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에 해당되는 글 54건

  1. 2013.09.03 신라의 쇠망 (삼화선생 서당국사)
  2. 2013.09.03 고려건국 (삼화선생 서당국사)
  3. 2013.09.03 고려정치 (삼화선생 서당국사)
  4. 2013.09.03 사회계급 (삼화선생 서당국사)
  5. 2013.09.03 고려의 건설사업 토지제도 (삼화선생 서당국사)
  6. 2013.09.03 성종의 치적 (삼화선생 서당국사)
  7. 2013.09.03 계단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8. 2013.09.03 유교와 불교의 문화 (삼화선생 서당국사)
  9. 2013.09.03 중기의 융성 (삼화선생 서당국사)
  10. 2013.09.03 여진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11. 2013.09.03 계생하는 반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12. 2013.09.03 몽고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13. 2013.09.03 정치의 문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14. 2013.09.03 외국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15. 2013.09.02 고려의 멸망 (삼화선생 서당국사)

신라의 쇠망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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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의 쇠망(衰亡)

 

신라(新羅)의 통일(統一)한 후(後)에는 통일(統一)하기 이전(以前)의 웅대(雄大)한 기백(氣魄)과 선미(善美)한 풍습(風習)이 점점(漸漸) 사라지기 시작(始作)하니 이것이 사라짐이 곳 쇠망(衰亡)할 전조(前兆)이다. 그 이유(理由)는

一.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왕위(王位)를 서로 현자(賢者)에게 사양(辭讓)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왕위(王位) 다툼이 그치지 아니하여 궁중(宮中)에 살벌(殺伐)과 유혈(流血)의 참극(慘劇)이 연달아 일어났다,

二.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정치(政治) 지도층(指導層)이 청백(淸白)하고 국사(國史)에 충성(忠誠)하여 민중(民衆)의 모범(模範)이 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귀족층(貴族層)이 부패(腐敗)하여 일야(밤낮) 왕유연(日夜 王遊宴)을 일삼고 경중(京中)에는 가무(歌舞)의 음악(音樂)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四.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화랑(花郞)의 무리와 같은 소년(少年) 애국자(愛國者)가 생명(生命)을 아끼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爲)하여 일하더니 통일후(統一後)에는 국민(國民)이 모두 위정(爲政) 계급(階級)을 미워하여 다시 화랑정신(花郞精神)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卽位)한 후(後)로는 간신(奸臣)들이 권력(權力)을 잡고 정치(政治)를 어지럽혀서 백성(百姓)의 원성(怨聲)이 더욱 높아가고 또 흉년(凶年)이 겹 들어서 각지(各地)에 도적(盜賊)이 봉기(蜂起)하였다.

이때 양길(梁吉)이 북원(北原)에서 무리를 모아 가지고 궁예(弓裔)로 하여금 북방(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서 무리를 모으고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을 위(爲)하여 원수(怨讐)를 갚는다하고 후백제(後百濟)라는 나라를 세우고 서남방(西南方)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얼마 지난 후(後)에 궁예(弓裔)는 스스로 임금이 되어 송악(松嶽)군(郡)에 도읍(都邑)하고 고구려(高句麗)의 옛 나라를 회복(恢復)한다하고 국호(國號)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니 이것은 모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의 유민(遺民)들이 그 조국(祖國)이 망(亡)한지 이미 수백년(數百年)에 아직도 조국(祖國) 광복(光復)의 뜻이 머리 속에 깊이 뿌리 박힌 것을 이용(利用)하여 신라(新羅)에 반항(反抗)케 하고 그 세력(勢力)을 확장(擴張)하려 함이다. 궁예(弓裔)는 다시 철원(鐵原)으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마진(摩震)이라 하다가 또 태봉(泰封)이라고 했다. 견훤(甄萱)은 도읍(都邑)을 무주(武州)로 옮기고 중국(中國)의 여러 나라와 무역(貿易)하여 힘을 기르는 한편 차츰 동(東)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한동안 반도(半島) 안에는 삼국(三國)이 다시 벌어지니 이를 후삼국(後三國)이라 한다.

태봉(泰封) 왕(王) 궁예(弓裔)는 송악(松嶽)사람 왕건(王建)을 시켜서 해로(海路)로 나주(羅州)를 쳐서 빼앗고 후백제(後百濟)와 중국(中國)과의 교섭(交涉)하는 교통(交通)을 끊고 고유(固有)한 항해(航海) 세력(勢力)을 발휘(發揮)하여 서해(西海)의 해적(海賊)을 막으니 이때로부터 왕건(王建)의 명성(名聲)이 일국(一國)에 떨쳤으니 태봉(泰封)왕(王)의 성질(性質)이 포악(暴惡)함으로 부하(部下) 제장(諸將)이 왕(王)을 쫓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推戴)하여 임금을 삼으니 이가 곧 고려시조(高麗始祖)이다. (檀紀 三千二百五十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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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건국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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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건국(高麗建國)

 

고려(高麗)태조(太祖)는 이듬해 송악(松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고 신라(新羅)와 친선(親善)을 도모(圖謀)하고 후백제(後百濟)를 제압(制壓)하려는 정책(政策)을 쓰니 신라(新羅)도 후백제(後百濟)에게 부대끼던 터임으로 고려(高麗)와 친(親)하려 하였다. 후백제(後百濟) 왕(王) 견훤(甄萱)은 이를 보고 비밀(秘密)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신라(新羅)에 쳐들어갔다. 신라(新羅) 경애왕(景哀王)은 마침 포석정(鮑石亭)에 나가서 유상곡수(流觴曲水)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후백제(後百濟)의 군사(軍士)를 만나 왕(王)과 왕비(王妃)와 대신(大臣)들이 모두 참혹(慘酷)한 변(變)을 당하였다. 견훤(甄萱)은 왕(王)을 해치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백성(百姓)을 포로(捕虜)하여 돌아가니 신라(新羅)왕(王)은 나아가 싸울 힘이 없고 들어와 지킬 힘이 없으므로 신하(臣下)들과 의논(議論)하고 고려(高麗)에 항복(降服)하려하니 태자(太子)가 통곡(慟哭)하면서 어찌 천년(千年) 조국(祖國)을 한번 싸우지도 아니하고 남에게 주리오 하나 왕(王)은 공연(空然)히 싸우기만 하면 불쌍한 백성(百姓)의 생명(生命)만을 없앤다 하고 항복(降服)하기로 결정(決定)하니 태자(太子)는 왕(王)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개골산(皆骨山)(금강산)에 들어가서 마의(麻衣)를 입고 일생(一生)을 마치니 이가 곧 마의태자(麻衣太子)이다. (檀紀 三千二百六十八年)

高麗가 新羅를 合倂하던 해에 後百濟에서도 變亂이 일어났다. 甄萱은 네째 아들 金剛을 사랑하여 이를 太子로 세우려 하였음으로 그 兄들이 不平을 품고 그 父王을 金山寺에 가두고 金剛을 죽인 後에 맏아들 神劍이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이에 甄萱은 憤함을 이기지 못하고 高麗로 亡命하여 신검(神劍)을 치기를 請하니 高麗太祖는 甄萱을 厚待하여 後百濟의 人心을 分散시키고 大軍을 거느리고 後百濟를 쳐서 滅하고 이에 半島를 統一하니 그 歷年數는 新羅는 五十六王 九百九十二年이오 後百濟는 二王 四十餘年이었다.

처음에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불교(佛敎)와 유교(儒敎)가 아울러 행(行)하여 불교(佛敎)에는 원효(元曉) 의상(義湘) 같은 명승(名僧)이 나고 원효(元曉)가 지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과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불교(佛敎)의 교리(敎理)에 새로운 진보(進步)를 가져오게 하였고 승(僧) 혜초(慧超)는 당(唐)나라에 건너갔다가 다시 길을 떠나 인도(印度)와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편답(遍踏)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팔(八) 세기(世紀) 무렵의 인도(印度) 사정(事情)을 전(傳)하는 유일(唯一)한 책(冊)으로 세계(世界)의 보배가 되어있고 또 혜초(慧超) 이외(以外)에도 신라(新羅)의 중으로써 인도(印度)를 찾아간 사람이 칠명(七名)이나 있다고 한다. 유교(儒敎)에는 설총(薛聰)이외(以外)에 김대문(金大問) 최치원(崔致遠) 같은 명유(名儒)가 났는데 김대문(金大問)은 국가학(國家學)을 연구(硏究)하여 극진(極盡)히 환대(歡待)하였고, 발해(渤海)의 옛 남경(南京)을 수복(收復)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러나 발해(渤海)가 망(亡)한 뒤로 만주(滿洲)의 대천지(大天地)는 다시 우리 민족(民族)의 땅이 되지 못하고 계단족(契丹族)과 여진족(女眞族)의 손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려(高麗) 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

성종(成宗)

무인(戊寅)

갑진(甲辰)

병오(丙午)

경술(庚戌)

을해(乙亥)

임오(壬午)

26

2

4

26

6

16

목종(穆宗)

현종(顯宗)

덕종(德宗)

정종(靖宗)

문종(文宗)

순종(順宗)

무술(戊戌)

경술(庚戌)

임신(壬申)

을해(乙亥)

정해(丁亥)

 

12

22

3

12

37

반(半)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갑자(甲子)

을해(乙亥)

병자(丙子)

병술(丙戌)

계묘(癸卯)

정묘(丁卯)

11

1

10

17

24

24

명종(明宗)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

광종(光宗)

신묘(辛卯)

무오(戊午)

을축(乙丑)

임신(壬申)

갑술(甲戌)

경신(庚申)

27

7

7

2

46

15

충렬(忠烈)

충선왕(忠宣王

충숙왕(忠肅王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王

을해(乙亥)

을유(乙酉)

신미(辛未)

신미(辛未)

을유(乙酉)

을축(乙丑)

34

5

25

52

4

3

공민왕(恭愍王

우왕(禑王)

창왕(昌王)

공양왕(恭讓王

 

 

임진(壬辰)

을묘(乙卯)

 

기사(己巳)

 

 

23

4

반(半)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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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정치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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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정치(政治)

 

고려(高麗)태조(太祖)의 정치(政治)는 신라(新羅)말엽(末葉)의 폐해(弊害)에 감(鑑)하여 여러 가지의 개혁(改革)과 독창(獨創)이 있었다.

一. 신라말(新羅末)에 토지제도(土地制度)가 문란(紊亂)하여 처음에 조세(租稅)는 토지수확량(土地收穫量)의 十分之一을 받던 것을 十分之二三을 받은 까닭에 백성(百姓)의 생활(生活)이 곤란(困難)하고 도적(盜賊)이 많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었음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신라(新羅)의 정전제(丁田制)를 습용(襲用)하되 조세(租稅)는 十分之一로 정(定)하고 건국후(建國後) 三年동안은 전부(全部) 면세(免稅)하였다.

二.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당(唐)나라 문화(文化)가 들어옴으로부터 국민(國民)이 자주정신(自主精神)을 잃고 사대사상(事大思想)에 취(醉)하는 경향(傾向)이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였음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중국(中國)과 아국(我國)은 인성(人性)이 각이(各異)하고 풍토(風土)가 부동(不同)하니 모든 제도(制度)와 문물(文物)은 반드시 중국(中國)과 동일(同一)히 할 필요(必要)가 없다하여 사대(事大)의 풍(風)을 경계(警戒)하였다.

三. 태조(太祖)는 동족(同族)인 발해(渤海)가 계단(契丹)에게 망(亡)한 뒤로 계단(契丹)을 무도(無道)한 나라라 하여 몹시 미워하고 계단(契丹)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화친(和親)할 것을 청(請)하되 듣지 아니하고 북방(北方) 경영(經營)에 전념(專念)하였다.

四. 종래(從來) 중국(中國)에는 연호제도(年號制度)가 있어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인 천자(天子)는 연호(年號)를 쓸 수 있으되 속국(屬國)은 쓸 수 없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가장 강성(强盛)하던 시대(時代)에는 우리 나라도 중국(中國)과 대등(對等)한 천자국(天子國)이라 하여 연호(年號)를 썼으니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영락(永樂),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의 건원(建元)같은 것이 그 것이다. 신라(新羅) 통일후(統一後)에 당(唐)나라에 부려(附麗)하여 당(唐)나라 연호(年號)를 쓰더니 태조(太祖) 건국후(建國後)에 우리 나라도 완전(完全)한 자주독립국(自主獨立國)가라 하여 연호(年號)를 세워 천수(天授)라 하였다.

五. 삼국시대(三國時代)이전(以前)에는 유족(遺族)만 성(姓)이 있고 일반(一般) 서민(庶民)은 명(名)만 있고 성(姓)이 없더니 태조(太祖) 건국후(建國後)에 전국민(全國民)에게 일제(一齊)히 성(姓)을 영사(領賜)하고 오직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고려(高麗)에 반항(反抗)하는 자(者)에게 마(麻), 우(牛), 돈(豚), 상(象)등(等)의 수축명(獸畜名)을 사(賜)하여 일반(一般) 국민(國民)과 요연(暸然)하게 구별(區別)하였으니 후일(後日)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재상(宰相) 상진(尙震)은 상(象)성(姓)의 승격(昇格)이라 한다.

