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와운동 대대의호근 (한장경저 역학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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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節 대대(對待)와 운동(運動)

‣대대(對待)의 호근(互根)

 

만물(萬物)은 그 조직체(組織體)가 있는 동시(同時)에 반드시 운행력(運行力)이 있고 운행(運行)은 물(物)의 운동(運動)으로부터 생(生)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은 어떠한 형태(形態)로든지 하나도 운동(運動)치 아니하는 것이 없고 또 일순간(一瞬間)도 운동(運動)을 계속(繼續)치 아니하는 것이 없으니, 운동(運動)이 지식(止息)되면 신단계(新段階)로 넘어가지 못하고 생존작용(生存作用)이 행(行)치 못한다. 역(易)에「終止則亂 = 종(終)하여 지(止)한즉 난(亂)한다」【註一】하니, 사물(事物)이 이미 종(終)하여 궁극(窮極)하려하는 때에 운동(運動)이 계속(繼續)하면 변화(變化)가 일어나서 전사(前事)의 종단(終端)이 곧 후사(後事)의 발단(發端)이 되어 다시 시작(始作)하는 것이오, 만일 지식(止息)하여 운동(運動)치 아니하면 전사(前事)가 양패(壞敗)하고 후사(後事)가 계속(繼續)치 못하여 스스로 패란(敗亂)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지(終止)와 정(靜)은 그 뜻이 상이(相異)하니 정(靜)은 종지(終止)함이 아니오 능동(能動)에 대(對)한 수동(受動)의 상(象)을 말함이니, 마치 사람의 활동(活動)은 능동(能動)이오 휴식(休息)은 수동(受動)이므로 휴식(休息)을 정(靜)이라 함과 같음이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은 생존작용(生存作用)을 행(行)하기 위(爲)하여 잠시(暫時)도 지식(止息)하는 것이 없고 그 조직(組織)이 스스로 운동(運動)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없도록 구성(構成)되어 있으니 그 조직(組織)이라 함은 곧 대대(對待)의 호근(互根)이다. 호근(互根)이라 함은 용(用)은 체(體)에 의착(依着)하여 능동작용(能動作用)을 행(行)하고, 체(體)는 용(用)의 고무(鼓舞)를 승수(承受)하여 수동작용(受動作用)을 행(行)하여, 상리(相離)하지도 못하고 상합(相合)하지도 못함이다. 그러므로 호근(互根)하고 있는 양물(兩物)은 하나는 동작(動作)하려 하고 하나는 정지(靜止)하려 하며, 하나는 발현(發顯)하려 하고 하나는 수렴(收斂)하려 하여, 거기에 스스로 작용(作用)과 반작용(反作用), 견인(牽引)과 추척(推斥), 압제(壓制)와 분기(奮起) 등(等)에 의(依)한 동작(動作)이 생(生)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러한 동작(動作)이 곧 운동(運動)이다. 역(易)에「尺蠖之屈 以求伸也 龍蛇之蟄 以存身也 = 척확(尺蠖)의 굴(屈)함은 써 신(伸)함을 구(求)함이오, 용사(龍蛇)의 칩(蟄)함은 써 신(身)을 존(存)함이라」【註二】하니, 굴(屈)은 수렴작용(收斂作用)이므로 체(體)가 되고 신(伸)은 발서작용(發舒作用)이므로 용(用)이 되어 서로 대대(對待)하여, 굴(屈)치 아니하면 신(伸)할 수가 없고 신(伸)치 아니하면 굴(屈)할 수가 없으며, 또 이미 굴(屈)하면 다시 신(伸)치 아니할 수가 없고, 이미 신(伸)하면 다시 굴(屈)치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은 반드시 하나는 굴(屈)하려 하고 하나는 신(伸)하려 하며, 또 한번은 굴(屈)하려 하고 한번은 신(伸)하려 하여, 굴(屈)하는 작용(作用)은 능(能)히 신(伸)하는 작용(作用)을 제어(制御)하고 