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에 해당되는 글 54건

  1. 2016.05.27 韓長庚 編 朝鮮歷史 (T) 1
  2. 2013.09.03 회고담 (삼화선생 서당국사)
  3. 2013.09.03 아국의 자연환경 (삼화선생 서당국사)
  4. 2013.09.03 원시생활 (삼화선생 서당국사)
  5. 2013.09.03 고조선 (삼화선생 서당국사)
  6. 2013.09.03 삼국의 흥기(삼화선생 서당국사)
  7. 2013.09.03 고구려의 융성 (삼화선생 서당국사)
  8. 2013.09.03 백제와 신라의 발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9. 2013.09.03 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선생 서당국사)
  10. 2013.09.03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11. 2013.09.03 삼국혼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12. 2013.09.03 신라의 삼한통일 (삼화선생 서당국사)
  13. 2013.09.03 삼국의 문화와 경제 (삼화선생 서당국사)
  14. 2013.09.03 발해의 건국 (삼화선생 서당국사)
  15. 2013.09.03 해상발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韓長庚 編 朝鮮歷史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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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長庚 編 朝鮮歷史 書生 全永壽 韓聲遠 筆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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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담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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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顧談

 

二十二 歲에 咸興農村에서 私立學校 敎員으로 있을때에 漢學을 하는 노인집에 우리나라 歷史 大東紀年이라는 책이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빌려보았다. 이때는 日本한테 侵略당한지 八年이라 우리나라 歷史冊을 보기만하면 押收하는 까닭에 歷史冊을 얻어 보기는 極히 어려웠다. 그 冊을 보고 제나라歷史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 冊을 秘密히 읽었다. 또 그 이웃洞里에 「燃藜室記述」이라는 歷史冊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도 秘密히 빌려 읽었다. 그때 每日申報에 朝鮮儒敎淵源이라는 論文이 계속 發表되었는데 우리나라 歷史가 全然 發表되지 못하고 있던 當時에 이 論文은 내 歷史硏究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學校에서 退勤하여 宿所에 돌아오면 新聞에서 꼭 이 論文을 베껴가지고 그날 밤으로 이것을 精讀하였다. 그 學校를 그만둔 後에 己未年의 三一運動을 겪고 이를 契機로 사람들 中에서는 우리歷史를 알아야겠다는 民族意識이 높아지고 나 亦是 우리歷史를 더 깊이 硏究해야겠다는 생각이 切實해서 그해 가을에 歷史遺蹟을 探訪하기 爲하여 期限없는 南道旅行을 떠났다. 서울에 와서 몇일간 여러 史蹟을 돌아보고 더 南으로 내려가서 公州 扶餘 恩津 鷄龍山을 거쳐서 淸州 報恩 錦山을 보고 全州에 들어갔다가 萬頃江을 따라 내려가는 途中 旅費가 떨어졌다. 할 수 없이 金堤郡 農村의 어느 私立學校 敎員으로 就任하여 一時지내기로 했는데 그만 六年을 보냈다. 이 學校에 있는 동안에 全北과 全南에 있는 史蹟을 두루 돌아보고 여름 겨울 放學을 利用하여 慶州 金海等地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이 學校를 그만둔 後에는 北間島와 西間島를 돌아다니면서 古代 祖上들이 經營하던 滿洲方面의 史蹟을 찾아보았다. 歷史硏究 十年間 한 가지 풀리지 않는 問題는 우리나라의 古代에는 農民이 全人口의 九割이 넘었는데 歷史冊은 主로 王室과 貴族들의 歷史로 되어있고 農民의 歷史는 全然 記錄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었다. 나는 農民의 歷史를 알아 보려고 하던次에 朝鮮農民이라는 月刊雜誌가 發刊되어 거기에 入社하여 農村問題를 硏究하면서 農民歷史를 아울러 硏究했다. 이렇게 五,六 年 歷史를 硏究하는 동안 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歷史는 되는대로 發展變化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떠한 原理와 法則을 따라서 發展하고 變化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다시 이 原理와 法則을 硏究하기 시작했다.

먼저 읽은 것이 西洋哲學이오 여기에 四,五年의 歲月을 쏟았는데 여기에서는 아무 所得이 없었다. 다음에는 宋代의 程朱哲學인 理氣說을 硏究하고 우리나라 先賢들의 學說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무런 原理와 法則을 發見치 못하고 다시 易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하고 八一五解放 三年前에 처음으로 易學에 들어가니 이것이 내가 易學을 硏究하기 始作한 動機다. 易學은 宇宙萬物에 모두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하는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도 生長成法則이 있고 時運에 生長成法則이 있는 까닭에 人類歷史에도 또한 이러한 法則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宇宙의 法則이 바로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되는 것이오 여기에서 비로소 이제까지 追求하던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을 大略 짐작한 것이오 그 實은 人類歷史의 發展變化하는 法則이 곧 易學原理의 主要部分임을 알게 되었다. 1967年回顧談

 

 

 

아국(我國)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원시생활(原始生活)

고조선(古朝鮮)

삼국(三國)의 흥기(興起)

고구려(高句麗)의 융성(隆盛)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

三.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

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

삼국혼전(三國混戰)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

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

발해(渤海)의 건국(建國)

해상발전(海上發展)

신라(新羅)의 쇠망(衰亡)

고려건국(高麗建國)

고려(高麗)정치(政治)

사회계급(社會階級)

건설사업(建設事業)

一. 토지제도(土地制度)

二. 성종(成宗)의 치적(治積)

계단(契丹)관계(關係)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문화(文化)

중기(中期)의 융성(隆盛)

여진(女眞)관계(關係)

계생(繼生)하는 반란(叛亂)

몽고란(蒙古亂)

정치(政治)의 문란(紊亂)

건설(建設)시기(時機)

단종(端宗)과 세조(世祖)

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


외국(外國)관계(關係)

고려(高麗)의 멸망(滅亡)

비고(備考)

이조(李朝)건국(建國)

이조(李朝)정치(政治)

왕위쟁탈(王位爭奪)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

중종반정(中宗反正)후(後)의 국정(國政)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

사회(社會)의 부패(腐敗)

임진왜란(壬辰倭亂)

난후(亂後)의 형세(形勢)

병자호란(丙子胡亂)

서양문화(西洋文化)와의 교섭(交涉)과 외국무역(外國貿易)

사색당쟁(四色黨爭)

영(英) 정(正)의 문화(文化)

세도(勢道)정치(政治)

홍경래(洪景來) 난(亂)과 민란(民亂)

북간도(北間島) 이주(移住)

개국(開國)시대(時代)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일본(日本)의 침략(侵略)

민중(民衆)운동(運動)

기미독립(己未獨立) 선언서(宣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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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국의 자연환경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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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국(我國)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아국(我國)은 아세아대륙(亞細亞大陸) 의 동북부(東北部)에 뻗어 나온 반도(半島)로서 삼면(三面)이 환해(環海)하고 앞으로 태평양(太平洋)과의 사이에 일본열도(日本列島)가 병풍(屛風)처럼 가리웠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地理的條件)으로 말미암아 고래(古來)로 대륙(大陸)에서 흥망(興亡)한 여러 나라 세력(勢力)이 우리를 덮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며 또 일본(日本)의 눈길이 언제나 우리에게 쏠려 있음으로 우리는 금후(今後)로도 항상(恒常) 대륙(大陸)을 돌아보고 일본(日本)을 내다보면서 생존(生存)하여야만 할 것이다.

아국(我國)은 북위(北緯) 삼십삼도(三十三度)에서 사십삼도(四十三度)까지의 사이에 있어서 가장 살기 좋은 온대(溫帶)의 한 지방(地方)이며 한서(寒暑)가 모두 생물(生物)이 서식(棲息)하기에 알맞고 또 절후(節候)를 따라서 우설(雨雪)이 고르므로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 자란다. 더욱이 공기(空氣)가 맑고 아름다운 산천(山川)이 어리어서 경치(景致)좋기로 세계(世界)에서 유명(有名)하고 지하(地下)에는 금(金) 은(銀) 동(銅) 철(鐵)을 비롯한 모든 광물(鑛物)이 풍부(豊富)하며 바다에는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부딪쳐서 각종(各種)의 어물(魚物)이 많이 잡힌다.

아국(我國)과 대륙(大陸)과의 지경(地境)은 근세(近世)에 와서 백두산(白頭山)과 및 거기에서 흘러내리는 두만강(豆滿江) 압록강(鴨綠江)으로 하였으나 옛날은 송화강(松花江)기슭의 만주(滿洲)벌판이 아국(我國)의 강토(疆土)이었고 또 그와 반대(反對)로 국경선(國境線)이 지금(只今)보다 축소(縮小)된 일도 있었으나 그러나 오늘날 삼팔선(三八線)이란 부자연(不自然)한 선(線)을 긋고 남북(南北)이 두 동강이로 나뉘게 된 것은 역사적(歷史的)으로 그러한 기록(記錄)이 있는 것도 아니오 또 우리민족(民族)이 이를 승인(承認)한 것도 아니다. 아국(我國)은 세계(世界)어느 나라보다도 순수(純粹)한 단일(單一)한 민족(民族)으로서 이 부자연(不自然)한 선(線)은 불원(不遠)하여 반드시 소멸(消滅)시켜야 할 것이다.