六. 태조(太祖)는 승(僧) 도선(道詵)을 선생(先生)으로 모시고 그의 말에 의(衣)하여 각지(各地)에 사찰(寺刹)을 창건(創建)하고 관궐(官闕)을 지으니 도선(道詵)은 당승(唐僧) 일행(一行)의 풍수학설(風水學說)을 배워서 아국(我國) 풍수지리(風水地理)학(學)의 원조(元祖)가 된 자(者)로써 세인(世人)이 용자(龍子)라 칭(稱)하고 이때로부터 명당(明堂) 화복(禍福)의 사상(思想)이 국민(國民)의 머리 속에 뿌리 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高麗) 태조(太祖) 정치(政治)는 아국사상(我國史上) 중요(重要)한 일시기(一時期)를 획(劃)하였고 삼국(三國)통일후(統一後) 오랜 동안의 정치부패기(政治腐敗期)를 지낸 까닭에 종전(從前)의 농후(濃厚)한 풍속(風俗)은 많이 없어졌으나 고려태조(高麗太祖)의 모든 시책(施策)이 적의(適宜)함을 얻었으므로 국민(國民)의 기풍(氣風)이 진실(眞實)하여 국가(國家)에 전란(戰亂)이 있는 때에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먼저 창검(槍劍)을 집고 선진(先陣)에 나섰으며 관리(官吏)들이 그 지위(地位)를 자기보다 연장(年長)하고 또 현능(賢能)한 자(者)에게 사양(辭讓)하는 일이 있으니 태조(太祖)가 최응(崔凝)으로써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삼으니 응(凝)이 말하기를 신(臣)의 동료(同僚) 윤봉(尹逢)이 신(臣)보다 십년(十年)을 연장(年長)하니 청(請)컨대 먼저 제수(除授)하소서 하고 사양(辭讓)하니 태조(太祖)가 대희(大喜)하여 그 예양(禮讓)함을 칭찬(稱讚)한 것이 그 일례(一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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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급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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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급(社會階級)

 

고려(高麗)는 신라(新羅)의 사직(社稷)을 물려받음과 함께 신라(新羅)의 귀족(貴族)들도 이를 받아드려서 왕대(王代)계통(系統)의 사람들과 함께 고려(高麗)의 특권계급(特權階級)을 이루었다. 그 후(後) 발해(渤海)가 망(亡)하여 그 왕족(王族) 귀족(貴族)이 많이 고려(高麗)에 들어와서 이에 합(合)치고 또 불교(佛敎)로써 국교(國敎)를 삼은 관계(關係)로 승려(僧侶)들도 이 계급(階級)에 참여(參與)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권계급(特權階級)밑에 서민계급(庶民階級)이 있어서 산업(産業)을 맡아보았으며 다시 밑으로 여러 가지의 천인(賤人) 계급(階級)이 있어서 그 중(中)에서도 공사(公私)노비(奴婢)의 노예계급(奴隸階級)은 온갖 학대(虐待)를 받고 한 낟 재물(財物)로서 매매(買賣)되는 풍습(風習)이 있었으며 또 그들의 자손(子孫)은 대대(代代)로 노예(奴隸)가 되는 것이다. 서민계급(庶民階級)이라 함은 농민(農民), 상인(商人), 공장(工匠), 병졸(兵卒) 등(等)으로서 그 중(中)에서도 농민(農民)은 가장 많이 생산(生産)노동(勞動)에 종사(從事)하고 또 부역(賦役)과 병역(兵役)을 맡아 하였다. 이들 중(中)에는 계단(契丹) 여진(女眞) 일본(日本) 등(等)의 귀화민(歸化民)이 많았다.

고려(高麗)의 계급제도(階級制度)는 대단히 엄격(嚴格)하여 인세(人世)의 호적(戶籍)을 고람(考覽)하여 천류(賤類)에 견연(牽連)이 있으면 그 사람을 관리(官吏)로 쓰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건국(建國) 초(初)에 공신(功臣)들은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노예(奴隸)를 삼으니 그들의 불평(不平)과 원망(怨望)이 적지 아니함으로 광종(光宗)은 노비안험법(奴婢按驗法)을 만들어서 노비(奴婢)의 문서(文書)를 새로이 심사(審査)하고 노비(奴婢)와 노주간(奴主間)의 시비(是非)를 재판(裁判)하여 억울(抑鬱)한 노비(奴婢)들은 해방(解放)시키더니 이번에는 노주(奴主)들이 불평(不平)이 일어나서 이미 속량(贖良)한 사람들은 노주(奴主)의 소청(所請)에 따라서 다시 노비(奴婢)를 만든 일도 있었다.

고려(高麗)는 불교(佛敎)와 함께 유교(儒敎)도 발달(發達)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유학(儒學)은 경서(經書)를 줄기로 하여 유학(儒學)의 근본사상(根本思想)을 공부(工夫)하는 일이 적고 과거(科擧)에 필요(必要)한 과목(科目)에 치중(置中)하는 경향(傾向)이 있었다. 과거법(科擧法)은 광종(光宗)때에 중국(中國)사람 쌍기(雙冀)가 귀화(歸化)하고 그의 건의(建議)를 따라서 비롯하였는데 이때의 과거(科擧) 삼(三)은, 일(一)은 진사과(進士科)이니 문예(文藝)를 주(主)로 하여 시험(試驗)함으로 제술과(製述科)라고도 하며, 이(二)는 명경과(明經科)이니 경의(經義)를 주(主)로 하여 시험(試驗)하며 삼(三)은 의복과(醫卜科)이니 의학(醫學) 천문(天文) 음양(陰陽) 지리(地理)를 시험(試驗)하더니 그 후(後)에 명법과(明法科) 진사(進士) 명경(明經)등(等)과(科)에 합격(合格)한 사람들은 귀족계급(貴族階級)에 참여(參與)하게되고 의복(醫卜) 법(法) 등과(等科)는 국가기관(國家機關)의 사무(事務)와 기술(技術)을 맡아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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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설사업 토지제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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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업(建設事業)

一. 토지제도(土地制度)

 

토지제도(土地制度)는 태조(太祖)가 신라(新羅)의 구제(舊制)를 습용(襲用)할 것을 원칙(原則)으로 정(定)하고 만사 초창중(萬事 草創中)에 있어 그 세칙(細則)을 정(定)치 못하더니 오세(五世) 경종(景宗)때에 이르러 비로소 전국(全國)의 토지(土地)를 모두 공전(公田)으로 하고 균전제(均田制)에 의(依)하여 수전수전(授田收田)의 법(法)을 확립(確立)하였다. 그 법(法)은 조정(朝廷)의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부병한인(府兵閑人)(관리(官吏)에서 물러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신분(身分)과 직위(職位)에 따라서 농사(農事)지을 땅과 시초(柴草땔감)로 쓸 토지(土地)를 아울러 주니 이를 전시과(田柴科)라고 한다. 전시지(田柴地)는 자손(子孫)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오 그 받은 사람이 사망(死亡)하거나 퇴직(退職)하면 국가(國家)에 반환(返還)하는 것이 원칙(原則)이며 부병(府兵)은 이십(二十)세(歲)에 전(田)을 받고 육십세(六十歲)에 이르러 도로 바치는 법(法)이었다. 일반(一般) 전시과(田柴科)외(外)에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란 것이 있어서 국가(國家)에 공훈(功勳)을 세운 사람이나 또는 그 자손(子孫)에게 주어서 세습(世襲)으로 인정(認定)하였으며 또 그밖에 공해전(公廨田) (관청(官廳)의 경비(經費)를 쓰기 위(爲)한 것) 사원전(寺院田)(사원(寺院)의 경비(經費)를 위(爲)하여 주는 것) 내계전(內桂田)(왕실(王室)의 재원(財源)으로 쓰는 토지) 녹과전(祿科田)(관리(官吏)들의 생활(生活)을 돕기 위(爲)하여 주는 것)등(等)이 있었다.) 이리하여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하고 조권(租權)을 가지고 있어 토지(土地)의 매매(買賣)를 금(禁)하고 그 겸병(兼倂)의 폐(弊)를 방지(防止)하였다. 농민(農民)은 십육세(十六歲)가 되면 반드시 토지(土地)를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자손(子孫)이 출생(出生)하는 때 그 출생(出生)을 등록(登錄)하여야 그 지(地)를 받는 관계(關係)로 호적(戶籍)에 빠지는 사람이 없고 관리(官吏)가 죄(罪)를 지으면 면직(免職)이 되는 동시(同時)에 그 받은 바의 토지(土地)를 빼앗겨서 생활(生活)의 길이 끊어지게 됨으로 관리(官吏)들이 모두 일에 충실(充實)하고 청렴(淸廉)하였으니 이것이 고려(高麗)초기(初期) 국세(國勢)가 융성(隆盛)한 소이(所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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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치적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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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성종(成宗)의 치적(治積)

 

육세(六世) 성종(成宗)에 이르러 고려(高麗)일대(一代)의 모든 제도(制度)가 비로소 완비(完備)되니 태조(太祖)가 삼국(三國) 통일후(統一後) 사십여년(四十餘年)의 오랜 세월(歲月)을 지나서 겨우 법전(法典)이 완성(完成)되고, 또 고구려(高句麗)의 고지(故地)를 수복(收復)할 북방(北方) 경영(經營)도 진보(進捗)되지 못함은 지지(遲遲)함이 없지 아니하나 이렇게 지지(遲遲)함은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부단(不斷)히 반항운동(反抗運動)을 일으켜서 국내(國內)가 안정(安定)치 못함으로 인(因)함이라고 볼 것이다.

성종(成宗)은 불교(佛敎)의 외(外)에 특(特)히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여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根本)을 삼고 외방(外方)의 우수(優秀)한 자제(子弟)를 뽑아 국자감(國子監)(지금의 대학(大學))에서 공부하게 하고 그 중(中)에서 뛰어난 자(者)를 골라서 다시 송(宋)나라에 유학(遊學)시켰다.

그리고 외방(外方)의 십이목(十二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 의학박사(醫學搏士)를 보내어 교육(敎育)과 의료(醫療)를 맡아보게 하였다.

또 경제정책(經濟政策)에 힘써서 농사(農事)철의 부역(賦役)을 금(禁)하고 병기(兵器)를 걷어서 농구(農具)를 만들어 농업(農業)을 장려(獎勵)하니 지금 우리 나라에서 쓰이는 풍장 같은 농악(農樂)이 이 시대(時代)에 처음으로 생긴 것이라 하며 면재법(免災法)을 마련(磨練)하여 재난(災難)을 입은 자(者)에게 세납(稅納)과 부역(賦役)을 감(減)하는 준례(準例)를 세우고 비황책(備荒策)으로 주(州)와 부(府)에 의창(義倉)을 두어 곡식(穀食)을 쌓고 양경(兩京)과 십이목(十二牧)에 상평창(常平倉)을 두어 곡식(穀食)과 포목(布木)을 저축(貯蓄)하였다가 농사(農事)의 형편(形便)을 따라서 물가(物價)가 높으면 상평창(常平倉)의 물품(物品)을 헐(歇)하게 방매(放賣)하여 물가(物價)를 내리게 하고 물가(物價)가 너무 떨어지면 상평창(常平倉)에서 비싸게 매입(買入)하여 물가(物價)의 조절(調節)을 도모(圖謀)하여 국민(國民)의 생활(生活)을 안정(安定)시켰다.

또 특이(特異)한 제도(制度)로 보(寶)라는 것이 있으니 보(寶)는 지금의 계(契)의 기원(起源)으로써 일정(一定)한 재단(財團)을 가지고 거기서 생기는 이식(利息)으로 목적(目的)하는 사업(事業)을 경영(經營)하는 것이니 폐난(弊難)에 빠진 사람들을 구휼(救恤)하기 위한 제위보(濟危寶), 교육(敎育)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학보(學寶) 같은 것이 그 것이오 이 기관(機關)은 한편으로는 사업(事業) 경영체(經營體)가 되고 한편으로는 서민금융(庶民金融) 기관(機關)이 되어 국민(國民)의 경제(經濟) 생활(生活)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 때의 물품(物品) 매매(買賣)에는 화폐(貨幣)를 쓰지 아니하고 마포(麻布)와 미곡(米穀)으로 화폐(貨幣)의 대신(代身)으로 썼다. 그러나 사회(社會)가 발달(發達)하고 인구(人口)가 늘어서 매매(買賣)는 점차(漸次) 많아지는데 마포(麻布)는 중량(重量)이 무겁고 습기(濕氣)와 연기(煙氣)에 품질(品質)이 상(傷)하기 쉽고 또 서모(鼠耗)도 적지 아니하여 큰 불편(不便)을 느끼게 되었다. 외국(外國)과의 통상무역(通商貿易)에는 포화(布貨) 이외(以外)에 지은(地銀)을 쓰고 일부(一部)에는 송전(宋錢)이 들어와서 유통(流通)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극(極)히 소수(小數)에 불과(不過)하였다.

