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歷史'에 해당되는 글 58건

  1. 2013.09.03 몽고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2. 2013.09.03 정치의 문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3. 2013.09.03 외국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4. 2013.09.02 고려의 멸망 (삼화선생 서당국사)
  5. 2013.09.02 이조건국 (삼화선생 서당국사)
  6. 2013.09.02 이조정치 (삼화선생 서당국사)
  7. 2013.09.02 왕위쟁탈 (삼화선생 서당국사)
  8. 2013.09.02 건설시기 (삼화선생 서당국사)
  9. 2013.09.02 단종과 세조 (삼화선생 서당국사)
  10. 2013.09.02 이조기초의 완성 (삼화선생 서당국사)
  11. 2013.09.02 연산군의 실정 (삼화선생 서당국사)
  12. 2013.09.02 중종반정후의 국정 (삼화선생 서당국사)
  13. 2013.09.02 일본과의 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14. 2013.09.02 사회의 부패 (삼화선생 서당국사)
  15. 2013.09.02 임진왜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몽고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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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란(蒙古亂)

 

최충헌(崔忠獻)이 권세(權勢)를 잡은 후(後)에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판국(版局)이 벌어졌다. 몽고(蒙古)는 본시(本是) 외몽고(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유목(遊牧)하는 부족(部族)이러니 성길사한(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사방(四方)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쳐서 큰 세력(勢力)을 이루니 이는 최충헌(崔忠獻)이 한창 세도(勢道)를 부리던 희종(熙宗)때 일이다. 금(金)나라가 몽고(蒙古)의 힘에 눌림에 계단(契丹)의 귀족(貴族)들이 요동(遼東)에서 일어나고 금(金)의 반장(叛將) 포선만노(蒲鮮萬奴)는 지금의 간도(間道)지방(地方)을 근거지(根據地)로 하여 동진국(東眞國)을 세웠다. 그 후(後) 고종(高宗)때에 이르러 요동(遼東)의 계단족(契丹族)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우리 나라 지경(地境) 안으로 밀려들어와서 약탈(掠奪)을 함부로 행(行)하였다. 고려(高麗)는 군사(軍士)를 보내어 각지(各地)에서 계단병(契丹兵)과 싸우는 중(中)에 또 몽고(蒙古)가 동진(東眞)과 연합(聯合)하여 계단병(契丹兵)을 치기 위(爲)하여 그 뒤를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오니 국내(國內)에 사국군대(四國軍隊)가 어울려서 형세(形勢)가 극(極)히 험악(險惡)하고 또 급박(急迫)하였다. 더욱이 고려(高麗)와 몽고(蒙古)는 종래(從來)로 외교관계(外交關係)가 전연(全然)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인성(人性)이 강한(强悍)함으로 국내인심(國內人心)이 흉흉(恟恟)하였다.

이때 계단병(契丹兵)은 앞으로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막히고 뒤로 몽진연합군(蒙眞聯合軍)에계 쫓기어 서북면(西北面)의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서 지키니 몽고(蒙古)장(將) 합진(哈眞)과 동진장(東眞將) 완안자연(完顔子淵)이 그 뒤를 따라 강동성(江東城)을 포위(包圍)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형세(形勢)가 심(甚)히 위구(危懼)함을 보고 전략(戰略)과 외교(外交)에 능숙(能熟)한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여 조충(趙冲)을 원수(元帥)로 하고 김취려(金就礪)를 부원수(副元帥)로 하여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몽진군(蒙眞軍)의 영(營)에 가서 크게 주연(酒宴)을 베풀고 두 장수(將帥)를 접대(接待)하였다. 두 장수(將帥)는 우리 나라 두 원수(元帥)의 인격(人格)이 매우 높음을 보고 모앙(慕仰)함을 마지아니하였다. 완안자연(完顔子淵)은 아인(我人)에게 말하되 고려(高麗)의 조원수(趙元帥)는 기위(奇偉)한 사람이라 국가(國家)가 이러한 장수(將帥)를 둔 것은 천(天)의 사(賜)함이라 하고 합진(哈眞)은 김취려(金就礪)를 보고 말하되 내가 일직 육국(六國)을 정벌(征伐)하여 귀인(貴人)을 만남이 많으되 형(兄)의 얼굴을 보니 어찌 그렇게 기위(奇偉)한고 하여 칭찬(稱讚)하였다. 이에 세나라 군사(軍士)는 강동성(江東城)을 쳐서 계단병(契丹兵)을 전멸(全滅)시킨 뒤 몽진(蒙塵)과 화호(和好)를 맺고 무사(無事)히 돌려보냈었다. 이 난(亂)에 귀항(歸降)한 자(者)가 말했는데 이들은 산림지대(山林地帶)와 황무지(荒蕪地)에 이주(移住)시켜 농사(農事)짓게 하니 이를 계단장(契丹場)이라 하고 계단장(契丹場)에 들어간 자(者)들 중(中)에는 농사(農事)짓기 싫어하고 사냥과 피혁(皮革) 유기(柳器) 등(等) 수공업(手工業)으로 전업(轉業)하는 자(者)가 많았으니 이것이 대개(大槪) 후일(後日)의 소위(所謂) 소백정(白丁) 고리백정(白丁)등(等)이 된 것이다.

만주(滿洲) 지방(地方)에서는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밀려나와서 동진국(東眞國)은 얼마후(後)에 망(亡)하고 몽고(蒙古)는 고려(高麗)를 구원(救援)하였다. 고종(高宗) 십이년(十二年)에 몽고(蒙古)의 사신(使臣)이 고려(高麗)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도적(盜賊)을 만나 죽은 일이 있음으로 몽고(蒙古)에서는 이것을 트집잡아 가지고 국교(國交)가 점점(漸漸) 험악(險惡)하더니 마침내 고종(高宗) 십팔년(十八年)에 제일차(第一次)로 고려(高麗)에 쳐들어 왔다. 원래(原來) 만몽(滿蒙) 지방(地方)에 뿌리를 잡은 국가(國家)들은,

一. 해양(海洋)을 가지지 못해서 해외(海外)로 발전(發展)할 길이 없고 二. 기후(氣候)가 추워서 잠포(蠶布) 등(等) 의복(衣服) 자료(資料)가 생산(生産)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몽고(蒙古)가 처음으로부터 고려(高麗)를 빼앗을 욕심(慾心)을 가지는 것도 이 해양(海洋)과 의복(衣服) 자료(資料)를 얻기 위(爲)함이오 계단병(契丹兵)이 뒤를 쫓아 나온 것도 고려(高麗)에 발을 부칠 구실(口實)을 얻으려 함이오 다시 고려(高麗)에 쳐들어 온 것도 자기들이 처음부터 욕심(慾心)내던 일을 달성(達成)하기 위(爲)함이다.

금후(今後)에 있어서도 몽고(蒙古)방면(方面)에 입(立)하는 나라는 해안(海岸)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가장 거리(距離)가 가까운 동해(東海)로 진출(進出)하려 할 것이오 더욱이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爲)하여 반드시 아국(我國) 해안(海岸)에 착목(着目)할 것은 물론(勿論)이다. 몽고군(蒙古軍)이 쳐들어오면서 구주성(龜州城)을 포위(包圍)하니 이때 구주(龜州)를 지키던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 등(等)이 여러 날 동안 몽고군(蒙古軍)과 싸워서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몽고장(蒙古將) 한 사람이 탄복(歎服)하여 왈(曰) 내가 종군(從軍)한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성(城)이 이와 같이 공격(攻擊)을 받고 굴(屈)치 않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 성중(城中) 제장(諸將)들은 후일(後日) 반드시 장상(將相)이 되리로다 하였다.

그러나 고려(高麗)는 마침내 몽고군(蒙古軍)을 대적(對敵)치 못하여 그 이듬해 삼군(三軍)이 몽고군(蒙古軍)에게 굴복(屈服)하기에 이르렀다. 몽고(蒙古)에서는 달로화적(達魯花赤)(다루가치)라는 관리(官吏) 칠십이인(七十二人)을 보내와서 고려(高麗)의 내정(內政)을 간섭(干涉)하였다. 이에 고려(高麗) 조정(朝廷)은 몽고(蒙古)와 항쟁(抗爭)하려하여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가 당시(當時) 정권(政權)을 잡고 있는지라 왕(王)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니 (단기 삼천오백육십오년) 이는 몽고군(蒙古軍)이 육지(陸地)에서는 강(强)하나 수군(水軍)이 없어서 바다에서는 힘쓰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삼십년(三十年)동안 몽고(蒙古)의 군사(軍士)가 강화도(江華島)의 맞은편(便)에 와서 아무리 위협(威脅)을 하고 출륙(出陸)하기를 계속(繼續)하여도 최우(崔瑀)는 응(應)하지 아니하니 그 분(忿)풀이를 육지(陸地)에서 마음껏 하여 전후(前後)육차(六次)나 그들의 사나운 발굽이 압록강(鴨綠江) 이쪽을 짓밟아서 서북면(西北面)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이 견디지 못하여 아주 마을이 비게 되었으며 적군(敵軍)은 멀리 경주(慶州)까지 쳐들어와서 학살(虐殺)과 노략(擄掠)을 마음대로 하였다.

대구(大邱) 부인사(符仁寺)에 있는 대장경(大藏經)판(版)과 경주(慶州) 황룡사(皇龍寺)의 구층석탑(九層石塔)이 불타 버린 것도 이 때이며 그들이 제육차(第六次)로 들어 왔을 때는 고려(高麗)사람을 잡아 간 것이 이십만명(二十萬名)을 넘고 죽은 사람의 수(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고려(高麗)에서는 대장경(大藏經)이 불타버린 것을 아깝게 생각하여 고종왕(高宗王)은 다시 발원(發願)하여 십육년(十六年)동안의 노력(努力)으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판(版)을 새기고 이 대장경(大藏經)을 새겨 내기에 하도 힘들어서 더 간편(簡便)한 방법(方法)을 생각해 낸 것이 활자(活字)이다.

고종(高宗) 이십일년(二十一年) (삼천육백육십칠년)에 이미 주자(鑄字)로써 책(冊)을 박아내니 이는 독일(獨逸)사람들이 서양(西洋)에서 처음으로 활자(活字)를 만들어서 책(冊)을 박아낸 것보다 이백년(二百年)이나 앞섰다. 활자(活字)는 문명(文明)의 모(母)라는 말이 있거니와 세계(世界)에서 가장 먼저 활자(活字)를 발명(發明)한 고려(高麗)는 역시(亦是) 문화(文化)의 선진국(先進國)이었다.

송(宋)나라 임금이 일부러 사신(使臣)을 보내와서 귀중(貴重)한 책(冊)을 빌려달라 하고 일본(日本)이 항상(恒常) 남양(南洋)의 진기(珍奇)한 물건(物件)을 가지고 와서 그 값으로 특(特)히 대장경(大藏經)을 나눠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高麗)가 당시(當時)의 동양(東洋)에서 문화적(文化的)으로 얼마나 높은 수준(水準)을 지니었던가를 알 수 있고 이러한 문화(文化) 속에서 맺어진 열매가 활자(活字)이었다.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간 뒤 최씨(崔氏)는 정권(政權)을 오로지 하여 사병(私兵)인 삼별초군(三別抄軍)으로써 스스로 수비(守備)하여 육지(陸地)에 나가 싸운 일이 없고 오직 육지군대(陸地軍隊)에 대(對)하여 항전(抗戰)을 명령(命令)할 뿐이며 서남안지방(西南岸地方)으로부터 수로(水路)로 식량(食糧)과 기타(其他) 물자(物資)를 운수(運輸)해다 안락(安樂)한 생활(生活)을 계속(繼續)하였다.

고종(高宗) 사십오년(四十五年)에 최씨(崔氏)와 삼별초군(三別抄軍)사이에 틈이 생김을 이용(利用)하여 삼별초(三別抄)를 시켜서 최씨(崔氏)를 멸(滅)하니 최씨(崔氏)는 四世 六十餘年만에 亡하고 王이 直接 政治를 맡아보게 됨에 마침내 몽고(蒙古)에 굴복(屈服)하고 왕자(王子)를 보내어 화친(和親)하기를 청(請)하니 원(元)나라(몽고(蒙古)) 세조(世祖) 홀필열(忽必烈)이 뜻밖의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 왈(曰) 고려(高麗)는 만리(萬里)의 나라이라 당태종(唐太宗)이 치다가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왕자(王子)가 오니 이는 하늘이 시킴이라 하고 후(厚)히 접대(接待)하고 군사(軍士)로 호위(扈衛)시켜서 본국(本國)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동안에 고종(高宗)이 승하(昇遐)하고 왕자(王子)가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이가 원종(元宗)이다. 원종(元宗) 시대(時代)는 전쟁(戰爭)이 겨우 끝나고 그 뒤를 정리(整理)하는 가장 복잡(複雜)한 때라 첫째로 삼십년(三十年)동안 도읍(都邑)하던 임시수도(臨時首都) 강화도(江華島)로부터 송경(松京)에 환도(還都)한 것이오 둘째로 환도(還都)한 뒤 삼별초(三別抄)가 반란(叛亂)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내려가서 관군(官軍)과 싸우다가 패(敗)하여 다시 제주도(濟州道)에 들어가더니 마침내 관군(官軍)에게 망(亡)하였다.

이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에 대(對)하여 지금의 어떤 학자(學者)는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으로써 몽고(蒙古)에 항전(抗戰)하는 의거(義擧)라 하여 찬양(讚揚)하고 있으나 삼별초(三別抄)는 원래(元來) 최씨(崔氏)의 수족(手足)으로써 몽고란(蒙古亂)중 가장 안락(安樂)한 도중(島中)생활(生活)을 하고 항적(抗敵)의 진(陣)에 참가(參加)한 일리 없고 최씨(崔氏)가 망한 뒤에 여전(如前)히 강화도(江華島)에 있어 육지(陸地)에 나와 싸운 일이 없었으니 이것을 항전파(抗戰派)라고 부를 수 없음은 물론(勿論)이오 환도후(還都後)에 그 조직(組織)을 고쳐서 관군(官軍)으로 개편(改編)하려하매 그들은 과거(過去)의 특수(特殊)존재(存在)로서의 특권(特權)이 상실(喪失)됨에 불만(不滿)을 품고 반란(叛亂)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로 동북면(東北面)의 쌍역(雙域)에 있는 관리(官吏)들이 본국(本國)을 배반(背叛)하고 화주(和州 永興) 이북(以北)의 땅으로써 원(元)나라에 부속(附屬)한 것이다. 이로부터 원(元)나라가 고려(高麗)의 종주국(宗主國)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가 일본(日本)을 칠 터이니 고려(高麗)도 힘을 합(合)하라 하여 충렬왕(忠烈王)이 임금이 되던 해에 (단기 삼천육백칠년) 고려(高麗)에서 만든 전함(戰艦) 구백척(九百隻)으로 합포(合浦)(지금의 마산부근)를 떠나서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를 무찌르고 구주(九州)의 박다(博多)를 점령(占領)하였으나 폭풍우(暴風雨)가 일어나서 전함(戰艦)이 많이 파손(破損)되었음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그 후(後) 칠년(七年)만에 다시 몽고군(蒙古軍)과 중국(中國)의 강남군(江南軍)과 고려군(高麗軍)이 연합(聯合)하여 일본(日本)을 치러 갔으나 이번에도 대풍(大風)이 일어나서 강남군(江南軍)이 거의 전멸(全滅)하고 헛되이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에 중국(中國)의 전함(戰艦)은 대개(大槪) 파손(破損)되었으나 고려(高麗) 전함(戰艦)의 파손(破損) 된 것이 극(極)히 적은 것은 백제시대(百濟時代) 이래(以來) 아국(我國)의 조선기술(造船技術)이 우수(優秀)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려(高麗)는 백여년(百餘年)동안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는 사이에 나라 정치(政治)는 전(專)혀 원(元)나라의 의사(意思)에 의하여 행(行)하여졌다. 충렬왕(忠烈王)이후(以後)로는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의 공주(公主)에게 장가를 들어서 원(元)나라 임금의 사위가 되고 그 공주(公主)가 낳은 아들이 왕위(王位)에 오르게되니 고려(高麗)왕실(王室)은 혈통적(血統的)으로도 원(元)나라의 지배(支配)를 받게 되었고 임금의 시호(諡號)는 종전(從前)의 종자(宗字)를 폐(廢)하고 그 머리에 충자(忠字)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代代)로 왕(王)이 원(元)나라 대도(大都)에 별저(別邸)를 두고 거기 내왕(來往)이 잦으니 그 비용(費用)도 적지 아니하여 국가(國家)재정(財政)이 극(極)히 곤란(困難)하였지만 정치(政治)의 명령계통(命令系統)이 헝클어져서 본국(本國)에서 발(發)한 명령(命令)이 원(元)나라 대도(大都)로부터 저지(沮止) 당(當)하는 일도 있고 원(元)나라에 아부(阿附)하여 권세(權勢)를 얻으려 하여 본국(本國)을 무함(誣陷)하는 폐주견(吠主犬)들이 양국(兩國)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면서 정부(政府)나 임금이 알지 못하는 정령(政令)을 발(發)하는 일도 있어 나라 기강(紀綱)이 여지(餘地)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폐주견(吠主犬)들은 심지어(甚至於) 본국(本國)의 국호(國號)를 폐(廢)하고 원(元)나라의 일지방(一地方)으로 만들자는 운동(運動)까지 일어나니 충선왕(忠宣王)은 체읍(涕泣)하면서 사백년(四百年)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이 나의 몸에 이르러 떨어지게 되니 어찌 통심(痛心)한 일이 아니랴하고 이제현(李濟賢) 등(等)으로 더불어 원(元)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겨우 무사(無事)함을 얻은 일도 있었다.

이때 왕실(王室)로부터 민간(民間)에 이르기까지 원(元)나라 풍습(風習)이 흘러 들어오고 한편(便)으로는 문화(文化)의 수입(輸入)도 활발(活潑)하여 안향(安珦)이 孔子의 도상(圖像)과 유교의식(儒敎儀式)을 중국(中國)으로부터 직접(直接) 가져 온 것도 이때의 일이오 충선왕(忠宣王)은 원(元)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이루고 조맹부(趙孟頫)등(等) 대학자(大學者)들과 사귀어 한때 대륙(大陸)문화(文化)의 중심(中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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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문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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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政治)의 문란(紊亂)

 

고려(高麗)는 농업(農業)으로써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삼았음으로 토지생산(土地生産)은 국민생활(國民生活)의 기초(基礎)가 되고 국가재정(國家財政)의 지주(支柱)가 되고 호구(戶口)의 정비(整備) 군사(軍士)의 징발(徵發) 등(等)이 모두 토지(土地)의 수수제도(授受制度)로부터 출발(出發)하였으니 국가(國家)의 흥폐(興廢), 정치(政治)의 선부(善否)가 모두 토지제도(土地制度)의 여하(如何)에 달려 있었다. 몽고란(蒙古亂) 이후(以後)로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헝클어짐을 따라 가장 먼저 폐해(弊害)를 생(生)한 것이 토지제도(土地制度)였다.

처음에 관리(官吏)의 봉급(俸給)으로써 농민(農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의 수조권(收租權)을 준 것은 다만 현물(現物) 운반(運搬)의 불편(不便)을 덜기 위(爲)한 방편(方便)에 불과(不過)한 것이오 그 관리(官吏)에게 토지(土地)를 준 것은 아니오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관리(官吏)와 농민(農民)과의 사이에 신분적(身分的)으로 노주관계(奴主關係)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토지(土地) 생산물(生産物)의 십분일(十分一)을 관리(官吏)에게 주면서도 부역(賦役)이나 호세(戶稅)는 국가(國家)에 바친 것이니 이것은 다른 나라의 봉건사회(封建社會)의 농노제(農奴制)와는 그 성질(性質)이 전연(全然) 다르다.

그런데 국가(國家)의 질서(秩序)가 한번 헝클어지자 권신(權臣) 귀족(貴族) 토호(土豪)들은 그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농민(農民)에 대(對)하여 국가(國家)의 호구장(戶口帳)에서 삭거(削去)하고 국가(國家)에 바쳐야 할 부역(賦役)과 호세(戶稅)를 자기(自己)가 사취(私取)하니 국가(國家)의 공민(公民)의 수(數)는 날로 줄어들고 이 까닭에 호적(戶籍)이 헝클어지고 또 토지수수법(土地授受法)이 제대로 실행(實行)되지 못함으로 인(因)하여 병역(兵役)을 부담(負擔)할 장정(壯丁)의 수(數)도 알 수 없이 되었다.

한편(便)으로 간인(奸人)의 무리가 함부로 농간(弄奸)을 하여 일찍 관리(官吏)가 병정(兵丁)을 들어간 일이 없이 전시과(田柴科)의 토지를 도적(盜賊)해 먹으며 아비는 공전(公田)을 사사(私私)로이 아들에게 세습(世襲)시키고 아들은 이를 은익(隱匿)하여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니 고려(高麗) 토지(土地) 一百七十餘萬結 中에서 國家의 土地帳에 남아있는 土地가 七八十萬結 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 農民 한 집의 경작(耕作)하는 토지(土地)에 대하여 수조권(收租權)을 가지고 있다고 자칭(自稱)하는 자가 六七人에 달(達)하는 일도 있어 어느 사람이 국가(國家)에서 인정(認定)한 수조권(收租權)자인지 알 수 없고 이 까닭에 농민(農民)이 지은 일년(一年) 농사(農事)는 모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전수(公田數)가 줄어들고 국가(國家)에 들어가는 전조(田租)가 또한 중간(中間)에서 횡령(橫領)되어 국가재정(國家財政)은 말할 수 없이 군색(窘塞)하였고 혹(或) 현상(賢相)이 들어 있어 이 폐해(弊害)를 그치려하되 반근착절(盤根錯節)한 권신(權臣)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농민(農民)들은 하루바삐 정국(政局)에 대변동(大變動)이 생겨서 새로운 정치(政治)가 나오기를 갈망(渴望)하였다.

세상(世上)일이 이와 같이되니 관리(官吏)의 부패(腐敗)는 극도(極度)에 달(達)하여 민재(民財)를 빼앗아 먹기를 항다반사(恒茶飯事)로 하니 이때의 사관(史官)들은 이를 평(評)하여 말하되 응견(鷹犬)을 치토(雉兎)의 장(場)에 방(放)함과 같다고 하였다.

