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에 해당되는 글 54건

  1. 2013.09.01 영정의 문화 (삼화선생 서당국사)
  2. 2013.09.01 세도정치 (삼화선생 서당국사)
  3. 2013.09.01 홍경래란과 민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4. 2013.09.01 북간도 이주 (삼화선생 서당국사)
  5. 2013.09.01 개국시대 (삼화선생 서당국사)
  6. 2013.08.31 임오군란 갑신정변 (삼화선생 서당국사)
  7. 2013.08.31 일본의 침략 (삼화선생 서당국사)
  8. 2013.08.31 민중운동 (삼화선생 서당국사)
  9. 2013.08.31 기미독립선언서 (삼화선생 서당국사)

영정의 문화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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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英) 정(正)의 문화(文化)

 

실학(實學)이 한번 일어난 후(後)로 이 방면(方面)에 뜻을 두는 학자(學者)가 많고 또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글을 편찬(編纂)하고 민간(民間)에서는 역사(歷史) 지리(地理) 정치(政治) 경제(經濟) 실업(實業) 산학(算學) 의학(醫學) 실학(實學)에 대(對)한 연구(硏究)와 저술(著述)이 성(盛)해서 그 문운(文運)의 발달(發達)은 세종(世宗)때에 필적(匹敵)할만 하였다. 또 전(前)부터 천주교(天主敎)가 들어오고 있던 중(中) 정조(正祖)때에는 이승훈(李承薰)이 북경(北京)으로부터 천주교(天主敎)에 관(關)한 책(冊)을 가져와서 청년학자(靑年學者)들끼리 나누어 읽음에 그 교세(敎勢)가 크게 떨쳐서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도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제사(祭祀)를 폐(廢)하고 이 교(敎)를 신앙(信仰)하는 자(者)가 많으며 특(特)히 황해(黃海) 강원(江原) 경기(京畿) 충청(忠淸)의 각도(各道)에 성행(盛行)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천주교(天主敎)가 제사(祭祀)를 폐(廢)하는 까닭으로 이를 사교(邪敎)라 하여 금령(禁令)을 내리고 또 근원(根源)을 막는다하여 북경(北京)으로부터 모든 서적(書籍)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교세(敎勢)는 비밀리(秘密裏)에 더욱 넓어지고 소주(蘇州)(강소성)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비밀리(秘密裏) 입국(入國)하여 더욱 전도(傳道)에 힘썼다.

남인(南人)들은 숙종(肅宗) 말(末)로부터 정권(政權)에서 멀어짐에 그 힘을 학문(學問)에 기울여서 청(淸)나라의 고증학(考證學)을 받아드린 것도 남인(南人)이었고 또 천주학(天主學)이라는 새 지식(知識)에 대(對)하여 서로 그들은 특별(特別)한 관심(關心)을 가지고 남인(南人)으로서 천주교(天主敎)를 믿는 사람이 많았으니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이학규(李學逵) 정약종(鄭若鍾) 정약용(鄭若鏞) 같은 일대(一代)의 명사(名士)가 모두 진실(眞實)한 신도(信徒)였고 특(特)히 정약용(鄭若鏞)(다산(茶山))은 실학파(實學派) 가운데서 가장 특출(特出)한 학자(學者)이었다.

원래(元來) 천주교(天主敎)에서 제사(祭祀)를 제사(祭祀)를 지내지 말라함이 국속(國俗)에 어그러지기 때문에 나라에서 이를 사교(邪敎) 또는 좌도(左道)라 하여 금지(禁止)함이러니 정권(政權)다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비(非) 천주교인파(天主敎人派)가 천주교인(天主敎人)인 반대파(反對派)를 넘어뜨리려는 죄목(罪目)으로 이를 이용(利用)함에 미쳐 천주교(天主敎)에 대(對)한 박해(迫害)가 정조(正祖) 십오년(十五年) 이후(以後)로 여러 번 일어났다. 그러나 정조(正祖)때는 남인(南人) 채제공(蔡濟恭)(번암(樊巖))이 오랫동안 정승(政丞)으로 있으면서 이들을 옹호(擁護)하여 될 수 있도록 일이 없이 하였으나 정조(正祖)의 다음 임금 순조(純祖)가 즉위(卽位)함에 원년(元年)에 서교(西敎)의 옥(獄)을 일으켜서 다수(多數)한 교도(敎徒)가 잡혀 죽었다. 그러나 금령(禁令)이 엄(嚴)할수록 비밀리(秘密裏)에 더욱 퍼졌다. 천주교(天主敎)는 가깝게는 북경(北京)과 멀리는 서양(西洋)에 연결(連結)을 가졌음으로 세계(世界)의 새 소식(消息)과 학술(學術)이 이 길로 말미암아 들어오는 것이 많았으니 영국(英國)에서 발명(發明)된 수두법(手痘法)이 정약용(鄭若鏞)으로 말미암아 전래(傳來)한 것이 그 일례(一例)이오 후일(後日)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지구도(地球圖)같은 것도 천주교(天主敎)를 통(通)하여 서양학술(西洋學術)의 영향(影響)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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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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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勢道)정치(政治)

 

세도(勢道)라 함은 본시(本是) 왕(王)과 신하(臣下)들 사이를 주선(周旋)하는 소임(所任)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다. 모든 정치(政治)가 그의 손을 거치게 됨으로 스스로 세력(勢力)을 잡게된 것이다. 정조(正祖)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에 세손(世孫)을 해(害)하려 함으로 홍국영(洪國榮)이 세손(世孫)을 극진(極盡)히 보호(保護)하여 겨우 무사(無事)함을 얻고 및 즉위(卽位)한 뒤에 홍국영(洪國榮)으로써 숙위대장(宿衛大將)을 삼으니 궁중(宮中)을 지키면서 부터 소위(所謂) 세도(勢道)가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은 횡포(橫暴)한 일이 많음으로 미구(未久)에 물러나더니 정조(正祖)의 뒤를 이은 순조(純祖)가 왕(王)이 되니 때에 나이 십일세(十一歲)이었다. 그래서 영조(英祖)의 후인(后人) 안동(安東) 김씨(金氏)가 대신(代身) 국사(國事)를 처리(處理)하고 그 본가편(本家便)의 김조순(金祖淳)이 실권(實權)을 잡으니 세상(世上)에서 이 정치(政治) 형태(形態)를 안동(安東) 김씨(金氏) 세도(勢道)라고 칭(稱)하고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삼대(三代)가 모두 안동(安東) 김씨(金氏)에게 장가를 들어서 이 뒤 육십년(六十年)동안에 김씨(金氏)가 외척(外戚)으로써 세도(勢道)를 잡고 나가니 이것이 척리파(戚里派)의 완전(完全)한 재(再)등장(登場)이다.

세도(勢道)정치(政治)가 벌어진 후(後)로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풍습(風習)이 날로 심(甚)하고 관직(官職)을 매득(買得)한 무리들은 백성(百姓)들을 토색(討索)하여 재산(財産)을 잡으려하고 한 편(便) 서원(書院)을 중심(中心)으로 한 양반들이 무고(無辜)한 백성(百姓)들을 잡아다가 억울(抑鬱)한 죄(罪)를 얽어서 재물(財物)을 함부로 빼앗고 군현(郡縣)의 이속(吏屬)들이 여러 가지 농간(弄奸)으로 민재(民財)를 착취(搾取)하니 백성(百姓)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도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음으로 힘써 일할 생각이 나지 아니하여 모든 산업(産業)이 위축(萎縮)하니 평안지방(平安地方) 같은 곳은 고래(古來)로 율목(栗木) 재배(栽培)가 성행(盛行)하여 율산(栗産)이 전국(全國)에 유명(有名)하더니 율목(栗木)이 있는 까닭으로 전일(前日) 남(南)쪽 지방(地方)에서 고구마 재배(栽培)로 인(因)하여 파산(破産)하는 일이 있음과 같은 억울(抑鬱)한 사정(事情)이 도처(到處)에 생겼음으로 일제(一齊)히 율목(栗木)을 베어버린 일도 있었다.

이조(李朝)의 정치(政治)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삼정(三政)이라 하니 이는 국가(國家) 정치(政治)에 가장 근본(根本)이 되는 재정(財政)문제(問題)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전정(田政)이라 함은 토지(土地)의 소출(所出)을 근거(根據)로 하여 받는 세납(稅納)이오 군정(軍政)이라 함은 군포(軍布)이오 환곡(還穀)이라 함은 춘궁기(春窮期)에 가난한 백성(百姓)들에게 곡식(穀食)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얼마쯤의 이식(利息)을 붙여서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고구려(高句麗) 시대(時代)의 진대(賑貸)의 진대법(賑貸法)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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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란과 민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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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洪景來) 난(亂)과 민란(民亂)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생긴 뒤로 삼정(三政)이 어지러워서 백성(百姓)이 살수가 없고 흉년(凶年)이 자주 들고 천재지변(天災地變)이 그치지 아니하여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 정조(正祖)때에 평안도(平安道) 유생(儒生)들이 서북(西北)사람을 몹시 차별(差別)한다는 이유(理由)로 과거(科擧)의 시험장(試驗場)에 들어감을 거부(拒否)한 일이 있는데 정조(正祖)는 조그마한 천민(賤民)들이 감(敢)히 왕명(王命)을 거역(拒逆)한다 하여 크게 노(怒)하여 그 수모자(首謀者)를 귀양보내고 그 외(外)는 모두 다시 과거(科擧)를 보지 못하게 하니 평안도(平安道) 인심(人心)이 극도(極度)로 분개(憤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中) 용강(龍岡)사람 홍경래(洪景來)가 벼슬을 구(求)하러 서울에 왔다가 조정(朝廷)의 처사(處事)가 탁란(濁亂)함을 보고 혁명(革命)의 뜻을 품고 순조(純祖) 십일년(十一年) 신미(辛未)에 우군칙(禹君則) 등(等)으로 더불어 가산(嘉山) 다복동(多福洞)에서 난리(亂離)를 일으켜 스스로 평서(平西) 대원수(大元帥)가 되고 격서(檄書)를 관서(關西) 일대(一帶)에 전(傳)하되 「관서(關西)는 단기(檀箕)의 구역(舊域)으로 문물(文物)이 환랑(煥朗)하며 왜호(倭胡)의 양난(兩難)에 효충(效忠)이 크거늘 조정(朝廷)이 서토(西土)를 경시(輕視)함은 하고(何故)오 더욱 방금(方今)에 유왕(幼王)이 상(上)에 있고 권간(權奸)이 날로 늘어서 김조순(金祖淳) 박종경(朴宗慶)의 무리가 국병(國柄)을 절롱(竊弄)하여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비는 틈이 없고 생민(生民)이 도탄(塗炭)하여 전두(前頭)가 불측(不測)하니 마땅히 이때로서 서인(西人)이 분기(奮起)하여 국내(國內)를 징청(澄淸)할 것이다.」하고 각(各) 고을을 치니 청천강(淸川江) 이북(以北)의 여러 고을이 이에 호응(呼應)하여 그 기세(氣勢)가 크게 떨치고 수령(守令) 중(中)에도 홍군(洪軍)에 항복(降服)한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저 유명(有名)한 김삿갓(입(笠) 이름 환연(煥淵))은 이때 조부(祖父) 김익순(金益淳)이 수령(守令)으로서 홍군(洪軍)에 항복(降服)하여 역적(逆賊)이 되었음으로 역적(逆賊)의 손자(孫子)로써 법망(法網)을 피(避)하여 삿갓을 쓰고 숨어 다닌 사람이다.

