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에 해당되는 글 54건
- 2013.09.02 이조건국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이조정치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왕위쟁탈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건설시기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단종과 세조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이조기초의 완성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연산군의 실정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중종반정후의 국정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일본과의 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사회의 부패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임진왜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난후의 형세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2 병자호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1 서양문화와의 교섭과 외국무역 (삼화선생 서당국사)
- 2013.09.01 사색당쟁 (삼화선생 서당국사)
이조(李朝)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 |
정종(定宗) |
태종(太宗) |
세종(世宗) |
문종(文宗) |
단종(端宗) |
임신(壬申) |
기묘(己卯) |
신사(辛巳) |
기해(己亥) |
신미(辛未) |
계유(癸酉) |
7 |
2 |
18 |
32 |
2 |
3 |
세조(世祖) |
예종(睿宗) |
성종(成宗) |
연산군(燕山君 |
중종(中宗) |
인종(仁宗) |
병자(丙子) |
기축(己丑) |
경유(庚酉) |
을묘(乙卯) |
병인(丙寅) |
을사(乙巳) |
13 |
1 |
25 |
11 |
39 |
1 |
명종(明宗) |
선조(宣祖) |
광해군(光海君 |
인조(仁祖) |
효종(孝宗) |
현종(顯宗) |
병오(丙午) |
무진(戊辰) |
을유(乙酉) |
계해(癸亥) |
경인(庚寅) |
경자(庚子) |
22 |
41 |
14 |
27 |
10 |
15 |
숙종(肅宗) |
경종(景宗) |
영조(英祖) |
정조(正祖) |
순조(純祖) |
헌종(憲宗) |
을묘(乙卯) |
신축(辛丑) |
을사(乙巳) |
정유(丁酉) |
신유(辛酉) |
을미(乙未) |
46 |
4 |
52 |
24 |
34 |
15 |
철종(哲宗) |
광무황제(光武皇帝) |
융희황제(隆熙皇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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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庚戌) |
갑자(甲子) |
정미(丁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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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44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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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備考)
一. 고려(高麗)왕실(王室)이 없어진 것은 태조(太祖)가 한양(漢陽)에 이도(移都)하니 전(全) 백성(百姓)이 송경(松京)에 회귀(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태종(太宗)이 부하(部下)로 하여금 망월대(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개국(開國)초(初)에 무국호(無國號)하여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라 칭(稱)하고 명국(明國)에서 태조(太祖)가 왕위(王位)에 오름을 승낙(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조선(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조선(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이조(李朝)는 명(明)의 아유국(阿諛國))
三. 태조(太祖)는 백성(百姓)을 위하여 혁명(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일생(一生)에 왕위(王位)를 차지하려고 명국(明國)에 아유(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이태조(李太祖)는 명(明)에서 명령(命令)하면 모두 응(應)하였다.
이조(李朝)건국(建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선조(先祖)는 본시(本是) 함경도(咸鏡道)에 살았는데 그 고조부(高祖父)가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하고 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 경흥(慶興)에 살더니 태조(太祖)의 어버이 이자춘(李子春)은 영흥(永興)에 살고 거기서 태조(太祖)를 낳으니 이때 영흥(永興)은 쌍성총독부(雙城總督府)로 되어 원(元)나라에 속(屬)하였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유인우(柳仁雨)가 쌍성(雙城)을 칠 때에 이자춘(李子春)이 이를 도와서 공(功)이 있었음으로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 겸(兼)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함주(咸州)를 중심(中心)으로 하여 큰 세력(勢力)을 가졌고 이때 태조(太祖)는 나이 젊었으나 특출(特出)한 무예(武藝)가 있었음으로 함주(咸州) 이북(以北)에 살고 있는 여진족(女眞族)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으며 후일(後日)에 태조(太祖)가 자주 큰 공(功)을 세운 것도 그 수하(手下)에 동두란(佟豆蘭) 이하(以下) 여진(女眞) 출신(出身)의 맹장(猛將)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 한다.
태조(太祖)가 건국(建國)한 이듬해에 국호(國號)를 고쳐서 조선(朝鮮)이라 하고 삼년(三年) 후(後)에 도읍(都邑)을 지금의 서울에 옮기고 경복궁(景福宮)을 짓고 성(城)을 쌓아서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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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李朝)정치(政治)
一. 토지제도(土地制度)이니 고려시대(高麗時代)는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장정(壯丁)에 따라서 수수(授受)하더니 태조(太祖)가 공민왕(恭愍王) 삼년(三年)에 개혁(改革)한 전제(田制)는 다만 사전(私田)을 폐(廢)하고 과전제(科田制)를 부활(復活)한 것이 고려(高麗)의 전제(田制)와 같을 뿐이오 토지(土地)를 농민(農民)에게 분배(分配)한 것은 장정(壯丁) 수수(授受)제(制)가 아니라 대개(大槪) 농민(農民)이 현재(現在) 경작(耕作)하고 있는 토지(土地)를 그 농가(農家)에 주는 것을 원칙(原則)으로 한 까닭에 각(各) 농가(農家)의 경작면적(耕作面積)에 많고 적은 차이(差異)가 생겼다.
그러므로 토지(土地)는 비록 고려(高麗)의 국유제(國有制)를 그대로 계승(繼承)하고 있으나 각(各) 농가(農家)의 경지(耕地)는 영구(永久) 경작권(耕作權)의 형태(形態)로 되어 있어 그 속에 후일(後日) 사유지(私有地)로 될 싹을 포장(包藏)하고 있으며 그 경작지(耕作地)는 국법(國法)에 의하여 자유(自由)로 매매(買賣) 전당(典當)하는 것을 금(禁)하고 있으나 이것은 완전(完全)히 국유제(國有制)가 사유제(私有制)로 변(變)해 넘어가는 과도기적(過渡期的) 형태(形態)이었다.
二. 高麗는 佛敎로서 국교(國敎)를 삼고 각지(各地)에 수다(數多)한 사찰(寺刹)을 세우고 왕실(王室)로부터 민간(民間)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식(儀式)은 불교식(佛敎式)을 썼다. 그러나 말엽(末葉)에 이르러 불교(佛敎)의 폐(廢)가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이조(李朝)는 불교(佛敎)를 극도(極度)로 배척(排斥)하여 사찰(寺刹)의 대부분(大部分)을 헐어버리고 사찰토지(寺刹土地)를 몰수(沒收)하고 유교(儒敎)로서 국교(國敎)를 삼고 특(特)히 중국(中國)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을 존숭(尊崇)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依)하여 집마다 가묘(家廟)를 만들게 하고 정주학(程朱學) 이외(以外)의 학문(學文)은 모두 이단(異端)이라 하여 일체(一切)로 용납(容納)치 못하게 하였다. 인위적(人爲的) 국민사상(國民思想) 통일(統一)의 결과(結果)는 학풍(學風)이 편협(偏狹)하여 배타성(排他性)이 강(强)하고 사상(思想)의 침체(沈滯)를 초래(招來)하여 생발(生發)의 기(氣)가 없었다.
三. 고려(高麗)에 무신횡포(武臣橫暴)의 폐(弊)가 크고 이성계(李成桂) 자신(自身)도 무신(武臣)으로써 왕대(王代)의 사직(社稷)을 빼앗았음으로 이조(李朝)는 무신(武臣)을 누르고 문신(文臣)을 높여서 국가대사(國家大事)는 전(專)혀 문신(文臣)의 손에 의(依)하여 행(行)하니 이 까닭에 사회(社會)는 문약(文弱)에 빠져서 외적(外敵)이 쳐들어오면 나아가 막을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恒常) 퇴굴(退屈)하였으며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는 물론(勿論)이오 그 일문(一門)까지도 병역(兵役)을 면제(免除)하고 오직 무세무력(無勢無力)한 한문미족(寒門微族)의 사람들만 군병(軍兵)으로 만들었다.
四. 혁명(革命)을 일으킨 이론(理論)이 광명정대(光明正大)치 못하여 고려유민(高麗遺民)들의 반대(反對)가 강열(强烈)하였음으로 이조(李朝)는 왕대부흥운동(王代復興運動)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건국(建國)한지 삼년(三年)에 전국(全國)의 왕대(王代)를 노소(老少)없이 모두 잡아서 학살(虐殺)하니 이때 왕대(王代)를 강화도(江華島)와 남해(南海) 여러 섬에 보내어 안주(安住)시킨다 하고 배에 싣고 들어가다가 물 속에 넣어 죽인 자(者)도 팔백여명(八百餘名)이오 개성(開城)으로부터 이북(以北)의 평안도지방(平安道地方)에 사는 왕대(王代)들은 모두 도망(逃亡)하여 요동(遼東)으로 들어가니 지금 만주(滿洲)지방(地方)에 다른 성(姓)보다 특(特)히 왕대(王代)가 많은 것은 이 까닭이라 하며 외국(外國)으로 도망(逃亡)할 수 없는 왕대(王代)들은 성자(姓字)를 고쳐서 옥(玉) 전(全) 전(田) 차(車) 등(等)으로 변(變)하니 혁명후(革命後)에 전조(前朝) 왕족(王族)을 일인(一人)도 남기지 아니하고 학살(虐殺)한 것은 아국(我國)유사(有史) 이래(以來) 오직 이조(李朝)뿐이었다. 한편(便)으로 황해도(黃海道) 평안도(平安道) 지방(地方)에서 왕대(王代)를 받들고 반란(叛亂)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개성(開城) 이북(以北)의 사람을 조정(朝廷)의 대관(大官)에 쓰지 아니하고, 함경도(咸鏡道)는 자기(自己)의 출신(出身)지방(地方)이다.
인성(人性)이 강(强)하고 만일 대용(大用)하면 이씨(李氏) 조정(朝廷)에 불리(不利)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역시(亦是) 대관(大官)에 쓰지 아니하니 이 까닭에 이조(李朝) 오백년(五百年)동안에 서북인(西北人)은 사로(仕路)가 막힌 것이다.
五. 고려(高麗) 말엽(末葉)에 정치(政治)가 문란(紊亂)하여지자 권신(權臣)귀족(貴族)들은 국가(國家)의 관리(官吏)에 정원(定員)이 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마음대로 자기(自己) 친척(親戚)이나 특수관계(特殊關係)가 있는 者를 관리(官吏)로 쓰게되어 정원수(定員數)의 배(倍) 이상(以上)을 초과(超過)하였는데 이조(李朝) 개국후(開國後)에 관리(官吏)의 수(數)를 줄이고 관리(官吏)를 개체(改替)하려하였으나 만일 그 때문에 인심(人心)이 불안(不安)하여 동요(動搖)가 생기면 이씨(李氏) 정권(政權)의 유지(維持)에 불리(不利)할까 염려(念慮)하여 관리(官吏)의 수(數)도 줄이지 못하고 주요(主要)한 자리 외(外)에는 개체(改替)하지도 못하니 이 까닭에 재정(財政)이 곤란(困難)하고 따라서 관리(官吏)의 봉급(俸給)은 생활비(生活費)를 충족(充足)치 못하였고 이것이 이조(李朝) 오백년(五百年)동안을 통(通)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많이 생긴 주인(主因)이 되었다. (관리(官吏)수(數)가 많으면 이조시대(李朝時代)의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생긴다.)
六. 고려(高麗)의 문은 귀족(貴族)이 이미 없어지고 이씨(李氏)에 친부(親附)한 자(者)가 신귀족(新貴族)이 되었는데 이씨(李氏) 조정(朝廷)은 아직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어느 한 구석에서 어떠한 사건(事件)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음으로 이들 신귀족(新貴族)을 특별(特別) 대우(待遇)하고 민재(民財)를 빼앗아 먹는 것을 묵인(黙認)하기까지 하고 李氏에게 모반(謀反)하는 일을 고발(告發)하라고 장려(獎勵)하여 후(厚)한 상(賞)을 주었으니 이것이 이조(李朝) 일대(一代)에 귀족(貴族)의 횡포(橫暴)와 고발(告發)의 폐습(弊習)을 조장(助長)한 일인(一因)이 되었다.
七. 이조(李朝)가 고려(高麗)를 빼앗은 것은 사회(社會)의 발전(發展)을 위한 혁명(革命)이 아니오 다만 이씨가(李氏家)가 왕(王)노릇을 한다는 것이 주요(主要)한 목적(目的)이 되어 있으니 이것은 이대(李代) 개국후(開國後) 흔히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개국(開國)한 처음부터 추악(醜惡)한 왕위쟁탈전(王位爭奪戰)이 일어나서 오백년(五百年)동안을 끊임없이 부자(父子) 형제(兄弟) 숙질(叔姪) 등(等)의 사이에 유혈(流血)의 극(劇)을 연출(演出)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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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쟁탈(王位爭奪)
처음에 태조(太祖)는 송경(松京)으로부터 도읍(都邑)을 옮기려하여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과 한양(漢陽)을 친(親)히 돌아본 결과(結果) 한양(漢陽)으로 옮겨왔는데 얼마 안가서 왕자(王子)의 변(變)이 일어나서 골육(骨肉)의 참혹(慘酷)한 화란(禍亂)을 자아냈다. 태조(太祖)에게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韓)씨의 소생(所生)에 육자(六子)가 있고 신덕왕후(神德王后) 강(康)씨의 소생(所生)에 방번(芳蕃) 방석(芳碩)의 이자(二子)가 있는데 태조(太祖)의 혁명(革命) 운동(運動)에 한씨(韓氏) 소생(所生)의 방원(芳遠)(태종(太宗))의 힘이 가장 크더니 한씨(韓氏)는 개국(開國)하기 전(前)에 죽고 강씨(康氏)가 왕후(王后)로 되어 자기(自己)의 소생(所生) 방석(芳碩)으로 세자(世子)를 삼으려하니 정부(政府)대신(大臣) 중(中)에는 「평시(平時)에는 장(長)을 세우고 난시(亂時)에는 공(功)을 먼저 한다.」하여 반대(反對)한 일도 있었다.
태조(太祖)는 왕위(王位)로써 국가(國家) 전체(全體)와 관련(關聯)시키지 아니하고 이씨가(李氏家)의 사사(私事)로 생각하여 그 사랑하는 강씨(康氏)의 소생(所生) 방석(芳碩)으로써 세자(世子)를 삼으니 한씨(韓氏) 소생(所生)의 여러 형(兄)들이 불평(不平)을 품고 그 중(中)에서도 개국(開國)의 공(功)이 있는 방원(芳遠)의 불만(不滿)이 가장 컸다.
이때 세자(世子) 방석(芳碩)을 돕는 책임(責任)을 맡은 자(者)는 정도전(鄭道傳) 등(等)이라 정도전(鄭道傳) 등(等)은 여러 왕자(王子)가 불평(不平)을 품고있는 형세(形勢)를 살피고 태조(太祖)에게 말하여 왕자(王子)들의 병기(兵器)를 지니는 것을 금(禁)하고 다시 왕자(王子) 칠인(七人)을 칠도(七道)에 분견(分遣)하고자 하니 이는 왕자(王子)들을 방축(放逐)하려는 술책(術策)이다. 이에 방원(芳遠)은 크게 노(怒)하여 방번(芳蕃) 방석(芳碩)과 정도전(鄭道傳) 등(等)을 죽이고 방원(芳遠)의 형(兄) 방과(芳果)가 세자(世子)가 되니 태조(太祖)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분(忿)함을 참지 못하여 가장 친근(親近)한 부하(部下)를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울 근처(近處)의 산사(山寺)를 逍遊하다가 멀리 北으로 行하여 舊居인 함흥(咸興) 본궁(本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방과(芳果)가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정종(定宗)이오 정종(定宗) 원년(元年)에 한양(漢陽)은 골육(骨肉)의 변(變)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신도(新都)를 버리고 개경(開京)으로 돌아갔다. 정종(定宗)은 방원(芳遠)으로써 세제자(世弟子)를 삼으니 방원(芳遠)의 형(兄) 방간(芳幹)이 거기에 불만(不滿)을 품고 박포(朴苞)로 더불어 방원(芳遠)을 해(害)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박포(朴苞)는 잡혀서 죽고 방간(芳幹)은 토산(兎山)으로 쫓겨나갔다. 정종(定宗)이 임금이 된지 이년(二年)만에 하루는 세제(世弟)방원(芳遠)의 기색(氣色)이 수상(殊常)함을 보고 왕위(王位)를 방원(芳遠)에게 전(傳)하니 이가 태종(太宗)이다. 태종(太宗)은 즉위(卽位)한 후(後) 곧 한양(漢陽)으로 돌아왔는데 조신중(朝臣中)에는 개경(開京)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신도(新都)를 싫어하는 자(者)가 많아서 왕도(王都)가 안정(安定)치 못하더니 하루 밤에 개경(開京)궁궐(宮闕)이 전부(全部) 불에 타버리니 다시 개경(開京)으로 옮기자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太祖)가 함흥(咸興)에 들어간 후(後)에 조정(朝廷)에서는 자주 문안사(問安使)를 보내었으나 태조(太祖)는 분(忿)함이 풀리지 아니하여 오는 사람마다 죽여서 일인(一人)도 생환(生還)한 자(者)가 없으니 지금까지도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태종(太宗)이 박순(朴淳)을 보내어 태조(太祖)의 환국(還國)하기를 청(請)하고 부자간(父子間)의 천륜(天倫)의 정(情)을 극진(極盡)하니 태조(太祖)가 감동(感動)하여 돌아왔다.
박순(朴淳)의 극진(極盡)한 말의 내용(內容)을 함흥(咸興)고노(古老)들이 구비(口碑)로 상전(相傳)하는 말에 의(依)하면 「부자(父子)가 상쟁(相爭)하여 남북(南北) 이조(二朝)가 있음과 같이 국민(國民)의 눈에 보이는데 창업(創業)한지 오래되지 못하고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여 장차(將次) 무슨 변란(變亂)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 부자(父子)가 상쟁(相爭)하여 나아가 국가(國家) 만년(萬年)의 기업(基業)을 떨어뜨리랴」함이라 태조(太祖)는 이 말을 듣고 대오(大悟)하여 드디어 남환(南還)을 결의(決意)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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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建設)시기(時機)
태종(太宗)이 임금이 된 것은 개국(開國)한지 구년(九年)만이라 이제로부터 점차(漸次)로 건설적(建設的) 정책(政策)을 행(行)하게 되었다.
경제면(經濟面)에서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이래(以來)로 화폐제도(貨幣制度)를 여러 번 확립(確立)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태종(太宗)이 다시 착수(着手)하여 전화(錢貨)를 만들려 하였으나 그 원료(原料)되는 동(銅)이 부족(不足)함으로 주(主)로 저폐(楮幣)를 만들어 쓰게 하니 이는 지금의 지폐(紙幣)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전화(錢貨)를 신용(信用)치 않는 당시(當時) 사람들이 저화(楮貨)를 신용(信用)할 이유(理由)가 없었다. 그리하여 저폐(楮幣)의 가치(價値)가 폭락(暴落)하더니 마침내 유통(流通)이 끊어지고 전일(前日)과 같이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쓰고 오승포(五升布)를 표준(標準)으로 하니 오승포(五升布)라 함은 일정(一定)하여있는 포폭(布幅)에 경사(經絲) 사백본(四百本)을 말함이다. (한 목은 십(十) 오리 일(一)승(升)은 팔(八)목)
문화(文化) 면(面)에 있어서 특기(特記)할만한 것은 주자소(鑄字所) 설치(設置)이다. 고려(高麗)때에 활자(活字)를 만들어 쓴 일이 있었으나 그 규모(規模)가 크지 못하더니 태종(太宗) 삼년(三年)에 주자소(鑄字所)를 두고 이직(李稷) 박석명(朴錫命) 등(等)으로 하여금 동(銅)으로 많은 주자(鑄字)를 만들어 주요(主要)한 서적(書籍)을 인쇄(印刷)하여 내니 이는 우리 나라 출판문화사(出版文化史) 상(上) 획기적(劃期的) 혁명(革命)이다.
외교(外交)에 있어서는 태조(太祖)개국(開國)할 때에 명(明)나라의 승인(承認)을 얻고 해마다 많은 세폐(歲幣)를 바치기로 하였음으로 명(明)나라의 세폐(歲幣) 요구(要求)가 수량(數量)이 많고 또 가혹(苛酷)하여 특(特)히 마필(馬匹)의 요구(要求)가 더욱 심(甚)하여 매년(每年) 수천필(數千匹) 내지 만여필(萬餘匹)을 강요(强要)하고 또 축우(畜牛)까지 요구(要求)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여기에 응(應)하면 국내(國內)의 마필(馬匹)이 전부(全部) 없어질 것이오 응(應)하지 아니하면 명(明)나라로부터 어떠한 압박(壓迫)이 올지 알 수 없어서 진퇴(進退) 양난(兩難)에 빠졌다. 조신(朝臣) 중(中)에는 이를 거절(拒絶)하자고 주장(主張)한 강경(强硬) 논(論)도 있었으나 태종(太宗)은 온화(穩話)하게 이를 해결(解決)하자고 무마(撫摩)하고 명(明)나라에 대(對)하여 세폐(歲幣)를 감(減)할 것을 여러 차례로 요청(要請)하더니 얼마후(後)에 그 요청(要請)대로 실현(實現)되었다.
고려(高麗)말(末)에 극성(極盛)하던 왜구(倭寇)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태종(太宗)때에 남해안(南海岸)을 침범(侵犯)한 일이 있음으로 태종(太宗)이 위(位)를 세종(世宗)에게 전(傳)하고 대상왕(大上王)이 되었으니 자기(自己) 생전(生前)에 왜구(倭寇)의 소굴(巢窟)을 없애야 한다하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상당(相當)한 전과(戰果)를 내었으나 오래 수비(守備)하기가 어려움으로 얼마 후에 회군(回軍)하였다. (이종무(李從茂)가 변변치 못하여 一敗하여 돌아왔다.)
처음에 태종(太宗)의 장자(長子)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써 세자(世子)를 삼았으나 삼자(三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 항상(恒常) 장차(將次)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할 생각이 있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또한 천자(天資)가 척당(倜儻)하여 자기(自己)보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의 재덕(才德)이 뛰어남을 알고 왕위(王位)를 그에게 넘기려하여 거짓 방탕(放蕩)하여 세자(世子)의 위(位)에서 물러나니 이씨(李氏) 개국(開國)이후 추악(醜惡)한 왕위(王位) 쟁탈전(爭奪戰)을 하는 속에서 홀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이와 같은 특이(特異)한 행동(行動)을 한 것은 일신(一身)의 영예(榮譽)보다 국가(國家) 전체(全體)를 위하는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왕위(王位)를 상양(相讓)하던 혼후(渾厚)한 풍(風)을 다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후(後)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王)이되니 이가 세종(世宗)이라 세종(世宗)은 이조(李朝) 일대(一代)를 통(通)하여 제일(第一)가는 성군(聖君)일 뿐만 아니라 아국(我國)의 역사(歷史) 전체(全體)를 통(通)하여 보아도 가장 훌륭한 인군(人君)이다.
세종(世宗)은 황희(黃憙) 허조(許稠) 등(等) 명상(名相)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함에 그 중점(重點)을 인재(人才) 문제(問題)에 두었다. 즉 어떻게 하면 인재(人才)를 많이 배양(培養)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人才)를 거용(擧用)할 수 있을까 하고 또 군왕(君王)이나 재상(宰相)의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훌륭한 인재(人才)를 얻어서 국가(國家)의 각 기관(機關)에 적재적소(適材適所)로 배치(配置)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과거(科擧)로써 인재(人才)를 취(取)하는데 그 출제(出題)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국방(國防) 문화(文化) 등(等)에 관(關)한 실제(實際) 방책(方策)으로 하고 여기에 급제(及第)한 사람은 다시 호당(湖堂)에 보내어 몇 해 동안을 자유롭게 연구(硏究)케 하니 이 까닭에 인재(人才)가 배출(輩出)하여 여러 가지 큰 사업(事業)을 행(行)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서변(西邊)과 북변(北邊)에는 여진족(女眞族)이 거주(居住)하고 있는데 국인(國人)들은 이를 야인(野人)이라 불렀다.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한 뒤에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이남(以南)의 여진족(女眞族)이 한때 모두 귀부(歸附)하였으나 이는 일시적(一時的)의 일이오 그 지대(地帶)가 우리 나라의 영토(領土)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 야인(野人)은 항상(恒常) 서북(西北) 변(邊)의 근심이 되더니 세종(世宗)은 이를 정벌(征伐)하기로 결의(決意)하고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북변(北邊)을 치게 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유한(有限)한 인력(人力)으로써 성공(成功)할 수 없는 군역(軍役)을 시작(始作)한다하여 극력(極力)으로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세종(世宗)은 굽히지 아니하고 야인(野人)을 쳐서 혹(或)은 항복(降服)받고 혹(或)은 두만강(豆滿江) 외(外)로 쫓아내고 두만강(豆滿江) 남(南)에 종성(鍾城) 경원(慶源) 회령(會寧) 경흥(慶興) 은성(穩城) 부령(富寧)의 육진(六鎭)을 새로이 세우고 경상도(慶尙道) 백성(百姓)을 옮겨서 그 지방(地方)을 채우니 발해(渤海)가 망(亡)한지 오백여년(五百餘年)에 이 지대(地帶)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 영토(領土)로 돌아왔으며 귀순(歸順)한 야인(野人)들은 혹(或)은 우리 나라 사람에 동화(同化)하고 혹(或)은 재가승(在家僧)이라는 특수인(特殊人)으로서 그 지방(地方)에 남았었다.