고려(高麗)문화(文化)에 중심(中心)이 되고 있는 불교(佛敎)에도 폐해(弊害)가 생(生)하여 승려(僧侶)들은 특권(特權)을 믿고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마음대로 하고 사찰(寺刹)에서 음범(淫犯)을 행(行)하는 일도 적지 아니하여 정계(政界)와 함께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여기에 불만(不滿)을 가진 유신중(儒臣中)에는 불교(佛敎)를 배척(排斥)하는 소리가 점점(漸漸) 높아지고 유교(儒敎) 장려(獎勵)의 선진(先陣)에 나선자(者)가 안향(安珦)이다. 안향(安珦)는 中國으로 부터 孔子圖像과 유교(儒敎)의 모든 의식(儀式)을 전(傳)해오고 또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 즉(卽) 성리학(性理學)을 가져와서 후진(後進)을 가르치니 이것이 우리 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이 뿌리를 뻗은 시초(始初)이오 이어서 이색(李穡)(호(號) 목은(牧隱)) 정몽주(鄭夢周)(호(號) 포은(圃隱)) 같은 대유(大儒)를 생(生)하니 당시(當時) 정몽주(鄭夢周)는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조(祖)라 칭(稱)하였고 이 연원(淵源)이 이조(李朝)에 흘러 내려가서 성리학(性理學)의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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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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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外國)관계(關係)

 

원(元)나라가 아세아(亞細亞) 대륙(大陸)에 대제국(大帝國)을 건설(建設)한지 八九十年에 차츰 그 힘이 기우러져서 사방(四方)에 도적(盜賊)이 일어나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는 형편(形便)이라 공민왕(恭愍王)은 세자(世子)때에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이러한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이 기회(機會)에 원(元)나라 세력(勢力)을 물리치기로 하고 왕(王)의 오년(五年)(단기 삼육팔구년)에 원(元)나라에서 고려(高麗)에 설치(設置)하여둔 정동행자(征東行者)를 파(罷)하고 전일(前日)에 원(元)나라에게 빼앗긴 동북면(東北面)의 땅과 나아가서는 요동(遼東) 등지(等地)를 도로 찾으려하여 인당(印璫)으로 하여금 압록강(鴨綠江)저편(便)의 팔참(八站)을 치고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동북면(東北面)의 쌍성(雙城) 이북(以北)을 수복(收復)하게 하니 이것은 오랜 동안 북방(北方) 민족(民族)에게 눌려서 피어나지 못하던 대고구려주의(大高句麗主義)가 다시 한번 광채(光彩)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때에 원(元)나라의 홍두적(紅頭賊)이란 도적(盜賊)의 무리 십여만명(十餘萬名)이 우리 나라에 근거(根據)를 잡으려 하여 쳐들어 왔다. 고려(高麗)로서는 뜻밖의 일이오 도적(盜賊)의 기세(氣勢)는 매우 사나웠음으로 왕(王)은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등지(等地)로 피난(避難)하니 적(賊)이 송경(松京)을 함락(陷落)시켜서 궁궐(宮闕)과 모든 재보(財寶) 문헌(文獻)이 탕진(蕩盡)하였다. 수일(數日)후(後)에 정세운(鄭世雲)이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등(等) 삼원수(三元帥)로 더불어 겨우 쳐서 파(破)하니 적(敵)의 태평(太平)은 죽고 나머지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서 달아났다.

왕(王)은 기어(期於)코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려하여 이성계(李成桂)등(等)으로 하여금 요양성(遼陽城)을 쳐서 떨어뜨리고 遼東의 官民에게 榜을 내 걸어 우리의 目的은 한때 잃어버린 고지(故地)를 찾으려 함에 있다하고 타일렀다. 이는 물론(勿論) 요하(遼河)까지가 본시(本是) 우리의 지경(地境)임을 말함이겠지만 이때 형편(形便)으로도 원(元) 나라가 고려(高麗)를 누르고 국경(國境)을 南으로 뻗은 반면(反面)에 백성(百姓)들은 이 분명(分明)치 않은 지경(地境)을 믿어서 전(前)날 보다도 더 북(北)쪽으로 나갔음으로 요동(遼東) 평야(平野)에 고려(高麗)사람이 많이 살아서 요양(遼陽)에 고려군민총독부(高麗軍民總督府)가 생기더니 이때 마침 고려(高麗)의 국정(國情)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그 때문에 대륙정책(大陸政策)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나라는 북(北)으로 만주대륙(滿洲大陸)과 접(接)하고 동(東)으로 일(一) 해협(海峽)을 격(隔)하여 일본(日本)과 이웃하고 있음으로 외교관계(外交關係)와 국방(國防)관계(關係)는 항상(恒常)이 두 방면(方面)에서 생겼다.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왜구(倭寇)는 고려(高麗)를 멸망(滅亡)케 한 일인(一因)이 된 대사건(大事件)이라 원래(元來) 왜구(倭寇)는 일본(日本)사람의 해적(海賊)떼로서 고려(高麗) 중엽(中葉)부터 고려(高麗)와 송(宋)나라의 해안지방(海岸地方)을 노략(擄掠)질 하여 대대(代代)로 내려오면서 약탈(掠奪) 강도(强盜)로 업(業)을 삼는 무리들이었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이르러 왜구(倭寇)가 더욱 심(甚)하여 해안지방(海岸地方)은 물론(勿論)이오 차츰 육지(陸地)로 들어오고 또 남방(南方)을 휩쓴 뒤에 북(北)으로 뻗어서 경기도(京畿道)의 강화(江華) 풍덕(豊德)같은 서울의 지척(咫尺)에까지 미쳤다.

해안지방(海岸地方) 사람들은 안도(安堵)하고 살 수 없음으로 깊이 육지(陸地)로 들어가고 양전옥답(良田沃畓)에 갈대가 무성(茂盛)하니 우리 나라에서 가장 곡식(穀食)이 많이 나는 토지(土地)는 주(主)로 연해안(沿海岸)에 있는데 해안지방(海岸地方)에 농민(農民)이 살지 못하고 모든 토지(土地)가 황무(荒蕪)로 화(化)한 까닭에 국내(國內)의 식량(食糧)이 부족(不足)하고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이 또한 군색(窘塞)하였다.

이와 같이 왜구(倭寇)가 삼십여년(三十餘年)을 계속(繼續)하는 동안에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여러 차례로 왜구(倭寇)를 대파(大破)한 일이 있고 최무선(崔茂宣)이 원(元)나라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製造)하는 방법(方法)을 배워 아국(我國) 최초(最初)의 화기(火器)를 만들어서 전라도(全羅道) 진포(鎭浦)에서 왜구(倭寇)의 배 삼백척(三百隻)을 단번(單番)에 무찌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왜구(倭寇)의 기세(氣勢)는 좀처럼 줄어들지 아니하고 우왕(禑王)때에는 왕도(王都)를 깊은 육지(陸地)로 옮기자는 議論도 일어나고 정몽주(鄭夢周)를 일본(日本)에 보내어 왜구(倭寇)를 금(禁)해 달라고 청(請)한 일도 있었으며 임진강(臨津江) 어구(於口)로부터 남안(南岸)을 거쳐 멀리 동해안(東海岸)의 함주(咸州) 해안(海岸)에 이르기까지 연장(延長) 四千里의 땅이 모두 왜구(倭寇)의 난무(亂舞)장(場)이 되었고 어떤 곳에는 연작(鷰雀)이 임목(林木)에 귀소(歸巢)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왜구중(倭寇中)에는 일본(日本) 해적(海賊)만 있는 것이 아니오 고려(高麗)사람으로서 지방관리(地方官吏)에게 불만(不滿)을 품은 자(者)와 생활(生活)이 곤난(困難)한 자(者)가 왜구(倭寇)노릇을 하는 가(假) 왜구(倭寇)도 적지 아니하여 방비(防備)가 허소(虛疎)한 곳에는 반드시 왜구(倭寇)가 출몰(出沒)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왜구(倭寇)의 대부대(大部隊)가 전라도(全羅道) 운봉(雲峰)으로 모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부하장(部下將) 동두란(佟豆蘭)과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황산(荒山) 서북(西北)에서 크게 싸워서 왜구(倭寇)의 아지발도(阿只拔都) 대장(大將)을 죽이고 그 무리를 쳐 없애니 이로부터 왜구(倭寇)의 기세(氣勢)가 꺾이어서 다시 전일(前日)과 같이 횡행(橫行)하지 못하였고 이성계(李成桂)가 개선(凱旋)하는 대로(大路)변(變)에는 백성(百姓)들이 모여 나와서 환영(歡迎)하고 최영(崔瑩)은 이성계(李成桂)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 공(功)을 칭사(稱謝)하니 이에 이성계(李成桂)의 위망(威望)이 일세(一世)를 덮어서 후일(後日) 혁명(革命)의 기지(基地)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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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멸망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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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의 멸망(滅亡)

 

공민왕(恭愍王) 말년(末年)에 원(元)나라가 북(北)으로 쫓겨가고 명(明)나라가 중원(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단기 삼천칠백일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대륙(大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두 가지 의견(意見)이 대립(對立)되었다. 최영(崔瑩)은 오래 동안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사정(事情)을 잘 알고 있음으로 원(元)나라와 명(明)나라의 현(現) 세력(勢力)이 아직 정(定)해진 것이 아니니 우리는 원(元)나라와 사귀고 명(明)나라를 누르면서 이 기회(機會)에 요동(遼東)을 회복(恢復)하여 국세(國勢)를 다시 한번 떨쳐보자 하고 이성계(李成桂)는 명(明)나라가 이미 중원(中原)을 차지하였으니 우리는 천하(天下)의 대세(大勢)에 어김없이 원(元)나라에 대(對)하던 태도(態度)로써 명(明)나라를 대(對)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主張)하니 이것이 소위(所謂)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와의 대립(對立)이다. 그러던 차(次)에 명(明)나라는 차츰 요동(遼東)을 평정(平定)하고 우왕(禑王) 십사년(十四年)에 이르러서는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 장차(將次) 압록강(鴨綠江)이쪽의 땅을 빼앗으려 하니 최영(崔瑩)이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하여 명(明)나라를 치기로 결정(決定)하니 이성계(李成桂)는 여러 번 왕(王)에게 글을 올려 반대(反對)하였다.

최영(崔瑩)은 조금도 북벌(北伐)계획(計劃)을 굽히지 아니하고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王)과 함께 서경(西京)으로 나가서 조민수(曹敏修)와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군사(軍士) 오만(五萬)을 거느리고 가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이성계(李成桂)에게 대군(大軍)을 주어서 그 계획(計劃)을 실현(實現)하려 한 것이 최영(崔瑩)의 일대실책(一大失策)이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서 위화도(威化島) (을혜섬)에 머무는 차에 조민수(曹敏修)를 달래어 장마철에 많은 군사(軍士)가 강(江)을 건너가기 어렵고 또 명(明)나라는 새로 일어나서 그 강대(强大)한 기세(氣勢)를 대적(對敵)하기가 쉽지 아니하니 여기서 회군(回軍)하는 것이 옳다하고 풍우(風雨)같이 서경(西京)을 향(向)하여 행진(行進)하니 이것은 분명(分明)히 왕명(王命)을 거역(拒逆)하는 일이라 군사중(軍士中)에서는 벌써 목(木)자(子) 득국(得國)이라는 요언(謠言)이 성행(盛行)하고 최영(崔瑩)은 왕(王)과 함께 형세(形勢)가 이미 틀리고 이성계(李成桂)의 손에 잡혀 죽으니 국인(國人)이 최영(崔瑩)의 죽음을 듣고 도하(都下)가 모두 철시(撤市)하여 조(弔)하고 원근(遠近)의 남녀노소(男女老少) 없이 모두 서로 붙들고 울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의 아들을 세우니 이가 창왕(昌王)이다. 이로부터 이성계(李成桂)가 권세(權勢)를 한 손에 잡고 안으로는 그의 반대파(反對派)를 몰아내고 밖으로는 명(明)나라와 친(親)하여 고려(高麗)의 운명(運命)은 이미 조석(朝夕)으로 보전(保全)하기 어렵게 되었다.

처음에 공민왕(恭愍王)때에 승(僧) 신돈(辛旽)을 써서 국정(國政)을 맡겼다가 실정(失政)을 보고 신돈(辛旽)을 죽였는데 우왕(禑王)은 혹(或)은 공민왕(恭愍王)의 아들이라 하고 혹(或)은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왕실(王室)을 중심(中心)으로 기괴(奇怪)한 풍설(風說)이 크게 유행(流行)하니 우왕(禑王)을 왕대(王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왕대(王代) 조정(朝廷)을 지지(支持)하려는 사람이오 신대(辛代)라 하는 것은 주(主)로 이성계(李成桂)를 중심(中心)으로 한 혁명파(革命派)이다. 이성계(李成桂)는 우왕(禑王)을 신대(辛代)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그 아들 창왕(昌王) 또한 신대(辛代)의 혈통(血統)이라 하여 몰아내어 죽이고 왕대(王代)중에서 가장 암약(暗弱)한 공양왕(恭讓王)을 세우니 이때로부터는 이미 이성계(李成桂)의 천하(天下)가 되고 만 것이다.

고려(高麗)의 전제(田制)는 문란(紊亂)할대로 문란(紊亂)하여 이를 사무적(事務的)으로 바로잡을 수 는 없었다. 이에 조준(趙浚) 등(等)이 사전(私田) 개혁(改革)을 주장(主張)하여 훈신(勳臣) 귀족(貴族)들의 맹렬(猛烈)한 반대(反對)가 있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이 이를 지지(支持)하여 고려(高麗)가 망(亡)하기 전(前)해인 공양왕(恭讓王) 삼년(三年)에 옛날의 과전제(科田制)를 부활(復活)하는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斷行)하고 사전(私田) 문권(文券)을 서울의 한 복판에 쌓아 놓고 만민(萬民) 환시중(環視中)에 불살라 버리니 이로써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은 농민(農民)들의 환영(歡迎)을 받고, 한편(便) 묵은 귀족(貴族)들의 세력(勢力)을 무너뜨리어 세력(勢力)은 더욱 커지고 또 국가(國家)의 재원(財源)을 넉넉하게 하여 이씨조선(李氏朝鮮) 건국(建國)의 경제적(經濟的) 기초(基礎)를 삼았다.

우리 나라 의복(衣服) 자료(資料)는 마포(麻布)가 가장 주(主)되고 그밖에 중국(中國)으로부터 수입(輸入)되는 면포(綿布) 등(等)이 있고 농촌(農村)의 세민층(細民層)은 구피(狗皮)를 입는 자(者)도 적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중(中) 공민왕(恭愍王)때에 문익점(文益漸)이 중국(中國)에 갔다가 교지(交趾베트남)로부터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가져오는데 이때 원(元)나라에서는 면화(棉花) 종자(種子)를 외국(外國)에 보내는 것을 엄금(嚴禁)하고 있었음으로 문익점(文益漸)은 필관(筆管)속에 비밀(秘密)히 넣어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우리 나라 면화(棉花) 재배(栽培)의 시초(始初)이며 고려(高麗)가 망(亡)할 무렵에 전국(全國)에 퍼져서 우리 나라 의복계(衣服界)에 일(一) 신기원(新紀元)을 그었던 것이다.

고려(高麗)의 왕실(王室)을 지켜가고 이성계(李成桂)의 세력(勢力)을 눌러 보려고 하는 사람들 중(中)에 그 중심(中心) 인물(人物)은 정몽주(鄭夢周)였다. 그러나 정몽주(鄭夢周)는 일개(一個) 문신(文臣)이라 아무 무력적(武力的) 실력(實力)이 없더니 공양왕(恭讓王) 사년(四年)에 이성계(李成桂)가 해주(海州)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상(傷)하였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이를 기회(機會)로 이성계(李成桂)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송경(松京)에 돌아오고 그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자객(刺客) 조영규(趙英珪)를 보내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鄭夢周)를 처 죽였다.

정몽주(鄭夢周)가 죽자 고려(高麗)의 운명(運命)도 이와 함께 다 하였다. 그해 칠월(七月)에 이성계(李成桂)는 공양왕(恭讓王)을 폐(廢)하여 원주(原州)로 내치고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이태조(李太祖)이오 (단기 삼천칠백이십오년) 임신(壬申) 고려는 삼십사왕(三十四王) 四百七十五年으로 끝마쳤다.

高麗時代는 三國時代의 무용(武勇)의 유풍(遺風)이 있어 능(能)히 계단(契丹) 몽고(蒙古) 홍건적(紅巾賊) 왜구(倭寇)와 같은 대적(大敵)을 막아 싸우니 당시(當時)의 유물(遺物)로서 건축(建築)에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 조각(彫刻)에 은진(恩津)의 미륵불(彌勒佛) 등(等)은 미술(美術)로도 유명(有名)하거니와 그 굳세고 힘찬 모습은 그때 사람의 기질(氣質)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엽(末葉)에 이르러 종래(從來)에 국난(國難)이 있을 때는 귀족(貴族)의 자제(子弟)가 진(陣)의 선두(先頭)에 나서던 진실(眞實)한 풍(風)이 없어지고 세력(勢力)이 있는 자(者)들이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하는 풍(風)이 생(生)하니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에 유학(儒學)을 배우는 학생(學生)들이 우리는 공자묘(孔子廟)를 지키는 유생(儒生)들이니 전쟁(戰爭)에 나갈 수 없다고 정부(政府)에 청원(請願)한바 그때 정승(政丞) 염제신(廉悌臣)이 엄책(嚴責)하여 왈(曰) 국난(國難)이 있을 때에 귀족(貴族)자제(子弟)들이 먼저 칼을 잡고 나가는 것은 조종(祖宗) 이래(以來)의 상규(常規)라 너희들이 공자묘(孔子廟)를 빙자(憑藉)하는 것은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함이라 너희들이 지키지 아니하면 공자묘(孔子廟)가 어디로 도망(逃亡)가느냐 하고 일제(一齊)히 전쟁(戰爭)에 내어 보낸 일이 있으니 이것이 고려(高麗)사람의 기질(氣質)의 변함이오 이 변화(變化)한 기질(氣質)이 이조(李朝)에 상속(相續) 되었다.

고려사회(高麗社會)의 부패(腐敗)는 혁명(革命)을 불렀고 혁명(革命)은 사회발전(社會發展) 과정(科程)에 있어서 일대(一大) 청신제(淸新劑)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는 공민왕(恭愍王) 삼년(三年)에 이미 전제(田制)를 개혁(改革)한 뒤에 자기(自己)가 국왕(國王)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정치개혁(政治改革)에 대(對)한 주장(主張)을 내 세운 것이 없고 다만 왕대(王代) 사직(社稷)을 빼앗으려는 권력(權力) 다툼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조신중(朝臣中)에는 이성계(李成桂)의 혁명(革命)에 대(對)하여 강렬(强烈)한 반대(反對)를 한 자(者)가 적지 아니하고 그 중(中)에는 송경(松京)의 두문동(杜門洞)에 숨어서 일생(一生)을 이씨(李氏)의 앞에 무릎을 굴(屈)치 안한 자(者) 있으니 이를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한다.

칠십이현(七十二賢)과 그 자손(子孫)들은 이씨(李氏)에 복(服)하지 아니하고 혹(或)은 유기(柳器) 피혁장(皮革匠)등 천업(賤業)을 하는 자(者)도 있고 혹(或)은 상업(商業)에 몸을 던져 송경(松京)과 연안(延安) 배천(白川)의 사이를 왕래(往來)하는 자(者)도 있었으니 지금의 개성(開城) 사람의 상업술(商業術)이 일국(一國)에 유명(有名)하고 개성상업부기(開城商業簿記)가 서양식(西洋式) 부기(簿記)와 병칭(倂稱)되고 있는 것은 당시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의 창안(創案)으로 된 까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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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건국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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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李朝)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

임신(壬申)

기묘(己卯)

신사(辛巳)

기해(己亥)

신미(辛未)

계유(癸酉)

7

2

18

32

2

3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인종(仁宗)

병자(丙子)

기축(己丑)

경유(庚酉)

을묘(乙卯)

병인(丙寅)

을사(乙巳)

13

1

25

11

39

1

명종(明宗)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병오(丙午)

무진(戊辰)

을유(乙酉)

계해(癸亥)

경인(庚寅)

경자(庚子)

22

41

14

27

10

15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헌종(憲宗)

을묘(乙卯)

신축(辛丑)

을사(乙巳)

정유(丁酉)

신유(辛酉)

을미(乙未)

46

4

52

24

34

15

철종(哲宗)

광무황제(光武皇帝)

융희황제(隆熙皇帝)

 

 

 

경술(庚戌)

갑자(甲子)

정미(丁未)

 

 

 

14

44

4

 

 

 

비고(備考)

一. 고려(高麗)왕실(王室)이 없어진 것은 태조(太祖)가 한양(漢陽)에 이도(移都)하니 전(全) 백성(百姓)이 송경(松京)에 회귀(回歸)하기에 뜻을 두니 태종(太宗)이 부하(部下)로 하여금 망월대(望月臺)를 불살라 버리라

二. 개국(開國)초(初)에 무국호(無國號)하여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라 칭(稱)하고 명국(明國)에서 태조(太祖)가 왕위(王位)에 오름을 승낙(承諾)받고 화녕(和甯, 寧)과 조선(朝鮮)이라는 두 이름에서 조선(朝鮮)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이조(李朝)는 명(明)의 아유국(阿諛國))

三. 태조(太祖)는 백성(百姓)을 위하여 혁명(革命)함이 아니라 다만 일생(一生)에 왕위(王位)를 차지하려고 명국(明國)에 아유(阿諛)해서 겨우 임금이 되니 이태조(李太祖)는 명(明)에서 명령(命令)하면 모두 응(應)하였다.

 

이조(李朝)건국(建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선조(先祖)는 본시(本是) 함경도(咸鏡道)에 살았는데 그 고조부(高祖父)가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벼슬을 하고 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 경흥(慶興)에 살더니 태조(太祖)의 어버이 이자춘(李子春)은 영흥(永興)에 살고 거기서 태조(太祖)를 낳으니 이때 영흥(永興)은 쌍성총독부(雙城總督府)로 되어 원(元)나라에 속(屬)하였다. 공민왕(恭愍王)때에 유인우(柳仁雨)가 쌍성(雙城)을 칠 때에 이자춘(李子春)이 이를 도와서 공(功)이 있었음으로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 겸(兼)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함주(咸州)를 중심(中心)으로 하여 큰 세력(勢力)을 가졌고 이때 태조(太祖)는 나이 젊었으나 특출(特出)한 무예(武藝)가 있었음으로 함주(咸州) 이북(以北)에 살고 있는 여진족(女眞族)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으며 후일(後日)에 태조(太祖)가 자주 큰 공(功)을 세운 것도 그 수하(手下)에 동두란(佟豆蘭) 이하(以下) 여진(女眞) 출신(出身)의 맹장(猛將)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 한다.

태조(太祖)가 건국(建國)한 이듬해에 국호(國號)를 고쳐서 조선(朝鮮)이라 하고 삼년(三年) 후(後)에 도읍(都邑)을 지금의 서울에 옮기고 경복궁(景福宮)을 짓고 성(城)을 쌓아서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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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정치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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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李朝)정치(政治)

 

一. 토지제도(土地制度)이니 고려시대(高麗時代)는 토지(土地)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장정(壯丁)에 따라서 수수(授受)하더니 태조(太祖)가 공민왕(恭愍王) 삼년(三年)에 개혁(改革)한 전제(田制)는 다만 사전(私田)을 폐(廢)하고 과전제(科田制)를 부활(復活)한 것이 고려(高麗)의 전제(田制)와 같을 뿐이오 토지(土地)를 농민(農民)에게 분배(分配)한 것은 장정(壯丁) 수수(授受)제(制)가 아니라 대개(大槪) 농민(農民)이 현재(現在) 경작(耕作)하고 있는 토지(土地)를 그 농가(農家)에 주는 것을 원칙(原則)으로 한 까닭에 각(各) 농가(農家)의 경작면적(耕作面積)에 많고 적은 차이(差異)가 생겼다.