이 해 십이월(十二月)에 홍경래(洪景來)는 청천강(淸川江)을 도수(渡水)하여 남진(南進)하려 하더니 일야간(一夜間)에 비가 와서 얼음이 풀렸음으로 강(江)을 건너지 못하고 정주성(定州城)을 웅거(雄據)하고 관군(官軍)과 항전(抗戰)하였다. 이때는 오랫동안 승평(昇平)이 계속(繼續)하여 백성(百姓)들이 병사(兵事)를 알지 못하는지라 관군(官軍)이 비록 홍군(洪軍)을 치고 있으나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사기(士氣)가 떨치지 못하더니 상지(相持)한지 넉 달만에 임신년(壬申年) 사월(四月)에 관군(官軍)이 성외(城外)에 굴(窟)을 파고 화약(火藥)을 터뜨려서 겨우 성(城)이 함락(陷落)하였다. 홍경래(洪景來)는 「事已至此無可奈何」라하고 城을 넘어 도주(逃走)하여 그 종적(蹤迹)을 알지 못하였다.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 일어나기 전(前)에 이미 각지방(各地方)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났으니 민란(民亂)이라 함은 대개 수령(守令)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못 견디어 민중(民衆) 속에서 지휘자(指揮者)를 정(定)하고 난(亂)을 일으켜 수령(守令)을 몰아내는 것인데 수령(守令)을 죽이는 일은 극(極)히 적고 대부분(大部分)은 버들 광주리에 담아서 군경(群境)밖에 내어쫓는 것이다. 그럼으로 민란(民亂)은 혁명(革命)이 아니니 당시(當時)의 민란(民亂)은 귀족사회(貴族社會)의 영원성(永遠性)을 시인(是認) 하면서 다만 그때 그때의 불평(不平) 때문에 일어나는 소요(騷擾)이오 또 학정(虐政)을 하는 수령(守令)을 쫓아내면 그 목적(目的)이 달성(達成)되는 것이다. 지금 세상(世上)에 행(行)하는 춘향전(春香傳)은 정조(正祖) 시대(時代)의 전후(前後)에 지은 소설(小說)이라 하는데 그 글 속에 전라도(全羅道) 오십삼주(五十三州)의 머슴들이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짚둥우리에 담아서 경외(境外)에 몰아내겠다고 계획(計劃)함과 같음이 민란(民亂)의 실마리였다.

순조(純祖)의 뒤를 이은 헌종(憲宗)이 또한 나이 어리고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세도(勢道)를 잡고있어 정치(政治)가 어지럽고 각지(各地)에서 백성(百姓)의 소동(騷動)이 일어나서 조정(朝廷)에서는 이년(二年)이나 삼년(三年)에 한번씩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팔도(八道)에 보내어 민폐(民弊)를 끼치는 자(者)를 죄(罪)주는데 어사(御使)가 한번 나갔다가 돌아오면 수령(守令) 이속(吏屬) 토호(土豪)들이 죄(罪)를 받는 자(者)가 이백(二百) 혹(或)은 삼백(三百)에 가까우니 당시(當時) 지방(地方)에서 백성(百姓)을 괴롭게 하는 자(者)가 얼마나 많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사(御使)의 출도(出道)도 크게 효과(效果)를 내지 못하고 백성(百姓)의 고통(苦痛)은 여전(如前)히 심(甚)하더니 헌종(憲宗)의 다음 임금 철종(哲宗) 십삼년(十三年) 임술(壬戌)에 경상도(慶尙道) 진주(晉州)에서 백성(百姓)들이 병사(兵使)의 포학(暴虐)을 견디지 못하여 민란(民亂)을 일으켜 탐욕(貪慾)한 관리(官吏)를 몰아내고 그와 부동(附同)한 사람들을 잡아 다스리니 그 형세(形勢)가 가장 맹렬(猛烈)하였다. 이 바람이 한번 일어남에 각지(各地) 백성(百姓)들의 가슴속에 쌓이고 쌓였던 불평(不平)이 일시(一時)에 폭발(暴發)하여 경상도(慶尙道) 각지(各地)에서 불이 터지고 다음에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에 퍼졌는데 그 중(中)에 전라도(全羅道)가 우심(尤甚)하여 감사(監司)가 쫓겨나기에 이르렀고 다시 퍼져서 멀리 함경도(咸鏡道)의 함흥(咸興)과 제주도(濟州島)에까지 미치니 나라의 위신(威信)은 땅에 떨어지고 이씨(李氏) 왕조(王朝)의 몰락(沒落)이 가까워 오는 조종(弔鍾)을 울린다는 감(感)을 깊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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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이주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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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北間島) 이주(移住)

 

청국(淸國)이 중국(中國)을 통일(統一)한 후(後)에 만주(滿洲)를 통(統)히 금봉지(禁封地)로 하여 만주(滿洲)인(人) 이외(以外)의 거주(居住)를 금지(禁止)하고 더욱이 백두산(白頭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압록강(鴨綠江) 유역(流域)의 서간도(西間島)와 두만강(豆滿江) 유역(流域)의 북간도(北間島)를 청국(淸國) 시조(始祖)의 발상지(發祥地)라 하여 공광(空曠)하게 하여 아무도 인거(人居)치 못하게 하니 공지(空地)로 된지 이백년(二百年)에 산야(山野)에 수림(樹林)이 가득하여 하늘을 가리고 그 사이로 각종(各種) 짐승들이 놀고 있으며 각(各) 강변(江邊)에는 겸가(蒹葭갈대)가 무성(茂盛)하고 지중(池中)에는 사람의 식료(食料)로 되는 마름이 가득하였다. 헌종(憲宗)이후(以後)에 정치(政治)는 더욱 어지럽고 흉년(凶年)이 자주 들어서 생로(生路)를 잃은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의 백성(百姓)들은 스스로 금지(禁地)로 되어 있는 강(江) 월편(越便)의 간도(間島)에 착안(着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밀(秘密)히 강(江)을 건너서 짐승도 사냥하고 인삼(人蔘) 마름을 캐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관리(官吏)들은 타국(他國)의 금지(禁地)에 들어가면 국제문제(國際問題)가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도강(渡江)하는 자(者)를 엄벌(嚴罰)하고 한편(便)으로 서간도(西間島)의 모아산(帽兒山) 지방(地方)에 있는 만주인(滿洲人) 부락(部落)과 북간도(北間島)의 혼춘(琿春) 지방(地方)에 있는 만주인(滿洲人) 부락(部落)에서는 생활필수품(生活必需品)인 식염(食鹽) 부정(釜鼎) 기(器) 농구(農具) 축우(畜牛) 등(等)을 우리 나라로부터 가져가지 아니하면 구(求)할 길이 없는데 양국(兩國)의 정식(正式) 개시장(開市場)을 통(通)하여 매득(買得)하는 일도 있으나 그것 만으로서는 항상(恒常) 그 수요(需要)를 만족(滿足)시키지 못함으로 자연(自然)히 우리 나라 사람의 입주(入住)를 환영(歡迎)하고 우리 나라 관리(官吏)가 그곳에 가서 수색(搜索)할 때도 잘 보호(保護)하여 주었다.

철종(哲宗) 때에 이르러서는 비밀(秘密)히 입주(入住)하는 자(者)가 더욱 늘어서 겨울에 강(江)이 합빙(合氷)한 때에 이르러서는 수십호(數十戶)가 집단(集團)으로 입주(入住)하는 일도 있으며 이때 연해주(沿海州)는 본시(本是) 중국영토(中國領土)이었는데 몇 해전(前)에 아라사(俄羅斯)(러시아)에 할양(割讓)된 것이다.