(함경(咸鏡)지명(地名)에 흥(興) 자(字)가 셋이 있는 것은 태조(太祖)의 고조부(高祖父)가 살았던 데를 경흥(慶興)이라 하고 정종(定宗) 태종(太宗)의 출생지(出生地)를 함흥(咸興)이라 하고 영흥(永興)은 태조(太祖)가 낫기 때문에 영흥(永興)이라고 지명(地名)을 각각 지었다. 신흥(新興)은 왜정(倭政)때 새로 지은 지명(地名))
세종(世宗)이 조세제도(租稅制度)에 대(對)하여는 칠팔년(七八年)을 고민(苦悶)하고 드디어 투표제도(投票制度)를 실시(實施)하였다.
서변(西邊)에서는 파저강(婆豬江) 기슭에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 등(等)이 웅거(雄據)하여 자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약탈(掠奪)함으로 태종(太宗)때에 갑산(甲山)의 땅을 나누어 지금의 평안도(平安道)에 여연군(閭延郡)을 두었다. 세종(世宗)때에 이르러 야인(野人)의 침입(侵入)이 잦아서 강안(江岸)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들이 안주(安住)할 수 없으니 세종(世宗)은 이를 다만 방비(防備)하느니보다 한 걸음 나아가 강(江)을 건너서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부실 계획(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강(江)건너는 명(明)나라의 영토(領土)이오 또 임목(林木)이 폐문(蔽文)하여 함부로 쳐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명(明)나라에 대(對)하던 외교(外交)로써 야인(野人)정벌(征伐)의 부득이(不得已)함을 역설(力說)하고 한편(便)으로는 비밀(秘密)히 북벌군(北伐軍)을 훈련(訓練)하고 강변(江邊)에 군량(軍糧)을 비축(備蓄)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많아서 매일(每日) 이 문제(問題)를 가지고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만일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깨지 않으면 서변(西邊) 일대(一帶)는 야인(野人)의 독무대(獨舞臺)가 될 것이니 이를 실행(實行)치 아니할 수 없고 또 이를 치자면 명(明)나라 영토(領土)에 공공연(公公然)하게 들어갈 수가 없음으로 비밀리(秘密裏)에 거사(擧事)하려는 것이다. 이 문제(問題)를 크게 떠들어서 만일 명(明)나라에 들리면 대사(大事)가 틀어질 것이니 조용히 처리(處理)하고자 타일렀다.
그러나 반대(反對)하는 자(者)들은 듣지 아니하고 연일(連日)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대노(大怒)하여 왈(曰) 야인(野人)의 침략(侵略)을 그대로 방임(放任)하자는 것은 국토(國土)를 적(賊)에게 주자는 생각이니 외교관계(外交關係)에 관(關)한 일을 공공연(公公然)하게 떠들면 국가(國家) 장래(將來)에 무슨 이익(利益)이 있느냐 하여 책(責)하고 아국(我國) 인성(人性)이 경조(輕躁)하여 반드시 국가(國家) 대사(大事)를 그르칠지로다. 하고 탄식(嘆息)하였다. 이에 모든 반대(反對)를 물리치고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야인(野人)을 치고 강(江) 이쪽에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세곳을 두니 이로써 압록강(鴨綠江) 기슭에 사군(四郡)이 이루어져서 그 후(後) 다소(多少)의 곡절(曲折)이 없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압록강(鴨綠江)이 완전(完全)히 우리 나라의 국경(國境)이 되었다.
토지(土地)의 조세제도(租稅制度)는 고제(古制)에 의(依)하여 수확량(收穫量)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을 받기로 하였으나 토지(土地)마다 매년(每年) 일정(一定)한 액수(額數)를 받는 공법(貢法)을 쓰느냐 또는 해마다 년년(年年)의 풍흉(豊凶)과 작황(作況)의 양부(良否)를 실지(實地)로 답사(踏査)하여 세액(稅額)을 정(定)하는 답험법(踏驗法)을 쓰느냐 하는 것이 전국적(全國的)으로 일대(一大) 송안(訟案)이 되었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노력(努力)을 들이면 수확(收穫)을 올릴 수 있고 또 수한재(水旱災)가 적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공법(貢法)을 환영(歡迎)하고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고 기후(氣候)의 영향(影響)을 많이 받아서 흉년(凶年)이 잦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답험법(踏驗法)을 환영(歡迎)하였다. 그리하여 공법(貢法)도 써보고 답험법(踏驗法)도 써 보았는데 공법(貢法)에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을 정(定)하는 일이나 답험법(踏驗法)에서 매년(每年)의 수확량(收穫量)을 정(定)하는 일이나 모두 실제(實際)로 간사(幹事)하는 관리(官吏)의 공정(公正)여부(與否)가 법(法)의 정신(精神)을 살리고 죽이고 하였다.
그러나 세제(稅制)를 어느 쪽으로든지 확정(確定)치 아니할 수 없음으로 세종(世宗)은 각도(各道)를 단위(單位)로 하여 각 수령(守令)과 농가(農家)로 하여금 어느 제도(制度)를 찬성(贊成)하는가를 낙점(落點)케 하니 낙점(落點)이라 함은 지금의 투표(投票)와 같은 것이다. 그 결과(結果)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의 삼도(三道)는 공법(貢法) 찬성(贊成) 자(者)가 십(十)의 팔(八)이오 경기(京畿) 강원(江原)의 양도(兩道)는 양법(兩法)의 찬성(贊成)이 대략(大略) 반반(半半)이었다. 이에 민의(民意)를 존중(尊重)히 여겨 삼남(三南)과 경기(京畿) 강원(江原)은 공법(貢法)을 쓰고 서북(西北) 삼도(三道)는 답험법(踏驗法)으로 쓰이게 하되 공법(貢法)을 쓰는 지대(地帶)에서도 토지(土地) 등급(等級)이 낮은 박토(薄土)에 대(對)하여는 재(災)를 주기로 하였다. 동일(同一)한 국내(國內)에서 지방(地方)에 따라서 상이(相異)한 법(法)을 쓴 것은 오직 민정(民情)에 맞추려 함이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오백여년(五百餘年) 전(前)옛날에 민의(民意)를 묻기 위(爲)하여 대중(大衆)의 낙점제(落點制)를 썼다는 것은 일대(一大) 기관(奇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토지제도(土地制度)에 결부제(結負制)를 편용(偏用)한 것은 제도(制度)의 문란(紊亂)을 발생(發生)시킨 일인(一因)이 되었다. 신라시대(新羅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에는 면적(面積)을 표시(表示)하는 경무제(頃畝制)와 수확량(收穫量)을 표시(表示)하는 결부제(結負制)를 병용(竝用)하니 일결(一結)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부(負)가되고 일부(一負)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이 일속(一束)이 되었다. (결(結)은 맥, 부(負)는 짐, 속(束)은 뭇)
경(頃)이라 함은 토지(土地)의 일등지(一等地)의 일결(一結)과 동일(同一)한 면적(面積)이오 경(頃)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무(畝)가된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처음에는 양제(兩制)를 병용(竝用)하다가 그 후(後)에 세액계산(稅額計算)의 편의(便宜)를 위(爲)하여 결부법(結付法)을 전용(專用)하고 이조(李朝)에 이르러 이를 답습(踏襲)하였다. 세종(世宗)때에 토지(土地)를 구등(九等)에 나누었는데 이를 결부(結負)와 경(頃)으로써 비교(比較)하여보면 일등지(一等地) 일결(一結)은 일경(一頃)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하나 구등지(九等地) 일결(一結)은 사경(四頃) 여(餘)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함으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에 따라서 경수(頃數)가 모두 다르고 따라서 그 토지(土地)를 보고 그 결수(結數)를 알 수 없으며 혹(或)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이 농민(農民)의 토지(土地)를 침범(侵犯)하되 국가(國家)의 토지장부(土地帳簿)에는 결 부 수(結負數)만 있고 그 토지(土地)의 지도(地圖)라든가 면적(面積)이든가가 기재(記載)되어 있지 아니함으로 침점(侵占)여부(與否)와 침범(侵犯)한 면적(面積)을 가고(可考)할 길이 전연(全然)없고 이 까닭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각(各) 토지(土地)의 세액(稅額)이 헝클어지기 시작(始作)하였다. (세종(世宗)이 면적(面積)을 재기 위(爲)하여 인재(人才)를 구(求)하니 인재(人才)가 없어서 면적(面積)을 재지 못하여 토지제도(土地制度)가 문란(紊亂)하였다.)
세종(世宗)은 천성(天性)이 총명(聰明)하고 또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궁중(宮中)에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학자(學者)들을 모아서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는 한편 유익(有益)한 서적(書籍)을 많이 만드니 고려사(高麗史)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농사설(農事說)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등(等)은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음악(音樂)에도 많은 관심(關心)을 가져서 해주(海州)에서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南陽)에서 경석(磬石)이 나며,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악기(樂器)를 고쳐 만들고 이어서 구악(舊樂)을 고쳐 다듬으니 지금껏 세계(世界)에 자랑이 되고 우리 나라의 아악(雅樂)은 이때에 완성(完成)한 것이다. 또 역상(曆象) 방면(方面)에도 연구(硏究)를 쌓아서 장영실(蔣英實)과 더불어 대소(大小)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앙부일귀(仰釜日晷) 등(等)을 만들고 동(銅)으로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서울과 각도(各道)에 나눠주어서 우량(雨量)을 재었다. 이는 서기(西紀)1639년(年)보다. 이백년(二百年)이 앞서서 활자(活字)와 함께 우리 문화(文化)의 자랑거리다.
또 우리 문화사(文化史)상(上) 가장 특기(特記)할만한 사업(事業)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국문(國文)의 창제(創製)이다.
세종(世宗)은 「제국(諸國)이 각기(各其) 문자(文字)가 있어서 방언(方言)을 기(記)하거늘 독(獨)히 무(無)하노라 아국(我國)의 어음(語音)이 중국(中國)과 달라서 한자(漢字)와 서로 유통(流通)치 못함으로 우민(愚民)이 언(言)코자 함이 있으되 마침내 그 정(情)을 신(伸)치 못하노라 내가 이를 민망(憫惘)히 여겨 문자(文字)를 신제(新製)하야 인인(人人)으로 하여금 학습(學習)하기 쉽고 일용(日用)에 편(便)케 하고자 하노라」함과 같이 국가의식(國家意識)의 자각(自覺)과 대중교육(大衆敎育)의 필요(必要)에 의(依)하여 국문(國文)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등(等)과 더불어 친(親)히 연구(硏究)를 거듭한 결과 그의 이십팔년(二十八年) (삼천칠백칠십구년 병인(丙寅))에 이십팔자(二十八字)를 지어내어 중외(中外)에 영포(領布)하니 이것이 오늘날 세계(世界)의 여러 문자(文字)중에서 제일(第一) 우수(優秀)한 우리 국문(國文)이다.
이때 한학사상(漢學思想)에 젖은 최만리(崔萬里)같은 무리들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성현(聖賢)의 글이 아니라 하여 쓰기를 반대(反對)한 일이 있었으나 세종(世宗)은 이를 물리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써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내는 한편 관청(官廳)의 공문서(公文書)에 이 글을 쓰게 하며 또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경전(經典)을 번역(飜譯)하여 백성(百姓)들에게 읽혔다. 민간(民間)에서는 이 글을 언문(諺文) 또는 언서(諺書)라하고 한문(漢文)을 번역(飜譯)한 것을 언해(諺解)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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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端宗)과 세조(世祖)
세종(世宗)의 다음에 문종(文宗)은 재위(在位)한지 겨우 이년(二年)이오 그 아들 단종(端宗)이 왕(王)이 되니 나이 겨우 십이세(十二歲)이다. 그런데 당시(當時) 단종(端宗)에게는 모후(母后)가 없고 근친(近親)이라고는 숙부(叔父) 칠인(七人) 즉(卽) 수양대군(首陽大君) 以下 七人君이 있어 모두 强盛하니 國民들은 王의 장래에 대하여 모두 위구(危懼)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전일(前日)에 세종(世宗)이 승하(昇遐)하였을 때에 국민(國民)이 성군(聖君)을 잃은 것을 크게 슬퍼하였는데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하였을 때에는 그때보다도 더욱 슬퍼하니 그것은 문종(文宗)을 위(爲)한 슬픔이 아니라 어린 단종(端宗)이 보호자(保護者)가 없고 칠대군(七大君)의 힘이 강대(强大)함으로 국사(國事)가 장차(將次) 어떻게될까 근심하는 슬픔이었다.
단종(端宗) 이년(二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등(等)과 더불어 난(亂)을 일으켜, 그때 정승(政丞)으로 있는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等)을 죽이고 스스로 군국(軍國) 대권(大權)을 잡고 있더니 또 이년(二年)후(後)에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니 이가 세조(世祖)이다. 이에 단종(端宗)의 舊臣中에는 兩派로 갈려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等은 世祖에게 붙고 世祖의 行爲를 통분(痛憤)히 생각하는 성삼문(成三問) 박팽연(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等)은 세조(世祖)를 몰아내고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려 하다가 미연(未然)에 발각(發覺)되어 그 가족(家族)및 연루(連累)자(者)들과 함께 사형(死刑)을 당(當)하고 단종(端宗)은 노산군(魯山君)으로 내려서 영월(寧越)로 귀양가더니 이듬해에 세조(世祖)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에서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일으키다가 패(敗)하여 죽고 단종(端宗)도 또한 세조(世祖)에게 해(害)된 바 되었다.
세조(世祖)는 왕위(王位)를 억지로 얻었으나, 정치(政治)를 잘하여 성장기(成長期)에 있는 이조(李朝)를 힘써 배양(培養)하였다. 왕(王)은 억불정책(抑佛政策)을 늦추어서 서울 안에 원각사(圓覺寺)를 짓고 십삼층탑(十三層塔)을 쌓으며 刊都監을 두어서 佛經을 많이 박아내었다.
특히 民間의 弊害를 없애기에 努力하여 백성(百姓)들이 억울(抑鬱)한 일이 있는 때는 직접(直接)으로 왕(王)에게 상서(上書)하게 하고 비록 세력(勢力)이 있는 자(者)라도 민폐(民弊)를 짓는 자(者)는 용서(容恕)함이 없이 처벌(處罰)하였다.
(권람(權擥)은 권근(權近)의 손자(孫子)라 권근(權近)은 고려(高麗) 신하(臣下)로써 이씨(李氏) 득국(得國)함에 귀화(歸化)하였다. 처음에는 태조(太祖)가 써먹기 위하여 잘 대우(待遇)하더니 이씨(李氏)가 완전(完全)히 득국(得國)하니 권근(權近)을 절개(節槪)없는 신하(臣下)라고 물리치니 노말년(老末年)에 분(忿)함을 참지 못하였다. 이를 손자(孫子)가 알고 단종(端宗)이 임금이 되어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빼앗는다는 것을 듣고 이에 참여(參與)하여 이씨(李氏)끼리 싸우라는 내용(內容)계획(計劃)을 세웠다. 그러니 고려(高麗) 신하(臣下)가 이조(李朝) 집안끼리 싸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육신(死六臣)은 다만 단종(端宗)이 왕위(王位)에 오르면 세조(世祖)보다 정치(政治)를 잘한다하여, 또 나라를 위(爲)하여 단종(端宗)을 받든 것이 아니라 단종(端宗)에만 충성(忠誠)한 것이다. 세조(世祖)가 한 일은 무리(無理)가 아니고 당연(當然)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설(說)도 있다.)
당시(當時) 민폐(民弊)의 가장 큰 자(者)는 방납(防納)이니 방납(防納)이라 함은 백성(百姓)이 국가(國家)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상인(商人)이나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이 대납(代納)하는 것이다. 당시(當時)의 백성(百姓)이 국가(國家)에 대한 부담(負擔)의 의무(義務)에는 토지생산(土地生産)의 일부(一部)를 바치는 조세(租稅), 각(各) 지방(地方)에서 산출(産出)되는 특산품(特産品)을 바치는 공물(貢物), 병역(兵役), 축성(築城), 운수(運輸) 등(等)에 종사(從事)하는 부역(賦役)의 세 가지가 있었다.
공물(貢物)은 전국(全國) 각(各) 군(郡)을 단위(單位)로 하여 바치는 것인데 예(例)컨대 해변(海邊) 군(郡)은 어물(魚物) 해초(海草) 등등(等等) 산간(山間) 군(郡)은 모피(毛皮) 약재(藥材)등(等) 평야(平野) 군(郡)은 연초(煙草) 과실(果實) 명유(明油)등(等) 전주(全州)의 지(紙), 해주(海州)의 묵(墨), 갑산(甲山)의 산삼(山蔘), 강원도(江原道)의 청밀(淸蜜), 전라도(全羅道) 죽물(竹物) 등(等)이오 정부(政府)에서 수백종(數百種)의 산물(産物)을 각군(各郡) 산출액(産出額)과 호구수(戶口數)를 참작(參酌)하여 각도(各道)에 배정(配定)하고 도(道)는 군(郡)에 배정(配定)하고 군(郡)은 백성(百姓)의 각(各)에 배정(配定)하며 백성(百姓)이 자기(自己)에게 배정(配定)된 공물(貢物)을 군수(郡守)에게 바치면 군(郡)의 이서(吏胥)들이 그것을 검사(檢査)하여 수납(收納)하니 당시(當時) 공물(貢物)의 부담(負擔)은 조세(租稅)보다 몇 배나 중(重)하고 검사(檢査)에 불합격(不合格)되면 다시 호품(好品)을 구득(求得)하지 아니하면 안되므로 백성(百姓)의 손해(損害)가 적지 아니하였고 이서(吏胥)들은 백성(百姓)의 약점(弱點)을 승(乘)하여 비록 호품(好品)이라도 불합격(不合格)으로 퇴각(退却)하고 상인(商人)과 결탁(結託)하여 백성(百姓)으로부터 시가(時價)의 이삼배(二三倍)를 걷어서 그 물품(物品)을 대납(代納)하고 차액(差額)되는 이익(利益)을 분식(分食)하는 것이다.
대저(大抵) 이조(李朝)의 이서(吏胥)는 행정상(行政上) 한 특수계급(特殊階級)으로 존재(存在)하였다. 이서(吏胥)는 원래(原來) 국가(國家)의 관리(官吏)가 아니오 각군(各郡)의 행정사무(行政事務)를 돕는 사무원(事務員)으로서 아무런 봉급(俸給)이나 보수(報酬)를 받지 아니하는지라 이조개국(李朝開國) 초(初)에는 사무(事務)는 다단(多端)하되 생활비(生活費)를 얻을 길이 없음으로 고역(苦役)과 궁곤(窮困)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逃亡)하는 자(者)도 적지 아니하더니 그 후(後)에 백성(百姓)들로부터 횡렴(橫斂)하는 곡경(曲逕)을 발견(發見)하고 또 소위(所謂) 군수(郡守) 현령(縣令)은 그 지방(地方)의 실정(實情)을 잘 알고 있는 이서(吏胥)의 힘을 받지 아니하면 군정(郡政)을 행(行)할 수가 없음으로 군행정(郡行政)의 실권(實權)은 전(全)혀 이서(吏胥)의 손에 쥐여있었고 더욱이 전국(全國) 삼백여군(三百餘郡)에는 모두 그 지방(地方) 출신(出身)의 이서(吏胥)가 있어 국가(國家)에서 임명(任命)한 수령(守令)과 백성(百姓)의 중간(中間)에 개재(介在)하여 사무계급(事務階級)으로써 일대세력(一大勢力)을 형성(形成)하고 있어 수령(守令)은 물론(勿論)이오 중앙정부(中央政府)에서도 그 세력(勢力)을 무시(無始)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서(吏胥)들이 공물(貢物) 검사(檢査)를 하게되니 그 합검(合檢) 불합검(不合檢)은 전(專)혀 그들의 일구일필(一口一筆)에 달려 있고 거기에 따라서 방납제(防納制)가 생기게 되니 백성(百姓)에게 끼치는 폐해(弊害)는 실(實)로 막대(莫大)하고 세조재야(世祖在也)하는 동안은 엄격(嚴格)하고 과단(果斷)있는 행정(行政)으로 능(能)히 이 폐해(弊害)를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임금 때로부터 점점 부활(復活)되고 말았다.
세종(世宗)이 육진(六鎭)을 건설(建設)한 뒤에 야인(野人)들의 침략(侵略)이 그치지 아니 하고 단종(端宗) 때에는 그 세력(勢力)이 더욱 성(盛)하였음으로 조신(朝臣) 중(中)에는 육진(六鎭)을 포기(抛棄)하자는 비굴(卑屈)한 논자(論者)도 있어 한동안 서로 의론(議論)을 다투었다. 세조(世祖)가 왕(王)이 된 뒤에 처음에 압록강(鴨綠江)기슭의 사군(四郡)을 폐(廢)하고 야인(野人)들을 무마(撫摩)하기로 하였으나 갈수록 그들의 버릇이 사나워 짐으로 세조(世祖)는 회령(會寧)을 엿보는 야인(野人)을 쳐서 이를 두만강(豆滿江) 북쪽으로 쫓고 또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강(江) 내외(內外)의 야인(野人)의 소굴(巢窟)을 엎었으며 어유소(魚有沼) 남소(南沼) 장군(將軍) 등(等)을 시켜서 파저강(婆豬江)의 야인(野人) 괴수(魁首) 이만주(李滿住)의 부자(父子)를 잡아 죽였다.
세조(世祖)의 왕위(王位) 쟁탈(爭奪) 난(亂)은 이씨왕가(李氏王家)의 개국(開國) 초(初)부터 있은 예(例)의 골육전(骨肉戰)이오 육신(六臣)의 사(死)는 주(主)를 위(爲)한 사절(死節)이라 군주정치(君主政治) 시대(時代)에는 흔히 있는 일이오 아무런 특이(特異)한 것이 없으나 다만 이 난(亂)이 우리 나라의 정치(政治)와 인심(人心)에 미친 영향(影響)은 실(實)로 크고 또 심각(深刻)한 것이었다. 고려(高麗) 말(末)에 정몽주(鄭夢周)가 국사(國事)에 순절(殉節)하고 그 제자(弟子) 길재(吉再)(호(號)는 야은(冶隱))가 정몽주(鄭夢周)의 이학(理學) 계통(系統)을 계승(繼承)하고 그것이 김숙자(金叔慈)(호(號)는 강호(江湖))를 거쳐 김종직(金宗直)(호(號)는 점필제(佔畢齊)에게로 전(傳)하였는데 이 계통(系統)의 학(學)을 받은 유사(儒士)들은 절의(節義)에 대(對)한 관념(觀念)이 가장 강(强)하고 따라서 세조(世祖)의 행사(行事)에 대(對)하여 큰 분노(憤怒)를 품고 세조(世祖)에게 붙어서 공신(功臣)이 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等)을 극도(極度)로 미워함은 물론(勿論)이오 한명회(韓明澮) 같은 사람은 이 공로(功勞)로 국구(國舅)가 되었기 때문에 유사(儒士)들은 왕실(王室)의 외척(外戚)까지를 몹시 미워하여 이때로부터 유사(儒士) 대(對) 공신(功臣) 척리(戚里)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이 벌어져서 이래(爾來) 백여년(百餘年)동안을 정계(政界)의 대소사건(大小事件)이 주(主)로 유사(儒士)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으로부터 일어났고 필경(畢竟) 우리 사회(社會)를 망(亡)쳐버린 붕당(朋黨) 싸움의 시초(始初)인 동서분당(東西分黨)도 유사(儒士) 대(對) 척리(戚里)의 싸움에서 발단(發端)한 것이다.
또 한가지 영향(影響)은 벼슬하는 사람들이 군주(君主)에 충성(忠誠)을 다하다가 세조(世祖)의 독수(毒手)에 걸려서 무참(無慘)히 죽고 그 가족(家族)까지 학살(虐殺) 당(當)하는 것을 보고 세사(世事)의 무상(無常)함을 보고 장태식(長太息)하고 자후(自後)로는 보신지책(保身之策)에 치중(置中)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항직(伉直)한 행동(行動)을 피(避)하려 하였음으로 정계(政界)의 공기(空氣)가 인순고식(因循姑息)과 유유범범(悠悠泛泛)에 흘러서 창조(創造)와 혁신(革新)을 행(行)하려는 활기(活氣)를 전(全)혀 잃으니 이것이 이조일대(李朝一代)를 통(通)하여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이 생기지 못한 주인(主因)이 되었다.
이조개국(李朝開國) 이래(以來)로 서북인(西北人)을 쓰지 아니함으로 서북인(西北人)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혁명(革命)을 성공(成功)한 서북(西北) 맹장(猛將)들도 모두 분기(憤氣)를 품고 향리(鄕里)에 돌아갔으며 특(特)히 태조(太祖)의 아장(牙將)으로 있던 동두란(佟豆蘭)도 태조(太祖)가 성(姓)을 이씨(李氏)를 주고 청해백(淸海伯)을 봉(封)하여 특수(特殊)한 대우(待遇)를 하였으나 역시(亦是) 불만(不滿)을 품고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그 털과 상소문(上疏文)과 함께 봉(封)하여 태조(太祖)에게 올리고 도망(逃亡)하여 그 고향(故鄕)인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으로 돌아가니 태조(太祖)는 후일(後日)에 혹(或) 변(變)을 생(生)할까 두려워하여 그 가족(家族)을 한양(漢陽)으로 옮겨온 일도 있다.
그러던 中 세조(世祖)의 난(亂)이 일어나서 인심(人心)이 불안하게 되자 함경(咸鏡)사람 이시애(李施愛)가 난리(亂離)를 꾸며서 함경감사(咸鏡監司)(신숙주(申叔舟)의 아들)를 죽이고 각지(各地)에서 난민(亂民)이 일어나서 수령(守令)들을 죽였다. 세조(世祖)는 군사(軍士)를 보내어 여러 달만에 평정(平定)하고 이래백년(爾來百年)동안 함경도(咸鏡道)에 停擧를 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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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
세조(世祖)의 다음에 예종(睿宗)은 위(位)에 있은지 일년(一年)이오 성종(成宗)이 왕(王)이되니 이때는 이조(李朝)의 기초(基礎)가 굳어지고 또 여러 가지 제도(制度)가 갖추어졌다. 왕(王)은 유신(儒臣) 김종직(金宗直) 등(等)을 쓰고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문선(東文選)같은 책(冊)을 만들고 또 세조(世祖)때에 시작(始作)하여 끝마치지 못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完成)하니 이는 이후(以後) 수백년(數百年)동안 정치(政治)를 행(行)하는 기틀이 되었다. 집현전(集賢殿)은 세조(世祖)때에 폐(廢)하였으나 성종(成宗)은 홍문관(弘文館)을 새로이 두고 젊은 학자(學者)들을 공부(工夫)시키던 호당(湖堂)도 다시 시작(始作)하였다.
