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의 몰락과 정신문명의 발달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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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質文明의 沒落과 精神文明의 發達

 

사람의 生理가 時運을 따라서 變化하므로 사람의 學問의 傾向도 또한 時運을 따라서 變化하는 것이다. 萬物의 生生에는 모두 生命과 神의 二元이 있는데, 生命의 運動은 無形에서 有形한 形質이 生하여 物質이 되고, 神은 無形하여 有形한 物質속에 갈무리하여 있고 사람의 天性 心情等 精神은 形質속에 갈무리하여 있는 神作用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形質이 자라기는 物質로써 하고 精神이 여물기는 神作用으로써하며, 또 사람은 자라는 일만을 自由意志에 依하여 行하고 生하고 여무는 일은 神作用에 依하여 行하는 것이므로 그 形質이 자라기 爲하여 物質生活을 營爲함에는 사람마다 그 個體의 自由에 依하여 行하는 것이다. 動物들은 天然物에 對하여 아무런 加工도 없이 그대로 먹고살지만 사람은 반드시 天然物에 人工을 加하여 그 所用하는 物資를 創製하는 것이니 이가 人工이 天工을 代成함이오 이는 사람에게 物을 創製하는 才能과 自由가 있는 까닭이다.

지금은 長의 時運이오 長의 時運은 形質의 자라는 때이므로 사람들은 自體가 자라기 爲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硏究하기에 心力을 다하고 있는데, 長의 時運의 初期에는 사람들의 生活이 單純하고 그 精神作用이 또한 어리므로 그 生活에 必要한 事物에 대한 硏究가 部分的으로는 進步와 發明이 깊지 아니하였으나 그 原理를 體系的으로 짜 놓은 學問은 없었으며, 사람들의 精神이 漸次 자람을 따라서 비로소 事物을 硏究하는 여러 가지 方法이 案出되고 그中에서도 特히 分析과 實驗에 依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아내는 學問이 생기니 이가 곧 科學이다. 科學이라 함은 分析과 實驗에 依하여 物質의 組織運行되는 原理를 證明하는 學問이오 分析이라 함은 草木의 자랄 때에 枝葉이 漸漸 나뉘움과 같은 것이니 科字도 草木이 자라서 가지가 나뉘운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科學은 長의 時運에 사람들이 自體가 자라기 爲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案出하여 系統的으로 그 原理의 體系를 세운 學問이다. 長의 時運의 初期에는 비록 科學이라는 學問은 없었으나 사람들이 人工으로써 天工을 代行하여 그 生活資料를 創製하여 살아온 것이오 이들 創製物은 賢哲한 先知者들이 나와서 發明發見한 것이니 이는 科學以前의 人工이나 그 以後의 人工이나가 모두 그 때와 環境에 따라서 사람의 精神에서 案出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에 온 世人이 科學의 偉大함을 敬歎하여 科學萬能時代가 되고 있으나 이것은 決코 科學의 偉大함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의 精神發達의 偉大함에 基因한 것이다. 사람의 精神에는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 하는 發展이 있고 長의 時運의 사람의 精神은 時運과 함께 자라고 있으므로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能히 事物을 分析 實驗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인 科學이라는 學問을 發見한 것이니 그러므로 科學은 사람의 精神의 자라는 過程에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硏究하는 方法으로서 案出된 産物에 不過한 것이오 이는 사람의 精神이 偉大하여 그 자라는 때에 物質文明을 建設하기 爲하여 科學이라는 한 用具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科學은 長의 時運의 人類社會에 燦爛한 物質文明을 建設한 功績은 적지 아니하나 거기에는 스스로 一定한 限度가 있고 그 限度에 達하면 그 以上 더 자라지 못하고 도리어 病的症狀이 나타나는 것이다.