아(俄)국(國)에서는 연해주(沿海州)의 광막(廣漠)한 황지(荒地)를 개척(開拓)하기 위(爲)하여 우리 나라 사람의 입주(入住)를 환영(歡迎)하고 식량(食糧)과 종자(種子)등(等)을 대어주고 있음으로 북간도(北間島)에 들어갔던 우리 백성(百姓)들은 다시 연해주(沿海州)로 전주(轉住)하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가 우리 나라 사람의 손으로서 개척(開拓)되었다는 것이다. 후일(後日) 우리 나라 사람의 이주(移住)한 수(數)가 북간도(北間島)에 사십여만(四十餘萬), 연해주(沿海州)에 이십만(二十萬)이 된 것은 모두 이때로부터 비롯한 것이며 마령서(馬鈴薯)(감자)가 북방(北方)으로부터 전(傳)하여 온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비밀(秘密)히 도강(渡江)하다가 관인(官人)에게 잡혀 죽은 사람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적지 아니하여 이러한 원사자(寃死者)의 피와 눈물이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의 개척사(開拓史)의 첫머리를 꾸민 것이오 그만치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는 우리 민족(民族)의 영원(永遠)히 잊어버리지 못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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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시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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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開國)시대(時代)

 

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의 제이자(第二子명복(命福))가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고종(高宗)이오 때에 나이 십이세(十二歲)이었다. 흥선군(興宣君)이 대원군(大院君)으로 되어 실제(實際)의 정권(政權)을 잡으며 외척(外戚)의 세도(勢道)를 막기 위(爲)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력(勢力)을 누르고 또 당파(黨派)싸움의 뿌리를 뽑기 위(爲)하여 사색(四色)을 똑같이 등용(登用)하여 계급(階級)과 지방(地方)의 차별(差別)을 없애기 위(爲)하여 평씨(平氏)와 서북(西北)사람을 불러 쓰고 당쟁(黨爭)의 근원지(根源地)가 되어 백성(百姓)을 못살게 구는 많은 서원(書院)을 없애며 군포(軍布)란 이름으로 상민(常民)이 많이 부담(負擔)하는 병역세(兵役稅)를 호포(戶布)로 고쳐서 양반계급(兩班階級)도 이를 내게 하고 부정(不正)한 관리(官吏)와 이속(吏屬)들을 처벌(處罰)하니 오랫동안 흐리고 어지럽던 정치(政治)에 새 광명(光明)의 빛이 오는 듯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은 과단성(果斷性)과 결행력(決行力)이 강(强)한 반면(反面)에 소홀(疎忽)한 처단(處斷)도 없지 아니하고 더욱이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불타버린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지으려고 백성(百姓)들의 재물(財物)과 노력을 강제(强制)로 바치게 하고 경비(經費)가 부족(不足)함에 당백전(當百錢)을 만들어 내어서 경제계(經濟界)를 어지럽게 하니 백성(百姓)들의 원성(怨聲)이 날로 높아지고 한 편(便)으로 왕대(王代)의 특권(特權)을 잃은 계급(階級)들이 대원군(大院君)을 비방(誹謗)하려는 소리도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이보다 앞서 철종(哲宗) 말년(末年)에 아라사(俄羅斯) 국(國)이 청국(淸國)으로부터 오소리강(烏蘇里江) 이동(以東)의 연해주(沿海州)를 얻어 조선(朝鮮)이 아국(俄國)으로부터 국경(國境)이 상접(相接)하게되고 고종(高宗) 즉위(卽位)의 해에 아인(俄人)이 이미 경흥(慶興)에 와서 통교(通交)를 청(請)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中)에 천주교인(天主敎人) 가운데 아국(俄國) 문제(問題)를 좋게 해결(解決)하는 대신(代身)에 천주교(天主敎) 전도(傳導)의 공인(公認)을 얻으려하여 대원군(大院君)에게 운동(運動)하는 자(者)가 있었는데 그의 행동(行動)이 대원군(大院君)의 마음을 거슬리는 점이 있었고 또 천주교도(天主敎徒)들이 외국(外國)과 연락(連絡)하여 우리 나라를 위태(危殆)롭게 할 염려(念慮)가 있다하여 고종(高宗) 삼년(三年)(단기 사천백구십구년)에 비밀(秘密)히 입국(入國)한 불란서(佛蘭西)사람 교사(敎士)들과 천주교도(天主敎徒) 수만명(數萬名)을 대학살(大虐殺)하였다. 교사(敎士) 중(中) 한사람이 빠져나가서 청국(淸國)에 있는 불란서(佛蘭西) 함대(艦隊)에 이일을 알리니 불국(佛國) 함(艦) 칠척(七隻)이 강화도(江華島)를 침범(侵犯)하다가 우리 군사(軍士)에게 패(敗)하여 물러가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고종(高宗) 오년(五年)에 미국상선(美國商船)이 평양(平壤)의 대동강(大洞江)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빠지고 양식(糧食)이 다하여 몰살(沒殺)한 일이 있었다. 청국(淸國)에 있는 미국(美國) 관리(官吏)가 오랜 뒤에 이 소문(所聞)을 듣고 고종(高宗) 팔년(八年)에 군함(軍艦) 오척(五隻)을 거느리고 강화(江華) 해협(海峽)으로 침입(侵入)하다가 우리 군사(軍士)에게 막혀서 더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가니 이를 신미양요(辛未洋擾)라 한다.

대원군(大院君)은 거듭 양요(洋擾)를 치뤘으나 번번히 쳐서 물리쳤음으로 외국(外國)의 무서운 것이 없음을 속단(速斷)하고 금교(禁敎)와 배외(排外)의 결심(決心)을 더욱 굳게 하고 서울 종로(鐘路) 네거리와 국내(國內)의 중요(重要)한 곳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니 그 글에「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이라 하였다.

일본(日本)은 덕천막부(德川幕府)의 말기(末期)에 구미(歐美)로 더불어 통상(通商)관계(關係)를 맺고 서양문화(西洋文化)를 수입(輸入)한 뒤로 우리 나라는 일본(日本)의 심사(心事)를 의심(疑心)하여 전(前)부터의 교제(交際)를 끊어버렸더니 고종(高宗) 오년(五年) 무진(戊辰)에 이른바 명치유신(明治維新)이 된 후(後)에 그 사유(事由)를 우리 나라에 통지(通知)하여 왔는데 그 문구(文句)가 전(前)과 같이 공손(恭遜)하지 아니함으로써 대원군(大院君)이 이를 받지 아니하여 양국(兩國)의 사이에 불화(不和)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中)에 대원군(大院君)은 조정(朝廷)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는데 처음에 대원군(大院君)은 외척(外戚)이 권세(權勢)를 잡고 국사(國事)를 그르치는 일이 있을까 두려하여 고종(高宗) 왕비(王妃)를 간택(揀擇)함에 있어서 일부러 아비 없는 민비(閔妃)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민비(閔妃)는 비상(非常)히 재주가 있고 정치(政治)에 욕심(慾心)이 있는지라 여러 가지 책략(策略)을 써서 대원군(大院君)이 정권(政權)을 잡은지 십년(十年)만에 마침내 이를 내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고종(高宗)에게 돌아온 정권(政權)을 자기(自己)가 대신(代身) 장악(掌握)하고 민씨(閔氏) 일파(一派)의 세력(勢力)을 늘이니 이로부터 대원군(大院君)과 그 며느리 민비(閔妃)와의 사이에 갈등(葛藤)이 생겨서 여러 가지 변(變)을 지어내었다. 대원군(大院君)이 물러나고 민비(閔妃)의 본가편(本家便)에서 세도(勢道)를 잡으면서 대외(對外) 방침(方針)이 차차(次次) 변(變)하여 가더니 고종(高宗) 십이년(十二年) 을해(乙亥)에 일본(日本) 군함(軍艦) 한 척(隻)이 강화도(江華島)앞에 들어와 서있는 것을 우리 포대(砲臺)가 이를 포격(砲擊)하니 일본(日本)이 이를 당(當)하여 사태(事態)가 험악(險惡)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진의(眞意)가 이 기회(機會)에 외교관계(外交關係)를 맺음에 있고 우리 국책(國策)도 그렇게 기우러진 때이라 다음해 병자(丙子)에 양국대표(兩國代表)가 강화(江華)에 모여서 수호조규(修好條規)를 맺으니 그 내용(內容)은 조선(朝鮮)이 자생국(自生國)으로써 일본(日本)과 평등권(平等權)을 가지고 사명(使命)을 교환(交換) 하기로 하고 부산(釜山) 밖에 또 이항(二港)을 개항(開港)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결과(結果)로 십육년(十六年) 기묘(己卯)에 일본공사(日本公使) 화방의질(花房義質)이 와서 왜관(倭館)을 열고 부산(釜山) 원산(元山) 인천(仁川)이 차례로 개항(開港) 되었다.

원래(原來) 조선(朝鮮)은 인조(仁祖) 정축(丁丑) 이후(以後)에 청국(淸國)을 종주국(宗主國)으로 하여 다공(多貢)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은 형식(形式)에 그치고 실제(實際)에 있어서는 내외(內外)의 정책(政策)을 자주(自主)하는 독립국(獨立國)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朝鮮)에 외국관계(外國關係)의 사단(事端)이 일어날 때마다 청국(淸國)은 항상(恒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조선(朝鮮)이 자주국(自主國)임을 언명(言明)하니 그럼으로 강화조약(江華條約)의 첫머리에 이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조약(條約)이 체결(締結)된 뒤에 일본(日本)의 세력(勢力)이 조선(朝鮮)에 퍼질 조짐(兆朕)이 보이므로 청국(淸國)은 전일(前日) 태도(態度)를 버리고 그 외교(外交)를 맡아보는 북양(北洋) 대신(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우리 나라를 권(勸)해서 서양(西洋)각국(各國)으로 더불어 통상(通商)을 열게 하여 십구년(十九年) 임오(壬午)에 미국(美國)과 수호통상(修好通商) 조약(條約)이 성립(成立)하고 계미년(癸未年)에 영국(英國) 덕국(德國)(독일) 갑신(甲申)년에 이태리(伊太利) 아라사(俄羅斯)와의 조약(條約)이 차례(次例)로 성립(成立)하여 아국(我國)이 완전(完全)히 국제무대(國際舞臺)위에 나서고 세계(世界) 각국(各國)의 사이에 문호(門戶)가 개방(開放)되었다.

대저(大抵) 산업(産業) 혁명(革命)으로 이미 성취(成就)한 서양사회(西洋社會)는 물자(物資) 문명(文明)이 상당(相當)히 발달(發達)하고 소위(所謂)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社會)를 만들고 그 만들어 낸 상품(商品)을 팔기 위(爲)하여 새로운 시장(市場)을 찾아내기에 눈이 붉은 때이라 우리 나라가 홀로 동북(東北) 일우(一隅)의 은토(隱土)국(國)으로서 문호(門戶)를 잠그고 있을 수 없었고 또 서양사회(西洋社會)와의 접촉(接觸)을 통(通)하여서만 그들의 새로운 물질문명(物質文明)을 받아들일 수가 있음으로 일본(日本)을 비롯한 여러 외국(外國)과 통상(通商)을 시작(始作)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여러 강국(强國)이 우리 나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 세력(勢力) 다툼을 하게 되었으니 실(實)로 고종(高宗) 병자(丙子) 이후(以後)의 우리 나라는 세계열강(世界列强)의 각축장(角逐場)으로 화(化)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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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갑신정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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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오랜 동안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깨트리고 외국(外國)과의 통상(通商)을 허(許)한 우리 나라는 비로소 세계(世界)의 정세(情勢)에 눈뜨게 되어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 신사(辛巳)에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등(等) 십수인(十數人)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 하여 일본(日本)으로 보내어 개화(開化)의 정무(政務)를 시찰(視察)케 하니 이는 우리 나라가 서양(西洋)의 신문명(新文明)에 대(對)하여 적극적(積極的)으로 관심(關心)을 표시(表示)한 시초(始初)이었다.