이에 성종(成宗)은 비로소 동(銅)을 원료(原料)로 하여 전화(錢貨)를 만드니 이것이 아국(我國) 주전(鑄錢)의 시(始)이다. (檀紀 三千三百二十九年 成宗 十五年) 그러나 貨幣는 반드시 시장(市場)을 통(通)하여 유통(流通)되는 것이오 만일 시장(市場)이 없으면 그것으로써 생활(生活) 필수품(必需品)을 매득(買得)하기에 여간(如干) 불편(不便)이 아니라 이 시대(時代)는 시장(市場) 수(數)가 적고 또 민간(民間)에서 전화(錢貨)를 신용(信用)치 않는 관계(關係)로 널리 쓰이지 못하고 여전(如前)히 포화(布貨)로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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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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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契丹)관계(關係)

 

이때 중국대륙(中國大陸)에는 송(宋)나라가 있었고 만주(滿洲)에는 계단(契丹)이 있어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원래(原來) 아국(我國)은 만주(滿洲)의 배후(背後)에 있는 강국(强國)임으로 만주(滿洲)에 터를 잡고있는 나라가 중국대륙(中國大陸)과 다투고자하면 먼저 배후(背後)의 위험(危險)을 조정(調整)하지 아니하고는 중국(中國) 방면(方面)으로 전력(全力)할 수 없는 것임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以來)로 중국(中國)방면(方面)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아국(我國)의 병(兵)을 받음이 통례(通例)이었다. 계단(契丹)이 발해(渤海)를 멸(滅)한 후(後)에 압록강(鴨綠江) 좌우(左右)의 지(地)에는 여진족(女眞族)이 살았음으로 계단(契丹)과 아국(我國)은 직접(直接) 부딪히는 일이 없고 또 송(宋)나라가 계단(契丹)을 칠 때에 아국(我國)에 원병(援兵)을 청(請)하였으되 아국(我國)에서는 섣불리 이에 응(應)하지 아니하였음으로 계단(契丹)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섭(關涉)이 없었다. 그러나 계단(契丹)은 어느 때든지 아국(我國)을 제압(制壓)치 아니할 수 없는 처지(處地)였음으로 성종(成宗) 십이년(十二年)에 (三千三百二十六年) 공연(空然)한 트집을 잡아 대군(大軍)을 보내어 북변(北邊)에 쳐들어 왔다.

이때 고려(高麗)는 삼한통일(三韓統一)후(後) 근(近) 육십년간(六十年間) 병혁(兵革)을 알지 못하여 인심(人心)이 해이한 터이라 계단(契丹) 병(兵)이 들어옴을 보고 정부(政府) 고관중(高官中)에는 북변(北邊)의 땅을 할양(割讓)하고 화친(和親)하자는 의론(議論)까지 있었다. 이때 서희(徐熙)는 할지론(割地論)을 크게 반대(反對)하여 말하되 우리 나라는 동방(東方)의 대국(大國)이오 또 계단(契丹)을 막을만한 힘도 있는데 땅을 버려서 화친(和親)함은 국가(國家)의 치욕(恥辱)이오 더욱이 고구려(高句麗)의 고지(故地)를 수복(收復)하려는 우리 나라로서 어찌 경솔(輕率)히 할지론(割地論)을 말하랴 일전(一戰)한 후(後)에 모든 일을 처리(處理)하여도 늦지 아니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나가 싸워서 적(敵)의 기세(氣勢)를 꺾어놓고 계단(契丹)장수(將帥) 소손령(蕭遜寧)을 찾아가서 저들이 까닭 없이 사단(事端)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침범(侵犯)함을 힐난(詰難)하였다. 소손령(蕭遜寧)은 고려(高麗)는 신라(新羅)를 물려받은 나라이니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은 전부(全部) 계단(契丹)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하였다. 서희(徐熙)는 우리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의 부흥(復興)임으로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한 것이니 땅의 경계(境界)를 말하면 계단(契丹)은 본시(本是) 고구려(高句麗) 땅이니 우리가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항변(抗辯)하였다. 소손령(蕭遜寧)은 그러면 고려(高麗)는 무슨 까닭으로 가까운 계단(契丹)과 사귀지 아니하고 멀리 송(宋)나라와 친(親)하냐 하니 이것은 우리 나라와 송(宋)나라의 관계(關係)를 끊고 자기(自己) 나라와는 친선(親善)하여 후고(後顧)의 걱정을 없애려는 심산(心算)이다. 서희(徐熙)는 우리도 계단(契丹)과 사귀고자하나 중간(中間)에 여진(女眞)의 땅이 가로 놓여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니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의 땅을 우리에게 달라하여 동의(同意)를 얻고 서로 화친(和親)을 맺고 계단군(契丹軍)이 물러간 뒤에 익년(翌年)부터 군사를 내어 곽주(郭州) 구주(龜州)등 여러 성(城)을 쌓으니 이것이 이른바 강동육성(江東六城)의 기초(基礎)가 된 것이다. 그러나 계단(契丹)은 이번 화친(和親)으로써 만족(滿足)치 아니하고 기회(機會)만 있으면 다시 고려(高麗)를 침범(侵犯)하려 하던 차(次)에 마침 고려(高麗)에 내란(內亂)이 있어서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해(害)하고 현종(顯宗)을 세우니 계단(契丹)이 강조(康兆)의 죄(罪)를 묻는다 빙자(憑藉)하고 삼십만(三十萬)의 군사(軍士)로 쳐들어 왔다. 이때 신하(臣下)들 중에 화친(和親)하자고 주장(主張)하는 자(者)가 있었으나 강감찬(姜邯贊)이 이를 반대(反對)하고 현종(顯宗) 왕(王)을 나주(羅州)로 피난(避難)하게 하고 양규(楊規)로 하여금 계단군(契丹軍)을 맞아 싸우니 계단군(契丹軍)은 약탈(掠奪)과 포학(暴虐)을 마음껏 하다가 마침내 헛되이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우리 나라의 귀중(貴重)한 문헌(文獻)이 많이 불타버렸으니 우리 나라에도 옛날부터 고기삼한(古記三韓), 고기고구려(古記高句麗), 유기신라(留記新羅) 백제(百濟)의 사기(史記) 등(等) 사적(史籍)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모두 이와 같은 병화(兵火)에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삼국시(三國時) 이전(以前)의 일을 기록(記錄)한 사서(史書)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기타 중국(中國) 서적(書籍)에 산견(散見)하는 것뿐이다. 계단(契丹)은 고려(高麗)에 대(對)한 야심(野心)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 후 팔년(八年)만에 (顯宗 九年 檀紀 三千三百五十一年) 다시 앞서 쌓은 육성(六城)을 달라는 핑계로 십만(十萬)군(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이에 상원수(上元帥)가 산(山)골에 복병(伏兵)을 두어 계단군(契丹軍)을 무찌르고, 적병(敵兵)이 길을 피(避)하여 송도(松都)로 내려오는 것을 대동강(大洞江)에서 습격(襲擊)하여 적병(敵兵)을 만여명(萬餘名)을 죽이니 계단군(契丹軍)의 기세(氣勢)가 한목 꺾이었다. 이듬해 이월(二月)에 적군(敵軍)의 대부대(大部隊)가 구주(龜州)를 지나는 것을 강감찬(姜邯贊)이 동문(東門) 밖에서 맞아 싸워서 크게 깨트리고 도주(逃走)하는 적(敵)을 추격(追擊)하여 이를 섬멸(殲滅)하니 이후(以後)로 계단(契丹)은 다시 고려(高麗)를 침범(侵犯)하는 일이 없었고 지금까지 우리 국민(國民)은 강감찬(姜邯贊)을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명장(名將)으로 병칭(竝稱)하고 있는 것이다.

만주(滿洲)에서 계단(契丹)의 세력(勢力)이 쇠약(衰弱)해지고 압록강(鴨綠江) 좌우(左右)에 있는 여진(女眞)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한 틈을 타서 고려(高麗)는 이남(以南)의 지(地)를 점차(漸次) 수복(收復)하고 덕종(德宗)은 유소(柳韶)를 시켜서 여진(女眞)을 방비(防備)하기 위(爲)한 성(城)을 쌓으니 압록강(鴨綠江) 어구(於口)인 의주(義州)군 광성면(光城面) 외동(外洞)으로부터 시작(始作)하여 함경남도(咸鏡南道) 정평군(定平郡)의 비백산(鼻白山)을 거쳐서 함주군(咸州郡) 都連逋에 이르기까지 무릇 千餘里이니 이것을 천리장성(千里長城)이라 하며 십이년(十二年)동안의 공력(功力)을 기우려 정종(靖宗) 십년(十年)에 완성(完成)하였다. (檀紀 三千三百二十四年)

成宗때에 地方으로 나누어 경기(京畿)의 외(外)에 관내도(關內道)-양주(楊州)- 광주(廣州)- 해주(海州)), 중원도(中原道)-충주(忠州)- 청주(淸州)), 하남도(河南道)-공주 등(等), 강남도(江南道)-전주(全州)등(等), 영남도(嶺南道)-상주(尙州)등(等), 산남도(山南道)-진주(晉州)등(等) 영동도(嶺東道)-경주(慶州)등(等), 해양도(海陽道)-나주(羅州) 승천(昇川)(順川) 삭방도(朔方道)-춘주(春州) 명주(溟州)등(等), 패서도(浿西道)-서경(西京)등(等)의 십도(十道)로 만들었으니 현종(顯宗)때에 이르러서 북변(北邊)이 아직 정(定)치 못하였음으로 다시 지방(地方)의 구획(區劃)을 고쳐서 경기(京畿)의 외(外)에 양광도(楊廣道)-(지금의 경기도(京畿道)의 일부(一部)와 충청남북도(忠淸南北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지금의 강원도(江原道)의 일부(一部)) 서해도(西海道)-(지금의 황해도(黃海道)의 오도(五道)를 두고 북변(北邊)에는 동계(東界)와 북계(北界)를 두니 동계(東界)는 또한 동북면(東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江原道) 북부(北部)와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南部)이오 북계(北界)는 또한 서북면(西北面)이라 하는데 지금의 평안남북도(平安南北道)의 대부분(大部分)이다. 이와 같이 북변(北邊)을 서계(西界)로 정(定)한 것은 이 지방(地方)이 계단(契丹)및 여진(女眞)과 상접(相接)하는 땅이오 또 앞으로 북진(北進)하려는 계획(計劃)이 있기 때문에 잠정적(暫定的)으로 정(定)해 놓은 행정구역(行政區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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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불교의 문화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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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문화(文化)

 

고려(高麗) 건국(建國) 이후(以後)에 유교(儒敎)가 들어와서 관가(官家)에서 세운 교육기관(敎育機關)에 의(依)하여 상당(相當)한 발달(發達)을 이루고 이러한 관학(官學)외(外)에 사학(私學)이 있어서 한때 크게 떨치었고 학생(學生)들은 관학(官學)보다도 사학(私學)에 가기를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관학(官學)에서보다 사학(私學)에서 더 많이 인재(人才)가 났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황금시대(黃金時代)라고 칭(稱)하는 문종(文宗)때에는 유명(有名)한 사학(私學)이 십이개(十二個)나 있어서 거기서 공부(工夫)하는 학도(學徒)들은 십이문도(十二門徒)라하고 그 중(中)에서도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칭(稱)하는 최충(崔沖)의 문(門)이 가장 이름이 높고 당시(當時) 국가(國家)의 드러난 인물(人物)은 대개(大槪)가 이 최문(崔門) 출신(出身)이었고 최충(崔沖)의 시호(諡號)가 문헌공(文憲公)임으로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칭(稱) 하였다.

고려(高麗)는 불교(佛敎)로써 국교(國敎)를 삼고 정치제도(政治制度) 같은 것이 불법(佛法)에 인연(因緣)되지 아니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一般) 풍습(風習)에도 모두 불교(佛敎)의 정신(精神)이 들어 있었다.

고려사회(高麗社會)의 특수(特殊)한 풍습(風習)으로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있었으니 이는 국가제전(國家祭典)으로써 우리 나라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 널리 행(行)하여진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 등(等)의 풍속(風俗)이 불교(佛敎)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얼마쯤 변화(變化)하여진 것이다. 연등(燃燈)은 불(佛)을 섬기는 것이오 팔관(八關)은 천신(天神)을 비롯하여 자연신(自然神)을 섬기는 것이니 둘 다 등(燈)불을 찬란(燦爛)히 켜고 온갖 음식(飮食)을 베풀며 그 사이에 춤추고 노래하여 전국민(全國民)이 함께 즐기고 동시(同時)에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즐겁게 하여 풍년(豊年)이 들고 천하(天下)가 화평(和平)하기를 빌고 감사(感謝)하는 것이었다.