사회(社會)의 계급(階級)에는 네 층(層)이 있어 그 지위(地位)가 직업(職業)과 사회적(社會的) 대우(待遇)를 달리 하였으며 대개(大槪)는 거주지역(居住地域)도 달리하고 또 다른 계급(階級)과 혼인(婚姻)하는 일도 적었다. 여러 계급(階級) 중(中)에 가장 상층(上層)에 있는 것이 양반(兩班)이니 양반(兩班)이라 함은 동반(東班)인 문관(文官)과 서반(西班)인 무관(武官)을 합(合)한 말이다. 공경(公卿)과 사대부(士大夫) 계급(階級)을 통틀어 말함이며 이들은 정치(政治)를 지도(指導)하는 지위(地位)를 차지하여 모든 특권(特權)과 향락(享樂)을 누리었다.
그 다음에 중인(中人) 계급(階級)이 있으니 그들은 의관(醫官) 역관(譯官) 계사(計士) 관상(觀相) 율학(律學) 사자(寫字) 도화(圖畵) 등(等) 국가(國家)에 요긴(要緊)한 기술(技術) 방면(方面)의 일을 맡아보았다.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는 양반과 상민(常民)의 중간(中間)이었으며 이 밖에 이서(吏胥)와 군교(軍校) 같은 층(層)은 보다 얼마쯤 낮은 것이었으나 역시(亦是) 중인(中人) 계급(階級)에 속(屬)하였다. 그 다음에 상민계급(常民階級)은 농업(農業) 공업(工業)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수(數)가 가장 많고 또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이루고 있으나 그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가 낮아서 자기(自己)의 생존권(生存權)을 보전(保全)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양반(兩班)과 중인(中人)에게 눌리어 지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천민계급(賤民階級)은 노비(奴婢)를 비롯하여 배우(俳優) 무당(巫堂) 기생(妓生) 역졸(驛卒) 백정(白丁) 등(等)을 말하는 것이니 노비(奴婢)에는 국사(國事)에 속(屬)하는 것을 공노비(公奴婢)라하고 개인가(個人家)에 속(屬)하는 것은 사노비(私奴婢)라 하며 백정(白丁)에도 지금에 흔히 말하는 소 잡는 사람만이 백정(白丁)이 아니라 유기(柳器) 장피(匠皮) 혁공(革工) 같은 것도 모두 백정(白丁)이라 불렀고 이들은 인권(人權)을 주장(主張)하지 못함은 물론(勿論)이오 어떤 경우(境遇)에는 우마(牛馬)와 동양(同樣)의 대우(待遇)를 받았다.
외교관계(外交關係)에 있어서는 명(明)나라에 대(對)한 조공(朝貢)과 일본(日本) 남양(南陽) 등(等)에 대(對)한 교린(交隣)이 있었는데 이러한 외교(外交)의 이면(裏面)에는 인국(隣國)들과 평화(平和)로운 무역(貿易)을 행(行)하려는 것이 있었다. 명(明)나라와의 관계(關係)는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무역(朝貢貿易)을 행(行)하고 저쪽에서 사신(使臣)이 오면 이를 칙사(勅使)라 하여 특별(特別)히 대우(待遇)하였는데 조공무역(朝貢貿易)이라 함은 물공(物貢)의 형식(形式)을 통(通)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의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것으로 이는 중국(中國) 사람들의 대국연(大國然)하는 자존심(自尊心)에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 공물(貢物)의 형식(形式)으로 내어가는 물건(物件)은 금은(金銀), 인삼(人蔘), 표피(豹皮), 저포(苧布), 화문석(花紋席), 나전(螺鈿), 백지(白紙) 등(等)이었고 그 대신(代身) 저쪽에서 들어오는 것은 주(主)로 견단(絹緞), 자기(磁器), 약재(藥材), 서적(書籍) 등(等)이었으며 이밖에도 국경(國境) 지대(地帶)의 사무역(私貿易)과 밀무역(密貿易)을 통(通)하여 두 나라 사이의 물자(物資)가 많이 교류(交流)되었으니 이 시대(時代)는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비교적(比較的) 자유(自由)로 중국(中國)으로 왕래(往來)하면서 학문(學問)도 배우고 무역(貿易)도 하던 때와 달라서 공적(公的)으로 중국(中國)을 다니는 이외(以外)에는 왕래(往來)를 엄금(嚴禁)하는 쇄국시대(鎖國時代)라 물자(物資)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이 여의(如意)치 못함으로 압록강(鴨綠江) 안(岸)의 중강진(中江鎭)과 두만강(豆滿江)안(岸)에서 년(年) 일이차(一二次)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외(外)에 밀역(密易)이 연중(年中) 성행(盛行)하였다. 명(明)나라에 바치던 금은(金銀) 공(貢)은 세종(世宗)때에 외교(外交) 교섭(交涉)에 의(依)하여 면제(免除)되고 그 후(後)로는 우리 나라에서 금은(金銀)이 나지 아니함을 보이기 위(爲)하여 금은광(金銀鑛)을 폐(廢)한 일도 있었다.
일본(日本)과의 사이는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대마도(對馬島)를 친 이후(以後)로 한때 교통(交通)이 그쳤었으나 대마도(對馬島)는 산(山)이 많고 식량(食糧) 기타(其他) 물산(物産)이 적어서 우리 나라의 힘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음으로 저쪽에서 사죄(謝罪)의 뜻을 표(表)하고 다시 서로 화호(和好)하기를 간청(懇請)하였다. 이에 세종(世宗)은 삼포(三浦)를 열어서 대마도인(對馬島人)이 와서 무역(貿易)함을 허락(許諾)하니 삼포(三浦)라 함은 제포(薺浦) (지금의 창원군(昌原郡)마산방(馬山傍) 제덕리(薺德里)의 내이포(乃而浦) 부산포(釜山浦) 울산(蔚山)의 염포(塩浦)이다. 그 후(後)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어서 해마다 대마도(對馬島) 왕(王)이 보내는 배를 오십(五十)척(隻)으로 한정(限定)하며 또 미두(米豆) 이백석(二百石) 씩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무역품(貿易品)을 왜인(倭人)들은 동(銅) 은(銀) 유황(硫黃) 등(等)의 광산물(鑛産物)을 비롯하여 남양(南洋)의 특산(特産)인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등(等)을 들여오고 우리 나라에서는 면포(綿布) 마포(麻布) 미두(米豆) 백지(白紙) 서적(書籍)(특히 대장경(大藏經))을 보내었다.
여진(女眞)과의 사이에는 두만강(豆滿江) 기슭에 경성(鏡城) 경원(鏡源)의 무역소(貿易所)를 열어서 그들의 마필(馬匹)과 여러 가지 수피(獸皮) 즉(卽) 토표피(土豹皮), 초서피(貂鼠皮), 웅피(熊皮), 녹피(鹿皮)를 들여오는 대신(代身) 이쪽에서 금은(金銀), 마포(麻布), 저포(苧布), 면포(綿布), 농구(農具), 부정(釜鼎), 유기(鍮器), 백지(白紙), 염장(鹽醬), 주(酒) 등(等)을 내어 보냈으며 또 여진(女眞)의 추장(酋長)들에게 직첩(職帖)을 주어서 그 계급(階級)에 따라 서울에 와서 진상(進上) 숙배(肅拜)한 이름으로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하게 하니 이는 조공무역(朝貢貿易)의 형식(形式)을 본뜬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지금의 태평로(太平路)에 태평관(太平館)이 있어 명(明)나라 사신(使臣)들을 접대(接待)하고 동대문(東大門)안에는 북평관(北平館)이 있어 왜인(倭人)들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와서 묵을 때면 후시(後市)라는 명목(名目)으로 館所 에서 무역(貿易)이 행(行)하여 졌다. 이 밖에 유구국(琉球國)에서도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설당(雪糖), 석(錫), 서각(犀角) 등(等)의 여러 가지 진기(珍奇)한 남양산물(南洋産物)을 가져오고 우리 나라의 면포(綿布), 마포(麻布), 대장경(大藏經) 등(等)을 얻어 갔으며 섬라(暹羅)(지금의 태국(泰國))에서도 방물(方物)을 가지고 사신(使臣)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外國) 사신(使臣)이 우리 국경(國境)에 들어오면 정부(政府)에서 그들을 후대(厚待)하는 뜻으로서 서울까지 오는 비용(費用)과 서울에서 머물고 다시 돌아 갈때 국경(國境)까지 나가는 비용(費用)을 부담(負擔)하였고 그 보내는 물건(物件)도 가져온 물건(物件)의 몇배(倍)를 주었음으로 남양(南洋)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게 되었고 우리 나라의 부담(負擔)이 적지 아니하니 이는 외국(外國)이 우리 나라에 조공(朝貢)한다는 형식(形式)을 꾸미고 무역상(貿易上) 실권(實權)을 취(取)하려 함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외국(外國)의 조공(朝貢)을 받는 것을 만족(滿足)하게 생각할 뿐이오 우리 나라 사람이 해외(海外)에 나가서 무역(貿易)하는 길을 전연(全然) 폐쇄(閉鎖)하여 버리니 이 까닭에 무역관계(貿易關係)에는 항상(恒常) 손(損)을 보고 국민(國民)의 해외(海外) 웅비(雄飛)의 기상(氣象)은 날로 사라졌다.
성종(成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팔구(八九)십년(十年)이라 국가(國家)의 기초(基礎)가 굳어진 때라 점차(漸次) 보수(保守)의 경향(傾向)이 생(生)하고 모든 부면(部面)에 경화(硬化) 침체(沈滯)의 빛이 농후(濃厚)하여지니 사가(史家)들은 이를 성극시대장쇠(盛極時代將衰)의 기(期)라 한다.
특(特)히 귀족(貴族)의 세력(勢力)이 강(强)하고 반상(班常)의 구별(區別)이 엄(嚴)하며 전국적(全國的)으로 불과(不過) 삼십(三十) 내외(內外)의 족벌(族閥)이 정치(政治)를 전행(專行)하고 지방별(地方別)로는 경기(京畿) 충청(忠淸) 경남(慶南)의 삼도(三道)가 귀족(貴族) 주거(住居)의 중심(中心)이 되었다. 또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제도(制度)가 더욱 엄격(嚴格)하여 여자(女子)의 개가(改嫁)를 불허(不許)하고 재가(再嫁)녀(女)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국가(國家)가 서용(敍用)치 아니하고 귀족(貴族)들은 과부(寡婦)를 금고(禁錮)하는 것을 가내(家內)의 영예(榮譽)로 여겼으며 첩(妾)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서얼(庶孼)이라 하여 천대(賤待)하고 서자(庶子)들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니 이 서자(庶子)는 소위(所謂) 그 아비된 자(者)가 향락(享樂)과 음욕(淫慾)의 만족(滿足)을 얻기 위(爲)하여 생(生)긴 산물(産物)이오 모복(母腹)으로부터 낙지(落地)하는 순간(瞬間)이 이미 천대(賤待)를 받을 운명(運命)을 가졌으니 서자(庶子)의 서자(庶子)된 죄(罪)는 아비에게 있는 것이오 서자(庶子)자신(自身)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된 자(者)는 첩(妾)을 축(蓄)하는 날에 벌써 서자(庶子)의 출생(出生)할 것이 약속(約束)되었고 그 서자(庶子)가 사회(社會)로부터 천대(賤待)를 받는 것을 알면서 축첩생활(蓄妾生活)을 하는 것은 그 심신(心身)의 부패(腐敗)한 所致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오 더욱이 서자얼(庶子孼) 천대(賤待)의 제도(制度)는 축첩(蓄妾)을 가장 많이 하는 귀족계급(貴族階級)들이 만든 것이다.
세조(世祖)때에는 강력(强力)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행(行)하여 비록 간관(諫官)이라 하더라도 언론(言論)의 자유(自由)를 행(行)치 아니하더니 성종(成宗)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고 언어(言語)를 개(開)하여 간관(諫官)들의 언론자유(言論自由)를 인(認)하니 이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이 벌어졌다. 유신(儒臣)들은 세조(世祖)때에 가슴속에 쌓여 있으되 발표(發表)할 수 없었던 울분(鬱憤)이 일시(一時)에 터져 나와서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조금이라도 과오(過誤)를 범(犯)함이 있는 때는 일호(一毫)의 관용(寬容)이 없이 논박(論駁) 공격(攻擊)하고 어느 한 사람이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하면 유신(儒臣) 전체(全體)가 그를 응원(應援)하여 조정(朝廷)은 유신(儒臣)이 지도권(指導權)을 잡고 성종(成宗)도 대체(大體)로 유신(儒臣)들의 말을 청종(聽從)하였다.
이때의 유교(儒敎)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한학(漢學)과 달라서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인 성리학(性理學)을 말하는 것이니 성리학(性理學)을 또한 이기설(理氣說)이라 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제자(弟子) 가운데서 성리학(性理學)에 가장 밝은 사람은 정여창(鄭汝昌) (호(號) 일두(一蠹)) 김굉필(金宏弼)(호(號) 한훤당(寒暄堂))이니 정여창(鄭汝昌)의 이기론(理氣論)에는 「理의 在하는 바에 氣가 또한 聚하고 氣가 動하는 바에 理가 또한 着하여 彼此의 別이 없다. 그러나 理는 혼연지선(渾然至善)하여 爲함이 없고 氣는 순리청탁(醇醨(漓)淸濁)하여 運用이 있어 피차(彼此)의 別이 있으니 이를 一하되 二하고 二하되 一한다 함이다. 理가 없으면 氣가 응주(凝做)할 바가 없고 氣가 없으면 理가 流行치 못한다」하니 이것이 理氣說의 大要이다. 이 이기설(理氣說)의 새로운 이론(理論)은 청년학자(靑年學者)들 사이에 환영(歡迎)되고 李朝一代 學問의 中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였음으로 교육(敎育)과 과거(科擧)도 또한 유학(儒學)을 中心으로 하였으니 교육기관(敎育機關)으로는 서울에 성균관(成均館)(지금의 국립대학교)을 비롯하여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고 외방(外方)에는 고을마다 향교(鄕校)가 있고 마을에는 서당(書堂)이 있어 주(主)로 유교(儒敎)의 경전(經典)을 가르쳤고 이밖에 특수(特殊) 과목(科目)으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서학(書學) 화학(畵學)을 연구(硏究)하는 기관(機關)이 있고 또 한어(漢語) 여진어(女眞語) 몽고어(蒙古語) 왜어(倭語) 등(等)을 가르치는 기관(機關)도 있다.
과거(科擧)는 국가(國家)에서 인재(人才)를 취(取)하는 최고(最高) 시험(試驗)이라 태종(太宗) 세종(世宗)의 시대(時代)에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등(等) 주요(主要)한 현실문제(現實問題)에 대(對)한 논문(論文)을 시험(試驗)하더니 성종(成宗) 이후(以後)에는 그러한 논문(論文) 시험(試驗)이 점점 적어지고 주(主)로 문장(文章)을 취(取)하는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이 행(行)하니 이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은 그 속에 치국(治國) 경륜(經綸)이 있는 것도 아니오 국민생활(國民生活) 상(上)에 어떠한 관련(關聯)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다만 공교(工巧)로운 심장적구(尋章摘句)와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일삼는 것이니 이 까닭에 소위(所謂) 학문(學問)은 형식(形式)에 흐르고 실용(實用)이 없는 귀족계급(貴族階級)의 유희물(遊戱物)이 되고 말았다. 그럼으로 정여창(鄭汝昌)같은 이는 교시(巧詩) 하는 士를 取하지 아니하여 말하되 「詩는 성정(性情)의 發함이라 어찌 설설(屑屑)하게 工夫를 강하(强下)하리오」하였다.
이조개국(李朝開國) 後에 외방관리(外方官吏)의 민폐(民弊)를 作하는 者가 있고 없음을 조사(調査)하기 爲하여 자주 경차관(敬差官)이라는 특사(特使)를 보내더니 그 後에 그 관명(官名)을 어사(御使)라 고쳐서 비밀(秘密)히 각도(各道)에 보내 이가 암행어사(暗行御史)의 기원(起源)이다. 성종(成宗)때에 이르러 王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여 官吏가 罪를 받는 者가 極히 적고 태평성대(泰平盛代)라고 일컬었으나 그 반면(反面)에 민폐(民弊)를 작(作)하는 관리(官吏)가 많이 생겨서 사회내부(社會內部)에 퇴폐(頹廢)의 기운(氣運)이 싹트기 시작(始作)하였다. 이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각도(各道)에 파견(派遣)하니 당시(當時) 조지서(趙之瑞) 정광필(鄭光弼) 김일손(金馹孫) 같은 이가 모두 명어사(名御使)였다.
어사(御使)의 임무(任務)는 대체(大體)로 국법(國法)을 지키지 않는 者, 부모(父母)에 불효(不孝)하는 양풍미속(良風美俗)을 해(害)하는 者, 수령(守令)이나 이서(吏胥)들이 국곡(國穀)을 도적(盜賊)하고 인민(人民)을 괴롭게 하는 者等 법률(法律)과 도덕(道德)에 어그러지는 행위일체(行爲 一切)를 조사(調査)하고 그것을 범(犯)한 者를 발견(發見)할 時는 王의 대리(代理)의 자격(資格)으로 그 고을에 출도(出道)하여 혹(或)은 수령(守令)을 파면(罷免)시킬 수도 있고 혹(或)은 죄인(罪人)을 선참후계(先斬後啓)할 수도 있음으로 외방(外方)에서는 어사(御使)를 호(虎)라고도 불렀다.
어사(御使)가 수월(數月)의 동안에 일도(一道)를 순행(巡行)하는 것임으로 간리(奸吏)들의 소행(所行)을 一 一히 탐지(探知)할 수는 없으나 한번 출동(出動)하면 일도(一道)가 숙연(肅然)하여 간악(奸惡)을 자행(恣行)치 못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에 축묘(畜猫)가 있으매 서(鼠)가 사행(肆行)치 못한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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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
성종(成宗) 왕비(王妃) 윤씨(尹氏)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生母)라 윤비(尹妃)가 왕(王)에게 불손(不遜)한 일이 있음으로 왕(王)이 폐위(廢位)하였다가 죽였다. 연산군(燕山君)은 성질(性質)이 원래(元來) 난폭(亂暴)한데 그 모(母)가 원사(寃死)함을 알고 심중(心中)에 깊은 악감(惡感)을 품고 있었다. 이때 신하(臣下)들 중(中)에는 후일(後日)에 연산군(燕山君)이 왕위(王位)에 오르면 반드시 국사(國事)를 크게 그르치리라고 풍간(諷諫)한 사람도 있었으나 성종(成宗)도 그 성미(性味)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참아 세자(世子)를 폐(廢)할 수가 없다하여 실행(實行)치 못하고 마침내 연산군(燕山君)을 세워서 이조(李朝) 쇠퇴(衰頹)의 단(端)을 열었으니 이는 전(專)혀 성종(成宗) 유약(柔弱)의 소치(所致)이다.
연산군(燕山君)이 왕(王)이 된 후(後)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은 여전(如前)히 격화(激化)하였다. 성종(成宗)은 항상(恒常) 유신(儒臣)을 옹호(擁護)한 까닭에 유신(儒臣)의 언론(言論)이 실행(實行)되었지만 연산군(燕山君)은 혼암(昏暗)한 임금이라 유신(儒臣)들이 공신척리(功臣戚里)를 공격(攻擊)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또 그때 조정(朝廷)에는 공신(功臣)의 자손(子孫)들과 외척(外戚)의 무리가 권세(權勢)를 잡고있어 유신(儒臣)들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런데 김종직(金宗直)이 일즉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을 지은 일이 있으니 이 글은 옛날 중국(中國)에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라는 어린 임금을 세우고 섬기다가 죽인 일이 있는데 은연(隱然)히 의제(義帝)를 단종(端宗)에 비(比)하고 항우(項羽)를 세조(世祖)에게 비(比)하고 의제(義帝)를 조(弔)함은 곳 단종(端宗)을 조(弔)함이라 종직(宗直)의 제자(弟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이 되어 이 글을 사초(史草)에 기재(記載)하고 그 끝에 「忠憤之文」이라고 附記하였다.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 중(中)의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等)이 이 사초(史草)를 보고 이는 세조(世祖)의 일을 비방(誹謗)하는 것이라 하여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리니 연산군(燕山君)은 이를 대역죄(大逆罪)라 하여 김종직(金宗直)의 시체(屍體)를 파내어 버리고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等)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弟子)들을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 또는 사화(史禍)라 하고 이조(李朝) 유학계(儒學界)에 제일차(第一次)의 겁운(劫運)이었다.
연산군(燕山君)은 음탕(淫蕩)하고 유연(遊宴)을 좋아하여 막대(莫大)한 재정(財政)을 소비(消費)하고 유연비(遊宴費)가 부족(不足)하게 되자 인민(人民)으로부터 공물(貢物)을 가징(加徵)하여 조종(祖宗) 이래(以來)의 규준(規準)을 깨뜨리고 간인배(奸人輩)를 등용(登用)하여 국정(國政)을 혼란(混亂)케 하더니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있은지 육년(六年)만에 그 생모(生母) 윤씨(尹氏)를 폐(廢)하여 죽일 것을 주장(主張)한 사람들을 조사(調査)하여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 보내니 이를 갑자사화(甲子士禍)라 하고 유학계(儒學界)의 제이차(第二次) 겁운(劫運)이었다. 두번의 사화(士禍)가 있은 후(後)로 연산군(燕山君)은 학정(虐政)이 더욱 심(甚)하여 정치(政治)가 어지럽고 백성(百姓)이 살 수 없으니 이에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等)이 반정운동(反正運動)을 일으키어 연산군(燕山君)을 폐(廢)하여 강화도(江華島)의 교동(喬桐)에 내치고 연산군(燕山君)의 아우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推戴)하여 세우니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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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中宗反正)후(後)의 국정(國政)
중종(中宗)의 반정(反正)은 연산군(燕山君)의 학정(虐政)에 괴로움을 받던 백성(百姓)과 두 번의 사화(士禍)에 기(氣)가 꺾어진 유학계(儒學界)에 한 광명(光明)을 주고 활기(活氣)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사회(社會)의 행방면(行方面)에 개혁(改革)의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이때 김굉필(金宏弼)의 제자(弟子)에 조광조(趙光祖)(호(號) 정암(靜菴))가 있으니 그는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고 정치(政治)를 정화(淨化)함으로써 기임(己任)을 삼고 중종(中宗)의 신임(信任)을 얻어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等) 청년학도(靑年學徒)와 더불어 그 이상(理想)한 바를 실현(實現)하기에 노력(努力)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향약법(鄕約法)을 시행(施行)하여 지방자치(地方自治)의 제도(制度)를 세우니 향약(鄕約)이라 함은 중국(中國) 송(宋)나라 사람들이 시작(始作)한 것으로 한 지방(地方)사람끼리 자치적(自治的)인 규약(規約)을 만들어 선(善)한 일을 서로 권면(勸勉)하고 악(惡)한일을 서로 규간(規諫)하고 예의(禮義)로써 서로 교제(交際)하고 환난(患難)을 서로 구제(救濟)한다는 네 가지 취지(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때에 공신(功臣)에 濫參한 자(者)가 많았으니 원래(元來) 반정공신(反正功臣)이라 함은 반정사업(反正事業)을 획책(劃策)하고 신명(身命)을 그 사업(事業)에 바친 자(者)를 말함이다. 그런데 중종(中宗)의 공신중(功臣中)에 거사(擧事)하는 날에 그 소문(所聞)을 듣고 비로소 와서 열(列)에 참거(參擧)한 자(者) 실제(實際)로 이 사업(事業)에 공헌(貢獻)한 일이 없이 공신(功臣)들과 인연(因緣)이 있는 자(者)들이 공신명부(功臣名簿)에 기록(記錄)됨으로 인(因)하여 공신(功臣)인 자(者)가 칠십(七十)여인(餘人)에 달(達)하고 공신(功臣)들은 국가(國家)로부터 공신전(功臣田)을 받아서 세습(世襲)하고 군(君)을 봉(封)하여 사회적(社會的) 특권(特權)을 향유(享有)하니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이러한 공신(功臣)들을 삭제(削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당시(當時) 반정(反正)의 공(功)이 있는 공신(功臣)들 중(中)에는 특권(特權)을 남용(濫用)하여 세력(勢力)을 얻기와 재화(財貨)를 모으기에만 힘쓰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이는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반정사업(反正事業)을 행(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귀(富貴)를 얻으려 하는 반정(反正) 모리배(牟利輩)의 행동(行動)이었다. 유신(儒臣)대(對) 공신(功臣)의 싸움은 해를 지낼수록 더욱 심각(深刻)하여지는 터이라 조광조(趙光祖) 유신일파(儒臣一派)가 이를 그대로 간과(看過)할 이(理)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신파(功臣派)에 어떠한 과실(過失)이 있는 때는 총궐기(總蹶起)하여 공격(攻擊)하고 왕(王)이 자기(自己)들의 의견(意見)을 듣지 아니하는 때에는 동맹(同盟)퇴직(退職)한 일도 이삼차(二三次) 있었으나 중종왕(中宗王)은 암왕(暗王)이라 조광조(趙光祖)를 신임(信任)한 것도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신임(信任)이 아니라 다만 일반세론(一般世論)을 듣고 그를 현인(賢人)이라 하여 대용(大用)한 것이다. 그런데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중종(中宗)을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聖君)을 만들고 사회(社會)로 하여금 성의정심(誠意正心)할 것을 강요(强要)하다 깊이 탄(歎)하였다.