신사단(紳士團)이 돌아와서 임오년(壬午年)에 통리기무위문(統理機務衛門)이라는 기관(機關)을 만들어서 정치(政治)를 시행(施行)하며 또 병제(兵制)를 고치고 일본(日本) 육군(陸軍) 장교(將校)를 데려다가 신식(新式)의 군대(軍隊)를 편성(編成)하였다.

이와 동시(同時)에 모든 방면(方面)에 신구(新舊)의 대립(對立)이 생겨서 서로 비난(非難)과 공격(攻擊)을 일삼게 되니 신문화(新文化)를 받아들이자는 자(者)는 개화파(開化派)라 하고 일본(日本)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수구파(守舊派)라 지목(指目)하였는데 이들은 세계열강(世界列强)의 틈에 끼어있는 우리 나라의 새 지위(地位)를 자각(自覺)하여 국민일치(國民一致)로 자주독립(自主獨立)의 기초(基礎)를 닦는다는 것보다 개화파(開化派)는 일본(日本)을 힘입으려 하고 수구파(守舊派)는 청국(淸國)을 기대려하여 양자(兩者)가 모두 제 정신(精神)을 차리지 못하는 점(點)으로는 매 한가지오 다른 것이 없었고 이로 인(因)하여 우리 나라는 청국(淸國)과 일본(日本)이 동양(東洋)에서의 지위(地位)를 다투는 씨름판이 되었다.

군제개혁(軍制改革)과 일본(日本) 세력(勢力)의 도입(導入)은 수구파(守舊派)의 싫어 하는 바이오 또 구식(舊式) 군인(軍人)은 실직(失職)될 것을 걱정하고 있더니 임오년(壬午年)에 구식(舊式) 군인(軍人)이 오랫동안 요미(料米)를 받지 못하고 또 밀렸던 요미(料米)를 타는데 쌀에 모래가 많이 섞여서 이에 불평(不平)이 폭발(暴發)하여 한편(便)으로 퇴처(退處)하여 있는 대원군(大院君)에게 진정(陳情)을 하고 한편(便)으로 당시(當時) 정권(政權)을 잡고 탐학(貪虐) 불법(不法)으로 민렴(民斂)을 한 민씨(閔氏)를 죽이고 위해(危害)가 민비(閔妃)에게 미칠듯 함에 민비(閔妃)는 충주(忠州)로 도망(逃亡)하고 한편(便)으로 일본(日本) 공사관(公使館)을 습격(襲擊)하고 또 교사(敎師)로 와 있던 일본(日本)장교(將校)를 죽이니 일본공사(日本公使)는 스스로 사관(使舘)에 불지르고 인천(仁川)으로 가서 영국(英國) 군함(軍艦)을 얻어 타고 본국(本國)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 한다.

대원군(大院君)이 이 변보(變報)를 듣고 나와서 난(亂)을 진정(鎭定)하고 다시 정권(政權)을 잡으니 민씨(閔氏)들은 구원(救援)을 청국(淸國)에 청(請)하매 청국(淸國)에서는 이 기회(機會)를 타서 우리 나라에 세력(勢力)을 뻗치려 하여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병(兵) 삼천(三千)을 거느리고 서울로 와있게 하고 대원군(大院君)이 이번 변란(變亂)이 장본인(張本人)이라 하여 억지로 청국(淸國)으로 데려가더니 얼마후(後)에 돌려보냈다. 화방(花房)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인천(仁川)으로 와서 변란(變亂)의 책임(責任)을 물으니 조정(朝廷)에서는 배상금(賠償金) 오십만원(五十萬圓)을 내고 일본(日本) 공사관(公使館)에 호위병(護衛兵)을 두고 사신(使臣)을 일본(日本)에 보내어 진사(陳謝)의 뜻을 표(表)하는 등(等) 조건(條件)으로 조약(條約)을 맺으니 이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오 이해 팔월(八月)에 박영효(朴英孝)를 대사(大使)로 하고 김옥균(金玉均)을 부사(副使)로 일본(日本)에 보내니 이때의 승선(乘船)에 처음으로 태극기(太極旗)를 사용(使用)하였다.

박영효(朴英孝) 김옥균(金玉均) 등(等)이 일본(日本)에 가서 보고는 우리 나라 정치(政治) 개화(開化)의 시급(時急)함을 깨닫고 돌아와서 위선(爲先) 전환국(典圜局)(주전소(鑄錢所)) 기기국(機器局)(제조소(製造所)) 박문국(博文局)(인쇄소(印刷所))등(等)을 설치(設置)하고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發刊)하여 민지(民志)의 계개발(啓開發)에 힘쓰고 국정(國政) 개혁(改革)에 대(對)하여 여러 가지 포부(抱負)를 발표(發表)하니 이가 우리 나라 최초(最初)의 신문(新聞)이었다.

고종(高宗) 이십일년(二十一年) 갑신(甲申)에 청국(淸國)은 불국(佛國)과의 사이에 분쟁(紛爭)이 있었다. 그럼으로 다른 일을 돌아볼 여력(餘力)이 없는지라 개화파(開化派)에서는 이를 알고 일본(日本)의 후원(後援)을 얻어 수구파(守舊派)를 소탕(掃蕩)하여버릴 계획(計劃)을 세우고 그해 시월(十月)에 신설(新設)한 우정국(郵政局)의 개청식(開廳式)이 있음을 기회(機會)로 하여 민씨(閔氏) 일당(一黨)의 여러 요인(要人)을 죽이고 일병(日兵)을 궁중(宮中)으로 끌어들여 왕(王)을 족쳐서 개화파(開化派)의 신정부(新政府)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가 청국(淸國) 군사(軍士)를 청병(淸兵)함에 청장(淸將) 원세개(袁世凱)가 군사(軍士)를 이끌고 들어가서 일군(日軍)과 접전(接戰)하였다. 일병(日兵)이 힘이 약(弱)하여 궁중(宮中)에서 패퇴(敗退)하고 홍영식(洪英植) 등(等)은 죽고 일본공사(日本公使) 등(等)은 분격(憤激)한 민중(民衆)의 습격(襲擊)을 받으면서 서울에서 퇴거(退去)하고 박영효(朴英孝) 김옥균(金玉均)등(等)은 이틈에 끼어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하고 그 즉시(卽時)로 민씨(閔氏) 수구파(守舊派)의 정국(政局)이 다시 나타나니 이것이 갑신(甲申) 시월(十月)의 변(變)이라는 것이오 개화파(開化派)의 실패(失敗)는 내 집안 일을 남의 힘으로만 하려 한 당연(當然)한 결과(結果)이오 그 까닭에 우리 나라의 개화(開化)가 시운(時運)에 뒤진 것은 천재(千載)의 한사(恨事)이었다.

이해 십일월(十一月)에 일본(日本)에서 전권대사(全權大使) 정상성(井上聲)이 군대(軍隊)를 거느리고 와서 담변(談辨)하여 우리가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의 신축(新築)할 기지(基地)와 비용(費用)을 부담(負擔)하는 조건(條件)으로 그 전(前) 일을 결말(結末) 짓고 한편(便) 일본(日本)은 다음해 을유(乙酉)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청국(淸國)에 보내어 이홍장(李鴻章)으로 더불어 천진(天津)에서 담변(談辨)하여 양국(兩國)의 조선(朝鮮) 주둔(駐屯) 병(兵)을 사개월(四個月) 이내(以內)로 철수(撤收)할 것과 앞으로 조선(朝鮮) 사변(事變)에 있어 양국(兩國)이 군대(軍隊)를 출동(出動) 시킬 때에는 서로 통지(通知)할 것을 약정(約定)하니 이것이 소위(所謂) 천진조약(天津條約)이오 이 갑신(甲申)의 변(變)은 여러 해 동안 속으로 갈등(葛藤)되는 청(淸) 일(日) 양국(兩國)의 세력(勢力)이 표면(表面)에서 충돌(衝突)한 것이다.