성종(成宗)때에는 승(僧) 삼십여명(三十餘名)을 송(宋)나라 항주(抗州)에 보내어 그 곳 영명사(永明寺) 지현선사(智賢禪師)에게 선종(禪宗)의 교리(敎理)를 배워 오고 그 외(外)에도 불법(佛法)을 닦으러 대륙(大陸)에 건너가는 승(僧)이 수(數)없이 많았다. 그 중(中)에서도 고려(高麗) 불교계(佛敎界)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대현국사(大賢國師) 의천(義天)이다.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써 십일세(十一歲)에 출가(出家)하여 승(僧)이 되고 후(後)에 송(宋)나라에 건너가서 불경(佛經) 천권(千卷)을 구(求)해 오고 또다시 송(宋)나라와 요(遼)나라(계단(契丹)와 일본(日本)에 사람을 보내어 사천권(四千卷)을 구(求)해와서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불경(佛經)을 박아내니 一千十部 四千七百四十卷이며 이를 흥왕사판(興王寺版) 대장경(大藏經) 또는 의천(義天)의 속장경(續藏經)이라 한다.

이보다 앞서 성종(成宗)때에 불법(佛法)의 힘으로 계단(契丹)의 군사(軍士)를 물리치려 하여 불경(佛經) 판각(版刻)을 시작(始作)하여 대장경(大藏經) 一千七十六部 五千四百八十卷을 박아내고 그 후(後) 文宗때에 빠진 佛經 일천권(一千卷)을 박아내고 여기에 興王寺版을 合치면 그 當時의 世界에서 가장 完備한 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國寶가 後日 蒙古亂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高宗이 다시 發願하여 十六年동안의 노력(努力)으로 이를 새로 만드니 이것이 지금 경상도(慶尙道)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유명(有名)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불교(佛敎)가 퍼짐과 함께 거기에 따르는 미술공예(美術工藝)도 크게 발달(發達)하여 아국사상(我國史上) 미술공예(美術工藝)의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이루었고, 다만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인성(人性)이 혼후(渾厚)함으로 모든 제품(製品)이 웅대(雄大)한 기상(氣象)이 나타나고 있음에 비(比)하여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인성(人性)은 혼후(渾厚)한 풍(風)이 적고 오직 진실(眞實)하였음으로 모든 제품(製品)에 우아(優雅)한 맛은 유여(有餘)하나 웅대(雄大)한 기상(氣象)은 적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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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의 융성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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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中期)의 융성(隆盛)

 

문종(文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일백삼십여(一百三十餘)이오 외(外)로는 북변(北邊)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쌓인 후(後)에 국경(國境)에 큰 일이 없고 내(內)로는 문화(文化)가 발달(發達)하고 도로(道路)를 열어서 교통(交通)을 편리(便利)하게 하니 물론(勿論) 당시(當時)의 교통(交通)은 지금과 같이 어떠한 산곡태산(山谷泰山)이든지 우마차(牛馬車)가 통행(通行)할 수 있는 도로(道路)가 아니오 소위(所謂) 평지(平地)의 도로(道路)도 겨우 우마차(牛馬車)가 통행(通行)할 수 있음에 불과(不過)하고 산로(山路)에는 보행인(步行人)이나 태우마(駄牛馬)가 행(行)할 정도(程度)이니 지금 각지(各地)에 남아있는 구로(舊路) 폐로(廢路)가 곧 그 시대(時代)의 유물(遺物)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當時)에는 군사(軍士)가 행진(行陣)할 때에는 군사(軍士)들이 무거운 식량(食糧) 전구(戰具)같은 것을 지는 외(外)에 태우마(駄牛馬)의 열(列)이 천리(千里) 이천리(二千里)를 잇닿았다 한다. 성종(成宗) 이후(以後) 각(各) 주요(主要) 도로(道路)에 비로소 원(院)을 두어 행인(行人)의 숙소(宿所)로 쓰는 정책(政策)을 그대로 이어오고 산곡험산(山谷驗山)에도 대개(大槪) 도로(道路)를 만들어 종전(從前)에 비(比)하여 교통(交通)이 훨씬 편리(便利)하여졌다.

건국(建國) 초기(初期)로부터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의 유민(遺民)이 항상(恒常) 반항(反抗)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음으로 문종(文宗)은 외방(外方)에서 반항(反抗)하는 사상(思想)이 있는 유력(有力)한 향리(鄕吏)의 자제(子弟)를 서울에 와서 머물게 하니 이것을 기인(其人)이라 하고 기인제(其人制)가 생긴 이후(以後)로 외방(外方)의 인심(人心)이 점차(漸次) 안정(安定)되고 이 기인제(其人制)는 후일(後日)의 경주인(京主人)의 근원(根源)이 된 것이다.

문종(文宗)의 세(世)는 고려(高麗) 일대(一代)를 통(通)하여 가장 좋은 태평(太平)시절(時節)을 이루었고 고려(高麗)도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왕위(王位) 계승(繼承)의 좋은 법(法)을 받아 유군(幼君)을 세우지 아니하고 왕위(王位)를 아들에게만 전(傳)함이 아니라 형제(兄弟) 상전(相傳)하는 뜻이 적지 아니하더니 선종(宣宗)이 그 아들 헌종(獻宗)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하니 헌종(獻宗)은 황구(黃口) 유아(幼兒)라 국정(國政)을 감임(堪任)할 능력(能力)이 없고 모든 행정권(行政權)이 그 신하(臣下)의 손에 의(依)하여 좌우(左右)되니 왕(王)의 숙부(叔父) 숙종(肅宗)이 정부(政府)를 전복(顚覆)하고 왕(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王)이 되니 이것은 이조(李朝)때의 단종(端宗) 사변(事變)과 같은 것이다.

화폐제도(貨幣制度)는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창설(創設)한 뒤로 잘 행(行)치 못하였고 대현국사(大賢國師) 의천(義天) 같은 이도 주전(鑄錢)의 실행(實行)을 주장(主張)하니 숙종(肅宗)이 왕(王)이 된 후(後)로 이 정책(政策)을 강력(强力)히 추진(推進)하여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전(鑄錢)을 만들어 주요(主要)도시(都市)에서 쓰게 하니 이때의 전면(錢面)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비롯하여 해동중보(海東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등(等)으로 쓰이었으며 또 一斤重의 銀으로 我國地形을 본뜬 甁을 만들어서 돈으로 쓰니 이 銀甁은 그 模樣을 좇아서 활구(濶口)라 하였으며 이 외(外)에도 쇄은(碎銀) 소은병(小銀甁) 같은 것도 쓰였다.

숙종(肅宗)이 화폐제도(貨幣制度)를 확립(確立)하려고 한 것은 당시(當時) 산업(産業)이 발달(發達)하여 국내(國內)에 물화(物化)의 유통(流通)이 많을 뿐만 아니라 외국무역(外國貿易)이 또한 늘어가는 까닭이었다. 이때 고려(高麗)는 대륙(大陸)세력(勢力)과 항상(恒常) 무력(武力) 교섭(交涉)을 가지고 있으되 한 편(便)으로 벽란(碧瀾예성강)나루를 통(通)하여 송(宋)나라와 흑수(黑水)(지금의 北滿州) 일본(日本) 유구(琉球)(오끼나와 부근) 섬라(暹羅)(타이랜드)등(等) 여러 나라와 또 멀리는 대식국(大食國)(중동지방)의 상인(商人)들과 평화(平和)로운 무역(貿易)을 계속(繼續)하였고 저쪽에서 들어오는 물건(物件)은 주(主)로 비단, 책(冊), 문방구(文房具), 약재(藥材), 향료(香料), 다(茶), 대모(玳瑁), 서각(犀角) 등(等)이며 이 쪽에서 나가는 것은 동(銅), 은(銀), 포목(布木), 인삼(人蔘), 우황(牛黃), 호피(虎皮), 지(紙), 화문석(花紋席), 나전(螺鈿), 자기(磁器) 등(等)이었다. 고려자기(高麗磁器)는 천하(天下)의 절품(絶品)으로서, 또 고려(高麗)의 견지(繭紙)는 고려(高麗) 특산품(特産品)으로써 당시(當時) 송(宋)나라에서 대환영(大歡迎)을 받았던 것이다.

서남해중(西南海中)에 있는 탐라(耽羅)는 지금의 제주도(濟州道)인데 고초(古初)에 형제(兄弟) 삼인(三人)이 석혈(石穴)중(中)에서 살더니 그 후(後)에 여자(女子)와 우조(牛鳥)와 각곡(各穀) 종자(種子)를 실은 배가 해변(海邊)에 와서 닿음으로 삼인(三人)이 여자(女子)를 분취(分娶)하고 성(姓)은 각각(各各) 고(高) 부(夫) 양(良)으로 정(定)하고 농사(農事)지으니 인구(人口)가 차차(次次) 늘어가서 한 독립국가(獨立國家)가 되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비로소 백제(百濟)와 통(通)하였다. 신라(新羅)통일(統一) 후(後)로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한 속국(屬國)으로 조공(朝貢)하고 있더니 숙종(肅宗)은 이를 내지(內地)와 동일(同一)하게 만들고 고려(高麗)의 정치(政治)를 펴기 위(爲)하여 국호(國號)를 폐(廢)하고 군(郡)을 만드니 이때로부터 탐라(耽羅)는 국가(國家)에서 보내는 관리(官吏)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성(人性)이 강한(强悍)하고 종전(從前)의 왕자(王子) 계통(系統)이 지방(地方)의 세력(勢力)을 가지고 있어 국가(國家)에 대(對)하여 반란(反亂)이 자주 일어났다.

고려(高麗)초기(初期)로부터 국가(國家)의 운명(運命)을 예언(豫言)한 소위(所謂) 비결(秘訣)이 유행(流行)하였는데 그 비결(秘訣)에 목(木)자(子)가 득국(得國)하여 한양(漢陽)에 도(都)한다는 말이 있었음으로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자(者)가 음모(陰謀)를 꾸미는 일이 종종(種種)있었다. 숙종(肅宗)은 한양(漢陽)(지금의 서울)에 이본(李本)을 많이 심고 장성(長成)함을 기다려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작벌(斫伐)케 하여 이씨(李氏)의 왕기(王氣)를 제압(制壓)한다고 한 일까지 있었으니 고려(高麗)의 정치(政治)는 비결(秘訣)의 힘의 작용(作用)이 적지 아니하였고 이 비결(秘訣)은 이조(李朝)의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것으로서 당시(當時) 고려(高麗)의 민간(民間)에도 비결(秘訣)의 힘의 영향(影響)이 가장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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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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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女眞)관계(關係)

 

여진(女眞)은 처음에 발해국(渤海國)을 구성(構成)한 말갈(靺鞨)의 일족(一族)이라 발해(渤海)가 계단(契丹)에게 망(亡)한 뒤에 여진족(女眞族)이 남만주(南滿州) 방면(方面)에 거주(居住)하는 자(者)는 계단(契丹)에게 귀화(歸化)하여 숙여진(熟女眞)이 되고 백두산(白頭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북만주(北滿州)와 옥저(沃沮)고지(故地)에 거주(居住)하는 자(者)는 항상(恒常) 계단(契丹)에 반항(反抗)하였음으로 이를 생여진(生女眞)이라 한다. 우리 나라와 인접(隣接)하고 있는 여진족(女眞族)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으로서 무역(貿易)과 침략(侵略)을 되풀이하였으나 고려(高麗)를 두려워하는 기색(氣色)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합이빈(哈爾濱)(하얼빈) 부근(附近)의 완안(完顔) 부(部)에 오아속(烏雅束)이 나서 그 세력(勢力)이 무척 늘어서 이웃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合)치고 그 힘이 우리 나라 국경(國境)에까지 미치니 오아속(烏雅束)의 선세(先世)는 고려(高麗) 동북면(東北面)의 화주(和州)(지금의 영흥(永興)사람 김모(金某)임으로 그들은 고려(高麗)를 부모지국(父母之國)이라 肅宗 九年 正月에 咸州(지금의 咸興)의 女眞 부락部落을 통합(統合)한 오아속烏雅束의 부하(部下)는 국경(國境)을 넘어서 정평(定平)에 들어왔다. 이에 고려(高麗)에서는 임간(林幹)을 보내어 치다가 실패(失敗)하고 다시 윤관(尹瓘)을 대신(代身) 보내었으나 또한 공(功)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적(敵)을 유화(宥和)하여 돌려보내었다. 그러나 윤관(尹瓘)은 이 싸움에서 여진(女眞)이 어찌하여 강(强)한가를 알았다. 그것은 고려(高麗)의 보병(步兵)에 대(對)하여 적(敵)은 모두 기병(騎兵)이어서 처음부터 대적(對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윤관(尹瓘)은 이에 신기대(神騎隊)라는 기병대(騎兵隊)를 만들어서 맹렬(猛烈)한 훈련(訓練)을 시켰다. 그러던 중(中) 숙종(肅宗)이 승하(昇遐)하면서 유언(遺言)으로 지금의 여진(女眞)의 세력(勢力)을 꺾지 아니하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으리라 하여 여진(女眞)을 치기를 부탁(付託)하였다.

숙종(肅宗) 이년(二年)에 (기원 삼천사백사십년) 여진(女眞)이 다시 국경(國境)을 침범(侵犯)함으로 윤관(尹瓘)이 십칠만(十七萬)의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장성(長城)을 넘어 가서 적(敵)의 소굴(巢窟) 일백(一百) 삼십여소(三十餘所)를 무찌르고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함주(咸州), 공험진(公嶮鎭), 의주(宜州), 통태(通泰), 평융(平戎)의 구성(九城)을 쌓으니 이것이 유명(有名)한 동북면(東北面) 구성(九城)이다.

