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흥기(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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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三國)의 흥기(興起)

 

처음에 북부여(北扶餘)의 임금 해모수(解慕潄)가 아들 주몽(朱夢)을 낳았는데 주몽(朱夢)은 동부여(東扶餘)의 임금 금와(金蛙)에게 양육(養育)되다가 그의 형제(兄弟)들의 시기(猜忌)에 못 배겨 부하(部下)를 거느리고 도망(逃亡)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러 국가(國家)를 세우고 성(姓)을 고(高)라 하니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

일설(一說)에는 주몽(朱夢)이 졸본(卒本)에 와서 졸왕(卒王)의 여서(女婿)가 되었다가 왕(王)이 죽은 뒤에 그 위(位)를 계승(繼承)하였다 하는데 여러 가지 사실(史實)로 보면 이 말이 가장 근리(近理)하고 주몽(朱夢)이 졸본(卒本) 국호(國號)를 고쳐서 고구려(高句麗)라 하였음으로 후인(後人)이 고구려(高句麗)의 역연수(歷年數)에 대(對)하여 주몽(朱夢)으로부터 망(亡)할 때까지를 칠백오년(七百五年)이라 하고 졸본(卒本)까지를 합(合)하여 구백년(九百年)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의 다섯 대족단(代族團)이 중심(中心)으로 이루어진 사회(社會)이며 산(山)이 많고 토지(土地)가 여위어서 생활(生活)이 곤란(困難)한 까닭에 사람들이 권검(勸儉)하였다.(고구려(高句麗) 건국(建國) 단기(檀紀) 이천이백구십칠년(二千二百九十七年))

고구려(高句麗)시조(始祖) 주몽왕(朱夢王)이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는데 동부여(東扶餘)에 있을 때에 낳은 아들 유리(類利)가 찾아와서 태자(太子)가 되었음으로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부하(部下) 십인(十人)을 거느리고 남(南)으로 향(向)하여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을 지나서 마한(馬韓)에 들어가니 마한왕(馬韓王)이 두 형제(兄弟)의 웅걸(雄傑)함을 보고 동북(東北) 백리(百里)의 땅을 할여(割與)하여 써 거처(居處)하게 하였다. 비류(沸流)는 어염(魚鹽)의 이(利)를 취(取)하여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仁川)지방(地方))에 나라를 세우고 온조(溫祚)는 산천(山川)의 험(險)과 평야(平野)의 이(利)를 취(取)하여 한강안(漢江岸)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都邑)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백제(百濟)라하고 성(姓)을 부여(扶餘)라 하니 이가 곧 백제시조(百濟始祖)이다.(檀紀 二千三百十六年)

비류(沸流)는 그 땅이 비습(卑濕)하여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죽으매 그 백성(百姓)이 모두 위례성(慰禮城)으로 돌아오니, 온조(溫祚)는 세력(勢力)이 점점(漸漸)자랐으니, 창업(創業) 초기(初期)에 북변(北邊)의 낙랑(樂浪)과 말갈(靺鞨)이 자주 침입(侵入)함으로 한산(漢山)에(지금의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 도읍(都邑)을 옮겼다.

변 진한(弁辰韓)의 사로국(斯盧國)에는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육촌장(六村長)이 회의(會議)를 열고 북방인(北方人)의 세력(勢力)이 남(南)으로 밀려오는 이때에 우리가 현군(賢君) 일인(一人)을 구(求)하여 세우고 국가(國家)를 통일(統一)하지 아니하면 안되리라 하고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맞이하여 임금을 삼고 지금의 경주(慶州)에 도읍(都邑)하니 이가 곧 신라(新羅) 시조(始祖)이다. (檀紀 二千二百七十七年) 신라(新羅)의 국호(國號)는, 처음에는 사로(斯盧) 그밖에 여러 가지로 불러 왔으나 후(後)에 신라(新羅)라 고쳤으므로 신라(新羅)로 통칭(通稱)하는 것이다.

삼국(三國)의 시조(始祖)는 모두 일대(一代)의 영걸(英傑)이라 당시(當時)의 각국(各國)이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로 성립(成立)되어 완전(完全)한 통일국가(統一國家)를 이루지 못하고 부락(部落)과 부락(部落)사이에 호상(互相) 침벌(侵伐)함이 있으되 국가(國家) 총왕(總王)이 능(能)히 제어(制御)치 못함을 보고 정치(政治)를 중앙(中央)에 통일(統一)한다는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쓰기로 하였다. 그 까닭에 건국(建國)초(初)부터 부근(附近)의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여 군현(郡縣)을 만들고 관리(官吏)를 보내어 다스렸으니 이것이 아국(我國) 역사상(歷史上) 정치제도(政治制度)의 대(大) 전환기(轉換期)이다.

