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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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女眞)관계(關係)

 

여진(女眞)은 처음에 발해국(渤海國)을 구성(構成)한 말갈(靺鞨)의 일족(一族)이라 발해(渤海)가 계단(契丹)에게 망(亡)한 뒤에 여진족(女眞族)이 남만주(南滿州) 방면(方面)에 거주(居住)하는 자(者)는 계단(契丹)에게 귀화(歸化)하여 숙여진(熟女眞)이 되고 백두산(白頭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북만주(北滿州)와 옥저(沃沮)고지(故地)에 거주(居住)하는 자(者)는 항상(恒常) 계단(契丹)에 반항(反抗)하였음으로 이를 생여진(生女眞)이라 한다. 우리 나라와 인접(隣接)하고 있는 여진족(女眞族)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으로서 무역(貿易)과 침략(侵略)을 되풀이하였으나 고려(高麗)를 두려워하는 기색(氣色)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합이빈(哈爾濱)(하얼빈) 부근(附近)의 완안(完顔) 부(部)에 오아속(烏雅束)이 나서 그 세력(勢力)이 무척 늘어서 이웃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合)치고 그 힘이 우리 나라 국경(國境)에까지 미치니 오아속(烏雅束)의 선세(先世)는 고려(高麗) 동북면(東北面)의 화주(和州)(지금의 영흥(永興)사람 김모(金某)임으로 그들은 고려(高麗)를 부모지국(父母之國)이라 肅宗 九年 正月에 咸州(지금의 咸興)의 女眞 부락部落을 통합(統合)한 오아속烏雅束의 부하(部下)는 국경(國境)을 넘어서 정평(定平)에 들어왔다. 이에 고려(高麗)에서는 임간(林幹)을 보내어 치다가 실패(失敗)하고 다시 윤관(尹瓘)을 대신(代身) 보내었으나 또한 공(功)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적(敵)을 유화(宥和)하여 돌려보내었다. 그러나 윤관(尹瓘)은 이 싸움에서 여진(女眞)이 어찌하여 강(强)한가를 알았다. 그것은 고려(高麗)의 보병(步兵)에 대(對)하여 적(敵)은 모두 기병(騎兵)이어서 처음부터 대적(對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윤관(尹瓘)은 이에 신기대(神騎隊)라는 기병대(騎兵隊)를 만들어서 맹렬(猛烈)한 훈련(訓練)을 시켰다. 그러던 중(中) 숙종(肅宗)이 승하(昇遐)하면서 유언(遺言)으로 지금의 여진(女眞)의 세력(勢力)을 꺾지 아니하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으리라 하여 여진(女眞)을 치기를 부탁(付託)하였다.

숙종(肅宗) 이년(二年)에 (기원 삼천사백사십년) 여진(女眞)이 다시 국경(國境)을 침범(侵犯)함으로 윤관(尹瓘)이 십칠만(十七萬)의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장성(長城)을 넘어 가서 적(敵)의 소굴(巢窟) 일백(一百) 삼십여소(三十餘所)를 무찌르고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함주(咸州), 공험진(公嶮鎭), 의주(宜州), 통태(通泰), 평융(平戎)의 구성(九城)을 쌓으니 이것이 유명(有名)한 동북면(東北面) 구성(九城)이다.

구성(九城)의 땅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 확실(確實)히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혹(或)은 공험진(公嶮鎭)을 지금의 북간도(北間島)의 땅이라 하고, 혹(或)은 길주(吉州)를 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 길주(吉州)라 하여 마치 구성(九城)의 땅이 두만강(豆滿江)의 좌우(左右)에 까지 미침과 같이 말하는 일도 있으나 당시(當時) 전쟁(戰爭)한 일수(日數)와 거리(距離) 등(等)으로 생각하여 보면 지금의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북부(北部) 해안(海岸)지방(地方)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 해로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여진(女眞)은 고려(高麗)에 원수(怨讐)를 갚고 구성(九城)을 회복(恢復)하려하여 쉴 사이 없이 반격(反擊)을 되풀이하고 또 완안(完顔)부(部)가 수만명(數萬名)으로서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등(等)을 차례로 포위(包圍)하였으나 성공(成功)치 못하였다. 이때 여진(女眞)은 구성(九城) 등지(等地)에서 쫓겨나간 부락(部落)이 안주(安住)할 곳을 잃어서 몹시 피로(疲勞)하고 고려(高麗)도 또한 구성(九城)의 땅이 험(驗)하여 지키기 어렵고 또 거리(距離)가 멀어서 모든 군수물(軍需物)을 수송(輸送)하기 어려워서 국력(國力)이 피폐(疲弊)하였다. 이에 여진(女眞)은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구성(九城)을 반환(返還)하여 달라고 애원(哀願)하여 왈(曰) 만일 구성(九城)을 돌려주면 이후(以後)로는 영원(永遠)히 고려(高麗)를 부모(父母)의 나라로 섬기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조공(朝貢)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맹서(盟誓)하고 돌 자갈 하나라도 지경(地境)을 넘어서 던지지 아니 하겠다고 굳게 다짐함으로 고려(高麗)는 그들의 소원(所願)을 들어주기로 하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여진(女眞) 면장(面長)들로 하여금 함주성(咸州城) 밖에 단(壇)을 모으고 하늘에 맹서(盟誓)케 한 다음 구성(九城)으로부터 차례로 물러나니 이로써 여러 해 동안 애써 이루어진 동북면(東北面)의 계획(計劃)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반환(返還)은 효과(效果)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니 후일(後日) 고려(高麗)와 여진(女眞)과의 교섭(交涉)에 큰 영향(影響)을 끼쳐서 오랫동안 불안(不安)하던 동북면(東北面)의 국경(國境)이 이로부터는 평정(平靜)하여졌고 오아속(烏雅束)의 아들 아골타(阿骨打)가 여진국(女眞國)을 크게 만들어 국호(國號)를 금(金)이라 하고 계단(契丹) 즉(卽) 요(遼)나라를 멸(滅)하고 다시 중국(中國)에 쳐들어가서 송(宋)나라를 양자강(楊子江) 남(南)쪽으로 몰아내서 동양(東洋) 천지(天地)를 뒤흔들었건만 고려(高麗)에 대(對)하여는 항상(恒常) 우호(友好)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택리지(擇里志)라는 글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만주(滿洲)에서 일어난 국가(國家)는 대강(大江)과 대야(大野)를 가지고 있어 그 기풍(氣風)이 웅대(雄大)함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는 능(能)히 중국대륙(中國大陸)과 자웅(雌雄)을 다투었고 발해(渤海) 유족(遺族)인 금(金)나라는 능(能)히 중국(中國)에 들어가서 제왕(帝王)노릇을 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에 국척(局蹐, 跼蹐)하고 있는 국가(國家)는 천리(千里)의 강(江)과 백리(百里)의 야(野)가 없기 때문에 겨우 그 봉역(封域)을 근수(僅守)할 뿐이라는 뜻을 썼는데 지리(地理)와 국민(國民)기풍(氣風)의 관계(關係)가 있고 없는 것은 별문제(別問題)로 하고 어쨌든 우리 민족(民族)이 만주(滿洲)를 잃은 후(後)에 그 세력(勢力)이 갑자기 미약(微弱)하여진 것은 사실(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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