아국(我國)의 척량산맥(脊梁山脈)은 해발(海拔) 이천칠백여(二千七百餘) 미(米 미터)의 백두산(白頭山)에서 비롯하여 함경도(咸鏡道)땅에 개마(蓋馬)의 높고 넓은 고원지대(高原地帶)를 이루고 남(南)으로 내려와서 강원도(江原道)와의 사이에 철령(鐵嶺)을 이루니 옛날 여기에 관문(關門)을 두어서 출입(出入)하는 행인(行人)을 수비(守備)하였기 때문에 이를 중심(中心)으로 강원도(江原道)를 관동(關東), 함경도(咸鏡道)를 관북(關北),평안도(平安道)를 관서(關西)라 부르는 이름이 생겼다. 이 척량산맥(脊梁山脈)은 강원도(江原道)의 한복판을 타고 내려오면서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같은 명산(名山)을 내고 경상도(慶尙道)와의 지경(地境)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이 되고 다시 소백산맥(小白山脈)으로 뻗어 나와서 지리산(智異山)을 이루고 그 여맥(餘脈)이 멀리 제주도(濟州道)의 한라산(漢拏山)에까지 미쳤다. 충청도(忠淸道)와 경상도(慶尙道)와의 사이에 죽령(竹嶺), 조령(鳥嶺)의 관문(關門)이 있어 예로부터 남북(南北)이 통(通)하는 길목이 되었고 경상도(慶尙道)를 영남(嶺南)이라 함은 이 두 영(嶺)의 남(南)쪽에 있기 때문이다. 충청도(忠淸道)를 호서(湖西)라하고 전라도(全羅道)를 호남(湖南)이라 함은 신라(新羅)때에 지금(只今)의 김제(金堤)땅에 벽골제(碧骨堤)라는 큰 못을 파고 이 못이 호수(湖水)처럼 크고 넓다하여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이 아국(我國)의 지세(地勢)는 척량산맥(脊梁山脈)이 북(北)에서 남(南)으로 뻗어 있고 이 산맥(山脈)을 분수령(分水嶺)으로 하여 동(東)은 경사(傾斜)가 급(急)하나 서(西)와 남(南)은 넓은 평야(平野)가 열리고 대하(大河)가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문화(文化)는 언제나 동북부(東北部)지방(地方)보다 서남부(西南部)지방(地方)에서 먼저 열리었다. 강(江)은 북(北)으로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이 있어서 다 함께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였으나 하나는 서(西)로 흘러서 황해(黃海)에 들어가고 하나는 동(東)으로 흘러서 동해(東海)에 들어갔다. 이 두 강(江)은 근세(近世)에 와서 아국(我國)의 북경(北境)이 되고 하나는 서(西)로 중국대륙(中國大陸)과의 교섭(交涉)의 관문(關門)이 되고 하나는 북(北)으로 여진족(女眞族)의 내왕(來往)하는 길목이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압록강(鴨綠江)은 길이가 이천리(二千里)에 가까워서 아국(我國)에서 제일(第一) 큰 강(江)이며 고구려(高句麗)는 이 강(江)안에서 흥(興)하였고 남(南)으로 대한해협(大韓海峽)에 들어가는 낙동(洛東)은 신라(新羅)의 발상지(發祥地)이오 그밖에 청천강(淸川江), 대동강(大洞江), 예성강(禮成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금강(錦江)등(等) 황해(黃海)로 흘러 들어가는 강(江)이 대부분(大部分)이오 예로부터 이러한 강안(江岸)이 역사(歷史)의 무대(舞臺)로 등장(登場)하였다. 특(特)히 대동강(大洞江)은 고조선(古朝鮮)의 중심지(中心地)로서 나중에 고구려(高句麗)의 도읍(都邑)이 되었고 예성강(禮成江)과 임진강(臨津江) 어귀는 고려(高麗)의 근거지(根據地)이오 한강(漢江)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유명(有名)한 쟁탈지(爭奪地)가 되고 근세이래(近世以來)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안(江岸)의 서울이 아국(我國)의 수도(首都)이고 금강(錦江)은 백제말엽(百濟末葉)의 도읍(都邑)이었다.

고대(古代)의 도읍(都邑)은 방비(防備)의 편리(便利)와 풍산지대(豊産地帶)를 가진 것이 주요(主要)한 조건(條件)이 되어 있었으므로 역대(歷代)의 국도(國都)는 모두 대강(大江)의 험(險)과 평야(平野)를 가진 강안(江岸)을 취(取)하였던 것이다.

아국(我國)의 기후(氣候)는 대륙(大陸)과 대양(大洋)과의 사이에 갈마드는, 일사량(日射量)의 차(差)로 말미암아 생긴 계절풍(季節風)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좌우(左右)된다. 시월(十月)에서부터 삼월(三月)까지는 대륙계절풍(大陸季節風)이 불어서 춥고 가물며 사월(四月)에서부터 구월(九月)까지는 비교적(比較的) 약(弱)한 해안계절풍(海岸季節風)이 불어서 비가 많이 온다. 동일(同一)한 위도(緯度)의 타국(他國)에 비기어 아국(我國)의 겨울이 더욱 춥고 또 일년강우량(一年降雨量)의 사분지삼(四分之三)이 여름에 있음은 이 때문이고 아국(我國)의 농업생산(農業生産)이 이러한 기후(氣候)의 지배(支配)를 받음은 물론(勿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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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생활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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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생활(原始生活)

 

아국(我國)의 원시시대(原始時代)에는 주(主)로 어패(魚貝)와 조수(鳥獸)를 잡아먹고 초근목실(草根木實)을 캐어 먹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입고 석굴(石窟)과 움집에서 살았다. 농사(農事)라고는 오직 서(黍 기장)가 있을 뿐이오 서(黍 기장)는 어떤 토지(土地)에서든지 잘 생육(生育)되고 파종시기(播種時期)의 조만(早晩)에 영향(影響)됨이 적으므로 농업기술(農業技術)이 부족(不足)한 고대(古代)에 서농(黍農)만 있는 것은 필연(必然)한 일이다.

기구(器具)나 기명(器皿)은 주로 토석(土石)들로 만든 것이었으니 이 때를 석기시대(石器時代)라 한다. 지금(只今) 아국(我國)과 만주(滿洲)에서 발견(發見)되는 석부(石斧), 석촉(石鏃), 석도(石刀)의 여러 가지 석기(石器)는 모두 같은 계통(系統)인 것이며 이 시대(時代)의 토기(土器)는 물론(勿論) 날 그릇이었으니 그래도 쓸모 있게 여러 가지 모양(模樣)을 만들고 또 간단(簡單)한 그림 모양(模樣)도 새겨내었다. 그러므로 석기(石器)보다 토기(土器)에 있어서 그 시대(時代)의 모습(模習)과 그 민족(民族)의 성격(性格)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석기시대(石器時代)의 흔적(痕跡)은 지금(只今) 아국(我國)의 각처(各處)에 있는 굴(屈)속과 고성지(古城地)와 고분(古墳) 가운데서 많이 발견(發見)되거니와 그 중(中)에서도 해변(海邊) 여러 곳에 산재(散在)하는 패총(貝塚)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패총 중(貝塚中)에는 황해도(黃海道) 몽금포(夢金浦)와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金海)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有名)하며 그밖에 경상남도(慶尙南道) 고성(固城)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迎日)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北靑) 함경북도(咸鏡北道) 성진(城津), 웅기(雄基) 등지(等地)에도 큰 패총(貝塚)이 있으니 이는 옛날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버린 것이 파묻혀 생긴 것이다.

「선돌」이라는 입석(立石)은 높은 산(山)을 본뜬 것이어서 그때 사람들의 신앙(信仰)의 대상(對象)이었으며 이는 세계(世界)에서도 태양(太陽)을 숭배(崇拜)하는 풍습(風習)이 있는데, 어떤 곳에나 있지만 아국(我國)에 더욱 많고 그 중(中)에서도 단군전설(檀君傳說)이 남아 있는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지방(地方)과 마한(馬韓)의 옛 땅에 특(特)히 많다.

또「고인돌」이라고 한 지석(支石)은 혹(或)은 하늘에 제사(祭祀)지내던 제단(祭壇)이었다 하고 혹(或)은 옛사람들의 무덤이라 하나 이 역시(亦是) 태양(太陽)을 숭배(崇拜)하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한 흔적(痕跡)이며 특(特)히 지석(支石)은 인국(鄰國)인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에서는 전연(全然) 발견(發見)되지 아니 하는데 아국(我國)을 비롯하여 만주(滿洲)와 시베리아와 유럽에 걸쳐서 이것이 있고 아국(我國)에서는 여러 곳에서 발견(發見)되었다.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과 황해도(黃海道) 은률(殷栗)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有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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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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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古朝鮮)

 

지금(只今)으로부터 사천여년(四千餘年) 전(前)의 옛날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중국(中國)의 요(堯)임금 때요 이 해를 아국(我國)의 기원원년(紀元元年)이라 한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천여년(千餘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하나 확실(確實)한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그 후(後)에 중국(中國)의 은(殷)나라가 망(亡)하고 주(周)나라가 대신(代身)하게 되었는데, 은(殷)나라의 왕자(王子)인 기자(箕子)가 그 무리를 데리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지금(只今)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부여(扶餘), 남부(南部)에는 구려맥(句麗貊)이 있고 반도방면(半島方面)에는 한(韓)이 있었는데 그 연대(年代)와 국도(國都)는 알 수 없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은 여러모로 발달(發達)된 산업(産業)의 기초(基礎) 위에서 대륙(大陸)의 진보(進步)한 문명(文明)을 수입(輸入)하여 크게 발전(發展)하고 조선기술(造船技術)이 발달(發達)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中國)의 제(齊)와 노(魯)로 더불어 무역(貿易)하며 농사(農事)짓는 법(法)과 우마(牛馬)를 기르는 목축업(牧畜業)이 발달(發達)하고 사람의 성질(性質)이 정직(正直)과 예절(禮節)과 신의(信義)를 숭상(崇尙)하고 평화(平和)와 정결(淨潔)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중국(中國)사람들은 아국인(我國人)을 군자지국(君子之國) 대인지시(大人之市)라하고 인인선(仁人善)이라 불렀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이 구백여년(九百餘年)동안 계속(繼續)하는 중(中)에 중국(中國)에서는 주(周)나라 세력(勢力)이 차츰 약(弱)해지고 소위(所謂)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時代)라 해서 여러 백년(百年)동안 전쟁(戰爭)이 계속(繼續)되고 흉년(凶年)이 겹들어서 연(燕), 조(趙), 제(齊), 노(魯)의 중국(中國) 북방(北方) 사람들이 혹(或)은 해로(海路)로, 혹(或)은 육로(陸路)로 조선(朝鮮)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중(中)에서도 특(特)히 연(燕)나라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의 서부(西部)를 쳐서 빼앗고 요하(遼河)를 사이에 두고 조선(朝鮮)과 지경(地境)을 접(接)하여 있어서 일직부터 교섭(交涉)이 잦았고 주(周)나라가 망(亡)하고 진(秦)나라가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할 무렵에 조선(朝鮮)으로 피난(避難)하여 들어오는 사람이 수(數) 없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기부왕(箕埠王)때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을 서부국경(西部國境)에 머물게 하더니 만(滿)이 야심(野心)을 품고 많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난리(亂離)를 일으켜 왕도(王都)를 치거늘 준왕(準王)이 미처 항거(抗拒)치 못하여 해로(海路)로 마한(馬韓)에 주입(走入)하니 이는 단기(檀紀)이천일백사십년(二千一百四十年) 정미(丁未)이다.