고구려(高句麗)는 태백산(太白山) 좌우(左右)에 산재(散在)한 여러 부락국가(部落國家)를 정복(征服)하고 한(漢)이 현토군(玄菟郡)을 쳐서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취(取)하니 이때가 졸본(卒本)이라는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로 개칭(改稱)한 때이오 동(東)으로 옥저(沃沮) 지방(地方)까지를 그 판도(版圖)에 넣었다.

백제(百濟)는 점차(漸次)로 마한국(馬韓國)의 여러 부락(部落)을 병합(倂合)하니 마한왕(馬韓王)이 책(責)하여 왈(曰) 왕(王)이 처음에 아경(我境)에 들어 왔을 때에 객신(客身)할 곳이 없기로 토지(土地)를 주어 안거(安居)케 했거늘 이제 우리 국토(國土)를 침범(侵犯)하니 무슨 도리(道理)인고 하였으나 온조왕(溫祚王)은 듣지 아니하고 남(南)으로 점차(漸次)로 강토(疆土)를 넓혔다.

신라(新羅)는 변 진한(弁辰韓)의 북부(北部)를 점점(漸漸) 병합(倂合)하고 서(西)로 마한국경(馬韓國境)에 다다르니 여기서 비로소 백제(百濟) 병(兵)과 상견(相見)하게 되어 삼국시대(三國時代) 육칠백년(六七百年) 간(間)의 전란(戰亂)의 막(幕)을 열었다. 그러나 이 전쟁(戰爭)은 호전기풍(好戰氣風)이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와 통일국가(統一國家)를 만들려는 운동(運動) 과정(過程)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생긴 현상(現象)이었다.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이 각기(各其)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로 엉켜 갔을 때에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 지방(地方)은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이루지 못하고 육가야국(六伽倻國)이 분립(分立)하여 부족사회(部族社會)를 그대로 지내었다. 그 중(中)에는 낙동강(洛東江) 하류(下流)의 김해(金海) 지방(地方)을 중심(中心)으로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가락국(駕洛國)을 세우니 이가 곧 가락시조(駕洛始祖)이오 가락(駕洛)을 또한 금관(金官)이라 하며 (檀紀 二千三百七十五年) 그밖에 대가야(大伽倻) 소가야(小伽倻) 아라가야(阿羅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등(等)이 있었는데 좁은 구역(區域)에 육국(六國)이 분립(分立)되어 있었음으로 국력(國力)이 모두 떨치지 못하고 또 그 위치(位置)가 아국(我國)의 최남단(最南端)에 있어 북(北)에서 밀려온 아국(我國) 문화권(文化圈)의 가장 구석진 곳이다. 다만 낙동강(洛東江)이 흘러내려 가서 삼각주(三角洲)를 이룬 곳으로 국민(國民)의 생활(生活)은 가장 유족(裕足)한 곳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제도(制度)와 풍습(風習)에는 여러 가지 특색(特色)이 있고 창조성(創造性)이 있었다. 신라(新羅)는 당시(當時) 일반적(一般的)으로 행(行)하고 있는 군주(君主)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타파(打破)하고 이세(二世) 남해왕(南解王)은 자(子) 유리(儒理)와 서(婿) 석탈해(昔脫解)에 일러 왈(曰) 아(我) 사후(死後)에 박(朴) 석(昔) 이성(二姓)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로써 왕위(王位)를 사(嗣)하라 하더니, 석탈해(昔脫解)가 제사대(第四代) 왕(王)이 되니 이로부터 박석(朴昔) 이성(二姓)이 상전(相傳)하고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수양(收養)하더니 그후(後)에 알지(閼智)의 자손(子孫)이 또한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여 이로부터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이 상전(相傳)하였다. 이 시대(時代)는 전란(戰亂)이 자주 일어나고 또 창업기(創業期)에 있었는데 만일 군주(君主)가 연유(年幼)하거나 또한 암우(暗愚)하면 혹(或)은 행정권(行政權)이 신하(臣下)에게 옮기고 혹(或)은 국가대사(國家大事)를 처리(處理)할 능력(能力)이 없어서 반드시 위망(危亡)에 빠지게 되는 것임으로 신라(新羅)에서는 일성(一姓) 세습제(世襲制)를 깨트리고 골품제(骨品制)를 써서 박석김(朴昔金) 삼성(三姓)을 성골(聖骨)이라 하고 성골(聖骨) 출신(出身)이 왕위(王位) 계승권(繼承權)을 가지되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가 왕(王)이 되기로 하니 이 까닭에 신라(新羅)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와 정립(鼎立)한 동안 일,이(一,二)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유군(幼君)과 암왕(暗王)이 거의 없었다.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도 이,삼(二,三)의 예외(例外)를 제(除)하고는 연유(年幼)한 군주(君主)가 거의 없으니 이로써 보면 연장(年長) 차(且) 현자(賢者)의 군(君)됨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왕위(王位)계승(繼承)의 한 원칙(原則)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며 후세(後世)에 자기(自己) 자손(子孫)에게 행복(幸福)을 주기 위(爲)하여 황구(黃口) 유아(幼兒)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함은 국사(國事)를 위(爲)함이 아니오 그 국가(國家)를 자가(自家) 혈통(血統)의 사유물(私有物)로 생각한 까닭이며, 이로 인(因)하여 국사(國事)를 그르치고 아들에게 행복(幸福)을 준다는 것이 도리어 큰 재화(災禍)를 준 예(例)도 적지 아니한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인성(人性)은 혼후(渾厚)하여 개인(個人)의 사욕(私慾)보다 국가(國家)를 위(爲)하는 마음이 더 두터웠다. 신라(新羅)에는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한 예(例)가 여러 번 있었고 고구려(高句麗)에서는 높은 벼슬을 다른 사람에게 사양(辭讓)하는 예(例)가 있었으니 고구려(高句麗) 고국왕(故國王)때에 오부(五部)에 명령(命令)하여 현인(賢人)을 천거(薦擧)하라한즉 오부(五部)가 연류(宴留)를 추천(推薦)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더니 연류(宴留)가 말하되 신(臣)이 용우(庸愚)하여 족(足)히 써 국가(國家) 대정(大政)을 맡지 못할지라 압록곡(鴨綠谷)에 을파소(乙巴素)가 있어 역전(力田) 자급(自給)하는데 성질(性質)이 강의(剛毅)하고 정치(政治)의 대재(大才)가 있으니 차인(此人)이 아니면 국사(國事)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신(臣)의 벼슬을 차(此)에게 맡기라 하였다. 왕(王)은 곧 을파소(乙巴素)를 거용(擧用)하니 을파소(乙巴素)의 정치(政治)가 현명(賢明)하여 백성(百姓)이 편안(便安)하고 또 백성(百姓)의 빈궁(貧窮)함을 걱정하여 봄에 국창(國倉)의 곡식(穀食)을 내어 백성(百姓)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환수(還收)하여 해마다 상례(常例)를 삼으니 백성(百姓)이 모두 기뻐하고 이것이 아국(我國)의 진대제도(賑貸制度)의 시초(始初)였다.

