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 (한장경저 역학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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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 序

역학(易學)은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생존법칙(生存法則)을 탐색(探索)하여 우리 인생사회(人生社會)의 생존사업(生存事業)을 행(行)하는 정치원리(政治原理)를 천명(闡明)한 학문(學問)이다.

역학(易學)에 의(依)하면 정치(政治)라는 것은 사회(社會)의 문물(文物)을 개명(開明)하고 세무(世務)를 성수(成遂)하여 민중(民衆)의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겁게 생활(生活)하게 하는 사업(事業)이니, 이 사업(事業) 이외(以外)에 따로 정치(政治)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 사업(事業)을 성수(成遂)함에는 정령(政令)을 민중(民衆)에 발시(發施)함이 가장 평이(平易)하고, 민심(民心)이 정령(政令)을 승수(承受)함이 가장 간약(簡約)하여, 정령(政令)과 민심(民心)이 서로 감응(感應)하고 서로 치일(致一)하여, 정령(政令)이 곧 민심(民心)이오 민심(民心)이 곧 정령(政令)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니, 이를 이간원리(易簡原理)라 하고 이간원리(易簡原理)가 곧 정치(政治)의 원리(原理)이다.

우리 인생(人生)은 정치(政治)의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생활(生活)하기 위(爲)하여 물자(物資)를 생산(生産)하는 것도 정치(政治)이오, 그를 교역(交易)하고 소비(消費)하는 것도 정치(政治)이오, 어린 자녀(子女)들이 학교(學校)로 내왕(來往)하는 일, 청년(靑年)장정(壯丁)들이 군문(軍門)으로 출입(出入)하는 일 등(等), 일상생활(日常生活)의 어느 것이 정치(政治)아님이 없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일동정(一動靜) 일호흡(一呼吸)이 정치(政治)와 관련(關聯)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 없거늘, 만약에 정령(政令)이 가험(苛險)하여 민심(民心)에 순응(順應)치 못하고, 민심(民心)이 폐조(閉阻)하여 정령(政令)을 열종(悅從)치 아니한다고 하면, 이는 이간원리(易簡原理)에 어그러져서 사회(社會)의 생존사업(生存事業)을 완수(完遂)치 못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인류(世界人類)의 정치원리(政治原理)는 자본주의(資本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두 가지로 대별(大別)되어 있다. 역리(易理)로써보면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會)는 자본가계급(資本家階級)이 정권(政權)을 잡고 사람을 황금(黃金)에 예속(隸屬)시키고 있으므로 정치(政治)가 이간(易簡)할 수가 없고 지금에 와서는 그 진로(進路)가 궁(窮)하고 있으니, 궁(窮)이라 함은 성장(成長)할 전도(前途)가 막혀서 더 발전(發展)치 못하고 스스로 변화(變化)함을 말함이며, 진로(進路)가 궁(窮)함으로 그 정표(政標)를 민주주의(民主主義)로 바꾸고 있으나 그 본질(本質)은 역시(亦是) 자본주의(資本主義)로서 자본가계급(資本家階級) 중심(中心)의 정치(政治)를 행(行)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자본주의(資本主義)타도(打倒)를 표방(標榜)하고 나온 것이라, 처음에 지하운동(地下運動)으로 잠행(潛行)하던 시대(時代)에는 그 교묘(巧妙)한 선전술(宣傳術)을 통(通)하여 근로계급(勤勞階級)과 약소민족(弱小民族)에게 지대(至大)한 영향력(影響力)을 미치더니 일단(一旦) 지상(地上)에 출현(出現)하여 정권(政權)을 잡은 연후(然後)에는 일당독재(一黨獨裁)를 강행(强行)하여 민중(民衆)의 천부(天賦)한 자유(自由)를 짓밟아서 노예(奴隸)상태(狀態)로 만들고, 독재(獨裁)지배층(支配層)과 피지배민중(被支配民衆)이 대립(對立)하여 공연은연(公然隱然)한 투쟁(鬪爭)이 일어나고 민중(民衆)들은 불안(不安)과 공포(恐怖)에 떨고 있으니, 이 주의하(主義下)의 정치(政治)는 이간(易簡)은 커녕, 최대(最大)의 험조(險阻)로 되어있다. 공산주의(共産主義)도 이미 궁(窮)에 달(達)한지라. 지금에 비록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자칭(自稱)하고 있으나, 그 본질(本質)은 민주주의(民主主義)를 가장(假裝)하고 독재군(獨裁群) 중심(中心)의 정치(政治)를 강행(强行)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일부(一部)에는 자본주의(資本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를 절충(折衷) 또는 구합(苟合)하는 중간로선(中間路線)을 취(取)하려는 경향(傾向)도 없지 아니하나, 물(物)이 궁(窮)한 자(者)는 그 본질(本質)이 변화(變化)한 연후(然後)에 전로(前路)가 벽통(闢通)하는 것이오, 만일 변화(變化)치 아니하면 궁(窮)을 아무리 절충구합(折衷苟合)하더라도 결국(結局) 궁(窮)밖에는 되지 못하는 것이니, 소위(所謂) 중간로선(中間路線)도 자본(資本) 공산(共産)의 두 주의(主義)와 함께 궁(窮)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명일(明日)의 정치원리(政治原理)는 어디서 찾아야할 것인가 하면, 오직 한 가지 찾아볼 수 있는 길은 이때까지 세인(世人)의 시청계(視聽界)로부터 멀리 격리(隔離)를 당(當)하고 있는 동양(東洋)의 역학(易學)이 있을 뿐이니, 이는 역학(易學)은 천지(天地)대자연(大自然)의 생존법칙(生存法則)에 의(依)하여 만물(萬物)이 자연(自然)스럽게 생생존존(生生存存)하고 있는 이간원리(易簡原理)를 정치(政治)의 원리(原理)로 삼는 까닭이다. 이간원리(易簡原理)는 천지(天地)의 생존법칙(生存法則)에 그 이론(理論)의 근거(根據)를 두고 있으므로, 그를 실천(實踐)하기 가장 평이(平易)하고 가장 간약(簡約)하여 조금도 가험(苛險)하다거나 폐조(閉阻)한 것이 없고, 마치 초목(草木), 충어(蟲魚), 조수(鳥獸) 등(等) 만물(萬物)이 생존법칙(生存法則)의 속에서 자연(自然)스럽게 번식(繁殖), 성장(成長)함과 같이 민중전체(民衆全體)가 순리(順理)로운 정치(政治)속에서 스스로 일심동체(一心同體)가되어, 지위(地位), 직업(職業)의 여하(如何)와 남녀로소(男女老少)를 막론(莫論)하고 모두 생활(生活)의 즐거움을 향유(享有)할 수 있는 것이다. 역학중(易學中)에 나타난 정치이론(政治理論)은 모두 이간원리(易簡原理)에 귀일(歸一)되는 것이니, 역(易)의 계사(繫辭)상전(上傳)의 첫머리에 이간정치(易簡政治)를 말하고 또 계사(繫辭)하전(下傳)의 초장(初章)에 이간원리(易簡原理)를 말하고 다시 그 종장(終章)에 이간(易簡)과 험조(險阻)의 이(理)를 말한 것은 반드시 심의(深意)가 있는 것이다. 저자(著者)는 이 원리(原理)를 정치연구(政治硏究)의 자료(資料)를 삼기 위(爲)하여 스스로 천학단식(淺學短識)함을 무릅쓰고 감(敢)히 이 일문(一文)을 초(草)하는 바이다.