구성(九城)의 땅이 지금의 어느 곳인지 확실(確實)히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혹(或)은 공험진(公嶮鎭)을 지금의 북간도(北間島)의 땅이라 하고, 혹(或)은 길주(吉州)를 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 길주(吉州)라 하여 마치 구성(九城)의 땅이 두만강(豆滿江)의 좌우(左右)에 까지 미침과 같이 말하는 일도 있으나 당시(當時) 전쟁(戰爭)한 일수(日數)와 거리(距離) 등(等)으로 생각하여 보면 지금의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북부(北部) 해안(海岸)지방(地方)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 해로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여진(女眞)은 고려(高麗)에 원수(怨讐)를 갚고 구성(九城)을 회복(恢復)하려하여 쉴 사이 없이 반격(反擊)을 되풀이하고 또 완안(完顔)부(部)가 수만명(數萬名)으로서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등(等)을 차례로 포위(包圍)하였으나 성공(成功)치 못하였다. 이때 여진(女眞)은 구성(九城) 등지(等地)에서 쫓겨나간 부락(部落)이 안주(安住)할 곳을 잃어서 몹시 피로(疲勞)하고 고려(高麗)도 또한 구성(九城)의 땅이 험(驗)하여 지키기 어렵고 또 거리(距離)가 멀어서 모든 군수물(軍需物)을 수송(輸送)하기 어려워서 국력(國力)이 피폐(疲弊)하였다. 이에 여진(女眞)은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구성(九城)을 반환(返還)하여 달라고 애원(哀願)하여 왈(曰) 만일 구성(九城)을 돌려주면 이후(以後)로는 영원(永遠)히 고려(高麗)를 부모(父母)의 나라로 섬기고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조공(朝貢)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맹서(盟誓)하고 돌 자갈 하나라도 지경(地境)을 넘어서 던지지 아니 하겠다고 굳게 다짐함으로 고려(高麗)는 그들의 소원(所願)을 들어주기로 하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여진(女眞) 면장(面長)들로 하여금 함주성(咸州城) 밖에 단(壇)을 모으고 하늘에 맹서(盟誓)케 한 다음 구성(九城)으로부터 차례로 물러나니 이로써 여러 해 동안 애써 이루어진 동북면(東北面)의 계획(計劃)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반환(返還)은 효과(效果)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니 후일(後日) 고려(高麗)와 여진(女眞)과의 교섭(交涉)에 큰 영향(影響)을 끼쳐서 오랫동안 불안(不安)하던 동북면(東北面)의 국경(國境)이 이로부터는 평정(平靜)하여졌고 오아속(烏雅束)의 아들 아골타(阿骨打)가 여진국(女眞國)을 크게 만들어 국호(國號)를 금(金)이라 하고 계단(契丹) 즉(卽) 요(遼)나라를 멸(滅)하고 다시 중국(中國)에 쳐들어가서 송(宋)나라를 양자강(楊子江) 남(南)쪽으로 몰아내서 동양(東洋) 천지(天地)를 뒤흔들었건만 고려(高麗)에 대(對)하여는 항상(恒常) 우호(友好)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택리지(擇里志)라는 글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만주(滿洲)에서 일어난 국가(國家)는 대강(大江)과 대야(大野)를 가지고 있어 그 기풍(氣風)이 웅대(雄大)함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는 능(能)히 중국대륙(中國大陸)과 자웅(雌雄)을 다투었고 발해(渤海) 유족(遺族)인 금(金)나라는 능(能)히 중국(中國)에 들어가서 제왕(帝王)노릇을 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에 국척(局蹐, 跼蹐)하고 있는 국가(國家)는 천리(千里)의 강(江)과 백리(百里)의 야(野)가 없기 때문에 겨우 그 봉역(封域)을 근수(僅守)할 뿐이라는 뜻을 썼는데 지리(地理)와 국민(國民)기풍(氣風)의 관계(關係)가 있고 없는 것은 별문제(別問題)로 하고 어쨌든 우리 민족(民族)이 만주(滿洲)를 잃은 후(後)에 그 세력(勢力)이 갑자기 미약(微弱)하여진 것은 사실(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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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생하는 반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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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생(繼生)하는 반란(叛亂)

 

숙종(肅宗)의 아들 인종(仁宗)은 나이 어리고 그 외조부(外祖父) 이자겸(李資謙)이 권력(權力)을 잡고 스스로 높은 벼슬에 나아가서 국사(國事)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구성(九城) 싸움에 나가서 공(功)을 세우고 돌아온 척준경(拓俊京)을 심복(心腹)으로 부려서 온갖 포학(暴虐)한 일을 다 하였다. 그는 자기(自己)에게 반대(反對)하는 사람을 모조리 방축(放逐)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고자 하여 왕(王)을 죽이려 하니 이것은 목(木) 자(子) 득국(得國) 비결(秘訣)에 인(因)함이라 그러나 자겸(資謙)은 마침내 패(敗)하고 말았다. 이 난리(亂離)에 궁궐(宮闕)이 불타 버리고 서울이 쓸쓸하게 됨에 승(僧) 묘청(妙淸)과 시인(詩人) 정지상(鄭知常) 등(等)을 중심(中心)으로 서경(西京)에 도(都)를 옮기고 임금을 황제(皇帝)라 일컫고 연호(年號)를 세우자는 의견(意見)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정(朝廷)에서는 그 의견(意見)을 반대(反對)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묘청(妙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경(西京)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부개(夫開)라 하니, 인종(仁宗)은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그 이듬해에 평정(平定)하였다.

묘청(妙淸)의 난(亂)에 대(對)하여 옛날 사서(史書)에는 묘청(妙淸)으로써 망탄(妄誕)한 사람이라 하고 그 난(亂)을 일으킨 것은 정권(政權) 다툼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여러 학자(學者)들은 묘청(妙淸)으로써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항(對抗)하는 혁명가(革命家)라 하여 시비(是非)가 정(定)치 못하고 있다. 당시(當時)의 시세(時勢)를 보건대 조정(朝廷) 안에는 중국(中國)을 조국(祖國)처럼 여기는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思想)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니 정치가(政治家)중(中)에는 거기에 불만(不滿)을 품은 자(者) 적지 아니하였고 묘청(妙淸)도 그 중(中)의 일인(一人)이었다. 이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혁파(革破)를 주장(主張)함에는 그것을 주장(主張)할만한 인물(人物)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나 묘청(妙淸)은 사실(事實)로 망탄(妄誕)한 사람이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써 왕(王)의 마음을 이끌고 정지상(鄭知常)이 또한 음양설(陰陽說)로써 거기에 부동(附同)하였으며 서경(西京)에 도읍(都邑)을 옮기려 함은 서경(西京)에 묘청(妙淸)의 세력(勢力)이 이미 부식(扶植)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묘청(妙淸)이 진심(眞心)으로 국가(國家)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爲)하는 정인(正人) 지사(志士)가 아니오 다만 세력(勢力) 다툼을 위(爲)한 술책(術策)에 불과(不過)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高麗)는 태조(太祖) 이래(以來)로 우문정책(右文政策)을 쓰고 무인(武人)을 낮추어보게 되어서 무인(武人)들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더니 의종(毅宗)때에 이르러 왕(王)은 본시(本是) 기질(氣質)이 나약(懦弱)하여 근시(近侍)와 문신(文臣)들만을 가까이하고 그들이 또한 왕(王)의 사랑을 믿고 방자(放恣)한 일이 많아서 무신(武臣)들의 감정(感情)이 더욱 날카로워 졌다. 이러한 무신(武臣)들의 불평(不平)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정중부(鄭仲夫) 등(等)이 난(亂)을 일으켜 근시(近侍)와 문신(文臣)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집을 헐어버리고 왕(王)을 몰아내고 왕(王)의 아우를 세우니 이가 명종(明宗)이다. 이 난리(亂離)가 경인년(庚寅年)에 제일차(第一次)로 일어나고 계사년(癸巳年)에 재차(再次) 일어났음으로 이를 경계지란(庚癸之亂)이라 한다. 정중부(鄭仲夫)는 나라의 권세(權勢)를 한 손에 잡고 조정(朝廷)의 중요(重要)한 벼슬에서 외방(外方)의 소임(所任)에 이르기까지 전부(全部) 무신(武臣)이 맡아보게 되었다.

문신(文臣)의 세상(世上)은 비록 무력(無力)하나마 전통(傳統)과 권위(權威)를 세우고 그를 중심(中心)으로 하여금 움직여 나갔지만 무인(武人)의 세상(世上)은 그러한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힘으로 움직였다. 정중부(鄭仲夫)는 권세(權勢)를 잡은지 십년(十年)만에 경대승(慶大升)에게 죽고 대승(大升)은 다행(多幸)이 천명(天命)을 마쳤으나 그때 서울 안 도적(盜賊)은 모두 무신(武臣)의 부하(部下)라고 할 만치 백성(百姓)들의 원성(怨聲)이 적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後)에 장군(將軍) 이의민(李義旼)이 권세(權勢)를 잡고 갖은 포학(暴虐)을 다하여 목(木)자(子) 득국(得國)의 비결(秘訣)을 이용(利用)하여 반역(叛逆)을 도모(圖謀)하더니 최충헌(崔忠獻)이 의민(義旼)을 죽이고 그의 삼족(三族)과 종들까지도 모조리 잡아죽이니 국가(國家)의 모든 권세(權勢)가 충헌(忠獻)에게 돌아갔다. 충헌(忠獻)은 명종(明宗)을 가두고 그 아우를 세우니 이가 신종(神宗)이다. 충헌(忠獻)은 사병(私兵)을 길러서 자기(自己)를 수호(守護)케 하니 그 세력(勢力)이 관군(官軍)보다 억세고 나라의 정치(政治)를 자기 집 도방(都房)에 앉아서 처결(處決)하니 이것을 도방정치(都房政治)라하고 도방정치(都房政治)가 생긴 후(後)로 조정(朝廷)은 빈집이 되고 관군(官軍)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아니하고 그가 권세(權勢)를 잡은 이십사년(二十四年)간(間)에 두 임금을 내치고 내 임금을 세우니 유약(柔弱)한 왕(王)들이 또한 충헌(忠獻)의 비위(脾胃)를 맞추는 수밖에 다른 도리(道理)가 없었다.

무신(武臣)의 난리(亂離)를 거쳐서 그들의 발호(跋扈)로 유족사회(遺族社會)의 묵은 전통(傳統)이 무너지고 사회(社會)가 힘으로 움직이게 되자 이때까지 하층(下層)에서 눌려 살던 농민(農民)과 노예(奴隸)계급(階級)이 자주 반란(叛亂)을 일으켰다. 그 중(中)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건(事件)으로는 명종(明宗)때에 공주(公州)에서 일어난 망이(亡伊)의 난(亂)과 청도(淸道)에서 일어난 김사미(金沙彌)의 난(亂)과 신종(神宗)때에 동경(東京경주)에서 일어난 김순(金順)의 난(亂)과 울진(蔚珍)에서 일어난 김위(金偉)의 난(亂) 같은 것이며 노예(奴隸)의 반란(叛亂)으로는 신종(神宗)때에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사건(事件)과 같은 것은 주목(注目)할 현상(現象)이니 만적(萬積)은 관사(官私) 노비(奴婢) 수천(數千)명을 송도(松都)의 뒷산에 모아 놓고 최충헌(崔忠獻) 이하(以下) 자기네들의 상전(上典)을 각각 죽이고 노비(奴婢) 문서(文書)를 불사라서 노비를 모두 해방(解放)하여 삼한(三韓)에 천인(賤人) 계급(階級)을 없이하고 또 장상(將相)이 본시(本是) 종(種)이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도 장상(將相)이 될 수 있다하고 일을 꾸미다가 중도(中途)에 발각(發覺)되어 거사(擧事)치 못하고 모두 잡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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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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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란(蒙古亂)

 

최충헌(崔忠獻)이 권세(權勢)를 잡은 후(後)에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판국(版局)이 벌어졌다. 몽고(蒙古)는 본시(本是) 외몽고(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유목(遊牧)하는 부족(部族)이러니 성길사한(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사방(四方)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쳐서 큰 세력(勢力)을 이루니 이는 최충헌(崔忠獻)이 한창 세도(勢道)를 부리던 희종(熙宗)때 일이다. 금(金)나라가 몽고(蒙古)의 힘에 눌림에 계단(契丹)의 귀족(貴族)들이 요동(遼東)에서 일어나고 금(金)의 반장(叛將) 포선만노(蒲鮮萬奴)는 지금의 간도(間道)지방(地方)을 근거지(根據地)로 하여 동진국(東眞國)을 세웠다. 그 후(後) 고종(高宗)때에 이르러 요동(遼東)의 계단족(契丹族)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우리 나라 지경(地境) 안으로 밀려들어와서 약탈(掠奪)을 함부로 행(行)하였다. 고려(高麗)는 군사(軍士)를 보내어 각지(各地)에서 계단병(契丹兵)과 싸우는 중(中)에 또 몽고(蒙古)가 동진(東眞)과 연합(聯合)하여 계단병(契丹兵)을 치기 위(爲)하여 그 뒤를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니 국내(國內)에 사국군대(四國軍隊)가 어울려서 형세(形勢)가 극(極)히 험악(險惡)하고 또 급박(急迫)하였다. 더욱이 고려(高麗)와 몽고(蒙古)는 종래(從來)로 외교관계(外交關係)가 전연(全然)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인성(人性)이 강한(强悍)함으로 국내인심(國內人心)이 흉흉(恟恟)하였다.