삼국(三國)은 국가(國家)에 큰 난리(亂離)가 있으면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집고 궁시(弓矢)를 메고 군대(軍隊)의 선두(先頭)에 나서고 군졸(軍卒)이 그 뒤를 따름으로 장 병(將 兵)이 모두 일체(一體)가되어 당시(當時) 천하(天下) 강국(强國)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물론(勿論) 이때는 전공(戰功)이 있는 자(者)에게 토지(土地)를 주는 전장제도(田庄制度)가 있고 또 포로(捕虜)를 획득(獲得)하여 농업(農業) 노예(奴隸)로 사용(使用)하는 제도(制度)가 있음으로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들이 선두(先頭)에 나서는 것은 전공(戰功)을 세우기 위(爲)한 일면(一面)이 없지 아니하나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는 숭고(崇高)한 정신(精神)은 족(足)히 후세(後世)의 미약(微弱)한 하민층(下民層)만을 군사(軍士)로 내 세우고 자기(自己)는 안일(安逸)한 지위(地位)에 도피(逃避)하는 귀족층(貴族層)을 괴사(愧死)케 할 것이오 유명(有名)한 신라(新羅)의 화랑(花郞)도 이러한 정신(精神)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람은 혼후(渾厚)한 기풍(氣風)으로써 지위(地位)의 고하(高下)와 세력(勢力)의 강약(强弱)을 가리지 아니하고 오직 일심(一心)으로 함께 국사(國事)에 당(當)하였으므로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아국(我國)역사상(歷史上) 가장 광휘(光輝)있는 시대(時代)를 현출(現出)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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