그러므로 토지(土地)는 비록 고려(高麗)의 국유제(國有制)를 그대로 계승(繼承)하고 있으나 각(各) 농가(農家)의 경지(耕地)는 영구(永久) 경작권(耕作權)의 형태(形態)로 되어 있어 그 속에 후일(後日) 사유지(私有地)로 될 싹을 포장(包藏)하고 있으며 그 경작지(耕作地)는 국법(國法)에 의하여 자유(自由)로 매매(買賣) 전당(典當)하는 것을 금(禁)하고 있으나 이것은 완전(完全)히 국유제(國有制)가 사유제(私有制)로 변(變)해 넘어가는 과도기적(過渡期的) 형태(形態)이었다.

二. 高麗는 佛敎로서 국교(國敎)를 삼고 각지(各地)에 수다(數多)한 사찰(寺刹)을 세우고 왕실(王室)로부터 민간(民間)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식(儀式)은 불교식(佛敎式)을 썼다. 그러나 말엽(末葉)에 이르러 불교(佛敎)의 폐(廢)가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이조(李朝)는 불교(佛敎)를 극도(極度)로 배척(排斥)하여 사찰(寺刹)의 대부분(大部分)을 헐어버리고 사찰토지(寺刹土地)를 몰수(沒收)하고 유교(儒敎)로서 국교(國敎)를 삼고 특(特)히 중국(中國)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을 존숭(尊崇)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依)하여 집마다 가묘(家廟)를 만들게 하고 정주학(程朱學) 이외(以外)의 학문(學文)은 모두 이단(異端)이라 하여 일체(一切)로 용납(容納)치 못하게 하였다. 인위적(人爲的) 국민사상(國民思想) 통일(統一)의 결과(結果)는 학풍(學風)이 편협(偏狹)하여 배타성(排他性)이 강(强)하고 사상(思想)의 침체(沈滯)를 초래(招來)하여 생발(生發)의 기(氣)가 없었다.

三. 고려(高麗)에 무신횡포(武臣橫暴)의 폐(弊)가 크고 이성계(李成桂) 자신(自身)도 무신(武臣)으로써 왕대(王代)의 사직(社稷)을 빼앗았음으로 이조(李朝)는 무신(武臣)을 누르고 문신(文臣)을 높여서 국가대사(國家大事)는 전(專)혀 문신(文臣)의 손에 의(依)하여 행(行)하니 이 까닭에 사회(社會)는 문약(文弱)에 빠져서 외적(外敵)이 쳐들어오면 나아가 막을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恒常) 퇴굴(退屈)하였으며 귀족(貴族)의 자제(子弟)는 물론(勿論)이오 그 일문(一門)까지도 병역(兵役)을 면제(免除)하고 오직 무세무력(無勢無力)한 한문미족(寒門微族)의 사람들만 군병(軍兵)으로 만들었다.

四. 혁명(革命)을 일으킨 이론(理論)이 광명정대(光明正大)치 못하여 고려유민(高麗遺民)들의 반대(反對)가 강열(强烈)하였음으로 이조(李朝)는 왕대부흥운동(王代復興運動)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건국(建國)한지 삼년(三年)에 전국(全國)의 왕대(王代)를 노소(老少)없이 모두 잡아서 학살(虐殺)하니 이때 왕대(王代)를 강화도(江華島)와 남해(南海) 여러 섬에 보내어 안주(安住)시킨다 하고 배에 싣고 들어가다가 물 속에 넣어 죽인 자(者)도 팔백여명(八百餘名)이오 개성(開城)으로부터 이북(以北)의 평안도지방(平安道地方)에 사는 왕대(王代)들은 모두 도망(逃亡)하여 요동(遼東)으로 들어가니 지금 만주(滿洲)지방(地方)에 다른 성(姓)보다 특(特)히 왕대(王代)가 많은 것은 이 까닭이라 하며 외국(外國)으로 도망(逃亡)할 수 없는 왕대(王代)들은 성자(姓字)를 고쳐서 옥(玉) 전(全) 전(田) 차(車) 등(等)으로 변(變)하니 혁명후(革命後)에 전조(前朝) 왕족(王族)을 일인(一人)도 남기지 아니하고 학살(虐殺)한 것은 아국(我國)유사(有史) 이래(以來) 오직 이조(李朝)뿐이었다. 한편(便)으로 황해도(黃海道) 평안도(平安道) 지방(地方)에서 왕대(王代)를 받들고 반란(叛亂)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개성(開城) 이북(以北)의 사람을 조정(朝廷)의 대관(大官)에 쓰지 아니하고, 함경도(咸鏡道)는 자기(自己)의 출신(出身)지방(地方)이다.

인성(人性)이 강(强)하고 만일 대용(大用)하면 이씨(李氏) 조정(朝廷)에 불리(不利)한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역시(亦是) 대관(大官)에 쓰지 아니하니 이 까닭에 이조(李朝) 오백년(五百年)동안에 서북인(西北人)은 사로(仕路)가 막힌 것이다.

五. 고려(高麗) 말엽(末葉)에 정치(政治)가 문란(紊亂)하여지자 권신(權臣)귀족(貴族)들은 국가(國家)의 관리(官吏)에 정원(定員)이 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마음대로 자기(自己) 친척(親戚)이나 특수관계(特殊關係)가 있는 者를 관리(官吏)로 쓰게되어 정원수(定員數)의 배(倍) 이상(以上)을 초과(超過)하였는데 이조(李朝) 개국후(開國後)에 관리(官吏)의 수(數)를 줄이고 관리(官吏)를 개체(改替)하려하였으나 만일 그 때문에 인심(人心)이 불안(不安)하여 동요(動搖)가 생기면 이씨(李氏) 정권(政權)의 유지(維持)에 불리(不利)할까 염려(念慮)하여 관리(官吏)의 수(數)도 줄이지 못하고 주요(主要)한 자리 외(外)에는 개체(改替)하지도 못하니 이 까닭에 재정(財政)이 곤란(困難)하고 따라서 관리(官吏)의 봉급(俸給)은 생활비(生活費)를 충족(充足)치 못하였고 이것이 이조(李朝) 오백년(五百年)동안을 통(通)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많이 생긴 주인(主因)이 되었다. (관리(官吏)수(數)가 많으면 이조시대(李朝時代)의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생긴다.)

六. 고려(高麗)의 문은 귀족(貴族)이 이미 없어지고 이씨(李氏)에 친부(親附)한 자(者)가 신귀족(新貴族)이 되었는데 이씨(李氏) 조정(朝廷)은 아직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고 어느 한 구석에서 어떠한 사건(事件)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음으로 이들 신귀족(新貴族)을 특별(特別) 대우(待遇)하고 민재(民財)를 빼앗아 먹는 것을 묵인(黙認)하기까지 하고 李氏에게 모반(謀反)하는 일을 고발(告發)하라고 장려(獎勵)하여 후(厚)한 상(賞)을 주었으니 이것이 이조(李朝) 일대(一代)에 귀족(貴族)의 횡포(橫暴)와 고발(告發)의 폐습(弊習)을 조장(助長)한 일인(一因)이 되었다.

七. 이조(李朝)가 고려(高麗)를 빼앗은 것은 사회(社會)의 발전(發展)을 위한 혁명(革命)이 아니오 다만 이씨가(李氏家)가 왕(王)노릇을 한다는 것이 주요(主要)한 목적(目的)이 되어 있으니 이것은 이대(李代) 개국후(開國後) 흔히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개국(開國)한 처음부터 추악(醜惡)한 왕위쟁탈전(王位爭奪戰)이 일어나서 오백년(五百年)동안을 끊임없이 부자(父子) 형제(兄弟) 숙질(叔姪) 등(等)의 사이에 유혈(流血)의 극(劇)을 연출(演出)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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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쟁탈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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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쟁탈(王位爭奪)

 

처음에 태조(太祖)는 송경(松京)으로부터 도읍(都邑)을 옮기려하여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과 한양(漢陽)을 친(親)히 돌아본 결과(結果) 한양(漢陽)으로 옮겨왔는데 얼마 안가서 왕자(王子)의 변(變)이 일어나서 골육(骨肉)의 참혹(慘酷)한 화란(禍亂)을 자아냈다. 태조(太祖)에게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韓)씨의 소생(所生)에 육자(六子)가 있고 신덕왕후(神德王后) 강(康)씨의 소생(所生)에 방번(芳蕃) 방석(芳碩)의 이자(二子)가 있는데 태조(太祖)의 혁명(革命) 운동(運動)에 한씨(韓氏) 소생(所生)의 방원(芳遠)(태종(太宗))의 힘이 가장 크더니 한씨(韓氏)는 개국(開國)하기 전(前)에 죽고 강씨(康氏)가 왕후(王后)로 되어 자기(自己)의 소생(所生) 방석(芳碩)으로 세자(世子)를 삼으려하니 정부(政府)대신(大臣) 중(中)에는 「평시(平時)에는 장(長)을 세우고 난시(亂時)에는 공(功)을 먼저 한다.」하여 반대(反對)한 일도 있었다.

태조(太祖)는 왕위(王位)로써 국가(國家) 전체(全體)와 관련(關聯)시키지 아니하고 이씨가(李氏家)의 사사(私事)로 생각하여 그 사랑하는 강씨(康氏)의 소생(所生) 방석(芳碩)으로써 세자(世子)를 삼으니 한씨(韓氏) 소생(所生)의 여러 형(兄)들이 불평(不平)을 품고 그 중(中)에서도 개국(開國)의 공(功)이 있는 방원(芳遠)의 불만(不滿)이 가장 컸다.

이때 세자(世子) 방석(芳碩)을 돕는 책임(責任)을 맡은 자(者)는 정도전(鄭道傳) 등(等)이라 정도전(鄭道傳) 등(等)은 여러 왕자(王子)가 불평(不平)을 품고있는 형세(形勢)를 살피고 태조(太祖)에게 말하여 왕자(王子)들의 병기(兵器)를 지니는 것을 금(禁)하고 다시 왕자(王子) 칠인(七人)을 칠도(七道)에 분견(分遣)하고자 하니 이는 왕자(王子)들을 방축(放逐)하려는 술책(術策)이다. 이에 방원(芳遠)은 크게 노(怒)하여 방번(芳蕃) 방석(芳碩)과 정도전(鄭道傳) 등(等)을 죽이고 방원(芳遠)의 형(兄) 방과(芳果)가 세자(世子)가 되니 태조(太祖)는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분(忿)함을 참지 못하여 가장 친근(親近)한 부하(部下)를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울 근처(近處)의 산사(山寺)를 逍遊하다가 멀리 北으로 行하여 舊居인 함흥(咸興) 본궁(本宮)으로 들어갔다. 이에 방과(芳果)가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정종(定宗)이오 정종(定宗) 원년(元年)에 한양(漢陽)은 골육(骨肉)의 변(變)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신도(新都)를 버리고 개경(開京)으로 돌아갔다. 정종(定宗)은 방원(芳遠)으로써 세제자(世弟子)를 삼으니 방원(芳遠)의 형(兄) 방간(芳幹)이 거기에 불만(不滿)을 품고 박포(朴苞)로 더불어 방원(芳遠)을 해(害)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박포(朴苞)는 잡혀서 죽고 방간(芳幹)은 토산(兎山)으로 쫓겨나갔다. 정종(定宗)이 임금이 된지 이년(二年)만에 하루는 세제(世弟)방원(芳遠)의 기색(氣色)이 수상(殊常)함을 보고 왕위(王位)를 방원(芳遠)에게 전(傳)하니 이가 태종(太宗)이다. 태종(太宗)은 즉위(卽位)한 후(後) 곧 한양(漢陽)으로 돌아왔는데 조신중(朝臣中)에는 개경(開京)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신도(新都)를 싫어하는 자(者)가 많아서 왕도(王都)가 안정(安定)치 못하더니 하루 밤에 개경(開京)궁궐(宮闕)이 전부(全部) 불에 타버리니 다시 개경(開京)으로 옮기자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太祖)가 함흥(咸興)에 들어간 후(後)에 조정(朝廷)에서는 자주 문안사(問安使)를 보내었으나 태조(太祖)는 분(忿)함이 풀리지 아니하여 오는 사람마다 죽여서 일인(一人)도 생환(生還)한 자(者)가 없으니 지금까지도 한번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태종(太宗)이 박순(朴淳)을 보내어 태조(太祖)의 환국(還國)하기를 청(請)하고 부자간(父子間)의 천륜(天倫)의 정(情)을 극진(極盡)하니 태조(太祖)가 감동(感動)하여 돌아왔다.

박순(朴淳)의 극진(極盡)한 말의 내용(內容)을 함흥(咸興)고노(古老)들이 구비(口碑)로 상전(相傳)하는 말에 의(依)하면 「부자(父子)가 상쟁(相爭)하여 남북(南北) 이조(二朝)가 있음과 같이 국민(國民)의 눈에 보이는데 창업(創業)한지 오래되지 못하고 인심(人心)이 안정(安定)되지 못하여 장차(將次) 무슨 변란(變亂)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어찌 부자(父子)가 상쟁(相爭)하여 나아가 국가(國家) 만년(萬年)의 기업(基業)을 떨어뜨리랴」함이라 태조(太祖)는 이 말을 듣고 대오(大悟)하여 드디어 남환(南還)을 결의(決意)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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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시기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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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建設)시기(時機)

 

태종(太宗)이 임금이 된 것은 개국(開國)한지 구년(九年)만이라 이제로부터 점차(漸次)로 건설적(建設的) 정책(政策)을 행(行)하게 되었다.

경제면(經濟面)에서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이래(以來)로 화폐제도(貨幣制度)를 여러 번 확립(確立)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태종(太宗)이 다시 착수(着手)하여 전화(錢貨)를 만들려 하였으나 그 원료(原料)되는 동(銅)이 부족(不足)함으로 주(主)로 저폐(楮幣)를 만들어 쓰게 하니 이는 지금의 지폐(紙幣)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전화(錢貨)를 신용(信用)치 않는 당시(當時) 사람들이 저화(楮貨)를 신용(信用)할 이유(理由)가 없었다. 그리하여 저폐(楮幣)의 가치(價値)가 폭락(暴落)하더니 마침내 유통(流通)이 끊어지고 전일(前日)과 같이 마포(麻布)를 교환(交換)의 매개(媒介)로 쓰고 오승포(五升布)를 표준(標準)으로 하니 오승포(五升布)라 함은 일정(一定)하여있는 포폭(布幅)에 경사(經絲) 사백본(四百本)을 말함이다. (한 목은 십(十) 오리 일(一)승(升)은 팔(八)목)

문화(文化) 면(面)에 있어서 특기(特記)할만한 것은 주자소(鑄字所) 설치(設置)이다. 고려(高麗)때에 활자(活字)를 만들어 쓴 일이 있었으나 그 규모(規模)가 크지 못하더니 태종(太宗) 삼년(三年)에 주자소(鑄字所)를 두고 이직(李稷) 박석명(朴錫命) 등(等)으로 하여금 동(銅)으로 많은 주자(鑄字)를 만들어 주요(主要)한 서적(書籍)을 인쇄(印刷)하여 내니 이는 우리 나라 출판문화사(出版文化史) 상(上) 획기적(劃期的) 혁명(革命)이다.

외교(外交)에 있어서는 태조(太祖)개국(開國)할 때에 명(明)나라의 승인(承認)을 얻고 해마다 많은 세폐(歲幣)를 바치기로 하였음으로 명(明)나라의 세폐(歲幣) 요구(要求)가 수량(數量)이 많고 또 가혹(苛酷)하여 특(特)히 마필(馬匹)의 요구(要求)가 더욱 심(甚)하여 매년(每年) 수천필(數千匹) 내지 만여필(萬餘匹)을 강요(强要)하고 또 축우(畜牛)까지 요구(要求)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여기에 응(應)하면 국내(國內)의 마필(馬匹)이 전부(全部) 없어질 것이오 응(應)하지 아니하면 명(明)나라로부터 어떠한 압박(壓迫)이 올지 알 수 없어서 진퇴(進退) 양난(兩難)에 빠졌다. 조신(朝臣) 중(中)에는 이를 거절(拒絶)하자고 주장(主張)한 강경(强硬) 논(論)도 있었으나 태종(太宗)은 온화(穩話)하게 이를 해결(解決)하자고 무마(撫摩)하고 명(明)나라에 대(對)하여 세폐(歲幣)를 감(減)할 것을 여러 차례로 요청(要請)하더니 얼마후(後)에 그 요청(要請)대로 실현(實現)되었다.

고려(高麗)말(末)에 극성(極盛)하던 왜구(倭寇)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태종(太宗)때에 남해안(南海岸)을 침범(侵犯)한 일이 있음으로 태종(太宗)이 위(位)를 세종(世宗)에게 전(傳)하고 대상왕(大上王)이 되었으니 자기(自己) 생전(生前)에 왜구(倭寇)의 소굴(巢窟)을 없애야 한다하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상당(相當)한 전과(戰果)를 내었으나 오래 수비(守備)하기가 어려움으로 얼마 후에 회군(回軍)하였다. (이종무(李從茂)가 변변치 못하여 一敗하여 돌아왔다.)

처음에 태종(太宗)의 장자(長子)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써 세자(世子)를 삼았으나 삼자(三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 항상(恒常) 장차(將次)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王位)를 전(傳)할 생각이 있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또한 천자(天資)가 척당(倜儻)하여 자기(自己)보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의 재덕(才德)이 뛰어남을 알고 왕위(王位)를 그에게 넘기려하여 거짓 방탕(放蕩)하여 세자(世子)의 위(位)에서 물러나니 이씨(李氏) 개국(開國)이후 추악(醜惡)한 왕위(王位) 쟁탈전(爭奪戰)을 하는 속에서 홀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이와 같은 특이(特異)한 행동(行動)을 한 것은 일신(一身)의 영예(榮譽)보다 국가(國家) 전체(全體)를 위하는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왕위(王位)를 상양(相讓)하던 혼후(渾厚)한 풍(風)을 다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후(後)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王)이되니 이가 세종(世宗)이라 세종(世宗)은 이조(李朝) 일대(一代)를 통(通)하여 제일(第一)가는 성군(聖君)일 뿐만 아니라 아국(我國)의 역사(歷史) 전체(全體)를 통(通)하여 보아도 가장 훌륭한 인군(人君)이다.

세종(世宗)은 황희(黃憙) 허조(許稠) 등(等) 명상(名相)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함에 그 중점(重點)을 인재(人才) 문제(問題)에 두었다. 즉 어떻게 하면 인재(人才)를 많이 배양(培養)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人才)를 거용(擧用)할 수 있을까 하고 또 군왕(君王)이나 재상(宰相)의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훌륭한 인재(人才)를 얻어서 국가(國家)의 각 기관(機關)에 적재적소(適材適所)로 배치(配置)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과거(科擧)로써 인재(人才)를 취(取)하는데 그 출제(出題)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국방(國防) 문화(文化) 등(等)에 관(關)한 실제(實際) 방책(方策)으로 하고 여기에 급제(及第)한 사람은 다시 호당(湖堂)에 보내어 몇 해 동안을 자유롭게 연구(硏究)케 하니 이 까닭에 인재(人才)가 배출(輩出)하여 여러 가지 큰 사업(事業)을 행(行)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서변(西邊)과 북변(北邊)에는 여진족(女眞族)이 거주(居住)하고 있는데 국인(國人)들은 이를 야인(野人)이라 불렀다.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한 뒤에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이남(以南)의 여진족(女眞族)이 한때 모두 귀부(歸附)하였으나 이는 일시적(一時的)의 일이오 그 지대(地帶)가 우리 나라의 영토(領土)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 야인(野人)은 항상(恒常) 서북(西北) 변(邊)의 근심이 되더니 세종(世宗)은 이를 정벌(征伐)하기로 결의(決意)하고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북변(北邊)을 치게 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유한(有限)한 인력(人力)으로써 성공(成功)할 수 없는 군역(軍役)을 시작(始作)한다하여 극력(極力)으로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였다. 세종(世宗)은 굽히지 아니하고 야인(野人)을 쳐서 혹(或)은 항복(降服)받고 혹(或)은 두만강(豆滿江) 외(外)로 쫓아내고 두만강(豆滿江) 남(南)에 종성(鍾城) 경원(慶源) 회령(會寧) 경흥(慶興) 은성(穩城) 부령(富寧)의 육진(六鎭)을 새로이 세우고 경상도(慶尙道) 백성(百姓)을 옮겨서 그 지방(地方)을 채우니 발해(渤海)가 망(亡)한지 오백여년(五百餘年)에 이 지대(地帶)가 처음으로 우리 나라 영토(領土)로 돌아왔으며 귀순(歸順)한 야인(野人)들은 혹(或)은 우리 나라 사람에 동화(同化)하고 혹(或)은 재가승(在家僧)이라는 특수인(特殊人)으로서 그 지방(地方)에 남았었다.

(함경(咸鏡)지명(地名)에 흥(興) 자(字)가 셋이 있는 것은 태조(太祖)의 고조부(高祖父)가 살았던 데를 경흥(慶興)이라 하고 정종(定宗) 태종(太宗)의 출생지(出生地)를 함흥(咸興)이라 하고 영흥(永興)은 태조(太祖)가 낫기 때문에 영흥(永興)이라고 지명(地名)을 각각 지었다. 신흥(新興)은 왜정(倭政)때 새로 지은 지명(地名))

세종(世宗)이 조세제도(租稅制度)에 대(對)하여는 칠팔년(七八年)을 고민(苦悶)하고 드디어 투표제도(投票制度)를 실시(實施)하였다.

서변(西邊)에서는 파저강(婆豬江) 기슭에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 등(等)이 웅거(雄據)하여 자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약탈(掠奪)함으로 태종(太宗)때에 갑산(甲山)의 땅을 나누어 지금의 평안도(平安道)에 여연군(閭延郡)을 두었다. 세종(世宗)때에 이르러 야인(野人)의 침입(侵入)이 잦아서 강안(江岸) 일대(一帶)에는 백성(百姓)들이 안주(安住)할 수 없으니 세종(世宗)은 이를 다만 방비(防備)하느니보다 한 걸음 나아가 강(江)을 건너서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부실 계획(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강(江)건너는 명(明)나라의 영토(領土)이오 또 임목(林木)이 폐문(蔽文)하여 함부로 쳐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명(明)나라에 대(對)하던 외교(外交)로써 야인(野人)정벌(征伐)의 부득이(不得已)함을 역설(力說)하고 한편(便)으로는 비밀(秘密)히 북벌군(北伐軍)을 훈련(訓練)하고 강변(江邊)에 군량(軍糧)을 비축(備蓄)하니 조신(朝臣) 중(中)에는 북벌(北伐)을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많아서 매일(每日) 이 문제(問題)를 가지고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만일 야인(野人)의 본거(本據)를 깨지 않으면 서변(西邊) 일대(一帶)는 야인(野人)의 독무대(獨舞臺)가 될 것이니 이를 실행(實行)치 아니할 수 없고 또 이를 치자면 명(明)나라 영토(領土)에 공공연(公公然)하게 들어갈 수가 없음으로 비밀리(秘密裏)에 거사(擧事)하려는 것이다. 이 문제(問題)를 크게 떠들어서 만일 명(明)나라에 들리면 대사(大事)가 틀어질 것이니 조용히 처리(處理)하고자 타일렀다.

