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의 파당대대 (한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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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의 派黨對待

 

이조(李朝)의 파당대대(派黨對待)의 투쟁(鬪爭)은 멀리 세조(世祖)가 단종(端宗)과 육신(六臣)을 죽이고 탈위(奪位)한데서 발단(發端)하니, 당시(當時) 유신파(儒臣派)의 분노(憤怒)는 主로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를 향(向)하여 발사(發射)하고 성종(成宗)일대중(一代中)의 정치투쟁(政治鬪爭)은 전(專)혀 유신파(儒臣派)의 대(對)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 공격(攻擊)이다. 이 투쟁(鬪爭)이 연산시대(燕山時代)에 이르러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가 유신파(儒臣派)를 일망타진(一網打盡)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양성(釀成)하고 중종반정후(中宗反正後)에 조광조(趙光祖)등(等) 유신파(儒臣派)가 다시 등장(登場)하여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와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을 전개(展開)하더니 마침내 공신(功臣)삭탈문제(削奪問題)로 인(因)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보게 되고 중종(中宗)말년(末年)에 유신파(儒臣派)가 다시 거두(擧頭)하더니 명종(明宗)초년(初年)에 또 척리파(戚里派) 윤씨(尹氏)와 충돌(衝突)이 생(生)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만난 것이다. 선조(宣祖)이후(以後)에 비로소 유신파(儒臣派)의 천하(天下)가 되어 오랜동안의 숙분(宿憤)을 쾌설(快雪)하기는 하나 아직 척리파(戚里派)에 대(對)한 숙감(宿憾)이 풀리지 아니하던중(中) 사적(私的)으로는『김효원(金孝元)』대(對)『심의겸(沈義謙)』 공적(公的)으로는 유신파(儒臣派)대(對) 척리파(戚里派)의 대(對) 결전(決戰)이 일어나서 드디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양당(兩黨)을 생(生)한 것이다. 그러나 세조(世祖)이후(以後) 백수십년간(百數十年間)의 정쟁(政爭)은 서로 대대작용(對待作用)을 행(行)하여 정쟁(政爭)의 의의(意義)가 있고 따라서 그 운동(運動)도 활기(活氣)를 띤 것이러니 동서분당(東西分黨)이후(以後)에 척리파(戚里派)는 다시 지평선(地平線) 상(上)에 올라오지 못하고 유신(儒臣)일색(一色)으로 정치(政治)를 운영(運營)하니, 이 때로 부터의 정쟁(政爭)은 종래(從來)와 같은 투쟁(鬪爭)대상(對象)이 있는 것도 아니오, 또 현실(現實)과 이상(理想)의 대립(對立)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정쟁(政爭)의 의의(意義)를 전연(全然) 상실(喪失)하니, 의의(意義)없는 정쟁(政爭)은 다만 권력(權力)과 모략(謀略)으로써 상대방(相對方)을 공파(攻破)하고 정권(政權)을 잡는 것이 유일(唯一)한 목표(目標)이라, 그러므로 동인(東人)은 마침내 서인(西人)을 구축(驅逐)하고 독천하(獨天下)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독천하(獨天下)는 또한 대대(對待)의 대상(對象)이 없는지라, 이에 자체(自體)분열(分裂)에 의(依)한 생식작용(生殖作用)을 행(行)하여 동인(東人)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파(分派)되고 북인(北人)은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分裂)된 것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以後)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조정(朝廷)에 공립(共立)하더니, 서인(西人)은 남인(南人)을 타도(打倒)한 후(後)에 다시 자체(自體)분열(分裂)에 의(依)하여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을 생(生)하여 대대작용(對待作用)을 행(行)한 것이다. 영조(英祖)이후(以後)에 소위(所謂)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당쟁(黨爭)의 휴전(休戰)을 도모(圖謀)하나 여의(如意)치 못하고, 주(主)로 노론(老論)이 용사(用事)하여 거의 독천하(獨天下)가 되더니, 이에 무당무파(無黨無派)를 표방(標榜)한 속칭(俗稱) 탕평당(蕩平黨)이 새로 출현(出現)하여 홍씨(洪氏)를 중심(中心)으로한 척리파(戚里派)가 재차(再次) 등장(登場)하니, 이 세력(勢力)은 비록 오래지 아니하여 제거(除去)된 것이나 척리파(戚里派)의 재등장(再登場)의 뿌리는 이미 부식(扶植)되고, 역사(歷史)는 여기서 일대환전(一大圜轉)하여 이래(爾來) 근백년간(近百年間) 왈조(曰趙), 왈김(曰金), 왈민(曰閔), 등(等) 척리(戚里)천하(天下)를 현출(現出)하고 유신파(儒臣派)는 다시 거두(擧頭)치 못하며, 척리(戚里)천하(天下)는 대대작용(對待作用)을 행(行)치 못하고 운동(運動)이 지식(止息)하여 퇴폐(頹廢)와 부패(腐敗)의 일로(一路)를 향진(向進)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조(李朝)의 학술(學術)은 정주학(程朱學)이 독세력(獨勢力)을 차지하여 대대작용(對待作用)이 없고 사상계(思想界)의 침체(沈滯)를 초래(招來)하더니, 여러 차례의 정쟁(政爭)에서 패배(敗北)를 당(當)한 남인(南人)들은 새로운 방면(方面)에 진로(進路)를 개척(開拓)하여, 국리(國利)민생(民生)에 실천(實踐)할 수 있는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즉(卽) 실학(實學)으로써 종래(從來)에 공리공론(空理空論)에 흐르고 있는 소위(所謂) 성리학(性理學)과 대대(對待)하니, 정치(政治)와 사회(社會)가 천부만패(千腐萬敗)한 이조(李朝)말기(末期)에 있어서 실학(實學)의 발생(發生)은 실(實)로 유일(唯一)한 생기(生氣)의 약동(躍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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