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원리총론'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13.09.08 동식물과 사람의 차이 (역학원리총론)
  2. 2013.09.08 신과 사람의 상우 (역학원리총론)
  3. 2013.09.08 자유의지와 선악 (역학원리총론)
  4. 2013.09.08 지금의 인간은 자라는과정에 있는 미성품 (역학원리총론)
  5. 2013.09.08 천명은 일생의 사명 (역학원리총론)
  6. 2013.09.08 효충의는 삼대륜 (역학원리총론)
  7. 2013.09.08 선천과 후천의시운 (역학원리총론)
  8. 2013.09.08 지구 달 사람의변화 (역학원리총론)
  9. 2013.09.08 물질문명의 몰락과 정신문명의 발달 (역학원리총론)
  10. 2013.09.08 새종교의 출현 종교는 신도의교 (역학원리총론)
  11. 2013.09.08 불교의 교리 (역학원리총론)
  12. 2013.09.08 유교의 교리 (역학원리총론)
  13. 2013.09.08 기독교의 교리 (역학원리총론)
  14. 2013.09.08 삼교교리의 상호관련 (역학원리총론)

동식물과 사람의 차이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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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植物과 사람의 差異

 

動物에도 精神作用이 없는 것은 아니나, 動物의 精神은 神을 닮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사람과 動物은 모두 그 씨의 發生當時에 이미 그 體의 組織이 全然 相異하고 있는 까닭이다. 生物의 組織은 모두 水火로써 體를 삼고 있는데, 사람의 體는 水火의 調和된 胎宮에서 胎育되므로 寒熱이 調節되어 頭部는 寒하고 寒한 部分에는 털이 生하며, 얼굴이나 몸같은 것은 水火의 烹湯作用에 依하여 熱하고 熱한 部分에는 털이 生치 아니하여 革이 되는 것이니, 胎宮 革卦의「水火相息」과「革面」은 이 뜻을 말한 것으로서, 水火相息이라 함은 烹湯作用이 行함이오 革面이라 함은 動物의 面上에는 털이 있어 毛皮가 되고 사람의 面上에는 털이 없어서 革이 된다 함이다. 사람은 몸에 陽氣가 盛하여 火氣가 炎上하므로 身體는 火의 炎上體와 같이 三角形으로 直立하여 天地를 貫通하고 天性이 또한 火炎體로 되어 頭腦에 依附하여 天을 向하며 天性은 水火가 調和되어 水는 透明하고 火는 光明하므로 透明作用과 光明作用으로써 事物을 接應하여 神作用이 行하며 火의 陽氣의 發揚作用으로 因하여 言語를 發宣하며, 身體가 直立한 까닭에 手指를 써서 器物을 工作하며, 言語와 手工이 있는 까닭에 文字를 發明하여 師傅의 敎가 行하니, 師傅의 敎는 神道이라 사람이 神道를 行하는 것이 곧 神을 닮는 所以이다. 動物은 그 씨의 發生하는 때에 이미 水氣가 勝하고 火氣가 적어서 火炎과 같은 炎上體가 되지 못하므로 그 胎宮에 水火의 烹湯作用이 行치 못하여, 소위 高等動物들도 얼굴이나 全身에 털이 生하여 毛皮에 싸여 있으며 水의 形은 水平으로 되어 地面을 橫平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水氣가 勝하고 있는 動物의 體는 모두 橫平하여 背를 하늘로 하고 腹을 땅으로 하여 天地를 直立치 못하며 사람은 그 體가 直立하므로 그 家族系統도 위의 祖上父母로부터 아래의 子孫에 이름과 같은 縱系와 夫婦 兄弟와 같은 橫系와의 兩系가 同居하여 水火의 調和를 이루고 있는데, 動物은 그 體가 平橫하므로 그 새끼를 乳養하는 期間 以外에는 縱系族屬이라는 것이 없고 오직 雌雄相從하는 橫系만이 있는 것이오, 사람이 天地의 神을 祖考로 모시는 것도 또한 縱系의 理에 依한 것이다. 動物은 火氣가 不足하여 火의 光明이 弱하므로 精神作用이 어두우며, 陽氣가 적어서 發宣하는 힘이 없으므로 言語를 發치 못하는 것이다. 또 사람의 食物은 大槪 水火로써 加工하여 그 精을 攝取하고, 飮用水는 到處에 있는 것이로되 오직 生命體인 土中에서 솟아 나오는 물이 生命水로 되어 물의 最精한 것이므로 飮用水는 井泉을 파서 마시는 것인데, 動物의 食料는 水土에서 生하는 天然物을 加工함이 없이 그대로 粗食하고 있으니, 動物은 火氣가 적어서 光明치 못하고 水氣가 비록 勝하되 水가 濁하여 透明치 못하고 한 까닭에 精神作用이 어둡고 濁하여 神을 닮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天地는 永遠不窮한 圜運動을 行하고 生生을 世世繼承하기 爲하여 먼저 植物을 生하고 그 植物을 生養資料로 하여 한 次元의 높은 動物을 生하고, 다시 植物과 動物을 生養資料로 하여 더 한 次元의 높은 사람을 生하고 사람의 天性으로 하여금 神을 닮게 하여 神과 사람이 함께 圜運動을 行하고 있으니, 이것이 天地가 사람을 生한 所以이오, 사람은 天地의 永遠한 生生作用의 一役을 맡기 爲하여 이 世上에 出生한 것이다. 動物이 植物을 生養資料로하고 사람이 動植物을 生養資料로하는 것은 萬物의 자라는 때에 相生과 相克의 作用을 어울러 行하는 天地의 自然法則이니 이는 動物과 植物은 陽氣가 不足하고 形質이 勝하고 天性이 여물지 못하여 神을 닮지못하는 것이므로 植物은 自體의 形質을 犧牲하여 神에게 바쳐서 윗 次元의 動物의 形質로 化하고, 動物이 또한 自體의 形質을 犧牲하여 神에게 바쳐서 윗 次元의 사람의 形質로 化하는 것으로서 모든 生物이 一聯이 되어 相生과 相克으로써 神을 닮는 作用을 行하는 運動이다.

植物 動物 사람의 一聯의 關係는 天地의 創造될때에 이미 定하여진 것이니, 이것을 生長成의 象으로써 보건대, 神이 처음으로 生物을 創造할 때에 生物의 基本組織인 形質을 먼저 만들고 純全히 神의 뜻인 自然法則을 따르게 하고 行動의 自由를 주지 아니하니, 이는 生物의 基本組織이 行動의 自由를 가지고 있으면 神의 自然法則을 어겨서 스스로 自體의 組織을 破壞하는 일이 있는 까닭이오, 生物의 基本組織은「生」의 象인데, 基本組織을 破壞하는 것은 곧 自體의 生을 破壞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生物의 基本組織에는 自由가 없고 오직 自然法則을 順從할뿐이며, 이것이 最初로 創造된 植物이다.

萬物의 生生에는 모두 組織과 運行의 兩象이 있는데 植物은 行動의 自由가 없으므로 그 運行이라고는 土中에 着根하여 周圍에 있는 營養을 取하고 他力에 依하여 生殖作用을 行하는等의 本能生活을 營爲할뿐이니 이는 物이 다만 組織體를 가지고 살고만 있는 生의 象으로써 自然法則을 어기는 일이 없이 神의 뜻을 順從하고 있으나 行動의 自由가 없는 까닭에 또한 神에게로 圜行하는 作用도 없는 것이다. 植物에는 草木의 數多한 種類가 있어 그 數를 헤아릴 수 없을 만치 繁雜하니, 이는 植物이 各其 神의 體의 作用을 一部分씩을 나누어 받아서 그 個體를 삼는 까닭에 神의 體의 全體가 모두 部分으로 나뉘어서 數多한 植物種類가 생긴 것이오, 이 植物의 全種類의 作用을 하나로 綜合하여 놓으면 또한 神의 體의 全體作用을 이루는 것이니 그러므로 植物의 全種類는 곧 神의 體의 全體로서 地上의 모든 生物의 基本組織이 되는 것이다.

植物의 다음에는 植物의 基本組織인 形質을 바탕으로 하여 그 形質에는 亦是 組織을 變改할만한 行動의 自由가 없고 神의 自然法則을 따라서 生하고 자라고 老하고 죽고하면서 다만 그 形質을 움직여서 生育 生殖 長壽의 세 本能을 遂行할 수 있는 行動의 自由를 가지는 한 生物이 創造되니, 이가 곧 動物이다. 그러므로 動物은 植物의 形質을 그 體의 基本組織으로하여 自然法則을 順應하고 거기에 本能生活을 遂行할 수 있는 行動의 自由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本能生活의 自由는 生物이 자라기 爲하여는 가장 基本되는 自由인데, 動物은「長」의 象이되므로 자라는 동안의 本能生活을 營爲하기 爲하여 行動의 自由가 있는 것이다. 다만 動物에는 天性中의 本能인 情만 있고 天性의 여무는 作用이 없으므로 神에게로 圜行하는 作用이 없으며, 動物에도 數多한 種類가 있는 것은 動物이 各其 神의 情의 一部分씩을 나누어 받아서 그 本能을 삼는 까닭에 神의 情의 全體가 나뉘어서 數多한 動物種類가 생긴 것이오, 이 動物의 全種類의 本能을 하나로 綜合하여 놓으면 또한 神의 情의 全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動物의 全種類의 本能은 곧 神의 情의 全體로서 이것이 모든 生物의 本能의 源이 되는 것이다.

動物의 다음에는 植物의 形質을「生」의 基本組織으로하여 自然法則을 따르고 動物의 本能을「자라는 作用」으로하여 自由로이 行動하고 그 위에 神에게로 圜行하기 爲하여 그 形象은 神의 形象을 닮고 言語의 自由를 가지는 한 生物이 創造되니, 이가 곧 사람이다. 사람은 天地唯一神의 形像대로 되어 있으므로 世界人類가 單一種類로 되고 言語는 天性의 여무는 作用을 가진 者만이 使用할 수 있는 것인데, 說卦에「神이라 함은 萬物을 妙하게하고 言을 하는 者이라」하여 神이 萬物을 創造하고 사람에게 言語를 주어 서로 酬酌한다 함을 말함이니 이는 사람은「成」의 象으로서 植物의 形質과 動物의 本能을 合하고 또 神의 言語를 배워서 天性의 여무는 作用을 行한다 함이며, 사람이 言語를 通하여 神으로 더불어 酬酌할 수 있는 것이 곧 能히 神에게로 圜行하는 所以이다.

世人中에는 흔히 사람을 動物의 一種類로 보는 일도 있으나 사람과 動物은 그 生生하는 次元이 全然다르다. 사람은 植物의 形質로써 肉體의 組織을 삼고 그것이「生」의 象이 되는 것이므로 사람의 肉體는 植物과 같이 神의 自然法則을 따라서 生長老死하고 있으니, 人體中에 自然法則을 順從하는 것은 오직 이 肉體이며, 人體가 植物의 要素를 가지고 自然法則을 따라서 生하고 있으므로 사람은 반드시 植物을 取하여 自體生養의 資料를 삼는 것이며, 사람은 動物의 自由行動하는 本能으로써 生活의 本能을 삼고 그것이「長」의 象이 되는 것이므로 사람의 肉體는 動物과 같이 本能을 따라서 行動하고 있으니 이 까닭에 人間의 本能生活은 모두 動物的이며, 人體가 動物의 要素를 가지고 本能生活을하여 자라고 있으므로 動物을 取하여 自體生養의 資料를 삼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生活이 本能生活에 그친다고 하면 이는 動物과 別로 差別이 없다고 할 것이나 사람은 그 形像이 神을 닮고 言語를 通하여 神으로 더불어 酬酌할 수가 있으므로 사람의 肉體中에 動物의 要素가 들어 있을 뿐이오 動物의 一種類는 아니다. 사람과 動物의 生長成하는 象을 比較하여 보더라도 天地自然數에 陽數의 終인 九數는 자라는 極數가되고 陰數의 終인 十數는 여무는 極數가 되는데, 사람은 男體는 九竅가 열리고 女體는 十竅가 열려서 陰陽長成의 極數를 가지고, 男女가 모두 女體의 十竅에서 九合朔을 지낸 十朔만에 出生하므로 自然數 五十五가 具全하여 陰陽이 調節되고 神의 作用이 行하는 것이며, 動物은 비록 高等動物이라 하더라도 九竅만이 열리고 十竅가 되지 못하므로 肉體만 자라고 天性이 여물지 못하는 것이니, 이가 사람이 動物보다. 한 次元 높은 位에 있는 所以이며, 이 까닭에 動物은 自體를 犧牲하여 사람을 生養하는 資料가 되는 것이 自體의 形質을 한 次元 높은 사람의 形質로 化하여 神에게로 한 次元 接近하는 所以이다. 神은 사람으로 더불어 圜行하기 爲하여 사람을 生하고 사람을 기르기 爲하여 動植物을 犧牲하고 있으므로 사람은 반드시 天性이 여물어서 神을 닮는 修養을 쌓은 然後에, 自體를 犧牲하여 사람을 生養하고 있는 動植物에 對하여 그 恩德을 報答함이 되는 것이오, 만일 사람이 그 天性을 여물게 하지 못하고 한갓 자기 肉體가 살찌기 爲하여 다른 生物만을 犧牲하여 없애면 이는 無故殺生이 되어 天地生生의 大德에 어그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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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사람의 상우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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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과 사람의 相祐

 

