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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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와 중국(中國)과의 관계(關係)

 

고구려는 압록강(鴨綠江)을 중심(中心)으로 남북(南北) 수천리(數千里)에 걸쳐서 큰 세력(勢力)을 길렀으므로 비단(非但)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에 대(對)한 압력(壓力)이 될 뿐 아니라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대하여도 끊임없는 위협(威脅)이었다.

그러나 전일(前日)의 중국(中國)은 오호(五胡) 십육국(十六國)의 어지러운 시대(時代)였으나 그 뒤에 남북(南北)으로 나뉘었다가 수(隋)나라가 일어나서 통일(統一)을 이룬 뒤에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사이에는 두 큰 세력(勢力)이 마주쳐서 부딪치지 아니할 수 없이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수(隋)나라의 요서(遼西)를 친 것이 동기(動機)가 되어서 수(隋) 문제(文帝)가 삼십만(三十萬) 군사(軍士)로서 쳐들어 왔으나 중도(中途)에서 패(敗)하여 돌아갔다. 다음 임금 양제(煬帝)는 본시(本是) 허심(虛心)이 많은 사람으로서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해 보겠다는 야심(野心)과 부황(父皇)이 이루지 못한 한(恨)을 풀겠다는 생각으로 천하(天下)의 힘을 기우려 영양왕(嬰陽王) 이십이년(二十二年) (檀紀 二千九百四十五年)에 百十三萬의 陸軍과 多數한 水軍을 거느리고 高句麗로 쳐들어오니 陣의 길이가 九百六十里에 뻗쳤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짐작(斟酌)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으로써 대장(大將)을 삼고 준비(準備)하던 터이라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수군(隋軍) 이십만((二十萬)을 유인(誘引)하여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러 대파(大破)하니 적(敵)의 생환(生還) 자(者)가 겨우 二千八百名에 지나지 못하니 이것을 살수대전(薩水大戰)이라 하며 요동(遼東)에 남아있는 군사(軍士)는 혹(或)은 패(敗)하고 혹(或)은 겁(怯)을 먹고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양제(煬帝)는 이듬해 다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와서 요동성(遼東城)을 쳤으나 거듭 실패(失敗)하고 세 번째 고구려(高句麗)를 치려다가 국내(國內) 반란(叛亂)으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게 망(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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