이때 계단병(契丹兵)은 앞으로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막히고 뒤로 몽진연합군(蒙眞聯合軍)에계 쫓기어 서북면(西北面)의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서 지키니 몽고(蒙古)장(將) 합진(哈眞)과 동진장(東眞將) 완안자연(完顔子淵)이 그 뒤를 따라 강동성(江東城)을 포위(包圍)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형세(形勢)가 심(甚)히 위구(危懼)함을 보고 전략(戰略)과 외교(外交)에 능숙(能熟)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여 조충(趙冲)을 원수(元帥)로 하고 김취려(金就礪)를 부원수(副元帥)로 하여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몽진군(蒙眞軍)의 영(營)에 가서 크게 주연(酒宴)을 베풀고 두 장수(將帥)를 접대(接待)하였다. 두 장수(將帥)는 우리 나라 두 원수(元帥)의 인격(人格)이 매우 높음을 보고 모앙(慕仰)함을 마지아니하였다. 완안자연(完顔子淵)은 아인(我人)에게 말하되 고려(高麗)의 조원수(趙元帥)는 기위(奇偉)한 사람이라 국가(國家)가 이러한 장수(將帥)를 둔 것은 천(天)의 사(賜)함이라 하고 합진(哈眞)은 김취려(金就礪)를 보고 말하되 내가 일직 육국(六國)을 정벌(征伐)하여 귀인(貴人)을 만남이 많으되 형(兄)의 얼굴을 보니 어찌 그렇게 기위(奇偉)한고 하여 칭찬(稱讚)하였다. 이에 세나라 군사(軍士)는 강동성(江東城)을 쳐서 계단병(契丹兵)을 전멸(全滅)시킨 뒤 몽진(蒙塵)과 화호(和好)를 맺고 무사(無事)히 돌려보냈었다. 이 난(亂)에 귀항(歸降)한 자(者)가 말했는데 이들은 산림지대(山林地帶)와 황무지(荒蕪地)에 이주(移住)시켜 농사(農事)짓게 하니 이를 계단장(契丹場)이라 하고 계단장(契丹場)에 들어간 자(者)들 중(中)에는 농사(農事)짓기 싫어하고 사냥과 피혁(皮革) 유기(柳器) 등(等) 수공업(手工業)으로 전업(轉業)하는 자(者)가 많았으니 이것이 대개(大槪) 후일(後日)의 소위(所謂) 소백정(白丁) 고리백정(白丁)등(等)이 된 것이다.

만주(滿洲) 지방(地方)에서는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밀려나와서 동진국(東眞國)은 얼마후(後)에 망(亡)하고 몽고(蒙古)는 고려(高麗)를 구원(救援)하였다. 고종(高宗) 십이년(十二年)에 몽고(蒙古)의 사신(使臣)이 고려(高麗)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도적(盜賊)을 만나 죽은 일이 있음으로 몽고(蒙古)에서는 이것을 트집잡아 가지고 국교(國交)가 점점(漸漸) 험악(險惡)하더니 마침내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에 제일차(第一次)로 고려(高麗)에 쳐들어 왔다. 원래(原來) 만몽(滿蒙) 지방(地方)에 뿌리를 잡은 국가(國家)들은,

一. 해양(海洋)을 가지지 못해서 해외(海外)로 발전(發展)할 길이 없고 二. 기후(氣候)가 추워서 잠포(蠶布) 등(等) 의복(衣服) 자료(資料)가 생산(生産)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몽고(蒙古)가 처음으로부터 고려(高麗)를 빼앗을 욕심(慾心)을 가지는 것도 이 해양(海洋)과 의복(衣服) 자료(資料)를 얻기 위(爲)함이오 계단병(契丹兵)이 뒤를 쫓아 나온 것도 고려(高麗)에 발을 부칠 구실(口實)을 얻으려 함이오 다시 고려(高麗)에 쳐들어 온 것도 자기들이 처음부터 욕심(慾心)내던 일을 달성(達成)하기 위(爲)함이다.

금후(今後)에 있어서도 몽고(蒙古)방면(方面)에 입(立)하는 나라는 해안(海岸)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가장 거리(距離)가 가까운 동해(東海)로 진출(進出)하려 할 것이오 더욱이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아국(我國) 해안(海岸)에 착목(着目)할 것은 물론(勿論)이다. 몽고군(蒙古軍)이 쳐들어오면서 구주성(龜州城)을 포위(包圍)하니 이때 구주(龜州)를 지키던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 등(等)이 여러 날 동안 몽고군(蒙古軍)과 싸워서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몽고장(蒙古將) 한 사람이 탄복(歎服)하여 왈(曰) 내가 종군(從軍)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성(城)이 이와 같이 공격(攻擊)을 받고 굴(屈)치 않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 성중(城中) 제장(諸將)들은 후일(後日) 반드시 장상(將相)이 되리로다 하였다.

그러나 고려(高麗)는 마침내 몽고군(蒙古軍)을 대적(對敵)치 못하여 그 이듬해 삼군(三軍)이 몽고군(蒙古軍)에게 굴복(屈服)하기에 이르렀다. 몽고(蒙古)에서는 달로화적(達魯花赤)(다루가치)라는 관리(官吏) 칠십이인(七十二人)을 보내와서 고려(高麗)의 내정(內政)을 간섭(干涉)하였다. 이에 고려(高麗) 조정(朝廷)은 몽고(蒙古)와 항쟁(抗爭)하려하여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가 당시(當時) 정권(政權)을 잡고 있는지라 왕(王)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니 (단기 삼천오백육십오년) 이는 몽고군(蒙古軍)이 육지(陸地)에서는 강(强)하나 수군(水軍)이 없어서 바다에서는 힘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삼십년(三十年)동안 몽고(蒙古)의 군사(軍士)가 강화도(江華島)의 맞은편(便)에 와서 아무리 위협(威脅)을 하고 출륙(出陸)하기를 계속(繼續)하여도 최우(崔瑀)는 응(應)하지 아니하니 그 분(忿)풀이를 육지(陸地)에서 마음껏 하여 전후(前後)육차(六次)나 그들의 사나운 발굽이 압록강(鴨綠江) 이쪽을 짓밟아서 서북면(西北面)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이 견디지 못하여 아주 마을이 비게 되었으며 적군(敵軍)은 멀리 경주(慶州)까지 쳐들어와서 학살(虐殺)과 노략(擄掠)을 마음대로 하였다.

대구(大邱) 부인사(符仁寺)에 있는 대장경(大藏經)판(版)과 경주(慶州) 황룡사(皇龍寺)의 구층석탑(九層石塔)이 불타 버린 것도 이 때이며 그들이 제육차(第六次)로 들어 왔을 때는 고려(高麗)사람을 잡아 간 것이 이십만명(二十萬名)을 넘고 죽은 사람의 수(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고려(高麗)에서는 대장경(大藏經)이 불타버린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고종왕(高宗王)은 다시 발원(發願)하여 십육년(十六年)동안의 노력(努力)으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판(版)을 새기고 이 대장경(大藏經)을 새겨 내기에 하도 힘들어서 더 간편(簡便)한 방법(方法)을 생각해 낸 것이 활자(活字)이다.

고종(高宗) 이십일년(二十一年) (삼천육백육십칠년)에 이미 주자(鑄字)로써 책(冊)을 박아내니 이는 독일(獨逸)사람들이 서양(西洋)에서 처음으로 활자(活字)를 만들어서 책(冊)을 박아낸 것보다 이백년(二百年)이나 앞섰다. 활자(活字)는 문명(文明)의 모(母)라는 말이 있거니와 세계(世界)에서 가장 먼저 활자(活字)를 발명(發明)한 고려(高麗)는 역시(亦是) 문화(文化)의 선진국(先進國)이었다.

송(宋)나라 임금이 일부러 사신(使臣)을 보내와서 귀중(貴重)한 책(冊)을 빌려달라 하고 일본(日本)이 항상(恒常) 남양(南洋)의 진기(珍奇)한 물건(物件)을 가지고 와서 그 값으로 특(特)히 대장경(大藏經)을 나눠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高麗)가 당시(當時)의 동양(東洋)에서 문화적(文化的)으로 얼마나 높은 수준(水準)을 지니었던가를 알 수 있고 이러한 문화(文化) 속에서 맺어진 열매가 활자(活字)이었다.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간 뒤 최씨(崔氏)는 정권(政權)을 오로지 하여 사병(私兵)인 삼별초군(三別抄軍)으로써 스스로 수비(守備)하여 육지(陸地)에 나가 싸운 일이 없고 오직 육지군대(陸地軍隊)에 대(對)하여 항전(抗戰)을 명령(命令)할 뿐이며 서남안지방(西南岸地方)으로부터 수로(水路)로 식량(食糧)과 기타(其他) 물자(物資)를 운수(運輸)해다 안락(安樂)한 생활(生活)을 계속(繼續)하였다.

고종(高宗) 사십오년(四十五年)에 최씨(崔氏)와 삼별초군(三別抄軍)사이에 틈이 생김을 이용(利用)하여 삼별초(三別抄)를 시켜서 최씨(崔氏)를 멸(滅)하니 최씨(崔氏)는 四世 六十餘年만에 亡하고 王이 直接 政治를 맡아보게 됨에 마침내 몽고(蒙古)에 굴복(屈服)하고 왕자(王子)를 보내어 화친(和親)하기를 청(請)하니 원(元)나라(몽고(蒙古)) 세조(世祖) 홀필열(忽必烈)이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 왈(曰) 고려(高麗)는 만리(萬里)의 나라이라 당태종(唐太宗)이 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왕자(王子)가 오니 이는 하늘이 시킴이라 하고 후(厚)히 접대(接待)하고 군사(軍士)로 호위(扈衛)시켜서 본국(本國)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동안에 고종(高宗)이 승하(昇遐)하고 왕자(王子)가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가 원종(元宗)이다. 원종(元宗)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겨우 끝나고 그 뒤를 정리(整理)하는 가장 복잡(複雜)한 때라 첫째로 삼십년(三十年)동안 도읍(都邑)하던 임시수도(臨時首都) 강화도(江華島)로부터 송경(松京)에 환도(還都)한 것이오 둘째로 환도(還都)한 뒤 삼별초(三別抄)가 반란(叛亂)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내려가서 관군(官軍)과 싸우다가 패(敗)하여 다시 제주도(濟州道)에 들어가더니 마침내 관군(官軍)에게 망(亡)하였다.