天地는 永遠不窮히 生生하기 爲하여 사람을 生하고 사람은 神을 닮아서 世世繼承한 然後에 生生의 任務를 다하는 것이니, 사람이 神의 法則을 본받아서 神의 事業을 祐하는 것이 곧 神을 닮는 일이다. 祐라함은 天佑神助라는 뜻으로서 사람이 神을 돕고 神이 사람을 돕고 함을 祐라 하는 것이니, 繫辭에「可히 더불어 神을 祐한다」함은 사람이 神을 祐함을 말함이오 大有卦에「天으로부터 祐한다」함은 神이 사람을 祐함을 말함이다. 사람이 神을 祐한다 함은 神의 事業을 祐함이오 神의 事業이라 함은 神이 天地의 永遠한 生生作用을 行하기 爲하여 사람을 生養하여 사람으로 더불어 圜運動을 行하는 것이 곧 神의 事業이다. 그러므로 天地間에는 사람을 生養하는 일보다 더 큰 事業이 없고 萬物中에는 사람이 가장 靈貴한 것이며, 人間社會의 生生事業은 모두 神이 사람을 生養하는 事業으로서 政治 學術같은 것도 비록 그것이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營爲되고 있으되 그 事業은 神의 計劃에 依한 事業으로서 사람들이 神의 뜻을 받들어서 行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自由意志가 있어서 神의 事業을 祐할 수도 있고 또 害할 수도 있는지라, 사람이 神의 뜻을 받들어서 神의 事業을 祐하는 것은 天을 順하는 것이오 天을 順하는 者는 天의 祐를 받는 것이며, 神의 뜻을 받들지 아니하고 不善을 行하여 도리어 사람의 生生을 害하는 것은 天을 逆하는 일이오 天을 逆하는 者는 天의 祐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神의 子孫으로서 神으로 더불어 圜運動을 行하고 神의 事業을 祐하는 것이 곧 神을 닮는 것이니, 圜함과 祐함과 닮음과는 同一한 일에 對한 表現을 달리한 것으로서, 이것을 生生運動하는 面으로써 보면 圜運動이 되고, 世世繼承하는 面으로써 보면 神을 닮음이 되고, 事業을 行하는 面으로써 보면 神을 祐함이 되는 것이다. 乾文言에「大人은 鬼神으로 더불어 그 吉凶을 合한다」하니 이는 大人이 吉하다 하는 것을 鬼神도 吉하다하고 大人이 凶하다하는 것을 鬼神도 凶하다 한다는 뜻으로서 大人이 神을 닮아서 그 天性에 神作用이 있으므로 大人과 鬼神이 完全히 合致한다 함이다.

사람은 그 日常生活에 쓰고 있는 物資와 器具는 天然物을 그대로 쓰는 것은 거의 없고 반드시 人工을 加하여 쓰며, 사람의 共同生活에 必要한 모든 制度는 天然物로는 全然 存在하지 아니한 것이므로 사람이 自然法則을 본받아서 새로 制定하는 것이니, 이는 사람이 사람을 生養하는 事業을 行하기 爲하여 天地의 未成한 天工을 代行하고 天工은 사람을 待하여 完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繫辭에는 天地人을 三才라하니 才라함은 物을 創生하는 才能을 말함이라, 天은 萬物의 씨를 創生하여 地에 施하고 地는 天의 下施한 씨를 承受하여 形質을 創生하고 사람은 天然物에 人工을 加하여 그 所用하는 物資를 生産하니 이는 天地人이 모두 物을 創生하는 才能이 있으므로 이것을 三才라 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이 地上에는 天地가 創生한 天然物과 사람이 加工한 人工物이 全域을 차지하고 그 以外에는 鳥類의 巢 蜂蟻의 집 거미의 그물 같은 것이 있을 뿐이며, 사람이 三才의 位에 있는 것이 곧 天地로 더불어 圜行하는 地位에 있는 所以이다.

人工物의 創製와 制度의 制定같은 것은 空間에 屬하는 일이오 時間의 運行에도 또한 天工과 人工과의 關係가 있으니, 이는 곧 사람이 天時를 順하는 일이다. 天時라 함은 一年의 四時나 生長成의 時運과 같은 것이니, 例컨대 봄이 오면 萬物은 發生하는 것이로되 百穀같은 것은 人工으로써 土壤을 耕起하고 씨를 심은 然後에 그 發育이 正常한 것이오 가을이 되면 百穀은 成熟하는 것이로되 여름에 人工으로써 培養한 然後에 가을의 結實이 完全한 것이니, 이가 人工으로써 天時를 順함이다. 天地의 時의 變化에는 時運이 있는데, 時運이 變할 때마다 사람은 그 時運에 맞춰서 制度를 새로 만들고 生活樣式을 變改한 然後에 各其 適宜함을 得하는 것이니, 生의 時運인 原始社會의 人間生活과 지금의 長의 時運의 人間生活의 相異한 것은 이 까닭이다. 그러므로 時運이 變할 때마다 반드시 先覺者가 나와서 새 時運에 맞는 새 生活을 指導 하는 것이니, 이는 비록 봄이 되어도 人工으로써 百穀을 심지 아니하면 가을에 完全한 結實을 얻을 수 없음과 같이 비록 時運의 變하는 때라 하더라도 사람이 人工으로써 그 時運에 맞는 事業을 行치 아니하면 그 時運에 맞는 天祐를 받지 못하는 까닭이다. 時運의 變化는 天工이오 時運에 맞는 事業을 行하는 것은 人工이니 時運의 變化하는 때에 先覺者가 나와서 다음 時運을 豫見하고 그 時運에 맞는 事業을 人工으로써 創設하는 것이 또한 物을 創生하는 三才의 일이며 時運의 變하는 때가 오면 天工은 또한 반드시 人工으로써 天工을 代成할 수 있는 先覺者를 이 世上에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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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와 선악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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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節 自由意志와 善惡

■ 善惡이 모두 自由

 

사람의 天性이 發用함에는 自由가 있어 그것이 自由意志가 되는 것이니. 이는 사람은 各其 居住를 달리하고 그 居住하는 곳의 地宜 氣候 食物等이 同一치 아니하므로 自體가 生生하기 爲하여 自體의 生生을 適宜히 裁成할 수 있는 自由意志를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고, 또 사람은 神을 祐하여 모든 生活資料를 生産하고 共同生活에 必要한 制度를 만들어 사람을 生養하는 事業을 行하고 함에는 그 計劃을 세우고 才能을 發揮하여 人工을 行할 수 있는 自由意志를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고 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自由意志는 그 出生하는 때에 天地로부터 稟受한 天賦의 自由이니 繫辭에「天下가 무엇을 思하며 무엇을 慮하리오 天下가 同歸하되 길은 다르고 一致하되 慮는 百이라」하니 同歸一致라함은 神에게로 歸一함을 말함이오 길이 다르고 慮가 百이라 함은 各自의 天性에 自由가 있다 함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天性의 自由는 自體가 生生하고 또 사람을 生養하기 爲하여 天으로부터 받은 바의 自由로서 이것은 神을 祐하는 自由이오 天工을 代行하는 自由이다.

사람은 自由意志와 生을 營爲하는 知能이 있고 또 사람의 天性은 善의 繼生하여 여문 것이므로 天性은 善한 것인데 사람에게 惡이 있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먼저 善惡이라는 것을 易理로써 보면 天性은 씨의 組織과 같은 것으로서 씨에서 싹이 나오는 것이 곧 善인즉 씨가 여물지 아니하고 쭉정이로 되어 싹이 나오지 아니하는 것은 善을 害함이 있는 까닭이오, 善을 害하는 것이 곧 惡이니, 이는 生生하여 發育함은 善이 되고 生生을 害하는 것은 惡이 된다함이며, 그러므로 사람을 生養하는 事業을 돕는 것은 善한 일이오, 生養事業을 害하는 것은 惡한 일이니, 이가 善惡을 判別하는 標準이 되는 것이다.

或은 말하기를 神이 사람을 創造하실 때에 무엇 때문에 사람에게 自由意志와 知能을 주어서 惡을 行하게하고 또 그 惡을 防止치 아니하는가 하는데, 神이 萬物을 創造하실 때에 먼저 植物을 지어서 行動의 自由와 知能을 주시지 아니하고, 다음에 動物을 創造하심에 行動의 自由만을 주시고 知能을 주시지 아니하며, 그 다음에 사람을 創造하심에 天地唯一神의 形像대로 짓고 神 自身이 가지고 있는 自由意志와 知能을 그대로 주시고 神의 말하는 言語를 주어서 神과 사람이 서로 酬酌하게 하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자라고 여물어서 神에게로 圜行하도록 하시었으므로, 사람은 人工으로써 天工의 未成함을 代成하고 天性이 여물어서 神作用이 生하여 天으로 圜行하는 것이니, 사람의 自由는 사람의 자라는 동안 아무런 制限을 받지 아니하는 天賦의 自由이다. 神과 生命은 一體二元의 理로 되는데 神은 永遠한 生生을 主宰하므로 萬物의 씨를 創造하심에 모두 永遠性을 賦與하여 世世로 繼承케 하시니, 그러므로 萬物의 生長成運動에 있어서, 生의 象인 씨의 創造와 成의 象인 열매의 여무는 것은 神이 直接主宰하시고 씨에서 싹이 나와서 열매를 맺기까지의 形質의 자라는 동안은 有形을 主宰하는 生命體가 그 任務를 맡고 있는 것이며, 物의 有形하는 동안에는 神은 形質中에 갈무리하여 다만 그를 따라 가실 뿐이다. 이것을 사람의 生生으로써 보면 사람의 씨의 始生하는 일과 사람의 天性이 여물어서 神에게로 圜行하는 일은 神이 主宰하시고, 사람의 出生以後에 肉體를 生養하고 精神을 修鍊하는 等 자라는 동안의 일은 하나의 獨立된 生命體로 되어있는 사람 自身의 任務로 되는 것이다.

神이 사람을 創造하실 때에 神의 形像대로 지은 까닭에 神에게 自由意志와 知能이 있음과 같이 사람에게도 自由意志와 知能을 賦與하신것인데, 사람은 자라는 동안에 그 自由意志와 知能을 마음껏 行使하여 善할 수도 있고 惡할 수도 있으며, 神은 다만 사람의 行爲의 結果에 대하여 害福을 주실 뿐이다. 害福이라 함은 사람이 자라는 동안에 善을 行하든지 惡을 行하든지 그것은 모두 사람의 自由이오 善이 쌓이면 사람의 天性이 여물어서 神을 닮아 알맹이가 되고 惡이 쌓이면 天性에 神作用이 없어서 쭉정이가 되는 것이니, 이가 곧 害福이오 이것을 自然法則面으로써 보면 應報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自己의 自由意志대로 行한 行爲에 對하여 그 自身이 責任을 지는 것이다.

사람은 自身이 자라는 自由를 가지고 있으므로 남을 자라게 하는 能力의 自由도 있어 能히 사람을 生養하는 事業을 行할 수가 있는 것이오 여무는 일은 그렇지 아니하여 自身의 여무는 것도 神의 主宰에 屬하는 것이므로 남을 여물게 할 수는 없으며, 다만 師傅가 弟子의 天性을 여물게 하는 것은 師傅自身의 自由能力이 아니라 聖人이 設하여 놓은 神道의 敎로써 가르치는 까닭이니 그러므로 사람은 神作用에 依하여서만 天性이 여물수가 있는 것이다.

 

●自由의 本質

사람에게는 자라는 동안에 自由意志가 있고 또 자라는 동안에 生長競爭이 있으므로 사람의 자라는 동안에는 各人으로부터 生長競爭의 自由가 發動하여 온 人類世界는 모두 競爭이오 모두 自由이니, 그러므로 이 世上에는 自己의 生存作用을 行하는것도 發揮하는것도 自由이오, 남의 生存作用을 侵害하는것도 自由이오, 勢力을 가진 者가 民衆을 抑壓하여 政權을 行使하는것도 自由이오 民衆들이 自體의 利益을 護衛하기 爲하여 政權에 對抗하는것도 自由이다. 過去의 資本主義 社會의 弱小民族侵略도 資本主義들의 自由이었고 지금의 共産主義者들이 民衆을 奴隸化하고 自體가 勞動貴族化하는 것도 共産主義者들의 自由이다. 自由라는 것은 本質이 이러한 것이다. 만일 이러한 自由에 對하여 所謂 사람의 自由를 尊重하여 이러한 自由도 尊重하고, 저러한 自由도 尊重한다면, 이 世上에는 强者만이 살고 弱者는 살 수 없어서 이 世上에는 自由라는 것이 全然抹殺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自由를 行使하는 行爲에는 스스로 남의 生을 爲하는 行爲와 남의 生을 害하는 行爲가 있고 남의 生을 爲하는 行爲는 善이 되고 남의 生을 害하는 行爲는 惡이 되는 것이다.

 

●善惡의 標準

善惡이라는 것을 人體로써 보면 健康은 善이오 疾病은 惡이니 이는 健康은 사람을 生하게하므로 善이 되고 疾病은 사람의 生을 害하므로 惡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獨立한 個體로 되어 있어 그 모든 行爲는 徹頭徹尾 自己個體의 生을 爲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오, 決코 남을 爲하는 것이 아니니, 사람의 行爲가 어떻게 남의 生을 爲할 것인가 하면, 사람의 自由行爲에는 體와 用이 있다. 사람은 個體로 되어 있어 그 行爲는 반드시 個體의 生을 爲하는 것이므로 個體의 生을 爲하는 行爲는 自由行爲의 體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共同生活을 營爲하기로 되어 있는 까닭에 自己가 自己個體의 生을 爲하는 方法은 두 가지 길이 있으니 卽 自己가 남을 爲하지 아니하고 오직 自己個體만을 徹底히 爲하는 個人主義를 通하는 길과 自己가 남을 爲하고 그 남들로 하여금 또한 나를 爲하게 하는 共同體를 通하는 길이 있다. 自己가 남을 爲치 아니하고 오직 自己個體만을 徹底히 爲하는 個人主義의 길은 結局 이 넓은 社會안에서 自己를 爲하는 사람은 自己 혼자 뿐이며, 自己가 남을 爲하고 그 남들이 또한 나를 爲하는 共同體의 길은 結局 이 넓은 社會가 모두 나를 爲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 넓은 社會가 모두 서로 爲하고 서로 돕고 하는 것이 人類社會의 本然의 姿勢이오 사람이 남을 爲하는 行爲가 곧 自己의 生을 爲하는 行爲이며, 그러므로 사람이 남을 爲하는 行爲는 自由行爲의 用이 되는 것이다. 이 體와 用의 理를 要約하면 사람의 自由行爲의 體는 自身이 直接으로 自己個體의 生을 爲하는 것이오 自由行爲의 用은 남을 爲하여 間接으로 自己個體의 生을 爲하는 것이니, 사람의 自由行爲에 이 體와 用이 具備한 然後에 能히 그 生을 完遂하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體만 있고 用이 없으면 제 自身 혼자만이 自身을 爲하는 사람이 되고 이 世上에서 남과 相接할 수 없는 孤身隻影이 되고 易理에는 이러한 사람을 器局의 좁은 小人이라 하고 惡을 犯하는 者는 남의 生을 爲할 줄을 알지 못하는 이러한 小人들이라고 한 것이다.