신(伸)하는 작용(作用)은 능(能)히 굴(屈)하는 작용(作用)을 추척(推斥)하여, 굴신(屈伸)이 상감(相感)하여 스스로 운동(運動)치 아니할 수 없는 것이며, 동칩(冬蟄)하는 용사(龍蛇)는 체(體)만 있고 용(用)이 고무(鼓舞)치 못함으로 운동(運動)이 없으니, 이는 체내(體內)에 정(精)과 기(氣)의 대화(大和)를 보합(保合)하기 위(爲)하여 지정(止靜)한 것이오, 지식(止息)함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은 대대(對待)가 있으면 운동(運動)이 생(生)하고 대대(對待)가 없으면 운동(運動)이 생(生)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대(對待)와 운동(運動)은 어느 것이 선(先)하고 어느 것이 후(後)한다는 선후(先後)의 구별(區別)이 없나니, 이미 말한바와 같이 대대(對待)가 있은 연후(然後)에 운동(運動)이 생(生)하는 것이지만, 또한 그와 반대(反對)로 운동(運動)이 대대(對待)를 생(生)하여 운동(運動)이 있으면 대대작용(對待作用)이 행(行)하고 운동(運動)이 없으면 대대작용(對待作用)이 폐절(廢絶)되는 것이다. 역(易)에「乾坤 其易之縕耶 乾坤成列而易立乎其中矣 乾坤毁則 無以見易 易不可見則 乾坤或幾乎息矣 = 건곤(乾坤)은 그 역(易)의 온(縕)인저 건곤(乾坤)이 열(列)을 성(成)하매 역(易)이 그 중(中)에 입(立)하나니 건곤(乾坤)이 훼(毁)하면 써 역(易)을 견(見)치 못하고 역(易)을 가(可)히 견(見)치 못하면 건곤(乾坤)이 혹(或) 거의 식(息)한다」【註三】하니, 건(乾)은 양물(陽物)이오 곤(坤)은 음물(陰物)이며 온(縕)이라 함은 포축(包蓄)하는 뜻이오 역(易)이라 함은 운동변화(運動變化)의 뜻이라, 모든 운동변화(運動變化)는 음양(陰陽)의 대대(對待)와 서로 포축(包蓄)하고 있으므로, 음양(陰陽)의 대대작용(對待作用)이 양편(兩便)에 위열(位列)을 지은 연후(然後)에 운동변화(運動變化)가 그 중(中)에 행(行)하나니, 음양(陰陽)이 훼기(毁棄)하여 독음(獨陰)이나 독양(獨陽)이 되면 운동변화(運動變化)가 생(生)치 못하고 또 운동변화(運動變化)가 생(生)치 못하면, 양물(陽物)은 독양(獨陽)이 되고 음물(陰物)은 독음(獨陰)이 되어, 생생(生生)의 공(功)이 지식(止息)하는 것이니, 이것이 운동(運動)과 대대(對待)의 관계(關係)를 가장 명확(明確)히 표시(表示)함이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의 생존작용(生存作用)에는 반드시 운동(運動)과 대대(對待)가 병행(竝行)하나니, 식물(植物)의 동일체내(同一體內)에 뿌리의 배일성(背日性) 및 향토성(向土性)과 지엽(枝葉)의 향일성(向日性) 및 배토성(背土性)이 대대(對待)하고 있으므로 능(能)히 그 발육(發育)을 이루고, 동물(動物)의 동일체내(同一體內)에 피부(皮膚)의 수렴작용(收斂作用)과 혈액(血液)의 고동작용(鼓動作用)이 대대(對待)하고 있으므로 신체(身體)의 활동(活動)이 생(生)하고, 동일(同一)한 혈관(血管)에 동맥(動脈)과 정맥(靜脈)이 대대(對待)하고 있으므로 능(能)히 순환작용(循環作用)을 행(行)하고, 어느 지방(地方)에 특수(特殊)한 풍토병(風土病)이 있으면 그 지방(地方)에는 반드시 그 병(病)을 극복(克服)하는 약재(藥材)가 생(生)하고, 와류(蛙類)가 동면(冬眠)하는 까닭에 그를 식물(食物)로 하는 사류(蛇類)가 대대(對待)의 대상(對象)을 상실(喪失)하여 또한 동면(冬眠)치 아니할 수 없고, 어느 사물(事物)에 한 세력(勢力)이 이루어지면 그 반면(反面)에 반드시 그에 대항(對抗)하는 신세력(新勢力)이 발생(發生)하나니, 이것이 모두 대대작용(對待作用)에 의(依)하여 운동(運動)이 일어나고 또 운동(運動)이 있으므로 써 대대(對待)가 생(生)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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