그러나 반대(反對)하는 자(者)들은 듣지 아니하고 연일(連日) 떠들었다. 세종(世宗)은 대노(大怒)하여 왈(曰) 야인(野人)의 침략(侵略)을 그대로 방임(放任)하자는 것은 국토(國土)를 적(賊)에게 주자는 생각이니 외교관계(外交關係)에 관(關)한 일을 공공연(公公然)하게 떠들면 국가(國家) 장래(將來)에 무슨 이익(利益)이 있느냐 하여 책(責)하고 아국(我國) 인성(人性)이 경조(輕躁)하여 반드시 국가(國家) 대사(大事)를 그르칠지로다. 하고 탄식(嘆息)하였다. 이에 모든 반대(反對)를 물리치고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야인(野人)을 치고 강(江) 이쪽에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의 세곳을 두니 이로써 압록강(鴨綠江) 기슭에 사군(四郡)이 이루어져서 그 후(後) 다소(多少)의 곡절(曲折)이 없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압록강(鴨綠江)이 완전(完全)히 우리 나라의 국경(國境)이 되었다.

토지(土地)의 조세제도(租稅制度)는 고제(古制)에 의(依)하여 수확량(收穫量)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을 받기로 하였으나 토지(土地)마다 매년(每年) 일정(一定)한 액수(額數)를 받는 공법(貢法)을 쓰느냐 또는 해마다 년년(年年)의 풍흉(豊凶)과 작황(作況)의 양부(良否)를 실지(實地)로 답사(踏査)하여 세액(稅額)을 정(定)하는 답험법(踏驗法)을 쓰느냐 하는 것이 전국적(全國的)으로 일대(一大) 송안(訟案)이 되었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노력(努力)을 들이면 수확(收穫)을 올릴 수 있고 또 수한재(水旱災)가 적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공법(貢法)을 환영(歡迎)하고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고 기후(氣候)의 영향(影響)을 많이 받아서 흉년(凶年)이 잦은 토지(土地)를 가진 사람은 답험법(踏驗法)을 환영(歡迎)하였다. 그리하여 공법(貢法)도 써보고 답험법(踏驗法)도 써 보았는데 공법(貢法)에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을 정(定)하는 일이나 답험법(踏驗法)에서 매년(每年)의 수확량(收穫量)을 정(定)하는 일이나 모두 실제(實際)로 간사(幹事)하는 관리(官吏)의 공정(公正)여부(與否)가 법(法)의 정신(精神)을 살리고 죽이고 하였다.

그러나 세제(稅制)를 어느 쪽으로든지 확정(確定)치 아니할 수 없음으로 세종(世宗)은 각도(各道)를 단위(單位)로 하여 각 수령(守令)과 농가(農家)로 하여금 어느 제도(制度)를 찬성(贊成)하는가를 낙점(落點)케 하니 낙점(落點)이라 함은 지금의 투표(投票)와 같은 것이다. 그 결과(結果)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의 삼도(三道)는 공법(貢法) 찬성(贊成) 자(者)가 십(十)의 팔(八)이오 경기(京畿) 강원(江原)의 양도(兩道)는 양법(兩法)의 찬성(贊成)이 대략(大略) 반반(半半)이었다. 이에 민의(民意)를 존중(尊重)히 여겨 삼남(三南)과 경기(京畿) 강원(江原)은 공법(貢法)을 쓰고 서북(西北) 삼도(三道)는 답험법(踏驗法)으로 쓰이게 하되 공법(貢法)을 쓰는 지대(地帶)에서도 토지(土地) 등급(等級)이 낮은 박토(薄土)에 대(對)하여는 재(災)를 주기로 하였다. 동일(同一)한 국내(國內)에서 지방(地方)에 따라서 상이(相異)한 법(法)을 쓴 것은 오직 민정(民情)에 맞추려 함이오 더욱이 지금으로부터 오백여년(五百餘年) 전(前)옛날에 민의(民意)를 묻기 위(爲)하여 대중(大衆)의 낙점제(落點制)를 썼다는 것은 일대(一大) 기관(奇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토지제도(土地制度)에 결부제(結負制)를 편용(偏用)한 것은 제도(制度)의 문란(紊亂)을 발생(發生)시킨 일인(一因)이 되었다. 신라시대(新羅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에는 면적(面積)을 표시(表示)하는 경무제(頃畝制)와 수확량(收穫量)을 표시(表示)하는 결부제(結負制)를 병용(竝用)하니 일결(一結)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부(負)가되고 일부(一負)의 십분지일(十分之一)이 일속(一束)이 되었다. (결(結)은 맥, 부(負)는 짐, 속(束)은 뭇)

경(頃)이라 함은 토지(土地)의 일등지(一等地)의 일결(一結)과 동일(同一)한 면적(面積)이오 경(頃)의 백분지일(百分之一)이 무(畝)가된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처음에는 양제(兩制)를 병용(竝用)하다가 그 후(後)에 세액계산(稅額計算)의 편의(便宜)를 위(爲)하여 결부법(結付法)을 전용(專用)하고 이조(李朝)에 이르러 이를 답습(踏襲)하였다. 세종(世宗)때에 토지(土地)를 구등(九等)에 나누었는데 이를 결부(結負)와 경(頃)으로써 비교(比較)하여보면 일등지(一等地) 일결(一結)은 일경(一頃)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하나 구등지(九等地) 일결(一結)은 사경(四頃) 여(餘)의 면적(面積)과 동일(同一)함으로 토지(土地)의 등급(等級)에 따라서 경수(頃數)가 모두 다르고 따라서 그 토지(土地)를 보고 그 결수(結數)를 알 수 없으며 혹(或)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이 농민(農民)의 토지(土地)를 침범(侵犯)하되 국가(國家)의 토지장부(土地帳簿)에는 결 부 수(結負數)만 있고 그 토지(土地)의 지도(地圖)라든가 면적(面積)이든가가 기재(記載)되어 있지 아니함으로 침점(侵占)여부(與否)와 침범(侵犯)한 면적(面積)을 가고(可考)할 길이 전연(全然)없고 이 까닭에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각(各) 토지(土地)의 세액(稅額)이 헝클어지기 시작(始作)하였다. (세종(世宗)이 면적(面積)을 재기 위(爲)하여 인재(人才)를 구(求)하니 인재(人才)가 없어서 면적(面積)을 재지 못하여 토지제도(土地制度)가 문란(紊亂)하였다.)

세종(世宗)은 천성(天性)이 총명(聰明)하고 또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궁중(宮中)에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학자(學者)들을 모아서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는 한편 유익(有益)한 서적(書籍)을 많이 만드니 고려사(高麗史)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농사설(農事說)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등(等)은 모두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음악(音樂)에도 많은 관심(關心)을 가져서 해주(海州)에서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南陽)에서 경석(磬石)이 나며,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악기(樂器)를 고쳐 만들고 이어서 구악(舊樂)을 고쳐 다듬으니 지금껏 세계(世界)에 자랑이 되고 우리 나라의 아악(雅樂)은 이때에 완성(完成)한 것이다. 또 역상(曆象) 방면(方面)에도 연구(硏究)를 쌓아서 장영실(蔣英實)과 더불어 대소(大小)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앙부일귀(仰釜日晷) 등(等)을 만들고 동(銅)으로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서울과 각도(各道)에 나눠주어서 우량(雨量)을 재었다. 이는 서기(西紀)1639년(年)보다. 이백년(二百年)이 앞서서 활자(活字)와 함께 우리 문화(文化)의 자랑거리다.

또 우리 문화사(文化史)상(上) 가장 특기(特記)할만한 사업(事業)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즉 국문(國文)의 창제(創製)이다.

세종(世宗)은 「제국(諸國)이 각기(各其) 문자(文字)가 있어서 방언(方言)을 기(記)하거늘 독(獨)히 무(無)하노라 아국(我國)의 어음(語音)이 중국(中國)과 달라서 한자(漢字)와 서로 유통(流通)치 못함으로 우민(愚民)이 언(言)코자 함이 있으되 마침내 그 정(情)을 신(伸)치 못하노라 내가 이를 민망(憫惘)히 여겨 문자(文字)를 신제(新製)하야 인인(人人)으로 하여금 학습(學習)하기 쉽고 일용(日用)에 편(便)케 하고자 하노라」함과 같이 국가의식(國家意識)의 자각(自覺)과 대중교육(大衆敎育)의 필요(必要)에 의(依)하여 국문(國文)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등(等)과 더불어 친(親)히 연구(硏究)를 거듭한 결과 그의 이십팔년(二十八年) (삼천칠백칠십구년 병인(丙寅))에 이십팔자(二十八字)를 지어내어 중외(中外)에 영포(領布)하니 이것이 오늘날 세계(世界)의 여러 문자(文字)중에서 제일(第一) 우수(優秀)한 우리 국문(國文)이다.

이때 한학사상(漢學思想)에 젖은 최만리(崔萬里)같은 무리들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성현(聖賢)의 글이 아니라 하여 쓰기를 반대(反對)한 일이 있었으나 세종(世宗)은 이를 물리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써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내는 한편 관청(官廳)의 공문서(公文書)에 이 글을 쓰게 하며 또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경전(經典)을 번역(飜譯)하여 백성(百姓)들에게 읽혔다. 민간(民間)에서는 이 글을 언문(諺文) 또는 언서(諺書)라하고 한문(漢文)을 번역(飜譯)한 것을 언해(諺解)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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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과 세조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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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端宗)과 세조(世祖)

 

세종(世宗)의 다음에 문종(文宗)은 재위(在位)한지 겨우 이년(二年)이오 그 아들 단종(端宗)이 왕(王)이 되니 나이 겨우 십이세(十二歲)이다. 그런데 당시(當時) 단종(端宗)에게는 모후(母后)가 없고 근친(近親)이라고는 숙부(叔父) 칠인(七人) 즉(卽) 수양대군(首陽大君) 以下 七人君이 있어 모두 强盛하니 國民들은 王의 장래에 대하여 모두 위구(危懼)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전일(前日)에 세종(世宗)이 승하(昇遐)하였을 때에 국민(國民)이 성군(聖君)을 잃은 것을 크게 슬퍼하였는데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하였을 때에는 그때보다도 더욱 슬퍼하니 그것은 문종(文宗)을 위(爲)한 슬픔이 아니라 어린 단종(端宗)이 보호자(保護者)가 없고 칠대군(七大君)의 힘이 강대(强大)함으로 국사(國事)가 장차(將次) 어떻게될까 근심하는 슬픔이었다.

단종(端宗) 이년(二年)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등(等)과 더불어 난(亂)을 일으켜, 그때 정승(政丞)으로 있는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等)을 죽이고 스스로 군국(軍國) 대권(大權)을 잡고 있더니 또 이년(二年)후(後)에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니 이가 세조(世祖)이다. 이에 단종(端宗)의 舊臣中에는 兩派로 갈려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等은 世祖에게 붙고 世祖의 行爲를 통분(痛憤)히 생각하는 성삼문(成三問) 박팽연(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等)은 세조(世祖)를 몰아내고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려 하다가 미연(未然)에 발각(發覺)되어 그 가족(家族)및 연루(連累)자(者)들과 함께 사형(死刑)을 당(當)하고 단종(端宗)은 노산군(魯山君)으로 내려서 영월(寧越)로 귀양가더니 이듬해에 세조(世祖)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에서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일으키다가 패(敗)하여 죽고 단종(端宗)도 또한 세조(世祖)에게 해(害)된 바 되었다.

세조(世祖)는 왕위(王位)를 억지로 얻었으나, 정치(政治)를 잘하여 성장기(成長期)에 있는 이조(李朝)를 힘써 배양(培養)하였다. 왕(王)은 억불정책(抑佛政策)을 늦추어서 서울 안에 원각사(圓覺寺)를 짓고 십삼층탑(十三層塔)을 쌓으며 刊都監을 두어서 佛經을 많이 박아내었다.

특히 民間의 弊害를 없애기에 努力하여 백성(百姓)들이 억울(抑鬱)한 일이 있는 때는 직접(直接)으로 왕(王)에게 상서(上書)하게 하고 비록 세력(勢力)이 있는 자(者)라도 민폐(民弊)를 짓는 자(者)는 용서(容恕)함이 없이 처벌(處罰)하였다.

(권람(權擥)은 권근(權近)의 손자(孫子)라 권근(權近)은 고려(高麗) 신하(臣下)로써 이씨(李氏) 득국(得國)함에 귀화(歸化)하였다. 처음에는 태조(太祖)가 써먹기 위하여 잘 대우(待遇)하더니 이씨(李氏)가 완전(完全)히 득국(得國)하니 권근(權近)을 절개(節槪)없는 신하(臣下)라고 물리치니 노말년(老末年)에 분(忿)함을 참지 못하였다. 이를 손자(孫子)가 알고 단종(端宗)이 임금이 되어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빼앗는다는 것을 듣고 이에 참여(參與)하여 이씨(李氏)끼리 싸우라는 내용(內容)계획(計劃)을 세웠다. 그러니 고려(高麗) 신하(臣下)가 이조(李朝) 집안끼리 싸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육신(死六臣)은 다만 단종(端宗)이 왕위(王位)에 오르면 세조(世祖)보다 정치(政治)를 잘한다하여, 또 나라를 위(爲)하여 단종(端宗)을 받든 것이 아니라 단종(端宗)에만 충성(忠誠)한 것이다. 세조(世祖)가 한 일은 무리(無理)가 아니고 당연(當然)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설(說)도 있다.)

당시(當時) 민폐(民弊)의 가장 큰 자(者)는 방납(防納)이니 방납(防納)이라 함은 백성(百姓)이 국가(國家)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상인(商人)이나 세력(勢力)있는 자(者)들이 대납(代納)하는 것이다. 당시(當時)의 백성(百姓)이 국가(國家)에 대한 부담(負擔)의 의무(義務)에는 토지생산(土地生産)의 일부(一部)를 바치는 조세(租稅), 각(各) 지방(地方)에서 산출(産出)되는 특산품(特産品)을 바치는 공물(貢物), 병역(兵役), 축성(築城), 운수(運輸) 등(等)에 종사(從事)하는 부역(賦役)의 세 가지가 있었다.

공물(貢物)은 전국(全國) 각(各) 군(郡)을 단위(單位)로 하여 바치는 것인데 예(例)컨대 해변(海邊) 군(郡)은 어물(魚物) 해초(海草) 등등(等等) 산간(山間) 군(郡)은 모피(毛皮) 약재(藥材)등(等) 평야(平野) 군(郡)은 연초(煙草) 과실(果實) 명유(明油)등(等) 전주(全州)의 지(紙), 해주(海州)의 묵(墨), 갑산(甲山)의 산삼(山蔘), 강원도(江原道)의 청밀(淸蜜), 전라도(全羅道) 죽물(竹物) 등(等)이오 정부(政府)에서 수백종(數百種)의 산물(産物)을 각군(各郡) 산출액(産出額)과 호구수(戶口數)를 참작(參酌)하여 각도(各道)에 배정(配定)하고 도(道)는 군(郡)에 배정(配定)하고 군(郡)은 백성(百姓)의 각(各)에 배정(配定)하며 백성(百姓)이 자기(自己)에게 배정(配定)된 공물(貢物)을 군수(郡守)에게 바치면 군(郡)의 이서(吏胥)들이 그것을 검사(檢査)하여 수납(收納)하니 당시(當時) 공물(貢物)의 부담(負擔)은 조세(租稅)보다 몇 배나 중(重)하고 검사(檢査)에 불합격(不合格)되면 다시 호품(好品)을 구득(求得)하지 아니하면 안되므로 백성(百姓)의 손해(損害)가 적지 아니하였고 이서(吏胥)들은 백성(百姓)의 약점(弱點)을 승(乘)하여 비록 호품(好品)이라도 불합격(不合格)으로 퇴각(退却)하고 상인(商人)과 결탁(結託)하여 백성(百姓)으로부터 시가(時價)의 이삼배(二三倍)를 걷어서 그 물품(物品)을 대납(代納)하고 차액(差額)되는 이익(利益)을 분식(分食)하는 것이다.

대저(大抵) 이조(李朝)의 이서(吏胥)는 행정상(行政上) 한 특수계급(特殊階級)으로 존재(存在)하였다. 이서(吏胥)는 원래(原來) 국가(國家)의 관리(官吏)가 아니오 각군(各郡)의 행정사무(行政事務)를 돕는 사무원(事務員)으로서 아무런 봉급(俸給)이나 보수(報酬)를 받지 아니하는지라 이조개국(李朝開國) 초(初)에는 사무(事務)는 다단(多端)하되 생활비(生活費)를 얻을 길이 없음으로 고역(苦役)과 궁곤(窮困)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逃亡)하는 자(者)도 적지 아니하더니 그 후(後)에 백성(百姓)들로부터 횡렴(橫斂)하는 곡경(曲逕)을 발견(發見)하고 또 소위(所謂) 군수(郡守) 현령(縣令)은 그 지방(地方)의 실정(實情)을 잘 알고 있는 이서(吏胥)의 힘을 받지 아니하면 군정(郡政)을 행(行)할 수가 없음으로 군행정(郡行政)의 실권(實權)은 전(全)혀 이서(吏胥)의 손에 쥐여있었고 더욱이 전국(全國) 삼백여군(三百餘郡)에는 모두 그 지방(地方) 출신(出身)의 이서(吏胥)가 있어 국가(國家)에서 임명(任命)한 수령(守令)과 백성(百姓)의 중간(中間)에 개재(介在)하여 사무계급(事務階級)으로써 일대세력(一大勢力)을 형성(形成)하고 있어 수령(守令)은 물론(勿論)이오 중앙정부(中央政府)에서도 그 세력(勢力)을 무시(無始)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서(吏胥)들이 공물(貢物) 검사(檢査)를 하게되니 그 합검(合檢) 불합검(不合檢)은 전(專)혀 그들의 일구일필(一口一筆)에 달려 있고 거기에 따라서 방납제(防納制)가 생기게 되니 백성(百姓)에게 끼치는 폐해(弊害)는 실(實)로 막대(莫大)하고 세조재야(世祖在也)하는 동안은 엄격(嚴格)하고 과단(果斷)있는 행정(行政)으로 능(能)히 이 폐해(弊害)를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임금 때로부터 점점 부활(復活)되고 말았다.

세종(世宗)이 육진(六鎭)을 건설(建設)한 뒤에 야인(野人)들의 침략(侵略)이 그치지 아니 하고 단종(端宗) 때에는 그 세력(勢力)이 더욱 성(盛)하였음으로 조신(朝臣) 중(中)에는 육진(六鎭)을 포기(抛棄)하자는 비굴(卑屈)한 논자(論者)도 있어 한동안 서로 의론(議論)을 다투었다. 세조(世祖)가 왕(王)이 된 뒤에 처음에 압록강(鴨綠江)기슭의 사군(四郡)을 폐(廢)하고 야인(野人)들을 무마(撫摩)하기로 하였으나 갈수록 그들의 버릇이 사나워 짐으로 세조(世祖)는 회령(會寧)을 엿보는 야인(野人)을 쳐서 이를 두만강(豆滿江) 북쪽으로 쫓고 또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강(江) 내외(內外)의 야인(野人)의 소굴(巢窟)을 엎었으며 어유소(魚有沼) 남소(南沼) 장군(將軍) 등(等)을 시켜서 파저강(婆豬江)의 야인(野人) 괴수(魁首) 이만주(李滿住)의 부자(父子)를 잡아 죽였다.

세조(世祖)의 왕위(王位) 쟁탈(爭奪) 난(亂)은 이씨왕가(李氏王家)의 개국(開國) 초(初)부터 있은 예(例)의 골육전(骨肉戰)이오 육신(六臣)의 사(死)는 주(主)를 위(爲)한 사절(死節)이라 군주정치(君主政治) 시대(時代)에는 흔히 있는 일이오 아무런 특이(特異)한 것이 없으나 다만 이 난(亂)이 우리 나라의 정치(政治)와 인심(人心)에 미친 영향(影響)은 실(實)로 크고 또 심각(深刻)한 것이었다. 고려(高麗) 말(末)에 정몽주(鄭夢周)가 국사(國事)에 순절(殉節)하고 그 제자(弟子) 길재(吉再)(호(號)는 야은(冶隱))가 정몽주(鄭夢周)의 이학(理學) 계통(系統)을 계승(繼承)하고 그것이 김숙자(金叔慈)(호(號)는 강호(江湖))를 거쳐 김종직(金宗直)(호(號)는 점필제(佔畢齊)에게로 전(傳)하였는데 이 계통(系統)의 학(學)을 받은 유사(儒士)들은 절의(節義)에 대(對)한 관념(觀念)이 가장 강(强)하고 따라서 세조(世祖)의 행사(行事)에 대(對)하여 큰 분노(憤怒)를 품고 세조(世祖)에게 붙어서 공신(功臣)이 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等)을 극도(極度)로 미워함은 물론(勿論)이오 한명회(韓明澮) 같은 사람은 이 공로(功勞)로 국구(國舅)가 되었기 때문에 유사(儒士)들은 왕실(王室)의 외척(外戚)까지를 몹시 미워하여 이때로부터 유사(儒士) 대(對) 공신(功臣) 척리(戚里)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이 벌어져서 이래(爾來) 백여년(百餘年)동안을 정계(政界)의 대소사건(大小事件)이 주(主)로 유사(儒士)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으로부터 일어났고 필경(畢竟) 우리 사회(社會)를 망(亡)쳐버린 붕당(朋黨) 싸움의 시초(始初)인 동서분당(東西分黨)도 유사(儒士) 대(對) 척리(戚里)의 싸움에서 발단(發端)한 것이다.

또 한가지 영향(影響)은 벼슬하는 사람들이 군주(君主)에 충성(忠誠)을 다하다가 세조(世祖)의 독수(毒手)에 걸려서 무참(無慘)히 죽고 그 가족(家族)까지 학살(虐殺) 당(當)하는 것을 보고 세사(世事)의 무상(無常)함을 보고 장태식(長太息)하고 자후(自後)로는 보신지책(保身之策)에 치중(置中)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항직(伉直)한 행동(行動)을 피(避)하려 하였음으로 정계(政界)의 공기(空氣)가 인순고식(因循姑息)과 유유범범(悠悠泛泛)에 흘러서 창조(創造)와 혁신(革新)을 행(行)하려는 활기(活氣)를 전(全)혀 잃으니 이것이 이조일대(李朝一代)를 통(通)하여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이 생기지 못한 주인(主因)이 되었다.

이조개국(李朝開國) 이래(以來)로 서북인(西北人)을 쓰지 아니함으로 서북인(西北人)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혁명(革命)을 성공(成功)한 서북(西北) 맹장(猛將)들도 모두 분기(憤氣)를 품고 향리(鄕里)에 돌아갔으며 특(特)히 태조(太祖)의 아장(牙將)으로 있던 동두란(佟豆蘭)도 태조(太祖)가 성(姓)을 이씨(李氏)를 주고 청해백(淸海伯)을 봉(封)하여 특수(特殊)한 대우(待遇)를 하였으나 역시(亦是) 불만(不滿)을 품고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그 털과 상소문(上疏文)과 함께 봉(封)하여 태조(太祖)에게 올리고 도망(逃亡)하여 그 고향(故鄕)인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으로 돌아가니 태조(太祖)는 후일(後日)에 혹(或) 변(變)을 생(生)할까 두려워하여 그 가족(家族)을 한양(漢陽)으로 옮겨온 일도 있다.