위만(衛滿)이 나라를 세운 후(後)에 국호(國號)를 또한 조선(朝鮮)이라 하니 이것을 위씨조선(衛氏朝鮮)이라 한다. 이때에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진(秦)나라를 이어서 중원(中原)을 통일(統一)한 한(漢)나라의 세력(勢力)이 커져서 동(東)으로 침입(侵入)하니 위만(衛滿)의 손자(孫子) 우거(右渠)는 견디지 못하여 항복(降服)하니 이는 단기(檀紀) 이천이백이십육년(二千二百二十六年) 계유(癸酉)의 일이오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삼대(三代) 팔십칠년(八十七年)으로써 끝마쳤다.

한(漢)나라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의 고지(故地)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菟)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사군(四郡)의 위치(位置)와 넓이에 대(對)하여는 여러 가지 말이 없지 않으나 대개(大槪) 낙랑군(樂浪郡)은 평양(平壤)을 중심(中心)으로 한 대동강(大洞江) 기슭임이 확실(確實)하고 진번군(眞番郡)은 황해도(黃海道)와 경기도(京畿道)의 한강(漢江) 이북(以北)이오 임둔군(臨屯郡)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와 강원도(江原道)의 철령(鐵嶺) 이북(以北)이오 현토군(玄菟郡)은 압록강(鴨綠江) 기슭을 중심(中心)으로 한 평안북도(平安北道)와 동가강(佟佳江) 하류지방(下流地方)이라 한다. 그러나 사군(四郡)은 우리 민족(民族)의 맹렬(猛烈)한 반항(反抗)때문에 미처 뿌리를 내릴 사이도 없이 진번(眞番) 임둔(臨屯) 이군(二郡)은 이십육년(二十六年)만에 없어지고 현토군(玄菟郡)은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스스로 해소(解消)되고 낙랑군(樂浪郡)만이 중국(中國) 사람들의 근거지(根據地)로서 반도(半島) 중부(中部)에 사백여년(四百餘年)동안 남아 있었다.

낙랑군(樂浪郡)은 아국(我國)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중국(中國)과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함으로 아국(我國)의 중국(中國) 무역(貿易)을 맡아 하였다. 평양(平壤)에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 토성리(土城里)라는 마을에 분명(分明)한 토성(土城) 자리가 있고 그 마을 전토(田土)사이에서 낙랑군(樂浪郡)의 유물(遺物)이 나옴으로 보아 이곳이 낙랑(樂浪)의 서울임을 알 수 있다. 그 동(東)쪽 평평(平平)한 언덕 위에 수다(數多)한 고분(古墳)이 있고 그 고분(古墳) 속에서 금(金) 옥(玉) 동(銅)으로 만든 거울과 각종(各種)의 질그릇과 그림을 새긴 솥이라든가 와편(瓦片) 칠기(漆器) 등(等) 낙랑유물(樂浪遺物)이 많이 나와서 고고학상(考古學上) 보배가 되었다.

조선(朝鮮) 중부(中部)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이 건국(建國)될 무렵에 지금(只今)의 북만주(北滿洲) 지방(地方)에는 부여족(扶餘族)이 살아서 농업(農業)과 목축(牧畜)에 힘쓰고 중국(中國)의 진보(進步)된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하였으며 지 방(地 方)이 이천리(二千里)이오 호수(戶數)가 팔만(八萬)이나되며 서(西)로 오환(烏桓) 선고(鮮皐) 등(等)의 인(鄰)과 겨뤄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나라에 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들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지 아니하면 그 과실(過失)이 임금에게 있다하여 혹(或)은 갈아세워야 한다하고 혹(或)은 죽여야한다 하였다. 부여(扶餘)의 임금은 세습적(世襲的) 추장(酋長)에 지나지 아니하여 그 밑에 짐승이름을 붙인 오(烏), 가(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等) 벼슬이 있어 사출도(四出道)를 나가 지키고 이들은 각기(各其) 수백호(數百戶)로부터 수천호(數千戶)의 백성(百姓)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여(扶餘)와 때를 같이하여 동해(東海) 방면(方面)에는 옥저(沃沮), 예(濊)가 있고 반도(半島) 남부(南部)에는 삼한(三韓)이 있었다. 옥저(沃沮)는 지금(只今)의 함경도(咸鏡道) 지방(地方)에 살았는데 그 땅은 동북(東北)이 좁고 서남(西南)이 넓으며 장(長)이 천리(千里)이고 북(北)으로는 읍루(挹婁)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이고 남(南)으로는 예(濊)와 잇닿아 있었다. 호수(戶數)는 오천(五千)이며 임금은 없고 부락(部落)마다 수령(首領)이 있어 부락(部落)일을 추려나가고 언어(言語)는 고구려(高句麗)와 같고 성질(性質)이 강직(强直)하고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생산(生産)되고 음식(飮食)과 거처(居處)와 모든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비슷하였다. 옥저(沃沮)는 남북(南北)의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북옥저(北沃沮)는 읍루(挹婁)와 접경(接境)한 관계(關係)로 여름이면 읍루(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약탈(掠奪)함으로 산중(山中)에 깊이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게되면 비로소 부락(部落)에 내려와서 살았다.

예(濊)는 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동(東)에서 함경도(咸鏡道)의 남(南)에 걸쳐서 살았다. 스스로 고구려(高句麗)와 동족(同族)이라 하고 호수(戶數)가 이만(二萬)이며 사람들이 성질(性質)이 순후(淳厚)하고 염치(廉恥)가 밝으며 도적(盜賊)이 없어서 밤에 문(門)을 닫는 일이 없었다.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이 고구려(高句麗)와 거의 비슷하나 의복(衣服)은 다르며 여러 부락(部落)은 산천(山川)의 경계(境界)를 중(重)히 여겨 서로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고 이를 범(犯)하면 책화(責禍)라 하여 노예(奴隸)와 우마(牛馬)로써 배상(賠償)하며 기(忌)하는 것이 많아서 가족중(家族中)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곧 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살았다. 예(濊)사람들은 마포(麻布)를 짜고 양잠(養蠶)할 줄 알고, 별을 보고 그 해의 농사(農事)의 풍흉(豊凶)을 미리 알 수 있었다.

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이 시대(時代)는 일산(一山)의 장(障)과 일수(一水)의 조(阻)가 스스로 한 부락(部落)을 이루어 국가(國家)노릇을 하였는데 삼한(三韓)의 지방(地方)에 이러한 부락국가(部落國家)가 칠십팔국(七十八國)이나 있었다. 각(各) 부락(部落)에는 수령(首領)이 있고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은 각기(各其) 소속(所屬)한 부락국가(部落國家)를 통어(統御)하는 총왕(總王)이 있었다.

마한(馬韓)은 그 중(中) 서(西)쪽에 있어서 백성(百姓)이 농사(農事)를 짓고 양잠(養蠶)을하고 오십사국(五十四國)으로 나뉘어 그 크기가 대국(大國)은 만여호(萬餘戶), 소국(小國)은 수백호(數百戶)이며 사람의 성질(性質)이 용감(勇敢)하고 해마다 오월(五月)에 파종(播種)이 끝난 뒤와 시월(十月)에 추수(秋收)를 마친 뒤에 한번씩 전국인(全國人)이 모여 천제사(天祭祀)를 지내고 여러 날 동안 일야(日夜)로 마음껏 먹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놀았다.

변(弁),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도(慶尙道)땅에서 모두 이십사국(二十四國)이 있고 대국(大國)은 사오천호(四五千戶)이오 소국(小國)은 육칠(六七)백호(百戶)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지(地)가 비옥(肥沃)하여 여러 가지 곡식(穀食)이 잘되고 벼를 심고 양잠(養蠶)과 우마(牛馬)의 축산(畜産)이 성(盛)하고 혼인(婚姻)에 예절(禮節)이 밝고 사람이 죽으면 큰 조우(鳥羽)를 달아 보내니 이는 그 영혼(靈魂)이 날아가도록 함이었다.

이때까지의 역사가(歷史家)들은 삼한(三韓)을 나눠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 하고 그 중(中) 마한(馬韓)이 지금(只今)의 한강(漢江) 이남(以南)에서부터 충남북도(忠南北道)와 전라도(全羅道)땅이고 진한(辰韓)은 지금(只今)의 경상도(慶尙道)의 대부분(大部分)이고 변한(弁韓)은 나중의 가야(伽倻)의 여러 나라가 일어난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지방(地方)이라 하였으나 새로운 연구(硏究)에 의(依)하면 진한(辰韓)이 한사군(漢四郡)에서 가장 가까운 한강(漢江) 유역(流域)이고 마한(馬韓)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이고 변한(弁韓)이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지방(地方)이라 한다.

부여(扶餘)의 일족(一族)에 졸본부여(卒本扶餘)가 있으니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연안(沿岸)의 땅이오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이다.

이 시대(時代)의 정치(政治)는 신앙(信仰)과 완전(完全)히 분립(分立)되지 아니하여 부락(部落)의 수령(首領)이 마을사람들을 거느리고 천제(天祭)를 지내며 또 마을의 정치(政治)를 행(行)하였다. 신앙(信仰)의 가장 높은 대상(對象)은 하늘의 상징(象徵)인 태양(太陽)이었으며 해마다 농사(農事)가 끝나면 일정(一定)한 때에 신곡(新穀)으로 술과 떡을 빚어 천제(天祭)를 지내고 그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놀았다.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부여(扶餘)의 영고(迎鼓) 등(等)은 모두 이를 이름이다. 이 제사(祭祀)는 처음에 높은 산(山)마루에서 지냈으니 그 곳은 어느 곳보다도 태양(太陽)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러한 풍습(風習)은 나중에 농업(農業)이 발달(發達)되고 강안(江岸)과 평야(平野)에 내려와 살게된 뒤에도 계속(繼續)되어 국가(國家)에서는 해마다 유명(有名)한 높은 산(山)에 산제(山祭)를 드리고 고을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으며 마을에는 당산(堂山)이 있어서 온 고을사람과 온 마을사람이 정성(精誠)을 바치는 곳이다.