器局의 좁은 小人들은 그 眼界가 적으므로 그 個體의 生을 營爲할 때에 저 혼자가 제 生을 爲하드래도 社會에 큰 害가 없는 것이나, 만일 그러한 小人들이 社會의 支配權을 가지는 때는 社會로 하여금 自己의 個體를 奉養케 하여 드디어 큰 惡에 빠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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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인간은 자라는과정에 있는 미성품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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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人間은 자라는 過程에 있는 未成品

 

사람의 天性은 善한 것인데 지금에 人間社會에서 惡이 자주 發生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람의 天性이 善하다 함은 天性의 여문 것을 말함이오 사람의 자라는 過程에는 아직 天性이 여물지 못하여 온전한 善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자라는 過程에 있는 사람은 하나의 未成品으로 되어 있는 까닭이다. 지금은 長의 時運에 當하여 사람들이 모두 未成品으로 되어있어, 사람들의 天性이 또한 未成品으로 되어 있으므로 善이 되지 못하고 惡이 發生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모든 生物은 個體를 가지고 生育하는 本能이 있으므로 個體의 자라는 때에는 반드시 生長競爭을 行하여 他를 克制하는 것이오 特히 長의 時運中에 있어서는 그 生長競爭의 結果가 惡에 까지 發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樹木의 例로써 보건대 樹木은 아무 意識이 없으되 또한 生長競爭作用을 가지고 서로 排斥하면서 自體의 生長을 期하고 將且 열매를 맺고 여물어서 世世繼承하여 永遠不窮히 生生하려 하는 것이며, 만일 生長競爭에 敗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면 世世繼承의 作用이 끊어지는 것이므로 樹木은 열매를 맺기 爲하여 生長競爭을 行하는 것이다. 그러나 樹木에는 自由意志가 없고 全혀 自然法則을 順하여 神의 生生事業을 害하는 일이 없으므로 惡은 發生치 아니하는 것이다. 動物같은 것은 自由意志를 가지고 生長競爭을 行하고 있으나 그 것은 相互間의 衝突에 不過하고 意識的 計劃的으로 神의 生生事業을 害하는 것이 아니므로 또한 惡이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오직 사람은 生長競爭을 行하는 때에 意識的 計劃的으로 他를 克하여 神의 生生事業을 害하는 일이 있으므로 生長競爭의 激甚한 長의 時運에 惡이 發生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惡의 生하는 것을 人體의 組織으로써 보건대 사람의 精神과 肉體는 一體二元의 理로 되는데, 精神에는 神作用이 있어 萬人公共한 것이므로 거기에는 理性이 있고 惡이 없으며, 肉體는 個人마다 各各 私有한 個體로서 거기에는 本能의 感情이 있고 感情에는 彼我의 區別이 强하고 個體의 私가 生하는 까닭에 흔히 理性이 밝지 못하고 和氣를 傷하여 惡이 生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善을 쌓으면 天性이 여물어서 알맹이가 되고 惡을 쌓으면 天性이 여물지 못하여 쭉정이가 되어 스스로 消滅하는 것인데, 惡이 쭉정이로 되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하면 神은 사람의 自由로운 生生을 爲하여 또 自由로이 자라게 하기 爲하여 사람의 자라는 동안에 사람에게 自由意志를 賦與하고 사람은 自由意志에 依하여 모든 所願을 成就하는 것이므로 神은 사람이 自由意志를 行使하는 동안은 善惡間에 사람의 行爲를 그대로 許하고 사람의 所願하는대로 따라가시는 것이니 이는 사람에게 自由意志가 있은 然後에 充分히 자랄 수 있는 까닭이며, 사람의 言行은 天地圜行의 理에 의하여 善惡間에 모두 神에게로 올라가고 神은 그것을 받으시는 대로 모두 그 사람에게 돌려주시어 그 사람의 所願을 成就시키시는 것이다. 卽 사람은 善을 行하면 善이 쌓여서 자라고 惡을 行하면 惡이 쌓여서 자라는 것이며, 善의 자란 것은 열매가 여물어서 永遠한 씨가 되는 것이오 惡의 자란 것은 쭉정이가 되어 生生이 끊어지는 것이니, 사람이 善을 行하는 者는 열매가 되기를 願하는 者이오 惡을 行하는 者는 쭉정이가 되기를 願하는 者이라, 自身의 自由意志로써 善惡을 行하여 열매가되고 쭉정이가 되고 하는 것은 모두 그 所願을 成就하는 일이다.

坤卦에「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이라 하니 이는 사람이 自由意志로써 善惡을 積하여 그 所願하는 慶殃을 받음을 말함이며, 여기에도 또한 圜運動의 象이 있으니, 自家에서 善함이 나가면 반드시 善의 應報가 돌아오고, 自家에서 不善함이 나가면 반드시 不善의 應報가 돌아오는 것인데, 自家에서 나가서 自家에 돌아오는 것은 空間的 圜運動이오, 지금에 나가서 後日에 돌아오는 것은 時間的 圜運動이다. 여름에 草木의 자랄 때에는 어느 열매가 알맹이로 되고 어느 열매가 쭉정이로 되고 할 것을 分別할 수가 없는 것이나, 가을이 되면 알맹이와 쭉정이가 스스로 選別되어 알맹이만 남고 쭉정이는 消滅되는 것이니, 이는 天地의 生生法則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라는 때에 自由意志의 길을 바르게 向하여 充實히 자라면 알맹이가 또한 充實히 여무는 것이오 充實히 자라지 못하면 비록 成의 時運이 到來하더라도 充實한 알맹이가 되지 못하는 것이며, 지금의 人間은 長의 時運에 處하여 아직 여물지 못한 未成品이 되고 있으므로 惡을 行하는 일이 있어 쭉정이로 되는 者가 적지 아니한 것이다. 人體로써 보면 健康은 사람의 生命을 完全히 하는 것이므로 善하여 알맹이의 象이 되고 疾病은 사람의 生을 害하여 死에 이르게 하는 것이므로 惡하여 쭉정이의 象이 되는 것이다.

人間社會안에 사람의 生을 害하는 惡人이 있는 것은 사람의 身體에 疾病이 있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身體의 疾病을 治療하여 그 生을 完全하게 하는 것은 비록 疾病治療中에 그 사람에게 苦痛을 주고 身體一部를 手術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善이 되고 惡이 되지 아니하는 것이며, 이 理에 依하여 社會안의 惡人의 自由를 拘束하고 嚴刑을 加하고 하는 것은 社會의 疾病을 治療하여 그 社會의 生을 完遂하기 爲함이니, 그러므로 이것은 善이 되고 惡이 되지 아니하는 것이며, 革卦에「湯武革命順乎天而應乎人」이라 함은 天時와 人心에 順應하여 社會안의 惡政治를 除去하고 社會의 生을 完遂하는 事業을 行함을 革命이라 한 것이다. 여기에 革命이라 함은 順天應人하는 革命을 말하는 것이므로 革命은 善한 것이며, 長의 時運에 勢力의 强弱으로써 서로 政權을 爭奪하는 것은 비록 政權을 奪取하되 그것은 社會를 生生하는 運動이 아니므로 革命이라고 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性惡說

사람의 天性을 惡하다고하는 性惡說이 있는데, 天性은 사람의 모든 行爲를 主宰하여 人體의 健康함과 같은 것이므로 天性은 반드시 善한 것이며, 저 所謂 性惡說은 마치 世間에 疾病에 걸린 사람이 많음을 보고 사람의 몸은 疾病으로서 組織되었다 함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몸은 健康으로서 組織되고 疾病 같은 것은 一時的 不健康 現象에 不過한 것이니, 그러므로 사람의 天性은 善한 것이오 저 惡같은 것은 生長競爭의 過程에서 天性이 疾病에 걸려서 一時的으로 發生하는 것이오 天性에는 惡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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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은 일생의 사명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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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命은 一生의 使命

 

사람에게는 自由意志가 있어 神의 自然法則을 어기고 惡의 發生하는 일이 있으므로 사람은 그 出生하는 때에 自體의 生生을 營爲함에 必要한 天性을 天으로부터 稟受하는 同時에 또한 世上에 出生하여 어떠한 일을 한다는 使命을 天으로부터 아울러 稟受하니, 이가 天命이오, 乾卦에 「乾道가 變化하여 各各 性命을 正한다」함은 物이 天性과 天命을 바르게 行한다 함을 말함이다. 天性은 圓深通明하여 空間의 象이 되고 天命은 사람의 一生동안에 遂行할 바의 使命이므로 時間의 象이 되는데, 空間은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그 一部를 變改할 수가 있으므로 天性에는 自由가 있어 能히 空間의 自然物에 對하여 人工을 加할 수가 있는 것이오 時間은 사람의 힘의 全然 미치지 못하는 境域이므로 스스로 旣定된 使命이 있어 사람은 天時를 奉行하면서 그 使命을 다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生物이 無形에서 有形으로 化하여 이 世上에 生한 者는 반드시 天命을 받고 있는 것이니, 이는 모든 生物이 世上에 나올 때에 다만 偶然忽然히 되는대로 오다가다 나온 것이 아니라 모두 神의 體의 一部分을 나눠 받고 나온 까닭이다. 植物이나 動物은 數多한 種類로 나뉘어서 生하고 있는데, 이들은 形質을 主로 하고 있으므로 그 所謂 天命이라는 것은 그 種類의 形質의 生生繼承하는 일이니 그 一例로는 楊木은 楊木으로 生하여 楊木의 씨를 保有하는 것이 그의 天命이오, 桑木은 桑木으로 生하여 桑木의 씨를 保有하는 것이 그의 天命이오, 牛는 牛로 生하여 牛의 씨를 保存하는 것이 그의 天命이오 馬는 馬로 生하여 馬의 씨를 保存하는 것이 그의 天命이다. 그러므로 楊桑牛馬는 모두 그 種類대로 共通한 個性을 가지고 同一한 任務를 遂行하여 모두 自然스럽게 그 天命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單一種類로 되어 共同生活의 社會를 組織하고 사람의 生活은 極히 複雜하여 반드시 分業協業이 있는 것이므로 사람은 그 種類는 單一하고 있으되 그 性格 知識 技能 같은 個性은 實로 千差萬別한 것이니, 사람의 個性의 千萬가지 差異는 動植物의 千萬가지 種類의 差異와 匹敵하는 것이며,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한 分業協業으로써 神의 事業을 祐하기 爲하여 各其 獨殊한 性格 知識 技能等 個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곧 天命이다. 사람은 獨殊한 個性을 가지고 神의 事業을 祐하는 것으로써 一生의 使命을 삼고 있으므로 사람은 動植物과 같이 自體의 形質이 자라고 子孫을 繁殖하고 하는 것으로는 天命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動植物은 數多한 種類로 나뉘어 있으므로 그 種族保存이 한 使命으로 되어 있으나, 사람은 世界人類가 모두 單一種類로 되고 있으므로 그 種族의 保存은 天命이 되지 아니하고 人類全體의 生生을 爲하는 事業이 天命으로 되는 까닭이며, 사람이 자라는 동안에 自由意志로써 그 使命을 다하는 것은 天命을 順함이되고 使命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天命을 逆함이 되는 것이다.

天命인 使命은 사람의 一生동안에 遂行하는 일이므로 어느 一面으로는 運命도 되는 것이니. 마치 動植物의 楊桑牛馬는 一生을 楊桑牛馬로 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 完全히 運命으로 되어 있음과 같은 것이다. 이런 面으로 볼 때에는 사람의 天命도 또한 運命이 되는 것이오, 또 사람의 살고 있는 時運도 時間에 屬하여 있으므로 또한 運命이 되는 것이니, 사람은 時運이라는 運命의 속에서 살면서 그 稟受한 바의 使命을 다하고 있으므로 그 一生의 活動은 스스로 運命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時間속의 人間의 實生活은 空間에 屬하니, 空間에 屬하는 일은 人工으로써 善하게 할 수도 있고 惡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비록 어떠한 時運이 到來하더라도 사람은 그 時運에만 依存하는 것이 아니오 空間에 屬하는 일은 最善의 人工을 加하여 人間生活에 利用하고 人工으로써 할 수 있는 人事를 다한 然後에 時運을 待하는 것이 곧 天命을 順함이다.

天性과 天命은 하나는 自由이오 하나는 運命으로서 서로 對立하고 있는듯하나, 두가지가 모두 天으로부터 稟受한 것으로서 그 本源이 同一하므로 사람은 그 自由意志로써 天性의 至善을 다하고 天命을 順하여 사람을 生養하는 事業을 行하는 때에 天性의 自由와 天命의 運命이 스스로 一致하는 것이니, 說卦에「理를 窮하고 性을 盡하여 써 命에 至한다」함은 天性과 天命의 一致한 境地를 말함이오 天性과 天命의 一致한 者는 天性의 여문 者이다.

