(周)나라가 망(亡)하고 진(秦)나라가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할 무렵에 조선(朝鮮)으로 피난(避難)하여 들어오는 사람이 수(數) 없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기부왕(箕埠王)때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을 서부국경(西部國境)에 머물게 하더니 만(滿)이 야심(野心)을 품고 많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난리(亂離)를 일으켜 왕도(王都)를 치거늘 준왕(準王)이 미처 항거(抗拒)치 못하여 해로(海路)로 마한(馬韓)에 주입(走入)하니 이는 단기(檀紀)이천일백사십년(二千一百四十年) 정미(丁未)이다.

위만(衛滿)이 나라를 세운 후(後)에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위씨조선(衛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진(秦)나라를 이어서 중원(中原)을 통일(統一)한 한(漢)나라의 세력(勢力)이 커져서 동(東)으로 침입(侵入)하니 위만(衛滿)의 손자(孫子) 우거(右渠)는 견디지 못하여 항복(降服)하니 이는 단기(檀紀) 이천이백이십육년(二千二百二十六年) 계유(癸酉)의 일이오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삼대(三代) 팔십칠년(八十七年)으로써 끝마쳤다.

한(漢)나라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의 고지(故地)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菟)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사군(四郡)의 위치(位置)와 넓이에 대(對)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않으나 대개(大槪) 낙랑군(樂浪郡)은 평양(平壤)을 중심(中心)으로 한 대동강(大洞江) 기슭임이 확실(確實)하고 진번군(眞番郡)은 황해도(黃海道)와 경기도(京畿道)의 한강(漢江) 이북(以北)이오 임둔군(臨屯郡)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와 강원도(江原道)의 철령(鐵嶺) 이북(以北)이오 현토군(玄菟郡)은 압록강(鴨綠江) 기슭을 중심(中心)으로 한 평안북도(平安北道)와 동가강(佟佳江) 하류지방(下流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사군(四郡)은 우리 민족(民族)의 맹렬(猛烈)한 반항(反抗)때문에 미처 뿌리를 내릴 사이도 없이 진번(眞番) 임둔(臨屯) 이군(二郡)은 이십육년(二十六年)만에 없어지고 현토군(玄菟郡)은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스스로 해소(解消)되고 낙랑군(樂浪郡)만이 중국(中國) 사람들의 근거지(根據地)로서 반도(半島) 중부(中部)에 사백여년(四百餘年)동안 남아 있었다.

낙랑군(樂浪郡)은 아국(我國)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중국(中國)과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함으로 아국(我國)의 중국(中國) 무역(貿易)을 맡아 하였다. 평양(平壤)에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 토성리(土城里)라는 마을에 분명(分明)한 토성(土城) 자리가 있고 그 마을 전토(田土)사이에서 낙랑군(樂浪郡)의 유물(遺物)이 나옴으로 보아 이곳이 낙랑(樂浪)의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 동(東)쪽 평평(平平)한 언덕 위에 수다(數多)한 고분(古墳)이 있고 그 고분(古墳) 속에서 금(金) 옥(玉) 동(銅)으로 만든 거울과 각종(各種)의 질그릇과 그림을 새긴 솥이라든가 와편(瓦片) 칠기(漆器) 등(等) 낙랑유물(樂浪遺物)이 많이 나와서 고고학상(考古學上) 보배가 되었다.

조선(朝鮮) 중부(中部)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이 건국(建國)될 무렵에 지금(只今)의 북만주(北滿洲) 지방(地方)에는 부여족(扶餘族)이 살아서 농업(農業)과 목축(牧畜)에 힘쓰고 중국(中國)의 진보(進步)된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하였으며 지 방(地 方)이 이천리(二千里)이오 호수(戶數)가 팔만(八萬)이나되며 서(西)로 오환(烏桓) 선고(鮮皐) 등(等)의 인(鄰)과 겨뤄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나라에 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들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지 아니하면 그 과실(過失)이 임금에게 있다하여 혹(或)은 갈아세워야 한다하고 혹(或)은 죽여야한다 하였다. 부여(扶餘)의 임금은 세습적(世襲的) 추장(酋長)에 지나지 아니하여 그 밑에 짐승이름을 붙인 오(烏), 가(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等) 벼슬이 있어 사출도(四出道)를 나가 지키고 이들은 각기(各其) 수백호(數百戶)로부터 수천호(數千戶)의 백성(百姓)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여(扶餘)와 때를 같이하여 동해(東海) 방면(方面)에는 옥저(沃沮), 예(濊)가 있고 반도(半島) 남부(南部)에는 삼한(三韓)이 있었다. 옥저(沃沮)는 지금(只今)의 함경도(咸鏡道) 지방(地方)에 살았는데 그 땅은 동북(東北)이 좁고 서남(西南)이 넓으며 장(長)이 천리(千里)이고 북(北)으로는 읍루(挹婁)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이고 남(南)으로는 예(濊)와 잇닿아 있었다. 호수(戶數)는 오천(五千)이며 임금은 없고 부락(部落)마다 수령(首領)이 있어 부락(部落)일을 추려나가고 언어(言語)는 고구려(高句麗)와 같고 성질(性質)이 강직(强直)하고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생산(生産)되고 음식(飮食)과 거처(居處)와 모든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비슷하였다. 옥저(沃沮)는 남북(南北)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북옥저(北沃沮)는 읍루(挹婁)와 접경(接境)한 관계(關係)로 여름이면 읍루(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약탈(掠奪)함으로 산중(山中)에 깊이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게되면 비로소 부락(部落)에 내려와서 살았다.

예(濊)는 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동(東)에서 함경도(咸鏡道)의 남(南)에 걸쳐서 살았다. 스스로 고구려(高句麗)와 동족(同族)이라 하고 호수(戶數)가 이만(二萬)이며 사람들이 성질(性質)이 순후(淳厚)하고 염치(廉恥)가 밝으며 도적(盜賊)이 없어서 밤에 문(門)을 닫는 일이 없었다.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거의 비슷하나 의복(衣服)은 다르며 여러 부락(部落)은 산천(山川)의 경계(境界)를 중(重)히 여겨 서로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고 이를 범(犯)하면 책화(責禍)라 하여 노예(奴隸)와 우마(牛馬)로써 배상(賠償)하며 기(忌)하는 것이 많아서 가족중(家族中)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곧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살았다. 예(濊)사람들은 마포(麻布)를 짜고 양잠(養蠶)할 줄 알고, 별을 보고 그 해의 농사(農事)의 풍흉(豊凶)을 미리 알 수 있었다.

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이 시대(時代)는 일산(一山)의 장(障)과 일수(一水)의 조(阻)가 스스로 한 부락(部落)을 이루어 국가(國家)노릇을 하였는데 삼한(三韓)의 지방(地方)에 이러한 부락국가(部落國家)가 칠십팔국(七十八國)이나 있었다. 각(各) 부락(部落)에는 수령(首領)이 있고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은 각기(各其) 소속(所屬)한 부락국가(部落國家)를 통어(統御)하는 총왕(總王)이 있었다.

마한(馬韓)은 그 중(中) 서(西)쪽에 있어서 백성(百姓)이 농사(農事)를 짓고 양잠(養蠶)을하고 오십사국(五十四國)으로 나뉘어 그 크기가 대국(大國)은 만여호(萬餘戶), 소국(小國)은 수백호(數百戶)이며 사람의 성질(性質)이 용감(勇敢)하고 해마다 오월(五月)에 파종(播種)이 끝난 뒤와 시월(十月)에 추수(秋收)를 마친 뒤에 한번씩 전국인(全國人)이 모여 천제사(天祭祀)를 지내고 여러 날 동안 일야(日夜)로 마음껏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놀았다.

변(弁),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도(慶尙道)땅에서 모두 이십사국(二十四國)이 있고 대국(大國)은 사오천호(四五千戶)이오 소국(小國)은 육칠(六七)백호(百戶)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지(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되고 벼를 심고 양잠(養蠶)과 우마(牛馬)의 축산(畜産)이 성(盛)하고 혼인(婚姻)에 예절(禮節)이 밝고 사람이 죽으면 큰 조우(鳥羽)를 달아 보내니 이는 그 영혼(靈魂)이 날아가도록 함이었다.

이때까지의 역사가(歷史家)들은 삼한(三韓)을 나눠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 하고 그 중(中) 마한(馬韓)이 지금(只今)의 한강(漢江) 이남(以南)에서부터 충남북도(忠南北道)와 전라도(全羅道)땅이고 진한(辰韓)은 지금(只今)의 경상도(慶尙道)의 대부분(大部分)이고 변한(弁韓)은 나중의 가야(伽倻)의 여러 나라가 일어난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지방(地方)이라 하였으나 새로운 연구(硏究)에 의(依)하면 진한(辰韓)이 한사군(漢四郡)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漢江) 유역(流域)이고 마한(馬韓)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이고 변한(弁韓)이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지방(地方)이라 한다.

부여(扶餘)의 일족(一族)에 졸본부여(卒本扶餘)가 있으니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연안(沿岸)의 땅이오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이다.

이 시대(時代)의 정치(政治)는 신앙(信仰)과 완전(完全)히 분립(分立)되지 아니하여 부락(部落)의 수령(首領)이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천제(天祭)를 지내며 또 마을의 정치(政治)를 행(行)하였다. 신앙(信仰)의 가장 높은 대상(對象)은 하늘의 상징(象徵)인 태양(太陽)이었으며 해마다 농사(農事)가 끝나면 일정(一定)한 때에 신곡(新穀)으로 술과 떡을 빚어 천제(天祭)를 지내고 그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놀았다.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부여(扶餘)의 영고(迎鼓) 등(等)은 모두 이를 이름이다. 이 제사(祭祀)는 처음에 높은 산(山)마루에서 지냈으니 그 곳은 어느 곳보다도 태양(太陽)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러한 풍습(風習)은 나중에 농업(農業)이 발달(發達)되고 강안(江岸)과 평야(平野)에 내려와 살게된 뒤에도 계속(繼續)되어 국가(國家)에서는 해마다 유명(有名)한 높은 산(山)에 산제(山祭)를 드리고 고을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으며 마을에는 당산(堂山)이 있어서 온 고을사람과 온 마을사람이 정성(精誠)을 바치는 곳이다.

사회(社會)는 대가(大家)라는 지배계급(支配階級)과 하호(下戶)라는 백성(百姓)과 노예(奴隸)의 세 계급(階級)으로 나뉘었고 대가(大家)들은 광대(廣大)한 토지(土地)를 가지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농사(農事)를 지었으며 이 시대(時代)는 토지(土地)는 넓고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함으로 전쟁(戰爭)할 때마다 노예(奴隸)로 부릴 포로(捕虜)를 얻는 것이 유일(唯一)한 전리품(戰利品)이었다. 산업(産業)은 농잠(農蠶)과 직포(織布)가 자못 발달(發達)하였으며 변 진한(弁辰韓)에서는 철(鐵)을 채굴(採掘)하여 돈으로 쓰고 이웃나라와 서로 무역(貿易)하였다.

종전(從前)에는 석기(石器)와 동기(銅器)만 있었는데 동기(銅器)는 연(軟)하여 칼 도끼 등(等)으로 사용(使用)치 못하더니 철(鐵)이 발견(發見)된 후(後)로 철제(鐵製)연장과 무기(武器)가 생겨서 산업(産業)과 전쟁(戰爭)양식(樣式)에 대혁명(大革命)을 일으켰다. 지금 이 문명(文明)에서 철(鐵) 한가지를 없앤다고 하면 이 호화(豪華)스러운 문명(文明)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니 고대(古代)의 철(鐵)의 발견(發見)은 참으로 경이적(驚異的) 사실(事實)이었다.

 

삼국(三國)의 흥기(興起)

처음에 북부여(北扶餘)의 임금 해모수(解慕潄)가 아들 주몽(朱夢)을 낳았는데 주몽(朱夢)은 동부여(東扶餘)의 임금 금와(金蛙)에게 양육(養育)되다가 그의 형제(兄弟)들의 시기(猜忌)에 못 배겨 부하(部下)를 거느리고 도망(逃亡)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러 국가(國家)를 세우고 성(姓)을 고(高)라 하니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

일설(一說)에는 주몽(朱夢)이 졸본(卒本)에 와서 졸왕(卒王)의 여서(女婿)가 되었다가 왕(王)이 죽은 뒤에 그 위(位)를 계승(繼承)하였다 하는데 여러 가지 사실(史實)로 보면 이 말이 가장 근리(近理)하고 주몽(朱夢)이 졸본(卒本) 국호(國號)를 고쳐서 고구려(高句麗)라 하였음으로 후인(後人)이 고구려(高句麗)의 역연수(歷年數)에 대(對)하여 주몽(朱夢)으로부터 망(亡)할 때까지를 칠백오년(七百五年)이라 하고 졸본(卒本)까지를 합(合)하여 구백년(九百年)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의 다섯 대족단(代族團)이 중심(中心)으로 이루어진 사회(社會)이며 산(山)이 많고 토지(土地)가 여위어서 생활(生活)이 곤란(困難)한 까닭에 사람들이 권검(勸儉)하였다.(고구려(高句麗) 건국(建國) 단기(檀紀) 이천이백구십칠년(二千二百九十七年))

고구려(高句麗)시조(始祖) 주몽왕(朱夢王)이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는데 동부여(東扶餘)에 있을 때에 낳은 아들 유리(類利)가 찾아와서 태자(太子)가 되었음으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부하(部下) 십인(十人)을 거느리고 남(南)으로 향(向)하여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을 지나서 마한(馬韓)에 들어가니 마한왕(馬韓王)이 두 형제(兄弟)의 웅걸(雄傑)함을 보고 동북(東北) 백리(百里)의 땅을 할여(割與)하여 써 거처(居處)하게 하였다. 비류(沸流)는 어염(魚鹽)의 이(利)를 취(取)하여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仁川)지방(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온조(溫祚)는 산천(山川)의 험(險)과 평야(平野)의 이(利)를 취(取)하여 한강안(漢江岸)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都邑)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백제(百濟)라하고 성(姓)을 부여(扶餘)라 하니 이가 곧 백제시조(百濟始祖)이다.(檀紀 二千三百十六年)

비류(沸流)는 그 땅이 비습(卑濕)하여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죽으매 그 백성(百姓)이 모두 위례성(慰禮城)으로 돌아오니, 온조(溫祚)는 세력(勢力)이 점점(漸漸)자랐으니, 창업(創業) 초기(初期)에 북변(北邊)의 낙랑(樂浪)과 말갈(靺鞨)이 자주 침입(侵入)함으로 한산(漢山)에(지금의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 도읍(都邑)을 옮겼다.

변 진한(弁辰韓)의 사로국(斯盧國)에는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육촌장(六村長)이 회의(會議)를 열고 북방인(北方人)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밀려오는 이때에 우리가 현군(賢君) 일인(一人)을 구(求)하여 세우고 국가(國家)를 통일(統一)하지 아니하면 안되리라 하고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맞이하여 임금을 삼고 지금의 경주(慶州)에 도읍(都邑)하니 이가 곧 신라(新羅) 시조(始祖)이다. (檀紀 二千二百七十七年) 신라(新羅)의 국호(國號)는, 처음에는 사로(斯盧) 그밖에 여러 가지로 불러 왔으나 후(後)에 신라(新羅)라 고쳤으므로 신라(新羅)로 통칭(通稱)하는 것이다.

삼국(三國)의 시조(始祖)는 모두 일대(一代)의 영걸(英傑)이라 당시(當時)의 각국(各國)이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로 성립(成立)되어 완전(完全)한 통일국가(統一國家)를 이루지 못하고 부락(部落)과 부락(部落)사이에 호상(互相) 침벌(侵伐)함이 있으되 국가(國家) 총왕(總王)이 능(能)히 제어(制御)치 못함을 보고 정치(政治)를 중앙(中央)에 통일(統一)한다는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쓰기로 하였다. 그 까닭에 건국(建國)초(初)부터 부근(附近)의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여 군현(郡縣)을 만들고 관리(官吏)를 보내어 다스렸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역사상(歷史上) 정치제도(政治制度)의 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고구려(高句麗)는 태백산(太白山) 좌우(左右)에 산재(散在)한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를 정복(征服)하고 한(漢)이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취(取)하니 이때가 졸본(卒本)이라는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로 개칭(改稱)한 때이오 동(東)으로 옥저(沃沮) 지방(地方)까지를 그 판도(版圖)에 넣었다.

백제(百濟)는 점차(漸次)로 마한국(馬韓國)의 여러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니 마한왕(馬韓王)이 책(責)하여 왈(曰) 왕(王)이 처음에 아경(我境)에 들어 왔을 때에 객신(客身)할 곳이 없기로 토지(土地)를 주어 안거(安居)케 했거늘 이제 우리 국토(國土)를 침범(侵犯)하니 무슨 도리(道理)인고 하였으나 온조왕(溫祚王)은 듣지 아니하고 남(南)으로 점차(漸次)로 강토(疆土)를 넓혔다.

신라(新羅)는 변 진한(弁辰韓)의 북부(北部)를 점점(漸漸) 병합(倂合)하고 서(西)로 마한국경(馬韓國境)에 다다르니 여기서 비로소 백제(百濟) 병(兵)과 상견(相見)하게 되어 삼국시대(三國時代) 육칠백년(六七百年) 간(間)의 전란(戰亂)의 막(幕)을 열었다. 그러나 이 전쟁(戰爭)은 호전기풍(好戰氣風)이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와 통일국가(統一國家)를 만들려는 운동(運動) 과정(過程)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생긴 현상(現象)이었다.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이 각기(各其)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로 엉켜 갔을 때에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 지방(地方)은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이루지 못하고 육가야국(六伽倻國)이 분립(分立)하여 부족사회(部族社會)를 그대로 지내었다. 그 중(中)에는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의 김해(金海) 지방(地方)을 중심(中心)으로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가락국(駕洛國)을 세우니 이가 곧 가락시조(駕洛始祖)이오 가락(駕洛)을 또한 금관(金官)이라 하며 (檀紀 二千三百七十五年) 그밖에 대가야(大伽倻) 소가야(小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등(等)이 있었는데 좁은 구역(區域)에 육국(六國)이 분립(分立)되어 있었음으로 국력(國力)이 모두 떨치지 못하고 또 그 위치(位置)가 아국(我國)의 최남단(最南端)에 있어 북(北)에서 밀려온 아국(我國) 문화권(文化圈)의 가장 구석진 곳이다. 다만 낙동강(洛東江)이 흘러내려 가서 삼각주(三角洲)를 이룬 곳으로 국민(國民)의 생활(生活)은 가장 유족(裕足)한 곳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제도(制度)와 풍습(風習)에는 여러 가지 특색(特色)이 있고 창조성(創造性)이 있었다. 신라(新羅)는 당시(當時) 일반적(一般的)으로 행(行)하고 있는 군주(君主)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타파(打破)하고 이세(二世) 남해왕(南解王)은 자(子) 유리(儒理)와 서(婿) 석탈해(昔脫解)에 일러 왈(曰) 아(我) 사후(死後)에 박(朴) 석(昔) 이성(二姓)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로써 왕위(王位)를 사(嗣)하라 하더니, 석탈해(昔脫解)가 제사대(第四代) 왕(王)이 되니 이로부터 박석(朴昔) 이성(二姓)이 상전(相傳)하고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수양(收養)하더니 그후(後)에 알지(閼智)의 자손(子孫)이 또한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여 이로부터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이 상전(相傳)하였다. 이 시대(時代)는 전란(戰亂)이 자주 일어나고 또 창업기(創業期)에 있었는데 만일 군주(君主)가 연유(年幼)하거나 또한 암우(暗愚)하면 혹(或)은 행정권(行政權)이 신하(臣下)에게 옮기고 혹(或)은 국가대사(國家大事)를 처리(處理)할 능력(能力)이 없어서 반드시 위망(危亡)에 빠지게 되는 것임으로 신라(新羅)에서는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깨트리고 골품제(骨品制)를 써서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을 성골(聖骨)이라 하고 성골(聖骨) 출신(出身)이 왕위(王位) 계승권(繼承權)을 가지되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가 왕(王)이 되기로 하니 이 까닭에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와 정립(鼎立)한 동안 일,이(一,二)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유군(幼君)과 암왕(暗王)이 거의 없었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도 이,삼(二,三)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연유(年幼)한 군주(君主)가 거의 없으니 이로써 보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의 군(君)됨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왕위(王位)계승(繼承)의 한 원칙(原則)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며 후세(後世)에 자기(自己) 자손(子孫)에게 행복(幸福)을 주기 위(爲)하여 황구(黃口) 유아(幼兒)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함은 국사(國事)를 위(爲)함이 아니오 그 국가(國家)를 자가(自家) 혈통(血統)의 사유물(私有物)로 생각한 까닭이며, 이로 인(因)하여 국사(國事)를 그르치고 아들에게 행복(幸福)을 준다는 것이 도리어 큰 재화(災禍)를 준 예(例)도 적지 아니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인성(人性)은 혼후(渾厚)하여 개인(個人)의 사욕(私慾)보다 국가(國家)를 위(爲)하는 마음이 더 두터웠다. 신라(新羅)에는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한 예(例)가 여러 번 있었고 고구려(高句麗)에서는 높은 벼슬을 다른 사람에게 사양(辭讓)하는 예(例)가 있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왕(故國王)때에 오부(五部)에 명령(命令)하여 현인(賢人)을 천거(薦擧)하라한즉 오부(五部)가 연류(宴留)를 추천(推薦)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더니 연류(宴留)가 말하되 신(臣)이 용우(庸愚)하여 족(足)히 써 국가(國家) 대정(大政)을 맡지 못할지라 압록곡(鴨綠谷)에 을파소(乙巴素)가 있어 역전(力田) 자급(自給)하는데 성질(性質)이 강의(剛毅)하고 정치(政治)의 대재(大才)가 있으니 차인(此人)이 아니면 국사(國事)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신(臣)의 벼슬을 차(此)에게 맡기라 하였다. 왕(王)은 곧 을파소(乙巴素)를 거용(擧用)하니 을파소(乙巴素)의 정치(政治)가 현명(賢明)하여 백성(百姓)이 편안(便安)하고 또 백성(百姓)의 빈궁(貧窮)함을 걱정하여 봄에 국창(國倉)의 곡식(穀食)을 내어 백성(百姓)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환수(還收)하여 해마다 상례(常例)를 삼으니 백성(百姓)이 모두 기뻐하고 이것이 아국(我國)의 진대제도(賑貸制度)의 시초(始初)였다.

삼국(三國)은 국가(國家)에 큰 난리(亂離)가 있으면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집고 궁시(弓矢)를 메고 군대(軍隊)의 선두(先頭)에 나서고 군졸(軍卒)이 그 뒤를 따름으로 장 병(將 兵)이 모두 일체(一體)가되어 당시(當時) 천하(天下) 강국(强國)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물론(勿論) 이때는 전공(戰功)이 있는 자(者)에게 토지(土地)를 주는 전장제도(田庄制度)가 있고 또 포로(捕虜)를 획득(獲得)하여 농업(農業) 노예(奴隸)로 사용(使用)하는 제도(制度)가 있음으로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들이 선두(先頭)에 나서는 것은 전공(戰功)을 세우기 위(爲)한 일면(一面)이 없지 아니하나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는 숭고(崇高)한 정신(精神)은 족(足)히 후세(後世)의 미약(微弱)한 하민층(下民層)만을 군사(軍士)로 내 세우고 자기(自己)는 안일(安逸)한 지위(地位)에 도피(逃避)하는 귀족층(貴族層)을 괴사(愧死)케 할 것이오 유명(有名)한 신라(新羅)의 화랑(花郞)도 이러한 정신(精神)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람은 혼후(渾厚)한 기풍(氣風)으로써 지위(地位)의 고하(高下)와 세력(勢力)의 강약(强弱)을 가리지 아니하고 오직 일심(一心)으로 함께 국사(國事)에 당(當)하였으므로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아국(我國)역사상(歷史上) 가장 광휘(光輝)있는 시대(時代)를 현출(現出)한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융성(隆盛)

고구려(高句麗)의 국도(國都) 졸본(卒本)은 평야(平野)가 적고 외적(外敵)을 막기에 불편(不便)함으로 얼마 후(後)에 국내성(國內城)에 옮기고 다시 환도성(丸都城)에 옮겨서 서(西)로 요하(遼河)방면(方面)으로 내려가고 남(南)으로 한반도(韓半島)로 내려가기 시작(始作)하였다. 고구려(高句麗)가 서(西)와 남(南)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면 안될 이(理)는 두 가지가 있다.

一. 고구려(高句麗)의 땅은 평야(平野)가 적고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며 기후(氣候)가 한냉(寒冷)하여 농산(農産)이 풍부(豊富)치 못함으로 국가(國家) 존립상(存立上) 오곡(五穀)과 잠마(蠶麻)가 풍성(豊盛)한 남방(南方)으로 진출(進出)치 아니할 수 없는 것

二. 요하(遼河)로부터 대동강(大洞江)에 이르는 일대지(一帶地)는 고래(古來)로 우리 민족(民族)이 거주(居住)하던 조선(朝鮮) 고지(故地)이던 것이 지금(只今)에 현토(玄菟) 낙랑(樂浪)등(等)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으로 되었음으로 이것을 회복(恢復)치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건국(建國)초기(初期)부터 서출(西出) 남하(南下) 정책(政策)을 써서 마침내 서(西)로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지경(地境)이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南)으로 낙랑(樂浪)을 취(取)하여 사백년(四百年)동안 내려오던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을 뿌리 채 뽑아버리고 드디어 백제(百濟)와 접경(接境)하니 이때가 삼국(三國)이 비로소 정립(鼎立)한 때이오 삼국(三國) 후(後) 약 삼백년(約 三百年) 경(頃)의 일이었다.

고구려(高句麗)는 서(西)쪽으로 발달(發達)하는 도중(途中)에 중국(中國)과의 충돌(衝突)이 가장 심(甚)하더니 중국(中國)의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위(魏)와 항쟁(抗爭)하다가 위장(魏將) 관구검(毌丘儉)에게 패(敗)하여 환도성(丸都城)이 회신(灰燼)되었으므로 일시(一時) 국세(國勢)가 매우 위태(危殆)하였으나 얼마 후(後)에 다시 회복(恢復)하여 대륙(大陸)으로 진출(進出)하는 정책(政策)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요하(遼河) 서(西)쪽의 금주성(錦州城)에 웅거(雄據)하고 있는 연(燕)나라와 쟁웅(爭雄)하다가 연군(燕軍)에게 패(敗)하여 환도성(丸都城)은 다시 수리(修理)할 수 없이 파괴(破壞)되고 도성(都城)이 적국(敵國)에 너무 가까워서 항상(恒常) 위험성(危險性)이 있음을 염려(念慮)하여 그 후(後)에 평양(平壤)으로 옮기더니 고구려(高句麗) 중흥(中興)의 영왕(英王)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다시 환도성(丸都城)에 도읍(都邑)하고 강토(疆土)를 사방(四方)으로 넓히니 이때가 고구려(高句麗)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이오 지금 만주(滿洲) 집안현(輯安縣) 비석가(碑石街)에 흘연(屹然)히 서있는 높이 이십이척(二十二尺)의 거비(巨碑)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공적(功績)을 영원(永遠)히 전(傳)하기 위(爲)하여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세운 것이다.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

백제(百濟)는 건국(建國) 후(後) 점차(漸次)로 마한(馬韓)의 땅을 탈취(奪取)하더니 불과(不過) 이십(二十) 여년(餘年)에 전역(全域)을 통합(統合)하고 반도(半島) 서남부(西南部)의 일대국(一大國)을 형성(形成)하였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농산(農産)이 많고 일면(一面)이 대해(大海)인 관계(關係)로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이 발달(發達)하여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무역(貿易)하고 수군(水軍)이 또한 정예(精銳)하여 한때는 중국(中國)의 동해안(東海岸) 일부(一部)를 점령(占領)한 일도 있었다.

고구려(高句麗)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내려 온 후(後) 예성강(禮成江)(황해도)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충돌(衝突)이 일어나기 시작(始作)하였다.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는 본시(本是) 형제(兄弟)의 나라이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백제(百濟)를 치다가 전사(戰死)하니 이로부터 양국(兩國)이 세수(世讎)가 맺어져서 전쟁(戰爭)이 연년(連年) 부절(不絶)하더니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이 남하정책(南下政策)을 추진(推進)하여 평양(平壤)에 이도(移都)한 후로 백제(百濟)는 그 압력(壓力)에 눌려서 더 북진(北進)치 못하고 개로왕(盖鹵王)때에는 고구려(高句麗)와 싸우다가 왕(王)은 전사(戰死)하고 전군(全軍)이 복멸(覆滅)하고 한강(漢江) 좌우(左右)의 지(地)를 상실(喪失)하고 왕자(王子)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기니 이때가 백제(百濟)의 최대(最大) 수난기(受難期)이었다.

신라(新羅)는 반도(半島)의 동남(東南) 일우(一隅)에 처(處)하여 현군(賢君)이 상속(相續)하고 그 정치(政治)에는 화백(和白)이라는 제도(制度)가 있어 임금을 선거(選擧)하고 다른 중요(重要)한 국사(國事)를 의론(議論)하는데 유족(遺族)들이 모여서 회의(會議)하고 전원(全員)이 찬성(贊成)한 연후(然後)에 결정(決定)함으로 항상(恒常) 국론(國論)이 잘 통일(統一)되고 또 이 나라는 육부족(六部族)의 합의(合意)에 의(依)하여 성립(成立)되었으므로 그 국민(國民)의 부족적(部族的) 단결(團結)이 가장 공고(鞏固)하였으니 이것이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었고 이 부족(部族)의 단결력(團結力)은 전전이사(轉轉移徙)하여 다니는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는 아국(我國)의 서해안(西海岸)을 끼고 있어서 일직부터 대륙(大陸)과의 교섭(交涉)이 빈번(頻繁)하여 손쉽게 그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할 수 있었고 한문(漢文)도 국초(國初)부터 들어와서 일부(一部) 지식계급(知識階級)사이에 행(行)하였음으로 문화(文化) 정도(程度)의 향상(向上)이 볼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新羅)는 지리적(地理的)으로 중국(中國)과 직접(直接)으로 교통(交通)하지 못하고 주(主)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통(通)하여 간접(間接)으로 대륙(大陸)문화(文化)를 받은 관계(關係)로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얼마쯤 뒤졌으나 그 대신(代身) 삼한시대(三韓時代)로부터 계속(繼續)하여오는 국유문화(國有文化)를 충분(充分)히 발달(發達)케 하고 그 기초(基礎)위에 대륙문화(大陸文化)를 받아서 세계(世界)에 자랑할만한 신라문화(新羅文化)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불교(佛敎)를 받아들일 때에 있어서도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가장 쉽게 받아왔으나 오직 신라(新羅)는 그 받아들이는 가부(可否)에 대(對)하여 논란(論難)과 비판(批判)이 가장 심각(深刻)하여 어려운 곡절(曲折)을 겪었고 그 뒤에 가장 아름다운 불교문화(佛敎文化)의 꽃이 핀 것으로 보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후세(後世)에 외국문화(外國文化)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깊은 검토(檢討)와 비판(批判)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유문화(國有文化)의 기초(基礎)가 약(弱)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三.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귀족(貴族) 공신(功臣)들에게 전장(田庄) 식읍(食邑) 등(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농경(農耕)에 종사(從事)할 노예(奴隸)를 아울러 주니 고구려(高句麗)에는 좌식(坐食)하는 대가(大家)가 만여호(萬餘戶)이오 하호(下戶)는 그들에게 양식(糧食)과 어염(魚鹽)을 져다 바쳤으며, 신라(新羅)에는 재상가(宰相家)의 노복(奴僕)이 삼천인(三千人)에 달하고 우마(牛馬)의 수(數)도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 때는 돈이 없고 미곡(米穀)과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사용(使用)하니 이것은 고대(古代) 물물교환(物物交換)의 유풍(遺風)이오 지금에 호남(湖南)지방(地方)에서 미곡(米穀)에 한(限)하여 매(買)하는 것을 판다하고 매(賣)하는 것을 산다 하는 것은 삼국(三國) 이래(以來) 미곡(米穀) 마포(麻布)가 돈으로 쓰이던 유속(遺俗)이다.

삼국(三國)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의 도성(都城) 인구(人口)는 고구려(高句麗)는 이십일만여호(二十一萬餘戶)이오 신라(新羅)는 십칠만여호(十七萬餘戶)이오 백제(百濟)는 십오만여호(十五萬餘戶)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한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인구(人口)가 일호(一戶)에 오인(五人)으로 잡더라도 칠십만(七十萬) 혹(或)은 백만(百萬)이 될 것이니 이것은 사실(事實)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도성(都城)이 팽창(膨脹)치 아니할 수 없는 이유(理由)가 있으니 이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도성(都城)이 수삼개월(數三個月) 적군(敵軍)의 포위(包圍)를 당(當)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 포위(包圍)에는 식량(食糧) 무기(武器) 기타 여러 가지 생필품(生活品)을 도성내(都城內)에서 자급자족(自作自給)치 아니하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각국(各國)의 도성내(都城內)에는 첫째로 무기(武器)를 제조(製造)하는 공장(工場)이 있고 거기에 종사(從事)하는 기술자(技術者)및 노무자(勞務者)등(等) 백공(百工)이 있고 큰 시장(市場)도 이 도성내(都城內)에 집중(集中)되어 있었다. 국가(國家)가 도성(都城)을 옮길 때에 먼저 공장(工場)과 백공(百工)을 옮긴 것은 이 까닭이오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이 팽창(膨脹)한 것은 자연(自然)의 이(理)이다.

 

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을 중심(中心)으로 남북(南北) 수천리(數千里)에 걸쳐서 큰 세력(勢力)을 길렀으므로 비단(非但)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에 대(對)한 압력(壓力)이 될 뿐 아니라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대하여도 끊임없는 위협(威脅)이었다.

그러나 전일(前日)의 중국(中國)은 오호(五胡) 십육국(十六國)의 어지러운 시대(時代)였으나 그 뒤에 남북(南北)으로 나뉘었다가 수(隋)나라가 일어나서 통일(統一)을 이룬 뒤에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사이에는 두 큰 세력(勢力)이 마주쳐서 부딪치지 아니할 수 없이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수(隋)나라의 요서(遼西)를 친 것이 동기(動機)가 되어서 수(隋) 문제(文帝)가 삼십만(三十萬) 군사(軍士)로서 쳐들어 왔으나 중도(中途)에서 패(敗)하여 돌아갔다. 다음 임금 양제(煬帝)는 본시(本是) 허심(虛心)이 많은 사람으로서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해 보겠다는 야심(野心)과 부황(父皇)이 이루지 못한 한(恨)을 풀겠다는 생각으로 천하(天下)의 힘을 기우려 영양왕(嬰陽王) 이십이년(二十二年) (檀紀 二千九百四十五年)에 百十三萬의 陸軍과 多數한 水軍을 거느리고 高句麗로 쳐들어오니 陣의 길이가 九百六十里에 뻗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짐작(斟酌)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으로써 대장(大將)을 삼고 준비(準備)하던 터이라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수군(隋軍) 이십만((二十萬)을 유인(誘引)하여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러 대파(大破)하니 적(敵)의 생환(生還) 자(者)가 겨우 二千八百名에 지나지 못하니 이것을 살수대전(薩水大戰)이라 하며 요동(遼東)에 남아있는 군사(軍士)는 혹(或)은 패(敗)하고 혹(或)은 겁(怯)을 먹고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양제(煬帝)는 이듬해 다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와서 요동성(遼東城)을 쳤으나 거듭 실패(失敗)하고 세 번째 고구려(高句麗)를 치려다가 국내(國內) 반란(叛亂)으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게 망(亡)하였다.

 

삼국혼전(三國混戰)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麗)에게 밀려서 웅진(熊津)으로 옮긴 후(後) 외(外)로는 고구려(高句麗)의 침략(侵略)이 그치지 아니하고 내(內)로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국력(國力)이 떨치지 못함으로 한 편(便)으로는 멀리 일본(日本)과 친선(親善)하여 그 후원(後援)을 얻으려 하였으며 백제(百濟)의 학자(學者) 왕인(王人)이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가지고 일본(日本)에 들어가서 그 왕자(王子)에게 처음으로 한문(漢文)을 가르쳐주고 불교(佛敎)와 및 건축(建築), 도기(陶器), 양조(釀造), 야금(冶金), 조각(彫刻), 회화(繪畵)등(等)의 기술(技術)을 전(傳)한 것도 모두 이 시대(時代)의 일이었다. 백제(百濟) 성왕(聖王)은 신라(新羅)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를 치려 하더니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의 강성(强盛)함을 두려워하고 또 부질없이 외국(外國)과 싸우기보다 내정(內政)을 닦아서 국력(國力)을 충실(充實)히 하는 것이 옳다하고 백제(百濟)의 청(請)을 거절(拒絶)하고 도리어 고구려(高句麗)와 통(通)함으로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화호(和好)가 깨지고 신라(新羅)를 치다가 왕(王)이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백제(百濟)는 더욱 약(弱)하여 웅진(熊津)에서 지탱(支撑)치 못하고 도읍(都邑)을 사비(泗沘)(지금의 부여(扶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 고쳤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때에 불교(佛敎)가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이 나라 정치(政治)는 군주(君主)와 민중(民衆)의 계급(階級) 차별(差別)이 엄격(嚴格)한 계급제도(階級制度)이며 불교(佛敎)는 상하(上下)의 차별(差別)이 없는 평등사상(平等思想)위에 서는 것이므로 법흥왕(法興王)이 불교(佛敎)를 펴서 정치적(政治的)으로는 군민(君民)의 계급(階級)을 엄립(嚴立)하고 종교적(宗敎的)으로는 군민평등(君民平等)을 주창(主唱)하여 국민(國民)의 일치단결(一致團結)을 도(圖)하니 이 정책(政策)이 민심(民心)단합(團合)에 적지 않은 효과(效果)를 거두었던 것이다.

다음임금 진흥왕(眞興王)은 신라(新羅) 중흥(中興)의 영걸(英傑)이라 처음으로 화랑(花郞)이라는 제도(制度)를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무리를 모아서 오유(娛遊)하면서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을 토론(討論)하기도하고 가무(歌舞)로써 즐기기도 하고 멀리 국내(國內)의 유명(有名)한 산천(山川)을 돌아다니면서 몸도 단련(鍛鍊)하고 인정(人情)도 살피며 그리하는 중에 옳고 바른 사람을 골라서 나라에 천거(薦擧)하여 적당(適當)한 소임(所任)을 맡아보게 하니 당시(當時)에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화랑(花郞) 출신(出身)이었고 이것이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여 서로 화호(和好)를 맺는 것이 외교정책(外交政策)의 주요(主要)한 하나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한편(便)으로는 대륙문화(大陸文化)를 수입(輸入)하고 한편(便)으로는 대국(大國)의 성원(聲援)을 빌어서 적대국(敵對國)을 위압(威壓)하려 함이니 지금(只今)에 외국(外國) 승인(承認)을 받음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자유(自由)로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할 수 있으되 오직 신라(新羅)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 할 길이 없으므로 삼국(三國)의 혼전(混戰) 지대(地帶)인 한강(漢江) 일대지(一帶地)를 점령(占領)하고 서해(西海)로부터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는 것이 국가대계(國家大計)의 주요(主要)한 일부(一部)이었다. 이에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한강(漢江) 지대(地帶)에서 격전(激戰)하고 있는 기회(機會)를 틈타서 먼저 백제군(百濟軍)과 연합(聯合)하여 고구려(高句麗) 군(軍)을 쫓아버리고 다시 백제군(百濟軍)을 반격(反擊)하여 드디어 한주(漢州)(지금의 서울)로부터 인천(仁川) 남양(南陽)에 이르는 지역(地域)을 점유(占有)하니 이로부터 중국(中國)에 통(通)하는 길이 열리고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기초(基礎)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로부터 해마다 대륙(大陸)과의 교통(交通)이 끊이지 아니하고 유학생(遊學生)과 구법승(求法僧)이 수(數)없이 다녔다. 이때 육가야국(六伽耶國) 중(中)에 가락국(駕洛國)은 법흥왕(法興王)때에 이미 신라(新羅)에 합병(合倂)되고 진흥왕(眞興王)때에 대가야국(大伽倻國)을 쳐서 군현(郡縣)을 삼으니 남은 사(四) 가야국(伽倻國)이 차례로 무너져서 낙동강(洛東江) 유역(流域) 지방(地方)이 전부(全部) 신라(新羅)의 땅이 되었고 지금의 가야금(伽倻琴)은 이 가야국(伽倻國)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며 진흥왕(眞興王)은 또한 북(北)으로 땅을 넓혀서 남옥저(南沃沮)의 중부(中部)에까지 이르고 국경(國境) 지방(地方)에 순수(巡狩)하여 비(碑)를 세우니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창녕읍(昌寧邑)과 서울의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과 함경남도(咸鏡南道)의 함주군(咸州郡) 황초령(黃草嶺)과 함경남도(咸鏡南道) 이원군(利原郡)의 마운령(摩雲嶺)에 있는 순수비(巡狩碑)가 곧 그것이다.

신라(新羅)의 국세(局勢)가 갑자기 강성(强盛)하여짐을 보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종래(從來)의 세수(世讎)를 버리고 서로 화호(和好)를 맺어서 신라(新羅)에 당(當)하게 되니 신라(新羅)도 형세(形勢)의 위태(危殆)함을 깨닫고 중국대륙(中國大陸)의 힘을 이끌어 올 정책(政策)을 쓰게 되었다.

이때 중국(中國)은 수(隋)나라가 망(亡)하고 당(唐)나라가 대신(代身)하고 그 임금 태종(太宗)은 유명(有名)한 영왕(英王)이다. 당태종(唐太宗)은 북(北)으로 돌궐(突闕)(터키)을 무찌르고 서(西)로 토번(吐藩)(티베트)과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평정(平定)하고 남방(南方)의 여러 나라도 조공(朝貢)하게되어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였다고 생각되었으나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高句麗)만이 그에게 굴복(屈伏)하지 아니함으로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때 (檀紀 二千九百七十七年)에 스스로 군사(軍士) 삼십만(三十萬)을 거느리고 風雨같이 몰려와서 이듬해 四月에 이미 요하(遼河)를 건넜고 이때 고구려(高句麗)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국정(國政)을 잡고 굳게 지키었다. 당태종(唐太宗)은 요동성(遼東城)과 백암성(白岩城)을 빼았은 후(後) 안시성(安市城)을 포위(包圍)하고 수개월(數個月)을 싸웠으나 마침내 떨어뜨리지 못하던 중(中) 고구려(高句麗) 장수(將帥)의 화살이 당태종(唐太宗)의 눈을 마쳤으므로 당병(唐兵)은 전의(戰意)를 잃고 또 가을철이 되어 찬바람이 불어오고 양식(糧食)까지 다하게 되었다. 이에 당태종(唐太宗)은 싸움을 단염(斷念)하고 도로 돌아가는데 험로(險路)와 풍설(風雪)에 인마(人馬)의 희생(犧牲)이 길에 가득하였고 그 후(後) 수차(數次)로 군사(軍士)를 보내어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역시(亦是) 고구려(高句麗)의 맹렬(猛烈)한 반격(反擊)으로 실패(失敗)하고 돌아갔다.

고구려(高句麗)와 대륙(大陸)의 세력(勢力)이 반세기(半世紀)를 두고 겨룬 그 사이에 신라(新羅)의 힘이 더욱 커지고 그 때에 또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의 두 영걸(英傑)이 나서 하나는 군사(軍事)로 하나는 외교(外交)로 대(大) 신라(新羅)를 세우기에 힘을 다하였다. 백제(百濟)는 성왕(聖王)이 전사(戰死)한 원수(怨讐)를 기어(期於)히 갚으려하여 자주 군사(軍士)를 내어 신라(新羅)를 치고 고구려(高句麗)가 또한 신라(新羅)의 대륙(大陸)의 힘을 이끄는 것을 미워하여 압력(壓力)을 가(加)하니 신라(新羅)는 김춘추(金春秋)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구원(救援)을 청(請)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 죽은 후(後) 그 아들 고종(高宗)은 어버이의 뜻을 이어 항상(恒常) 동방(東方)을 판도내(版圖內)에 넣으려 하던 차(次)에 신라(新羅)의 청병(請兵)이 있으므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회(好機會)라 하여 드디어 백제(百濟)를 칠 군사(軍士)를 일으켰다.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할 무렵에 신라(新羅) 왕(王)이 승하(昇遐)하고 김춘추(金春秋) 알천(閼川) 두 사람이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할 후보(候補)자(者)가 되었는데 이인(二人)이 서로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하다가 춘추(春秋)가 왕(王)이 되니 이가 곧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이때 백제(百濟)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민생(民生)은 도탄(塗炭)에 빠지고 여러 번 신라(新羅)를 치다가 번번이 패(敗)하니 국세(國勢)가 위급(危急)하던 차 당(唐)나라 군사(軍士)가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이 장군(將軍)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백제(百濟) 장군(將軍) 계백(階伯)은 결사군(決死軍) 오천명(五千名)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아가 김유신(金庾信) 군(軍)을 맞아 용감(勇敢)히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하여 마침내 패(敗)하여 전사(戰死)하고 사비성(泗泌城)이 나당(羅唐) 연합군(聯合軍)에게 떨어지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이 항복(降服)하니 이로써 백제(百濟)는 三十一王 六百七十八年에 亡하고 (단기 二千九百九十三年) 지금 부여(扶餘) 금강안(錦江岸)의 낙화암(落花岩)은 당시(當時) 궁녀(宮女)들이 도망(逃亡)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애화(哀話)를 남긴 곳이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은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당(唐)나라의 근본(根本) 정책(政策)에 의(依)하여 그 군사(軍士)를 옮겨서 신라(新羅)를 치려하였다. 원래(原來) 외국(外國)의 군대(軍隊)를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하는 데는 마침내 그 군대(軍隊)의 침박(侵撲)을 받는 것이 고금(古今) 역사(歷史)의 통례(通例)라 무열왕(武烈王)과 김유신(金庾信)은 일직부터 외군(外軍) 이용(利用)의 위험성(危險性)이 있음을 잘알고 또 당(唐)나라의 야심(野心)을 이미 간파(看破)한 터이라 한편(便)으로 백제(百濟)에 출병(出兵)하면서 한편(便)으로 국내(國內)를 굳게 지키니 소정방(蘇定方)이 그 기미(機微)를 알고 감(敢)히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김유신(金庾信)으로써 명장(名將)이라고 칭(稱)하는 소이(所以)이오 후세(後世)에 자국내(自國內)를 텅텅 비워 놓고 외군(外軍)을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한다는 것은 가장 우매(愚昧)한 것이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등(等) 오(五) 도독부(都督附)를 두었는데 백제(百濟) 유민(遺民)들의 광복운동(光復運動)으로 말미암아 당(唐)나라의 군정(軍政)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왕족(王族) 복신(福信)이 승(僧) 도침(道琛)과 더불어 지금 한산(韓山)부근(附近)인 주류성(周留城)에서 군사(軍士)를 일으켜 일본(日本)에 가 있는 왕자(王子) 풍(豊)을 세워 임금을 삼고 고구려(高句麗)와 일본(日本)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여 한동안 그 기세(氣勢)가 떨치더니 나중에 내부(內部)의 세력(勢力) 다툼으로 말미암아 복신(福信)이 도침(道琛)을 죽이고 풍왕(豊王)이 또 복신(福信)을 죽여서 마침내 모두가 무너지고 말았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다시 고구려(高句麗)를 칠 준비(準備)를 시작(始作)하였다. 이때 고구려(高句麗)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고 그 아들 남생(男生)이 정권(政權)을 잡았는데 가족(家族)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겨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우 정사(淨士)는 十二城으로써 신라(新羅)에 가서 붙고 남생(男生) 그 아우 남달(男達)이 서로 시기(猜忌)하여 싸움이 일어나더니 남생(男生)은 당(唐)나라에 항복(降服)하여 본국(本國)의 군사기밀(軍事機密)을 일일이 고(告)하였다. 당(唐)나라 임금 고종(高宗)은 어버이 태종(太宗)의 뜻을 이어 육차(六次)나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으로 평생(平生)의 한(恨)으로 여기던 터이라 장군 이적(李勣)을 시켜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로 쳐들어 가게하고 이에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도 군사(軍士)와 식량(食糧)을 내어 당군(唐軍)을 도왔다. 고구려(高句麗)는 나라 일이 어지러운 데에 흉년(凶年)이 겹 들여서 매우 곤경(困境)에 빠졌으나 그래도 二年동안이나 지탱(支撑)하다가 마침내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되니 (단기 三千一年) 백제(百濟)가 망(亡)한 후(後) 팔년(八年)만이오 그 역연수(歷年數)는 졸본(卒本) 부여(扶餘) 건국(建國)으로부터는 팔백(八百) 여년(餘年)이오 주몽(朱夢)으로부터는 二十八王 七百五年으로 망(亡)하였다.

당(唐)나라는 평양(平壤)에 동도호부(東都護府)를 두고 고구려(高句麗) 고지(故地)를 구(九) 도독부(都督府)로 나누고 고구려(高句麗) 백성(百姓)을 많이 중국(中國)으로 옮겨갔다.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 일변령(釰弁令)은 왕족안승(王族安勝)을 받들어 광복운동(光復運動)을 일으키고 신라(新羅)가 또 이를 도와서 당(唐)나라에 대항(對抗)하였음으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마침내 요동(遼東)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승(安勝)이 일변령(釰弁令)을 죽여서 광복운동(光復運動)은 중심(中心)을 잃어버리고 안승(安勝)은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하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칠 때에는 그 토지(土地)를 신라(新羅)가 통일(統一)할 생각이었으나 두 나라가 망(亡)한 후(後)에 당(唐)나라가 그 땅을 모두 점령(占領)하고 신라(新羅)는 도리어 당(唐)나라의 위협(威脅)을 받게 되었다.문무왕(文武王)은 두 나라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을 도와서 당(唐)나라와 싸우게 하더니 마침내 당(唐)나라와 직접(直接) 싸우기로 결정(決定)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 이년후(二年後)부터 칠년(七年)동안 싸움을 계속(繼續)하던 끝에 실력(實力)으로 당군(唐軍)을 몰아내고 대동강(大洞江) 이남(以南)의 땅을 찾아서 비로소 삼한(三韓) 통일(統一)의 업(業)이 이루어졌다.

 

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

삼국(三國)에는 국문(國文)이 없고 중국(中國)의 한문(漢文)을 수입(輸入)하여 썼으므로 일부(一部) 귀족계급(貴族階級)은 그것을 이용(利用)할 수 있었으나 일반(一般)백성(百姓)은 아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고 한문자(漢文字)가 국어(國語)에 맞지 않음으로 일을 기록(記錄)할 때에는 한자(漢字)의 음(音)과 훈(訓)을 빌어서 「밝은달」을 「明期月」이라는 等으로 썼으니 新羅의 향가(鄕歌)가 그 예(例)이다. 신라(新羅)가 삼한통일(三韓統一)뒤에 오륙백년(五六百年)의 전화(戰禍)로부터 비로소 해방(解放)되어 당(唐)나라로 들어가는 유학생(遊學生)이 해마다 늘어가고 성당(盛唐)의 찬란(燦爛)한 문물(文物)을 부지런히 받아들이는 동시(同時)에 한문(漢文) 열(熱)도 상당(相當)히 높아졌다. 그리하여 한문학자(漢文學者) 설총(薛聰)은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어 경서(經書)를 해석(解釋)하여 생도(生徒)를 가르치고 종전(從前)에는 지명(地名) 같은 것이 모두 우리 나라 말로 되어 있더니,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에 모든 지명(地名)을 중국식(中國式)으로 고치니 「沙熱伊 고을」을 「淸風縣」으로 고침과 같음이오 이 무렵을 前後하여 人名도 차츰 中國式 姓名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의 옛 모습이 漸次 사라지고 中國을 崇拜하는 風習이 생겨서 사대사상(事大思想)이 국민(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국민사상(國民思想)의 일대(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불교(佛敎)는 아국(我國)에 들어온 후(後) 건축(建築), 조각(彫刻), 야금(冶金), 회화(繪畵) 등(等) 기술(技術)을 전래(傳來) 하여 불교(佛敎) 광포(廣布)와 함께 널리 보급(普及)되었으나 끊임없는 전란(戰亂)으로 인(因)하여 그 발생(發生)하려던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더니 신라(新羅)의 통일기(統一期)를 전후(前後)하여 힘있게 발전(發展)하였으니 지금 남아있는 황룡사(皇龍寺)의 구층탑(九層塔), 첨성대(瞻星臺), 불국사(佛國寺), 석굴암(石窟庵) 같은 것이 모두 그 시대(時代)의 만든 유물(遺物)이다.

토지제도(土地制度)는 삼국(三國) 정립(鼎立) 당시(當時)에는 유족(遺族)들이 대 면적(大 面積)을 차지하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경작(耕作)하고 일반(一般)농민(農民)은 각기(各其) 일정(一定)한 면적(面積)을 가지고 농사(農事)지으며 이때는 지(地)가 많고 인구(人口)가 비교적(比較的) 적고 유식민(遊食民)을 구(驅)하여 강제(强制)로 황지(荒地)를 개척(開拓)하고 농업(農業)에 종사(從事)케 하였다.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사회(社會)가 안정(安定)되었으므로 비로소 당(唐)나라의 균전제(均田制)를 배워서 정전제(丁田制)를 만들고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십오세(十五歲)부터 장정(壯丁)이라 하여 국가(國家)로부터 분배(分配)받고 육십세(六十歲)에 국가(國家)에 반환(返還)하며 공신(功臣)유족(遺族)들에게 사전(賜田)을 주어 토지(土地)의 수세권(收稅權)을 가지게 하였다.

 

발해(渤海)의 건국(建國)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하고 일변령(釰弁令)등(等)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이 실패(失敗)에 돌아감에 그 백성(百姓)들이 혹(或)은 당(唐)나라에 강제(强制)로 옮겨지고 혹(或)은 신라(新羅)로 망입(亡入)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북방(北方)으로 유입(流入)하였다. 이때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말갈족(靺鞨族)이 살고 칠부(七部)로 나뉘어 있었으나 그 중(中)에 가장 드러난 것은 송화강(松花江) 기슭에 속말말갈(粟末靺鞨)과 흑룡강(黑龍江)가에 사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두 부족(部族)이 있고 고구려(高句麗) 당시(當時)에는 이들 말갈(靺鞨)은 고구려(高句麗)의 속국(屬國)이 되어 있었으나 고구려(高句麗)의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된 뒤에 북방(北方)의 모든 성(城)이 당(唐)나라에 점령(占領)된 것이 아니어서 말갈(靺鞨)사람들이 그러한 성(城)에 웅거(雄據)하고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들이 이에 합세(合勢)하였다. 그러한지 삼십년(三十年) 동안에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여러 번 당병(唐兵)과 싸워서 크게 이기니 당병(唐兵)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지 삼십일년(三十一年)만에 새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진국(震國)이라 하니, 그 후(後)에 발해(渤海)로 고치니 이가 곧 발해(渤海) 태조(太祖)이다. (檀紀 三千三十二年)

발해(渤海)는 서(西)로 당(唐)나라와 서역(西域)의 문화(文化)를 받아들이고 동(東)으로 일본(日本)과 무역(貿易)하여 해적(海賊)을 충동(衝動)시켜서 당(唐)나라의 산동반도(山東半島)를 친일도 있었다. 처음에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에 도읍(都邑)하더니 후세(後世)에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로 옮기니 이는 길림성(吉林城) 영안현(寧安縣)에 있는 동경성(東京城)이라 하며 지금도 그때의 그 성(城)자리가 남아 있어서 그 주위(周圍)가 거의 사십리(四十里)나 된다.

이때의 강토(疆土)는 북(北)은 흑룡강(黑龍江)에 이르고 서(西)로 요해(遼海)에 미치고 남(南)은 대동강(大洞江)과 원산(元山) 등지(等地)로써 신라(新羅)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에 닿으니 중국(中國)사람들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稱)하였으며 발해(渤海)의 건국(建國)과 신라(新羅)의 통일기(統一期)가 거의 연대(年代)를 같이 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신라(新羅)를 남국(南國) 또는 남조(南朝)라 하고 발해(渤海)를 북국(北國) 또는 북조(北朝)라 하여 이 시대(時代)를 우리 나라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라고 한다.

발해(渤海)는 만주(滿洲)의 넓은 벌판을 차지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전통(傳統)을 물려받으며 성당(盛唐)의 문화(文化)를 받아들여서 산업(産業)과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발해(渤海)에는 부여족(扶餘族)과 말갈족(靺鞨族)이 합쳐서 나라를 세웠으되 어찌한 때문인지 신라(新羅)와는 교섭(交涉)이 거의 없었고 또 말갈족(靺鞨族)은 그 뒤에 오래 남아서 여진족(女眞族)이 되었으되 부여족(扶餘族)은 전연(全然) 만주(滿洲)에 남지 아니하였다.

 

해상발전(海上發展)

신라(新羅)는 북(北)쪽의 일면(一面)이 대륙(大陸)에 접(接)할뿐이오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려있는 반도국(半島國)이다. 국민(國民)들은 해상(海上)에서의 활동(活動)이 자못 활발(活潑)하여 수(數)많은 유학생(遊學生)과 상인(商人)들이 당(唐)나라에 내왕(來往)하였고 따라서 당(唐)나라의 해안(海岸)지방(地方)에는 신라(新羅)사람들이 교거(僑居)하는 신라방(新羅坊)이 처처(處處)에 생겼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통일(統一)이후(以後) 더욱 현저(顯著)하여 그 중(中)에서 한 예(例)를 들면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남(東南)에 있는 석성만(石城灣) 부근(附近)인 등주(登州) 문등현(文登縣) 청령향(淸寧鄕) 적산(赤山)은 신라(新羅)에서 당(唐)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그 곳에서 신라(新羅)사람들이 세운 법화원(法花院)이라는 사찰(寺刹)은 쌀 백석(百石)지기의 장전(庄田)이 있었으며 설법(說法)이 열릴 때에는 신라(新羅)사람들의 남녀 수백명(數百名)이 모였다. 당시(當時)는 일본(日本)사람들이 당(唐)나라에 내왕(來往)하는 것도 신라(新羅)사람들의 힘을 많이 빌렸으니 신문왕(神文王)때에는 당(唐)나라에 가는 일본(日本)사람들의 학생(學生)과 구법승(求法僧)이 많이 신라(新羅)의 배를 타고 다녔으며 경덕왕(景德王)때에는 일본(日本)에가는 당(唐)나라 사신(使臣)이 신라(新羅)의 배를 이용(利用)하였고 혜태왕(惠泰王)때에는 당(唐)나라에 가있는 일본(日本)사람들이 그 본국(本國)과의 통신(通信)을 신라(新羅)의 선편(船便)으로 하였다. 그러나 신라(新羅)의 말엽(末葉)에 이르러 국세(國勢)가 떨치지 못하고 때마침 당(唐)나라도 쇠약(衰弱)해지니 황해(黃海)위에 해적(海賊)이 들끓었고 이는 수백년(數百年)동안 평화(平和)롭게 계속(繼續)되던 양국(兩國)사이의 교통(交通)에 큰 위협(威脅)이 될뿐더러 심지어(甚至於)는 해적(海賊)의 떼가 신라(新羅)사람들을 잡아다가 노비(奴婢)로 팔아먹는 일까지도 있었다. 이때 당(唐)나라에 벼슬살이하던 장보고(張保皐)가 이러한 사실(事實)을 알고 신라(新羅)로 돌아와서 왕(王)에게 아뢰고 스스로 청해진(淸海鎭)(지금의 全羅南道 莞島)) 대사(大使)가되어 군사(軍士) 일만명(一萬名)으로 양해(兩海)의 길목을 지키는 동시(同時) 맹렬(猛烈)한 해상(海上)활동(活動)을 시작(始作)하여 황해(黃海)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掌握)하고 당(唐)나라와 일본(日本)에 무역(貿易)하여 다시금 신라(新羅)의 명성(名聲)이 천하(天下)에 떨쳤다. 그러나 신라(新羅) 조정(朝廷)의 왕위(王位) 다툼의 여파(餘波)가 여기까지 미쳐와서 장보고(張保皐)는 임금이 보낸 자객(刺客)에게 암살(暗殺)을 당(當)하고 빛나던 청해진(淸海鎭)의 막(幕)이 닫혔다.

 

신라(新羅)의 쇠망(衰亡)

신라(新羅)의 통일(統一)한 후(後)에는 통일(統一)하기 이전(以前)의 웅대(雄大)한 기백(氣魄)과 선미(善美)한 풍습(風習)이 점점(漸漸) 사라지기 시작(始作)하니 이것이 사라짐이 곳 쇠망(衰亡)할 전조(前兆)이다. 그 이유(理由)는

一.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왕위(王位)를 서로 현자(賢者)에게 사양(辭讓)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왕위(王位) 다툼이 그치지 아니하여 궁중(宮中)에 살벌(殺伐)과 유혈(流血)의 참극(慘劇)이 연달아 일어났다,

二.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정치(政治) 지도층(指導層)이 청백(淸白)하고 국사(國史)에 충성(忠誠)하여 민중(民衆)의 모범(模範)이 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귀족층(貴族層)이 부패(腐敗)하여 일야(밤낮) 왕유연(日夜 王遊宴)을 일삼고 경중(京中)에는 가무(歌舞)의 음악(音樂)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三. 統一以前에는 年幼한 임금이 거의 없더니 統一後에는 自己의 血統에게 富貴와 榮華를 주기 爲하여 幼兒에게 王位를 傳하여 王位爭奪의 端緖를 열었다.

四.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화랑(花郞)의 무리와 같은 소년(少年) 애국자(愛國者)가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爲)하여 일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국민(國民)이 모두 위정(爲政) 계급(階級)을 미워하여 다시 화랑정신(花郞精神)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卽位)한 후(後)로는 간신(奸臣)들이 권력(權力)을 잡고 정치(政治)를 어지럽혀서 백성(百姓)의 원성(怨聲)이 더욱 높아가고 또 흉년(凶年)이 겹 들어서 각지(各地)에 도적(盜賊)이 봉기(蜂起)하였다.

이때 양길(梁吉)이 북원(北原)에서 무리를 모아 가지고 궁예(弓裔)로 하여금 북방(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서 무리를 모으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을 위(爲)하여 원수(怨讐)를 갚는다하고 후백제(後百濟)라는 나라를 세우고 서남방(西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얼마 지난 후(後)에 궁예(弓裔)는 스스로 임금이 되어 송악(松嶽)군(郡)에 도읍(都邑)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옛 나라를 회복(恢復)한다하고 국호(國號)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니 이것은 모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의 유민(遺民)들이 그 조국(祖國)이 망(亡)한지 이미 수백년(數百年)에 아직도 조국(祖國) 광복(光復)의 뜻이 머리 속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을 이용(利用)하여 신라(新羅)에 반항(反抗)케 하고 그 세력(勢力)을 확장(擴張)하려 함이다. 궁예(弓裔)는 다시 철원(鐵原)으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마진(摩震)이라 하다가 또 태봉(泰封)이라고 했다. 견훤(甄萱)은 도읍(都邑)을 무주(武州)로 옮기고 중국(中國)의 여러 나라와 무역(貿易)하여 힘을 기르는 한편 차츰 동(東)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한동안 반도(半島) 안에는 삼국(三國)이 다시 벌어지니 이를 후삼국(後三國)이라 한다.