그러던 中 세조(世祖)의 난(亂)이 일어나서 인심(人心)이 불안하게 되자 함경(咸鏡)사람 이시애(李施愛)가 난리(亂離)를 꾸며서 함경감사(咸鏡監司)(신숙주(申叔舟)의 아들)를 죽이고 각지(各地)에서 난민(亂民)이 일어나서 수령(守令)들을 죽였다. 세조(世祖)는 군사(軍士)를 보내어 여러 달만에 평정(平定)하고 이래백년(爾來百年)동안 함경도(咸鏡道)에 停擧를 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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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기초의 완성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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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

 

세조(世祖)의 다음에 예종(睿宗)은 위(位)에 있은지 일년(一年)이오 성종(成宗)이 왕(王)이되니 이때는 이조(李朝)의 기초(基礎)가 굳어지고 또 여러 가지 제도(制度)가 갖추어졌다. 왕(王)은 유신(儒臣) 김종직(金宗直) 등(等)을 쓰고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문선(東文選)같은 책(冊)을 만들고 또 세조(世祖)때에 시작(始作)하여 끝마치지 못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完成)하니 이는 이후(以後) 수백년(數百年)동안 정치(政治)를 행(行)하는 기틀이 되었다. 집현전(集賢殿)은 세조(世祖)때에 폐(廢)하였으나 성종(成宗)은 홍문관(弘文館)을 새로이 두고 젊은 학자(學者)들을 공부(工夫)시키던 호당(湖堂)도 다시 시작(始作)하였다.

사회(社會)의 계급(階級)에는 네 층(層)이 있어 그 지위(地位)가 직업(職業)과 사회적(社會的) 대우(待遇)를 달리 하였으며 대개(大槪)는 거주지역(居住地域)도 달리하고 또 다른 계급(階級)과 혼인(婚姻)하는 일도 적었다. 여러 계급(階級) 중(中)에 가장 상층(上層)에 있는 것이 양반(兩班)이니 양반(兩班)이라 함은 동반(東班)인 문관(文官)과 서반(西班)인 무관(武官)을 합(合)한 말이다. 공경(公卿)과 사대부(士大夫) 계급(階級)을 통틀어 말함이며 이들은 정치(政治)를 지도(指導)하는 지위(地位)를 차지하여 모든 특권(特權)과 향락(享樂)을 누리었다.

그 다음에 중인(中人) 계급(階級)이 있으니 그들은 의관(醫官) 역관(譯官) 계사(計士) 관상(觀相) 율학(律學) 사자(寫字) 도화(圖畵) 등(等) 국가(國家)에 요긴(要緊)한 기술(技術) 방면(方面)의 일을 맡아보았다.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는 양반과 상민(常民)의 중간(中間)이었으며 이 밖에 이서(吏胥)와 군교(軍校) 같은 층(層)은 보다 얼마쯤 낮은 것이었으나 역시(亦是) 중인(中人) 계급(階級)에 속(屬)하였다. 그 다음에 상민계급(常民階級)은 농업(農業) 공업(工業)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수(數)가 가장 많고 또 국가경제(國家經濟)의 중심(中心)을 이루고 있으나 그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가 낮아서 자기(自己)의 생존권(生存權)을 보전(保全)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 양반(兩班)과 중인(中人)에게 눌리어 지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천민계급(賤民階級)은 노비(奴婢)를 비롯하여 배우(俳優) 무당(巫堂) 기생(妓生) 역졸(驛卒) 백정(白丁) 등(等)을 말하는 것이니 노비(奴婢)에는 국사(國事)에 속(屬)하는 것을 공노비(公奴婢)라하고 개인가(個人家)에 속(屬)하는 것은 사노비(私奴婢)라 하며 백정(白丁)에도 지금에 흔히 말하는 소 잡는 사람만이 백정(白丁)이 아니라 유기(柳器) 장피(匠皮) 혁공(革工) 같은 것도 모두 백정(白丁)이라 불렀고 이들은 인권(人權)을 주장(主張)하지 못함은 물론(勿論)이오 어떤 경우(境遇)에는 우마(牛馬)와 동양(同樣)의 대우(待遇)를 받았다.

외교관계(外交關係)에 있어서는 명(明)나라에 대(對)한 조공(朝貢)과 일본(日本) 남양(南陽) 등(等)에 대(對)한 교린(交隣)이 있었는데 이러한 외교(外交)의 이면(裏面)에는 인국(隣國)들과 평화(平和)로운 무역(貿易)을 행(行)하려는 것이 있었다. 명(明)나라와의 관계(關係)는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무역(朝貢貿易)을 행(行)하고 저쪽에서 사신(使臣)이 오면 이를 칙사(勅使)라 하여 특별(特別)히 대우(待遇)하였는데 조공무역(朝貢貿易)이라 함은 물공(物貢)의 형식(形式)을 통(通)하여 나라와 나라사이의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것으로 이는 중국(中國) 사람들의 대국연(大國然)하는 자존심(自尊心)에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 공물(貢物)의 형식(形式)으로 내어가는 물건(物件)은 금은(金銀), 인삼(人蔘), 표피(豹皮), 저포(苧布), 화문석(花紋席), 나전(螺鈿), 백지(白紙) 등(等)이었고 그 대신(代身) 저쪽에서 들어오는 것은 주(主)로 견단(絹緞), 자기(磁器), 약재(藥材), 서적(書籍) 등(等)이었으며 이밖에도 국경(國境) 지대(地帶)의 사무역(私貿易)과 밀무역(密貿易)을 통(通)하여 두 나라 사이의 물자(物資)가 많이 교류(交流)되었으니 이 시대(時代)는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비교적(比較的) 자유(自由)로 중국(中國)으로 왕래(往來)하면서 학문(學問)도 배우고 무역(貿易)도 하던 때와 달라서 공적(公的)으로 중국(中國)을 다니는 이외(以外)에는 왕래(往來)를 엄금(嚴禁)하는 쇄국시대(鎖國時代)라 물자(物資)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이 여의(如意)치 못함으로 압록강(鴨綠江) 안(岸)의 중강진(中江鎭)과 두만강(豆滿江)안(岸)에서 년(年) 일이차(一二次)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행(行)하는 외(外)에 밀역(密易)이 연중(年中) 성행(盛行)하였다. 명(明)나라에 바치던 금은(金銀) 공(貢)은 세종(世宗)때에 외교(外交) 교섭(交涉)에 의(依)하여 면제(免除)되고 그 후(後)로는 우리 나라에서 금은(金銀)이 나지 아니함을 보이기 위(爲)하여 금은광(金銀鑛)을 폐(廢)한 일도 있었다.

일본(日本)과의 사이는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대마도(對馬島)를 친 이후(以後)로 한때 교통(交通)이 그쳤었으나 대마도(對馬島)는 산(山)이 많고 식량(食糧) 기타(其他) 물산(物産)이 적어서 우리 나라의 힘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음으로 저쪽에서 사죄(謝罪)의 뜻을 표(表)하고 다시 서로 화호(和好)하기를 간청(懇請)하였다. 이에 세종(世宗)은 삼포(三浦)를 열어서 대마도인(對馬島人)이 와서 무역(貿易)함을 허락(許諾)하니 삼포(三浦)라 함은 제포(薺浦) (지금의 창원군(昌原郡)마산방(馬山傍) 제덕리(薺德里)의 내이포(乃而浦) 부산포(釜山浦) 울산(蔚山)의 염포(塩浦)이다. 그 후(後)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어서 해마다 대마도(對馬島) 왕(王)이 보내는 배를 오십(五十)척(隻)으로 한정(限定)하며 또 미두(米豆) 이백석(二百石) 씩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무역품(貿易品)을 왜인(倭人)들은 동(銅) 은(銀) 유황(硫黃) 등(等)의 광산물(鑛産物)을 비롯하여 남양(南洋)의 특산(特産)인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등(等)을 들여오고 우리 나라에서는 면포(綿布) 마포(麻布) 미두(米豆) 백지(白紙) 서적(書籍)(특히 대장경(大藏經))을 보내었다.

여진(女眞)과의 사이에는 두만강(豆滿江) 기슭에 경성(鏡城) 경원(鏡源)의 무역소(貿易所)를 열어서 그들의 마필(馬匹)과 여러 가지 수피(獸皮) 즉(卽) 토표피(土豹皮), 초서피(貂鼠皮), 웅피(熊皮), 녹피(鹿皮)를 들여오는 대신(代身) 이쪽에서 금은(金銀), 마포(麻布), 저포(苧布), 면포(綿布), 농구(農具), 부정(釜鼎), 유기(鍮器), 백지(白紙), 염장(鹽醬), 주(酒) 등(等)을 내어 보냈으며 또 여진(女眞)의 추장(酋長)들에게 직첩(職帖)을 주어서 그 계급(階級)에 따라 서울에 와서 진상(進上) 숙배(肅拜)한 이름으로 공적무역(公的貿易)을 하게 하니 이는 조공무역(朝貢貿易)의 형식(形式)을 본뜬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에는 지금의 태평로(太平路)에 태평관(太平館)이 있어 명(明)나라 사신(使臣)들을 접대(接待)하고 동대문(東大門)안에는 북평관(北平館)이 있어 왜인(倭人)들이 들게 하였다. 그들이 와서 묵을 때면 후시(後市)라는 명목(名目)으로 館所 에서 무역(貿易)이 행(行)하여 졌다. 이 밖에 유구국(琉球國)에서도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어와서 소목(蘇木), 호초(胡椒), 향료(香料), 설당(雪糖), 석(錫), 서각(犀角) 등(等)의 여러 가지 진기(珍奇)한 남양산물(南洋産物)을 가져오고 우리 나라의 면포(綿布), 마포(麻布), 대장경(大藏經) 등(等)을 얻어 갔으며 섬라(暹羅)(지금의 태국(泰國))에서도 방물(方物)을 가지고 사신(使臣)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外國) 사신(使臣)이 우리 국경(國境)에 들어오면 정부(政府)에서 그들을 후대(厚待)하는 뜻으로서 서울까지 오는 비용(費用)과 서울에서 머물고 다시 돌아 갈때 국경(國境)까지 나가는 비용(費用)을 부담(負擔)하였고 그 보내는 물건(物件)도 가져온 물건(物件)의 몇배(倍)를 주었음으로 남양(南洋)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게 되었고 우리 나라의 부담(負擔)이 적지 아니하니 이는 외국(外國)이 우리 나라에 조공(朝貢)한다는 형식(形式)을 꾸미고 무역상(貿易上) 실권(實權)을 취(取)하려 함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외국(外國)의 조공(朝貢)을 받는 것을 만족(滿足)하게 생각할 뿐이오 우리 나라 사람이 해외(海外)에 나가서 무역(貿易)하는 길을 전연(全然) 폐쇄(閉鎖)하여 버리니 이 까닭에 무역관계(貿易關係)에는 항상(恒常) 손(損)을 보고 국민(國民)의 해외(海外) 웅비(雄飛)의 기상(氣象)은 날로 사라졌다.

성종(成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팔구(八九)십년(十年)이라 국가(國家)의 기초(基礎)가 굳어진 때라 점차(漸次) 보수(保守)의 경향(傾向)이 생(生)하고 모든 부면(部面)에 경화(硬化) 침체(沈滯)의 빛이 농후(濃厚)하여지니 사가(史家)들은 이를 성극시대장쇠(盛極時代將衰)의 기(期)라 한다.

특(特)히 귀족(貴族)의 세력(勢力)이 강(强)하고 반상(班常)의 구별(區別)이 엄(嚴)하며 전국적(全國的)으로 불과(不過) 삼십(三十) 내외(內外)의 족벌(族閥)이 정치(政治)를 전행(專行)하고 지방별(地方別)로는 경기(京畿) 충청(忠淸) 경남(慶南)의 삼도(三道)가 귀족(貴族) 주거(住居)의 중심(中心)이 되었다. 또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제도(制度)가 더욱 엄격(嚴格)하여 여자(女子)의 개가(改嫁)를 불허(不許)하고 재가(再嫁)녀(女)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국가(國家)가 서용(敍用)치 아니하고 귀족(貴族)들은 과부(寡婦)를 금고(禁錮)하는 것을 가내(家內)의 영예(榮譽)로 여겼으며 첩(妾)의 소생(所生)한 자손(子孫)은 서얼(庶孼)이라 하여 천대(賤待)하고 서자(庶子)들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니 이 서자(庶子)는 소위(所謂) 그 아비된 자(者)가 향락(享樂)과 음욕(淫慾)의 만족(滿足)을 얻기 위(爲)하여 생(生)긴 산물(産物)이오 모복(母腹)으로부터 낙지(落地)하는 순간(瞬間)이 이미 천대(賤待)를 받을 운명(運命)을 가졌으니 서자(庶子)의 서자(庶子)된 죄(罪)는 아비에게 있는 것이오 서자(庶子)자신(自身)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비된 자(者)는 첩(妾)을 축(蓄)하는 날에 벌써 서자(庶子)의 출생(出生)할 것이 약속(約束)되었고 그 서자(庶子)가 사회(社會)로부터 천대(賤待)를 받는 것을 알면서 축첩생활(蓄妾生活)을 하는 것은 그 심신(心身)의 부패(腐敗)한 所致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오 더욱이 서자얼(庶子孼) 천대(賤待)의 제도(制度)는 축첩(蓄妾)을 가장 많이 하는 귀족계급(貴族階級)들이 만든 것이다.

세조(世祖)때에는 강력(强力)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행(行)하여 비록 간관(諫官)이라 하더라도 언론(言論)의 자유(自由)를 행(行)치 아니하더니 성종(成宗)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고 언어(言語)를 개(開)하여 간관(諫官)들의 언론자유(言論自由)를 인(認)하니 이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이 벌어졌다. 유신(儒臣)들은 세조(世祖)때에 가슴속에 쌓여 있으되 발표(發表)할 수 없었던 울분(鬱憤)이 일시(一時)에 터져 나와서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조금이라도 과오(過誤)를 범(犯)함이 있는 때는 일호(一毫)의 관용(寬容)이 없이 논박(論駁) 공격(攻擊)하고 어느 한 사람이 공격(攻擊)을 시작(始作)하면 유신(儒臣) 전체(全體)가 그를 응원(應援)하여 조정(朝廷)은 유신(儒臣)이 지도권(指導權)을 잡고 성종(成宗)도 대체(大體)로 유신(儒臣)들의 말을 청종(聽從)하였다.

이때의 유교(儒敎)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한학(漢學)과 달라서 송(宋)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인 성리학(性理學)을 말하는 것이니 성리학(性理學)을 또한 이기설(理氣說)이라 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제자(弟子) 가운데서 성리학(性理學)에 가장 밝은 사람은 정여창(鄭汝昌) (호(號) 일두(一蠹)) 김굉필(金宏弼)(호(號) 한훤당(寒暄堂))이니 정여창(鄭汝昌)의 이기론(理氣論)에는 「理의 在하는 바에 氣가 또한 聚하고 氣가 動하는 바에 理가 또한 着하여 彼此의 別이 없다. 그러나 理는 혼연지선(渾然至善)하여 爲함이 없고 氣는 순리청탁(醇醨(漓)淸濁)하여 運用이 있어 피차(彼此)의 別이 있으니 이를 一하되 二하고 二하되 一한다 함이다. 理가 없으면 氣가 응주(凝做)할 바가 없고 氣가 없으면 理가 流行치 못한다」하니 이것이 理氣說의 大要이다. 이 이기설(理氣說)의 새로운 이론(理論)은 청년학자(靑年學者)들 사이에 환영(歡迎)되고 李朝一代 學問의 中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였음으로 교육(敎育)과 과거(科擧)도 또한 유학(儒學)을 中心으로 하였으니 교육기관(敎育機關)으로는 서울에 성균관(成均館)(지금의 국립대학교)을 비롯하여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고 외방(外方)에는 고을마다 향교(鄕校)가 있고 마을에는 서당(書堂)이 있어 주(主)로 유교(儒敎)의 경전(經典)을 가르쳤고 이밖에 특수(特殊) 과목(科目)으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서학(書學) 화학(畵學)을 연구(硏究)하는 기관(機關)이 있고 또 한어(漢語) 여진어(女眞語) 몽고어(蒙古語) 왜어(倭語) 등(等)을 가르치는 기관(機關)도 있다.

과거(科擧)는 국가(國家)에서 인재(人才)를 취(取)하는 최고(最高) 시험(試驗)이라 태종(太宗) 세종(世宗)의 시대(時代)에는 주(主)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등(等) 주요(主要)한 현실문제(現實問題)에 대(對)한 논문(論文)을 시험(試驗)하더니 성종(成宗) 이후(以後)에는 그러한 논문(論文) 시험(試驗)이 점점 적어지고 주(主)로 문장(文章)을 취(取)하는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이 행(行)하니 이 시부표책(詩賦表策) 등(等)의 시험(試驗)은 그 속에 치국(治國) 경륜(經綸)이 있는 것도 아니오 국민생활(國民生活) 상(上)에 어떠한 관련(關聯)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다만 공교(工巧)로운 심장적구(尋章摘句)와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일삼는 것이니 이 까닭에 소위(所謂) 학문(學問)은 형식(形式)에 흐르고 실용(實用)이 없는 귀족계급(貴族階級)의 유희물(遊戱物)이 되고 말았다. 그럼으로 정여창(鄭汝昌)같은 이는 교시(巧詩) 하는 士를 取하지 아니하여 말하되 「詩는 성정(性情)의 發함이라 어찌 설설(屑屑)하게 工夫를 강하(强下)하리오」하였다.

이조개국(李朝開國) 後에 외방관리(外方官吏)의 민폐(民弊)를 作하는 者가 있고 없음을 조사(調査)하기 爲하여 자주 경차관(敬差官)이라는 특사(特使)를 보내더니 그 後에 그 관명(官名)을 어사(御使)라 고쳐서 비밀(秘密)히 각도(各道)에 보내 이가 암행어사(暗行御史)의 기원(起源)이다. 성종(成宗)때에 이르러 王이 성질(性質)이 인유(仁柔)하여 官吏가 罪를 받는 者가 極히 적고 태평성대(泰平盛代)라고 일컬었으나 그 반면(反面)에 민폐(民弊)를 작(作)하는 관리(官吏)가 많이 생겨서 사회내부(社會內部)에 퇴폐(頹廢)의 기운(氣運)이 싹트기 시작(始作)하였다. 이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각도(各道)에 파견(派遣)하니 당시(當時) 조지서(趙之瑞) 정광필(鄭光弼) 김일손(金馹孫) 같은 이가 모두 명어사(名御使)였다.

어사(御使)의 임무(任務)는 대체(大體)로 국법(國法)을 지키지 않는 者, 부모(父母)에 불효(不孝)하는 양풍미속(良風美俗)을 해(害)하는 者, 수령(守令)이나 이서(吏胥)들이 국곡(國穀)을 도적(盜賊)하고 인민(人民)을 괴롭게 하는 者等 법률(法律)과 도덕(道德)에 어그러지는 행위일체(行爲 一切)를 조사(調査)하고 그것을 범(犯)한 者를 발견(發見)할 時는 王의 대리(代理)의 자격(資格)으로 그 고을에 출도(出道)하여 혹(或)은 수령(守令)을 파면(罷免)시킬 수도 있고 혹(或)은 죄인(罪人)을 선참후계(先斬後啓)할 수도 있음으로 외방(外方)에서는 어사(御使)를 호(虎)라고도 불렀다.

어사(御使)가 수월(數月)의 동안에 일도(一道)를 순행(巡行)하는 것임으로 간리(奸吏)들의 소행(所行)을 一 一히 탐지(探知)할 수는 없으나 한번 출동(出動)하면 일도(一道)가 숙연(肅然)하여 간악(奸惡)을 자행(恣行)치 못하니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에 축묘(畜猫)가 있으매 서(鼠)가 사행(肆行)치 못한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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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실정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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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

 

성종(成宗) 왕비(王妃) 윤씨(尹氏)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生母)라 윤비(尹妃)가 왕(王)에게 불손(不遜)한 일이 있음으로 왕(王)이 폐위(廢位)하였다가 죽였다. 연산군(燕山君)은 성질(性質)이 원래(元來) 난폭(亂暴)한데 그 모(母)가 원사(寃死)함을 알고 심중(心中)에 깊은 악감(惡感)을 품고 있었다. 이때 신하(臣下)들 중(中)에는 후일(後日)에 연산군(燕山君)이 왕위(王位)에 오르면 반드시 국사(國事)를 크게 그르치리라고 풍간(諷諫)한 사람도 있었으나 성종(成宗)도 그 성미(性味)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참아 세자(世子)를 폐(廢)할 수가 없다하여 실행(實行)치 못하고 마침내 연산군(燕山君)을 세워서 이조(李朝) 쇠퇴(衰頹)의 단(端)을 열었으니 이는 전(專)혀 성종(成宗) 유약(柔弱)의 소치(所致)이다.

연산군(燕山君)이 왕(王)이 된 후(後)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의 싸움은 여전(如前)히 격화(激化)하였다. 성종(成宗)은 항상(恒常) 유신(儒臣)을 옹호(擁護)한 까닭에 유신(儒臣)의 언론(言論)이 실행(實行)되었지만 연산군(燕山君)은 혼암(昏暗)한 임금이라 유신(儒臣)들이 공신척리(功臣戚里)를 공격(攻擊)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또 그때 조정(朝廷)에는 공신(功臣)의 자손(子孫)들과 외척(外戚)의 무리가 권세(權勢)를 잡고있어 유신(儒臣)들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런데 김종직(金宗直)이 일즉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을 지은 일이 있으니 이 글은 옛날 중국(中國)에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라는 어린 임금을 세우고 섬기다가 죽인 일이 있는데 은연(隱然)히 의제(義帝)를 단종(端宗)에 비(比)하고 항우(項羽)를 세조(世祖)에게 비(比)하고 의제(義帝)를 조(弔)함은 곳 단종(端宗)을 조(弔)함이라 종직(宗直)의 제자(弟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이 되어 이 글을 사초(史草)에 기재(記載)하고 그 끝에 「忠憤之文」이라고 附記하였다.

공신척리파(功臣戚里派) 중(中)의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等)이 이 사초(史草)를 보고 이는 세조(世祖)의 일을 비방(誹謗)하는 것이라 하여 연산군(燕山君)에게 알리니 연산군(燕山君)은 이를 대역죄(大逆罪)라 하여 김종직(金宗直)의 시체(屍體)를 파내어 버리고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等)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弟子)들을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 또는 사화(史禍)라 하고 이조(李朝) 유학계(儒學界)에 제일차(第一次)의 겁운(劫運)이었다.