그러나 사람은 自身의 稟受한 天命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렵고, 天命을 알지 못하고서 자기가 이 世上에 태어난 使命을 다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비록 天命을 알지 못하고 있으되 人間으로 神을 祐하는 일을 行하면 또한 스스로 使命을 다하는 일이 되는 것이니, 이는 人類의 共同生活에는 여러 가지의 分業協業이 있으되 그 歸着하는 곳은 모두 神을 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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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충의는 삼대륜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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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節 孝 忠 義는 三大倫

■ 孝忠義는 神道이다

 

사람의 行動하는 倫理로서 神과 相通하는 三大倫이 있으니, 三大倫이라 함은 父子道의 孝와 國民道의 忠과 夫婦道의 義를 말함이다. 孝忠義의 三大倫은 神의 垂示하신 天倫인데, 長의 時運의 사람들은 자라는 過程에 있어 生長競爭을 行하여 自己의 自由意志를 主張하고 神의 뜻을 알지못하여 이 天倫을 바르게 쓰지 못하고 도리어 當時의 君主와 貴族들에게 잘못 利用된 일도 있는 것이며, 成의 時運에는 이것이 人間社會의 最大 倫理로 되는 것이다. 三大倫은 남만을 爲하는 것이 아니라 結果的으로는 自身의 生生을 爲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또한 天地가 圜運動을 하여 自身에서 나간 善不善이 다시 自身에게로 돌아온다는 原理도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三大倫은 人間社會의 모든 道德의 發源이 되는 것이다.

 

孝의 原理

孝는 天地의 生生原理의 中心이 되고 있는 것이니, 사람이 生하고 자라고 함에는 神으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祖上父母의 天命의 줄을 通하여 天命을 받는 것이므로 天命의 줄을 連繼하는 것이 곧 孝이다.

 

註 ●孝의 理

萃卦에「王假有廟致孝享也」라 하여 子孫이 廟를 세워서 父母의 神을 奉享하는 것을 孝라 하고 그 다음에「用大牲順天命」이라하여 母가 子의 出生을 爲하여 自身은 犧牲하는 것을 天命이라 하니 이는 父母가 終하고 子가 父母를 繼承하여 天命을 잇는 것이 곧 孝라 한 것이다.

사람의 살고 있는 이 地球는 太陽을 中心으로하여 公轉하고 神이 또한 太陽에 位居하심으로 사람은 地球와 함께 太陽을 公轉하면서 또한 神을 中心으로하여 圜行하는 것이오, 太陽과 地球와의 사이에 電氣와 磁氣를 因한 引力의 줄이 있으므로 神과 사람과의 사이에도 또한 天行健의 雷風의 氣를 因한 天命의 줄이 있어 祖孫系統의 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圜運動은 遠心運動과 向心運動으로 되어 있는지라, 사람이 無形한 天祖神에서 出生하여 有形으로 되어 子子孫孫이 한 世代씩 늘어 나가는 것은 中心에서 멀어지는 遠心運動이오 사람의 遠心運動은 各人마다 그 位置가 다르고 世代마다 그 軌道가 늘어나서 同一한 位置 同一한 軌道를 걷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그러므로 사람은 얼굴이나 性質의 全然 同一한 者는 한 사람도 없는 것이오, 사람의 出生한 以後에 그 向하여 나가는 길은 有形으로부터 다시 無形으로 되어 天祖神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는 中心을 찾아가는 向心運動이며, 그러므로 사람은 그 出生하는 날부터 一生동안의 걸어가는 行路는 神의 계신 곳으로 向하여가는 것이다.

사람은 神을 中心으로하여 間斷없이 遠心運動과 向心運動을 아울러 行하고 있으니, 遠心運動을 行하는 것은 空間的으로 無限히 擴大하기 爲하여 無形에서 有形이 生하여 中心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이는 사람의 形質의 자라는 運動이오, 向心運動을 行하는 것은 時間的으로 無窮히 繼承하기 爲하여 遠心의 終點에서 未來의 始點을 찾아서 無形한 中心을 向하여가는 것이며, 이는 사람의 天性의 여무는 運動이다. 天地의 生生運動은 모두 圜運動으로 되고 直線運動은 없는지라, 사람이 祖上으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은 그것이 生生運動이므로 반드시 圜運動이오 直線運動이 아니며, 圜運動에 連結되어 繼續하는 生生運動은 또한 圜運動이므로 사람이 向하여가는 길도 또한 直線이 아니오 반드시 圜運動이니, 그러므로 사람이 圜運動을 行하여가는 길은 그것의 圓形이거나 螺旋形이거나를 勿論하고 반드시 始發하는 中心을 向하여 圜行하는 것이다.

사람이 神을 中心으로한 遠心運動과 向心運動은 스스로 神과 사람과의 사이에 連繼되어있는 줄을 通하여 行하는 것이오 이 줄은 사람의 祖上이 神에서 出生하여 世世로 繼承하여 내려오는 줄이므로 이것은 天命의 줄이 되는 것이다. 地球와 太陽과의 引力의 줄은 遠心運動의 줄과 向心運動의 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相反되는 두 運動을 한 줄로써 行하고 있음과 같이, 神과 사람과의 天命의 줄도 또한 한줄로 되어 있어 祖上으로부터 世世連續하는 遠心運動의 줄이 곧 사람이 神에게로 圜行하는 向心運動의 줄이 되어, 사람이 神에게로 돌아감에는 반드시 祖上父母의 내려오신 줄을 도로 걸어 올라가는 것이다. 神과 사람과의 天命의 줄에는 祖上父母의 位도 있어 神을 向하는 向心運動은 반드시 同一한 줄에 位하신 여러 祖上父母의 마디를 거쳐서 올라가는 것이므로 神을 向하는 마음이 곧 祖上父母를 向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神의 事業을 祐하는 때에 비로소 天命의 줄이 連繼되어 神에 對한 孝가 되는 것이오, 神을 向하는 마음이 곧 祖上父母를 向하는 마음이므로 神에 대한 孝가 바로 祖上父母에 對한 孝가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神에 對한 孝가 없이는 祖上父母에도 孝가 되지 못하며, 또 祖上父母에 對한 孝가 없이는 神에도 孝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神에 對한 孝라함은 사람이 神의 事業을 祐하는 일이라, 사람이 神을 祐하면 神은 圜運動의 理에 依하여 사람의 祐를 받으시는 대로 天惠를 내리어 사람을 祐하시는 것이니, 이는 사람이 神을 祐하는 일이 또한 自身이 神의 祐를 받는 結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神에게 孝하는 것은 또한 自身의 生生을 爲하는 일이오 神이 天惠를 내리어 사람을 祐하시는 것은 또한 그 子孫을 生養하여 永遠한 生生事業을 行하시기 爲함이니 이와 같이 神과 사람이 相祐하여 天地가 永遠不窮히 生生하는 것이 孝의 原理로 되는 것이다.

孝의 原理로써 보면 子孫이 祖上父母를 爲하는 것은 곧 自身의 生生을 爲하여 自身과 神과의 天命의 줄을 連繼하는 일이오 祖上父母가 子孫을 愛育하는 것은 또한 自身의 世世繼承하는 生生을 爲하여 自己子孫과 神과의 天命의 줄을 連繼하는 일이다. 子孫이 祖上父母를 爲하고 祖上父母가 子孫을 愛育하고 하는 것은 모두 自己의 生生을 爲하는 일이면서 또한 子孫은 祖上父母의 功德을 報答하고 祖上父母는 神의 子孫을 生養하여 神의 事業을 祐하는 것이니 祖上父母와 子孫과의 사이는 自와 他를 超越하여 同一한 天命의 줄위에서 生生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孝라는 것은 다만 生存한 父母를 爲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天性을 여물게하고 神의 사업을 祐하여 神을 向하는 마음과 이미 作故하신 祖上父母를 向하는 마음이 一致하고 아울러 手下의 子孫들에게 善言善行을 垂範하여 祖上父母와 手下子孫들과의 사이에 天命의 줄이 連繼되게하는 것이 곧 作故하신 祖上父母에 對한 孝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祖上神에서 出生하여 時間的 繼承으로는 祖上과 子孫의 繼世하는 系統이 되고 空間的 擴大로는 世界人類의 連枝하는 兄弟의 誼가 되는데, 사람이 神의 事業을 祐하여 사람을 生養한다 함은 別다른 남이 아니오 곧 자기의 世界兄弟를 生養하는 것이다. 世界人類는 비록 皮膚色이 서로 다르고 言語風俗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 하더라도 모두 同一神에서 出生하여 同一祖上을 모시고 있는 兄弟이오 비록 寸數의 늘고 밭고 한 差異는 있다 하더라도 各自 分離된 남남이 아니며 소위 同民族과 異民族의 差異라는 것은 다만 寸數의 늘고 밭고 함과 婚姻을 通하고 通치 아니하고 한 差異 밖에는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사람이 有形한 肉體로써 서로 接觸하는 것은 極히 局限되어 있으되 無形한 天性에는 神의 作用이 있어 全人類가 모두 共通한 것이니, 易卦에는 달에서 사람의 씨의 生함을 象한 卦名을「同人」이라 하고 거기에 또「天下의 志를 通한다」고한 것은, 人類의 씨가 모두 달에서 出生하여 그 本源이 同一하고 天下사람의 志가 서로 通한다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世界人類가 兄弟의 誼로써 서로돕고 서로 親和하는 것은 神의 生生事業을 祐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곧 神에 對한 孝가 되는 것이다.

 

 

忠의 原理

 

忠은 사람은 自體가 生生하기 爲하여 心의 體인 德을 光明케하여 自體가 所屬하여 있는 社會의 生生을 돕고 事業을 修하는 것이 곧 忠이다.

 

註 ●忠의 理

乾文言에「忠과 信이 써 德을 進하는 바이라」한바 德이라 함은 사람이 物을 生養하는 마음의 體를 말함이니, 忠은 中心으로부터 物을 愛育하는 마음이 솟아나옴을 말함이오 마음이 忠하면 能히 物을 生養한다 함이다.

사람은 國家社會의 共同生活體의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 共同體의 生生을 爲하여 中心에서 나오는 共同生活 精神이 곧 忠이다. 사람은 그 社會에 出生하는 날에 스스로 그 國家社會의 一員이 되어, 國家社會의 生生이 곧 自身의 生生과 直結되는 것이므로 國民은 國家의 生生을 爲하여 忠하는 것이 곧 自身의 生生을 爲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自身의 生生을 爲하여 各其職務를 通하여 自己를 利하고 아울러 社會를 利하여 사람을 生養하는 일에 參與하는 것은 國家社會의 生生을 爲하는 忠이 되는 同時에 또한 神의 事業을 祐하여 神에 對한 忠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生活에는 形質로된 肉體의 生活과 天性作用인 精神의 生活과의 二元作用이 있는데, 肉體는 有形한 個體로 되어 個個人의 獨自한 것이므로 肉體生活은 個體를 中心으로하여 行하는 것이니, 이가 곧 本能生活이오 精神은 無形한 氣로서 人類共通한 것이므로 精神生活은 全人類의 所自出한 神을 中心으로 하여 行하는 것이니, 이가 곧 理性生活이다. 사람의 精神은 神을 中心으로하여 生活하고 있으므로 祖上父母에 對한 孝가 또한 神에 對한 孝가되고 國家社會에 대한 忠이 또한 神에 對한 忠이 되는 것이며 同一히 神을 祐하는 일에 孝와 忠의 分別이 있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하면, 이것을 繼繼生生하는 祖孫傳承關係로써 볼 때에는 孝가되고 共同生活하는 上下組織關係로써 볼 때에는 忠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植物의 形質을「生」의 基本組織으로하여 自然法則을 따르고, 動物의 本能을「자라는 作用」으로하여 自由로이 行動하며, 또 이들 植物과 動物을 生活資料로 하여 生生하고 있으므로 사람의 生生法則이 植物動物과 同一하고 사람의 忠孝의 理도 또한 植物動物의 生理와 相通하는 것이다. 草木이 뿌리로부터 漸次로 生長하여 本末의 次序가 있는 것은 사람이 祖上으로부터 代代로 繼承하는 形態와 같고 草木의 生長에 節이 있는 것은 사람의 祖孫傳承하는 寸數의 形態와 같으니 根本은 祖上父母의 象이오 枝葉은 子孫의 象이라 草木의 枝葉은 그 所自出한 根本을 庇護하기 爲하여 枝葉을 뿌리의 伸張한 範圍만치 伸張시켜 뿌리가 日光에 乾燥됨을 防止하고 뿌리는 水分과 營養을 吸收하여 枝葉에 傳達하여 根本과 枝葉이 모두 그 自體의 生生을 爲하여 서로 庇護하고 서로 養育하니 이는 사람의 祖上父母와 子孫이 서로 그 自體의 生生을 爲하여 天命의 줄을 連繼함과 같은 것이며, 草木의 枝葉이 그 根本을 爲하는 것은 孝의 象이 되므로 사람이 祖上父母를 爲하는 孝는 草木의 孝의 理와 相通하는 것이다.