태봉(泰封) 왕(王) 궁예(弓裔)는 송악(松嶽)사람 왕건(王建)을 시켜서 해로(海路)로 나주(羅州)를 쳐서 빼앗고 후백제(後百濟)와 중국(中國)과의 교섭(交涉)하는 교통(交通)을 끊고 고유(固有)한 항해(航海) 세력(勢力)을 발휘(發揮)하여 서해(西海)의 해적(海賊)을 막으니 이때로부터 왕건(王建)의 명성(名聲)이 일국(一國)에 떨쳤으니 태봉(泰封)왕(王)의 성질(性質)이 포악(暴惡)함으로 부하(部下) 제장(諸將)이 왕(王)을 쫓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推戴)하여 임금을 삼으니 이가 곧 고려시조(高麗始祖)이다. (檀紀 三千二百五十一年)

 

 

태조(太祖)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

성종(成宗)

무인(戊寅)

갑진(甲辰)

병오(丙午)

경술(庚戌)

을해(乙亥)

임오(壬午)

26

2

4

26

6

16

목종(穆宗)

현종(顯宗)

덕종(德宗)

정종(靖宗)

문종(文宗)

순종(順宗)

무술(戊戌)

경술(庚戌)

임신(壬申)

을해(乙亥)

정해(丁亥)

 

12

22

3

12

37

반(半)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갑자(甲子)

을해(乙亥)

병자(丙子)

병술(丙戌)

계묘(癸卯)

정묘(丁卯)

11

1

10

17

24

24

명종(明宗)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

광종(光宗)

신묘(辛卯)

무오(戊午)

을축(乙丑)

임신(壬申)

갑술(甲戌)

경신(庚申)

27

7

7

2

46

15

충렬(忠烈)

충선왕(忠宣王

충숙왕(忠肅王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王

을해(乙亥)

을유(乙酉)

신미(辛未)

신미(辛未)

을유(乙酉)

을축(乙丑)

34

5

25

52

4

3

공민왕(恭愍王

우왕(禑王)

창왕(昌王)

공양왕(恭讓王

 

 

임진(壬辰)

을묘(乙卯)

 

기사(己巳)

 

 

23

4

반(半)

4

 

 

고려(高麗) 역대표(歷代表)

 

고려건국(高麗建國)

고려(高麗)태조(太祖)는 이듬해 송악(松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고 신라(新羅)와 친선(親善)을 도모(圖謀)하고 후백제(後百濟)를 제압(制壓)하려는 정책(政策)을 쓰니 신라(新羅)도 후백제(後百濟)에게 부대끼던 터임으로 고려(高麗)와 친(親)하려 하였다. 후백제(後百濟) 왕(王) 견훤(甄萱)은 이를 보고 비밀(秘密)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신라(新羅)에 쳐들어갔다.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은 마침 포석정(鮑石亭)에 나가서 유상곡수(流觴曲水)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후백제(後百濟)의 군사(軍士)를 만나 왕(王)과 왕비(王妃)와 대신(大臣)들이 모두 참혹(慘酷)한 변(變)을 당하였다. 견훤(甄萱)은 왕(王)을 해치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백성(百姓)을 포로(捕虜)하여 돌아가니 신라(新羅)왕(王)은 나아가 싸울 힘이 없고 들어와 지킬 힘이 없으므로 신하(臣下)들과 의논(議論)하고 고려(高麗)에 항복(降服)하려하니 태자(太子)가 통곡(慟哭)하면서 어찌 천년(千年) 조국(祖國)을 한번 싸우지도 아니하고 남에게 주리오 하나 왕(王)은 공연(空然)히 싸우기만 하면 불쌍한 백성(百姓)의 생명(生命)만을 없앤다 하고 항복(降服)하기로 결정(決定)하니 태자(太子)는 왕(王)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개골산(皆骨山)(금강산)에 들어가서 마의(麻衣)를 입고 일생(一生)을 마치니 이가 곧 마의태자(麻衣太子)이다. (檀紀 三千二百六十八年)

高麗가 新羅를 合倂하던 해에 後百濟에서도 變亂이 일어났다. 甄萱은 네째 아들 金剛을 사랑하여 이를 太子로 세우려 하였음으로 그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父王을 金山寺에 가두고 金剛을 죽인 後에 맏아들 神劍이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이에 甄萱은 憤함을 이기지 못하고 高麗로 亡命하여 신검(神劍)을 치기를 請하니 高麗太祖는 甄萱을 厚待하여 後百濟의 人心을 分散시키고 大軍을 거느리고 後百濟를 쳐서 滅하고 이에 半島를 統一하니 그 歷年數는 新羅는 五十六王 九百九十二年이오 後百濟는 二王 四十餘年이었다.

처음에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불교(佛敎)와 유교(儒敎)가 아울러 행(行)하여 불교(佛敎)에는 원효(元曉) 의상(義湘) 같은 명승(名僧)이 나고 원효(元曉)가 지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과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불교(佛敎)의 교리(敎理)에 새로운 진보(進步)를 가져오게 하였고 승(僧) 혜초(慧超)는 당(唐)나라에 건너갔다가 다시 길을 떠나 인도(印度)와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편답(遍踏)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팔(八) 세기(世紀) 무렵의 인도(印度) 사정(事情)을 전(傳)하는 유일(唯一)한 책(冊)으로 세계(世界)의 보배가 되어있고 또 혜초(慧超) 이외(以外)에도 신라(新羅)의 중으로써 인도(印度)를 찾아간 사람이 칠명(七名)이나 있다고 한다. 유교(儒敎)에는 설총(薛聰)이외(以外)에 김대문(金大問) 최치원(崔致遠) 같은 명유(名儒)가 났는데 김대문(金大問)은 국가학(國家學)을 연구(硏究)하여 극진(極盡)히 환대(歡待)하였고, 발해(渤海)의 옛 남경(南京)을 수복(收復)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러나 발해(渤海)가 망(亡)한 뒤로 만주(滿洲)의 대천지(大天地)는 다시 우리 민족(民族)의 땅이 되지 못하고 계단족(契丹族)과 여진족(女眞族)의 손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려(高麗)정치(政治)

고려(高麗)태조(太祖)의 정치(政治)는 신라(新羅)말엽(末葉)의 폐해(弊害)에 감(鑑)하여 여러 가지의 개혁(改革)과 독창(獨創)이 있었다.

一. 신라말(新羅末)에 토지제도(土地制度)가 문란(紊亂)하여 처음에 조세(租稅)는 토지수확량(土地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던 것을 十分之二三을 받은 까닭에 백성(百姓)의 생활(生活)이 곤란(困難)하고 도적(盜賊)이 많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었음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신라(新羅)의 정전제(丁田制)를 습용(襲用)하되 조세(租稅)는 十分之一로 정(定)하고 건국후(建國後) 三年동안은 전부(全部) 면세(免稅)하였다.

二.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당(唐)나라 문화(文化)가 들어옴으로부터 국민(國民)이 자주정신(自主精神)을 잃고 사대사상(事大思想)에 취(醉)하는 경향(傾向)이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음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중국(中國)과 아국(我國)은 인성(人性)이 각이(各異)하고 풍토(風土)가 부동(不同)하니 모든 제도(制度)와 문물(文物)은 반드시 중국(中國)과 동일(同一)히 할 필요(必要)가 없다하여 사대(事大)의 풍(風)을 경계(警戒)하였다.

三. 태조(太祖)는 동족(同族)인 발해(渤海)가 계단(契丹)에게 망(亡)한 뒤로 계단(契丹)을 무도(無道)한 나라라 하여 몹시 미워하고 계단(契丹)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화친(和親)할 것을 청(請)하되 듣지 아니하고 북방(北方) 경영(經營)에 전념(專念)하였다.

四. 종래(從來) 중국(中國)에는 연호제도(年號制度)가 있어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인 천자(天子)는 연호(年號)를 쓸 수 있으되 속국(屬國)은 쓸 수 없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가장 강성(强盛)하던 시대(時代)에는 우리 나라도 중국(中國)과 대등(對等)한 천자국(天子國)이라 하여 연호(年號)를 썼으니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영락(永樂),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의 건원(建元)같은 것이 그 것이다.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당(唐)나라에 부려(附麗)하여 당(唐)나라 연호(年號)를 쓰더니 태조(太祖) 건국후(建國後)에 우리 나라도 완전(完全)한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가라 하여 연호(年號)를 세워 천수(天授)라 하였다.

五. 삼국시대(三國時代)이전(以前)에는 유족(遺族)만 성(姓)이 있고 일반(一般) 서민(庶民)은 명(名)만 있고 성(姓)이 없더니 태조(太祖) 건국후(建國後)에 전국민(全國民)에게 일제(一齊)히 성(姓)을 영사(領賜)하고 오직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고려(高麗)에 반항(反抗)하는 자(者)에게 마(麻), 우(牛), 돈(豚), 상(象)등(等)의 수축명(獸畜名)을 사(賜)하여 일반(一般) 국민(國民)과 요연(暸然)하게 구별(區別)하였으니 후일(後日)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재상(宰相) 상진(尙震)은 상(象)성(姓)의 승격(昇格)이라 한다.

六. 태조(太祖)는 승(僧) 도선(道詵)을 선생(先生)으로 모시고 그의 말에 의(依)하여 각지(各地)에 사찰(寺刹)을 창건(創建)하고 관궐(官闕)을 지으니 도선(道詵)은 당승(唐僧) 일행(一行)의 풍수학설(風水學說)을 배워서 아국(我國) 풍수지리(風水地理)학(學)의 원조(元祖)가 된 자(者)로써 세인(世人)이 용자(龍子)라 칭(稱)하고 이때로부터 명당(明堂) 화복(禍福)의 사상(思想)이 국민(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 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高麗) 태조(太祖) 정치(政治)는 아국사상(我國史上) 중요(重要)한 일시기(一時期)를 획(劃)하였고 삼국(三國)통일후(統一後) 오랜 동안의 정치부패기(政治腐敗期)를 지낸 까닭에 종전(從前)의 농후(濃厚)한 풍속(風俗)은 많이 없어졌으나 고려태조(高麗太祖)의 모든 시책(施策)이 적의(適宜)함을 얻었으므로 국민(國民)의 기풍(氣風)이 진실(眞實)하여 국가(國家)에 전란(戰亂)이 있는 때에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집고 선진(先陣)에 나섰으며 관리(官吏)들이 그 지위(地位)를 자기보다 연장(年長)하고 또 현능(賢能)한 자(者)에게 사양(辭讓)하는 일이 있으니 태조(太祖)가 최응(崔凝)으로써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삼으니 응(凝)이 말하기를 신(臣)의 동료(同僚) 윤봉(尹逢)이 신(臣)보다 십년(十年)을 연장(年長)하니 청(請)컨대 먼저 제수(除授)하소서 하고 사양(辭讓)하니 태조(太祖)가 대희(大喜)하여 그 예양(禮讓)함을 칭찬(稱讚)한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사회계급(社會階級)

고려(高麗)는 신라(新羅)의 사직(社稷)을 물려받음과 함께 신라(新羅)의 귀족(貴族)들도 이를 받아드려서 왕대(王代)계통(系統)의 사람들과 함께 고려(高麗)의 특권계급(特權階級)을 이루었다. 그 후(後) 발해(渤海)가 망(亡)하여 그 왕족(王族) 귀족(貴族)이 많이 고려(高麗)에 들어와서 이에 합(合)치고 또 불교(佛敎)로써 국교(國敎)를 삼은 관계(關係)로 승려(僧侶)들도 이 계급(階級)에 참여(參與)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권계급(特權階級)밑에 서민계급(庶民階級)이 있어서 산업(産業)을 맡아보았으며 다시 밑으로 여러 가지의 천인(賤人) 계급(階級)이 있어서 그 중(中)에서도 공사(公私)노비(奴婢)의 노예계급(奴隸階級)은 온갖 학대(虐待)를 받고 한 낟 재물(財物)로서 매매(買賣)되는 풍습(風習)이 있었으며 또 그들의 자손(子孫)은 대대(代代)로 노예(奴隸)가 되는 것이다. 서민계급(庶民階級)이라 함은 농민(農民), 상인(商人), 공장(工匠), 병졸(兵卒) 등(等)으로서 그 중(中)에서도 농민(農民)은 가장 많이 생산(生産)노동(勞動)에 종사(從事)하고 또 부역(賦役)과 병역(兵役)을 맡아 하였다. 이들 중(中)에는 계단(契丹) 여진(女眞) 일본(日本) 등(等)의 귀화민(歸化民)이 많았다.

고려(高麗)의 계급제도(階級制度)는 대단히 엄격(嚴格)하여 인세(人世)의 호적(戶籍)을 고람(考覽)하여 천류(賤類)에 견연(牽連)이 있으면 그 사람을 관리(官吏)로 쓰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건국(建國) 초(初)에 공신(功臣)들은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노예(奴隸)를 삼으니 그들의 불평(不平)과 원망(怨望)이 적지 아니함으로 광종(光宗)은 노비안험법(奴婢按驗法)을 만들어서 노비(奴婢)의 문서(文書)를 새로이 심사(審査)하고 노비(奴婢)와 노주간(奴主間)의 시비(是非)를 재판(裁判)하여 억울(抑鬱)한 노비(奴婢)들은 해방(解放)시키더니 이번에는 노주(奴主)들이 불평(不平)이 일어나서 이미 속량(贖良)한 사람들은 노주(奴主)의 소청(所請)에 따라서 다시 노비(奴婢)를 만든 일도 있었다.

고려(高麗)는 불교(佛敎)와 함께 유교(儒敎)도 발달(發達)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유학(儒學)은 경서(經書)를 줄기로 하여 유학(儒學)의 근본사상(根本思想)을 공부(工夫)하는 일이 적고 과거(科擧)에 필요(必要)한 과목(科目)에 치중(置中)하는 경향(傾向)이 있었다. 과거법(科擧法)은 광종(光宗)때에 중국(中國)사람 쌍기(雙冀)가 귀화(歸化)하고 그의 건의(建議)를 따라서 비롯하였는데 이때의 과거(科擧) 삼(三)은, 일(一)은 진사과(進士科)이니 문예(文藝)를 주(主)로 하여 시험(試驗)함으로 제술과(製述科)라고도 하며, 이(二)는 명경과(明經科)이니 경의(經義)를 주(主)로 하여 시험(試驗)하며 삼(三)은 의복과(醫卜科)이니 의학(醫學) 천문(天文) 음양(陰陽) 지리(地理)를 시험(試驗)하더니 그 후(後)에 명법과(明法科) 진사(進士) 명경(明經)등(等)과(科)에 합격(合格)한 사람들은 귀족계급(貴族階級)에 참여(參與)하게되고 의복(醫卜) 법(法) 등과(等科)는 국가기관(國家機關)의 사무(事務)와 기술(技術)을 맡아보는 것이었다.

 

 

건설사업(建設事業)

一. 토지제도(土地制度)

토지제도(土地制度)는 태조(太祖)가 신라(新羅)의 구제(舊制)를 습용(襲用)할 것을 원칙(原則)으로 정(定)하고 만사 초창중(萬事 草創中)에 있어 그 세칙(細則)을 정(定)치 못하더니 오세(五世) 경종(景宗)때에 이르러 비로소 전국(全國)의 토지(土地)를 모두 공전(公田)으로 하고 균전제(均田制)에 의(依)하여 수전수전(授田收田)의 법(法)을 확립(確立)하였다. 그 법(法)은 조정(朝廷)의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부병한인(府兵閑人)(관리(官吏)에서 물러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신분(身分)과 직위(職位)에 따라서 농사(農事)지을 땅과 시초(柴草땔감)로 쓸 토지(土地)를 아울러 주니 이를 전시과(田柴科)라고 한다. 전시지(田柴地)는 자손(子孫)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오 그 받은 사람이 사망(死亡)하거나 퇴직(退職)하면 국가(國家)에 반환(返還)하는 것이 원칙(原則)이며 부병(府兵)은 이십(二十)세(歲)에 전(田)을 받고 육십세(六十歲)에 이르러 도로 바치는 법(法)이었다. 일반(一般) 전시과(田柴科)외(外)에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란 것이 있어서 국가(國家)에 공훈(功勳)을 세운 사람이나 또는 그 자손(子孫)에게 주어서 세습(世襲)으로 인정(認定)하였으며 또 그밖에 공해전(公廨田) (관청(官廳)의 경비(經費)를 쓰기 위(爲)한 것) 사원전(寺院田)(사원(寺院)의 경비(經費)를 위(爲)하여 주는 것) 내계전(內桂田)(왕실(王室)의 재원(財源)으로 쓰는 토지) 녹과전(祿科田)(관리(官吏)들의 생활(生活)을 돕기 위(爲)하여 주는 것)등(等)이 있었다.) 이리하여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하고 조권(租權)을 가지고 있어 토지(土地)의 매매(買賣)를 금(禁)하고 그 겸병(兼倂)의 폐(弊)를 방지(防止)하였다. 농민(農民)은 십육세(十六歲)가 되면 반드시 토지(土地)를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자손(子孫)이 출생(出生)하는 때 그 출생(出生)을 등록(登錄)하여야 그 지(地)를 받는 관계(關係)로 호적(戶籍)에 빠지는 사람이 없고 관리(官吏)가 죄(罪)를 지으면 면직(免職)이 되는 동시(同時)에 그 받은 바의 토지(土地)를 빼앗겨서 생활(生活)의 길이 끊어지게 됨으로 관리(官吏)들이 모두 일에 충실(充實)하고 청렴(淸廉)하였으니 이것이 고려(高麗)초기(初期) 국세(國勢)가 융성(隆盛)한 소이(所以)이다.

 

二. 성종(成宗)의 치적(治積)

육세(六世) 성종(成宗)에 이르러 고려(高麗)일대(一代)의 모든 제도(制度)가 비로소 완비(完備)되니 태조(太祖)가 삼국(三國) 통일후(統一後) 사십여년(四十餘年)의 오랜 세월(歲月)을 지나서 겨우 법전(法典)이 완성(完成)되고, 또 고구려(高句麗)의 고지(故地)를 수복(收復)할 북방(北方) 경영(經營)도 진보(進捗)되지 못함은 지지(遲遲)함이 없지 아니하나 이렇게 지지(遲遲)함은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부단(不斷)히 반항운동(反抗運動)을 일으켜서 국내(國內)가 안정(安定)치 못함으로 인(因)함이라고 볼 것이다.

성종(成宗)은 불교(佛敎)의 외(外)에 특(特)히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여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根本)을 삼고 외방(外方)의 우수(優秀)한 자제(子弟)를 뽑아 국자감(國子監)(지금의 대학(大學))에서 공부하게 하고 그 중(中)에서 뛰어난 자(者)를 골라서 다시 송(宋)나라에 유학(遊學)시켰다.

그리고 외방(外方)의 십이목(十二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 의학박사(醫學搏士)를 보내어 교육(敎育)과 의료(醫療)를 맡아보게 하였다.

또 경제정책(經濟政策)에 힘써서 농사(農事)철의 부역(賦役)을 금(禁)하고 병기(兵器)를 걷어서 농구(農具)를 만들어 농업(農業)을 장려(獎勵)하니 지금 우리 나라에서 쓰이는 풍장 같은 농악(農樂)이 이 시대(時代)에 처음으로 생긴 것이라 하며 면재법(免災法)을 마련(磨練)하여 재난(災難)을 입은 자(者)에게 세납(稅納)과 부역(賦役)을 감(減)하는 준례(準例)를 세우고 비황책(備荒策)으로 주(州)와 부(府)에 의창(義倉)을 두어 곡식(穀食)을 쌓고 양경(兩京)과 십이목(十二牧)에 상평창(常平倉)을 두어 곡식(穀食)과 포목(布木)을 저축(貯蓄)하였다가 농사(農事)의 형편(形便)을 따라서 물가(物價)가 높으면 상평창(常平倉)의 물품(物品)을 헐(歇)하게 방매(放賣)하여 물가(物價)를 내리게 하고 물가(物價)가 너무 떨어지면 상평창(常平倉)에서 비싸게 매입(買入)하여 물가(物價)의 조절(調節)을 도모(圖謀)하여 국민(國民)의 생활(生活)을 안정(安定)시켰다.

또 특이(特異)한 제도(制度)로 보(寶)라는 것이 있으니 보(寶)는 지금의 계(契)의 기원(起源)으로써 일정(一定)한 재단(財團)을 가지고 거기서 생기는 이식(利息)으로 목적(目的)하는 사업(事業)을 경영(經營)하는 것이니 폐난(弊難)에 빠진 사람들을 구휼(救恤)하기 위한 제위보(濟危寶), 교육(敎育)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학보(學寶) 같은 것이 그 것이오 이 기관(機關)은 한편으로는 사업(事業) 경영체(經營體)가 되고 한편으로는 서민금융(庶民金融) 기관(機關)이 되어 국민(國民)의 경제(經濟) 생활(生活)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 때의 물품(物品) 매매(買賣)에는 화폐(貨幣)를 쓰지 아니하고 마포(麻布)와 미곡(米穀)으로 화폐(貨幣)의 대신(代身)으로 썼다. 그러나 사회(社會)가 발달(發達)하고 인구(人口)가 늘어서 매매(買賣)는 점차(漸次) 많아지는데 마포(麻布)는 중량(重量)이 무겁고 습기(濕氣)와 연기(煙氣)에 품질(品質)이 상(傷)하기 쉽고 또 서모(鼠耗)도 적지 아니하여 큰 불편(不便)을 느끼게 되었다. 외국(外國)과의 통상무역(通商貿易)에는 포화(布貨) 이외(以外)에 지은(地銀)을 쓰고 일부(一部)에는 송전(宋錢)이 들어와서 유통(流通)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극(極)히 소수(小數)에 불과(不過)하였다.

이에 성종(成宗)은 비로소 동(銅)을 원료(原料)로 하여 전화(錢貨)를 만드니 이것이 아국(我國) 주전(鑄錢)의 시(始)이다. (檀紀 三千三百二十九年 成宗 十五年) 그러나 貨幣는 반드시 시장(市場)을 통(通)하여 유통(流通)되는 것이오 만일 시장(市場)이 없으면 그것으로써 생활(生活) 필수품(必需品)을 매득(買得)하기에 여간(如干) 불편(不便)이 아니라 이 시대(時代)는 시장(市場) 수(數)가 적고 또 민간(民間)에서 전화(錢貨)를 신용(信用)치 않는 관계(關係)로 널리 쓰이지 못하고 여전(如前)히 포화(布貨)로 쓰게 되었다.

 

계단(契丹)관계(關係)

이때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송(宋)나라가 있었고 만주(滿洲)에는 계단(契丹)이 있어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원래(原來) 아국(我國)은 만주(滿洲)의 배후(背後)에 있는 강국(强國)임으로 만주(滿洲)에 터를 잡고있는 나라가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다투고자하면 먼저 배후(背後)의 위험(危險)을 조정(調整)하지 아니하고는 중국(中國) 방면(方面)으로 전력(全力)할 수 없는 것임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로 중국(中國)방면(方面)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아국(我國)의 병(兵)을 받음이 통례(通例)이었다. 계단(契丹)이 발해(渤海)를 멸(滅)한 후(後)에 압록강(鴨綠江) 좌우(左右)의 지(地)에는 여진족(女眞族)이 살았음으로 계단(契丹)과 아국(我國)은 직접(直接) 부딪히는 일이 없고 또 송(宋)나라가 계단(契丹)을 칠 때에 아국(我國)에 원병(援兵)을 청(請)하였으되 아국(我國)에서는 섣불리 이에 응(應)하지 아니하였음으로 계단(契丹)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섭(關涉)이 없었다. 그러나 계단(契丹)은 어느 때든지 아국(我國)을 제압(制壓)치 아니할 수 없는 처지(處地)였음으로 성종(成宗) 십이년(十二年)에 (三千三百二十六年) 공연(空然)한 트집을 잡아 대군(大軍)을 보내어 북변(北邊)에 쳐들어 왔다.

이때 고려(高麗)는 삼한통일(三韓統一)후(後) 근(近) 육십년간(六十年間) 병혁(兵革)을 알지 못하여 인심(人心)이 해이한 터이라 계단(契丹) 병(兵)이 들어옴을 보고 정부(政府) 고관중(高官中)에는 북변(北邊)의 땅을 할양(割讓)하고 화친(和親)하자는 의론(議論)까지 있었다. 이때 서희(徐熙)는 할지론(割地論)을 크게 반대(反對)하여 말하되 우리 나라는 동방(東方)의 대국(大國)이오 또 계단(契丹)을 막을만한 힘도 있는데 땅을 버려서 화친(和親)함은 국가(國家)의 치욕(恥辱)이오 더욱이 고구려(高句麗)의 고지(故地)를 수복(收復)하려는 우리 나라로서 어찌 경솔(輕率)히 할지론(割地論)을 말하랴 일전(一戰)한 후(後)에 모든 일을 처리(處理)하여도 늦지 아니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나가 싸워서 적(敵)의 기세(氣勢)를 꺾어놓고 계단(契丹)장수(將帥) 소손령(蕭遜寧)을 찾아가서 저들이 까닭 없이 사단(事端)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침범(侵犯)함을 힐난(詰難)하였다. 소손령(蕭遜寧)은 고려(高麗)는 신라(新羅)를 물려받은 나라이니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은 전부(全部) 계단(契丹)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하였다. 서희(徐熙)는 우리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의 부흥(復興)임으로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한 것이니 땅의 경계(境界)를 말하면 계단(契丹)은 본시(本是) 고구려(高句麗) 땅이니 우리가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항변(抗辯)하였다. 소손령(蕭遜寧)은 그러면 고려(高麗)는 무슨 까닭으로 가까운 계단(契丹)과 사귀지 아니하고 멀리 송(宋)나라와 친(親)하냐 하니 이것은 우리 나라와 송(宋)나라의 관계(關係)를 끊고 자기(自己) 나라와는 친선(親善)하여 후고(後顧)의 걱정을 없애려는 심산(心算)이다. 서희(徐熙)는 우리도 계단(契丹)과 사귀고자하나 중간(中間)에 여진(女眞)의 땅이 가로 놓여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니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의 땅을 우리에게 달라하여 동의(同意)를 얻고 서로 화친(和親)을 맺고 계단군(契丹軍)이 물러간 뒤에 익년(翌年)부터 군사를 내어 곽주(郭州) 구주(龜州)등 여러 성(城)을 쌓으니 이것이 이른바 강동문성(江東文城)의 기초(基礎)가 된 것이다. 그러나 계단(契丹)은 이번 화친(和親)으로써 만족(滿足)치 아니하고 기회(機會)만 있으면 다시 고려(高麗)를 침범(侵犯)하려 하던 차(次)에 마침 고려(高麗)에 내란(內亂)이 있어서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해(害)하고 현종(顯宗)을 세우니 계단(契丹)이 강조(康兆)의 죄(罪)를 묻는다 빙자(憑藉)하고 삼십만(三十萬)의 군사(軍士)로 쳐들어 왔다. 이때 신하(臣下)들 중에 화친(和親)하자고 주장(主張)하는 자(者)가 있었으나 강감찬(姜邯贊)이 이를 반대(反對)하고 현종(顯宗) 왕(王)을 나주(羅州)로 피난(避難)하게 하고 양규(楊規)로 하여금 계단군(契丹軍)을 맞아 싸우니 계단군(契丹軍)은 약탈(掠奪)과 포학(暴虐)을 마음껏 하다가 마침내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우리 나라의 귀중(貴重)한 문헌(文獻)이 많이 불타버렸으니 우리 나라에도 옛날부터 고기삼한(古記三韓), 고기고구려(古記高句麗), 유기신라(留記新羅) 백제(百濟)의 사기(史記) 등(等) 사적(史籍)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모두 이와 같은 병화(兵火)에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삼국시(三國時) 이전(以前)의 일을 기록(記錄)한 사서(史書)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기타 중국(中國) 서적(書籍)에 산견(散見)하는 것뿐이다. 계단(契丹)은 고려(高麗)에 대(對)한 야심(野心)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 후 팔년(八年)만에 (顯宗 九年 檀紀 三千三百五十一年) 다시 앞서 쌓은 육성(六城)을 달라는 핑계로 십만(十萬)군(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이에 상원수(上元帥)가 산(山)골에 복병(伏兵)을 두어 계단군(契丹軍)을 무찌르고, 적병(敵兵)이 길을 피(避)하여 송도(松都)로 내려오는 것을 대동강(大洞江)에서 습격(襲擊)하여 적병(敵兵)을 만여명(萬餘名)을 죽이니 계단군(契丹軍)의 기세(氣勢)가 한목 꺾이었다. 이듬해 이월(二月)에 적군(敵軍)의 대부대(大部隊)가 구주(龜州)를 지나는 것을 강감찬(姜邯贊)이 동문(東門) 밖에서 맞아 싸워서 크게 깨트리고 도주(逃走)하는 적(敵)을 추격(追擊)하여 이를 섬멸(殲滅)하니 이후(以後)로 계단(契丹)은 다시 고려(高麗)를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었고 지금까지 우리 국민(國民)은 강감찬(姜邯贊)을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명장(名將)으로 병칭(竝稱)하고 있는 것이다.

만주(滿洲)에서 계단(契丹)의 세력(勢力)이 쇠약(衰弱)해지고 압록강(鴨綠江) 좌우(左右)에 있는 여진(女眞)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한 틈을 타서 고려(高麗)는 이남(以南)의 지(地)를 점차(漸次) 수복(收復)하고 덕종(德宗)은 유소(柳韶)를 시켜서 여진(女眞)을 방비(防備)하기 위(爲)한 성(城)을 쌓으니 압록강(鴨綠江) 어구(於口)인 의주(義州)군 광성면(光城面) 외동(外洞)으로부터 시작(始作)하여 함경남도(咸鏡南道) 정평군(定平郡)의 비백산(鼻白山)을 거쳐서 함주군(咸州郡) 都連逋에 이르기까지 무릇 千餘里이니 이것을 천리장성(千里長城)이라 하며 십이년(十二年)동안의 공력(功力)을 기우려 정종(靖宗) 십년(十年)에 완성(完成)하였다. (檀紀 三千三百二十四年)

成宗때에 地方으로 나누어 경기(京畿)의 외(外)에 관내도(關內道)-양주(楊州)- 광주(廣州)- 해주(海州)), 중원도(中原道)-충주(忠州)- 청주(淸州)), 하남도(河南道)-공주 등(等), 강남도(江南道)-전주(全州)등(等), 영남도(嶺南道)-상주(尙州)등(等), 산남도(山南道)-진주(晉州)등(等) 영동도(嶺東道)-경주(慶州)등(等), 해양도(海陽道)-나주(羅州) 승천(昇川)(順川) 삭방도(朔方道)-춘주(春州) 명주(溟州)등(等), 패서도(浿西道)-서경(西京)등(等)의 십도(十道)로 만들었으니 현종(顯宗)때에 이르러서 북변(北邊)이 아직 정(定)치 못하였음으로 다시 지방(地方)의 구획(區劃)을 고쳐서 경기(京畿)의 외(外)에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도(京畿道)의 일부(一部)와 충청남북도(忠淸南北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일부(一部)) 서해도(西海道)-(지금의 황해도(黃海道)의 오도(五道)를 두고 북변(北邊)에는 동계(東界)와 북계(北界)를 두니 동계(東界)는 또한 동북면(東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江原道) 북부(北部)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이오 북계(北界)는 또한 서북면(西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평안남북도(平安南北道)의 대부분(大部分)이다. 이와 같이 북변(北邊)을 서계(西界)로 정(定)한 것은 이 지방(地方)이 계단(契丹)및 여진(女眞)과 상접(相接)하는 땅이오 또 앞으로 북진(北進)하려는 계획(計劃)이 있기 때문에 잠정적(暫定的)으로 정(定)해 놓은 행정구역(行政區域)이다.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문화(文化)

고려(高麗) 건국(建國) 이후(以後)에 유교(儒敎)가 들어와서 관가(官家)에서 세운 교육기관(敎育機關)에 의(依)하여 상당(相當)한 발달(發達)을 이루고 이러한 관학(官學)외(外)에 사학(私學)이 있어서 한때 크게 떨치었고 학생(學生)들은 관학(官學)보다도 사학(私學)에 가기를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관학(官學)에서보다 사학(私學)에서 더 많이 인재(人才)가 났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황금시대(黃金時代)라고 칭(稱)하는 문종(文宗)때에는 유명(有名)한 사학(私學)이 십이개(十二個)나 있어서 거기서 공부(工夫)하는 학도(學徒)들은 십이문도(十二門徒)라하고 그 중(中)에서도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칭(稱)하는 최충(崔沖)의 문(門)이 가장 이름이 높고 당시(當時) 국가(國家)의 드러난 인물(人物)은 대개(大槪)가 이 최문(崔門) 출신(出身)이었고 최충(崔沖)의 시호(諡號)가 문헌공(文憲公)임으로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칭(稱) 하였다.

고려(高麗)는 불교(佛敎)로써 국교(國敎)를 삼고 정치제도(政治制度) 같은 것이 불법(佛法)에 인연(因緣)되지 아니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一般) 풍습(風習)에도 모두 불교(佛敎)의 정신(精神)이 들어 있었다.

고려사회(高麗社會)의 특수(特殊)한 풍습(風習)으로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있었으니 이는 국가제전(國家祭典)으로써 우리 나라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 널리 행(行)하여진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 등(等)의 풍속(風俗)이 불교(佛敎)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얼마쯤 변화(變化)하여진 것이다. 연등(燃燈)은 불(佛)을 섬기는 것이오 팔관(八關)은 천신(天神)을 비롯하여 자연신(自然神)을 섬기는 것이니 둘 다 등(燈)불을 찬란(燦爛)히 켜고 온갖 음식(飮食)을 베풀며 그 사이에 춤추고 노래하여 전국민(全國民)이 함께 즐기고 동시(同時)에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즐겁게 하여 풍년(豊年)이 들고 천하(天下)가 화평(和平)하기를 빌고 감사(感謝)하는 것이었다.

성종(成宗)때에는 승(僧) 삼십여명(三十餘名)을 송(宋)나라 항주(抗州)에 보내어 그 곳 영명사(永明寺) 지현선사(智賢禪師)에게 선종(禪宗)의 교리(敎理)를 배워 오고 그 외(外)에도 불법(佛法)을 닦으러 대륙(大陸)에 건너가는 승(僧)이 수(數)없이 많았다. 그 중(中)에서도 고려(高麗) 불교계(佛敎界)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대현국사(大賢國師) 의천(義天)이다.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써 십일세(十一歲)에 출가(出家)하여 승(僧)이 되고 후(後)에 송(宋)나라에 건너가서 불경(佛經) 천권(千卷)을 구(求)해 오고 또다시 송(宋)나라와 요(遼)나라(계단(契丹)와 일본(日本)에 사람을 보내어 사천권(四千卷)을 구(求)해와서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불경(佛經)을 박아내니 一千十部 四千七百四十卷이며 이를 흥왕사판(興王寺版) 대장경(大藏經) 또는 의천(義天)의 속장경(續藏經)이라 한다.

이보다 앞서 성종(成宗)때에 불법(佛法)의 힘으로 계단(契丹)의 군사(軍士)를 물리치려 하여 불경(佛經) 판각(版刻)을 시작(始作)하여 대장경(大藏經) 一千七十六部 五千四百八十卷을 박아내고 그 후(後) 文宗때에 빠진 佛經 일천권(一千卷)을 박아내고 여기에 興王寺版을 合치면 그 當時의 世界에서 가장 完備한 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國寶가 後日 蒙古亂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高宗이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노력(努力)으로 이를 새로 만드니 이것이 지금 경상도(慶尙道)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유명(有名)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불교(佛敎)가 퍼짐과 함께 거기에 따르는 미술공예(美術工藝)도 크게 발달(發達)하여 아국사상(我國史上) 미술공예(美術工藝)의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이루었고, 다만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인성(人性)이 혼후(渾厚)함으로 모든 제품(製品)이 웅대(雄大)한 기상(氣象)이 나타나고 있음에 비(比)하여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인성(人性)은 혼후(渾厚)한 풍(風)이 적고 오직 진실(眞實)하였음으로 모든 제품(製品)에 우아(優雅)한 맛은 유여(有餘)하나 웅대(雄大)한 기상(氣象)은 적다고 한다.

 

중기(中期)의 융성(隆盛)

문종(文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일백삼십여(一百三十餘)이오 외(外)로는 북변(北邊)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쌓인 후(後)에 국경(國境)에 큰 일이 없고 내(內)로는 문화(文化)가 발달(發達)하고 도로(道路)를 열어서 교통(交通)을 편리(便利)하게 하니 물론(勿論) 당시(當時)의 교통(交通)은 지금과 같이 어떠한 산곡태산(山谷泰山)이든지 우마차(牛馬車)가 통행(通行)할 수 있는 도로(道路)가 아니오 소위(所謂) 평지(平地)의 도로(道路)도 겨우 우마차(牛馬車)가 통행(通行)할 수 있음에 불과(不過)하고 산로(山路)에는 보행인(步行人)이나 태우마(駄牛馬)가 행(行)할 정도(程度)이니 지금 각지(各地)에 남아있는 구로(舊路) 폐로(廢路)가 곧 그 시대(時代)의 유물(遺物)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當時)에는 군사(軍士)가 행진(行陣)할 때에는 군사(軍士)들이 무거운 식량(食糧) 전구(戰具)같은 것을 지는 외(外)에 태우마(駄牛馬)의 열(列)이 천리(千里) 이천리(二千里)를 잇닿았다 한다. 성종(成宗) 이후(以後) 각(各) 주요(主要) 도로(道路)에 비로소 원(院)을 두어 행인(行人)의 숙소(宿所)로 쓰는 정책(政策)을 그대로 이어오고 산곡험산(山谷驗山)에도 대개(大槪) 도로(道路)를 만들어 종전(從前)에 비(比)하여 교통(交通)이 훨씬 편리(便利)하여졌다.

건국(建國) 초기(初期)로부터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항상(恒常) 반항(反抗)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음으로 문종(文宗)은 외방(外方)에서 반항(反抗)하는 사상(思想)이 있는 유력(有力)한 향리(鄕吏)의 자제(子弟)를 서울에 와서 머물게 하니 이것을 기인(其人)이라 하고 기인제(其人制)가 생긴 이후(以後)로 외방(外方)의 인심(人心)이 점차(漸次) 안정(安定)되고 이 기인제(其人制)는 후일(後日)의 경주인(京主人)의 근원(根源)이 된 것이다.

문종(文宗)의 세(世)는 고려(高麗) 일대(一代)를 통(通)하여 가장 좋은 태평(太平)시절(時節)을 이루었고 고려(高麗)도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왕위(王位) 계승(繼承)의 좋은 법(法)을 받아 유군(幼君)을 세우지 아니하고 왕위(王位)를 아들에게만 전(傳)함이 아니라 형제(兄弟) 상전(相傳)하는 뜻이 적지 아니하더니 선종(宣宗)이 그 아들 헌종(獻宗)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하니 헌종(獻宗)은 황구(黃口) 유아(幼兒)라 국정(國政)을 감임(堪任)할 능력(能力)이 없고 모든 행정권(行政權)이 그 신하(臣下)의 손에 의(依)하여 좌우(左右)되니 왕(王)의 숙부(叔父) 숙종(肅宗)이 정부(政府)를 전복(顚覆)하고 왕(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王)이 되니 이것은 이조(李朝)때의 단종(端宗) 사변(事變)과 같은 것이다.

화폐제도(貨幣制度)는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창설(創設)한 뒤로 잘 행(行)치 못하였고 대현국사(大賢國師) 의천(義天) 같은 이도 주전(鑄錢)의 실행(實行)을 주장(主張)하니 숙종(肅宗)이 왕(王)이 된 후(後)로 이 정책(政策)을 강력(强力)히 추진(推進)하여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전(鑄錢)을 만들어 주요(主要)도시(都市)에서 쓰게 하니 이때의 전면(錢面)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비롯하여 해동중보(海東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등(等)으로 쓰이었으며 또 一斤重의 銀으로 我國地形을 본뜬 甁을 만들어서 돈으로 쓰니 이 銀甁은 그 模樣을 좇아서 활구(濶口)라 하였으며 이 외(外)에도 쇄은(碎銀) 소은병(小銀甁) 같은 것도 쓰였다.

숙종(肅宗)이 화폐제도(貨幣制度)를 확립(確立)하려고 한 것은 당시(當時) 산업(産業)이 발달(發達)하여 국내(國內)에 물화(物化)의 유통(流通)이 많을 뿐만 아니라 외국무역(外國貿易)이 또한 늘어가는 까닭이었다. 이때 고려(高麗)는 대륙(大陸)세력(勢力)과 항상(恒常) 무력(武力) 교섭(交涉)을 가지고 있으되 한 편(便)으로 벽란(碧瀾예성강)나루를 통(通)하여 송(宋)나라와 흑수(黑水)(지금의 北滿州) 일본(日本) 유구(琉球)(오끼나와 부근) 섬라(暹羅)(타이랜드)등(等) 여러 나라와 또 멀리는 대식국(大食國)(중동지방)의 상인(商人)들과 평화(平和)로운 무역(貿易)을 계속(繼續)하였고 저쪽에서 들어오는 물건(物件)은 주(主)로 비단, 책(冊), 문방구(文房具), 약재(藥材), 향료(香料), 다(茶), 대모(玳瑁), 서각(犀角) 등(等)이며 이 쪽에서 나가는 것은 동(銅), 은(銀), 포목(布木), 인삼(人蔘), 우황(牛黃), 호피(虎皮), 지(紙), 화문석(花紋席), 나전(螺鈿), 자기(磁器) 등(等)이었다. 고려자기(高麗磁器)는 천하(天下)의 절품(絶品)으로서, 또 고려(高麗)의 견지(繭紙)는 고려(高麗) 특산품(特産品)으로써 당시(當時) 송(宋)나라에서 대환영(大歡迎)을 받았던 것이다.

서남해중(西南海中)에 있는 탐라(耽羅)는 지금의 제주도(濟州道)인데 고초(古初)에 형제(兄弟) 삼인(三人)이 석혈(石穴)중(中)에서 살더니 그 후(後)에 여자(女子)와 우조(牛鳥)와 각곡(各穀) 종자(種子)를 실은 배가 해변(海邊)에 와서 닿음으로 삼인(三人)이 여자(女子)를 분취(分娶)하고 성(姓)은 각각(各各) 고(高) 부(夫) 양(良)으로 정(定)하고 농사(農事)지으니 인구(人口)가 차차(次次) 늘어가서 한 독립국가(獨立國家)가 되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비로소 백제(百濟)와 통(通)하였다. 신라(新羅)통일(統一) 후(後)로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한 속국(屬國)으로 조공(朝貢)하고 있더니 숙종(肅宗)은 이를 내지(內地)와 동일(同一)하게 만들고 고려(高麗)의 정치(政治)를 펴기 위(爲)하여 국호(國號)를 폐(廢)하고 군(郡)을 만드니 이때로부터 탐라(耽羅)는 국가(國家)에서 보내는 관리(官吏)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성(人性)이 강한(强悍)하고 종전(從前)의 왕자(王子) 계통(系統)이 지방(地方)의 세력(勢力)을 가지고 있어 국가(國家)에 대(對)하여 반란(反亂)이 자주 일어났다.

고려(高麗)초기(初期)로부터 국가(國家)의 운명(運命)을 예언(豫言)한 소위(所謂) 비결(秘訣)이 유행(流行)하였는데 그 비결(秘訣)에 목(木)자(子)가 득국(得國)하여 한양(漢陽)에 도(都)한다는 말이 있었음으로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자(者)가 음모(陰謀)를 꾸미는 일이 종종(種種)있었다. 숙종(肅宗)은 한양(漢陽)(지금의 서울)에 이본(李本)을 많이 심고 장성(長成)함을 기다려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작벌(斫伐)케 하여 이씨(李氏)의 왕기(王氣)를 제압(制壓)한다고 한 일까지 있었으니 고려(高麗)의 정치(政治)는 비결(秘訣)의 힘의 작용(作用)이 적지 아니하였고 이 비결(秘訣)은 이조(李朝)의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것으로서 당시(當時) 고려(高麗)의 민간(民間)에도 비결(秘訣)의 힘의 영향(影響)이 가장 컸던 것이다.

 

여진(女眞)관계(關係)

여진(女眞)은 처음에 발해국(渤海國)을 구성(構成)한 말갈(靺鞨)의 일족(一族)이라 발해(渤海)가 계단(契丹)에게 망(亡)한 뒤에 여진족(女眞族)이 남만주(南滿州) 방면(方面)에 거주(居住)하는 자(者)는 계단(契丹)에게 귀화(歸化)하여 숙여진(熟女眞)이 되고 백두산(白頭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북만주(北滿州)와 옥저(沃沮)고지(故地)에 거주(居住)하는 자(者)는 항상(恒常) 계단(契丹)에 반항(反抗)하였음으로 이를 생여진(生女眞)이라 한다. 우리 나라와 인접(隣接)하고 있는 여진족(女眞族)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으로서 무역(貿易)과 침략(侵略)을 되풀이하였으나 고려(高麗)를 두려워하는 기색(氣色)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합이빈(哈爾濱)(하얼빈) 부근(附近)의 완안(完顔) 부(部)에 오아속(烏雅束)이 나서 그 세력(勢力)이 무척 늘어서 이웃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合)치고 그 힘이 우리 나라 국경(國境)에까지 미치니 오아속(烏雅束)의 선세(先世)는 고려(高麗) 동북면(東北面)의 화주(和州)(지금의 영흥(永興)사람 김모(金某)임으로 그들은 고려(高麗)를 부모지국(父母之國)이라 肅宗 九年 正月에 咸州(지금의 咸興)의 女眞 부락部落을 통합(統合)한 오아속烏雅束의 부하(部下)는 국경(國境)을 넘어서 정평(定平)에 들어왔다. 이에 고려(高麗)에서는 임간(林幹)을 보내어 치다가 실패(失敗)하고 다시 윤관(尹瓘)을 대신(代身) 보내었으나 또한 공(功)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적(敵)을 유화(宥和)하여 돌려보내었다. 그러나 윤관(尹瓘)은 이 싸움에서 여진(女眞)이 어찌하여 강(强)한가를 알았다. 그것은 고려(高麗)의 보병(步兵)에 대(對)하여 적(敵)은 모두 기병(騎兵)이어서 처음부터 대적(對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윤관(尹瓘)은 이에 신기대(神騎隊)라는 기병대(騎兵隊)를 만들어서 맹렬(猛烈)한 훈련(訓練)을 시켰다. 그러던 중(中) 숙종(肅宗)이 승하(昇遐)하면서 유언(遺言)으로 지금의 여진(女眞)의 세력(勢力)을 꺾지 아니하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으리라 하여 여진(女眞)을 치기를 부탁(付託)하였다.

숙종(肅宗) 이년(二年)에 (기원 삼천사백사십년) 여진(女眞)이 다시 국경(國境)을 침범(侵犯)함으로 윤관(尹瓘)이 십칠만(十七萬)의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장성(長城)을 넘어 가서 적(敵)의 소굴(巢窟) 일백(一百) 삼십여소(三十餘所)를 무찌르고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함주(咸州), 공험진(公嶮鎭), 의주(宜州), 통태(通泰), 평융(平戎)의 구성(九城)을 쌓으니 이것이 유명(有名)한 동북면(東北面) 구성(九城)이다.

구성(九城)의 땅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 확실(確實)히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혹(或)은 공험진(公嶮鎭)을 지금의 북간도(北間島)의 땅이라 하고, 혹(或)은 길주(吉州)를 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 길주(吉州)라 하여 마치 구성(九城)의 땅이 두만강(豆滿江)의 좌우(左右)에 까지 미침과 같이 말하는 일도 있으나 당시(當時) 전쟁(戰爭)한 일수(日數)와 거리(距離) 등(等)으로 생각하여 보면 지금의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북부(北部) 해안(海岸)지방(地方)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 해로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여진(女眞)은 고려(高麗)에 원수(怨讐)를 갚고 구성(九城)을 회복(恢復)하려하여 쉴 사이 없이 반격(反擊)을 되풀이하고 또 완안(完顔)부(部)가 수만명(數萬名)으로서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등(等)을 차례로 포위(包圍)하였으나 성공(成功)치 못하였다. 이때 여진(女眞)은 구성(九城) 등지(等地)에서 쫓겨나간 부락(部落)이 안주(安住)할 곳을 잃어서 몹시 피로(疲勞)하고 고려(高麗)도 또한 구성(九城)의 땅이 험(驗)하여 지키기 어렵고 또 거리(距離)가 멀어서 모든 군수물(軍需物)을 수송(輸送)하기 어려워서 국력(國力)이 피폐(疲弊)하였다. 이에 여진(女眞)은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구성(九城)을 반환(返還)하여 달라고 애원(哀願)하여 왈(曰) 만일 구성(九城)을 돌려주면 이후(以後)로는 영원(永遠)히 고려(高麗)를 부모(父母)의 나라로 섬기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조공(朝貢)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맹서(盟誓)하고 돌 자갈 하나라도 지경(地境)을 넘어서 던지지 아니 하겠다고 굳게 다짐함으로 고려(高麗)는 그들의 소원(所願)을 들어주기로 하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여진(女眞) 면장(面長)들로 하여금 함주성(咸州城) 밖에 단(壇)을 모으고 하늘에 맹서(盟誓)케 한 다음 구성(九城)으로부터 차례로 물러나니 이로써 여러 해 동안 애써 이루어진 동북면(東北面)의 계획(計劃)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반환(返還)은 효과(效果)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니 후일(後日) 고려(高麗)와 여진(女眞)과의 교섭(交涉)에 큰 영향(影響)을 끼쳐서 오랫동안 불안(不安)하던 동북면(東北面)의 국경(國境)이 이로부터는 평정(平靜)하여졌고 오아속(烏雅束)의 아들 아골타(阿骨打)가 여진국(女眞國)을 크게 만들어 국호(國號)를 금(金)이라 하고 계단(契丹) 즉(卽) 요(遼)나라를 멸(滅)하고 다시 중국(中國)에 쳐들어가서 송(宋)나라를 양자강(楊子江) 남(南)쪽으로 몰아내서 동양(東洋) 천지(天地)를 뒤흔들었건만 고려(高麗)에 대(對)하여는 항상(恒常) 우호(友好)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택리지(擇里志)라는 글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만주(滿洲)에서 일어난 국가(國家)는 대강(大江)과 대야(大野)를 가지고 있어 그 기풍(氣風)이 웅대(雄大)함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는 능(能)히 중국대륙(中國大陸)과 자웅(雌雄)을 다투었고 발해(渤海) 유족(遺族)인 금(金)나라는 능(能)히 중국(中國)에 들어가서 제왕(帝王)노릇을 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에 국척(局蹐, 跼蹐)하고 있는 국가(國家)는 천리(千里)의 강(江)과 백리(百里)의 야(野)가 없기 때문에 겨우 그 봉역(封域)을 근수(僅守)할 뿐이라는 뜻을 썼는데 지리(地理)와 국민(國民)기풍(氣風)의 관계(關係)가 있고 없는 것은 별문제(別問題)로 하고 어쨌든 우리 민족(民族)이 만주(滿洲)를 잃은 후(後)에 그 세력(勢力)이 갑자기 미약(微弱)하여진 것은 사실(事實)이다.

 

계생(繼生)하는 반란(叛亂)

숙종(肅宗)의 아들 인종(仁宗)은 나이 어리고 그 외조부(外祖父) 이자겸(李資謙)이 권력(權力)을 잡고 스스로 높은 벼슬에 나아가서 국사(國事)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구성(九城) 싸움에 나가서 공(功)을 세우고 돌아온 척준경(拓俊京)을 심복(心腹)으로 부려서 온갖 포학(暴虐)한 일을 다 하였다. 그는 자기(自己)에게 반대(反對)하는 사람을 모조리 방축(放逐)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고자 하여 왕(王)을 죽이려 하니 이것은 목(木) 자(子) 득국(得國) 비결(秘訣)에 인(因)함이라 그러나 자겸(資謙)은 마침내 패(敗)하고 말았다. 이 난리(亂離)에 궁궐(宮闕)이 불타 버리고 서울이 쓸쓸하게 됨에 승(僧) 묘청(妙淸)과 시인(詩人) 정지상(鄭知常) 등(等)을 중심(中心)으로 서경(西京)에 도(都)를 옮기고 임금을 황제(皇帝)라 일컫고 연호(年號)를 세우자는 의견(意見)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정(朝廷)에서는 그 의견(意見)을 반대(反對)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묘청(妙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경(西京)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부개(夫開)라 하니, 인종(仁宗)은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그 이듬해에 평정(平定)하였다.

묘청(妙淸)의 난(亂)에 대(對)하여 옛날 사서(史書)에는 묘청(妙淸)으로써 망탄(妄誕)한 사람이라 하고 그 난(亂)을 일으킨 것은 정권(政權) 다툼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러 학자(學者)들은 묘청(妙淸)으로써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항(對抗)하는 혁명가(革命家)라 하여 시비(是非)가 정(定)치 못하고 있다. 당시(當時)의 시세(時勢)를 보건대 조정(朝廷) 안에는 중국(中國)을 조국(祖國)처럼 여기는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思想)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니 정치가(政治家)중(中)에는 거기에 불만(不滿)을 품은 자(者) 적지 아니하였고 묘청(妙淸)도 그 중(中)의 일인(一人)이었다. 이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혁파(革破)를 주장(主張)함에는 그것을 주장(主張)할만한 인물(人物)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나 묘청(妙淸)은 사실(事實)로 망탄(妄誕)한 사람이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써 왕(王)의 마음을 이끌고 정지상(鄭知常)이 또한 음양설(陰陽說)로써 거기에 부동(附同)하였으며 서경(西京)에 도읍(都邑)을 옮기려 함은 서경(西京)에 묘청(妙淸)의 세력(勢力)이 이미 부식(扶植)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묘청(妙淸)이 진심(眞心)으로 국가(國家)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爲)하는 정인(正人) 지사(志士)가 아니오 다만 세력(勢力) 다툼을 위(爲)한 술책(術策)에 불과(不過)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高麗)는 태조(太祖) 이래(以來)로 우문정책(右文政策)을 쓰고 무인(武人)을 낮추어보게 되어서 무인(武人)들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더니 의종(毅宗)때에 이르러 왕(王)은 본시(本是) 기질(氣質)이 나약(懦弱)하여 근시(近侍)와 문신(文臣)들만을 가까이하고 그들이 또한 왕(王)의 사랑을 믿고 방자(放恣)한 일이 많아서 무신(武臣)들의 감정(感情)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이러한 무신(武臣)들의 불평(不平)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정중부(鄭仲夫) 등(等)이 난(亂)을 일으켜 근시(近侍)와 문신(文臣)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집을 헐어버리고 왕(王)을 몰아내고 왕(王)의 아우를 세우니 이가 명종(明宗)이다. 이 난리(亂離)가 경인년(庚寅年)에 제일차(第一次)로 일어나고 계사년(癸巳年)에 재차(再次) 일어났음으로 이를 경계지란(庚癸之亂)이라 한다. 정중부(鄭仲夫)는 나라의 권세(權勢)를 한 손에 잡고 조정(朝廷)의 중요(重要)한 벼슬에서 외방(外方)의 소임(所任)에 이르기까지 전부(全部) 무신(武臣)이 맡아보게 되었다.

문신(文臣)의 세상(世上)은 비록 무력(無力)하나마 전통(傳統)과 권위(權威)를 세우고 그를 중심(中心)으로 하여금 움직여 나갔지만 무인(武人)의 세상(世上)은 그러한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힘으로 움직였다. 정중부(鄭仲夫)는 권세(權勢)를 잡은지 십년(十年)만에 경대승(慶大升)에게 죽고 대승(大升)은 다행(多幸)이 천명(天命)을 마쳤으나 그때 서울 안 도적(盜賊)은 모두 무신(武臣)의 부하(部下)라고 할 만치 백성(百姓)들의 원성(怨聲)이 적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後)에 장군(將軍) 이의민(李義旼)이 권세(權勢)를 잡고 갖은 포학(暴虐)을 다하여 목(木)자(子) 득국(得國)의 비결(秘訣)을 이용(利用)하여 반역(叛逆)을 도모(圖謀)하더니 최충헌(崔忠獻)이 의민(義旼)을 죽이고 그의 삼족(三族)과 종들까지도 모조리 잡아죽이니 국가(國家)의 모든 권세(權勢)가 충헌(忠獻)에게 돌아갔다. 충헌(忠獻)은 명종(明宗)을 가두고 그 아우를 세우니 이가 신종(神宗)이다. 충헌(忠獻)은 사병(私兵)을 길러서 자기(自己)를 수호(守護)케 하니 그 세력(勢力)이 관군(官軍)보다 억세고 나라의 정치(政治)를 자기 집 도방(都房)에 앉아서 처결(處決)하니 이것을 도방정치(都房政治)라하고 도방정치(都房政治)가 생긴 후(後)로 조정(朝廷)은 빈집이 되고 관군(官軍)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아니하고 그가 권세(權勢)를 잡은 이십사년(二十四年)간(間)에 두 임금을 내치고 내 임금을 세우니 유약(柔弱)한 왕(王)들이 또한 충헌(忠獻)의 비위(脾胃)를 맞추는 수밖에 다른 도리(道理)가 없었다.

무신(武臣)의 난리(亂離)를 거쳐서 그들의 발호(跋扈)로 유족사회(遺族社會)의 묵은 전통(傳統)이 무너지고 사회(社會)가 힘으로 움직이게 되자 이때까지 하층(下層)에서 눌려 살던 농민(農民)과 노예(奴隸)계급(階級)이 자주 반란(叛亂)을 일으켰다. 그 중(中)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건(事件)으로는 명종(明宗)때에 공주(公州)에서 일어난 망이(亡伊)의 난(亂)과 청도(淸道)에서 일어난 김사미(金沙彌)의 난(亂)과 신종(神宗)때에 동경(東京경주)에서 일어난 김순(金順)의 난(亂)과 울진(蔚珍)에서 일어난 김위(金偉)의 난(亂) 같은 것이며 노예(奴隸)의 반란(叛亂)으로는 신종(神宗)때에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사건(事件)과 같은 것은 주목(注目)할 현상(現象)이니 만적(萬積)은 관사(官私) 노비(奴婢) 수천(數千)명을 송도(松都)의 뒷산에 모아 놓고 최충헌(崔忠獻) 이하(以下) 자기네들의 상전(上典)을 각각 죽이고 노비(奴婢) 문서(文書)를 불사라서 노비를 모두 해방(解放)하여 삼한(三韓)에 천인(賤人) 계급(階級)을 없이하고 또 장상(將相)이 본시(本是) 종(種)이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도 장상(將相)이 될 수 있다하고 일을 꾸미다가 중도(中途)에 발각(發覺)되어 거사(擧事)치 못하고 모두 잡혀 죽었다.

 

몽고란(蒙古亂)

최충헌(崔忠獻)이 권세(權勢)를 잡은 후(後)에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판국(版局)이 벌어졌다. 몽고(蒙古)는 본시(本是) 외몽고(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유목(遊牧)하는 부족(部族)이러니 성길사한(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사방(四方)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쳐서 큰 세력(勢力)을 이루니 이는 최충헌(崔忠獻)이 한창 세도(勢道)를 부리던 희종(熙宗)때 일이다. 금(金)나라가 몽고(蒙古)의 힘에 눌림에 계단(契丹)의 귀족(貴族)들이 요동(遼東)에서 일어나고 금(金)의 반장(叛將) 포선만노(蒲鮮萬奴)는 지금의 간도(間道)지방(地方)을 근거지(根據地)로 하여 동진국(東眞國)을 세웠다. 그 후(後) 고종(高宗)때에 이르러 요동(遼東)의 계단족(契丹族)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우리 나라 지경(地境) 안으로 밀려들어와서 약탈(掠奪)을 함부로 행(行)하였다. 고려(高麗)는 군사(軍士)를 보내어 각지(各地)에서 계단병(契丹兵)과 싸우는 중(中)에 또 몽고(蒙古)가 동진(東眞)과 연합(聯合)하여 계단병(契丹兵)을 치기 위(爲)하여 그 뒤를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니 국내(國內)에 사국군대(四國軍隊)가 어울려서 형세(形勢)가 극(極)히 험악(險惡)하고 또 급박(急迫)하였다. 더욱이 고려(高麗)와 몽고(蒙古)는 종래(從來)로 외교관계(外交關係)가 전연(全然)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인성(人性)이 강한(强悍)함으로 국내인심(國內人心)이 흉흉(恟恟)하였다.

이때 계단병(契丹兵)은 앞으로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막히고 뒤로 몽진연합군(蒙眞聯合軍)에게 쫓기어 서북면(西北面)의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서 지키니 몽고(蒙古)장(將) 합진(哈眞)과 동진장(東眞將) 완안자연(完顔子淵)이 그 뒤를 따라 강동성(江東城)을 포위(包圍)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형세(形勢)가 심(甚)히 위구(危懼)함을 보고 전략(戰略)과 외교(外交)에 능숙(能熟)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여 조충(趙冲)을 원수(元帥)로 하고 김취려(金就礪)를 부원수(副元帥)로 하여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몽진군(蒙眞軍)의 영(營)에 가서 크게 주연(酒宴)을 베풀고 두 장수(將帥)를 접대(接待)하였다. 두 장수(將帥)는 우리 나라 두 원수(元帥)의 인격(人格)이 매우 높음을 보고 모앙(慕仰)함을 마지아니하였다. 완안자연(完顔子淵)은 아인(我人)에게 말하되 고려(高麗)의 조원수(趙元帥)는 기위(奇偉)한 사람이라 국가(國家)가 이러한 장수(將帥)를 둔 것은 천(天)의 사(賜)함이라 하고 합진(哈眞)은 김취려(金就礪)를 보고 말하되 내가 일직 육국(六國)을 정벌(征伐)하여 귀인(貴人)을 만남이 많으되 형(兄)의 얼굴을 보니 어찌 그렇게 기위(奇偉)한고 하여 칭찬(稱讚)하였다. 이에 세나라 군사(軍士)는 강동성(江東城)을 쳐서 계단병(契丹兵)을 전멸(全滅)시킨 뒤 몽진(蒙塵)과 화호(和好)를 맺고 무사(無事)히 돌려보냈었다. 이 난(亂)에 귀항(歸降)한 자(者)가 말했는데 이들은 산림지대(山林地帶)와 황무지(荒蕪地)에 이주(移住)시켜 농사(農事)짓게 하니 이를 계단장(契丹場)이라 하고 계단장(契丹場)에 들어간 자(者)들 중(中)에는 농사(農事)짓기 싫어하고 사냥과 피혁(皮革) 유기(柳器) 등(等) 수공업(手工業)으로 전업(轉業)하는 자(者)가 많았으니 이것이 대개(大槪) 후일(後日)의 소위(所謂) 소백정(白丁) 고리백정(白丁)등(等)이 된 것이다.

만주(滿洲) 지방(地方)에서는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밀려나와서 동진국(東眞國)은 얼마후(後)에 망(亡)하고 몽고(蒙古)는 고려(高麗)를 구원(救援)하였다. 고종(高宗) 십이년(十二年)에 몽고(蒙古)의 사신(使臣)이 고려(高麗)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도적(盜賊)을 만나 죽은 일이 있음으로 몽고(蒙古)에서는 이것을 트집잡아 가지고 국교(國交)가 점점(漸漸) 험악(險惡)하더니 마침내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에 제일차(第一次)로 고려(高麗)에 쳐들어 왔다. 원래(原來) 만몽(滿蒙) 지방(地方)에 뿌리를 잡은 국가(國家)들은,

一. 해양(海洋)을 가지지 못해서 해외(海外)로 발전(發展)할 길이 없고 二. 기후(氣候)가 추워서 잠포(蠶布) 등(等) 의복(衣服) 자료(資料)가 생산(生産)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몽고(蒙古)가 처음으로부터 고려(高麗)를 빼앗을 욕심(慾心)을 가지는 것도 이 해양(海洋)과 의복(衣服) 자료(資料)를 얻기 위(爲)함이오 계단병(契丹兵)이 뒤를 쫓아 나온 것도 고려(高麗)에 발을 부칠 구실(口實)을 얻으려 함이오 다시 고려(高麗)에 쳐들어 온 것도 자기들이 처음부터 욕심(慾心)내던 일을 달성(達成)하기 위(爲)함이다.

