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의 발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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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

 

백제(百濟)는 건국(建國) 후(後) 점차(漸次)로 마한(馬韓)의 땅을 탈취(奪取)하더니 불과(不過) 이십(二十) 여년(餘年)에 전역(全域)을 통합(統合)하고 반도(半島) 서남부(西南部)의 일대국(一大國)을 형성(形成)하였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농산(農産)이 많고 일면(一面)이 대해(大海)인 관계(關係)로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이 발달(發達)하여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무역(貿易)하고 수군(水軍)이 또한 정예(精銳)하여 한때는 중국(中國)의 동해안(東海岸) 일부(一部)를 점령(占領)한 일도 있었다.

고구려(高句麗)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내려 온 후(後) 예성강(禮成江)(황해도)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충돌(衝突)이 일어나기 시작(始作)하였다.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는 본시(本是) 형제(兄弟)의 나라이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백제(百濟)를 치다가 전사(戰死)하니 이로부터 양국(兩國)이 세수(世讎)가 맺어져서 전쟁(戰爭)이 연년(連年) 부절(不絶)하더니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이 남하정책(南下政策)을 추진(推進)하여 평양(平壤)에 이도(移都)한 후로 백제(百濟)는 그 압력(壓力)에 눌려서 더 북진(北進)치 못하고 개로왕(盖鹵王)때에는 고구려(高句麗)와 싸우다가 왕(王)은 전사(戰死)하고 전군(全軍)이 복멸(覆滅)하고 한강(漢江) 좌우(左右)의 지(地)를 상실(喪失)하고 왕자(王子)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기니 이때가 백제(百濟)의 최대(最大) 수난기(受難期)이었다.

신라(新羅)는 반도(半島)의 동남(東南) 일우(一隅)에 처(處)하여 현군(賢君)이 상속(相續)하고 그 정치(政治)에는 화백(和白)이라는 제도(制度)가 있어 임금을 선거(選擧)하고 다른 중요(重要)한 국사(國事)를 의론(議論)하는데 유족(遺族)들이 모여서 회의(會議)하고 전원(全員)이 찬성(贊成)한 연후(然後)에 결정(決定)함으로 항상(恒常) 국론(國論)이 잘 통일(統一)되고 또 이 나라는 육부족(六部族)의 합의(合意)에 의(依)하여 성립(成立)되었으므로 그 국민(國民)의 부족적(部族的) 단결(團結)이 가장 공고(鞏固)하였으니 이것이 후일(後日) 삼한통일(三韓統一)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었고 이 부족(部族)의 단결력(團結力)은 전전이사(轉轉移徙)하여 다니는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는 아국(我國)의 서해안(西海岸)을 끼고 있어서 일직부터 대륙(大陸)과의 교섭(交涉)이 빈번(頻繁)하여 손쉽게 그 문화(文化)를 수입(輸入)할 수 있었고 한문(漢文)도 국초(國初)부터 들어와서 일부(一部) 지식계급(知識階級)사이에 행(行)하였음으로 문화(文化) 정도(程度)의 향상(向上)이 볼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新羅)는 지리적(地理的)으로 중국(中國)과 직접(直接)으로 교통(交通)하지 못하고 주(主)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통(通)하여 간접(間接)으로 대륙(大陸)문화(文化)를 받은 관계(關係)로 문화(文化)의 발달(發達)이 얼마쯤 뒤졌으나 그 대신(代身) 삼한시대(三韓時代)로부터 계속(繼續)하여오는 국유문화(國有文化)를 충분(充分)히 발달(發達)케 하고 그 기초(基礎)위에 대륙문화(大陸文化)를 받아서 세계(世界)에 자랑할만한 신라문화(新羅文化)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불교(佛敎)를 받아들일 때에 있어서도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가장 쉽게 받아왔으나 오직 신라(新羅)는 그 받아들이는 가부(可否)에 대(對)하여 논란(論難)과 비판(批判)이 가장 심각(深刻)하여 어려운 곡절(曲折)을 겪었고 그 뒤에 가장 아름다운 불교문화(佛敎文化)의 꽃이 핀 것으로 보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후세(後世)에 외국문화(外國文化)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깊은 검토(檢討)와 비판(批判)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유문화(國有文化)의 기초(基礎)가 약(弱)한 까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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