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생하는 반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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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생(繼生)하는 반란(叛亂)

 

숙종(肅宗)의 아들 인종(仁宗)은 나이 어리고 그 외조부(外祖父) 이자겸(李資謙)이 권력(權力)을 잡고 스스로 높은 벼슬에 나아가서 국사(國事)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구성(九城) 싸움에 나가서 공(功)을 세우고 돌아온 척준경(拓俊京)을 심복(心腹)으로 부려서 온갖 포학(暴虐)한 일을 다 하였다. 그는 자기(自己)에게 반대(反對)하는 사람을 모조리 방축(放逐)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고자 하여 왕(王)을 죽이려 하니 이것은 목(木) 자(子) 득국(得國) 비결(秘訣)에 인(因)함이라 그러나 자겸(資謙)은 마침내 패(敗)하고 말았다. 이 난리(亂離)에 궁궐(宮闕)이 불타 버리고 서울이 쓸쓸하게 됨에 승(僧) 묘청(妙淸)과 시인(詩人) 정지상(鄭知常) 등(等)을 중심(中心)으로 서경(西京)에 도(都)를 옮기고 임금을 황제(皇帝)라 일컫고 연호(年號)를 세우자는 의견(意見)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정(朝廷)에서는 그 의견(意見)을 반대(反對)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묘청(妙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경(西京)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부개(夫開)라 하니, 인종(仁宗)은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그 이듬해에 평정(平定)하였다.

묘청(妙淸)의 난(亂)에 대(對)하여 옛날 사서(史書)에는 묘청(妙淸)으로써 망탄(妄誕)한 사람이라 하고 그 난(亂)을 일으킨 것은 정권(政權) 다툼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러 학자(學者)들은 묘청(妙淸)으로써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항(對抗)하는 혁명가(革命家)라 하여 시비(是非)가 정(定)치 못하고 있다. 당시(當時)의 시세(時勢)를 보건대 조정(朝廷) 안에는 중국(中國)을 조국(祖國)처럼 여기는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思想)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니 정치가(政治家)중(中)에는 거기에 불만(不滿)을 품은 자(者) 적지 아니하였고 묘청(妙淸)도 그 중(中)의 일인(一人)이었다. 이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혁파(革破)를 주장(主張)함에는 그것을 주장(主張)할만한 인물(人物)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나 묘청(妙淸)은 사실(事實)로 망탄(妄誕)한 사람이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써 왕(王)의 마음을 이끌고 정지상(鄭知常)이 또한 음양설(陰陽說)로써 거기에 부동(附同)하였으며 서경(西京)에 도읍(都邑)을 옮기려 함은 서경(西京)에 묘청(妙淸)의 세력(勢力)이 이미 부식(扶植)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묘청(妙淸)이 진심(眞心)으로 국가(國家)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爲)하는 정인(正人) 지사(志士)가 아니오 다만 세력(勢力) 다툼을 위(爲)한 술책(術策)에 불과(不過)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高麗)는 태조(太祖) 이래(以來)로 우문정책(右文政策)을 쓰고 무인(武人)을 낮추어보게 되어서 무인(武人)들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더니 의종(毅宗)때에 이르러 왕(王)은 본시(本是) 기질(氣質)이 나약(懦弱)하여 근시(近侍)와 문신(文臣)들만을 가까이하고 그들이 또한 왕(王)의 사랑을 믿고 방자(放恣)한 일이 많아서 무신(武臣)들의 감정(感情)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이러한 무신(武臣)들의 불평(不平)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정중부(鄭仲夫) 등(等)이 난(亂)을 일으켜 근시(近侍)와 문신(文臣)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집을 헐어버리고 왕(王)을 몰아내고 왕(王)의 아우를 세우니 이가 명종(明宗)이다. 이 난리(亂離)가 경인년(庚寅年)에 제일차(第一次)로 일어나고 계사년(癸巳年)에 재차(再次) 일어났음으로 이를 경계지란(庚癸之亂)이라 한다. 정중부(鄭仲夫)는 나라의 권세(權勢)를 한 손에 잡고 조정(朝廷)의 중요(重要)한 벼슬에서 외방(外方)의 소임(所任)에 이르기까지 전부(全部) 무신(武臣)이 맡아보게 되었다.