금후(今後)에 있어서도 몽고(蒙古)방면(方面)에 입(立)하는 나라는 해안(海岸)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가장 거리(距離)가 가까운 동해(東海)로 진출(進出)하려 할 것이오 더욱이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아국(我國) 해안(海岸)에 착목(着目)할 것은 물론(勿論)이다. 몽고군(蒙古軍)이 쳐들어오면서 구주성(龜州城)을 포위(包圍)하니 이때 구주(龜州)를 지키던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 등(等)이 여러 날 동안 몽고군(蒙古軍)과 싸워서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몽고장(蒙古將) 한 사람이 탄복(歎服)하여 왈(曰) 내가 종군(從軍)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성(城)이 이와 같이 공격(攻擊)을 받고 굴(屈)치 않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 성중(城中) 제장(諸將)들은 후일(後日) 반드시 장상(將相)이 되리로다 하였다.

그러나 고려(高麗)는 마침내 몽고군(蒙古軍)을 대적(對敵)치 못하여 그 이듬해 삼군(三軍)이 몽고군(蒙古軍)에게 굴복(屈服)하기에 이르렀다. 몽고(蒙古)에서는 달로화적(達魯花赤)(다루가치)라는 관리(官吏) 칠십이인(七十二人)을 보내와서 고려(高麗)의 내정(內政)을 간섭(干涉)하였다. 이에 고려(高麗) 조정(朝廷)은 몽고(蒙古)와 항쟁(抗爭)하려하여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가 당시(當時) 정권(政權)을 잡고 있는지라 왕(王)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니 (단기 삼천오백육십오년) 이는 몽고군(蒙古軍)이 육지(陸地)에서는 강(强)하나 수군(水軍)이 없어서 바다에서는 힘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삼십년(三十年)동안 몽고(蒙古)의 군사(軍士)가 강화도(江華島)의 맞은편(便)에 와서 아무리 위협(威脅)을 하고 출륙(出陸)하기를 계속(繼續)하여도 최우(崔瑀)는 응(應)하지 아니하니 그 분(忿)풀이를 육지(陸地)에서 마음껏 하여 전후(前後)육차(六次)나 그들의 사나운 발굽이 압록강(鴨綠江) 이쪽을 짓밟아서 서북면(西北面)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이 견디지 못하여 아주 마을이 비게 되었으며 적군(敵軍)은 멀리 경주(慶州)까지 쳐들어와서 학살(虐殺)과 노략(擄掠)을 마음대로 하였다.

대구(大邱) 부인사(符仁寺)에 있는 대장경(大藏經)판(版)과 경주(慶州) 황룡사(皇龍寺)의 구층석탑(九層石塔)이 불타 버린 것도 이 때이며 그들이 제육차(第六次)로 들어 왔을 때는 고려(高麗)사람을 잡아 간 것이 이십만명(二十萬名)을 넘고 죽은 사람의 수(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고려(高麗)에서는 대장경(大藏經)이 불타버린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고종왕(高宗王)은 다시 발원(發願)하여 십육년(十六年)동안의 노력(努力)으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판(版)을 새기고 이 대장경(大藏經)을 새겨 내기에 하도 힘들어서 더 간편(簡便)한 방법(方法)을 생각해 낸 것이 활자(活字)이다.

고종(高宗) 이십일년(二十一年) (삼천육백육십칠년)에 이미 주자(鑄字)로써 책(冊)을 박아내니 이는 독일(獨逸)사람들이 서양(西洋)에서 처음으로 활자(活字)를 만들어서 책(冊)을 박아낸 것보다 이백년(二百年)이나 앞섰다. 활자(活字)는 문명(文明)의 모(母)라는 말이 있거니와 세계(世界)에서 가장 먼저 활자(活字)를 발명(發明)한 고려(高麗)는 역시(亦是) 문화(文化)의 선진국(先進國)이었다.

송(宋)나라 임금이 일부러 사신(使臣)을 보내와서 귀중(貴重)한 책(冊)을 빌려달라 하고 일본(日本)이 항상(恒常) 남양(南洋)의 진기(珍奇)한 물건(物件)을 가지고 와서 그 값으로 특(特)히 대장경(大藏經)을 나눠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高麗)가 당시(當時)의 동양(東洋)에서 문화적(文化的)으로 얼마나 높은 수준(水準)을 지니었던가를 알 수 있고 이러한 문화(文化) 속에서 맺어진 열매가 활자(活字)이었다.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간 뒤 최씨(崔氏)는 정권(政權)을 오로지 하여 사병(私兵)인 삼별초군(三別抄軍)으로써 스스로 수비(守備)하여 육지(陸地)에 나가 싸운 일이 없고 오직 육지군대(陸地軍隊)에 대(對)하여 항전(抗戰)을 명령(命令)할 뿐이며 서남안지방(西南岸地方)으로부터 수로(水路)로 식량(食糧)과 기타(其他) 물자(物資)를 운수(運輸)해다 안락(安樂)한 생활(生活)을 계속(繼續)하였다.

고종(高宗) 사십오년(四十五年)에 최씨(崔氏)와 삼별초군(三別抄軍)사이에 틈이 생김을 이용(利用)하여 삼별초(三別抄)를 시켜서 최씨(崔氏)를 멸(滅)하니 최씨(崔氏)는 四世 六十餘年만에 亡하고 王이 直接 政治를 맡아보게 됨에 마침내 몽고(蒙古)에 굴복(屈服)하고 왕자(王子)를 보내어 화친(和親)하기를 청(請)하니 원(元)나라(몽고(蒙古)) 세조(世祖) 홀필열(忽必烈)이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 왈(曰) 고려(高麗)는 만리(萬里)의 나라이라 당태종(唐太宗)이 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왕자(王子)가 오니 이는 하늘이 시킴이라 하고 후(厚)히 접대(接待)하고 군사(軍士)로 호위(扈衛)시켜서 본국(本國)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동안에 고종(高宗)이 승하(昇遐)하고 왕자(王子)가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가 원종(元宗)이다. 원종(元宗)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겨우 끝나고 그 뒤를 정리(整理)하는 가장 복잡(複雜)한 때라 첫째로 삼십년(三十年)동안 도읍(都邑)하던 임시수도(臨時首都) 강화도(江華島)로부터 송경(松京)에 환도(還都)한 것이오 둘째로 환도(還都)한 뒤 삼별초(三別抄)가 반란(叛亂)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내려가서 관군(官軍)과 싸우다가 패(敗)하여 다시 제주도(濟州道)에 들어가더니 마침내 관군(官軍)에게 망(亡)하였다.

이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에 대(對)하여 지금의 어떤 학자(學者)는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으로써 몽고(蒙古)에 항전(抗戰)하는 의거(義擧)라 하여 찬양(讚揚)하고 있으나 삼별초(三別抄)는 원래(元來) 최씨(崔氏)의 수족(手足)으로써 몽고란(蒙古亂)중 가장 안락(安樂)한 도중(島中)생활(生活)을 하고 항적(抗敵)의 진(陣)에 참가(參加)한 일이 없고 최씨(崔氏)가 망한 뒤에 여전(如前)히 강화도(江華島)에 있어 육지(陸地)에 나와 싸운 일이 없었으니 이것을 항전파(抗戰派)라고 부를 수 없음은 물론(勿論)이오 환도후(還都後)에 그 조직(組織)을 고쳐서 관군(官軍)으로 개편(改編)하려하매 그들은 과거(過去)의 특수(特殊)존재(存在)로서의 특권(特權)이 상실(喪失)됨에 불만(不滿)을 품고 반란(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로 동북면(東北面)의 쌍역(雙域)에 있는 관리(官吏)들이 본국(本國)을 배반(背叛)하고 화주(和州 永興) 이북(以北)의 땅으로써 원(元)나라에 부속(附屬)한 것이다. 이로부터 원(元)나라가 고려(高麗)의 종주국(宗主國)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가 일본(日本)을 칠 터이니 고려(高麗)도 힘을 합(合)하라 하여 충렬왕(忠烈王)이 임금이 되던 해에 (단기 삼천육백칠년) 고려(高麗)에서 만든 전함(戰艦) 구백척(九百隻)으로 합포(合浦)(지금의 마산부근)를 떠나서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를 무찌르고 구주(九州)의 박다(博多)를 점령(占領)하였으나 폭풍우(暴風雨)가 일어나서 전함(戰艦)이 많이 파손(破損)되었음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그 후(後) 칠년(七年)만에 다시 몽고군(蒙古軍)과 중국(中國)의 강남군(江南軍)과 고려군(高麗軍)이 연합(聯合)하여 일본(日本)을 치러 갔으나 이번에도 대풍(大風)이 일어나서 강남군(江南軍)이 거의 전멸(全滅)하고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에 중국(中國)의 전함(戰艦)은 대개(大槪) 파손(破損)되었으나 고려(高麗) 전함(戰艦)의 파손(破損) 된 것이 극(極)히 적은 것은 백제시대(百濟時代) 이래(以來) 아국(我國)의 조선기술(造船技術)이 우수(優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려(高麗)는 백여년(百餘年)동안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는 사이에 나라 정치(政治)는 전(專)혀 원(元)나라의 의사(意思)에 의하여 행(行)하여졌다. 충렬왕(忠烈王)이후(以後)로는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의 공주(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원(元)나라 임금의 사위가 되고 그 공주(公主)가 낳은 아들이 왕위(王位)에 오르게되니 고려(高麗)왕실(王室)은 혈통적(血統的)으로도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게 되었고 임금의 시호(諡號)는 종전(從前)의 종자(宗字)를 폐(廢)하고 그 머리에 충자(忠字)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 대도(大都)에 별저(別邸)를 두고 거기 내왕(來往)이 잦으니 그 비용(費用)도 적지 아니하여 국가(國家)재정(財政)이 극(極)히 곤란(困難)하였지만 정치(政治)의 명령계통(命令系統)이 헝클어져서 본국(本國)에서 발(發)한 명령(命令)이 원(元)나라 대도(大都)로부터 저지(沮止) 당(當)하는 일도 있고 원(元)나라에 아부(阿附)하여 권세(權勢)를 얻으려 하여 본국(本國)을 무함(誣陷)하는 폐주견(吠主犬)들이 양국(兩國)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면서 정부(政府)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정령(政令)을 발(發)하는 일도 있어 나라 기강(紀綱)이 여지(餘地)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폐주견(吠主犬)들은 심지어(甚至於) 본국(本國)의 국호(國號)를 폐(廢)하고 원(元)나라의 일지방(一地方)으로 만들자는 운동(運動)까지 일어나니 충선왕(忠宣王)은 체읍(涕泣)하면서 사백년(四百年)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이 나의 몸에 이르러 떨어지게 되니 어찌 통심(痛心)한 일이 아니랴하고 이제현(李濟賢) 등(等)으로 더불어 원(元)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겨우 무사(無事)함을 얻은 일도 있었다.

이때 왕실(王室)로부터 민간(民間)에 이르기까지 원(元)나라 풍습(風習)이 흘러 들어오고 한편(便)으로는 문화(文化)의 수입(輸入)도 활발(活潑)하여 안향(安珦)이 孔子의 도상(圖像)과 유교의식(儒敎儀式)을 중국(中國)으로부터 직접(直接) 가져 온 것도 이때의 일이오 충선왕(忠宣王)은 원(元)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이루고 조맹부(趙孟頫)등(等) 대학자(大學者)들과 사귀어 한때 대륙(大陸)문화(文化)의 중심(中心)이 되었다.

 

정치(政治)의 문란(紊亂)

고려(高麗)는 농업(農業)으로써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삼았음으로 토지생산(土地生産)은 국민생활(國民生活)의 기초(基礎)가 되고 국가재정(國家財政)의 지주(支柱)가 되고 호구(戶口)의 정비(整備) 군사(軍士)의 징발(徵發) 등(等)이 모두 토지(土地)의 수수제도(授受制度)로부터 출발(出發)하였으니 국가(國家)의 흥폐(興廢), 정치(政治)의 선부(善否)가 모두 토지제도(土地制度)의 여하(如何)에 달려 있었다. 몽고란(蒙古亂) 이후(以後)로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헝클어짐을 따라 가장 먼저 폐해(弊害)를 생(生)한 것이 토지제도(土地制度)였다.

처음에 관리(官吏)의 봉급(俸給)으로써 농민(農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의 수조권(收租權)을 준 것은 다만 현물(現物) 운반(運搬)의 불편(不便)을 덜기 위(爲)한 방편(方便)에 불과(不過)한 것이오 그 관리(官吏)에게 토지(土地)를 준 것은 아니오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관리(官吏)와 농민(農民)과의 사이에 신분적(身分的)으로 노주관계(奴主關係)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토지(土地) 생산물(生産物)의 십분일(十分一)을 관리(官吏)에게 주면서도 부역(賦役)이나 호세(戶稅)는 국가(國家)에 바친 것이니 이것은 다른 나라의 봉건사회(封建社會)의 농노제(農奴制)와는 그 성질(性質)이 전연(全然) 다르다.

그런데 국가(國家)의 질서(秩序)가 한번 헝클어지자 권신(權臣) 귀족(貴族) 토호(土豪)들은 그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농민(農民)에 대(對)하여 국가(國家)의 호구장(戶口帳)에서 삭거(削去)하고 국가(國家)에 바쳐야 할 부역(賦役)과 호세(戶稅)를 자기(自己)가 사취(私取)하니 국가(國家)의 공민(公民)의 수(數)는 날로 줄어들고 이 까닭에 호적(戶籍)이 헝클어지고 또 토지수수법(土地授受法)이 제대로 실행(實行)되지 못함으로 인(因)하여 병역(兵役)을 부담(負擔)할 장정(壯丁)의 수(數)도 알 수 없이 되었다.

한편(便)으로 간인(奸人)의 무리가 함부로 농간(弄奸)을 하여 일찍 관리(官吏)가 병정(兵丁)을 들어간 일이 없이 전시과(田柴科)의 토지를 도적(盜賊)해 먹으며 아비는 공전(公田)을 사사(私私)로이 아들에게 세습(世襲)시키고 아들은 이를 은익(隱匿)하여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니 고려(高麗) 토지(土地) 一百七十餘萬結 中에서 國家의 土地帳에 남아있는 土地가 七八十萬結 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 農民 한 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에 대하여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있다고 자칭(自稱)하는 자가 六七人에 달(達)하는 일도 있어 어느 사람이 국가(國家)에서 인정(認定)한 수조권(收租權)자인지 알 수 없고 이 까닭에 농민(農民)이 지은 일년(一年) 농사(農事)는 모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전수(公田數)가 줄어들고 국가(國家)에 들어가는 전조(田租)가 또한 중간(中間)에서 횡령(橫領)되어 국가재정(國家財政)은 말할 수 없이 군색(窘塞)하였고 혹(或) 현상(賢相)이 들어 있어 이 폐해(弊害)를 그치려하되 반근착절(盤根錯節)한 권신(權臣)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농민(農民)들은 하루바삐 정국(政局)에 대변동(大變動)이 생겨서 새로운 정치(政治)가 나오기를 갈망(渴望)하였다.

세상(世上)일이 이와 같이되니 관리(官吏)의 부패(腐敗)는 극도(極度)에 달(達)하여 민재(民財)를 빼앗아 먹기를 항다반사(恒茶飯事)로 하니 이때의 사관(史官)들은 이를 평(評)하여 말하되 응견(鷹犬)을 치토(雉兎)의 장(場)에 방(放)함과 같다고 하였다.

고려(高麗)문화(文化)에 중심(中心)이 되고 있는 불교(佛敎)에도 폐해(弊害)가 생(生)하여 승려(僧侶)들은 특권(特權)을 믿고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마음대로 하고 사찰(寺刹)에서 음범(淫犯)을 행(行)하는 일도 적지 아니하여 정계(政界)와 함께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불만(不滿)을 가진 유신중(儒臣中)에는 불교(佛敎)를 배척(排斥)하는 소리가 점점(漸漸) 높아지고 유교(儒敎) 장려(獎勵)의 선진(先陣)에 나선자(者)가 안향(安珦)이다. 안향(安珦)은 中國으로 부터 孔子圖像과 유교(儒敎)의 모든 의식(儀式)을 전(傳)해오고 또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 즉(卽) 성리학(性理學)을 가져와서 후진(後進)을 가르치니 이것이 우리 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이 뿌리를 뻗은 시초(始初)이오 이어서 이색(李穡)(호(號) 목은(牧隱)) 정몽주(鄭夢周)(호(號) 포은(圃隱)) 같은 대유(大儒)를 생(生)하니 당시(當時) 정몽주(鄭夢周)는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조(祖)라 칭(稱)하였고 이 연원(淵源)이 이조(李朝)에 흘러 내려가서 성리학(性理學)의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룬 것이다.

 

 

외국(外國)관계(關係)

원(元)나라가 아세아(亞細亞) 대륙(大陸)에 대제국(大帝國)을 건설(建設)한지 八九十年에 차츰 그 힘이 기우러져서 사방(四方)에 도적(盜賊)이 일어나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는 형편(形便)이라 공민왕(恭愍王)은 세자(世子)때에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이러한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이 기회(機會)에 원(元)나라 세력(勢力)을 물리치기로 하고 왕(王)의 오년(五年)(단기 삼육팔구년)에 원(元)나라에서 고려(高麗)에 설치(設置)하여둔 정동행자(征東行者)를 파(罷)하고 전일(前日)에 원(元)나라에게 빼앗긴 동북면(東北面)의 땅과 나아가서는 요동(遼東) 등지(等地)를 도로 찾으려하여 인당(印璫)으로 하여금 압록강(鴨綠江)저편(便)의 팔참(八站)을 치고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동북면(東北面)의 쌍성(雙城) 이북(以北)을 수복(收復)하게 하니 이것은 오랜 동안 북방(北方) 민족(民族)에게 눌려서 피어나지 못하던 대고구려주의(大高句麗主義)가 다시 한번 광채(光彩)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때에 원(元)나라의 홍두적(紅頭賊)이란 도적(盜賊)의 무리 십여만명(十餘萬名)이 우리 나라에 근거(根據)를 잡으려 하여 쳐들어 왔다. 고려(高麗)로서는 뜻밖의 일이오 도적(盜賊)의 기세(氣勢)는 매우 사나웠음으로 왕(王)은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등지(等地)로 피난(避難)하니 적(賊)이 송경(松京)을 함락(陷落)시켜서 궁궐(宮闕)과 모든 재보(財寶) 문헌(文獻)이 탕진(蕩盡)하였다. 수일(數日)후(後)에 정세운(鄭世雲)이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등(等) 삼원수(三元帥)로 더불어 겨우 쳐서 파(破)하니 적(敵)의 태평(太平)은 죽고 나머지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달아났다.

왕(王)은 기어(期於)코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려하여 이성계(李成桂)등(等)으로 하여금 요양성(遼陽城)을 쳐서 떨어뜨리고 遼東의 官民에게 榜을 내 걸어 우리의 目的은 한때 잃어버린 고지(故地)를 찾으려 함에 있다하고 타일렀다. 이는 물론(勿論) 요하(遼河)까지가 본시(本是) 우리의 지경(地境)임을 말함이겠지만 이때 형편(形便)으로도 원(元) 나라가 고려(高麗)를 누르고 국경(國境)을 南으로 뻗은 반면(反面)에 백성(百姓)들은 이 분명(分明)치 않은 지경(地境)을 믿어서 전(前)날 보다도 더 북(北)쪽으로 나갔음으로 요동(遼東) 평야(平野)에 고려(高麗)사람이 많이 살아서 요양(遼陽)에 고려군민총독부(高麗軍民總督府)가 생기더니 이때 마침 고려(高麗)의 국정(國情)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그 때문에 대륙정책(大陸政策)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나라는 북(北)으로 만주대륙(滿洲大陸)과 접(接)하고 동(東)으로 일(一) 해협(海峽)을 격(隔)하여 일본(日本)과 이웃하고 있음으로 외교관계(外交關係)와 국방(國防)관계(關係)는 항상(恒常)이 두 방면(方面)에서 생겼다.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왜구(倭寇)는 고려(高麗)를 멸망(滅亡)케 한 일인(一因)이 된 대사건(大事件)이라 원래(元來) 왜구(倭寇)는 일본(日本)사람의 해적(海賊)떼로서 고려(高麗) 중엽(中葉)부터 고려(高麗)와 송(宋)나라의 해안지방(海岸地方)을 노략(擄掠)질 하여 대대(代代)로 내려오면서 약탈(掠奪) 강도(强盜)로 업(業)을 삼는 무리들이었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이르러 왜구(倭寇)가 더욱 심(甚)하여 해안지방(海岸地方)은 물론(勿論)이오 차츰 육지(陸地)로 들어오고 또 남방(南方)을 휩쓴 뒤에 북(北)으로 뻗어서 경기도(京畿道)의 강화(江華) 풍덕(豊德)같은 서울의 지척(咫尺)에까지 미쳤다.

해안지방(海岸地方) 사람들은 안도(安堵)하고 살 수 없음으로 깊이 육지(陸地)로 들어가고 양전옥답(良田沃畓)에 갈대가 무성(茂盛)하니 우리 나라에서 가장 곡식(穀食)이 많이 나는 토지(土地)는 주(主)로 연해안(沿海岸)에 있는데 해안지방(海岸地方)에 농민(農民)이 살지 못하고 모든 토지(土地)가 황무(荒蕪)로 화(化)한 까닭에 국내(國內)의 식량(食糧)이 부족(不足)하고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이 또한 군색(窘塞)하였다.

이와 같이 왜구(倭寇)가 삼십여년(三十餘年)을 계속(繼續)하는 동안에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여러 차례로 왜구(倭寇)를 대파(大破)한 일이 있고 최무선(崔茂宣)이 원(元)나라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製造)하는 방법(方法)을 배워 아국(我國) 최초(最初)의 화기(火器)를 만들어서 전라도(全羅道) 진포(鎭浦)에서 왜구(倭寇)의 배 삼백척(三百隻)을 단번(單番)에 무찌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왜구(倭寇)의 기세(氣勢)는 좀처럼 줄어들지 아니하고 우왕(禑王)때에는 왕도(王都)를 깊은 육지(陸地)로 옮기자는 議論도 일어나고 정몽주(鄭夢周)를 일본(日本)에 보내어 왜구(倭寇)를 금(禁)해 달라고 청(請)한 일도 있었으며 임진강(臨津江) 어구(於口)로부터 남안(南岸)을 거쳐 멀리 동해안(東海岸)의 함주(咸州) 해안(海岸)에 이르기까지 연장(延長) 四千里의 땅이 모두 왜구(倭寇)의 난무(亂舞)장(場)이 되었고 어떤 곳에는 연작(鷰雀)이 임목(林木)에 귀소(歸巢)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왜구중(倭寇中)에는 일본(日本) 해적(海賊)만 있는 것이 아니오 고려(高麗)사람으로서 지방관리(地方官吏)에게 불만(不滿)을 품은 자(者)와 생활(生活)이 곤난(困難)한 자(者)가 왜구(倭寇)노릇을 하는 가(假) 왜구(倭寇)도 적지 아니하여 방비(防備)가 허소(虛疎)한 곳에는 반드시 왜구(倭寇)가 출몰(出沒)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왜구(倭寇)의 대부대(大部隊)가 전라도(全羅道) 운봉(雲峰)으로 모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부하장(部下將) 동두란(佟豆蘭)과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황산(荒山) 서북(西北)에서 크게 싸워서 왜구(倭寇)의 아지발도(阿只拔都) 대장(大將)을 죽이고 그 무리를 쳐 없애니 이로부터 왜구(倭寇)의 기세(氣勢)가 꺾이어서 다시 전일(前日)과 같이 횡행(橫行)하지 못하였고 이성계(李成桂)가 개선(凱旋)하는 대로(大路)변(變)에는 백성(百姓)들이 모여 나와서 환영(歡迎)하고 최영(崔瑩)은 이성계(李成桂)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공(功)을 칭사(稱謝)하니 이에 이성계(李成桂)의 위망(威望)이 일세(一世)를 덮어서 후일(後日) 혁명(革命)의 기지(基地)를 이룬 것이다.

 

고려(高麗)의 멸망(滅亡)

공민왕(恭愍王) 말년(末年)에 원(元)나라가 북(北)으로 쫓겨가고 명(明)나라가 중원(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단기 삼천칠백일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대륙(大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두 가지 의견(意見)이 대립(對立)되었다. 최영(崔瑩)은 오래 동안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원(元)나라와 명(明)나라의 현(現) 세력(勢力)이 아직 정(定)해진 것이 아니니 우리는 원(元)나라와 사귀고 명(明)나라를 누르면서 이 기회(機會)에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여 국세(國勢)를 다시 한번 떨쳐보자 하고 이성계(李成桂)는 명(明)나라가 이미 중원(中原)을 차지하였으니 우리는 천하(天下)의 대세(大勢)에 어김없이 원(元)나라에 대(對)하던 태도(態度)로써 명(明)나라를 대(對)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主張)하니 이것이 소위(所謂)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와의 대립(對立)이다. 그러던 차(次)에 명(明)나라는 차츰 요동(遼東)을 평정(平定)하고 우왕(禑王) 십사년(十四年)에 이르러서는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 장차(將次) 압록강(鴨綠江)이쪽의 땅을 빼앗으려 하니 최영(崔瑩)이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하여 명(明)나라를 치기로 결정(決定)하니 이성계(李成桂)는 여러 번 왕(王)에게 글을 올려 반대(反對)하였다.

최영(崔瑩)은 조금도 북벌(北伐)계획(計劃)을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王)과 함께 서경(西京)으로 나가서 조민수(曹敏修)와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군사(軍士) 오만(五萬)을 거느리고 가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이성계(李成桂)에게 대군(大軍)을 주어서 그 계획(計劃)을 실현(實現)하려 한 것이 최영(崔瑩)의 일대실책(一大失策)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서 위화도(威化島) (을혜섬)에 머무는 차에 조민수(曹敏修)를 달래어 장마철에 많은 군사(軍士)가 강(江)을 건너가기 어렵고 또 명(明)나라는 새로 일어나서 그 강대(强大)한 기세(氣勢)를 대적(對敵)하기가 쉽지 아니하니 여기서 회군(回軍)하는 것이 옳다하고 풍우(風雨)같이 서경(西京)을 향(向)하여 행진(行進)하니 이것은 분명(分明)히 왕명(王命)을 거역(拒逆)하는 일이라 군사중(軍士中)에서는 벌써 목(木)자(子) 득국(得國)이라는 요언(謠言)이 성행(盛行)하고 최영(崔瑩)은 왕(王)과 함께 형세(形勢)가 이미 틀리고 이성계(李成桂)의 손에 잡혀 죽으니 국인(國人)이 최영(崔瑩)의 죽음을 듣고 도하(都下)가 모두 철시(撤市)하여 조(弔)하고 원근(遠近)의 남녀노소(男女老少) 없이 모두 서로 붙들고 울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의 아들을 세우니 이가 창왕(昌王)이다. 이로부터 이성계(李成桂)가 권세(權勢)를 한 손에 잡고 안으로는 그의 반대파(反對派)를 몰아내고 밖으로는 명(明)나라와 친(親)하여 고려(高麗)의 운명(運命)은 이미 조석(朝夕)으로 보전(保全)하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 공민왕(恭愍王)때에 승(僧) 신돈(辛旽)을 써서 국정(國政)을 맡겼다가 실정(失政)을 보고 신돈(辛旽)을 죽였는데 우왕(禑王)은 혹(或)은 공민왕(恭愍王)의 아들이라 하고 혹(或)은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왕실(王室)을 중심(中心)으로 기괴(奇怪)한 풍설(風說)이 크게 유행(流行)하니 우왕(禑王)을 왕대(王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왕대(王代) 조정(朝廷)을 지지(支持)하려는 사람이오 신대(辛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이성계(李成桂)를 중심(中心)으로 한 혁명파(革命派)이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을 신대(辛代)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그 아들 창왕(昌王) 또한 신대(辛代)의 혈통(血統)이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왕대(王代)중에서 가장 암약(暗弱)한 공양왕(恭讓王)을 세우니 이때로부터는 이미 이성계(李成桂)의 천하(天下)가 되고 만 것이다.

고려(高麗)의 전제(田制)는 문란(紊亂)할대로 문란(紊亂)하여 이를 사무적(事務的)으로 바로잡을 수 는 없었다. 이에 조준(趙浚) 등(等)이 사전(私田) 개혁(改革)을 주장(主張)하여 훈신(勳臣) 귀족(貴族)들의 맹렬(猛烈)한 반대(反對)가 있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이 이를 지지(支持)하여 고려(高麗)가 망(亡)하기 전(前)해인 공양왕(恭讓王) 삼년(三年)에 옛날의 과전제(科田制)를 부활(復活)하는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斷行)하고 사전(私田) 문권(文券)을 서울의 한 복판에 쌓아 놓고 만민(萬民) 환시중(環視中)에 불살라 버리니 이로써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은 농민(農民)들의 환영(歡迎)을 받고, 한편(便) 묵은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을 무너뜨리어 세력(勢力)은 더욱 커지고 또 국가(國家)의 재원(財源)을 넉넉하게 하여 이씨조선(李氏朝鮮) 건국(建國)의 경제적(經濟的) 기초(基礎)를 삼았다.

우리 나라 의복(衣服) 자료(資料)는 마포(麻布)가 가장 주(主)되고 그밖에 중국(中國)으로부터 수입(輸入)되는 면포(綿布) 등(等)이 있고 농촌(農村)의 세민층(細民層)은 구피(狗皮)를 입는 자(者)도 적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중(中) 공민왕(恭愍王)때에 문익점(文益漸)이 중국(中國)에 갔다가 교지(交趾베트남)로부터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가져오는데 이때 원(元)나라에서는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외국(外國)에 보내는 것을 엄금(嚴禁)하고 있었음으로 문익점(文益漸)은 필관(筆管)속에 비밀(秘密)히 넣어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우리 나라 면화(棉花) 재배(栽培)의 시초(始初)이며 고려(高麗)가 망(亡)할 무렵에 전국(全國)에 퍼져서 우리 나라 의복계(衣服界)에 일(一) 신기원(新紀元)을 그었던 것이다.

고려(高麗)의 왕실(王室)을 지켜가고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을 눌러 보려고 하는 사람들 중(中)에 그 중심(中心) 인물(人物)은 정몽주(鄭夢周)였다. 그러나 정몽주(鄭夢周)는 일개(一個) 문신(文臣)이라 아무 무력적(武力的) 실력(實力)이 없더니 공양왕(恭讓王) 사년(四年)에 이성계(李成桂)가 해주(海州)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상(傷)하였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이를 기회(機會)로 이성계(李成桂)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송경(松京)에 돌아오고 그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자객(刺客) 조영규(趙英珪)를 보내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鄭夢周)를 처 죽였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고려(高麗)의 운명(運命)도 이와 함께 다 하였다. 그해 칠월(七月)에 이성계(李成桂)는 공양왕(恭讓王)을 폐(廢)하여 원주(原州)로 내치고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이태조(李太祖)이오 (단기 삼천칠백이십오년) 임신(壬申) 고려는 삼십사왕(三十四王) 四百七十五年으로 끝마쳤다.

高麗時代는 三國時代의 무용(武勇)의 유풍(遺風)이 있어 능(能)히 계단(契丹) 몽고(蒙古) 홍건적(紅巾賊) 왜구(倭寇)와 같은 대적(大敵)을 막아 싸우니 당시(當時)의 유물(遺物)로서 건축(建築)에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조각(彫刻)에 은진(恩津)의 미륵불(彌勒佛) 등(等)은 미술(美術)로도 유명(有名)하거니와 그 굳세고 힘찬 모습은 그때 사람의 기질(氣質)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엽(末葉)에 이르러 종래(從來)에 국난(國難)이 있을 때는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진(陣)의 선두(先頭)에 나서던 진실(眞實)한 풍(風)이 없어지고 세력(勢力)이 있는 자(者)들이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하는 풍(風)이 생(生)하니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에 유학(儒學)을 배우는 학생(學生)들이 우리는 공자묘(孔子廟)를 지키는 유생(儒生)들이니 전쟁(戰爭)에 나갈 수 없다고 정부(政府)에 청원(請願)한바 그때 정승(政丞) 염제신(廉悌臣)이 엄책(嚴責)하여 왈(曰) 국난(國難)이 있을 때에 귀족(貴族)자제(子弟)들이 먼저 칼을 잡고 나가는 것은 조종(祖宗) 이래(以來)의 상규(常規)라 너희들이 공자묘(孔子廟)를 빙자(憑藉)하는 것은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함이라 너희들이 지키지 아니하면 공자묘(孔子廟)가 어디로 도망(逃亡)가느냐 하고 일제(一齊)히 전쟁(戰爭)에 내어 보낸 일이 있으니 이것이 고려(高麗)사람의 기질(氣質)의 변함이오 이 변화(變化)한 기질(氣質)이 이조(李朝)에 상속(相續) 되었다.

고려사회(高麗社會)의 부패(腐敗)는 혁명(革命)을 불렀고 혁명(革命)은 사회발전(社會發展) 과정(科程)에 있어서 일대(一大) 청신제(淸新劑)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는 공민왕(恭愍王) 삼년(三年)에 이미 전제(田制)를 개혁(改革)한 뒤에 자기(自己)가 국왕(國王)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정치개혁(政治改革)에 대(對)한 주장(主張)을 내 세운 것이 없고 다만 왕대(王代) 사직(社稷)을 빼앗으려는 권력(權力) 다툼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조신중(朝臣中)에는 이성계(李成桂)의 혁명(革命)에 대(對)하여 강렬(强烈)한 반대(反對)를 한 자(者)가 적지 아니하고 그 중(中)에는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에 숨어서 일생(一生)을 이씨(李氏)의 앞에 무릎을 굴(屈)치 안한 자(者) 있으니 이를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한다.

칠십이현(七十二賢)과 그 자손(子孫)들은 이씨(李氏)에 복(服)하지 아니하고 혹(或)은 유기(柳器) 피혁장(皮革匠)등 천업(賤業)을 하는 자(者)도 있고 혹(或)은 상업(商業)에 몸을 던져 송경(松京)과 연안(延安) 배천(白川)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는 자(者)도 있었으니 지금의 개성(開城) 사람의 상업술(商業術)이 일국(一國)에 유명(有名)하고 개성상업부기(開城商業簿記)가 서양식(西洋式) 부기(簿記)와 병칭(倂稱)되고 있는 것은 당시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의 창안(創案)으로 된 까닭이라 한다.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임신(壬申)

기묘(己卯)

신사(辛巳)

기해(己亥)

신미(辛未)

계유(癸酉)

7

2

18

32

2

3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인종(仁宗)

병자(丙子)

기축(己丑)

경유(庚酉)

을묘(乙卯)

병인(丙寅)

을사(乙巳)

13

1

25

11

39

1

명종(明宗)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병오(丙午)

무진(戊辰)

을유(乙酉)

계해(癸亥)

경인(庚寅)

경자(庚子)

22

41

14

27

10

15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

을묘(乙卯)

신축(辛丑)

을사(乙巳)

정유(丁酉)

신유(辛酉)

을미(乙未)

46

4

52

24

34

15

철종(哲宗)

광무황제(光武皇帝)

융희황제(隆熙皇帝)

 

 

 

경술(庚戌)

갑자(甲子)

정미(丁未)

 

 

 

14

44

4

 

 

 

이조(李朝)역대표(歷代表)

 

비고(備考)

一. 고려(高麗)왕실(王室)이 없어진 것은 태조(太祖)가 한양(漢陽)에 이도(移都)하니 전(全) 백성(百姓)이 송경(松京)에 회귀(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태종(太宗)이 부하(部下)로 하여금 망월대(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개국(開國)초(初)에 무국호(無國號)하여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라 칭(稱)하고 명국(明國)에서 태조(太祖)가 왕위(王位)에 오름을 승낙(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조선(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조선(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이조(李朝)는 명(明)의 아유국(阿諛國))

三. 태조(太祖)는 백성(百姓)을 위하여 혁명(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일생(一生)에 왕위(王位)를 차지하려고 명국(明國)에 아유(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이태조(李太祖)는 명(明)에서 명령(命令)하면 모두 응(應)하였다.

 

이조(李朝)건국(建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선조(先祖)는 본시(本是) 함경도(咸鏡道)에 살았는데 그 고조부(高祖父)가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하고 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 경흥(慶興)에 살더니 태조(太祖)의 어버이 이자춘(李子春)은 영흥(永興)에 살고 거기서 태조(太祖)를 낳으니 이때 영흥(永興)은 쌍성총독부(雙城總督府)로 되어 원(元)나라에 속(屬)하였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유인우(柳仁雨)가 쌍성(雙城)을 칠 때에 이자춘(李子春)이 이를 도와서 공(功)이 있었음으로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 겸(兼)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함주(咸州)를 중심(中心)으로 하여 큰 세력(勢力)을 가졌고 이때 태조(太祖)는 나이 젊었으나 특출(特出)한 무예(武藝)가 있었음으로 함주(咸州) 이북(以北)에 살고 있는 여진족(女眞族)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으며 후일(後日)에 태조(太祖)가 자주 큰 공(功)을 세운 것도 그 수하(手下)에 동두란(佟豆蘭) 이하(以下) 여진(女眞) 출신(出身)의 맹장(猛將)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 한다.

태조(太祖)가 건국(建國)한 이듬해에 국호(國號)를 고쳐서 조선(朝鮮)이라 하고 삼년(三年) 후(後)에 도읍(都邑)을 지금의 서울에 옮기고 경복궁(景福宮)을 짓고 성(城)을 쌓아서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다.

 

 

이조(李朝)정치(政治)

一. 토지제도(土地制度)이니 고려시대(高麗時代)는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장정(壯丁)에 따라서 수수(授受)하더니 태조(太祖)가 공민왕(恭愍王) 삼년(三年)에 개혁(改革)한 전제(田制)는 다만 사전(私田)을 폐(廢)하고 과전제(科田制)를 부활(復活)한 것이 고려(高麗)의 전제(田制)와 같을 뿐이오 토지(土地)를 농민(農民)에게 분배(分配)한 것은 장정(壯丁) 수수(授受)제(制)가 아니라 대개(大槪) 농민(農民)이 현재(現在) 경작(耕作)하고 있는 토지(土地)를 그 농가(農家)에 주는 것을 원칙(原則)으로 한 까닭에 각(各) 농가(農家)의 경작면적(耕作面積)에 많고 적은 차이(差異)가 생겼다.

그러므로 토지(土地)는 비록 고려(高麗)의 국유제(國有制)를 그대로 계승(繼承)하고 있으나 각(各) 농가(農家)의 경지(耕地)는 영구(永久) 경작권(耕作權)의 형태(形態)로 되어 있어 그 속에 후일(後日) 사유지(私有地)로 될 싹을 포장(包藏)하고 있으며 그 경작지(耕作地)는 국법(國法)에 의하여 자유(自由)로 매매(買賣) 전당(典當)하는 것을 금(禁)하고 있으나 이것은 완전(完全)히 국유제(國有制)가 사유제(私有制)로 변(變)해 넘어가는 과도기적(過渡期的) 형태(形態)이었다.

二. 高麗는 佛敎로서 국교(國敎)를 삼고 각지(各地)에 수다(數多)한 사찰(寺刹)을 세우고 왕실(王室)로부터 민간(民間)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식(儀式)은 불교식(佛敎式)을 썼다. 그러나 말엽(末葉)에 이르러 불교(佛敎)의 폐(廢)가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이조(李朝)는 불교(佛敎)를 극도(極度)로 배척(排斥)하여 사찰(寺刹)의 대부분(大部分)을 헐어버리고 사찰토지(寺刹土地)를 몰수(沒收)하고 유교(儒敎)로서 국교(國敎)를 삼고 특(特)히 중국(中國)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을 존숭(尊崇)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依)하여 집마다 가묘(家廟)를 만들게 하고 정주학(程朱學) 이외(以外)의 학문(學文)은 모두 이단(異端)이라 하여 일체(一切)로 용납(容納)치 못하게 하였다. 인위적(人爲的) 국민사상(國民思想) 통일(統一)의 결과(結果)는 학풍(學風)이 편협(偏狹)하여 배타성(排他性)이 강(强)하고 사상(思想)의 침체(沈滯)를 초래(招來)하여 생발(生發)의 기(氣)가 없었다.

三. 고려(高麗)에 무신횡포(武臣橫暴)의 폐(弊)가 크고 이성계(李成桂) 자신(自身)도 무신(武臣)으로써 왕대(王代)의 사직(社稷)을 빼앗았음으로 이조(李朝)는 무신(武臣)을 누르고 문신(文臣)을 높여서 국가대사(國家大事)는 전(專)혀 문신(文臣)의 손에 의(依)하여 행(行)하니 이 까닭에 사회(社會)는 문약(文弱)에 빠져서 외적(外敵)이 쳐들어오면 나아가 막을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恒常) 퇴굴(退屈)하였으며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는 물론(勿論)이오 그 일문(一門)까지도 병역(兵役)을 면제(免除)하고 오직 무세무력(無勢無力)한 한문미족(寒門微族)의 사람들만 군병(軍兵)으로 만들었다.

四. 혁명(革命)을 일으킨 이론(理論)이 광명정대(光明正大)치 못하여 고려유민(高麗遺民)들의 반대(反對)가 강열(强烈)하였음으로 이조(李朝)는 왕대부흥운동(王代復興運動)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건국(建國)한지 삼년(三年)에 전국(全國)의 왕대(王代)를 노소(老少)없이 모두 잡아서 학살(虐殺)하니 이때 왕대(王代)를 강화도(江華島)와 남해(南海) 여러 섬에 보내어 안주(安住)시킨다 하고 배에 싣고 들어가다가 물 속에 넣어 죽인 자(者)도 팔백여명(八百餘名)이오 개성(開城)으로부터 이북(以北)의 평안도지방(平安道地方)에 사는 왕대(王代)들은 모두 도망(逃亡)하여 요동(遼東)으로 들어가니 지금 만주(滿洲)지방(地方)에 다른 성(姓)보다 특(特)히 왕대(王代)가 많은 것은 이 까닭이라 하며 외국(外國)으로 도망(逃亡)할 수 없는 왕대(王代)들은 성자(姓字)를 고쳐서 옥(玉) 전(全) 전(田) 차(車) 등(等)으로 변(變)하니 혁명후(革命後)에 전조(前朝) 왕족(王族)을 일인(一人)도 남기지 아니하고 학살(虐殺)한 것은 아국(我國)유사(有史) 이래(以來) 오직 이조(李朝)뿐이었다. 한편(便)으로 황해도(黃海道) 평안도(平安道) 지방(地方)에서 왕대(王代)를 받들고 반란(叛亂)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개성(開城) 이북(以北)의 사람을 조정(朝廷)의 대관(大官)에 쓰지 아니하고, 함경도(咸鏡道)는 자기(自己)의 출신(出身)지방(地方)이다.

인성(人性)이 강(强)하고 만일 대용(大用)하면 이씨(李氏) 조정(朝廷)에 불리(不利)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역시(亦是) 대관(大官)에 쓰지 아니하니 이 까닭에 이조(李朝) 오백년(五百年)동안에 서북인(西北人)은 사로(仕路)가 막힌 것이다.

五. 고려(高麗) 말엽(末葉)에 정치(政治)가 문란(紊亂)하여지자 권신(權臣)귀족(貴族)들은 국가(國家)의 관리(官吏)에 정원(定員)이 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마음대로 자기(自己) 친척(親戚)이나 특수관계(特殊關係)가 있는 者를 관리(官吏)로 쓰게되어 정원수(定員數)의 배(倍) 이상(以上)을 초과(超過)하였는데 이조(李朝) 개국후(開國後)에 관리(官吏)의 수(數)를 줄이고 관리(官吏)를 개체(改替)하려하였으나 만일 그 때문에 인심(人心)이 불안(不安)하여 동요(動搖)가 생기면 이씨(李氏) 정권(政權)의 유지(維持)에 불리(不利)할까 염려(念慮)하여 관리(官吏)의 수(數)도 줄이지 못하고 주요(主要)한 자리 외(外)에는 개체(改替)하지도 못하니 이 까닭에 재정(財政)이 곤란(困難)하고 따라서 관리(官吏)의 봉급(俸給)은 생활비(生活費)를 충족(充足)치 못하였고 이것이 이조(李朝) 오백년(五百年)동안을 통(通)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많이 생긴 주인(主因)이 되었다. (관리(官吏)수(數)가 많으면 이조시대(李朝時代)의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생긴다.)

六. 고려(高麗)의 문은 귀족(貴族)이 이미 없어지고 이씨(李氏)에 친부(親附)한 자(者)가 신귀족(新貴族)이 되었는데 이씨(李氏) 조정(朝廷)은 아직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어느 한 구석에서 어떠한 사건(事件)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음으로 이들 신귀족(新貴族)을 특별(特別) 대우(待遇)하고 민재(民財)를 빼앗아 먹는 것을 묵인(黙認)하기까지 하고 李氏에게 모반(謀反)하는 일을 고발(告發)하라고 장려(獎勵)하여 후(厚)한 상(賞)을 주었으니 이것이 이조(李朝) 일대(一代)에 귀족(貴族)의 횡포(橫暴)와 고발(告發)의 폐습(弊習)을 조장(助長)한 일인(一因)이 되었다.

七. 이조(李朝)가 고려(高麗)를 빼앗은 것은 사회(社會)의 발전(發展)을 위한 혁명(革命)이 아니오 다만 이씨가(李氏家)가 왕(王)노릇을 한다는 것이 주요(主要)한 목적(目的)이 되어 있으니 이것은 이대(李代) 개국후(開國後) 흔히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개국(開國)한 처음부터 추악(醜惡)한 왕위쟁탈전(王位爭奪戰)이 일어나서 오백년(五百年)동안을 끊임없이 부자(父子) 형제(兄弟) 숙질(叔姪) 등(等)의 사이에 유혈(流血)의 극(劇)을 연출(演出)한 것이다.

 

왕위쟁탈(王位爭奪)

처음에 태조(太祖)는 송경(松京)으로부터 도읍(都邑)을 옮기려하여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과 한양(漢陽)을 친(親)히 돌아본 결과(結果) 한양(漢陽)으로 옮겨왔는데 얼마 안가서 왕자(王子)의 변(變)이 일어나서 골육(骨肉)의 참혹(慘酷)한 화란(禍亂)을 자아냈다. 태조(太祖)에게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韓)씨의 소생(所生)에 육자(六子)가 있고 신덕왕후(神德王后) 강(康)씨의 소생(所生)에 방번(芳蕃) 방석(芳碩)의 이자(二子)가 있는데 태조(太祖)의 혁명(革命) 운동(運動)에 한씨(韓氏) 소생(所生)의 방원(芳遠)(태종(太宗))의 힘이 가장 크더니 한씨(韓氏)는 개국(開國)하기 전(前)에 죽고 강씨(康氏)가 왕후(王后)로 되어 자기(自己)의 소생(所生) 방석(芳碩)으로 세자(世子)를 삼으려하니 정부(政府)대신(大臣) 중(中)에는 「평시(平時)에는 장(長)을 세우고 난시(亂時)에는 공(功)을 먼저 한다.」하여 반대(反對)한 일도 있었다.

태조(太祖)는 왕위(王位)로써 국가(國家) 전체(全體)와 관련(關聯)시키지 아니하고 이씨가(李氏家)의 사사(私事)로 생각하여 그 사랑하는 강씨(康氏)의 소생(所生) 방석(芳碩)으로써 세자(世子)를 삼으니 한씨(韓氏) 소생(所生)의 여러 형(兄)들이 불평(不平)을 품고 그 중(中)에서도 개국(開國)의 공(功)이 있는 방원(芳遠)의 불만(不滿)이 가장 컸다.

이때 세자(世子) 방석(芳碩)을 돕는 책임(責任)을 맡은 자(者)는 정도전(鄭道傳) 등(等)이라 정도전(鄭道傳) 등(等)은 여러 왕자(王子)가 불평(不平)을 품고있는 형세(形勢)를 살피고 태조(太祖)에게 말하여 왕자(王子)들의 병기(兵器)를 지니는 것을 금(禁)하고 다시 왕자(王子) 칠인(七人)을 칠도(七道)에 분견(分遣)하고자 하니 이는 왕자(王子)들을 방축(放逐)하려는 술책(術策)이다. 이에 방원(芳遠)은 크게 노(怒)하여 방번(芳蕃) 방석(芳碩)과 정도전(鄭道傳) 등(等)을 죽이고 방원(芳遠)의 형(兄) 방과(芳果)가 세자(世子)가 되니 태조(太祖)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분(忿)함을 참지 못하여 가장 친근(親近)한 부하(部下)를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울 근처(近處)의 산사(山寺)를 소유(逍遊)하다가 멀리 北으로 行하여 舊居인 함흥(咸興) 본궁(本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방과(芳果)가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정종(定宗)이오 정종(定宗) 원년(元年)에 한양(漢陽)은 골육(骨肉)의 변(變)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신도(新都)를 버리고 개경(開京)으로 돌아갔다. 정종(定宗)은 방원(芳遠)으로써 세제자(世弟子)를 삼으니 방원(芳遠)의 형(兄) 방간(芳幹)이 거기에 불만(不滿)을 품고 박포(朴苞)로 더불어 방원(芳遠)을 해(害)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박포(朴苞)는 잡혀서 죽고 방간(芳幹)은 토산(兎山)으로 쫓겨나갔다. 정종(定宗)이 임금이 된지 이년(二年)만에 하루는 세제(世弟)방원(芳遠)의 기색(氣色)이 수상(殊常)함을 보고 왕위(王位)를 방원(芳遠)에게 전(傳)하니 이가 태종(太宗)이다. 태종(太宗)은 즉위(卽位)한 후(後) 곧 한양(漢陽)으로 돌아왔는데 조신중(朝臣中)에는 개경(開京)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신도(新都)를 싫어하는 자(者)가 많아서 왕도(王都)가 안정(安定)치 못하더니 하루 밤에 개경(開京)궁궐(宮闕)이 전부(全部) 불에 타버리니 다시 개경(開京)으로 옮기자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太祖)가 함흥(咸興)에 들어간 후(後)에 조정(朝廷)에서는 자주 문안사(問安使)를 보내었으나 태조(太祖)는 분(忿)함이 풀리지 아니하여 오는 사람마다 죽여서 일인(一人)도 생환(生還)한 자(者)가 없으니 지금까지도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태종(太宗)이 박순(朴淳)을 보내어 태조(太祖)의 환국(還國)하기를 청(請)하고 부자간(父子間)의 천륜(天倫)의 정(情)을 극진(極盡)하니 태조(太祖)가 감동(感動)하여 돌아왔다.

박순(朴淳)의 극진(極盡)한 말의 내용(內容)을 함흥(咸興)고노(古老)들이 구비(口碑)로 상전(相傳)하는 말에 의(依)하면 「부자(父子)가 상쟁(相爭)하여 남북(南北) 이조(二朝)가 있음과 같이 국민(國民)의 눈에 보이는데 창업(創業)한지 오래되지 못하고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여 장차(將次) 무슨 변란(變亂)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 부자(父子)가 상쟁(相爭)하여 나아가 국가(國家) 만년(萬年)의 기업(基業)을 떨어뜨리랴」함이라 태조(太祖)는 이 말을 듣고 대오(大悟)하여 드디어 남환(南還)을 결의(決意)하였다 한다.

 

건설(建設)시기(時機)

태종(太宗)이 임금이 된 것은 개국(開國)한지 구년(九年)만이라 이제로부터 점차(漸次)로 건설적(建設的) 정책(政策)을 행(行)하게 되었다.

경제면(經濟面)에서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이래(以來)로 화폐제도(貨幣制度)를 여러 번 확립(確立)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태종(太宗)이 다시 착수(着手)하여 전화(錢貨)를 만들려 하였으나 그 원료(原料)되는 동(銅)이 부족(不足)함으로 주(主)로 저폐(楮幣)를 만들어 쓰게 하니 이는 지금의 지폐(紙幣)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전화(錢貨)를 신용(信用)치 않는 당시(當時) 사람들이 저화(楮貨)를 신용(信用)할 이유(理由)가 없었다. 그리하여 저폐(楮幣)의 가치(價値)가 폭락(暴落)하더니 마침내 유통(流通)이 끊어지고 전일(前日)과 같이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쓰고 오승포(五升布)를 표준(標準)으로 하니 오승포(五升布)라 함은 일정(一定)하여있는 포폭(布幅)에 경사(經絲) 사백본(四百本)을 말함이다. (한 목은 십(十) 오리 일(一)승(升)은 팔(八)목)

문화(文化) 면(面)에 있어서 특기(特記)할만한 것은 주자소(鑄字所) 설치(設置)이다. 고려(高麗)때에 활자(活字)를 만들어 쓴 일이 있었으나 그 규모(規模)가 크지 못하더니 태종(太宗) 삼년(三年)에 주자소(鑄字所)를 두고 이직(李稷) 박석명(朴錫命) 등(等)으로 하여금 동(銅)으로 많은 주자(鑄字)를 만들어 주요(主要)한 서적(書籍)을 인쇄(印刷)하여 내니 이는 우리 나라 출판문화사(出版文化史) 상(上) 획기적(劃期的) 혁명(革命)이다.

외교(外交)에 있어서는 태조(太祖)개국(開國)할 때에 명(明)나라의 승인(承認)을 얻고 해마다 많은 세폐(歲幣)를 바치기로 하였음으로 명(明)나라의 세폐(歲幣) 요구(要求)가 수량(數量)이 많고 또 가혹(苛酷)하여 특(特)히 마필(馬匹)의 요구(要求)가 더욱 심(甚)하여 매년(每年) 수천필(數千匹) 내지 만여필(萬餘匹)을 강요(强要)하고 또 축우(畜牛)까지 요구(要求)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여기에 응(應)하면 국내(國內)의 마필(馬匹)이 전부(全部) 없어질 것이오 응(應)하지 아니하면 명(明)나라로부터 어떠한 압박(壓迫)이 올지 알 수 없어서 진퇴(進退) 양난(兩難)에 빠졌다. 조신(朝臣) 중(中)에는 이를 거절(拒絶)하자고 주장(主張)한 강경(强硬) 논(論)도 있었으나 태종(太宗)은 온화(穩話)하게 이를 해결(解決)하자고 무마(撫摩)하고 명(明)나라에 대(對)하여 세폐(歲幣)를 감(減)할 것을 여러 차례로 요청(要請)하더니 얼마후(後)에 그 요청(要請)대로 실현(實現)되었다.

고려(高麗)말(末)에 극성(極盛)하던 왜구(倭寇)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태종(太宗)때에 남해안(南海岸)을 침범(侵犯)한 일이 있음으로 태종(太宗)이 위(位)를 세종(世宗)에게 전(傳)하고 대상왕(大上王)이 되었으니 자기(自己) 생전(生前)에 왜구(倭寇)의 소굴(巢窟)을 없애야 한다하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상당(相當)한 전과(戰果)를 내었으나 오래 수비(守備)하기가 어려움으로 얼마 후에 회군(回軍)하였다. (이종무(李從茂)가 변변치 못하여 一敗하여 돌아왔다.)

처음에 태종(太宗)의 장자(長子)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써 세자(世子)를 삼았으나 삼자(三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 항상(恒常) 장차(將次)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할 생각이 있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또한 천자(天資)가 개당(個儻)하여 자기(自己)보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의 재덕(才德)이 뛰어남을 알고 왕위(王位)를 그에게 넘기려하여 거짓 방탕(放蕩)하여 세자(世子)의 위(位)에서 물러나니 이씨(李氏) 개국(開國)이후 추악(醜惡)한 왕위(王位) 쟁탈전(爭奪戰)을 하는 속에서 홀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이와 같은 특이(特異)한 행동(行動)을 한 것은 일신(一身)의 영예(榮譽)보다 국가(國家) 전체(全體)를 위하는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왕위(王位)를 상양(相讓)하던 혼후(渾厚)한 풍(風)을 다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후(後)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王)이되니 이가 세종(世宗)이라 세종(世宗)은 이조(李朝) 일대(一代)를 통(通)하여 제일(第一)가는 성군(聖君)일 뿐만 아니라 아국(我國)의 역사(歷史) 전체(全體)를 통(通)하여 보아도 가장 훌륭한 인군(人君)이다.

세종(世宗)은 황희(黃憙) 허조(許稠) 등(等) 명상(名相)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함에 그 중점(重點)을 인재(人才) 문제(問題)에 두었다. 즉 어떻게 하면 인재(人才)를 많이 배양(培養)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人才)를 거용(擧用)할 수 있을까 하고 또 군왕(君王)이나 재상(宰相)의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훌륭한 인재(人才)를 얻어서 국가(國家)의 각 기관(機關)에 적재적소(適材適所)로 배치(配置)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과거(科擧)로써 인재(人才)를 취(取)하는데 그 출제(出題)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국방(國防) 문화(文化) 등(等)에 관(關)한 실제(實際) 방책(方策)으로 하고 여기에 급제(及第)한 사람은 다시 호당(湖堂)에 보내어 몇 해 동안을 자유롭게 연구(硏究)케 하니 이 까닭에 인재(人才)가 배출(輩出)하여 여러 가지 큰 사업(事業)을 행(行)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서변(西邊)과 북변(北邊)에는 여진족(女眞族)이 거주(居住)하고 있는데 국인(國人)들은 이를 야인(野人)이라 불렀다.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한 뒤에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이남(以南)의 여진족(女眞族)이 한때 모두 귀부(歸附)하였으나 이는 일시적(一時的)의 일이오 그 지대(地帶)가 우리 나라의 영토(領土)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 야인(野人)은 항상(恒常) 서북(西北) 변(邊)의 근심이 되더니 세종(世宗)은 이를 정벌(征伐)하기로 결의(決意)하고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북변(北邊)을 치게 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유한(有限)한 인력(人力)으로써 성공(成功)할 수 없는 군역(軍役)을 시작(始作)한다하여 극력(極力)으로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세종(世宗)은 굽히지 아니하고 야인(野人)을 쳐서 혹(或)은 항복(降服)받고 혹(或)은 두만강(豆滿江) 외(外)로 쫓아내고 두만강(豆滿江) 남(南)에 종성(鍾城) 경원(慶源) 회령(會寧) 경흥(慶興) 은성(穩城) 부령(富寧)의 육진(六鎭)을 새로이 세우고 경상도(慶尙道) 백성(百姓)을 옮겨서 그 지방(地方)을 채우니 발해(渤海)가 망(亡)한지 오백여년(五百餘年)에 이 지대(地帶)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 영토(領土)로 돌아왔으며 귀순(歸順)한 야인(野人)들은 혹(或)은 우리 나라 사람에 동화(同化)하고 혹(或)은 재가승(在家僧)이라는 특수인(特殊人)으로서 그 지방(地方)에 남았었다.

(함경(咸鏡)지명(地名)에 흥(興) 자(字)가 셋이 있는 것은 태조(太祖)의 고조부(高祖父)가 살았던 데를 경흥(慶興)이라 하고 정종(定宗) 태종(太宗)의 출생지(出生地)를 함흥(咸興)이라 하고 영흥(永興)은 태조(太祖)가 낫기 때문에 영흥(永興)이라고 지명(地名)을 각각 지었다. 신흥(新興)은 왜정(倭政)때 새로 지은 지명(地名))

세종(世宗)이 조세제도(租稅制度)에 대(對)하여는 칠팔년(七八年)을 고민(苦悶)하고 드디어 투표제도(投票制度)를 실시(實施)하였다.

서변(西邊)에서는 파저강(婆豬江) 기슭에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 등(等)이 웅거(雄據)하여 자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약탈(掠奪)함으로 태종(太宗)때에 갑산(甲山)의 땅을 나누어 지금의 평안도(平安道)에 여연군(閭延郡)을 두었다. 세종(世宗)때에 이르러 야인(野人)의 침입(侵入)이 잦아서 강안(江岸)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들이 안주(安住)할 수 없으니 세종(世宗)은 이를 다만 방비(防備)하느니보다 한 걸음 나아가 강(江)을 건너서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부실 계획(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강(江)건너는 명(明)나라의 영토(領土)이오 또 임목(林木)이 폐문(蔽文)하여 함부로 쳐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명(明)나라에 대(對)하던 외교(外交)로써 야인(野人)정벌(征伐)의 부득이(不得已)함을 역설(力說)하고 한편(便)으로는 비밀(秘密)히 북벌군(北伐軍)을 훈련(訓練)하고 강변(江邊)에 군량(軍糧)을 비축(備蓄)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많아서 매일(每日) 이 문제(問題)를 가지고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만일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깨지 않으면 서변(西邊) 일대(一帶)는 야인(野人)의 독무대(獨舞臺)가 될 것이니 이를 실행(實行)치 아니할 수 없고 또 이를 치자면 명(明)나라 영토(領土)에 공공연(公公然)하게 들어갈 수가 없음으로 비밀리(秘密裏)에 거사(擧事)하려는 것이다. 이 문제(問題)를 크게 떠들어서 만일 명(明)나라에 들리면 대사(大事)가 틀어질 것이니 조용히 처리(處理)하고자 타일렀다.

그러나 반대(反對)하는 자(者)들은 듣지 아니하고 연일(連日)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대노(大怒)하여 왈(曰) 야인(野人)의 침략(侵略)을 그대로 방임(放任)하자는 것은 국토(國土)를 적(賊)에게 주자는 생각이니 외교관계(外交關係)에 관(關)한 일을 공공연(公公然)하게 떠들면 국가(國家) 장래(將來)에 무슨 이익(利益)이 있느냐 하여 책(責)하고 아국(我國) 인성(人性)이 경조(輕躁)하여 반드시 국가(國家) 대사(大事)를 그르칠지로다. 하고 탄식(嘆息)하였다. 이에 모든 반대(反對)를 물리치고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야인(野人)을 치고 강(江) 이쪽에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세곳을 두니 이로써 압록강(鴨綠江) 기슭에 사군(四郡)이 이루어져서 그 후(後) 다소(多少)의 곡절(曲折)이 없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압록강(鴨綠江)이 완전(完全)히 우리 나라의 국경(國境)이 되었다.

토지(土地)의 조세제도(租稅制度)는 고제(古制)에 의(依)하여 수확량(收穫量)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을 받기로 하였으나 토지(土地)마다 매년(每年) 일정(一定)한 액수(額數)를 받는 공법(貢法)을 쓰느냐 또는 해마다 년년(年年)의 풍흉(豊凶)과 작황(作況)의 양부(良否)를 실지(實地)로 답사(踏査)하여 세액(稅額)을 정(定)하는 답험법(踏驗法)을 쓰느냐 하는 것이 전국적(全國的)으로 일대(一大) 송안(訟案)이 되었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노력(努力)을 들이면 수확(收穫)을 올릴 수 있고 또 수한재(水旱災)가 적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공법(貢法)을 환영(歡迎)하고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고 기후(氣候)의 영향(影響)을 많이 받아서 흉년(凶年)이 잦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답험법(踏驗法)을 환영(歡迎)하였다. 그리하여 공법(貢法)도 써보고 답험법(踏驗法)도 써 보았는데 공법(貢法)에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을 정(定)하는 일이나 답험법(踏驗法)에서 매년(每年)의 수확량(收穫量)을 정(定)하는 일이나 모두 실제(實際)로 간사(幹事)하는 관리(官吏)의 공정(公正)여부(與否)가 법(法)의 정신(精神)을 살리고 죽이고 하였다.