萬物에는 物質과 精神의 兩面이 있어 生長成의 運動을 行하고 있는데 사람은 精神이 善하기만 하면 無限性을 가지고 生하고 자라고 여물어서 神과 相通하는 것이지만 物質로 된 形質은 자라기만하고 여물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形質이 자람을 極하면 여무는 것이 아니라 老衰하여 消滅하는 길로 向하는 까닭이다. 이것을 草木으로써 보면 여름에 草木의 枝葉이 繁盛하여 靑綠이 滿地하면 그 榮華한 景致는 可謂 絶勝이다. 그러나 여름과 가을의 交代하는 어느 하루아침에 이르러 氣候의 變化로 因하여 秋風이 일어나면 이제까지 繁榮을 極하던 枝葉의 榮華는 一時에 枯落하고 여문 열매만이 가지의 사이에 남게 되는 것이니, 枝葉의 榮華는 사람의 形質의 象이오 여문 열매는 사람의 여문 精神의 象이다. 人類社會는 宇宙의 時運에 應하여 長의 時運과 成의 時運이 있으므로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에는 이제까지의 物質文明은 사람의 形質과 같이 또한 草木의 枝葉과 같이 반드시 자람을 停止하고 老衰枯落하는 것이오 그 뒤에는 사람의 여문 精神이 神作用을 行함과 같이 또한 草木의 열매가 여물어서 世世繼承하는 作用을 行함과 같이 반드시 한 次元 더 높은 神作用의 文明이 發生하는 것이다.

그러면 科學은 그 자람을 極하고 한 次元 높은 새 文明을 낳을 수가 없는가 하면, 科學은 分析實驗하는 方法을 通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아내는 學問이니 形而下學的인 物質의 面은 이러한 方法으로써 硏究할 수가 있으나 分析實驗의 領域外에 있는 形而上的 事物 例컨대 萬物의 씨는 처음에 어떻게 생기고 또 어떻게 여물어서 宇宙創造 當時에 생겨난 씨가 지금까지 世世繼承하여 傳來하는가 하는 原理라든가 萬物에는 그 生長成하는 自然法則과 整然不亂한 秩序가 어떻게 생겨서 各自가 獨立的으로 生成하면서 또한 全體가 有機的으로 함께 生成하고 있는가 하는 作用이라든가에 對하여는 一言半句의 答案도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科學은 사람이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기 爲하여 案出된 學問이므로 科學으로서는 物質의 자라는 原理밖에는 硏究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形質의 자라는 동안에만 自由意志를 行使하고 科學은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案出된 學問이오 사람의 精神의 여무는 것은 神作用에 依하여 行하는 것이므로 科學으로써 事物을 硏究함에는 오직 形質의 자라는 範圍에 그치고 그 以上의 여무는 領域에 對하여는 거의 無知에 가까운 것이다. 더욱이 萬物은 모두 宇宙神에서 創造되고 神을 中心으로하여 그자라는 때는 遠心運動을 行하여 形質이 자라고, 그 여무는 때는 向心運動을 行하여 精神이 여물면서 神에게로 돌아가는 것인데, 科學은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는 物質學으로서 遠心運動을 行하고 있으며, 遠心運動을 行하는 者는 神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므로 科學은 發達하면 發達할수록 神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내종에는 全然 神을 忘却하게 되는 것이니, 이 遠心運動에서 向心運動으로 넘어가는 轉換點이 곧 科學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限度로서 한次元 더 높은 文明을 誕生할 수 없는 所以이다.

萬物에는 生長成의 運動이 있어 자라면 반드시 여물기로 되어 있으되 形質과 같은 것은 자람이 極하면 老衰하여 消滅의 길로 向하는데 이消滅의 길로 걸어가는 過程에 病的症狀이 일어나는 것이니, 老人들의 老衰가 곧 이 病의 症狀이다. 科學文明은 物質文明으로서 人間社會의 道德이나 善惡같은 것은 全然關涉하지 아니하고 오직 物質生活의 一層向上을 爲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人類生活의 向上을 爲하여 案出한 科學이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原子武器를 만들어 가지고 瞬息間에 이 地球도 破壞할 수 있을만치 橫暴하여 人類의 生存을 威脅하고 있으니, 이는 科學이 老衰病에 걸린 症狀이다.