끝으로 이 글의 초안(草案)을 작성(作成)함으로부터 금일(今日)에 이르기까지 무릇 칠년(七年)에, 그동안 글의 내용(內容)에 대(對)하여 친절(親切)한 지도(指導)와 귀중(貴重)한 조언(助言)을 베풀어주신 여러 선배(先輩)를 비롯하여, 이글의 완성(完成)을 후원(後援)하는 호의(好意)로 저자(著者)의 피난(避難)생활중(生活中)에 물질적(物質的)으로 막대(莫大)한 원조(援助)를 보내주신 여러 친우(親友)와 정치원리(政治原理)로서의 역학(易學)을 세상(世上)에 소개(紹介)하려는 특지(特志)로써 이해관계(利害關係)를 불관(不關)하고 이의 출판(出版)을 인수(引受)하여 주신 이우(李友) 종열씨(鍾烈氏)에게 심심(甚深)한 사의(謝意)를 표(表)하는 바이다. 더욱이 세간(世間)에서는 역학(易學)이라고 하면 의례(依例)히 점서(占書)인줄로만 알고 있는 금일(今日)에, 이 글이 처음으로 정치원리(政治原理)의 학문(學問)으로서 세상(世上)에 나오는 것은 결(決)코 저자(著者) 일인(一人)의 힘이 아니오, 오로지 여러 선배(先輩)와 제우(諸友)들의 계도(啓導)․ 성원(聲援)하여주신 결실(結實)임을 독자(讀者)여러분에게 알리는 바이다.

단기(檀紀) 사이팔칠년(四二八七年) 갑오(甲午) 십이월(十二月) 일(日)

 

서울 신촌(新村)에서 저자(著者) 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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