動物體의 各器官은 順次的으로 生長分岐하는 草木과는 달라서 그 出生하는 때에 統體가 이미 組織되고 있는 것은 사람이 出生하면서 스스로 그 所屬한 共同生活體의 一員이 됨과 같고 動物體의 各器官이 그 自體의 生生을 爲하여 共同으로 그 統體의 生生을 營爲하는 것은 사람이 自體의 生生을 爲하여 그 所屬한 國家社會의 生生을 돕고 있음과 같은 것이며, 動物體의 各器官이 그 統體를 爲하는 것은 忠의 象이 되므로 사람이 國家社會를 爲하는 忠은 動物體의 忠의 理와 相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天地間의 모든 生物의 生生은 모두 孝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序卦에「有夫婦然後有父子 有父子然後有君臣 有君臣然後有上下 有上下然後禮義有所錯」이라 하니 父子는 植物體의 象이오 君臣의 權力組織인 國家道는 動物體의 象이오 上下道는 自然秩序인 禮義의 錯하는 人道의 象이니, 이는 植物이 있은 然後에 動物이 있고 動物이 있은 然後에 사람이 있다하는 象이다. 父子道는 父母가 全力을 다하여 子女를 生養하여 國家社會에 바치는 것으로서 이는 植物이 自體를 犧牲하여 動物體를 生養하는 象이오 國家道는 國家가 全力을 다하여 사람을 生養하여 그 天性을 여물게 하는 것으로서, 이는 動物이 自體를 犧牲하여 사람을 生養하는 象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自體를 生養하여주는 植物動物의 恩德을 잊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 自體를 生養하여주는 父母 國家의 恩德을 잊지 아니하는 行爲와 相通하는 것이오 이 自體를 生養하여주는 恩德을 잊지 아니하는 것이 곧 孝忠의 길이다.

 

義의 原理

義는 義라함은 陰陽兩物이 서로 和合하여 하나의 새로운 合同體를 이루는 것이오 그러므로 一夫一婦의 配合하는 것을 天地의 大義라 한 것이다

 

註 ●義의 理

家人卦에「男女正天地之大義」라 하고 歸妹卦에「天地之大義」라 하니 이는 夫婦의 陰陽和合을 義라 한 것이다.

사람의 社會生活은 家庭을 基本單位로 하여 行하는 것이므로 家人卦에는「家를 正하매 天下가 定한다」하여, 各個의 家庭이 社會組織의 基本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또 「男이 外에 正位하고 女가 內에 正位하여 男女가 正함은 天地의 大義」라 하여 夫婦라 함은 一男一女가 서로 和合하고 各其 內外의 位가되어 한 家庭을 이루는 것이므로 一夫一婦가 相配하는 것이 곧 大義라 함을 말하고, 損卦에는「三人이 行하면 一人을 損하고 一人이 行하면 그 友를 得한다」하여, 二人相配하는 一夫一婦制가 天地의 道라 함을 말한 것이다. 天下의 衆男衆女中에서 오직 一男一女가 相合하여 夫婦가되니 그 夫婦의 義가 大한 것이오 夫婦가 된 然後에는 一生동안에 夫는 一婦를 爲하고 婦는 一夫를 爲하여 함께 살고 있으니, 그 夫婦의 義가 和한 것이며, 男女가 一夫一婦의 義를 지키는 것은 서로 그 相對便을 爲하는 일인 同時에 또한 서로 그 自身의 生生을 爲하는 일이다.

易卦에는 男女의 婚姻 夫婦의 家庭 童蒙의 出生의 세곳에 모두 神道를 말하니, 이 세 가지는 家庭生活의 主要한 일이오 그 中에서도 家庭의 秩序를 세우는 夫婦의 義가 그 中心이 되고 있어 家道를 正한 然後에 國家社會의 生生事業도 行할 수가 있고 孝忠한 子孫도 이러한 家庭에서 出生할 수가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夫婦間에 義의 和한 家庭은 또한 사람을 生養하는 神의 事業을 祐하여 神道가 行하는 것이다.

 

●生活의 體用

世間에는 個人主義思想을 가지고 自己의 個體의 生만을 爲하고 他人의 生을 不顧하는 일이 許多한데 이것은 生活의 體用을 알지못하는 까닭이다. 自體의 生을 爲하는 것은 生活의 體이오 他人의 生을 爲하는 것은 生活의 用이니, 사람은 내가 남을 爲하는 때에 남이 또한 나를 爲하여 비로소 共同生活을 營爲하는 것이라, 사람이 自體의 生만을 爲하고 남의 生을 爲하지 아니하면 이는 生活의 體만있고 生活의 用이 없는 것이므로 그 사람은 남으로 더불어 共同生活을 營爲하지 못하고 孤立 獨存한 生活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오 人間은 孤立獨存으로서 生活할 수는 없는 것이다. 忠孝義의 原理도 實은 生活의 體用에서 生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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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과 후천의시운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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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章 未來의 成의 時運

第一節 世上의 變化

■ 先天과 后天의 時運

 

지금 이 時點은 萬物의 자라고 있는 長의 時運이오, 物의 자라는 者는 반드시 여물어서 成하는 것이므로 앞으로 오는 未來時運은 成의 時運이다. 옛적에 生의 時運으로부터 長의 時運으로 넘어올 때에는 生의 時運을 先天이라 하고 長의 時運을 后天이라 하였는데 지금에는 長의 時運으로부터 장차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서 先世 乾坤으로부터 次世代의 乾坤이 生하는 것이므로 生과 長의 두 時運을 合하여 모두 先天이라 하고 成의 時運을 后天이라 한다. 后字는 後라는 뜻과 女王이라는 뜻과 先世를 繼體한다는 뜻과의 세 가지 뜻이 있으므로 長하는 陽運의 後에 成하는 陰運이 繼하고 陰運은 女의 象이라 하여 未來의 成의 時運을 后天이라 한 것이다.

時運의 長과 成의 象을 樹木의 生生으로써 보면 여름에 樹木의 陽氣가 內部로부터 外部에 發宣하고 水液이 뿌리로부터 위로 逆上하고 無形에서 有形한 줄기 가지 잎사귀가 나와서 여러 갈래로 나뉘우고 하는 것은長의 時運의 象이오, 가을에 外部의 陽氣가 樹木의 內部에 들어가서 收斂하고 水液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와서 뿌리로 돌아가고 열매가 여물어서 次世代의 씨로 되고하는 것은 成의 時運의 象이다. 지금의 長의 時運의 일을 옛적의 生의 時運의 일에 比하여 보면 人間界의 일만으로써 보더라도 無形에서 有形이 生한 것과 少에서 多가 生한 것이 그 大部分이니, 옛적보다 人文이 發達하고 人口가 膨脹한 것도 長의 象이오 사람들의 各種 生活資料와 여러 가지 器物이 새로 發明된 것도 또한 長의 象이다. 그런데 生의 時運에서 長의 時運으로 넘어올 때에는 一年으로치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는 때와 같아서 無形에서 有形이 生하는 것이지만, 앞으로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갈 때에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때와 같아서 生長하던 것이 모두 收斂으로 變하고 이제까지 茂盛하던 잎사귀가 서리를 맞아서 떨어지고 여문 열매와 쭉정이가 分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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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달 사람의변화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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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地球 달 사람의 變化

 

宇宙의 天體는 그 組織이 陰陽의 二元作用으로 되어 收斂作用과 發散作用이 있으므로 그 生生하는 過程에는 스스로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고 하여 收斂하는 時運과 發散하는 時運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太陽系의 宇宙도 時運의 變化가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地球도 不斷히 變化하고 있는 것이다. 地球는 發生하는 當時에 單番에 完成된 것이 아니오 거기에도 生長成의 象이 있어 生의 時運에 生하고 長의 時運에 자라며 지금에는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이다. 地球가 長의 時運에는 樹木生成의 理와같이 內部에 있는 陽氣가 外部로 發宣放出되어 陰陽이 調和치 못하므로 氣候의 極寒과 極暑가 있고 南北極의 地가 凍結하는 것이오 成의 時運에는 陽氣가 外部로부터 內部에 入하여 地熱이 높아지고 極寒과 極暑가없어 氣候가 溫和하고 南北極地方의 얼음이 풀리는 것이니 지금에 南北極의 얼음이 조금씩 풀리고 있는 것은 地球가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徵兆이다.

地球에 어떠한 變化가 生하면 地球의 胎宮으로 되어있는 달에도 또한 變化가 生하는 것이다. 달의 組織은 艮山과 兌澤으로되고 艮兌는 乾坤의 六子中에 最少하므로 母體의 胎宮中에서 자라고 있는 胎兒의 象이 되는데, 胎中의 胎兒는 반드시 여물어서 母腹外로 出産하는 것이라 成의 時運이되면 胎中에 있는 달도 또한 여물어서 變化하고 달이 變化하면 그 軌道가 또한 變化하는 것이다. 달의 變化하는 象을 生成의 理로써 보건대, 사람의 胎兒가 母腹中에 있을 때는 母體와 逆行하여 倒生의 象이 되는 것인데 胎兒가 出産하면 母體와 같이 頭가 天을 向하고 足이 地를 밟는 것이니, 이 理에 依하여 지금에는 달의 表面이 地球를 向하고 裏面은 늘 裏面대로 있는 것인데 달이 여물어서 軌道가 變化하면 月體가 뒤집혀서 지금의 表面이 안으로 숨어버리고 지금의 裏面이 地球를 向하게 되는 것이다. 달의 消하는 그믐에는 달이 太陽의 앞에 있고 달의 始生하는 初生에는 달이 太陽의 뒤에 있는 것이니 이 理에 依하여 成의 時運에 달이 出生하는 때는 달이 太陽의 앞에서 太陽의 뒤로 돌아가는 象이 되어 日月地球의 軌道의 相互關係가 모두 變하는 것이다.

달의 軌道는 어떻게 變化하는가 하면 易學에는 乾坤의 正策數가 三百六十으로 되어 있어 이것이 周天의 正度數 三百六十度와 一歲의 正日數 三百六十日을 象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周天度數는 三百六十五度餘가 되고 一歲의 日數는 三百六十五日餘가 되어 度數는 正度數보다 五度餘가 더 많고 日數는 正日數보다 五日餘가 더 많으니 이 五日餘는 正日數보다 늘어나는 閏日이다. 閏이라 함은 懷妊生殖하여 數가 늘어난다는 뜻이라, 지금은 長의 時運이므로 天時에도 每歲 五日餘의 閏日이 生하는 것이며 每歲에 五日餘의 閏日이 生하는 까닭에 日月의 運行을 標準한 太陰曆에는 五歲에 約 兩次의 閏日을 두고 閏月이 드는 해는 十三月이 되어 이것을 閏歲라하고 閏歲의 總日數는 平均 三百八十四日인데 이것은 一歲의 正日數 三百六十日보다 二十四日이 더 많으니, 그러므로 二十四日은 閏日數의 象이 되는 것이다. 母胎中의 胎兒는 閏生의 象이므로 胎兒의 數는 二十四로 되고 지금의 地球가 約 二十四度를 傾斜하고 있는 것도 또한 母胎中에 胎兒의 閏數 二十四가 보태어 있는 까닭이다. 胎中에서 자라고 있는 胎兒는 자람이 끝나면 반드시 여물어서 母腹外로 出産하는 것이오, 胎兒가 出産하면 胎兒의 閏數 二十四가 줄어서 母體는 三百六十의 正數가 되는 것이므로 地球의 胎宮에서 달이 여물어서 軌道가 變하면서 出産하면 地球에서 二十四의 閏數가 줄고 正數 三百六十이 되어 地球의 傾斜가 바로 서는 것이니, 이가 地球와 달의 變化하는 때이다. 地球가 바로 서고 달의 軌道가 變하면 海洋과 潮汐에 큰 變化가 일어나서 水가 北地에서 汐하고 南天에서 潮하고 또 水가 萬折하여 東으로 向하는 것이니, 이가 成의 時運의 始로서 閏없는 三百六十日曆이 나오는 때이다.

註 ●胎宮 二十四數

易卦數는 六十四卦인데 六十卦는 父母數이오 四卦는 胎宮數이니 一卦 六爻로써 計算하면 六十卦는 三百六十으로서 正數가되고 四卦는 二十四로서 閏數가 되는 것이다. 易卦 六十四卦의 總爻數는 三百八十四數로 되어 閏歲 三百八十四日數와 同一하고 乾坤正策數 三百六十보다 二十四가 더 많으니 이 二十四는 胎宮 四卦의 爻數로서 그것이 胎宮에서 자라고 있는 胎兒의 閏數이다. 易經의 上經은 百八十爻이오 下經은 二百四爻로서 上下 傾斜의 象이 되는 것은 下經속에 胎宮 二十四爻가 들어 있는 까닭이니, 地球의 傾斜 約 二十四度도 이 理에 依한 것이다.

天地의 時運이 變化하면 사람의 生理에도 또한 變化가 生하는 것이니, 長의 時運에는 사람의 心氣가 主로 外向하여 權勢 財利 名譽等 外的 生活에 置重하고 生長競爭이 甚하며, 또 時運의 象을 生物로써 보면 長의 時運은 動物의 象이오 動物은 專혀 本能生活을하고 거의 全部가 個體生活을 하는 것이므로 사람도 長의 時運에는 本能生活과 個體主義生活이 主生活로 되고 極端的으로는 動物生活에 墮落하는 者도 없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成의 時運이되면 사람들의 生理가 一轉하여 天性이 여물고 神作用이 生하여 能히 空間의 幽深과 時間의 未來를 通觀할 수가 있고 個體主義가 變하여 天下가 同人하고 世界人類는 모두 한 家庭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長의 時運에는 天地自然數가 九數까지만 자라고 十數의 자리가 열리지 아니하여 暗黑속에 싸여 있으므로 사람마다 그 뱃속에 獨自한 秘密을 감추고 있어 사람과 사람사이에 서로 信賴할 수가 없고 서로 利害關係로서 다투고 있어 이 世上은 公明할 날이 없는 것이다.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면 十數가 열려서 自然數가 具全하여 神의 作用이 行하고 사람들의 天性에 神의 作用이 行하면 이 世上에는 秘密이라는 것이 存在할 수도 없고 또 사람들의 마음이 光明하여 惡을 行하는 秘密을 뱃속에 두지도 아니하여 이 世上은 光華한 神世界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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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의 몰락과 정신문명의 발달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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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質文明의 沒落과 精神文明의 發達

 

사람의 生理가 時運을 따라서 變化하므로 사람의 學問의 傾向도 또한 時運을 따라서 變化하는 것이다. 萬物의 生生에는 모두 生命과 神의 二元이 있는데, 生命의 運動은 無形에서 有形한 形質이 生하여 物質이 되고, 神은 無形하여 有形한 物質속에 갈무리하여 있고 사람의 天性 心情等 精神은 形質속에 갈무리하여 있는 神作用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形質이 자라기는 物質로써 하고 精神이 여물기는 神作用으로써하며, 또 사람은 자라는 일만을 自由意志에 依하여 行하고 生하고 여무는 일은 神作用에 依하여 行하는 것이므로 그 形質이 자라기 爲하여 物質生活을 營爲함에는 사람마다 그 個體의 自由에 依하여 行하는 것이다. 動物들은 天然物에 對하여 아무런 加工도 없이 그대로 먹고살지만 사람은 반드시 天然物에 人工을 加하여 그 所用하는 物資를 創製하는 것이니 이가 人工이 天工을 代成함이오 이는 사람에게 物을 創製하는 才能과 自由가 있는 까닭이다.