이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에 대(對)하여 지금의 어떤 학자(學者)는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으로써 몽고(蒙古)에 항전(抗戰)하는 의거(義擧)라 하여 찬양(讚揚)하고 있으나 삼별초(三別抄)는 원래(元來) 최씨(崔氏)의 수족(手足)으로써 몽고란(蒙古亂)중 가장 안락(安樂)한 도중(島中)생활(生活)을 하고 항적(抗敵)의 진(陣)에 참가(參加)한 일리 없고 최씨(崔氏)가 망한 뒤에 여전(如前)히 강화도(江華島)에 있어 육지(陸地)에 나와 싸운 일이 없었으니 이것을 항전파(抗戰派)라고 부를 수 없음은 물론(勿論)이오 환도후(還都後)에 그 조직(組織)을 고쳐서 관군(官軍)으로 개편(改編)하려하매 그들은 과거(過去)의 특수(特殊)존재(存在)로서의 특권(特權)이 상실(喪失)됨에 불만(不滿)을 품고 반란(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로 동북면(東北面)의 쌍역(雙域)에 있는 관리(官吏)들이 본국(本國)을 배반(背叛)하고 화주(和州 永興) 이북(以北)의 땅으로써 원(元)나라에 부속(附屬)한 것이다. 이로부터 원(元)나라가 고려(高麗)의 종주국(宗主國)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가 일본(日本)을 칠 터이니 고려(高麗)도 힘을 합(合)하라 하여 충렬왕(忠烈王)이 임금이 되던 해에 (단기 삼천육백칠년) 고려(高麗)에서 만든 전함(戰艦) 구백척(九百隻)으로 합포(合浦)(지금의 마산부근)를 떠나서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를 무찌르고 구주(九州)의 박다(博多)를 점령(占領)하였으나 폭풍우(暴風雨)가 일어나서 전함(戰艦)이 많이 파손(破損)되었음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그 후(後) 칠년(七年)만에 다시 몽고군(蒙古軍)과 중국(中國)의 강남군(江南軍)과 고려군(高麗軍)이 연합(聯合)하여 일본(日本)을 치러 갔으나 이번에도 대풍(大風)이 일어나서 강남군(江南軍)이 거의 전멸(全滅)하고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에 중국(中國)의 전함(戰艦)은 대개(大槪) 파손(破損)되었으나 고려(高麗) 전함(戰艦)의 파손(破損) 된 것이 극(極)히 적은 것은 백제시대(百濟時代) 이래(以來) 아국(我國)의 조선기술(造船技術)이 우수(優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려(高麗)는 백여년(百餘年)동안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는 사이에 나라 정치(政治)는 전(專)혀 원(元)나라의 의사(意思)에 의하여 행(行)하여졌다. 충렬왕(忠烈王)이후(以後)로는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의 공주(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원(元)나라 임금의 사위가 되고 그 공주(公主)가 낳은 아들이 왕위(王位)에 오르게되니 고려(高麗)왕실(王室)은 혈통적(血統的)으로도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게 되었고 임금의 시호(諡號)는 종전(從前)의 종자(宗字)를 폐(廢)하고 그 머리에 충자(忠字)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 대도(大都)에 별저(別邸)를 두고 거기 내왕(來往)이 잦으니 그 비용(費用)도 적지 아니하여 국가(國家)재정(財政)이 극(極)히 곤란(困難)하였지만 정치(政治)의 명령계통(命令系統)이 헝클어져서 본국(本國)에서 발(發)한 명령(命令)이 원(元)나라 대도(大都)로부터 저지(沮止) 당(當)하는 일도 있고 원(元)나라에 아부(阿附)하여 권세(權勢)를 얻으려 하여 본국(本國)을 무함(誣陷)하는 폐주견(吠主犬)들이 양국(兩國)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면서 정부(政府)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정령(政令)을 발(發)하는 일도 있어 나라 기강(紀綱)이 여지(餘地)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폐주견(吠主犬)들은 심지어(甚至於) 본국(本國)의 국호(國號)를 폐(廢)하고 원(元)나라의 일지방(一地方)으로 만들자는 운동(運動)까지 일어나니 충선왕(忠宣王)은 체읍(涕泣)하면서 사백년(四百年)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이 나의 몸에 이르러 떨어지게 되니 어찌 통심(痛心)한 일이 아니랴하고 이제현(李濟賢) 등(等)으로 더불어 원(元)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겨우 무사(無事)함을 얻은 일도 있었다.

이때 왕실(王室)로부터 민간(民間)에 이르기까지 원(元)나라 풍습(風習)이 흘러 들어오고 한편(便)으로는 문화(文化)의 수입(輸入)도 활발(活潑)하여 안향(安珦)이 孔子의 도상(圖像)과 유교의식(儒敎儀式)을 중국(中國)으로부터 직접(直接) 가져 온 것도 이때의 일이오 충선왕(忠宣王)은 원(元)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이루고 조맹부(趙孟頫)등(等) 대학자(大學者)들과 사귀어 한때 대륙(大陸)문화(文化)의 중심(中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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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문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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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政治)의 문란(紊亂)

 

고려(高麗)는 농업(農業)으로써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삼았음으로 토지생산(土地生産)은 국민생활(國民生活)의 기초(基礎)가 되고 국가재정(國家財政)의 지주(支柱)가 되고 호구(戶口)의 정비(整備) 군사(軍士)의 징발(徵發) 등(等)이 모두 토지(土地)의 수수제도(授受制度)로부터 출발(出發)하였으니 국가(國家)의 흥폐(興廢), 정치(政治)의 선부(善否)가 모두 토지제도(土地制度)의 여하(如何)에 달려 있었다. 몽고란(蒙古亂) 이후(以後)로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헝클어짐을 따라 가장 먼저 폐해(弊害)를 생(生)한 것이 토지제도(土地制度)였다.

처음에 관리(官吏)의 봉급(俸給)으로써 농민(農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의 수조권(收租權)을 준 것은 다만 현물(現物) 운반(運搬)의 불편(不便)을 덜기 위(爲)한 방편(方便)에 불과(不過)한 것이오 그 관리(官吏)에게 토지(土地)를 준 것은 아니오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관리(官吏)와 농민(農民)과의 사이에 신분적(身分的)으로 노주관계(奴主關係)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토지(土地) 생산물(生産物)의 십분일(十分一)을 관리(官吏)에게 주면서도 부역(賦役)이나 호세(戶稅)는 국가(國家)에 바친 것이니 이것은 다른 나라의 봉건사회(封建社會)의 농노제(農奴制)와는 그 성질(性質)이 전연(全然) 다르다.

그런데 국가(國家)의 질서(秩序)가 한번 헝클어지자 권신(權臣) 귀족(貴族) 토호(土豪)들은 그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농민(農民)에 대(對)하여 국가(國家)의 호구장(戶口帳)에서 삭거(削去)하고 국가(國家)에 바쳐야 할 부역(賦役)과 호세(戶稅)를 자기(自己)가 사취(私取)하니 국가(國家)의 공민(公民)의 수(數)는 날로 줄어들고 이 까닭에 호적(戶籍)이 헝클어지고 또 토지수수법(土地授受法)이 제대로 실행(實行)되지 못함으로 인(因)하여 병역(兵役)을 부담(負擔)할 장정(壯丁)의 수(數)도 알 수 없이 되었다.

한편(便)으로 간인(奸人)의 무리가 함부로 농간(弄奸)을 하여 일찍 관리(官吏)가 병정(兵丁)을 들어간 일이 없이 전시과(田柴科)의 토지를 도적(盜賊)해 먹으며 아비는 공전(公田)을 사사(私私)로이 아들에게 세습(世襲)시키고 아들은 이를 은익(隱匿)하여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니 고려(高麗) 토지(土地) 一百七十餘萬結 中에서 國家의 土地帳에 남아있는 土地가 七八十萬結 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 農民 한 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에 대하여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있다고 자칭(自稱)하는 자가 六七人에 달(達)하는 일도 있어 어느 사람이 국가(國家)에서 인정(認定)한 수조권(收租權)자인지 알 수 없고 이 까닭에 농민(農民)이 지은 일년(一年) 농사(農事)는 모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전수(公田數)가 줄어들고 국가(國家)에 들어가는 전조(田租)가 또한 중간(中間)에서 횡령(橫領)되어 국가재정(國家財政)은 말할 수 없이 군색(窘塞)하였고 혹(或) 현상(賢相)이 들어 있어 이 폐해(弊害)를 그치려하되 반근착절(盤根錯節)한 권신(權臣)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농민(農民)들은 하루바삐 정국(政局)에 대변동(大變動)이 생겨서 새로운 정치(政治)가 나오기를 갈망(渴望)하였다.

세상(世上)일이 이와 같이되니 관리(官吏)의 부패(腐敗)는 극도(極度)에 달(達)하여 민재(民財)를 빼앗아 먹기를 항다반사(恒茶飯事)로 하니 이때의 사관(史官)들은 이를 평(評)하여 말하되 응견(鷹犬)을 치토(雉兎)의 장(場)에 방(放)함과 같다고 하였다.

고려(高麗)문화(文化)에 중심(中心)이 되고 있는 불교(佛敎)에도 폐해(弊害)가 생(生)하여 승려(僧侶)들은 특권(特權)을 믿고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마음대로 하고 사찰(寺刹)에서 음범(淫犯)을 행(行)하는 일도 적지 아니하여 정계(政界)와 함께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불만(不滿)을 가진 유신중(儒臣中)에는 불교(佛敎)를 배척(排斥)하는 소리가 점점(漸漸) 높아지고 유교(儒敎) 장려(獎勵)의 선진(先陣)에 나선자(者)가 안향(安珦)이다. 안향(安珦)는 中國으로 부터 孔子圖像과 유교(儒敎)의 모든 의식(儀式)을 전(傳)해오고 또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 즉(卽) 성리학(性理學)을 가져와서 후진(後進)을 가르치니 이것이 우리 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이 뿌리를 뻗은 시초(始初)이오 이어서 이색(李穡)(호(號) 목은(牧隱)) 정몽주(鄭夢周)(호(號) 포은(圃隱)) 같은 대유(大儒)를 생(生)하니 당시(當時) 정몽주(鄭夢周)는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조(祖)라 칭(稱)하였고 이 연원(淵源)이 이조(李朝)에 흘러 내려가서 성리학(性理學)의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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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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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外國)관계(關係)

 

원(元)나라가 아세아(亞細亞) 대륙(大陸)에 대제국(大帝國)을 건설(建設)한지 八九十年에 차츰 그 힘이 기우러져서 사방(四方)에 도적(盜賊)이 일어나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는 형편(形便)이라 공민왕(恭愍王)은 세자(世子)때에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이러한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이 기회(機會)에 원(元)나라 세력(勢力)을 물리치기로 하고 왕(王)의 오년(五年)(단기 삼육팔구년)에 원(元)나라에서 고려(高麗)에 설치(設置)하여둔 정동행자(征東行者)를 파(罷)하고 전일(前日)에 원(元)나라에게 빼앗긴 동북면(東北面)의 땅과 나아가서는 요동(遼東) 등지(等地)를 도로 찾으려하여 인당(印璫)으로 하여금 압록강(鴨綠江)저편(便)의 팔참(八站)을 치고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동북면(東北面)의 쌍성(雙城) 이북(以北)을 수복(收復)하게 하니 이것은 오랜 동안 북방(北方) 민족(民族)에게 눌려서 피어나지 못하던 대고구려주의(大高句麗主義)가 다시 한번 광채(光彩)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때에 원(元)나라의 홍두적(紅頭賊)이란 도적(盜賊)의 무리 십여만명(十餘萬名)이 우리 나라에 근거(根據)를 잡으려 하여 쳐들어 왔다. 고려(高麗)로서는 뜻밖의 일이오 도적(盜賊)의 기세(氣勢)는 매우 사나웠음으로 왕(王)은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등지(等地)로 피난(避難)하니 적(賊)이 송경(松京)을 함락(陷落)시켜서 궁궐(宮闕)과 모든 재보(財寶) 문헌(文獻)이 탕진(蕩盡)하였다. 수일(數日)후(後)에 정세운(鄭世雲)이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등(等) 삼원수(三元帥)로 더불어 겨우 쳐서 파(破)하니 적(敵)의 태평(太平)은 죽고 나머지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달아났다.

왕(王)은 기어(期於)코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려하여 이성계(李成桂)등(等)으로 하여금 요양성(遼陽城)을 쳐서 떨어뜨리고 遼東의 官民에게 榜을 내 걸어 우리의 目的은 한때 잃어버린 고지(故地)를 찾으려 함에 있다하고 타일렀다. 이는 물론(勿論) 요하(遼河)까지가 본시(本是) 우리의 지경(地境)임을 말함이겠지만 이때 형편(形便)으로도 원(元) 나라가 고려(高麗)를 누르고 국경(國境)을 南으로 뻗은 반면(反面)에 백성(百姓)들은 이 분명(分明)치 않은 지경(地境)을 믿어서 전(前)날 보다도 더 북(北)쪽으로 나갔음으로 요동(遼東) 평야(平野)에 고려(高麗)사람이 많이 살아서 요양(遼陽)에 고려군민총독부(高麗軍民總督府)가 생기더니 이때 마침 고려(高麗)의 국정(國情)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그 때문에 대륙정책(大陸政策)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나라는 북(北)으로 만주대륙(滿洲大陸)과 접(接)하고 동(東)으로 일(一) 해협(海峽)을 격(隔)하여 일본(日本)과 이웃하고 있음으로 외교관계(外交關係)와 국방(國防)관계(關係)는 항상(恒常)이 두 방면(方面)에서 생겼다.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왜구(倭寇)는 고려(高麗)를 멸망(滅亡)케 한 일인(一因)이 된 대사건(大事件)이라 원래(元來) 왜구(倭寇)는 일본(日本)사람의 해적(海賊)떼로서 고려(高麗) 중엽(中葉)부터 고려(高麗)와 송(宋)나라의 해안지방(海岸地方)을 노략(擄掠)질 하여 대대(代代)로 내려오면서 약탈(掠奪) 강도(强盜)로 업(業)을 삼는 무리들이었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이르러 왜구(倭寇)가 더욱 심(甚)하여 해안지방(海岸地方)은 물론(勿論)이오 차츰 육지(陸地)로 들어오고 또 남방(南方)을 휩쓴 뒤에 북(北)으로 뻗어서 경기도(京畿道)의 강화(江華) 풍덕(豊德)같은 서울의 지척(咫尺)에까지 미쳤다.

해안지방(海岸地方) 사람들은 안도(安堵)하고 살 수 없음으로 깊이 육지(陸地)로 들어가고 양전옥답(良田沃畓)에 갈대가 무성(茂盛)하니 우리 나라에서 가장 곡식(穀食)이 많이 나는 토지(土地)는 주(主)로 연해안(沿海岸)에 있는데 해안지방(海岸地方)에 농민(農民)이 살지 못하고 모든 토지(土地)가 황무(荒蕪)로 화(化)한 까닭에 국내(國內)의 식량(食糧)이 부족(不足)하고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이 또한 군색(窘塞)하였다.

