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동식과의비교 (한장경저 역학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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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동식(動植)과의 비교(比較)

 

이제 동식물(動植物)과 사람을 비교(比較)하여 보건대 만물(萬物)은 그 조직(組織)에 따라서 천(天)에 본(本)한 자(者)와 지(地)에 본(本)한 자(者)가 있으니, 천(天)은 기(氣)의 유행(流行)함이므로 천(天)에 본(本)한 자(者)는 기(氣)가 강건(强健)하여 상(上)을 친(親)하고 지(地)는 정(精)의 응주(凝做)함이므로 지(地)에 본(本)한 자(者)는 정(精)이 후중(厚重)하여 하(下)를 친(親)하나니, 동물(動物)은 상(上)을 친(親)하는 자(者)이오, 식물(植物)은 하(下)를 친(親)하는 자(者)이다. 먼저 식물(植物)로써 보면 식물(植物)은 지중(地中)에 착근(着根)하여 지(地)에 본(本)함으로 스스로 유동(流動)치 못하고 그 섭취(攝取)하는 영양분(營養分)은 근착지(根着地)의 지미(地味)에 국한(局限)하고 기(氣)를 받음이 극(極)히 적으니 정신(精神)은 기(氣)의 작용(作用)이라, 식물(植物)은 하(下)를 친(親)하고 기(氣)가 적음으로 정신작용(精神作用)이 없고 오직 약간(若干)의 감각(感覺)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동물(動物)은 대개(大槪) 배부(背部)는 천(天)을 향(向)하고 복부(腹部)는 지(地)를 향(向)하여 체(體)가 횡재(橫在)하여 평면(平面)이 되고 있으므로 주(主)로 지(地)에 본(本)하여, 비록 그 체(體)가 자유(自由)로 유동(流動)하고 있으되 그 섭취(攝取)하는 바의 식물(食物)은 대개(大槪) 일정(一定)한 범위(範圍)에 국한(局限)하여 각미(各味)를 겸식(兼食)치 못하고 전(專)혀 편식(偏食)하고 있으니, 동물(動物)에 육서(陸棲) 수서(水棲) 식초류(食草類) 식육류(食肉類) 등(等)이 있는 것이 그 일례(一例)이오, 또 비록 호흡(呼吸)하고 있으되 기(氣)를 받음이 광대(廣大)치 못하고 정신작용(精神作用)이 극(極)히 편국(偏局)하여 과거(過去)에 대(對)한 기억(記憶)과 미래(未來)에 대(對)한 추상(推想)이 거의 없고 오직 현실생활(現實生活)에 지배(支配)되고 있으니, 사람도 음식(飮食)을 편식(偏食)하는 자(者)가 대개(大槪) 편성(偏性)이 되고 기(氣)의 부족(不足)한 자(者)가 대개(大槪) 정신(精神)이 건전(健全)치 못하여 그 생활(生活)과 일상(日常)의 활동(活動)이 주(主)로 현실생활(現實生活)에 편국(偏局)하고 있음은 이 까닭이다.