지금은 長의 時運이오 長의 時運은 形質의 자라는 때이므로 사람들은 自體가 자라기 爲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硏究하기에 心力을 다하고 있는데, 長의 時運의 初期에는 사람들의 生活이 單純하고 그 精神作用이 또한 어리므로 그 生活에 必要한 事物에 대한 硏究가 部分的으로는 進步와 發明이 깊지 아니하였으나 그 原理를 體系的으로 짜 놓은 學問은 없었으며, 사람들의 精神이 漸次 자람을 따라서 비로소 事物을 硏究하는 여러 가지 方法이 案出되고 그中에서도 特히 分析과 實驗에 依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아내는 學問이 생기니 이가 곧 科學이다. 科學이라 함은 分析과 實驗에 依하여 物質의 組織運行되는 原理를 證明하는 學問이오 分析이라 함은 草木의 자랄 때에 枝葉이 漸漸 나뉘움과 같은 것이니 科字도 草木이 자라서 가지가 나뉘운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科學은 長의 時運에 사람들이 自體가 자라기 爲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案出하여 系統的으로 그 原理의 體系를 세운 學問이다. 長의 時運의 初期에는 비록 科學이라는 學問은 없었으나 사람들이 人工으로써 天工을 代行하여 그 生活資料를 創製하여 살아온 것이오 이들 創製物은 賢哲한 先知者들이 나와서 發明發見한 것이니 이는 科學以前의 人工이나 그 以後의 人工이나가 모두 그 때와 環境에 따라서 사람의 精神에서 案出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에 온 世人이 科學의 偉大함을 敬歎하여 科學萬能時代가 되고 있으나 이것은 決코 科學의 偉大함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의 精神發達의 偉大함에 基因한 것이다. 사람의 精神에는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 하는 發展이 있고 長의 時運의 사람의 精神은 時運과 함께 자라고 있으므로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能히 事物을 分析 實驗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인 科學이라는 學問을 發見한 것이니 그러므로 科學은 사람의 精神의 자라는 過程에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硏究하는 方法으로서 案出된 産物에 不過한 것이오 이는 사람의 精神이 偉大하여 그 자라는 때에 物質文明을 建設하기 爲하여 科學이라는 한 用具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科學은 長의 時運의 人類社會에 燦爛한 物質文明을 建設한 功績은 적지 아니하나 거기에는 스스로 一定한 限度가 있고 그 限度에 達하면 그 以上 더 자라지 못하고 도리어 病的症狀이 나타나는 것이다.

萬物에는 物質과 精神의 兩面이 있어 生長成의 運動을 行하고 있는데 사람은 精神이 善하기만 하면 無限性을 가지고 生하고 자라고 여물어서 神과 相通하는 것이지만 物質로 된 形質은 자라기만하고 여물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形質이 자람을 極하면 여무는 것이 아니라 老衰하여 消滅하는 길로 向하는 까닭이다. 이것을 草木으로써 보면 여름에 草木의 枝葉이 繁盛하여 靑綠이 滿地하면 그 榮華한 景致는 可謂 絶勝이다. 그러나 여름과 가을의 交代하는 어느 하루아침에 이르러 氣候의 變化로 因하여 秋風이 일어나면 이제까지 繁榮을 極하던 枝葉의 榮華는 一時에 枯落하고 여문 열매만이 가지의 사이에 남게 되는 것이니, 枝葉의 榮華는 사람의 形質의 象이오 여문 열매는 사람의 여문 精神의 象이다. 人類社會는 宇宙의 時運에 應하여 長의 時運과 成의 時運이 있으므로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에는 이제까지의 物質文明은 사람의 形質과 같이 또한 草木의 枝葉과 같이 반드시 자람을 停止하고 老衰枯落하는 것이오 그 뒤에는 사람의 여문 精神이 神作用을 行함과 같이 또한 草木의 열매가 여물어서 世世繼承하는 作用을 行함과 같이 반드시 한 次元 더 높은 神作用의 文明이 發生하는 것이다.

그러면 科學은 그 자람을 極하고 한 次元 높은 새 文明을 낳을 수가 없는가 하면, 科學은 分析實驗하는 方法을 通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아내는 學問이니 形而下學的인 物質의 面은 이러한 方法으로써 硏究할 수가 있으나 分析實驗의 領域外에 있는 形而上的 事物 例컨대 萬物의 씨는 처음에 어떻게 생기고 또 어떻게 여물어서 宇宙創造 當時에 생겨난 씨가 지금까지 世世繼承하여 傳來하는가 하는 原理라든가 萬物에는 그 生長成하는 自然法則과 整然不亂한 秩序가 어떻게 생겨서 各自가 獨立的으로 生成하면서 또한 全體가 有機的으로 함께 生成하고 있는가 하는 作用이라든가에 對하여는 一言半句의 答案도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科學은 사람이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기 爲하여 案出된 學問이므로 科學으로서는 物質의 자라는 原理밖에는 硏究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形質의 자라는 동안에만 自由意志를 行使하고 科學은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案出된 學問이오 사람의 精神의 여무는 것은 神作用에 依하여 行하는 것이므로 科學으로써 事物을 硏究함에는 오직 形質의 자라는 範圍에 그치고 그 以上의 여무는 領域에 對하여는 거의 無知에 가까운 것이다. 더욱이 萬物은 모두 宇宙神에서 創造되고 神을 中心으로하여 그자라는 때는 遠心運動을 行하여 形質이 자라고, 그 여무는 때는 向心運動을 行하여 精神이 여물면서 神에게로 돌아가는 것인데, 科學은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는 物質學으로서 遠心運動을 行하고 있으며, 遠心運動을 行하는 者는 神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므로 科學은 發達하면 發達할수록 神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내종에는 全然 神을 忘却하게 되는 것이니, 이 遠心運動에서 向心運動으로 넘어가는 轉換點이 곧 科學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限度로서 한次元 더 높은 文明을 誕生할 수 없는 所以이다.

萬物에는 生長成의 運動이 있어 자라면 반드시 여물기로 되어 있으되 形質과 같은 것은 자람이 極하면 老衰하여 消滅의 길로 向하는데 이消滅의 길로 걸어가는 過程에 病的症狀이 일어나는 것이니, 老人들의 老衰가 곧 이 病의 症狀이다. 科學文明은 物質文明으로서 人間社會의 道德이나 善惡같은 것은 全然關涉하지 아니하고 오직 物質生活의 一層向上을 爲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人類生活의 向上을 爲하여 案出한 科學이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原子武器를 만들어 가지고 瞬息間에 이 地球도 破壞할 수 있을만치 橫暴하여 人類의 生存을 威脅하고 있으니, 이는 科學이 老衰病에 걸린 症狀이다.

人口의 生産은 사람의 形質의 자라는 象이오 人類의 生生運動은 반드시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여 陰陽이 調和한 然後에 過度한 것도 없고 不及한 것도 없고 適當히 生하고 適當히 자라는 것인데, 長의 時運에 사람들의 氣가 모두 外向하고 그 崇尙하는 學問인 科學이 또한 자라는 方面으로 突進하여 發散하는 것만을 알고 內收할 줄을 알지 못하므로 形質이 過度히 자라서 人口의 生産이 急激히 膨脹하여 도리어 人類自體의 生活을 威脅하고 있으니, 이는 形質이 너무 자라서 老衰病에 걸린 症狀이다. 原子武器의 橫暴와 人口生産의 過剩은 科學이 形質의 자라는 일에만 偏向하고 여무는 原理를 알지 못하는 所致로 생긴 病的症狀이며, 이 病은 科學속에는 아무런 治療方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精神에는 生長成의 發展이 있는지라, 長의 時運에는 形質의 자라는 原理의 學問인 科學을 發明하여 燦爛한 物質文明을 建設한 것이오 科學에는 자라는 原理만 있고 여무는 原理가 없으므로 老衰하여 病的症狀이 생기고 있지만, 사람의 精神은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에는 여물기 爲하여 자라기를 求하지 아니하므로 時運으로 더불어 함께 여물려고 하는 人類에게는 科學은 쓸 곳이 없는 묵은 學問이 되는 것이오 또 여문다는 일은 자라는 原理의 學問인 科學에게는 全然 想像조차 不到하는 未知의 境域이다. 그러므로 여물기를 求하는 사람에게는 여무는 原理의 學問이 必要한 것이오 이 學問은 곧 精神을 여물게 하는 神作用의 原理인 神學이다. 成의 時運에는 오직 神學만이 사람의 精神을 여물게 하여 過度히 자란 科學의 病的症狀을 克服하고 陰陽의 調和作用으로써 自然스럽게 人口의 生産을 調節하여 人類社會에 物質文明보다 한 次元 더 높은 精神文明을 建設하는 것이다.

神學에 依하여 精神文明이 建設되면 사람들은 精神이 여물어서 지난날에 形質의 자람을 爲主하던 物質文明을 다시 追求하는 者가 없어서, 物質文明은 秋風이 일어난 뒤의 枝葉과 같이 枯落하고 神學에 依한 精神文明이 枯落한 枝葉사이의 열매와 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神學이라 함은 어떠한 것인가 하면 佛敎의佛經 儒敎의易學 基督敎의聖經과 같이 宇宙神과 사람과의 關係를 말한 學問이 곧 神學이오 神學에 依한 精神文明이라 함은 從來의 科學은 사람의 精神이 모두 外向하여 外的知識을 求하므로써 事物에 對한 知識은 廣汎하게 얻을 수가 있었으나 自身의 精神은 昏暗하여 靈的으로는 하나의 無知한 人間이 되고 있는 것인데, 神學은 精神이 內向하여 스스로 內明하므로 神作用이 生하고 神과 相和하여 肉眼으로 볼 수 없는 事物도 能히 靈眼으로써 볼 수가 있고, 肉耳로써 들을 수 없는 일도 能히 靈耳로써 들을 수가 있고 未來의 事物을 豫觀할 수도 있는 것이니, 이가 神學에 依한 精神文明이다.

長의 時運에는 사람들이 自由意志로써 形質의 자람을 爲하여 生長競爭을 行하고 그 까닭에 形質의 자라는 原理의 學問인 科學을 至上 學問으로 삼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精神의 光明이 모두 形質에 掩蔽되어 昏暗하게 된 것이오, 成의 時運에는 사람들이 神으로부터 善惡에 對한 審判을 받고 비로소 精神이 內向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昭明하게 하는 것이므로 사람들의 靈이 通明하는 것이며, 이 長과 成의 時運이 바뀌우는 때에 지금까지 繁榮을 자랑하던 科學文明이 물러가고 한 次元더 높은 神學文明이 오는 것이다. 이것을 易理로써 보면 人類의 科學時代의 生活은 蠱의 幼虫生活과 같고 神學時代의 生活은 蠱의 幼虫이 成虫인 蝶으로 化한 生活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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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종교의 출현 종교는 신도의교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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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節 새 宗敎의 出現

■ 宗敎는 神道의 敎

 

宗敎라 함은 무엇인가, 易經에「聖人이 神道로써 敎를 設하매 天下가 服한다」한 것이 宗敎의 本旨를 말한 것이다. 神道라 함은 易經에「觀天之神道而四時不忒」이라 한바와 같이 神이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고 하는 道로써 物을 生하고 자라게 하고 여물게 하고 하는 四時의 生長成作用을 行함을 말함이니 宇宙間의 萬物은 모두 神道에 依한 生長成의 作用으로써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 하며, 사람도 이 生長成의 作用에 依하여 無形한 神으로부터 有形한 形質을 받아서 生하고 生한 然後에 自由意志로써 人工을 行하여 자라고 자란 然後에 天性이 여물어서 다시 神에게로 圜行하는 것이다. 聖人은 이 神道의 生長成하는 作用을 본받아서 사람이 바르게 生하고 바르게 자라고 바르게 여물고 하는 敎理를 삼고 그것으로써 敎를 設하여 사람을 가르치시니 이에 天下의 사람이 모두 이 敎理에 服從하여 神道의 속에서 生活하게 된 것이오, 이 神道의 敎理로써 사람을 가르치는 敎育이 곧 宗敎이다.

神은 宇宙生成의 主宰로서 唯一無二하여 宇宙生命體를 統率하고 있으므로 宇宙의 生命體組織이 곧 神의 體이며 그러므로 宇宙生命體가 萬物을 生生함에, 無形에서 有形한 形質을 造出하는 生의 作用과 陽氣가 發動하여 物을 자라게 하는 長의 作用과 陰氣가 收斂하여 物을 여물게 하는 成의 作用이 있음과 같이 神의 體에도 또한 이 生長成의 세 가지 作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唯一神이 生長成의 어느 한 作用만을 行하신다고 하면 이는 한 個體의 作用이 되고마는 것이며, 統體는 個體의 作用을 行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聖人을 이 世上에 내시어 各其 神의 體의 一部分씩을 맡게 하고 聖人은 神의 計劃한 自然法則에 依하여 生長成의 理로써 敎를 設하여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이며 自然法則의 生長成作用에는 스스로 時運의 區別이 있으므로 神道의 敎에도 또한 生에 對한 敎理, 長에 對한 敎理, 成에 對한 敎理의 區分이 있는 것이니, 이가 宗敎가 各立하여 그 敎理를 달리하는 所以이다.