그러나 세제(稅制)를 어느 쪽으로든지 확정(確定)치 아니할 수 없음으로 세종(世宗)은 각도(各道)를 단위(單位)로 하여 각 수령(守令)과 농가(農家)로 하여금 어느 제도(制度)를 찬성(贊成)하는가를 낙점(落點)케 하니 낙점(落點)이라 함은 지금의 투표(投票)와 같은 것이다. 그 결과(結果)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의 삼도(三道)는 공법(貢法) 찬성(贊成) 자(者)가 십(十)의 팔(八)이오 경기(京畿) 강원(江原)의 양도(兩道)는 양법(兩法)의 찬성(贊成)이 대략(大略) 반반(半半)이었다. 이에 민의(民意)를 존중(尊重)히 여겨 삼남(三南)과 경기(京畿) 강원(江原)은 공법(貢法)을 쓰고 서북(西北) 삼도(三道)는 답험법(踏驗法)으로 쓰이게 하되 공법(貢法)을 쓰는 지대(地帶)에서도 토지(土地) 등급(等級)이 낮은 박토(薄土)에 대(對)하여는 재(災)를 주기로 하였다. 동일(同一)한 국내(國內)에서 지방(地方)에 따라서 상이(相異)한 법(法)을 쓴 것은 오직 민정(民情)에 맞추려 함이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오백여년(五百餘年) 전(前)옛날에 민의(民意)를 묻기 위(爲)하여 대중(大衆)의 낙점제(落點制)를 썼다는 것은 일대(一大) 기관(奇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토지제도(土地制度)에 결부제(結負制)를 편용(偏用)한 것은 제도(制度)의 문란(紊亂)을 발생(發生)시킨 일인(一因)이 되었다. 신라시대(新羅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에는 면적(面積)을 표시(表示)하는 경무제(頃畝制)와 수확량(收穫量)을 표시(表示)하는 결부제(結負制)를 병용(竝用)하니 일결(一結)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부(負)가되고 일부(一負)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이 일속(一束)이 되었다. (결(結)은 맥, 부(負)는 짐, 속(束)은 뭇)

경(頃)이라 함은 토지(土地)의 일등지(一等地)의 일결(一結)과 동일(同一)한 면적(面積)이오 경(頃)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무(畝)가된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처음에는 양제(兩制)를 병용(竝用)하다가 그 후(後)에 세액계산(稅額計算)의 편의(便宜)를 위(爲)하여 결부법(結負法)을 전용(專用)하고 이조(李朝)에 이르러 이를 답습(踏襲)하였다. 세종(世宗)때에 토지(土地)를 구등(九等)에 나누었는데 이를 결부(結負)와 경(頃)으로써 비교(比較)하여보면 일등지(一等地) 일결(一結)은 일경(一頃)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하나 구등지(九等地) 일결(一結)은 사경(四頃) 여(餘)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함으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에 따라서 경수(頃數)가 모두 다르고 따라서 그 토지(土地)를 보고 그 결수(結數)를 알 수 없으며 혹(或)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이 농민(農民)의 토지(土地)를 침범(侵犯)하되 국가(國家)의 토지장부(土地帳簿)에는 결 부 수(結負數)만 있고 그 토지(土地)의 지도(地圖)라든가 면적(面積)이든가가 기재(記載)되어 있지 아니함으로 침점(侵占)여부(與否)와 침범(侵犯)한 면적(面積)을 가고(可考)할 길이 전연(全然)없고 이 까닭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각(各) 토지(土地)의 세액(稅額)이 헝클어지기 시작(始作)하였다. (세종(世宗)이 면적(面積)을 재기 위(爲)하여 인재(人才)를 구(求)하니 인재(人才)가 없어서 면적(面積)을 재지 못하여 토지제도(土地制度)가 문란(紊亂)하였다.)

세종(世宗)은 천성(天性)이 총명(聰明)하고 또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궁중(宮中)에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학자(學者)들을 모아서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는 한편 유익(有益)한 서적(書籍)을 많이 만드니 고려사(高麗史)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농사설(農事說)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등(等)은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음악(音樂)에도 많은 관심(關心)을 가져서 해주(海州)에서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南陽)에서 경석(磬石)이 나며,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악기(樂器)를 고쳐 만들고 이어서 구악(舊樂)을 고쳐 다듬으니 지금껏 세계(世界)에 자랑이 되고 우리 나라의 아악(雅樂)은 이때에 완성(完成)한 것이다. 또 역상(曆象) 방면(方面)에도 연구(硏究)를 쌓아서 장영실(蔣英實)과 더불어 대소(大小)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앙부일귀(仰釜日晷) 등(等)을 만들고 동(銅)으로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서울과 각도(各道)에 나눠주어서 우량(雨量)을 재었다. 이는 서기(西紀)1639년(年)보다. 이백년(二百年)이 앞서서 활자(活字)와 함께 우리 문화(文化)의 자랑거리다.

또 우리 문화사(文化史)상(上) 가장 특기(特記)할만한 사업(事業)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국문(國文)의 창제(創製)이다.

세종(世宗)은 「제국(諸國)이 각기(各其) 문자(文字)가 있어서 방언(方言)을 기(記)하거늘 독(獨)히 무(無)하노라 아국(我國)의 어음(語音)이 중국(中國)과 달라서 한자(漢字)와 서로 유통(流通)치 못함으로 우민(愚民)이 언(言)코자 함이 있으되 마침내 그 정(情)을 신(伸)치 못하노라 내가 이를 민망(憫惘)히 여겨 문자(文字)를 신제(新製)하야 인인(人人)으로 하여금 학습(學習)하기 쉽고 일용(日用)에 편(便)케 하고자 하노라」함과 같이 국가의식(國家意識)의 자각(自覺)과 대중교육(大衆敎育)의 필요(必要)에 의(依)하여 국문(國文)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등(等)과 더불어 친(親)히 연구(硏究)를 거듭한 결과 그의 이십팔년(二十八年) (삼천칠백칠십구년 병인(丙寅))에 이십팔자(二十八字)를 지어내어 중외(中外)에 영포(領布)하니 이것이 오늘날 세계(世界)의 여러 문자(文字)중에서 제일(第一) 우수(優秀)한 우리 국문(國文)이다.

이때 한학사상(漢學思想)에 젖은 최만리(崔萬里)같은 무리들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성현(聖賢)의 글이 아니라 하여 쓰기를 반대(反對)한 일이 있었으나 세종(世宗)은 이를 물리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써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내는 한편 관청(官廳)의 공문서(公文書)에 이 글을 쓰게 하며 또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경전(經典)을 번역(飜譯)하여 백성(百姓)들에게 읽혔다. 민간(民間)에서는 이 글을 언문(諺文) 또는 언서(諺書)라하고 한문(漢文)을 번역(飜譯)한 것을 언해(諺解)라 하였다.

 

단종(端宗)과 세조(世祖)

세종(世宗)의 다음에 문종(文宗)은 재위(在位)한지 겨우 이년(二年)이오 그 아들 단종(端宗)이 왕(王)이 되니 나이 겨우 십이세(十二歲)이다. 그런데 당시(當時) 단종(端宗)에게는 모후(母后)가 없고 근친(近親)이라고는 숙부(叔父) 칠인(七人) 즉(卽) 수양대군(首陽大君) 以下 七人君이 있어 모두 强盛하니 國民들은 王의 장래에 대하여 모두 위구(危懼)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전일(前日)에 세종(世宗)이 승하(昇遐)하였을 때에 국민(國民)이 성군(聖君)을 잃은 것을 크게 슬퍼하였는데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하였을 때에는 그때보다도 더욱 슬퍼하니 그것은 문종(文宗)을 위(爲)한 슬픔이 아니라 어린 단종(端宗)이 보호자(保護者)가 없고 칠대군(七大君)의 힘이 강대(强大)함으로 국사(國事)가 장차(將次) 어떻게될까 근심하는 슬픔이었다.

단종(端宗) 이년(二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등(等)과 더불어 난(亂)을 일으켜, 그때 정승(政丞)으로 있는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等)을 죽이고 스스로 군국(軍國) 대권(大權)을 잡고 있더니 또 이년(二年)후(後)에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니 이가 세조(世祖)이다. 이에 단종(端宗)의 舊臣中에는 兩派로 갈려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等은 世祖에게 붙고 世祖의 行爲를 통분(痛憤)히 생각하는 성삼문(成三問) 박팽연(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等)은 세조(世祖)를 몰아내고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려 하다가 미연(未然)에 발각(發覺)되어 그 가족(家族)및 연루(連累)자(者)들과 함께 사형(死刑)을 당(當)하고 단종(端宗)은 노산군(魯山君)으로 내려서 영월(寧越)로 귀양가더니 이듬해에 세조(世祖)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에서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일으키다가 패(敗)하여 죽고 단종(端宗)도 또한 세조(世祖)에게 해(害)된 바 되었다.

세조(世祖)는 왕위(王位)를 억지로 얻었으나, 정치(政治)를 잘하여 성장기(成長期)에 있는 이조(李朝)를 힘써 배양(培養)하였다. 왕(王)은 억불정책(抑佛政策)을 늦추어서 서울 안에 원각사(圓覺寺)를 짓고 십삼층탑(十三層塔)을 쌓으며 刊都監을 두어서 佛經을 많이 박아내었다.

특히 民間의 弊害를 없애기에 努力하여 백성(百姓)들이 억울(抑鬱)한 일이 있는 때는 직접(直接)으로 왕(王)에게 상서(上書)하게 하고 비록 세력(勢力)이 있는 자(者)라도 민폐(民弊)를 짓는 자(者)는 용서(容恕)함이 없이 처벌(處罰)하였다.

(권람(權擥)은 권근(權近)의 손자(孫子)라 권근(權近)은 고려(高麗) 신하(臣下)로써 이씨(李氏) 득국(得國)함에 귀화(歸化)하였다. 처음에는 태조(太祖)가 써먹기 위하여 잘 대우(待遇)하더니 이씨(李氏)가 완전(完全)히 득국(得國)하니 권근(權近)을 절개(節槪)없는 신하(臣下)라고 물리치니 노말년(老末年)에 분(忿)함을 참지 못하였다. 이를 손자(孫子)가 알고 단종(端宗)이 임금이 되어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빼앗는다는 것을 듣고 이에 참여(參與)하여 이씨(李氏)끼리 싸우라는 내용(內容)계획(計劃)을 세웠다. 그러니 고려(高麗) 신하(臣下)가 이조(李朝) 집안끼리 싸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육신(死六臣)은 다만 단종(端宗)이 왕위(王位)에 오르면 세조(世祖)보다 정치(政治)를 잘한다하여, 또 나라를 위(爲)하여 단종(端宗)을 받든 것이 아니라 단종(端宗)에만 충성(忠誠)한 것이다. 세조(世祖)가 한 일은 무리(無理)가 아니고 당연(當然)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설(說)도 있다.)

당시(當時) 민폐(民弊)의 가장 큰 자(者)는 방납(防納)이니 방납(防納)이라 함은 백성(百姓)이 국가(國家)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상인(商人)이나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이 대납(代納)하는 것이다. 당시(當時)의 백성(百姓)이 국가(國家)에 대한 부담(負擔)의 의무(義務)에는 토지생산(土地生産)의 일부(一部)를 바치는 조세(租稅), 각(各) 지방(地方)에서 산출(産出)되는 특산품(特産品)을 바치는 공물(貢物), 병역(兵役), 축성(築城), 운수(運輸) 등(等)에 종사(從事)하는 부역(賦役)의 세 가지가 있었다.

공물(貢物)은 전국(全國) 각(各) 군(郡)을 단위(單位)로 하여 바치는 것인데 예(例)컨대 해변(海邊) 군(郡)은 어물(魚物) 해초(海草) 등등(等等) 산간(山間) 군(郡)은 모피(毛皮) 약재(藥材)등(等) 평야(平野) 군(郡)은 연초(煙草) 과실(果實) 명유(明油)등(等) 전주(全州)의 지(紙), 해주(海州)의 묵(墨), 갑산(甲山)의 산삼(山蔘), 강원도(江原道)의 청밀(淸蜜), 전라도(全羅道) 죽물(竹物) 등(等)이오 정부(政府)에서 수백종(數百種)의 산물(産物)을 각군(各郡) 산출액(産出額)과 호구수(戶口數)를 참작(參酌)하여 각도(各道)에 배정(配定)하고 도(道)는 군(郡)에 배정(配定)하고 군(郡)은 백성(百姓)의 각(各)에 배정(配定)하며 백성(百姓)이 자기(自己)에게 배정(配定)된 공물(貢物)을 군수(郡守)에게 바치면 군(郡)의 이서(吏胥)들이 그것을 검사(檢査)하여 수납(收納)하니 당시(當時) 공물(貢物)의 부담(負擔)은 조세(租稅)보다 몇 배나 중(重)하고 검사(檢査)에 불합격(不合格)되면 다시 호품(好品)을 구득(求得)하지 아니하면 안되므로 백성(百姓)의 손해(損害)가 적지 아니하였고 이서(吏胥)들은 백성(百姓)의 약점(弱點)을 승(乘)하여 비록 호품(好品)이라도 불합격(不合格)으로 퇴각(退却)하고 상인(商人)과 결탁(結託)하여 백성(百姓)으로부터 시가(時價)의 이삼배(二三倍)를 걷어서 그 물품(物品)을 대납(代納)하고 차액(差額)되는 이익(利益)을 분식(分食)하는 것이다.

대저(大抵) 이조(李朝)의 이서(吏胥)는 행정상(行政上) 한 특수계급(特殊階級)으로 존재(存在)하였다. 이서(吏胥)는 원래(原來) 국가(國家)의 관리(官吏)가 아니오 각군(各郡)의 행정사무(行政事務)를 돕는 사무원(事務員)으로서 아무런 봉급(俸給)이나 보수(報酬)를 받지 아니하는지라 이조개국(李朝開國) 초(初)에는 사무(事務)는 다단(多端)하되 생활비(生活費)를 얻을 길이 없음으로 고역(苦役)과 궁곤(窮困)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逃亡)하는 자(者)도 적지 아니하더니 그 후(後)에 백성(百姓)들로부터 횡렴(橫斂)하는 곡경(曲逕)을 발견(發見)하고 또 소위(所謂) 군수(郡守) 현령(縣令)은 그 지방(地方)의 실정(實情)을 잘 알고 있는 이서(吏胥)의 힘을 받지 아니하면 군정(郡政)을 행(行)할 수가 없음으로 군행정(郡行政)의 실권(實權)은 전(全)혀 이서(吏胥)의 손에 쥐여있었고 더욱이 전국(全國) 삼백여군(三百餘郡)에는 모두 그 지방(地方) 출신(出身)의 이서(吏胥)가 있어 국가(國家)에서 임명(任命)한 수령(守令)과 백성(百姓)의 중간(中間)에 개재(介在)하여 사무계급(事務階級)으로써 일대세력(一大勢力)을 형성(形成)하고 있어 수령(守令)은 물론(勿論)이오 중앙정부(中央政府)에서도 그 세력(勢力)을 무시(無始)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서(吏胥)들이 공물(貢物) 검사(檢査)를 하게되니 그 합검(合檢) 불합검(不合檢)은 전(專)혀 그들의 일구일필(一口一筆)에 달려 있고 거기에 따라서 방납제(防納制)가 생기게 되니 백성(百姓)에게 끼치는 폐해(弊害)는 실(實)로 막대(莫大)하고 세조재야(世祖在也)하는 동안은 엄격(嚴格)하고 과단(果斷)있는 행정(行政)으로 능(能)히 이 폐해(弊害)를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임금 때로부터 점점 부활(復活)되고 말았다.

세종(世宗)이 육진(六鎭)을 건설(建設)한 뒤에 야인(野人)들의 침략(侵略)이 그치지 아니 하고 단종(端宗) 때에는 그 세력(勢力)이 더욱 성(盛)하였음으로 조신(朝臣) 중(中)에는 육진(六鎭)을 포기(抛棄)하자는 비굴(卑屈)한 논자(論者)도 있어 한동안 서로 의론(議論)을 다투었다. 세조(世祖)가 왕(王)이 된 뒤에 처음에 압록강(鴨綠江)기슭의 사군(四郡)을 폐(廢)하고 야인(野人)들을 무마(撫摩)하기로 하였으나 갈수록 그들의 버릇이 사나워 짐으로 세조(世祖)는 회령(會寧)을 엿보는 야인(野人)을 쳐서 이를 두만강(豆滿江) 북쪽으로 쫓고 또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강(江) 내외(內外)의 야인(野人)의 소굴(巢窟)을 엎었으며 어유소(魚有沼) 남소(南沼) 장군(將軍) 등(等)을 시켜서 파저강(婆豬江)의 야인(野人) 괴수(魁首) 이만주(李滿住)의 부자(父子)를 잡아 죽였다.

세조(世祖)의 왕위(王位) 쟁탈(爭奪) 난(亂)은 이씨왕가(李氏王家)의 개국(開國) 초(初)부터 있은 예(例)의 골육전(骨肉戰)이오 육신(六臣)의 사(死)는 주(主)를 위(爲)한 사절(死節)이라 군주정치(君主政治) 시대(時代)에는 흔히 있는 일이오 아무런 특이(特異)한 것이 없으나 다만 이 난(亂)이 우리 나라의 정치(政治)와 인심(人心)에 미친 영향(影響)은 실(實)로 크고 또 심각(深刻)한 것이었다. 고려(高麗) 말(末)에 정몽주(鄭夢周)가 국사(國事)에 순절(殉節)하고 그 제자(弟子) 길재(吉再)(호(號)는 야은(冶隱))가 정몽주(鄭夢周)의 이학(理學) 계통(系統)을 계승(繼承)하고 그것이 김숙자(金叔慈)(호(號)는 강호(江湖))를 거쳐 김종직(金宗直)(호(號)는 점필제(佔畢齊)에게로 전(傳)하였는데 이 계통(系統)의 학(學)을 받은 유사(儒士)들은 절의(節義)에 대(對)한 관념(觀念)이 가장 강(强)하고 따라서 세조(世祖)의 행사(行事)에 대(對)하여 큰 분노(憤怒)를 품고 세조(世祖)에게 붙어서 공신(功臣)이 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等)을 극도(極度)로 미워함은 물론(勿論)이오 한명회(韓明澮) 같은 사람은 이 공로(功勞)로 국구(國舅)가 되었기 때문에 유사(儒士)들은 왕실(王室)의 외척(外戚)까지를 몹시 미워하여 이때로부터 유사(儒士) 대(對) 공신(功臣) 척리(戚里)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이 벌어져서 이래(爾來) 백여년(百餘年)동안을 정계(政界)의 대소사건(大小事件)이 주(主)로 유사(儒士)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으로부터 일어났고 필경(畢竟) 우리 사회(社會)를 망(亡)쳐버린 붕당(朋黨) 싸움의 시초(始初)인 동서분당(東西分黨)도 유사(儒士) 대(對) 척리(戚里)의 싸움에서 발단(發端)한 것이다.

또 한가지 영향(影響)은 벼슬하는 사람들이 군주(君主)에 충성(忠誠)을 다하다가 세조(世祖)의 독수(毒手)에 걸려서 무참(無慘)히 죽고 그 가족(家族)까지 학살(虐殺) 당(當)하는 것을 보고 세사(世事)의 무상(無常)함을 보고 장태식(長太息)하고 자후(自後)로는 보신지책(保身之策)에 치중(置中)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항직(伉直)한 행동(行動)을 피(避)하려 하였음으로 정계(政界)의 공기(空氣)가 인순고식(因循姑息)과 유유범범(悠悠泛泛)에 흘러서 창조(創造)와 혁신(革新)을 행(行)하려는 활기(活氣)를 전(全)혀 잃으니 이것이 이조일대(李朝一代)를 통(通)하여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이 생기지 못한 주인(主因)이 되었다.

이조개국(李朝開國) 이래(以來)로 서북인(西北人)을 쓰지 아니함으로 서북인(西北人)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혁명(革命)을 성공(成功)한 서북(西北) 맹장(猛將)들도 모두 분기(憤氣)를 품고 향리(鄕里)에 돌아갔으며 특(特)히 태조(太祖)의 아장(牙將)으로 있던 동두란(佟豆蘭)도 태조(太祖)가 성(姓)을 이씨(李氏)를 주고 청해백(淸海伯)을 봉(封)하여 특수(特殊)한 대우(待遇)를 하였으나 역시(亦是) 불만(不滿)을 품고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그 털과 상소문(上疏文)과 함께 봉(封)하여 태조(太祖)에게 올리고 도망(逃亡)하여 그 고향(故鄕)인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으로 돌아가니 태조(太祖)는 후일(後日)에 혹(或) 변(變)을 생(生)할까 두려워하여 그 가족(家族)을 한양(漢陽)으로 옮겨온 일도 있다.

그러던 中 세조(世祖)의 난(亂)이 일어나서 인심(人心)이 불안하게 되자 함경(咸鏡)사람 이시애(李施愛)가 난리(亂離)를 꾸며서 함경감사(咸鏡監司)(신숙주(申叔舟)의 아들)를 죽이고 각지(各地)에서 난민(亂民)이 일어나서 수령(守令)들을 죽였다. 세조(世祖)는 군사(軍士)를 보내어 여러 달만에 평정(平定)하고 이래백년(爾來百年)동안 함경도(咸鏡道)에 停擧를 行하였다.

 

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

세조(世祖)의 다음에 예종(睿宗)은 위(位)에 있은지 일년(一年)이오 성종(成宗)이 왕(王)이되니 이때는 이조(李朝)의 기초(基礎)가 굳어지고 또 여러 가지 제도(制度)가 갖추어졌다. 왕(王)은 유신(儒臣) 김종직(金宗直) 등(等)을 쓰고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문선(東文選)같은 책(冊)을 만들고 또 세조(世祖)때에 시작(始作)하여 끝마치지 못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完成)하니 이는 이후(以後) 수백년(數百年)동안 정치(政治)를 행(行)하는 기틀이 되었다. 집현전(集賢殿)은 세조(世祖)때에 폐(廢)하였으나 성종(成宗)은 홍문관(弘文館)을 새로이 두고 젊은 학자(學者)들을 공부(工夫)시키던 호당(湖堂)도 다시 시작(始作)하였다.

사회(社會)의 계급(階級)에는 네 층(層)이 있어 그 지위(地位)가 직업(職業)과 사회적(社會的) 대우(待遇)를 달리 하였으며 대개(大槪)는 거주지역(居住地域)도 달리하고 또 다른 계급(階級)과 혼인(婚姻)하는 일도 적었다. 여러 계급(階級) 중(中)에 가장 상층(上層)에 있는 것이 양반(兩班)이니 양반(兩班)이라 함은 동반(東班)인 문관(文官)과 서반(西班)인 무관(武官)을 합(合)한 말이다. 공경(公卿)과 사대부(士大夫) 계급(階級)을 통틀어 말함이며 이들은 정치(政治)를 지도(指導)하는 지위(地位)를 차지하여 모든 특권(特權)과 향락(享樂)을 누리었다.

그 다음에 중인(中人) 계급(階級)이 있으니 그들은 의관(醫官) 역관(譯官) 계사(計士) 관상(觀相) 율학(律學) 사자(寫字) 도화(圖畵) 등(等) 국가(國家)에 요긴(要緊)한 기술(技術) 방면(方面)의 일을 맡아보았다.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는 양반과 상민(常民)의 중간(中間)이었으며 이 밖에 이서(吏胥)와 군교(軍校) 같은 층(層)은 보다 얼마쯤 낮은 것이었으나 역시(亦是) 중인(中人) 계급(階級)에 속(屬)하였다. 그 다음에 상민계급(常民階級)은 농업(農業) 공업(工業)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수(數)가 가장 많고 또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이루고 있으나 그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가 낮아서 자기(自己)의 생존권(生存權)을 보전(保全)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양반(兩班)과 중인(中人)에게 눌리어 지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천민계급(賤民階級)은 노비(奴婢)를 비롯하여 배우(俳優) 무당(巫堂) 기생(妓生) 역졸(驛卒) 백정(白丁) 등(等)을 말하는 것이니 노비(奴婢)에는 국사(國事)에 속(屬)하는 것을 공노비(公奴婢)라하고 개인가(個人家)에 속(屬)하는 것은 사노비(私奴婢)라 하며 백정(白丁)에도 지금에 흔히 말하는 소 잡는 사람만이 백정(白丁)이 아니라 유기(柳器) 장피(匠皮) 혁공(革工) 같은 것도 모두 백정(白丁)이라 불렀고 이들은 인권(人權)을 주장(主張)하지 못함은 물론(勿論)이오 어떤 경우(境遇)에는 우마(牛馬)와 동양(同樣)의 대우(待遇)를 받았다.

외교관계(外交關係)에 있어서는 명(明)나라에 대(對)한 조공(朝貢)과 일본(日本) 남양(南陽) 등(等)에 대(對)한 교린(交隣)이 있었는데 이러한 외교(外交)의 이면(裏面)에는 인국(隣國)들과 평화(平和)로운 무역(貿易)을 행(行)하려는 것이 있었다. 명(明)나라와의 관계(關係)는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무역(朝貢貿易)을 행(行)하고 저쪽에서 사신(使臣)이 오면 이를 칙사(勅使)라 하여 특별(特別)히 대우(待遇)하였는데 조공무역(朝貢貿易)이라 함은 물공(物貢)의 형식(形式)을 통(通)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의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것으로 이는 중국(中國) 사람들의 대국연(大國然)하는 자존심(自尊心)에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 공물(貢物)의 형식(形式)으로 내어가는 물건(物件)은 금은(金銀), 인삼(人蔘), 표피(豹皮), 저포(苧布), 화문석(花紋席), 나전(螺鈿), 백지(白紙) 등(等)이었고 그 대신(代身) 저쪽에서 들어오는 것은 주(主)로 견단(絹緞), 자기(磁器), 약재(藥材), 서적(書籍) 등(等)이었으며 이밖에도 국경(國境) 지대(地帶)의 사무역(私貿易)과 밀무역(密貿易)을 통(通)하여 두 나라 사이의 물자(物資)가 많이 교류(交流)되었으니 이 시대(時代)는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비교적(比較的) 자유(自由)로 중국(中國)으로 왕래(往來)하면서 학문(學問)도 배우고 무역(貿易)도 하던 때와 달라서 공적(公的)으로 중국(中國)을 다니는 이외(以外)에는 왕래(往來)를 엄금(嚴禁)하는 쇄국시대(鎖國時代)라 물자(物資)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이 여의(如意)치 못함으로 압록강(鴨綠江) 안(岸)의 중강진(中江鎭)과 두만강(豆滿江)안(岸)에서 년(年) 일이차(一二次)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외(外)에 밀역(密易)이 연중(年中) 성행(盛行)하였다. 명(明)나라에 바치던 금은(金銀) 공(貢)은 세종(世宗)때에 외교(外交) 교섭(交涉)에 의(依)하여 면제(免除)되고 그 후(後)로는 우리 나라에서 금은(金銀)이 나지 아니함을 보이기 위(爲)하여 금은광(金銀鑛)을 폐(廢)한 일도 있었다.

일본(日本)과의 사이는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대마도(對馬島)를 친 이후(以後)로 한때 교통(交通)이 그쳤었으나 대마도(對馬島)는 산(山)이 많고 식량(食糧) 기타(其他) 물산(物産)이 적어서 우리 나라의 힘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음으로 저쪽에서 사죄(謝罪)의 뜻을 표(表)하고 다시 서로 화호(和好)하기를 간청(懇請)하였다. 이에 세종(世宗)은 삼포(三浦)를 열어서 대마도인(對馬島人)이 와서 무역(貿易)함을 허락(許諾)하니 삼포(三浦)라 함은 제포(薺浦) (지금의 창원군(昌原郡)마산방(馬山傍) 제덕리(薺德里)의 내이포(乃而浦) 부산포(釜山浦) 울산(蔚山)의 염포(塩浦)이다. 그 후(後)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어서 해마다 대마도(對馬島) 왕(王)이 보내는 배를 오십(五十)척(隻)으로 한정(限定)하며 또 미두(米豆) 이백석(二百石) 씩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무역품(貿易品)을 왜인(倭人)들은 동(銅) 은(銀) 유황(硫黃) 등(等)의 광산물(鑛産物)을 비롯하여 남양(南洋)의 특산(特産)인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등(等)을 들여오고 우리 나라에서는 면포(綿布) 마포(麻布) 미두(米豆) 백지(白紙) 서적(書籍)(특히 대장경(大藏經))을 보내었다.

여진(女眞)과의 사이에는 두만강(豆滿江) 기슭에 경성(鏡城) 경원(鏡源)의 무역소(貿易所)를 열어서 그들의 마필(馬匹)과 여러 가지 수피(獸皮) 즉(卽) 토표피(土豹皮), 초서피(貂鼠皮), 웅피(熊皮), 녹피(鹿皮)를 들여오는 대신(代身) 이쪽에서 금은(金銀), 마포(麻布), 저포(苧布), 면포(綿布), 농구(農具), 부정(釜鼎), 유기(鍮器), 백지(白紙), 염장(鹽醬), 주(酒) 등(等)을 내어 보냈으며 또 여진(女眞)의 추장(酋長)들에게 직첩(職帖)을 주어서 그 계급(階級)에 따라 서울에 와서 진상(進上) 숙배(肅拜)한 이름으로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하게 하니 이는 조공무역(朝貢貿易)의 형식(形式)을 본뜬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지금의 태평로(太平路)에 태평관(太平館)이 있어 명(明)나라 사신(使臣)들을 접대(接待)하고 동대문(東大門)안에는 북평관(北平館)이 있어 왜인(倭人)들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와서 묵을 때면 후시(後市)라는 명목(名目)으로 館所 에서 무역(貿易)이 행(行)하여 졌다. 이 밖에 유구국(琉球國)에서도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설당(雪糖), 석(錫), 서각(犀角) 등(等)의 여러 가지 진기(珍奇)한 남양산물(南洋産物)을 가져오고 우리 나라의 면포(綿布), 마포(麻布), 대장경(大藏經) 등(等)을 얻어 갔으며 섬라(暹羅)(지금의 태국(泰國))에서도 방물(方物)을 가지고 사신(使臣)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外國) 사신(使臣)이 우리 국경(國境)에 들어오면 정부(政府)에서 그들을 후대(厚待)하는 뜻으로서 서울까지 오는 비용(費用)과 서울에서 머물고 다시 돌아 갈때 국경(國境)까지 나가는 비용(費用)을 부담(負擔)하였고 그 보내는 물건(物件)도 가져온 물건(物件)의 몇배(倍)를 주었음으로 남양(南洋)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게 되었고 우리 나라의 부담(負擔)이 적지 아니하니 이는 외국(外國)이 우리 나라에 조공(朝貢)한다는 형식(形式)을 꾸미고 무역상(貿易上) 실권(實權)을 취(取)하려 함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외국(外國)의 조공(朝貢)을 받는 것을 만족(滿足)하게 생각할 뿐이오 우리 나라 사람이 해외(海外)에 나가서 무역(貿易)하는 길을 전연(全然) 폐쇄(閉鎖)하여 버리니 이 까닭에 무역관계(貿易關係)에는 항상(恒常) 손(損)을 보고 국민(國民)의 해외(海外) 웅비(雄飛)의 기상(氣象)은 날로 사라졌다.

성종(成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팔구(八九)십년(十年)이라 국가(國家)의 기초(基礎)가 굳어진 때라 점차(漸次) 보수(保守)의 경향(傾向)이 생(生)하고 모든 부면(部面)에 경화(硬化) 침체(沈滯)의 빛이 농후(濃厚)하여지니 사가(史家)들은 이를 성극시대장쇠(盛極時代將衰)의 기(期)라 한다.

특(特)히 귀족(貴族)의 세력(勢力)이 강(强)하고 반상(班常)의 구별(區別)이 엄(嚴)하며 전국적(全國的)으로 불과(不過) 삼십(三十) 내외(內外)의 족벌(族閥)이 정치(政治)를 전행(專行)하고 지방별(地方別)로는 경기(京畿) 충청(忠淸) 경남(慶南)의 삼도(三道)가 귀족(貴族) 주거(住居)의 중심(中心)이 되었다. 또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제도(制度)가 더욱 엄격(嚴格)하여 여자(女子)의 개가(改嫁)를 불허(不許)하고 재가(再嫁)녀(女)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국가(國家)가 서용(敍用)치 아니하고 귀족(貴族)들은 과부(寡婦)를 금고(禁錮)하는 것을 가내(家內)의 영예(榮譽)로 여겼으며 첩(妾)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서얼(庶孼)이라 하여 천대(賤待)하고 서자(庶子)들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니 이 서자(庶子)는 소위(所謂) 그 아비된 자(者)가 향락(享樂)과 음욕(淫慾)의 만족(滿足)을 얻기 위(爲)하여 생(生)긴 산물(産物)이오 모복(母腹)으로부터 낙지(落地)하는 순간(瞬間)이 이미 천대(賤待)를 받을 운명(運命)을 가졌으니 서자(庶子)의 서자(庶子)된 죄(罪)는 아비에게 있는 것이오 서자(庶子)자신(自身)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된 자(者)는 첩(妾)을 축(蓄)하는 날에 벌써 서자(庶子)의 출생(出生)할 것이 약속(約束)되었고 그 서자(庶子)가 사회(社會)로부터 천대(賤待)를 받는 것을 알면서 축첩생활(蓄妾生活)을 하는 것은 그 심신(心身)의 부패(腐敗)한 所致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오 더욱이 서자얼(庶子孼) 천대(賤待)의 제도(制度)는 축첩(蓄妾)을 가장 많이 하는 귀족계급(貴族階級)들이 만든 것이다.

세조(世祖)때에는 강력(强力)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행(行)하여 비록 간관(諫官)이라 하더라도 언론(言論)의 자유(自由)를 행(行)치 아니하더니 성종(成宗)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고 언어(言語)를 개(開)하여 간관(諫官)들의 언론자유(言論自由)를 인(認)하니 이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이 벌어졌다. 유신(儒臣)들은 세조(世祖)때에 가슴속에 쌓여 있으되 발표(發表)할 수 없었던 울분(鬱憤)이 일시(一時)에 터져 나와서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조금이라도 과오(過誤)를 범(犯)함이 있는 때는 일호(一毫)의 관용(寬容)이 없이 논박(論駁) 공격(攻擊)하고 어느 한 사람이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하면 유신(儒臣) 전체(全體)가 그를 응원(應援)하여 조정(朝廷)은 유신(儒臣)이 지도권(指導權)을 잡고 성종(成宗)도 대체(大體)로 유신(儒臣)들의 말을 청종(聽從)하였다.

이때의 유교(儒敎)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한학(漢學)과 달라서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인 성리학(性理學)을 말하는 것이니 성리학(性理學)을 또한 이기설(理氣說)이라 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제자(弟子) 가운데서 성리학(性理學)에 가장 밝은 사람은 정여창(鄭汝昌) (호(號) 일두(一蠹)) 김굉필(金宏弼)(호(號) 한훤당(寒暄堂))이니 정여창(鄭汝昌)의 이기론(理氣論)에는 「理의 在하는 바에 氣가 또한 聚하고 氣가 動하는 바에 理가 또한 着하여 彼此의 別이 없다. 그러나 理는 혼연지선(渾然至善)하여 爲함이 없고 氣는 순리청탁(醇醨(漓)淸濁)하여 運用이 있어 피차(彼此)의 別이 있으니 이를 一하되 二하고 二하되 一한다 함이다. 理가 없으면 氣가 응주(凝做)할 바가 없고 氣가 없으면 理가 流行치 못한다」하니 이것이 理氣說의 大要이다. 이 이기설(理氣說)의 새로운 이론(理論)은 청년학자(靑年學者)들 사이에 환영(歡迎)되고 李朝一代 學問의 中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였음으로 교육(敎育)과 과거(科擧)도 또한 유학(儒學)을 中心으로 하였으니 교육기관(敎育機關)으로는 서울에 성균관(成均館)(지금의 국립대학교)을 비롯하여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고 외방(外方)에는 고을마다 향교(鄕校)가 있고 마을에는 서당(書堂)이 있어 주(主)로 유교(儒敎)의 경전(經典)을 가르쳤고 이밖에 특수(特殊) 과목(科目)으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서학(書學) 화학(畵學)을 연구(硏究)하는 기관(機關)이 있고 또 한어(漢語) 여진어(女眞語) 몽고어(蒙古語) 왜어(倭語) 등(等)을 가르치는 기관(機關)도 있다.

과거(科擧)는 국가(國家)에서 인재(人才)를 취(取)하는 최고(最高) 시험(試驗)이라 태종(太宗) 세종(世宗)의 시대(時代)에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등(等) 주요(主要)한 현실문제(現實問題)에 대(對)한 논문(論文)을 시험(試驗)하더니 성종(成宗) 이후(以後)에는 그러한 논문(論文) 시험(試驗)이 점점 적어지고 주(主)로 문장(文章)을 취(取)하는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이 행(行)하니 이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은 그 속에 치국(治國) 경륜(經綸)이 있는 것도 아니오 국민생활(國民生活) 상(上)에 어떠한 관련(關聯)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다만 공교(工巧)로운 심장적구(尋章摘句)와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일삼는 것이니 이 까닭에 소위(所謂) 학문(學問)은 형식(形式)에 흐르고 실용(實用)이 없는 귀족계급(貴族階級)의 유희물(遊戱物)이 되고 말았다. 그럼으로 정여창(鄭汝昌)같은 이는 교시(巧詩) 하는 士를 取하지 아니하여 말하되 「詩는 성정(性情)의 發함이라 어찌 설설(屑屑)하게 工夫를 강하(强下)하리오」하였다.

이조개국(李朝開國) 後에 외방관리(外方官吏)의 민폐(民弊)를 作하는 者가 있고 없음을 조사(調査)하기 爲하여 자주 경차관(敬差官)이라는 특사(特使)를 보내더니 그 後에 그 관명(官名)을 어사(御使)라 고쳐서 비밀(秘密)히 각도(各道)에 보내 이가 암행어사(暗行御史)의 기원(起源)이다. 성종(成宗)때에 이르러 王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여 官吏가 罪를 받는 者가 極히 적고 태평성대(泰平盛代)라고 일컬었으나 그 반면(反面)에 민폐(民弊)를 작(作)하는 관리(官吏)가 많이 생겨서 사회내부(社會內部)에 퇴폐(頹廢)의 기운(氣運)이 싹트기 시작(始作)하였다. 이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각도(各道)에 파견(派遣)하니 당시(當時) 조지서(趙之瑞) 정광필(鄭光弼) 김일손(金馹孫) 같은 이가 모두 명어사(名御使)였다.

어사(御使)의 임무(任務)는 대체(大體)로 국법(國法)을 지키지 않는 者, 부모(父母)에 불효(不孝)하는 양풍미속(良風美俗)을 해(害)하는 者, 수령(守令)이나 이서(吏胥)들이 국곡(國穀)을 도적(盜賊)하고 인민(人民)을 괴롭게 하는 者等 법률(法律)과 도덕(道德)에 어그러지는 행위일체(行爲 一切)를 조사(調査)하고 그것을 범(犯)한 者를 발견(發見)할 時는 王의 대리(代理)의 자격(資格)으로 그 고을에 출도(出道)하여 혹(或)은 수령(守令)을 파면(罷免)시킬 수도 있고 혹(或)은 죄인(罪人)을 선참후계(先斬後啓)할 수도 있음으로 외방(外方)에서는 어사(御使)를 호(虎)라고도 불렀다.

어사(御使)가 수월(數月)의 동안에 일도(一道)를 순행(巡行)하는 것임으로 간리(奸吏)들의 소행(所行)을 一 一히 탐지(探知)할 수는 없으나 한번 출동(出動)하면 일도(一道)가 숙연(肅然)하여 간악(奸惡)을 자행(恣行)치 못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에 축묘(畜猫)가 있으매 서(鼠)가 사행(肆行)치 못한다.」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

성종(成宗) 왕비(王妃) 윤씨(尹氏)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生母)라 윤비(尹妃)가 왕(王)에게 불손(不遜)한 일이 있음으로 왕(王)이 폐위(廢位)하였다가 죽였다. 연산군(燕山君)은 성질(性質)이 원래(元來) 난폭(亂暴)한데 그 모(母)가 원사(寃死)함을 알고 심중(心中)에 깊은 악감(惡感)을 품고 있었다. 이때 신하(臣下)들 중(中)에는 후일(後日)에 연산군(燕山君)이 왕위(王位)에 오르면 반드시 국사(國事)를 크게 그르치리라고 풍간(諷諫)한 사람도 있었으나 성종(成宗)도 그 성미(性味)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참아 세자(世子)를 폐(廢)할 수가 없다하여 실행(實行)치 못하고 마침내 연산군(燕山君)을 세워서 이조(李朝) 쇠퇴(衰頹)의 단(端)을 열었으니 이는 전(專)혀 성종(成宗) 유약(柔弱)의 소치(所致)이다.

연산군(燕山君)이 왕(王)이 된 후(後)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은 여전(如前)히 격화(激化)하였다. 성종(成宗)은 항상(恒常) 유신(儒臣)을 옹호(擁護)한 까닭에 유신(儒臣)의 언론(言論)이 실행(實行)되었지만 연산군(燕山君)은 혼암(昏暗)한 임금이라 유신(儒臣)들이 공신척리(功臣戚里)를 공격(攻擊)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또 그때 조정(朝廷)에는 공신(功臣)의 자손(子孫)들과 외척(外戚)의 무리가 권세(權勢)를 잡고있어 유신(儒臣)들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런데 김종직(金宗直)이 일즉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을 지은 일이 있으니 이 글은 옛날 중국(中國)에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라는 어린 임금을 세우고 섬기다가 죽인 일이 있는데 은연(隱然)히 의제(義帝)를 단종(端宗)에 비(比)하고 항우(項羽)를 세조(世祖)에게 비(比)하고 의제(義帝)를 조(弔)함은 곳 단종(端宗)을 조(弔)함이라 종직(宗直)의 제자(弟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이 되어 이 글을 사초(史草)에 기재(記載)하고 그 끝에 「忠憤之文」이라고 附記하였다.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 중(中)의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等)이 이 사초(史草)를 보고 이는 세조(世祖)의 일을 비방(誹謗)하는 것이라 하여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리니 연산군(燕山君)은 이를 대역죄(大逆罪)라 하여 김종직(金宗直)의 시체(屍體)를 파내어 버리고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等)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弟子)들을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 또는 사화(史禍)라 하고 이조(李朝) 유학계(儒學界)에 제일차(第一次)의 겁운(劫運)이었다.

연산군(燕山君)은 음탕(淫蕩)하고 유연(遊宴)을 좋아하여 막대(莫大)한 재정(財政)을 소비(消費)하고 유연비(遊宴費)가 부족(不足)하게 되자 인민(人民)으로부터 공물(貢物)을 가징(加徵)하여 조종(祖宗) 이래(以來)의 규준(規準)을 깨뜨리고 간인배(奸人輩)를 등용(登用)하여 국정(國政)을 혼란(混亂)케 하더니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있은지 육년(六年)만에 그 생모(生母) 윤씨(尹氏)를 폐(廢)하여 죽일 것을 주장(主張)한 사람들을 조사(調査)하여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 보내니 이를 갑자사화(甲子士禍)라 하고 유학계(儒學界)의 제이차(第二次) 겁운(劫運)이었다. 두번의 사화(士禍)가 있은 후(後)로 연산군(燕山君)은 학정(虐政)이 더욱 심(甚)하여 정치(政治)가 어지럽고 백성(百姓)이 살 수 없으니 이에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等)이 반정운동(反正運動)을 일으키어 연산군(燕山君)을 폐(廢)하여 강화도(江華島)의 교동(喬桐)에 내치고 연산군(燕山君)의 아우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推戴)하여 세우니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후(後)의 국정(國政)

중종(中宗)의 반정(反正)은 연산군(燕山君)의 학정(虐政)에 괴로움을 받던 백성(百姓)과 두 번의 사화(士禍)에 기(氣)가 꺾어진 유학계(儒學界)에 한 광명(光明)을 주고 활기(活氣)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사회(社會)의 행방면(行方面)에 개혁(改革)의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이때 김굉필(金宏弼)의 제자(弟子)에 조광조(趙光祖)(호(號) 정암(靜菴))가 있으니 그는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고 정치(政治)를 정화(淨化)함으로써 기임(己任)을 삼고 중종(中宗)의 신임(信任)을 얻어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等) 청년학도(靑年學徒)와 더불어 그 이상(理想)한 바를 실현(實現)하기에 노력(努力)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향약법(鄕約法)을 시행(施行)하여 지방자치(地方自治)의 제도(制度)를 세우니 향약(鄕約)이라 함은 중국(中國) 송(宋)나라 사람들이 시작(始作)한 것으로 한 지방(地方)사람끼리 자치적(自治的)인 규약(規約)을 만들어 선(善)한 일을 서로 권면(勸勉)하고 악(惡)한일을 서로 규간(規諫)하고 예의(禮義)로써 서로 교제(交際)하고 환난(患難)을 서로 구제(救濟)한다는 네 가지 취지(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때에 공신(功臣)에 濫參한 자(者)가 많았으니 원래(元來) 반정공신(反正功臣)이라 함은 반정사업(反正事業)을 획책(劃策)하고 신명(身命)을 그 사업(事業)에 바친 자(者)를 말함이다. 그런데 중종(中宗)의 공신중(功臣中)에 거사(擧事)하는 날에 그 소문(所聞)을 듣고 비로소 와서 열(列)에 참거(參擧)한 자(者) 실제(實際)로 이 사업(事業)에 공헌(貢獻)한 일이 없이 공신(功臣)들과 인연(因緣)이 있는 자(者)들이 공신명부(功臣名簿)에 기록(記錄)됨으로 인(因)하여 공신(功臣)인 자(者)가 칠십(七十)여인(餘人)에 달(達)하고 공신(功臣)들은 국가(國家)로부터 공신전(功臣田)을 받아서 세습(世襲)하고 군(君)을 봉(封)하여 사회적(社會的) 특권(特權)을 향유(享有)하니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이러한 공신(功臣)들을 삭제(削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당시(當時) 반정(反正)의 공(功)이 있는 공신(功臣)들 중(中)에는 특권(特權)을 남용(濫用)하여 세력(勢力)을 얻기와 재화(財貨)를 모으기에만 힘쓰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이는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반정사업(反正事業)을 행(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귀(富貴)를 얻으려 하는 반정(反正) 모리배(牟利輩)의 행동(行動)이었다. 유신(儒臣)대(對) 공신(功臣)의 싸움은 해를 지낼수록 더욱 심각(深刻)하여지는 터이라 조광조(趙光祖) 유신일파(儒臣一派)가 이를 그대로 간과(看過)할 이(理)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신파(功臣派)에 어떠한 과실(過失)이 있는 때는 총궐기(總蹶起)하여 공격(攻擊)하고 왕(王)이 자기(自己)들의 의견(意見)을 듣지 아니하는 때에는 동맹(同盟)퇴직(退職)한 일도 이삼차(二三次) 있었으나 중종왕(中宗王)은 암왕(暗王)이라 조광조(趙光祖)를 신임(信任)한 것도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신임(信任)이 아니라 다만 일반세론(一般世論)을 듣고 그를 현인(賢人)이라 하여 대용(大用)한 것이다. 그런데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중종(中宗)을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聖君)을 만들고 사회(社會)로 하여금 성의정심(誠意正心)할 것을 강요(强要)하다 깊이 탄(歎)하였다.

이 까닭에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폐정(弊政)을 개혁(改革)한 것이 많아서 백성(百姓)으로부터 환영(歡迎)을 받는 반면(反面)에 공신(功臣) 귀족(貴族)들로부터 극도(極度)의 미움을 받고 왕(王)도 또한 점점(漸漸)으로 염증(厭症)을 내게 되었다.

조광조(趙光祖) 一派는 專혀 도학(道學)을 主張하여 小學과 같은 수신서(修身書)와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성리학(性理學)을 爲主하고 시(詩) 부(賦) 표(表) 책(策)과 같은 문장학(文章學)을 배척(排斥)하며 인재(人才)를 취(取)함에 있어도 문장(文章)으로써 과거(科擧)를 보는 현행(現行)시험법(試驗法)을 폐지(廢止)하고 인물고사(人物考査)로써 사람을 취(取)하는 현량과(賢良科)를 행(行)하기를 건의(建議)하니 이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는 정광필(鄭光弼)이 홀로 반대(反對)하여 말하되 현량과(賢良科)의 이름은 비록 좋으나 인심(人心)이 순후(淳厚)치 못한 금일(今日)에는 반드시 폐해(弊害)가 생(生)할 것이니 행(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왕(王)은 조광조(趙光祖)의 말을 좇아 마침내 시행(施行)하였다. 그러나 현량과(賢良科)의 시험관(試驗官)은 주(主)로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가 당(當)하고 있었음으로 그 취(取)하는바 사람은 거의 성리학(性理學) 파(派)들이어서 문장(文章)을 주(主)하는 선비들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인재(人才)를 씀이 편벽(偏僻)하다는 비난(非難)이 각방면(各方面)에서 일어났다.

이조(李朝)의 전제(田制)는 국유제(國有制)이오 매매(買賣)와 전당(典當)을 금(禁)하더니 징병제도(徵兵制度)에 입영(入營)하는 비용(費用) 또 병역복무중(兵役服務中) 의식제비(依食諸費)를 군인(軍人)이 자담(自擔)하는 관계(關係)로 농민(農民)이 군대(軍隊)에 징소(徵召)되는 때에는 그 입영(入營)하는 모든 비용(費用)을 마련하기 爲하여 경작(耕作)하던 土地를 전당(典當)치 아니할 수 없고 전당기간(典當期間)은 五年으로하되 그 期間이 지나도 부채(負債)를 갚지 못하는 때는 土地가 대금업자(貸金業者)의 소유(所有)로 넘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국법(國法)에 위반(違反)되는 일이나 국가(國家)에서는 군대징소상(軍隊徵召上) 금지(禁止)할 수 없는 일임으로 묵인(黙認)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 전제파탄(田制破綻)의 시초(始初)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전당행위(典當行爲)가 비밀리(秘密裏)에 행(行)하더니 내종(乃終)에는 공공연(公公然)하게 관습화(慣習化)하고 소유(所有)의 이전(移轉)도 자유(自由)로 행(行)하여 완전(完全)한 사유제(私有制)로 화(化)하고 따라서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들은 남의 토지(土地)를 경작(耕作)하고 수확물(收穫物)의 일부(一部)를 지주(地主)에게 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이 발생(發生)한 시(始)이오 세종(世宗) 말년(末年)으로부터 세조(世祖)때에 걸쳐서 생긴 일이다. 그 後에는 전당기간(典當期間) 五年이라는 것이 五十日로 단축(短縮)되니 군대(軍隊)로 징소(徵召)되는 군인(軍人)이 오십일(五十日) 기간내(期間內)에 환토(還土)할 수는 없음으로 전당(典當)하는 날이 곧 토지(土地)가 영영(永永) 방매(放賣)되는 날이다.

이 까닭에 빈민(貧民)들의 경지(耕地)는 급속도(急速度)로 부인(富人)의 손에 겸병(兼倂)되고 중종(中宗)때에 이르러서는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이라는 두 계급(階級)이 똑똑히 사회면(社會面)에 나타났다. 강릉(江陵)사람 박수량(朴遂良)은 어전(御前)에서 현량과(賢良科) 시험(試驗)을 마치고 말하되 「평소(平素)에 생각(生覺)하고 있는 바를 한번 전하(殿下)께 아뢰고자 하였는데 이 기회(機會)에 아뢰어도 좋은가」라고 물어서 왕(王)의 허락(許諾)을 받고 아뢰기를 「지금 강릉(江陵) 지방(地方)은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이 허다(許多)하여 농민(農民) 생활(生活)이 대단히 궁핍(窮乏)하니 이것은 하루바삐 고치지 아니하면 국가(國家)의 장래(將來)에 큰 근심이 될 것이니 다시 균전제(均田制)를 행(行)하는 것이 가(可)하다」고 하였다.

중신(重臣)들 중(中)에는 지주(地主)의 토지(土地)를 국가(國家)에서 수상(收上)하여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에게 분급(分給)할 수 는 있으나 그렇게 하면 공연(空然)한 혼란(混亂)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반대(反對)하고 전일(前日)에 분급(分給)한 것을 지주(地主)에게 팔고 농토를 잃었으니 지금 분배(分配)하여 주더라도 또 얼마후(後)에 다시 지주(地主)에게 팔 것이 아니냐하여 응(應)치 아니하였다. 이 문제(問題)가 한번 제의(提議)되자 조정(朝廷)안에는 양론(兩論)이 대립(對立)하고 조광조(趙光祖) 파(派)에서는 토지(土地)를 다시 분배(分配)하자는 혁신론(革新論)을 주장(主張)하여 비록 후일(後日)에 다시 팔아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금일(今日)의 일은 금일(今日)의 정(情)에 맞게 하는 것이 정치(政治)의 본지(本旨)라 하여 기어(期於)히 토지제도(土地制度)를 개혁(改革)하려 하였다. 왕(王)은 중신(重臣)들로 하여금 여러 날 동안 토론(討論)시킨 결과(結果) 한 사람의 토지(土地) 소유(所有)는 오십(五十)결(結) 이내(以內)로 제한(制限)하기로 하니 당시(當時)에 있어서 토지(土地) 소유(所有)를 제한(制限)한 것은 일대(一大) 개혁(改革)이 아닌 것은 아니나 대체(大體)로 지주(地主)계급(階級)에 유리(有利)한 해결(解決)이오 금후(今後)의 토지(土地) 겸병(兼倂)의 방지(防止)에 아무런 실효(實效)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주(地主) 계급(階級)이 이 제도령(制度令)에 대(對)하여 불만(不滿)을 가진 것은 물론(勿論)이다.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의 정치(政治) 이념(理念)은, 그 이상(理想)은 좋으나 그 수단(手段)이 과격(過激)한 점(點)이 많고 공신(功臣) 귀족(貴族)들과의 사이에 극단(極端)의 비타협(非妥協) 태도(態度)를 취(取)하고 성리학파(性理學派) 이외(以外)의 사람에게는 편협(偏狹)한 배타심(排他心)으로 대(對)하여 당시(當時) 현(賢) 재상(宰相)으로 이름난 정광필(鄭光弼)같은 이도 그들은 비부(鄙夫)라고 통매(痛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自己) 일파(一派)의 사람들을 조정(朝廷)에 포열(布列)하고 점점(漸漸) 정치(政治)의 실권(實權)을 잡으며 백성(百姓)들은 그들을 크게 환영(歡迎)하게 되니 이에 왕(王)은 은연(隱然)히 위구(危懼) 불평(不平)한 마음을 품게되었다. 그러던 중(中) 그들은 칠십여인(七十餘人)의 위훈(僞勳)을 삭제(削除)하자고 제의(提議)하니 공신(功臣)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들기 시작(始作)하고 평소(平素)에 유신파(儒臣派)로부터 소인(小人)이라는 이름 밑에 극도(極度)의 배척(排斥)을 받은 남곤(南袞)과 공신(功臣)의 한사람인 심정(沈貞) 등(等)이 주동(主動)이 되어 한편(便)으로 왕(王)의 마음을 동요(動搖)시키고 한편(便)으로 조광조(趙光祖) 파(派)의 모역(謀逆)함을 무고(誣告)하여 중종(中宗) 십사년(十四年) 기묘(己卯)에 조광조(趙光祖)와 그의 동지(同志)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여 즉회(卽回)로 죽이려하는 것을 정광필(鄭光弼)이 왕(王)의 소매를 붙잡고 「신진(新進) 연소(年少)들이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그 행동(行動)이 과격(過激)하였을 뿐이오 이지(異志)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만류(挽留)하여 모두 귀양살이 보내더니 미구(未久)에 적소(謫所)에서 대부분(大部分)을 죽이니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화(禍)가 있은 후(後)에 현량과(賢良科)를 폐(廢)하고 토지제도(土地制度) 한령(限令)이 스스로 소멸(消滅)됨은 물론(勿論)이오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읽는 자(者)는 모두 조광조(趙光祖) 파(派)라 하여 강압(强壓)함으로 이러한 글은 당세(當世)의 큰 금물(禁物)이 되고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等)이 용사(用事)하여 정치(政治)를 어지럽게 하고 정광필(鄭光弼)도 그들에게 물려 나갔다.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等)이 정권(政權)을 잡고 그 당류(黨類)를 이끌어들여 정치(政治)를 어지럽힌 지 십여년(十餘年)에 왕(王)은 그 무리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김안노(金安老)를 써서 그 무리를 없애니 이를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 하여 안노(安老)의 흉악(凶惡)함은 곤정(袞貞)의 무리보다 더 심(甚)하였다. 안노(安老)가 용사(用事)한지 칠년(七年)에 왕(王)은 그 일파(一派)를 모두 제거(除去)하니 간신(奸臣)이 정권(政權)을 잡음이 전후(前後) 십구년(十九年)동안이라 왕(王)은 크게 회오(悔悟)하여 탄식(歎息)하되 「처음에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를 몰아내면 국사(國事)가 잘될 줄 알았더니 곤정(袞貞) 일파(一派)의 간악(奸惡)은 말할 수 없이 심(甚)하였고 이 일파(一派)를 몰아내면 금후(今後)는 아무 일 없을 줄로 생각했더니 安老의 흉악(凶惡)은 전(前)보다 더 심(甚)하여 국가(國家)를 위태(危殆)롭게 하고 백성(百姓)을 괴롭게 하였다. 후세(後世)에 나를 어떤 임금이라 칭(稱)할고」하고 정광필(鄭光弼)을 적소(謫所)로부터 불러들여 정승(政丞)을 삼으니 백성(百姓)들이 천일(天日)을 본듯이 환호(歡呼)하였다. 이에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의 금(禁)이 스스로 풀리고 유신(儒臣)들을 거용(擧用)하였으며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은 비로소 서원(書院)을 짓고 거기에 선현(先賢)을 모시고 유생(儒生)들이 모여서 도학(道學)을 연구(硏究)하게 하니 이것이 이조(李朝) 서원(書院)의 시초(始初)이다.

그러나 중종(中宗)은 암주(暗主)라 조정(朝廷)안에 왕권(王權) 쟁탈(爭奪)의 단서(端緖)가 열리었다. 중종(中宗)도 비(妃)에 선비(先妃) 윤씨(尹氏)는 인종(仁宗)을 낳고 계비(繼妃) 윤씨(尹氏)는 명종(明宗)을 낳았는데 인종(仁宗)의 외숙(外叔)은 윤임(尹任)이오 명종(明宗)의 외숙(外叔)은 윤원형(尹元衡)이니 세인(世人)이 윤임(尹任)을 대윤(大尹)이라 하고 윤원형(尹元衡)을 소윤(小尹)이라 하고 이 두 사람의 세력(勢力) 다툼을 대윤(大尹) 소윤(小尹)의 싸움이라 하였다. 인종(仁宗)은 중종(中宗)을 이어 왕(王)이 된지 겨우 일년(一年)에 승하(昇遐)하고 아들이 없음으로 그 아우 명종(明宗)이 십이세(十二歲)에 왕(王)이 되고 그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정치(政治) 실권(實權)을 잡고 윤원형(尹元衡)이 용사(用事)하니 최초(最初)부터 척리(戚里)파(派)를 미워하는 유생(儒生)들이 명종(明宗) 외가(外家)의 천정(擅政)함을 좋아할 이(理)가 없었다. 이에 윤원형(尹元衡)은 전(前)부터의 정적(政敵)인 대윤(大尹) 일파(一派)와 자기(自己)에게 좋지 못한 감정(感情)을 가지고 있는 유신(儒臣)들을 일체(一切) 배제(排除)하기로 정(定)하고 명종(明宗)이 왕(王)이 되던 을사(乙巳)년에 근거(根據)없는 사실(事實)을 꾸며서 역적(逆賊)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 한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여러 차례 사화(士禍) 중(中) 가장 참혹(慘酷)하고 인심(人心)이 가장 분개(憤慨)하였다. 무오(戊午) 기묘(己卯)의 사화(士禍)는 그 상대자(相對者)가 간신(奸臣)들이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燕山君)이 그 어머니를 위(爲)한 복수(復讐)이니 혹(或)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왕(王)의 모후(母后)와 왕(王)의 외숙(外叔)이 아무런 죄(罪)가 없는 유신(儒臣)들을 무함(誣陷)하여, 절대충성(絶對忠誠)을 다할 것을 학문(學問)의 대본(大本)을 삼고 있는 유학도(儒學徒)들도 왕실(王室)에 대한 충성(忠誠)이 엷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자(前者)에 세 번의 사화(士禍)에는 비록 참혹(慘酷)한 변(變)을 당(當)하였으되 오히려 다시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여 그 이상(理想)하는 바를 정치(政治)의 면(面)에 실현(實現)하려고 노력(努力)하는 사람이 연(連)달아 나왔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以後)에는 그들은 정치(政治)에서 물러나 현실(現實) 세상(世上)과 인연(因緣)을 끊고 산림(山林)에 숨어서 오로지 학문(學問)에만 힘쓰게 되었음으로 정치(政治)와 학문(學問)이 나뉘어져서 소위(所謂) 산림학자(山林學者)라는 것이 생기고 실사(實事)를 떠나서 이론(理論)에 행동(行動)을 떠나서 사색(思索)에 치우치는 경향(傾向)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서경덕(徐敬德)(호(號)는 화담(花潭)) 조식(曺植)(호(號)는 남명(南溟)) 이황(李滉)(호(號)는 퇴계(退溪)) 기대승(奇大升)(호(號)는 고봉(高峯) 이지함(李之菡)(호(號)는 토정(土亭)같은 일대(一代) 명유(名儒)가 나서 명종(明宗)시대(時代)의 유학계(儒學界)에 꽃을 피웠으나 그들은 정치(政治) 방면(方面)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고 비록 이황(李滉)같은 이는 왕(王)의 부름을 받아서 벼슬에 나온 일이 있으나 기회만 있으면 다시 산림(山林)으로 돌아갔음으로 그때에 이를 평(評)하여 산금(山禽)이라고 별명(別名)을 지은 일도 있었다.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

세종(世宗)때에 옥포(玉浦)를 열어서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한 것이 그 후(後) 차츰 왜인(倭人)의 수효(數爻)가 늘어서 수천명(數千名)에 이르며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을 어기는 일이 적지 아니하더니 중종(中宗) 오년(五年)(단기 삼천팔백사십삼년 경오(庚午))에 대마도(對馬島)와 연결(連結)하여 난(亂)을 일으키니 이를 삼포왜란(三浦倭亂) 또는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 한다.

이 난(亂)은 곧 평정(平定)되었으나 그 후(後)에도 중종(中宗) 삼십구년(三十九年)에 통영군(統營郡) 사량(蛇梁)에서 변란(變亂)을 일으킨 일이 있고 명종(明宗) 십년(十年) 을묘(乙卯)에 또 다시 해남군(海南郡) 달량포(達梁浦)에 침입(侵入)하니 이를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한다. 원래(元來) 왜인(倭人)들은 아국(我國)과 무역(貿易)하지 아니하고는 살수가 없는 데이나 그 무역액(貿易額)에는 제한(制限)이 있으므로 왜인(倭人)들은 비밀(秘密)히 제한외(制限外)의 무역(貿易)을 행(行)하고 또 변장(變裝)하고 거주구역(居住區域)밖에 나와서 민가(民家)로 좇아 다니면서 장사하는 한편(便) 국가(國家)의 정치(政治)와 사업(事業)의 기밀(機密)을 정탐(偵探)하여 왜(倭) 본국(本國)에 보고(報告)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에 정부(政府)에서는 지방관리(地方官吏)에게 명(命)하여 그를 엄금(嚴禁)한 관계(關係)로 양국민(兩國民)의 감정(感情)이 서로 좋지 못하여 마침내 삼포(三浦)의 변(變)이 일어나고 그 변(變)이 평정(平定)된 뒤로 종래(從來)의 무역액(貿易額)을 반(半)으로 줄이니 이때로부터 왜인(倭人)의 아국(我國)에 대(對)한 감정(感情)이 더욱 악화(惡化)되었다.