천진조약(天津條約)에 의(依)하여 양국(兩國)이 모두 철병(撤兵)하였으나 청병(淸兵)의 一將 원세개(袁世凱)가 통상사무(通商事務) 전권위원(全權委員)의 명목(名目)으로써 그대로 서울에 머물면서 내정(內政)에 간섭(干涉)하고 제민(諸閔)이 그와 어우러져서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행(行)하여 국사(國事)가 더욱 글러졌다. 다만 시세(時勢)의 추이(推移)하는 바에 개화(開化)에 관(關)한 신시설(新施設)이 철종(哲宗)때에 안동김씨(安東金氏)들이 세도(勢道)하여 함부로 관직(官職)을 팔아먹고 이 관직(官職)을 산 무리들이 지방관(地方官)으로 내려와서 토색(討索)을 마음껏 하고 양반계급(兩班階級)이 서원(書院)을 소굴(巢窟)로 하여 백성(百姓)들을 괴롭게 함으로 각지(各地)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고 민심(民心)이 불안(不安)한 중(中) 경주(慶州)의 최제우(崔濟愚)(水雲)가 東學이란 새 宗敎를 일으켜서 「輔國安民 廣濟蒼生」을 敎의 主旨로하니 塗炭에 빠진 百姓들이 많이 加入하였다. 政府에서는 특권계급(特權階級)에 불평(不平)을 품은 하층계급(下層階級)의 사람들이 한 당(黨)으로 단결(團結)됨을 두려워하여 동학(東學)이 세상(世上)을 어지럽히고 민중(民衆)을 속인다는 죄명(罪名)으로 최제우(崔濟愚)를 잡아다 大邱에서 死刑하니 敎徒들은 地下로 들어가서 東學運動을 繼續하였다. 비정(秕政)에 시달리는 백성(百姓)들은 마음이 많이 이에 기우러져서 은연(隱然)히 천세력(天勢力)을 형성(形成)하더니 임진(壬辰)에 이르러 최시형(崔時亨)(해월(海月))을 중심으로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이 표면화(表面化)하여 정부(政府)에 글을 올리고 계사년(癸巳年)에는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을 중심(中心)으로 굳게 단결(團結)한 교도(敎徒)들이 경성(京城)에 올라와서 대궐(大闕) 앞에서 탄원(歎願)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시위운동(示威運動)을 감행(敢行)하였다. 이때에는 정부(政府)의 해산명령(解散命令)으로 일단(一旦) 물러났으나 한편(便) 불안(不安)한 민심(民心)을 자극(刺戟)하고 한편(便) 교세(敎勢)가 크게 떨쳐서 경상(慶尙) 전라(全羅) 충청(忠淸)의 삼남(三南)을 비롯하여 강원(江原) 황해(黃海) 평안도(平安道)에 이르기까지 동학(東學)의 운동(運動)이 급속도(急速度)로 발전(發展)하였다

이때 전라도(全羅道) 고부(古阜) 군수(郡守)가 만석보(萬石洑)(정읍)를 수리(修理)함에 있어 부정(不正)한 일이 있었음으로 민란(民亂)이 일어나더니 동학당원(東學黨員) 전봉준(全琫準)이 이를 계기(契機)로 하여 그 무리들과 함께 난리(亂離)를 일으켜서 사방(四方)이 이에 호응(呼應)하여 일어났다. 관군(官軍)이 이를 치러 갔으나 도처(到處)에서 패(敗)하고 마침내 전주(全州)가 동학당(東學黨)에게 점령(占領)되었음으로 조정(朝廷)에서 원세개(袁世凱)에게 상의(相議)한 결과(結果) 청국(淸國) 군사(軍士) 일천오백명이 와서 군사(軍士)를 도와서 겨우 난(亂)을 평정(平定)하였다. 일본(日本)은 벌써부터 한번 청국(淸國)과 싸워 대륙(大陸)에 있는 지위(地位)를 결정(決定)해 보려고 벼르는 차이라 갑오(甲午) 이월(二月)에 일본(日本)의 보호하(保護下)에 있던 김옥균(金玉均)이 상해(上海)에 갔다가 조선(朝鮮)사람 자객(刺客)에게 암살(暗殺)을 당(當)하고 국론(國論)이 일어나고 인(因)하여 청국(淸國)이 동학란(東學亂)에 일본(日本)에 통고(通告)함이 없이 조선(朝鮮)에 출병(出兵)함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위반(違反)함이라 하여 또한 유민(留民)을 보호(保護)한다는 명목(名目)으로 출병(出兵)하더니 이해 유월(六月)에 마침내 아산(牙山) 해상(海上)에서 양국(兩國)의 해군(海軍)이 충돌(衝突)하고 성환(成歡)에서 육전(陸戰)이 시작(始作)하였다. 전쟁(戰爭)이 난 뒤에 수륙(水陸) 양쪽에서 청국(淸國)이 대패(大敗)하여 일본(日本)의 지위(地位)는 나날이 강(强)하여 졌다.

일본(日本)이 세력(勢力)의 커짐을 따라 우리 나라 내정(內政)에 간섭(干涉)하기 시작(始作)하고 개화당(開化黨)이 세(勢)를 얻어 민씨(閔氏) 일족(一族)을 물리치고 김홍집(金弘集)을 수반(首班)으로 하는 신정부(新政府)가 조직(組織)되고 청국(淸國)과의 관계(關係)를 끊고 개국기원(開國紀元) 준용과거(遵用科擧) 폐지(廢止) 계급타파(階級打破) 사회혁신(社會革新) 등(等)에 관(關)한 이백여건(二百餘件)을 결정(決定)하니 이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 한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은 우리 나라의 천수백년(千數百年)동안을 내려오던 봉건적제도(封建的制度)를 종결(終決)시키고 서양(西洋)의 자본주의(資本主義)를 수입(輸入)하는 시초(始初)이며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이를 강요(强要)한 것은 우리 나라의 발전(發展)을 위(爲)함이 아니오 일본(日本) 자본주의(資本主義)의 한 시장(市場)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을미년(乙未年)에 일본(日本)과 청국(淸國)이 마관조약(馬關條約)을 맺고 우리 나라의 독립(獨立)을 밝히고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일본(日本)에 주기로 하더니 아라사(俄羅斯)와 독일(獨逸)과 불란서(佛蘭西)의 삼국(三國)이 일본(日本)을 눌러서 요동(遼東)반도(半島)를 청국(淸國)에 돌려주기로 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日本)의 힘이 약(弱)함을 보고 또 주권(主權)의 침해(侵害)와 이권(利權)의 강요(强要)가 심(甚)해 짐으로 조정(朝廷)과 국민(國民)들에 배일(排日)의 기운(氣運)이 움직이고 따라서 일본(日本)의 압제(壓制)로 된 경장(更張)도 좋을 수가 없다하여 잘 시행(施行)되지 아니 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는 문벌타파(門閥打破)의 칙유(勅諭)가 내려서 양반(兩班)도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할 수 있고 또 상업(商業)이나 공업(工業)을 하던 사람도 학교(學敎)에 입학(入學)할 수 있다 하니 이는 사민평등(四民平等)(士農工商)의 첫 걸음을 내 디딘 것이며 이러한 정신(精神) 아래 을유년(乙酉年)에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서 신학문(新學問)과 신사상(新思想)을 가르치고 이해에 또 濟象院을 設立하여 처음으로 西洋의 의술(醫術)을 받아 들였다. 이 보다 앞서 갑신년(甲申年)에 우정국(郵政局)을 설립(設立)하고 우체제도(郵遞制度)를 실시(實施)하려던 것이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因)하여 일시(一時) 중단(中斷)되더니 을유년(乙酉年)에 전보국(電報局)이 생기고 이와 전후(前後)하여 주요(主要) 도시(都市)에 전신선(電信線)이 가설(架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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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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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의 침략(侵略)

 

우리 나라에 배일(排日)의 소리가 높아짐에 종전(從前)부터 동양(東洋) 방면(方面)에 세력(勢力)을 뻗쳐보려고 항상(恒常) 기회(機會)를 엿보고 있던 아라사(俄羅斯)가 공사(公使) 위패(韋貝)(카를 베베르)를 우리 나라에 보내어 왕실(王室)에 친근(親近)하기를 힘쓰고 일본(日本)을 누름에는 아국(俄國)이 가장 적당(適當)함을 선전(宣傳)하여 새로이 궁정(宮廷)의 신뢰(信賴)를 받게되고 개화당(開化黨)은 점차(漸次)로 몰락(沒落)하였다. 이때 일본(日本)의 공사(公使) 삼포오루(三浦梧樓)(미우라 고로)는 무인(武人)이라 이를 개(慨)하여 국면(局面)의 비상타개(非常打開)를 결정(決定)하고 을미(乙未) 팔월(八月)에 일변(一邊) 대원군(大院君)을 데려내어 먼저 궁중(宮中)으로 들어가고 병사(兵士)와 검객(劍客)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친아(親俄) 정책(政策)을 주장(主張)하고 있는 민비(閔妃)를 해(害)한 후(後) 그 시신(屍身)을 소화(燒火)하고 일변(一邊) 삼포(三浦) 자신(自身)은 왕(王)에게 뵈고 친아(親俄) 파(派)를 쫓아낼 것과 개화파(開化派) 내각(內閣)을 재(再) 조직(組織)할 것을 강청(强請)하여 왕(王)의 승인(承認)을 얻으니 이를 팔월을미지변(八月乙未之變)이라 한다. 이 사변(事變)이 외교상(外交上)으로 거북한 문제(問題)가 됨에 일본(日本)은 삼포(三浦) 이하(以下) 관계자(關係者)를 소환(召還)하여 투옥(投獄)하였다.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은 다시 개혁안(改革案)을 진행(進行)하여 구력(舊曆)을 폐지(廢止)하고 태양력(太陽曆)을 채용(採用)하며 단발령(斷髮令)을 영포(領布)하면서 일왕일원(一王一元)의 연호(年號)를 세우기로 하여 병신(丙申)으로부터 건양(建陽)이라 채(採)할 것을 결정(決定)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강압수단(强壓手段)은 일반(一般)의 악감(惡感)을 사고 더욱이 민비(閔妃)의 시해(弑害)는 왕(王)의 부자(父子)의 지한(至恨)이 되어 개화당(開化黨)의 시정(施政)은 잘 진행(進行)되지 아니하였고 한편(便)으로 박정양(朴定陽) 등(等) 친아(親俄) 파(派)의 암중운동(暗中運動)이 있어 건양(建陽) 원년(元年) 이월(二月)에 왕(王)과 태자(太子)가 궁중(宮中)에서 벗어나서 아국(俄國) 사관(使舘)으로 옮겨가고 정국(政局)이 일변(一變)하여 개화(開化)의 신법령(新法令)은 많이 철폐(撤廢)되고 아국(俄國)의 세력(勢力)이 우리 나라 궁정(宮廷)에 깊이 뿌리를 박고 김홍집(金弘集)은 난(亂) 중(中)에 맞아죽고 그 밖의 친일파(親日派)는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하고 각(各) 지방(地方)에는 국모(國母)의 원수(怨讐)를 갚고 단발(斷髮)을 반대(反對)한다하여 의병(義兵)이 일러 나서 국내(國內)가 소연(騷然)하였다.