神의 體가 生長成作用을 行하는 象을 天地日月로써 보면 太陽속의 有形한 陰質은 宇宙無形中에서 始生한 有形體로서 生의 象이 되는데, 太陽의 組織은 陽氣인 天과 陰氣인 地와 電氣인 雷와 磁氣인 風과 및 水火의 精으로써 構成되고, 그 中에서 地風水火의 陰質이 太陽에서 分離하여 地球가 된 것이니, 그러므로 太陽속의 陰質과 地球는 同質의 有形體로서 生의 象이 되고 있는 것이다.

萬物은 形質이 있으면 스스로 生生作用을 行하기 爲하여 반드시 陽性과 陰性의 兩性이 있고 이 兩性의 交互作用에 依하여 生長成의 作用을 行하는 것인데 太陽에서 나오는 光明은 陽性으로서 陽氣의 發施作用을 行하고 陽氣는 長의 象이되며, 地球에 屬하여 있는 달은 地球의 胎宮인 陰性으로서 陰氣의 收斂作用을 行하여 太陽에서 오는 陽氣를 承受하여 物을 여물게 하고 陰氣는 成의 象이 되는 것이다. 또 神의 體의 生長成作用을 人身으로써 보면 사람의 形質은 無形에서 有形이 生하여 마치 太陽속의 陰質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은 生의 象이 되고 男體의 陽氣는 자라서 發施作用을 行하여 마치 太陽의 陽氣가 地球와 달의 陰質에 發施됨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은 長의 象이 되고 女體의 胎宮에서 胎兒가 長成하여 母腹外로 出産하는 것은 마치 달이 太陽의 陽氣를 承受하여 物을 여물게 함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은 成의 象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生이라 함은 無形에서 有形한 形質의 始生함을 象함이오 長이라 함은 陽氣가 運行하여 物을 始하여 形體가 자람을 象함이오 成이라 함은 陰精이 陽氣를 包含하고 義가 和하여 次世代를 作成함을 象함이다.

宇宙의 主宰인 神의 體에는 이와 같은 세 가지 作用이 있고 이 세 가지 作用은 各其 生長成의 세 가지 時運과 合致하는 것이므로 聖人의 敎도 또한 세 가지 作用을 區分하여 세 가지 時運에 合致하는 敎를 設하신 것이니, 그러므로 처음에 나온 佛敎는 神의 體의 生하는 作用과 生하는 時運을 象하고, 다음에 나온 儒敎는 神의 體의 長하는 作用과 長하는 時運을 象하고, 내종에 나온 基督敎는 神의 體의 成하는 作用과 成하는 時運을 象한 것이다. 世間에는 여러 가지 形態의 宗敎가 있으나 이 神道의 세 가지 作用中에서 어느 한 作用을 敎理로 한 然後에 聖人의 敎가 되는 것이오 그렇지 못한 者는 聖人의 敎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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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교리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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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의 敎理

 

佛敎가 神의 體의 生하는 作用이 되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하면, 天地間에서 最初로 無形에서 有形이 生한 것은 太陽속에 있는 地風水火의 陰質인데, 佛敎는 地水火風의 四大로써 形質組織의 要素를 삼으니 이는 佛敎가 形質의 始生함을 象하여 生의 象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佛敎는 色이 그대로 空이오 空이 그대로 色이라 하여 萬物의 自性은 生도 없고 滅도 없다하니, 이는 萬物의 形質이 空에서 生하여 色은 空을 떠나지 아니하고 空은 色을 떠나지 아니한다는 뜻으로서, 無形에서 有形한 形質의 生하는 象을 말한 것이다.

地水火風의 陰質이 太陽의 속에 있을 때에는 늘 太陽의 光을 받아서 光明을 發하고 있으나 그것이 太陽에서 分離하여 地球로 되는 때에는 陰質이 陽光을 가리워서 光明을 發치 못하는 것이며, 사람은 地水火風의 陰質과의 因緣에 依하여 地上에서 生하고 자라는 것이니, 이 陰質은 我도 아니오 我의 것도 아닌 것인데, 사람의 陰質이 자라는 때는 스스로 光明을 가리워서 無明이 되는 것이오 無明이 되면「我」「我의 것」이라는 主觀的 執着이 生하여 貪嗔癡라는 三毒作用이 일어나서 一生을 煩惱와 苦의 속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佛敎의 修行에 依하여 我라든가 我의 것이라든가 하는 主觀的 執着을 없이하면 비록 形質은 있으되 形質의 生이 生 그대로 있고 자라지 아니하여, 마치 太陽속에 있는 陰質이 陰質그대로 있으면서 光明을 發揚함과 같은 것이오 形質이 光明을 發하면 스스로 貪嗔癡의 모든 煩惱를 解脫하고 生老病死의 苦가 없는 것이니, 이것을 草木으로써 보면 草木의 씨의 組織이 자라지 아니하고 組織된 그대로 있는 象이며 組織된 그대로 있는 者는 內部에 光明을 갈무리하고 그 作用이 寂然히 靜하므로 佛敎는 그 修行의 極致를 光明과 寂靜에 두는 것이니, 이가 佛敎의 根本敎理이다.

太陽속의 陰質과 地球의 陰質과는 모두 地水火風으로 되어 그 本質이 同一하고 사람의 씨는 太陽의 光明에서 오고 있으되 그 陰質은 또한 地水火風으로 되어 地上의 陰質에서 자라고 있으므로 佛敎에서는 사람의 生前에 잘 修行하여 天性이 씨의 組織과 같이 組織그대로 있고 자라지 아니하면, 死後의 鬼神이 天上의 光明한 곳에서 生한다 하고 이 光明한 곳을 極樂世界라 한다.

極樂世界는 光明이 燦爛하여 아름답고 깨끗하며 나무와 宮殿이 모두 七寶로 되어 있다 하니 七寶라 함은 燦爛한 七色光明으로서 이것이 바로 太陽光明의 七色의 象이다. 天上의 光明體는 太陽과 달이오 달은 地球에서 分離하여 달의 陰質과 太陽속의 陰質은 그 本質이 同一하고 太陽의 光明과 달의 光明이 또한 그 本質이 同一한 것인데, 太陽은 陽性이므로 發散作用을 行하여 生함을 主하고 달은 陰性이므로 收斂作用을 行하여 여무는 것을 主하니 그러므로 사람의 死後鬼神은 發散作用을 行하는 太陽에는 가지 못하고 收斂作用을 行하는 달로 가는 것이며, 이 까닭에 太陽의 光을 받아서 光明을 發하고 있는 달이 곧 極樂世界이오 이는 鬼神이 달에 依附한다는 理에 依한 것이다. 地球의 陰質과 달의 陰質은 그 本質이 同一하므로 사람은 地上에도 生하고 天上의 달에도 生하여 死後에 極樂世界로 갈 수가 있는 것이다.

佛敎는 生을 象하여 자라지 아니하는 修行을 쌓기 爲하여 「我」「我의것」이라는 執着을 없애는 同時에 또한 사람의 主要한 本能을 抑制하고 있으니, 그 敎人들이 生産業을 營爲치 아니하고 乞食을 하는 것은 飮食本能을 抑制함이오 婚姻을 하지 아니하여 家庭을 두지 아니하는 것은 生殖本能을 抑制함이다. 사람의 本能에는 飮食本能 生殖本能 및 長壽本能의 세 가지가 있는데, 我 我의것에 執着치 아니하고 自身의 形質을 私有치 아니하여 精神的으로 長壽本能을 抑制하고 또 肉體的으로 飮食本能과 生殖本能을 抑制하니, 이는 徹底히 자라지 아니하는 修行이다. 그러나 宇宙의 時運變化는 人力의 미치지 못하는 곳이므로 佛敎에도 時運變化에 順應하는 일이 있으니, 釋迦가 前生의 善慧菩薩로부터 人世에 出生할 때에 「모든 사람이 佛法에 들어올 根性이 익었는가, 人間界에서 부처될 때가 되었는가」하는 것을 觀察하고 人間에 태어난 것인즉 釋迦 以前의 사람들은 아직 佛法에 들어올 根性이 익지 못하여 비록 修行을 하더라도 人間에서 부처가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오, 이가 時運變化의 證據이다.

佛敎는 神의 體의 生하는 作用을 象한 것인데, 그 敎理에 宇宙 唯一神을 말하지 아니하고 數多한 天神을 말하니 이는 形質의 始生함을 象한 까닭이다. 物의 形質이 生하는 者는 모두 個體로 되어 空間에 布列하는 狀態로 되고 始生한 童蒙과 같아서 能動的인 統一運行이 行치 못하니 統一運行은 唯一神의 作用인데, 形質의 始生을 象한 佛敎에는 統一運行이 없으므로 唯一神을 말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佛敎에도 唯一神이 없는 것은 아니다. 儒敎에서는 唯一神을 上帝라하고 基督敎에서는 唯一神을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世界人類는 모두 唯一神의 子孫, 唯一神의 百姓으로서 서로 兄弟가 되고 있으며 神의 最大事業은 그 子孫인 世界人類를 生養하는 일이오 따라서 사람의 最大事業과 最大道德이 또한 自身의 兄弟인 世界人類를 生養하는 일이니, 이 까닭에 儒敎에서는 仁을 行하여 百姓을 사랑하라 하고 基督敎에서는 博愛로써 네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것이며 佛敎에서는 慈悲로써 衆生을 濟度하라하니 衆生을 濟度하는 것이 곧 儒敎 基督敎와 같이 自身의 世界兄弟를 生養한다는 原理에서 나온 일이오 世界人類를 自身의 兄弟로 생각하는 것이 곧 宇宙唯一神을 모시고 있는 證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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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교리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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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敎의 敎理

 

儒敎가 神의 體의 長하는 作用이 되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하면, 儒敎의 原文은 易經이오 易經에는 太陽에서 오는 陽子인 震子가 자라서 달의 陰精과 相交하는 象을 말하고 있으므로 長의 時運을 象한 敎理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易經序卦의 初頭에는 天地의 創生하는 때의 日月의 生하는 原理를 말하고 中間에는 달의 자라는 原理를 말하고 終端에는 달이 여물어서 變化하는 原理를 말한 것이며 易經은 日月의 變化로써 時運의 生長成하는 原理를 말한 까닭에 易經이라는 易字가 日月로 되고 거기에 變易 遷易한다는 뜻을 寓한 것이다.

易經에 말한 日月相交는 太陽의 震雷와 달의 兌澤이 陰陽作用으로써 相交하는 것인데 震은 長男이오 兌는 少女이며 易理에 二長二少의 相合을 正이라 하고 長과 少의 相合을 不正이라 하는 것이므로 震長男과 兌少女의 相交는 不正의 象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長의 時運에는 사람이 自由意志를 가지고 相克을 主하여 반드시 陰陽이 正치 못하고 서로 生長競爭을 行하여 惡이 發生하는 것이며, 이 까닭에 易經에는 人類가 始生한 곳에 惡을 막고 善을 揚함을 말한 것이며 惡을 막고 善을 揚하는 것이 儒敎의 根本敎理이다. 物의 자라는 것은 將且 여물기 爲함이오 物이 여물면 內部에 神作用을 包含하는 것이므로 儒敎에는 佛敎나 基督敎와 같은 死後의 極樂 天堂의 理를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이 地上에 人類世界가 있고 天上에 神世界가 있고 사람의 天性이 여물어서 神에게로 圜行한다는 原理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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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교리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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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의 敎理

 

基督敎가 神의 體의 成하는 作用이 되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하면, 太陽에서 오는 震子는 달의 陰精中에 入한 然後에 萬物의 形質을 作成하여 여무는 것이오, 震子가 달에 入하면 마치 사람의 生殖作用에서 男體의 精子가 女體의 卵子를 決하여 入하고 卵子는 自體를 犧牲하고 그 血이 精子를 包하여 精子와 卵子의 相交하는 때에 萬物을 妙하게 하는 神作用을 받고 있음과 같이 달의 陰精도 震子를 承受하는 때에 陰精이 決하고 血이 違去하는 理가 있는 것이며, 예수가 十字架에서 몸을 犧牲하고 保血의 作用으로써 그 弟子들를 包하고 聖靈을 내려서 弟子들의 天性을 여물게 하여 死後에 天堂으로 가게 하는 것은 바로 달의 陰精이 震子를 育成함과 같은 것이니, 이 保血로써 弟子들의 天性을 여물게 하여 神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基督敎의 根本敎理이다.

예수는 무슨까닭에 自身을 犧牲하여 弟子들을 育成하는가 하면 예수는 宇宙神의 自然法則을 따라서 自體의 生成을 爲하여 그 弟子들의 天性을 여물게 하는 것이니, 이는 예수는 神의 體의 成하는 作用을 行하는 象으로서 神의 子孫들을 여물게 하는 任務를 맡고 있으므로 自體를 犧牲하고 그 保血로써 弟子들을 育成하는 것이 곧 神의 生成作用을 代行하는 同時에 또한 自體의 生成을 完遂하는 길이 되는 까닭이다. 陰精이 陽氣를 受하여 胎育함에는 반드시 陰精의 犧牲과 血去作用이 行하는 것이므로 예수의 十字架犧牲과 保血은 바로 이 任務를 遂行하여 神의 自然法則을 完成한 것이다.

萬物의 生長한 者는 반드시 死하고 物의 死하는 것은 罪를 짓고 死刑을 當하는 象이니, 그러므로 生長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出生하면서부터 原罪를 짓고 있는 것이며, 사람이 死하지 아니하고 永生하게되면 이는 原罪를 贖하는 象이다. 聖經에는 世界人類가 모두 아담 해와의 子孫으로 되어 있는데 아담 해와가 善惡果를 따먹고 生長한 까닭에 老死하는 罪를 짓고 그 子孫들은 모두 반드시 자라서 죽는다는 原罪를 지은 것이오, 예수의 弟子들은 예수의 保血에 依하여 聖靈을 받고 救援을 받아서 永生하게 되는데 永生하는 것은 原罪를 免한다는 뜻이라, 이는 예수가 그 保血로써 弟子들의 原罪를 贖한 象이 되는 것이다.