이에 조정(朝廷)에서는 왜인(倭人)들이 왜구(倭寇)를 잡아 바치었다든가 표류(漂流)한 우리 나라 사람을 돌려 보내주었다든가 하여 우리 나라에 공로(功勞)가 있는 자(者)에게는 관직(官職)을 주어 이를 수직왜(守職倭)라 하여 특별(特別)한 대우(待遇)로써 그들을 무마(撫摩)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感情)은 마침내 풀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간교(奸狡)한 꾀로써 우리 나라를 속이고 우리 나라 국정(國政)을 밀정(密偵)하니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들을 대(對)할 때 경어(敬語)를 쓰는 일이 적고 흔히 왜놈이라 불러서 모욕(侮辱)하였다. 김안국(金安國)같은 이는 이를 근심하여 양국민(兩國民) 사이의 감정(感情)이 좋지 못하고 장래(將來) 국가(國家)에 이(利)롭지 못하리라고 경고(警告)한 일도 있었다.

을묘란(乙卯亂)이 일어나자 조정(朝廷)에서는 이준경(李浚慶)으로 도순찰사(都巡察使)를 명(命)하여 치게 하니 이준경(李浚慶)이 호남(湖南)에 내려갔으나 군사(軍士)도 몇 사람되지 아니하고 무기(武器)도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한편으로는 군사(軍士)들을 소집(召集)하고 한편으로는 무기(武器)를 만들어서 영격(迎擊)하더니 적(賊)은 약탈(掠奪)하여 가지고 해상(海上)으로 도망하였다. 이 난(亂)이 있은 후(後)에 한동안 양국(兩國) 교통(交通)이 끊어지더니 일본(日本)이 다시 통상(通商)하기를 간망(懇望)하고 우리 나라에서도 그들을 무마(撫摩)하는 것이 득책(得策)이라 하여 통상(通商)을 허(許)하는데 종래(從來)에 개항(開港)한 청포(菁浦)방면(方面)은 첩첩(疊疊)한 도서(島嶼)에 싸여서 왜선(倭船)이 숨기 쉽고 우리 나라의 척후(斥候)가 보기 어려움으로 부산(釜山) 일항(一港)을 열어서 왜선(倭船)의 내왕(來往)을 허(許)하니 이는 부산(釜山)에 섬이 없어서 왜선(倭船)의 내왕(來往)을 보기 쉬운 까닭이다.

 

사회(社會)의 부패(腐敗)

연산군(燕山君) 이후(以後) 육십여년(六十餘年) 간(間) 간신(奸臣)이 정권(政權)을 잡을 때가 많았고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이르러서는 정치(政治)가 극도(極度)로 어지럽고 화뇌(貨賂)가 성행(盛行)하여 사회(社會)는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외방(外方)의 공물(貢物)은 개국초(開國初)에 지방산물(地方産物)과 호구수(戶口數)를 감안(勘案)하여 정(定)한 것인데 연산군(燕山君)이 이를 가징(加徵)하고 또 산물(産物)이 수량(數量)과 호구(戶口)가 오륙십(五六十) 년간(年間)에 변동(變動)된 것이 적지 아니 하되 조정(朝廷)에서는 그것을 민간(民間) 실정(實情)에 맞도록 개정(改正)치 아니하여 민폐(民弊)가 심(甚)하였다.

군역(軍役)은 군포(軍布)을 바치고 징소(徵召)됨을 면(免)하는 제도(制度)가 행(行)하였는데 이는 각(各) 진보(鎭堡)가 군포(軍布)를 받아 가지고 군인(軍人)을 용인(傭人)하기 위(爲)함이다. 그러나 진보(鎭堡)의 주장(主將)이란 자(者)들은 군포(軍布)로써 사복(私腹)을 채우고 군사(軍士)를 용인(傭人)치 아니 하는 까닭에 각(各) 진보(鎭堡)의 실제(實際) 인원(人員)은 정원수(定員數)의 천(千)의 이삼(二三)에도 달(達)치 못하고 군적(軍籍)에는 허명(虛名) 가명(假名) 심지어(甚至於) 구명(狗名) 묘명(猫名)까지 씌어있었다. 그리고 한번 군포(軍布)를 바치기 시작(始作)한 사람은 매년(每年) 계속(繼續)하여 바치기로 되어있는데 혹(或)은 그 사람이 사망(死亡)한 뒤에도 여전(如前)히 징포(徵布)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 백골징포(白骨徵布)라하고 혹(或)은 유아(乳兒)에게도 徵布하였으니 이를 황구(黃口)징병(徵兵)이라 하고 혹(或)은 사람이 고역(苦役)을 견디지 못하여 전가(全家)를 거느리고 도망(逃亡)하여 버리면 그 군포(軍布)를 그의 일족(一族)으로부터 받고 일족(一族)이 없으면 절린(切隣)으로부터 징수(徵收)하니 이는 군포(軍布)가 주장(主將)의 사수입(私收入)이 되는 까닭에 사망(死亡) 유아(乳兒) 도망(逃亡) 같은 사실(事實)을 국가(國家)에 보고(報告)하지 아니하고 계속(繼續) 징수(徵收)하는 것이며 이로 인(因)하여 진보(鎭堡)에는 매년(每年) 고정(固定)불변(不變)하는 군포(軍布) 수입(收入)이 있었다. 그럼으로 이때에는 각(各) 진보(鎭堡)의 가격(價格)이 군포(軍布) 필수(疋數)에 정(定)해져서 그 가격(價格)의 다소(多少)로써 지위(地位)의 고하(高下)를 정(定)하는 것이었다.

이서(吏胥)의 폐망(弊亡) 전(前)부터 있는 일이지만 중종(中宗) 명종(明宗)의 전후(前後) 삼십여년(三十餘年) 간(間) 중앙(中央)의 정치(政治)가 어지러움으로 인(因)하여 더욱 심(甚)하여져서 모든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백성(百姓)들은 그 생활(生活)을 유지(維持)할 수 없었고 당시(當時) 군현(郡縣)의 수(數)는 삼백이십(三百二十) 여(餘)인데 군현(郡縣)이 너무 많아서 백성(百姓)의 부담(負擔)이 과중(過重)함으로 이를 폐합(廢合)하여 백성(百姓)의 부담(負擔)을 경감(輕減)하려고 기도(企圖)한 일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이서(吏胥)의 실직(失職)하는 자(者)가 많게 됨으로 군현(郡縣)의 실권(實權)을 잡고 있는 이서(吏胥)들은 중앙정부(中央政府) 내(內)의 간신배(奸臣輩)들과 결탁(結託)하여 극력(極力)으로 저해(沮害)한 일도 있었고 수령(守令)들은 중앙(中央)으로부터 임명(任命)되어 삼년(三年)이라는 임기(任期)(임기(任期)에는 신축(伸縮)이 있었다.)를 지내는데 지방(地方)의 실정(實情)을 잘 알지 못함으로 그 대부분(大部分)은 이서(吏胥)의 손에 사무(事務)를 맡겨 버리는 형편(形便)이어서 백성(百姓)들은 수령(守令)보다도 이서(吏胥)를 두려워하였으니 이 까닭에 국가(國家)의 말단행정(末端行政)은 이서정치(吏胥政治)로 화(化)하였다.

조식(曺植) 같은 이는 명종(明宗)에게 상서(上書)하여 왕(王)의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과부(寡婦)로서 정치(政治)를 어지럽게 한다는 과부간정론(寡婦干政論)과 군현(郡縣)의 이서배(吏胥輩)들이 국사(國事)를 그르치고 있다는 이서망국론(吏胥亡國論)을 올려 세인(世人)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케 한 일도 있었다.

이때 유신(儒臣)들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어서 비록 기(氣)가 꺾이었으나 그 잠재(潛在)한 힘은 더욱 굳세어 공신척리(功臣戚里)들을 미워하는 생각이 날로 강(强)해지더니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음에 종래(從來) 왕후(王后)의 힘을 배경(背景)으로 하여 온갖 횡포(橫暴)를 자행(恣行)하던 윤원형(尹元衡)은 의지(依支)할 곳이 없는 일독부(一獨夫)라 유신(儒臣)들은 일제(一齊)히 궐기(蹶起)하여 마침내 윤원형(尹元衡)을 몰아내고 무리를 일소(一掃)하였다.

명종(明宗)의 뒤를 이어 선조(宣祖)가 왕(王)이 되니 이때는 명상(名相) 이준경(李浚慶)이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조정(朝廷)이 유신(儒臣) 일색(一色)으로 조직(組織)되었다. 세조(世祖)때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파의 싸움이 일어난 이래(以來) 일백십여(一百十餘) 년(年)만에 비로소 유신(儒臣)이 완전(完全)히 정권(政權)을 잡으니 이로부터 그 이상(理想)하는 바의 정치(政治)를 실현(實現)할 시기(時機)가 도래(到來)한 것이다.

그러나 이준경(李浚慶)은 그 임종(臨終) 유차(遺箚)에 「지금(只今) 사습(士習)이 부허(浮虛)하여 허위(虛僞)가 풍(風)을 작(作)하니 붕당(朋黨)의 점(漸)이 있다」고 경고(警告)하니 당시(當時) 유사(儒士)들이 경조(輕躁)하여 독실(篤實)한 풍(風)이 없고 고언(高言) 대담(大談)을 일삼고 사람의 조그마한 과실(過失)이라도 관용(寬容)함이 없이 공격(攻擊)하기를 좋아함으로 반드시 붕당(朋黨)이 생긴다고 예언(豫言)한 것이다.

이 유차(遺箚)가 한번 들어오자 조정(朝廷) 제신(諸臣)들은 붕당(朋黨)이 없음을 극력(極力) 변명(辨明)하고 이이(李珥)같은 이는 이준경(李浚慶)이 무근(無根)한 말로써 사림(士林)을 화독(禍毒)하는 것이라 하여 공박(攻駁)하고 심지어(甚至於) 이준경(李浚慶)을 추죄(追罪)하자는 격론(激論)까지 일어난 일이 있으니 이는 자기(自己)들이 결(決)코 붕당(朋黨)을 만들지 않을 것을 맹서(盟誓)함과 같음이다.

그러나 이준경(李浚慶)이 죽은지 사년(四年)만인 선조(宣祖) 팔년(八年) 을해(乙亥)(단기 삼천구백팔년)에 마침내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기고 말았다. 처음에 심의겸(沈義謙)은 왕실(王室)의 외척(外戚)으로서 명종(明宗)때에 간신(奸臣)들의 행악(行惡)이 심(甚)한 중(中)에서 유사(儒士)들을 구활(救活)한 일이 많았음으로 비록 심(沈)이 척리파(戚里派)에 속(屬)하되 유신(儒臣)들의 호감(好感)을 얻고 있으며 김효원(金孝元)은 신진(新進) 유사(儒士)로써 연소유신(年少儒臣)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었는데 김효원(金孝元)은 심의겸(沈義謙)을 척리파(戚里派)라 하여 배격(排擊)하고 심의겸(沈義謙)은 김효원(金孝元)이 일직 권신(權臣)의 문(門)에 출입(出入)하였다 하여 멸시(蔑視)한 관계(關係)로 두 사람사이에 갈등(葛藤)이 생겼다. 이에 심의겸(沈義謙)을 우(右)하는 자(者)와 김효원(金孝元)을 우(右)하는 자(者)가 생기고 경조부박(輕佻浮薄)한 무리들이 마치 정월(正月) 초생(初生) 줄다리기에 양편(兩便)에 서로 와서 덧붙듯이 혹(或)은 심의겸(沈義謙)파(派)에 붙고 혹(或)은 김효원(金孝元)파(派)에 붙어서 조정(朝廷)안이 양당(兩黨)으로 갈라지니 심(沈)의 집은 서울의 서편(西便)에 있음으로 그를 서인(西人)이라 하고 김(金)의 집은 동편(東便)에 있음으로 동인(東人)이라 하고 또 노성파(老成派)는 대개(大槪) 서인(西人)이 되고 소장파(少壯派)는 대개(大槪) 동인(東人)이 되니 유신(儒臣) 대 공신척리(功臣戚里)파(派)의 백십여년간(百十餘年間)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은 역시(亦是) 유사(儒士) 대(對) 척리(戚里)의 사소(些少)한 감정(感情) 소격(疏隔)을 계기(契機)로 하여 그 형태(形態)가 일변(一變)하여 동류(同流) 상잔(相殘) 동지(同志) 상식(相食)하는 유신(儒臣) 대(對) 유신(儒臣)의 추악(醜惡)한 당쟁(黨爭)으로 화(化)하였다.

당쟁(黨爭)이 한번 일어난 후(後) 조정(朝廷)안에는 중정(中正) 불편(不偏)한 자(者)가 거의 없고 오직 자당(自黨)의 이해를 위(爲)하여 움직여서 정치(政治)의 이상(理想)이 있는 것도 아니오 사(事)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가리는 것도 아니오 동인(東人)은 동인(東人)을 옹호(擁護)하고 서인(西人)은 서인(西人)을 옹호(擁護)하여 일대(一大) 난투(亂鬪) 장(場)을 이루었다. 선조(宣祖)는 군신(群臣)에게 누가 붕당(朋黨)을 만들고 있느냐고 문책(問責)한즉 군신(群臣)들은 붕당(朋黨)이라는 말은 다만 항간(巷間)에서 유포(流布)되는 풍설(風說)이오 조신중(朝臣中)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변명(辨明)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쓰고 죄(罪) 줌이 모두 당쟁(黨爭)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공론(公論)이 행(行)치 못하고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짐으로 이이(李珥)는 이를 조정(調停)하는 것을 기임(己任)으로 삼고 분당(分黨)의 장본인(張本人)인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을 외관(外官)으로 내어보내면 당쟁(黨爭)이 멈추리라고 하여 왕(王)께 이 의견(意見)을 아뢰었던 바 왕(王)은 심의겸(沈義謙)으로 개성(開城) 유수(留守)를 삼고 김효원(金孝元)으로 회령(會寧) 부사(府使)를 삼으니 비록 동(同)한 외관(外官)이로되 심(沈)은 승진(昇進)되고 김(金)은 폄점(貶點)되는 결과(結果)를 생(生)하였다. 이에 동인(東人)들은 크게 불평(不平)을 품고 또 김(金)의 폄점(貶點)은 이이(李珥)의 제안(提案)에 의(依)한 것이라 하여 일제(一齊)히 일어나서 이이(李珥)도 공정(公正)한 조정자(調停者)가 아니고 서인(西人)에 당(黨)하여 동인(東人)을 압박(壓迫)하는 것이라 하여 공격(攻擊)을 행(行)하니 이이(李珥)는 조정(調停)하기를 단념(斷念)할 뿐만 아니라 조정(朝廷)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으로 향리(鄕里)로 물러갔다. 이때 이지함(李之菡)은 국사(國事)를 근심하여 말하기를 율곡(栗谷)이 조정(朝廷)에 있으면 큰 효과(效果)는 없어도 파국(破局)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한번 물러가는 날이면 이 정국(政局)을 다시 수습(收拾)할 수 없으리라 하여 크게 탄식(歎息)하였다.

음식(飮食)이 있는 곳에 반드시 다툼이 있는지라 처음에는 서인(西人)이 득세(得勢)하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동인(東人)이 힘이 커지자 동인(東人) 속에서 다시 내부(內部)에 싸움이 일어나니 이는 이산해(李山海)를 중심(中心)으로 한 일파(一派)와 유성룡(柳成龍)(호(號)는 서애(西崖))을 중심(中心)으로 한 일파(一派)이니 이(李)는 서울에 살고 있음으로 북(北)이라 하고 유(柳)는 영남(嶺南)에 살고 있음으로 남인(南人)이라 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은 남(南) 북(北) 서(西)의 삼당(三黨)으로 나뉘어 삼색(三色)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는 날로 험악(險惡)하여 가고 국내(國內) 정세(情勢)는 당쟁(黨爭)으로 인(因)하여 더욱 부패(腐敗)하여지고 특(特)히 병비(兵備)가 극(極)히 허소(虛疎)하여 북(北)의 야인(野人)이나 남(南)의 왜구(倭寇)가 침입(侵入)하는 일이 있으면 도저(到底)히 막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이이(李珥)는 미리 십만(十萬) 병(兵)을 양(養)하여 경성(京城)에 이만(二萬)을 두고 각도(各道)에 일만(一萬)씩을 두어 여외(廬外)의 악(惡)을 방비(防備)할지오 만일(萬一) 그렇지 아니하면 일년(一年)을 불거(不去)하여 토붕(土崩)의 화(禍)가 있으리라고 경정(逕庭)에서 아뢰나 유성룡(柳成龍)이 무사태평(無事泰平)한 때에 병(兵)을 양(養)하는 것은 화(禍)를 양(養)함이라 하여 반대(反對)하고 다른 조신(朝臣)들도 당쟁(黨爭)에만 열중(熱中)하고 국사(國事)를 근심하는 자(者)가 없음으로 이 나라를 살리는 유일책(唯一策)인 십만(十萬) 양병론(養兵論)은 실현(實現)되지 못하고 말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선조(宣祖) 초(初)에 일본(日本)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국내(國內)를 통일(統一)하고 장차(將次) 대륙(大陸)으로 진출(進出)할 야심(野心)이 있어 우리 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양국(兩國)이 서로 친화(親和)하게 지내자 하고 또 우리 나라에 침입(侵入)할 뜻이 있다는 풍설(風說)이 퍼지고 있음으로 선조(宣祖) 이십삼년(二十三年)에 조정(朝廷)에서는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보내니 그 형식(形式)은 양국(兩國) 수호(修好)를 위(爲)함이나 기실(其實)은 수길(秀吉)의 태도(態度)를 타진(打診)함이다. 황(黃)과 김(金)이 돌아온 후(後) 두 사람의 복명(復命)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 황(黃)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안광(眼光)이 빛나고 태도(態度)가 거만(倨慢)하니 반드시 입구(入寇)하리라 하고 김(金)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눈이 쥐눈 같고 인물(人物)이 보잘 것 없으니 반드시 입구(入寇)치 아니한다. 하였다. 황(黃)은 서인(西人)임으로 서인(西人)들은 덮어놓고 황(黃)의 말을 옳다하고 김(金)은 동인(東人)임으로 동인(東人)들은 김(金)의 말을 지지(支持)하여 국가명일(國家明日)의 흥망(興亡)이 달려있는 중대(重大) 사(事)에 적(敵)의 실정(實情)을 깊이 검토(檢討)치 아니하고 오직 당인(黨人) 옹호(擁護)만을 위주(爲主)하였으며 이때 동인(東人)의 세력(勢力)이 컸음으로 조정(朝廷)의 의론(議論)은 김(金)의 말을 좇게되고 선조(宣祖)도 또한 김(金)이 선사(善使)하였다 하여 포상(褒賞)하고 착수(着手)중(中)에 있는 남방(南方)의 군비(軍備)도 수면상태(睡眠狀態)에 빠지고 군신(君臣)이하(以下)가 모두 태평몽(泰平夢)에 취도(醉倒)하였다.

일본(日本) 수길(秀吉)은 우리 나라의 군비(軍備)의 허실(虛實)을 전일(前日)의 사신(使臣) 왕래(往來) 시(時)에 미리 탐지(探知)하고 선조(宣祖) 이십오년(二十五年) 임진(壬辰)(단기 삼천구백이십오년)에 명(明)나라를 치러가니 조선(朝鮮)은 길을 빌려달라고 빙자(憑藉)하고 그해 사월(四月)에 군사(軍士) 이십만(二十萬)과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藤淸正) 등(等) 장수(將帥)를 보내어 풍우(風雨)같이 몰려와서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하니 이는 우리 나라의 청천벽력(靑天霹靂)이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던 아국(我國) 군대(軍隊)가 백전(百戰) 노련(老鍊)한 왜병(倭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동래성(東來城)이 일전(一戰)도 못하고 함락(陷落)되고 적군(敵軍)은 거침없이 동서(東西) 두 길로 나뉘어 경성(京城)을 향(向)하여 북상(北上)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이 급보(急報)를 듣고 모두 창황망조(蒼皇罔措)하고 선조(宣祖)는 김식일(金識一)이 국사(國事)를 그르쳤다 하여 곧 잡아오라고 엄명(嚴命)을 내리더니 성일(誠一)이 황공(惶恐) 입경(入京)하는 차(次)에 선조(宣祖)는 다시 명령(命令)을 내리어 이번 왜구(倭寇)는 너로 인(因)하여 오는 것이니 네가 나가서 막으라 하여 남방(南方)으로 보내었다.

조정(朝廷)에서는 적(敵)을 막을 힘이 없고 서로(西路)를 좇아 피난(避難)의 길을 떠나니 경성(京城) 안에 있던 난민(亂民)들이 경복궁(景福宮)에 불질러 사뤘으며 각지(各地)의 수령(守令)들은 대부분(大部分)이 직무(職務)를 버리고 도망(逃亡)하였음으로 호구(戶口)와 토지(土地)의 문적(文籍)이 이때에 대개(大槪) 멸실(滅失)되었다. 왜병(倭兵)이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한지 겨우 이십일(二十日)만에 경성(京城)이 함락(陷落)되고 팔도(八道) 인심(人心)이 토붕(土崩)하듯이 무너져서 다시 수습(收拾)할 수가 없었다. 선조(宣祖)는 서로(西路)를 피난(避難)하면서도 서도(西道)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를 크게 의구(疑懼)하여 이원익(李元翼)을 불러서 말하되 경(卿)이 일직 안주(安州) 목사(牧使)가 되었을 때 행정(行政)을 잘하여 평안도(平安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생각한다하니 경(卿)이 먼저 평안도(平安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안무(按撫)하라하고 또 최흥원(崔興源)을 불러 말하되 경(卿)이 일직 황해(黃海)감사(監司)사가 되었을 때 백성(百姓)을 사랑하였음으로 황해도(黃海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잊지 아니한다 하니 경(卿)이 먼저 황해도(黃海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개성(開城)에 가서 얼마동안 머물다가 왜병(倭兵)이 따라옴을 보고 평양(平壤)을 거쳐서 의주(義州)에 가서 머물고 있었다.

국세(國勢)가 이렇게 위태(危殆)로운 지경(地境)에 이르렀을 때에 국내(國內)에는 오직 두 줄기의 생기(生氣)가 움직였으니 그 하나는 이순신(李舜臣)의 해전(海戰)이오 또 하나는 의병(義兵)의 궐기(蹶起)이다. 이순신(李舜臣)은 전라도(全羅道) 좌수사(左水使)가 된 때로부터 미리 왜적(倭賊)의 침입(侵入)이 있을 것을 짐작(斟酌)하고 우수(優秀)한 전선(戰船)을 제조(製造)하려 하여 백제(百濟) 시대(時代) 이래(以來) 고려(高麗) 시대(時代)로 거쳐서 전(傳)해오는 아국(我國) 특유(特有)의 조선(造船)기술(技術)을 써서 새로이 한 배를 창조(創造)하니 그 배는 철판(鐵板)으로 위를 덮어서 거북의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 송곳을 꽂고 적병(敵兵)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사이에 십자로(十字路)를 통(通)하여 우리 군사(軍士)가 자유(自由)로 통행(通行)하게 하고 전후(前後)좌우(左右)에 총혈(銃穴)을 내어서 군사(軍士)가 그 밑에 숨어 총(銃)을 놓게 된 것이니 이를 구선(龜船)이라 한다.

이순신(李舜臣)은 왜병(倭兵)이 들어옴을 보고 구선(龜船) 팔십척(八十隻)을 거느리고 오월(五月) 칠일(七日) 옥포(玉浦)에서, 유월(六月) 사일(四日)에 당포(唐浦)에서, 칠월(七月) 팔일(八日)에 한산도(閑山島)의 앞바다 등(等) 적(敵)의 수군(水軍)을 연(連)거푸 쳐 부시고 한산도(閑山島)의 길목을 수비(守備)하니 적(敵)이 다시 남해(南海) 변(邊)을 엿보지 못하였다. 처음에 왜병(倭兵)은 육로(陸路)와 해로(海路)의 두 길로 병진(倂進)하여 일거(一擧)에 우리 나라를 삼키려 한 것인데 해로(海路)가 이순신(李舜臣)에게 막힌 까닭에 육로(陸路) 군(軍)의 동(東)은 함경도(咸鏡道) 두만강(豆滿江)까지 들어가고 서(西)는 평양(平壤)까지 들어갔으되 더 북상(北上)하기를 두려하여 왕(王)을 쫓아가지 못하였으니 이 대란(大亂)에 우리 나라가 다시 소생(蘇生)함에는 이순신(李舜臣)의 힘이 절대(絶對)한 것이었다.

왜병(倭兵)이 처음 들어 올 때에는 인심(人心)이 모두 황겁(慌怯)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또 적(敵)은 조총(鳥銃)을 가지고 있는데 총(銃)의 위력(威力)이 얼마나 큰가를 알지 못함으로 감(敢)히 접전(接戰)할 용기(勇氣)를 내지 못하더니 시일(時日)이 경과(經過)함을 따라 점차(漸次)로 적(敵)의 정세(情勢)를 알게 됨으로부터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거의(擧義)하려는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경상도(慶尙道)에서 처음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者)는 곽재우(郭在祐)(호(號)는 망우당(忘憂堂))이니 홍의(紅衣)를 입고 마(馬)를 타고 적진(敵陣)에 들어가서 횡행(橫行)하되 적(敵)이 감(敢)히 막지 못하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있는 곳에는 적(敵)이 반드시 피거(避去)하였다. 전라도(全羅道)에서는 광주(光州)의 고경명(高敬命)(호(號)는 제봉(霽峰))이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와 김천일(金千鎰) 등(等)으로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이 소식(消息)을 듣고 각지(各地)에서 의병(義兵)이 연거푸 일어났음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중(中)에 의병(義兵)의 세력(勢力)이 가장 큰 곳이 호남(湖南)이었고 이 의병(義兵)의 힘에 의하여 호남(湖南)이 보전(保全)된 까닭에 국가(國家)의 생맥(生脈)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호남(湖南) 의병(義兵)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군(軍)과 아울러 유명(有名)한 것은 금산(錦山)의 조헌(趙憲)(호(號)는 중봉(重峯))군(軍)이다. 조헌(趙憲)은 임진(壬辰) 전년(前年)에 미리 명년(明年)에 큰 병란(兵亂)이 일어 날줄을 알고 선조(宣祖)에게 상소(上疏)하여 정치(政治)의 잘못됨을 통론(痛論)하고 급(急)히 방비(防備)의 책(策)을 세울 것을 극언(極言)하니 그 말이 너무 과격(過激)함으로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광인(狂人)이라 하여 귀양보내었다.

임진(壬辰)란(亂)이 일어남에 동지(同志)를 모아서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원근(遠近)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조헌(趙憲)이 일어났다. 하여 용관(聳觀)하고 우국(憂國)하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여러 번 왜병(倭兵)과 싸워서 이기더니 금산(錦山)싸움에서 중과(衆寡)과가 부적(不適)하여 패사(敗死)하고 동지(同志)인 칠백의사(七百義士)도 함께 죽으니 지금도 전쟁(戰爭)하던 자리에 칠백의사(七百義士) 총(塚)이 있으며 이 싸움에 왜병(倭兵)도 죽은 자(者)가 많고 또 전쟁(戰爭)의 후방(後方) 세력(勢力)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여 물러가고 다시 전라도(全羅道)를 엿보지 못하니 호남(湖南)북부(北部)의 보전(保全)함은 주(主)로 조헌(趙憲)의 힘이었다.

이밖에도 각도(各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서 큰 전공(戰功)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적병(敵兵)을 괴롭게 하여 마음대로 횡행(橫行)치 못하게 하고 우리 나라 백성(百姓)에게 한줄기의 기(氣)를 넣어준 공(功)은 적지 아니하였으며 특(特)히 승병(僧兵)의 힘이 또한 적지 아니하니 승(僧) 유정(惟政)(호(號)는 사명산인(泗溟山人))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고제(高弟)로서 승병(僧兵)을 모아 비록 실전(實戰)에는 참가(參加)치 아니하였으나 물자(物資)의 운반(運搬)과 여러 가지 역사(役事)에 큰 조력(助力)을 하였다.

이때 국군(國軍)들도 점차(漸次)로 세력(勢力)을 얻어서 왜병(倭兵)을 쳐 부시려는 용기(勇氣)를 내게되고 권율(權慄)은 이기(梨崎)(배티,대둔산부근)에서, 이정암(李廷馣)은 연안(延安)에서, 김시민(金時敏)은 진주(晉州)에서 모두 크게 이겼다.

이 정도(程度)의 병력(兵力)만으로는 전국(全國)에 가득히 찬 적(敵)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왕(王선조(宣祖))은 의주(義州)에 있어서 유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호(號)는 백사(白沙) 이덕형(李德馨)(호(號)는 한음(漢陰)등(等)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하는데 난(亂)이 일어난 후(後)에 당쟁(黨爭)은 일시(一時) 멈추어 졌으나 그 저류(底流)에는 여전(如前)이 동서(東西)의 알력(軋轢)이 있음으로 왕(宣祖王)은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有西東」가 하여 東西의 싸움이 國家로 하여금 이 地境을 만들어 놓고 또 여기까지 몰려와서 東西 싸움을 하느냐 恨歎하였다.

國事가 이에 이르매 獨力으로는 恢復할만한 길이 없음으로 明나라에 請兵하기로 決定하였다. 이때 明나라에서는 이상(異常)한 와언(訛言)이 전파(傳播)되어 조선(朝鮮)이 왜(倭)와 공모(共謀)하여 명국(明國)을 치러온다고 하였다 그 증거(證據)로는 왜병(倭兵)이 들어온後 한번의 결전(決戰)도 없이 왕(王宣祖)은 압록강(鴨綠江) 변(邊)까지 들어오고 왜병(倭兵)은 평양(平壤)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청병(請兵)하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이를 변명(辨明)하고 또 원병(援兵)을 보내어 달라고 간청(懇請)하였으며 明나라에서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일본수길(日本秀吉)이 장차(將次) 명(明)나라를 치기 위(爲)하여 조선(朝鮮)에 길을 빌려달라 하고 조선(朝鮮)이 그를 거절(拒絶)하자 곧 침입(侵入)한 사정(事情)과 명국(明國)의 울타리가 되고있는 조선(朝鮮)이 명국(明國)을 대신(代身)하여 왜구(倭寇)의 화(禍)를 받고있다는 사실(事實)을 확실(確實)히 알게되고 이에 조선(朝鮮)에 원병(援兵)을 보내기로 결정(決定)하였다. 그리하여 癸巳年 正月에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사만(四萬)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평양(平壤)의 적(敵)을 대파(大破)하니 적(敵)이 개성(開城) 방면(方面)으로 물러났다. 이여송(李如松)은 적(敵)을 경(輕)히 여기고 추격(追擊)하여 벽제관(碧蹄舘)에서 싸우다가 패(敗)하고 다시 추격(追擊)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에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크게 적(敵)을 파(破)하니 적(敵)은 제해권(制海權)을 잃어서 보급(補給)이 끊어지고 또 평양(平壤)과 행주(幸州)에서 대패(大敗)하여 기세(氣勢)가 점점(漸漸) 줄어들더니 이여송(李如松)이 명(明)나라사람 심유경(沈惟敬)을 시켜서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의 사이에 화의(和議)를 진행(進行) 시켰음으로 왜병(倭兵)은 이해 사월(四月)에 경성(京城)을 물러나서 남해안(南海岸)으로 내려갔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래 머물 계획(計劃)을 세우고 또 전일(前日)에 진주(晉州)에서 패(敗)한 것을 분(憤)하게 여겨서 십여만(十餘萬)의 군사(軍士)로 진주성(晉州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전번(前番)에 김시민(金時敏)이 진주(晉州) 싸움에 대승(大勝)할 때는 수천병(數千兵)으로써 적(敵)의 십만병(十萬兵)을 물리쳤는데 이번에는 성중병(城中兵)이 육만(六萬)에 이르니 사람마다 모두 성(城)을 지키기에 아무 염려(念慮)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직 진주(晉州) 기생(妓生) 논개(論介)가 근심하였다.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이 그 연고(緣故)를 물으니 논개(論介)가 대답(對答)하되 전번(前番)에는 군사(軍士)가 비록 적으나 장수(將帥)가 서로 사랑하고 호령(號令)이 한군데서 나온 까닭에 이겼지만 이번은 군사(軍士)가 비록 많으나 통솔(統率)이 없고 장수(將帥)가 병(兵)을 알지 못하니 이 까닭에 근심한다고 하였다.

성중(城中)은 구일(九日) 구야(九夜)의 동안에 백여(百餘)차례를 싸워서 번번히 적을 막으나 마침내 성(城)이 함락(陷落)하고 성중(城中)의 백성(百姓)들까지 모두 칠만명(七萬名)이 죽으니 그 참혹(慘酷)하기가 임진란(壬辰亂) 중(中)에서도 가장 심(甚)하였고 논개(論介)는 적장(敵將)에 끌려서 촉석루(矗石樓) 아래의 암상(岩上)에서 적(敵)의 주연(酒宴)에 나갔다가 적장(敵將)의 허리를 안고 함께 강중(江中)에 떨어져 죽으니 후인(後人)이 이 암석(岩石)을 의기암(義妓岩)이라고 이름지었다.

왕(王宣祖)은 경성(京城)이 수복(收復)한 후(後) 경성(京城)을 떠난지 일년반(一年半)만에 구도(舊都)에 돌아왔다. 그러나 왜병(倭兵)이 아직 남방(南方)에 가득히 차있어 어느 때에 다시 쳐올지 알 수 없고 심유경(沈惟敬)의 화의(和議)의 대(對)하여는 반대(反對)의 태도(態度)를 취하고 명(明)나라에 적극(積極) 남공(南攻)하기를 청(請)하였다 명(明)나라에서는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원수(遠輸)하기가 곤란(困難)하다하여 구차(苟且)히 화의(和議)를 성립(成立)시키려하니 왕(王宣祖)은 국력(國力)이 약(弱)하여 독력(獨力)으로 왜(倭)를 섬멸(殲滅)치 못함을 슬퍼하여 군제(軍制)의 대(大) 개혁(改革)을 제안(提案)하니 이 안(案)은 예(隸)를 해방(解放)하여 군사(軍士)로 쓰자는 것인데 이는 군제(軍制) 개혁(改革)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계급제도(社會階級制度)의 일대(一大) 혁명(革命)이 되는 것이다.

아국(我國)의 군제(軍制)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군역(軍役)이 면제(免除)되고 노예계급(奴隸階級)은 천인(賤人)이라 하여 군역(軍役)에 참여(參與)치 못하게 하니 그 까닭은 만일 천인(賤人)이 먼저 입대(入隊)하여 군교(軍校)가 되고 양민(良民)이 후(後)에 입대(入隊)하여 병졸(兵卒)이 되면 양민(良民)이 천인(賤人)의 지휘(指揮)를 받게되어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양민(良民)이나 천인(賤人)이나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오 또 국가(國家)의 앞날을 생각하여 볼때 군사(軍士)가 부족(不足)한 현실(現實)을 타개(打開)하려면 수십만(數十萬)의 천인(賤人) 장정(壯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 종래(從來)의 계급제도(階級制度)를 깨뜨리고 천인(賤人)을 양민(良民)과 함께 군사(軍士)로 쓰게 하려하니 제신(諸臣)들은 이를 잘 토의(討議)하라고 영(令)을 내렸다.

조정(朝廷) 제신(諸臣)중(中)에는 여기에 찬성(贊成)한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사노(私奴)를 많이 부리고 있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강경(强硬)한 반대운동(反對運動)을 일으켰으니 그 이유(理由)는 노주(奴主)의 분(分)은 군신(君臣)의 분(分)과 같으매 만일 노예(奴隸)를 해방(解放)하여 양민(良民)을 만들면 이는 강상(綱常)이 무너지는 것이라 하니 기실(其實)은 국가(國家)의 강상(綱常)을 존중(尊重)히 여기는 데서 나온 주장(主將)이 아니라 전(專)혀 노예(奴隸)를 부려서 호화(豪華)한 생활(生活)을 누리려는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왕(王宣祖)의 제안(提案)이 마침내 통과(通過)되지 못하니 왕(王宣祖)은 「국가(國家)를 살리는 최선(最善)의 안(案)이 개인(個人)들의 사심(私心)때문에 실행(實行)되지 못하니 가탄(可歎)한 일이로다.」하고 이 제도(制度)를 공노(公奴)에게만 시행(施行)하였다. 공노(公奴)중(中)에는 주야(晝夜)로 무예(武藝)를 연습(練習)하여 군대(軍隊)에 들어가서 양민(良民)이 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한편(便)으로 양반계급(兩班階級)의 여러 가지 방해(妨害)로 인(因)하여 완전(完全)한 실시(實施)를 보지 못하였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으로 물러간 후(後)에 명(明)나라와의 사이에 화의(和議)가 진행(進行)되어 차츰 본국(本國)으로 물러가더니 양국(兩國)의 대표(代表) 사이에 결정(決定)한 화의(和議) 조건(條件)과 명(明)나라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보낸 칙서(勅書)의 내용(內容)이 서로 틀린다 하여 선조(宣祖) 삼십년(三十年) 정유(丁酉)에 다시 대군(大軍)을 보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유란(丁酉亂)이라 한다.

왜병(倭兵)은 전번(前番)의 실패(失敗)에 삼가서 수군(水軍)을 더 증가(增加)하고 또 미리 간첩(間諜) 요시라(要詩羅)를 놓아서 우리 조정(朝廷)과 이순신(李舜臣)과의 사이를 이간(離間)하니 우리 조정(朝廷)에서는 그 모략(謀略)에 넘어가서 이순신(李舜臣)을 잡아다가 옥(獄)에 가두고 장차(將次)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事件)의 이면(裏面)에는 역시(亦是) 당파(黨派) 싸움이 숨어 있으니 조정(朝廷)이 의주(義州)에 있을 동안은 당쟁(黨爭)이 한동안 멈추고 있더니 경성(京城)에 환도(還都)한 후(後)에 다시 재연(再燃)하여 북인(北人)의 세력(勢力)이 우세(優勢)한 판인데 이순신(李舜臣)은 유성룡(柳成龍)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유성룡(柳成龍)은 남인(南人)이기 때문에 북인(北人)들은 이순신(李舜臣)을 당쟁(黨爭)의 희생(犧牲)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이순신(李舜臣) 처치(處置)에 대(對)하여 의견(意見)을 유성룡(柳成龍)에게 물으니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李舜臣)은 명장(名將)이라 왜인(倭人)의 말을 듣고 함부로 죄(罪)줄 수도 없고 또 전란(戰亂)이 끝나지 아니한 때 이런 명장(名將)을 죽이는 것은 불가(不可)하다」하였다.

왕(王宣祖)은 이 말을 중(重)히 여겨 다만 면직(免職)시키고 석방(釋放)하니 이때 사신(史臣)은 이를 평(評)하기를 「남해(南海)를 홀로 지켜서 국맥(國脈)을 붙잡고 오던 명장(名將)이 적(敵)의 모개(謀介) 이간(離間)과 당쟁(黨爭)의 여파(餘波)로 이런 일을 당(當)하니 멀리 남방(南方)의 적세(賊勢)를 바라보고 가까이 조정(朝廷)의 형편(形便)을 살펴봄에 가슴속에서 통곡(痛哭)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구나」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면직(免職)된 뒤에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니 원균(元均)은 본시(本是)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사(水使)로 있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통제사(統制使)가 된 뒤에 그 부하(部下)되기를 부끄러워하여 항상(恒常) 이순신(李舜臣)을 조정(朝廷)에 모해(謀害)하던 자(者)이오 먼저에 이순신(李舜臣)이 죄(罪)를 받은 것도 원균(元均)의 모해(謀害)가 유력(有力)한 일인(一因)이 된 것이다. 왜병(倭兵)들은 원균(元均)이 이순신(李舜臣)을 대신(代身)함을 듣고 수군(水軍)을 크게 발(發)하여 우리 수군(水軍)을 치니 원균(元均)이 대패(大敗)하여 육지(陸地)에 올라와 도망(逃亡)하였는데 그 생사(生死)는 세상(世上)이 알지 못하며 적(敵)은 전라도(全羅道) 해안(海岸)을 점령(占領)하고 멀리 충청도(忠淸道)의 직산(稷山) 당진(唐津)에 까지 침입(侵入)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크게 당황(唐慌)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라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순신(李舜臣)으로 통제사(統制使)를 삼았다. 이때 왜병(倭兵)이 전라도(全羅道) 육지(陸地)에 깊이 들어와 싸우므로 이순신(李舜臣)은 산곡(山谷)길을 좇아 우수영(右水營)에 이르니 전선(戰船)의 남은 것이 겨우 십이척(十二隻)이라 피난선(避難船)을 모아 가지고 진도(珍島)의 울돌목(명량(鳴梁)에서 적선(敵船) 오백척(五百隻)을 무찌르고 고금도(古今島)를 무찌르니 적(敵)의 세력(勢力)이 꺾이어서 다시 서해(西海)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 육지(陸地)에서는 명(明)나라 원군(援軍)이 남원(南原)에서 패(敗)하고 또 울산(蔚山) 사천(泗川) 순천(順天)등지(等地)에 진지(陣地)를 쌓고 적(敵)과 싸우다가 모두 패(敗)하였다.

적세(敵勢)가 다시 성(盛)함을 보고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사람 김덕령(金德齡)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김덕령(金德齡)은 용력(勇力)이 있고 안광(眼光)이 횃불과 같아서 대적(對敵)하는 바가 없고 왜병(倭兵)이 두려하여 감(敢)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충청도(忠淸道)에서 반란군(叛亂軍)이 일어나서 김덕령(金德齡)도 자기(自己)들과 합모(合謀)한다고 선전(宣傳)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곧 김덕령(金德齡)을 잡아다가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그 무죄(無罪)함을 알았으나 김덕령(金德齡)은 이귀(李貴)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이귀(李貴)는 서인(西人)이라 동인(東人)이 조정(朝廷)안의 세력(勢力)을 잡고 있는데 김덕령(金德齡)의 목숨을 구원(救援)하여 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김덕령(金德齡)같은 용장(勇將)을 방면(放免)하였다가 후일(後日)에 만일 반란(叛亂)을 일으키면 억제(抑制)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죽였다.

우리 나라 군사(軍士)와 명(明)나라 군사(軍士)는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랫동안 적병(敵兵)과 대치(對峙)하고 있더니 선조(宣祖) 삼십일년(三十一年) 무술(戊戌) 십일월(十一月)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으면서 왜병(倭兵)을 철수(撤收)시키는데 이순신(李舜臣)은 그 퇴로(退路)를 막고 경상도(慶尙道) 노량(露梁)에서 적(敵)을 맞아 싸워 크게 파(破)하더니 적(敵)의 탄(彈)알에 맞아 전사(戰死)하고 적(敵)이 도환(逃還)한 자(者)가 겨우 오십여척(五十餘隻)에 불과(不過)하고 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이 이로써 끝났다. 이때 조정(朝廷)의 일부(一部)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만일 전승(戰勝)하고 돌아오더라도 반드시 간신(奸臣)들의 모해(謀害)로 죽을 것이니 차라리 전사(戰死)하리라」하고 일부러 투구를 벗고 탄(彈)알에 죽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일본(日本)이 무단(無端)히 군사(軍士)를 일으켜서 인국(隣國)을 침략(侵略)하여 무고(無辜)한 인민(人民)을 함부로 살륙(殺戮)하고 우리 나라는 기근(饑饉)과 질병(疾病)이 이에 겹 들여서 참혹(慘酷)한 화(禍)가 몽고(蒙古)의 침입(侵入)보다 더 심(甚)하였고 명(明)나라가 오랫동안 군사(軍士)를 움직여서 이 때문에 나라가 몹시 병폐(病弊)하였다.

명(明)나라 군사(軍士)가 우리 나라에 와서 있는 동안에 횡폭(橫暴)한 일도 적지 아니하고 소위 관왕묘(關王廟)라 하여 중국(中國) 옛날의 관우장군(關羽將軍)을 모시고 선조(宣祖) 왕(王)으로 하여금 절하게 하는 일도 있어 우리 나라를 괴롭게 함이 많았으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란(大亂)을 구(求)해 주는 은혜(恩惠)를 깊이 감사(感謝)하여 아무런 불평(不平)도 말치 아니 하였고 명(明)나라는 이 난리(亂離)에서 많은 군사(軍士)와 재물(財物)을 잃은 까닭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만주족(滿洲族)에게 망(亡)하게 되니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깊이 명(明)나라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오래 잊지 아니 하였다.

이 난리(亂離)에 무기(武器)의 발달(發達)한 것은 구선(龜船) 이외(以外)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있으니 이는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대포(大砲)로써 이 포(砲)가 터지면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震動)하고 철편(鐵片)이 튀어 나가서 적(敵)을 해치는 것인데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석(朴昔)이 이 포(砲)를 써서 경주(慶州)를 회복(恢復)하였다. 왜병(倭兵)으로부터 얻은 조총(鳥銃)은 본시(本是) 일본(日本)이 서양(西洋)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인데 우리 나라도 이 법(法)을 얻은 후(後)에 공장(工匠)에게 명령(命令)하여 제조(製造)하니 이가 우리 나라가 총(銃)을 사용(使用)한 처음이다. 왜병(倭兵)은 물러갈 때에 여러 가지 기술자(技術者)를 사로잡아 가고 특(特)히 그 중(中)에는 도공(陶工)이 가장 많았음으로 일본(日本)의 도자기(陶磁器) 공업(工業)이 이로부터 시작(始作)하였다. 왜병(倭兵)은 저희들도 많은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희생(犧牲)하고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이 돌아갔으나 우리 나라의 우수(優秀)한 기술(技術)을 배워 갔음으로 저희들끼리 말하기를 「무장(武裝)한 유학생(遊學生)을 조선(朝鮮)에 보냈다」고 하였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은 후(後)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새로이 막부(幕府)를 열어서 이전(以前)의 잘못을 말하고 국교(國交)를 회복(恢復)하기를 거듭 청(請)하며 또 그들에게 사로잡혀간 수천(數千)명(名)의 포로(捕虜)를 돌려보내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日本)에 대(對)한 복수심(復讐心)이 복 받혀서 허락(許諾)치 아니하더니 양국간(兩國間)에 오랫동안 국교(國交)가 끊어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전쟁(戰爭)이 끝난지 칠년(七年)만에(을사(乙巳))일본(日本)의 소원(所願)을 들어서 부산(釜山)에 다시 왜관(倭館)을 열고 대마도(對馬島)와의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하여 그 후(後) 삼백년(三百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난후(亂後)의 형세(形勢)

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은 비록 끝났으나 기경(起耕)치 못한 토지(土地)가 적지 아니하고 집과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고 생계(生計)를 잃은 백성(百姓)이 수(數)없이 많고 산곡(山谷)에 피난(避難) 갔던 사람들은 기아(飢餓)를 견디지 못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하면서 겨우 고향(故鄕)에 돌아 왔으나 의지(依支)할 곳이 없어서 도로(道路)에서 방황(彷徨)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이러한 난민(難民)에 대(對)하여 아무런 구제책(救濟策)이 없었고 더욱이 난중(亂中)에 국적(國籍)의 대부분(大部分)이 없어졌는데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은 남의 토지(土地)를 모경(冒耕)하여 자기(自己)의 토지(土地)를 만들려하니 도처(到處)에서 전송(田訟)이 일어나되 관가(官家)에서 이를 적당(適當)하게 처리(處理)치 못하였고 조정(朝廷)에서는 토지측량(土地測量)에 착수(着手)하였으나 사무(事務)가 자리를 잡지 못하여 잘 진척(進陟)되지 아니 하였다. 한 편(便)으로는 당쟁(黨爭)이 더욱 심(甚)하여 북인(北人)들 끼리에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눠져서 그 세력(勢力) 다툼은 일보(一步)를 나아가 왕위(王位) 쟁탈전(爭奪戰)과 엉켜지게 되었으니 이는 관인(官人)들 끼리에만 세력(勢力)을 다투기 보다 세력(勢力)의 발원(發願)인 군왕(君王)을 자기들 편(便)에 넣는 것이 가장 유력(有力)하기 때문이다. 당쟁(黨爭)이 이와 같이 심각(深刻)하게 되니 난후(亂後)의 모든 정리(整理) 같은 것은 아무런 효과(效果)를 나타내지 못하고 말았다.

선조(宣祖)의 다음 임금 광해군(光海君)은 본시(本是) 난중(亂中)에 인심(人心)을 수습(收拾)하려고 갑자기 세자(世子)로 세운 것이라 선조(宣祖)가 이를 바꾸려는 뜻이 있었다. 이 기미(機微)를 알고 소북파(小北派)는 선조(宣祖)의 뜻을 받들려 하고 대북파(大北派)는 세자(世子)를 옹호(擁護)하여 서로 다투더니 선조(宣祖)가 병중(病中)에 대북파(大北派)를 척축(斥逐)하던 중(中) 급졸(急猝)히 승하(昇遐)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왕위(王位)에 오르고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等)이 세력을 잡으니 항간(巷間)에서는 선조(宣祖)가 과독(過毒)하였다고 전(傳)했다.

당시(當時) 세납(稅納)은 토지(土地)의 소출(所出)로써 바치는 조세(租稅)와 지방(地方)의 특산물(特産物)을 바치는 공물(貢物)과 병역(兵役)과 부역(賦役) 대신(代身)으로 바치는 군포(軍布)가 있었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폐해(弊害)가 따르고 더욱이 대란(大亂)을 치른 후(後)로 토지제도(土地制度)와 세제(稅制)가 극도(極度)로 문란(紊亂)하여졌음으로 광해군(光海君) 즉위(卽位) 초(初) 이원익(李元翼)(호(號) 오리(梧里))이 대동법(大同法)을 설(設)하기를 청(請)하였다. 이 법(法)은 선혜청(宣惠廳)이라는 기관(機關)을 두고 매년(每年) 춘추(春秋)에 전(田) 일결(一結)에 미(米) 팔(八)되를 거두어 경고(京庫)에 수납(收納)하여 수시(隨時)로 국비(國費)를 지출(支出)하는데 각(各) 사사주인(司私主人)으로 하여금 上供하는 제(諸) 물품(物品)을 수납(收納)케 하고 이 외(外)에는 척포(尺布) 승미(升米)도 민호주(民戶主)로부터 가징(加徵)치 못하게 하여서 사주인私主人 방납계배(防納計倍)의 폐(弊)를 끄치려 함이라 광해군(光海君)은 이 제도(制度)를 경기도(京畿道)에 먼저 시험적(試驗的)으로 행(行)하니 거실(巨室)호민(豪民)과 사주인(私主人)들이 모두 방납(防納)의 대리(大利)를 잃고 백방(百方)으로 저해(沮害)함으로 광해군(光海君)은 여러 번 이 제도(制度)를 파(罷)하려 하였으나 경기(京畿)백성(百姓)들이 일제(一齊)히 그 편리(便利)함을 말하고 파(罷)하지 못하도록 다툰 까닭에 계속(繼續)하여 행(行)하고 그 후(後)에 점차(漸次)로 타도(他道)에 시행(施行)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성질(性質)이 사납고 어두워서 정치(政治)가 몹시 어지럽고 대북파(大北派)를 중용(重用)하여 그 형(兄) 임해군(臨海君) 이하(以下) 동기(同氣)를 많이 죽이고 선조(宣祖) 왕비(王妃)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廢)하여 서궁(西宮)에 유폐(幽閉)하고 폐모(廢母)에 반대(反對)하는 이원익(李元翼)(오리(梧里)) 이항복(李恒福)(필운(弼雲),백사(白沙)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정온(鄭蘊)(호(號) 동계(桐溪))등(等)을 죄(罪)주었다. 이항복(李恒福)이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으로 귀양가는 길에 철령(鐵嶺)에 올라서서 「철령(鐵嶺)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본들 어떠하리」라는 노래를 지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세력(勢力)을 잃고 기회(機會)를 엿보고 있던 서인(西人)들이 비밀(秘密)히 반정(反正)할 꾀를 꾸미더니 광해군(光海君) 십년(十年)에 이귀(李貴)(黙齋), 김류(金瑬)(北渚)等이 中心이 되어 반정군(反政軍)을 일으켜서 왕(王)을 강화도(江華島)에 내치고 왕(王)의 조카 능양군(綾陽君)을 맞아드려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인조(仁祖)이다.

임진(壬辰)란(亂)이 끝난 지 이미 이십여년(二十餘年)이라 난후(亂後) 정리(整理)도 채 되지 못한 위에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이 또 십오년(十五年) 동안을 계속(繼續)하니 국가(國家)의 정치(政治)는 말할 수 없이 헝클어지고 백성(百姓)의 생활(生活)은 극도(極度)의 곤궁(困窮)에 빠졌다. 이에 인조(仁祖)는 이원익(李元翼)을 불러들여 정승(政丞)을 삼고 난마(亂麻) 같은 정치(政治)를 정리(整理)하는데 이원익(李元翼)은 대동법(大同法)을 팔도(八道)에 모두 시행(施行)하기를 극력(極力)으로 주장(主將)하였다. 그 때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많아서 경기도(京畿道) 이외(以外)에 겨우 충청도(忠淸道)에 시행(施行)하니 백성(百姓)들은 모두 이 법(法)을 대환영(大歡迎)함으로 얼마후(後)에 반대론(反對論)을 물리치고 팔도(八道)에 시행(施行)하였다.

처음에 반정(反正)을 꾀하던 여러 사람들은 오직 국가(國家)와 백성(百姓)을 위(爲)하여 거의(擧義)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반정후(反正後) 공신(功臣)들의 대부분(大部分)은 순전(純全)히 사리(私利)를 위(爲)하여 행동(行動)하고 공신(功臣)이라는 특권(特權)을 이용(利用)하여 모리(牟利) 행위(行爲)를 자행(恣行)함으로 국인(國人)의 비난(非難)이 적지 아니 하였고 김장생(金長生)(사계(沙溪) 같은 이는 공신(功臣)들에게 글을 보내어 반정(反正) 거의(擧義)한 것은 일국(一國)이 칭송(稱誦)하는 일이나 공(功)을 빙자(憑藉)하고 사리(私利)를 도모(圖謀)하면 후세(後世)의 공론(公論)이 이를 무엇이라고 평(評)하랴 경고(警告)한 일도 있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밖에 있는 여진족(女眞族) 즉(卽) 야인(野人)은 명(明)나라에서도 억제(抑制)하기 어려워서 항상(恒常) 회유(懷柔)하여 오던 터이라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우리 나라 북변(北邊)을 침입(侵入)하려는 계획(計劃)이 있었는데, 만일 이때에 야인(野人)이 침범(侵犯)하였다면 우리 나라는 복배(腹背)로 적(敵)을 받아서 지탱(支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육진(六鎭)의 수비를 튼튼히 한 까닭에 아무 일 없었다. 그 후(後)에 야인(野人)들은 명(明)나라 세력(勢力)이 약(弱)해짐을 보고 점차(漸次)로 기세(氣勢)를 펴는 중(中)에 여진족(女眞族)중(中)에서 노아합적(奴兒哈赤)(누르하치)이 일어나서 만주(滿洲)에 있는 여러 부족(部族)을 통일(統一)하고 광해군(光海君) 팔년(八年)에 임금이 되고 왕호(王號)를 「대한(大汗)」이라 하고 심양(瀋陽)(봉천(奉天))에 도(都)하고 국호(國號)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맹렬(猛烈)한 기세(氣勢)로 명(明)나라에 쳐들어갔다. 명(明)나라에서는 우리 나라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였음으로 광해군(光海君)은 강홍립(姜弘立) 등(等)으로 하여금 군사(軍士) 일만명(一萬名)을 거느리고 가서 명(明)나라를 돕게 하니 이는 임진(壬辰)란(亂)의 은혜(恩惠)를 갑기 위(爲)함이라 그러나 명(明)나라 군사(軍士)가 패(敗)하고 강홍립(姜弘立)은 만주(滿洲)에 항복(降服)하고 그 후(後)로부터 광해군(光海君)은 될수록 중립(中立)을 지켜서 만주(滿洲)가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와서 동맹(同盟)하기를 청(請)하였으나 응(應)하지 아니하고 또 명(明)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보내기를 교섭(交涉)하였으되 역시(亦是) 주저(躊躇)하고 있었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후(後)에 조정(朝廷)에서는 광해군(光海君)의 중립정책(中立政策)이 명(明)나라에 대(對)한 의리(義理)에 어긋났다하여 가도(假島)(평안도 피섬)에 와 있는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을 도와서 그와 긴밀(緊密)한 관계(關係)를 맺었다.

처음에 인조반정(仁祖反正)할 때에 이괄(李适)의 공(功)이 적지 아니하였는데 조정(朝廷)의 처사(處事)가 이괄(李适)의 마음에 만족(滿足)치 아니하였음으로 이괄(李适)은 평안도(平安道)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풍우(風雨)같이 달려와서 경성(京城)을 점령(占領)하였다. 인조(仁祖)는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에 피난(避難)하고 장만(張晩), 정충신(鄭忠信), 이서(李曙) 등(等)으로 하여금 이를 쳐서 깨뜨리고 이괄(李适)이하 여러 수령(首領)들을 죽이니 그 여당(餘黨)이 만주(滿洲)로 도망(逃亡)하여 들어가서 만주(滿洲) 임금 태종(太宗)을 충동(衝動)시켜 조선(朝鮮)을 치기를 청(請)하였다.

이때 만주(滿洲)는 우리 나라가 명(明)나라를 돕고 있는 형세(形勢)를 살피고 힘으로 누르려고 하던 차(次)이라 아민(阿敏)이라는 장수(將帥)로 하여금 군사(軍士) 삼만(三萬)을 거느리고 인조(仁祖) 오년(五年) 정묘(丁卯)에 쳐들어왔다. 조정(朝廷)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적군(敵軍)을 막고 왕(王仁祖)은 강화도(江華島)에 피난(避難)하더니 마침내 그들과 형제(兄弟)의 의(誼)를 맺고 적군(敵軍)이 물러가니 이를 정묘호란(丁卯虎亂)이라 한다.

그 후(後) 만주(滿洲)의 세력(勢力)은 더욱 강(强)해지고 그 임금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太宗)은 용병(用兵)을 잘하여 중국(中國)과 몽고(蒙古)를 점차(漸次)로 약취(略取)하고 우리 나라에 대(對)하여 형제국(兄弟國)의 약조(約條)를 고쳐서 군신(君臣)국(國)으로 만들자고 함에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분(憤)하게 여겨서 그들과 절교(絶交)하자고 주장(主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만주(滿洲)는 국호(國號)를 청(淸)이라 고치고 천자(天子)의 호(號)를 칭(稱)하고 우리 나라에 대(對)하여 저희에게 존호(尊號)를 바치라고 요구(要求)하니 이에 양국(兩國)의 국교(國交)는 몹시 험악(險惡)하였다.

이때 조정(朝廷)에서는 청병(淸兵)이 반드시 침입(侵入)할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오직 입으로 청국(淸國)을 배척(排斥)하는 소리만 높을 뿐이오 침입(侵入)하는 것을 막을만한 준비(準備)는 전연(全然) 없었다.

조신(朝臣) 중(中)에는 이미 양국(兩國)의 화(和)가 끊어지고 또 방비책(防備策)도 세우지 않으면 국가(國家)의 장래(將來)가 어떻게 될 것이냐고 근심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고 윤황(尹煌)(八松)같은 이는 「이미 和하지 못하고 또 싸우지도 못하면 이는 앉아서 나라를 亡케 함이라 다시 和할 수가 없다면 싸울 準備를 急히 갖춰야 될 것인데 只今에 軍士도 없고 軍糧도 없으니 이제로부터 이를 準備하여 淸兵을 막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 오직 한가지 방법(方法)은 왕(王)이 여러 신하(臣下)를 거느리고 모두 창(槍)을 집고 활을 메고 선진(先陣)에 나가서 개성(開城)이나 평양(平壤)에 진주(進駐)하여 전국(全國)에 호령(號令)을 내리면 이 소식(消息)을 들은 의병사(義兵士)들이 반드시 무기(武器)를 준비(準備)하고 양식(糧食)을 등에 지고 스스로 달려와서 국난(國難)에 부(赴)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순월(旬月)사이에 정병(精兵) 수만(數萬)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 방법(方法)만이 나라를 구(救)하는 길이라」하여 친정론(親征論)을 역설(力說)하였다.

그러나 조정(朝廷) 내(內)에는 김류(金瑬)와 김자점(金自點)의 세력(勢力)싸움이 벌어지고 붓대와 혀끝으로 적(敵)을 꾸짖을 뿐이오 아무런 계획(計劃)도 없는 자(者)들이 대부분(大部分)이니 이 친정론(親征論)이 실행(實行)되지 못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中)에 인조(仁祖) 십사년(十四年) 병자(丙子) 십이월(十二月)에 청태종(淸太宗)이 스스로 군사(軍士) 십만(十萬)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는데 이때 우리 나라의 명장(名將) 임경업(林慶業)(고송(孤松))이 의주(義州)부윤(府尹)으로 있으면서 백마(白馬)산성(山城)을 굳게 지키고 있음으로 청병(淸兵)은 이를 피(避)하여 창성(昌城)의 간도(間道)로 나와서 도중(道中)에서 만나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경성(京城)에 통보(通報)하는 길을 끊고 신도겸행(信道兼行)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넌지 사월(四月)만에 선진(先陣)이 경성(京城) 교외(郊外) 십여리허(十餘里許)에 이르니 조정(朝廷)에서는 몽상(夢想)도 못하던 일이라 상하(上下)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먼저 왕자(王子)를 비롯하여 대신(大臣)들의 가족(家族)을 강화도(江華島)로 피난(避難)시키니 이는 청병(淸兵)이 침입(侵入)하는 때에 가장 안전(安全)한 피난지(避難地)로 설비(設備)하여 둔 곳이오 또 청병(淸兵)을 막을 준비(準備)를 하지 아니한 것도 전(專)혀 이 강화도(江華島)를 믿었기 때문이다.