사회(社會)는 대가(大家)라는 지배계급(支配階級)과 하호(下戶)라는 백성(百姓)과 노예(奴隸)의 세 계급(階級)으로 나뉘었고 대가(大家)들은 광대(廣大)한 토지(土地)를 가지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농사(農事)를 지었으며 이 시대(時代)는 토지(土地)는 넓고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함으로 전쟁(戰爭)할 때마다 노예(奴隸)로 부릴 포로(捕虜)를 얻는 것이 유일(唯一)한 전리품(戰利品)이었다. 산업(産業)은 농잠(農蠶)과 직포(織布)가 자못 발달(發達)하였으며 변 진한(弁辰韓)에서는 철(鐵)을 채굴(採掘)하여 돈으로 쓰고 이웃나라와 서로 무역(貿易)하였다.

종전(從前)에는 석기(石器)와 동기(銅器)만 있었는데 동기(銅器)는 연(軟)하여 칼 도끼 등(等)으로 사용(使用)치 못하더니 철(鐵)이 발견(發見)된 후(後)로 철제(鐵製)연장과 무기(武器)가 생겨서 산업(産業)과 전쟁(戰爭)양식(樣式)에 대혁명(大革命)을 일으켰다. 지금 이 문명(文明)에서 철(鐵) 한가지를 없앤다고 하면 이 호화(豪華)스러운 문명(文明)도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이니 고대(古代)의 철(鐵)의 발견(發見)은 참으로 경이적(驚異的) 사실(事實)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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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흥기(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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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三國)의 흥기(興起)

 

처음에 북부여(北扶餘)의 임금 해모수(解慕潄)가 아들 주몽(朱夢)을 낳았는데 주몽(朱夢)은 동부여(東扶餘)의 임금 금와(金蛙)에게 양육(養育)되다가 그의 형제(兄弟)들의 시기(猜忌)에 못 배겨 부하(部下)를 거느리고 도망(逃亡)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러 국가(國家)를 세우고 성(姓)을 고(高)라 하니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

일설(一說)에는 주몽(朱夢)이 졸본(卒本)에 와서 졸왕(卒王)의 여서(女婿)가 되었다가 왕(王)이 죽은 뒤에 그 위(位)를 계승(繼承)하였다 하는데 여러 가지 사실(史實)로 보면 이 말이 가장 근리(近理)하고 주몽(朱夢)이 졸본(卒本) 국호(國號)를 고쳐서 고구려(高句麗)라 하였음으로 후인(後人)이 고구려(高句麗)의 역연수(歷年數)에 대(對)하여 주몽(朱夢)으로부터 망(亡)할 때까지를 칠백오년(七百五年)이라 하고 졸본(卒本)까지를 합(合)하여 구백년(九百年)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의 다섯 대족단(代族團)이 중심(中心)으로 이루어진 사회(社會)이며 산(山)이 많고 토지(土地)가 여위어서 생활(生活)이 곤란(困難)한 까닭에 사람들이 권검(勸儉)하였다.(고구려(高句麗) 건국(建國) 단기(檀紀) 이천이백구십칠년(二千二百九十七年))

고구려(高句麗)시조(始祖) 주몽왕(朱夢王)이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는데 동부여(東扶餘)에 있을 때에 낳은 아들 유리(類利)가 찾아와서 태자(太子)가 되었음으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부하(部下) 십인(十人)을 거느리고 남(南)으로 향(向)하여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을 지나서 마한(馬韓)에 들어가니 마한왕(馬韓王)이 두 형제(兄弟)의 웅걸(雄傑)함을 보고 동북(東北) 백리(百里)의 땅을 할여(割與)하여 써 거처(居處)하게 하였다. 비류(沸流)는 어염(魚鹽)의 이(利)를 취(取)하여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仁川)지방(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온조(溫祚)는 산천(山川)의 험(險)과 평야(平野)의 이(利)를 취(取)하여 한강안(漢江岸)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都邑)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백제(百濟)라하고 성(姓)을 부여(扶餘)라 하니 이가 곧 백제시조(百濟始祖)이다.(檀紀 二千三百十六年)

비류(沸流)는 그 땅이 비습(卑濕)하여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죽으매 그 백성(百姓)이 모두 위례성(慰禮城)으로 돌아오니, 온조(溫祚)는 세력(勢力)이 점점(漸漸)자랐으니, 창업(創業) 초기(初期)에 북변(北邊)의 낙랑(樂浪)과 말갈(靺鞨)이 자주 침입(侵入)함으로 한산(漢山)에(지금의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 도읍(都邑)을 옮겼다.

변 진한(弁辰韓)의 사로국(斯盧國)에는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육촌장(六村長)이 회의(會議)를 열고 북방인(北方人)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밀려오는 이때에 우리가 현군(賢君) 일인(一人)을 구(求)하여 세우고 국가(國家)를 통일(統一)하지 아니하면 안되리라 하고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맞이하여 임금을 삼고 지금의 경주(慶州)에 도읍(都邑)하니 이가 곧 신라(新羅) 시조(始祖)이다. (檀紀 二千二百七十七年) 신라(新羅)의 국호(國號)는, 처음에는 사로(斯盧) 그밖에 여러 가지로 불러 왔으나 후(後)에 신라(新羅)라 고쳤으므로 신라(新羅)로 통칭(通稱)하는 것이다.

삼국(三國)의 시조(始祖)는 모두 일대(一代)의 영걸(英傑)이라 당시(當時)의 각국(各國)이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로 성립(成立)되어 완전(完全)한 통일국가(統一國家)를 이루지 못하고 부락(部落)과 부락(部落)사이에 호상(互相) 침벌(侵伐)함이 있으되 국가(國家) 총왕(總王)이 능(能)히 제어(制御)치 못함을 보고 정치(政治)를 중앙(中央)에 통일(統一)한다는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쓰기로 하였다. 그 까닭에 건국(建國)초(初)부터 부근(附近)의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여 군현(郡縣)을 만들고 관리(官吏)를 보내어 다스렸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역사상(歷史上) 정치제도(政治制度)의 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고구려(高句麗)는 태백산(太白山) 좌우(左右)에 산재(散在)한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를 정복(征服)하고 한(漢)이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취(取)하니 이때가 졸본(卒本)이라는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로 개칭(改稱)한 때이오 동(東)으로 옥저(沃沮) 지방(地方)까지를 그 판도(版圖)에 넣었다.

백제(百濟)는 점차(漸次)로 마한국(馬韓國)의 여러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니 마한왕(馬韓王)이 책(責)하여 왈(曰) 왕(王)이 처음에 아경(我境)에 들어 왔을 때에 객신(客身)할 곳이 없기로 토지(土地)를 주어 안거(安居)케 했거늘 이제 우리 국토(國土)를 침범(侵犯)하니 무슨 도리(道理)인고 하였으나 온조왕(溫祚王)은 듣지 아니하고 남(南)으로 점차(漸次)로 강토(疆土)를 넓혔다.

신라(新羅)는 변 진한(弁辰韓)의 북부(北部)를 점점(漸漸) 병합(倂合)하고 서(西)로 마한국경(馬韓國境)에 다다르니 여기서 비로소 백제(百濟) 병(兵)과 상견(相見)하게 되어 삼국시대(三國時代) 육칠백년(六七百年) 간(間)의 전란(戰亂)의 막(幕)을 열었다. 그러나 이 전쟁(戰爭)은 호전기풍(好戰氣風)이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와 통일국가(統一國家)를 만들려는 운동(運動) 과정(過程)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생긴 현상(現象)이었다.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이 각기(各其)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로 엉켜 갔을 때에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 지방(地方)은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이루지 못하고 육가야국(六伽倻國)이 분립(分立)하여 부족사회(部族社會)를 그대로 지내었다. 그 중(中)에는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의 김해(金海) 지방(地方)을 중심(中心)으로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가락국(駕洛國)을 세우니 이가 곧 가락시조(駕洛始祖)이오 가락(駕洛)을 또한 금관(金官)이라 하며 (檀紀 二千三百七十五年) 그밖에 대가야(大伽倻) 소가야(小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등(等)이 있었는데 좁은 구역(區域)에 육국(六國)이 분립(分立)되어 있었음으로 국력(國力)이 모두 떨치지 못하고 또 그 위치(位置)가 아국(我國)의 최남단(最南端)에 있어 북(北)에서 밀려온 아국(我國) 문화권(文化圈)의 가장 구석진 곳이다. 다만 낙동강(洛東江)이 흘러내려 가서 삼각주(三角洲)를 이룬 곳으로 국민(國民)의 생활(生活)은 가장 유족(裕足)한 곳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제도(制度)와 풍습(風習)에는 여러 가지 특색(特色)이 있고 창조성(創造性)이 있었다. 신라(新羅)는 당시(當時) 일반적(一般的)으로 행(行)하고 있는 군주(君主)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타파(打破)하고 이세(二世) 남해왕(南解王)은 자(子) 유리(儒理)와 서(婿) 석탈해(昔脫解)에 일러 왈(曰) 아(我) 사후(死後)에 박(朴) 석(昔) 이성(二姓)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로써 왕위(王位)를 사(嗣)하라 하더니, 석탈해(昔脫解)가 제사대(第四代) 왕(王)이 되니 이로부터 박석(朴昔) 이성(二姓)이 상전(相傳)하고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수양(收養)하더니 그후(後)에 알지(閼智)의 자손(子孫)이 또한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여 이로부터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이 상전(相傳)하였다. 이 시대(時代)는 전란(戰亂)이 자주 일어나고 또 창업기(創業期)에 있었는데 만일 군주(君主)가 연유(年幼)하거나 또한 암우(暗愚)하면 혹(或)은 행정권(行政權)이 신하(臣下)에게 옮기고 혹(或)은 국가대사(國家大事)를 처리(處理)할 능력(能力)이 없어서 반드시 위망(危亡)에 빠지게 되는 것임으로 신라(新羅)에서는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깨트리고 골품제(骨品制)를 써서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을 성골(聖骨)이라 하고 성골(聖骨) 출신(出身)이 왕위(王位) 계승권(繼承權)을 가지되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가 왕(王)이 되기로 하니 이 까닭에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와 정립(鼎立)한 동안 일,이(一,二)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유군(幼君)과 암왕(暗王)이 거의 없었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도 이,삼(二,三)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연유(年幼)한 군주(君主)가 거의 없으니 이로써 보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의 군(君)됨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왕위(王位)계승(繼承)의 한 원칙(原則)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며 후세(後世)에 자기(自己) 자손(子孫)에게 행복(幸福)을 주기 위(爲)하여 황구(黃口) 유아(幼兒)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함은 국사(國事)를 위(爲)함이 아니오 그 국가(國家)를 자가(自家) 혈통(血統)의 사유물(私有物)로 생각한 까닭이며, 이로 인(因)하여 국사(國事)를 그르치고 아들에게 행복(幸福)을 준다는 것이 도리어 큰 재화(災禍)를 준 예(例)도 적지 아니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인성(人性)은 혼후(渾厚)하여 개인(個人)의 사욕(私慾)보다 국가(國家)를 위(爲)하는 마음이 더 두터웠다. 신라(新羅)에는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한 예(例)가 여러 번 있었고 고구려(高句麗)에서는 높은 벼슬을 다른 사람에게 사양(辭讓)하는 예(例)가 있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왕(故國王)때에 오부(五部)에 명령(命令)하여 현인(賢人)을 천거(薦擧)하라한즉 오부(五部)가 연류(宴留)를 추천(推薦)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더니 연류(宴留)가 말하되 신(臣)이 용우(庸愚)하여 족(足)히 써 국가(國家) 대정(大政)을 맡지 못할지라 압록곡(鴨綠谷)에 을파소(乙巴素)가 있어 역전(力田) 자급(自給)하는데 성질(性質)이 강의(剛毅)하고 정치(政治)의 대재(大才)가 있으니 차인(此人)이 아니면 국사(國事)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신(臣)의 벼슬을 차(此)에게 맡기라 하였다. 왕(王)은 곧 을파소(乙巴素)를 거용(擧用)하니 을파소(乙巴素)의 정치(政治)가 현명(賢明)하여 백성(百姓)이 편안(便安)하고 또 백성(百姓)의 빈궁(貧窮)함을 걱정하여 봄에 국창(國倉)의 곡식(穀食)을 내어 백성(百姓)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환수(還收)하여 해마다 상례(常例)를 삼으니 백성(百姓)이 모두 기뻐하고 이것이 아국(我國)의 진대제도(賑貸制度)의 시초(始初)였다.