이 까닭에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폐정(弊政)을 개혁(改革)한 것이 많아서 백성(百姓)으로부터 환영(歡迎)을 받는 반면(反面)에 공신(功臣) 귀족(貴族)들로부터 극도(極度)의 미움을 받고 왕(王)도 또한 점점(漸漸)으로 염증(厭症)을 내게 되었다.
조광조(趙光祖) 一派는 專혀 도학(道學)을 主張하여 小學과 같은 수신서(修身書)와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성리학(性理學)을 爲主하고 시(詩) 부(賦) 표(表) 책(策)과 같은 문장학(文章學)을 배척(排斥)하며 인재(人才)를 취(取)함에 있어도 문장(文章)으로써 과거(科擧)를 보는 현행(現行)시험법(試驗法)을 폐지(廢止)하고 인물고사(人物考査)로써 사람을 취(取)하는 현량과(賢良科)를 행(行)하기를 건의(建議)하니 이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는 정광필(鄭光弼)이 홀로 반대(反對)하여 말하되 현량과(賢良科)의 이름은 비록 좋으나 인심(人心)이 순후(淳厚)치 못한 금일(今日)에는 반드시 폐해(弊害)가 생(生)할 것이니 행(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왕(王)은 조광조(趙光祖)의 말을 좇아 마침내 시행(施行)하였다. 그러나 현량과(賢良科)의 시험관(試驗官)은 주(主)로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가 당(當)하고 있었음으로 그 취(取)하는바 사람은 거의 성리학(性理學) 파(派)들이어서 문장(文章)을 주(主)하는 선비들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인재(人才)를 씀이 편벽(偏僻)하다는 비난(非難)이 각방면(各方面)에서 일어났다.
이조(李朝)의 전제(田制)는 국유제(國有制)이오 매매(買賣)와 전당(典當)을 금(禁)하더니 징병제도(徵兵制度)에 입영(入營)하는 비용(費用) 또 병역복무중(兵役服務中) 의식제비(依食諸費)를 군인(軍人)이 자담(自擔)하는 관계(關係)로 농민(農民)이 군대(軍隊)에 징소(徵召)되는 때에는 그 입영(入營)하는 모든 비용(費用)을 마련하기 爲하여 경작(耕作)하던 土地를 전당(典當)치 아니할 수 없고 전당기간(典當期間)은 五年으로하되 그 期間이 지나도 부채(負債)를 갚지 못하는 때는 土地가 대금업자(貸金業者)의 소유(所有)로 넘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국법(國法)에 위반(違反)되는 일이나 국가(國家)에서는 군대징소상(軍隊徵召上) 금지(禁止)할 수 없는 일임으로 묵인(黙認)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 전제파탄(田制破綻)의 시초(始初)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전당행위(典當行爲)가 비밀리(秘密裏)에 행(行)하더니 내종(乃終)에는 공공연(公公然)하게 관습화(慣習化)하고 소유(所有)의 이전(移轉)도 자유(自由)로 행(行)하여 완전(完全)한 사유제(私有制)로 화(化)하고 따라서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들은 남의 토지(土地)를 경작(耕作)하고 수확물(收穫物)의 일부(一部)를 지주(地主)에게 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이 발생(發生)한 시(始)이오 세종(世宗) 말년(末年)으로부터 세조(世祖)때에 걸쳐서 생긴 일이다. 그 後에는 전당기간(典當期間) 五年이라는 것이 五十日로 단축(短縮)되니 군대(軍隊)로 징소(徵召)되는 군인(軍人)이 오십일(五十日) 기간내(期間內)에 환토(還土)할 수는 없음으로 전당(典當)하는 날이 곧 토지(土地)가 영영(永永) 방매(放賣)되는 날이다.
이 까닭에 빈민(貧民)들의 경지(耕地)는 급속도(急速度)로 부인(富人)의 손에 겸병(兼倂)되고 중종(中宗)때에 이르러서는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이라는 두 계급(階級)이 똑똑히 사회면(社會面)에 나타났다. 강릉(江陵)사람 박수량(朴遂良)은 어전(御前)에서 현량과(賢良科) 시험(試驗)을 마치고 말하되 「평소(平素)에 생각(生覺)하고 있는 바를 한번 전하(殿下)께 아뢰고자 하였는데 이 기회(機會)에 아뢰어도 좋은가」라고 물어서 왕(王)의 허락(許諾)을 받고 아뢰기를 「지금 강릉(江陵) 지방(地方)은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이 허다(許多)하여 농민(農民) 생활(生活)이 대단히 궁핍(窮乏)하니 이것은 하루바삐 고치지 아니하면 국가(國家)의 장래(將來)에 큰 근심이 될 것이니 다시 균전제(均田制)를 행(行)하는 것이 가(可)하다」고 하였다.
중신(重臣)들 중(中)에는 지주(地主)의 토지(土地)를 국가(國家)에서 수상(收上)하여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에게 분급(分給)할 수 는 있으나 그렇게 하면 공연(空然)한 혼란(混亂)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반대(反對)하고 전일(前日)에 분급(分給)한 것을 지주(地主)에게 팔고 농토를 잃었으니 지금 분배(分配)하여 주더라도 또 얼마후(後)에 다시 지주(地主)에게 팔 것이 아니냐하여 응(應)치 아니하였다. 이 문제(問題)가 한번 제의(提議)되자 조정(朝廷)안에는 양론(兩論)이 대립(對立)하고 조광조(趙光祖) 파(派)에서는 토지(土地)를 다시 분배(分配)하자는 혁신론(革新論)을 주장(主張)하여 비록 후일(後日)에 다시 팔아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금일(今日)의 일은 금일(今日)의 정(情)에 맞게 하는 것이 정치(政治)의 본지(本旨)라 하여 기어(期於)히 토지제도(土地制度)를 개혁(改革)하려 하였다. 왕(王)은 중신(重臣)들로 하여금 여러 날 동안 토론(討論)시킨 결과(結果) 한 사람의 토지(土地) 소유(所有)는 오십(五十)결(結) 이내(以內)로 제한(制限)하기로 하니 당시(當時)에 있어서 토지(土地) 소유(所有)를 제한(制限)한 것은 일대(一大) 개혁(改革)이 아닌 것은 아니나 대체(大體)로 지주(地主)계급(階級)에 유리(有利)한 해결(解決)이오 금후(今後)의 토지(土地) 겸병(兼倂)의 방지(防止)에 아무런 실효(實效)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주(地主) 계급(階級)이 이 제도령(制度令)에 대(對)하여 불만(不滿)을 가진 것은 물론(勿論)이다.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의 정치(政治) 이념(理念)은, 그 이상(理想)은 좋으나 그 수단(手段)이 과격(過激)한 점(點)이 많고 공신(功臣) 귀족(貴族)들과의 사이에 극단(極端)의 비타협(非妥協) 태도(態度)를 취(取)하고 성리학파(性理學派) 이외(以外)의 사람에게는 편협(偏狹)한 배타심(排他心)으로 대(對)하여 당시(當時) 현(賢) 재상(宰相)으로 이름난 정광필(鄭光弼)같은 이도 그들은 비부(鄙夫)라고 통매(痛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自己) 일파(一派)의 사람들을 조정(朝廷)에 포열(布列)하고 점점(漸漸) 정치(政治)의 실권(實權)을 잡으며 백성(百姓)들은 그들을 크게 환영(歡迎)하게 되니 이에 왕(王)은 은연(隱然)히 위구(危懼) 불평(不平)한 마음을 품게되었다. 그러던 중(中) 그들은 칠십여인(七十餘人)의 위훈(僞勳)을 삭제(削除)하자고 제의(提議)하니 공신(功臣)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들기 시작(始作)하고 평소(平素)에 유신파(儒臣派)로부터 소인(小人)이라는 이름 밑에 극도(極度)의 배척(排斥)을 받은 남곤(南袞)과 공신(功臣)의 한사람인 심정(沈貞) 등(等)이 주동(主動)이 되어 한편(便)으로 왕(王)의 마음을 동요(動搖)시키고 한편(便)으로 조광조(趙光祖) 파(派)의 모역(謀逆)함을 무고(誣告)하여 중종(中宗) 십사년(十四年) 기묘(己卯)에 조광조(趙光祖)와 그의 동지(同志)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여 즉회(卽回)로 죽이려하는 것을 정광필(鄭光弼)이 왕(王)의 소매를 붙잡고 「신진(新進) 연소(年少)들이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그 행동(行動)이 과격(過激)하였을 뿐이오 이지(異志)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만류(挽留)하여 모두 귀양살이 보내더니 미구(未久)에 적소(謫所)에서 대부분(大部分)을 죽이니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화(禍)가 있은 후(後)에 현량과(賢良科)를 폐(廢)하고 토지제도(土地制度) 한령(限令)이 스스로 소멸(消滅)됨은 물론(勿論)이오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읽는 자(者)는 모두 조광조(趙光祖) 파(派)라 하여 강압(强壓)함으로 이러한 글은 당세(當世)의 큰 금물(禁物)이 되고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等)이 용사(用事)하여 정치(政治)를 어지럽게 하고 정광필(鄭光弼)도 그들에게 물려 나갔다.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等)이 정권(政權)을 잡고 그 당류(黨類)를 이끌어들여 정치(政治)를 어지럽힌 지 십여년(十餘年)에 왕(王)은 그 무리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김안노(金安老)를 써서 그 무리를 없애니 이를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 하여 안노(安老)의 흉악(凶惡)함은 곤정(袞貞)의 무리보다 더 심(甚)하였다. 안노(安老)가 용사(用事)한지 칠년(七年)에 왕(王)은 그 일파(一派)를 모두 제거(除去)하니 간신(奸臣)이 정권(政權)을 잡음이 전후(前後) 십구년(十九年)동안이라 왕(王)은 크게 회오(悔悟)하여 탄식(歎息)하되 「처음에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를 몰아내면 국사(國事)가 잘될 줄 알았더니 곤정(袞貞) 일파(一派)의 간악(奸惡)은 말할 수 없이 심(甚)하였고 이 일파(一派)를 몰아내면 금후(今後)는 아무 일 없을 줄로 생각했더니 安老의 흉악(凶惡)은 전(前)보다 더 심(甚)하여 국가(國家)를 위태(危殆)롭게 하고 백성(百姓)을 괴롭게 하였다. 후세(後世)에 나를 어떤 임금이라 칭(稱)할고」하고 정광필(鄭光弼)을 적소(謫所)로부터 불러들여 정승(政丞)을 삼으니 백성(百姓)들이 천일(天日)을 본듯이 환호(歡呼)하였다. 이에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의 금(禁)이 스스로 풀리고 유신(儒臣)들을 거용(擧用)하였으며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은 비로소 서원(書院)을 짓고 거기에 선현(先賢)을 모시고 유생(儒生)들이 모여서 도학(道學)을 연구(硏究)하게 하니 이것이 이조(李朝) 서원(書院)의 시초(始初)이다.
그러나 중종(中宗)은 암주(暗主)라 조정(朝廷)안에 왕권(王權) 쟁탈(爭奪)의 단서(端緖)가 열리었다. 중종(中宗)도 비(妃)에 선비(先妃) 윤씨(尹氏)는 인종(仁宗)을 낳고 계비(繼妃) 윤씨(尹氏)는 명종(明宗)을 낳았는데 인종(仁宗)의 외숙(外叔)은 윤임(尹任)이오 명종(明宗)의 외숙(外叔)은 윤원형(尹元衡)이니 세인(世人)이 윤임(尹任)을 대윤(大尹)이라 하고 윤원형(尹元衡)을 소윤(小尹)이라 하고 이 두 사람의 세력(勢力) 다툼을 대윤(大尹) 소윤(小尹)의 싸움이라 하였다. 인종(仁宗)은 중종(中宗)을 이어 왕(王)이 된지 겨우 일년(一年)에 승하(昇遐)하고 아들이 없음으로 그 아우 명종(明宗)이 십이세(十二歲)에 왕(王)이 되고 그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정치(政治) 실권(實權)을 잡고 윤원형(尹元衡)이 용사(用事)하니 최초(最初)부터 척리(戚里)파(派)를 미워하는 유생(儒生)들이 명종(明宗) 외가(外家)의 천정(擅政)함을 좋아할 이(理)가 없었다. 이에 윤원형(尹元衡)은 전(前)부터의 정적(政敵)인 대윤(大尹) 일파(一派)와 자기(自己)에게 좋지 못한 감정(感情)을 가지고 있는 유신(儒臣)들을 일체(一切) 배제(排除)하기로 정(定)하고 명종(明宗)이 왕(王)이 되던 을사(乙巳)년에 근거(根據)없는 사실(事實)을 꾸며서 역적(逆賊)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 한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여러 차례 사화(士禍) 중(中) 가장 참혹(慘酷)하고 인심(人心)이 가장 분개(憤慨)하였다. 무오(戊午) 기묘(己卯)의 사화(士禍)는 그 상대자(相對者)가 간신(奸臣)들이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燕山君)이 그 어머니를 위(爲)한 복수(復讐)이니 혹(或)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왕(王)의 모후(母后)와 왕(王)의 외숙(外叔)이 아무런 죄(罪)가 없는 유신(儒臣)들을 무함(誣陷)하여, 절대충성(絶對忠誠)을 다할 것을 학문(學問)의 대본(大本)을 삼고 있는 유학도(儒學徒)들도 왕실(王室)에 대한 충성(忠誠)이 엷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자(前者)에 세 번의 사화(士禍)에는 비록 참혹(慘酷)한 변(變)을 당(當)하였으되 오히려 다시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여 그 이상(理想)하는 바를 정치(政治)의 면(面)에 실현(實現)하려고 노력(努力)하는 사람이 연(連)달아 나왔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以後)에는 그들은 정치(政治)에서 물러나 현실(現實) 세상(世上)과 인연(因緣)을 끊고 산림(山林)에 숨어서 오로지 학문(學問)에만 힘쓰게 되었음으로 정치(政治)와 학문(學問)이 나뉘어져서 소위(所謂) 산림학자(山林學者)라는 것이 생기고 실사(實事)를 떠나서 이론(理論)에 행동(行動)을 떠나서 사색(思索)에 치우치는 경향(傾向)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서경덕(徐敬德)(호(號)는 화담(花潭)) 조식(曺植)(호(號)는 남명(南溟)) 이황(李滉)(호(號)는 퇴계(退溪)) 기대승(奇大升)(호(號)는 고봉(高峯) 이지함(李之菡)(호(號)는 토정(土亭)같은 일대(一代) 명유(名儒)가 나서 명종(明宗)시대(時代)의 유학계(儒學界)에 꽃을 피웠으나 그들은 정치(政治) 방면(方面)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고 비록 이황(李滉)같은 이는 왕(王)의 부름을 받아서 벼슬에 나온 일이 있으나 기회만 있으면 다시 산림(山林)으로 돌아갔음으로 그때에 이를 평(評)하여 산금(山禽)이라고 별명(別名)을 지은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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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
세종(世宗)때에 옥포(玉浦)를 열어서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한 것이 그 후(後) 차츰 왜인(倭人)의 수효(數爻)가 늘어서 수천명(數千名)에 이르며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을 어기는 일이 적지 아니하더니 중종(中宗) 오년(五年)(단기 삼천팔백사십삼년 경오(庚午))에 대마도(對馬島)와 연결(連結)하여 난(亂)을 일으키니 이를 삼포왜란(三浦倭亂) 또는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 한다.
이 난(亂)은 곧 평정(平定)되었으나 그 후(後)에도 중종(中宗) 삼십구년(三十九年)에 통영군(統營郡) 사량(蛇梁)에서 변란(變亂)을 일으킨 일이 있고 명종(明宗) 십년(十年) 을묘(乙卯)에 또 다시 해남군(海南郡) 달량포(達梁浦)에 침입(侵入)하니 이를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한다. 원래(元來) 왜인(倭人)들은 아국(我國)과 무역(貿易)하지 아니하고는 살수가 없는 데이나 그 무역액(貿易額)에는 제한(制限)이 있으므로 왜인(倭人)들은 비밀(秘密)히 제한외(制限外)의 무역(貿易)을 행(行)하고 또 변장(變裝)하고 거주구역(居住區域)밖에 나와서 민가(民家)로 좇아 다니면서 장사하는 한편(便) 국가(國家)의 정치(政治)와 사업(事業)의 기밀(機密)을 정탐(偵探)하여 왜(倭) 본국(本國)에 보고(報告)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에 정부(政府)에서는 지방관리(地方官吏)에게 명(命)하여 그를 엄금(嚴禁)한 관계(關係)로 양국민(兩國民)의 감정(感情)이 서로 좋지 못하여 마침내 삼포(三浦)의 변(變)이 일어나고 그 변(變)이 평정(平定)된 뒤로 종래(從來)의 무역액(貿易額)을 반(半)으로 줄이니 이때로부터 왜인(倭人)의 아국(我國)에 대(對)한 감정(感情)이 더욱 악화(惡化)되었다.
이에 조정(朝廷)에서는 왜인(倭人)들이 왜구(倭寇)를 잡아 바치었다든가 표류(漂流)한 우리 나라 사람을 돌려 보내주었다든가 하여 우리 나라에 공로(功勞)가 있는 자(者)에게는 관직(官職)을 주어 이를 수직왜(守職倭)라 하여 특별(特別)한 대우(待遇)로써 그들을 무마(撫摩)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感情)은 마침내 풀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간교(奸狡)한 꾀로써 우리 나라를 속이고 우리 나라 국정(國政)을 밀정(密偵)하니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들을 대(對)할 때 경어(敬語)를 쓰는 일이 적고 흔히 왜놈이라 불러서 모욕(侮辱)하였다. 김안국(金安國)같은 이는 이를 근심하여 양국민(兩國民) 사이의 감정(感情)이 좋지 못하고 장래(將來) 국가(國家)에 이(利)롭지 못하리라고 경고(警告)한 일도 있었다.
을묘란(乙卯亂)이 일어나자 조정(朝廷)에서는 이준경(李浚慶)으로 도순찰사(都巡察使)를 명(命)하여 치게 하니 이준경(李浚慶)이 호남(湖南)에 내려갔으나 군사(軍士)도 몇 사람되지 아니하고 무기(武器)도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한편으로는 군사(軍士)들을 소집(召集)하고 한편으로는 무기(武器)를 만들어서 영격(迎擊)하더니 적(賊)은 약탈(掠奪)하여 가지고 해상(海上)으로 도망하였다. 이 난(亂)이 있은 후(後)에 한동안 양국(兩國) 교통(交通)이 끊어지더니 일본(日本)이 다시 통상(通商)하기를 간망(懇望)하고 우리 나라에서도 그들을 무마(撫摩)하는 것이 득책(得策)이라 하여 통상(通商)을 허(許)하는데 종래(從來)에 개항(開港)한 청포(菁浦)방면(方面)은 첩첩(疊疊)한 도서(島嶼)에 싸여서 왜선(倭船)이 숨기 쉽고 우리 나라의 척후(斥候)가 보기 어려움으로 부산(釜山) 일항(一港)을 열어서 왜선(倭船)의 내왕(來往)을 허(許)하니 이는 부산(釜山)에 섬이 없어서 왜선(倭船)의 내왕(來往)을 보기 쉬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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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社會)의 부패(腐敗)
연산군(燕山君) 이후(以後) 육십여년(六十餘年) 간(間) 간신(奸臣)이 정권(政權)을 잡을 때가 많았고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이르러서는 정치(政治)가 극도(極度)로 어지럽고 화뇌(貨賂)가 성행(盛行)하여 사회(社會)는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외방(外方)의 공물(貢物)은 개국초(開國初)에 지방산물(地方産物)과 호구수(戶口數)를 감안(勘案)하여 정(定)한 것인데 연산군(燕山君)이 이를 가징(加徵)하고 또 산물(産物)이 수량(數量)과 호구(戶口)가 오륙십(五六十) 년간(年間)에 변동(變動)된 것이 적지 아니 하되 조정(朝廷)에서는 그것을 민간(民間) 실정(實情)에 맞도록 개정(改正)치 아니하여 민폐(民弊)가 심(甚)하였다.
군역(軍役)은 군포(軍布)을 바치고 징소(徵召)됨을 면(免)하는 제도(制度)가 행(行)하였는데 이는 각(各) 진보(鎭堡)가 군포(軍布)를 받아 가지고 군인(軍人)을 용인(傭人)하기 위(爲)함이다. 그러나 진보(鎭堡)의 주장(主將)이란 자(者)들은 군포(軍布)로써 사복(私腹)을 채우고 군사(軍士)를 용인(傭人)치 아니 하는 까닭에 각(各) 진보(鎭堡)의 실제(實際) 인원(人員)은 정원수(定員數)의 천(千)의 이삼(二三)에도 달(達)치 못하고 군적(軍籍)에는 허명(虛名) 가명(假名) 심지어(甚至於) 구명(狗名) 묘명(猫名)까지 씌어있었다. 그리고 한번 군포(軍布)를 바치기 시작(始作)한 사람은 매년(每年) 계속(繼續)하여 바치기로 되어있는데 혹(或)은 그 사람이 사망(死亡)한 뒤에도 여전(如前)히 징포(徵布)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 백골징포(白骨徵布)라하고 혹(或)은 유아(乳兒)에게도 徵布하였으니 이를 황구(黃口)징병(徵兵)이라 하고 혹(或)은 사람이 고역(苦役)을 견디지 못하여 전가(全家)를 거느리고 도망(逃亡)하여 버리면 그 군포(軍布)를 그의 일족(一族)으로부터 받고 일족(一族)이 없으면 절린(切隣)으로부터 징수(徵收)하니 이는 군포(軍布)가 주장(主將)의 사수입(私收入)이 되는 까닭에 사망(死亡) 유아(乳兒) 도망(逃亡) 같은 사실(事實)을 국가(國家)에 보고(報告)하지 아니하고 계속(繼續) 징수(徵收)하는 것이며 이로 인(因)하여 진보(鎭堡)에는 매년(每年) 고정(固定)불변(不變)하는 군포(軍布) 수입(收入)이 있었다. 그럼으로 이때에는 각(各) 진보(鎭堡)의 가격(價格)이 군포(軍布) 필수(疋數)에 정(定)해져서 그 가격(價格)의 다소(多少)로써 지위(地位)의 고하(高下)를 정(定)하는 것이었다.
이서(吏胥)의 폐망(弊亡) 전(前)부터 있는 일이지만 중종(中宗) 명종(明宗)의 전후(前後) 삼십여년(三十餘年) 간(間) 중앙(中央)의 정치(政治)가 어지러움으로 인(因)하여 더욱 심(甚)하여져서 모든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백성(百姓)들은 그 생활(生活)을 유지(維持)할 수 없었고 당시(當時) 군현(郡縣)의 수(數)는 삼백이십(三百二十) 여(餘)인데 군현(郡縣)이 너무 많아서 백성(百姓)의 부담(負擔)이 과중(過重)함으로 이를 폐합(廢合)하여 백성(百姓)의 부담(負擔)을 경감(輕減)하려고 기도(企圖)한 일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이서(吏胥)의 실직(失職)하는 자(者)가 많게 됨으로 군현(郡縣)의 실권(實權)을 잡고 있는 이서(吏胥)들은 중앙정부(中央政府) 내(內)의 간신배(奸臣輩)들과 결탁(結託)하여 극력(極力)으로 저해(沮害)한 일도 있었고 수령(守令)들은 중앙(中央)으로부터 임명(任命)되어 삼년(三年)이라는 임기(任期)(임기(任期)에는 신축(伸縮)이 있었다.)를 지내는데 지방(地方)의 실정(實情)을 잘 알지 못함으로 그 대부분(大部分)은 이서(吏胥)의 손에 사무(事務)를 맡겨 버리는 형편(形便)이어서 백성(百姓)들은 수령(守令)보다도 이서(吏胥)를 두려워하였으니 이 까닭에 국가(國家)의 말단행정(末端行政)은 이서정치(吏胥政治)로 화(化)하였다.
조식(曺植) 같은 이는 명종(明宗)에게 상서(上書)하여 왕(王)의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과부(寡婦)로서 정치(政治)를 어지럽게 한다는 과부간정론(寡婦干政論)과 군현(郡縣)의 이서배(吏胥輩)들이 국사(國事)를 그르치고 있다는 이서망국론(吏胥亡國論)을 올려 세인(世人)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케 한 일도 있었다.
이때 유신(儒臣)들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어서 비록 기(氣)가 꺾이었으나 그 잠재(潛在)한 힘은 더욱 굳세어 공신척리(功臣戚里)들을 미워하는 생각이 날로 강(强)해지더니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음에 종래(從來) 왕후(王后)의 힘을 배경(背景)으로 하여 온갖 횡포(橫暴)를 자행(恣行)하던 윤원형(尹元衡)은 의지(依支)할 곳이 없는 일독부(一獨夫)라 유신(儒臣)들은 일제(一齊)히 궐기(蹶起)하여 마침내 윤원형(尹元衡)을 몰아내고 무리를 일소(一掃)하였다.
명종(明宗)의 뒤를 이어 선조(宣祖)가 왕(王)이 되니 이때는 명상(名相) 이준경(李浚慶)이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조정(朝廷)이 유신(儒臣) 일색(一色)으로 조직(組織)되었다. 세조(世祖)때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파의 싸움이 일어난 이래(以來) 일백십여(一百十餘) 년(年)만에 비로소 유신(儒臣)이 완전(完全)히 정권(政權)을 잡으니 이로부터 그 이상(理想)하는 바의 정치(政治)를 실현(實現)할 시기(時機)가 도래(到來)한 것이다.