왕(王仁祖)은 제신(諸臣)을 거느리고 강화(江華) 반월(半月)로 나가려 하더니 청병(淸兵)이 이미 길을 막았음으로 급(急)히 동대문(東大門)을 나가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니 청병(淸兵)이 뒤를 따라 성(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성(城)에 농거(籠居)한지 사십일(四十日)에 근왕병(勤王兵)은 이르지 아니하고 양식(糧食)이 핍절(乏絶)하여 마(馬)를 잡아먹게 되고 성중(城中) 인심(人心)이 크게 위구(危懼)하여 고성(孤城)을 지키기 어려운 형편(形便)이었다. 하루는 왕(王仁祖)이 성(城)을 순시(巡視)하더니 한 군졸(軍卒)이 왕(王)전(前)에 나와 업드려 말하되 「지금 대장(大將)된 사람은 목숨을 아껴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비단 옷을 입고 성(城)아래에 앉아서 우리 군졸(軍卒)을 독전(督戰)하니 이런 대장(大將)은 아무 소용(所用)이 없는 것인즉 우리 군졸(軍卒) 중(中)에서 대장(大將)을 정(定)하여 주시면 사력(死力)을 내어 싸우리라」하니 왕(王)은 군심(軍心)이 이미 변(變)함을 보고 크게 놀라서 제신(諸臣)과 이를 의론(議論)하는데 혹시(或是) 군변(軍變)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이때 강화도(江華島)를 지키는 대장(大將)은 청병(淸兵)이 바다를 건너서 들어올 수 없는 것을 굳게 믿고 매일(每日) 주연(酒宴)을 베풀고 놀더니 뜻밖에 청병(淸兵)이 성하(城下)에 이르러 쳐들어 왔다. 성중(城中)에서는 비록 군사(軍士)는 있었으나 수족(手足)을 놀릴 사이 없이 함락(陷落)되고 피난(避難) 나갔던 왕자(王子)이하(以下)가 모두 포로(捕虜)되고 대신(大臣)들 가족(家族)의 부녀(婦女)들은 능욕(凌辱)을 당(當)할 것을 두려하여 혹은 목매어 죽고 혹(或)은 바다에 빠져 죽으니 그 참상(慘狀)을 참아 볼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는 강화도(江華島) 함락(陷落)의 소식(消息)을 듣고 모두 낙담(落膽)하여 더 항전(抗戰)할 기(氣)를 전연(全然)잃고 왕(王仁祖)과 최명길(崔鳴吉)(지천(遲川))등(等)은 화의(和議)를 주장(主張)하게 되니 이 화의(和議)라 함은 동등(同等)한 국가(國家)로써 화친(和親)하는 것이 아니오 청(淸)에 굴복(屈服)하고 천자(天子)로 모시는 굴욕적(屈辱的)인 항복(降服)이다. 이에 조신(朝臣) 중(中) 척화파(斥和派)는 군신(君臣)이 모두 전사(戰死)할지언정 결(決)코 오랑캐의 앞에 굴슬(屈膝)하고 살지는 못하리라 하고 최명길(崔鳴吉) 등(等) 주화파(主和派)를 매국적(賣國賊)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왕(王仁祖)은 한갓 죽는 것은 국가(國家)를 위(爲)함이 아니라 하고 다음해 정축(丁丑) 정월(正月)에 삼전도(三田渡)(송파)에서 청병(淸兵)에 항복(降服)하였다.

이에 청태종(淸太宗)은 세자(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인질(人質)로 하고 김상헌(金尙憲) 등(等) 척화신(斥和臣)과 수천명(數千名)의 포로(捕虜)를 끌고 군사(軍士)를 돌렸다.

이때 최명길(崔鳴吉)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尙憲) 등(等) 척화파(斥和派)의 사이에 서로 의심(疑心)이 생긴 까닭은 척화파(斥和派)는 주화파(主和派)로써 부귀(富貴)를 탐(貪)내어 청국(淸國)에 항복(降服)하여 그 지위(地位)를 굳게 하려는 것이라 하고 주화파(主和派)는 척화파(斥和派)로써 참으로 대의(大義)를 세우는 것이 아니오 조명(釣名)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 한 것이다.

그 뒤에 청국(淸國)은 명국(明國)을 치기 위(爲)하여 우리 나라 군사(軍士)를 보내기를 강요(强要)하니 최명길(崔鳴吉)이 극력(極力) 반대(反對)함으로 청(淸)은 최명길(崔鳴吉)을 불러다가 옥(獄)에 가두었다.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鳴吉)은 모두 사생(死生)이 눈앞에 박두(迫頭)하되 조금도 굴(屈)하지 아니하고 끝끝내 대의(大義)를 지켰음으로 종래(從來) 양파(兩派)사이의 모든 의심(疑心)과 오해(誤解)가 풀려버렸다.

우리 나라 사람이 청병(淸兵)에게 잡혀간 것이 적지 아니하고 또 청국(淸國)은 명(明)나라를 칠 군사(軍士)를 보내라고 계속(繼續) 요구(要求)하니 조정(朝廷)에서는 포로(捕虜)된 사람을 돌려오는 것과 군사(軍士)보내기를 거절(拒絶)하는 것이 대청외교(對淸外交)의 가장 중요(重要)한 일이었다. 그러나 청(淸)의 힘이 늘어서 군사(軍士)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었는데 임경업(林慶業)이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명병(明兵)과 싸우게 되자 군사(軍士) 중(中)에 도망(逃亡)하여 명(明)나라에 들어가서 청병(淸兵)의 내용(內容)을 알려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또 포로(捕虜)된 사람을 담배를 주고 돌려온 일이 있으니 담배는 광해군(光海君) 때에 일본(日本)을 거쳐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고 몇 해 아니 되어 국내(國內)에 퍼져서 한 생산업(生産業)이 되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는, 삼국시대(三國時代)는 혹(或)은 대등(對等)한 지위(地位)로써 교제(交際)하고 혹(或)은 외교정책(外交政策)으로 사대(事大)의 예(禮)를 잡더니 몽고(蒙古) 침입(侵入) 후(後)에 그 힘에 굴복(屈服)하여 완전(完全)한 군신(君臣) 관계(關係)가 되고 고려말(高麗末)에 명(明)나라가 중국(中國)을 차지하자 자진(自進)하여 군신(君臣) 관계(關係)를 맺으니 이는 북방(北方) 호족(胡族)에 대(對)하여는 항상(恒常) 적대감정(敵對感情)을 가지면서 한족(漢族)에 대(對)하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대(事大)의 예(禮)를 잡는 고래(古來)의 한 전통(傳統)이었다. 그런데 청국(淸國)은 호족(胡族)이라 국인(國人) 전체(全體)가 그에게 굴복(屈服)하기를 싫어하고 힘만 있으면 그를 쳐보려는 생각을 가졌다.

병자(丙子)의 란(亂)에 힘이 원체(元體) 부족(不足)하여 굴복(屈服)하기는 하였으나 청(淸)에 대한 반항심(反抗心)은 더욱 굳어졌다. 인질(人質)로 갔던 왕자(王子)는 십년(十年)만에 돌아오더니 세자(世子)는 십년(十年) 노고(勞苦)에 귀국(歸國)한지 얼마 아니 되어 병사(病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조(仁祖)의 뒤를 이어 왕(王)이 되니 이가 효종(孝宗)이다.

효종(孝宗)은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백반고초(百般苦楚)를 비상(備嘗)하고 또 청병(淸兵)에 종사(從事)한 일이 있어 그들의 실력(實力)을 잘 알고 있는지라 왕(王)이 된 후(後)에 청(淸)의 원수(怨讐)를 갚을 생각이 간절(懇切)하여 북벌(北伐)할 뜻을 품었다.

이에 송시열(宋時烈)(우암(尤庵)등(等)과 더불어 북벌(北伐) 계획(計劃)을 꾸미고 이완(李浣)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조련(調練)시키고 각지(各地)에 전마(戰馬)를 기르고 주요(主要)한 병참지(兵站地)에 군량(軍糧)을 저치(儲置)하였다. 그리고 이조(李朝)건국(建國)한지 이백오십여년(二百五十餘年)동안에 서북인(西北人)의 사로(仕路)를 막고 가혹(苛酷)한 차별(差別) 대우(待遇)를 하더니 강대(强大)한 청국(淸國)을 치려니 자연(自然)히 서북인(西北人)의 힘을 합(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에 비로소 서북인(西北人) 조용(調用)의 논(論)이 일어났다. 그러나 종래(從來)에 문(文)은 지평장령(持平掌令)에 지나지 못하고 무(武)는 만호첨사(萬戶僉使)에 지나지 못하던 것을 겨우 일이(一二)계급(階級)을 올려 주자는 데 불과(不過)하고 이것조차 조정(朝廷)안의 양반계급(兩班階級)의 방해(妨害)로 인(因)하여 순편(順便)하게 진행(進行)치 못하였다.

한편(便)으로 청국(淸國)과 교통(交通)한 뒤로 중국(中國)의 학문(學問)과 산업(産業)방면(方面)을 보고 돌아온 학자(學者)들 중(中)에는 우리 자체(自體)의 비판(批判)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청국(淸國)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발달(發達)하고 서양학술(西洋學術)이 수입(收入)되어 널리 퍼지고 있는 때이라 우리 나라 사신(使臣)들이 당시(當時) 청(淸)의 서울인 북경(北京)을 내왕(來往)하면서 이러한 중국(中國) 학술(學術)방면(方面)에 눈뜨기 시작(始作)하고 우리의 종래(從來)의 성리학(性理學)만으로는 국력(國力)을 크게 할 수 없으니 위선(爲先) 우리의 고유한 문화(文化)와 역사(歷史) 지리(地理) 등(等)을 연구(硏究)하는 동시(同時)에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學問)을 넓혀서 국내(國內)의 산업(産業)과 외국무역(外國貿易)을 진흥(振興)시켜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를 북학론(北學論)이라 이르고 북학(北學)이라 함은 북(北)으로 선진국(先進國)을 배운다는 뜻이다.

북학론(北學論)을 생(生)하는 학파(學派)를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또는 실학파(實學派)라 하는데 그중(中) 먼저 주창(主唱)한 사람은 유명(有名)한 경제학자(經濟學者)로 칭(稱)하는 유형원(柳馨遠)(반계(磻溪))이었고 실학(實學)의 주창(主唱)은 종래(從來) 정주학(程朱學)만을 숭고(崇高)하던 학풍(學風)의 일대(一大) 변화(變化)이오 또한 침체(沈滯)한 사회(社會) 분위기(雰圍氣)에 일대(一大) 청신기분(淸新氣分)을 주입(注入)한 것이었다.

정치가(政治家)중(中)에는 김육(金堉)(잠곡(潛谷)이 중국(中國)으로부터 철전(鐵錢)을 수입(收入)하여 철화(鐵貨) 제도(制度)의 확립(確立)을 꾀하니 이는 면포(綿布)를 화폐(貨幣)로 사용(使用)하여서는 국내(國內)의 산업(産業)이 발달(發達)될 수 없음으로 기어(期於)히 철화(鐵貨)로써 통화(通貨)를 삼으려 한 것이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주전(鑄錢)을 시작(始作)함으로부터 육백여년(六百餘年)을 지난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철화(鐵貨)가 통화(通貨)로 쓰게 되었으며 또 대동법(大同法)도 김육(金堉)의 강력(强力)한 주장(主張)에 의(依)하여 전국(全國)에 고루 시행(施行)하게 되었다.

또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로 흉년(凶年)이 자주 드는데 흉년(凶年)의 원인(原因)은 주(主)로 한재(旱災)이었고 특(特)히 수도경작(水稻耕作)에 한재(旱災)가 더욱 심(甚)하였다. 이에 효종(孝宗)은 만주(滿洲)에서 보고 온 수차(水車)를 국중(國中)에 보급(普及)시켜서 관개(灌漑)에 적지 않은 편의(便宜)를 주었다.

효종(孝宗)이 북벌(北伐) 계획(計劃)을 세움으로부터 비로소 자기비판(自己批判)이 생겨서 자체(自體)가 얼마나 미약(微弱)하고 침체(沈滯)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학술(學術) 산업(産業) 등(等) 모든 방면(方面)에 개혁(改革)과 쇄신(刷新)의 기운(氣運)이 가득 하였다. 소위(所謂) 북벌(北伐)이라 함은 효종(孝宗)이 복수심(復讐心)에서 나온 일종(一種)의 희망(希望)이오 당시(當時)의 양국(兩國) 국력(國力)을 비교(比較)하여 보아서 결(決)코 실현성(實現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국민(國民) 전체(全體)가 북벌(北伐)의 불가능(不可能)함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 등(等)이 이를 주장(主張)한 것은 왕(王孝宗)의 뜻을 영합(迎合)하여 자기(自己)의 지위(地位)를 고식(固植)하려 한 것이오 아무 진실성(眞實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후(後)에 윤휴(尹鑴)가 북벌(北伐) 론(論)을 주장(主張)한 것도 또한 조명(釣名)을 위(爲)한 것이었다. 효종(孝宗)은 북벌(北伐)하기 위(爲)하여 총수대(銃手隊)를 양성(養成)하였는데 이때 북만주(北滿州)의 흑룡강(黑龍江) 방면(方面)에서는 아라사(俄羅斯)(러시아)인(人) 침략(侵略)이 심(甚)하여 청(淸)과의 사이에 충돌(衝突)이 있으되 청인(淸人)은 항상(恒常) 아(俄) 인(人)에게 패(敗)함으로 청(淸)은 조선(朝鮮) 총수(銃手)의 잘 싸움을 알고 구원(救援)을 청(請)하여 두 번을 우리 총수대(銃手隊)가 들어가서 아(俄) 인(人) 격퇴(擊退)에 성공(成功)하니 이가 우리 나라와 아(俄) 인(人)이 서로 관섭(關涉)한 시초(始初)이었으며 효종(孝宗)은 왕위(王位)에 있은지 십년(十年) (기해(己亥)오월(五月)) 승하(昇遐)하고 북벌(北伐)론(論)은 스스로 사라지고 말았다.

 

서양문화(西洋文化)와의 교섭(交涉)과 외국무역(外國貿易)

이조(李朝)는 정주학(程朱學)을 숭상(崇尙)하고 그 외(外)의 학문(學問)은 일체(一切)로 이단(異端)이라 하여 배척(排斥)함으로 학술(學術)의 발달(發達)할 여지(餘地)가 없었다. 산업(産業) 방면(方面)에 있어서는 오직 농업(農業)을 중(重)히 여기고 공업(工業)을 천(賤)히 여기며 혹시(或是) 공업(工業) 기술(技術)이 능숙(能熟)한 자(者)가 있으면 소위(所謂) 양반(兩班)들은 그를 불러다가 임금(賃金)도 변변히 주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사역(使役) 함으로 기술자(技術者)들은 그 생활(生活)을 유지(維持)할 수 없어서 그 후(後)부터는 그 기술(技術)을 발휘(發揮)치 아니하고 고의(故意)로 조악(粗惡)한 물건(物件)을 만들게되니 그 까닭에 기술(技術)은 점차(漸次)로 퇴보(退步)되고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 국제적(國際的)으로 유명(有名)한 모든 공작물(工作物)이 다시 생산(生産)되지 못하니 유명(有名)한 백제(百濟) 이래(以來)의 조선(造船) 기술(技術) 신라시대(新羅時代)의 건축(建築) 조각(彫刻) 회화(繪畵) 등(等) 기술(技術) 고려(高麗)의 자기(磁器) 제지(製紙) 기술(技術) 등(等)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그러던 중(中) 중국(中國)에서는 명(明)나라 말엽(末葉)에 이태리(伊太利)사람 이마두(伊瑪竇)(마테오 리치)가 북경(北京)에 와서 천주교(天主敎) 당(堂)을 세우고 교리(敎理)와 학술(學術)에 관(關)한 도서(圖書)를 많이 번역(飜譯)하여 낸 뒤로부터 서양(西洋)의 학술(學術)과 기물(器物)이 차차(次次) 퍼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국(中國)을 거쳐 다시 우리 나라에 지래(持來)하게 되었다.

인조(仁祖) 구년(九年) (단기 삼천구백육십사년 신미(辛未))에 정두원(鄭斗源)(호정(壺亭))이 明나라에 갔다가 西洋의 총(銃) 천리경(千里鏡)(망원경) 자명종(自鳴鐘)(시계)등(等)을 가져와서 처음으로 서양(西洋) 문물(文物)을 전(傳)하였으며 효종(孝宗) 때에는 김육(金堉)이 북경(北京)의 흠천감(欽天監)에 사람을 보내어 서양(西洋) 역법(曆法)을 배워다가 효종(孝宗) 사년(四年) (계사(癸巳))부터 시헌역(時憲曆)을 시행(施行)하니 이것이 서양(西洋) 문물(文物)을 직접(直接)으로 채용(採用)한 시초(始初)이었다.

서양(西洋)의 천주교(天主敎)는 선조(宣祖)때에 중국(中國)을 거쳐서 들어온 형적(形迹)이 있고 인조(仁祖)때로부터 서학(西學)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秘密裏)에 민간(民間)에 유포(流布)되고 있었다. 원래(原來) 종교(宗敎)의 포교(布敎)에는 교리(敎理) 이외(以外)에 다른 학술(學術) 공예(工藝) 등(等)을 수반(隨伴)하여 와서 교리(敎理) 선전(宣傳)의 힘을 돕는 것이다. 그 까닭에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불교(佛敎)가 들어올 때에 여러 가지 기술(技術)이 반래(伴來)하고 천주교(天主敎)의 포교(布敎)에도 서양(西洋)문물(文物)의 전래(傳來)가 간접적(間接的)으로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의 학술(學術)과 공업(工業) 기술(技術)에 이색(異色)이 섞이게 되었다.

서양(西洋)사람으로서 직접(直接)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는 선조(宣祖)때에 제주도(濟州道)에 표착(漂着)한 마리이(馬里伊)(포르투칼 사람..)를 비롯하여 인조(仁祖)때에는 화란(和蘭)(네델란드)사람 삼인(三人)이 표착(漂着)하여 왔고 그 중(中)에서도 박연(朴淵)은(벨테브레)은 대포(大砲)를 만드는 기술(技術)이 있고 우리 나라 사람에게 장가를 들어서 살았으며 효종(孝宗)때에는 역시(亦是) 화란(和蘭)사람 하멜등(等)(여수시 바닷가에 하멜공원이 있음) 삼십육(三十六)인(人)이 표류(漂流)하여 와서 십사년(十四年)동안 우리 나라에 구류(拘留)되어 있다가 그 중(中)에서 「하멜」등(等) 육인(六人)이 일본(日本)의 장기(長崎)로 도망(逃亡)하여 그곳에서 본국(本國)에 돌아갔다. 「하멜」이 우리 나라에 관(關)한 책(冊)을 지어내니 서양(西洋) 사람의 손으로 우리 나라가 세계(世界)에 소개(紹介)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외국(外國) 무역(貿易)은 전(前)에는 외국(外國)과의 통상(通商)을 국가(國家) 재정(財政)을 보족(補足)하기 위(爲)하여 통상(通商)에 힘쓰고 거기에 필요(必要)한 시설(施設)을 하였다. 일본(日本)에 대(對)하여는 부산(釜山) 왜관(倭館)을 물이 깊은 초량(草梁)으로 옮기고 선박(船舶)의 왕래(往來)를 편리(便利)하게 하고 청(淸)에 대(對)하여는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의 무역(貿易)을 정기적(定期的)으로 개설(開設)하게 하고 동부(東部) 만주(滿洲)에 대(對)한 회령(會寧) 개시(開市)에도 그때 그때의 적당(適當)한 변통(變通)을 더 하였다. 의주(義州)에서 청인(淸人)의 생사(生絲)를 들여오고 부산(釜山)에서 일본(日本)의 은(銀)을 받아다가 다시 두 나라에 전매(轉賣)하여 그 이익(利益)을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에 보태었고 또 인삼(人蔘)의 수출(輸出)도 적지 아니 하였다.

이조개국(李朝開國) 초(初)에는 남양(南洋) 방면(方面)의 조왜(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섬라(暹羅)(동남아시아 샴, 타이) 유구(琉球)(오끼나와)등(等) 여러 나라가 자주 토산물(土産物)을 가지고 오더니 그 후(後)에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의 해상(海上)에는 왜구(倭寇)의 작폐(作弊)가 심(甚)하여 남양(南洋) 사람들의 직접(直接) 통항(通航)은 끊어지고 그 대신(代身)에 해상(海上) 무역(貿易)으로써 유일(唯一)한 생계(生計)를 삼는 유구(琉球)사람들이 남해(南海) 일본(日本) 조선(朝鮮)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면서 중계무역(中繼貿易)의 이(利)를 취(取)하였다.

이러한 관계(關係)로써 유구(琉球)는 우리 나라에 내왕(來往)이 많고 성종(成宗)때에 가장 빈번(頻繁)하였고 연산군(燕山君) 이후(以後)로 차차(次次) 드물어졌다. 그네들은 대개(大槪) 섬라(暹羅) 안남(安南)(베트남) 남양군도(南洋群島)(괌,싸이판지역) 조왜(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등(等) 남국(南國)의 물자(物資)를 직접(直接) 또는 중국(中國) 경유(經由)로 받아다가 일본(日本) 박다(博多)(규슈)에서는 일본(日本)상인(商人)에 넘기고 우리 나라 삼포(三浦)로 와서는 주(主)로 면포(綿布)와 교역(交易)하여 한번에 수천(數千) 내지(乃至) 수만여필(數萬餘疋)을 가져가는 일도 있었으니 이때의 일본(日本)이나 유구(琉球)는 아직 목면(木棉) 재배(栽培)를 몰라서 일국(一國)의 수요(需要)를 우리 나라에서 가져다가 공급(供給) 하였음으로 우리 나라 면포(綿布)는 국제(國際) 통화(通貨)로써 중요성(重要性)을 가지고 있었다. 인조(仁祖)때에 유구(琉球) 왕(王)이 일본(日本)에 잡혀간 일이 있는데 왕자(王子)가 부왕(父王)을 속(贖)하고자 하여 여러 가지 보화(寶貨)를 배에 싣고 일본에 가다가 바람에 표류(漂流)되어 제주도(濟州道)에 내박(來泊)하였다. 그때 제주도(濟州道) 목사(牧使)는 그 보화(寶貨)를 탐내어 취(取)하려 하였으나 응(應)하지 아니 함으로 불법입국(不法入國)하였다는 죄명(罪名) 하(下)에 사형(死刑)에 처(處)하니 왕자(王子)는 부왕(父王)도 속(贖)하지 못하고 아무 죄(罪)없이 이역(異域)에서 죽는 것이 하도 원통(寃痛)하여 보화(寶貨)를 해중(海中)에 집어넣고 글 한 수(首)를 짓고 형(刑)을 받으니 이것이 유구(琉球) 사람이 우리나라에 온 최후(最後)이었다.

堯語難明桀服身 三良入地人誰贖

臨刑何暇訴蒼旻 二子乘舟賊不仁

骨曝沙場纏有草 竹西樓下滔滔水

魂歸故國弔無親 遺恨分明咽萬春

 

堯임금말도 桀에겐 밝히기 어렵고

세사람 묻히니 누가 贖하리오

刑에 臨하여 하늘에 호소할 겨를도 없네

二子乘舟에 적은 어질지 못하네

뼈는 모래밭에 딩굴고 풀마저엉킬터

魂은 고국에 돌아간들 조문할 친척 없네

죽서루아래 도도히 흐르는 물처럼

유한 오열은 분명 만년 봄 하리라

 

 

 

 

사색당쟁(四色黨爭)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은 서인(西人)의 손으로써 된 것임으로 서인(西人)이 정권(政權)을 홀로 차지하고 광해군(光海君)을 도와서 악정(惡政)을 행(行)하던 대북파(大北派)는 전멸(全滅)되고 소북파(小北派)와 남인(南人)은 정치(政治)에 참여(參與)하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다. 그러나 서인(西人)의 횡포(橫暴)가 차차(次次) 심(甚)하였음으로 효종(孝宗) 말년(末年)으로부터 왕(王)은 서인(西人)을 싫어하고 남인(南人)을 등용(登用)하는 일이 많더니 효종(孝宗)의 다음 임금 현종(顯宗)에 이르러서는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함께 조정(朝廷)에 입(立)하였다.

이때 양파(兩派)의 당쟁(黨爭)으로서 소위(所謂) 예송(禮訟)이라는 것이 있으니 효종(孝宗)의 상(喪)에 그 계모(繼母) 조대비(趙大妃)가 어떠한 복(服)을 입어야 옳으냐 함에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 등(等)은 일년(一年)이라 하고 남인(南人) 윤휴(尹鑴) 등(等)은 삼년(三年)이라 하여 서로 싸우다 서인(西人)이 이겼는데 현종(顯宗)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 (효종(孝宗)인(人))의 상(喪)에 다시 그 시어머니 조대비(趙大妃)의 복(服)을 서인(西人) 김수흥(金壽興) 등(等)은 구월(九月)이라 하고 남인(南人) 허적(許積) 등(等)은 일년(一年)이라 하여 이번은 남인(南人)이 이기고 오십년(五十年)동안을 정권(政權)을 잡고 있던 서인(西人)은 정계(政界)에서 쫓겨났다. 이때로부터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당쟁(黨爭)이 더욱 심(甚)하였는데 현종(顯宗)의 다음 임금 숙종(肅宗)의 초년(初年)에는 남인(南人)이 세력(勢力)을 얻고 있더니 숙종(肅宗) 육년(六年)에 서인(西人) 김석주(金錫冑) 등(等)이 당시(當時)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는 허적(許積)의 서자(庶子) 허견(許堅)이 역모(逆謀)를 꾸몄다하여 역옥(逆獄)을 일으켜서 허적(許積) 윤휴(尹鑴) 등(等) 남인(南人)의 영수(領首)들이 원통(寃痛)한 죽음을 당(黨)하고 남인(南人)이 무고(無辜)히 죄(罪)를 입은 자(者)가 천(千)을 넘고 서인(西人)이 다시 정권(政權)을 잡으니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이때 서인(西人)의 수령(首領)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弟子) 윤증(尹拯)과의 사이에 감정(感情)이 어긋나서 두 파(派)로 나뉘었는데 송(宋)의 편(便)을 드는 사람을 노론(老論)이라 하고 윤(尹)의 편(便)을 드는 사람을 소론(少論)이라 하니 이에 서인(西人)은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나뉘고 거기에 남인(南人)과 소북(小北)을 합쳐서 사색(四色)이라 일컬었다. 숙종(肅宗)은 본시(本是) 변덕(變德)이 많은 임금이라 어느 한가지 일이 몇 해 동안 계속(繼續)되면 곧 염증(厭症)이 나서 새 것을 좋아하는 성질(性質)이 있었다. 숙종(肅宗) 십오년(十五年)에 왕(王)이 왕비(王妃) 민씨(閔氏)를 싫어하고 희빈(嬉嬪) 장씨(張氏)를 사랑하고 그가 낳은 아들을 세자(世子)로 봉(封)하려 함에 송시열(宋時烈) 등(等) 서인(西人)이 이를 반대(反對)하였음으로 왕(王)은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민비(閔妃)를 폐(廢)하고 다시 남인(南人)을 쓰니 고대(古代) 소설(小說)로 전(傳)해오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왕(王)이 장빈(張嬪)에 혹(惑)하여 민비(閔妃)를 몰아냄을 풍자(諷刺)한 글이었다.

그러나 숙종(肅宗) 이십년(二十年)에 이르러 왕(王)은 전(前)에 한 일을 후회(後悔)하고 민비(閔妃)를 복위(復位)하고 장빈(張嬪)을 쫓아내고 다시 서인(西人)을 불러 쓰니 이로부터 남인(南人)들은 아주 정계(政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정계(政界)에서 물러난 남인(南人) 학자(學者)들은 벼슬을 체념(諦念)하고 주(主)로 실학(實學) 방면(方面)으로 향(向)하여 고서(古書)의 고증(考證)과 새로운 연구(硏究)가 많이 생기니 그 중(中)에 가장 유명(有名)한 사람은 이익(李瀷)(성호(星湖)이니 그는 유형원(柳馨遠)(반계(磻溪)의 새 학풍(學風)을 계승(繼承)하여 후진(後進)의 길을 개척(開拓)한 대(大) 학자(學者)이었다. 남인(南人)의 패퇴(敗退)는 비록 남인(南人)을 위(爲)하여는 소조(蕭條)한 감(感)이 없지 아니하나 우리 나라 학문(學問)의 발달(發達)을 위 하여는 크게 경하(慶賀)할 일이었다.

정계(政界)의 번복(飜覆)이 이와 같이 잦고 정쟁(政爭)이 이와 같이 험(險)함으로 국가(國家)의 대사(大事)는 모두 방기(放棄)하는 형편(形便)이었다.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두 대란(大亂)을 겪은 뒤에 토지(土地) 겸병(兼倂)의 폐(弊)는 더욱 증장(增長)하여 사회(社會)는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의 양대(兩大) 계급(階級)으로 분열(分列)하고 소작인(小作人)들은 생계(生計)가 점점(漸漸) 어려워서 산림(山林) 중(中)에 들어가서 임목(林木)을 불사르고 경지(耕地)만드는 경향(傾向)이 많았으니 이가 화전(火田)의 시(始)이다. 그러나 조정(朝廷)에서는 이에 대(對)한 아무런 대책(對策)이 없고 이로부터 각지(各地)에 울창(鬱蒼)하던 임목(林木)은 날로 황폐(荒廢)하여졌다.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와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에 천제(天際)에 높이 솟아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우리 나라의 주산(主山)으로 되어있으나 청국(淸國)과의 사이에 과재(跨在)하여 양국(兩國) 국경선(國境線)이 명확(明確)치 아니하였다. 세종왕(世宗王)이 육진(六鎭)을 설치(設置)한 후(後)에 두만강(豆滿江) 북편(北便)의 주민(住民)들이 번호(藩胡)라는 이름으로 대대(代代)로 조정(朝廷)에 공물(貢物)을 바치더니 인조(仁祖)때에 청국(淸國)이 이 지방(地方)에 살던 동족(同族)을 데려감에 이 지방(地方)이 공한(空閑)한 채로 버려져서 피아(彼我)의 유민(流民)들이 비밀(秘密)히 입거(入居)하였다. 그래서 여기가 어느 나라 땅이냐 하는 문제(問題)가 가끔 일어나더니 숙종(肅宗) 삼십팔년(三十八年) 임진(壬辰)에 청국(淸國) 강희(康熙) 제(帝)가 이 지방(地方)의 국경(國境)을 밝히기 위(爲)하여 목극등(穆克登)을 우리 나라에 보내었다. 이때 조선(朝鮮)에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사이에 격렬(激烈)한 당쟁(黨爭)이 벌어지고 있는 때라 국경문제(國境問題)의 중요성(重要性)은 염두(念頭) 에 두지 아니하고 북경(北境) 지리(地理)에 아무런 견식(見識)이 없는 사람들을 백두산(白頭山)에 보내어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경계(境界)를 정(定)하는데 목극등(穆克登)의 주장(主張)에 일언(一言)의 항변(抗辯)도 없이 유유순종(唯唯順從)하여 백두산(白頭山)하(下) 십리(十里)허(許)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서(西)는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東)은 토문강(土門江)이 된다는 글을 새기니 이가 소위(所謂)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이다.

비(碑)를 세운 후(後)에 조정(朝廷) 안에서 여러 가지 물론(物論)이 일어나고 북변(北邊)에 있는 관리(官吏)가 실지(實地)로 이 일대를 답사(踏査)하여 조정(朝廷)에 보고(報告)하였는데 그 요지(要旨)는 정계비(定界碑)의 서편(西便)으로 흐르는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는 틀림이 없으나 동편(東便)으로 흐르는 물은 사파(四派)가 있으니 가장 북편(北便)에서 흐르는 제일파(第一派)의 물은 비(碑)에서 거리가 멀고 또 북(北)쪽으로 들어가니 이는 문제(問題) 삼을 것이 없고 그 물의 남(南)에서 흐르는 제이파(第二派)도 비(碑)와의 거리(距離)가 조금 멀고 제삼파(第三派)의 물은 비(碑)에서 가장 가까운데 이 물을 따라 내려가면 점점(漸漸) 북(北)으로 굽어져서 깊이 호지(胡地)로 들어가고 제사파(第四派)인 가장 남(南)쪽에 있는 물은 비(碑)에서 가장 멀고 이것이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가 된 것이니 결국(結局) 정계비(定界碑)에 기록(記錄)된 所謂 토문강(土門江)이라 함은 제삼파(第三派)의 물을 말함이 확실(確實)하다고 하였다. 이 제삼파(第三派)의 물은 간도(間島)의 북(北)쪽을 흘러서 두만강(豆滿江) 하류(下流)에 이르러 합수(合水)된 것임으로 지금의 간도(間島) 지방(地方)은 정계비문(定界碑文)대로 해석(解釋)하면 당연(當然)히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되는 것이오 이것이 후일(後日) 양국간(兩國間)의 분쟁(紛爭)거리가 되는 것이다.

울릉도(鬱陵島)는 동해(東海) 중(中)에 있는 일(一) 고도(孤島)라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독립국가(獨立國家)로 있다가 신라(新羅)의 군현(郡縣)으로 된 것이다. 이조(李朝) 초기(初期)에는 주민(住民)이 있어 농업(農業)과 어업(漁業)으로 생활(生活)하더니 그 후(後)에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이 자주 있어서 주민(住民)들이 안주(安住)할 수가 없고 또 국가(國家)에서 군사(軍士)를 보내어 수비(守備)할 수도 없음으로 조정(朝廷)에서는 주민(住民)을 전부(全部) 내륙(內陸)으로 옮기고 무인도(無人島)를 만들었다. 울릉도(鬱陵島)와 그 동(東)쪽에 있는 독도(獨島)는 어획(漁獲)이 많은 곳임으로 일본어민(日本漁民)들이 비밀(秘密)히 들어와서 자유(自由)로 고기잡이를 하고 혹(或) 조선어민(朝鮮漁民)이 고기 잡으러 들어가면 그들은 鬱陵島를 일본(日本) 영토(領土)라 하여 축출(逐出)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숙종(肅宗)때에 안용복(安龍福)이 여러 어민(漁民)들과 함께 울릉도(鬱陵島)에 고기 잡으러 들어갔더니 일본어선(日本漁船)이 이미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기로 안용복(安龍福)은 우리 어민들과 합력(合力)하여 몰아버린 일이 있는데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알고 도리어 법금(法禁)을 범(犯)하고 밀어(密漁)하였다는 죄명(罪名)으로 벌을 받았다.

그러나 안용복(安龍福)은 우리 나라 영토(領土)를 우리 나라 사람이 지키지 못하고 일본어민(日本漁民))의 임의(任意) 사용(使用)에 맡기는 것이 원통(寃痛)하여 다시 어선(漁船)을 타고 들어갔더니 역시(亦是) 일본어선(日本漁船)이 와서 있기로 이를 난타(亂打)하여 쫓아 보냈는데 마침 풍파(風波)가 일어나서 표류(漂流)하여 일본(日本)에 들어갔다. 안용복(安龍福)은 이 기회(機會)에 일본인(日本人)의 울릉도(鬱陵島) 밀어(密漁) 금지(禁止) 문제(問題)를 근본적(根本的)으로 해결(解決)하리라 하고 일본(日本)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이를 힐문(詰問)하더니 막부(幕府)에서는 이는 대마도(對馬島)의 어민(漁民)들의 소위(所爲)요 중앙(中央) 정부(政府)에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며 타국(他國) 영토(領土)에 들어가서 고기 잡는 것은 부당(不當)한 일이오 또 이로 인(因)하여 양국간(兩國間)의 화(和)를 상(傷)함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대마도(對馬島) 주(主)에게 보내는 글을 안용복(安龍福)에게 주었다. 안용복(安龍福)은 그 글을 가지고 대마도(對馬島) 주(主)에게 전(傳)하니 대마도(對馬島) 주(主)는 막부(幕府)의 엄명(嚴命)에 겁(怯)을 먹고 안용복(安龍福)에게 사과(謝過)까지 하였다. 안용복(安龍福)은 다시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다시는 밀어(密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約束)의 글을 받아 가지고 나라에 돌아오니 이는 외교(外交)의 일대(一大) 성공(成功)이오 또 울릉도(鬱陵島)를 일본(日本) 영토(領土)라고 주장(主張)하여 일후(日後) 양국(兩國)간(間)에 분쟁(紛爭)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危險性)을 이미 막은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이 말을 듣고 안용복(安龍福)의 공(功)을 상(賞)주려는 말은 없고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이 없이 외국(外國)과 교섭(交涉)한 죄(罪)로 사형(死刑)에 처(處)하려 하였다. 이때 조정(朝廷)안에는 사형(死刑) 논(論)에 반대(反對)하여 상공죄론(賞功罪論)이 강력(强力)히 주장(主張)되니 이 논(論)은 안용복(安龍福)이 일본인(日本人)의 밀어(密漁)를 금지(禁止)한 공(功)은 크게 상(賞)주어야할 것이오 사사(私私)로이 외국(外國)과 교섭(交涉)한 죄는 벌(罰)하여야할 것인데 만일 안용복(安龍福)을 죽이면 이는 한것 대마도(對馬島) 주(主)로 하여금 통쾌(痛快)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우리 나라의 수치(羞恥)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논(論)이 마침내 이겨서 안용복(安龍福)은 한동안 옥(獄)에 갇혔다가 방면(放免)되고 상(賞)은 받지 못하였다.

숙종(肅宗) 일대(一代)는 당쟁(黨爭)이 가장 심(甚)하여 국토(國土)의 영토(領土)문제(問題)까지 등한시(等閑視)하기에 이르렀고 숙종(肅宗)의 뒤를 이은 경종(景宗)은 희빈(嬉嬪) 장씨(張氏)의 소생(所生)이라 처음에 숙종(肅宗)때에 경종(景宗)을 세자(世子)로 봉(封)하려는 것을 노론(老論) 송시열(宋時烈) 등(等)이 반대(反對)하였고 또 경종(景宗)이 즉위(卽位)한 후(後)에 노론(老論)들은 경종(景宗)이 병약(病弱)하다하여 왕(王)의 이복(異腹)아우 영조(英祖)를 왕(王)의 대리(代理)로 세워서 정사(政事)를 대청(代聽)케 하려하니 이에 소론(少論)들은 노론(老論)을 역적(逆賊)으로 몰아서 소위(所爲) 노론곡신(老論哭臣)이라는 李頣命 金昌集 李健命 趙泰采 等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罪주니 이는 경종(景宗) 원년(元年) 신축(辛丑)으로부터 다음해 임인(壬寅)에 걸친 일임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라 하는데 사화(士禍)라 함은 비사류파(非士類派)가 사류(士類)를 모해(謀害)하는 것이오 사류(士類)와 사류(士類)와의 모해(謀害)는 사화(士禍)가 아니라 당쟁(黨爭)의 살육(殺戮) 극(劇)이니 소위(所謂) 辛壬士禍는 하나의 사류(士類) 간(間)의 살육(殺戮)극(劇)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경종(景宗)은 신병(身病)이 있어 재위(在位)한지 겨우 사년(四年)이오 영조(英祖)가 즉위(卽位)하니 영조(英祖)는 총명(聰明)함이 이조(李朝) 제왕(諸王) 중(中)에서 넉넉히 중주(中主)는 되는지라 일직부터 당파(黨派)싸움이 국가(國家)의 모든 불행(不幸)의 원인(原因)임을 깊이 느끼고 친(親)히 노론(老論)의 閔鎭遠과 少論의 李光佐의 화해(和解)를 권(勸)하고 조정(朝廷)에서는 여러 색목(色目)의 사람을 함께 쓰기로 하니 이를 탕평책(蕩平策)이라 한다. 당인(黨人) 중(中)에는 저희들의 지나친 행동(行動)을 반성(反省)하고 국가(國家)의 앞날을 위(爲)하여 탕평책(蕩平策)에 호응(呼應)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당화(黨禍)때문에 참혹(慘酷)한 화(禍)를 당(當)한 집의 자손(子孫)들은 양파(兩派)가 함께 조정(朝廷)에 입(立)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더욱이 노론(老論)들은 기어(期於)이 신임당화(辛壬黨禍)의 원수(怨讐)를 갚으려 하였다. 왕(王英祖)은 아무리 탕평(蕩平)하기를 권(勸)하되 노론(老論)들이 끝까지 응(應)하려하지 아니함으로 「당쟁(黨爭)도 국가(國家)가 있은 연후(然後)의 일이오 만일 당쟁(黨爭)때문에 국가(國家)가 망(亡)하면 당인(黨人)들은 어느 곳에 가서 당쟁(黨爭)을 할 것인가」하여 정(情)으로 읍언(泣言)한 일도 있고 몇 차례는 일이(一二)일간(日間) 단식(斷食)하고 당인(黨人)들의 반성(反省)을 촉구(促求)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당쟁(黨爭)은 이미 원결수심(怨決讐深)하고 난치(難治)의 고질(痼疾)로되어 왕(王英祖)의 읍소(泣訴)나 단식(斷食)으로써 화해(和解)될 것이 아니었다. 이에 왕(王英祖)은 탕평책(蕩平策)에 응(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점차(漸次)로 멀리하고 당쟁(黨爭)에 깊이 관계(關係)되지 아니한 사람들을 쓰게되니 조정(朝廷)안에서 당쟁(黨爭)에 깊이 관계(關係)되지 아니한 사람은 주(主)로 척리파(戚里派)이었고 이로부터 척리파(戚里派)의 대두(擡頭)하는 경향(傾向)이 나타나서 순조(純祖)이후 팔십여년(八十餘年) 간(間)을 외척(外戚) 전횡(專橫) 시대(時代)를 만들었다. 처음에 세조(世祖)때에 유신파(儒臣派) 대(對) 척리파(戚里派)의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이 구십년(九十年)동안을 계속(繼續)하다가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유신파(儒臣派)가 승리(勝利)를 얻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유신(儒臣) 동지(同志) 간(間)에 당쟁(黨爭)이 일어나서 이래(爾來) 백(百)육칠십년(六七十年)간(間)을 혈투(血鬪)를 연출(演出)하고 마침내 자체(自體)의 부패(腐敗)로 인(因)하여 다시 전일(前日)의 정적(政敵)이던 척리파(戚里派)를 등장(登場)케 하니 이는 세사(世事)의 한 과보(果報)로써 역사(歷史)는 복(覆)치 아니하면서 또한 반복(反覆)하는 것이다.

영조(英祖)가 비록 탕평책(蕩平策)을 쓰고 있으나 정계(政界)의 이면(裏面)에는 여전(如前)히 격심(激甚)한 당쟁(黨爭)의 조류(潮流)가 흐르고 있고 각지방(各地方)에는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고 유사(儒士)들의 독서처(讀書處)로 되어 있는 서원(書院)은 당쟁(黨爭)의 근거지(根據地)로 되어 있으며 타당(他黨)과의 사이에는 서로 통혼(通婚)치 아니함은 물론(勿論)이오 지방(地方)에서 일어나는 사소(些少)한 일까지도 모두 당쟁(黨爭) 꺼리로 이용(利用)하였고 영조(英祖) 초년(初年)에는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이 합세(合勢)하여 이인좌(李麟佐)를 대장(大將)으로 하여 영남(嶺南)에서 병(兵)을 일으켜 정국(政局)을 전복(顚覆)시키려는 반란(叛亂)까지 일어났다. 영조(英祖) 중년(中年)에 세자(世子)로 하여금 대리(代理) 청정(聽政)케 하였는데 세자(世子)의 처사(處事)가 당인(黨人)들의 이해(利害)에 맞지 아니함으로 당인(黨人)들은 백방(百方)으로 모략(謀略)을 꾸며서 왕(王)과 세자(世子)와의 사이를 이간(離間)시키고 일보(一步)를 진(進)하여 왕(王英祖)의 부자간(父子間)의 감정(感情)의 갈등(葛藤)을 일으키더니 필경(畢竟) 세자(世子)를 왕(王)에게 참소(讒訴)하여 이를 폐(廢)하고 뒤주 속에 넣어서 죽이기에 이르니 이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이오 정조(正祖)의 부(父)이다.

그럼으로 정조(正祖)의 신하(臣下)들 중(中)에서 김구주(金龜柱)는 세자(世子)를 죽임이 옳다 하고 홍봉한(洪鳳漢)은 옳지 않다 하여 두 파(派)의 의견(意見)이 나뉘어지니 김(金)의 편(便)에 가담(加擔)한 사람을 벽파(僻派)라 하고 홍(洪)의 편(便)에 가담(加擔)하는 파(派)를 시파(時派)라 하여 이로부터 사색(四色)의 싸움보다도 시벽(時僻)의 두 파(派)가 서로 맞서서 정조(正祖) 일대(一代)는 이 싸움으로 날을 보내었으니 정조(正祖)가 그 부(父)의 원사(寃死) 참사(慘死)한 것을 몹시 슬퍼함으로 왕(王)의 뜻을 받드는 사람은 시파(時派)가 되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은 영조(英祖)의 처리(處理)할 일이니 이를 비난(非難)할 수 없다 하는자(者)는 벽파(僻派)가 되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은 당쟁(黨爭)의 여파(餘波)가 왕실(王室)에 미친것이오 국가정치(國家政治)에는 아무 관계(關係)가 없는 일인데 이것으로써 또 서로 가부(可否)를 다투고 있는 것은 세력(勢力) 쟁탈(爭奪)을 위한 일(一) 방편(方便)으로 이용(利用)한 것이다.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세(世)는 사색(四色)이 없어진 것은 아니오 또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와의 싸움이 일어났으나 정조(正祖)도 현명(賢命)한 임금이라 영조(英祖)의 정책(政策)을 답습(踏襲)하여 탕평책(蕩平策)을 썼음으로 숙종(肅宗)의 때와 같은 유혈(流血)의 참극(慘劇)은 별(別)로 없어서 인심(人心)이 안정(安定)하였다.

그리하여 왕(王)은 민생문제(民生問題)에 크게 유의(留意)하였으니 영조(英祖)는 당시(當時) 평민(平民)의 장정(壯丁)들이 군포(軍布)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무명 이필(二疋)씩 바치었는데 이것이 백성(百姓)에게 과중(過重)한 부담(負擔)이 되고 있음으로 왕(王英祖)의 이십육년(二十六年)부터 균역법(均役法)을 시행(施行)하여 군포(軍布)를 한 필(疋)씩 감(減)하고 그 대신(代身) 어염(魚鹽) 선박(船舶)에도 과세(課稅)하였다.

조엄(趙儼)은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감저(甘藷)(고구마)를 가져와서 심으니 이가 우리 나라에서 감저(甘藷)를 심은 처음이다. 조정(朝廷)에서는 감저(甘藷)가 구황곡식(救荒穀食)으로 중요(重要)한 것이라 하여 삼남(三南) 각지(各地)에 심게 하니 수십년(數十年) 동안에 각지방(各地方)에 널리 보급(普及)되니 정조(正祖)때에 이르러 전국(全國)에서 산출(産出)되는 감저(甘藷)의 수량(數量)을 조사(調査)케 한바 의외(意外)에 남해안(南海岸)의 몇 부락(部落)에 겨우 얼마간 남아 있을 뿐이오 그 외(外)에는 종자(種子)조차 없어져 버렸다. 왕(王)은 크게 놀래어 그 원인(原因)을 조사(調査)하니 농가(農家)에서 감저(甘藷)를 심으면 군현(郡縣)의 이속(吏屬)들과 토호(土豪)들이 값도 내지 않고 무료(無料)로 토색(討索)하고 그 토색(討索)에 응(應)하지 아니하면 무슨 구실(口實)을 만들어서 잡아다가 엄형(嚴刑)을 가(加)하니 농민(農民)들은 감저(甘藷)를 심은 까닭에 파산(破産)할 지경(地境)에 이른 자(者)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필경(畢竟) 종자(種子)까지 없애버린 것이었다. 이에 왕은 엄명(嚴命)을 내리어 토색(討索)하는 자(者)를 엄금(嚴禁)하고 그 재배(栽培)함을 극력(極力) 장려(獎勵)한 결과 드디어 우리 나라의 주요(主要)한 생산물(生産物)이 되었다.

정조(正祖)는 또한 전국(全國)에 영(令)을 내리어 농업기술(農業技術)의 우수(優秀)한 것이 있으면 그 요령(要領)과 방법(方法)을 적어서 조정(朝廷)에 올리라 하니 이에 전국(全國)으로부터 수리시설(水利施設) 농용거(農用車)등(等) 농업상(農業上) 유익(有益)한 계획(計劃)과 경험담(經驗談)이 많이 제출(提出)되었다. 왕(王)은 농업(農業)을 장려(獎勵)하는 의미(意味)로 좋은 안(案)을 제출(提出)한 사람을 뽑아서 서울에 불러다가 한자리에 모으고 각자(各自) 안(案)을 설명(說明)케 한 후(後) 후(厚)히 상(賞)을 주고 그 안(案)을 모아서 농서(農書)를 만들어 전국(全國)에 폈다.

 

영(英) 정(正)의 문화(文化)

실학(實學)이 한번 일어난 후(後)로 이 방면(方面)에 뜻을 두는 학자(學者)가 많고 또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글을 편찬(編纂)하고 민간(民間)에서는 역사(歷史) 지리(地理) 정치(政治) 경제(經濟) 실업(實業) 산학(算學) 의학(醫學) 실학(實學)에 대(對)한 연구(硏究)와 저술(著述)이 성(盛)해서 그 문운(文運)의 발달(發達)은 세종(世宗)때에 필적(匹敵)할만 하였다. 또 전(前)부터 천주교(天主敎)가 들어오고 있던 중(中) 정조(正祖)때에는 이승훈(李承薰)이 북경(北京)으로부터 천주교(天主敎)에 관(關)한 책(冊)을 가져와서 청년학자(靑年學者)들끼리 나누어 읽음에 그 교세(敎勢)가 크게 떨쳐서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도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제사(祭祀)를 폐(廢)하고 이 교(敎)를 신앙(信仰)하는 자(者)가 많으며 특(特)히 황해(黃海) 강원(江原) 경기(京畿) 충청(忠淸)의 각도(各道)에 성행(盛行)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천주교(天主敎)가 제사(祭祀)를 폐(廢)하는 까닭으로 이를 사교(邪敎)라 하여 금령(禁令)을 내리고 또 근원(根源)을 막는다하여 북경(北京)으로부터 모든 서적(書籍)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교세(敎勢)는 비밀리(秘密裏)에 더욱 넓어지고 소주(蘇州)(강소성)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비밀리(秘密裏) 입국(入國)하여 더욱 전도(傳道)에 힘썼다.

남인(南人)들은 숙종(肅宗) 말(末)로부터 정권(政權)에서 멀어짐에 그 힘을 학문(學問)에 기울여서 청(淸)나라의 고증학(考證學)을 받아드린 것도 남인(南人)이었고 또 천주학(天主學)이라는 새 지식(知識)에 대(對)하여 서로 그들은 특별(特別)한 관심(關心)을 가지고 남인(南人)으로서 천주교(天主敎)를 믿는 사람이 많았으니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이학규(李學逵) 정약종(鄭若鍾) 정약용(鄭若鏞) 같은 일대(一代)의 명사(名士)가 모두 진실(眞實)한 신도(信徒)였고 특(特)히 정약용(鄭若鏞)(다산(茶山))은 실학파(實學派) 가운데서 가장 특출(特出)한 학자(學者)이었다.

원래(元來) 천주교(天主敎)에서 제사(祭祀)를 제사(祭祀)를 지내지 말라함이 국속(國俗)에 어그러지기 때문에 나라에서 이를 사교(邪敎) 또는 좌도(左道)라 하여 금지(禁止)함이러니 정권(政權)다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비(非) 천주교인파(天主敎人派)가 천주교인(天主敎人)인 반대파(反對派)를 넘어뜨리려는 죄목(罪目)으로 이를 이용(利用)함에 미쳐 천주교(天主敎)에 대(對)한 박해(迫害)가 정조(正祖) 십오년(十五年) 이후(以後)로 여러 번 일어났다. 그러나 정조(正祖)때는 남인(南人) 채제공(蔡濟恭)(번암(樊巖))이 오랫동안 정승(政丞)으로 있으면서 이들을 옹호(擁護)하여 될 수 있도록 일이 없이 하였으나 정조(正祖)의 다음 임금 순조(純祖)가 즉위(卽位)함에 원년(元年)에 서교(西敎)의 옥(獄)을 일으켜서 다수(多數)한 교도(敎徒)가 잡혀 죽었다. 그러나 금령(禁令)이 엄(嚴)할수록 비밀리(秘密裏)에 더욱 퍼졌다. 천주교(天主敎)는 가깝게는 북경(北京)과 멀리는 서양(西洋)에 연결(連結)을 가졌음으로 세계(世界)의 새 소식(消息)과 학술(學術)이 이 길로 말미암아 들어오는 것이 많았으니 영국(英國)에서 발명(發明)된 수두법(手痘法)이 정약용(鄭若鏞)으로 말미암아 전래(傳來)한 것이 그 일례(一例)이오 후일(後日)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지구도(地球圖)같은 것도 천주교(天主敎)를 통(通)하여 서양학술(西洋學術)의 영향(影響)을 받은 것이다.

 

세도(勢道)정치(政治)

세도(勢道)라 함은 본시(本是) 왕(王)과 신하(臣下)들 사이를 주선(周旋)하는 소임(所任)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다. 모든 정치(政治)가 그의 손을 거치게 됨으로 스스로 세력(勢力)을 잡게된 것이다. 정조(正祖)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에 세손(世孫)을 해(害)하려 함으로 홍국영(洪國榮)이 세손(世孫)을 극진(極盡)히 보호(保護)하여 겨우 무사(無事)함을 얻고 및 즉위(卽位)한 뒤에 홍국영(洪國榮)으로써 숙위대장(宿衛大將)을 삼으니 궁중(宮中)을 지키면서 부터 소위(所謂) 세도(勢道)가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은 횡포(橫暴)한 일이 많음으로 미구(未久)에 물러나더니 정조(正祖)의 뒤를 이은 순조(純祖)가 왕(王)이 되니 때에 나이 십일세(十一歲)이었다. 그래서 영조(英祖)의 후인(后人) 안동(安東) 김씨(金氏)가 대신(代身) 국사(國事)를 처리(處理)하고 그 본가편(本家便)의 김조순(金祖淳)이 실권(實權)을 잡으니 세상(世上)에서 이 정치(政治) 형태(形態)를 안동(安東) 김씨(金氏) 세도(勢道)라고 칭(稱)하고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삼대(三代)가 모두 안동(安東) 김씨(金氏)에게 장가를 들어서 이 뒤 육십년(六十年)동안에 김씨(金氏)가 외척(外戚)으로써 세도(勢道)를 잡고 나가니 이것이 척리파(戚里派)의 완전(完全)한 재(再)등장(登場)이다.

세도(勢道)정치(政治)가 벌어진 후(後)로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풍습(風習)이 날로 심(甚)하고 관직(官職)을 매득(買得)한 무리들은 백성(百姓)들을 토색(討索)하여 재산(財産)을 잡으려하고 한 편(便) 서원(書院)을 중심(中心)으로 한 양반들이 무고(無辜)한 백성(百姓)들을 잡아다가 억울(抑鬱)한 죄(罪)를 얽어서 재물(財物)을 함부로 빼앗고 군현(郡縣)의 이속(吏屬)들이 여러 가지 농간(弄奸)으로 민재(民財)를 착취(搾取)하니 백성(百姓)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도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음으로 힘써 일할 생각이 나지 아니하여 모든 산업(産業)이 위축(萎縮)하니 평안지방(平安地方) 같은 곳은 고래(古來)로 율목(栗木) 재배(栽培)가 성행(盛行)하여 율산(栗産)이 전국(全國)에 유명(有名)하더니 율목(栗木)이 있는 까닭으로 전일(前日) 남(南)쪽 지방(地方)에서 고구마 재배(栽培)로 인(因)하여 파산(破産)하는 일이 있음과 같은 억울(抑鬱)한 사정(事情)이 도처(到處)에 생겼음으로 일제(一齊)히 율목(栗木)을 베어버린 일도 있었다.

이조(李朝)의 정치(政治)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삼정(三政)이라 하니 이는 국가(國家) 정치(政治)에 가장 근본(根本)이 되는 재정(財政)문제(問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전정(田政)이라 함은 토지(土地)의 소출(所出)을 근거(根據)로 하여 받는 세납(稅納)이오 군정(軍政)이라 함은 군포(軍布)이오 환곡(還穀)이라 함은 춘궁기(春窮期)에 가난한 백성(百姓)들에게 곡식(穀食)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얼마쯤의 이식(利息)을 붙여서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고구려(高句麗) 시대(時代)의 진대(賑貸)의 진대법(賑貸法)과 같은 것이다.

 

홍경래(洪景來) 난(亂)과 민란(民亂)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생긴 뒤로 삼정(三政)이 어지러워서 백성(百姓)이 살수가 없고 흉년(凶年)이 자주 들고 천재지변(天災地變)이 그치지 아니하여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 정조(正祖)때에 평안도(平安道) 유생(儒生)들이 서북(西北)사람을 몹시 차별(差別)한다는 이유(理由)로 과거(科擧)의 시험장(試驗場)에 들어감을 거부(拒否)한 일이 있는데 정조(正祖)는 조그마한 천민(賤民)들이 감(敢)히 왕명(王命)을 거역(拒逆)한다 하여 크게 노(怒)하여 그 수모자(首謀者)를 귀양보내고 그 외(外)는 모두 다시 과거(科擧)를 보지 못하게 하니 평안도(平安道) 인심(人心)이 극도(極度)로 분개(憤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中) 용강(龍岡)사람 홍경래(洪景來)가 벼슬을 구(求)하러 서울에 왔다가 조정(朝廷)의 처사(處事)가 탁란(濁亂)함을 보고 혁명(革命)의 뜻을 품고 순조(純祖) 십일년(十一年) 신미(辛未)에 우군칙(禹君則) 등(等)으로 더불어 가산(嘉山) 다복동(多福洞)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스스로 평서(平西) 대원수(大元帥)가 되고 격서(檄書)를 관서(關西) 일대(一帶)에 전(傳)하되 「관서(關西)는 단기(檀箕)의 구역(舊域)으로 문물(文物)이 환랑(煥朗)하며 왜호(倭胡)의 양난(兩難)에 효충(效忠)이 크거늘 조정(朝廷)이 서토(西土)를 경시(輕視)함은 하고(何故)오 더욱 방금(方今)에 유왕(幼王)이 상(上)에 있고 권간(權奸)이 날로 늘어서 김조순(金祖淳) 박종경(朴宗慶)의 무리가 국병(國柄)을 절롱(竊弄)하여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비는 틈이 없고 생민(生民)이 도탄(塗炭)하여 전두(前頭)가 불측(不測)하니 마땅히 이때로서 서인(西人)이 분기(奮起)하여 국내(國內)를 징청(澄淸)할 것이다.」하고 각(各) 고을을 치니 청천강(淸川江) 이북(以北)의 여러 고을이 이에 호응(呼應)하여 그 기세(氣勢)가 크게 떨치고 수령(守令) 중(中)에도 홍군(洪軍)에 항복(降服)한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저 유명(有名)한 김삿갓(입(笠) 이름 환연(煥淵))은 이때 조부(祖父) 김익순(金益淳)이 수령(守令)으로서 홍군(洪軍)에 항복(降服)하여 역적(逆賊)이 되었음으로 역적(逆賊)의 손자(孫子)로써 법망(法網)을 피(避)하여 삿갓을 쓰고 숨어 다닌 사람이다.

이 해 십이월(十二月)에 홍경래(洪景來)는 청천강(淸川江)을 도수(渡水)하여 남진(南進)하려 하더니 일야간(一夜間)에 비가 와서 얼음이 풀렸음으로 강(江)을 건너지 못하고 정주성(定州城)을 웅거(雄據)하고 관군(官軍)과 항전(抗戰)하였다. 이때는 오랫동안 승평(昇平)이 계속(繼續)하여 백성(百姓)들이 병사(兵事)를 알지 못하는지라 관군(官軍)이 비록 홍군(洪軍)을 치고 있으나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사기(士氣)가 떨치지 못하더니 상지(相持)한지 넉 달만에 임신년(壬申年) 사월(四月)에 관군(官軍)이 성외(城外)에 굴(窟)을 파고 화약(火藥)을 터뜨려서 겨우 성(城)이 함락(陷落)하였다. 홍경래(洪景來)는 「事已至此無可奈何」라하고 城을 넘어 도주(逃走)하여 그 종적(蹤迹)을 알지 못하였다.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 일어나기 전(前)에 이미 각지방(各地方)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났으니 민란(民亂)이라 함은 대개 수령(守令)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못 견디어 민중(民衆) 속에서 지휘자(指揮者)를 정(定)하고 난(亂)을 일으켜 수령(守令)을 몰아내는 것인데 수령(守令)을 죽이는 일은 극(極)히 적고 대부분(大部分)은 버들 광주리에 담아서 군경(群境)밖에 내어쫓는 것이다. 그럼으로 민란(民亂)은 혁명(革命)이 아니니 당시(當時)의 민란(民亂)은 귀족사회(貴族社會)의 영원성(永遠性)을 시인(是認) 하면서 다만 그때 그때의 불평(不平) 때문에 일어나는 소요(騷擾)이오 또 학정(虐政)을 하는 수령(守令)을 쫓아내면 그 목적(目的)이 달성(達成)되는 것이다. 지금 세상(世上)에 행(行)하는 춘향전(春香傳)은 정조(正祖) 시대(時代)의 전후(前後)에 지은 소설(小說)이라 하는데 그 글 속에 전라도(全羅道) 오십삼주(五十三州)의 머슴들이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짚둥우리에 담아서 경외(境外)에 몰아내겠다고 계획(計劃)함과 같음이 민란(民亂)의 실마리였다.

순조(純祖)의 뒤를 이은 헌종(憲宗)이 또한 나이 어리고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세도(勢道)를 잡고있어 정치(政治)가 어지럽고 각지(各地)에서 백성(百姓)의 소동(騷動)이 일어나서 조정(朝廷)에서는 이년(二年)이나 삼년(三年)에 한번씩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팔도(八道)에 보내어 민폐(民弊)를 끼치는 자(者)를 죄(罪)주는데 어사(御使)가 한번 나갔다가 돌아오면 수령(守令) 이속(吏屬) 토호(土豪)들이 죄(罪)를 받는 자(者)가 이백(二百) 혹(或)은 삼백(三百)에 가까우니 당시(當時) 지방(地方)에서 백성(百姓)을 괴롭게 하는 자(者)가 얼마나 많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사(御使)의 출도(出道)도 크게 효과(效果)를 내지 못하고 백성(百姓)의 고통(苦痛)은 여전(如前)히 심(甚)하더니 헌종(憲宗)의 다음 임금 철종(哲宗) 십삼년(十三年) 임술(壬戌)에 경상도(慶尙道) 진주(晉州)에서 백성(百姓)들이 병사(兵使)의 포학(暴虐)을 견디지 못하여 민란(民亂)을 일으켜 탐욕(貪慾)한 관리(官吏)를 몰아내고 그와 부동(附同)한 사람들을 잡아 다스리니 그 형세(形勢)가 가장 맹렬(猛烈)하였다. 이 바람이 한번 일어남에 각지(各地) 백성(百姓)들의 가슴속에 쌓이고 쌓였던 불평(不平)이 일시(一時)에 폭발(暴發)하여 경상도(慶尙道) 각지(各地)에서 불이 터지고 다음에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에 퍼졌는데 그 중(中)에 전라도(全羅道)가 우심(尤甚)하여 감사(監司)가 쫓겨나기에 이르렀고 다시 퍼져서 멀리 함경도(咸鏡道)의 함흥(咸興)과 제주도(濟州島)에까지 미치니 나라의 위신(威信)은 땅에 떨어지고 이씨(李氏) 왕조(王朝)의 몰락(沒落)이 가까워 오는 조종(弔鍾)을 울린다는 감(感)을 깊게 하였다.