삼국(三國)은 국가(國家)에 큰 난리(亂離)가 있으면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집고 궁시(弓矢)를 메고 군대(軍隊)의 선두(先頭)에 나서고 군졸(軍卒)이 그 뒤를 따름으로 장 병(將 兵)이 모두 일체(一體)가되어 당시(當時) 천하(天下) 강국(强國)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물론(勿論) 이때는 전공(戰功)이 있는 자(者)에게 토지(土地)를 주는 전장제도(田庄制度)가 있고 또 포로(捕虜)를 획득(獲得)하여 농업(農業) 노예(奴隸)로 사용(使用)하는 제도(制度)가 있음으로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들이 선두(先頭)에 나서는 것은 전공(戰功)을 세우기 위(爲)한 일면(一面)이 없지 아니하나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는 숭고(崇高)한 정신(精神)은 족(足)히 후세(後世)의 미약(微弱)한 하민층(下民層)만을 군사(軍士)로 내 세우고 자기(自己)는 안일(安逸)한 지위(地位)에 도피(逃避)하는 귀족층(貴族層)을 괴사(愧死)케 할 것이오 유명(有名)한 신라(新羅)의 화랑(花郞)도 이러한 정신(精神)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람은 혼후(渾厚)한 기풍(氣風)으로써 지위(地位)의 고하(高下)와 세력(勢力)의 강약(强弱)을 가리지 아니하고 오직 일심(一心)으로 함께 국사(國事)에 당(當)하였으므로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아국(我國)역사상(歷史上) 가장 광휘(光輝)있는 시대(時代)를 현출(現出)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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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융성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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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의 융성(隆盛)

 

고구려(高句麗)의 국도(國都) 졸본(卒本)은 평야(平野)가 적고 외적(外敵)을 막기에 불편(不便)함으로 얼마 후(後)에 국내성(國內城)에 옮기고 다시 환도성(丸都城)에 옮겨서 서(西)로 요하(遼河)방면(方面)으로 내려가고 남(南)으로 한반도(韓半島)로 내려가기 시작(始作)하였다. 고구려(高句麗)가 서(西)와 남(南)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면 안될 이(理)는 두 가지가 있다.

一. 고구려(高句麗)의 땅은 평야(平野)가 적고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며 기후(氣候)가 한냉(寒冷)하여 농산(農産)이 풍부(豊富)치 못함으로 국가(國家) 존립상(存立上) 오곡(五穀)과 잠마(蠶麻)가 풍성(豊盛)한 남방(南方)으로 진출(進出)치 아니할 수 없는 것

二. 요하(遼河)로부터 대동강(大洞江)에 이르는 일대지(一帶地)는 고래(古來)로 우리 민족(民族)이 거주(居住)하던 조선(朝鮮) 고지(故地)이던 것이 지금(只今)에 현토(玄菟) 낙랑(樂浪)등(等)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으로 되었음으로 이것을 회복(恢復)치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건국(建國)초기(初期)부터 서출(西出) 남하(南下) 정책(政策)을 써서 마침내 서(西)로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지경(地境)이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南)으로 낙랑(樂浪)을 취(取)하여 사백년(四百年)동안 내려오던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을 뿌리 채 뽑아버리고 드디어 백제(百濟)와 접경(接境)하니 이때가 삼국(三國)이 비로소 정립(鼎立)한 때이오 삼국(三國) 후(後) 약 삼백년(約 三百年) 경(頃)의 일이었다.

고구려(高句麗)는 서(西)쪽으로 발달(發達)하는 도중(途中)에 중국(中國)과의 충돌(衝突)이 가장 심(甚)하더니 중국(中國)의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위(魏)와 항쟁(抗爭)하다가 위장(魏將) 관구검(毌丘儉)에게 패(敗)하여 환도성(丸都城)이 회신(灰燼)되었으므로 일시(一時) 국세(國勢)가 매우 위태(危殆)하였으나 얼마 후(後)에 다시 회복(恢復)하여 대륙(大陸)으로 진출(進出)하는 정책(政策)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요하(遼河) 서(西)쪽의 금주성(錦州城)에 웅거(雄據)하고 있는 연(燕)나라와 쟁웅(爭雄)하다가 연군(燕軍)에게 패(敗)하여 환도성(丸都城)은 다시 수리(修理)할 수 없이 파괴(破壞)되고 도성(都城)이 적국(敵國)에 너무 가까워서 항상(恒常) 위험성(危險性)이 있음을 염려(念慮)하여 그 후(後)에 평양(平壤)으로 옮기더니 고구려(高句麗) 중흥(中興)의 영왕(英王)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다시 환도성(丸都城)에 도읍(都邑)하고 강토(疆土)를 사방(四方)으로 넓히니 이때가 고구려(高句麗)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이오 지금 만주(滿洲) 집안현(輯安縣) 비석가(碑石街)에 흘연(屹然)히 서있는 높이 이십이척(二十二尺)의 거비(巨碑)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공적(功績)을 영원(永遠)히 전(傳)하기 위(爲)하여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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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의 발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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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

 

백제(百濟)는 건국(建國) 후(後) 점차(漸次)로 마한(馬韓)의 땅을 탈취(奪取)하더니 불과(不過) 이십(二十) 여년(餘年)에 전역(全域)을 통합(統合)하고 반도(半島) 서남부(西南部)의 일대국(一大國)을 형성(形成)하였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농산(農産)이 많고 일면(一面)이 대해(大海)인 관계(關係)로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이 발달(發達)하여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무역(貿易)하고 수군(水軍)이 또한 정예(精銳)하여 한때는 중국(中國)의 동해안(東海岸) 일부(一部)를 점령(占領)한 일도 있었다.

고구려(高句麗)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내려 온 후(後) 예성강(禮成江)(황해도)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충돌(衝突)이 일어나기 시작(始作)하였다.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는 본시(本是) 형제(兄弟)의 나라이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백제(百濟)를 치다가 전사(戰死)하니 이로부터 양국(兩國)이 세수(世讎)가 맺어져서 전쟁(戰爭)이 연년(連年) 부절(不絶)하더니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이 남하정책(南下政策)을 추진(推進)하여 평양(平壤)에 이도(移都)한 후로 백제(百濟)는 그 압력(壓力)에 눌려서 더 북진(北進)치 못하고 개로왕(盖鹵王)때에는 고구려(高句麗)와 싸우다가 왕(王)은 전사(戰死)하고 전군(全軍)이 복멸(覆滅)하고 한강(漢江) 좌우(左右)의 지(地)를 상실(喪失)하고 왕자(王子)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기니 이때가 백제(百濟)의 최대(最大) 수난기(受難期)이었다.

신라(新羅)는 반도(半島)의 동남(東南) 일우(一隅)에 처(處)하여 현군(賢君)이 상속(相續)하고 그 정치(政治)에는 화백(和白)이라는 제도(制度)가 있어 임금을 선거(選擧)하고 다른 중요(重要)한 국사(國事)를 의론(議論)하는데 유족(遺族)들이 모여서 회의(會議)하고 전원(全員)이 찬성(贊成)한 연후(然後)에 결정(決定)함으로 항상(恒常) 국론(國論)이 잘 통일(統一)되고 또 이 나라는 육부족(六部族)의 합의(合意)에 의(依)하여 성립(成立)되었으므로 그 국민(國民)의 부족적(部族的) 단결(團結)이 가장 공고(鞏固)하였으니 이것이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었고 이 부족(部族)의 단결력(團結力)은 전전이사(轉轉移徙)하여 다니는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는 아국(我國)의 서해안(西海岸)을 끼고 있어서 일직부터 대륙(大陸)과의 교섭(交涉)이 빈번(頻繁)하여 손쉽게 그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할 수 있었고 한문(漢文)도 국초(國初)부터 들어와서 일부(一部) 지식계급(知識階級)사이에 행(行)하였음으로 문화(文化) 정도(程度)의 향상(向上)이 볼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新羅)는 지리적(地理的)으로 중국(中國)과 직접(直接)으로 교통(交通)하지 못하고 주(主)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통(通)하여 간접(間接)으로 대륙(大陸)문화(文化)를 받은 관계(關係)로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얼마쯤 뒤졌으나 그 대신(代身) 삼한시대(三韓時代)로부터 계속(繼續)하여오는 국유문화(國有文化)를 충분(充分)히 발달(發達)케 하고 그 기초(基礎)위에 대륙문화(大陸文化)를 받아서 세계(世界)에 자랑할만한 신라문화(新羅文化)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불교(佛敎)를 받아들일 때에 있어서도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가장 쉽게 받아왔으나 오직 신라(新羅)는 그 받아들이는 가부(可否)에 대(對)하여 논란(論難)과 비판(批判)이 가장 심각(深刻)하여 어려운 곡절(曲折)을 겪었고 그 뒤에 가장 아름다운 불교문화(佛敎文化)의 꽃이 핀 것으로 보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후세(後世)에 외국문화(外國文化)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깊은 검토(檢討)와 비판(批判)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유문화(國有文化)의 기초(基礎)가 약(弱)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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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사회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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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귀족(貴族) 공신(功臣)들에게 전장(田庄) 식읍(食邑) 등(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농경(農耕)에 종사(從事)할 노예(奴隸)를 아울러 주니 고구려(高句麗)에는 좌식(坐食)하는 대가(大家)가 만여호(萬餘戶)이오 하호(下戶)는 그들에게 양식(糧食)과 어염(魚鹽)을 져다 바쳤으며, 신라(新羅)에는 재상가(宰相家)의 노복(奴僕)이 삼천인(三千人)에 달하고 우마(牛馬)의 수(數)도 거의 비슷하였다고 한다. 이 때는 돈이 없고 미곡(米穀)과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사용(使用)하니 이것은 고대(古代) 물물교환(物物交換)의 유풍(遺風)이오 지금에 호남(湖南)지방(地方)에서 미곡(米穀)에 한(限)하여 매(買)하는 것을 판다하고 매(賣)하는 것을 산다 하는 것은 삼국(三國) 이래(以來) 미곡(米穀) 마포(麻布)가 돈으로 쓰이던 유속(遺俗)이다.