연산군(燕山君)은 음탕(淫蕩)하고 유연(遊宴)을 좋아하여 막대(莫大)한 재정(財政)을 소비(消費)하고 유연비(遊宴費)가 부족(不足)하게 되자 인민(人民)으로부터 공물(貢物)을 가징(加徵)하여 조종(祖宗) 이래(以來)의 규준(規準)을 깨뜨리고 간인배(奸人輩)를 등용(登用)하여 국정(國政)을 혼란(混亂)케 하더니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있은지 육년(六年)만에 그 생모(生母) 윤씨(尹氏)를 폐(廢)하여 죽일 것을 주장(主張)한 사람들을 조사(調査)하여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 보내니 이를 갑자사화(甲子士禍)라 하고 유학계(儒學界)의 제이차(第二次) 겁운(劫運)이었다. 두번의 사화(士禍)가 있은 후(後)로 연산군(燕山君)은 학정(虐政)이 더욱 심(甚)하여 정치(政治)가 어지럽고 백성(百姓)이 살 수 없으니 이에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等)이 반정운동(反正運動)을 일으키어 연산군(燕山君)을 폐(廢)하여 강화도(江華島)의 교동(喬桐)에 내치고 연산군(燕山君)의 아우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推戴)하여 세우니 이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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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후의 국정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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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中宗反正)후(後)의 국정(國政)

 

중종(中宗)의 반정(反正)은 연산군(燕山君)의 학정(虐政)에 괴로움을 받던 백성(百姓)과 두 번의 사화(士禍)에 기(氣)가 꺾어진 유학계(儒學界)에 한 광명(光明)을 주고 활기(活氣)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사회(社會)의 행방면(行方面)에 개혁(改革)의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이때 김굉필(金宏弼)의 제자(弟子)에 조광조(趙光祖)(호(號) 정암(靜菴))가 있으니 그는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고 정치(政治)를 정화(淨化)함으로써 기임(己任)을 삼고 중종(中宗)의 신임(信任)을 얻어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等) 청년학도(靑年學徒)와 더불어 그 이상(理想)한 바를 실현(實現)하기에 노력(努力)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향약법(鄕約法)을 시행(施行)하여 지방자치(地方自治)의 제도(制度)를 세우니 향약(鄕約)이라 함은 중국(中國) 송(宋)나라 사람들이 시작(始作)한 것으로 한 지방(地方)사람끼리 자치적(自治的)인 규약(規約)을 만들어 선(善)한 일을 서로 권면(勸勉)하고 악(惡)한일을 서로 규간(規諫)하고 예의(禮義)로써 서로 교제(交際)하고 환난(患難)을 서로 구제(救濟)한다는 네 가지 취지(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때에 공신(功臣)에 濫參한 자(者)가 많았으니 원래(元來) 반정공신(反正功臣)이라 함은 반정사업(反正事業)을 획책(劃策)하고 신명(身命)을 그 사업(事業)에 바친 자(者)를 말함이다. 그런데 중종(中宗)의 공신중(功臣中)에 거사(擧事)하는 날에 그 소문(所聞)을 듣고 비로소 와서 열(列)에 참거(參擧)한 자(者) 실제(實際)로 이 사업(事業)에 공헌(貢獻)한 일이 없이 공신(功臣)들과 인연(因緣)이 있는 자(者)들이 공신명부(功臣名簿)에 기록(記錄)됨으로 인(因)하여 공신(功臣)인 자(者)가 칠십(七十)여인(餘人)에 달(達)하고 공신(功臣)들은 국가(國家)로부터 공신전(功臣田)을 받아서 세습(世襲)하고 군(君)을 봉(封)하여 사회적(社會的) 특권(特權)을 향유(享有)하니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이러한 공신(功臣)들을 삭제(削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당시(當時) 반정(反正)의 공(功)이 있는 공신(功臣)들 중(中)에는 특권(特權)을 남용(濫用)하여 세력(勢力)을 얻기와 재화(財貨)를 모으기에만 힘쓰는 자(者)가 적지 아니하니 이는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반정사업(反正事業)을 행(行)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귀(富貴)를 얻으려 하는 반정(反正) 모리배(牟利輩)의 행동(行動)이었다. 유신(儒臣)대(對) 공신(功臣)의 싸움은 해를 지낼수록 더욱 심각(深刻)하여지는 터이라 조광조(趙光祖) 유신일파(儒臣一派)가 이를 그대로 간과(看過)할 이(理)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신파(功臣派)에 어떠한 과실(過失)이 있는 때는 총궐기(總蹶起)하여 공격(攻擊)하고 왕(王)이 자기(自己)들의 의견(意見)을 듣지 아니하는 때에는 동맹(同盟)퇴직(退職)한 일도 이삼차(二三次) 있었으나 중종왕(中宗王)은 암왕(暗王)이라 조광조(趙光祖)를 신임(信任)한 것도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신임(信任)이 아니라 다만 일반세론(一般世論)을 듣고 그를 현인(賢人)이라 하여 대용(大用)한 것이다. 그런데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중종(中宗)을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聖君)을 만들고 사회(社會)로 하여금 성의정심(誠意正心)할 것을 강요(强要)하다 깊이 탄(歎)하였다.

이 까닭에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는 폐정(弊政)을 개혁(改革)한 것이 많아서 백성(百姓)으로부터 환영(歡迎)을 받는 반면(反面)에 공신(功臣) 귀족(貴族)들로부터 극도(極度)의 미움을 받고 왕(王)도 또한 점점(漸漸)으로 염증(厭症)을 내게 되었다.

조광조(趙光祖) 一派는 專혀 도학(道學)을 主張하여 小學과 같은 수신서(修身書)와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성리학(性理學)을 爲主하고 시(詩) 부(賦) 표(表) 책(策)과 같은 문장학(文章學)을 배척(排斥)하며 인재(人才)를 취(取)함에 있어도 문장(文章)으로써 과거(科擧)를 보는 현행(現行)시험법(試驗法)을 폐지(廢止)하고 인물고사(人物考査)로써 사람을 취(取)하는 현량과(賢良科)를 행(行)하기를 건의(建議)하니 이때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는 정광필(鄭光弼)이 홀로 반대(反對)하여 말하되 현량과(賢良科)의 이름은 비록 좋으나 인심(人心)이 순후(淳厚)치 못한 금일(今日)에는 반드시 폐해(弊害)가 생(生)할 것이니 행(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왕(王)은 조광조(趙光祖)의 말을 좇아 마침내 시행(施行)하였다. 그러나 현량과(賢良科)의 시험관(試驗官)은 주(主)로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가 당(當)하고 있었음으로 그 취(取)하는바 사람은 거의 성리학(性理學) 파(派)들이어서 문장(文章)을 주(主)하는 선비들의 불평(不平)이 적지 아니하고 인재(人才)를 씀이 편벽(偏僻)하다는 비난(非難)이 각방면(各方面)에서 일어났다.

이조(李朝)의 전제(田制)는 국유제(國有制)이오 매매(買賣)와 전당(典當)을 금(禁)하더니 징병제도(徵兵制度)에 입영(入營)하는 비용(費用) 또 병역복무중(兵役服務中) 의식제비(依食諸費)를 군인(軍人)이 자담(自擔)하는 관계(關係)로 농민(農民)이 군대(軍隊)에 징소(徵召)되는 때에는 그 입영(入營)하는 모든 비용(費用)을 마련하기 爲하여 경작(耕作)하던 土地를 전당(典當)치 아니할 수 없고 전당기간(典當期間)은 五年으로하되 그 期間이 지나도 부채(負債)를 갚지 못하는 때는 土地가 대금업자(貸金業者)의 소유(所有)로 넘어가는 것이니 이것이 비록 국법(國法)에 위반(違反)되는 일이나 국가(國家)에서는 군대징소상(軍隊徵召上) 금지(禁止)할 수 없는 일임으로 묵인(黙認)치 아니할 수 없으니 이것이 전제파탄(田制破綻)의 시초(始初)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전당행위(典當行爲)가 비밀리(秘密裏)에 행(行)하더니 내종(乃終)에는 공공연(公公然)하게 관습화(慣習化)하고 소유(所有)의 이전(移轉)도 자유(自由)로 행(行)하여 완전(完全)한 사유제(私有制)로 화(化)하고 따라서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들은 남의 토지(土地)를 경작(耕作)하고 수확물(收穫物)의 일부(一部)를 지주(地主)에게 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이 발생(發生)한 시(始)이오 세종(世宗) 말년(末年)으로부터 세조(世祖)때에 걸쳐서 생긴 일이다. 그 後에는 전당기간(典當期間) 五年이라는 것이 五十日로 단축(短縮)되니 군대(軍隊)로 징소(徵召)되는 군인(軍人)이 오십일(五十日) 기간내(期間內)에 환토(還土)할 수는 없음으로 전당(典當)하는 날이 곧 토지(土地)가 영영(永永) 방매(放賣)되는 날이다.

이 까닭에 빈민(貧民)들의 경지(耕地)는 급속도(急速度)로 부인(富人)의 손에 겸병(兼倂)되고 중종(中宗)때에 이르러서는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이라는 두 계급(階級)이 똑똑히 사회면(社會面)에 나타났다. 강릉(江陵)사람 박수량(朴遂良)은 어전(御前)에서 현량과(賢良科) 시험(試驗)을 마치고 말하되 「평소(平素)에 생각(生覺)하고 있는 바를 한번 전하(殿下)께 아뢰고자 하였는데 이 기회(機會)에 아뢰어도 좋은가」라고 물어서 왕(王)의 허락(許諾)을 받고 아뢰기를 「지금 강릉(江陵) 지방(地方)은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이 허다(許多)하여 농민(農民) 생활(生活)이 대단히 궁핍(窮乏)하니 이것은 하루바삐 고치지 아니하면 국가(國家)의 장래(將來)에 큰 근심이 될 것이니 다시 균전제(均田制)를 행(行)하는 것이 가(可)하다」고 하였다.

중신(重臣)들 중(中)에는 지주(地主)의 토지(土地)를 국가(國家)에서 수상(收上)하여 토지(土地)없는 농민(農民)에게 분급(分給)할 수 는 있으나 그렇게 하면 공연(空然)한 혼란(混亂)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반대(反對)하고 전일(前日)에 분급(分給)한 것을 지주(地主)에게 팔고 농토를 잃었으니 지금 분배(分配)하여 주더라도 또 얼마후(後)에 다시 지주(地主)에게 팔 것이 아니냐하여 응(應)치 아니하였다. 이 문제(問題)가 한번 제의(提議)되자 조정(朝廷)안에는 양론(兩論)이 대립(對立)하고 조광조(趙光祖) 파(派)에서는 토지(土地)를 다시 분배(分配)하자는 혁신론(革新論)을 주장(主張)하여 비록 후일(後日)에 다시 팔아버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금일(今日)의 일은 금일(今日)의 정(情)에 맞게 하는 것이 정치(政治)의 본지(本旨)라 하여 기어(期於)히 토지제도(土地制度)를 개혁(改革)하려 하였다. 왕(王)은 중신(重臣)들로 하여금 여러 날 동안 토론(討論)시킨 결과(結果) 한 사람의 토지(土地) 소유(所有)는 오십(五十)결(結) 이내(以內)로 제한(制限)하기로 하니 당시(當時)에 있어서 토지(土地) 소유(所有)를 제한(制限)한 것은 일대(一大) 개혁(改革)이 아닌 것은 아니나 대체(大體)로 지주(地主)계급(階級)에 유리(有利)한 해결(解決)이오 금후(今後)의 토지(土地) 겸병(兼倂)의 방지(防止)에 아무런 실효(實效)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주(地主) 계급(階級)이 이 제도령(制度令)에 대(對)하여 불만(不滿)을 가진 것은 물론(勿論)이다.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의 정치(政治) 이념(理念)은, 그 이상(理想)은 좋으나 그 수단(手段)이 과격(過激)한 점(點)이 많고 공신(功臣) 귀족(貴族)들과의 사이에 극단(極端)의 비타협(非妥協) 태도(態度)를 취(取)하고 성리학파(性理學派) 이외(以外)의 사람에게는 편협(偏狹)한 배타심(排他心)으로 대(對)하여 당시(當時) 현(賢) 재상(宰相)으로 이름난 정광필(鄭光弼)같은 이도 그들은 비부(鄙夫)라고 통매(痛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自己) 일파(一派)의 사람들을 조정(朝廷)에 포열(布列)하고 점점(漸漸) 정치(政治)의 실권(實權)을 잡으며 백성(百姓)들은 그들을 크게 환영(歡迎)하게 되니 이에 왕(王)은 은연(隱然)히 위구(危懼) 불평(不平)한 마음을 품게되었다. 그러던 중(中) 그들은 칠십여인(七十餘人)의 위훈(僞勳)을 삭제(削除)하자고 제의(提議)하니 공신(功臣)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들기 시작(始作)하고 평소(平素)에 유신파(儒臣派)로부터 소인(小人)이라는 이름 밑에 극도(極度)의 배척(排斥)을 받은 남곤(南袞)과 공신(功臣)의 한사람인 심정(沈貞) 등(等)이 주동(主動)이 되어 한편(便)으로 왕(王)의 마음을 동요(動搖)시키고 한편(便)으로 조광조(趙光祖) 파(派)의 모역(謀逆)함을 무고(誣告)하여 중종(中宗) 십사년(十四年) 기묘(己卯)에 조광조(趙光祖)와 그의 동지(同志)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여 즉회(卽回)로 죽이려하는 것을 정광필(鄭光弼)이 왕(王)의 소매를 붙잡고 「신진(新進) 연소(年少)들이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그 행동(行動)이 과격(過激)하였을 뿐이오 이지(異志)가 있는 것이 아니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만류(挽留)하여 모두 귀양살이 보내더니 미구(未久)에 적소(謫所)에서 대부분(大部分)을 죽이니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이 화(禍)가 있은 후(後)에 현량과(賢良科)를 폐(廢)하고 토지제도(土地制度) 한령(限令)이 스스로 소멸(消滅)됨은 물론(勿論)이오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읽는 자(者)는 모두 조광조(趙光祖) 파(派)라 하여 강압(强壓)함으로 이러한 글은 당세(當世)의 큰 금물(禁物)이 되고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等)이 용사(用事)하여 정치(政治)를 어지럽게 하고 정광필(鄭光弼)도 그들에게 물려 나갔다.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等)이 정권(政權)을 잡고 그 당류(黨類)를 이끌어들여 정치(政治)를 어지럽힌 지 십여년(十餘年)에 왕(王)은 그 무리에게 속은 줄을 깨닫고 김안노(金安老)를 써서 그 무리를 없애니 이를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 하여 안노(安老)의 흉악(凶惡)함은 곤정(袞貞)의 무리보다 더 심(甚)하였다. 안노(安老)가 용사(用事)한지 칠년(七年)에 왕(王)은 그 일파(一派)를 모두 제거(除去)하니 간신(奸臣)이 정권(政權)을 잡음이 전후(前後) 십구년(十九年)동안이라 왕(王)은 크게 회오(悔悟)하여 탄식(歎息)하되 「처음에 조광조(趙光祖) 일파(一派)를 몰아내면 국사(國事)가 잘될 줄 알았더니 곤정(袞貞) 일파(一派)의 간악(奸惡)은 말할 수 없이 심(甚)하였고 이 일파(一派)를 몰아내면 금후(今後)는 아무 일 없을 줄로 생각했더니 安老의 흉악(凶惡)은 전(前)보다 더 심(甚)하여 국가(國家)를 위태(危殆)롭게 하고 백성(百姓)을 괴롭게 하였다. 후세(後世)에 나를 어떤 임금이라 칭(稱)할고」하고 정광필(鄭光弼)을 적소(謫所)로부터 불러들여 정승(政丞)을 삼으니 백성(百姓)들이 천일(天日)을 본듯이 환호(歡呼)하였다. 이에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의 금(禁)이 스스로 풀리고 유신(儒臣)들을 거용(擧用)하였으며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은 비로소 서원(書院)을 짓고 거기에 선현(先賢)을 모시고 유생(儒生)들이 모여서 도학(道學)을 연구(硏究)하게 하니 이것이 이조(李朝) 서원(書院)의 시초(始初)이다.

그러나 중종(中宗)은 암주(暗主)라 조정(朝廷)안에 왕권(王權) 쟁탈(爭奪)의 단서(端緖)가 열리었다. 중종(中宗)도 비(妃)에 선비(先妃) 윤씨(尹氏)는 인종(仁宗)을 낳고 계비(繼妃) 윤씨(尹氏)는 명종(明宗)을 낳았는데 인종(仁宗)의 외숙(外叔)은 윤임(尹任)이오 명종(明宗)의 외숙(外叔)은 윤원형(尹元衡)이니 세인(世人)이 윤임(尹任)을 대윤(大尹)이라 하고 윤원형(尹元衡)을 소윤(小尹)이라 하고 이 두 사람의 세력(勢力) 다툼을 대윤(大尹) 소윤(小尹)의 싸움이라 하였다. 인종(仁宗)은 중종(中宗)을 이어 왕(王)이 된지 겨우 일년(一年)에 승하(昇遐)하고 아들이 없음으로 그 아우 명종(明宗)이 십이세(十二歲)에 왕(王)이 되고 그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정치(政治) 실권(實權)을 잡고 윤원형(尹元衡)이 용사(用事)하니 최초(最初)부터 척리(戚里)파(派)를 미워하는 유생(儒生)들이 명종(明宗) 외가(外家)의 천정(擅政)함을 좋아할 이(理)가 없었다. 이에 윤원형(尹元衡)은 전(前)부터의 정적(政敵)인 대윤(大尹) 일파(一派)와 자기(自己)에게 좋지 못한 감정(感情)을 가지고 있는 유신(儒臣)들을 일체(一切) 배제(排除)하기로 정(定)하고 명종(明宗)이 왕(王)이 되던 을사(乙巳)년에 근거(根據)없는 사실(事實)을 꾸며서 역적(逆賊)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혹(或)은 죽이고 혹(或)은 귀양보내니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 한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여러 차례 사화(士禍) 중(中) 가장 참혹(慘酷)하고 인심(人心)이 가장 분개(憤慨)하였다. 무오(戊午) 기묘(己卯)의 사화(士禍)는 그 상대자(相對者)가 간신(奸臣)들이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燕山君)이 그 어머니를 위(爲)한 복수(復讐)이니 혹(或)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왕(王)의 모후(母后)와 왕(王)의 외숙(外叔)이 아무런 죄(罪)가 없는 유신(儒臣)들을 무함(誣陷)하여, 절대충성(絶對忠誠)을 다할 것을 학문(學問)의 대본(大本)을 삼고 있는 유학도(儒學徒)들도 왕실(王室)에 대한 충성(忠誠)이 엷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자(前者)에 세 번의 사화(士禍)에는 비록 참혹(慘酷)한 변(變)을 당(當)하였으되 오히려 다시 유학(儒學)을 진흥(振興)하여 그 이상(理想)하는 바를 정치(政治)의 면(面)에 실현(實現)하려고 노력(努力)하는 사람이 연(連)달아 나왔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以後)에는 그들은 정치(政治)에서 물러나 현실(現實) 세상(世上)과 인연(因緣)을 끊고 산림(山林)에 숨어서 오로지 학문(學問)에만 힘쓰게 되었음으로 정치(政治)와 학문(學問)이 나뉘어져서 소위(所謂) 산림학자(山林學者)라는 것이 생기고 실사(實事)를 떠나서 이론(理論)에 행동(行動)을 떠나서 사색(思索)에 치우치는 경향(傾向)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서경덕(徐敬德)(호(號)는 화담(花潭)) 조식(曺植)(호(號)는 남명(南溟)) 이황(李滉)(호(號)는 퇴계(退溪)) 기대승(奇大升)(호(號)는 고봉(高峯) 이지함(李之菡)(호(號)는 토정(土亭)같은 일대(一代) 명유(名儒)가 나서 명종(明宗)시대(時代)의 유학계(儒學界)에 꽃을 피웠으나 그들은 정치(政治) 방면(方面)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고 비록 이황(李滉)같은 이는 왕(王)의 부름을 받아서 벼슬에 나온 일이 있으나 기회만 있으면 다시 산림(山林)으로 돌아갔음으로 그때에 이를 평(評)하여 산금(山禽)이라고 별명(別名)을 지은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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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관계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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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

 

세종(世宗)때에 옥포(玉浦)를 열어서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한 것이 그 후(後) 차츰 왜인(倭人)의 수효(數爻)가 늘어서 수천명(數千名)에 이르며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을 어기는 일이 적지 아니하더니 중종(中宗) 오년(五年)(단기 삼천팔백사십삼년 경오(庚午))에 대마도(對馬島)와 연결(連結)하여 난(亂)을 일으키니 이를 삼포왜란(三浦倭亂) 또는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 한다.

이 난(亂)은 곧 평정(平定)되었으나 그 후(後)에도 중종(中宗) 삼십구년(三十九年)에 통영군(統營郡) 사량(蛇梁)에서 변란(變亂)을 일으킨 일이 있고 명종(明宗) 십년(十年) 을묘(乙卯)에 또 다시 해남군(海南郡) 달량포(達梁浦)에 침입(侵入)하니 이를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한다. 원래(元來) 왜인(倭人)들은 아국(我國)과 무역(貿易)하지 아니하고는 살수가 없는 데이나 그 무역액(貿易額)에는 제한(制限)이 있으므로 왜인(倭人)들은 비밀(秘密)히 제한외(制限外)의 무역(貿易)을 행(行)하고 또 변장(變裝)하고 거주구역(居住區域)밖에 나와서 민가(民家)로 좇아 다니면서 장사하는 한편(便) 국가(國家)의 정치(政治)와 사업(事業)의 기밀(機密)을 정탐(偵探)하여 왜(倭) 본국(本國)에 보고(報告)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에 정부(政府)에서는 지방관리(地方官吏)에게 명(命)하여 그를 엄금(嚴禁)한 관계(關係)로 양국민(兩國民)의 감정(感情)이 서로 좋지 못하여 마침내 삼포(三浦)의 변(變)이 일어나고 그 변(變)이 평정(平定)된 뒤로 종래(從來)의 무역액(貿易額)을 반(半)으로 줄이니 이때로부터 왜인(倭人)의 아국(我國)에 대(對)한 감정(感情)이 더욱 악화(惡化)되었다.

이에 조정(朝廷)에서는 왜인(倭人)들이 왜구(倭寇)를 잡아 바치었다든가 표류(漂流)한 우리 나라 사람을 돌려 보내주었다든가 하여 우리 나라에 공로(功勞)가 있는 자(者)에게는 관직(官職)을 주어 이를 수직왜(守職倭)라 하여 특별(特別)한 대우(待遇)로써 그들을 무마(撫摩)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感情)은 마침내 풀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간교(奸狡)한 꾀로써 우리 나라를 속이고 우리 나라 국정(國政)을 밀정(密偵)하니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들을 대(對)할 때 경어(敬語)를 쓰는 일이 적고 흔히 왜놈이라 불러서 모욕(侮辱)하였다. 김안국(金安國)같은 이는 이를 근심하여 양국민(兩國民) 사이의 감정(感情)이 좋지 못하고 장래(將來) 국가(國家)에 이(利)롭지 못하리라고 경고(警告)한 일도 있었다.