 

북간도(北間島) 이주(移住)

청국(淸國)이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한 후(後)에 만주(滿洲)를 통(統)히 금봉지(禁封地)로 하여 만주(滿洲)인(人) 이외(以外)의 거주(居住)를 금지(禁止)하고 더욱이 백두산(白頭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압록강(鴨綠江) 유역(流域)의 서간도(西間島)와 두만강(豆滿江) 유역(流域)의 북간도(北間島)를 청국(淸國) 시조(始祖)의 발상지(發祥地)라 하여 공광(空曠)하게 하여 아무도 인거(人居)치 못하게 하니 공지(空地)로 된지 이백년(二百年)에 산야(山野)에 수림(樹林)이 가득하여 하늘을 가리고 그 사이로 각종(各種) 짐승들이 놀고 있으며 각(各) 강변(江邊)에는 겸가(蒹葭갈대)가 무성(茂盛)하고 지중(池中)에는 사람의 식료(食料)로 되는 마름이 가득하였다. 헌종(憲宗)이후(以後)에 정치(政治)는 더욱 어지럽고 흉년(凶年)이 자주 들어서 생로(生路)를 잃은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의 백성(百姓)들은 스스로 금지(禁地)로 되어 있는 강(江) 월편(越便)의 간도(間島)에 착안(着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밀(秘密)히 강(江)을 건너서 짐승도 사냥하고 인삼(人蔘) 마름을 캐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관리(官吏)들은 타국(他國)의 금지(禁地)에 들어가면 국제문제(國際問題)가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도강(渡江)하는 자(者)를 엄벌(嚴罰)하고 한편(便)으로 서간도(西間島)의 모아산(帽兒山) 지방(地方)에 있는 만주인(滿洲人) 부락(部落)과 북간도(北間島)의 혼춘(琿春) 지방(地方)에 있는 만주인(滿洲人) 부락(部落)에서는 생활필수품(生活必需品)인 식염(食鹽) 부정(釜鼎) 기(器) 농구(農具) 축우(畜牛) 등(等)을 우리 나라로부터 가져가지 아니하면 구(求)할 길이 없는데 양국(兩國)의 정식(正式) 개시장(開市場)을 통(通)하여 매득(買得)하는 일도 있으나 그것 만으로서는 항상(恒常) 그 수요(需要)를 만족(滿足)시키지 못함으로 자연(自然)히 우리 나라 사람의 입주(入住)를 환영(歡迎)하고 우리 나라 관리(官吏)가 그곳에 가서 수색(搜索)할 때도 잘 보호(保護)하여 주었다.

철종(哲宗) 때에 이르러서는 비밀(秘密)히 입주(入住)하는 자(者)가 더욱 늘어서 겨울에 강(江)이 합빙(合氷)한 때에 이르러서는 수십호(數十戶)가 집단(集團)으로 입주(入住)하는 일도 있으며 이때 연해주(沿海州)는 본시(本是) 중국영토(中國領土)이었는데 몇 해전(前)에 아라사(俄羅斯)(러시아)에 할양(割讓)된 것이다.

아(俄)국(國)에서는 연해주(沿海州)의 광막(廣漠)한 황지(荒地)를 개척(開拓)하기 위(爲)하여 우리 나라 사람의 입주(入住)를 환영(歡迎)하고 식량(食糧)과 종자(種子)등(等)을 대어주고 있음으로 북간도(北間島)에 들어갔던 우리 백성(百姓)들은 다시 연해주(沿海州)로 전주(轉住)하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가 우리 나라 사람의 손으로서 개척(開拓)되었다는 것이다. 후일(後日) 우리 나라 사람의 이주(移住)한 수(數)가 북간도(北間島)에 사십여만(四十餘萬), 연해주(沿海州)에 이십만(二十萬)이 된 것은 모두 이때로부터 비롯한 것이며 마령서(馬鈴薯)(감자)가 북방(北方)으로부터 전(傳)하여 온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비밀(秘密)히 도강(渡江)하다가 관인(官人)에게 잡혀 죽은 사람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적지 아니하여 이러한 원사자(寃死者)의 피와 눈물이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의 개척사(開拓史)의 첫머리를 꾸민 것이오 그만치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는 우리 민족(民族)의 영원(永遠)히 잊어버리지 못할 곳이다.

 

 

 

개국(開國)시대(時代)

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의 제이자(第二子명복(命福))가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고종(高宗)이오 때에 나이 십이세(十二歲)이었다. 흥선군(興宣君)이 대원군(大院君)으로 되어 실제(實際)의 정권(政權)을 잡으며 외척(外戚)의 세도(勢道)를 막기 위(爲)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력(勢力)을 누르고 또 당파(黨派)싸움의 뿌리를 뽑기 위(爲)하여 사색(四色)을 똑같이 등용(登用)하여 계급(階級)과 지방(地方)의 차별(差別)을 없애기 위(爲)하여 평씨(平氏)와 서북(西北)사람을 불러 쓰고 당쟁(黨爭)의 근원지(根源地)가 되어 백성(百姓)을 못살게 구는 많은 서원(書院)을 없애며 군포(軍布)란 이름으로 상민(常民)이 많이 부담(負擔)하는 병역세(兵役稅)를 호포(戶布)로 고쳐서 양반계급(兩班階級)도 이를 내게 하고 부정(不正)한 관리(官吏)와 이속(吏屬)들을 처벌(處罰)하니 오랫동안 흐리고 어지럽던 정치(政治)에 새 광명(光明)의 빛이 오는 듯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은 과단성(果斷性)과 결행력(決行力)이 강(强)한 반면(反面)에 소홀(疎忽)한 처단(處斷)도 없지 아니하고 더욱이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불타버린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지으려고 백성(百姓)들의 재물(財物)과 노력을 강제(强制)로 바치게 하고 경비(經費)가 부족(不足)함에 당백전(當百錢)을 만들어 내어서 경제계(經濟界)를 어지럽게 하니 백성(百姓)들의 원성(怨聲)이 날로 높아지고 한 편(便)으로 왕대(王代)의 특권(特權)을 잃은 계급(階級)들이 대원군(大院君)을 비방(誹謗)하려는 소리도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이보다 앞서 철종(哲宗) 말년(末年)에 아라사(俄羅斯) 국(國)이 청국(淸國)으로부터 오소리강(烏蘇里江) 이동(以東)의 연해주(沿海州)를 얻어 조선(朝鮮)이 아국(俄國)으로부터 국경(國境)이 상접(相接)하게되고 고종(高宗) 즉위(卽位)의 해에 아인(俄人)이 이미 경흥(慶興)에 와서 통교(通交)를 청(請)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中)에 천주교인(天主敎人) 가운데 아국(俄國) 문제(問題)를 좋게 해결(解決)하는 대신(代身)에 천주교(天主敎) 전도(傳導)의 공인(公認)을 얻으려하여 대원군(大院君)에게 운동(運動)하는 자(者)가 있었는데 그의 행동(行動)이 대원군(大院君)의 마음을 거슬리는 점이 있었고 또 천주교도(天主敎徒)들이 외국(外國)과 연락(連絡)하여 우리 나라를 위태(危殆)롭게 할 염려(念慮)가 있다하여 고종(高宗) 삼년(三年)(단기 사천백구십구년)에 비밀(秘密)히 입국(入國)한 불란서(佛蘭西)사람 교사(敎士)들과 천주교도(天主敎徒) 수만명(數萬名)을 대학살(大虐殺)하였다. 교사(敎士) 중(中) 한사람이 빠져나가서 청국(淸國)에 있는 불란서(佛蘭西) 함대(艦隊)에 이일을 알리니 불국(佛國) 함(艦) 칠척(七隻)이 강화도(江華島)를 침범(侵犯)하다가 우리 군사(軍士)에게 패(敗)하여 물러가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고종(高宗) 오년(五年)에 미국상선(美國商船)이 평양(平壤)의 대동강(大洞江)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빠지고 양식(糧食)이 다하여 몰살(沒殺)한 일이 있었다. 청국(淸國)에 있는 미국(美國) 관리(官吏)가 오랜 뒤에 이 소문(所聞)을 듣고 고종(高宗) 팔년(八年)에 군함(軍艦) 오척(五隻)을 거느리고 강화(江華) 해협(海峽)으로 침입(侵入)하다가 우리 군사(軍士)에게 막혀서 더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가니 이를 신미양요(辛未洋擾)라 한다.

대원군(大院君)은 거듭 양요(洋擾)를 치뤘으나 번번히 쳐서 물리쳤음으로 외국(外國)의 무서운 것이 없음을 속단(速斷)하고 금교(禁敎)와 배외(排外)의 결심(決心)을 더욱 굳게 하고 서울 종로(鐘路) 네거리와 국내(國內)의 중요(重要)한 곳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니 그 글에「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이라 하였다.

일본(日本)은 덕천막부(德川幕府)의 말기(末期)에 구미(歐美)로 더불어 통상(通商)관계(關係)를 맺고 서양문화(西洋文化)를 수입(輸入)한 뒤로 우리 나라는 일본(日本)의 심사(心事)를 의심(疑心)하여 전(前)부터의 교제(交際)를 끊어버렸더니 고종(高宗) 오년(五年) 무진(戊辰)에 이른바 명치유신(明治維新)이 된 후(後)에 그 사유(事由)를 우리 나라에 통지(通知)하여 왔는데 그 문구(文句)가 전(前)과 같이 공손(恭遜)하지 아니함으로써 대원군(大院君)이 이를 받지 아니하여 양국(兩國)의 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中)에 대원군(大院君)은 조정(朝廷)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는데 처음에 대원군(大院君)은 외척(外戚)이 권세(權勢)를 잡고 국사(國事)를 그르치는 일이 있을까 두려하여 고종(高宗) 왕비(王妃)를 간택(揀擇)함에 있어서 일부러 아비 없는 민비(閔妃)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민비(閔妃)는 비상(非常)히 재주가 있고 정치(政治)에 욕심(慾心)이 있는지라 여러 가지 책략(策略)을 써서 대원군(大院君)이 정권(政權)을 잡은지 십년(十年)만에 마침내 이를 내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고종(高宗)에게 돌아온 정권(政權)을 자기(自己)가 대신(代身) 장악(掌握)하고 민씨(閔氏) 일파(一派)의 세력(勢力)을 늘이니 이로부터 대원군(大院君)과 그 며느리 민비(閔妃)와의 사이에 갈등(葛藤)이 생겨서 여러 가지 변(變)을 지어내었다. 대원군(大院君)이 물러나고 민비(閔妃)의 본가편(本家便)에서 세도(勢道)를 잡으면서 대외(對外) 방침(方針)이 차차(次次) 변(變)하여 가더니 고종(高宗) 십이년(十二年) 을해(乙亥)에 일본(日本) 군함(軍艦) 한 척(隻)이 강화도(江華島)앞에 들어와 서있는 것을 우리 포대(砲臺)가 이를 포격(砲擊)하니 일본(日本)이 이를 당(當)하여 사태(事態)가 험악(險惡)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진의(眞意)가 이 기회(機會)에 외교관계(外交關係)를 맺음에 있고 우리 국책(國策)도 그렇게 기우러진 때이라 다음해 병자(丙子)에 양국대표(兩國代表)가 강화(江華)에 모여서 수호조규(修好條規)를 맺으니 그 내용(內容)은 조선(朝鮮)이 자생국(自生國)으로써 일본(日本)과 평등권(平等權)을 가지고 사명(使命)을 교환(交換) 하기로 하고 부산(釜山) 밖에 또 이항(二港)을 개항(開港)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결과(結果)로 십육년(十六年) 기묘(己卯)에 일본공사(日本公使) 화방의질(花房義質)이 와서 왜관(倭館)을 열고 부산(釜山) 원산(元山) 인천(仁川)이 차례로 개항(開港) 되었다.

원래(原來) 조선(朝鮮)은 인조(仁祖) 정축(丁丑) 이후(以後)에 청국(淸國)을 종주국(宗主國)으로 하여 다공(多貢)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은 형식(形式)에 그치고 실제(實際)에 있어서는 내외(內外)의 정책(政策)을 자주(自主)하는 독립국(獨立國)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朝鮮)에 외국관계(外國關係)의 사단(事端)이 일어날 때마다 청국(淸國)은 항상(恒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조선(朝鮮)이 자주국(自主國)임을 언명(言明)하니 그럼으로 강화조약(江華條約)의 첫머리에 이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조약(條約)이 체결(締結)된 뒤에 일본(日本)의 세력(勢力)이 조선(朝鮮)에 퍼질 조짐(兆朕)이 보이므로 청국(淸國)은 전일(前日) 태도(態度)를 버리고 그 외교(外交)를 맡아보는 북양(北洋) 대신(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우리 나라를 권(勸)해서 서양(西洋)각국(各國)으로 더불어 통상(通商)을 열게 하여 십구년(十九年) 임오(壬午)에 미국(美國)과 수호통상(修好通商) 조약(條約)이 성립(成立)하고 계미년(癸未年)에 영국(英國) 덕국(德國)(독일) 갑신(甲申)년에 이태리(伊太利) 아라사(俄羅斯)와의 조약(條約)이 차례(次例)로 성립(成立)하여 아국(我國)이 완전(完全)히 국제무대(國際舞臺)위에 나서고 세계(世界) 각국(各國)의 사이에 문호(門戶)가 개방(開放)되었다.

대저(大抵) 산업(産業) 혁명(革命)으로 이미 성취(成就)한 서양사회(西洋社會)는 물자(物資) 문명(文明)이 상당(相當)히 발달(發達)하고 소위(所謂)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社會)를 만들고 그 만들어 낸 상품(商品)을 팔기 위(爲)하여 새로운 시장(市場)을 찾아내기에 눈이 붉은 때이라 우리 나라가 홀로 동북(東北) 일우(一隅)의 은토(隱土)국(國)으로서 문호(門戶)를 잠그고 있을 수 없었고 또 서양사회(西洋社會)와의 접촉(接觸)을 통(通)하여서만 그들의 새로운 물질문명(物質文明)을 받아들일 수가 있음으로 일본(日本)을 비롯한 여러 외국(外國)과 통상(通商)을 시작(始作)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여러 강국(强國)이 우리 나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 세력(勢力) 다툼을 하게 되었으니 실(實)로 고종(高宗) 병자(丙子) 이후(以後)의 우리 나라는 세계열강(世界列强)의 각축장(角逐場)으로 화(化)한 것이다.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오랜 동안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깨트리고 외국(外國)과의 통상(通商)을 허(許)한 우리 나라는 비로소 세계(世界)의 정세(情勢)에 눈뜨게 되어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 신사(辛巳)에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등(等) 십수인(十數人)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 하여 일본(日本)으로 보내어 개화(開化)의 정무(政務)를 시찰(視察)케 하니 이는 우리 나라가 서양(西洋)의 신문명(新文明)에 대(對)하여 적극적(積極的)으로 관심(關心)을 표시(表示)한 시초(始初)이었다.

신사단(紳士團)이 돌아와서 임오년(壬午年)에 통리기무위문(統理機務衛門)이라는 기관(機關)을 만들어서 정치(政治)를 시행(施行)하며 또 병제(兵制)를 고치고 일본(日本) 육군(陸軍) 장교(將校)를 데려다가 신식(新式)의 군대(軍隊)를 편성(編成)하였다.

이와 동시(同時)에 모든 방면(方面)에 신구(新舊)의 대립(對立)이 생겨서 서로 비난(非難)과 공격(攻擊)을 일삼게 되니 신문화(新文化)를 받아들이자는 자(者)는 개화파(開化派)라 하고 일본(日本)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수구파(守舊派)라 지목(指目)하였는데 이들은 세계열강(世界列强)의 틈에 끼어있는 우리 나라의 새 지위(地位)를 자각(自覺)하여 국민일치(國民一致)로 자주독립(自主獨立)의 기초(基礎)를 닦는다는 것보다 개화파(開化派)는 일본(日本)을 힘입으려 하고 수구파(守舊派)는 청국(淸國)을 기대려하여 양자(兩者)가 모두 제 정신(精神)을 차리지 못하는 점(點)으로는 매 한가지오 다른 것이 없었고 이로 인(因)하여 우리 나라는 청국(淸國)과 일본(日本)이 동양(東洋)에서의 지위(地位)를 다투는 씨름판이 되었다.

군제개혁(軍制改革)과 일본(日本) 세력(勢力)의 도입(導入)은 수구파(守舊派)의 싫어 하는 바이오 또 구식(舊式) 군인(軍人)은 실직(失職)될 것을 걱정하고 있더니 임오년(壬午年)에 구식(舊式) 군인(軍人)이 오랫동안 요미(料米)를 받지 못하고 또 밀렸던 요미(料米)를 타는데 쌀에 모래가 많이 섞여서 이에 불평(不平)이 폭발(暴發)하여 한편(便)으로 퇴처(退處)하여 있는 대원군(大院君)에게 진정(陳情)을 하고 한편(便)으로 당시(當時) 정권(政權)을 잡고 탐학(貪虐) 불법(不法)으로 민렴(民斂)을 한 민씨(閔氏)를 죽이고 위해(危害)가 민비(閔妃)에게 미칠듯 함에 민비(閔妃)는 충주(忠州)로 도망(逃亡)하고 한편(便)으로 일본(日本) 공사관(公使館)을 습격(襲擊)하고 또 교사(敎師)로 와 있던 일본(日本)장교(將校)를 죽이니 일본공사(日本公使)는 스스로 사관(使舘)에 불지르고 인천(仁川)으로 가서 영국(英國) 군함(軍艦)을 얻어 타고 본국(本國)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 한다.

대원군(大院君)이 이 변보(變報)를 듣고 나와서 난(亂)을 진정(鎭定)하고 다시 정권(政權)을 잡으니 민씨(閔氏)들은 구원(救援)을 청국(淸國)에 청(請)하매 청국(淸國)에서는 이 기회(機會)를 타서 우리 나라에 세력(勢力)을 뻗치려 하여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병(兵) 삼천(三千)을 거느리고 서울로 와있게 하고 대원군(大院君)이 이번 변란(變亂)이 장본인(張本人)이라 하여 억지로 청국(淸國)으로 데려가더니 얼마후(後)에 돌려보냈다. 화방(花房)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인천(仁川)으로 와서 변란(變亂)의 책임(責任)을 물으니 조정(朝廷)에서는 배상금(賠償金) 오십만원(五十萬圓)을 내고 일본(日本) 공사관(公使館)에 호위병(護衛兵)을 두고 사신(使臣)을 일본(日本)에 보내어 진사(陳謝)의 뜻을 표(表)하는 등(等) 조건(條件)으로 조약(條約)을 맺으니 이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오 이해 팔월(八月)에 박영효(朴英孝)를 대사(大使)로 하고 김옥균(金玉均)을 부사(副使)로 일본(日本)에 보내니 이때의 승선(乘船)에 처음으로 태극기(太極旗)를 사용(使用)하였다.

박영효(朴英孝) 김옥균(金玉均) 등(等)이 일본(日本)에 가서 보고는 우리 나라 정치(政治) 개화(開化)의 시급(時急)함을 깨닫고 돌아와서 위선(爲先) 전환국(典圜局)(주전소(鑄錢所)) 기기국(機器局)(제조소(製造所)) 박문국(博文局)(인쇄소(印刷所))등(等)을 설치(設置)하고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發刊)하여 민지(民志)의 계개발(啓開發)에 힘쓰고 국정(國政) 개혁(改革)에 대(對)하여 여러 가지 포부(抱負)를 발표(發表)하니 이가 우리 나라 최초(最初)의 신문(新聞)이었다.

고종(高宗) 이십일년(二十一年) 갑신(甲申)에 청국(淸國)은 불국(佛國)과의 사이에 분쟁(紛爭)이 있었다. 그럼으로 다른 일을 돌아볼 여력(餘力)이 없는지라 개화파(開化派)에서는 이를 알고 일본(日本)의 후원(後援)을 얻어 수구파(守舊派)를 소탕(掃蕩)하여버릴 계획(計劃)을 세우고 그해 시월(十月)에 신설(新設)한 우정국(郵政局)의 개청식(開廳式)이 있음을 기회(機會)로 하여 민씨(閔氏) 일당(一黨)의 여러 요인(要人)을 죽이고 일병(日兵)을 궁중(宮中)으로 끌어들여 왕(王)을 족쳐서 개화파(開化派)의 신정부(新政府)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가 청국(淸國) 군사(軍士)를 청병(淸兵)함에 청장(淸將) 원세개(袁世凱)가 군사(軍士)를 이끌고 들어가서 일군(日軍)과 접전(接戰)하였다. 일병(日兵)이 힘이 약(弱)하여 궁중(宮中)에서 패퇴(敗退)하고 홍영식(洪英植) 등(等)은 죽고 일본공사(日本公使) 등(等)은 분격(憤激)한 민중(民衆)의 습격(襲擊)을 받으면서 서울에서 퇴거(退去)하고 박영효(朴英孝) 김옥균(金玉均)등(等)은 이틈에 끼어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하고 그 즉시(卽時)로 민씨(閔氏) 수구파(守舊派)의 정국(政局)이 다시 나타나니 이것이 갑신(甲申) 시월(十月)의 변(變)이라는 것이오 개화파(開化派)의 실패(失敗)는 내 집안 일을 남의 힘으로만 하려 한 당연(當然)한 결과(結果)이오 그 까닭에 우리 나라의 개화(開化)가 시운(時運)에 뒤진 것은 천재(千載)의 한사(恨事)이었다.

이해 십일월(十一月)에 일본(日本)에서 전권대사(全權大使) 정상성(井上聲)이 군대(軍隊)를 거느리고 와서 담변(談辨)하여 우리가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의 신축(新築)할 기지(基地)와 비용(費用)을 부담(負擔)하는 조건(條件)으로 그 전(前) 일을 결말(結末) 짓고 한편(便) 일본(日本)은 다음해 을유(乙酉)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청국(淸國)에 보내어 이홍장(李鴻章)으로 더불어 천진(天津)에서 담변(談辨)하여 양국(兩國)의 조선(朝鮮) 주둔(駐屯) 병(兵)을 사개월(四個月) 이내(以內)로 철수(撤收)할 것과 앞으로 조선(朝鮮) 사변(事變)에 있어 양국(兩國)이 군대(軍隊)를 출동(出動) 시킬 때에는 서로 통지(通知)할 것을 약정(約定)하니 이것이 소위(所謂) 천진조약(天津條約)이오 이 갑신(甲申)의 변(變)은 여러 해 동안 속으로 갈등(葛藤)되는 청(淸) 일(日) 양국(兩國)의 세력(勢力)이 표면(表面)에서 충돌(衝突)한 것이다.

천진조약(天津條約)에 의(依)하여 양국(兩國)이 모두 철병(撤兵)하였으나 청병(淸兵)의 一將 원세개(袁世凱)가 통상사무(通商事務) 전권위원(全權委員)의 명목(名目)으로써 그대로 서울에 머물면서 내정(內政)에 간섭(干涉)하고 제민(諸閔)이 그와 어우러져서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행(行)하여 국사(國事)가 더욱 글러졌다. 다만 시세(時勢)의 추이(推移)하는 바에 개화(開化)에 관(關)한 신시설(新施設)이 철종(哲宗)때에 안동김씨(安東金氏)들이 세도(勢道)하여 함부로 관직(官職)을 팔아먹고 이 관직(官職)을 산 무리들이 지방관(地方官)으로 내려와서 토색(討索)을 마음껏 하고 양반계급(兩班階級)이 서원(書院)을 소굴(巢窟)로 하여 백성(百姓)들을 괴롭게 함으로 각지(各地)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민심(民心)이 불안(不安)한 중(中) 경주(慶州)의 최제우(崔濟愚)(水雲)가 東學이란 새 宗敎를 일으켜서 「輔國安民 廣濟蒼生」을 敎의 主旨로하니 塗炭에 빠진 百姓들이 많이 加入하였다. 政府에서는 특권계급(特權階級)에 불평(不平)을 품은 하층계급(下層階級)의 사람들이 한 당(黨)으로 단결(團結)됨을 두려워하여 동학(東學)이 세상(世上)을 어지럽히고 민중(民衆)을 속인다는 죄명(罪名)으로 최제우(崔濟愚)를 잡아다 大邱에서 死刑하니 敎徒들은 地下로 들어가서 東學運動을 繼續하였다. 비정(秕政)에 시달리는 백성(百姓)들은 마음이 많이 이에 기우러져서 은연(隱然)히 천세력(天勢力)을 형성(形成)하더니 임진(壬辰)에 이르러 최시형(崔時亨)(해월(海月))을 중심으로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이 표면화(表面化)하여 정부(政府)에 글을 올리고 계사년(癸巳年)에는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을 중심(中心)으로 굳게 단결(團結)한 교도(敎徒)들이 경성(京城)에 올라와서 대궐(大闕) 앞에서 탄원(歎願)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시위운동(示威運動)을 감행(敢行)하였다. 이때에는 정부(政府)의 해산명령(解散命令)으로 일단(一旦) 물러났으나 한편(便) 불안(不安)한 민심(民心)을 자극(刺戟)하고 한편(便) 교세(敎勢)가 크게 떨쳐서 경상(慶尙) 전라(全羅) 충청(忠淸)의 삼남(三南)을 비롯하여 강원(江原) 황해(黃海) 평안도(平安道)에 이르기까지 동학(東學)의 운동(運動)이 급속도(急速度)로 발전(發展)하였다

이때 전라도(全羅道) 고부(古阜) 군수(郡守)가 만석보(萬石洑)(정읍)를 수리(修理)함에 있어 부정(不正)한 일이 있었음으로 민란(民亂)이 일어나더니 동학당원(東學黨員) 전봉준(全琫準)이 이를 계기(契機)로 하여 그 무리들과 함께 난리(亂離)를 일으켜서 사방(四方)이 이에 호응(呼應)하여 일어났다. 관군(官軍)이 이를 치러 갔으나 도처(到處)에서 패(敗)하고 마침내 전주(全州)가 동학당(東學黨)에게 점령(占領)되었음으로 조정(朝廷)에서 원세개(袁世凱)에게 상의(相議)한 결과(結果) 청국(淸國) 군사(軍士) 일천오백명이 와서 군사(軍士)를 도와서 겨우 난(亂)을 평정(平定)하였다. 일본(日本)은 벌써부터 한번 청국(淸國)과 싸워 대륙(大陸)에 있는 지위(地位)를 결정(決定)해 보려고 벼르는 차이라 갑오(甲午) 이월(二月)에 일본(日本)의 보호하(保護下)에 있던 김옥균(金玉均)이 상해(上海)에 갔다가 조선(朝鮮)사람 자객(刺客)에게 암살(暗殺)을 당(當)하고 국론(國論)이 일어나고 인(因)하여 청국(淸國)이 동학란(東學亂)에 일본(日本)에 통고(通告)함이 없이 조선(朝鮮)에 출병(出兵)함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위반(違反)함이라 하여 또한 유민(留民)을 보호(保護)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출병(出兵)하더니 이해 유월(六月)에 마침내 아산(牙山) 해상(海上)에서 양국(兩國)의 해군(海軍)이 충돌(衝突)하고 성환(成歡)에서 육전(陸戰)이 시작(始作)하였다. 전쟁(戰爭)이 난 뒤에 수륙(水陸) 양쪽에서 청국(淸國)이 대패(大敗)하여 일본(日本)의 지위(地位)는 나날이 강(强)하여 졌다.

일본(日本)이 세력(勢力)의 커짐을 따라 우리 나라 내정(內政)에 간섭(干涉)하기 시작(始作)하고 개화당(開化黨)이 세(勢)를 얻어 민씨(閔氏) 일족(一族)을 물리치고 김홍집(金弘集)을 수반(首班)으로 하는 신정부(新政府)가 조직(組織)되고 청국(淸國)과의 관계(關係)를 끊고 개국기원(開國紀元) 준용과거(遵用科擧) 폐지(廢止) 계급타파(階級打破) 사회혁신(社會革新) 등(等)에 관(關)한 이백여건(二百餘件)을 결정(決定)하니 이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한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은 우리 나라의 천수백년(千數百年)동안을 내려오던 봉건적제도(封建的制度)를 종결(終決)시키고 서양(西洋)의 자본주의(資本主義)를 수입(輸入)하는 시초(始初)이며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이를 강요(强要)한 것은 우리 나라의 발전(發展)을 위(爲)함이 아니오 일본(日本) 자본주의(資本主義)의 한 시장(市場)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을미년(乙未年)에 일본(日本)과 청국(淸國)이 마관조약(馬關條約)을 맺고 우리 나라의 독립(獨立)을 밝히고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일본(日本)에 주기로 하더니 아라사(俄羅斯)와 독일(獨逸)과 불란서(佛蘭西)의 삼국(三國)이 일본(日本)을 눌러서 요동(遼東)반도(半島)를 청국(淸國)에 돌려주기로 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日本)의 힘이 약(弱)함을 보고 또 주권(主權)의 침해(侵害)와 이권(利權)의 강요(强要)가 심(甚)해 짐으로 조정(朝廷)과 국민(國民)들에 배일(排日)의 기운(氣運)이 움직이고 따라서 일본(日本)의 압제(壓制)로 된 경장(更張)도 좋을 수가 없다하여 잘 시행(施行)되지 아니 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는 문벌타파(門閥打破)의 칙유(勅諭)가 내려서 양반(兩班)도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할 수 있고 또 상업(商業)이나 공업(工業)을 하던 사람도 학교(學敎)에 입학(入學)할 수 있다 하니 이는 사민평등(四民平等)(士農工商)의 첫 걸음을 내 디딘 것이며 이러한 정신(精神) 아래 을유년(乙酉年)에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서 신학문(新學問)과 신사상(新思想)을 가르치고 이해에 또 濟象院을 設立하여 처음으로 西洋의 의술(醫術)을 받아 들였다. 이 보다 앞서 갑신년(甲申年)에 우정국(郵政局)을 설립(設立)하고 우체제도(郵遞制度)를 실시(實施)하려던 것이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因)하여 일시(一時) 중단(中斷)되더니 을유년(乙酉年)에 전보국(電報局)이 생기고 이와 전후(前後)하여 주요(主要) 도시(都市)에 전신선(電信線)이 가설(架設)되었다.

 

일본(日本)의 침략(侵略)

우리 나라에 배일(排日)의 소리가 높아짐에 종전(從前)부터 동양(東洋) 방면(方面)에 세력(勢力)을 뻗쳐보려고 항상(恒常) 기회(機會)를 엿보고 있던 아라사(俄羅斯)가 공사(公使) 위패(韋貝)(카를 베베르)를 우리 나라에 보내어 왕실(王室)에 친근(親近)하기를 힘쓰고 일본(日本)을 누름에는 아국(俄國)이 가장 적당(適當)함을 선전(宣傳)하여 새로이 궁정(宮廷)의 신뢰(信賴)를 받게되고 개화당(開化黨)은 점차(漸次)로 몰락(沒落)하였다. 이때 일본(日本)의 공사(公使) 삼포오루(三浦梧樓)(미우라 고로)는 무인(武人)이라 이를 개(慨)하여 국면(局面)의 비상타개(非常打開)를 결정(決定)하고 을미(乙未) 팔월(八月)에 일변(一邊) 대원군(大院君)을 데려내어 먼저 궁중(宮中)으로 들어가고 병사(兵士)와 검객(劍客)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친아(親俄) 정책(政策)을 주장(主張)하고 있는 민비(閔妃)를 해(害)한 후(後) 그 시신(屍身)을 소화(燒火)하고 일변(一邊) 삼포(三浦) 자신(自身)은 왕(王)에게 뵈고 친아(親俄) 파(派)를 쫓아낼 것과 개화파(開化派) 내각(內閣)을 재(再) 조직(組織)할 것을 강청(强請)하여 왕(王)의 승인(承認)을 얻으니 이를 팔월을미지변(八月乙未之變)이라 한다. 이 사변(事變)이 외교상(外交上)으로 거북한 문제(問題)가 됨에 일본(日本)은 삼포(三浦) 이하(以下) 관계자(關係者)를 소환(召還)하여 투옥(投獄)하였다.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은 다시 개혁안(改革案)을 진행(進行)하여 구력(舊曆)을 폐지(廢止)하고 태양력(太陽曆)을 채용(採用)하며 단발령(斷髮令)을 영포(領布)하면서 일왕일원(一王一元)의 연호(年號)를 세우기로 하여 병신(丙申)으로부터 건양(建陽)이라 채(採)할 것을 결정(決定)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강압수단(强壓手段)은 일반(一般)의 악감(惡感)을 사고 더욱이 민비(閔妃)의 시해(弑害)는 왕(王)의 부자(父子)의 지한(至恨)이 되어 개화당(開化黨)의 시정(施政)은 잘 진행(進行)되지 아니하였고 한편(便)으로 박정양(朴定陽) 등(等) 친아(親俄) 파(派)의 암중운동(暗中運動)이 있어 건양(建陽) 원년(元年) 이월(二月)에 왕(王)과 태자(太子)가 궁중(宮中)에서 벗어나서 아국(俄國) 사관(使舘)으로 옮겨가고 정국(政局)이 일변(一變)하여 개화(開化)의 신법령(新法令)은 많이 철폐(撤廢)되고 아국(俄國)의 세력(勢力)이 우리 나라 궁정(宮廷)에 깊이 뿌리를 박고 김홍집(金弘集)은 난(亂) 중(中)에 맞아죽고 그 밖의 친일파(親日派)는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하고 각(各) 지방(地方)에는 국모(國母)의 원수(怨讐)를 갚고 단발(斷髮)을 반대(反對)한다하여 의병(義兵)이 일러 나서 국내(國內)가 소연(騷然)하였다.

고종(高宗)은 아관(俄館)에 머무르기 일년(一年)만에 정유(丁酉) 이월(二月)에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德壽宮))에 돌아갔다. 그리고 기미독립(己未獨立) 후(後) 하지 못한 바를 결정(決定)하여 황제위(皇帝位)에 오르고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고치고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바꾸고 특파대사(特派大使) 또는 전권공사(全權公使)를 각국(各國)에 파견(派遣)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허울은 훌륭하게 만들어 졌으나 군상신하(君上臣下)의 아무 데서도 새로운 정신(精神)을 가다듬은 실상(實相)을 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관정(官廷)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친아파(親俄派)의 굴혈(窟穴)이 되어서 아국(俄國)의 심부름하기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광무(光武)원년(元年) 구월(九月)에는 아국(俄國)이 반(半)넘어 위협(威脅)으로써 우리 군대(軍隊)의 교련(敎鍊)과 재정(財政)의 처리(處理)를 수중(手中)에 거두어가며 일변(一邊) 광산(鑛山) 삼림(森林) 기타(其他)의 이권(利權)을 훔쳐가기에 열중(熱中)하며 또 해군(海軍) 근거지(根據地)로 마산(馬山)을 조차(租借)하려는 음모(陰謀)도 진행(進行)하고 있었다.

갑신(甲申)의 당인(黨人)으로서 미국(美國)에 망명(亡命)하여 있던 서재필(徐載弼)이 건양(建陽) 원년(元年) 미국(美國)에서 돌아와서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의 고문(顧問)으로 있으면서 독립문(獨立門)을 짓고 신문(新聞)을 내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만들어 국민정신(國民精神) 계발(啓發)에 힘쓰더니, 아국(俄國)의 이러한 야심(野心)을 보고 맹렬(猛烈)히 일어나서 반대운동(反對運動)을 일으키니 아국(俄國)의 행동(行動)이 크게 퇴축(退縮)되고 마산(馬山) 조차(租借) 문제(問題)도 미연(未然) 방지(防止)되었다.

독립협회(獨立協會)는 내정(內政)의 개혁상(改革上)에 많은 의견(意見)을 제출(提出)하였으나 정부(政府)나 민간(民間)이 모두 입으로만 떠들 뿐이오 실천(實踐)에 대한 계획(計劃)과 열의(熱意)가 없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오직 광무년간(光武年間)에 새로운 시설(施設)이 전(前)보다 많았으니 원년(元年)에는 경성(京城) 인천(仁川)간(間)에 전선(電線)을 가설(架設)하고 이년(二年)에는 경성(京城)에 전차(電車)가 놓이고 삼년(三年)에는 경인철도(京仁鐵道)가 개통(開通)되었다.

아국(俄國)이 우리 나라에 가까워 짐음 일본(日本)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써 일본(日本)은 아국(俄國)에 대(對)해서 한국문제(韓國問題)에 관(關)한 협의(協議)를 구(求)하여 두어 차례 내약(內約)도 성립(成立)되었다. 그러나 아국(俄國)은 불같은 남하욕(南下慾)을 그러한 내약(內約)에 거리낌없이 하고싶은 일을 하며 또 만주(滿洲)의 경영(經營)에 착수(着手)하여 광무(光武) 이년(二年)에 청국(淸國)으로부터 요동(遼東)반도(半島)를 조차(租借)하여 여순구(旅順口)에 군항(軍港)을 설비(設備)하고 만주(滿洲)철도(鐵道)의 부설권(敷設權)을 얻으며 일변(一邊) 조선(朝鮮)의 진해만(鎭海灣)의 밤구미(마산포의 한 지역)를 조차(租借)하여 그 야심(野心)이 점점 들어 났다. 다시 광무(光武) 사년(四年) 청국(淸國)에 의화단(義和團)의 난(亂)이 있음을 기회(機會)로 하여 만주(滿洲)를 군사점령하(軍事占領下)에 두고 각국(各國)의 말에 이기지 못하여 철병(撤兵)한다는 기한(期限)을 정(定)하되 그는 형식(形式)뿐이오 실행(實行)하지는 아니 하였다. 일본(日本)은 아국(俄國)의 남하(南下)를 제어(制御)하려하여 광무(光武) 육년(六年) 일월(一月)에 일영동맹(日英同盟)을 맺으니 그 대개(大槪)는 한청양국(韓淸兩國)의 독립(獨立)과 및 그 영토(領土)를 보전(保全)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은 한국(韓國)에서 영국(英國)은 청국(淸國)에서 정치상(政治上) 경제상(經濟上)으로 특수(特殊)한 권익(權益)을 가지고 이것이 침해(侵害)되는 때에는 양국(兩國)이 공동(公同)으로 필요(必要)한 조치(措置)를 하며 또 양국(兩國) 중(中) 일국(一國)이 타국(他國)과 개전(開戰)하는 때에는 일국(一國)은 엄정(嚴正) 중립(中立)을 지킨다 함이었다. 아국(俄國)에서는 일영동맹(日英同盟)에 대항(對抗)하기 위(爲)하여 아불동맹(俄佛同盟)을 맺어 극동(極東)에 있는 양국(兩國)의 이익(利益)을 공동(共同)으로 보호(保護)한다 하였다.

일본(日本)과 영국(英國)이 동맹(同盟)을 맺어 소위(所謂) 한국(韓國)의 독립(獨立)과 영토보전(領土保全)한다 함은 한국(韓國)의 이익을 위(爲)함이 아니라 한국(韓國)이 아국(俄國)에게 탈취(奪取)됨을 방지(防止)하고 일본(日本)이 탈취(奪取)하겠다는 뜻이니 이때로부터 한국(韓國)은 완전(完全)히 열강(列强)의 조상육(俎上肉)이 된 것이오 자주독립(自主獨立)하는 역사(歷史)는 이미 끊어진 것이다.

아국(俄國)은 만주(滿洲)에서 철병(撤兵)할 성의(誠意)를 보이지 아니할 뿐 아니라 광무(光武) 칠년(七年)에는 한국(韓國)으로 손을 뻗어서 일변(一邊) 용암포(龍巖浦)(압록강 하구 평북)의 조차(租借)를 구(求)하고 일변(一邊) 군대(軍隊)를 그리로 보내서 벌목(伐木)과 건축(建築)의 사업을 시작(始作)하였다.

일본(日本)은 아국(俄國)과 최후(最後)의 교섭(交涉)을 시(始)하여 아국(俄國)이 만주(滿洲)와 한국(韓國)에서 손을 떼기를 요구(要求)하여 아국(俄國)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북위(北緯) 삼십구도(三十九度) 이상(以上)의 우리 나라의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의 땅을 중립지대(中立地帶)로 하기를 요구(要求)하고 조금도 양보(讓步)하려 하지 아니하더니 광무(光武) 팔년(八年) 이월(二月)에 마침내 일아전쟁(日俄戰爭)이 일어났다. 일아(日俄)의 풍운(風雲)이 급(急)하여짐에 우리 정부(政府)는 미리 국외중립(國外中立)을 선언(宣言)하였으나 전쟁(戰爭)의 시작(始作)됨과 함께 일본군(日本軍)이 연속(連續) 입국(入國)하여 국토(國土)의 일부(一部)가 전쟁(戰爭)으로 화(化)하고 아국(俄國)의 패퇴(敗退)를 따라서 일본(日本)의 압력(壓力)이 그대로 커졌다. 그리하여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대(對)한 시정개선(施政改善)의 충고권(忠告權)과 외교기능(外交機能)의 제한권(制限權)을 가지고 다시 재정(財政)과 외교(外交)의 감독권(監督權)을 가지고 정부(政府) 각(各) 기관(機關)에 일본인(日本人) 고문(顧問)이 들어앉고 이 동안에 경의(京義) 경원(京元)의 양(兩) 철도(鐵道) 부설권(敷設權) 이하(以下)로 허다(許多)한 권익(權益)을 가지고 이어 통신사업(通信事業)도 일본(日本)의 것이 되었다.

광무(光武) 구년(九年)에 일본(日本)이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대승(大勝)하고 또 아국(俄國) 해군(海軍)이 대마해협(對馬海峽)에서 치명상(致命傷)을 받아 전국(戰局)의 대세(大勢)가 이미 정(定)하매 미국(美國) 대통령(大統領) 루즈벨트가 이 중간(中間)에 들어 양국(兩國)의 강화조약(講和條約)이 포츠머스(뉴햄프셔주)에서 조인(調印)되어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에서 정치상(政治上) 군사상(軍事上) 경제상(經濟上)으로 특수(特殊)한 이익(利益)이 승인(承認)되었다.

일본(日本)은 이해 십일월(十一月)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와서 위협(威脅)으로써 협약(協約)을 맺으니 외교권(外交權)을 빼앗고 통감(統監)을 경성(京城)에 두어 보호정치(保護政治)를 시행(施行)하니 이것이 보통(普通) 이른바 오조약(五條約) 또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條約)은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반대(反對)하고 황제(皇帝)가 서명(署名)을 거절(拒絶)한 때문에 형식(形式)을 갖추지 못하고 일방적(一方的)으로 실행(實行)된 것이다.

이 조약(條約)이 한번 발포(發布)됨에 국민(國民) 상하(上下)의 분격(憤激)이 극도(極度)에 달(達)하고 오랫동안 한국(韓國)의 보전(保全)과 동양평화(東洋平和)를 공약(公約)해 오던 일본(日本)의 무신의(無信義)함을 통매(痛罵)하여 한신(韓臣)들 중에는 조약(條約) 폐기(廢棄)를 소청(疏請)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매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이하(以下) 순국(殉國)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조병세(趙秉世)는 그 유서(遺書)에 「강린(强隣)이 조약(條約)을 져버리고 도적(盜賊)의 무리가 나라를 팔아서 우리의 자손(子孫)이 이 장차(將次) 남의 노예(奴隸)가 될 것이니 바라건대 동포(同胞)들은 각자(各自)가 분발(奮發)하여 독립(獨立)의 기초(基礎)를 닦으라」하고 민영환(閔泳煥)의 유서(遺書)에서는「내가 죽어도 지하(地下)에서 우리 나라의 독립(獨立)을 위(爲)하여 싸우리니 동포(同胞)들은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말고 천만번(千萬番) 분발(奮發)하여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學問)을 더욱 힘쓰며 한마음 한뜻으로 나가서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회복(恢復)하면 나는 저승에서 기뻐하리라」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한국병합(韓國倂合)에 대(對)한 방안(方案)은 이미 결정(決定)되고 시기(時機)만 기다릴 뿐이더니 광무(光武) 십일년(十一年)에 화란(和蘭)(네델란드) 해아(海牙)(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매 한국(韓國) 황제(皇帝)의 밀사(密使) 이상설(李相卨) 이준(李雋)이 해아(海牙)에 가서 협약(協約)의 무효(無效)함을 역설(力說)하니 이에 일본(日本)이 그 책임(責任)을 묻는다 하여 황제(皇帝)를 퇴위(退位)시켜 태황제(太皇帝)라 하고 태자(太子)를 세워 황제(皇帝)를 삼고 연호(年號)를 융희(隆熙)라 고치고 일체(一切) 행정(行政)을 통감(統監)의 지휘(指揮)를 받고 일본인(日本人)을 한국(韓國)의 관리(官吏)로 임용(任用)하기로 하는 동시(同時)에 군대(軍隊)를 해산(解産)하고 각부(各部)의 차관(次官)에 일본인(日本人)을 임용(任用)하여 소위(所謂) 차관정치(次官政治)가 실현(實現)되었다.

간도지방(間島地方)은 청국(淸國)의 봉금지(封禁地)로 되어 만주족(滿洲族) 이외(以外)의 인민(人民)의 입거(入居)함을 허락(許諾)하지 아니하더니 어느 틈에 청국(淸國)의 산동지방(山東地方)의 유민(流民)들이 입주(入住)하여 우리 고종(高宗) 초년(初年)에는 이미 억제(抑制)할 수 없이 되었음으로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에 청국(淸國)의 토문강(土門江) 일대(一帶) 지방(地方)을 정식(正式)으로 개방(開放)하기로 하고 관리(官吏)를 보내어 조사(調査)할 때 그곳이 이미 조선인(朝鮮人)의 집단(集團) 거주(居住)로 된 것을 발견(發見)하였다. 이에 청국(淸國)에서는 조선인(朝鮮人)에게 청국(淸國) 민속(民俗)을 좇거나 조선(朝鮮)으로 철환(撤還)하거나 양자(兩者) 중(中)에 그 하나를 택(擇)하라고 하였다. 조선인(朝鮮人)은 그대로 살되 청국(淸國) 풍속(風俗)을 좇지 아니하겠다 하여 말썽이 되더니 이십년(二十年)에 어윤중(魚允中)이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되어 두만강(豆滿江) 연변(沿邊)을 시찰(視察)할 때에 이 사정(事情)을 알고 이는 국세민생(國勢民生)의 큰 문제(問題)라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와 그 부근(附近)의 지형(地形)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그 결과(結果)로 정계비(定界碑)에서 가까이 나오는 물은 동북(東北)의 방향(方向)으로 흐르다가 토문(土門)의 형상(形狀)을 짓고 지금 간도지방(間島地方)을 휩싸 흐르는 것을 발견(發見)하고 토문강(土門江)이라는 것은 곧 이 물이오 간도지방(間島地方)은 당연(當然)히 조선(朝鮮)의 소속(所屬)임을 판정(判定)하였고 청국(淸國)에서는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豆滿江)의 별명(別名)이라 하여 양국(兩國)의 주장(主張)이 서로 대립(對立)되었다. 이십이년(二十二年)에 양국(兩國)은 실지(實地)로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청국(淸國)에서 그 주장(主張)하는 근거(根據)가 부족(不足)함을 깨닫고도 오히려 굴(屈)하지 아니하고 조선(朝鮮)에서도 기어(期於)히 주장(主張)을 관철(貫徹)하려하여 이래(爾來) 수십년(數十年)에 문제(問題)의 해결(解決)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한국(韓國)의 외교(外交)가 일본(日本)으로 넘어감에 간도문제(間島問題)가 청일(淸日)사이의 분쟁(紛爭)이 되고 처음에는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의 방침(方針)대로 간도(間島)를 우리 나라 영토(領土)로 정(定)하고 행정기관(行政機關)을 간도(間島)의 용정촌(龍井村)에 두고 조선인민(朝鮮人民)을 거느리더니 융희(隆熙) 삼년(三年)에 일본(日本)이 남만주(南滿州) 철도(鐵道)의 안봉선(安奉線)을 고쳐 놓을 때에 청국(淸國)이 일본(日本)의 말을 잘 듣지 아니함에 일본(日本)은 철도(鐵道)용지(用地) 문제(問題)를 일본(日本)의 요구(要求)대로 해결(解決)하는 대신(代身)에 간도(間島)를 청국영토(淸國領土)로 인정(認定)하였다. 그리하여 간도(間島)의 주권(主權)은 청국(淸國)에 주고 한국인민(韓國人民)은 전(前)과 같이 자유(自由)로 거주(居住)하면서 청국(淸國)의 법권(法權)에 복종(服從)하며 용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백초구(百草溝) 는 개방지(開放地)로 하여 이쪽의 영사관(領事館)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간도문제(間島問題)는 일본(日本)이 저희 본국(本國)의 이익(利益)을 위(爲)하여 청국(淸國)에 준 것이오 한국(韓國)의 승인(承認)한 것이 아님으로 금후(今後) 우리 나라와 중국(中國)과의 사이에 다시 분쟁(紛爭)이 일어날 문제(問題)이다.

 

민중(民衆)운동(運動)

처음에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맺어지며 중앙(中央) 정국(政局)이 소란(騷亂)함은 물론(勿論)이오 지방(地方)에서도 조약(條約)에 대(對)한 반항운동(反抗運動)이 도처(到處)에서 일어났다. 그 중(中)에서도 크게 기세(氣勢)를 떨친 것은 광무(光武) 십년(十年)에 민종식(閔宗植)이 홍천(洪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최익현(崔益鉉)은 순창(淳昌)에서 신돌석(申乭石)은 평해(平海)에서 이에 호응(呼應)하여 일어나 한동안 일인(日人)을 괴롭게 하였다.

일본(日本) 세력(勢力)이 커지기 시작(始作)힘으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 중(中)에서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서 일본(日本)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祖國)과 동포(同胞)를 배반(背叛)하는 무리가 생겼으니 그 중(中)에서도 안병준(安秉畯) 윤시병(尹始炳)같은 자(者)들은 동학(東學)교도(敎徒)의 한 사람인 이용구(李容九)와 더불어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서 일본(日本)의 전쟁(戰爭)에 협력(協力)하고 또 보호조약(保護條約)을 맺기 전(前)부터 이미 우리 나라는 일본(日本)의 보호(保護)를 받아야 한다고 발표(發表)하였다. 이에 일본(日本)에 가있던 동학(東學)의 수령(首領) 손병희(孫秉熙)는 곧 경성(京城)으로 돌아와서 이용구(李容九)와 손을 끊고 새로이 천도교(天道敎)를 일으켜서 동학(東學)의 전통(傳統)을 이으니 따로이 시천교(侍天敎)를 세워서 이와 대립(對立) 하였다.

이에 일진회(一進會)의 반역행동(反逆行動)에 대항(對抗)하기 위(爲)하여 장지연(張志淵)등(等)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組織)하였으나 내무대신(內務大臣)으로 들어간 송병준(宋秉畯)에게 해산(解散)을 당(當)하고 광무(光武) 십일년(十一年)에는 나인영(羅寅永)등(等)이 일본(日本)과 협약(協約)맺은 오대신(五大臣)을 매국노(賣國奴) 또는 오적(五賊)이라 하여 암살(暗殺)을 도모(圖謀)하고 오대신(五大臣)의 한 사람 권중현(權重顯)을 길거리에서 저격(狙擊)한 일이 있었다.

융희(隆熙) 연대(年代)에 이르러서는 의분(義憤)에 북받치는 민중(民衆)의 격렬(激烈)한 행동(行動)이 더욱 잦았다. 처음에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를 빼앗으려는 행동(行動)을 미국(美國)이 시인(是認)하고 일본(日本)의 추천(推薦)으로 미국(美國)사람 수지분(須知芬)(D.W.스티븐스)이 우리 나라의 외교(外交) 고문(顧問)이 되더니 수지분(須知芬)이 미국(美國)에 건너가서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대(對)한 행동(行動)을 찬(讚)한 까닭에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두 사람이 이를 쏘아 죽이고 삼년(三年) 시월(十月)에는 전(前)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합이빈(哈爾濱)(하얼빈)에 간 것을 안중근(安重根)이 쏘아 죽이고 이해 십이월(十二月)에는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경성(京城)의 길거리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에 찔린 일은 가장 세상(世上)에 들어 난 일이다.

앞서 국가(國家)의 내외(內外) 정세(情勢)의 긴박(緊迫)과 새 사조(思潮)의 움직임은 뜻이 있는 인사(人士)들로 하여금 일아(日俄)를 반성(反省)하게 하여 국학(國學)에 대(對)한 연구(硏究)가 늘어갔으니 주시경(周時經)은 국문(國文)의 연구(硏究)와 보급(普及)에 힘썼고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같은 젊은 학자(學者)들은 국사(國史) 연구(硏究)에 공적(功績)이 있었고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은 국문(國文)과 한문(漢文)을 섞어 쓴 새로운 글월로서 신(新) 소설(小說)은 우리 나라의 문학(文學)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언론기관(言論機關)에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비롯하여 황성신문(皇城新聞) 제국신문(帝國新聞) 대한매일신문(大韓每日新聞) 등(等)이 차례로 나타나서 모두 독립사상(獨立思想)을 고취(鼓吹)하고 일본(日本)의 야망(野望)을 비난(非難)하였다.

그러나 한번 기우러지기 시작(始作)한 국세(國勢)는 다시 회복(恢復)할 길이 없었다.

융희(隆熙) 사년(四年)에 일본(日本)군벌(軍閥)의 거두(巨頭) 사내정의(寺內正毅)(데라우찌 마사다께)가 총독(總督)으로 되어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의 사이에 합방조약(合邦條約)이 맺어져서 이해 팔월(八月) 이십구일(二十九日)에 이를 발표(發表)하였다.

우리 나라가 건국(建國) 이래(以來) 사천여년(四千餘年)에 일직 단절(斷絶) 된 일이 없는 역사(歷史)의 전통(傳統)이 처음으로 끊어지고 이천만(二千萬) 민족(民族)은 비통(悲痛)한 시련(試鍊)을 직면(直面)하였다.

이씨(李氏) 건국(建國)으로부터 융희(隆熙) 사년(四年) 경술(庚戌)에 이르기까지 이십칠대(二十七代) 오백십구년(五百十九年)이었고 뜻 있는 사람들은 의분(義憤)을 이기지 못하여 일본(日本)에 반항(反抗)하다 혹(或)은 죽고 혹(或)은 옥(獄)에 갇치고 혹(或)은 외국(外國)으로 망명(亡命) 하였다.

 

  기미독립(己未獨立) 선언서(宣言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이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의 권위(權威)를 장(仗)하야 차(此)를 선언(宣言)함이며 이천만(二千萬) 민중(民衆)의 성충(誠忠)을 합(合)하야 차(此)를 포명(佈明)함이며 민족(民族)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발전(自由發展)을 위(爲)하야 차(此)를 주장(主張)함이며 인류적(人類的) 양심(良心) 발로(發露)에 기인(基因)한 세계개조(世界改造)의 대기운(大機運)에 순응병진(順應倂進)하기 위(爲)하야 차(此)를 제기(提起)함이니 시(是) ― 천(天)의 명명(明命)이며 시대(時代)의 대세(大勢)이며 전인류공동주권(全人類共同主權)의 정당(正當)한 발동(發動)이라 천하하물(天下何物)이든지 차(此)를 저지억제(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구시대(舊時代)의 유물(遺物)인 침략주의(侵略主義) 강권주의(强權主義)의 희생(犧牲)을 작(作)하야 유사이래(有史以來) 누천년(累千年)에 처음으로 이민족겸제(異民族箝制)의 통고(痛苦)를 상(嘗)한지 금(今)에 십년(十年)을 과(過)한지라 아생존권(我生存權)의 박탈(剝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심령상발전(心靈上發展)의 장애(障碍)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민족적존영(民族的尊榮)의 훼손(毁損)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으로써 세계문화(世界文化)의 대조류(大潮流)에 기여보비(寄與補裨)할 기연(機緣)을 유실(遺失)함이 무릇 기하(幾何)이뇨

희(噫)라 구래(舊來)의 억울(抑鬱)을 선양(宣揚)하려하면

시하(時下)의 고통(苦痛)을 파탈(擺脫)하려하면

장래(將來)의 위협(威脅)을 삼제(芟除)하려하면

민족적양심(民族的良心)과 국가적염의(國家的廉義)의 압축소잔(壓縮銷殘)을 흥분신장(興奮伸張)하려하면

각개인격(各個人格)의 정당(正當)한 발달(發達)을 수(遂)하려하면

가련(可憐)한 자제(子弟)에게 수치적재산(羞恥的財産)을 유여(遺與)치 아니하려하면

자자손손(子子孫孫)의 영구완전(永久完全)한 경복(慶福)을 도영(導迎)하려하면

최대급무(最大急務)가 민족적독립(民族的獨立)을 확실(確實)하게 함이니 이천만각개(二千萬各個)가 인(人)마다 방촌(方寸)의 인(刃)을 회(懷)하고 인류통성(人類通性)과 시대양심(時代良心)이 정의(正義)의 군(軍)과 인도(人道)의 간과(干戈)로써 호원(護援)하는 금일(今日) 오인(吾人)은 진(進)하야 취(取)함에 하강(何强)을 좌(挫)치 못하랴 퇴(退)하야 작(作)하매 하지(何志)를 전(展)치 못하랴

병자수호조규(丙子修護條規) 이래(以來) 시시종종(時時種種)의 금석맹약(金石盟約)을 식(食)하얏다 하야 일본(日本)의 무신(無信)을 죄(罪)하랴 아니하노라 학자(學者)는 강단(講壇)에서 정치가(政治家)는 실제(實際)에서 아(我) 조종(朝宗)의 세업(世業)을 식민지시(植民地視)하고 아(我) 문화민족(文化民族)을 토매인우(土昧人遇)하야 한갓 정복자(征服者)의 쾌(快)를 탐(貪)할 뿐이오 아(我)의 구원(久遠)한 사회기초(社會基礎)와 탁락(卓犖)한 민족심리(民族心理)를 무시(無視)한다 하야 일본(日本)의 소의(少義)함을 책(責)하랴 아니하노라

자기(自己)를 책려(策勵)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타(他)의 원우(怨尤)를 가(暇)치 못하노라

현재(現在)를 주무(綢繆)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숙석(宿昔)의 징변(懲辨)을 가(暇)치 못하노라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소임(所任)은 다만 자기(自己)의 건설(建設)이 유(有)할 뿐이오 결(決)코 타(他)의 파괴(破壞)에 재(在)치 아니 하도다

엄숙(嚴肅)한 양심(良心)의 명령(命令)으로써 자가(自家)의 신운명(新運命)을 개척(開拓)할 뿐이오 결(決)코 구원(舊怨)과 일시적감정(一時的感情)으로써 타(他)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 구사상(舊思想) 구세력(舊勢力)에 기미(羈縻)된 일본(日本) 위정가(爲政家)의 공명적희생(功名的犧牲)이된 부자연우불합리(不自然又不合理)한 착오상태(錯誤狀態)를 개선광정(改善匡正)하야 자연우합리(自然又合理)한 정경대원(政經大原)으로 귀환(歸還)케 함이로다

당초(當初)에 민족적요구(民族的要求)로써 출(出)치 아니한 양국합병(兩國合倂)의 결과(結果)가 필경(畢竟) 고식적(姑息的) 위압(威壓)과 차별적(差別的) 불평(不平)과 통계수자상허식(統計數字上虛飾)의 하(下)에서 이해상반(利害相反)한 양민족간(兩民族間)에 영원(永遠)히 화동(和同)할 수 없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去益深造)하는 금래실적(今來實積)을 관(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舊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眞正)한 이해(理解)와 동정(同情)에 기본(基本)한 우호적(友好的) 신국면(新局面)을 타개(打開)함이 피차간(彼此間)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捷徑)임을 명지(明知)할 것이 아닌가 또 이천만(二千萬) 함분축원(含憤蓄怨)의 민(民)을 위력(威力)으로써 구속(拘束)함은 다만 동양(東洋)의 영구(永久)한 평화(平和)를 보장(保障)하는 소이(所以)가 아닐 뿐 아니라 차(此)로 인(因)하야 동양안위(東洋安危)의 주추(主樞)인 사억만지나인(四億萬支那人)의 일본(日本)에 대(對)한 위구(危懼)와 시의(猜疑)를 갈수록 농후(濃厚)케 하야 그 결과(結果)로 동양전국(東洋全局)이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비운(悲運)을 초치(招致)할 것이 명(明)하니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조선독립(朝鮮獨立)은 조선인(朝鮮人)으로 하야곰 정당(正當)한 생영(生榮)을 수(遂)케 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으로 하야곰 사로(邪路)로써 출(出)하야 동양지지자(東洋支持者)인 중책(重責)을 전(全)케 하는 것이며 지나(支那)로 하야곰 몽매(夢寐)에도 면(免)치 못하는 불안공포(不安恐怖)로서 탈출(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東洋平和)로 중요(重要)한 일부(一部)를 삼는 세계평화(世界平和)와 인류행복(人類幸福)에 필요(必要)한 계단(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區區)한 감정상(感情上) 문제(問題)리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展開)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時代)가 거(去)하고 도의(道義)의 시대(時代)가 래(來)하도다 과거전세기(過去全世紀)에 연마장양(鍊磨長養)된 인도적(人道的) 정신(精神)이 바야흐로 신문명(新文明)의 서광(曙光)을 인류역사(人類歷史)에 투사(投射)하기 시(始)하도다.

신춘(新春)이 세계(世界)에 래(來)하야 만물(萬物)의 회소(回蘇)를 최촉(催促)하는도다 동빙한설(凍氷寒雪)에 호흡(呼吸)을 폐칩(閉蟄)한 것이 피일시(彼一時)의 세(勢)라 하면 화풍난양(和風暖陽)에 기맥(氣脈)을 진서(振舒)함은 차일시(此一時)의 세(勢)니 천지(天地)의 부운(復運)에 제(際)하고 세계변조(世界變潮)를 승(乘)한 오인(吾人)은 아무 주저(躊躇)할 것 없으며 아무 기탄(忌憚)할 것도 없도다 아(我)의 고유(固有)한 자유권(自由權)을 호전(護全)하야 생왕(生旺)의 낙(樂)을 포향(飽享)할 것이며 아(我)의 자족(自足)한 독창력(獨創力)을 발휘(發揮)하야 춘만(春滿)한 대계(大界)에 민족적정화(民族的精華)를 결뉴(結紐)할지로다

아(我) 등(等)이 자(玆)에 분기(奮起)하도다 양심(良心)이 아(我)와 동존(同存)하며 진리(眞理)가 아(我)와 병진(倂進)하는도다 남녀노소(男女老少)없이 음울(陰鬱)한 고소(古巢)로서 활발(活潑)히 기래(起來)하야 만휘군상(萬彙群象)으로 더불어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을 성수(成遂)케 하도다 천백세조령(千百世祖靈)이 오등(吾等)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全世界) 기운(氣運)이 오등(吾等)을 외호(外護)하나니 착수(着手)가 곧 성공(成功)이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光明)으로 맥진(驀進)할 따름인저

 

공약삼장(公約三章)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인도(正義人道) 생존존영(生存尊榮)을 위(爲)하는 민족적요구(民族的要求)이니 자유적정신(自由的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決)코 배타적(排他的)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치 말라

최후(最後)의 일인(一人)까지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正當)한 의사(意思)를 쾌(快)히 발표(發表)하라

일체(一切)의 행동(行動)은 가장 질서(秩序)를 존중(尊重)하야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야곰 어디 까지던지 광명정대(光明正大)케 하라

조선(朝鮮)건국(建國) 사천이백오십이년(四千二百五十二年) 삼월(三月) 일일(一日)

조선민족대표(朝鮮民族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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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표<아국역사>삼화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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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誤表

제목

고조선(古朝鮮)

()나라가 망()하고 ()나라

()나라가 망()하고 ()나라

 

구가(狗加) () 벼슬이 있어 소도(所道)를 나가 지키고

구가(狗加) () 벼슬이 있어 사출도(四出道)를 나가 지키고

삼국(三國)의 흥기(興起)

?????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

우리 나라의 광복운동(光復運動)

나라의 광복운동(光復運動)

고려(高麗)정치(政治)

그의 말에 의()하여

그의 말에 의()하여

 

고난(誥難)하였다.

힐난(詰難)하였다.