고종(高宗)은 아관(俄館)에 머무르기 일년(一年)만에 정유(丁酉) 이월(二月)에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德壽宮))에 돌아갔다. 그리고 기미독립(己未獨立) 후(後) 하지 못한 바를 결정(決定)하여 황제위(皇帝位)에 오르고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고치고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바꾸고 특파대사(特派大使) 또는 전권공사(全權公使)를 각국(各國)에 파견(派遣)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허울은 훌륭하게 만들어 졌으나 군상신하(君上臣下)의 아무 데서도 새로운 정신(精神)을 가다듬은 실상(實相)을 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관정(官廷)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친아파(親俄派)의 굴혈(窟穴)이 되어서 아국(俄國)의 심부름하기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광무(光武)원년(元年) 구월(九月)에는 아국(俄國)이 반(半)넘어 위협(威脅)으로써 우리 군대(軍隊)의 교련(敎鍊)과 재정(財政)의 처리(處理)를 수중(手中)에 거두어가며 일변(一邊) 광산(鑛山) 삼림(森林) 기타(其他)의 이권(利權)을 훔쳐가기에 열중(熱中)하며 또 해군(海軍) 근거지(根據地)로 마산(馬山)을 조차(租借)하려는 음모(陰謀)도 진행(進行)하고 있었다.

갑신(甲申)의 당인(黨人)으로서 미국(美國)에 망명(亡命)하여 있던 서재필(徐載弼)이 건양(建陽) 원년(元年) 미국(美國)에서 돌아와서 개화당(開化黨) 내각(內閣)의 고문(顧問)으로 있으면서 독립문(獨立門)을 짓고 신문(新聞)을 내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만들어 국민정신(國民精神) 계발(啓發)에 힘쓰더니, 아국(俄國)의 이러한 야심(野心)을 보고 맹렬(猛烈)히 일어나서 반대운동(反對運動)을 일으키니 아국(俄國)의 행동(行動)이 크게 퇴축(退縮)되고 마산(馬山) 조차(租借) 문제(問題)도 미연(未然) 방지(防止)되었다.

독립협회(獨立協會)는 내정(內政)의 개혁상(改革上)에 많은 의견(意見)을 제출(提出)하였으나 정부(政府)나 민간(民間)이 모두 입으로만 떠들 뿐이오 실천(實踐)에 대한 계획(計劃)과 열의(熱意)가 없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오직 광무년간(光武年間)에 새로운 시설(施設)이 전(前)보다 많았으니 원년(元年)에는 경성(京城) 인천(仁川)간(間)에 전선(電線)을 가설(架設)하고 이년(二年)에는 경성(京城)에 전차(電車)가 놓이고 삼년(三年)에는 경인철도(京仁鐵道)가 개통(開通)되었다.

아국(俄國)이 우리 나라에 가까워 짐음 일본(日本)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써 일본(日本)은 아국(俄國)에 대(對)해서 한국문제(韓國問題)에 관(關)한 협의(協議)를 구(求)하여 두어 차례 내약(內約)도 성립(成立)되었다. 그러나 아국(俄國)은 불같은 남하욕(南下慾)을 그러한 내약(內約)에 거리낌없이 하고싶은 일을 하며 또 만주(滿洲)의 경영(經營)에 착수(着手)하여 광무(光武) 이년(二年)에 청국(淸國)으로부터 요동(遼東)반도(半島)를 조차(租借)하여 여순구(旅順口)에 군항(軍港)을 설비(設備)하고 만주(滿洲)철도(鐵道)의 부설권(敷設權)을 얻으며 일변(一邊) 조선(朝鮮)의 진해만(鎭海灣)의 밤구미(마산포의 한 지역)를 조차(租借)하여 그 야심(野心)이 점점 들어 났다. 다시 광무(光武) 사년(四年) 청국(淸國)에 의화단(義和團)의 난(亂)이 있음을 기회(機會)로 하여 만주(滿洲)를 군사점령하(軍事占領下)에 두고 각국(各國)의 말에 이기지 못하여 철병(撤兵)한다는 기한(期限)을 정(定)하되 그는 형식(形式)뿐이오 실행(實行)하지는 아니 하였다. 일본(日本)은 아국(俄國)의 남하(南下)를 제어(制御)하려하여 광무(光武) 육년(六年) 일월(一月)에 일영동맹(日英同盟)을 맺으니 그 대개(大槪)는 한청양국(韓淸兩國)의 독립(獨立)과 및 그 영토(領土)를 보전(保全)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은 한국(韓國)에서 영국(英國)은 청국(淸國)에서 정치상(政治上) 경제상(經濟上)으로 특수(特殊)한 권익(權益)을 가지고 이것이 침해(侵害)되는 때에는 양국(兩國)이 공동(公同)으로 필요(必要)한 조치(措置)를 하며 또 양국(兩國) 중(中) 일국(一國)이 타국(他國)과 개전(開戰)하는 때에는 일국(一國)은 엄정(嚴正) 중립(中立)을 지킨다 함이었다. 아국(俄國)에서는 일영동맹(日英同盟)에 대항(對抗)하기 위(爲)하여 아불동맹(俄佛同盟)을 맺어 극동(極東)에 있는 양국(兩國)의 이익(利益)을 공동(共同)으로 보호(保護)한다 하였다.

일본(日本)과 영국(英國)이 동맹(同盟)을 맺어 소위(所謂) 한국(韓國)의 독립(獨立)과 영토보전(領土保全)한다 함은 한국(韓國)의 이익을 위(爲)함이 아니라 한국(韓國)이 아국(俄國)에게 탈취(奪取)됨을 방지(防止)하고 일본(日本)이 탈취(奪取)하겠다는 뜻이니 이때로부터 한국(韓國)은 완전(完全)히 열강(列强)의 조상육(俎上肉)이 된 것이오 자주독립(自主獨立)하는 역사(歷史)는 이미 끊어진 것이다.

아국(俄國)은 만주(滿洲)에서 철병(撤兵)할 성의(誠意)를 보이지 아니할 뿐 아니라 광무(光武) 칠년(七年)에는 한국(韓國)으로 손을 뻗어서 일변(一邊) 용암포(龍巖浦)(압록강 하구 평북)의 조차(租借)를 구(求)하고 일변(一邊) 군대(軍隊)를 그리로 보내서 벌목(伐木)과 건축(建築)의 사업을 시작(始作)하였다.

일본(日本)은 아국(俄國)과 최후(最後)의 교섭(交涉)을 시(始)하여 아국(俄國)이 만주(滿洲)와 한국(韓國)에서 손을 떼기를 요구(要求)하여 아국(俄國)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북위(北緯) 삼십구도(三十九度) 이상(以上)의 우리 나라의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의 땅을 중립지대(中立地帶)로 하기를 요구(要求)하고 조금도 양보(讓步)하려 하지 아니하더니 광무(光武) 팔년(八年) 이월(二月)에 마침내 일아전쟁(日俄戰爭)이 일어났다. 일아(日俄)의 풍운(風雲)이 급(急)하여짐에 우리 정부(政府)는 미리 국외중립(國外中立)을 선언(宣言)하였으나 전쟁(戰爭)의 시작(始作)됨과 함께 일본군(日本軍)이 연속(連續) 입국(入國)하여 국토(國土)의 일부(一部)가 전쟁(戰爭)으로 화(化)하고 아국(俄國)의 패퇴(敗退)를 따라서 일본(日本)의 압력(壓力)이 그대로 커졌다. 그리하여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대(對)한 시정개선(施政改善)의 충고권(忠告權)과 외교기능(外交機能)의 제한권(制限權)을 가지고 다시 재정(財政)과 외교(外交)의 감독권(監督權)을 가지고 정부(政府) 각(各) 기관(機關)에 일본인(日本人) 고문(顧問)이 들어앉고 이 동안에 경의(京義) 경원(京元)의 양(兩) 철도(鐵道) 부설권(敷設權) 이하(以下)로 허다(許多)한 권익(權益)을 가지고 이어 통신사업(通信事業)도 일본(日本)의 것이 되었다.

광무(光武) 구년(九年)에 일본(日本)이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대승(大勝)하고 또 아국(俄國) 해군(海軍)이 대마해협(對馬海峽)에서 치명상(致命傷)을 받아 전국(戰局)의 대세(大勢)가 이미 정(定)하매 미국(美國) 대통령(大統領) 루즈벨트가 이 중간(中間)에 들어 양국(兩國)의 강화조약(講和條約)이 포츠머스(뉴햄프셔주)에서 조인(調印)되어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에서 정치상(政治上) 군사상(軍事上) 경제상(經濟上)으로 특수(特殊)한 이익(利益)이 승인(承認)되었다.

일본(日本)은 이해 십일월(十一月)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와서 위협(威脅)으로써 협약(協約)을 맺으니 외교권(外交權)을 빼앗고 통감(統監)을 경성(京城)에 두어 보호정치(保護政治)를 시행(施行)하니 이것이 보통(普通) 이른바 오조약(五條約) 또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條約)은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반대(反對)하고 황제(皇帝)가 서명(署名)을 거절(拒絶)한 때문에 형식(形式)을 갖추지 못하고 일방적(一方的)으로 실행(實行)된 것이다.

이 조약(條約)이 한번 발포(發布)됨에 국민(國民) 상하(上下)의 분격(憤激)이 극도(極度)에 달(達)하고 오랫동안 한국(韓國)의 보전(保全)과 동양평화(東洋平和)를 공약(公約)해 오던 일본(日本)의 무신의(無信義)함을 통매(痛罵)하여 한신(韓臣)들 중에는 조약(條約) 폐기(廢棄)를 소청(疏請)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매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이하(以下) 순국(殉國)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조병세(趙秉世)는 그 유서(遺書)에 「강린(强隣)이 조약(條約)을 져버리고 도적(盜賊)의 무리가 나라를 팔아서 우리의 자손(子孫)이 이 장차(將次) 남의 노예(奴隸)가 될 것이니 바라건대 동포(同胞)들은 각자(各自)가 분발(奮發)하여 독립(獨立)의 기초(基礎)를 닦으라」하고 민영환(閔泳煥)의 유서(遺書)에서는「내가 죽어도 지하(地下)에서 우리 나라의 독립(獨立)을 위(爲)하여 싸우리니 동포(同胞)들은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말고 천만번(千萬番) 분발(奮發)하여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學問)을 더욱 힘쓰며 한마음 한뜻으로 나가서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회복(恢復)하면 나는 저승에서 기뻐하리라」하였다.