을묘란(乙卯亂)이 일어나자 조정(朝廷)에서는 이준경(李浚慶)으로 도순찰사(都巡察使)를 명(命)하여 치게 하니 이준경(李浚慶)이 호남(湖南)에 내려갔으나 군사(軍士)도 몇 사람되지 아니하고 무기(武器)도 없어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한편으로는 군사(軍士)들을 소집(召集)하고 한편으로는 무기(武器)를 만들어서 영격(迎擊)하더니 적(賊)은 약탈(掠奪)하여 가지고 해상(海上)으로 도망하였다. 이 난(亂)이 있은 후(後)에 한동안 양국(兩國) 교통(交通)이 끊어지더니 일본(日本)이 다시 통상(通商)하기를 간망(懇望)하고 우리 나라에서도 그들을 무마(撫摩)하는 것이 득책(得策)이라 하여 통상(通商)을 허(許)하는데 종래(從來)에 개항(開港)한 청포(菁浦)방면(方面)은 첩첩(疊疊)한 도서(島嶼)에 싸여서 왜선(倭船)이 숨기 쉽고 우리 나라의 척후(斥候)가 보기 어려움으로 부산(釜山) 일항(一港)을 열어서 왜선(倭船)의 내왕(來往)을 허(許)하니 이는 부산(釜山)에 섬이 없어서 왜선(倭船)의 내왕(來往)을 보기 쉬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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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부패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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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社會)의 부패(腐敗)

 

연산군(燕山君) 이후(以後) 육십여년(六十餘年) 간(間) 간신(奸臣)이 정권(政權)을 잡을 때가 많았고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이르러서는 정치(政治)가 극도(極度)로 어지럽고 화뇌(貨賂)가 성행(盛行)하여 사회(社會)는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외방(外方)의 공물(貢物)은 개국초(開國初)에 지방산물(地方産物)과 호구수(戶口數)를 감안(勘案)하여 정(定)한 것인데 연산군(燕山君)이 이를 가징(加徵)하고 또 산물(産物)이 수량(數量)과 호구(戶口)가 오륙십(五六十) 년간(年間)에 변동(變動)된 것이 적지 아니 하되 조정(朝廷)에서는 그것을 민간(民間) 실정(實情)에 맞도록 개정(改正)치 아니하여 민폐(民弊)가 심(甚)하였다.

군역(軍役)은 군포(軍布)을 바치고 징소(徵召)됨을 면(免)하는 제도(制度)가 행(行)하였는데 이는 각(各) 진보(鎭堡)가 군포(軍布)를 받아 가지고 군인(軍人)을 용인(傭人)하기 위(爲)함이다. 그러나 진보(鎭堡)의 주장(主將)이란 자(者)들은 군포(軍布)로써 사복(私腹)을 채우고 군사(軍士)를 용인(傭人)치 아니 하는 까닭에 각(各) 진보(鎭堡)의 실제(實際) 인원(人員)은 정원수(定員數)의 천(千)의 이삼(二三)에도 달(達)치 못하고 군적(軍籍)에는 허명(虛名) 가명(假名) 심지어(甚至於) 구명(狗名) 묘명(猫名)까지 씌어있었다. 그리고 한번 군포(軍布)를 바치기 시작(始作)한 사람은 매년(每年) 계속(繼續)하여 바치기로 되어있는데 혹(或)은 그 사람이 사망(死亡)한 뒤에도 여전(如前)히 징포(徵布)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 백골징포(白骨徵布)라하고 혹(或)은 유아(乳兒)에게도 徵布하였으니 이를 황구(黃口)징병(徵兵)이라 하고 혹(或)은 사람이 고역(苦役)을 견디지 못하여 전가(全家)를 거느리고 도망(逃亡)하여 버리면 그 군포(軍布)를 그의 일족(一族)으로부터 받고 일족(一族)이 없으면 절린(切隣)으로부터 징수(徵收)하니 이는 군포(軍布)가 주장(主將)의 사수입(私收入)이 되는 까닭에 사망(死亡) 유아(乳兒) 도망(逃亡) 같은 사실(事實)을 국가(國家)에 보고(報告)하지 아니하고 계속(繼續) 징수(徵收)하는 것이며 이로 인(因)하여 진보(鎭堡)에는 매년(每年) 고정(固定)불변(不變)하는 군포(軍布) 수입(收入)이 있었다. 그럼으로 이때에는 각(各) 진보(鎭堡)의 가격(價格)이 군포(軍布) 필수(疋數)에 정(定)해져서 그 가격(價格)의 다소(多少)로써 지위(地位)의 고하(高下)를 정(定)하는 것이었다.

이서(吏胥)의 폐망(弊亡) 전(前)부터 있는 일이지만 중종(中宗) 명종(明宗)의 전후(前後) 삼십여년(三十餘年) 간(間) 중앙(中央)의 정치(政治)가 어지러움으로 인(因)하여 더욱 심(甚)하여져서 모든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백성(百姓)들은 그 생활(生活)을 유지(維持)할 수 없었고 당시(當時) 군현(郡縣)의 수(數)는 삼백이십(三百二十) 여(餘)인데 군현(郡縣)이 너무 많아서 백성(百姓)의 부담(負擔)이 과중(過重)함으로 이를 폐합(廢合)하여 백성(百姓)의 부담(負擔)을 경감(輕減)하려고 기도(企圖)한 일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이서(吏胥)의 실직(失職)하는 자(者)가 많게 됨으로 군현(郡縣)의 실권(實權)을 잡고 있는 이서(吏胥)들은 중앙정부(中央政府) 내(內)의 간신배(奸臣輩)들과 결탁(結託)하여 극력(極力)으로 저해(沮害)한 일도 있었고 수령(守令)들은 중앙(中央)으로부터 임명(任命)되어 삼년(三年)이라는 임기(任期)(임기(任期)에는 신축(伸縮)이 있었다.)를 지내는데 지방(地方)의 실정(實情)을 잘 알지 못함으로 그 대부분(大部分)은 이서(吏胥)의 손에 사무(事務)를 맡겨 버리는 형편(形便)이어서 백성(百姓)들은 수령(守令)보다도 이서(吏胥)를 두려워하였으니 이 까닭에 국가(國家)의 말단행정(末端行政)은 이서정치(吏胥政治)로 화(化)하였다.

조식(曺植) 같은 이는 명종(明宗)에게 상서(上書)하여 왕(王)의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과부(寡婦)로서 정치(政治)를 어지럽게 한다는 과부간정론(寡婦干政論)과 군현(郡縣)의 이서배(吏胥輩)들이 국사(國事)를 그르치고 있다는 이서망국론(吏胥亡國論)을 올려 세인(世人)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케 한 일도 있었다.

이때 유신(儒臣)들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어서 비록 기(氣)가 꺾이었으나 그 잠재(潛在)한 힘은 더욱 굳세어 공신척리(功臣戚里)들을 미워하는 생각이 날로 강(强)해지더니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음에 종래(從來) 왕후(王后)의 힘을 배경(背景)으로 하여 온갖 횡포(橫暴)를 자행(恣行)하던 윤원형(尹元衡)은 의지(依支)할 곳이 없는 일독부(一獨夫)라 유신(儒臣)들은 일제(一齊)히 궐기(蹶起)하여 마침내 윤원형(尹元衡)을 몰아내고 무리를 일소(一掃)하였다.

명종(明宗)의 뒤를 이어 선조(宣祖)가 왕(王)이 되니 이때는 명상(名相) 이준경(李浚慶)이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조정(朝廷)이 유신(儒臣) 일색(一色)으로 조직(組織)되었다. 세조(世祖)때에 유신(儒臣) 대(對) 공신척리(功臣戚里)파의 싸움이 일어난 이래(以來) 일백십여(一百十餘) 년(年)만에 비로소 유신(儒臣)이 완전(完全)히 정권(政權)을 잡으니 이로부터 그 이상(理想)하는 바의 정치(政治)를 실현(實現)할 시기(時機)가 도래(到來)한 것이다.

그러나 이준경(李浚慶)은 그 임종(臨終) 유차(遺箚)에 「지금(只今) 사습(士習)이 부허(浮虛)하여 허위(虛僞)가 풍(風)을 작(作)하니 붕당(朋黨)의 점(漸)이 있다」고 경고(警告)하니 당시(當時) 유사(儒士)들이 경조(輕躁)하여 독실(篤實)한 풍(風)이 없고 고언(高言) 대담(大談)을 일삼고 사람의 조그마한 과실(過失)이라도 관용(寬容)함이 없이 공격(攻擊)하기를 좋아함으로 반드시 붕당(朋黨)이 생긴다고 예언(豫言)한 것이다.

이 유차(遺箚)가 한번 들어오자 조정(朝廷) 제신(諸臣)들은 붕당(朋黨)이 없음을 극력(極力) 변명(辨明)하고 이이(李珥)같은 이는 이준경(李浚慶)이 무근(無根)한 말로써 사림(士林)을 화독(禍毒)하는 것이라 하여 공박(攻駁)하고 심지어(甚至於) 이준경(李浚慶)을 추죄(追罪)하자는 격론(激論)까지 일어난 일이 있으니 이는 자기(自己)들이 결(決)코 붕당(朋黨)을 만들지 않을 것을 맹서(盟誓)함과 같음이다.

그러나 이준경(李浚慶)이 죽은지 사년(四年)만인 선조(宣祖) 팔년(八年) 을해(乙亥)(단기 삼천구백팔년)에 마침내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기고 말았다. 처음에 심의겸(沈義謙)은 왕실(王室)의 외척(外戚)으로서 명종(明宗)때에 간신(奸臣)들의 행악(行惡)이 심(甚)한 중(中)에서 유사(儒士)들을 구활(救活)한 일이 많았음으로 비록 심(沈)이 척리파(戚里派)에 속(屬)하되 유신(儒臣)들의 호감(好感)을 얻고 있으며 김효원(金孝元)은 신진(新進) 유사(儒士)로써 연소유신(年少儒臣)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었는데 김효원(金孝元)은 심의겸(沈義謙)을 척리파(戚里派)라 하여 배격(排擊)하고 심의겸(沈義謙)은 김효원(金孝元)이 일직 권신(權臣)의 문(門)에 출입(出入)하였다 하여 멸시(蔑視)한 관계(關係)로 두 사람사이에 갈등(葛藤)이 생겼다. 이에 심의겸(沈義謙)을 우(右)하는 자(者)와 김효원(金孝元)을 우(右)하는 자(者)가 생기고 경조부박(輕佻浮薄)한 무리들이 마치 정월(正月) 초생(初生) 줄다리기에 양편(兩便)에 서로 와서 덧붙듯이 혹(或)은 심의겸(沈義謙)파(派)에 붙고 혹(或)은 김효원(金孝元)파(派)에 붙어서 조정(朝廷)안이 양당(兩黨)으로 갈라지니 심(沈)의 집은 서울의 서편(西便)에 있음으로 그를 서인(西人)이라 하고 김(金)의 집은 동편(東便)에 있음으로 동인(東人)이라 하고 또 노성파(老成派)는 대개(大槪) 서인(西人)이 되고 소장파(少壯派)는 대개(大槪) 동인(東人)이 되니 유신(儒臣) 대 공신척리(功臣戚里)파(派)의 백십여년간(百十餘年間)의 격렬(激烈)한 투쟁(鬪爭)은 역시(亦是) 유사(儒士) 대(對) 척리(戚里)의 사소(些少)한 감정(感情) 소격(疏隔)을 계기(契機)로 하여 그 형태(形態)가 일변(一變)하여 동류(同流) 상잔(相殘) 동지(同志) 상식(相食)하는 유신(儒臣) 대(對) 유신(儒臣)의 추악(醜惡)한 당쟁(黨爭)으로 화(化)하였다.

당쟁(黨爭)이 한번 일어난 후(後) 조정(朝廷)안에는 중정(中正) 불편(不偏)한 자(者)가 거의 없고 오직 자당(自黨)의 이해를 위(爲)하여 움직여서 정치(政治)의 이상(理想)이 있는 것도 아니오 사(事)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가리는 것도 아니오 동인(東人)은 동인(東人)을 옹호(擁護)하고 서인(西人)은 서인(西人)을 옹호(擁護)하여 일대(一大) 난투(亂鬪) 장(場)을 이루었다. 선조(宣祖)는 군신(群臣)에게 누가 붕당(朋黨)을 만들고 있느냐고 문책(問責)한즉 군신(群臣)들은 붕당(朋黨)이라는 말은 다만 항간(巷間)에서 유포(流布)되는 풍설(風說)이오 조신중(朝臣中)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변명(辨明)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쓰고 죄(罪) 줌이 모두 당쟁(黨爭)의 영향(影響)을 받아서 공론(公論)이 행(行)치 못하고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짐으로 이이(李珥)는 이를 조정(調停)하는 것을 기임(己任)으로 삼고 분당(分黨)의 장본인(張本人)인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을 외관(外官)으로 내어보내면 당쟁(黨爭)이 멈추리라고 하여 왕(王)께 이 의견(意見)을 아뢰었던 바 왕(王)은 심의겸(沈義謙)으로 개성(開城) 유수(留守)를 삼고 김효원(金孝元)으로 회령(會寧) 부사(府使)를 삼으니 비록 동(同)한 외관(外官)이로되 심(沈)은 승진(昇進)되고 김(金)은 폄점(貶點)되는 결과(結果)를 생(生)하였다. 이에 동인(東人)들은 크게 불평(不平)을 품고 또 김(金)의 폄점(貶點)은 이이(李珥)의 제안(提案)에 의(依)한 것이라 하여 일제(一齊)히 일어나서 이이(李珥)도 공정(公正)한 조정자(調停者)가 아니고 서인(西人)에 당(黨)하여 동인(東人)을 압박(壓迫)하는 것이라 하여 공격(攻擊)을 행(行)하니 이이(李珥)는 조정(調停)하기를 단념(斷念)할 뿐만 아니라 조정(朝廷)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으로 향리(鄕里)로 물러갔다. 이때 이지함(李之菡)은 국사(國事)를 근심하여 말하기를 율곡(栗谷)이 조정(朝廷)에 있으면 큰 효과(效果)는 없어도 파국(破局)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한번 물러가는 날이면 이 정국(政局)을 다시 수습(收拾)할 수 없으리라 하여 크게 탄식(歎息)하였다.

음식(飮食)이 있는 곳에 반드시 다툼이 있는지라 처음에는 서인(西人)이 득세(得勢)하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동인(東人)이 힘이 커지자 동인(東人) 속에서 다시 내부(內部)에 싸움이 일어나니 이는 이산해(李山海)를 중심(中心)으로 한 일파(一派)와 유성룡(柳成龍)(호(號)는 서애(西崖))을 중심(中心)으로 한 일파(一派)이니 이(李)는 서울에 살고 있음으로 북(北)이라 하고 유(柳)는 영남(嶺南)에 살고 있음으로 남인(南人)이라 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은 남(南) 북(北) 서(西)의 삼당(三黨)으로 나뉘어 삼색(三色)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는 날로 험악(險惡)하여 가고 국내(國內) 정세(情勢)는 당쟁(黨爭)으로 인(因)하여 더욱 부패(腐敗)하여지고 특(特)히 병비(兵備)가 극(極)히 허소(虛疎)하여 북(北)의 야인(野人)이나 남(南)의 왜구(倭寇)가 침입(侵入)하는 일이 있으면 도저(到底)히 막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이이(李珥)는 미리 십만(十萬) 병(兵)을 양(養)하여 경성(京城)에 이만(二萬)을 두고 각도(各道)에 일만(一萬)씩을 두어 여외(廬外)의 악(惡)을 방비(防備)할지오 만일(萬一) 그렇지 아니하면 일년(一年)을 불거(不去)하여 토붕(土崩)의 화(禍)가 있으리라고 경정(逕庭)에서 아뢰나 유성룡(柳成龍)이 무사태평(無事泰平)한 때에 병(兵)을 양(養)하는 것은 화(禍)를 양(養)함이라 하여 반대(反對)하고 다른 조신(朝臣)들도 당쟁(黨爭)에만 열중(熱中)하고 국사(國事)를 근심하는 자(者)가 없음으로 이 나라를 살리는 유일책(唯一策)인 십만(十萬) 양병론(養兵論)은 실현(實現)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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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삼화선생 서당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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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선조(宣祖) 초(初)에 일본(日本)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국내(國內)를 통일(統一)하고 장차(將次) 대륙(大陸)으로 진출(進出)할 야심(野心)이 있어 우리 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양국(兩國)이 서로 친화(親和)하게 지내자 하고 또 우리 나라에 침입(侵入)할 뜻이 있다는 풍설(風說)이 퍼지고 있음으로 선조(宣祖) 이십삼년(二十三年)에 조정(朝廷)에서는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보내니 그 형식(形式)은 양국(兩國) 수호(修好)를 위(爲)함이나 기실(其實)은 수길(秀吉)의 태도(態度)를 타진(打診)함이다. 황(黃)과 김(金)이 돌아온 후(後) 두 사람의 복명(復命)이 서로 같지 아니하니 황(黃)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안광(眼光)이 빛나고 태도(態度)가 거만(倨慢)하니 반드시 입구(入寇)하리라 하고 김(金)은 말하되 수길(秀吉)의 눈이 쥐눈 같고 인물(人物)이 보잘 것 없으니 반드시 입구(入寇)치 아니한다. 하였다. 황(黃)은 서인(西人)임으로 서인(西人)들은 덮어놓고 황(黃)의 말을 옳다하고 김(金)은 동인(東人)임으로 동인(東人)들은 김(金)의 말을 지지(支持)하여 국가명일(國家明日)의 흥망(興亡)이 달려있는 중대(重大) 사(事)에 적(敵)의 실정(實情)을 깊이 검토(檢討)치 아니하고 오직 당인(黨人) 옹호(擁護)만을 위주(爲主)하였으며 이때 동인(東人)의 세력(勢力)이 컸음으로 조정(朝廷)의 의론(議論)은 김(金)의 말을 좇게되고 선조(宣祖)도 또한 김(金)이 선사(善使)하였다 하여 포상(褒賞)하고 착수(着手)중(中)에 있는 남방(南方)의 군비(軍備)도 수면상태(睡眠狀態)에 빠지고 군신(君臣)이하(以下)가 모두 태평몽(泰平夢)에 취도(醉倒)하였다.

일본(日本) 수길(秀吉)은 우리 나라의 군비(軍備)의 허실(虛實)을 전일(前日)의 사신(使臣) 왕래(往來) 시(時)에 미리 탐지(探知)하고 선조(宣祖) 이십오년(二十五年) 임진(壬辰)(단기 삼천구백이십오년)에 명(明)나라를 치러가니 조선(朝鮮)은 길을 빌려달라고 빙자(憑藉)하고 그해 사월(四月)에 군사(軍士) 이십만(二十萬)과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藤淸正) 등(等) 장수(將帥)를 보내어 풍우(風雨)같이 몰려와서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하니 이는 우리 나라의 청천벽력(靑天霹靂)이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던 아국(我國) 군대(軍隊)가 백전(百戰) 노련(老鍊)한 왜병(倭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동래성(東來城)이 일전(一戰)도 못하고 함락(陷落)되고 적군(敵軍)은 거침없이 동서(東西) 두 길로 나뉘어 경성(京城)을 향(向)하여 북상(北上)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이 급보(急報)를 듣고 모두 창황망조(蒼皇罔措)하고 선조(宣祖)는 김식일(金識一)이 국사(國事)를 그르쳤다 하여 곧 잡아오라고 엄명(嚴命)을 내리더니 성일(誠一)이 황공(惶恐) 입경(入京)하는 차(次)에 선조(宣祖)는 다시 명령(命令)을 내리어 이번 왜구(倭寇)는 너로 인(因)하여 오는 것이니 네가 나가서 막으라 하여 남방(南方)으로 보내었다.

조정(朝廷)에서는 적(敵)을 막을 힘이 없고 서로(西路)를 좇아 피난(避難)의 길을 떠나니 경성(京城) 안에 있던 난민(亂民)들이 경복궁(景福宮)에 불질러 사뤘으며 각지(各地)의 수령(守令)들은 대부분(大部分)이 직무(職務)를 버리고 도망(逃亡)하였음으로 호구(戶口)와 토지(土地)의 문적(文籍)이 이때에 대개(大槪) 멸실(滅失)되었다. 왜병(倭兵)이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한지 겨우 이십일(二十日)만에 경성(京城)이 함락(陷落)되고 팔도(八道) 인심(人心)이 토붕(土崩)하듯이 무너져서 다시 수습(收拾)할 수가 없었다. 선조(宣祖)는 서로(西路)를 피난(避難)하면서도 서도(西道)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를 크게 의구(疑懼)하여 이원익(李元翼)을 불러서 말하되 경(卿)이 일직 안주(安州) 목사(牧使)가 되었을 때 행정(行政)을 잘하여 평안도(平安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생각한다하니 경(卿)이 먼저 평안도(平安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안무(按撫)하라하고 또 최흥원(崔興源)을 불러 말하되 경(卿)이 일직 황해(黃海)감사(監司)사가 되었을 때 백성(百姓)을 사랑하였음으로 황해도(黃海道) 백성(百姓)이 지금까지 경(卿)을 잊지 아니한다 하니 경(卿)이 먼저 황해도(黃海道)에 가서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개성(開城)에 가서 얼마동안 머물다가 왜병(倭兵)이 따라옴을 보고 평양(平壤)을 거쳐서 의주(義州)에 가서 머물고 있었다.

국세(國勢)가 이렇게 위태(危殆)로운 지경(地境)에 이르렀을 때에 국내(國內)에는 오직 두 줄기의 생기(生氣)가 움직였으니 그 하나는 이순신(李舜臣)의 해전(海戰)이오 또 하나는 의병(義兵)의 궐기(蹶起)이다. 이순신(李舜臣)은 전라도(全羅道) 좌수사(左水使)가 된 때로부터 미리 왜적(倭賊)의 침입(侵入)이 있을 것을 짐작(斟酌)하고 우수(優秀)한 전선(戰船)을 제조(製造)하려 하여 백제(百濟) 시대(時代) 이래(以來) 고려(高麗) 시대(時代)로 거쳐서 전(傳)해오는 아국(我國) 특유(特有)의 조선(造船)기술(技術)을 써서 새로이 한 배를 창조(創造)하니 그 배는 철판(鐵板)으로 위를 덮어서 거북의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 송곳을 꽂고 적병(敵兵)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사이에 십자로(十字路)를 통(通)하여 우리 군사(軍士)가 자유(自由)로 통행(通行)하게 하고 전후(前後)좌우(左右)에 총혈(銃穴)을 내어서 군사(軍士)가 그 밑에 숨어 총(銃)을 놓게 된 것이니 이를 구선(龜船)이라 한다.

이순신(李舜臣)은 왜병(倭兵)이 들어옴을 보고 구선(龜船) 팔십척(八十隻)을 거느리고 오월(五月) 칠일(七日) 옥포(玉浦)에서, 유월(六月) 사일(四日)에 당포(唐浦)에서, 칠월(七月) 팔일(八日)에 한산도(閑山島)의 앞바다 등(等) 적(敵)의 수군(水軍)을 연(連)거푸 쳐 부시고 한산도(閑山島)의 길목을 수비(守備)하니 적(敵)이 다시 남해(南海) 변(邊)을 엿보지 못하였다. 처음에 왜병(倭兵)은 육로(陸路)와 해로(海路)의 두 길로 병진(倂進)하여 일거(一擧)에 우리 나라를 삼키려 한 것인데 해로(海路)가 이순신(李舜臣)에게 막힌 까닭에 육로(陸路) 군(軍)의 동(東)은 함경도(咸鏡道) 두만강(豆滿江)까지 들어가고 서(西)는 평양(平壤)까지 들어갔으되 더 북상(北上)하기를 두려하여 왕(王)을 쫓아가지 못하였으니 이 대란(大亂)에 우리 나라가 다시 소생(蘇生)함에는 이순신(李舜臣)의 힘이 절대(絶對)한 것이었다.