이와 같이 왜구(倭寇)가 삼십여년(三十餘年)을 계속(繼續)하는 동안에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여러 차례로 왜구(倭寇)를 대파(大破)한 일이 있고 최무선(崔茂宣)이 원(元)나라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製造)하는 방법(方法)을 배워 아국(我國) 최초(最初)의 화기(火器)를 만들어서 전라도(全羅道) 진포(鎭浦)에서 왜구(倭寇)의 배 삼백척(三百隻)을 단번(單番)에 무찌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왜구(倭寇)의 기세(氣勢)는 좀처럼 줄어들지 아니하고 우왕(禑王)때에는 왕도(王都)를 깊은 육지(陸地)로 옮기자는 議論도 일어나고 정몽주(鄭夢周)를 일본(日本)에 보내어 왜구(倭寇)를 금(禁)해 달라고 청(請)한 일도 있었으며 임진강(臨津江) 어구(於口)로부터 남안(南岸)을 거쳐 멀리 동해안(東海岸)의 함주(咸州) 해안(海岸)에 이르기까지 연장(延長) 四千里의 땅이 모두 왜구(倭寇)의 난무(亂舞)장(場)이 되었고 어떤 곳에는 연작(鷰雀)이 임목(林木)에 귀소(歸巢)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왜구중(倭寇中)에는 일본(日本) 해적(海賊)만 있는 것이 아니오 고려(高麗)사람으로서 지방관리(地方官吏)에게 불만(不滿)을 품은 자(者)와 생활(生活)이 곤난(困難)한 자(者)가 왜구(倭寇)노릇을 하는 가(假) 왜구(倭寇)도 적지 아니하여 방비(防備)가 허소(虛疎)한 곳에는 반드시 왜구(倭寇)가 출몰(出沒)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왜구(倭寇)의 대부대(大部隊)가 전라도(全羅道) 운봉(雲峰)으로 모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부하장(部下將) 동두란(佟豆蘭)과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황산(荒山) 서북(西北)에서 크게 싸워서 왜구(倭寇)의 아지발도(阿只拔都) 대장(大將)을 죽이고 그 무리를 쳐 없애니 이로부터 왜구(倭寇)의 기세(氣勢)가 꺾이어서 다시 전일(前日)과 같이 횡행(橫行)하지 못하였고 이성계(李成桂)가 개선(凱旋)하는 대로(大路)변(變)에는 백성(百姓)들이 모여 나와서 환영(歡迎)하고 최영(崔瑩)은 이성계(李成桂)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공(功)을 칭사(稱謝)하니 이에 이성계(李成桂)의 위망(威望)이 일세(一世)를 덮어서 후일(後日) 혁명(革命)의 기지(基地)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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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멸망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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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 멸망(滅亡)

 

공민왕(恭愍王) 말년(末年)에 원(元)나라가 북(北)으로 쫓겨가고 명(明)나라가 중원(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단기 삼천칠백일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대륙(大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두 가지 의견(意見)이 대립(對立)되었다. 최영(崔瑩)은 오래 동안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원(元)나라와 명(明)나라의 현(現) 세력(勢力)이 아직 정(定)해진 것이 아니니 우리는 원(元)나라와 사귀고 명(明)나라를 누르면서 이 기회(機會)에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여 국세(國勢)를 다시 한번 떨쳐보자 하고 이성계(李成桂)는 명(明)나라가 이미 중원(中原)을 차지하였으니 우리는 천하(天下)의 대세(大勢)에 어김없이 원(元)나라에 대(對)하던 태도(態度)로써 명(明)나라를 대(對)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主張)하니 이것이 소위(所謂)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와의 대립(對立)이다. 그러던 차(次)에 명(明)나라는 차츰 요동(遼東)을 평정(平定)하고 우왕(禑王) 십사년(十四年)에 이르러서는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 장차(將次) 압록강(鴨綠江)이쪽의 땅을 빼앗으려 하니 최영(崔瑩)이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하여 명(明)나라를 치기로 결정(決定)하니 이성계(李成桂)는 여러 번 왕(王)에게 글을 올려 반대(反對)하였다.

최영(崔瑩)은 조금도 북벌(北伐)계획(計劃)을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王)과 함께 서경(西京)으로 나가서 조민수(曹敏修)와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군사(軍士) 오만(五萬)을 거느리고 가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이성계(李成桂)에게 대군(大軍)을 주어서 그 계획(計劃)을 실현(實現)하려 한 것이 최영(崔瑩)의 일대실책(一大失策)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서 위화도(威化島) (을혜섬)에 머무는 차에 조민수(曹敏修)를 달래어 장마철에 많은 군사(軍士)가 강(江)을 건너가기 어렵고 또 명(明)나라는 새로 일어나서 그 강대(强大)한 기세(氣勢)를 대적(對敵)하기가 쉽지 아니하니 여기서 회군(回軍)하는 것이 옳다하고 풍우(風雨)같이 서경(西京)을 향(向)하여 행진(行進)하니 이것은 분명(分明)히 왕명(王命)을 거역(拒逆)하는 일이라 군사중(軍士中)에서는 벌써 목(木)자(子) 득국(得國)이라는 요언(謠言)이 성행(盛行)하고 최영(崔瑩)은 왕(王)과 함께 형세(形勢)가 이미 틀리고 이성계(李成桂)의 손에 잡혀 죽으니 국인(國人)이 최영(崔瑩)의 죽음을 듣고 도하(都下)가 모두 철시(撤市)하여 조(弔)하고 원근(遠近)의 남녀노소(男女老少) 없이 모두 서로 붙들고 울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의 아들을 세우니 이가 창왕(昌王)이다. 이로부터 이성계(李成桂)가 권세(權勢)를 한 손에 잡고 안으로는 그의 반대파(反對派)를 몰아내고 밖으로는 명(明)나라와 친(親)하여 고려(高麗)의 운명(運命)은 이미 조석(朝夕)으로 보전(保全)하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 공민왕(恭愍王)때에 승(僧) 신돈(辛旽)을 써서 국정(國政)을 맡겼다가 실정(失政)을 보고 신돈(辛旽)을 죽였는데 우왕(禑王)은 혹(或)은 공민왕(恭愍王)의 아들이라 하고 혹(或)은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왕실(王室)을 중심(中心)으로 기괴(奇怪)한 풍설(風說)이 크게 유행(流行)하니 우왕(禑王)을 왕대(王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왕대(王代) 조정(朝廷)을 지지(支持)하려는 사람이오 신대(辛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이성계(李成桂)를 중심(中心)으로 한 혁명파(革命派)이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을 신대(辛代)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그 아들 창왕(昌王) 또한 신대(辛代)의 혈통(血統)이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왕대(王代)중에서 가장 암약(暗弱)한 공양왕(恭讓王)을 세우니 이때로부터는 이미 이성계(李成桂)의 천하(天下)가 되고 만 것이다.

고려(高麗)의 전제(田制)는 문란(紊亂)할대로 문란(紊亂)하여 이를 사무적(事務的)으로 바로잡을 수 는 없었다. 이에 조준(趙浚) 등(等)이 사전(私田) 개혁(改革)을 주장(主張)하여 훈신(勳臣) 귀족(貴族)들의 맹렬(猛烈)한 반대(反對)가 있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이 이를 지지(支持)하여 고려(高麗)가 망(亡)하기 전(前)해인 공양왕(恭讓王) 삼년(三年)에 옛날의 과전제(科田制)를 부활(復活)하는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斷行)하고 사전(私田) 문권(文券)을 서울의 한 복판에 쌓아 놓고 만민(萬民) 환시중(環視中)에 불살라 버리니 이로써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은 농민(農民)들의 환영(歡迎)을 받고, 한편(便) 묵은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을 무너뜨리어 세력(勢力)은 더욱 커지고 또 국가(國家)의 재원(財源)을 넉넉하게 하여 이씨조선(李氏朝鮮) 건국(建國)의 경제적(經濟的) 기초(基礎)를 삼았다.

우리 나라 의복(衣服) 자료(資料)는 마포(麻布)가 가장 주(主)되고 그밖에 중국(中國)으로부터 수입(輸入)되는 면포(綿布) 등(等)이 있고 농촌(農村)의 세민층(細民層)은 구피(狗皮)를 입는 자(者)도 적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중(中) 공민왕(恭愍王)때에 문익점(文益漸)이 중국(中國)에 갔다가 교지(交趾베트남)로부터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가져오는데 이때 원(元)나라에서는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외국(外國)에 보내는 것을 엄금(嚴禁)하고 있었음으로 문익점(文益漸)은 필관(筆管)속에 비밀(秘密)히 넣어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우리 나라 면화(棉花) 재배(栽培)의 시초(始初)이며 고려(高麗)가 망(亡)할 무렵에 전국(全國)에 퍼져서 우리 나라 의복계(衣服界)에 일(一) 신기원(新紀元)을 그었던 것이다.

고려(高麗)의 왕실(王室)을 지켜가고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을 눌러 보려고 하는 사람들 중(中)에 그 중심(中心) 인물(人物)은 정몽주(鄭夢周)였다. 그러나 정몽주(鄭夢周)는 일개(一個) 문신(文臣)이라 아무 무력적(武力的) 실력(實力)이 없더니 공양왕(恭讓王) 사년(四年)에 이성계(李成桂)가 해주(海州)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상(傷)하였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이를 기회(機會)로 이성계(李成桂)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송경(松京)에 돌아오고 그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자객(刺客) 조영규(趙英珪)를 보내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鄭夢周)를 처 죽였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고려(高麗)의 운명(運命)도 이와 함께 다 하였다. 그해 칠월(七月)에 이성계(李成桂)는 공양왕(恭讓王)을 폐(廢)하여 원주(原州)로 내치고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이태조(李太祖)이오 (단기 삼천칠백이십오년) 임신(壬申) 고려는 삼십사왕(三十四王) 四百七十五年으로 끝마쳤다.

高麗時代는 三國時代의 무용(武勇)의 유풍(遺風)이 있어 능(能)히 계단(契丹) 몽고(蒙古) 홍건적(紅巾賊) 왜구(倭寇)와 같은 대적(大敵)을 막아 싸우니 당시(當時)의 유물(遺物)로서 건축(建築)에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조각(彫刻)에 은진(恩津)의 미륵불(彌勒佛) 등(等)은 미술(美術)로도 유명(有名)하거니와 그 굳세고 힘찬 모습은 그때 사람의 기질(氣質)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엽(末葉)에 이르러 종래(從來)에 국난(國難)이 있을 때는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진(陣)의 선두(先頭)에 나서던 진실(眞實)한 풍(風)이 없어지고 세력(勢力)이 있는 자(者)들이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하는 풍(風)이 생(生)하니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에 유학(儒學)을 배우는 학생(學生)들이 우리는 공자묘(孔子廟)를 지키는 유생(儒生)들이니 전쟁(戰爭)에 나갈 수 없다고 정부(政府)에 청원(請願)한바 그때 정승(政丞) 염제신(廉悌臣)이 엄책(嚴責)하여 왈(曰) 국난(國難)이 있을 때에 귀족(貴族)자제(子弟)들이 먼저 칼을 잡고 나가는 것은 조종(祖宗) 이래(以來)의 상규(常規)라 너희들이 공자묘(孔子廟)를 빙자(憑藉)하는 것은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함이라 너희들이 지키지 아니하면 공자묘(孔子廟)가 어디로 도망(逃亡)가느냐 하고 일제(一齊)히 전쟁(戰爭)에 내어 보낸 일이 있으니 이것이 고려(高麗)사람의 기질(氣質)의 변함이오 이 변화(變化)한 기질(氣質)이 이조(李朝)에 상속(相續) 되었다.

고려사회(高麗社會)의 부패(腐敗)는 혁명(革命)을 불렀고 혁명(革命)은 사회발전(社會發展) 과정(科程)에 있어서 일대(一大) 청신제(淸新劑)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는 공민왕(恭愍王) 삼년(三年)에 이미 전제(田制)를 개혁(改革)한 뒤에 자기(自己)가 국왕(國王)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정치개혁(政治改革)에 대(對)한 주장(主張)을 내 세운 것이 없고 다만 왕대(王代) 사직(社稷)을 빼앗으려는 권력(權力) 다툼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조신중(朝臣中)에는 이성계(李成桂)의 혁명(革命)에 대(對)하여 강렬(强烈)한 반대(反對)를 한 자(者)가 적지 아니하고 그 중(中)에는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에 숨어서 일생(一生)을 이씨(李氏)의 앞에 무릎을 굴(屈)치 안한 자(者) 있으니 이를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한다.

칠십이현(七十二賢)과 그 자손(子孫)들은 이씨(李氏)에 복(服)하지 아니하고 혹(或)은 유기(柳器) 피혁장(皮革匠)등 천업(賤業)을 하는 자(者)도 있고 혹(或)은 상업(商業)에 몸을 던져 송경(松京)과 연안(延安) 배천(白川)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는 자(者)도 있었으니 지금의 개성(開城) 사람의 상업술(商業術)이 일국(一國)에 유명(有名)하고 개성상업부기(開城商業簿記)가 서양식(西洋式) 부기(簿記)와 병칭(倂稱)되고 있는 것은 당시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의 창안(創案)으로 된 까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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