삼국(三國)의 극성시대(極盛時代)의 도성(都城) 인구(人口)는 고구려(高句麗)는 이십일만여호(二十一萬餘戶)이오 신라(新羅)는 십칠만여호(十七萬餘戶)이오 백제(百濟)는 십오만여호(十五萬餘戶)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구(人口)가 희소(稀少)한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인구(人口)가 일호(一戶)에 오인(五人)으로 잡더라도 칠십만(七十萬) 혹(或)은 백만(百萬)이 될 것이니 이것은 사실(事實)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도성(都城)이 팽창(膨脹)치 아니할 수 없는 이유(理由)가 있으니 이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그치지 아니하고 어떤 때는 도성(都城)이 수삼개월(數三個月) 적군(敵軍)의 포위(包圍)를 당(當)하는 일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 포위(包圍)에는 식량(食糧) 무기(武器) 기타 여러 가지 생필품(生活品)을 도성내(都城內)에서 자급자족(自作自給)치 아니하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각국(各國)의 도성내(都城內)에는 첫째로 무기(武器)를 제조(製造)하는 공장(工場)이 있고 거기에 종사(從事)하는 기술자(技術者)및 노무자(勞務者)등(等) 백공(百工)이 있고 큰 시장(市場)도 이 도성내(都城內)에 집중(集中)되어 있었다. 국가(國家)가 도성(都城)을 옮길 때에 먼저 공장(工場)과 백공(百工)을 옮긴 것은 이 까닭이오 당시(當時)에 도성(都城)이 팽창(膨脹)한 것은 자연(自然)의 이(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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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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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을 중심(中心)으로 남북(南北) 수천리(數千里)에 걸쳐서 큰 세력(勢力)을 길렀으므로 비단(非但)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에 대(對)한 압력(壓力)이 될 뿐 아니라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대하여도 끊임없는 위협(威脅)이었다.

그러나 전일(前日)의 중국(中國)은 오호(五胡) 십육국(十六國)의 어지러운 시대(時代)였으나 그 뒤에 남북(南北)으로 나뉘었다가 수(隋)나라가 일어나서 통일(統一)을 이룬 뒤에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사이에는 두 큰 세력(勢力)이 마주쳐서 부딪치지 아니할 수 없이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수(隋)나라의 요서(遼西)를 친 것이 동기(動機)가 되어서 수(隋) 문제(文帝)가 삼십만(三十萬) 군사(軍士)로서 쳐들어 왔으나 중도(中途)에서 패(敗)하여 돌아갔다. 다음 임금 양제(煬帝)는 본시(本是) 허심(虛心)이 많은 사람으로서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해 보겠다는 야심(野心)과 부황(父皇)이 이루지 못한 한(恨)을 풀겠다는 생각으로 천하(天下)의 힘을 기우려 영양왕(嬰陽王) 이십이년(二十二年) (檀紀 二千九百四十五年)에 百十三萬의 陸軍과 多數한 水軍을 거느리고 高句麗로 쳐들어오니 陣의 길이가 九百六十里에 뻗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짐작(斟酌)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으로써 대장(大將)을 삼고 준비(準備)하던 터이라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수군(隋軍) 이십만((二十萬)을 유인(誘引)하여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러 대파(大破)하니 적(敵)의 생환(生還) 자(者)가 겨우 二千八百名에 지나지 못하니 이것을 살수대전(薩水大戰)이라 하며 요동(遼東)에 남아있는 군사(軍士)는 혹(或)은 패(敗)하고 혹(或)은 겁(怯)을 먹고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양제(煬帝)는 이듬해 다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와서 요동성(遼東城)을 쳤으나 거듭 실패(失敗)하고 세 번째 고구려(高句麗)를 치려다가 국내(國內) 반란(叛亂)으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게 망(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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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혼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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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혼전(三國混戰)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麗)에게 밀려서 웅진(熊津)으로 옮긴 후(後) 외(外)로는 고구려(高句麗)의 침략(侵略)이 그치지 아니하고 내(內)로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국력(國力)이 떨치지 못함으로 한 편(便)으로는 멀리 일본(日本)과 친선(親善)하여 그 후원(後援)을 얻으려 하였으며 백제(百濟)의 학자(學者) 왕인(王人)이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가지고 일본(日本)에 들어가서 그 왕자(王子)에게 처음으로 한문(漢文)을 가르쳐주고 불교(佛敎)와 및 건축(建築), 도기(陶器), 양조(釀造), 야금(冶金), 조각(彫刻), 회화(繪畵)등(等)의 기술(技術)을 전(傳)한 것도 모두 이 시대(時代)의 일이었다. 백제(百濟) 성왕(聖王)은 신라(新羅)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를 치려 하더니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의 강성(强盛)함을 두려워하고 또 부질없이 외국(外國)과 싸우기보다 내정(內政)을 닦아서 국력(國力)을 충실(充實)히 하는 것이 옳다하고 백제(百濟)의 청(請)을 거절(拒絶)하고 도리어 고구려(高句麗)와 통(通)함으로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화호(和好)가 깨지고 신라(新羅)를 치다가 왕(王)이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백제(百濟)는 더욱 약(弱)하여 웅진(熊津)에서 지탱(支撑)치 못하고 도읍(都邑)을 사비(泗沘)(지금의 부여(扶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 고쳤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때에 불교(佛敎)가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이 나라 정치(政治)는 군주(君主)와 민중(民衆)의 계급(階級) 차별(差別)이 엄격(嚴格)한 계급제도(階級制度)이며 불교(佛敎)는 상하(上下)의 차별(差別)이 없는 평등사상(平等思想)위에 서는 것이므로 법흥왕(法興王)이 불교(佛敎)를 펴서 정치적(政治的)으로는 군민(君民)의 계급(階級)을 엄립(嚴立)하고 종교적(宗敎的)으로는 군민평등(君民平等)을 주창(主唱)하여 국민(國民)의 일치단결(一致團結)을 도(圖)하니 이 정책(政策)이 민심(民心)단합(團合)에 적지 않은 효과(效果)를 거두었던 것이다.

다음임금 진흥왕(眞興王)은 신라(新羅) 중흥(中興)의 영걸(英傑)이라 처음으로 화랑(花郞)이라는 제도(制度)를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무리를 모아서 오유(娛遊)하면서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을 토론(討論)하기도하고 가무(歌舞)로써 즐기기도 하고 멀리 국내(國內)의 유명(有名)한 산천(山川)을 돌아다니면서 몸도 단련(鍛鍊)하고 인정(人情)도 살피며 그리하는 중에 옳고 바른 사람을 골라서 나라에 천거(薦擧)하여 적당(適當)한 소임(所任)을 맡아보게 하니 당시(當時)에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화랑(花郞) 출신(出身)이었고 이것이 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여 서로 화호(和好)를 맺는 것이 외교정책(外交政策)의 주요(主要)한 하나로 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한편(便)으로는 대륙문화(大陸文化)를 수입(輸入)하고 한편(便)으로는 대국(大國)의 성원(聲援)을 빌어서 적대국(敵對國)을 위압(威壓)하려 함이니 지금(只今)에 외국(外國) 승인(承認)을 받음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자유(自由)로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할 수 있으되 오직 신라(新羅)는 중국(中國)과 교통(交通) 할 길이 없으므로 삼국(三國)의 혼전(混戰) 지대(地帶)인 한강(漢江) 일대지(一帶地)를 점령(占領)하고 서해(西海)로부터 중국(中國)과 교통(交通)하는 것이 국가대계(國家大計)의 주요(主要)한 일부(一部)이었다. 이에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한강(漢江) 지대(地帶)에서 격전(激戰)하고 있는 기회(機會)를 틈타서 먼저 백제군(百濟軍)과 연합(聯合)하여 고구려(高句麗) 군(軍)을 쫓아버리고 다시 백제군(百濟軍)을 반격(反擊)하여 드디어 한주(漢州)(지금의 서울)로부터 인천(仁川) 남양(南陽)에 이르는 지역(地域)을 점유(占有)하니 이로부터 중국(中國)에 통(通)하는 길이 열리고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기초(基礎)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로부터 해마다 대륙(大陸)과의 교통(交通)이 끊이지 아니하고 유학생(遊學生)과 구법승(求法僧)이 수(數)없이 다녔다. 이때 육가야국(六伽耶國) 중(中)에 가락국(駕洛國)은 법흥왕(法興王)때에 이미 신라(新羅)에 합병(合倂)되고 진흥왕(眞興王)때에 대가야국(大伽倻國)을 쳐서 군현(郡縣)을 삼으니 남은 사(四) 가야국(伽倻國)이 차례로 무너져서 낙동강(洛東江) 유역(流域) 지방(地方)이 전부(全部) 신라(新羅)의 땅이 되었고 지금의 가야금(伽倻琴)은 이 가야국(伽倻國)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며 진흥왕(眞興王)은 또한 북(北)으로 땅을 넓혀서 남옥저(南沃沮)의 중부(中部)에까지 이르고 국경(國境) 지방(地方)에 순수(巡狩)하여 비(碑)를 세우니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창녕읍(昌寧邑)과 서울의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과 함경남도(咸鏡南道)의 함주군(咸州郡) 황초령(黃草嶺)과 함경남도(咸鏡南道) 이원군(利原郡)의 마운령(摩雲嶺)에 있는 순수비(巡狩碑)가 곧 그것이다.