왜병(倭兵)이 처음 들어 올 때에는 인심(人心)이 모두 황겁(慌怯)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또 적(敵)은 조총(鳥銃)을 가지고 있는데 총(銃)의 위력(威力)이 얼마나 큰가를 알지 못함으로 감(敢)히 접전(接戰)할 용기(勇氣)를 내지 못하더니 시일(時日)이 경과(經過)함을 따라 점차(漸次)로 적(敵)의 정세(情勢)를 알게 됨으로부터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거의(擧義)하려는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경상도(慶尙道)에서 처음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者)는 곽재우(郭再祐)(호(號)는 망우당(忘憂堂))이니 홍의(紅衣)를 입고 마(馬)를 타고 적진(敵陣)에 들어가서 횡행(橫行)하되 적(敵)이 감(敢)히 막지 못하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있는 곳에는 적(敵)이 반드시 피거(避去)하였다. 전라도(全羅道)에서는 광주(光州)의 고경명(高敬命)(호(號)는 제봉(霽峰))이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와 김천일(金千鎰) 등(等)으로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이 소식(消息)을 듣고 각지(各地)에서 의병(義兵)이 연거푸 일어났음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중(中)에 의병(義兵)의 세력(勢力)이 가장 큰 곳이 호남(湖南)이었고 이 의병(義兵)의 힘에 의하여 호남(湖南)이 보전(保全)된 까닭에 국가(國家)의 생맥(生脈)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호남(湖南) 의병(義兵)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군(軍)과 아울러 유명(有名)한 것은 금산(錦山)의 조헌(趙憲)(호(號)는 중봉(重峯))군(軍)이다. 조헌(趙憲)은 임진(壬辰) 전년(前年)에 미리 명년(明年)에 큰 병란(兵亂)이 일어 날줄을 알고 선조(宣祖)에게 상소(上疏)하여 정치(政治)의 잘못됨을 통론(痛論)하고 급(急)히 방비(防備)의 책(策)을 세울 것을 극언(極言)하니 그 말이 너무 과격(過激)함으로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광인(狂人)이라 하여 귀양보내었다.

임진(壬辰)란(亂)이 일어남에 동지(同志)를 모아서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원근(遠近)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두 조헌(趙憲)이 일어났다. 하여 용관(聳觀)하고 우국(憂國)하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여러 번 왜병(倭兵)과 싸워서 이기더니 금산(錦山)싸움에서 중과(衆寡)과가 부적(不適)하여 패사(敗死)하고 동지(同志)인 칠백의사(七百義士)도 함께 죽으니 지금도 전쟁(戰爭)하던 자리에 칠백의사(七百義士) 총(塚)이 있으며 이 싸움에 왜병(倭兵)도 죽은 자(者)가 많고 또 전쟁(戰爭)의 후방(後方) 세력(勢力)이 어떠함을 알지 못하여 물러가고 다시 전라도(全羅道)를 엿보지 못하니 호남(湖南)북부(北部)의 보전(保全)함은 주(主)로 조헌(趙憲)의 힘이었다.

이밖에도 각도(各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서 큰 전공(戰功)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적병(敵兵)을 괴롭게 하여 마음대로 횡행(橫行)치 못하게 하고 우리 나라 백성(百姓)에게 한줄기의 기(氣)를 넣어준 공(功)은 적지 아니하였으며 특(特)히 승병(僧兵)의 힘이 또한 적지 아니하니 승(僧) 유정(惟政)(호(號)는 사명산인(泗溟山人))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고제(高弟)로서 승병(僧兵)을 모아 비록 실전(實戰)에는 참가(參加)치 아니하였으나 물자(物資)의 운반(運搬)과 여러 가지 역사(役事)에 큰 조력(助力)을 하였다.

이때 국군(國軍)들도 점차(漸次)로 세력(勢力)을 얻어서 왜병(倭兵)을 쳐 부시려는 용기(勇氣)를 내게되고 권율(權慄)은 이기(梨崎)(배티,대둔산부근)에서, 이정암(李廷馣)은 연안(延安)에서, 김시민(金時敏)은 진주(晉州)에서 모두 크게 이겼다.

이 정도(程度)의 병력(兵力)만으로는 전국(全國)에 가득히 찬 적(敵)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왕(王선조(宣祖))은 의주(義州)에 있어서 유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호(號)는 백사(白沙) 이덕형(李德馨)(호(號)는 한음(漢陰)등(等)으로 더불어 국사(國事)를 의논(議論)하는데 난(亂)이 일어난 후(後)에 당쟁(黨爭)은 일시(一時) 멈추어 졌으나 그 저류(底流)에는 여전(如前)이 동서(東西)의 알력(軋轢)이 있음으로 왕(宣祖王)은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有西東」가 하여 東西의 싸움이 國家로 하여금 이 地境을 만들어 놓고 또 여기까지 몰려와서 東西 싸움을 하느냐 恨歎하였다.

國事가 이에 이르매 獨力으로는 恢復할만한 길이 없음으로 明나라에 請兵하기로 決定하였다. 이때 明나라에서는 이상(異常)한 와언(訛言)이 전파(傳播)되어 조선(朝鮮)이 왜(倭)와 공모(共謀)하여 명국(明國)을 치러온다고 하였다 그 증거(證據)로는 왜병(倭兵)이 들어온後 한번의 결전(決戰)도 없이 왕(王宣祖)은 압록강(鴨綠江) 변(邊)까지 들어오고 왜병(倭兵)은 평양(平壤)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청병(請兵)하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이를 변명(辨明)하고 또 원병(援兵)을 보내어 달라고 간청(懇請)하였으며 明나라에서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일본수길(日本秀吉)이 장차(將次) 명(明)나라를 치기 위(爲)하여 조선(朝鮮)에 길을 빌려달라 하고 조선(朝鮮)이 그를 거절(拒絶)하자 곧 침입(侵入)한 사정(事情)과 명국(明國)의 울타리가 되고있는 조선(朝鮮)이 명국(明國)을 대신(代身)하여 왜구(倭寇)의 화(禍)를 받고있다는 사실(事實)을 확실(確實)히 알게되고 이에 조선(朝鮮)에 원병(援兵)을 보내기로 결정(決定)하였다. 그리하여 癸巳年 正月에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사만(四萬)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평양(平壤)의 적(敵)을 대파(大破)하니 적(敵)이 개성(開城) 방면(方面)으로 물러났다. 이여송(李如松)은 적(敵)을 경(輕)히 여기고 추격(追擊)하여 벽제관(碧蹄舘)에서 싸우다가 패(敗)하고 다시 추격(追擊)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에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크게 적(敵)을 파(破)하니 적(敵)은 제해권(制海權)을 잃어서 보급(補給)이 끊어지고 또 평양(平壤)과 행주(幸州)에서 대패(大敗)하여 기세(氣勢)가 점점(漸漸) 줄어들더니 이여송(李如松)이 명(明)나라사람 심유경(沈惟敬)을 시켜서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의 사이에 화의(和議)를 진행(進行) 시켰음으로 왜병(倭兵)은 이해 사월(四月)에 경성(京城)을 물러나서 남해안(南海岸)으로 내려갔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래 머물 계획(計劃)을 세우고 또 전일(前日)에 진주(晉州)에서 패(敗)한 것을 분(憤)하게 여겨서 십여만(十餘萬)의 군사(軍士)로 진주성(晉州城)을 포위(包圍)하였다. 전번(前番)에 김시민(金時敏)이 진주(晉州) 싸움에 대승(大勝)할 때는 수천병(數千兵)으로써 적(敵)의 십만병(十萬兵)을 물리쳤는데 이번에는 성중병(城中兵)이 육만(六萬)에 이르니 사람마다 모두 성(城)을 지키기에 아무 염려(念慮)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직 진주(晉州) 기생(妓生) 논개(論介)가 근심하였다.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이 그 연고(緣故)를 물으니 논개(論介)가 대답(對答)하되 전번(前番)에는 군사(軍士)가 비록 적으나 장수(將帥)가 서로 사랑하고 호령(號令)이 한군데서 나온 까닭에 이겼지만 이번은 군사(軍士)가 비록 많으나 통솔(統率)이 없고 장수(將帥)가 병(兵)을 알지 못하니 이 까닭에 근심한다고 하였다.

성중(城中)은 구일(九日) 구야(九夜)의 동안에 백여(百餘)차례를 싸워서 번번히 적을 막으나 마침내 성(城)이 함락(陷落)하고 성중(城中)의 백성(百姓)들까지 모두 칠만명(七萬名)이 죽으니 그 참혹(慘酷)하기가 임진란(壬辰亂) 중(中)에서도 가장 심(甚)하였고 논개(論介)는 적장(敵將)에 끌려서 촉석루(矗石樓) 아래의 암상(岩上)에서 적(敵)의 주연(酒宴)에 나갔다가 적장(敵將)의 허리를 안고 함께 강중(江中)에 떨어져 죽으니 후인(後人)이 이 암석(岩石)을 의기암(義妓岩)이라고 이름지었다.

왕(王宣祖)은 경성(京城)이 수복(收復)한 후(後) 경성(京城)을 떠난지 일년반(一年半)만에 구도(舊都)에 돌아왔다. 그러나 왜병(倭兵)이 아직 남방(南方)에 가득히 차있어 어느 때에 다시 쳐올지 알 수 없고 심유경(沈惟敬)의 화의(和議)의 대(對)하여는 반대(反對)의 태도(態度)를 취하고 명(明)나라에 적극(積極) 남공(南攻)하기를 청(請)하였다 명(明)나라에서는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원수(遠輸)하기가 곤란(困難)하다하여 구차(苟且)히 화의(和議)를 성립(成立)시키려하니 왕(王宣祖)은 국력(國力)이 약(弱)하여 독력(獨力)으로 왜(倭)를 섬멸(殲滅)치 못함을 슬퍼하여 군제(軍制)의 대(大) 개혁(改革)을 제안(提案)하니 이 안(案)은 예(隸)를 해방(解放)하여 군사(軍士)로 쓰자는 것인데 이는 군제(軍制) 개혁(改革)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계급제도(社會階級制度)의 일대(一大) 혁명(革命)이 되는 것이다.

아국(我國)의 군제(軍制)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군역(軍役)이 면제(免除)되고 노예계급(奴隸階級)은 천인(賤人)이라 하여 군역(軍役)에 참여(參與)치 못하게 하니 그 까닭은 만일 천인(賤人)이 먼저 입대(入隊)하여 군교(軍校)가 되고 양민(良民)이 후(後)에 입대(入隊)하여 병졸(兵卒)이 되면 양민(良民)이 천인(賤人)의 지휘(指揮)를 받게되어 사회(社會)의 질서(秩序)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양민(良民)이나 천인(賤人)이나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오 또 국가(國家)의 앞날을 생각하여 볼때 군사(軍士)가 부족(不足)한 현실(現實)을 타개(打開)하려면 수십만(數十萬)의 천인(賤人) 장정(壯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 종래(從來)의 계급제도(階級制度)를 깨뜨리고 천인(賤人)을 양민(良民)과 함께 군사(軍士)로 쓰게 하려하니 제신(諸臣)들은 이를 잘 토의(討議)하라고 영(令)을 내렸다.

조정(朝廷) 제신(諸臣)중(中)에는 여기에 찬성(贊成)한 사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사노(私奴)를 많이 부리고 있는 양반계급(兩班階級)은 강경(强硬)한 반대운동(反對運動)을 일으켰으니 그 이유(理由)는 노주(奴主)의 분(分)은 군신(君臣)의 분(分)과 같으매 만일 노예(奴隸)를 해방(解放)하여 양민(良民)을 만들면 이는 강상(綱常)이 무너지는 것이라 하니 기실(其實)은 국가(國家)의 강상(綱常)을 존중(尊重)히 여기는 데서 나온 주장(主將)이 아니라 전(專)혀 노예(奴隸)를 부려서 호화(豪華)한 생활(生活)을 누리려는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왕(王宣祖)의 제안(提案)이 마침내 통과(通過)되지 못하니 왕(王宣祖)은 「국가(國家)를 살리는 최선(最善)의 안(案)이 개인(個人)들의 사심(私心)때문에 실행(實行)되지 못하니 가탄(可歎)한 일이로다.」하고 이 제도(制度)를 공노(公奴)에게만 시행(施行)하였다. 공노(公奴)중(中)에는 주야(晝夜)로 무예(武藝)를 연습(練習)하여 군대(軍隊)에 들어가서 양민(良民)이 된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한편(便)으로 양반계급(兩班階級)의 여러 가지 방해(妨害)로 인(因)하여 완전(完全)한 실시(實施)를 보지 못하였다.

왜병(倭兵)은 남해안(南海岸)으로 물러간 후(後)에 명(明)나라와의 사이에 화의(和議)가 진행(進行)되어 차츰 본국(本國)으로 물러가더니 양국(兩國)의 대표(代表) 사이에 결정(決定)한 화의(和議) 조건(條件)과 명(明)나라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보낸 칙서(勅書)의 내용(內容)이 서로 틀린다 하여 선조(宣祖) 삼십년(三十年) 정유(丁酉)에 다시 대군(大軍)을 보내어 쳐들어오니 이를 정유란(丁酉亂)이라 한다.

왜병(倭兵)은 전번(前番)의 실패(失敗)에 삼가서 수군(水軍)을 더 증가(增加)하고 또 미리 간첩(間諜) 요시라(要詩羅)를 놓아서 우리 조정(朝廷)과 이순신(李舜臣)과의 사이를 이간(離間)하니 우리 조정(朝廷)에서는 그 모략(謀略)에 넘어가서 이순신(李舜臣)을 잡아다가 옥(獄)에 가두고 장차(將次)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事件)의 이면(裏面)에는 역시(亦是) 당파(黨派) 싸움이 숨어 있으니 조정(朝廷)이 의주(義州)에 있을 동안은 당쟁(黨爭)이 한동안 멈추고 있더니 경성(京城)에 환도(還都)한 후(後)에 다시 재연(再燃)하여 북인(北人)의 세력(勢力)이 우세(優勢)한 판인데 이순신(李舜臣)은 유성룡(柳成龍)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유성룡(柳成龍)은 남인(南人)이기 때문에 북인(北人)들은 이순신(李舜臣)을 당쟁(黨爭)의 희생(犧牲)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왕(王宣祖)은 이순신(李舜臣) 처치(處置)에 대(對)하여 의견(意見)을 유성룡(柳成龍)에게 물으니 유성룡(柳成龍)은 「이순신(李舜臣)은 명장(名將)이라 왜인(倭人)의 말을 듣고 함부로 죄(罪)줄 수도 없고 또 전란(戰亂)이 끝나지 아니한 때 이런 명장(名將)을 죽이는 것은 불가(不可)하다」하였다.

왕(王宣祖)은 이 말을 중(重)히 여겨 다만 면직(免職)시키고 석방(釋放)하니 이때 사신(史臣)은 이를 평(評)하기를 「남해(南海)를 홀로 지켜서 국맥(國脈)을 붙잡고 오던 명장(名將)이 적(敵)의 모개(謀介) 이간(離間)과 당쟁(黨爭)의 여파(餘波)로 이런 일을 당(當)하니 멀리 남방(南方)의 적세(賊勢)를 바라보고 가까이 조정(朝廷)의 형편(形便)을 살펴봄에 가슴속에서 통곡(痛哭)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구나」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면직(免職)된 뒤에 원균(元均)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니 원균(元均)은 본시(本是)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사(水使)로 있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통제사(統制使)가 된 뒤에 그 부하(部下)되기를 부끄러워하여 항상(恒常) 이순신(李舜臣)을 조정(朝廷)에 모해(謀害)하던 자(者)이오 먼저에 이순신(李舜臣)이 죄(罪)를 받은 것도 원균(元均)의 모해(謀害)가 유력(有力)한 일인(一因)이 된 것이다. 왜병(倭兵)들은 원균(元均)이 이순신(李舜臣)을 대신(代身)함을 듣고 수군(水軍)을 크게 발(發)하여 우리 수군(水軍)을 치니 원균(元均)이 대패(大敗)하여 육지(陸地)에 올라와 도망(逃亡)하였는데 그 생사(生死)는 세상(世上)이 알지 못하며 적(敵)은 전라도(全羅道) 해안(海岸)을 점령(占領)하고 멀리 충청도(忠淸道)의 직산(稷山) 당진(唐津)에 까지 침입(侵入)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크게 당황(唐慌)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라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순신(李舜臣)으로 통제사(統制使)를 삼았다. 이때 왜병(倭兵)이 전라도(全羅道) 육지(陸地)에 깊이 들어와 싸우므로 이순신(李舜臣)은 산곡(山谷)길을 좇아 우수영(右水營)에 이르니 전선(戰船)의 남은 것이 겨우 십이척(十二隻)이라 피난선(避難船)을 모아 가지고 진도(珍島)의 울돌목(명량(鳴梁)에서 적선(敵船) 오백척(五百隻)을 무찌르고 고금도(古今島)를 무찌르니 적(敵)의 세력(勢力)이 꺾이어서 다시 서해(西海)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 육지(陸地)에서는 명(明)나라 원군(援軍)이 남원(南原)에서 패(敗)하고 또 울산(蔚山) 사천(泗川) 순천(順天)등지(等地)에 진지(陣地)를 쌓고 적(敵)과 싸우다가 모두 패(敗)하였다.

적세(敵勢)가 다시 성(盛)함을 보고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사람 김덕령(金德齡)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김덕령(金德齡)은 용력(勇力)이 있고 안광(眼光)이 횃불과 같아서 대적(對敵)하는 바가 없고 왜병(倭兵)이 두려하여 감(敢)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 충청도(忠淸道)에서 반란군(叛亂軍)이 일어나서 김덕령(金德齡)도 자기(自己)들과 합모(合謀)한다고 선전(宣傳)하니 조정(朝廷)에서는 곧 김덕령(金德齡)을 잡아다가 조사(調査)한 결과(結果) 그 무죄(無罪)함을 알았으나 김덕령(金德齡)은 이귀(李貴)의 천거(薦擧)한 사람이오 이귀(李貴)는 서인(西人)이라 동인(東人)이 조정(朝廷)안의 세력(勢力)을 잡고 있는데 김덕령(金德齡)의 목숨을 구원(救援)하여 줄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김덕령(金德齡)같은 용장(勇將)을 방면(放免)하였다가 후일(後日)에 만일 반란(叛亂)을 일으키면 억제(抑制)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죽였다.

우리 나라 군사(軍士)와 명(明)나라 군사(軍士)는 남해안(南海岸)에서 오랫동안 적병(敵兵)과 대치(對峙)하고 있더니 선조(宣祖) 삼십일년(三十一年) 무술(戊戌) 십일월(十一月)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으면서 왜병(倭兵)을 철수(撤收)시키는데 이순신(李舜臣)은 그 퇴로(退路)를 막고 경상도(慶尙道) 노량(露梁)에서 적(敵)을 맞아 싸워 크게 파(破)하더니 적(敵)의 탄(彈)알에 맞아 전사(戰死)하고 적(敵)이 도환(逃還)한 자(者)가 겨우 오십여척(五十餘隻)에 불과(不過)하고 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이 이로써 끝났다. 이때 조정(朝廷)의 일부(一部)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만일 전승(戰勝)하고 돌아오더라도 반드시 간신(奸臣)들의 모해(謀害)로 죽을 것이니 차라리 전사(戰死)하리라」하고 일부러 투구를 벗고 탄(彈)알에 죽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일본(日本)이 무단(無端)히 군사(軍士)를 일으켜서 인국(隣國)을 침략(侵略)하여 무고(無辜)한 인민(人民)을 함부로 살륙(殺戮)하고 우리 나라는 기근(饑饉)과 질병(疾病)이 이에 겹 들여서 참혹(慘酷)한 화(禍)가 몽고(蒙古)의 침입(侵入)보다 더 심(甚)하였고 명(明)나라가 오랫동안 군사(軍士)를 움직여서 이 때문에 나라가 몹시 병폐(病弊)하였다.

명(明)나라 군사(軍士)가 우리 나라에 와서 있는 동안에 횡폭(橫暴)한 일도 적지 아니하고 소위 관왕묘(關王廟)라 하여 중국(中國) 옛날의 관우장군(關羽將軍)을 모시고 선조(宣祖) 왕(王)으로 하여금 절하게 하는 일도 있어 우리 나라를 괴롭게 함이 많았으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란(大亂)을 구(求)해 주는 은혜(恩惠)를 깊이 감사(感謝)하여 아무런 불평(不平)도 말치 아니 하였고 명(明)나라는 이 난리(亂離)에서 많은 군사(軍士)와 재물(財物)을 잃은 까닭에 얼마 되지 아니하여 만주족(滿洲族)에게 망(亡)하게 되니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깊이 명(明)나라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오래 잊지 아니 하였다.

이 난리(亂離)에 무기(武器)의 발달(發達)한 것은 구선(龜船) 이외(以外)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있으니 이는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대포(大砲)로써 이 포(砲)가 터지면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震動)하고 철편(鐵片)이 튀어 나가서 적(敵)을 해치는 것인데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석(朴昔)이 이 포(砲)를 써서 경주(慶州)를 회복(恢復)하였다. 왜병(倭兵)으로부터 얻은 조총(鳥銃)은 본시(本是) 일본(日本)이 서양(西洋)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인데 우리 나라도 이 법(法)을 얻은 후(後)에 공장(工匠)에게 명령(命令)하여 제조(製造)하니 이가 우리 나라가 총(銃)을 사용(使用)한 처음이다. 왜병(倭兵)은 물러갈 때에 여러 가지 기술자(技術者)를 사로잡아 가고 특(特)히 그 중(中)에는 도공(陶工)이 가장 많았음으로 일본(日本)의 도자기(陶磁器) 공업(工業)이 이로부터 시작(始作)하였다. 왜병(倭兵)은 저희들도 많은 군사(軍士)와 물자(物資)를 희생(犧牲)하고 아무런 소득(所得)이 없이 돌아갔으나 우리 나라의 우수(優秀)한 기술(技術)을 배워 갔음으로 저희들끼리 말하기를 「무장(武裝)한 유학생(遊學生)을 조선(朝鮮)에 보냈다」고 하였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은 후(後)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새로이 막부(幕府)를 열어서 이전(以前)의 잘못을 말하고 국교(國交)를 회복(恢復)하기를 거듭 청(請)하며 또 그들에게 사로잡혀간 수천(數千)명(名)의 포로(捕虜)를 돌려보내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日本)에 대(對)한 복수심(復讐心)이 복 받혀서 허락(許諾)치 아니하더니 양국간(兩國間)에 오랫동안 국교(國交)가 끊어지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전쟁(戰爭)이 끝난지 칠년(七年)만에(을사(乙巳))일본(日本)의 소원(所願)을 들어서 부산(釜山)에 다시 왜관(倭館)을 열고 대마도(對馬島)와의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하여 그 후(後) 삼백년(三百年)동안 계속(繼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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