人口의 生産은 사람의 形質의 자라는 象이오 人類의 生生運動은 반드시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여 陰陽이 調和한 然後에 過度한 것도 없고 不及한 것도 없고 適當히 生하고 適當히 자라는 것인데, 長의 時運에 사람들의 氣가 모두 外向하고 그 崇尙하는 學問인 科學이 또한 자라는 方面으로 突進하여 發散하는 것만을 알고 內收할 줄을 알지 못하므로 形質이 過度히 자라서 人口의 生産이 急激히 膨脹하여 도리어 人類自體의 生活을 威脅하고 있으니, 이는 形質이 너무 자라서 老衰病에 걸린 症狀이다. 原子武器의 橫暴와 人口生産의 過剩은 科學이 形質의 자라는 일에만 偏向하고 여무는 原理를 알지 못하는 所致로 생긴 病的症狀이며, 이 病은 科學속에는 아무런 治療方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精神에는 生長成의 發展이 있는지라, 長의 時運에는 形質의 자라는 原理의 學問인 科學을 發明하여 燦爛한 物質文明을 建設한 것이오 科學에는 자라는 原理만 있고 여무는 原理가 없으므로 老衰하여 病的症狀이 생기고 있지만, 사람의 精神은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에는 여물기 爲하여 자라기를 求하지 아니하므로 時運으로 더불어 함께 여물려고 하는 人類에게는 科學은 쓸 곳이 없는 묵은 學問이 되는 것이오 또 여문다는 일은 자라는 原理의 學問인 科學에게는 全然 想像조차 不到하는 未知의 境域이다. 그러므로 여물기를 求하는 사람에게는 여무는 原理의 學問이 必要한 것이오 이 學問은 곧 精神을 여물게 하는 神作用의 原理인 神學이다. 成의 時運에는 오직 神學만이 사람의 精神을 여물게 하여 過度히 자란 科學의 病的症狀을 克服하고 陰陽의 調和作用으로써 自然스럽게 人口의 生産을 調節하여 人類社會에 物質文明보다 한 次元 더 높은 精神文明을 建設하는 것이다.

神學에 依하여 精神文明이 建設되면 사람들은 精神이 여물어서 지난날에 形質의 자람을 爲主하던 物質文明을 다시 追求하는 者가 없어서, 物質文明은 秋風이 일어난 뒤의 枝葉과 같이 枯落하고 神學에 依한 精神文明이 枯落한 枝葉사이의 열매와 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神學이라 함은 어떠한 것인가 하면 佛敎의佛經 儒敎의易學 基督敎의聖經과 같이 宇宙神과 사람과의 關係를 말한 學問이 곧 神學이오 神學에 依한 精神文明이라 함은 從來의 科學은 사람의 精神이 모두 外向하여 外的知識을 求하므로써 事物에 對한 知識은 廣汎하게 얻을 수가 있었으나 自身의 精神은 昏暗하여 靈的으로는 하나의 無知한 人間이 되고 있는 것인데, 神學은 精神이 內向하여 스스로 內明하므로 神作用이 生하고 神과 相和하여 肉眼으로 볼 수 없는 事物도 能히 靈眼으로써 볼 수가 있고, 肉耳로써 들을 수 없는 일도 能히 靈耳로써 들을 수가 있고 未來의 事物을 豫觀할 수도 있는 것이니, 이가 神學에 依한 精神文明이다.

長의 時運에는 사람들이 自由意志로써 形質의 자람을 爲하여 生長競爭을 行하고 그 까닭에 形質의 자라는 原理의 學問인 科學을 至上 學問으로 삼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精神의 光明이 모두 形質에 掩蔽되어 昏暗하게 된 것이오, 成의 時運에는 사람들이 神으로부터 善惡에 對한 審判을 받고 비로소 精神이 內向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昭明하게 하는 것이므로 사람들의 靈이 通明하는 것이며, 이 長과 成의 時運이 바뀌우는 때에 지금까지 繁榮을 자랑하던 科學文明이 물러가고 한 次元더 높은 神學文明이 오는 것이다. 이것을 易理로써 보면 人類의 科學時代의 生活은 蠱의 幼虫生活과 같고 神學時代의 生活은 蠱의 幼虫이 成虫인 蝶으로 化한 生活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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