신라(新羅)의 국세(局勢)가 갑자기 강성(强盛)하여짐을 보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종래(從來)의 세수(世讎)를 버리고 서로 화호(和好)를 맺어서 신라(新羅)에 당(當)하게 되니 신라(新羅)도 형세(形勢)의 위태(危殆)함을 깨닫고 중국대륙(中國大陸)의 힘을 이끌어 올 정책(政策)을 쓰게 되었다.

이때 중국(中國)은 수(隋)나라가 망(亡)하고 당(唐)나라가 대신(代身)하고 그 임금 태종(太宗)은 유명(有名)한 영왕(英王)이다. 당태종(唐太宗)은 북(北)으로 돌궐(突闕)(터키)을 무찌르고 서(西)로 토번(吐藩)(티베트)과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평정(平定)하고 남방(南方)의 여러 나라도 조공(朝貢)하게되어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였다고 생각되었으나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高句麗)만이 그에게 굴복(屈伏)하지 아니함으로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때 (檀紀 二千九百七十七年)에 스스로 군사(軍士) 삼십만(三十萬)을 거느리고 風雨같이 몰려와서 이듬해 四月에 이미 요하(遼河)를 건넜고 이때 고구려(高句麗)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국정(國政)을 잡고 굳게 지키었다. 당태종(唐太宗)은 요동성(遼東城)과 백암성(白岩城)을 빼았은 후(後) 안시성(安市城)을 포위(包圍)하고 수개월(數個月)을 싸웠으나 마침내 떨어뜨리지 못하던 중(中) 고구려(高句麗) 장수(將帥)의 화살이 당태종(唐太宗)의 눈을 마쳤으므로 당병(唐兵)은 전의(戰意)를 잃고 또 가을철이 되어 찬바람이 불어오고 양식(糧食)까지 다하게 되었다. 이에 당태종(唐太宗)은 싸움을 단염(斷念)하고 도로 돌아가는데 험로(險路)와 풍설(風雪)에 인마(人馬)의 희생(犧牲)이 길에 가득하였고 그 후(後) 수차(數次)로 군사(軍士)를 보내어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역시(亦是) 고구려(高句麗)의 맹렬(猛烈)한 반격(反擊)으로 실패(失敗)하고 돌아갔다.

고구려(高句麗)와 대륙(大陸)의 세력(勢力)이 반세기(半世紀)를 두고 겨룬 그 사이에 신라(新羅)의 힘이 더욱 커지고 그 때에 또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의 두 영걸(英傑)이 나서 하나는 군사(軍事)로 하나는 외교(外交)로 대(大) 신라(新羅)를 세우기에 힘을 다하였다. 백제(百濟)는 성왕(聖王)이 전사(戰死)한 원수(怨讐)를 기어(期於)히 갚으려하여 자주 군사(軍士)를 내어 신라(新羅)를 치고 고구려(高句麗)가 또한 신라(新羅)의 대륙(大陸)의 힘을 이끄는 것을 미워하여 압력(壓力)을 가(加)하니 신라(新羅)는 김춘추(金春秋)를 당(唐)나라에 보내어 구원(救援)을 청(請)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 죽은 후(後) 그 아들 고종(高宗)은 어버이의 뜻을 이어 항상(恒常) 동방(東方)을 판도내(版圖內)에 넣으려 하던 차(次)에 신라(新羅)의 청병(請兵)이 있으므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회(好機會)라 하여 드디어 백제(百濟)를 칠 군사(軍士)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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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한통일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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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의 삼한통일(三韓統一)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할 무렵에 신라(新羅) 왕(王)이 승하(昇遐)하고 김춘추(金春秋) 알천(閼川) 두 사람이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할 후보(候補)자(者)가 되었는데 이인(二人)이 서로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하다가 춘추(春秋)가 왕(王)이 되니 이가 곧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이때 백제(百濟)는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민생(民生)은 도탄(塗炭)에 빠지고 여러 번 신라(新羅)를 치다가 번번이 패(敗)하니 국세(國勢)가 위급(危急)하던 차 당(唐)나라 군사(軍士)가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이 장군(將軍)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백제(百濟) 장군(將軍) 계백(階伯)은 결사군(決死軍) 오천명(五千名)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아가 김유신(金庾信) 군(軍)을 맞아 용감(勇敢)히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하여 마침내 패(敗)하여 전사(戰死)하고 사비성(泗泌城)이 나당(羅唐) 연합군(聯合軍)에게 떨어지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이 항복(降服)하니 이로써 백제(百濟)는 三十一王 六百七十八年에 亡하고 (단기 二千九百九十三年) 지금 부여(扶餘) 금강안(錦江岸)의 낙화암(落花岩)은 당시(當時) 궁녀(宮女)들이 도망(逃亡)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애화(哀話)를 남긴 곳이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은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당(唐)나라의 근본(根本) 정책(政策)에 의(依)하여 그 군사(軍士)를 옮겨서 신라(新羅)를 치려하였다. 원래(原來) 외국(外國)의 군대(軍隊)를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하는 데는 마침내 그 군대(軍隊)의 침박(侵撲)을 받는 것이 고금(古今) 역사(歷史)의 통례(通例)라 무열왕(武烈王)과 김유신(金庾信)은 일직부터 외군(外軍) 이용(利用)의 위험성(危險性)이 있음을 잘알고 또 당(唐)나라의 야심(野心)을 이미 간파(看破)한 터이라 한편(便)으로 백제(百濟)에 출병(出兵)하면서 한편(便)으로 국내(國內)를 굳게 지키니 소정방(蘇定方)이 그 기미(機微)를 알고 감(敢)히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김유신(金庾信)으로써 명장(名將)이라고 칭(稱)하는 소이(所以)이오 후세(後世)에 자국내(自國內)를 텅텅 비워 놓고 외군(外軍)을 이끌어다가 이용(利用)한다는 것은 가장 우매(愚昧)한 것이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등(等) 오(五) 도독부(都督附)를 두었는데 백제(百濟) 유민(遺民)들의 광복운동(光復運動)으로 말미암아 당(唐)나라의 군정(軍政)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왕족(王族) 복신(福信)이 승(僧) 도침(道琛)과 더불어 지금 한산(韓山)부근(附近)인 주류성(周留城)에서 군사(軍士)를 일으켜 일본(日本)에 가 있는 왕자(王子) 풍(豊)을 세워 임금을 삼고 고구려(高句麗)와 일본(日本)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여 한동안 그 기세(氣勢)가 떨치더니 나중에 내부(內部)의 세력(勢力) 다툼으로 말미암아 복신(福信)이 도침(道琛)을 죽이고 풍왕(豊王)이 또 복신(福信)을 죽여서 마침내 모두가 무너지고 말았다.

당(唐)나라는 백제(百濟)를 멸(滅)한 뒤에 다시 고구려(高句麗)를 칠 준비(準備)를 시작(始作)하였다. 이때 고구려(高句麗)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고 그 아들 남생(男生)이 정권(政權)을 잡았는데 가족(家族)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겨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우 정사(淨士)는 十二城으로써 신라(新羅)에 가서 붙고 남생(男生) 그 아우 남달(男達)이 서로 시기(猜忌)하여 싸움이 일어나더니 남생(男生)은 당(唐)나라에 항복(降服)하여 본국(本國)의 군사기밀(軍事機密)을 일일이 고(告)하였다. 당(唐)나라 임금 고종(高宗)은 어버이 태종(太宗)의 뜻을 이어 육차(六次)나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으로 평생(平生)의 한(恨)으로 여기던 터이라 장군 이적(李勣)을 시켜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로 쳐들어 가게하고 이에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도 군사(軍士)와 식량(食糧)을 내어 당군(唐軍)을 도왔다. 고구려(高句麗)는 나라 일이 어지러운 데에 흉년(凶年)이 겹 들여서 매우 곤경(困境)에 빠졌으나 그래도 二年동안이나 지탱(支撑)하다가 마침내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되니 (단기 三千一年) 백제(百濟)가 망(亡)한 후(後) 팔년(八年)만이오 그 역연수(歷年數)는 졸본(卒本) 부여(扶餘) 건국(建國)으로부터는 팔백(八百) 여년(餘年)이오 주몽(朱夢)으로부터는 二十八王 七百五年으로 망(亡)하였다.