문신(文臣)의 세상(世上)은 비록 무력(無力)하나마 전통(傳統)과 권위(權威)를 세우고 그를 중심(中心)으로 하여금 움직여 나갔지만 무인(武人)의 세상(世上)은 그러한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힘으로 움직였다. 정중부(鄭仲夫)는 권세(權勢)를 잡은지 십년(十年)만에 경대승(慶大升)에게 죽고 대승(大升)은 다행(多幸)이 천명(天命)을 마쳤으나 그때 서울 안 도적(盜賊)은 모두 무신(武臣)의 부하(部下)라고 할 만치 백성(百姓)들의 원성(怨聲)이 적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後)에 장군(將軍) 이의민(李義旼)이 권세(權勢)를 잡고 갖은 포학(暴虐)을 다하여 목(木)자(子) 득국(得國)의 비결(秘訣)을 이용(利用)하여 반역(叛逆)을 도모(圖謀)하더니 최충헌(崔忠獻)이 의민(義旼)을 죽이고 그의 삼족(三族)과 종들까지도 모조리 잡아죽이니 국가(國家)의 모든 권세(權勢)가 충헌(忠獻)에게 돌아갔다. 충헌(忠獻)은 명종(明宗)을 가두고 그 아우를 세우니 이가 신종(神宗)이다. 충헌(忠獻)은 사병(私兵)을 길러서 자기(自己)를 수호(守護)케 하니 그 세력(勢力)이 관군(官軍)보다 억세고 나라의 정치(政治)를 자기 집 도방(都房)에 앉아서 처결(處決)하니 이것을 도방정치(都房政治)라하고 도방정치(都房政治)가 생긴 후(後)로 조정(朝廷)은 빈집이 되고 관군(官軍)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아니하고 그가 권세(權勢)를 잡은 이십사년(二十四年)간(間)에 두 임금을 내치고 내 임금을 세우니 유약(柔弱)한 왕(王)들이 또한 충헌(忠獻)의 비위(脾胃)를 맞추는 수밖에 다른 도리(道理)가 없었다.

무신(武臣)의 난리(亂離)를 거쳐서 그들의 발호(跋扈)로 유족사회(遺族社會)의 묵은 전통(傳統)이 무너지고 사회(社會)가 힘으로 움직이게 되자 이때까지 하층(下層)에서 눌려 살던 농민(農民)과 노예(奴隸)계급(階級)이 자주 반란(叛亂)을 일으켰다. 그 중(中)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건(事件)으로는 명종(明宗)때에 공주(公州)에서 일어난 망이(亡伊)의 난(亂)과 청도(淸道)에서 일어난 김사미(金沙彌)의 난(亂)과 신종(神宗)때에 동경(東京경주)에서 일어난 김순(金順)의 난(亂)과 울진(蔚珍)에서 일어난 김위(金偉)의 난(亂) 같은 것이며 노예(奴隸)의 반란(叛亂)으로는 신종(神宗)때에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사건(事件)과 같은 것은 주목(注目)할 현상(現象)이니 만적(萬積)은 관사(官私) 노비(奴婢) 수천(數千)명을 송도(松都)의 뒷산에 모아 놓고 최충헌(崔忠獻) 이하(以下) 자기네들의 상전(上典)을 각각 죽이고 노비(奴婢) 문서(文書)를 불사라서 노비를 모두 해방(解放)하여 삼한(三韓)에 천인(賤人) 계급(階級)을 없이하고 또 장상(將相)이 본시(本是) 종(種)이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도 장상(將相)이 될 수 있다하고 일을 꾸미다가 중도(中途)에 발각(發覺)되어 거사(擧事)치 못하고 모두 잡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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