그러나 일본(日本)의 한국병합(韓國倂合)에 대(對)한 방안(方案)은 이미 결정(決定)되고 시기(時機)만 기다릴 뿐이더니 광무(光武) 십일년(十一年)에 화란(和蘭)(네델란드) 해아(海牙)(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매 한국(韓國) 황제(皇帝)의 밀사(密使) 이상설(李相卨) 이준(李雋)이 해아(海牙)에 가서 협약(協約)의 무효(無效)함을 역설(力說)하니 이에 일본(日本)이 그 책임(責任)을 묻는다 하여 황제(皇帝)를 퇴위(退位)시켜 태황제(太皇帝)라 하고 태자(太子)를 세워 황제(皇帝)를 삼고 연호(年號)를 융희(隆熙)라 고치고 일체(一切) 행정(行政)을 통감(統監)의 지휘(指揮)를 받고 일본인(日本人)을 한국(韓國)의 관리(官吏)로 임용(任用)하기로 하는 동시(同時)에 군대(軍隊)를 해산(解産)하고 각부(各部)의 차관(次官)에 일본인(日本人)을 임용(任用)하여 소위(所謂) 차관정치(次官政治)가 실현(實現)되었다.

간도지방(間島地方)은 청국(淸國)의 봉금지(封禁地)로 되어 만주족(滿洲族) 이외(以外)의 인민(人民)의 입거(入居)함을 허락(許諾)하지 아니하더니 어느 틈에 청국(淸國)의 산동지방(山東地方)의 유민(流民)들이 입주(入住)하여 우리 고종(高宗) 초년(初年)에는 이미 억제(抑制)할 수 없이 되었음으로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에 청국(淸國)의 토문강(土門江) 일대(一帶) 지방(地方)을 정식(正式)으로 개방(開放)하기로 하고 관리(官吏)를 보내어 조사(調査)할 때 그곳이 이미 조선인(朝鮮人)의 집단(集團) 거주(居住)로 된 것을 발견(發見)하였다. 이에 청국(淸國)에서는 조선인(朝鮮人)에게 청국(淸國) 민속(民俗)을 좇거나 조선(朝鮮)으로 철환(撤還)하거나 양자(兩者) 중(中)에 그 하나를 택(擇)하라고 하였다. 조선인(朝鮮人)은 그대로 살되 청국(淸國) 풍속(風俗)을 좇지 아니하겠다 하여 말썽이 되더니 이십년(二十年)에 어윤중(魚允中)이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되어 두만강(豆滿江) 연변(沿邊)을 시찰(視察)할 때에 이 사정(事情)을 알고 이는 국세민생(國勢民生)의 큰 문제(問題)라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와 그 부근(附近)의 지형(地形)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그 결과(結果)로 정계비(定界碑)에서 가까이 나오는 물은 동북(東北)의 방향(方向)으로 흐르다가 토문(土門)의 형상(形狀)을 짓고 지금 간도지방(間島地方)을 휩싸 흐르는 것을 발견(發見)하고 토문강(土門江)이라는 것은 곧 이 물이오 간도지방(間島地方)은 당연(當然)히 조선(朝鮮)의 소속(所屬)임을 판정(判定)하였고 청국(淸國)에서는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豆滿江)의 별명(別名)이라 하여 양국(兩國)의 주장(主張)이 서로 대립(對立)되었다. 이십이년(二十二年)에 양국(兩國)은 실지(實地)로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청국(淸國)에서 그 주장(主張)하는 근거(根據)가 부족(不足)함을 깨닫고도 오히려 굴(屈)하지 아니하고 조선(朝鮮)에서도 기어(期於)히 주장(主張)을 관철(貫徹)하려하여 이래(爾來) 수십년(數十年)에 문제(問題)의 해결(解決)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한국(韓國)의 외교(外交)가 일본(日本)으로 넘어감에 간도문제(間島問題)가 청일(淸日)사이의 분쟁(紛爭)이 되고 처음에는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의 방침(方針)대로 간도(間島)를 우리 나라 영토(領土)로 정(定)하고 행정기관(行政機關)을 간도(間島)의 용정촌(龍井村)에 두고 조선인민(朝鮮人民)을 거느리더니 융희(隆熙) 삼년(三年)에 일본(日本)이 남만주(南滿州) 철도(鐵道)의 안봉선(安奉線)을 고쳐 놓을 때에 청국(淸國)이 일본(日本)의 말을 잘 듣지 아니함에 일본(日本)은 철도(鐵道)용지(用地) 문제(問題)를 일본(日本)의 요구(要求)대로 해결(解決)하는 대신(代身)에 간도(間島)를 청국영토(淸國領土)로 인정(認定)하였다. 그리하여 간도(間島)의 주권(主權)은 청국(淸國)에 주고 한국인민(韓國人民)은 전(前)과 같이 자유(自由)로 거주(居住)하면서 청국(淸國)의 법권(法權)에 복종(服從)하며 용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백초구(百草溝) 는 개방지(開放地)로 하여 이쪽의 영사관(領事館)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간도문제(間島問題)는 일본(日本)이 저희 본국(本國)의 이익(利益)을 위(爲)하여 청국(淸國)에 준 것이오 한국(韓國)의 승인(承認)한 것이 아님으로 금후(今後) 우리 나라와 중국(中國)과의 사이에 다시 분쟁(紛爭)이 일어날 문제(問題)이다.

And

민중운동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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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民衆)운동(運動)

 

처음에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맺어지며 중앙(中央) 정국(政局)이 소란(騷亂)함은 물론(勿論)이오 지방(地方)에서도 조약(條約)에 대(對)한 반항운동(反抗運動)이 도처(到處)에서 일어났다. 그 중(中)에서도 크게 기세(氣勢)를 떨친 것은 광무(光武) 십년(十年)에 민종식(閔宗植)이 홍천(洪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최익현(崔益鉉)은 순창(淳昌)에서 신돌석(申乭石)은 평해(平海)에서 이에 호응(呼應)하여 일어나 한동안 일인(日人)을 괴롭게 하였다.

일본(日本) 세력(勢力)이 커지기 시작(始作)힘으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 중(中)에서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서 일본(日本)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祖國)과 동포(同胞)를 배반(背叛)하는 무리가 생겼으니 그 중(中)에서도 안병준(安秉畯) 윤시병(尹始炳)같은 자(者)들은 동학(東學)교도(敎徒)의 한 사람인 이용구(李容九)와 더불어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서 일본(日本)의 전쟁(戰爭)에 협력(協力)하고 또 보호조약(保護條約)을 맺기 전(前)부터 이미 우리 나라는 일본(日本)의 보호(保護)를 받아야 한다고 발표(發表)하였다. 이에 일본(日本)에 가있던 동학(東學)의 수령(首領) 손병희(孫秉熙)는 곧 경성(京城)으로 돌아와서 이용구(李容九)와 손을 끊고 새로이 천도교(天道敎)를 일으켜서 동학(東學)의 전통(傳統)을 이으니 따로이 시천교(侍天敎)를 세워서 이와 대립(對立) 하였다.

이에 일진회(一進會)의 반역행동(反逆行動)에 대항(對抗)하기 위(爲)하여 장지연(張志淵)등(等)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組織)하였으나 내무대신(內務大臣)으로 들어간 송병준(宋秉畯)에게 해산(解散)을 당(當)하고 광무(光武) 십일년(十一年)에는 나인영(羅寅永)등(等)이 일본(日本)과 협약(協約)맺은 오대신(五大臣)을 매국노(賣國奴) 또는 오적(五賊)이라 하여 암살(暗殺)을 도모(圖謀)하고 오대신(五大臣)의 한 사람 권중현(權重顯)을 길거리에서 저격(狙擊)한 일이 있었다.

융희(隆熙) 연대(年代)에 이르러서는 의분(義憤)에 북받치는 민중(民衆)의 격렬(激烈)한 행동(行動)이 더욱 잦았다. 처음에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를 빼앗으려는 행동(行動)을 미국(美國)이 시인(是認)하고 일본(日本)의 추천(推薦)으로 미국(美國)사람 수지분(須知芬)(D.W.스티븐스)이 우리 나라의 외교(外交) 고문(顧問)이 되더니 수지분(須知芬)이 미국(美國)에 건너가서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에 대(對)한 행동(行動)을 찬(讚)한 까닭에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두 사람이 이를 쏘아 죽이고 삼년(三年) 시월(十月)에는 전(前)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합이빈(哈爾濱)(하얼빈)에 간 것을 안중근(安重根)이 쏘아 죽이고 이해 십이월(十二月)에는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경성(京城)의 길거리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에 찔린 일은 가장 세상(世上)에 들어 난 일이다.

앞서 국가(國家)의 내외(內外) 정세(情勢)의 긴박(緊迫)과 새 사조(思潮)의 움직임은 뜻이 있는 인사(人士)들로 하여금 일아(日俄)를 반성(反省)하게 하여 국학(國學)에 대(對)한 연구(硏究)가 늘어갔으니 주시경(周時經)은 국문(國文)의 연구(硏究)와 보급(普及)에 힘썼고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같은 젊은 학자(學者)들은 국사(國史) 연구(硏究)에 공적(功績)이 있었고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은 국문(國文)과 한문(漢文)을 섞어 쓴 새로운 글월로서 신(新) 소설(小說)은 우리 나라의 문학(文學)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언론기관(言論機關)에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비롯하여 황성신문(皇城新聞) 제국신문(帝國新聞) 대한매일신문(大韓每日新聞) 등(等)이 차례로 나타나서 모두 독립사상(獨立思想)을 고취(鼓吹)하고 일본(日本)의 야망(野望)을 비난(非難)하였다.

그러나 한번 기우러지기 시작(始作)한 국세(國勢)는 다시 회복(恢復)할 길이 없었다.

융희(隆熙) 사년(四年)에 일본(日本)군벌(軍閥)의 거두(巨頭) 사내정의(寺內正毅)(데라우찌 마사다께)가 총독(總督)으로 되어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의 사이에 합방조약(合邦條約)이 맺어져서 이해 팔월(八月) 이십구일(二十九日)에 이를 발표(發表)하였다.