당(唐)나라는 평양(平壤)에 동도호부(東都護府)를 두고 고구려(高句麗) 고지(故地)를 구(九) 도독부(都督府)로 나누고 고구려(高句麗) 백성(百姓)을 많이 중국(中國)으로 옮겨갔다.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 일변령(釰弁令)은 왕족안승(王族安勝)을 받들어 광복운동(光復運動)을 일으키고 신라(新羅)가 또 이를 도와서 당(唐)나라에 대항(對抗)하였음으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마침내 요동(遼東)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승(安勝)이 일변령(釰弁令)을 죽여서 광복운동(光復運動)은 중심(中心)을 잃어버리고 안승(安勝)은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처음에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에 청병(請兵)하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칠 때에는 그 토지(土地)를 신라(新羅)가 통일(統一)할 생각이었으나 두 나라가 망(亡)한 후(後)에 당(唐)나라가 그 땅을 모두 점령(占領)하고 신라(新羅)는 도리어 당(唐)나라의 위협(威脅)을 받게 되었다.문무왕(文武王)은 두 나라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을 도와서 당(唐)나라와 싸우게 하더니 마침내 당(唐)나라와 직접(直接) 싸우기로 결정(決定)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 이년후(二年後)부터 칠년(七年)동안 싸움을 계속(繼續)하던 끝에 실력(實力)으로 당군(唐軍)을 몰아내고 대동강(大洞江) 이남(以南)의 땅을 찾아서 비로소 삼한(三韓) 통일(統一)의 업(業)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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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문화와 경제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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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

 

삼국(三國)에는 국문(國文)이 없고 중국(中國)의 한문(漢文)을 수입(輸入)하여 썼으므로 일부(一部) 귀족계급(貴族階級)은 그것을 이용(利用)할 수 있었으나 일반(一般)백성(百姓)은 아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고 한문자(漢文字)가 국어(國語)에 맞지 않음으로 일을 기록(記錄)할 때에는 한자(漢字)의 음(音)과 훈(訓)을 빌어서 「밝은달」을 「明期月」이라는 等으로 썼으니 新羅의 향가(鄕歌)가 그 예(例)이다. 신라(新羅)가 삼한통일(三韓統一)뒤에 오륙백년(五六百年)의 전화(戰禍)로부터 비로소 해방(解放)되어 당(唐)나라로 들어가는 유학생(遊學生)이 해마다 늘어가고 성당(盛唐)의 찬란(燦爛)한 문물(文物)을 부지런히 받아들이는 동시(同時)에 한문(漢文) 열(熱)도 상당(相當)히 높아졌다. 그리하여 한문학자(漢文學者) 설총(薛聰)은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어 경서(經書)를 해석(解釋)하여 생도(生徒)를 가르치고 종전(從前)에는 지명(地名) 같은 것이 모두 우리 나라 말로 되어 있더니,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에 모든 지명(地名)을 중국식(中國式)으로 고치니 「沙熱伊 고을」을 「淸風縣」으로 고침과 같음이오 이 무렵을 前後하여 人名도 차츰 中國式 姓名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의 옛 모습이 漸次 사라지고 中國을 崇拜하는 風習이 생겨서 사대사상(事大思想)이 국민(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를 박게 되었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국민사상(國民思想)의 일대(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불교(佛敎)는 아국(我國)에 들어온 후(後) 건축(建築), 조각(彫刻), 야금(冶金), 회화(繪畵) 등(等) 기술(技術)을 전래(傳來) 하여 불교(佛敎) 광포(廣布)와 함께 널리 보급(普及)되었으나 끊임없는 전란(戰亂)으로 인(因)하여 그 발생(發生)하려던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더니 신라(新羅)의 통일기(統一期)를 전후(前後)하여 힘있게 발전(發展)하였으니 지금 남아있는 황룡사(皇龍寺)의 구층탑(九層塔), 첨성대(瞻星臺), 불국사(佛國寺), 석굴암(石窟庵) 같은 것이 모두 그 시대(時代)의 만든 유물(遺物)이다.

토지제도(土地制度)는 삼국(三國) 정립(鼎立) 당시(當時)에는 유족(遺族)들이 대 면적(大 面積)을 차지하고 노예(奴隸)를 부려서 경작(耕作)하고 일반(一般)농민(農民)은 각기(各其) 일정(一定)한 면적(面積)을 가지고 농사(農事)지으며 이때는 지(地)가 많고 인구(人口)가 비교적(比較的) 적고 유식민(遊食民)을 구(驅)하여 강제(强制)로 황지(荒地)를 개척(開拓)하고 농업(農業)에 종사(從事)케 하였다.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사회(社會)가 안정(安定)되었으므로 비로소 당(唐)나라의 균전제(均田制)를 배워서 정전제(丁田制)를 만들고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십오세(十五歲)부터 장정(壯丁)이라 하여 국가(國家)로부터 분배(分配)받고 육십세(六十歲)에 국가(國家)에 반환(返還)하며 공신(功臣)유족(遺族)들에게 사전(賜田)을 주어 토지(土地)의 수세권(收稅權)을 가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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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건국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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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의 건국(建國)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하고 일변령(釰弁令)등(等)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이 실패(失敗)에 돌아감에 그 백성(百姓)들이 혹(或)은 당(唐)나라에 강제(强制)로 옮겨지고 혹(或)은 신라(新羅)로 망입(亡入)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북방(北方)으로 유입(流入)하였다. 이때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말갈족(靺鞨族)이 살고 칠부(七部)로 나뉘어 있었으나 그 중(中)에 가장 드러난 것은 송화강(松花江) 기슭에 속말말갈(粟末靺鞨)과 흑룡강(黑龍江)가에 사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두 부족(部族)이 있고 고구려(高句麗) 당시(當時)에는 이들 말갈(靺鞨)은 고구려(高句麗)의 속국(屬國)이 되어 있었으나 고구려(高句麗)의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된 뒤에 북방(北方)의 모든 성(城)이 당(唐)나라에 점령(占領)된 것이 아니어서 말갈(靺鞨)사람들이 그러한 성(城)에 웅거(雄據)하고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들이 이에 합세(合勢)하였다. 그러한지 삼십년(三十年) 동안에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여러 번 당병(唐兵)과 싸워서 크게 이기니 당병(唐兵)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한지 삼십일년(三十一年)만에 새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진국(震國)이라 하니, 그 후(後)에 발해(渤海)로 고치니 이가 곧 발해(渤海) 태조(太祖)이다. (檀紀 三千三十二年)

발해(渤海)는 서(西)로 당(唐)나라와 서역(西域)의 문화(文化)를 받아들이고 동(東)으로 일본(日本)과 무역(貿易)하여 해적(海賊)을 충동(衝動)시켜서 당(唐)나라의 산동반도(山東半島)를 친일도 있었다. 처음에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에 도읍(都邑)하더니 후세(後世)에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로 옮기니 이는 길림성(吉林城) 영안현(寧安縣)에 있는 동경성(東京城)이라 하며 지금도 그때의 그 성(城)자리가 남아 있어서 그 주위(周圍)가 거의 사십리(四十里)나 된다.

이때의 강토(疆土)는 북(北)은 흑룡강(黑龍江)에 이르고 서(西)로 요해(遼海)에 미치고 남(南)은 대동강(大洞江)과 원산(元山) 등지(等地)로써 신라(新羅)와 이웃하고 동(東)은 대해(大海)에 닿으니 중국(中國)사람들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稱)하였으며 발해(渤海)의 건국(建國)과 신라(新羅)의 통일기(統一期)가 거의 연대(年代)를 같이 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은 신라(新羅)를 남국(南國) 또는 남조(南朝)라 하고 발해(渤海)를 북국(北國) 또는 북조(北朝)라 하여 이 시대(時代)를 우리 나라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라고 한다.

발해(渤海)는 만주(滿洲)의 넓은 벌판을 차지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전통(傳統)을 물려받으며 성당(盛唐)의 문화(文化)를 받아들여서 산업(産業)과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발해(渤海)에는 부여족(扶餘族)과 말갈족(靺鞨族)이 합쳐서 나라를 세웠으되 어찌한 때문인지 신라(新羅)와는 교섭(交涉)이 거의 없었고 또 말갈족(靺鞨族)은 그 뒤에 오래 남아서 여진족(女眞族)이 되었으되 부여족(扶餘族)은 전연(全然) 만주(滿洲)에 남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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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발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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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발전(海上發展)

 

신라(新羅)는 북(北)쪽의 일면(一面)이 대륙(大陸)에 접(接)할뿐이오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려있는 반도국(半島國)이다. 국민(國民)들은 해상(海上)에서의 활동(活動)이 자못 활발(活潑)하여 수(數)많은 유학생(遊學生)과 상인(商人)들이 당(唐)나라에 내왕(來往)하였고 따라서 당(唐)나라의 해안(海岸)지방(地方)에는 신라(新羅)사람들이 교거(僑居)하는 신라방(新羅坊)이 처처(處處)에 생겼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통일(統一)이후(以後) 더욱 현저(顯著)하여 그 중(中)에서 한 예(例)를 들면 지금의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남(東南)에 있는 석성만(石城灣) 부근(附近)인 등주(登州) 문등현(文登縣) 청령향(淸寧鄕) 적산(赤山)은 신라(新羅)에서 당(唐)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그 곳에서 신라(新羅)사람들이 세운 법화원(法花院)이라는 사찰(寺刹)은 쌀 백석(百石)지기의 장전(庄田)이 있었으며 설법(說法)이 열릴 때에는 신라(新羅)사람들의 남녀 수백명(數百名)이 모였다. 당시(當時)는 일본(日本)사람들이 당(唐)나라에 내왕(來往)하는 것도 신라(新羅)사람들의 힘을 많이 빌렸으니 신문왕(神文王)때에는 당(唐)나라에 가는 일본(日本)사람들의 학생(學生)과 구법승(求法僧)이 많이 신라(新羅)의 배를 타고 다녔으며 경덕왕(景德王)때에는 일본(日本)에가는 당(唐)나라 사신(使臣)이 신라(新羅)의 배를 이용(利用)하였고 혜태왕(惠泰王)때에는 당(唐)나라에 가있는 일본(日本)사람들이 그 본국(本國)과의 통신(通信)을 신라(新羅)의 선편(船便)으로 하였다. 그러나 신라(新羅)의 말엽(末葉)에 이르러 국세(國勢)가 떨치지 못하고 때마침 당(唐)나라도 쇠약(衰弱)해지니 황해(黃海)위에 해적(海賊)이 들끓었고 이는 수백년(數百年)동안 평화(平和)롭게 계속(繼續)되던 양국(兩國)사이의 교통(交通)에 큰 위협(威脅)이 될뿐더러 심지어(甚至於)는 해적(海賊)의 떼가 신라(新羅)사람들을 잡아다가 노비(奴婢)로 팔아먹는 일까지도 있었다. 이때 당(唐)나라에 벼슬살이하던 장보고(張保皐)가 이러한 사실(事實)을 알고 신라(新羅)로 돌아와서 왕(王)에게 아뢰고 스스로 청해진(淸海鎭)(지금의 全羅南道 莞島)) 대사(大使)가되어 군사(軍士) 일만명(一萬名)으로 양해(兩海)의 길목을 지키는 동시(同時) 맹렬(猛烈)한 해상(海上)활동(活動)을 시작(始作)하여 황해(黃海)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掌握)하고 당(唐)나라와 일본(日本)에 무역(貿易)하여 다시금 신라(新羅)의 명성(名聲)이 천하(天下)에 떨쳤다. 그러나 신라(新羅) 조정(朝廷)의 왕위(王位) 다툼의 여파(餘波)가 여기까지 미쳐와서 장보고(張保皐)는 임금이 보낸 자객(刺客)에게 암살(暗殺)을 당(當)하고 빛나던 청해진(淸海鎭)의 막(幕)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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