그러나 이준경(李浚慶)은 그 임종(臨終) 유차(遺箚)에 「지금(只今) 사습(士習)이 부허(浮虛)하여 허위(虛僞)가 풍(風)을 작(作)하니 붕당(朋黨)의 점(漸)이 있다」고 경고(警告)하니 당시(當時) 유사(儒士)들이 경조(輕躁)하여 독실(篤實)한 풍(風)이 없고 고언(高言) 대담(大談)을 일삼고 사람의 조그마한 과실(過失)이라도 관용(寬容)함이 없이 공격(攻擊)하기를 좋아함으로 반드시 붕당(朋黨)이 생긴다고 예언(豫言)한 것이다.
이 유차(遺箚)가 한번 들어오자 조정(朝廷) 제신(諸臣)들은 붕당(朋黨)이 없음을 극력(極力) 변명(辨明)하고 이이(李珥)같은 이는 이준경(李浚慶)이 무근(無根)한 말로써 사림(士林)을 화독(禍毒)하는 것이라 하여 공박(攻駁)하고 심지어(甚至於) 이준경(李浚慶)을 추죄(追罪)하자는 격론(激論)까지 일어난 일이 있으니 이는 자기(自己)들이 결(決)코 붕당(朋黨)을 만들지 않을 것을 맹서(盟誓)함과 같음이다.
그러나 이준경(李浚慶)이 죽은지 사년(四年)만인 선조(宣祖) 팔년(八年) 을해(乙亥)(단기 삼천구백팔년)에 마침내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기고 말았다. 처음에 심의겸(沈義謙)은 왕실(王室)의 외척(外戚)으로서 명종(明宗)때에 간신(奸臣)들의 행악(行惡)이 심(甚)한 중(中)에서 유사(儒士)들을 구활(救活)한 일이 많았음으로 비록 심(沈)이 척리파(戚里派)에 속(屬)하되 유신(儒臣)들의 호감(好感)을 얻고 있으며 김효원(金孝元)은 신진(新進) 유사(儒士)로써 연소유신(年少儒臣)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었는데 김효원(金孝元)은 심의겸(沈義謙)을 척리파(戚里派)라 하여 배격(排擊)하고 심의겸(沈義謙)은 김효원(金孝元)이 일직 권신(權臣)의 문(門)에 출입(出入)하였다 하여 멸시(蔑視)한 관계(關係)로 두 사람사이에 갈등(葛藤)이 생겼다. 이에 심의겸(沈義謙)을 우(右)하는 자(者)와 김효원(金孝元)을 우(右)하는 자(者)가 생기고 경조부박(輕佻浮薄)한 무리들이 마치 정월(正月) 초생(初生) 줄다리기에 양편(兩便)에 서로 와서 덧붙듯이 혹(或)은 심의겸(沈義謙)파(派)에 붙고 혹(或)은 김효원(金孝元)파(派)에 붙어서 조정(朝廷)안이 양당(兩黨)으로 갈라지니 심(沈)의 집은 서울의 서편(西便)에 있음으로 그를 서인(西人)이라 하고 김(金)의 집은 동편(東便)에 있음으로 동인(東人)이라 하고 또 노성파(老成派)는 대개(大槪) 서인(西人)이 되고 소장파(少壯派)는 대개(大槪) 동인(東人)이 되니 유신(儒臣) 대 공신척리(功臣戚里)파(派)의 백십여년간(百十餘年間)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은 역시(亦是) 유사(儒士) 대(對) 척리(戚里)의 사소(些少)한 감정(感情) 소격(疏隔)을 계기(契機)로 하여 그 형태(形態)가 일변(一變)하여 동류(同流) 상잔(相殘) 동지(同志) 상식(相食)하는 유신(儒臣) 대(對) 유신(儒臣)의 추악(醜惡)한 당쟁(黨爭)으로 화(化)하였다.
당쟁(黨爭)이 한번 일어난 후(後) 조정(朝廷)안에는 중정(中正) 불편(不偏)한 자(者)가 거의 없고 오직 자당(自黨)의 이해를 위(爲)하여 움직여서 정치(政治)의 이상(理想)이 있는 것도 아니오 사(事)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가리는 것도 아니오 동인(東人)은 동인(東人)을 옹호(擁護)하고 서인(西人)은 서인(西人)을 옹호(擁護)하여 일대(一大) 난투(亂鬪) 장(場)을 이루었다. 선조(宣祖)는 군신(群臣)에게 누가 붕당(朋黨)을 만들고 있느냐고 문책(問責)한즉 군신(群臣)들은 붕당(朋黨)이라는 말은 다만 항간(巷間)에서 유포(流布)되는 풍설(風說)이오 조신중(朝臣中)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변명(辨明)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쓰고 죄(罪) 줌이 모두 당쟁(黨爭)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공론(公論)이 행(行)치 못하고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짐으로 이이(李珥)는 이를 조정(調停)하는 것을 기임(己任)으로 삼고 분당(分黨)의 장본인(張本人)인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을 외관(外官)으로 내어보내면 당쟁(黨爭)이 멈추리라고 하여 왕(王)께 이 의견(意見)을 아뢰었던 바 왕(王)은 심의겸(沈義謙)으로 개성(開城) 유수(留守)를 삼고 김효원(金孝元)으로 회령(會寧) 부사(府使)를 삼으니 비록 동(同)한 외관(外官)이로되 심(沈)은 승진(昇進)되고 김(金)은 폄점(貶點)되는 결과(結果)를 생(生)하였다. 이에 동인(東人)들은 크게 불평(不平)을 품고 또 김(金)의 폄점(貶點)은 이이(李珥)의 제안(提案)에 의(依)한 것이라 하여 일제(一齊)히 일어나서 이이(李珥)도 공정(公正)한 조정자(調停者)가 아니고 서인(西人)에 당(黨)하여 동인(東人)을 압박(壓迫)하는 것이라 하여 공격(攻擊)을 행(行)하니 이이(李珥)는 조정(調停)하기를 단념(斷念)할 뿐만 아니라 조정(朝廷)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으로 향리(鄕里)로 물러갔다. 이때 이지함(李之菡)은 국사(國事)를 근심하여 말하기를 율곡(栗谷)이 조정(朝廷)에 있으면 큰 효과(效果)는 없어도 파국(破局)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한번 물러가는 날이면 이 정국(政局)을 다시 수습(收拾)할 수 없으리라 하여 크게 탄식(歎息)하였다.
음식(飮食)이 있는 곳에 반드시 다툼이 있는지라 처음에는 서인(西人)이 득세(得勢)하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동인(東人)이 힘이 커지자 동인(東人) 속에서 다시 내부(內部)에 싸움이 일어나니 이는 이산해(李山海)를 중심(中心)으로 한 일파(一派)와 유성룡(柳成龍)(호(號)는 서애(西崖))을 중심(中心)으로 한 일파(一派)이니 이(李)는 서울에 살고 있음으로 북(北)이라 하고 유(柳)는 영남(嶺南)에 살고 있음으로 남인(南人)이라 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은 남(南) 북(北) 서(西)의 삼당(三黨)으로 나뉘어 삼색(三色)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는 날로 험악(險惡)하여 가고 국내(國內) 정세(情勢)는 당쟁(黨爭)으로 인(因)하여 더욱 부패(腐敗)하여지고 특(特)히 병비(兵備)가 극(極)히 허소(虛疎)하여 북(北)의 야인(野人)이나 남(南)의 왜구(倭寇)가 침입(侵入)하는 일이 있으면 도저(到底)히 막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이이(李珥)는 미리 십만(十萬) 병(兵)을 양(養)하여 경성(京城)에 이만(二萬)을 두고 각도(各道)에 일만(一萬)씩을 두어 여외(廬外)의 악(惡)을 방비(防備)할지오 만일(萬一) 그렇지 아니하면 일년(一年)을 불거(不去)하여 토붕(土崩)의 화(禍)가 있으리라고 경정(逕庭)에서 아뢰나 유성룡(柳成龍)이 무사태평(無事泰平)한 때에 병(兵)을 양(養)하는 것은 화(禍)를 양(養)함이라 하여 반대(反對)하고 다른 조신(朝臣)들도 당쟁(黨爭)에만 열중(熱中)하고 국사(國事)를 근심하는 자(者)가 없음으로 이 나라를 살리는 유일책(唯一策)인 십만(十萬) 양병론(養兵論)은 실현(實現)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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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선조(宣祖) 초(初)에 일본(日本)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국내(國內)를 통일(統一)하고 장차(將次) 대륙(大陸)으로 진출(進出)할 야심(野心)이 있어 우리 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양국(兩國)이 서로 친화(親和)하게 지내자 하고 또 우리 나라에 침입(侵入)할 뜻이 있다는 풍설(風說)이 퍼지고 있음으로 선조(宣祖) 이십삼년(二十三年)에 조정(朝廷)에서는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보내니 그 형식(形式)은 양국(兩國) 수호(修好)를 위(爲)함이나 기실(其實)은 수길(秀吉)의 태도(態度)를 타진(打診)함이다. 황(黃)과 김(金)이 돌아온 후(後) 두 사람의 복명(復命)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 황(黃)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안광(眼光)이 빛나고 태도(態度)가 거만(倨慢)하니 반드시 입구(入寇)하리라 하고 김(金)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눈이 쥐눈 같고 인물(人物)이 보잘 것 없으니 반드시 입구(入寇)치 아니한다. 하였다. 황(黃)은 서인(西人)임으로 서인(西人)들은 덮어놓고 황(黃)의 말을 옳다하고 김(金)은 동인(東人)임으로 동인(東人)들은 김(金)의 말을 지지(支持)하여 국가명일(國家明日)의 흥망(興亡)이 달려있는 중대(重大) 사(事)에 적(敵)의 실정(實情)을 깊이 검토(檢討)치 아니하고 오직 당인(黨人) 옹호(擁護)만을 위주(爲主)하였으며 이때 동인(東人)의 세력(勢力)이 컸음으로 조정(朝廷)의 의론(議論)은 김(金)의 말을 좇게되고 선조(宣祖)도 또한 김(金)이 선사(善使)하였다 하여 포상(褒賞)하고 착수(着手)중(中)에 있는 남방(南方)의 군비(軍備)도 수면상태(睡眠狀態)에 빠지고 군신(君臣)이하(以下)가 모두 태평몽(泰平夢)에 취도(醉倒)하였다.
일본(日本) 수길(秀吉)은 우리 나라의 군비(軍備)의 허실(虛實)을 전일(前日)의 사신(使臣) 왕래(往來) 시(時)에 미리 탐지(探知)하고 선조(宣祖) 이십오년(二十五年) 임진(壬辰)(단기 삼천구백이십오년)에 명(明)나라를 치러가니 조선(朝鮮)은 길을 빌려달라고 빙자(憑藉)하고 그해 사월(四月)에 군사(軍士) 이십만(二十萬)과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藤淸正) 등(等) 장수(將帥)를 보내어 풍우(風雨)같이 몰려와서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하니 이는 우리 나라의 청천벽력(靑天霹靂)이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던 아국(我國) 군대(軍隊)가 백전(百戰) 노련(老鍊)한 왜병(倭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동래성(東來城)이 일전(一戰)도 못하고 함락(陷落)되고 적군(敵軍)은 거침없이 동서(東西) 두 길로 나뉘어 경성(京城)을 향(向)하여 북상(北上)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이 급보(急報)를 듣고 모두 창황망조(蒼皇罔措)하고 선조(宣祖)는 김식일(金識一)이 국사(國事)를 그르쳤다 하여 곧 잡아오라고 엄명(嚴命)을 내리더니 성일(誠一)이 황공(惶恐) 입경(入京)하는 차(次)에 선조(宣祖)는 다시 명령(命令)을 내리어 이번 왜구(倭寇)는 너로 인(因)하여 오는 것이니 네가 나가서 막으라 하여 남방(南方)으로 보내었다.
조정(朝廷)에서는 적(敵)을 막을 힘이 없고 서로(西路)를 좇아 피난(避難)의 길을 떠나니 경성(京城) 안에 있던 난민(亂民)들이 경복궁(景福宮)에 불질러 사뤘으며 각지(各地)의 수령(守令)들은 대부분(大部分)이 직무(職務)를 버리고 도망(逃亡)하였음으로 호구(戶口)와 토지(土地)의 문적(文籍)이 이때에 대개(大槪) 멸실(滅失)되었다. 왜병(倭兵)이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한지 겨우 이십일(二十日)만에 경성(京城)이 함락(陷落)되고 팔도(八道) 인심(人心)이 토붕(土崩)하듯이 무너져서 다시 수습(收拾)할 수가 없었다. 선조(宣祖)는 서로(西路)를 피난(避難)하면서도 서도(西道)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를 크게 의구(疑懼)하여 이원익(李元翼)을 불러서 말하되 경(卿)이 일직 안주(安州) 목사(牧使)가 되었을 때 행정(行政)을 잘하여 평안도(平安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생각한다하니 경(卿)이 먼저 평안도(平安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안무(按撫)하라하고 또 최흥원(崔興源)을 불러 말하되 경(卿)이 일직 황해(黃海)감사(監司)사가 되었을 때 백성(百姓)을 사랑하였음으로 황해도(黃海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잊지 아니한다 하니 경(卿)이 먼저 황해도(黃海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개성(開城)에 가서 얼마동안 머물다가 왜병(倭兵)이 따라옴을 보고 평양(平壤)을 거쳐서 의주(義州)에 가서 머물고 있었다.
국세(國勢)가 이렇게 위태(危殆)로운 지경(地境)에 이르렀을 때에 국내(國內)에는 오직 두 줄기의 생기(生氣)가 움직였으니 그 하나는 이순신(李舜臣)의 해전(海戰)이오 또 하나는 의병(義兵)의 궐기(蹶起)이다. 이순신(李舜臣)은 전라도(全羅道) 좌수사(左水使)가 된 때로부터 미리 왜적(倭賊)의 침입(侵入)이 있을 것을 짐작(斟酌)하고 우수(優秀)한 전선(戰船)을 제조(製造)하려 하여 백제(百濟) 시대(時代) 이래(以來) 고려(高麗) 시대(時代)로 거쳐서 전(傳)해오는 아국(我國) 특유(特有)의 조선(造船)기술(技術)을 써서 새로이 한 배를 창조(創造)하니 그 배는 철판(鐵板)으로 위를 덮어서 거북의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 송곳을 꽂고 적병(敵兵)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사이에 십자로(十字路)를 통(通)하여 우리 군사(軍士)가 자유(自由)로 통행(通行)하게 하고 전후(前後)좌우(左右)에 총혈(銃穴)을 내어서 군사(軍士)가 그 밑에 숨어 총(銃)을 놓게 된 것이니 이를 구선(龜船)이라 한다.
이순신(李舜臣)은 왜병(倭兵)이 들어옴을 보고 구선(龜船) 팔십척(八十隻)을 거느리고 오월(五月) 칠일(七日) 옥포(玉浦)에서, 유월(六月) 사일(四日)에 당포(唐浦)에서, 칠월(七月) 팔일(八日)에 한산도(閑山島)의 앞바다 등(等) 적(敵)의 수군(水軍)을 연(連)거푸 쳐 부시고 한산도(閑山島)의 길목을 수비(守備)하니 적(敵)이 다시 남해(南海) 변(邊)을 엿보지 못하였다. 처음에 왜병(倭兵)은 육로(陸路)와 해로(海路)의 두 길로 병진(倂進)하여 일거(一擧)에 우리 나라를 삼키려 한 것인데 해로(海路)가 이순신(李舜臣)에게 막힌 까닭에 육로(陸路) 군(軍)의 동(東)은 함경도(咸鏡道) 두만강(豆滿江)까지 들어가고 서(西)는 평양(平壤)까지 들어갔으되 더 북상(北上)하기를 두려하여 왕(王)을 쫓아가지 못하였으니 이 대란(大亂)에 우리 나라가 다시 소생(蘇生)함에는 이순신(李舜臣)의 힘이 절대(絶對)한 것이었다.
왜병(倭兵)이 처음 들어 올 때에는 인심(人心)이 모두 황겁(慌怯)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또 적(敵)은 조총(鳥銃)을 가지고 있는데 총(銃)의 위력(威力)이 얼마나 큰가를 알지 못함으로 감(敢)히 접전(接戰)할 용기(勇氣)를 내지 못하더니 시일(時日)이 경과(經過)함을 따라 점차(漸次)로 적(敵)의 정세(情勢)를 알게 됨으로부터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거의(擧義)하려는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경상도(慶尙道)에서 처음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者)는 곽재우(郭再祐)(호(號)는 망우당(忘憂堂))이니 홍의(紅衣)를 입고 마(馬)를 타고 적진(敵陣)에 들어가서 횡행(橫行)하되 적(敵)이 감(敢)히 막지 못하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있는 곳에는 적(敵)이 반드시 피거(避去)하였다. 전라도(全羅道)에서는 광주(光州)의 고경명(高敬命)(호(號)는 제봉(霽峰))이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와 김천일(金千鎰) 등(等)으로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이 소식(消息)을 듣고 각지(各地)에서 의병(義兵)이 연거푸 일어났음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중(中)에 의병(義兵)의 세력(勢力)이 가장 큰 곳이 호남(湖南)이었고 이 의병(義兵)의 힘에 의하여 호남(湖南)이 보전(保全)된 까닭에 국가(國家)의 생맥(生脈)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호남(湖南) 의병(義兵)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군(軍)과 아울러 유명(有名)한 것은 금산(錦山)의 조헌(趙憲)(호(號)는 중봉(重峯))군(軍)이다. 조헌(趙憲)은 임진(壬辰) 전년(前年)에 미리 명년(明年)에 큰 병란(兵亂)이 일어 날줄을 알고 선조(宣祖)에게 상소(上疏)하여 정치(政治)의 잘못됨을 통론(痛論)하고 급(急)히 방비(防備)의 책(策)을 세울 것을 극언(極言)하니 그 말이 너무 과격(過激)함으로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광인(狂人)이라 하여 귀양보내었다.
임진(壬辰)란(亂)이 일어남에 동지(同志)를 모아서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원근(遠近)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조헌(趙憲)이 일어났다. 하여 용관(聳觀)하고 우국(憂國)하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여러 번 왜병(倭兵)과 싸워서 이기더니 금산(錦山)싸움에서 중과(衆寡)과가 부적(不適)하여 패사(敗死)하고 동지(同志)인 칠백의사(七百義士)도 함께 죽으니 지금도 전쟁(戰爭)하던 자리에 칠백의사(七百義士) 총(塚)이 있으며 이 싸움에 왜병(倭兵)도 죽은 자(者)가 많고 또 전쟁(戰爭)의 후방(後方) 세력(勢力)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여 물러가고 다시 전라도(全羅道)를 엿보지 못하니 호남(湖南)북부(北部)의 보전(保全)함은 주(主)로 조헌(趙憲)의 힘이었다.
이밖에도 각도(各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서 큰 전공(戰功)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적병(敵兵)을 괴롭게 하여 마음대로 횡행(橫行)치 못하게 하고 우리 나라 백성(百姓)에게 한줄기의 기(氣)를 넣어준 공(功)은 적지 아니하였으며 특(特)히 승병(僧兵)의 힘이 또한 적지 아니하니 승(僧) 유정(惟政)(호(號)는 사명산인(泗溟山人))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고제(高弟)로서 승병(僧兵)을 모아 비록 실전(實戰)에는 참가(參加)치 아니하였으나 물자(物資)의 운반(運搬)과 여러 가지 역사(役事)에 큰 조력(助力)을 하였다.
이때 국군(國軍)들도 점차(漸次)로 세력(勢力)을 얻어서 왜병(倭兵)을 쳐 부시려는 용기(勇氣)를 내게되고 권율(權慄)은 이기(梨崎)(배티,대둔산부근)에서, 이정암(李廷馣)은 연안(延安)에서, 김시민(金時敏)은 진주(晉州)에서 모두 크게 이겼다.
이 정도(程度)의 병력(兵力)만으로는 전국(全國)에 가득히 찬 적(敵)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왕(王선조(宣祖))은 의주(義州)에 있어서 유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호(號)는 백사(白沙) 이덕형(李德馨)(호(號)는 한음(漢陰)등(等)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하는데 난(亂)이 일어난 후(後)에 당쟁(黨爭)은 일시(一時) 멈추어 졌으나 그 저류(底流)에는 여전(如前)이 동서(東西)의 알력(軋轢)이 있음으로 왕(宣祖王)은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有西東」가 하여 東西의 싸움이 國家로 하여금 이 地境을 만들어 놓고 또 여기까지 몰려와서 東西 싸움을 하느냐 恨歎하였다.
國事가 이에 이르매 獨力으로는 恢復할만한 길이 없음으로 明나라에 請兵하기로 決定하였다. 이때 明나라에서는 이상(異常)한 와언(訛言)이 전파(傳播)되어 조선(朝鮮)이 왜(倭)와 공모(共謀)하여 명국(明國)을 치러온다고 하였다 그 증거(證據)로는 왜병(倭兵)이 들어온後 한번의 결전(決戰)도 없이 왕(王宣祖)은 압록강(鴨綠江) 변(邊)까지 들어오고 왜병(倭兵)은 평양(平壤)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청병(請兵)하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이를 변명(辨明)하고 또 원병(援兵)을 보내어 달라고 간청(懇請)하였으며 明나라에서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일본수길(日本秀吉)이 장차(將次) 명(明)나라를 치기 위(爲)하여 조선(朝鮮)에 길을 빌려달라 하고 조선(朝鮮)이 그를 거절(拒絶)하자 곧 침입(侵入)한 사정(事情)과 명국(明國)의 울타리가 되고있는 조선(朝鮮)이 명국(明國)을 대신(代身)하여 왜구(倭寇)의 화(禍)를 받고있다는 사실(事實)을 확실(確實)히 알게되고 이에 조선(朝鮮)에 원병(援兵)을 보내기로 결정(決定)하였다. 그리하여 癸巳年 正月에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사만(四萬)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평양(平壤)의 적(敵)을 대파(大破)하니 적(敵)이 개성(開城) 방면(方面)으로 물러났다. 이여송(李如松)은 적(敵)을 경(輕)히 여기고 추격(追擊)하여 벽제관(碧蹄舘)에서 싸우다가 패(敗)하고 다시 추격(追擊)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에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크게 적(敵)을 파(破)하니 적(敵)은 제해권(制海權)을 잃어서 보급(補給)이 끊어지고 또 평양(平壤)과 행주(幸州)에서 대패(大敗)하여 기세(氣勢)가 점점(漸漸) 줄어들더니 이여송(李如松)이 명(明)나라사람 심유경(沈惟敬)을 시켜서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의 사이에 화의(和議)를 진행(進行) 시켰음으로 왜병(倭兵)은 이해 사월(四月)에 경성(京城)을 물러나서 남해안(南海岸)으로 내려갔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래 머물 계획(計劃)을 세우고 또 전일(前日)에 진주(晉州)에서 패(敗)한 것을 분(憤)하게 여겨서 십여만(十餘萬)의 군사(軍士)로 진주성(晉州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전번(前番)에 김시민(金時敏)이 진주(晉州) 싸움에 대승(大勝)할 때는 수천병(數千兵)으로써 적(敵)의 십만병(十萬兵)을 물리쳤는데 이번에는 성중병(城中兵)이 육만(六萬)에 이르니 사람마다 모두 성(城)을 지키기에 아무 염려(念慮)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직 진주(晉州) 기생(妓生) 논개(論介)가 근심하였다.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이 그 연고(緣故)를 물으니 논개(論介)가 대답(對答)하되 전번(前番)에는 군사(軍士)가 비록 적으나 장수(將帥)가 서로 사랑하고 호령(號令)이 한군데서 나온 까닭에 이겼지만 이번은 군사(軍士)가 비록 많으나 통솔(統率)이 없고 장수(將帥)가 병(兵)을 알지 못하니 이 까닭에 근심한다고 하였다.
성중(城中)은 구일(九日) 구야(九夜)의 동안에 백여(百餘)차례를 싸워서 번번히 적을 막으나 마침내 성(城)이 함락(陷落)하고 성중(城中)의 백성(百姓)들까지 모두 칠만명(七萬名)이 죽으니 그 참혹(慘酷)하기가 임진란(壬辰亂) 중(中)에서도 가장 심(甚)하였고 논개(論介)는 적장(敵將)에 끌려서 촉석루(矗石樓) 아래의 암상(岩上)에서 적(敵)의 주연(酒宴)에 나갔다가 적장(敵將)의 허리를 안고 함께 강중(江中)에 떨어져 죽으니 후인(後人)이 이 암석(岩石)을 의기암(義妓岩)이라고 이름지었다.
왕(王宣祖)은 경성(京城)이 수복(收復)한 후(後) 경성(京城)을 떠난지 일년반(一年半)만에 구도(舊都)에 돌아왔다. 그러나 왜병(倭兵)이 아직 남방(南方)에 가득히 차있어 어느 때에 다시 쳐올지 알 수 없고 심유경(沈惟敬)의 화의(和議)의 대(對)하여는 반대(反對)의 태도(態度)를 취하고 명(明)나라에 적극(積極) 남공(南攻)하기를 청(請)하였다 명(明)나라에서는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원수(遠輸)하기가 곤란(困難)하다하여 구차(苟且)히 화의(和議)를 성립(成立)시키려하니 왕(王宣祖)은 국력(國力)이 약(弱)하여 독력(獨力)으로 왜(倭)를 섬멸(殲滅)치 못함을 슬퍼하여 군제(軍制)의 대(大) 개혁(改革)을 제안(提案)하니 이 안(案)은 예(隸)를 해방(解放)하여 군사(軍士)로 쓰자는 것인데 이는 군제(軍制) 개혁(改革)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계급제도(社會階級制度)의 일대(一大) 혁명(革命)이 되는 것이다.