우리 나라가 건국(建國) 이래(以來) 사천여년(四千餘年)에 일직 단절(斷絶) 된 일이 없는 역사(歷史)의 전통(傳統)이 처음으로 끊어지고 이천만(二千萬) 민족(民族)은 비통(悲痛)한 시련(試鍊)을 직면(直面)하였다.

이씨(李氏) 건국(建國)으로부터 융희(隆熙) 사년(四年) 경술(庚戌)에 이르기까지 이십칠대(二十七代) 오백십구년(五百十九年)이었고 뜻 있는 사람들은 의분(義憤)을 이기지 못하여 일본(日本)에 반항(反抗)하다 혹(或)은 죽고 혹(或)은 옥(獄)에 갇치고 혹(或)은 외국(外國)으로 망명(亡命)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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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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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己未獨立) 선언서(宣言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이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의 권위(權威)를 장(仗)하야 차(此)를 선언(宣言)함이며 이천만(二千萬) 민중(民衆)의 성충(誠忠)을 합(合)하야 차(此)를 포명(佈明)함이며 민족(民族)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발전(自由發展)을 위(爲)하야 차(此)를 주장(主張)함이며 인류적(人類的) 양심(良心) 발로(發露)에 기인(基因)한 세계개조(世界改造)의 대기운(大機運)에 순응병진(順應倂進)하기 위(爲)하야 차(此)를 제기(提起)함이니 시(是) ― 천(天)의 명명(明命)이며 시대(時代)의 대세(大勢)이며 전인류공동주권(全人類共同主權)의 정당(正當)한 발동(發動)이라 천하하물(天下何物)이든지 차(此)를 저지억제(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구시대(舊時代)의 유물(遺物)인 침략주의(侵略主義) 강권주의(强權主義)의 희생(犧牲)을 작(作)하야 유사이래(有史以來) 누천년(累千年)에 처음으로 이민족겸제(異民族箝制)의 통고(痛苦)를 상(嘗)한지 금(今)에 십년(十年)을 과(過)한지라 아생존권(我生存權)의 박탈(剝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심령상발전(心靈上發展)의 장애(障碍)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민족적존영(民族的尊榮)의 훼손(毁損)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으로써 세계문화(世界文化)의 대조류(大潮流)에 기여보비(寄與補裨)할 기연(機緣)을 유실(遺失)함이 무릇 기하(幾何)이뇨

희(噫)라 구래(舊來)의 억울(抑鬱)을 선양(宣揚)하려하면

시하(時下)의 고통(苦痛)을 파탈(擺脫)하려하면

장래(將來)의 위협(威脅)을 삼제(芟除)하려하면

민족적양심(民族的良心)과 국가적염의(國家的廉義)의 압축소잔(壓縮銷殘)을 흥분신장(興奮伸張)하려하면

각개인격(各個人格)의 정당(正當)한 발달(發達)을 수(遂)하려하면

가련(可憐)한 자제(子弟)에게 수치적재산(羞恥的財産)을 유여(遺與)치 아니하려하면

자자손손(子子孫孫)의 영구완전(永久完全)한 경복(慶福)을 도영(導迎)하려하면

최대급무(最大急務)가 민족적독립(民族的獨立)을 확실(確實)하게 함이니 이천만각개(二千萬各個)가 인(人)마다 방촌(方寸)의 인(刃)을 회(懷)하고 인류통성(人類通性)과 시대양심(時代良心)이 정의(正義)의 군(軍)과 인도(人道)의 간과(干戈)로써 호원(護援)하는 금일(今日) 오인(吾人)은 진(進)하야 취(取)함에 하강(何强)을 좌(挫)치 못하랴 퇴(退)하야 작(作)하매 하지(何志)를 전(展)치 못하랴

병자수호조규(丙子修護條規) 이래(以來) 시시종종(時時種種)의 금석맹약(金石盟約)을 식(食)하얏다 하야 일본(日本)의 무신(無信)을 죄(罪)하랴 아니하노라 학자(學者)는 강단(講壇)에서 정치가(政治家)는 실제(實際)에서 아(我) 조종(朝宗)의 세업(世業)을 식민지시(植民地視)하고 아(我) 문화민족(文化民族)을 토매인우(土昧人遇)하야 한갓 정복자(征服者)의 쾌(快)를 탐(貪)할 뿐이오 아(我)의 구원(久遠)한 사회기초(社會基礎)와 탁락(卓犖)한 민족심리(民族心理)를 무시(無視)한다 하야 일본(日本)의 소의(少義)함을 책(責)하랴 아니하노라

자기(自己)를 책려(策勵)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타(他)의 원우(怨尤)를 가(暇)치 못하노라

현재(現在)를 주무(綢繆)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숙석(宿昔)의 징변(懲辨)을 가(暇)치 못하노라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소임(所任)은 다만 자기(自己)의 건설(建設)이 유(有)할 뿐이오 결(決)코 타(他)의 파괴(破壞)에 재(在)치 아니 하도다

엄숙(嚴肅)한 양심(良心)의 명령(命令)으로써 자가(自家)의 신운명(新運命)을 개척(開拓)할 뿐이오 결(決)코 구원(舊怨)과 일시적감정(一時的感情)으로써 타(他)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 구사상(舊思想) 구세력(舊勢力)에 기미(羈縻)된 일본(日本) 위정가(爲政家)의 공명적희생(功名的犧牲)이된 부자연우불합리(不自然又不合理)한 착오상태(錯誤狀態)를 개선광정(改善匡正)하야 자연우합리(自然又合理)한 정경대원(政經大原)으로 귀환(歸還)케 함이로다

당초(當初)에 민족적요구(民族的要求)로써 출(出)치 아니한 양국합병(兩國合倂)의 결과(結果)가 필경(畢竟) 고식적(姑息的) 위압(威壓)과 차별적(差別的) 불평(不平)과 통계수자상허식(統計數字上虛飾)의 하(下)에서 이해상반(利害相反)한 양민족간(兩民族間)에 영원(永遠)히 화동(和同)할 수 없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去益深造)하는 금래실적(今來實積)을 관(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舊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眞正)한 이해(理解)와 동정(同情)에 기본(基本)한 우호적(友好的) 신국면(新局面)을 타개(打開)함이 피차간(彼此間)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捷徑)임을 명지(明知)할 것이 아닌가 또 이천만(二千萬) 함분축원(含憤蓄怨)의 민(民)을 위력(威力)으로써 구속(拘束)함은 다만 동양(東洋)의 영구(永久)한 평화(平和)를 보장(保障)하는 소이(所以)가 아닐 뿐 아니라 차(此)로 인(因)하야 동양안위(東洋安危)의 주추(主樞)인 사억만지나인(四億萬支那人)의 일본(日本)에 대(對)한 위구(危懼)와 시의(猜疑)를 갈수록 농후(濃厚)케 하야 그 결과(結果)로 동양전국(東洋全局)이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비운(悲運)을 초치(招致)할 것이 명(明)하니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조선독립(朝鮮獨立)은 조선인(朝鮮人)으로 하야곰 정당(正當)한 생영(生榮)을 수(遂)케 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으로 하야곰 사로(邪路)로써 출(出)하야 동양지지자(東洋支持者)인 중책(重責)을 전(全)케 하는 것이며 지나(支那)로 하야곰 몽매(夢寐)에도 면(免)치 못하는 불안공포(不安恐怖)로서 탈출(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東洋平和)로 중요(重要)한 일부(一部)를 삼는 세계평화(世界平和)와 인류행복(人類幸福)에 필요(必要)한 계단(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區區)한 감정상(感情上) 문제(問題)리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展開)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時代)가 거(去)하고 도의(道義)의 시대(時代)가 래(來)하도다 과거전세기(過去全世紀)에 연마장양(鍊磨長養)된 인도적(人道的) 정신(精神)이 바야흐로 신문명(新文明)의 서광(曙光)을 인류역사(人類歷史)에 투사(投射)하기 시(始)하도다.

신춘(新春)이 세계(世界)에 래(來)하야 만물(萬物)의 회소(回蘇)를 최촉(催促)하는도다 동빙한설(凍氷寒雪)에 호흡(呼吸)을 폐칩(閉蟄)한 것이 피일시(彼一時)의 세(勢)라 하면 화풍난양(和風暖陽)에 기맥(氣脈)을 진서(振舒)함은 차일시(此一時)의 세(勢)니 천지(天地)의 부운(復運)에 제(際)하고 세계변조(世界變潮)를 승(乘)한 오인(吾人)은 아무 주저(躊躇)할 것 없으며 아무 기탄(忌憚)할 것도 없도다 아(我)의 고유(固有)한 자유권(自由權)을 호전(護全)하야 생왕(生旺)의 낙(樂)을 포향(飽享)할 것이며 아(我)의 자족(自足)한 독창력(獨創力)을 발휘(發揮)하야 춘만(春滿)한 대계(大界)에 민족적정화(民族的精華)를 결뉴(結紐)할지로다

아(我) 등(等)이 자(玆)에 분기(奮起)하도다 양심(良心)이 아(我)와 동존(同存)하며 진리(眞理)가 아(我)와 병진(倂進)하는도다 남녀노소(男女老少)없이 음울(陰鬱)한 고소(古巢)로서 활발(活潑)히 기래(起來)하야 만휘군상(萬彙群象)으로 더불어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을 성수(成遂)케 하도다 천백세조령(千百世祖靈)이 오등(吾等)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全世界) 기운(氣運)이 오등(吾等)을 외호(外護)하나니 착수(着手)가 곧 성공(成功)이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光明)으로 맥진(驀進)할 따름인저

 

공약삼장(公約三章)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인도(正義人道) 생존존영(生存尊榮)을 위(爲)하는 민족적요구(民族的要求)이니 자유적정신(自由的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決)코 배타적(排他的)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치 말라

최후(最後)의 일인(一人)까지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正當)한 의사(意思)를 쾌(快)히 발표(發表)하라

일체(一切)의 행동(行動)은 가장 질서(秩序)를 존중(尊重)하야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야곰 어디 까지던지 광명정대(光明正大)케 하라

조선(朝鮮)건국(建國) 사천이백오십이년(四千二百五十二年) 삼월(三月) 일일(一日)

조선민족대표(朝鮮民族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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