달의 陰精이 太陽의 震子를 承受하여 物을 作成하는 것은 樹木의 接木하는 理인데, 예수의 弟子가 예수의 안에 들어가서 예수를 믿고 그 保血作用에 依하여 聖靈을 받는 것은 또한 接木의 象이 되므로 聖經에는 이것을 葡萄나무에 가지를 接함과 같다고 한 것이니 이는 예수가 달의 象이 되고 있는 까닭이다. 달이 처음에 出生한 것은 宇宙父母의 相交에 依하여 出生한 것이 아니라 그 母體인 地球에서 自然發生하여 分離하여 나온 것이오 地球는 달의 母體의 象이니 이는 달이 母體에서 童貞女誕生한 것이며 예수가 母胎中에서 童貞女誕生한 것은 달이 그 母體인 地球에서 自然發生한 것과 같은 것이다. 聖經에는 예수의 出生에 對하여 말하기를「하나님의 말씀이 肉身이 되었다」고하니, 이것을 易理로써 보면 말씀은 澤精의 象이오 澤精은 또한 달의 象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太陽에서 分出한 달이라는 뜻이오 하나님의 말씀이 肉身이 되었다 함은 달의 澤精이 예수의 肉身이 되었다는 뜻이니 달이 예수의 肉身으로 된 것이 곧 예수의 童貞女誕生의 理이다. 예수는 달의 象으로서 陰體의 作用을 行하므로 男子이면서 妻를 娶하지 아니하고 남의 子女인 弟子를 包容하여 接木作用을 行한 것이다. 예수의 弟子들은 天性이 여물어서 死後에 天堂으로 가는데 死後의 鬼神은 반드시 收斂作用을 行하는 달로 들어가는 것인즉 天堂도 또한 달을 말함이니 이는 佛敎의 極樂과 基督敎의 天堂이 모두 달을 말한 것이다. 佛敎 儒敎 基督敎의 세 宗敎는 神의 體의 세作用中에서 各其 한 作用을 取하여 敎理를 삼아서 人類를 敎化한 것이므로 세 宗敎는 모두 唯一神의 一部分씩을 象하고 設敎의 目的이 또한 모두 사람이 神을 닮는데에 있는 것이니, 이제 그 敎理의 異同한 바를 例擧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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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교교리의 상호관련 (역학원리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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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敎 敎理의 相互關聯

 

佛敎는 太陽속의 陰質을 象하고 儒敎는 太陽의 陽氣가 地球와 달의 陰精을 相交함을 象하고 基督敎는 달을 象하며 佛敎는 生함을 象하고 儒敎는 長함을 象하고 基督敎는 成함을 象한 것이 그 相異한 바이다.

이 生長成을 易理로써 보면 佛敎는 伏義八卦圖의 象이오 儒敎는 文王八卦圖의 象이오 基督敎는 正易八卦圖의 象이다.

佛敎의 生死解脫의 理는 聖經의 아담 해와의 理와 相通하니 佛敎는 生을 象한 宗敎이오 씨의 生한 것이 生 그대로 있어 자라지 아니하고 모든 感覺에서 生하는 貪嗔癡의 煩惱를 끊으면 苦에서 解脫되어 天上에서 生하고 다시 人間世上으로 오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는 天上에서 永生하는 理이며, 基督敎의 創世記에는 아담 해와가 비로소 有形한 人間으로 出生하여 生命나무의 열매만 먹고 善惡을 아는 善惡果를 먹지 아니하면 天上에서 永生하는 것인데 蛇의 誘惑을 받아서 善惡果를 따먹은 까닭에 에덴 동산에서 몰려나고 마침내 生活의苦 死의苦 孕胎의苦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서로 比較하여 보면 佛敎가 貪嗔癡의 마음을 끊는다 함은 자라지 아니한다는 뜻이오 基督敎가 善惡을 모른다 함은 또한 자라지 아니한다는 뜻인데 蛇의 誘惑을 받고 善惡果를 따먹은 것은 곧 자라기 始作한 象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담 해와가 善惡果(生長成)를 따먹지 아니하고 자라지 아니하여 天上에서 永生하면 이는 바로 佛敎의 敎理가 되는 것이며, 아담 해와가 蛇의 誘惑을 받은 까닭에 자라고 또 여물어서 基督敎의 敎理가 生한 것이다.

蛇는 陰氣의 자라는 象이니 이것을 易理로써 보면 易學은 長을 象한 學問이오 上經은 陽의 長함을 말하고 下經은 陰의 長함을 말한 것인데, 上經 首卦의 陽에 龍의 象이 있고 下經 首卦의 陰陽相交에 龍蛇의 象이 있으니, 이는 陽의 長하는 象을 龍이라 하고 陰의 長하는 象을 蛇라 한 것이며 해와가 蛇의 誘惑을 받았다 함은 해와는 女體로서 陰精의 자라는 衝動을 받고 있는 象이다. 지금 基督敎의 一派에서 神父 修女의 獨身制度가 있는데, 이것은 아담 해와가 善惡果를 따먹기 以前의 象으로서 佛敎의 獨身出家의 理와 相通하는 것이다.

佛敎는 사람의 生前에 煩惱의 마음을 끊지 못하면 몇生동안 人間에 幻生하여 마음을 닦는 것이니, 이가 輪廻의 理이며, 만일 生前에 煩惱를 끊으면 天上에 나서 다시 이 世上에 오지 아니하는 것이며, 基督敎에서는 天性이 여물어서 天堂에 가면 天堂에서 永生한다 하니, 이것도 兩敎의 永生敎理가 相同한 것이다. 다만 佛敎는 生을 象하므로 몇生동안 天上과 人世를 往來하여 다시 人世에 와서 修行하고 修行이 되지 아니한 者는 畜生地獄과 人世를 輪廻하지만 基督敎는 成을 象하므로 長에서 成으로 넘어갈 때에 審判을 받고 永生과 쭉정이가 決定되어 있으므로 다시 畜生地獄等으로 輪廻하는 일은 없고 다만 天上과 人世를 往來하는 것이다. 地獄은 佛敎와 基督敎가 同一히 地中을 말한 것이니 地中은 熱湯이 끓고 있는 곳인데 罪를 지은 사람의 鬼는 이 地中熱湯속에 居하는 것이니 地獄은 달의 極樂天堂과 對照되는 것이다. 佛敎에서는 天上에 난 사람이 그 所願에 따라서 이 世上에 幻生하여 衆生을 濟度하는 일이 있고 基督敎에서도 엘리아가 요한으로 幻生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天上 人世를 往來하는 한 形態이다.

佛敎는 神의 體의 形質의 始生함을 象한 것이므로 神의 體에서 發揚하는 陽氣의 作用과 收斂하는 陰氣의 作用이 모두 그 속에 包含되어 있어 한편에서는 不斷히 發揚하고 한편에서는 不斷히 收斂하여 遠心運動과 向心運動이 倂行하고 鬼神과 사람이 서로 循環生生하여 人世에도 나고 天上의 極樂에도 나고 畜生地獄에서도 나는 것이다.

儒敎의 原文인 易學은 神의 體의 陽氣가 發揚하여 物의 長함을 象한 것이오 物의 長하는 者는 遠心運動을 行하여 神에서 漸漸 멀어지는데, 遠心運動을 行하는 物은 비록 神과 相離하지는 못하되 또한 神과 相和하지도 못하여, 自由意志로써 自身을 行動하고 있으니, 그러므로 사람의 自由意志의 善惡이라는 것은 그 長하는 동안에 遠心運動을 行하는 때에만 있는 것이오, 이 自由意志에 依한 行爲의 善惡에 따라서 天性이 여물기도하고 쭉정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天性이 여무는 것은 神으로부터 福을 받는 象이오 쭉정이가 되는 것은 神으로부터 害를 받는 象이니, 이가 自身의 行爲에 對하여 自身이 責任을 지고있는 原理이다. 사람이 長하는 동안은 生과 成의 中間에 있어 死와 關聯되지 아니하고 있으므로 易學에는 極樂地獄의 理가 없고 다만 害福의 理가 있는 것인데 그 實은 害가 地獄으로 가는 길이오 福이 極樂으로 가는 길이다.

基督敎는 神의 體의 陰氣가 收斂하여 物의 成함을 象한 것이오 物의 成하는 者는 向心運動을 行하여 神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사람이 向心運動을 行하면 天性이 여물어서 神에게로 돌아가고 向心運動을 行치 아니하면 天性이 여물지 못하여 神에게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神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그 鬼神이 消滅치 아니하고 永生하는 것이니 이가 基督敎의 永生의 理로서 天堂으로 간다는 것이다.

儒敎와 基督敎는 神의 體內의 陰陽關係로서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고 하는 道이므로 儒敎의 易學과 基督敎의 聖經은 一神의 兩面으로 되어 두 글이 모두 神의 啓示로 되어있는 것이다. 易學은 聖人이 河圖와 洛書를 則하고 蓍法을 用하여 지은 글인데, 河圖는 伏羲氏때에 龍馬가 圖를 등에 지고 河水에서 나온 것이오 洛書는 堯舜때에 龜가 書를 등에 지고 洛水에서 나온 것으로서 모두 神의 啓示하신 그림이오 蓍法은 聖人이 神明을 幽贊하여 生한 것이며, 聖經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記錄한 글로서 神의 啓示에 依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이는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에 天地日月의 變化가 있으므로 神은 그 子孫들의 向할바의 길을 가르치시는 同時에 또한 그 時運에 處할바의 方法을 알리시기 爲하여 學問으로된 易學과 信仰으로된 聖經을 啓示로써 이 世上에 내리신 것이다. 佛敎의 經典에 神의 啓示가 없는 것은 佛敎는 唯一神을 말하지 아니하고 또 生을 象하여 童蒙의 象이 되는데 童蒙은 神의 啓示를 알지못하고 童蒙의 敎育에는 스승의 말이 가장 有效한 것이므로 그 글은 主로 스승인 부처의 敎訓으로 된 것이다. 易經과 聖經은 모두 神의 啓示로 된 글로서 서로 表裏가 되고 있으므로 易經序卦의 初頭와 聖經創世記의 初頭는 서로 깊이 通하고 있는 것이다. 序卦 初頭의 乾坤卦는 天地의 始로서 創世記 初頭의「太初에 하나님이 天地를 創造하심」이오 序卦의 屯蒙卦는 水가 始生하고 昏昧의 속에서 光明이 始發하는 것으로서 創世記 첫날의「神이 水面에 運行하시고 晝夜가 나뉘움」이오 序卦의 需訟卦는 天이 水中에 있다가 天과 水가 나뉘우는 것으로서 創世記 둘째 날의「穹蒼이 생기고 穹蒼아래의 물과 穹蒼위의 물로 나뉘움」이오 序卦의 師比卦는 水土가 合하여 땅이 始成하는 것으로서 創世記 셋째날의「天下의 물이 한곳으로 모여서 땅과 바다가 되고 草木이 生함」이오 序卦의 小畜履卦는 달이 비로소 생겨서 日月의 光明이 地上을 비치는 것으로서 創世記 넷째날의「두 큰 光明이 생기어 큰 光明은 낮을 主管하고 작은 光明은 밤을 主管함」이오 序卦의 泰否卦는 위의 天과 下의 地가 相交하여 萬物이 通하는 것으로서 創世記의 다섯째날의「물과 땅위에 生物이 蕃盛함」이오 序卦의 同人大有卦는 人類가 始生하여 天으로부터 天佑神助를 받는 것으로서 創世記 여섯째 날의 「하나님의 形狀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地上 空中 물속의 모든 生物을 다스리게 하심」이오 序卦의 謙豫卦는 달에서 發生한 사람의 씨가 비로소 地上에 내려와서 有形한 人間이 되는 것으로서 創世記 일곱째날의「天地와 萬物이 다 이루어짐」이다. 그런데 序卦에는 謙豫卦의 다음인 隨蠱卦에 山澤의 水土氣가 合하여 사람의 形質이 생기고 거기에 風을 넣어서 蠱를 生하고 이에 男女가 分化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聖經도 일곱째날의 創造完成은 天上에서 사람의 씨를 完成함이오 地上에서 有形한 人間形質을 完成한 것은 아니며, 그러므로 일곱째날이 지난 뒤에 비로소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生命을 불어넣어 아담을 創造한 것이오 사람은 男女가 모두 男體속의 精子에서 出生한다는 理에 依하여 아담의 몸의 一部를 떼어서 해와를 創造하였다고 한 것이다.

易經에는 生의 時運으로부터 長의 時運으로 넘어갈 때에는 原始人의 大部分이 水中에 瀆하고 오직 最初로 出生한 震子가 天地 雷風 水火 山澤의 八象을 具하여 着生하여 瀆치 아니하고 비로소 上帝가 人類의 祖上임을 알 것인대 聖經에 노아 洪水는 또한 生의 時運으로부터 長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로서 오직 當代의 義人이라하는 노아 家族 八人만이 살고 그 外의 사람은 全部 水瀆하였으니 이가 두 글이 서로 表裏가되는 곳이오 노아 家族의 父母 三男 三婦의 八人은 바로 易經의 父母 三男 三女의 八卦의 象이다.

易學의 陰陽二元은 一體二元의 理인데, 基督敎에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生命을 불어넣었다 하는 것도 또한 一體二元이며 佛敎의 因緣도 모두 相對性을 띄어 一體二元의 象이 되니 佛 儒 基督의 三敎는 神의 體의 象인 日月地球의 組織原理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一體二元의 理로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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