아국(我國)의 군제(軍制)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군역(軍役)이 면제(免除)되고 노예계급(奴隸階級)은 천인(賤人)이라 하여 군역(軍役)에 참여(參與)치 못하게 하니 그 까닭은 만일 천인(賤人)이 먼저 입대(入隊)하여 군교(軍校)가 되고 양민(良民)이 후(後)에 입대(入隊)하여 병졸(兵卒)이 되면 양민(良民)이 천인(賤人)의 지휘(指揮)를 받게되어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양민(良民)이나 천인(賤人)이나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오 또 국가(國家)의 앞날을 생각하여 볼때 군사(軍士)가 부족(不足)한 현실(現實)을 타개(打開)하려면 수십만(數十萬)의 천인(賤人) 장정(壯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 종래(從來)의 계급제도(階級制度)를 깨뜨리고 천인(賤人)을 양민(良民)과 함께 군사(軍士)로 쓰게 하려하니 제신(諸臣)들은 이를 잘 토의(討議)하라고 영(令)을 내렸다.
조정(朝廷) 제신(諸臣)중(中)에는 여기에 찬성(贊成)한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사노(私奴)를 많이 부리고 있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강경(强硬)한 반대운동(反對運動)을 일으켰으니 그 이유(理由)는 노주(奴主)의 분(分)은 군신(君臣)의 분(分)과 같으매 만일 노예(奴隸)를 해방(解放)하여 양민(良民)을 만들면 이는 강상(綱常)이 무너지는 것이라 하니 기실(其實)은 국가(國家)의 강상(綱常)을 존중(尊重)히 여기는 데서 나온 주장(主將)이 아니라 전(專)혀 노예(奴隸)를 부려서 호화(豪華)한 생활(生活)을 누리려는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왕(王宣祖)의 제안(提案)이 마침내 통과(通過)되지 못하니 왕(王宣祖)은 「국가(國家)를 살리는 최선(最善)의 안(案)이 개인(個人)들의 사심(私心)때문에 실행(實行)되지 못하니 가탄(可歎)한 일이로다.」하고 이 제도(制度)를 공노(公奴)에게만 시행(施行)하였다. 공노(公奴)중(中)에는 주야(晝夜)로 무예(武藝)를 연습(練習)하여 군대(軍隊)에 들어가서 양민(良民)이 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한편(便)으로 양반계급(兩班階級)의 여러 가지 방해(妨害)로 인(因)하여 완전(完全)한 실시(實施)를 보지 못하였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으로 물러간 후(後)에 명(明)나라와의 사이에 화의(和議)가 진행(進行)되어 차츰 본국(本國)으로 물러가더니 양국(兩國)의 대표(代表) 사이에 결정(決定)한 화의(和議) 조건(條件)과 명(明)나라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보낸 칙서(勅書)의 내용(內容)이 서로 틀린다 하여 선조(宣祖) 삼십년(三十年) 정유(丁酉)에 다시 대군(大軍)을 보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유란(丁酉亂)이라 한다.
왜병(倭兵)은 전번(前番)의 실패(失敗)에 삼가서 수군(水軍)을 더 증가(增加)하고 또 미리 간첩(間諜) 요시라(要詩羅)를 놓아서 우리 조정(朝廷)과 이순신(李舜臣)과의 사이를 이간(離間)하니 우리 조정(朝廷)에서는 그 모략(謀略)에 넘어가서 이순신(李舜臣)을 잡아다가 옥(獄)에 가두고 장차(將次)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事件)의 이면(裏面)에는 역시(亦是) 당파(黨派) 싸움이 숨어 있으니 조정(朝廷)이 의주(義州)에 있을 동안은 당쟁(黨爭)이 한동안 멈추고 있더니 경성(京城)에 환도(還都)한 후(後)에 다시 재연(再燃)하여 북인(北人)의 세력(勢力)이 우세(優勢)한 판인데 이순신(李舜臣)은 유성룡(柳成龍)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유성룡(柳成龍)은 남인(南人)이기 때문에 북인(北人)들은 이순신(李舜臣)을 당쟁(黨爭)의 희생(犧牲)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이순신(李舜臣) 처치(處置)에 대(對)하여 의견(意見)을 유성룡(柳成龍)에게 물으니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李舜臣)은 명장(名將)이라 왜인(倭人)의 말을 듣고 함부로 죄(罪)줄 수도 없고 또 전란(戰亂)이 끝나지 아니한 때 이런 명장(名將)을 죽이는 것은 불가(不可)하다」하였다.
왕(王宣祖)은 이 말을 중(重)히 여겨 다만 면직(免職)시키고 석방(釋放)하니 이때 사신(史臣)은 이를 평(評)하기를 「남해(南海)를 홀로 지켜서 국맥(國脈)을 붙잡고 오던 명장(名將)이 적(敵)의 모개(謀介) 이간(離間)과 당쟁(黨爭)의 여파(餘波)로 이런 일을 당(當)하니 멀리 남방(南方)의 적세(賊勢)를 바라보고 가까이 조정(朝廷)의 형편(形便)을 살펴봄에 가슴속에서 통곡(痛哭)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구나」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면직(免職)된 뒤에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니 원균(元均)은 본시(本是)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사(水使)로 있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통제사(統制使)가 된 뒤에 그 부하(部下)되기를 부끄러워하여 항상(恒常) 이순신(李舜臣)을 조정(朝廷)에 모해(謀害)하던 자(者)이오 먼저에 이순신(李舜臣)이 죄(罪)를 받은 것도 원균(元均)의 모해(謀害)가 유력(有力)한 일인(一因)이 된 것이다. 왜병(倭兵)들은 원균(元均)이 이순신(李舜臣)을 대신(代身)함을 듣고 수군(水軍)을 크게 발(發)하여 우리 수군(水軍)을 치니 원균(元均)이 대패(大敗)하여 육지(陸地)에 올라와 도망(逃亡)하였는데 그 생사(生死)는 세상(世上)이 알지 못하며 적(敵)은 전라도(全羅道) 해안(海岸)을 점령(占領)하고 멀리 충청도(忠淸道)의 직산(稷山) 당진(唐津)에 까지 침입(侵入)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크게 당황(唐慌)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라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순신(李舜臣)으로 통제사(統制使)를 삼았다. 이때 왜병(倭兵)이 전라도(全羅道) 육지(陸地)에 깊이 들어와 싸우므로 이순신(李舜臣)은 산곡(山谷)길을 좇아 우수영(右水營)에 이르니 전선(戰船)의 남은 것이 겨우 십이척(十二隻)이라 피난선(避難船)을 모아 가지고 진도(珍島)의 울돌목(명량(鳴梁)에서 적선(敵船) 오백척(五百隻)을 무찌르고 고금도(古今島)를 무찌르니 적(敵)의 세력(勢力)이 꺾이어서 다시 서해(西海)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 육지(陸地)에서는 명(明)나라 원군(援軍)이 남원(南原)에서 패(敗)하고 또 울산(蔚山) 사천(泗川) 순천(順天)등지(等地)에 진지(陣地)를 쌓고 적(敵)과 싸우다가 모두 패(敗)하였다.
적세(敵勢)가 다시 성(盛)함을 보고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사람 김덕령(金德齡)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김덕령(金德齡)은 용력(勇力)이 있고 안광(眼光)이 횃불과 같아서 대적(對敵)하는 바가 없고 왜병(倭兵)이 두려하여 감(敢)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충청도(忠淸道)에서 반란군(叛亂軍)이 일어나서 김덕령(金德齡)도 자기(自己)들과 합모(合謀)한다고 선전(宣傳)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곧 김덕령(金德齡)을 잡아다가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그 무죄(無罪)함을 알았으나 김덕령(金德齡)은 이귀(李貴)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이귀(李貴)는 서인(西人)이라 동인(東人)이 조정(朝廷)안의 세력(勢力)을 잡고 있는데 김덕령(金德齡)의 목숨을 구원(救援)하여 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김덕령(金德齡)같은 용장(勇將)을 방면(放免)하였다가 후일(後日)에 만일 반란(叛亂)을 일으키면 억제(抑制)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죽였다.
우리 나라 군사(軍士)와 명(明)나라 군사(軍士)는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랫동안 적병(敵兵)과 대치(對峙)하고 있더니 선조(宣祖) 삼십일년(三十一年) 무술(戊戌) 십일월(十一月)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으면서 왜병(倭兵)을 철수(撤收)시키는데 이순신(李舜臣)은 그 퇴로(退路)를 막고 경상도(慶尙道) 노량(露梁)에서 적(敵)을 맞아 싸워 크게 파(破)하더니 적(敵)의 탄(彈)알에 맞아 전사(戰死)하고 적(敵)이 도환(逃還)한 자(者)가 겨우 오십여척(五十餘隻)에 불과(不過)하고 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이 이로써 끝났다. 이때 조정(朝廷)의 일부(一部)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만일 전승(戰勝)하고 돌아오더라도 반드시 간신(奸臣)들의 모해(謀害)로 죽을 것이니 차라리 전사(戰死)하리라」하고 일부러 투구를 벗고 탄(彈)알에 죽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일본(日本)이 무단(無端)히 군사(軍士)를 일으켜서 인국(隣國)을 침략(侵略)하여 무고(無辜)한 인민(人民)을 함부로 살륙(殺戮)하고 우리 나라는 기근(饑饉)과 질병(疾病)이 이에 겹 들여서 참혹(慘酷)한 화(禍)가 몽고(蒙古)의 침입(侵入)보다 더 심(甚)하였고 명(明)나라가 오랫동안 군사(軍士)를 움직여서 이 때문에 나라가 몹시 병폐(病弊)하였다.
명(明)나라 군사(軍士)가 우리 나라에 와서 있는 동안에 횡폭(橫暴)한 일도 적지 아니하고 소위 관왕묘(關王廟)라 하여 중국(中國) 옛날의 관우장군(關羽將軍)을 모시고 선조(宣祖) 왕(王)으로 하여금 절하게 하는 일도 있어 우리 나라를 괴롭게 함이 많았으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란(大亂)을 구(求)해 주는 은혜(恩惠)를 깊이 감사(感謝)하여 아무런 불평(不平)도 말치 아니 하였고 명(明)나라는 이 난리(亂離)에서 많은 군사(軍士)와 재물(財物)을 잃은 까닭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만주족(滿洲族)에게 망(亡)하게 되니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깊이 명(明)나라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오래 잊지 아니 하였다.
이 난리(亂離)에 무기(武器)의 발달(發達)한 것은 구선(龜船) 이외(以外)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있으니 이는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대포(大砲)로써 이 포(砲)가 터지면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震動)하고 철편(鐵片)이 튀어 나가서 적(敵)을 해치는 것인데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석(朴昔)이 이 포(砲)를 써서 경주(慶州)를 회복(恢復)하였다. 왜병(倭兵)으로부터 얻은 조총(鳥銃)은 본시(本是) 일본(日本)이 서양(西洋)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인데 우리 나라도 이 법(法)을 얻은 후(後)에 공장(工匠)에게 명령(命令)하여 제조(製造)하니 이가 우리 나라가 총(銃)을 사용(使用)한 처음이다. 왜병(倭兵)은 물러갈 때에 여러 가지 기술자(技術者)를 사로잡아 가고 특(特)히 그 중(中)에는 도공(陶工)이 가장 많았음으로 일본(日本)의 도자기(陶磁器) 공업(工業)이 이로부터 시작(始作)하였다. 왜병(倭兵)은 저희들도 많은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희생(犧牲)하고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이 돌아갔으나 우리 나라의 우수(優秀)한 기술(技術)을 배워 갔음으로 저희들끼리 말하기를 「무장(武裝)한 유학생(遊學生)을 조선(朝鮮)에 보냈다」고 하였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은 후(後)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새로이 막부(幕府)를 열어서 이전(以前)의 잘못을 말하고 국교(國交)를 회복(恢復)하기를 거듭 청(請)하며 또 그들에게 사로잡혀간 수천(數千)명(名)의 포로(捕虜)를 돌려보내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日本)에 대(對)한 복수심(復讐心)이 복 받혀서 허락(許諾)치 아니하더니 양국간(兩國間)에 오랫동안 국교(國交)가 끊어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전쟁(戰爭)이 끝난지 칠년(七年)만에(을사(乙巳))일본(日本)의 소원(所願)을 들어서 부산(釜山)에 다시 왜관(倭館)을 열고 대마도(對馬島)와의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하여 그 후(後) 삼백년(三百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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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후(亂後)의 형세(形勢)
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은 비록 끝났으나 기경(起耕)치 못한 토지(土地)가 적지 아니하고 집과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고 생계(生計)를 잃은 백성(百姓)이 수(數)없이 많고 산곡(山谷)에 피난(避難) 갔던 사람들은 기아(飢餓)를 견디지 못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하면서 겨우 고향(故鄕)에 돌아 왔으나 의지(依支)할 곳이 없어서 도로(道路)에서 방황(彷徨)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이러한 난민(難民)에 대(對)하여 아무런 구제책(救濟策)이 없었고 더욱이 난중(亂中)에 국적(國籍)의 대부분(大部分)이 없어졌는데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은 남의 토지(土地)를 모경(冒耕)하여 자기(自己)의 토지(土地)를 만들려하니 도처(到處)에서 전송(田訟)이 일어나되 관가(官家)에서 이를 적당(適當)하게 처리(處理)치 못하였고 조정(朝廷)에서는 토지측량(土地測量)에 착수(着手)하였으나 사무(事務)가 자리를 잡지 못하여 잘 진척(進陟)되지 아니 하였다. 한 편(便)으로는 당쟁(黨爭)이 더욱 심(甚)하여 북인(北人)들 끼리에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눠져서 그 세력(勢力) 다툼은 일보(一步)를 나아가 왕위(王位) 쟁탈전(爭奪戰)과 엉켜지게 되었으니 이는 관인(官人)들 끼리에만 세력(勢力)을 다투기 보다 세력(勢力)의 발원(發願)인 군왕(君王)을 자기들 편(便)에 넣는 것이 가장 유력(有力)하기 때문이다. 당쟁(黨爭)이 이와 같이 심각(深刻)하게 되니 난후(亂後)의 모든 정리(整理) 같은 것은 아무런 효과(效果)를 나타내지 못하고 말았다.
선조(宣祖)의 다음 임금 광해군(光海君)은 본시(本是) 난중(亂中)에 인심(人心)을 수습(收拾)하려고 갑자기 세자(世子)로 세운 것이라 선조(宣祖)가 이를 바꾸려는 뜻이 있었다. 이 기미(機微)를 알고 소북파(小北派)는 선조(宣祖)의 뜻을 받들려 하고 대북파(大北派)는 세자(世子)를 옹호(擁護)하여 서로 다투더니 선조(宣祖)가 병중(病中)에 대북파(大北派)를 척축(斥逐)하던 중(中) 급졸(急猝)히 승하(昇遐)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왕위(王位)에 오르고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等)이 세력을 잡으니 항간(巷間)에서는 선조(宣祖)가 과독(過毒)하였다고 전(傳)했다.
당시(當時) 세납(稅納)은 토지(土地)의 소출(所出)로써 바치는 조세(租稅)와 지방(地方)의 특산물(特産物)을 바치는 공물(貢物)과 병역(兵役)과 부역(賦役) 대신(代身)으로 바치는 군포(軍布)가 있었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폐해(弊害)가 따르고 더욱이 대란(大亂)을 치른 후(後)로 토지제도(土地制度)와 세제(稅制)가 극도(極度)로 문란(紊亂)하여졌음으로 광해군(光海君) 즉위(卽位) 초(初) 이원익(李元翼)(호(號) 오리(梧里))이 대동법(大同法)을 설(設)하기를 청(請)하였다. 이 법(法)은 선혜청(宣惠廳)이라는 기관(機關)을 두고 매년(每年) 춘추(春秋)에 전(田) 일결(一結)에 미(米) 팔(八)되를 거두어 경고(京庫)에 수납(收納)하여 수시(隨時)로 국비(國費)를 지출(支出)하는데 각(各) 사사주인(司私主人)으로 하여금 上供하는 제(諸) 물품(物品)을 수납(收納)케 하고 이 외(外)에는 척포(尺布) 승미(升米)도 민호주(民戶主)로부터 가징(加徵)치 못하게 하여서 사주인私主人 방납계배(防納計倍)의 폐(弊)를 끄치려 함이라 광해군(光海君)은 이 제도(制度)를 경기도(京畿道)에 먼저 시험적(試驗的)으로 행(行)하니 거실(巨室)호민(豪民)과 사주인(私主人)들이 모두 방납(防納)의 대리(大利)를 잃고 백방(百方)으로 저해(沮害)함으로 광해군(光海君)은 여러 번 이 제도(制度)를 파(罷)하려 하였으나 경기(京畿)백성(百姓)들이 일제(一齊)히 그 편리(便利)함을 말하고 파(罷)하지 못하도록 다툰 까닭에 계속(繼續)하여 행(行)하고 그 후(後)에 점차(漸次)로 타도(他道)에 시행(施行)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성질(性質)이 사납고 어두워서 정치(政治)가 몹시 어지럽고 대북파(大北派)를 중용(重用)하여 그 형(兄) 임해군(臨海君) 이하(以下) 동기(同氣)를 많이 죽이고 선조(宣祖) 왕비(王妃)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廢)하여 서궁(西宮)에 유폐(幽閉)하고 폐모(廢母)에 반대(反對)하는 이원익(李元翼)(오리(梧里)) 이항복(李恒福)(필운(弼雲),백사(白沙)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정온(鄭蘊)(호(號) 동계(桐溪))등(等)을 죄(罪)주었다. 이항복(李恒福)이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으로 귀양가는 길에 철령(鐵嶺)에 올라서서 「철령(鐵嶺)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본들 어떠하리」라는 노래를 지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에 오랫동안 세력(勢力)을 잃고 기회(機會)를 엿보고 있던 서인(西人)들이 비밀(秘密)히 반정(反正)할 꾀를 꾸미더니 광해군(光海君) 십년(十年)에 이귀(李貴)(黙齋), 김류(金瑬)(北渚)等이 中心이 되어 반정군(反政軍)을 일으켜서 왕(王)을 강화도(江華島)에 내치고 왕(王)의 조카 능양군(綾陽君)을 맞아드려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인조(仁祖)이다.
임진(壬辰)란(亂)이 끝난 지 이미 이십여년(二十餘年)이라 난후(亂後) 정리(整理)도 채 되지 못한 위에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이 또 십오년(十五年) 동안을 계속(繼續)하니 국가(國家)의 정치(政治)는 말할 수 없이 헝클어지고 백성(百姓)의 생활(生活)은 극도(極度)의 곤궁(困窮)에 빠졌다. 이에 인조(仁祖)는 이원익(李元翼)을 불러들여 정승(政丞)을 삼고 난마(亂麻) 같은 정치(政治)를 정리(整理)하는데 이원익(李元翼)은 대동법(大同法)을 팔도(八道)에 모두 시행(施行)하기를 극력(極力)으로 주장(主將)하였다. 그 때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많아서 경기도(京畿道) 이외(以外)에 겨우 충청도(忠淸道)에 시행(施行)하니 백성(百姓)들은 모두 이 법(法)을 대환영(大歡迎)함으로 얼마후(後)에 반대론(反對論)을 물리치고 팔도(八道)에 시행(施行)하였다.
처음에 반정(反正)을 꾀하던 여러 사람들은 오직 국가(國家)와 백성(百姓)을 위(爲)하여 거의(擧義)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반정후(反正後) 공신(功臣)들의 대부분(大部分)은 순전(純全)히 사리(私利)를 위(爲)하여 행동(行動)하고 공신(功臣)이라는 특권(特權)을 이용(利用)하여 모리(牟利) 행위(行爲)를 자행(恣行)함으로 국인(國人)의 비난(非難)이 적지 아니 하였고 김장생(金長生)(사계(沙溪) 같은 이는 공신(功臣)들에게 글을 보내어 반정(反正) 거의(擧義)한 것은 일국(一國)이 칭송(稱誦)하는 일이나 공(功)을 빙자(憑藉)하고 사리(私利)를 도모(圖謀)하면 후세(後世)의 공론(公論)이 이를 무엇이라고 평(評)하랴 경고(警告)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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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丙子胡亂)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밖에 있는 여진족(女眞族) 즉(卽) 야인(野人)은 명(明)나라에서도 억제(抑制)하기 어려워서 항상(恒常) 회유(懷柔)하여 오던 터이라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우리 나라 북변(北邊)을 침입(侵入)하려는 계획(計劃)이 있었는데, 만일 이때에 야인(野人)이 침범(侵犯)하였다면 우리 나라는 복배(腹背)로 적(敵)을 받아서 지탱(支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육진(六鎭)의 수비를 튼튼히 한 까닭에 아무 일 없었다. 그 후(後)에 야인(野人)들은 명(明)나라 세력(勢力)이 약(弱)해짐을 보고 점차(漸次)로 기세(氣勢)를 펴는 중(中)에 여진족(女眞族)중(中)에서 노아합적(奴兒哈赤)(누르하치)이 일어나서 만주(滿洲)에 있는 여러 부족(部族)을 통일(統一)하고 광해군(光海君) 팔년(八年)에 임금이 되고 왕호(王號)를 「대한(大汗)」이라 하고 심양(瀋陽)(봉천(奉天))에 도(都)하고 국호(國號)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맹렬(猛烈)한 기세(氣勢)로 명(明)나라에 쳐들어갔다. 명(明)나라에서는 우리 나라에 구원(救援)을 청(請)하였음으로 광해군(光海君)은 강홍립(姜弘立) 등(等)으로 하여금 군사(軍士) 일만명(一萬名)을 거느리고 가서 명(明)나라를 돕게 하니 이는 임진(壬辰)란(亂)의 은혜(恩惠)를 갑기 위(爲)함이라 그러나 명(明)나라 군사(軍士)가 패(敗)하고 강홍립(姜弘立)은 만주(滿洲)에 항복(降服)하고 그 후(後)로부터 광해군(光海君)은 될수록 중립(中立)을 지켜서 만주(滿洲)가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와서 동맹(同盟)하기를 청(請)하였으나 응(應)하지 아니하고 또 명(明)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보내기를 교섭(交涉)하였으되 역시(亦是) 주저(躊躇)하고 있었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후(後)에 조정(朝廷)에서는 광해군(光海君)의 중립정책(中立政策)이 명(明)나라에 대(對)한 의리(義理)에 어긋났다하여 가도(假島)(평안도 피섬)에 와 있는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을 도와서 그와 긴밀(緊密)한 관계(關係)를 맺었다.
처음에 인조반정(仁祖反正)할 때에 이괄(李适)의 공(功)이 적지 아니하였는데 조정(朝廷)의 처사(處事)가 이괄(李适)의 마음에 만족(滿足)치 아니하였음으로 이괄(李适)은 평안도(平安道)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풍우(風雨)같이 달려와서 경성(京城)을 점령(占領)하였다. 인조(仁祖)는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에 피난(避難)하고 장만(張晩), 정충신(鄭忠信), 이서(李曙) 등(等)으로 하여금 이를 쳐서 깨뜨리고 이괄(李适)이하 여러 수령(首領)들을 죽이니 그 여당(餘黨)이 만주(滿洲)로 도망(逃亡)하여 들어가서 만주(滿洲) 임금 태종(太宗)을 충동(衝動)시켜 조선(朝鮮)을 치기를 청(請)하였다.
이때 만주(滿洲)는 우리 나라가 명(明)나라를 돕고 있는 형세(形勢)를 살피고 힘으로 누르려고 하던 차(次)이라 아민(阿敏)이라는 장수(將帥)로 하여금 군사(軍士) 삼만(三萬)을 거느리고 인조(仁祖) 오년(五年) 정묘(丁卯)에 쳐들어왔다. 조정(朝廷)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적군(敵軍)을 막고 왕(王仁祖)은 강화도(江華島)에 피난(避難)하더니 마침내 그들과 형제(兄弟)의 의(誼)를 맺고 적군(敵軍)이 물러가니 이를 정묘호란(丁卯虎亂)이라 한다.
그 후(後) 만주(滿洲)의 세력(勢力)은 더욱 강(强)해지고 그 임금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太宗)은 용병(用兵)을 잘하여 중국(中國)과 몽고(蒙古)를 점차(漸次)로 약취(略取)하고 우리 나라에 대(對)하여 형제국(兄弟國)의 약조(約條)를 고쳐서 군신(君臣)국(國)으로 만들자고 함에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분(憤)하게 여겨서 그들과 절교(絶交)하자고 주장(主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차(次)에 만주(滿洲)는 국호(國號)를 청(淸)이라 고치고 천자(天子)의 호(號)를 칭(稱)하고 우리 나라에 대(對)하여 저희에게 존호(尊號)를 바치라고 요구(要求)하니 이에 양국(兩國)의 국교(國交)는 몹시 험악(險惡)하였다.
이때 조정(朝廷)에서는 청병(淸兵)이 반드시 침입(侵入)할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오직 입으로 청국(淸國)을 배척(排斥)하는 소리만 높을 뿐이오 침입(侵入)하는 것을 막을만한 준비(準備)는 전연(全然) 없었다.