사람은 비록 동물(動物)의 일류(一類)에 소속(所屬)하여 그 삼정(三情)의 발로(發露)는 동물(動物)과 하등(何等)의 차이(差異)가 없으되, 오직 그 조직형태(組織形態)가 두부(頭部)는 천(天)을 향(向)하고 양족(兩足)은 지(地)를 밟아서 천지(天地)로 더불어 삼각(三角)의 자태(姿態)를 이루고 이 자태(姿態)는 직립체(直立體)로 되어 주(主)로 천(天)에 본(本)하여 천지태일체(天地太一體)를 통관(通貫)하고 있다. 소강절(邵康節)은 말하되 「動者體橫 植者體縱 人宜橫而反縱也 飛者有翅 走者有趾 人之兩手翅也 兩足趾也 飛者食木 走者食草 人皆兼之而又食飛走也 故最貴乎萬物也 = 동물(動物)은 체(體)가 횡(橫)하고 식물(植物)은 체(體)가 종(縱)하니 사람은 마땅히 횡(橫)할 것이나 도리어 종(縱)하다 비조(飛鳥)의 유(類)는 시(翅)가 있고 주수(走獸)의 유(類)는 지(趾)가 있는데 사람의 양수(兩手)는 시(翅)오, 양족(兩足)은 지(趾)이다. 비류(飛類)는 목(木)을 식(食)하고 주류(走類)는 초(草)를 식(食)하는데 사람은 양자(兩者)를 겸(兼)하고 또 비주(飛走)를 식(食)하니 이런 고(故)로 사람은 가장 만물(萬物)보다 귀(貴)하다」【註二】하니, 이는 사람은 동물(動物)이면서 또한 동물(動物)의 유(類)를 초월(超越)하여 체(體)가 직립(直立)하고, 그 동작(動作)은 조수(鳥獸)의 시지(翅趾)를 겸유(兼有)하여 양족(兩足)은 신체(身體)를 지탱(支撑)하고 양수(兩手)는 기구(器具)를 사용(使用)하며, 식물(食物)은 초목조수(草木鳥獸) 등(等)의 백미(百味)를 겸식(兼食)함으로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신작용(精神作用)은 공간적(空間的)으로는 능(能)히 심원(深遠)을 탐색(探索)하여 자연계(自然界)의 비밀(秘密)을 개척(開拓)하고, 시간적(時間的)으로는 능(能)히 과거(過去)를 기억(記憶)하고 미래(未來)를 추상(推想)하며, 더욱이 자기(自己)의 정신력(精神力) 만으로는 오히려 부족(不足)하다고 생각하여 타인(他人)의 지식(知識)․기능(技能) 등(等)을 학내(學來)하여 자기(自己)의 정신력(精神力)을 보익배양(補益培養)하니, 이가 사람의 정신력(精神力)이 광원고대(廣遠高大)하여 멀리 동물계(動物界)를 초출(超出)한 소이(所以)이다. 소강절(邵康節)은 이를 설명(說明)하되 「能用天下之目 爲己之目 其目無所不觀矣 用天下之耳 爲己之耳 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 爲己之口 其口無所不言矣 用天下之心 爲己之心 其心無所不謀矣 夫天下之觀 其于見也 不亦廣乎 天下之聽 其于聞也 不亦遠乎 天下之言 其于論也 不亦高乎 天下之謀 其于樂也 不亦大乎」= 「능(能)히 천하(天下)의 목(目)을 용(用)하여 자기(自己)의 목(目)을 삼으니 그 목(目)이 관(觀)치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天下)의 이(耳)를 용(用)하여 자기(自己)의 이(耳)를 삼으니 그 이(耳)가 청(聽)치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天下)의 구(口)를 용(用)하여 자기(自己)의 구(口)를 삼으니, 그 구(口)가 언(言)치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天下)의 심(心)을 용(用)하여 자기(自己)의 심(心)을 삼으니 그 심(心)이 모(謀)치 못하는 바가 없다. 천하(天下)의 관(觀)함이 그 견(見)함에 또한 광(廣)치 아니하랴, 천하(天下)의 청(聽)함이 그 문(聞)함에 또한 원(遠)치 아니하랴, 천하(天下)의 언(言)함이 그 논(論)함에 또한 고(高)치 아니하랴, 천하(天下)의 모(謀)함이 그 낙(樂)함에 또한 대(大)치 아니하랴」 【註三】하여, 성인(聖人)은 천하(天下)의 이(耳) 목(目) 구(口) 심(心)으로써 자기(自己)의 이(耳) 목(目) 구(口) 심(心)을 삼는 까닭에, 그 보는 것이 지광(至廣)하고 그 듣는 것이 지원(至遠)하고 그 의논(議論)하는 것이 지고(至高)하고 그 즐겨하는 것이 지대(至大)함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사회(社會)를 조직(組織)하여 통체적(統體的)으로 영원(永遠)히 생존(生存)할 계획(計劃)을 수립(樹立)하고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을 정(定)하여 공동생활(共同生活)의 질서(秩序)를 보전(保全)하고 있으니, 이 까닭에 사람을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고 하는 것이오, 이 정신력(精神力)의 영이(靈異)함이 곧 정대작용(正大作用)을 본 받을 수 있는 소질(素質)이 되고 이러한 소질(素質)을 이성(理性)이라 한다.

이와 같이 사람은 한 면(面)으로는 동물(動物)과 다름이 없는 감정(感情)을 가지고, 한 면(面)으로는 사람 특유(特有)의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으니, 감정(感情)은 체(體)오, 이성(理性)은 용(用)이다. 세간(世間)에서 흔히 사람을 감정적(感情的)동물(動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체(體)의 일면(一面)을 말하는 것이니 실(實)은 사람은 여러 동물중(動物中)에서 유일(唯一)한 이성적(理性的) 동물(動物)이다. 그러므로 삼정(三情)으로써 보더라도 색욕(色慾)은 동물(動物)과 다름이 없으되 또한 음양관계(陰陽關係)에 대(對)하여 혈연적(血緣的) 사회적(社會的)으로 엄격(嚴格)한 규정(規定)이 있으며 식욕(食慾)은 동물(動物)과 다름이 없으되 또한 재화(財貨)와 음식(飮食)에 대(對)하여 예의(禮儀)와 염치(廉恥)가 있어 취(取)할 바와 취(取)치 못할 바를 알며, 자존욕(自存慾)은 동물(動物)과 다름이 없으되 또한 타인(他人)을 위(爲)하고 사회(社會)를 위(爲)하여 자신(自身)의 생명(生命)을 희생(犧牲)하는 일이 있으니, 이것이 모두 이성(理性)으로부터 출래(出來)한 사람의 특유(特有)한 행위(行爲)이다. 이와 같은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생(人生)은 반드시 정대작용(正大作用)을 본 받아서 모든 행위(行爲)로 하여금 정(正)하여 편(偏)치 아니하고, 대(大)하여 국(局)치 아니한 연후(然後)에 삼정(三情)의 발로(發露)가 모두 절도(節度)에 적중(適中)하여 조화(調和)함을 얻어 생존작용(生存作用)을 완수(完遂)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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