계단(契丹)관계(關係)

끊고 자기() 나라와

끊고 자기() 나라와

중기(中期)의 융성(隆盛)

그러나 문종(文宗)때는 성종(成宗) 이후(以後)

그러나 문종(文宗)때는 성종(成宗) 이후(以後)

몽고란(蒙古亂)

(蒙眞聯合軍)

(蒙眞聯合軍)

 

항적(抗敵)의진()에 참가(參加)한 일 없고

항적(抗敵)의진()에 참가(參加)한 일 없고

정치(政治)의 문란(紊亂)

안향(安珦)中國으로부터 孔子圖像

안향(安珦)中國으로부터 孔子圖像

고려(高麗)의 멸망(滅亡)

세민층(細民層)은구피()를 입는

세민층(細民層)은구피()를 입는

왕위쟁탈(王位爭奪)

산사(山寺) 하다가

산사(山寺)하다가

건설(建設)시기(時機)

()하여 결부법()

()하여 결부법()

 

간의실(簡儀室) 자격루(自擊漏)

간의(簡儀臺) 자격루(自擊漏)

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

공경()과 사대부(士大夫)

공경()과 사대부(士大夫)

 

서자(庶子)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자(庶子)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국정(國政)

농민(農民)에게 분급()할 수

농민(農民)에게 분급()할 수

 

前日)에 분급()한 것을 지주(地主

前日)에 분급()한 것을 지주(地主

기미독립(己未獨立) 선언서(宣言書)

오등()은 자()에 아() 조선(朝鮮)

오등()은 자()에 아() 조선(朝鮮)

 

 

 

 

 

 

 

 

 

我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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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담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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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顧談

 

二十二 歲에 咸興農村에서 私立學校 敎員으로 있을때에 漢學을 하는 노인집에 우리나라 歷史 大東紀年이라는 책이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빌려보았다. 이때는 日本한테 侵略당한지 八年이라 우리나라 歷史冊을 보기만하면 押收하는 까닭에 歷史冊을 얻어 보기는 極히 어려웠다. 그 冊을 보고 제나라歷史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 冊을 秘密히 읽었다. 또 그 이웃洞里에 「燃藜室記述」이라는 歷史冊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도 秘密히 빌려 읽었다. 그때 每日申報에 朝鮮儒敎淵源이라는 論文이 계속 發表되었는데 우리나라 歷史가 全然 發表되지 못하고 있던 當時에 이 論文은 내 歷史硏究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學校에서 退勤하여 宿所에 돌아오면 新聞에서 꼭 이 論文을 베껴가지고 그날 밤으로 이것을 精讀하였다. 그 學校를 그만둔 後에 己未年의 三一運動을 겪고 이를 契機로 사람들 中에서는 우리歷史를 알아야겠다는 民族意識이 높아지고 나 亦是 우리歷史를 더 깊이 硏究해야겠다는 생각이 切實해서 그해 가을에 歷史遺蹟을 探訪하기 爲하여 期限없는 南道旅行을 떠났다. 서울에 와서 몇일간 여러 史蹟을 돌아보고 더 南으로 내려가서 公州 扶餘 恩津 鷄龍山을 거쳐서 淸州 報恩 錦山을 보고 全州에 들어갔다가 萬頃江을 따라 내려가는 途中 旅費가 떨어졌다. 할 수 없이 金堤郡 農村의 어느 私立學校 敎員으로 就任하여 一時지내기로 했는데 그만 六年을 보냈다. 이 學校에 있는 동안에 全北과 全南에 있는 史蹟을 두루 돌아보고 여름 겨울 放學을 利用하여 慶州 金海等地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이 學校를 그만둔 後에는 北間島와 西間島를 돌아다니면서 古代 祖上들이 經營하던 滿洲方面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歷史硏究 十年間 한 가지 풀리지 않는 問題는 우리나라의 古代에는 農民이 全人口의 九割이 넘었는데 歷史冊은 主로 王室과 貴族들의 歷史로 되어있고 農民의 歷史는 全然 記錄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었다. 나는 農民의 歷史를 알아 보려고 하던次에 朝鮮農民이라는 月刊雜誌가 發刊되어 거기에 入社하여 農村問題를 硏究하면서 農民歷史를 아울러 硏究했다. 이렇게 五,六 年 歷史를 硏究하는 동안 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歷史는 되는대로 發展變化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떠한 原理와 法則을 따라서 發展하고 變化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다시 이 原理와 法則을 硏究하기 시작했다.

먼저 읽은 것이 西洋哲學이오 여기에 四,五年의 歲月을 쏟았는데 여기에서는 아무 所得이 없었다. 다음에는 宋代의 程朱哲學인 理氣說을 硏究하고 우리나라 先賢들의 學說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무런 原理와 法則을 發見치 못하고 다시 易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하고 八一五解放 三年前에 처음으로 易學에 들어가니 이것이 내가 易學을 硏究하기 始作한 動機다. 易學은 宇宙萬物에 모두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도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 生長成法則이 있는 까닭에 人類歷史에도 또한 이러한 法則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宇宙의 法則이 바로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되는 것이오 여기에서 비로소 이제까지 追求하던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을 大略 짐작한 것이오 그 實은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곧 易學原理의 主要部分임을 알게 되었다. 1967年回顧談

 

 

 

아국(我國)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원시생활(原始生活)

고조선(古朝鮮)

삼국(三國)의 흥기(興起)

고구려(高句麗)의 융성(隆盛)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

三.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

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

삼국혼전(三國混戰)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

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

발해(渤海)의 건국(建國)

해상발전(海上發展)

신라(新羅)의 쇠망(衰亡)

고려건국(高麗建國)

고려(高麗)정치(政治)

사회계급(社會階級)

건설사업(建設事業)

一. 토지제도(土地制度)

二. 성종(成宗)의 치적(治積)

계단(契丹)관계(關係)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문화(文化)

중기(中期)의 융성(隆盛)

여진(女眞)관계(關係)

계생(繼生)하는 반란(叛亂)

몽고란(蒙古亂)

정치(政治)의 문란(紊亂)

건설(建設)시기(時機)

단종(端宗)과 세조(世祖)

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


외국(外國)관계(關係)

고려(高麗)의 멸망(滅亡)

비고(備考)

이조(李朝)건국(建國)

이조(李朝)정치(政治)

왕위쟁탈(王位爭奪)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

중종반정(中宗反正)후(後)의 국정(國政)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

사회(社會)의 부패(腐敗)

임진왜란(壬辰倭亂)

난후(亂後)의 형세(形勢)

병자호란(丙子胡亂)

서양문화(西洋文化)와의 교섭(交涉)과 외국무역(外國貿易)

사색당쟁(四色黨爭)

영(英) 정(正)의 문화(文化)

세도(勢道)정치(政治)

홍경래(洪景來) 난(亂)과 민란(民亂)

북간도(北間島) 이주(移住)

개국(開國)시대(時代)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일본(日本)의 침략(侵略)

민중(民衆)운동(運動)

기미독립(己未獨立) 선언서(宣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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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국의 자연환경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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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국(我國)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아국(我國)은 아세아대륙(亞細亞大陸) 의 동북부(東北部)에 뻗어 나온 반도(半島)로서 삼면(三面)이 환해(環海)하고 앞으로 태평양(太平洋)과의 사이에 일본열도(日本列島)가 병풍(屛風)처럼 가리웠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地理的條件)으로 말미암아 고래(古來)로 대륙(大陸)에서 흥망(興亡)한 여러 나라 세력(勢力)이 우리를 덮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며 또 일본(日本)의 눈길이 언제나 우리에게 쏠려 있음으로 우리는 금후(今後)로도 항상(恒常) 대륙(大陸)을 돌아보고 일본(日本)을 내다보면서 생존(生存)하여야만 할 것이다.

아국(我國)은 북위(北緯) 삼십삼도(三十三度)에서 사십삼도(四十三度)까지의 사이에 있어서 가장 살기 좋은 온대(溫帶)의 한 지방(地方)이며 한서(寒暑)가 모두 생물(生物)이 서식(棲息)하기에 알맞고 또 절후(節候)를 따라서 우설(雨雪)이 고르므로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 자란다. 더욱이 공기(空氣)가 맑고 아름다운 산천(山川)이 어리어서 경치(景致)좋기로 세계(世界)에서 유명(有名)하고 지하(地下)에는 금(金) 은(銀) 동(銅) 철(鐵)을 비롯한 모든 광물(鑛物)이 풍부(豊富)하며 바다에는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부딪쳐서 각종(各種)의 어물(魚物)이 많이 잡힌다.

아국(我國)과 대륙(大陸)과의 지경(地境)은 근세(近世)에 와서 백두산(白頭山)과 및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두만강(豆滿江) 압록강(鴨綠江)으로 하였으나 옛날은 송화강(松花江)기슭의 만주(滿洲)벌판이 아국(我國)의 강토(疆土)이었고 또 그와 반대(反對)로 국경선(國境線)이 지금(只今)보다 축소(縮小)된 일도 있었으나 그러나 오늘날 삼팔선(三八線)이란 부자연(不自然)한 선(線)을 긋고 남북(南北)이 두 동강이로 나뉘게 된 것은 역사적(歷史的)으로 그러한 기록(記錄)이 있는 것도 아니오 또 우리민족(民族)이 이를 승인(承認)한 것도 아니다. 아국(我國)은 세계(世界)어느 나라보다도 순수(純粹)한 단일(單一)한 민족(民族)으로서 이 부자연(不自然)한 선(線)은 불원(不遠)하여 반드시 소멸(消滅)시켜야 할 것이다.

아국(我國)의 척량산맥(脊梁山脈)은 해발(海拔) 이천칠백여(二千七百餘) 미(米 미터)의 백두산(白頭山)에서 비롯하여 함경도(咸鏡道)땅에 개마(蓋馬)의 높고 넓은 고원지대(高原地帶)를 이루고 남(南)으로 내려와서 강원도(江原道)와의 사이에 철령(鐵嶺)을 이루니 옛날 여기에 관문(關門)을 두어서 출입(出入)하는 행인(行人)을 수비(守備)하였기 때문에 이를 중심(中心)으로 강원도(江原道)를 관동(關東), 함경도(咸鏡道)를 관북(關北),평안도(平安道)를 관서(關西)라 부르는 이름이 생겼다. 이 척량산맥(脊梁山脈)은 강원도(江原道)의 한복판을 타고 내려오면서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같은 명산(名山)을 내고 경상도(慶尙道)와의 지경(地境)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이 되고 다시 소백산맥(小白山脈)으로 뻗어 나와서 지리산(智異山)을 이루고 그 여맥(餘脈)이 멀리 제주도(濟州道)의 한라산(漢拏山)에까지 미쳤다. 충청도(忠淸道)와 경상도(慶尙道)와의 사이에 죽령(竹嶺), 조령(鳥嶺)의 관문(關門)이 있어 예로부터 남북(南北)이 통(通)하는 길목이 되었고 경상도(慶尙道)를 영남(嶺南)이라 함은 이 두 영(嶺)의 남(南)쪽에 있기 때문이다. 충청도(忠淸道)를 호서(湖西)라하고 전라도(全羅道)를 호남(湖南)이라 함은 신라(新羅)때에 지금(只今)의 김제(金堤)땅에 벽골제(碧骨堤)라는 큰 못을 파고 이 못이 호수(湖水)처럼 크고 넓다하여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이 아국(我國)의 지세(地勢)는 척량산맥(脊梁山脈)이 북(北)에서 남(南)으로 뻗어 있고 이 산맥(山脈)을 분수령(分水嶺)으로 하여 동(東)은 경사(傾斜)가 급(急)하나 서(西)와 남(南)은 넓은 평야(平野)가 열리고 대하(大河)가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문화(文化)는 언제나 동북부(東北部)지방(地方)보다 서남부(西南部)지방(地方)에서 먼저 열리었다. 강(江)은 북(北)으로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이 있어서 다 함께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였으나 하나는 서(西)로 흘러서 황해(黃海)에 들어가고 하나는 동(東)으로 흘러서 동해(東海)에 들어갔다. 이 두 강(江)은 근세(近世)에 와서 아국(我國)의 북경(北境)이 되고 하나는 서(西)로 중국대륙(中國大陸)과의 교섭(交涉)의 관문(關門)이 되고 하나는 북(北)으로 여진족(女眞族)의 내왕(來往)하는 길목이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압록강(鴨綠江)은 길이가 이천리(二千里)에 가까워서 아국(我國)에서 제일(第一) 큰 강(江)이며 고구려(高句麗)는 이 강(江)안에서 흥(興)하였고 남(南)으로 대한해협(大韓海峽)에 들어가는 낙동(洛東)은 신라(新羅)의 발상지(發祥地)이오 그밖에 청천강(淸川江), 대동강(大洞江), 예성강(禮成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금강(錦江)등(等) 황해(黃海)로 흘러 들어가는 강(江)이 대부분(大部分)이오 예로부터 이러한 강안(江岸)이 역사(歷史)의 무대(舞臺)로 등장(登場)하였다. 특(特)히 대동강(大洞江)은 고조선(古朝鮮)의 중심지(中心地)로서 나중에 고구려(高句麗)의 도읍(都邑)이 되었고 예성강(禮成江)과 임진강(臨津江) 어귀는 고려(高麗)의 근거지(根據地)이오 한강(漢江)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유명(有名)한 쟁탈지(爭奪地)가 되고 근세이래(近世以來)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안(江岸)의 서울이 아국(我國)의 수도(首都)이고 금강(錦江)은 백제말엽(百濟末葉)의 도읍(都邑)이었다.

고대(古代)의 도읍(都邑)은 방비(防備)의 편리(便利)와 풍산지대(豊産地帶)를 가진 것이 주요(主要)한 조건(條件)이 되어 있었으므로 역대(歷代)의 국도(國都)는 모두 대강(大江)의 험(險)과 평야(平野)를 가진 강안(江岸)을 취(取)하였던 것이다.

아국(我國)의 기후(氣候)는 대륙(大陸)과 대양(大洋)과의 사이에 갈마드는, 일사량(日射量)의 차(差)로 말미암아 생긴 계절풍(季節風)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좌우(左右)된다. 시월(十月)에서부터 삼월(三月)까지는 대륙계절풍(大陸季節風)이 불어서 춥고 가물며 사월(四月)에서부터 구월(九月)까지는 비교적(比較的) 약(弱)한 해안계절풍(海岸季節風)이 불어서 비가 많이 온다. 동일(同一)한 위도(緯度)의 타국(他國)에 비기어 아국(我國)의 겨울이 더욱 춥고 또 일년강우량(一年降雨量)의 사분지삼(四分之三)이 여름에 있음은 이 때문이고 아국(我國)의 농업생산(農業生産)이 이러한 기후(氣候)의 지배(支配)를 받음은 물론(勿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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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생활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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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생활(原始生活)

 

아국(我國)의 원시시대(原始時代)에는 주(主)로 어패(魚貝)와 조수(鳥獸)를 잡아먹고 초근목실(草根木實)을 캐어 먹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입고 석굴(石窟)과 움집에서 살았다. 농사(農事)라고는 오직 서(黍 기장)가 있을 뿐이오 서(黍 기장)는 어떤 토지(土地)에서든지 잘 생육(生育)되고 파종시기(播種時期)의 조만(早晩)에 영향(影響)됨이 적으므로 농업기술(農業技術)이 부족(不足)한 고대(古代)에 서농(黍農)만 있는 것은 필연(必然)한 일이다.

기구(器具)나 기명(器皿)은 주로 토석(土石)들로 만든 것이었으니 이 때를 석기시대(石器時代)라 한다. 지금(只今) 아국(我國)과 만주(滿洲)에서 발견(發見)되는 석부(石斧), 석촉(石鏃), 석도(石刀)의 여러 가지 석기(石器)는 모두 같은 계통(系統)인 것이며 이 시대(時代)의 토기(土器)는 물론(勿論) 날 그릇이었으니 그래도 쓸모 있게 여러 가지 모양(模樣)을 만들고 또 간단(簡單)한 그림 모양(模樣)도 새겨내었다. 그러므로 석기(石器)보다 토기(土器)에 있어서 그 시대(時代)의 모습(模習)과 그 민족(民族)의 성격(性格)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석기시대(石器時代)의 흔적(痕跡)은 지금(只今) 아국(我國)의 각처(各處)에 있는 굴(屈)속과 고성지(古城地)와 고분(古墳) 가운데서 많이 발견(發見)되거니와 그 중(中)에서도 해변(海邊) 여러 곳에 산재(散在)하는 패총(貝塚)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패총 중(貝塚中)에는 황해도(黃海道) 몽금포(夢金浦)와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金海)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有名)하며 그밖에 경상남도(慶尙南道) 고성(固城)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迎日)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北靑) 함경북도(咸鏡北道) 성진(城津), 웅기(雄基) 등지(等地)에도 큰 패총(貝塚)이 있으니 이는 옛날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버린 것이 파묻혀 생긴 것이다.

「선돌」이라는 입석(立石)은 높은 산(山)을 본뜬 것이어서 그때 사람들의 신앙(信仰)의 대상(對象)이었으며 이는 세계(世界)에서도 태양(太陽)을 숭배(崇拜)하는 풍습(風習)이 있는데, 어떤 곳에나 있지만 아국(我國)에 더욱 많고 그 중(中)에서도 단군전설(檀君傳說)이 남아 있는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지방(地方)과 마한(馬韓)의 옛 땅에 특(特)히 많다.

또「고인돌」이라고 한 지석(支石)은 혹(或)은 하늘에 제사(祭祀)지내던 제단(祭壇)이었다 하고 혹(或)은 옛사람들의 무덤이라 하나 이 역시(亦是) 태양(太陽)을 숭배(崇拜)하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한 흔적(痕跡)이며 특(特)히 지석(支石)은 인국(鄰國)인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에서는 전연(全然) 발견(發見)되지 아니 하는데 아국(我國)을 비롯하여 만주(滿洲)와 시베리아와 유럽에 걸쳐서 이것이 있고 아국(我國)에서는 여러 곳에서 발견(發見)되었다.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과 황해도(黃海道) 은률(殷栗)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有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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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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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古朝鮮)

 

지금(只今)으로부터 사천여년(四千餘年) 전(前)의 옛날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중국(中國)의 요(堯)임금 때요 이 해를 아국(我國)의 기원원년(紀元元年)이라 한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천여년(千餘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하나 확실(確實)한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그 후(後)에 중국(中國)의 은(殷)나라가 망(亡)하고 주(周)나라가 대신(代身)하게 되었는데, 은(殷)나라의 왕자(王子)인 기자(箕子)가 그 무리를 데리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지금(只今)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부여(扶餘), 남부(南部)에는 구려맥(句麗貊)이 있고 반도방면(半島方面)에는 한(韓)이 있었는데 그 연대(年代)와 국도(國都)는 알 수 없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은 여러모로 발달(發達)된 산업(産業)의 기초(基礎) 위에서 대륙(大陸)의 진보(進步)한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여 크게 발전(發展)하고 조선기술(造船技術)이 발달(發達)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中國)의 제(齊)와 노(魯)로 더불어 무역(貿易)하며 농사(農事)짓는 법(法)과 우마(牛馬)를 기르는 목축업(牧畜業)이 발달(發達)하고 사람의 성질(性質)이 정직(正直)과 예절(禮節)과 신의(信義)를 숭상(崇尙)하고 평화(平和)와 정결(淨潔)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중국(中國)사람들은 아국인(我國人)을 군자지국(君子之國) 대인지시(大人之市)라하고 인인선(仁人善)이라 불렀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이 구백여년(九百餘年)동안 계속(繼續)하는 중(中)에 중국(中國)에서는 주(周)나라 세력(勢力)이 차츰 약(弱)해지고 소위(所謂)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時代)라 해서 여러 백년(百年)동안 전쟁(戰爭)이 계속(繼續)되고 흉년(凶年)이 겹들어서 연(燕), 조(趙), 제(齊), 노(魯)의 중국(中國) 북방(北方) 사람들이 혹(或)은 해로(海路)로, 혹(或)은 육로(陸路)로 조선(朝鮮)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특(特)히 연(燕)나라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의 서부(西部)를 쳐서 빼앗고 요하(遼河)를 사이에 두고 조선(朝鮮)과 지경(地境)을 접(接)하여 있어서 일직부터 교섭(交涉)이 잦았고 주(周)나라가 망(亡)하고 진(秦)나라가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할 무렵에 조선(朝鮮)으로 피난(避難)하여 들어오는 사람이 수(數) 없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기부왕(箕埠王)때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을 서부국경(西部國境)에 머물게 하더니 만(滿)이 야심(野心)을 품고 많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난리(亂離)를 일으켜 왕도(王都)를 치거늘 준왕(準王)이 미처 항거(抗拒)치 못하여 해로(海路)로 마한(馬韓)에 주입(走入)하니 이는 단기(檀紀)이천일백사십년(二千一百四十年) 정미(丁未)이다.

위만(衛滿)이 나라를 세운 후(後)에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위씨조선(衛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진(秦)나라를 이어서 중원(中原)을 통일(統一)한 한(漢)나라의 세력(勢力)이 커져서 동(東)으로 침입(侵入)하니 위만(衛滿)의 손자(孫子) 우거(右渠)는 견디지 못하여 항복(降服)하니 이는 단기(檀紀) 이천이백이십육년(二千二百二十六年) 계유(癸酉)의 일이오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삼대(三代) 팔십칠년(八十七年)으로써 끝마쳤다.

한(漢)나라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의 고지(故地)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菟)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사군(四郡)의 위치(位置)와 넓이에 대(對)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않으나 대개(大槪) 낙랑군(樂浪郡)은 평양(平壤)을 중심(中心)으로 한 대동강(大洞江) 기슭임이 확실(確實)하고 진번군(眞番郡)은 황해도(黃海道)와 경기도(京畿道)의 한강(漢江) 이북(以北)이오 임둔군(臨屯郡)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와 강원도(江原道)의 철령(鐵嶺) 이북(以北)이오 현토군(玄菟郡)은 압록강(鴨綠江) 기슭을 중심(中心)으로 한 평안북도(平安北道)와 동가강(佟佳江) 하류지방(下流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사군(四郡)은 우리 민족(民族)의 맹렬(猛烈)한 반항(反抗)때문에 미처 뿌리를 내릴 사이도 없이 진번(眞番) 임둔(臨屯) 이군(二郡)은 이십육년(二十六年)만에 없어지고 현토군(玄菟郡)은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스스로 해소(解消)되고 낙랑군(樂浪郡)만이 중국(中國) 사람들의 근거지(根據地)로서 반도(半島) 중부(中部)에 사백여년(四百餘年)동안 남아 있었다.

낙랑군(樂浪郡)은 아국(我國)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중국(中國)과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함으로 아국(我國)의 중국(中國) 무역(貿易)을 맡아 하였다. 평양(平壤)에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 토성리(土城里)라는 마을에 분명(分明)한 토성(土城) 자리가 있고 그 마을 전토(田土)사이에서 낙랑군(樂浪郡)의 유물(遺物)이 나옴으로 보아 이곳이 낙랑(樂浪)의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 동(東)쪽 평평(平平)한 언덕 위에 수다(數多)한 고분(古墳)이 있고 그 고분(古墳) 속에서 금(金) 옥(玉) 동(銅)으로 만든 거울과 각종(各種)의 질그릇과 그림을 새긴 솥이라든가 와편(瓦片) 칠기(漆器) 등(等) 낙랑유물(樂浪遺物)이 많이 나와서 고고학상(考古學上) 보배가 되었다.

조선(朝鮮) 중부(中部)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이 건국(建國)될 무렵에 지금(只今)의 북만주(北滿洲) 지방(地方)에는 부여족(扶餘族)이 살아서 농업(農業)과 목축(牧畜)에 힘쓰고 중국(中國)의 진보(進步)된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하였으며 지 방(地 方)이 이천리(二千里)이오 호수(戶數)가 팔만(八萬)이나되며 서(西)로 오환(烏桓) 선고(鮮皐) 등(等)의 인(鄰)과 겨뤄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나라에 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들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지 아니하면 그 과실(過失)이 임금에게 있다하여 혹(或)은 갈아세워야 한다하고 혹(或)은 죽여야한다 하였다. 부여(扶餘)의 임금은 세습적(世襲的) 추장(酋長)에 지나지 아니하여 그 밑에 짐승이름을 붙인 오(烏), 가(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等) 벼슬이 있어 사출도(四出道)를 나가 지키고 이들은 각기(各其) 수백호(數百戶)로부터 수천호(數千戶)의 백성(百姓)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여(扶餘)와 때를 같이하여 동해(東海) 방면(方面)에는 옥저(沃沮), 예(濊)가 있고 반도(半島) 남부(南部)에는 삼한(三韓)이 있었다. 옥저(沃沮)는 지금(只今)의 함경도(咸鏡道) 지방(地方)에 살았는데 그 땅은 동북(東北)이 좁고 서남(西南)이 넓으며 장(長)이 천리(千里)이고 북(北)으로는 읍루(挹婁)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이고 남(南)으로는 예(濊)와 잇닿아 있었다. 호수(戶數)는 오천(五千)이며 임금은 없고 부락(部落)마다 수령(首領)이 있어 부락(部落)일을 추려나가고 언어(言語)는 고구려(高句麗)와 같고 성질(性質)이 강직(强直)하고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생산(生産)되고 음식(飮食)과 거처(居處)와 모든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비슷하였다. 옥저(沃沮)는 남북(南北)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북옥저(北沃沮)는 읍루(挹婁)와 접경(接境)한 관계(關係)로 여름이면 읍루(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약탈(掠奪)함으로 산중(山中)에 깊이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게되면 비로소 부락(部落)에 내려와서 살았다.

예(濊)는 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동(東)에서 함경도(咸鏡道)의 남(南)에 걸쳐서 살았다. 스스로 고구려(高句麗)와 동족(同族)이라 하고 호수(戶數)가 이만(二萬)이며 사람들이 성질(性質)이 순후(淳厚)하고 염치(廉恥)가 밝으며 도적(盜賊)이 없어서 밤에 문(門)을 닫는 일이 없었다.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거의 비슷하나 의복(衣服)은 다르며 여러 부락(部落)은 산천(山川)의 경계(境界)를 중(重)히 여겨 서로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고 이를 범(犯)하면 책화(責禍)라 하여 노예(奴隸)와 우마(牛馬)로써 배상(賠償)하며 기(忌)하는 것이 많아서 가족중(家族中)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곧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살았다. 예(濊)사람들은 마포(麻布)를 짜고 양잠(養蠶)할 줄 알고, 별을 보고 그 해의 농사(農事)의 풍흉(豊凶)을 미리 알 수 있었다.

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이 시대(時代)는 일산(一山)의 장(障)과 일수(一水)의 조(阻)가 스스로 한 부락(部落)을 이루어 국가(國家)노릇을 하였는데 삼한(三韓)의 지방(地方)에 이러한 부락국가(部落國家)가 칠십팔국(七十八國)이나 있었다. 각(各) 부락(部落)에는 수령(首領)이 있고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은 각기(各其) 소속(所屬)한 부락국가(部落國家)를 통어(統御)하는 총왕(總王)이 있었다.

마한(馬韓)은 그 중(中) 서(西)쪽에 있어서 백성(百姓)이 농사(農事)를 짓고 양잠(養蠶)을하고 오십사국(五十四國)으로 나뉘어 그 크기가 대국(大國)은 만여호(萬餘戶), 소국(小國)은 수백호(數百戶)이며 사람의 성질(性質)이 용감(勇敢)하고 해마다 오월(五月)에 파종(播種)이 끝난 뒤와 시월(十月)에 추수(秋收)를 마친 뒤에 한번씩 전국인(全國人)이 모여 천제사(天祭祀)를 지내고 여러 날 동안 일야(日夜)로 마음껏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놀았다.

변(弁),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도(慶尙道)땅에서 모두 이십사국(二十四國)이 있고 대국(大國)은 사오천호(四五千戶)이오 소국(小國)은 육칠(六七)백호(百戶)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지(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되고 벼를 심고 양잠(養蠶)과 우마(牛馬)의 축산(畜産)이 성(盛)하고 혼인(婚姻)에 예절(禮節)이 밝고 사람이 죽으면 큰 조우(鳥羽)를 달아 보내니 이는 그 영혼(靈魂)이 날아가도록 함이었다.

이때까지의 역사가(歷史家)들은 삼한(三韓)을 나눠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 하고 그 중(中) 마한(馬韓)이 지금(只今)의 한강(漢江) 이남(以南)에서부터 충남북도(忠南北道)와 전라도(全羅道)땅이고 진한(辰韓)은 지금(只今)의 경상도(慶尙道)의 대부분(大部分)이고 변한(弁韓)은 나중의 가야(伽倻)의 여러 나라가 일어난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지방(地方)이라 하였으나 새로운 연구(硏究)에 의(依)하면 진한(辰韓)이 한사군(漢四郡)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漢江) 유역(流域)이고 마한(馬韓)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이고 변한(弁韓)이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지방(地方)이라 한다.

부여(扶餘)의 일족(一族)에 졸본부여(卒本扶餘)가 있으니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연안(沿岸)의 땅이오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이다.

이 시대(時代)의 정치(政治)는 신앙(信仰)과 완전(完全)히 분립(分立)되지 아니하여 부락(部落)의 수령(首領)이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천제(天祭)를 지내며 또 마을의 정치(政治)를 행(行)하였다. 신앙(信仰)의 가장 높은 대상(對象)은 하늘의 상징(象徵)인 태양(太陽)이었으며 해마다 농사(農事)가 끝나면 일정(一定)한 때에 신곡(新穀)으로 술과 떡을 빚어 천제(天祭)를 지내고 그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놀았다.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부여(扶餘)의 영고(迎鼓) 등(等)은 모두 이를 이름이다. 이 제사(祭祀)는 처음에 높은 산(山)마루에서 지냈으니 그 곳은 어느 곳보다도 태양(太陽)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러한 풍습(風習)은 나중에 농업(農業)이 발달(發達)되고 강안(江岸)과 평야(平野)에 내려와 살게된 뒤에도 계속(繼續)되어 국가(國家)에서는 해마다 유명(有名)한 높은 산(山)에 산제(山祭)를 드리고 고을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으며 마을에는 당산(堂山)이 있어서 온 고을사람과 온 마을사람이 정성(精誠)을 바치는 곳이다.

사회(社會)는 대가(大家)라는 지배계급(支配階級)과 하호(下戶)라는 백성(百姓)과 노예(奴隸)의 세 계급(階級)으로 나뉘었고 대가(大家)들은 광대(廣大)한 토지(土地)를 가지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농사(農事)를 지었으며 이 시대(時代)는 토지(土地)는 넓고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함으로 전쟁(戰爭)할 때마다 노예(奴隸)로 부릴 포로(捕虜)를 얻는 것이 유일(唯一)한 전리품(戰利品)이었다. 산업(産業)은 농잠(農蠶)과 직포(織布)가 자못 발달(發達)하였으며 변 진한(弁辰韓)에서는 철(鐵)을 채굴(採掘)하여 돈으로 쓰고 이웃나라와 서로 무역(貿易)하였다.

종전(從前)에는 석기(石器)와 동기(銅器)만 있었는데 동기(銅器)는 연(軟)하여 칼 도끼 등(等)으로 사용(使用)치 못하더니 철(鐵)이 발견(發見)된 후(後)로 철제(鐵製)연장과 무기(武器)가 생겨서 산업(産業)과 전쟁(戰爭)양식(樣式)에 대혁명(大革命)을 일으켰다. 지금 이 문명(文明)에서 철(鐵) 한가지를 없앤다고 하면 이 호화(豪華)스러운 문명(文明)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니 고대(古代)의 철(鐵)의 발견(發見)은 참으로 경이적(驚異的) 사실(事實)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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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흥기(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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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三國)의 흥기(興起)

 

처음에 북부여(北扶餘)의 임금 해모수(解慕潄)가 아들 주몽(朱夢)을 낳았는데 주몽(朱夢)은 동부여(東扶餘)의 임금 금와(金蛙)에게 양육(養育)되다가 그의 형제(兄弟)들의 시기(猜忌)에 못 배겨 부하(部下)를 거느리고 도망(逃亡)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러 국가(國家)를 세우고 성(姓)을 고(高)라 하니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

일설(一說)에는 주몽(朱夢)이 졸본(卒本)에 와서 졸왕(卒王)의 여서(女婿)가 되었다가 왕(王)이 죽은 뒤에 그 위(位)를 계승(繼承)하였다 하는데 여러 가지 사실(史實)로 보면 이 말이 가장 근리(近理)하고 주몽(朱夢)이 졸본(卒本) 국호(國號)를 고쳐서 고구려(高句麗)라 하였음으로 후인(後人)이 고구려(高句麗)의 역연수(歷年數)에 대(對)하여 주몽(朱夢)으로부터 망(亡)할 때까지를 칠백오년(七百五年)이라 하고 졸본(卒本)까지를 합(合)하여 구백년(九百年)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의 다섯 대족단(代族團)이 중심(中心)으로 이루어진 사회(社會)이며 산(山)이 많고 토지(土地)가 여위어서 생활(生活)이 곤란(困難)한 까닭에 사람들이 권검(勸儉)하였다.(고구려(高句麗) 건국(建國) 단기(檀紀) 이천이백구십칠년(二千二百九十七年))

고구려(高句麗)시조(始祖) 주몽왕(朱夢王)이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는데 동부여(東扶餘)에 있을 때에 낳은 아들 유리(類利)가 찾아와서 태자(太子)가 되었음으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부하(部下) 십인(十人)을 거느리고 남(南)으로 향(向)하여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을 지나서 마한(馬韓)에 들어가니 마한왕(馬韓王)이 두 형제(兄弟)의 웅걸(雄傑)함을 보고 동북(東北) 백리(百里)의 땅을 할여(割與)하여 써 거처(居處)하게 하였다. 비류(沸流)는 어염(魚鹽)의 이(利)를 취(取)하여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仁川)지방(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온조(溫祚)는 산천(山川)의 험(險)과 평야(平野)의 이(利)를 취(取)하여 한강안(漢江岸)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都邑)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백제(百濟)라하고 성(姓)을 부여(扶餘)라 하니 이가 곧 백제시조(百濟始祖)이다.(檀紀 二千三百十六年)

비류(沸流)는 그 땅이 비습(卑濕)하여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죽으매 그 백성(百姓)이 모두 위례성(慰禮城)으로 돌아오니, 온조(溫祚)는 세력(勢力)이 점점(漸漸)자랐으니, 창업(創業) 초기(初期)에 북변(北邊)의 낙랑(樂浪)과 말갈(靺鞨)이 자주 침입(侵入)함으로 한산(漢山)에(지금의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 도읍(都邑)을 옮겼다.

변 진한(弁辰韓)의 사로국(斯盧國)에는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육촌장(六村長)이 회의(會議)를 열고 북방인(北方人)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밀려오는 이때에 우리가 현군(賢君) 일인(一人)을 구(求)하여 세우고 국가(國家)를 통일(統一)하지 아니하면 안되리라 하고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맞이하여 임금을 삼고 지금의 경주(慶州)에 도읍(都邑)하니 이가 곧 신라(新羅) 시조(始祖)이다. (檀紀 二千二百七十七年) 신라(新羅)의 국호(國號)는, 처음에는 사로(斯盧) 그밖에 여러 가지로 불러 왔으나 후(後)에 신라(新羅)라 고쳤으므로 신라(新羅)로 통칭(通稱)하는 것이다.

삼국(三國)의 시조(始祖)는 모두 일대(一代)의 영걸(英傑)이라 당시(當時)의 각국(各國)이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로 성립(成立)되어 완전(完全)한 통일국가(統一國家)를 이루지 못하고 부락(部落)과 부락(部落)사이에 호상(互相) 침벌(侵伐)함이 있으되 국가(國家) 총왕(總王)이 능(能)히 제어(制御)치 못함을 보고 정치(政治)를 중앙(中央)에 통일(統一)한다는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쓰기로 하였다. 그 까닭에 건국(建國)초(初)부터 부근(附近)의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여 군현(郡縣)을 만들고 관리(官吏)를 보내어 다스렸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역사상(歷史上) 정치제도(政治制度)의 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고구려(高句麗)는 태백산(太白山) 좌우(左右)에 산재(散在)한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를 정복(征服)하고 한(漢)이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취(取)하니 이때가 졸본(卒本)이라는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로 개칭(改稱)한 때이오 동(東)으로 옥저(沃沮) 지방(地方)까지를 그 판도(版圖)에 넣었다.

백제(百濟)는 점차(漸次)로 마한국(馬韓國)의 여러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니 마한왕(馬韓王)이 책(責)하여 왈(曰) 왕(王)이 처음에 아경(我境)에 들어 왔을 때에 객신(客身)할 곳이 없기로 토지(土地)를 주어 안거(安居)케 했거늘 이제 우리 국토(國土)를 침범(侵犯)하니 무슨 도리(道理)인고 하였으나 온조왕(溫祚王)은 듣지 아니하고 남(南)으로 점차(漸次)로 강토(疆土)를 넓혔다.

신라(新羅)는 변 진한(弁辰韓)의 북부(北部)를 점점(漸漸) 병합(倂合)하고 서(西)로 마한국경(馬韓國境)에 다다르니 여기서 비로소 백제(百濟) 병(兵)과 상견(相見)하게 되어 삼국시대(三國時代) 육칠백년(六七百年) 간(間)의 전란(戰亂)의 막(幕)을 열었다. 그러나 이 전쟁(戰爭)은 호전기풍(好戰氣風)이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와 통일국가(統一國家)를 만들려는 운동(運動) 과정(過程)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생긴 현상(現象)이었다.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이 각기(各其)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로 엉켜 갔을 때에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 지방(地方)은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이루지 못하고 육가야국(六伽倻國)이 분립(分立)하여 부족사회(部族社會)를 그대로 지내었다. 그 중(中)에는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의 김해(金海) 지방(地方)을 중심(中心)으로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가락국(駕洛國)을 세우니 이가 곧 가락시조(駕洛始祖)이오 가락(駕洛)을 또한 금관(金官)이라 하며 (檀紀 二千三百七十五年) 그밖에 대가야(大伽倻) 소가야(小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등(等)이 있었는데 좁은 구역(區域)에 육국(六國)이 분립(分立)되어 있었음으로 국력(國力)이 모두 떨치지 못하고 또 그 위치(位置)가 아국(我國)의 최남단(最南端)에 있어 북(北)에서 밀려온 아국(我國) 문화권(文化圈)의 가장 구석진 곳이다. 다만 낙동강(洛東江)이 흘러내려 가서 삼각주(三角洲)를 이룬 곳으로 국민(國民)의 생활(生活)은 가장 유족(裕足)한 곳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제도(制度)와 풍습(風習)에는 여러 가지 특색(特色)이 있고 창조성(創造性)이 있었다. 신라(新羅)는 당시(當時) 일반적(一般的)으로 행(行)하고 있는 군주(君主)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타파(打破)하고 이세(二世) 남해왕(南解王)은 자(子) 유리(儒理)와 서(婿) 석탈해(昔脫解)에 일러 왈(曰) 아(我) 사후(死後)에 박(朴) 석(昔) 이성(二姓)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로써 왕위(王位)를 사(嗣)하라 하더니, 석탈해(昔脫解)가 제사대(第四代) 왕(王)이 되니 이로부터 박석(朴昔) 이성(二姓)이 상전(相傳)하고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수양(收養)하더니 그후(後)에 알지(閼智)의 자손(子孫)이 또한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여 이로부터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이 상전(相傳)하였다. 이 시대(時代)는 전란(戰亂)이 자주 일어나고 또 창업기(創業期)에 있었는데 만일 군주(君主)가 연유(年幼)하거나 또한 암우(暗愚)하면 혹(或)은 행정권(行政權)이 신하(臣下)에게 옮기고 혹(或)은 국가대사(國家大事)를 처리(處理)할 능력(能力)이 없어서 반드시 위망(危亡)에 빠지게 되는 것임으로 신라(新羅)에서는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깨트리고 골품제(骨品制)를 써서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을 성골(聖骨)이라 하고 성골(聖骨) 출신(出身)이 왕위(王位) 계승권(繼承權)을 가지되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가 왕(王)이 되기로 하니 이 까닭에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와 정립(鼎立)한 동안 일,이(一,二)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유군(幼君)과 암왕(暗王)이 거의 없었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도 이,삼(二,三)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연유(年幼)한 군주(君主)가 거의 없으니 이로써 보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의 군(君)됨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왕위(王位)계승(繼承)의 한 원칙(原則)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며 후세(後世)에 자기(自己) 자손(子孫)에게 행복(幸福)을 주기 위(爲)하여 황구(黃口) 유아(幼兒)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함은 국사(國事)를 위(爲)함이 아니오 그 국가(國家)를 자가(自家) 혈통(血統)의 사유물(私有物)로 생각한 까닭이며, 이로 인(因)하여 국사(國事)를 그르치고 아들에게 행복(幸福)을 준다는 것이 도리어 큰 재화(災禍)를 준 예(例)도 적지 아니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인성(人性)은 혼후(渾厚)하여 개인(個人)의 사욕(私慾)보다 국가(國家)를 위(爲)하는 마음이 더 두터웠다. 신라(新羅)에는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한 예(例)가 여러 번 있었고 고구려(高句麗)에서는 높은 벼슬을 다른 사람에게 사양(辭讓)하는 예(例)가 있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왕(故國王)때에 오부(五部)에 명령(命令)하여 현인(賢人)을 천거(薦擧)하라한즉 오부(五部)가 연류(宴留)를 추천(推薦)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더니 연류(宴留)가 말하되 신(臣)이 용우(庸愚)하여 족(足)히 써 국가(國家) 대정(大政)을 맡지 못할지라 압록곡(鴨綠谷)에 을파소(乙巴素)가 있어 역전(力田) 자급(自給)하는데 성질(性質)이 강의(剛毅)하고 정치(政治)의 대재(大才)가 있으니 차인(此人)이 아니면 국사(國事)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신(臣)의 벼슬을 차(此)에게 맡기라 하였다. 왕(王)은 곧 을파소(乙巴素)를 거용(擧用)하니 을파소(乙巴素)의 정치(政治)가 현명(賢明)하여 백성(百姓)이 편안(便安)하고 또 백성(百姓)의 빈궁(貧窮)함을 걱정하여 봄에 국창(國倉)의 곡식(穀食)을 내어 백성(百姓)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환수(還收)하여 해마다 상례(常例)를 삼으니 백성(百姓)이 모두 기뻐하고 이것이 아국(我國)의 진대제도(賑貸制度)의 시초(始初)였다.

삼국(三國)은 국가(國家)에 큰 난리(亂離)가 있으면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집고 궁시(弓矢)를 메고 군대(軍隊)의 선두(先頭)에 나서고 군졸(軍卒)이 그 뒤를 따름으로 장 병(將 兵)이 모두 일체(一體)가되어 당시(當時) 천하(天下) 강국(强國)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물론(勿論) 이때는 전공(戰功)이 있는 자(者)에게 토지(土地)를 주는 전장제도(田庄制度)가 있고 또 포로(捕虜)를 획득(獲得)하여 농업(農業) 노예(奴隸)로 사용(使用)하는 제도(制度)가 있음으로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들이 선두(先頭)에 나서는 것은 전공(戰功)을 세우기 위(爲)한 일면(一面)이 없지 아니하나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는 숭고(崇高)한 정신(精神)은 족(足)히 후세(後世)의 미약(微弱)한 하민층(下民層)만을 군사(軍士)로 내 세우고 자기(自己)는 안일(安逸)한 지위(地位)에 도피(逃避)하는 귀족층(貴族層)을 괴사(愧死)케 할 것이오 유명(有名)한 신라(新羅)의 화랑(花郞)도 이러한 정신(精神)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람은 혼후(渾厚)한 기풍(氣風)으로써 지위(地位)의 고하(高下)와 세력(勢力)의 강약(强弱)을 가리지 아니하고 오직 일심(一心)으로 함께 국사(國事)에 당(當)하였으므로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아국(我國)역사상(歷史上) 가장 광휘(光輝)있는 시대(時代)를 현출(現出)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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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융성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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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의 융성(隆盛)

 

고구려(高句麗)의 국도(國都) 졸본(卒本)은 평야(平野)가 적고 외적(外敵)을 막기에 불편(不便)함으로 얼마 후(後)에 국내성(國內城)에 옮기고 다시 환도성(丸都城)에 옮겨서 서(西)로 요하(遼河)방면(方面)으로 내려가고 남(南)으로 한반도(韓半島)로 내려가기 시작(始作)하였다. 고구려(高句麗)가 서(西)와 남(南)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면 안될 이(理)는 두 가지가 있다.

一. 고구려(高句麗)의 땅은 평야(平野)가 적고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며 기후(氣候)가 한냉(寒冷)하여 농산(農産)이 풍부(豊富)치 못함으로 국가(國家) 존립상(存立上) 오곡(五穀)과 잠마(蠶麻)가 풍성(豊盛)한 남방(南方)으로 진출(進出)치 아니할 수 없는 것

二. 요하(遼河)로부터 대동강(大洞江)에 이르는 일대지(一帶地)는 고래(古來)로 우리 민족(民族)이 거주(居住)하던 조선(朝鮮) 고지(故地)이던 것이 지금(只今)에 현토(玄菟) 낙랑(樂浪)등(等)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으로 되었음으로 이것을 회복(恢復)치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건국(建國)초기(初期)부터 서출(西出) 남하(南下) 정책(政策)을 써서 마침내 서(西)로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지경(地境)이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南)으로 낙랑(樂浪)을 취(取)하여 사백년(四百年)동안 내려오던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을 뿌리 채 뽑아버리고 드디어 백제(百濟)와 접경(接境)하니 이때가 삼국(三國)이 비로소 정립(鼎立)한 때이오 삼국(三國) 후(後) 약 삼백년(約 三百年) 경(頃)의 일이었다.

고구려(高句麗)는 서(西)쪽으로 발달(發達)하는 도중(途中)에 중국(中國)과의 충돌(衝突)이 가장 심(甚)하더니 중국(中國)의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위(魏)와 항쟁(抗爭)하다가 위장(魏將) 관구검(毌丘儉)에게 패(敗)하여 환도성(丸都城)이 회신(灰燼)되었으므로 일시(一時) 국세(國勢)가 매우 위태(危殆)하였으나 얼마 후(後)에 다시 회복(恢復)하여 대륙(大陸)으로 진출(進出)하는 정책(政策)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요하(遼河) 서(西)쪽의 금주성(錦州城)에 웅거(雄據)하고 있는 연(燕)나라와 쟁웅(爭雄)하다가 연군(燕軍)에게 패(敗)하여 환도성(丸都城)은 다시 수리(修理)할 수 없이 파괴(破壞)되고 도성(都城)이 적국(敵國)에 너무 가까워서 항상(恒常) 위험성(危險性)이 있음을 염려(念慮)하여 그 후(後)에 평양(平壤)으로 옮기더니 고구려(高句麗) 중흥(中興)의 영왕(英王)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다시 환도성(丸都城)에 도읍(都邑)하고 강토(疆土)를 사방(四方)으로 넓히니 이때가 고구려(高句麗)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이오 지금 만주(滿洲) 집안현(輯安縣) 비석가(碑石街)에 흘연(屹然)히 서있는 높이 이십이척(二十二尺)의 거비(巨碑)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공적(功績)을 영원(永遠)히 전(傳)하기 위(爲)하여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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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의 발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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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

 

백제(百濟)는 건국(建國) 후(後) 점차(漸次)로 마한(馬韓)의 땅을 탈취(奪取)하더니 불과(不過) 이십(二十) 여년(餘年)에 전역(全域)을 통합(統合)하고 반도(半島) 서남부(西南部)의 일대국(一大國)을 형성(形成)하였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농산(農産)이 많고 일면(一面)이 대해(大海)인 관계(關係)로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이 발달(發達)하여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무역(貿易)하고 수군(水軍)이 또한 정예(精銳)하여 한때는 중국(中國)의 동해안(東海岸) 일부(一部)를 점령(占領)한 일도 있었다.

고구려(高句麗)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내려 온 후(後) 예성강(禮成江)(황해도)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충돌(衝突)이 일어나기 시작(始作)하였다.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는 본시(本是) 형제(兄弟)의 나라이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백제(百濟)를 치다가 전사(戰死)하니 이로부터 양국(兩國)이 세수(世讎)가 맺어져서 전쟁(戰爭)이 연년(連年) 부절(不絶)하더니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이 남하정책(南下政策)을 추진(推進)하여 평양(平壤)에 이도(移都)한 후로 백제(百濟)는 그 압력(壓力)에 눌려서 더 북진(北進)치 못하고 개로왕(盖鹵王)때에는 고구려(高句麗)와 싸우다가 왕(王)은 전사(戰死)하고 전군(全軍)이 복멸(覆滅)하고 한강(漢江) 좌우(左右)의 지(地)를 상실(喪失)하고 왕자(王子)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기니 이때가 백제(百濟)의 최대(最大) 수난기(受難期)이었다.

신라(新羅)는 반도(半島)의 동남(東南) 일우(一隅)에 처(處)하여 현군(賢君)이 상속(相續)하고 그 정치(政治)에는 화백(和白)이라는 제도(制度)가 있어 임금을 선거(選擧)하고 다른 중요(重要)한 국사(國事)를 의론(議論)하는데 유족(遺族)들이 모여서 회의(會議)하고 전원(全員)이 찬성(贊成)한 연후(然後)에 결정(決定)함으로 항상(恒常) 국론(國論)이 잘 통일(統一)되고 또 이 나라는 육부족(六部族)의 합의(合意)에 의(依)하여 성립(成立)되었으므로 그 국민(國民)의 부족적(部族的) 단결(團結)이 가장 공고(鞏固)하였으니 이것이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었고 이 부족(部族)의 단결력(團結力)은 전전이사(轉轉移徙)하여 다니는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는 아국(我國)의 서해안(西海岸)을 끼고 있어서 일직부터 대륙(大陸)과의 교섭(交涉)이 빈번(頻繁)하여 손쉽게 그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할 수 있었고 한문(漢文)도 국초(國初)부터 들어와서 일부(一部) 지식계급(知識階級)사이에 행(行)하였음으로 문화(文化) 정도(程度)의 향상(向上)이 볼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新羅)는 지리적(地理的)으로 중국(中國)과 직접(直接)으로 교통(交通)하지 못하고 주(主)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통(通)하여 간접(間接)으로 대륙(大陸)문화(文化)를 받은 관계(關係)로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얼마쯤 뒤졌으나 그 대신(代身) 삼한시대(三韓時代)로부터 계속(繼續)하여오는 국유문화(國有文化)를 충분(充分)히 발달(發達)케 하고 그 기초(基礎)위에 대륙문화(大陸文化)를 받아서 세계(世界)에 자랑할만한 신라문화(新羅文化)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불교(佛敎)를 받아들일 때에 있어서도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가장 쉽게 받아왔으나 오직 신라(新羅)는 그 받아들이는 가부(可否)에 대(對)하여 논란(論難)과 비판(批判)이 가장 심각(深刻)하여 어려운 곡절(曲折)을 겪었고 그 뒤에 가장 아름다운 불교문화(佛敎文化)의 꽃이 핀 것으로 보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후세(後世)에 외국문화(外國文化)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깊은 검토(檢討)와 비판(批判)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유문화(國有文化)의 기초(基礎)가 약(弱)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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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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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귀족(貴族) 공신(功臣)들에게 전장(田庄) 식읍(食邑) 등(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농경(農耕)에 종사(從事)할 노예(奴隸)를 아울러 주니 고구려(高句麗)에는 좌식(坐食)하는 대가(大家)가 만여호(萬餘戶)이오 하호(下戶)는 그들에게 양식(糧食)과 어염(魚鹽)을 져다 바쳤으며, 신라(新羅)에는 재상가(宰相家)의 노복(奴僕)이 삼천인(三千人)에 달하고 우마(牛馬)의 수(數)도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 때는 돈이 없고 미곡(米穀)과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사용(使用)하니 이것은 고대(古代) 물물교환(物物交換)의 유풍(遺風)이오 지금에 호남(湖南)지방(地方)에서 미곡(米穀)에 한(限)하여 매(買)하는 것을 판다하고 매(賣)하는 것을 산다 하는 것은 삼국(三國) 이래(以來) 미곡(米穀) 마포(麻布)가 돈으로 쓰이던 유속(遺俗)이다.

삼국(三國)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의 도성(都城) 인구(人口)는 고구려(高句麗)는 이십일만여호(二十一萬餘戶)이오 신라(新羅)는 십칠만여호(十七萬餘戶)이오 백제(百濟)는 십오만여호(十五萬餘戶)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한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인구(人口)가 일호(一戶)에 오인(五人)으로 잡더라도 칠십만(七十萬) 혹(或)은 백만(百萬)이 될 것이니 이것은 사실(事實)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도성(都城)이 팽창(膨脹)치 아니할 수 없는 이유(理由)가 있으니 이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도성(都城)이 수삼개월(數三個月) 적군(敵軍)의 포위(包圍)를 당(當)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 포위(包圍)에는 식량(食糧) 무기(武器) 기타 여러 가지 생필품(生活品)을 도성내(都城內)에서 자급자족(自作自給)치 아니하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각국(各國)의 도성내(都城內)에는 첫째로 무기(武器)를 제조(製造)하는 공장(工場)이 있고 거기에 종사(從事)하는 기술자(技術者)및 노무자(勞務者)등(等) 백공(百工)이 있고 큰 시장(市場)도 이 도성내(都城內)에 집중(集中)되어 있었다. 국가(國家)가 도성(都城)을 옮길 때에 먼저 공장(工場)과 백공(百工)을 옮긴 것은 이 까닭이오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이 팽창(膨脹)한 것은 자연(自然)의 이(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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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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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을 중심(中心)으로 남북(南北) 수천리(數千里)에 걸쳐서 큰 세력(勢力)을 길렀으므로 비단(非但)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에 대(對)한 압력(壓力)이 될 뿐 아니라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대하여도 끊임없는 위협(威脅)이었다.

그러나 전일(前日)의 중국(中國)은 오호(五胡) 십육국(十六國)의 어지러운 시대(時代)였으나 그 뒤에 남북(南北)으로 나뉘었다가 수(隋)나라가 일어나서 통일(統一)을 이룬 뒤에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사이에는 두 큰 세력(勢力)이 마주쳐서 부딪치지 아니할 수 없이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수(隋)나라의 요서(遼西)를 친 것이 동기(動機)가 되어서 수(隋) 문제(文帝)가 삼십만(三十萬) 군사(軍士)로서 쳐들어 왔으나 중도(中途)에서 패(敗)하여 돌아갔다. 다음 임금 양제(煬帝)는 본시(本是) 허심(虛心)이 많은 사람으로서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해 보겠다는 야심(野心)과 부황(父皇)이 이루지 못한 한(恨)을 풀겠다는 생각으로 천하(天下)의 힘을 기우려 영양왕(嬰陽王) 이십이년(二十二年) (檀紀 二千九百四十五年)에 百十三萬의 陸軍과 多數한 水軍을 거느리고 高句麗로 쳐들어오니 陣의 길이가 九百六十里에 뻗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짐작(斟酌)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으로써 대장(大將)을 삼고 준비(準備)하던 터이라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수군(隋軍) 이십만((二十萬)을 유인(誘引)하여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러 대파(大破)하니 적(敵)의 생환(生還) 자(者)가 겨우 二千八百名에 지나지 못하니 이것을 살수대전(薩水大戰)이라 하며 요동(遼東)에 남아있는 군사(軍士)는 혹(或)은 패(敗)하고 혹(或)은 겁(怯)을 먹고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양제(煬帝)는 이듬해 다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와서 요동성(遼東城)을 쳤으나 거듭 실패(失敗)하고 세 번째 고구려(高句麗)를 치려다가 국내(國內) 반란(叛亂)으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게 망(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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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혼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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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혼전(三國混戰)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麗)에게 밀려서 웅진(熊津)으로 옮긴 후(後) 외(外)로는 고구려(高句麗)의 침략(侵略)이 그치지 아니하고 내(內)로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국력(國力)이 떨치지 못함으로 한 편(便)으로는 멀리 일본(日本)과 친선(親善)하여 그 후원(後援)을 얻으려 하였으며 백제(百濟)의 학자(學者) 왕인(王人)이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가지고 일본(日本)에 들어가서 그 왕자(王子)에게 처음으로 한문(漢文)을 가르쳐주고 불교(佛敎)와 및 건축(建築), 도기(陶器), 양조(釀造), 야금(冶金), 조각(彫刻), 회화(繪畵)등(等)의 기술(技術)을 전(傳)한 것도 모두 이 시대(時代)의 일이었다. 백제(百濟) 성왕(聖王)은 신라(新羅)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를 치려 하더니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의 강성(强盛)함을 두려워하고 또 부질없이 외국(外國)과 싸우기보다 내정(內政)을 닦아서 국력(國力)을 충실(充實)히 하는 것이 옳다하고 백제(百濟)의 청(請)을 거절(拒絶)하고 도리어 고구려(高句麗)와 통(通)함으로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화호(和好)가 깨지고 신라(新羅)를 치다가 왕(王)이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백제(百濟)는 더욱 약(弱)하여 웅진(熊津)에서 지탱(支撑)치 못하고 도읍(都邑)을 사비(泗沘)(지금의 부여(扶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 고쳤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때에 불교(佛敎)가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이 나라 정치(政治)는 군주(君主)와 민중(民衆)의 계급(階級) 차별(差別)이 엄격(嚴格)한 계급제도(階級制度)이며 불교(佛敎)는 상하(上下)의 차별(差別)이 없는 평등사상(平等思想)위에 서는 것이므로 법흥왕(法興王)이 불교(佛敎)를 펴서 정치적(政治的)으로는 군민(君民)의 계급(階級)을 엄립(嚴立)하고 종교적(宗敎的)으로는 군민평등(君民平等)을 주창(主唱)하여 국민(國民)의 일치단결(一致團結)을 도(圖)하니 이 정책(政策)이 민심(民心)단합(團合)에 적지 않은 효과(效果)를 거두었던 것이다.

다음임금 진흥왕(眞興王)은 신라(新羅) 중흥(中興)의 영걸(英傑)이라 처음으로 화랑(花郞)이라는 제도(制度)를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무리를 모아서 오유(娛遊)하면서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을 토론(討論)하기도하고 가무(歌舞)로써 즐기기도 하고 멀리 국내(國內)의 유명(有名)한 산천(山川)을 돌아다니면서 몸도 단련(鍛鍊)하고 인정(人情)도 살피며 그리하는 중에 옳고 바른 사람을 골라서 나라에 천거(薦擧)하여 적당(適當)한 소임(所任)을 맡아보게 하니 당시(當時)에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화랑(花郞) 출신(出身)이었고 이것이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여 서로 화호(和好)를 맺는 것이 외교정책(外交政策)의 주요(主要)한 하나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한편(便)으로는 대륙문화(大陸文化)를 수입(輸入)하고 한편(便)으로는 대국(大國)의 성원(聲援)을 빌어서 적대국(敵對國)을 위압(威壓)하려 함이니 지금(只今)에 외국(外國) 승인(承認)을 받음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자유(自由)로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할 수 있으되 오직 신라(新羅)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 할 길이 없으므로 삼국(三國)의 혼전(混戰) 지대(地帶)인 한강(漢江) 일대지(一帶地)를 점령(占領)하고 서해(西海)로부터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는 것이 국가대계(國家大計)의 주요(主要)한 일부(一部)이었다. 이에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한강(漢江) 지대(地帶)에서 격전(激戰)하고 있는 기회(機會)를 틈타서 먼저 백제군(百濟軍)과 연합(聯合)하여 고구려(高句麗) 군(軍)을 쫓아버리고 다시 백제군(百濟軍)을 반격(反擊)하여 드디어 한주(漢州)(지금의 서울)로부터 인천(仁川) 남양(南陽)에 이르는 지역(地域)을 점유(占有)하니 이로부터 중국(中國)에 통(通)하는 길이 열리고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기초(基礎)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로부터 해마다 대륙(大陸)과의 교통(交通)이 끊이지 아니하고 유학생(遊學生)과 구법승(求法僧)이 수(數)없이 다녔다. 이때 육가야국(六伽耶國) 중(中)에 가락국(駕洛國)은 법흥왕(法興王)때에 이미 신라(新羅)에 합병(合倂)되고 진흥왕(眞興王)때에 대가야국(大伽倻國)을 쳐서 군현(郡縣)을 삼으니 남은 사(四) 가야국(伽倻國)이 차례로 무너져서 낙동강(洛東江) 유역(流域) 지방(地方)이 전부(全部) 신라(新羅)의 땅이 되었고 지금의 가야금(伽倻琴)은 이 가야국(伽倻國)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며 진흥왕(眞興王)은 또한 북(北)으로 땅을 넓혀서 남옥저(南沃沮)의 중부(中部)에까지 이르고 국경(國境) 지방(地方)에 순수(巡狩)하여 비(碑)를 세우니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창녕읍(昌寧邑)과 서울의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과 함경남도(咸鏡南道)의 함주군(咸州郡) 황초령(黃草嶺)과 함경남도(咸鏡南道) 이원군(利原郡)의 마운령(摩雲嶺)에 있는 순수비(巡狩碑)가 곧 그것이다.

신라(新羅)의 국세(局勢)가 갑자기 강성(强盛)하여짐을 보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종래(從來)의 세수(世讎)를 버리고 서로 화호(和好)를 맺어서 신라(新羅)에 당(當)하게 되니 신라(新羅)도 형세(形勢)의 위태(危殆)함을 깨닫고 중국대륙(中國大陸)의 힘을 이끌어 올 정책(政策)을 쓰게 되었다.

이때 중국(中國)은 수(隋)나라가 망(亡)하고 당(唐)나라가 대신(代身)하고 그 임금 태종(太宗)은 유명(有名)한 영왕(英王)이다. 당태종(唐太宗)은 북(北)으로 돌궐(突闕)(터키)을 무찌르고 서(西)로 토번(吐藩)(티베트)과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평정(平定)하고 남방(南方)의 여러 나라도 조공(朝貢)하게되어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였다고 생각되었으나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高句麗)만이 그에게 굴복(屈伏)하지 아니함으로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때 (檀紀 二千九百七十七年)에 스스로 군사(軍士) 삼십만(三十萬)을 거느리고 風雨같이 몰려와서 이듬해 四月에 이미 요하(遼河)를 건넜고 이때 고구려(高句麗)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국정(國政)을 잡고 굳게 지키었다. 당태종(唐太宗)은 요동성(遼東城)과 백암성(白岩城)을 빼았은 후(後) 안시성(安市城)을 포위(包圍)하고 수개월(數個月)을 싸웠으나 마침내 떨어뜨리지 못하던 중(中) 고구려(高句麗) 장수(將帥)의 화살이 당태종(唐太宗)의 눈을 마쳤으므로 당병(唐兵)은 전의(戰意)를 잃고 또 가을철이 되어 찬바람이 불어오고 양식(糧食)까지 다하게 되었다. 이에 당태종(唐太宗)은 싸움을 단염(斷念)하고 도로 돌아가는데 험로(險路)와 풍설(風雪)에 인마(人馬)의 희생(犧牲)이 길에 가득하였고 그 후(後) 수차(數次)로 군사(軍士)를 보내어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역시(亦是) 고구려(高句麗)의 맹렬(猛烈)한 반격(反擊)으로 실패(失敗)하고 돌아갔다.

고구려(高句麗)와 대륙(大陸)의 세력(勢力)이 반세기(半世紀)를 두고 겨룬 그 사이에 신라(新羅)의 힘이 더욱 커지고 그 때에 또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의 두 영걸(英傑)이 나서 하나는 군사(軍事)로 하나는 외교(外交)로 대(大) 신라(新羅)를 세우기에 힘을 다하였다. 백제(百濟)는 성왕(聖王)이 전사(戰死)한 원수(怨讐)를 기어(期於)히 갚으려하여 자주 군사(軍士)를 내어 신라(新羅)를 치고 고구려(高句麗)가 또한 신라(新羅)의 대륙(大陸)의 힘을 이끄는 것을 미워하여 압력(壓力)을 가(加)하니 신라(新羅)는 김춘추(金春秋)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구원(救援)을 청(請)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 죽은 후(後) 그 아들 고종(高宗)은 어버이의 뜻을 이어 항상(恒常) 동방(東方)을 판도내(版圖內)에 넣으려 하던 차(次)에 신라(新羅)의 청병(請兵)이 있으므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회(好機會)라 하여 드디어 백제(百濟)를 칠 군사(軍士)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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