조신(朝臣) 중(中)에는 이미 양국(兩國)의 화(和)가 끊어지고 또 방비책(防備策)도 세우지 않으면 국가(國家)의 장래(將來)가 어떻게 될 것이냐고 근심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고 윤황(尹煌)(八松)같은 이는 「이미 和하지 못하고 또 싸우지도 못하면 이는 앉아서 나라를 亡케 함이라 다시 和할 수가 없다면 싸울 準備를 急히 갖춰야 될 것인데 只今에 軍士도 없고 軍糧도 없으니 이제로부터 이를 準備하여 淸兵을 막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 오직 한가지 방법(方法)은 왕(王)이 여러 신하(臣下)를 거느리고 모두 창(槍)을 집고 활을 메고 선진(先陣)에 나가서 개성(開城)이나 평양(平壤)에 진주(進駐)하여 전국(全國)에 호령(號令)을 내리면 이 소식(消息)을 들은 의병사(義兵士)들이 반드시 무기(武器)를 준비(準備)하고 양식(糧食)을 등에 지고 스스로 달려와서 국난(國難)에 부(赴)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순월(旬月)사이에 정병(精兵) 수만(數萬)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 방법(方法)만이 나라를 구(救)하는 길이라」하여 친정론(親征論)을 역설(力說)하였다.
그러나 조정(朝廷) 내(內)에는 김류(金瑬)와 김자점(金自點)의 세력(勢力)싸움이 벌어지고 붓대와 혀끝으로 적(敵)을 꾸짖을 뿐이오 아무런 계획(計劃)도 없는 자(者)들이 대부분(大部分)이니 이 친정론(親征論)이 실행(實行)되지 못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中)에 인조(仁祖) 십사년(十四年) 병자(丙子) 십이월(十二月)에 청태종(淸太宗)이 스스로 군사(軍士) 십만(十萬)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는데 이때 우리 나라의 명장(名將) 임경업(林慶業)(고송(孤松))이 의주(義州)부윤(府尹)으로 있으면서 백마(白馬)산성(山城)을 굳게 지키고 있음으로 청병(淸兵)은 이를 피(避)하여 창성(昌城)의 간도(間道)로 나와서 도중(道中)에서 만나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경성(京城)에 통보(通報)하는 길을 끊고 신도겸행(信道兼行)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넌지 사월(四月)만에 선진(先陣)이 경성(京城) 교외(郊外) 십여리허(十餘里許)에 이르니 조정(朝廷)에서는 몽상(夢想)도 못하던 일이라 상하(上下)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먼저 왕자(王子)를 비롯하여 대신(大臣)들의 가족(家族)을 강화도(江華島)로 피난(避難)시키니 이는 청병(淸兵)이 침입(侵入)하는 때에 가장 안전(安全)한 피난지(避難地)로 설비(設備)하여 둔 곳이오 또 청병(淸兵)을 막을 준비(準備)를 하지 아니한 것도 전(專)혀 이 강화도(江華島)를 믿었기 때문이다.
왕(王仁祖)은 제신(諸臣)을 거느리고 강화(江華) 반월(半月)로 나가려 하더니 청병(淸兵)이 이미 길을 막았음으로 급(急)히 동대문(東大門)을 나가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니 청병(淸兵)이 뒤를 따라 성(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성(城)에 농거(籠居)한지 사십일(四十日)에 근왕병(勤王兵)은 이르지 아니하고 양식(糧食)이 핍절(乏絶)하여 마(馬)를 잡아먹게 되고 성중(城中) 인심(人心)이 크게 위구(危懼)하여 고성(孤城)을 지키기 어려운 형편(形便)이었다. 하루는 왕(王仁祖)이 성(城)을 순시(巡視)하더니 한 군졸(軍卒)이 왕(王)전(前)에 나와 업드려 말하되 「지금 대장(大將)된 사람은 목숨을 아껴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비단 옷을 입고 성(城)아래에 앉아서 우리 군졸(軍卒)을 독전(督戰)하니 이런 대장(大將)은 아무 소용(所用)이 없는 것인즉 우리 군졸(軍卒) 중(中)에서 대장(大將)을 정(定)하여 주시면 사력(死力)을 내어 싸우리라」하니 왕(王)은 군심(軍心)이 이미 변(變)함을 보고 크게 놀라서 제신(諸臣)과 이를 의론(議論)하는데 혹시(或是) 군변(軍變)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이때 강화도(江華島)를 지키는 대장(大將)은 청병(淸兵)이 바다를 건너서 들어올 수 없는 것을 굳게 믿고 매일(每日) 주연(酒宴)을 베풀고 놀더니 뜻밖에 청병(淸兵)이 성하(城下)에 이르러 쳐들어 왔다. 성중(城中)에서는 비록 군사(軍士)는 있었으나 수족(手足)을 놀릴 사이 없이 함락(陷落)되고 피난(避難) 나갔던 왕자(王子)이하(以下)가 모두 포로(捕虜)되고 대신(大臣)들 가족(家族)의 부녀(婦女)들은 능욕(凌辱)을 당(當)할 것을 두려하여 혹은 목매어 죽고 혹(或)은 바다에 빠져 죽으니 그 참상(慘狀)을 참아 볼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는 강화도(江華島) 함락(陷落)의 소식(消息)을 듣고 모두 낙담(落膽)하여 더 항전(抗戰)할 기(氣)를 전연(全然)잃고 왕(王仁祖)과 최명길(崔鳴吉)(지천(遲川))등(等)은 화의(和議)를 주장(主張)하게 되니 이 화의(和議)라 함은 동등(同等)한 국가(國家)로써 화친(和親)하는 것이 아니오 청(淸)에 굴복(屈服)하고 천자(天子)로 모시는 굴욕적(屈辱的)인 항복(降服)이다. 이에 조신(朝臣) 중(中) 척화파(斥和派)는 군신(君臣)이 모두 전사(戰死)할지언정 결(決)코 오랑캐의 앞에 굴슬(屈膝)하고 살지는 못하리라 하고 최명길(崔鳴吉) 등(等) 주화파(主和派)를 매국적(賣國賊)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왕(王仁祖)은 한갓 죽는 것은 국가(國家)를 위(爲)함이 아니라 하고 다음해 정축(丁丑) 정월(正月)에 삼전도(三田渡)(송파)에서 청병(淸兵)에 항복(降服)하였다.
이에 청태종(淸太宗)은 세자(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인질(人質)로 하고 김상헌(金尙憲) 등(等) 척화신(斥和臣)과 수천명(數千名)의 포로(捕虜)를 끌고 군사(軍士)를 돌렸다.
이때 최명길(崔鳴吉)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尙憲) 등(等) 척화파(斥和派)의 사이에 서로 의심(疑心)이 생긴 까닭은 척화파(斥和派)는 주화파(主和派)로써 부귀(富貴)를 탐(貪)내어 청국(淸國)에 항복(降服)하여 그 지위(地位)를 굳게 하려는 것이라 하고 주화파(主和派)는 척화파(斥和派)로써 참으로 대의(大義)를 세우는 것이 아니오 조명(釣名)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 한 것이다.
그 뒤에 청국(淸國)은 명국(明國)을 치기 위(爲)하여 우리 나라 군사(軍士)를 보내기를 강요(强要)하니 최명길(崔鳴吉)이 극력(極力) 반대(反對)함으로 청(淸)은 최명길(崔鳴吉)을 불러다가 옥(獄)에 가두었다.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鳴吉)은 모두 사생(死生)이 눈앞에 박두(迫頭)하되 조금도 굴(屈)하지 아니하고 끝끝내 대의(大義)를 지켰음으로 종래(從來) 양파(兩派)사이의 모든 의심(疑心)과 오해(誤解)가 풀려버렸다.
우리 나라 사람이 청병(淸兵)에게 잡혀간 것이 적지 아니하고 또 청국(淸國)은 명(明)나라를 칠 군사(軍士)를 보내라고 계속(繼續) 요구(要求)하니 조정(朝廷)에서는 포로(捕虜)된 사람을 돌려오는 것과 군사(軍士)보내기를 거절(拒絶)하는 것이 대청외교(對淸外交)의 가장 중요(重要)한 일이었다. 그러나 청(淸)의 힘이 늘어서 군사(軍士)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었는데 임경업(林慶業)이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명병(明兵)과 싸우게 되자 군사(軍士) 중(中)에 도망(逃亡)하여 명(明)나라에 들어가서 청병(淸兵)의 내용(內容)을 알려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또 포로(捕虜)된 사람을 담배를 주고 돌려온 일이 있으니 담배는 광해군(光海君) 때에 일본(日本)을 거쳐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고 몇 해 아니 되어 국내(國內)에 퍼져서 한 생산업(生産業)이 되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는, 삼국시대(三國時代)는 혹(或)은 대등(對等)한 지위(地位)로써 교제(交際)하고 혹(或)은 외교정책(外交政策)으로 사대(事大)의 예(禮)를 잡더니 몽고(蒙古) 침입(侵入) 후(後)에 그 힘에 굴복(屈服)하여 완전(完全)한 군신(君臣) 관계(關係)가 되고 고려말(高麗末)에 명(明)나라가 중국(中國)을 차지하자 자진(自進)하여 군신(君臣) 관계(關係)를 맺으니 이는 북방(北方) 호족(胡族)에 대(對)하여는 항상(恒常) 적대감정(敵對感情)을 가지면서 한족(漢族)에 대(對)하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대(事大)의 예(禮)를 잡는 고래(古來)의 한 전통(傳統)이었다. 그런데 청국(淸國)은 호족(胡族)이라 국인(國人) 전체(全體)가 그에게 굴복(屈服)하기를 싫어하고 힘만 있으면 그를 쳐보려는 생각을 가졌다.
병자(丙子)의 란(亂)에 힘이 원체(元體) 부족(不足)하여 굴복(屈服)하기는 하였으나 청(淸)에 대한 반항심(反抗心)은 더욱 굳어졌다. 인질(人質)로 갔던 왕자(王子)는 십년(十年)만에 돌아오더니 세자(世子)는 십년(十年) 노고(勞苦)에 귀국(歸國)한지 얼마 아니 되어 병사(病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인조(仁祖)의 뒤를 이어 왕(王)이 되니 이가 효종(孝宗)이다.
효종(孝宗)은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백반고초(百般苦楚)를 비상(備嘗)하고 또 청병(淸兵)에 종사(從事)한 일이 있어 그들의 실력(實力)을 잘 알고 있는지라 왕(王)이 된 후(後)에 청(淸)의 원수(怨讐)를 갚을 생각이 간절(懇切)하여 북벌(北伐)할 뜻을 품었다.
이에 송시열(宋時烈)(우암(尤庵)등(等)과 더불어 북벌(北伐) 계획(計劃)을 꾸미고 이완(李浣)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조련(調練)시키고 각지(各地)에 전마(戰馬)를 기르고 주요(主要)한 병참지(兵站地)에 군량(軍糧)을 저치(儲置)하였다. 그리고 이조(李朝)건국(建國)한지 이백오십여년(二百五十餘年)동안에 서북인(西北人)의 사로(仕路)를 막고 가혹(苛酷)한 차별(差別) 대우(待遇)를 하더니 강대(强大)한 청국(淸國)을 치려니 자연(自然)히 서북인(西北人)의 힘을 합(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에 비로소 서북인(西北人) 조용(調用)의 논(論)이 일어났다. 그러나 종래(從來)에 문(文)은 지평장령(持平掌令)에 지나지 못하고 무(武)는 만호첨사(萬戶僉使)에 지나지 못하던 것을 겨우 일이(一二)계급(階級)을 올려 주자는 데 불과(不過)하고 이것조차 조정(朝廷)안의 양반계급(兩班階級)의 방해(妨害)로 인(因)하여 순편(順便)하게 진행(進行)치 못하였다.
한편(便)으로 청국(淸國)과 교통(交通)한 뒤로 중국(中國)의 학문(學問)과 산업(産業)방면(方面)을 보고 돌아온 학자(學者)들 중(中)에는 우리 자체(自體)의 비판(批判)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청국(淸國)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발달(發達)하고 서양학술(西洋學術)이 수입(收入)되어 널리 퍼지고 있는 때이라 우리 나라 사신(使臣)들이 당시(當時) 청(淸)의 서울인 북경(北京)을 내왕(來往)하면서 이러한 중국(中國) 학술(學術)방면(方面)에 눈뜨기 시작(始作)하고 우리의 종래(從來)의 성리학(性理學)만으로는 국력(國力)을 크게 할 수 없으니 위선(爲先) 우리의 고유한 문화(文化)와 역사(歷史) 지리(地理) 등(等)을 연구(硏究)하는 동시(同時)에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學問)을 넓혀서 국내(國內)의 산업(産業)과 외국무역(外國貿易)을 진흥(振興)시켜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를 북학론(北學論)이라 이르고 북학(北學)이라 함은 북(北)으로 선진국(先進國)을 배운다는 뜻이다.
북학론(北學論)을 생(生)하는 학파(學派)를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또는 실학파(實學派)라 하는데 그중(中) 먼저 주창(主唱)한 사람은 유명(有名)한 경제학자(經濟學者)로 칭(稱)하는 유형원(柳馨遠)(반계(磻溪))이었고 실학(實學)의 주창(主唱)은 종래(從來) 정주학(程朱學)만을 숭고(崇高)하던 학풍(學風)의 일대(一大) 변화(變化)이오 또한 침체(沈滯)한 사회(社會) 분위기(雰圍氣)에 일대(一大) 청신기분(淸新氣分)을 주입(注入)한 것이었다.
정치가(政治家)중(中)에는 김육(金堉)(잠곡(潛谷)이 중국(中國)으로부터 철전(鐵錢)을 수입(收入)하여 철화(鐵貨) 제도(制度)의 확립(確立)을 꾀하니 이는 면포(綿布)를 화폐(貨幣)로 사용(使用)하여서는 국내(國內)의 산업(産業)이 발달(發達)될 수 없음으로 기어(期於)히 철화(鐵貨)로써 통화(通貨)를 삼으려 한 것이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주전(鑄錢)을 시작(始作)함으로부터 육백여년(六百餘年)을 지난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철화(鐵貨)가 통화(通貨)로 쓰게 되었으며 또 대동법(大同法)도 김육(金堉)의 강력(强力)한 주장(主張)에 의(依)하여 전국(全國)에 고루 시행(施行)하게 되었다.
또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로 흉년(凶年)이 자주 드는데 흉년(凶年)의 원인(原因)은 주(主)로 한재(旱災)이었고 특(特)히 수도경작(水稻耕作)에 한재(旱災)가 더욱 심(甚)하였다. 이에 효종(孝宗)은 만주(滿洲)에서 보고 온 수차(水車)를 국중(國中)에 보급(普及)시켜서 관개(灌漑)에 적지 않은 편의(便宜)를 주었다.
효종(孝宗)이 북벌(北伐) 계획(計劃)을 세움으로부터 비로소 자기비판(自己批判)이 생겨서 자체(自體)가 얼마나 미약(微弱)하고 침체(沈滯)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학술(學術) 산업(産業) 등(等) 모든 방면(方面)에 개혁(改革)과 쇄신(刷新)의 기운(氣運)이 가득 하였다. 소위(所謂) 북벌(北伐)이라 함은 효종(孝宗)이 복수심(復讐心)에서 나온 일종(一種)의 희망(希望)이오 당시(當時)의 양국(兩國) 국력(國力)을 비교(比較)하여 보아서 결(決)코 실현성(實現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국민(國民) 전체(全體)가 북벌(北伐)의 불가능(不可能)함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 등(等)이 이를 주장(主張)한 것은 왕(王孝宗)의 뜻을 영합(迎合)하여 자기(自己)의 지위(地位)를 고식(固植)하려 한 것이오 아무 진실성(眞實性)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후(後)에 윤휴(尹鑴)가 북벌(北伐) 론(論)을 주장(主張)한 것도 또한 조명(釣名)을 위(爲)한 것이었다. 효종(孝宗)은 북벌(北伐)하기 위(爲)하여 총수대(銃手隊)를 양성(養成)하였는데 이때 북만주(北滿州)의 흑룡강(黑龍江) 방면(方面)에서는 아라사(俄羅斯)(러시아)인(人) 침략(侵略)이 심(甚)하여 청(淸)과의 사이에 충돌(衝突)이 있으되 청인(淸人)은 항상(恒常) 아(俄) 인(人)에게 패(敗)함으로 청(淸)은 조선(朝鮮) 총수(銃手)의 잘 싸움을 알고 구원(救援)을 청(請)하여 두 번을 우리 총수대(銃手隊)가 들어가서 아(俄) 인(人) 격퇴(擊退)에 성공(成功)하니 이가 우리 나라와 아(俄) 인(人)이 서로 관섭(關涉)한 시초(始初)이었으며 효종(孝宗)은 왕위(王位)에 있은지 십년(十年) (기해(己亥)오월(五月)) 승하(昇遐)하고 북벌(北伐)론(論)은 스스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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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西洋文化)와의 교섭(交涉)과 외국무역(外國貿易)
이조(李朝)는 정주학(程朱學)을 숭상(崇尙)하고 그 외(外)의 학문(學問)은 일체(一切)로 이단(異端)이라 하여 배척(排斥)함으로 학술(學術)의 발달(發達)할 여지(餘地)가 없었다. 산업(産業) 방면(方面)에 있어서는 오직 농업(農業)을 중(重)히 여기고 공업(工業)을 천(賤)히 여기며 혹시(或是) 공업(工業) 기술(技術)이 능숙(能熟)한 자(者)가 있으면 소위(所謂) 양반(兩班)들은 그를 불러다가 임금(賃金)도 변변히 주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사역(使役) 함으로 기술자(技術者)들은 그 생활(生活)을 유지(維持)할 수 없어서 그 후(後)부터는 그 기술(技術)을 발휘(發揮)치 아니하고 고의(故意)로 조악(粗惡)한 물건(物件)을 만들게되니 그 까닭에 기술(技術)은 점차(漸次)로 퇴보(退步)되고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 국제적(國際的)으로 유명(有名)한 모든 공작물(工作物)이 다시 생산(生産)되지 못하니 유명(有名)한 백제(百濟) 이래(以來)의 조선(造船) 기술(技術) 신라시대(新羅時代)의 건축(建築) 조각(彫刻) 회화(繪畵) 등(等) 기술(技術) 고려(高麗)의 자기(磁器) 제지(製紙) 기술(技術) 등(等)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그러던 중(中) 중국(中國)에서는 명(明)나라 말엽(末葉)에 이태리(伊太利)사람 이마두(伊瑪竇)(마테오 리치)가 북경(北京)에 와서 천주교(天主敎) 당(堂)을 세우고 교리(敎理)와 학술(學術)에 관(關)한 도서(圖書)를 많이 번역(飜譯)하여 낸 뒤로부터 서양(西洋)의 학술(學術)과 기물(器物)이 차차(次次) 퍼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국(中國)을 거쳐 다시 우리 나라에 지래(持來)하게 되었다.
인조(仁祖) 구년(九年) (단기 삼천구백육십사년 신미(辛未))에 정두원(鄭斗源)(호정(壺亭))이 明나라에 갔다가 西洋의 총(銃) 천리경(千里鏡)(망원경) 자명종(自鳴鐘)(시계)등(等)을 가져와서 처음으로 서양(西洋) 문물(文物)을 전(傳)하였으며 효종(孝宗) 때에는 김육(金堉)이 북경(北京)의 흠천감(欽天監)에 사람을 보내어 서양(西洋) 역법(曆法)을 배워다가 효종(孝宗) 사년(四年) (계사(癸巳))부터 시헌역(時憲曆)을 시행(施行)하니 이것이 서양(西洋) 문물(文物)을 직접(直接)으로 채용(採用)한 시초(始初)이었다.
서양(西洋)의 천주교(天主敎)는 선조(宣祖)때에 중국(中國)을 거쳐서 들어온 형적(形迹)이 있고 인조(仁祖)때로부터 서학(西學)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는 이름으로 비밀리(秘密裏)에 민간(民間)에 유포(流布)되고 있었다. 원래(原來) 종교(宗敎)의 포교(布敎)에는 교리(敎理) 이외(以外)에 다른 학술(學術) 공예(工藝) 등(等)을 수반(隨伴)하여 와서 교리(敎理) 선전(宣傳)의 힘을 돕는 것이다. 그 까닭에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불교(佛敎)가 들어올 때에 여러 가지 기술(技術)이 반래(伴來)하고 천주교(天主敎)의 포교(布敎)에도 서양(西洋)문물(文物)의 전래(傳來)가 간접적(間接的)으로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의 학술(學術)과 공업(工業) 기술(技術)에 이색(異色)이 섞이게 되었다.
서양(西洋)사람으로서 직접(直接)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는 선조(宣祖)때에 제주도(濟州道)에 표착(漂着)한 마리이(馬里伊)(포르투칼 사람..)를 비롯하여 인조(仁祖)때에는 화란(和蘭)(네델란드)사람 삼인(三人)이 표착(漂着)하여 왔고 그 중(中)에서도 박연(朴淵)은(벨테브레)은 대포(大砲)를 만드는 기술(技術)이 있고 우리 나라 사람에게 장가를 들어서 살았으며 효종(孝宗)때에는 역시(亦是) 화란(和蘭)사람 하멜등(等)(여수시 바닷가에 하멜공원이 있음) 삼십육(三十六)인(人)이 표류(漂流)하여 와서 십사년(十四年)동안 우리 나라에 구류(拘留)되어 있다가 그 중(中)에서 「하멜」등(等) 육인(六人)이 일본(日本)의 장기(長崎)로 도망(逃亡)하여 그곳에서 본국(本國)에 돌아갔다. 「하멜」이 우리 나라에 관(關)한 책(冊)을 지어내니 서양(西洋) 사람의 손으로 우리 나라가 세계(世界)에 소개(紹介)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외국(外國) 무역(貿易)은 전(前)에는 외국(外國)과의 통상(通商)을 국가(國家) 재정(財政)을 보족(補足)하기 위(爲)하여 통상(通商)에 힘쓰고 거기에 필요(必要)한 시설(施設)을 하였다. 일본(日本)에 대(對)하여는 부산(釜山) 왜관(倭館)을 물이 깊은 초량(草梁)으로 옮기고 선박(船舶)의 왕래(往來)를 편리(便利)하게 하고 청(淸)에 대(對)하여는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의 무역(貿易)을 정기적(定期的)으로 개설(開設)하게 하고 동부(東部) 만주(滿洲)에 대(對)한 회령(會寧) 개시(開市)에도 그때 그때의 적당(適當)한 변통(變通)을 더 하였다. 의주(義州)에서 청인(淸人)의 생사(生絲)를 들여오고 부산(釜山)에서 일본(日本)의 은(銀)을 받아다가 다시 두 나라에 전매(轉賣)하여 그 이익(利益)을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에 보태었고 또 인삼(人蔘)의 수출(輸出)도 적지 아니 하였다.
이조개국(李朝開國) 초(初)에는 남양(南洋) 방면(方面)의 조왜(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섬라(暹羅)(동남아시아 샴, 타이) 유구(琉球)(오끼나와)등(等) 여러 나라가 자주 토산물(土産物)을 가지고 오더니 그 후(後)에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의 해상(海上)에는 왜구(倭寇)의 작폐(作弊)가 심(甚)하여 남양(南洋) 사람들의 직접(直接) 통항(通航)은 끊어지고 그 대신(代身)에 해상(海上) 무역(貿易)으로써 유일(唯一)한 생계(生計)를 삼는 유구(琉球)사람들이 남해(南海) 일본(日本) 조선(朝鮮)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면서 중계무역(中繼貿易)의 이(利)를 취(取)하였다.
이러한 관계(關係)로써 유구(琉球)는 우리 나라에 내왕(來往)이 많고 성종(成宗)때에 가장 빈번(頻繁)하였고 연산군(燕山君) 이후(以後)로 차차(次次) 드물어졌다. 그네들은 대개(大槪) 섬라(暹羅) 안남(安南)(베트남) 남양군도(南洋群島)(괌,싸이판지역) 조왜(爪哇)(베트남 마부 쟈바) 등(等) 남국(南國)의 물자(物資)를 직접(直接) 또는 중국(中國) 경유(經由)로 받아다가 일본(日本) 박다(博多)(규슈)에서는 일본(日本)상인(商人)에 넘기고 우리 나라 삼포(三浦)로 와서는 주(主)로 면포(綿布)와 교역(交易)하여 한번에 수천(數千) 내지(乃至) 수만여필(數萬餘疋)을 가져가는 일도 있었으니 이때의 일본(日本)이나 유구(琉球)는 아직 목면(木棉) 재배(栽培)를 몰라서 일국(一國)의 수요(需要)를 우리 나라에서 가져다가 공급(供給) 하였음으로 우리 나라 면포(綿布)는 국제(國際) 통화(通貨)로써 중요성(重要性)을 가지고 있었다. 인조(仁祖)때에 유구(琉球) 왕(王)이 일본(日本)에 잡혀간 일이 있는데 왕자(王子)가 부왕(父王)을 속(贖)하고자 하여 여러 가지 보화(寶貨)를 배에 싣고 일본에 가다가 바람에 표류(漂流)되어 제주도(濟州道)에 내박(來泊)하였다. 그때 제주도(濟州道) 목사(牧使)는 그 보화(寶貨)를 탐내어 취(取)하려 하였으나 응(應)하지 아니 함으로 불법입국(不法入國)하였다는 죄명(罪名) 하(下)에 사형(死刑)에 처(處)하니 왕자(王子)는 부왕(父王)도 속(贖)하지 못하고 아무 죄(罪)없이 이역(異域)에서 죽는 것이 하도 원통(寃痛)하여 보화(寶貨)를 해중(海中)에 집어넣고 글 한 수(首)를 짓고 형(刑)을 받으니 이것이 유구(琉球) 사람이 우리나라에 온 최후(最後)이었다.
堯語難明桀服身 三良入地人誰贖
臨刑何暇訴蒼旻 二子乘舟賊不仁
骨曝沙場纏有草 竹西樓下滔滔水
魂歸故國弔無親 遺恨分明咽萬春
堯話도桀服身이 밝히기 어렵고
세사람 묻히니 누가 贖하리오
刑에 臨하여 하늘에 호소할 겨를도 없네
二子乘舟에 적은 어질지 못하네
뼈는 모래밭에 딩굴고 풀마저엉킬터
魂은 고국에 돌아간들 조문할 친척 없네
죽서루아래 도도히 흐르는 물처럼
유한 오열은 분명 만년 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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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당쟁(四色黨爭)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은 서인(西人)의 손으로써 된 것임으로 서인(西人)이 정권(政權)을 홀로 차지하고 광해군(光海君)을 도와서 악정(惡政)을 행(行)하던 대북파(大北派)는 전멸(全滅)되고 소북파(小北派)와 남인(南人)은 정치(政治)에 참여(參與)하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다. 그러나 서인(西人)의 횡포(橫暴)가 차차(次次) 심(甚)하였음으로 효종(孝宗) 말년(末年)으로부터 왕(王)은 서인(西人)을 싫어하고 남인(南人)을 등용(登用)하는 일이 많더니 효종(孝宗)의 다음 임금 현종(顯宗)에 이르러서는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함께 조정(朝廷)에 입(立)하였다.
이때 양파(兩派)의 당쟁(黨爭)으로서 소위(所謂) 예송(禮訟)이라는 것이 있으니 효종(孝宗)의 상(喪)에 그 계모(繼母) 조대비(趙大妃)가 어떠한 복(服)을 입어야 옳으냐 함에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 등(等)은 일년(一年)이라 하고 남인(南人) 윤휴(尹鑴) 등(等)은 삼년(三年)이라 하여 서로 싸우다 서인(西人)이 이겼는데 현종(顯宗)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 (효종(孝宗)인(人))의 상(喪)에 다시 그 시어머니 조대비(趙大妃)의 복(服)을 서인(西人) 김수흥(金壽興) 등(等)은 구월(九月)이라 하고 남인(南人) 허적(許積) 등(等)은 일년(一年)이라 하여 이번은 남인(南人)이 이기고 오십년(五十年)동안을 정권(政權)을 잡고 있던 서인(西人)은 정계(政界)에서 쫓겨났다. 이때로부터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당쟁(黨爭)이 더욱 심(甚)하였는데 현종(顯宗)의 다음 임금 숙종(肅宗)의 초년(初年)에는 남인(南人)이 세력(勢力)을 얻고 있더니 숙종(肅宗) 육년(六年)에 서인(西人) 김석주(金錫冑) 등(等)이 당시(當時)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는 허적(許積)의 서자(庶子) 허견(許堅)이 역모(逆謀)를 꾸몄다하여 역옥(逆獄)을 일으켜서 허적(許積) 윤휴(尹鑴) 등(等) 남인(南人)의 영수(領首)들이 원통(寃痛)한 죽음을 당(黨)하고 남인(南人)이 무고(無辜)히 죄(罪)를 입은 자(者)가 천(千)을 넘고 서인(西人)이 다시 정권(政權)을 잡으니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이때 서인(西人)의 수령(首領)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弟子) 윤증(尹拯)과의 사이에 감정(感情)이 어긋나서 두 파(派)로 나뉘었는데 송(宋)의 편(便)을 드는 사람을 노론(老論)이라 하고 윤(尹)의 편(便)을 드는 사람을 소론(少論)이라 하니 이에 서인(西人)은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나뉘고 거기에 남인(南人)과 소북(小北)을 합쳐서 사색(四色)이라 일컬었다. 숙종(肅宗)은 본시(本是) 변덕(變德)이 많은 임금이라 어느 한가지 일이 몇 해 동안 계속(繼續)되면 곧 염증(厭症)이 나서 새 것을 좋아하는 성질(性質)이 있었다. 숙종(肅宗) 십오년(十五年)에 왕(王)이 왕비(王妃) 민씨(閔氏)를 싫어하고 희빈(嬉嬪) 장씨(張氏)를 사랑하고 그가 낳은 아들을 세자(世子)로 봉(封)하려 함에 송시열(宋時烈) 등(等) 서인(西人)이 이를 반대(反對)하였음으로 왕(王)은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민비(閔妃)를 폐(廢)하고 다시 남인(南人)을 쓰니 고대(古代) 소설(小說)로 전(傳)해오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왕(王)이 장빈(張嬪)에 혹(惑)하여 민비(閔妃)를 몰아냄을 풍자(諷刺)한 글이었다.
그러나 숙종(肅宗) 이십년(二十年)에 이르러 왕(王)은 전(前)에 한 일을 후회(後悔)하고 민비(閔妃)를 복위(復位)하고 장빈(張嬪)을 쫓아내고 다시 서인(西人)을 불러 쓰니 이로부터 남인(南人)들은 아주 정계(政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정계(政界)에서 물러난 남인(南人) 학자(學者)들은 벼슬을 체념(諦念)하고 주(主)로 실학(實學) 방면(方面)으로 향(向)하여 고서(古書)의 고증(考證)과 새로운 연구(硏究)가 많이 생기니 그 중(中)에 가장 유명(有名)한 사람은 이익(李瀷)(성호(星湖)이니 그는 유형원(柳馨遠)(반계(磻溪)의 새 학풍(學風)을 계승(繼承)하여 후진(後進)의 길을 개척(開拓)한 대(大) 학자(學者)이었다. 남인(南人)의 패퇴(敗退)는 비록 남인(南人)을 위(爲)하여는 소조(蕭條)한 감(感)이 없지 아니하나 우리 나라 학문(學問)의 발달(發達)을 위 하여는 크게 경하(慶賀)할 일이었다.
정계(政界)의 번복(飜覆)이 이와 같이 잦고 정쟁(政爭)이 이와 같이 험(險)함으로 국가(國家)의 대사(大事)는 모두 방기(放棄)하는 형편(形便)이었다.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두 대란(大亂)을 겪은 뒤에 토지(土地) 겸병(兼倂)의 폐(弊)는 더욱 증장(增長)하여 사회(社會)는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의 양대(兩大) 계급(階級)으로 분열(分列)하고 소작인(小作人)들은 생계(生計)가 점점(漸漸) 어려워서 산림(山林) 중(中)에 들어가서 임목(林木)을 불사르고 경지(耕地)만드는 경향(傾向)이 많았으니 이가 화전(火田)의 시(始)이다. 그러나 조정(朝廷)에서는 이에 대(對)한 아무런 대책(對策)이 없고 이로부터 각지(各地)에 울창(鬱蒼)하던 임목(林木)은 날로 황폐(荒廢)하여졌다.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와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에 천제(天際)에 높이 솟아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우리 나라의 주산(主山)으로 되어있으나 청국(淸國)과의 사이에 과재(跨在)하여 양국(兩國) 국경선(國境線)이 명확(明確)치 아니하였다. 세종왕(世宗王)이 육진(六鎭)을 설치(設置)한 후(後)에 두만강(豆滿江) 북편(北便)의 주민(住民)들이 번호(藩胡)라는 이름으로 대대(代代)로 조정(朝廷)에 공물(貢物)을 바치더니 인조(仁祖)때에 청국(淸國)이 이 지방(地方)에 살던 동족(同族)을 데려감에 이 지방(地方)이 공한(空閑)한 채로 버려져서 피아(彼我)의 유민(流民)들이 비밀(秘密)히 입거(入居)하였다. 그래서 여기가 어느 나라 땅이냐 하는 문제(問題)가 가끔 일어나더니 숙종(肅宗) 삼십팔년(三十八年) 임진(壬辰)에 청국(淸國) 강희(康熙) 제(帝)가 이 지방(地方)의 국경(國境)을 밝히기 위(爲)하여 목극등(穆克登)을 우리 나라에 보내었다. 이때 조선(朝鮮)에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사이에 격렬(激烈)한 당쟁(黨爭)이 벌어지고 있는 때라 국경문제(國境問題)의 중요성(重要性)은 염두(念頭) 에 두지 아니하고 북경(北境) 지리(地理)에 아무런 견식(見識)이 없는 사람들을 백두산(白頭山)에 보내어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경계(境界)를 정(定)하는데 목극등(穆克登)의 주장(主張)에 일언(一言)의 항변(抗辯)도 없이 유유순종(唯唯順從)하여 백두산(白頭山)하(下) 십리(十里)허(許)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서(西)는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東)은 토문강(土門江)이 된다는 글을 새기니 이가 소위(所謂)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이다.
비(碑)를 세운 후(後)에 조정(朝廷) 안에서 여러 가지 물론(物論)이 일어나고 북변(北邊)에 있는 관리(官吏)가 실지(實地)로 이 일대를 답사(踏査)하여 조정(朝廷)에 보고(報告)하였는데 그 요지(要旨)는 정계비(定界碑)의 서편(西便)으로 흐르는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는 틀림이 없으나 동편(東便)으로 흐르는 물은 사파(四派)가 있으니 가장 북편(北便)에서 흐르는 제일파(第一派)의 물은 비(碑)에서 거리가 멀고 또 북(北)쪽으로 들어가니 이는 문제(問題) 삼을 것이 없고 그 물의 남(南)에서 흐르는 제이파(第二派)도 비(碑)와의 거리(距離)가 조금 멀고 제삼파(第三派)의 물은 비(碑)에서 가장 가까운데 이 물을 따라 내려가면 점점(漸漸) 북(北)으로 굽어져서 깊이 호지(胡地)로 들어가고 제사파(第四派)인 가장 남(南)쪽에 있는 물은 비(碑)에서 가장 멀고 이것이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가 된 것이니 결국(結局) 정계비(定界碑)에 기록(記錄)된 所謂 토문강(土門江)이라 함은 제삼파(第三派)의 물을 말함이 확실(確實)하다고 하였다. 이 제삼파(第三派)의 물은 간도(間島)의 북(北)쪽을 흘러서 두만강(豆滿江) 하류(下流)에 이르러 합수(合水)된 것임으로 지금의 간도(間島) 지방(地方)은 정계비문(定界碑文)대로 해석(解釋)하면 당연(當然)히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되는 것이오 이것이 후일(後日) 양국간(兩國間)의 분쟁(紛爭)거리가 되는 것이다.
울릉도(鬱陵島)는 동해(東海) 중(中)에 있는 일(一) 고도(孤島)라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독립국가(獨立國家)로 있다가 신라(新羅)의 군현(郡縣)으로 된 것이다. 이조(李朝) 초기(初期)에는 주민(住民)이 있어 농업(農業)과 어업(漁業)으로 생활(生活)하더니 그 후(後)에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이 자주 있어서 주민(住民)들이 안주(安住)할 수가 없고 또 국가(國家)에서 군사(軍士)를 보내어 수비(守備)할 수도 없음으로 조정(朝廷)에서는 주민(住民)을 전부(全部) 내륙(內陸)으로 옮기고 무인도(無人島)를 만들었다. 울릉도(鬱陵島)와 그 동(東)쪽에 있는 독도(獨島)는 어획(漁獲)이 많은 곳임으로 일본어민(日本漁民)들이 비밀(秘密)히 들어와서 자유(自由)로 고기잡이를 하고 혹(或) 조선어민(朝鮮漁民)이 고기 잡으러 들어가면 그들은 鬱陵島를 일본(日本) 영토(領土)라 하여 축출(逐出)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숙종(肅宗)때에 안용복(安龍福)이 여러 어민(漁民)들과 함께 울릉도(鬱陵島)에 고기 잡으러 들어갔더니 일본어선(日本漁船)이 이미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기로 안용복(安龍福)은 우리 어민들과 합력(合力)하여 몰아버린 일이 있는데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알고 도리어 법금(法禁)을 범(犯)하고 밀어(密漁)하였다는 죄명(罪名)으로 벌을 받았다.
그러나 안용복(安龍福)은 우리 나라 영토(領土)를 우리 나라 사람이 지키지 못하고 일본어민(日本漁民))의 임의(任意) 사용(使用)에 맡기는 것이 원통(寃痛)하여 다시 어선(漁船)을 타고 들어갔더니 역시(亦是) 일본어선(日本漁船)이 와서 있기로 이를 난타(亂打)하여 쫓아 보냈는데 마침 풍파(風波)가 일어나서 표류(漂流)하여 일본(日本)에 들어갔다. 안용복(安龍福)은 이 기회(機會)에 일본인(日本人)의 울릉도(鬱陵島) 밀어(密漁) 금지(禁止) 문제(問題)를 근본적(根本的)으로 해결(解決)하리라 하고 일본(日本)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이를 힐문(詰問)하더니 막부(幕府)에서는 이는 대마도(對馬島)의 어민(漁民)들의 소위(所爲)요 중앙(中央) 정부(政府)에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며 타국(他國) 영토(領土)에 들어가서 고기 잡는 것은 부당(不當)한 일이오 또 이로 인(因)하여 양국간(兩國間)의 화(和)를 상(傷)함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대마도(對馬島) 주(主)에게 보내는 글을 안용복(安龍福)에게 주었다. 안용복(安龍福)은 그 글을 가지고 대마도(對馬島) 주(主)에게 전(傳)하니 대마도(對馬島) 주(主)는 막부(幕府)의 엄명(嚴命)에 겁(怯)을 먹고 안용복(安龍福)에게 사과(謝過)까지 하였다. 안용복(安龍福)은 다시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다시는 밀어(密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約束)의 글을 받아 가지고 나라에 돌아오니 이는 외교(外交)의 일대(一大) 성공(成功)이오 또 울릉도(鬱陵島)를 일본(日本) 영토(領土)라고 주장(主張)하여 일후(日後) 양국(兩國)간(間)에 분쟁(紛爭)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危險性)을 이미 막은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이 말을 듣고 안용복(安龍福)의 공(功)을 상(賞)주려는 말은 없고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이 없이 외국(外國)과 교섭(交涉)한 죄(罪)로 사형(死刑)에 처(處)하려 하였다. 이때 조정(朝廷)안에는 사형(死刑) 논(論)에 반대(反對)하여 상공죄론(賞功罪論)이 강력(强力)히 주장(主張)되니 이 논(論)은 안용복(安龍福)이 일본인(日本人)의 밀어(密漁)를 금지(禁止)한 공(功)은 크게 상(賞)주어야할 것이오 사사(私私)로이 외국(外國)과 교섭(交涉)한 죄는 벌(罰)하여야할 것인데 만일 안용복(安龍福)을 죽이면 이는 한것 대마도(對馬島) 주(主)로 하여금 통쾌(痛快)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우리 나라의 수치(羞恥)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논(論)이 마침내 이겨서 안용복(安龍福)은 한동안 옥(獄)에 갇혔다가 방면(放免)되고 상(賞)은 받지 못하였다.
숙종(肅宗) 일대(一代)는 당쟁(黨爭)이 가장 심(甚)하여 국토(國土)의 영토(領土)문제(問題)까지 등한시(等閑視)하기에 이르렀고 숙종(肅宗)의 뒤를 이은 경종(景宗)은 희빈(嬉嬪) 장씨(張氏)의 소생(所生)이라 처음에 숙종(肅宗)때에 경종(景宗)을 세자(世子)로 봉(封)하려는 것을 노론(老論) 송시열(宋時烈) 등(等)이 반대(反對)하였고 또 경종(景宗)이 즉위(卽位)한 후(後)에 노론(老論)들은 경종(景宗)이 병약(病弱)하다하여 왕(王)의 이복(異腹)아우 영조(英祖)를 왕(王)의 대리(代理)로 세워서 정사(政事)를 대청(代聽)케 하려하니 이에 소론(少論)들은 노론(老論)을 역적(逆賊)으로 몰아서 소위(所爲) 노론곡신(老論哭臣)이라는 李頣命 金昌集 李健命 趙泰采 等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罪주니 이는 경종(景宗) 원년(元年) 신축(辛丑)으로부터 다음해 임인(壬寅)에 걸친 일임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라 하는데 사화(士禍)라 함은 비사류파(非士類派)가 사류(士類)를 모해(謀害)하는 것이오 사류(士類)와 사류(士類)와의 모해(謀害)는 사화(士禍)가 아니라 당쟁(黨爭)의 살육(殺戮) 극(劇)이니 소위(所謂) 辛壬士禍는 하나의 사류(士類) 간(間)의 살육(殺戮)극(劇)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경종(景宗)은 신병(身病)이 있어 재위(在位)한지 겨우 사년(四年)이오 영조(英祖)가 즉위(卽位)하니 영조(英祖)는 총명(聰明)함이 이조(李朝) 제왕(諸王) 중(中)에서 넉넉히 중주(中主)는 되는지라 일직부터 당파(黨派)싸움이 국가(國家)의 모든 불행(不幸)의 원인(原因)임을 깊이 느끼고 친(親)히 노론(老論)의 閔鎭遠과 少論의 李光佐의 화해(和解)를 권(勸)하고 조정(朝廷)에서는 여러 색목(色目)의 사람을 함께 쓰기로 하니 이를 탕평책(蕩平策)이라 한다. 당인(黨人) 중(中)에는 저희들의 지나친 행동(行動)을 반성(反省)하고 국가(國家)의 앞날을 위(爲)하여 탕평책(蕩平策)에 호응(呼應)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당화(黨禍)때문에 참혹(慘酷)한 화(禍)를 당(當)한 집의 자손(子孫)들은 양파(兩派)가 함께 조정(朝廷)에 입(立)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더욱이 노론(老論)들은 기어(期於)이 신임당화(辛壬黨禍)의 원수(怨讐)를 갚으려 하였다. 왕(王英祖)은 아무리 탕평(蕩平)하기를 권(勸)하되 노론(老論)들이 끝까지 응(應)하려하지 아니함으로 「당쟁(黨爭)도 국가(國家)가 있은 연후(然後)의 일이오 만일 당쟁(黨爭)때문에 국가(國家)가 망(亡)하면 당인(黨人)들은 어느 곳에 가서 당쟁(黨爭)을 할 것인가」하여 정(情)으로 읍언(泣言)한 일도 있고 몇 차례는 일이(一二)일간(日間) 단식(斷食)하고 당인(黨人)들의 반성(反省)을 촉구(促求)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당쟁(黨爭)은 이미 원결수심(怨決讐深)하고 난치(難治)의 고질(痼疾)로되어 왕(王英祖)의 읍소(泣訴)나 단식(斷食)으로써 화해(和解)될 것이 아니었다. 이에 왕(王英祖)은 탕평책(蕩平策)에 응(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점차(漸次)로 멀리하고 당쟁(黨爭)에 깊이 관계(關係)되지 아니한 사람들을 쓰게되니 조정(朝廷)안에서 당쟁(黨爭)에 깊이 관계(關係)되지 아니한 사람은 주(主)로 척리파(戚里派)이었고 이로부터 척리파(戚里派)의 대두(擡頭)하는 경향(傾向)이 나타나서 순조(純祖)이후 팔십여년(八十餘年) 간(間)을 외척(外戚) 전횡(專橫) 시대(時代)를 만들었다. 처음에 세조(世祖)때에 유신파(儒臣派) 대(對) 척리파(戚里派)의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이 구십년(九十年)동안을 계속(繼續)하다가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유신파(儒臣派)가 승리(勝利)를 얻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유신(儒臣) 동지(同志) 간(間)에 당쟁(黨爭)이 일어나서 이래(爾來) 백(百)육칠십년(六七十年)간(間)을 혈투(血鬪)를 연출(演出)하고 마침내 자체(自體)의 부패(腐敗)로 인(因)하여 다시 전일(前日)의 정적(政敵)이던 척리파(戚里派)를 등장(登場)케 하니 이는 세사(世事)의 한 과보(果報)로써 역사(歷史)는 복(覆)치 아니하면서 또한 반복(反覆)하는 것이다.
영조(英祖)가 비록 탕평책(蕩平策)을 쓰고 있으나 정계(政界)의 이면(裏面)에는 여전(如前)히 격심(激甚)한 당쟁(黨爭)의 조류(潮流)가 흐르고 있고 각지방(各地方)에는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고 유사(儒士)들의 독서처(讀書處)로 되어 있는 서원(書院)은 당쟁(黨爭)의 근거지(根據地)로 되어 있으며 타당(他黨)과의 사이에는 서로 통혼(通婚)치 아니함은 물론(勿論)이오 지방(地方)에서 일어나는 사소(些少)한 일까지도 모두 당쟁(黨爭) 꺼리로 이용(利用)하였고 영조(英祖) 초년(初年)에는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이 합세(合勢)하여 이인좌(李麟佐)를 대장(大將)으로 하여 영남(嶺南)에서 병(兵)을 일으켜 정국(政局)을 전복(顚覆)시키려는 반란(叛亂)까지 일어났다. 영조(英祖) 중년(中年)에 세자(世子)로 하여금 대리(代理) 청정(聽政)케 하였는데 세자(世子)의 처사(處事)가 당인(黨人)들의 이해(利害)에 맞지 아니함으로 당인(黨人)들은 백방(百方)으로 모략(謀略)을 꾸며서 왕(王)과 세자(世子)와의 사이를 이간(離間)시키고 일보(一步)를 진(進)하여 왕(王英祖)의 부자간(父子間)의 감정(感情)의 갈등(葛藤)을 일으키더니 필경(畢竟) 세자(世子)를 왕(王)에게 참소(讒訴)하여 이를 폐(廢)하고 뒤주 속에 넣어서 죽이기에 이르니 이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이오 정조(正祖)의 부(父)이다.
그럼으로 정조(正祖)의 신하(臣下)들 중(中)에서 김구주(金龜柱)는 세자(世子)를 죽임이 옳다 하고 홍봉한(洪鳳漢)은 옳지 않다 하여 두 파(派)의 의견(意見)이 나뉘어지니 김(金)의 편(便)에 가담(加擔)한 사람을 벽파(僻派)라 하고 홍(洪)의 편(便)에 가담(加擔)하는 파(派)를 시파(時派)라 하여 이로부터 사색(四色)의 싸움보다도 시벽(時僻)의 두 파(派)가 서로 맞서서 정조(正祖) 일대(一代)는 이 싸움으로 날을 보내었으니 정조(正祖)가 그 부(父)의 원사(寃死) 참사(慘死)한 것을 몹시 슬퍼함으로 왕(王)의 뜻을 받드는 사람은 시파(時派)가 되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은 영조(英祖)의 처리(處理)할 일이니 이를 비난(非難)할 수 없다 하는자(者)는 벽파(僻派)가 되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은 당쟁(黨爭)의 여파(餘波)가 왕실(王室)에 미친것이오 국가정치(國家政治)에는 아무 관계(關係)가 없는 일인데 이것으로써 또 서로 가부(可否)를 다투고 있는 것은 세력(勢力) 쟁탈(爭奪)을 위한 일(一) 방편(方便)으로 이용(利用)한 것이다.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세(世)는 사색(四色)이 없어진 것은 아니오 또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와의 싸움이 일어났으나 정조(正祖)도 현명(賢命)한 임금이라 영조(英祖)의 정책(政策)을 답습(踏襲)하여 탕평책(蕩平策)을 썼음으로 숙종(肅宗)의 때와 같은 유혈(流血)의 참극(慘劇)은 별(別)로 없어서 인심(人心)이 안정(安定)하였다.
그리하여 왕(王)은 민생문제(民生問題)에 크게 유의(留意)하였으니 영조(英祖)는 당시(當時) 평민(平民)의 장정(壯丁)들이 군포(軍布)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무명 이필(二疋)씩 바치었는데 이것이 백성(百姓)에게 과중(過重)한 부담(負擔)이 되고 있음으로 왕(王英祖)의 이십육년(二十六年)부터 균역법(均役法)을 시행(施行)하여 군포(軍布)를 한 필(疋)씩 감(減)하고 그 대신(代身) 어염(魚鹽) 선박(船舶)에도 과세(課稅)하였다.
조엄(趙儼)은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감저(甘藷)(고구마)를 가져와서 심으니 이가 우리 나라에서 감저(甘藷)를 심은 처음이다. 조정(朝廷)에서는 감저(甘藷)가 구황곡식(救荒穀食)으로 중요(重要)한 것이라 하여 삼남(三南) 각지(各地)에 심게 하니 수십년(數十年) 동안에 각지방(各地方)에 널리 보급(普及)되니 정조(正祖)때에 이르러 전국(全國)에서 산출(産出)되는 감저(甘藷)의 수량(數量)을 조사(調査)케 한바 의외(意外)에 남해안(南海岸)의 몇 부락(部落)에 겨우 얼마간 남아 있을 뿐이오 그 외(外)에는 종자(種子)조차 없어져 버렸다. 왕(王)은 크게 놀래어 그 원인(原因)을 조사(調査)하니 농가(農家)에서 감저(甘藷)를 심으면 군현(郡縣)의 이속(吏屬)들과 토호(土豪)들이 값도 내지 않고 무료(無料)로 토색(討索)하고 그 토색(討索)에 응(應)하지 아니하면 무슨 구실(口實)을 만들어서 잡아다가 엄형(嚴刑)을 가(加)하니 농민(農民)들은 감저(甘藷)를 심은 까닭에 파산(破産)할 지경(地境)에 이른 자(者)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필경(畢竟) 종자(種子)까지 없애버린 것이었다. 이에 왕은 엄명(嚴命)을 내리어 토색(討索)하는 자(者)를 엄금(嚴禁)하고 그 재배(栽培)함을 극력(極力) 장려(獎勵)한 결과 드디어 우리 나라의 주요(主要)한 생산물(生産物)이 되었다.
정조(正祖)는 또한 전국(全國)에 영(令)을 내리어 농업기술(農業技術)의 우수(優秀)한 것이 있으면 그 요령(要領)과 방법(方法)을 적어서 조정(朝廷)에 올리라 하니 이에 전국(全國)으로부터 수리시설(水利施設) 농용거(農用車)등(等) 농업상(農業上) 유익(有益)한 계획(計劃)과 경험담(經驗談)이 많이 제출(提出)되었다. 왕(王)은 농업(農業)을 장려(獎勵)하는 의미(意味)로 좋은 안(案)을 제출(提出)한 사람을 뽑아서 서울에 불러다가 한자리에 모으고 각자(各自) 안(案)을 설명(說明)케 한 후(後) 후(厚)히 상(賞)을 주고 그 안(案)을 모아서 농서(農書)를 만들어 전국(全國)에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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